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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별지(簡札別紙)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들에게 족보 편찬 중에 제기된 양녕대군(讓寧大君) 순성파(順城派) 문제를 전한 내용의 간찰별지. 이승학(李承鶴)이 창평(昌平)에 있는 동생들에게 ?선원보(璿源譜)? 편찬 중에 제기된 양녕대군(讓寧大君) 순성파(順城派) 문제를 전한 내용의 간찰 별지이다. 이승학이 한양에 있으면서 알게 된 족보 관련 소식을 자세히 전한 것인데, 별지 중간에 '불에 태우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민한 사항이기 때문에 별지로 따로 적어 집으로 보낸 듯하다. 본 편지가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1899년에 작성된 이승학의 편지에 족보를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해에 작성된 별지로 추정된다. 별지는 오늘 (한양의) 문밖으로 숙소를 옮겼다는 소식으로 시작하여, ?선원보(璿源譜)? 편찬의 진행을 상세히 전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각처에서 족인들의 수단(收單)이 오는데, 순성파(順城派)는 아직도 다 모이지 않고 있으며 부안(扶安)과 공주(公州), 신창(新昌), 직산(稷山) 등지에 사는 족인들이 이제 도착했는데, 그 수단이 매우 한심하다고 표하기도 했다. 이어 순성파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두루 전했다. 양녕대군파가 우리 순성파의 원한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 ?선원보? 편찬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고, 또 순성파는 인재가 없다는 기롱이 있어서 반드시 면하기 어렵겠다는 말도 있으니,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통분을 참고 원한을 품는 것은 절박하여 그러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가 없다.[忍痛含冤迫不得已]'는 이 여덟 글자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순성파 문제는 이승학 자신이 관여하기보다는 족숙인 백동(栢洞) 대감과 도동(桃洞) 대감이 중재하여 처리할 것이기에 자신은 일의 추이를 살펴보겠다고 하였다. 또한 순성파 각 지역 사람들에게 오천군(烏川君, 이사종(李嗣宗))과 이산부정(伊山副正, 이사성(李嗣盛)) 형제의 분파에 대한 설을 널리 물었더니 모두 각 집안의 문적(文蹟)에 애초부터 이 일이 없었고, 다만 문강공(文岡公) 집안의 문적 중에 이 일이 보이는데, 천령씨(天齡氏) 집안에 후손이 없어 나중에 얻게 되었는데 이 일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 등은 크게 근심할 것이 없고 다만 돌아가는 상황을 기다릴 뿐이라고 집안 식구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이 단락에서 언급한 오천군과 이산부정의 분파나 문강공 가문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편지는 서울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비용 때문에 매번 동생들에게 혼란을 일으킨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 내용과 나귀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아 도동에서 탈 것을 빌렸다는 말을 끝으로 편지를 마쳤다. 별지에서 언급된 순성군 문제는, 순성군 이개(李?)의 배우자와 관련된 것을 말한 듯하다. 1899년에 종정원경(宗正院卿) 이재완(李載完)이 고종에게 요청하여 ?선원보?를 수정하고자 했다. 이때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전주이씨 양녕대군 계열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이전에 만들어진 ?선원가현록(璿源加現錄)?에서 양녕대군 이제(李禔)의 아래에 '순성군 이개의 첩(妾)의 맏아들 오천군 이사종'이 라고 기재되어 있고,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오천군 이사종의 기사 옆에 주석(註釋)을 달기를, '어머니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참의(參議) 정종성(鄭宗誠)의 서녀(庶女)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천군 후손들은 나라의 문헌과 개인 문헌들을 통해 연일 정씨가 서녀라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종성의 아들 정보(鄭保)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온 집안이 모두 반역자로 몰리자 순성군의 처도 첩으로 강등(降等)되었다는 것이다. 옛 ?선원록(璿源錄)』에 순성군이 연일 정씨에게 정식으로 장가들었으며, 또 순성군은 첫 부인 신씨(申氏)와 같은 산기슭에 따로 장사지내고, 후실인 정씨는 순성군과 함께 나란히 쌍무덤으로 장사지냈다고 씌어 있으니 정씨가 순성군의 첩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는 것이다. 순성군파 사람들은 당시 ?선원보? 편찬을 계기로 연일 정씨가 정식 처(妻)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억울함을 씻고자 했다. 