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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堂脩禊錄 艮齋崔演演之【江陵人生弘治癸亥庚寅夏賜暇乙酉司馬同年乙科司僕寺正父縣監世楗】十省堂嚴昕啓昭【寧越人生正德戊辰庚寅夏賜暇乙酉司馬戊子甲科弘文館典翰父部將用和】秋坡宋麒壽台叟【恩津人生正德丁卯甲午夏賜暇辛卯司馬甲午丙科議政府舍人父郡守世忠】松齋羅世纘丕承【羅州人生弘治戊午辛丑夏賜暇乙酉司馬戊子丙科戊戌擢英試甲科弘文館校理父生員彬】菊磵尹鉉子用【坡平人生正德甲戌戊戌春賜暇辛卯司馬丁酉甲科司憲府持平父勵節校尉鶴齡生父縣監承弘】竹溪任說君遇【豐川人生正德庚午丁酉秋賜暇辛卯司馬癸巳丙科丙申重試戊戌擢英試吏曹正郞父參奉明弼】芝山李滉景浩【眞寶人生弘治辛酉辛丑春賜暇戊子司馬甲午乙科弘文館校理父進士埴】錦湖林亨秀士遂【平澤人生正德甲戌戊戌春賜暇辛卯司馬乙未丙科會寧判官父府使畯】寓庵金澍應霖【安東人生正德壬申辛丑春賜暇辛卯司馬己亥甲科吏曹佐郞父從仕郞公亮】尙德齋鄭惟吉吉元【東萊人生正德乙亥辛丑春賜暇辛卯司馬戊戌甲科吏曹佐郞父郡守福謙】汲古齋李洪男士重【廣州人生正德乙亥辛丑春賜暇辛卯司馬戊戌乙科弘文館副修撰父牧使若氷】好學齋閔箕景說【驪州人生正德甲子辛丑春賜暇辛卯司馬己亥丙科弘文館著作父判官世瑠】湛齋金麟厚厚之【蔚山人生正德庚午辛丑春賜暇辛卯司馬庚子丙科承文院副正字父幼學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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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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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통지류

1916년 이의용(李宜容) 등 통고문(通告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고 大正五年陰十一月十六日 李宜容 寶城門中 大正五年陰十一月十六日 李宜容 寶城門中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6년 음력 11월 16일에 이의용 등 4명이 연명으로 보성 문중에 수봉하는 날에 식리하여 계출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보낸 통고문 1916년 음력 11월 16일에 이의용(李宜容) 등 4명이 연명으로 보성 문중에 수봉(收捧)하는 날 식리(殖利)한 것을 계산해 제출하겠다는 통고문이다. 의용‧화용(和容)‧복용(福容)‧선용(善容)이 시제사(時祭事)에 올릴 제수(祭需)는 근래 5말(斗)의 벼로 하고, 대지(垈地)의 도조로 받는 벼는 근래 해마다 수봉하여 선산 수호의 본뜻으로 하였다. 내년 가을부터 수봉하는 날에는 위에서 말한 벼를 본 문중에서 식리(殖利)하여 매년 10월 15일 시제 후 계산하여 제출하겠다. 본 문중과 보성 문중이 각각 완의(完議)를 이루면 이것으로 영원히 본보기로 시행할 일이라고 하였다. 발신자의 이름 아래에는 날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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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이의순(李毅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卽日 李毅淳 大父 卽日 李毅淳 大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965 모년 족손 이의순이 대부에게 추운 날씨에 무사히 행차를 마쳐서 위로된다고 하고, 자신은 돈이 없어 이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간찰 모년 즉일(卽日)에 족손(族孫) 이의순(李毅淳)이 대부(大父)께 추운 날씨에 무사히 행차를 마쳐서 위로된다고 하고, 자신은 돈이 없어 이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편지이다. 편지 받은 그 날에 이의순이 대부께 얼음 얼고 눈이 내리는 가운데 여정을 별일 없이 행차하셨다고 하니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자신은 빈손인 자로 스스로 불쌍히 여길 뿐인데, 이 일은 돈이 있었다면 마침내 끝났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니 서글프고 탄식함이 어찌 끝이 있었겠느냐는 내용이다. 오른쪽 부분이 일부 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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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17년 이종예(李鍾乂) 등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大正六年陰閏二月十八日 李鍾乂 李馨淳 大正六年陰閏二月十八日 李鍾乂 李馨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7년 음력 윤 2월 18일에 이종예와 이의순이 이형순에게 보낸 영수증 1917년 음력 윤 2월 18일에 증주(證主) 이종예(李鍾乂)와 이의순(李毅淳)이 이형순(李馨淳)에게 보낸 영수증이다. 수령액과 용역의 계약금액, 날짜, 증주, 수령인 등이 차례로 적혀있다. 大憲錢 21원53전 중에서 금(金) 10원(円)을 먼저 영수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발급한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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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5년 나수열(羅壽烈)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亥五月五日 羅壽烈 李敎成 乙亥五月五日 羅壽烈 李敎成 전라남도 장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789 1935년 5월 5일에 외종질 나수열이 혼사에 관해 김길중의 서신을 살펴보고 논의할 것이며, 아내의 안질에 복용할 웅담의 동봉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簡札) 1935년 5월 5일에 장성군 삼계면(森溪面) 수각리(水閣里)에 사는 외종질 나수열(羅壽烈)이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용암리(龍巖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지난번 보낸 편지는 받아 보았는지 묻고 근래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하시는 체후와 집안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외종질 자신은 여전히 잘 지낸다고 하였다. 혼사(婚事)에 관해 김길중의 서신이 도착하여 동봉하니 살펴보고 헤아려주기 바란다고 하고, 8월 그믐초 사이에 김길중과 함께 댁으로 찾아간다고 약속하였으니 7, 8월 사이에 1차로 왕림하여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자신의 늙은 아내가 안질(眼疾)로 눈이 흐려지는 지경에 있으니 웅담(熊膽)이 있으면 조금 서찰 중에 동봉하여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며칠 동안 고창(高敞) 순화(順化) 집에 갔다가 얼굴을 보고 토론한 뒤에 다시 서찰을 올릴 것이니 우선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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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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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씨족보서 金氏族譜序 김씨는 명망있는 가문이니 계통은 당악(棠岳)1)에서 나왔다. 고려 이전은 족보가 유실되어 기술할 수 없다. 성스러운 조선이 천명을 받아 동방(東方)의 소중화(小中華)를 여니 당시에 우리 조상이 호남 병사의 막부를 보좌[佐幕]2)하였다. 