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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한글 단자(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기사납월초오일 기사납월초오일 1929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499 1929년 12월 초5일 혼사에서 사용할 의복의 치수를 적어 보낸 한글 단자 1929년 12월 초5일 혼사에서 사용할 의복의 치수를 적어 보낸 단자(單子)이다. 한글 흘림체로 "뒤참 야답 치 넉넉, 긴동 네 치 닷분, 압참 다셧 치 어리게, 압깃 네 치 닷분 넉넉" 등의 치수가 쓰여 있고, 상대방에게 옷의 치수를 적어 보낸 단자이다. 피봉 앞면에는 '의망', 뒷면에는 '근봉'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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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 주제의 시 4수(首)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동지(冬至) 즈음의 추위와 어려움, 회포, 동지 다음날 솜옷을 입은 기쁨 등 동지를 주제로 읊은 시 4수 동지(冬至) 즈음의 추위와 어려움, 회포, 동지 다음날 솜옷을 입은 기쁨 등 동지를 주제로 읊은 시 4수이다. 작성 시기와 작자는 미상이다. 〈두 번 움츠려 읇다[二龜縮吟]〉, 〈동지음(冬至吟)〉 2수, 〈동지 다음날 솜옷을 입고 짓다〉 등이다. 첫 번째 시에서는 '우리나라 삼천리는 다시 따뜻해질 것이니', '움츠리고 펴지는 것은 날이 있으니 모름지기 여유로워라'라고 하였다. 〈동지음〉에서는 동지의 모습과 감상을 적었고, 세 번째 시에서는 동지에 비로소 솜옷을 입고는 '소설(小雪), 소한(小寒)도 두렵지 않은 옷', '모름지기 예의(禮義)도 배로 지키게 할 옷'이라고 하면서 솜옷을 입는 기쁨과 그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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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이종협(李鍾浹)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 元月 十七日 李鍾浹 李鍾采 丙寅 元月 十七日 李鍾浹 李鍾采 寶城郡 文德面 可川里李鍾采 氏 座下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6년 1월 17일 족종 이종협과 종탁(鍾鐸)‧철협(喆協) 3명이 이종채에게 족보 간행사업에 관한 용건을 적어 보낸 간찰 1926년 1월 17일 족종(族從) 이종협(李鍾浹)‧종탁(鍾鐸)‧철협(喆協)이 가천의 이종채(李鍾采)에게 보낸 간찰로, 족보 간행사업의 진행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다. 3년 뒤에 훌륭한 보책(譜冊)이 나오면 감격이라 하면 감격이고, 또한 가문에 새로운 광채를 더할 것이나, 족보간행 사업을 시작하고 여러 해가 되었고, 우리 본파는 인력을 투입하고 간행을 도와 완성을 고하고자 하는데, 귀 문중은 무엇을 찾느라 늦어지는가 하고 물었다. 족보의 규칙은 시대를 따라야 한다. 적서(嫡庶) 등을 말하지만, 분별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편집의 규칙에서도 층(層)에 10자, 높이는 9자 등으로 정해져 있는데, 귀 파(派)에서 따로 의견을 제시하니, 만약 누락되는 것이 없으면 미루지 말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속히 부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오늘 고치고 내일 또 고쳐서 세월을 보내어 비용이 늘어나니 감당하기 어렵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보내는 날짜 위에는 발신인의 종파의 직인이 찍혀있다. 