참고로 순성군과 연일 정씨 사이에 4남을 두었는데, 오천군 사종(嗣宗), 차남은 헌양군(巘陽君) 사조(嗣祖), 3남은 포산부정(苞山副正) 사원(嗣源), 4남은 이산부정(伊山副正) 사성(嗣盛)이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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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장문규(張文逵)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丙寅九月日 發文 出身 張文逵 等 7名 潭陽校宮 丙寅九月日 張文逵 潭陽鄕校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6년 9월에 장문규(張文逵) 외 6명이 담양향교(潭陽鄕校)에 서학(西學)의 무리를 몰아내기 위해 의병으로 참여해 줄 것을 독려한 통문(通文) 초본(抄本). 1866년 9월에 장문규(張文逵) 외 6명이 담양향교(潭陽鄕校)에 서학(西學)의 무리를 몰아내기 위해 의병으로 참여해 줄 것을 독려한 내용의 통문(通文) 초본(抄本)이다. 조선(朝鮮)이 건국된 지 400여 년 동안 교화가 잘 행해져 삼천리 강토에 병화(兵火)가 일어나지 않아 승평(昇平)의 때가 오래되었는데, 양이(洋夷)의 난리를 만나 혼란하여 왕업(王業)이 평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양이(洋夷)가 감히 그들의 호강(豪强)을 믿고 유입해 요사한 교육이 이어져 이륜(彛倫)의 근심을 일으켜 평안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 전해 듣건대 군무(軍務)에서 장차 병사를 모아 외세를 물리치려고 결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십실(十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이들이 존재하니 이 같은 상황에 어찌 분개(憤慨)하지 않겠느냐고 하며 의병 참여를 촉구했다. 또 우리 호남(湖南)은 본래 왕실의 풍패(灃沛)의 고향으로 계속해서 복을 받아 옥과 같은 문장을 짓는 자들의 연원이 되고, 기자(箕子)의 가르침을 따르는 충의(忠義)의 고장이며,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밝은 가르침도 우뚝하여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같은 충혼(忠魂)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곳이라는 점을 들어 충의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지역임을 강조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지금 호남인들이 그들과 같지 못해서 감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견주기는 힘들고 모은 군사들이 약하다는 것이 우려되지만, 오직 나라를 근심하여 이륜을 지키는 마음이 있고, 상사(上沙) 어른의 밝은 인도가 있으니, 바라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각자 분발하여 감히 지체하지 말고 의병에 힘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다. 각기 의병에 참여하여 서학(西學)의 무리를 섬멸하고 전성(前聖)의 도통의 연원을 밝히고 거듭 독려했다. 이어 장문규(張文逵) 등 통문을 작성한 이들의 성명이 적혀 있고, 추가로 이 통문을 속히 각 진(鎭)과 면, 리, 사찰에 전하여 의병에 참여할 인원의 명첩(名帖)을 만들어 곧바로 전주부모의소(全州府募義所)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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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이돈영(李敦榮) 등 격문(檄文)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격문 사회-조직/운영-격문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때 이돈영(李敦榮) 등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전주이씨(全州李氏) 제종(諸宗)에게 보낸 통문 2편의 초본(抄本)이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때 이돈영(李敦榮) 등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전주이씨(全州李氏) 제종(諸宗)에게 보낸 통문 2편의 초본(抄本)이다. 첫 번째 통문은 병인년(1866) 9월에 판종정경(判宗正卿) 이돈영(李敦榮) 외 12명이 의병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주이씨 제종에게 보낸 것이다. 통문의 상단에서는 예부터 국가에 치란(治亂)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와 같아서 잠깐 겪은 위기에 불과했다면 근일의 양이(洋夷, 병인양요(丙寅洋擾))가 국경에 침범한 일은 예부터 없었던 일대 변괴(變怪)라고 하며 병인양요의 위험성을 알렸다. 이어 우리나라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유풍을 세습하고 논맹(論孟)의 유훈을 외고 예악과 문물은 중화(中華)를 따르는 천하 만방에 떳떳함이 있는 나라인데, 저 양이들이 창궐(猖獗)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의기(義氣)를 고취 시켰다. 게다가 우리 전주이씨 제종은 왕실의 후손으로서 임금께서 한 집안과 같이 돈독하게 대해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며 흥선대원군께서도 친목과 은택을 내리시어 감복을 받고 있으니, 바로 이때가 은혜를 보답할 시기라고 하며 의병 참여를 촉구했다. 이어 전주이씨 제종께서 일심으로 협력해서 방책을 진달하여 적을 막고 섬멸할 대책을 모색하자고 하면서, 만일 신하 3천명이 일심이 된다면 큰 공훈이 된다고 하였다. 