금수(錦水) 서쪽 가와 백봉산(白鳳山)의 북쪽에 땅을 보고 나무를 베어 내어 이에 조종(祖宗)의 터를 잡아서 지금에 이르도록 삼백여 년 동안 대대로 귀업(龜業)3)에서 전해졌다.만력 정유년(1597, 선조30)에 한 집안이 전부 전쟁에 매몰되었는데 우리 황고(皇考) 및 종백부(宗伯父) 휘 김전(金悛)이 겨우 죽음을 면했으나 가문의 족보가 이때 유실되었다. 황고께서 우리 조선 건국 후,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에 휘자(諱字)와 세계(世系)를 손으로 써서 작은 간책(簡冊)을 만들어 전하게 되었다. 내가 어려서 선친을 잃고 고증할 곳이 없었는데 마침 오래된 책 속에서 간책을 얻었다. 손때가 아직 새로워 눈물을 가리고 받들어 열어본 나머지에, 그대로 이어서 황고(皇考) 이후 나뉜 종파와 외손 방지(傍支)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기록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었다.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누가 부모가 없겠는가마는 부모 윗대부터 친척이 다하는데 이르기까지 예(禮)가 비록 한계가 있더라도 정(情)으로 보면 부모이다. 수 대 후에 우리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면 날아다니고 달려 다니며 꿈틀거리는 벌레들과 서로 거리가 얼마나 되겠으며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무엇을 말미암아 일어나겠는가? 이것이 문중의 족보를 만든 까닭이다. 가문에 족보가 있는 것이 나라에 역사가 있는 것과 같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밝혀지지 않으면 종법(宗法)4)이 세워지지 못하고 오복(五服)5)의 친함이 없게 되고 추원보본(追遠報本)6)의 정성과 효우돈목(孝友敦睦)의 의리가 말미암아 세워질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우리 자손·형제·후손들은 선조의 가르침을 공경히 지키고 삼백 년 동안 서로 이어온 사대부의 풍을 추사(追思)하여, 영원히 만대를 전하고 추락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바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있는 선조의 바람이니라.황명남도후(皇明南渡後) 13년 정유년(1657, 효종8) 1월 갑자(甲子) 여절 교위(勵節校尉)7) 행(行)8)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9) 세마(洗馬) 지손(支孫) 만영(萬英) 두 번 절하고 쓰다. 金氏望族。 係出棠岳。 王麗以前。 譜逸不述。 聖鮮受命。 聿啓東華。 于時我祖。 佐幕南兵。 錦水西滸。 白鳳山陰。 相土刊木。 爰占宗基。 三百年于今而世傳龜業矣。 萬曆丁酉。 一家專沒於兵燹。 惟我皇考曁宗伯父諱 浚。 僅以身免。 門譜失守於此日。 皇考手記我朝以後南徙以下。 諱字世系。 書之小簡以傳焉。 萬英少失先人。 無所考徵。 適得是簡于舊秩中。 手澤尙新。 掩泣奉覽之餘。 仍錄皇考以後宗派所分及外孫傍支。 耳目所覩記。 幷成一冊。 以貽後昆焉。 嗚乎! 人有此生。 孰無父母。 自父母上至于親盡。 禮雖有限。 情則父母。 數代之後。 不知吾祖是爲何人。 則於飛走而蠢蠢者。 相距幾何。 而孝敬之心。 何由而起哉? 此門譜之所以作也。 是知家之有譜。 猶國之有史。 此而不明則宗法不立。 五服無親。 追遠報本之誠。 孝友敦睦之義。 無由而立矣。 惟吾子孫兄弟曁後人。 敬守先訓。 追思三百年相承士夫之風。 永傳萬世而勿墜。 匪我私言。 惟祖先在天之望云。 皇明南渡後十三年丁酉春正月甲子。 勵節校尉行世子翊衛司洗馬支孫萬英再拜謹書。 당악(棠岳) 해남의 옛 지명이다. 좌막(佐幕) 감사(監司)·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使) 따위에 따라다니는 관원의 하나로 비장(裨將)을 가리킨다. 막료(幕僚)라고도 하였다. 여기서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당악 김씨 시조 김인(金忍)을 가리킨다. 귀업(龜業) 현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귀업 마을로, 김만영이 이곳에 귀향하여 살았던 곳이다. 종법(宗法) 대종가(大宗家)·소종가(小宗家)의 계통을 밝히는 규칙이다. 한 가문에서 많은 소종가가 생길 때 대종가가 소종가를 통할하기 위해 생긴 것으로, 사당 제사, 합동 잔치, 복(服) 입는 것, 같은 종파끼리 혼인하지 않는 것 등을 시행하였다. 오복(五服) 다섯 등급의 상복으로 참최(斬衰) 3년, 자최(齊衰) 1년, 대공(大功) 9개월, 소공(小功) 5개월, 시마(緦麻) 3개월이다. 추원보본(追遠報本)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함을 말한다. 즉 선대 조상에게 해야 할 도리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추원은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함에 바치는 정성이라는 뜻으로, 《논어》 〈학이(學而)〉에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히 행하고 먼 조상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해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한 증자(曾子)의 말이 보인다. 보본(報本)은 조상의 은혜를 갚기를 생각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인데,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오직 사의 제사에는 구승으로 제물을 갖추게 하니, 근본에 보답하여 시초에 돌이키는 뜻이다.[唯社, 丘乘共粢盛, 所以報本反始也.]"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여절교위(勵節校尉) 조선 시대 종육품(從六品) 서반(西班)의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행(行) 행수법(行守法)으로, 품계와 벼슬을 서로 견주어서 관직의 앞에 붙이는 규례를 말한다. 품계가 높고 벼슬이 낮을 경우에는 관직 앞에 행(行) 자를 붙이고, 품계가 낮고 벼슬이 높을 경우에는 관직 앞에 수(守) 자를 붙인다. 1442년(세종24) 처음 실시되었고, 이듬해부터 지방 관직에도 확대 실시되었다. 《국역 세종실록 24년 7월 19일, 25년 7월 17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계방(桂坊)이라고도 하며 세자를 호위하던 곳이다. 익위(翊衛)·사어(司禦)·위솔(衛率)·부솔(副率)·시직(侍直)·세마(洗馬) 등의 관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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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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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신축년(1661) 辛丑 신축년 1월 9일 기미(己未) 소양(少陽)윤보(尹保) 씨 형제가 사는 봉산(蓬山)의 산실(山室)을 방문하였다. 윤공(尹公)과 형 윤경(尹儆)이 선영(先塋) 부근에 집을 지었는데 형제가 처자식을 데리고 터를 잡아 한 집에서 서로를 대하고 마음껏 즐기며 동문(洞門)을 나가지 않은 지 지금 10여 년이고, 나이도 70세이다. 두 사람이 비록 옛날 성현(聖賢)을 배워 실천하는 선비는 아니더라도 지행(志行)의 고상함은 숭상할 만한 점이 있다. 내가 방문하니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다. 산의 흥취가 자못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점이 있었다.1월 11일 신유(辛酉) 소양(少陽)수령을 찾아갔다. 수령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였다. 