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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式同福縣內西面第五寶巖里第 統第三戶幼學鰥夫羅得儉年六十己丑本錦城父通德郞 舜佐祖學生 景瞻曾祖學生 載挺外祖學生房啓亨本南陽率子幼學廷說年四十一戊申次子童蒙廷尹年十八辛未外祖學生金萬錠本光山賤口逃亡婢福丹年五十九庚寅母戶婢甲辰父良人談伊乙酉戶口相準印行縣監[署押] [周挾無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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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나채성(羅綵成)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同福縣監 羅綵成 □…□(6.5×6.5), 周挾無改印 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740 1876년 나채성이 가족원의 인적사항과 소유한 종들의 현황을 기록하여 동복현에 제출하고 확인을 거친 뒤 돌려받은 준호구 1876년 나채성이 가족원의 인적사항과 소유한 종들의 현황을 기록하여 동복현에 제출하고 확인을 거친 뒤 돌려받은 준호구이다. 동복현 내서면 학탄리에 거주하는 나채성이 67세 때에 작성한 것으로, 자신의 사조(四祖)와 처(妻) 임씨(林氏)의 사조, 아들 한규(漢珪) 그리고 도망 노비 1구(口)가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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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式單子同福縣內西面第六鶴灘里第 統第三戶幼學羅綏成年六十七庚午本錦城父學生 廷說祖通德郞 得儉曾祖通德郞舜佐外祖學生曺灝振本昌寧妻林氏歲五十三甲申籍淳昌父學生 成祿祖學生 昌復曾祖學生再茂外祖學生曺後周本昌寧率子幼學漢珪年三十丁未賤口逃亡奴甲奉癸酉戶口相準印行縣監[署押] [周挾無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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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57년 신재하(愼在夏)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愼在夏 全羅道 觀察使 巡使<押> □…□ 3顆(9.5x9.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7년에 영암에 사는 신재하 등이 전라감영에 올린 이인걸·이정필 정려 요청 상서. 1857년(철종 8) 11월에 영암군(靈巖郡)에 사는 신재하(愼在夏) 등 13명이 연명하여 전라감영에 올린 상서(上書)이다. 이들은 이인걸(李仁傑, ?~1593)과 그의 증손 이정필(李廷弼, 1640~)의 충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인걸은 문충공(文忠公) 익제(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예이고, 청호(晴湖) 이희(李暿)의 사손(嗣孫)이다. 본래 유학을 숭상하는 집안이지만 무재(武才)도 겸비하였기에, 무예를 익혀 벼슬이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결심하고, 가동(家僮)들을 이끌고 권율(權慄) 원수(元帥)의 막하에 들어가 군무를 살폈다. 불행히 행주(幸州) 전투에서 신여량(申汝樑)·박수량(朴遂良)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었다. 이인엽(李寅燁)이 묘지명을 써주었는데, "인의의 길을 밟고 나아가[蹈仁就義], 일월과 빛을 다투었네[日月爭光]" 등의 말이 있었다. 이인걸의 증손인 선전관(宣傳官) 이정필은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고, 등과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몸소 마련했는데, 아버지가 대합을 좋아하였기에 바다에 들어가서 캐오기를 겨울과 여름 내내 중단하지 않았다. 상중(喪中)에 여묘(廬墓)살이 할 때 동네의 강아지가 무덤 옆에 똥을 싸자, 강아지에게 소리치고 울면서 타일렀더니 다시는 무덤을 더럽히지 않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세상을 감동시키는 효자[感物孝子]"라고 칭했다. 상을 마친 다음에는 주머니에 돌아가신 분의 머리카락을 넣고 다니면서 항상 보면서 울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머리카락에 우는 효자[泣髮孝子]"라고 칭하였다. 그 당시에 암행어사 권상유(權尙游)가 국왕에 아뢰어, 50결(結) 분량의 면세를 허용해주고 매달 음식물을 지급해 주었으며, 호노(戶奴)의 잡역(雜役)을 모두 물지 않게 해준다는 내용의 완문(完文)을 작성해 주었다. 이상과 같이 두 인물의 행적은 당연히 정려(旌閭)해 주어야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잊히고 있는 상황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분묘를 지키고 관리할 수 있도록 정려(旌閭)를 포증(褒贈)하고 산 아래 마을인 망호정리(望湖亭里)의 환곡과 연호잡역(烟戶雜役)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감영에서는 27일에 "포양(褒揚)하는 은전과 연호 잡역을 면제하는 것은 마땅하게 고려하겠다."라고 처결을 내렸다. 이인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행주대첩 때 권율의 휘하에서 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행적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과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에 기록되어 있고, 충청남도 금산(錦山) 금곡사(金谷祠)와 전라남도 영암(靈巖) 영호사(靈湖祠)에 배향되었다. 