저 양이들이 비록 강하더라도 한 마음으로 맞선다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니 갖자 의기(義氣)를 높여 함께 국사(國事)에 힘쓰기를 바랐다. 통문의 주요 내용이 끝나고, 작성된 시기인 '丙寅九月日'과 발신인인 이돈영 외 12명의 명단이 표기되었다. 또 추가로 의병에 참여코자 하는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보내면 곧바로 종친부(宗親府)에 모여 상세히 살펴 별도로 처분할 것이라고 덧붙인 내용이 등사되었다. 두 번째 통문은 전(前) 참지(參知) 이윤수(李潤壽) 등 14명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면서 전주이씨 제종에게 보낸 것이다. 군신(君臣) 관계는 부자(父子) 관계와 같아서 아버지가 위급하면 아들이 보호해주고 아들이 위기에 놓이면 아버지가 막아주는 것이라는 말로 통문을 시작했다. 전주이씨 종파(宗派)는 임금에 대해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이지만 사적으로는 종족이라고 하면서 의병 참여를 독려했다. 게다가 전주이씨 제종은 ?선원보(璿源譜)?에 종인으로 입적되어서 여러 혜택을 받고 있으며, 우리 임금이 등극한 이후로는 지극한 은혜를 받았기에 전주이씨 제종은 양이의 침범으로 위기에 놓인 종묘와 사직을 위해 몸소 의기(義氣)를 실천할 때라고 독려했다. 이 통문 하단에 호남(湖南)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호남은 풍패(灃沛, 임금의 본관이 있는 곳)의 고을로, 논맹의 풍습이 깊어 임진왜란에 진신(縉紳)과 장보(章甫) 등이 일제히 의병에 참여하여 전장으로 나서기도 하고 군량미를 보내주기도 하는 등 큰 절개를 세워 아직도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를 모범으로 하여 전주이씨 제종은 이 통문을 들은 즉시 지체하지 말고 한결같이 임진년(1592)의 예에 따라 병사를 모집하거나 군량미를 모아 이 난리를 말끔하게 이겨내어 종사(宗社)를 안정시켜 조종(祖宗)이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여 신민의 치욕을 씻자고 하였다. 이어 적성 시기인 '丙寅九月十日'이 표기되어 있고 발신인인 이윤수 외 14명의 명단이 표기되었고, 주의할 사항을 조목별로 정리하였다. 조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일은 의기를 모아 거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지 말 것, 각 읍에 도유사(都有司)를 뽑고, 유사(有司)의 명첩(名帖)을 먼저 책으로 만들어 보낼 것, 양이의 강화도 침범은 매우 위급한 사안이기 때문에 시일에 늦지 말 것, 종친들이 먼저 효유(曉諭) 하여 나서되, 성씨를 논하지 말고 모두 함께 일에 참여하도록 할 것, 이 통문을 등사하여 속히 여러 읍에 전달하여서 한 읍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순상(巡相)에게도 이 통문 내용을 직접 전해 거행하여 흥선대원군의 분부를 받들 것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윤수(李潤壽, 1802~1871)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오(致五), 호는 오소(吾巢)이다. 이이박(李以鎛)의 아들이며 전라도 운봉(雲峰)에서 살았다. 병인양요 때 병조 참지로 있으면서 치밀한 작전을 세워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이 '호남 제1 재상'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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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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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이광수(李光秀) 시(詩) 1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湖南晩生 李光秀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광수(李光秀)가 일본 동경(東京)에 외교사절단으로 다녀온 누군가를 위해 지은 7언 율시(律詩)와 시서(詩序)이다. 이광수(李光秀)가 일본 동경(東京)에 외교사절단으로 다녀온 누군가를 위해 지은 7언 율시(律詩) 한 편과 시서(詩序)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 고종의 명령으로 외교 업무를 무사히 마치고 온 지인에게 빗을 선물하면서 바친 시이다. 수신인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대한제국이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까지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보자면 이 시기 외교사절을 맡았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시를 여는 기구(起句)에서는 황제의 명으로 동경(東京)으로 사신 나간 형께서 의연히 관대(冠帶)를 잘 정돈하여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아서, 사해(四海)의 생령(生靈)이 나라가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일가(一家)의 충효(忠孝) 있는 자들이 누가 형(兄)과 같겠냐며 찬탄한 내용이 담겼다. 다음 시구는 사신을 맡은 형은 장년(壯年)에 이미 강회(江淮)의 뜻을 품고 있었으니 이에 두터운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광수 같은 천하의 헝크러진 쑥대머리 사람도 머리털을 보호하고자 하는 은미한 뜻으로 작은 빗을 올린다는 내용으로, 빗을 선물한 진정한 의미를 잘 전달하였다. 