상이 재해를 입은 해읍(海邑) 백성들의 올해 전세(田稅)을 감면해 주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산읍(山邑)은 상세포(上細布), 기인목(其人木),19) 방물(方物) 등의 부세를 감면해 주었다고 한다. 남평(南平)은 비록 산읍에 속하지만 재해는 해읍과 차이가 없었으므로 본도의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해읍과 함께 거행하기를 별도로 계청하였는데, 상이 처리하라고 해당 조(曹)에 내리니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반대하는 내용으로 아뢰자, 백성들이 원망하였다고 한다.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집에서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상이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수령이 또 말하기를 "내가 부유한 백성의 곡식을 끌어 모아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이 났는데 별도로 담당 약정(約正)20)의 무리가 관청의 명령을 빙자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사사로이 거두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징계하여, 바야흐로 곡식을 찾아내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명을 혁파하고자 합니다."라고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부유한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나누어 주고, 죽음을 앞에 둔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또한 이웃 마을이 서로 구제하는 의리입니다. 지금 약정이 지나친 짓을 한다고 하여 명령을 폐한다면 목이 멘다고 먹기를 그만두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며, 군주가 어려 온 나라가 불안에 싸여 있고, 세신(世臣)이 연달아 죽으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수령이 말하기를 "상께서 부세를 견감한 것은 백성을 위하여 돌보아 주는 방도가 지극합니다. 다만 16개 관사에 바치는 공물은 한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막론하고 일정하여 더하고 빼는 것이 없습니다. 올해의 전결(田結)은 반 넘게 손실이 났지만 각 관사에 바치는 공물은 전례대로 감해 주지 않아 수령은 변통할 길이 없기에 굶주린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니, 근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보고하여 변통하게 할 수 없습니까?"라고 하니, 말하기를 "감사가 비록 계청(啓請)하더라도 해당 관사에서 으레 반드시 반대하는 내용을 아뢰니,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전(田) 1결(結)당 미(米) 1말을 세금으로 거두고, 1년이 지나더라도 다른 역을 지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주(海州)에 그 고사가 있어, 율곡(栗谷)이 건의하여 전국에 시행하기를 청하였지만 끝내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대동(大同)은 1결당 13말인데 또한 국가의 재용(財用)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니, 수령이 말하기를 "세상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2월 8일 무오(戊午) 바람이 차가웠다낮에 담양(潭陽)에 사는 여익길(呂益吉)이 찾아왔다. 여익길이 말하기를 "담양에 사는 사인(士人) 유진석(柳震碩)은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의 증손입니다. 올해 나이가 20남짓인데, 고학(古學)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이 은거한 곳에 집을 지어 글을 읽고 학문을 하며 산 어귀를 나오지 않은 지 지금 수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사람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으니, 이 말로 인하여 기록한다.2월 27일 정미(丁未) 소양(少陽)삼학재(三學齋) 유생들이 삼학재규의(三學齋規儀)를 써 주기를 청하니, 마침내 24조(條)를 지어서 주었다.【〈경의설(經義說)〉에 자세히 보인다.】2월 28일 무신(戊申) 소양(少陽)나는 봄여름이 되면 으레 상기증(上氣症)을 앓곤 한다. 정신이 혼미하고 입이 마르고 몸이 피곤하며, 머리가 무겁고 다리가 피로한 것 등 갖가지 좋지 않은 증상들이 나타나니 매우 근심스럽다. 연전에 수양하는 요결(要訣) 1책을 정헌(靜軒) 고공(高公) 순후(循厚)의 옛 별장에서 구하여 그 비법을 시험하였는데, 올해는 기운이 자못 조금 편안하니 그 효과를 본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에 몸 상태를 살펴보고 이어서 질병을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기록한다.정헌은 바로 나의 처 외조부 고순후(高循厚)이니,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셋 째 아들이다. 예학(禮學)에 정밀하였으며, 기상이 질박하고 고풍스러우며 행실이 단정하고 엄숙하니, 실로 옛날의 학자이다. 내가 젊어서 그 문하에 나아가 보고 느낀 것이 실로 많았다. 그런데 어느덧 20년이 지나 귀밑머리가 세려고 하고 병들어 쓸모없고 게으른 습성 탓에 조그마한 성취도 전혀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긴 탄식이 나온다.공은 관직이 형조 정랑에 이르렀다. 72세의 나이인 경진년(1620, 인조18) 2월 10에 졸하였다. 평소 품행이 단정하고 가난해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치관(緇冠)에 거친 삼베옷 차림으로 보리밥을 먹고 초가집에 살며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지만 즐거워하며 근심하지 않았다. 조정의 신료가 앞 다투어 천거하여 여러 번 관직이 내렸지만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위해 힘을 다하려는 뜻을 품고 사인(士人) 안방준(安邦俊),조평(趙坪)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바야흐로 나라의 환란에 달려가 순절하고자 하였으니, 사의(辭義)가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이윽고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와 종신토록 편안하고 고요하게 지내며 말소리와 얼굴빛에 동요가 없어 도를 지키다가 죽었다. 아, 도가 있는 선비가 아니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궁벽한 곳에 깊숙이 거처하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세상에 그의 지조를 아는 자가 없어 죽은 뒤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한탄스럽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감개가 일어 여기에 기록한다.2월 29일 기유(己酉) 대음(大陰)고요히 앉아 종일 책을 보다가 사람의 병통은 모두 기질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기(氣)의 죄과를 굴복시켜 탁한 기를 맑게 하고, 치우친 기를 바르게 하며, 들뜬 기를 고요하게 하고, 급한 기를 느리게 하며, 게으른 기를 부지런하게 하여 치우친 바에 따라 한결같이 중도에 알맞게 한다면 기가 중도에 알맞아 성(性)이 자연히 그 중도를 회복할 것이다. 