이정필은 167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효성으로 부모를 공양하고 자식의 도리를 다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여러 번 감영이나 군읍에 이 사실을 알렸다. 관아에서 상을 내렸으나 이정필은 이를 받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세금 등을 면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 또한 사양하고 받지 않아 정려를 내렸다.1)1) 『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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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中前 手標右標段 門末妄發濫計 矣子婦葬暗窆於都先山靑龍墱是如可 門誚大起?除良 自是渠過掘移後 以何妄心 呈訴于 官家 而當此頭質之場官分付截嚴 則與門相和 更不生之意 玆以成標爲去乎 日後以此憑考事甲申十一月十九日標主 李泰永[着名]證人 閔學錫[着名]朴相宜[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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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년 북창도감(北倉都監) 자문(尺文) 5 고문서-증빙류-자문 北倉都監 都監<押> 海南縣□圖□□(7.5x6.8)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615 병술년 1월 23일에 북창도감에서 발급한 자문 병술년 1월 23일에 북창도감에서 발급한 자문이다. 해남현 마포면(馬浦面) 냉천리(冷川里)의 세미 1섬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자문에는 세미 수취 책임자인 도감관(都監官)이 착압한 뒤 북창도감도서(北倉都監圖署)를 날인하였다. 1871년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志)?에 따르면 해남현 마포면과 청계면 사이에 북창이 그려진 지도가 있어 참고가 된다. 자문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물건이나 금전을 받은 뒤 발급하는 영수증이다. 자문의 유래는 한 자[尺]도 안 되는 매우 작은 문서라는 뜻에서 나온 만큼 그 크기가 매우 작다는 특징이 있다. 자문의 양식은 관청에 납부하는 징수 세목과 세금의 물목, 수량 등을 기재한 뒤 발급일자와 발급처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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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正月二十三日馬浦冷川里稅米壹石捧上 印都監[着押][北倉都監圖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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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 민백붕(閔百朋)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閔百朋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을미년 4월 2일, 여흥 민백붕이 자신의 조카를 장가보내며 작성한 혼서. 을미년 4월 2일, 여흥 민백붕(閔百朋)이 자신의 조카를 장가보내며 작성한 혼서이다. 상대의 영애를 자신의 조카에게 내실로 허락해 주시어 감사하고, 선인(先人)의 예에 따라 납폐(納幣)의 의식을 치른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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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伏承嘉命, 許以 令愛貺室于僕之令咸. 年旣長成, 玆有先人之禮, 謹行納幣之儀. 餘不備, 伏惟尊照 下察.謹拜上狀乙未四月初二日驪興后人 閔百朋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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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서피봉(婚書皮封) 1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金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김 생원에게 보낸 혼서의 피봉. 김(金) 생원에게 보낸 혼서(婚書)의 피봉(皮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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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공명첩(空名帖) 2 고문서-교령류-공명첩 高宗 金廷弼 祖父 施命之寶(10.0×10.0) 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694 1869년 김정필의 조부에게 통정대부 공조 참의를 추증하는 공명첩 1869년 김정필의 조부에게 통정대부 공조 참의를 추증하는 추증 교지이고 해당자가 적혀 있지 않으므로 공명첩이다. 