율시와 함께 적힌 서문(序文)은 빗을 선물한 의도가 담겨 있다. 죽하 대인(竹下大人)은 일본으로 사신을 다녀와서도 개화에 물들지 않고 모발을 잘 지켜왔다는 것이다. 머리칼 하나 보존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 몸을 보존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마는 진실로 그 의리에서는 중차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머리칼을 지킨 의리가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다르다는 것을 알겠느냐고 하였다. 그렇기에 죽하 대인은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고 외국으로 사신을 나가서도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평할 만하니, 감히 이 빗을 드려 나의 이 마음을 시로 읊었다고 하였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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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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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담양(潭陽) 전주이씨(全州李氏) 명단(名單) 2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담양 전주이씨 가문 사람들의 명단. 담양의 貞面 등 소속된 인물의 주소가 나열 *원문: 貞面 德谷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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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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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장전서당안(長田書堂案)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경제-회계/금융-용하기 甲寅正月日始設 甲寅正月日始設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3년부터 1936년까지 기록된 長田書堂 用下記. 담양군 창평면 장전에 소재한 전주이씨 문중 서당 회계기, 마지막에 有司 명단 표기 *자료명은 내표지에 의함 *상태: 성책, 필사본, 66張, 加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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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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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13년 임태규(任泰奎) 시권(試卷) 1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任泰奎 [1813] 任泰奎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豐川任氏世譜』 中編 一, 五 『한국의 과거제도』 , 이성무, 한국학술정보(주), 2004 『조선시대 시권 연구』 ,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HIKS_OD_F1034-01-100045 1813년(순조13)에 임태규(任泰奎)가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 1813년(순조13)에 임태규(任泰奎)가 작성하여 제출한 과거답안지, 즉 시권(試券)이다. 이 시권의 시험 과목은 사서의(四書疑)로 시제(試題)는 '問云云'으로 생략되었지만 소글자의 긴문장으로 기재되어 있다. 성적은 '차하(次下)'이다. 시권 우측에 '오숙(五宿)'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시권의 제출 순서를 말한다. 과거 시험에서 시권을 다 거두면 제출 순서대로 묶어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호(字號)를 매겼다. 이를 작축(作軸)이라고 하며, 천축(天軸), 지축(地軸), 현축(玄軸) 등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천축의 첫 번째 시권은 일천(一天), 두 번째 시권은 이천(二天)이라고 한다. 대개 비봉의 절취선에 크게 한 번 쓰고 그 아래에 좌우 각 두 번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본 문서는 숙축(宿軸)의 아홉 번째 시권인 것이다. 임태규(1779~1813)의 자(字)는 문경(文卿)이고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임상욱(任相郁)의 아들이다. 그의 부인은 의인(宜人) 금성김씨(錦城金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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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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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783년 임상욱(任相郁) 시권비봉(試券秘封)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任相郁 任相郁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豐川任氏世譜』 中編 一, 五 『한국의 과거제도』 , 이성무, 한국학술정보(주), 2004 『조선시대 시권 연구』 ,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HIKS_OD_F1034-01-100039 1783년(정조7)에 임상욱(任相郁)이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의 비봉(祕封) 1783년(정조7)에 임상욱(任相郁)이 작성하여 제출한 시권(試券)의 비봉(祕封)이다. 