내 기질의 병통은 매양 혼미하고 유약하며 게으르고 혼탁함에서 생기는데, 또 세밀하지 않고 거칠어서 혹 화락하면 나쁜 곳으로 빠지기 쉽고, 조급하면 난폭해지기 쉽다. 양부(兩斧)21)의 해로 말하면 또한 온갖 상념이 일어남을 면하지 못한다. 지금 즐겨 마시던 술은 끊은 지 몇 년이 되었다. 여색을 멀리 하라는 경계는 비록 매양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하게 공부하더라도22)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일어나는 상념은 혹 마음에 싹트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모두 기에 부림을 당한 것이니, 이로부터 기어코 맹렬하게 반성하고 통렬하게 끊어야 한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한다.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술시(戌時)에 지진이 났다. 한밤중까지 비가 그치지 않았다. 봄에 비가 자주 오는 것은 농부들이 꺼리는 바이고, 지진의 변고는 《춘추(春秋)》에 기록된 것이니,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어찌 근심스럽지 않겠는가.3월 17일 병인(丙寅) 대음(大陰)윤숙(尹俶)이 태수의 말을 전하기를 "이렇게 큰 기근을 당하였는데 16사(司)에 바치는 공물(貢物)은 조금도 견감해 주지 않습니다. 제용감(濟用監)의 정포(正布)를 현재 실어다 바쳐야 하는데 본현(本縣)은 재결(災結) 외에 남은 것이라곤 겨우 200부(夫) 뿐인데 평년에 바치는 공물의 원래 수량을 그대로 적용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고갈되어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지금 백성들의 정장(呈狀)으로 인하여 감사에게 전보(轉報)한 다음 입계(入啓)하여 우선 가을이 되면 실어다 바치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문구를 짓기 어려우니, 일전어(一轉語)23)를 내려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말단 관리라도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둔다면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로움을 줄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고통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감히 다른 말로 사양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정장의 글을 지어 보냈다.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무등산(無等山)에 제사 지내기 위해 광주(光州)에 왔다고 하는데, 민간에서 역병이 돌기 때문에 와서 제사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3월 18일 정묘(丁卯) 소음(少陰)윤선기(尹先夔),문만욱(文晩郁)이 찾아왔다. 능주(綾州) 사인(士人)과 본 고을 사인들이 웅점사(熊岾寺)에 모여 도내와 장흥(長興)에 통문을 돌렸다고 한다. 이는 장흥 사람 김광원(金光遠)24)이 영천서원(靈川書院)에 배향되자 여론이 김광원을 비난하여 서원을 중수할 적에 그대로 위판(位板)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문치욱(文致郁),이단(李漙) 등이 먼저 통문을 돌리자, 김광원의 자손도 생원(生員) 조덕길(曺德吉)에게 부탁하여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위판을 훼손하는 것은 의리가 아님을 알렸다. 당시 배향하는 의론은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먼저 꺼냈으므로 우산의 자손들이 능주 사인에게 권면하여 통문을 돌려 원통함을 호소하였다고 한다.내가 일찍이 그 중도를 잡아 논하기를 "김공의 출처와 언행은 내가 비록 전말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감히 함부로 의론하지 못하지만, 서원의 이름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니 반드시 오도(吾道)에 공이 있고 사문(斯文)에 신망을 받아 한 나라의 종유(宗儒)가 되며 백대의 사표가 되어 사림이 흠모하고 공론이 일제히 일어난 뒤에 사당을 세워 영령을 모셔야 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도학의 선정(先正)을 높이고 한편으로는 유림의 원기를 진작하여 백대에 전하여도 부끄러움이 없고 천하 사람들에게 성대하게 보여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한번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조금 엄격한 행실이 있다고 하여 그 자손과 친족들이 한 고을에 자리 잡고 살면서 갑자기 향사(享祀)하자는 의론을 내어 마침내 높다란 건물을 세운다. 아첨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거늘 온 세상이 모두 다 이와 같다. 저가 말하는 선유(先儒)가 비록 도덕은 진현(眞賢)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예의염치에 관한 생각은 필시 일반 사람보다 뛰어날 것이니, 행여 죽은 뒤에 지각이 있다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으며, 어찌 예에 맞지 않는 제사를 흠향하겠는가. 더구나 풍속이 날로 나빠지고 사풍(士風)이 경박해져 봄가을로 제사 지내는 것을 향현(享賢)이라고 하면서 묘우(廟宇)에 모여 종일 실컷 마시고 신나게 떠들며 방자하기 그지없다. 이로 인하여 날마다 다투고 갑자기 원수가 되니, 말류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세도(世道)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가 만회하여 폐단을 깨끗이 씻어 버리겠는가. 슬프도다."라고 하였다.저녁에 삼학재(三學齋)에서 묵었다. 생도 30여 인과 함께 묵었는데, 새벽닭이 처음 울 때 생도들이 일어나 강학하니 자못 인재를 기르는 즐거움이 있었다.3월 28일 정축(丁丑)문 앞 및 대천(大泉), 소천(小泉), 음천(陰泉), 양천(陽泉) 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 일을 주관한 자는 을생(乙生)과 돌이(道乙伊) 두 어린 남자 종이다. 네 곳의 천(泉)과 언덕 가에 심은 것이 모두 30여 그루이다. 어느 때 녹음이 길에 우거져 원림(園林)에 은은히 비춰 내 대문을 보호하여 황홀하게 바람이 불고 달이 떠오르는 감흥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마음이 동하게 한다.나는 젊어서부터 심하게 산수를 좋아하는 성벽(性癖)이 있었다. 하나의 산이나 돌, 원림이나 시내의 승경을 보면 날이 저물어도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돌아온 지 몇 달이 되면 또한 어느새 마음이 끌리고 생각은 그곳에 있었다. 반평생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우환까지 겹쳐 아직 경치 좋은 곳을 얻어서 터를 잡고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 탄식할 만하다. 비록 그렇지만 교외의 전원은 또한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몸을 숨기고 세상을 버린 마음을 깃들일 수 있다. 지금 새로 지은 집은 비록 산수의 승경은 없지만 교외의 들판과 냇물이 흐르는 시내를 잘 가꾸어 준다면 아마 달빛 아래 호미를 메고 돌아오는 흥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전(民田)이 섞여 있어 구입할 만한 돈이 없고 풍속도 좋지 않다. 