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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한남서림(翰南書林)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昭和)9.12.5 翰南書林 白斗鏞 李敎成 (昭和)9.12.5 翰南書林 白斗鏞 李敎成 서울특별시 종로구 郵便日附印 : 全南·福內 9.12.5 后4-12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632 1934년 음력 10월 27일, 한남서림 백두용이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의 이교성씨에게 책 가격을 전달하며 책을 사지 않을 경우 돌려 줄 것을 청한 간찰 1934년 음력 10월 27일, 생(生) 한남서림(翰南書林) 백두용(白斗鏞)이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의 이교성씨에게 책 가격을 전달하며 책을 사지 않을 경우 돌려줄 것을 청한 간찰이다. 지난번에 견본품으로 온 두 종(種)의 책자는 상대가 생각한대로 34원의 가격이니 보내주시면 된다고 하고, 그러나 그중에 낙질이 있다면 베껴서라도 보완해 줄 것, 대·소권으로 권이 가지런하지 않다면 휴지가 되고 마니 완전하게 받들도록 흠결 없이 해주면 돈을 보내드릴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발송해 드렸던 자신의 2종(種) 책자는 이 가격으로는 안 되니 돌려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하고 편지를 마쳤다. 한남서림에서 이교성 씨가 소유하고 있는 책 중 팔고 싶어 했던 책자에 대해 매입 가능함을 언급한 후, 한남서림에서 가져간 2종의 책자에 대하여 가격을 흥정하며 되돌려 줄 것을 청한 내용이다. 한남서림(翰南書林)은 1900년경에 백두용(白斗鏞,1872~1935)이 문을 연 최초의 근대적 고서점이다. 고서를 매입하여 파는 헌책방의 개념에, 간행사업도 병행하였는데 이것을 1932년에 간송 전형필이 인수하였다. 한남서림에서 편찬·간행한 책자를 살펴보면, 1917년 유금(柳琴)이 4가의 시 가운데서 초록한 것을 박제경이 주를 달고 백두용이 교정한 『전주사가시(箋註四家詩)』(활자본, 4권 1책), 어록과 이두를 모아서 설명한 『주해어록총람(註解語錄總覽)』(목판본, 1권 2책, 1919), 중국 속어사전(俗語辭典)인 『어록해(語錄解)』, 『詳密註解 옥추보경(玉樞寶經)』(1923), 『해동역대 명가필보(名家筆寶)』(1926), 작자미상의 조선후기 한문 희곡인 동상기를 모아 활자본으로 간행한 『동상기찬(東床記纂)』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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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_前面)全南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李 敎成 氏 宅郵便日附印 : …□ 9.12.5 后□…(皮封_背面)京城 益善洞 一二○ 金永完陽月小晦郵便日附印 : 全南·福內 9.12.6 后4-12(簡紙)天借奇緣 幸遂荊願 別後悵憧非比尋常 本月兼蒙惠訊 次第拜承 凉康慰荷 更維互寒體上護旺 諸度勻寗 仰祝且頌 生 憒劣無狀已也敎意敬悉 而朱箚尙未回收 仰謝隨 而至此悚汗何極 雖等閒書尺宜卽仰㚆而荒物質上鼎重往㚆焉 敢少忽而然哉 此邊居間者之本色每多如此 可歎可歎節當刻期隨覓入郵矣休慮少俟 是仰提綱價格不合 大全相換 第圖之似好兩種落卷朱箚付時伴呈計矣 恕諒若何 多少都留俟候 更伏祈文 祺對時增祉 不備上謝甲戌陽月小晦 生 金永完 拜㚆其外如有可圖件 幸須謀忠 至仰至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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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_前面)全南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李 