피봉부(皮封部)라고도 한다. 시권 우측에 응시자의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 四祖의 직역, 성명을 적어 답안지를 제출할 때 이 부분을 잘라서 따로 보관한다. 이는 채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피봉부와 본체부(답안지) 사이에 자호(字號)를 쓴다. 채점 후에 이 비봉을 답안지와 묶어서 작성자에게 돌려준다. 이를 통해 임상욱의 인적사항을 알 수 있다. 임상욱이 이 시권을 작성한 나이는 22세로, 본관은 풍천(豐川), 거주지는 남평(南平)이다. 그의 4조(祖)를 살펴보면, 아버지는 유학(幼學) 임은(任溵)이고, 할아버지는 학생(學生) 임인혁(任仁赫), 증조(曾祖)는 학생(學生) 임철주(任澈柱), 외조(外祖)는 학생(學生) 오태적(吳泰迪)이다. 임상욱(1762~1815)의 자(字)는 정망(正望)이고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그의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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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14년 임상욱(任相郁) 시권비봉(試卷秘封)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任相郁 任相郁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豐川任氏世譜』 中編 一, 五 『한국의 과거제도』 , 이성무, 한국학술정보(주), 2004 『조선시대 시권 연구』 ,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HIKS_OD_F1034-01-100043 1814년(순조14)에 임상욱(任相郁)이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의 비봉(祕封) 1814년(순조14)에 임상욱(任相郁)이 작성하여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 즉 시권(試券)의 비봉(祕封)이다. 피봉부(皮封部)라고도 한다. 시권 우측에 응시자의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 사조(四祖)의 직역, 성명을 적어 답안지를 제출할 때 이 부분을 잘라서 따로 보관한다. 이는 채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피봉부와 본체부(답안지) 사이에 자호(字號)를 쓴다. 채점 후에 이 비봉을 답안지와 묶어서 작성자에게 돌려준다. 이를 통해 임상욱의 인적사항을 알 수 있다. 임상욱이 이 시권을 작성한 나이는 53세로, 본관은 풍천(豐川), 거주지는 남평(南平)이다. 그의 4조(祖)를 살펴보면, 아버지는 유학(幼學) 임은(任溵)이고, 할아버지는 학생(學生) 임인혁(任仁赫), 증조(曾祖)는 학생(學生) 임철주(任澈柱), 외조(外祖)는 학생(學生) 오태적(吳泰迪)이다. 임상욱(1762~1815)의 자(字)는 정망(正望)이고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그의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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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유물
유형분류 :
서화

유명조선국양왕자기적비(有明朝鮮國兩王子紀蹟碑) 탁본(拓本)4 고문서-기타-서화 교육/문화-예술-서화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有明朝鮮國兩王子紀蹟碑 탁본(좌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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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903년 김치홍(金致弘) 관고(官誥) 고문서-교령류-관고 정치/행정-임면-관고 光武七年一月二十一日 金致弘 光武七年一月二十一日 高宗 金致弘 勅命之寶(11.0×11.0)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3년에 高宗이 金致弘을 정3품 通政大夫으로 품계를 올려주면서 발급한 문서. *左傍書: 大皇帝陛下入耆社時 士庶年八十人覃恩加資事奉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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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04년 공명첩(空名帖) 고문서-교령류-공명첩 정치/행정-임면-공명첩 光緖二十年四月日 光緖二十年四月日 高宗 施命之寶(10.5×10.2)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4년에 孺人을 貞夫人으로 추증한다는 내용으로 발급된 空名帖. *상태: 증직을 받은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음 *左傍書: 嘉善大夫兵曹參判依法典司憲府監察 祖妣 妻從夫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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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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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3년 이승학(李承鶴) 단자(單子)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卯四月日 化民 李承鶴 癸卯四月日 李承鶴 潭陽郡守 行官[押] 潭陽郡印 3顆(4.8×4.4)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3년 4월에 李承鶴이 潭陽郡守에게 올린 단자. 