무성한 숲 높은 산을 늘 그리워하여, 새가 저녁이면 숲으로 돌아가듯 본능적으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큰 은자(隱者)는 성시(城市)에 숨는 법이니,25) 진실로 나의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면 참으로 얻는 묘미가 절로 있을 것이고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곳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 하지만 돈독하게 믿고 의심이 없는 경지로 말하면 저 산수도 일개 외물일 따름이니 어찌 그 속에 마음을 얽매이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기록하여 스스로 경계한다.4월 9일 무자(戊子)본 고을 수령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로 인하여 대부분의 불공정한 것을 제거하였다고 한다. 올해의 기근은 전고에 없던 것으로, 관문(官門)에서 굶주림을 호소하는 자가 날마다 수백 명이었다. 관도(官道)를 메워 오열할 정도인지라 태수(太守)가 10일에 한번 창고의 문을 열어 구휼하기로 하였다. 관정(官庭)에 장막을 설치하고 죽을 끓여 주린 백성을 먹이니, 와서 먹는 주린 백성이 날마다 300여 명이었다. 미리 태장(太醬) 70여 단지를 마련하고 해채(海菜) 100여 섬을 사다가 국을 끓여 먹이니 주린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또 양쪽 대로 가에 승려들로 하여금 장막을 설치하여 죽을 끓이게 하고 다른 고을에서 경내로 들어오는 유민(流民)을 진휼하여 살리니,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무수한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또 멀리 관문까지 오지 못하는 농민을 염려하여 직접 곡식을 싣고 가서 구휼하니 고을 백성들이 고을 원의 은혜에 대해 칭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수가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였으니, 태수는 바로 이정(李晸)이다.4월 11일 경인(庚寅)하늘에 구름이 일어 가랑비가 내리려 하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초목의 가지와 잎이 모두 메말라 하늘로 곧장 뻗어 마치 우로(雨露)의 은택을 받고 싶어 하는 듯하였다. 자세히 그 정경을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발하는 뜻을 일으키게 하였다. 지각이 없는 식물이지만 또한 음양이 서로 만날 때 감응하는 것이 있는데, 하물며 이렇게 움직이고 지각이 있어 하늘에서 성명(性命)을 받은 존재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날 영춘재(迎春齋)에 앉아서 아이종에게 소양천(小陽泉)의 물을 길어오게 하여 솔잎을 타서 한 그릇을 마시자 정신이 나고 자못 상쾌해졌다. 나는 평소 병이 많아 방서(方書)를 탐구하여 음식을 조절하고 약물(藥物)을 복용하며 정신을 수양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솔잎을 복용하는 법을 익혀 복용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오늘 흥취가 있음을 깨달았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한다.이날 빈 재실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이 적막하였다. 봄새들은 지저귀며 처마를 따라 둥지를 찾느라 기둥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앞산 언덕에는 나물 캐고 소 치는 아이들이 단가를 부르고 경쾌하게 웃으면서 이리지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농부와 촌로는 소를 끌거나 호미를 메고 들밭과 수풀 사이를 찾아가니, 이 사이에 실로 참뜻이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저절로 감흥이 일어났다. 인하여 일어나 냇가를 소요하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오니 빈집은 적막하였다. 봄날 낮에 몇 권의 역사서가 솔바람에 이리저리 펄럭거렸다.4월 14일이날 남교(南郊) 정사(精舍)의 지붕에 이엉을 이었다. 뜰에 무성하게 우거진 매화의 가지를 직접 치고, 동자(僮子)는 마당을 쓸고 어린 여종은 집안 청소를 하였다. 집에 먼지가 없고 초가집이 정결한 가운데 고요히 서책을 보니 더욱 맛이 있었다. 다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달파 사방에는 시름뿐이니 전원의 즐거움은 또한 얻기 어려울 듯하다. 때때로 분수를 모르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이날 밤 절구 한 수를 입으로 읊어 이루었는데 "시끄럽게 우는 개구리들 내 마음을 알까 보랴[亂叫羣蛙說箇心]"라는 구절이다. 대개 앞 교외의 논을 새로 갈아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곤충은 지각이 없는 일개 미물일 따름인데 그 우는 소리는 울어 대다가 그치다가 하여 마치 음률이 있는 듯하였다. 더구나 개천과 수렁에서 자득하여 울적에 반드시 그 즐거움이 있으니, 개골거리는 소리는 또한 서로 그 심정을 말하는 듯하였다. 천기(天機)가 절로 동하여 소리를 내는 것은 또한 똑같은 마음이다. 그 사이에 진정한 의사가 암암리에 지각의 근원에서 서로 감응하는 곳이 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절로 읊조리곤 하니, 또한 사물과 내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른바 "성대한 천리가 상황에 따라 발현한다."라는 것이다. 한밤중에 잠자리에 들어 또 절구 1수를 지었다. "화평한 기운은 마음을 즐겁게 하니 잠자리를 정돈하네.[調氣怡神整枕衾]"라는 구절이 있다.4월 15일 갑오(甲午)밤에 하늘에 뜬 달이 산뜻하고 환하여 홀로 작은 창에 기대어 앉아 입으로 읊어 절구 1수를 이루었다. '홀로 소나무 드리운 창문에 기대어 앉으니 밤은 벌써 깊었네.[獨倚松窓夜已深]'라는 구절이 있다.4월 16일 을미(乙未)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하니 나를 어지럽게 하는 속세의 일이 사라졌다. 묵묵히 방에 앉아 책상 위 성현을 고요히 대하였다. 이와 같은 때 어찌 참다운 의사가 없겠는가. 다만 마음을 전일하게 지키지 못하여 사물을 접한 뒤에 쉽게 끌려갈까 두려울 따름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기상을 보존하면 도에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니, 힘쓸지어다.4월 23일 임인(壬寅)단비가 막 개어 만물이 모두 기쁜 기색이 있었다. 다만 흉년에 먹을 음식이 없고 보리도 익지 않아 마을에는 시름과 탄식이 가득하였다. 나의 집은 평소 가난한데 더구나 심각한 흉년을 만나 죽조차 끓이기 어려우니 가솔들 가운데 혹 성난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자도 있었다. 나는 본래 마음이 태평하여 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넉넉하거나 부족한 것을 가지고 좋아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닥쳐 생각해 보니, 사대부에게 가족이 있는 것은 나라에 백성이 있는 것과 같다. 군부(君父)가 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이 군주에게 돌아가는데, 가장이 되어서 가솔로 하여금 굶주림과 원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유독 딱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겠는가. 