敎成 殿京城 寬勳洞 十八番地翰南書林 緘 二月 三日(皮封_背面)郵便日附印 : 全南·福內 9.12.5 后4-12(簡紙)惠圅拜悉壹是 而向者見品先來兩種冊子 依俯示以參十四圓價格 送投亦無妨 然其中萬有落帙謄寫補充 又或大小不齊卷便是休紙 卽當奉完 能無欠點 價金謹當仰呈諒下 發送鄙件二種冊子 以此價額萬難奉副 幸望還投如何 順請爐安生 白斗鏞 拜謝書臼十月念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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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서산종회(西山宗會)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辛亥陰八月十五日 西山宗會 寶城佳川 宗中 辛亥陰八月十五日 西山宗會 寶城佳川 宗中 參判 鍾律, 議官 鍾一, 主事 鍾寅, 博士 鍾麟, 副尉 鵬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음력 8월 15일, 서산종회에서 판윤공 선조의 선산 추심과 묘정 수축을 위하여 배당금을 걷겠다는 내용으로 보성종중에 보낸 통문(通文) 1911년 음력 8월 15일에 서산종회(西山宗會)에서 판윤공(判尹公) 선조의 선산(先山) 추심(推尋)과 묘정 수축(修築)을 위하여 배당금을 걷겠다는 내용으로 보성(寶城) 가천(可川) 종중(宗中)에 보낸 통문이다. 신식연활자로 인쇄하고 구두점을 '。'로 표시해 놓았다. 요지는 판윤공(判尹公) 묘소의 수호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발급일자를 적고 발문(發文)자로서 서산종회의 석사 교진(敎璡)을 위시하여 주사(主事) 교선(敎善), 교섭(敎燮), 석사(碩士) 교원(敎元), 교항(敎恒), 참판 종률(鍾律), 의관(議官) 종일(鍾一), 주사 종인(鍾寅), 박사(博士) 종린(鍾麟), 석사 태순(台淳), 부위(鵬淳), 석사 영순(英淳)의 이름을 적어 보성 가천(佳川) 종중에서 받도록 적었다. 그 다음에 적힌 '위토(位土)의 사실(事實)'에는 판윤공 묘소가 전해 내려오다가 빚을 져 남에게 넘어가게 된 전말(顚末)을 적고 수금(收金)을 하게 된 이유를 6조항으로 적어 놓았다. 120원은 묘위답을 찾고, 60원은 사초 및 묘정을 수축하기 위해 총 200원을 모으기 위해 가천 문중에 배당한 돈은 10원이며 수금 기한은 1911년 음력 10월 1일(墓祀) 이전이고, 경성 중부 익동(益憧憧)의 의관(議官) 이종일(李鍾一) 가로 납부하도록 하였고, 각 종중에서 담당하는 금액은 부근 우편국에 가서 이종일씨에게도 보내도록 하라고 적혀 있다. 만약 기한 내에 납부하지 않아 유사(有司)가 파송되는 경우 유사의 여비(旅費)는 해당 종중에서 담당해야 한다는 조항이 함께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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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啓者。事孰爲大。事親爲大。事親孰大。推養爲大人莫不有親。我親。必有其親。而親之親。必有其親。以此推親。我親之本。必曰其祖也。人莫不事親。我事其親。而親。獨不欲事其親乎。親事其親。而親之親。獨不欲事其親乎。以此推孝。我孝之始。亦曰其祖也。况我隴李。世襲之孝。聞於天下者乎。然天之福人也。不曾以雙。孝子之門。每每有傷哉之家。此實吾宗仁人君子之恨也。嗚呼。今日。尤有可恨者。卽我中葉判尹公之祀事也。惟公。寔我文祖(文景相公)之子。三公(校理公, 參判公, 星原尉公)之考。其淸德令聞。洋溢乎當時。其遺風餘韻。馨香乎百代。今我雲仍之赫赫於天下者。實公之賜也。夫何世降而親殺。族疎而宗孤。公墓焉不克其守。簫簫馬鬣。只登乎樵牧之歌謳。草草奠酌。時憑乎村翁之香火。今焉三十霜于玆矣。卽我諸孫而觀之。雖曰遠祖。溯夫當時而念之。莫是一親夫我三公之靈。今如不昧。必不瞑目於地下。晝夜號泣於其親墓之左右矣。假使三公之享。牛實於籩。佾舞於庭。 靈其獨安乎。言念及此。不覺淚零而漬楮也。使我赫赫之宗。以 公而獨不享於百禩之後乎公祀之土。尙在墓前。宛然如舊矣。(顚末見下)公墓之守。亦在山下。傳焉至今矣。爾來三十年間。子孫之瞻省者。往往有愧諸墓直而獨往者。見諸祀土而痛哭者。此不足論。其於村人之指點而嗟惜。何哉。此實事親者之所不可忍。