작년에 부득이하게 향교 都正직을 맡았으나 그 직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교체해 달라고 요청한 내용 *題音: 정황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그대로 맡아달라는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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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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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16년 기우만(奇宇萬)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辰七月卄七日 病生 奇宇萬 丙辰七月卄七日 奇宇萬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6년 7월에 奇宇萬이 보낸 간찰. *원문: 不見故人殆數年望之如雲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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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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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16년 기우만(奇宇萬)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辰陽二 病生 奇宇萬 丙辰陽二 奇宇萬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6년 10월에 奇宇萬이 보낸 간찰. *상태: 상단 일부 훼손 *원문: 積病杜門人間何世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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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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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27년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丁卯年 丁卯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7년에 이승학가문에서 작성한 추수기. 담양에 있는 소작지 29석 4두에서 걷어 들인 소작료를 기입 문서에는 해당 토지와 걷은 소작료, 총면적, 소작인 등이 표기, 9개 토지의 11명의 소작인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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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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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이혁(李爀)·이돈수(李敦秀) 추수기(秋收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담양 창평면 장화리에 사는 李爀과 李敦秀가 걷은 소작료를 기록한 추수기. 이혁 소유의 토지 8개와 이돈수 토지 9개에서 받은 소작료를 기록 해당 토지의 번지와 전답 종류, 평수, 가격, 소작인 등이 표기 *상태: 필사, 공란의 ‘電報賴信紙’ 뒷면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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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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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13년 임태규(任泰奎) 시권비봉(試卷秘封) 1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任泰奎 任泰奎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豐川任氏世譜』 中編 一, 五 『한국의 과거제도』 , 이성무, 한국학술정보(주), 2004 『조선시대 시권 연구』 ,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HIKS_OD_F1034-01-100045 1813년(순조13)에 임태규(任泰奎)가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의 비봉(祕封) 1813년(순조13)에 임태규(任泰奎)가 작성하여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 즉 시권(試券)의 비봉(祕封)이다. 피봉부(皮封部)라고도 한다. 