옛 사람이 양식이 자주 떨어졌지만 그 즐거움을 변하지 않았던 것26)은 가속으로 하여금 의리를 깨우치게 하여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의리가 아닌 것을 사모하지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인(仁)이 이미 동복(僮僕)을 교화하여 의리를 깨우치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하였고, 그들을 굶주림과 추위, 고달픔에 떨게 하였으니, 내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측은할 뿐만이 아니라, 동복들도 항심이 없어 은연중에 불선한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계책은 평세(平歲)에 동복을 재촉하여 부지런히 농사짓게 하고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여 항상 유사시에 대비하는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굶주림을 면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근본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 가산(家産)을 경영하는 일을 앞세워 더 풍족하게 살려고 계산하는 마음은 손님의 자리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꼴이어서 점점 사악하고 인색하며 의리를 해치는 지경으로 점점 빠져드니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하여, 본원적인 곳을 엄히 확립한 뒤에 그 나머지를 미루어 사무에 미치게 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근심이 없도록 경계하는 바이다.이날 비가 그친 뒤에 바람이 맑고 온화하였다. 소가 비탈진 언덕에서 졸고 보리가 바람에 물결치듯 출렁거리며, 해오라기가 들판에 내려앉고 논에 물이 가득하니 전원의 흥취를 펴기에 충분하였다. 내가 근래 매양 새로 지은 재실에 앉아 들판을 보니 작은 새가 있었다. 그 울음소리가 매우 경쾌하고 간드러지며, 풀숲에서 날아올라 점점 춤추듯이 이리저리 날더니 곧장 하늘로 향해 솟아올랐다. 온갖 방법으로 혀를 놀려 약삭빠르게 요염하니, 소리가 처음에는 잠깐 낮고 느리더니만 하늘 높이 올라서는 마디마디가 가늘고 촉급해졌다. 가늘고 촉급한 소리가 극에 달하니 또 빙빙 돌면서 내려왔는데 그 소리가 조금 느려지다가 땅에 앉아서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그 새의 이름을 시속에서는 '종다리[鍾至理]'라고 한다. 내가 그 소리를 들으니 높고 낮으며, 길고 짧으며, 성기고 빠른 음률이 있었다. 그 나는 것을 보니 빙글 돌리고 나아가고 물러나며 오르내리는 조짐 있었으므로 보기에 또한 정취가 있었다.인하여 생각하기를, 무릇 천지 사이에 생겨 난 것은 모두 이(理)와 기(氣)가 발현 되지 않은 존재가 없고 각기 지각이 있다. 기(氣) 쪽에 속한 것은 지각의 근본이고 이(理) 쪽에 속한 것은 바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性)이다. 사람과 사물은 본래 다르지 않고, 다만 치우치거나 바른 구분이 있을 따름이다. 비록 그렇지만 성음(聲音)은 마음에서 나오고 운동은 기(氣)로 말미암는다. 이미 지각이 있으므로 운동과 성음이 있으니, 저 새가 소리를 내어 울부짖는 것은 필시 의미가 있어 그 정(情)을 말하는 것이건만, 다만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대저 사람이란 슬프면 울고 기쁘면 노래하며, 서로 만나 정을 얘기하고 책을 읽으면서 그 소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사람은 소리에 자연히 각각 그 의미가 있지만 저 새들은 또한 들을 줄 모르니, 이는 또한 사람이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사이에 지극한 이치가 담겨져 있는 것은 새들이나 사람이나 차이가 없다. 《시경(詩經)》에 '소리개는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못 속에서 뛰노누나.[鳶飛戾天 魚躍于淵]'라고 하였는데, 자사(子思)가 이 말을 인용하여 군자의 도를 밝혔다는 사실을 또한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고인이 위아래에서 우는 봉황의 소리를 듣고 십이율을 만들었으니,27) 봉황과 이 작은 새는 똑같이 새이고 이와 기를 함께 얻어 태어난 것도 마찬가지이니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옛날에 지인(至人)은 하나의 사물을 보면 반드시 그 이치를 궁구하였으니, 복희씨(伏羲氏)는 용마(龍馬)로 인하여 팔괘(八卦)를 그었고28) 우(禹) 임금은 신귀(神龜)를 보고 구주(九疇)를 만들었다.29) 정자(程子)가 토끼를 보고 괘를 그은 것30)도 이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미물을 보거나 새의 지저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을 다해 살피지 않은 적이 없다. 다만 보는 것이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치를 궁구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지금 작은 새를 보고 부질없이 기록한다.또 "사람들이 내 마음이 천지와 통하고 만물에 두루 미쳐 내외, 피차, 물아의 구분이 없이 똑같이 한 가지 이치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마음이 천협(淺狹)하지 않고 도량도 클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갓 내가 있는 것만 알고 상대가 있는 줄은 모른다. 한 몸의 몸뚱이 외에는 기가 전혀 통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넓지 않고 도량도 좁다."라고 하였다.오후에 문 앞을 지나는 고향 친구가 있었는데 들어와 보지 않은 채 지나갔다. 이 사람은 나와 교유한 적이 있고, 나와 인척관계 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더러 고유하였으면서 지금은 문 앞을 지나면서도 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곰곰이 그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근래 고향에 한두 소년이 있었는데 또한 나의 외가 쪽 사람이다. 자못 빈번하게 왕래하며 글을 배워 조금 깨우쳤다. 지난번에 향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아무개가 그대에게 글을 배우는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그대는 어찌 그만두어서 비방을 멈추게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경전(經傳)은 성현의 공변된 말이다. 나는 다행히 먼저 성현의 찌꺼기[糟粕]31)를 깨우쳤다. 사람이 배우고자 하는 것 또한 천하의 공변된 마음이다. 내가 어찌 성심으로 옛 성현을 배우려는 사람을 거절할 수 있겠으며, 남들도 어찌 공변된 마음으로 배우는 사람을 비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그 사람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갔다. 그 뒤에 이웃 고을의 아무개가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말하기를 "김 아무개와 아무개가 당론을 일삼는다고 하니, 어찌 유자의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들은 사람이 나에게 와서 전해 주었는데, 이는 향인이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당이 나뉜 뒤로 조정으로부터 향곡(鄕曲)에 이르기까지 색목(色目)을 손가락질하며 당동벌이(黨同伐異)32) 해 왔다. 광해조(光海朝)가 이 때문에 망국의 지경까지 갔는데, 그 의론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내게 와서 배운 소년도 바로 향인 가운데 당색이 다른 사람의 자제이므로 다른 쪽 사람이 꺼려서 비방하는 말을 지어서 나에게 미친 것인데, 오늘 문 앞을 지나며 방문하지 않은 것은 필시 꺼리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일 따름이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대저 인심은 천하의 공기(公器)이다. 