피봉 앞면에는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이종채(李鍾采)씨 좌하(座下)라 하였고, 뒷면에는 경성부 성주이씨보소(星州李氏譜所)에서 이종협이 발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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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九月十五日 金澤卿 李敎成 乙亥九月十五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766 1935년 9월 15일에 동생 김택경이 마종에 관한 일, 《현가궤범》 속록(續錄), 화종노인 주소 불분명 등의 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5년 9월 15일에 강원도 강릉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인형(仁兄)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푸른 갈대에 마음이 동요되고 국화가 피는 요즈음 춘부장(春府丈) 등의 안부를 묻고, 친구 및 여러 어른들과 반년 넘게 나누었던 정을 한순간도 잊지 못한다고 하고, 마종(麻種)에 관한 일을 언급하고 있다. 형이 말씀하신대로 대략 주선하였는데 송금이 지연되는 것은 무슨 층절(層節)이 있는지를 묻고, 그믐초 사이에 수합하여 출송할 계획에 대해 형의 회답을 보지 못하여 자못 암울하다고 하였다. 귀부의 농사형편은 마(麻)를 파종할 땅이 몇 고을이 되는지와 전의 시세의 높고 낮음에 다른 송금의 많고 적음을 상세히 헤아려 속히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생청(生淸)은 벌 농사가 잘 안되어 가격이 높고 귀하여 진품을 얻기 어렵다고 하고, 《현가궤범(絃歌軌範)》은 근래 등본 1책을 구하였는데 본주인이 50전으로 팔겠다고 하는데 형의 생각은 어떤지 묻고, 가을 뒤에 속록(續錄)하라는 말씀은 부응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곡성(谷城)의 화종노인 인섭씨(寅燮氏)가 전에 마종을 부탁하였으나 주소가 상세하지 않은데 남섭씨(南燮氏)와 같은 마을인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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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기유(李基瑜)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丁巳二月二十九日 李基瑜 丁巳二月二十九日 李基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7년 2월 29일에 이기유 등 6명이 외선조 봉사공의 재궁의 중건에 관한 일을 칭찬한 다음 약간의 돈을 찬조하겠다고 한 간찰 1917년 2월 29일에 이기유(李基瑜) 등 6명이 외선조(外先祖) 봉사공(奉事公) 재궁(齋宮)의 중건에 관한 일을 칭찬한 다음 약간의 돈을 찬조하겠다고 한 간찰이다. 이기유‧이기상(李基翔)‧이용회(李龍會)‧이우회(李友會)‧이정회(李正會)‧이태회(李太會)가 재양(載陽, 3월)에 외선조 봉사공의 재궁을 중건하는 일은 계획한 날짜보다 미리 완성되었고, 행인들마다 손으로 가리키며 성주이씨(星州李氏)의 효심이라고 한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쇠미해진 세상에 무너지는 풍속을 떨쳐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칭찬을 한 후, 연명한 사람들이 외예(外裔)로써 한 팔의 힘도 되지 못하는 약간의 돈 이십 원(円)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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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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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종중(宗中) 수입금액(收入金額) 장부(帳簿)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시천리 등 소재 전답에 대한 종중의 수입금액 장부 시천리 등 소재 전답에 대한 종중의 수입금액 장부이다. 날짜와 작성자 등은 모두 미상이다. 