亦夫推養者之所不可安。顧我諸宗。雖則淸貧。寧不出巨資而擴新庄。不能齊衆力而還我千金之舊土耶。伏願我僉宗之仁人君子。欲盡事親之大事。必先乎推養。使親之親。無憾乎冥冥之中。幸甚辛亥陰八月十五日西山宗會發文碩士 敎璡 議官 鍾一主事 敎善 主事 鍾寅主事 敎燮 博士 鍾麟碩士 敎元 碩士 台淳碩士 敎恒 副尉 鵬淳參判 鍾律 碩士 英淳寶城佳川 宗中 勳鑑位土의 事實判尹公墓所ᄂᆞᆫ 在楊州郡 蘆原面下契無樹洞佛堂谷 而局內에 無他田畓이오 墓下에 只有八斗落畓ᄒᆞ니 此是 公之祀土―라 故汶容氏가―世居京城 而其近代墓― 亦在 公之塋內 故로 其墓畓을 仍爲管攝인바 土之所出中에 二石租를 收入於自家ᄒᆞ야 作脯以供時祀ᄒᆞ고 其餘則付之墓直矣러니 去辛卯年冬에 汶容氏 後室嚴氏夫人이 典其畓於林震燮 而債用七百兩ᄒᆞ고 其所收二石租로 俾報錢賭케ᄒᆞ고 仍卽歸鄕이러니 墓直千伊東이 不報其賭ᄒᆞ야 錢利夥多에 林亦督債 故로 墓直이 更以五石賭로 移典于閔蔚珍家ᄒᆞ야 得債六千兩 而遂報林債ᄒᆞ니 此是位土無乎之事實收金이 理由一 排斂錢은 二百圓으로 議定ᄒᆞ야 一百二十圓은 畓土를 還推ᄒᆞ고 六十圓은 莎草及廟庭頹落을 修築ᄒᆞᆯ 事一 貴宗所當金은 十圓으로 議定ᄒᆞᆫ 事一 收金의 期限은 本年陰十月一日(卽公之時祀日)內로 定ᄒᆞᆫ 事一 收錢의 處所ᄂᆞᆫ 京城 中部 益洞 六十八統 三戶 議官 鍾一■家로 定ᄒᆞᆫ 事一 各宗中所當金額은 附近郵便局으로 交付ᄒᆞ야 右의 收金處所로 換送ᄒᆞᆯ 事一 限內에 金額이 未到ᄒᆞᄂᆞᆫ時ᄂᆞᆫ 有司를 派送ᄒᆞ되 其旅費ᄂᆞᆫ 該宗中에셔 擔負ᄒᆞᆯ 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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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川 靜座下 入納莘湖 謹拜候函曩時送奚 適不家 未得仰修候幅 慊然于中 姑舍物未下今又命孫兒進拜 因把筆臨紙 則聞康寧外 若無所可仰陳者 而第念寒近路 遠拜謁無期 只增一倍之悵 書不如面非此之謂耶 況不審靜養啓居 而連棣康謐 渾儀之均迪與否 區區伏祝 尤非他時可比 生之庭慈節 姑不受損 率亦不言驚 幸私幸私 餘冀動止 若時加愛 謹不備 拜候上丁九 旬八日 生 金漢翼 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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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川 省案下 入納莘湖 謹拜謝函卽拜惠書 不言有故 可想平安甚慰甚慰 婦阿覲日 向已承書謹悉 而室憂小差 此欲依敎 旋又病勢肆劇 尙此增減多端 蘇完無期故不得已退以明春 明明付書矣 想不日關聽 則可詳其此書之未悉也 便促漏萬只此謹謝 候禮丁臘 旬五 弟 金宰植 拜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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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可川 棣座 回納水山 謹拜謝狀(簡紙)漢翼啓 漢翼獲罪神祗 去年喪耦失嗣今番又哭 次第於故室 祥期之際 舊悼新悲 一時幷臻 益難堪遣 况奄奄隆耋不勝悲念 其爲迫切 尤復可言 際蒙尊慈遠委賻使 兼恐唁書撫眷 逈出悲感難喩 憑審體度錦護萬旺 閤儀濟濟慶福 此甚慰豁 而聞令伯氏 尙未還駕 何處避禍 爲之奉念靡已 此處禍危尤甚 不可擧一邑於里外 或山或海 縱有可避之地 到此地頭動輒受禍 惟有握髮 家居大誦 態掌之句而已 上下萬年不先不後 何生此險辰備喫 無限困辱 而又遭此禍 天乎天乎 痛矣痛矣 然吾輩平日讀書講義 正爲今日受用 復何怨 尤極當任之而已 餘萬都在黙亮 僅此呼倩 不備謝狀上甲戌九月十六日 服人金漢翼 拜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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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可川 棣座下 入納莘湖 謹拜候書(簡紙)遠地瞻仰 歲窮益切 伏惟靜養棣體候履玆祈寒益護萬康 胤兄安侍仁庇渾迪 伏祝區區不任賤悰 査生之庭 玆節恐攝爲旬餘 而今才稍復 眷下不無小警 而姑免大何 俯仰幸甚 孫婦溫柔和順 甚得婦道 私門慶幸 孰有加於此 當此女範揚地之時尊門之內敎如是 尤極欽歎 開春解冬 必賜枉臨 疊疊語留在拜討 