천리(天理)의 중정한 것을 품부받은 것이 천하의 공기가 된다. 이를테면 평평한 저울이나 맑은 물과 같으니, 만일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하늘에서 부여받은 바른 이치를 잃어버려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해치는 사악한 지경으로 빠질 것이니, 사람이고서 차마 이렇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의견을 제시하여 말하기를 "한유(韓愈)와 범중엄(范仲淹)처럼 문장이 뛰어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처럼 학문이 훌륭하더라도 만약 지금의 이른바 한편으로 치우친 당론에 구속된다면 그 사람은 볼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만약 지금의 당론을 위해서라면 하루아침에 만종(萬鍾)의 부를 쌓고 오정(五鼎)33)의 존귀한 지체가 되더라도 나는 하지 않는다. 만약 마음가짐이 중정하여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는다면 누추한 집에서 죽더라도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무릇 평소 남과 교유할 때라든지 논의를 세워 문장을 지을 때에는 평생 한마디 말도 당론에 스스로 치우친 적이 없으므로 동인과 서인이 모두 수상하게 여겼다. 혹자가 '아무개는 동론(東論)을 주장한다'고 한 것은 그가 비록 서인이라도 서인의 논리가 이치에 맞지 않으면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혹자가 '아무개는 서론(西論)을 주장한다'고 한 것은 그가 비록 동인이라도 동인의 말이 의리가 아니면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혹자가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다고 한 것은 양쪽이 옳지 않으면 양쪽을 비난하고 양쪽이 옳으면 양쪽이 옳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와서 배우면 어떤 사람은 꺼려서 얼굴을 가리고 문을 지나가기까지 하니, 사람의 편벽되고 인색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인가. 매우 우습다. 지극히 공정한 나의 마음으로 향당에 있으면 향인이 이와 같고, 조정에 나아가면 조정의 사람들이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세도가 이러하니 어찌 행할 수 있겠는가.내게 몇 뙈기 밭이 있으니 힘써 농사지어 풍년이 들면 처자식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새로 지은 집은 자못 정결하며 앞에는 샘이 있고 뒤에는 땔나무를 할 수 있는 산이 있다. 또 경서 몇 권이 있으니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지금부터 문을 닫고 깨끗이 청소하여 원기를 기르고 정신을 수양하여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편안히 하고 전현(前賢)의 지극한 훈계를 가슴에 새겨 천명을 따라 한가롭고 고요한 생활을 즐긴다면 한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고 죽어서는 편안할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다만 예부터 나라가 망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붕당을 지어 서로 다투었으니, 공변되지 않고 바르지 않아 나라가 따라서 멸망하였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노파심이 절실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근래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을 보았는데, 우리 동방에서 의리가 있는 문장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문집을 보니, 그 가운데 "내가 남시보(南時甫)와 화담(花潭) 학문의 문제점을 논하였는데 허태휘(許太輝)34)가 듣고서 편지를 보내 힐난하였고, 황중거(黃仲擧)35)와 학문을 논하다가 우연히 송당(松堂)의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36)를 언급하여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문인이 보고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말을 보고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다. 10년 전 우산(牛山)37) 안공(安公)이 〈우산답문서(牛山答問書)〉를 지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곳 몇 조목을 우연히 발견하고38) 우산의 문인에게 질정하는 가운데 내왕하는 사람이 적잖이 비난을 받았으니, 비난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다. 대개 천하의 의리에 관한 시비는 바로 공공(公共)의 일이다. 후학이 선각에 대해서 질정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혹 시비를 논란하는 것도 천하의 공도(公道)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각자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감싸며 일괄적으로 존숭하여 남들이 의혹스러운 점을 질정하지 못하게 하니, 참 우스운 일이다. 지금 이 책에서 우연히 이 논을 본 것으로 인하여 부질없이 기록한다.대개 우산(牛山)은 임하(林下)의 선비로 기상이 매우 좋다. 다만 본원과 관련된 곳에서 혹 함양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가다듬는 공부에 흠결이 있으니, 전적으로 들은 것을 기록하고 서술하는 것을 학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삼으므로 격앙되어 발로한 논의가 많고 온후하여 중도를 얻은 기풍이 적다. 내가 일찍이 인심이 허령(虛靈)하다는 설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理)는 본래 허하니 기(氣)를 겸한 뒤에 신령해진다. 기는 본래 신령하지 않고 이(理)에 의지한 뒤에 신령해진다."라고 하였다. 지금 주자(朱子)의 '이(理)와 기(氣)가 합하면 곧 지각할 수 있다'는 설을 보니 과연 망녕된 나의 주장과 우연히 합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공부를 한다면 혹 도의 본체를 보는 데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지 않겠는가. 주자가 또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촛불에 기름을 부으면 많은 불꽃이 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각하도록 하는 것은 마음의 이요,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의 신령함이다."39)라고 하였다. 내가 마침내 '불에 기름을 붓는다.'는 설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기름은 스스로 불꽃을 피울 수 없고 불을 붙여야 불꽃이 일어난다. 불은 스스로 불꽃을 피울 수 없고, 기름이 있어야만 불꽃을 피울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理)와 기(氣)가 서로 합하여야 지각이 생겨난다는 말이다.저녁에 남자종들이 소를 찾지 못하고 와서 말하기를 "소를 도둑맞은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달파 우리 백성들이 장차 죽게 생겼다. 