수입금액을 열거하였는데, 종중 전답의 출의금(出義金)과 식본금(殖本金)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전답 소재처는 시천과 가천, 신리이며, 총액은 출의금이 816냥5전, 식본금이 469냥8전5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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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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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23년 이대순 계산서(計算書) 고문서-증빙류-계산서 大正十二年 李大淳 谷城寶城門中 大正十二年 李大淳 谷城寶城門中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3년 보존이전등록세 등 사용처에 대한 이대순의 계산서 1923년 음력 10월 11일에 이대순이 곡성·보성 문중에 보낸 계산서이다. 이대순 개인의 문서용지에 쓴 것이다. 일금 97원에 대한 계산 내역서이다. 금액별 사용내역을 적었다. 사용내역은 보존이전등록세, 통신료, 식비 등이며, 그 아래에 겹줄로 세부내역을 적었다. 끝에는 사용액 합계와 차인잔금(差引殘金)을 적었다. 비룡리(飛龍里) 이전(移轉) 사건(事件)이라는 표제문만 쓴 낱장 문서가 있는데, 사용 용지가 같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계산서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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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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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5년 나수열(羅壽烈) 간찰(簡札) 5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十月二十四日 羅壽烈 李敎成 乙亥十月二十四日 羅壽烈 李敎成 전라남도 장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789 1935년 10월 24일에 외종질 나수열이 종증손(從曾孫)이 요절하는 일을 겪고, 김길중의 집 방문에 부재중이라는 내용 등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5년 10월 24일에 전남 장성군 삼계면(森溪面) 수각리(水閣里)에 사는 외종질 나수열(羅壽烈)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용암리(龍巖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보내주신 서찰을 받으니 뵙고 토론한 것 같다고 하고 근래 부모님을 모시는 체후와 집안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집안이 불운하여 종증손(從曾孫)이 요절하는 슬픈 일이 생겼으니 진실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고 하였다. 일전에 김길중(金吉中)의 집을 가는 길에 고창읍에 들어갔는데 진사(進士)인 사촌 동생을 만나 김길중이 있는지 물으니 김길중이 군산(群山) 사위집에 가서 10일 뒤에 돌아온다고 하였다고 하고, 순화(順化)의 집에 들어가서 서로 의논하는데 숙부의 서신이 어제 왔다고 하였다. 더욱 통탄스럽고 민망한 일이지만 이번 달 안에 다시 김길중의 집으로 가서 여러 가지로 권유할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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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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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正德十三年戊寅春友人妄順之【處順】以弘文傅士歸養特除求禮縣諸友皆歌詠其行予亦述懷以贈 