김정필의 조부로 추정한 것은 관련문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동년 동월에 김정필에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경복궁오위장에 임명하는 고신과 더불어 처 김씨,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추증교지가 함께 남아있고, 이 문서의 발급연월 좌측에 적힌 '조고(祖考)'를 통해 김정필의 조부에게 내린 공명첩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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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郡終望湖亭居 化民李圭浩 惶恐仰達于城主閤下 伏以 有寃必訴 有罪必懲 訟理之所由設 則其訴也 出於鳴寃之■〔心〕 而本不有所憎惡也 其懲也 緣於有罪之事 而固不可挾怨芥也 今夫民之以河聖祚暗葬事仰籲者 豈非必訴之寃乎 渠之暗理不掘者 亦豈非必懲之罪乎 惟我閤下洞察訟理之曲直 而捉囚河漢之母 以待其子之自來矣 今旣閱月 其子不來 而其母在囚 反爲致怨於民之所訴 更有何許漢從傍指嗾 造書傳致 其辭悖戾 其意陰險 有曰 故令捉囚陷於死地云 又曰 若不放釋 則生屍納宅云 究其設心 專爲脅制恐動之計也 如是 則豈有寃者訴罪者懲之理乎 大抵民之所訴者 只爲禁塚之故 而渠之所囚者 亦爲不掘之罪也 初不犯葬 則民何擧狀乎 終若掘去 則渠何久囚乎 何不以此爲念 而憑藉其病 ■〔恣〕其悖戾於文字之間 而渠不必自作自書 則必有釀計作書者也 此不可尋常看過 故玆以擧槪仰達爲去乎 伏乞 洞燭敎是後 覈其作書者 懲其無憚之習 而其病亦是實狀則代囚其家他眷 而放出爲白去乃 使之不待其子速掘其塚 卽爲蒙放是白等只 兩端間 決處之地 至祝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辛亥五月 日其子之尙不自現 其悖習可知雖有千辭萬語之惡說 有何可忌之事乎 爲(背面)先督掘 則不可以些少顔情 闊俠呈訴姑爲退待事初五日 告金正奉官 [署押][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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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敬通事 夫師生者人之大倫也 左右就養 服勤至死 莫於禮記 生之於三事之如一 出於欒其子之言 而朱夫子編入於小學 定爲萬世之法程 則爲後學者不可一日而不講斯義也 竊惟我 吾南先生 隱德■■(南岡)〔東岡〕倡道南海 使夫人者有以知聖賢之爲可 學章句詞章爲可 陋先王之道 不可棄夷狄之敎 不可從禮義之正 不可不守禽狄之穢 不可不斥 凜然有歲寒松栢之象 巋然爲魯殿之靈光則當此淫邪萬世人紀垂絶之日凡有血氣者 莫不思有以親愛之 而况親灸之者乎 况受恩罔極 如天地父母者乎 伏念 先生家世淸素 比歲以還剝落殊甚 往往有顔子之屢空 白首衰暮之年 躬親鄙事 耕田採薪 無所不至其在安貧樂道之地 宜其無戚戚之嬰懷 而樵牧婦孺黎爲之咨嗟 而太息爲其門生 故舊者寧可恝然於斯乎至於今日 則田疇所收不足 以支寒月 明春庚癸之竭 又將如何 瑧植等 深憂永嘆 不知所出 竊惟僉君子 衛師之忠篤倫之仁 必同此一般悰緖也 各捐瓶甖共濟師友之報艱難 以情以義在所不可已者也 未知雅意以爲如何 嗚呼 世之喪久矣 父子兄弟 天屬之地 猶有視若路人者 何況師友議定之地乎 雖然吾輩 平日讀書 固不以世俗薄態爲可願則其於今日之事 寧容若越視秦瘠恬不相顧乎 如不以爲不可 則亟思所以赴急期有實效 勿止爲應文傷數而已 則千萬幸甚右敬通于同門僉君子座前壬辰九月十八日同門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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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기우만(奇宇萬)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奇宇萬 魏啓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4년 9월 13일, 기우만이 자기 집 장례식에 위문해 준 데 대한 감사를 전하고 상대가 부탁한 죽오공의 묘문을 수락하겠다는 내용으로 위계학·위계관에게 보낸 답장 편지. 1914년 9월 13일, 기우만(奇宇萬) 생(生)이 자기 집 장례에 조문해 준 데 대한 감사를 전하고 상대가 부탁한 죽오공(竹塢公)의 묘문(墓文)을 써보겠다는 내용으로 위계학(魏啓學)·위계관(魏啓寬)에게 보낸 답장 편지이다. 기우만이 상대 위씨(魏氏)들이 모두 와서 조문해 준 데 대하여 감사인사를 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무사히 장례를 치른 것이 다행이라고 하였다. 본론으로는 상대의 돌아가신 선조 죽오공 묘문을 자신에게 부탁한 것에 대해 고사하기가 어렵다며 늙어 병이 있지만 간신이 정력을 수습하여 써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대가 물어준 신도(神道)는 서쪽을 위로 하는 것이 예(禮)라고 하신 말씀은 그 법식이 확실하다는 것, 장례는 지세(地勢)를 보고 묘제(墓祭)를 지낼 것이라고 하였다. 위소(慰疎: 慰狀)의 형식은 어떠하다며 잘 키운 젊은이를 칭찬하는 내용을 적었다. 죽오공은 위도한(魏道僩, 1763~1830)으로 자(字)는 슬혜(瑟兮)이다. 문집으로 『죽오선생유고(竹塢先生遺稿)』가 있다. 발신자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字)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전라남도 장성출신이며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참봉 벼슬을 지냈고, 개항기 을미사변 후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1896(고종 33)년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문인들과 재 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저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수신자 위계학(1868~1919)의 자(字)는 사열(士悅)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본관은 장흥이다. 위중식(魏重植)의 아들이며, 기우만의 문인으로, 장흥에서 거주하였다. 