餞迓之際 萬萬加愛 以慰瞻望 謹不備 拜候上丙之末月卄三日査生 金漢翼 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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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성주이씨 족보간행(族譜刊行) 발(跋) 초(草) 고문서-시문류-발 崇禎紀元後丁巳仲夏 李漢鎭 崇禎紀元後丁巳仲夏 李漢鎭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97년(정조 21) 성주이씨 족보를 간행하면서 기념하여 작성한 발문의 초본 1797년(정조 21)에 성주이씨 족보를 개수(改修) 간행하면서 작성한 발문(跋文)의 초본(草本)이다. 두 발문은 훗날 따로 베껴 놓은 것으로 보이며 1797년 5월에 후손 이한진(李漢鎭)이 작성한 발문과 같은 해 10월 16일, 이우진(李佑震)이 작성한 발문이 함께 등서되어 있다. 이한진의 발문 내용은 1687년(숙종 13)에 은암공(隱庵公) 이광적(李光迪)이 목판으로 3권의 족보를 만들고 1751년(영조 27) 학암공(鶴庵公) 이응협(李應協)이 7권으로 활자 인쇄하여 간행한 족보를 언급하고 이후 40년이 흘렀으므로 새로이 족보를 간행하여야 한다는 당위와, 1786년에 운각(芸閣) 활자를 이용하여 새긴 것이 여러 권이고 지금까지 500여 판에 이르렀지만 중도에 상척(喪慽)이 이어지는 통에 탈고를 하지 못하고, 자신도 세상에 나아가 4년간 일을 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등의 경위와 족보 간행의 의의 등을 서술한 내용이다. 이우진의 발문 내용은 1786년에 택진(澤鎭) 씨가 서울에 보소를 설치한 이래로 거의 수단(收單)을 했으나 중도에 잘못되게 된 것을 1796년 봄에 서울에서 영당(影堂)으로 수단을 실어 내려와 초권(初卷)을 교정하고, 택진 씨가 수집한 이하의 세계를 싣고 약간의 명전(名錢)을 마련하여 각수를 모으고 판을 꾸며 재승(齋僧) 만학(萬學)에게 시켜 10월에 마치게 된 일을 서술하며 2년 동안 영당을 수리하고 강당을 짓고 족보를 간행한 사적을 기록하였다. 이한진(李漢鎭, 1732~?)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중운(仲雲), 호는 경산(京山)으로 감역(監役)을 지냈다. 전학(篆學)에 뛰어났으며 음악에도 통하여 그의 퉁소는 홍대용(洪大容)의 거문고와 함께 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재주로 당시의 명사였던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성대중(成大中)·홍원섭(洪元燮) 등과 교유하였다. 글씨는 당나라 이양빙(李陽氷)의 소전(小篆)을 따랐는데, 『서청(書鯖)』에서는 그의 전서가 이름은 났으나 근골(筋骨)이 적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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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惟季夏隆省體候珍穆 大都均泰 昻不任遠溯區區之忱 族生依樣視務 幸私幸私 譜事益善進就 各處名單儘是設入 合寫正本 卽將移京開板爲計 事甚急勤 只待貴門名單 修送停役不可 奈何奈何多少情詵 每悉於前者 上告不必拕煩 然事將開板付印 故如是仰煩 幸下一言 以解渴望之情 千萬如何向與百淳從面 爛貴門事 而蘆原之訟 頗甚可幸 然將得終吉矣 貴門應訟之暇 以意不及他 稱託 然此事亦大然 則以一時不永之事 莫重承先裕後之謀 暴而棄之可乎否乎 蔽一言 自今晦初間 選定校正一員 書寫一人於谷室兩門中 卽卽奉單上來 以此宗中大事 無至少一之嘆 俾敦族誼千萬至望 姑爲掃榻跂待 不備上乙丑 陰六月 二十五日 族生 鍾浹 拜拜有問無答 果何事在他 不然況在周親 以爲家中大事 告之者 寧願聞一言之重寶城郡 文德面 可川里李敎成 氏 省座下京富川郡 西串面 佳佐里星州李氏 譜所陰六月 二十五日李鍾浹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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