士生千載後心事正相乖邈邈黃虞夢悠悠湖海懷窮通唯命在憂樂與人偕獨立風塵裏長悲井底蛙明君重儒學志士氣頗伸白日昭光遍靑春物意新長途馳駿骨滄海奮潛鱗借問鑾坡客胡爲謝此辰幸際雲龍會仍希日月輝金鑾朝入對蓮燭夜扶歸治亂明根本詩書討奧微他年湖海遠回首夢依依奉檄寧無喜高堂有老親採山供軟蕨釣水薦纖鱗至孝能爲化餘恩自及民會看爭訟息田里一般春忠謹功隨立偸閒事不成撫民宜用恕治吏最須明遺愛錢丞頌清心裴尉旌聖朝圖治急愼勿負恩榮南州歸思迫北關夢魂迷落日晴猶暗行雲住欲棲人隨沙岸别江向海門西隔浦塵埃起唯聞征馬嘶山水宣城郡風流付謝君窓輸天外峀簷落海中雲野鶴閒堪伴巖猿静自聞西林有鳴鳥日暮獨求羣吏散空庭暮鳥鳴春雨餘焚香静几案危坐讀詩書月吐山光暗魚遊池影虛油然得心處歲月問何如交遊十載中世事轉怱怱去住情無奈愁歡意不同南江流浩浩北岳直叢叢淚目看歸鳥烟雲斷碧空送子湖南云征塵不可攀停盃問歸路折柳慰行顔江月隱高樹海風吹遠山相思一千里日夜望關【出安順之家詩帖】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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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圍籬記 維正德庚辰夏予以大罪特蒙天恩減厥刑還配于咸鏡道之穩城府囚以籬圍使不通人物盖其安置人之衆別其制以示其重也旣而朝廷慮罪人任意出入不所居令諸道監司不時伺察以馳啓惟穩之府最遠於京師越冬之季月始受都事來檢籬之高下屋之小大量尺較寸錄列備悉旣去也府相與議曰昔在廢朝法網至密迫制罪人無敢措手足寬而不嚴厥邑有罪今朝廷別命官檢察其意將俾之極于困以不寧也守令而不克承守令之辜也是囚也籬雖高固而不極嚴壯屋雖蔽漏而不至隘塞將無奈咎責之及于府乎無若改舊以新易疎以密又有竢於後日也乃集城下胡人伐長株巨椽發邑內車轂運荊叢棘薄遠近聯路呼號相聞溢以街巷積若邱山擇小屋於府東北隅撤其廐去其垣畫于地正厥方位植以高株環以厚籬築以雜棘外內牙角相叉固不動髪密無容針周可五十尺高無慮四五丈距屋之簷纔數尺或咫而出其上三之二有強由是日光不入看天如在井裏雖白晝黃昏焉籬之南孔小穴以開飲食之路外而四面結小幕以置守直之所制度之嚴悉無虧漏視前圍不啻倍簁望之鬱然一林莽之峻山殊不測其中之有人居也豈俚言所謂生冢者乎家之制肖南人砧杵之屋而差大焉厥地窪湫厥材佶屈構以交柯以亂索塗以糞土被以荒蒿房無重闥門不限閾窓壁戶庭鋪陳器什之具務盡醜陋誠非人之所堪處卽功之告訖而移囚之實其月之望也其始也如入重泉之下仰無天俯無地曛黝晻黑而視不見物充欝蒸塞而息不通氣拘繋甚於桎梏蒙蔽過於蔀沛心身喪厥常矣自意朝夕必盡撥棄萬念唯待死日而飢寒相迫漸思食飮獲延餘生以迄于今亦苦矣嘗識周官司圜收敎罷民能改者上罪三年而舍其不能改而岀圜土者殺狂愚無狀負罪實深尙全首領靦然於天地之間宜乎歲月已久而陷益深人事屢變而困愈甚也坎之上六曰係用徽墨置于叢棘三歲不得凶凶之上六曰困于葛藟于臲卼曰動悔有悔征吉今旣不岀而又無所征則當盡其在我而竢之已力所不容吾如彼何古之志士不憂身之困而憂道之不亨不慮生之重而慮死乙或輕故樂天知命綽綽然有餘裕者也致命遂志無可奈何而安之者也其視禍福榮辱若浮雲之於太虛也豈區區言語之所及哉雖然事有蓋棺而後定旣往勿追來者固無窮苟能革愆改過遷善徙義克新乃心以順其終則所事畢矣尙復何恨然則斯籬也非困汝也將玉汝矣吁其勉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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畜獐說 予囚于氈城不得與人物相通人有以畜獐遺者憐其孑處資爲寂寞之友非玩好之珍也不辭焉嶄然其角出也巍然其容高也牙而不知齧角而不解觸信毛虫之無害者始也不甚親與之粟摩手撫之稍稍自馴日以相近起居必伺履舃以隨似戀基所主著也然猶烟朝月夕風悲氣悽徘猶躑躅哀然戀其鳴若慕其羣也戚乎其色若思其嘉山秀水也予不忍山野之性爲人所縶欲放諸林藪以遂其心則狎人已久懼爲虞獵所得留而飼之形貌顦悴意思怵迫漸不見超距踶逸之狀矣時與犬畜戲犬亦不爲訝故與之較智角村互爲勝負以相嬉如是者數一夕遇隣犬試戲如家犬乃駭悚然而立睨然而視躇【恐誤字也】擭而齧之逝其股乃斃夫犬之性本能搏噬而狐鬼麋鹿是喜其所戲者非力不制非牙不利而獐也屢觸而不知危隣之犬非家之習而獐也不審而犯卒以害生其愚之不亦甚乎嗚呼世之君子不愼所與而出肺肝相視竟爲其所陷者滔滔是雖人物之殊而智則同也故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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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魚說 胡人網細魚市利于城外隣兒從所善乞而爲饍擇其生者五六尾與予予不忍呴沫之將就死也置諸陶盂注之以水水浸滿而魚不動或浮或沉惟其水之力而下上焉僮奴以爲之死將遺之人予止而觀焉俄而開口嚼水戢鱗拂泥沉者奮身而岀浮者揺尾而入駢聯而進噞喁而聚潑潑然以戲悠悠然以逝似不覺斗水之勞而安其所矣予念天之於物均之以生無分細大咸欲其遂遂而不閼成而後用乃天地之宜而仁者之心也予非活汝而求成養汝而致用聊因目前之感以全頃刻之命於湯火之苦也豈曰遂其性者乎溪壑之縱游泳之樂予非不知而縲紲之囚身且不保顧何路達之於江海之遠㢤予乙惻惻於懷者不獨汝之感于中而心有所不周力有所不及天地大矣物類繁矣昆虫之蠢蠢草木之榛榛吾姓與何嗚呼使汝生於中國之土遭聖人禁數罟之政則洋洋於湘水之源圉圉於洞庭之湖自卵自育以全其天矣不然深藏乎萬仞乙澤學道於千里之波不爲芳餌所近則九點之化雖不可期鼎中之害亦足免矣胡爲乎淹息於風霜之地汚穢之溝爲腥戎之食而童子之困歟蛟龍失所螻蟻之微無不欲相侵况食汝之肉而飽其腹肥其身者乎魚乎魚乎生命也死命也自我所取將誰咎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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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음(所願吟)〉 