위계관(1873∼1942)의 자(字)는 자율(子栗), 호는 도곡(道谷), 5대조는 통덕랑 위백신(魏伯伸)이고 위영(魏栐)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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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五月二十五日右手標事段 唵川面盖山村後麓 卽祖考父親堂叔入墓之地而同里居朴義敏 占葬其祖父母村山下 則理當呈邑訴營 而當掘是矣 思念世誼不無彼此之顧念故許其葬占 以地價錢參拾兩捧上 日後子姪及兄弟從幼間如有殊異之說是去等 以此文記憑考卞呈事標主 徐明淑[着名]證人 姜文三[着名]鄭權夫[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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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북창색(北倉色) 정(鄭) 자문(尺文) 고문서-증빙류-자문 北倉色 鄭<押>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605 정유년 1월 28일에 북창색 정(鄭)이 발급한 자문 정유년 1월 28일에 북창색 정이 발급한 자문이다. 해남현 마포면(馬浦面) 냉천리(冷川里)의 세미 1섬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다른 자문에는 세미 수취 책임자인 도감관(都監官)이 착압한 뒤 북창도감도서(北倉都監圖署)를 날인하였으나, 여기서는 도감관 대신 실무자인 북창색이 착압하였다. 1871년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志)?에 따르면 해남현 마포면과 청계면 사이에 북창이 그려진 지도가 있어 참고가 된다. 자문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물건이나 금전을 받은 뒤 발급하는 영수증이다. 자문의 유래는 한 자[尺]도 안 되는 매우 작은 문서라는 뜻에서 나온 만큼 그 크기가 매우 작다는 특징이 있다. 자문의 양식은 관청에 납부하는 징수 세목과 세금의 물목, 수량 등을 기재한 뒤 발급일자와 발급처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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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浦冷川米壹石捧上 印鄭[着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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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이동흠(李東欽) 방목(榜目) 1 고문서-치부기록류-방목 李東欽 □…□ 2顆(8.0x8.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한량(閑良) 이동흠(李東欽)이 삼등(三等) 이인(貳人)으로 합격한 시험의 방목 한량(閑良) 이동흠(李東欽)이 삼등(三等) 이인(貳人)으로 합격한 시험의 방목으로, 이동흠이 기재된 부분만을 오린 일부이다. 이동흠과 관련한 호구단자가 6건이 현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거주지는 해남현 마포면(馬浦面) 산막동(山幕洞)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아버지는 재훈(載勳), 조부는 기춘(基春), 증조는 복광(馥光), 외조는 김상의(金尙儀), 처는 신풍최씨(新豊崔氏)이다. 1867년 이동흠의 39세 호구단자에 '출신(出身)'으로 기재되어 있고, 1885년 57세 때의 호구단자에는 '부사과(副司果)'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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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김정필(金廷弼) 소첩(小帖) 고문서-교령류-고신 綾州牧使 金廷弼 □…□ 3顆(7.0×7.0) 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694 1869년 능주 목사가 김정필에게 오위장의 공명첩을 수여하면서 함께 발급한 소첩 1869년 능주 목사가 회덕면의 유학 김정필에게 오위장의 공명첩을 수여하면서 함께 발급한 소첩이다. 이 소첩은 같은 해 김정필이 경복궁 오위장(景福宮五衛將)의 관직을 받는 공명첩과 함께 발급된 문서로, 공명첩 발급과 관련하여 증명 및 영수(領收)의 용도로 사용된 문서이다. 소첩은 일반적인 관작 임명의 경우와 달리 공명첩을 발급할 때 이와 관련하여 발급된 문서로, '소첩성급(小帖成給)'이라고 기재된 소첩과 공명첩을 전수한다는 의미의 '전수사(傳授事)'라고 기재된 전수첩(傳授帖) 두 가지가 있다. 공명첩은 임란 이후 제도화되어 시행되기 시작하였으며, 군공을 세운 사람 또는 납속(納粟)을 한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 주어졌지만, 그 뒤 국가의 재정이나 군량이 부족할 때, 또는 진휼(賑恤)을 위해 시행되어 공명첩 발급한 상례화 되었다. 본래 전쟁 중에 권한을 위임받은 자가 현장에서 수여하도록 하기 위해 처음부터 받을 사람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발급하였기 때문에 공명첩 혹은 공명고신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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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冕儀任淑陵參奉叙判任官八等者光武九年三月 日[宮內府印] 議政府贊政宮內府大臣臨時署理議政府贊政李載克 [宮內府大臣之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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