시권 우측에 응시자의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 사조(四祖)의 직역, 성명을 적어 답안지를 제출할 때 이 부분을 잘라서 따로 보관한다. 이는 채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피봉부와 본체부(답안지) 사이에 자호(字號)를 쓴다. 채점 후에 이 비봉을 답안지와 묶어서 작성자에게 돌려준다. 이를 통해 임태규의 인적사항을 알 수 있다. 임태규가 이 시권을 작성한 나이는 35세로,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거주지는 남평(南平)이다. 그의 4조(祖)를 살펴보면, 아버지는 유학(幼學) 임상욱(任相郁), 할아버지는 학생(學生) 임은(任溵), 증조(曾祖)는 학생(學生) 임창하(任昌夏), 외조(外祖)는 학생(學生) 김녹현(金祿鉉)이다. 임태규(1779~1813)의 자(字)는 문경(文卿)이고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임상욱(任相郁)의 아들이다. 그의 부인은 의인(宜人) 금성김씨(錦城金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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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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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13년 임태규(任泰奎) 시권(試卷) 2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任泰奎 [1813] 任泰奎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豐川任氏世譜』 中編 一, 五 『한국의 과거제도』 , 이성무, 한국학술정보(주), 2004 『조선시대 시권 연구』 ,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HIKS_OD_F1034-01-100047 1813년(순조13)에 임태규(任泰奎)가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 1813년(순조13)에 임태규(任泰奎)가 생원시(生員試)에 작성하여 제출한 시권(試券)으로, 삼등(三等) 제7인(人)에 급제한다. 이 시권의 시험 과목은 사서의(四書疑)로 시제(試題)는 '問云云'으로 생략되었지만 소글자의 긴문장으로 기재되어 있다. 성적은 '차하(次下)'이다. 시권 우측에 '구우(九宇)'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시권의 제출 순서를 말한다. 과거 시험에서 시권을 다 거두면 제출 순서대로 묶어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호(字號)를 매겼다. 이를 작축(作軸)이라고 하며, 천축(天軸), 지축(地軸), 현축(玄軸) 등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천축의 첫 번째 시권은 일천(一天), 두 번째 시권은 이천(二天)이라고 한다. 대개 비봉의 절취선에 크게 한 번 쓰고 그 아래에 좌우 각 두 번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본 문서는 우축(宇軸)의 아홉 번째 시권인 것이다. 임태규(1779~1813)의 자(字)는 문경(文卿)이고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임상욱(任相郁)의 아들이다. 그의 부인은 의인(宜人) 금성김씨(錦城金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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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13년 임태규(任泰奎) 시권비봉(試卷秘封) 2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任泰奎 任泰奎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豐川任氏世譜』 中編 一, 五 『한국의 과거제도』 , 이성무, 한국학술정보(주), 2004 『조선시대 시권 연구』 ,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HIKS_OD_F1034-01-100047 1813년(순조13)에 임태규(任泰奎)가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의 비봉(祕封) 1813년(순조13)에 임태규(任泰奎)가 과거(科擧)에서 작성하여 제출한 시권(試券)의 비봉(祕封)이다. 피봉부(皮封部)라고도 한다. 시권 우측에 응시자의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 사조(四祖)의 직역, 성명을 적어 답안지를 제출할 때 이 부분을 잘라서 따로 보관한다. 이는 채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피봉부와 본체부(답안지) 사이에 자호(字號)를 쓴다. 채점 후에 이 비봉을 답안지와 묶어서 작성자에게 돌려준다. 이를 통해 임태규의 인적사항을 알 수 있다. 임태규가 이 시권을 작성한 나이는 35세로,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거주지는 남평(南平)이다. 그의 4조(祖)를 살펴보면, 아버지는 유학(幼學) 임상욱(任相郁), 할아버지는 학생(學生) 임은(任溵), 증조(曾祖)는 학생(學生) 임창하(任昌夏), 외조(外祖)는 학생(學生) 김녹현(金祿鉉)이다. 임태규(1779~1813)의 자(字)는 문경(文卿)이고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임상욱(任相郁)의 아들이다. 그의 부인은 의인(宜人) 금성김씨(錦城金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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