등의 시 초고(草稿)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521 〈홍백란〉, 《지비자집》의 〈경협골〉, 〈박인규에게 고하다〉, 〈소원음〉 등의 시 초고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수정한 초고이다. 작성 시기와 작자는 미상이며, 모두 15편이다. 〈홍백란(紅白亂)〉 2수, 〈발문(發㦖)〉 2수, 〈증야죽박우(贈埜竹朴友)〉 3수, 《지비자집》의 〈경협골(勁脥骨)〉 5수, 〈유무음(有無吟)을 장서실에서 써서 아손(兒孫)에게 보여주다〉, 〈박인규(朴仁奎)에게 고하다〉, 〈소원음(所願吟)〉 등의 시가 있다. 〈경협골〉의 제목 밑에는 '주자(朱子)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주자가 이 3자를 써주었다.'는 세주가 있어, 이 시를 쓴 배경을 설명하였다. 〈소원음〉은 칠언율시로 '공자를 배우고자 하면 이자(李子)로부터, 주자를 배우고자 하면 송자(宋子)로부터. 이자는 우리나라에서 공자를 잇고, 송자는 우리나라에서 주자를 이었네. 심산(心山)은 두 부자(夫子) 모두 배우기를 원하네.'라는 내용이며, 이 시의 밑에는 "석담(石潭, 율곡 이이)의 근원은 수사에서 나왔고, 화양(華陽, 우암 송시열)의 맥은 무이(武夷)를 이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유무음(有無吟)을 장서실에서 써서 아손(兒孫)에게 보여주다〉라는 시는 아래의 관련문서 마지막에 있는 〈있고 없음을 읇다[有無吟]〉, 〈장서실에서 쓰다[書于藏書室]〉와 같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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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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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897년 이교성(李敎成) 제문(祭文) 고문서-시문류-제문 丁酉十月戊戌朔二十日丁巳 李敎成 丁酉十月戊戌朔二十日丁巳 李敎成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529 1897년 10월 20일 이교성이 5대조 할머니 증숙인 해평윤씨의 묘소에 올리는 제문 1897년 10월 20일 이교성(李敎成)이 5세부터는 친진(親盡)으로 1년에 한 번 묘제를 지내게 된 5대조 할머니 증(贈) 숙인(淑人) 해평윤씨 묘소에 올리는 제문이다. 1880년 자신이 정읍 두승산(斗升山) 아래 안영리로 이사한 뒤 1881년에 처음 세향(歲享)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혹은 난리로 혹은 형세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이미 16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금년 봄 비로소 제사를 들었으나 서로 다른 언덕을 바라보며 미치지 못하다가 하나의 지방(紙榜)으로 오세조 고비(考妣) 묘소 옆에 합쳤다고 하니, 세향은 반드시 묘소에서 하는 것인데 이같이 하면 어찌 묘제의 이름이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마침내 이것이 연례(年例)가 되어 여전히 묘향(墓享)을 빠뜨리고 있으니 이것은 시천(詩川)의 한 종인(宗人)에게서 나왔고 편리함으로 집안사람들을 선동하였다고 하였다. 자신이 잔약한 바탕으로 가난하고 이룬 것이 없으나 또한 한줄기 선조의 기운을 이은 사람이라, 어렵고 먼 길을 이제 돌아왔으니, 삼가 대강을 논하여 바로잡겠다고 하는 내용으로 올린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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