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신재하(愼在夏)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愼在夏 全羅道 觀察使 巡使<押> □…□ 3顆(9.5x9.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7년에 영암에 사는 신재하 등이 전라감영에 올린 이인걸·이정필 정려 요청 상서. 1857년(철종 8) 11월에 영암군(靈巖郡)에 사는 신재하(愼在夏) 등 13명이 연명하여 전라감영에 올린 상서(上書)이다. 이들은 이인걸(李仁傑, ?~1593)과 그의 증손 이정필(李廷弼, 1640~)의 충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인걸은 문충공(文忠公) 익제(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예이고, 청호(晴湖) 이희(李暿)의 사손(嗣孫)이다. 본래 유학을 숭상하는 집안이지만 무재(武才)도 겸비하였기에, 무예를 익혀 벼슬이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결심하고, 가동(家僮)들을 이끌고 권율(權慄) 원수(元帥)의 막하에 들어가 군무를 살폈다. 불행히 행주(幸州) 전투에서 신여량(申汝樑)·박수량(朴遂良)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었다. 이인엽(李寅燁)이 묘지명을 써주었는데, "인의의 길을 밟고 나아가[蹈仁就義], 일월과 빛을 다투었네[日月爭光]" 등의 말이 있었다. 이인걸의 증손인 선전관(宣傳官) 이정필은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고, 등과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몸소 마련했는데, 아버지가 대합을 좋아하였기에 바다에 들어가서 캐오기를 겨울과 여름 내내 중단하지 않았다. 상중(喪中)에 여묘(廬墓)살이 할 때 동네의 강아지가 무덤 옆에 똥을 싸자, 강아지에게 소리치고 울면서 타일렀더니 다시는 무덤을 더럽히지 않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세상을 감동시키는 효자[感物孝子]"라고 칭했다. 상을 마친 다음에는 주머니에 돌아가신 분의 머리카락을 넣고 다니면서 항상 보면서 울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머리카락에 우는 효자[泣髮孝子]"라고 칭하였다. 그 당시에 암행어사 권상유(權尙游)가 국왕에 아뢰어, 50결(結) 분량의 면세를 허용해주고 매달 음식물을 지급해 주었으며, 호노(戶奴)의 잡역(雜役)을 모두 물지 않게 해준다는 내용의 완문(完文)을 작성해 주었다. 이상과 같이 두 인물의 행적은 당연히 정려(旌閭)해 주어야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잊히고 있는 상황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분묘를 지키고 관리할 수 있도록 정려(旌閭)를 포증(褒贈)하고 산 아래 마을인 망호정리(望湖亭里)의 환곡과 연호잡역(烟戶雜役)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감영에서는 27일에 "포양(褒揚)하는 은전과 연호 잡역을 면제하는 것은 마땅하게 고려하겠다."라고 처결을 내렸다. 이인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행주대첩 때 권율의 휘하에서 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행적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과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에 기록되어 있고, 충청남도 금산(錦山) 금곡사(金谷祠)와 전라남도 영암(靈巖) 영호사(靈湖祠)에 배향되었다. 이정필은 167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효성으로 부모를 공양하고 자식의 도리를 다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여러 번 감영이나 군읍에 이 사실을 알렸다. 관아에서 상을 내렸으나 이정필은 이를 받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세금 등을 면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 또한 사양하고 받지 않아 정려를 내렸다.1)1) 『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