간찰별지(簡札別紙)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들에게 족보 편찬 중에 제기된 양녕대군(讓寧大君) 순성파(順城派) 문제를 전한 내용의 간찰별지. 이승학(李承鶴)이 창평(昌平)에 있는 동생들에게 ?선원보(璿源譜)? 편찬 중에 제기된 양녕대군(讓寧大君) 순성파(順城派) 문제를 전한 내용의 간찰 별지이다. 이승학이 한양에 있으면서 알게 된 족보 관련 소식을 자세히 전한 것인데, 별지 중간에 '불에 태우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민한 사항이기 때문에 별지로 따로 적어 집으로 보낸 듯하다. 본 편지가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1899년에 작성된 이승학의 편지에 족보를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해에 작성된 별지로 추정된다. 별지는 오늘 (한양의) 문밖으로 숙소를 옮겼다는 소식으로 시작하여, ?선원보(璿源譜)? 편찬의 진행을 상세히 전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각처에서 족인들의 수단(收單)이 오는데, 순성파(順城派)는 아직도 다 모이지 않고 있으며 부안(扶安)과 공주(公州), 신창(新昌), 직산(稷山) 등지에 사는 족인들이 이제 도착했는데, 그 수단이 매우 한심하다고 표하기도 했다. 이어 순성파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두루 전했다. 양녕대군파가 우리 순성파의 원한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 ?선원보? 편찬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고, 또 순성파는 인재가 없다는 기롱이 있어서 반드시 면하기 어렵겠다는 말도 있으니,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통분을 참고 원한을 품는 것은 절박하여 그러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가 없다.[忍痛含冤迫不得已]'는 이 여덟 글자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순성파 문제는 이승학 자신이 관여하기보다는 족숙인 백동(栢洞) 대감과 도동(桃洞) 대감이 중재하여 처리할 것이기에 자신은 일의 추이를 살펴보겠다고 하였다. 또한 순성파 각 지역 사람들에게 오천군(烏川君, 이사종(李嗣宗))과 이산부정(伊山副正, 이사성(李嗣盛)) 형제의 분파에 대한 설을 널리 물었더니 모두 각 집안의 문적(文蹟)에 애초부터 이 일이 없었고, 다만 문강공(文岡公) 집안의 문적 중에 이 일이 보이는데, 천령씨(天齡氏) 집안에 후손이 없어 나중에 얻게 되었는데 이 일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 등은 크게 근심할 것이 없고 다만 돌아가는 상황을 기다릴 뿐이라고 집안 식구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이 단락에서 언급한 오천군과 이산부정의 분파나 문강공 가문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편지는 서울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비용 때문에 매번 동생들에게 혼란을 일으킨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 내용과 나귀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아 도동에서 탈 것을 빌렸다는 말을 끝으로 편지를 마쳤다. 별지에서 언급된 순성군 문제는, 순성군 이개(李?)의 배우자와 관련된 것을 말한 듯하다. 1899년에 종정원경(宗正院卿) 이재완(李載完)이 고종에게 요청하여 ?선원보?를 수정하고자 했다. 이때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전주이씨 양녕대군 계열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이전에 만들어진 ?선원가현록(璿源加現錄)?에서 양녕대군 이제(李禔)의 아래에 '순성군 이개의 첩(妾)의 맏아들 오천군 이사종'이 라고 기재되어 있고,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오천군 이사종의 기사 옆에 주석(註釋)을 달기를, '어머니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참의(參議) 정종성(鄭宗誠)의 서녀(庶女)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천군 후손들은 나라의 문헌과 개인 문헌들을 통해 연일 정씨가 서녀라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종성의 아들 정보(鄭保)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온 집안이 모두 반역자로 몰리자 순성군의 처도 첩으로 강등(降等)되었다는 것이다. 옛 ?선원록(璿源錄)』에 순성군이 연일 정씨에게 정식으로 장가들었으며, 또 순성군은 첫 부인 신씨(申氏)와 같은 산기슭에 따로 장사지내고, 후실인 정씨는 순성군과 함께 나란히 쌍무덤으로 장사지냈다고 씌어 있으니 정씨가 순성군의 첩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는 것이다. 순성군파 사람들은 당시 ?선원보? 편찬을 계기로 연일 정씨가 정식 처(妻)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억울함을 씻고자 했다. 참고로 순성군과 연일 정씨 사이에 4남을 두었는데, 오천군 사종(嗣宗), 차남은 헌양군(巘陽君) 사조(嗣祖), 3남은 포산부정(苞山副正) 사원(嗣源), 4남은 이산부정(伊山副正) 사성(嗣盛)이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