아무리 양민이라도 도둑으로 변하였으니 장차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느냐. 어찌할꼬. 더구나 나는 잃었지만 남은 얻었을 테니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더 이상 찾지 말라."라고 하였다.4월 27일 병오(丙午) 소양(少陽)아침에 일어나 앉았다. 갠 하늘 날씨가 좋았고, 초목은 함초롬하였다. 두루미 한 마리가 홀로 샘의 근원에 서 있다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이어서 흥이 일어나 절구 1수를 지었는데 "검은 치마에 흰옷 차림을 한 선경의 동자라네.[玄裳素服一仙童]'라는 구절이었다. 또 절구 1수를 지었다.단비가 그치고 날이 개이자 보리가 이미 익었으니동산엔 싱그러운 풀이 가득하여 기운 맑고 그윽하네고요히 만물이 끊임없이 생성하는 의사를 보니도리어 내 마음에서 한 이치를 구하네근래 심기가 자못 온당하니 본원의 묘리를 이로 인하여 알 수 있을 듯하였다. 늘 부지런히 힘쓰다가 혹 감흥이 발현할 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에 끌려가니, 이는 공부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사물을 관찰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읊조리기를 마지않기까지 하였다. 이를 기록하여 눈이 녹고 풀이 자라는 근심을 경계한다.낮에 홍종화(洪鍾華) 씨가 와서 새로 지은 재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향당(鄕黨)에서 화목하게 지내는 의리를 설명하여 말하기를 "무릇 향당에서 이웃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도리는 충후하고 화목한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이 있으면 반복하여 서로 경계해야지 느닷없이 비난해선 안 됩니다. 선한 행실이 있으면 차근차근 서로 권면해야지 문득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먹어선 안 됩니다. 노인은 공경하고 현자는 존경하고, 어린이는 이끌어 주고 약한 사람은 세워 주고 강자는 경계하여 힘써 서로 과실이 적게 한다면 향리의 풍속이 점점 충후한 쪽으로 변할 것입니다. 향리에서 이 일로 서로 면려하는 것은 형들 몇 분에게 달려 있으니 힘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개 근래 향리의 풍속이 나빠지는 조짐이 있는 듯하였으므로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4월 28일 정미(丁未) 대양(大陽)비가 그친 뒤의 기상이 오늘은 더욱 좋다. 걸어서 앞 시내로 나가 새로 심은 버드나무를 점검하였다. 지난달에 오래 가물었으므로 말라 죽은 것이 3분의 2이나 되었는데 살아남은 것은 새로 잎이 나 사랑스러웠다. 이어서 생각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냄에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고 생장하는 이치도 만 가지로 같지 않다. 그러나 꽃이 피어 열매를 맺고, 열매를 맺어 또 번식한다. 열매가 없는 것은 반드시 그 뿌리를 옮겨 심은 뒤에 자라는 것이니, 초목은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유독 버드나무만 그 가지를 꺾어 흙에 꽂아도 살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이 나무는 천지에서 양생(陽生)의 기운을 받아 가장 먼저 싹이 돋고 또 무성하다. 그러므로 이른 봄 초목이 아직 싹트기 전에 이 나무는 먼저 잎이 돋아난다. 양기를 먼저 받기 때문에 초가을에 음기에 쉽게 감응하여 그 잎이 먼저 떨어진다. 옛사람이 글자를 만들 때 '목(木)'과 '양(昜)'을 의부로 삼았으니, 옛 '양(陽)' 자의 뜻은 이것을 본받은 것인가. 땅에 꽂아도 잘 사는 것은, 풍부한 양생(陽生)의 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양기가 상승할 때 그 기운을 쉽게 얻어서 사는 것임이 분명하다. 비유하자면 타고난 기운이 청명한 사람은 천리의 본원을 먼저 깨달아 선을 행하기 쉬운 것과 같다. 그 이치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음에 느낀 점이 있어 여기에 기록한다. 혹 이 나무가 푸른 잎이 녹음을 이루고 새순이 자라 가지가 뻗어 나갈 때면 주인도 진보하는 뜻을 두어 위로 본원이 되는 곳에 도달하여 행동할 때 발양(發揚)해서 이 나무와 더불어 퍼질 것이니, 경계할지어다. 이어서 절구 1수를 지었으니40) "몇 그루 버드나무를 문 앞에 심었네.[數株楊柳種門前]"라는 구절이 있다. 또 절구 1수를 지었으니, "전원에 새로 집을 지으니 맑은 시내가 곁에 있네.[野居新卜傍淸漪]"라는 구절이 있다.이인로(李仁老)가 말하기를, "저의 고조인 생원(生員) 이응림(李應霖)은 바로 우리 태조조(太祖朝) 때의 부마도위(駙馬都尉)인 이등(李䔲)의 손자로, 풍산(楓山) 추송곡(楸松谷)에 장사 지냈습니다. 올해 2월에 술사(術士) 이계현(李啓玄)이 와서 말하기를 '이 묘지는 매우 흉하니 자손들이 참혹한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자손에게 막 그 일이 있었기에 제가 듣고서는 매우 놀라 즉시 좋은 날을 잡아 이장하였습니다. 생원 공의 묘도(墓道)에 수기(水氣)가 있었는데 마치 조수(潮水)가 막 밀려난 뒤의 형상이었습니다. 백골이 물에 떠밀려 한쪽에 쌓여있었으며 거품이 일고 질척질척 하였으니 완연히 조수가 밀려난 뒤 물가의 형상과 같았습니다. 그 내묘(內墓)는 나무의 한 뿌리가 지판(地板) 아래로 들어가 있었고 크고 작은 뿌리가 무수하게 해골을 휘감고 있어서 열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오싹하였다. 대개 자손과 선조의 관계는 지엽과 뿌리 같은 관계이니 "조상도 편안하고 자손도 편안하다"라는 정자(程子)의 말이 매우 이치에 가깝다. 지금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창질(瘡疾)에 걸려 죽었는데 온 집안이 모두 그러하였고 이인로 등 몇 사람만 살아 있을 따름이다. 비록 묘 터의 조짐과 술가의 말이 우연히 맞아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알지 않아선 안 되는 일이다. 기록하여 치밀하게 무덤을 조성하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는다. 또 "무덤에 석회를 사용하는 것은 장차 나무뿌리가 파고들고, 개미가 갉아 먹고, 뱀이 지나다니는 근심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길한 기운이 오르지 못한다는 지관의 말에 현혹되어 지판(地板) 밑에는 으레 석회를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그것의 그릇됨을 극렬히 말하였다. 지판 아래에 만약 석회, 황토, 가는 모래 세 가지 물질을 섞어 버무려 두껍게 쌓아 단단하게 응고시킨다면 나무뿌리가 어디로 들어가겠는가. 장사 지낼 때 효성을 다하는 자는 이런 일에 대해 알지 않아선 안 된다.오후에 《포은집(圃隱集)》을 펴서 읽었다. 중국으로 왕래할 때 지은 시편을 두루 보았는데 수천 리 길 산천의 풍경을 모조리 입으로 읊어 놓은 것이다. 후인이 나중에 장구(章句)를 읊조린다면 신주(神州)의 형승(形勝)과 수레를 타고 왕복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듯 황홀할 것이다. 시구를 얻어 읊조리는 모습과 정신을 생각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듯하여 벌써 300년이 지난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이다. 공경하는 마음과 비감한 마음이 드는 끝에 생각하기를, 남아가 세상에 태어남에 사업이 매우 중하니, 위로는 천지의 무궁한 이치에 통달할 수 있고 아래로 만리 산천의 승경을 구경할 수 있으며, 앞으로는 천고의 지난 일을 통달할 수 있고 뒤로는 만대에 영원히 남을 이름을 세울 수 있다. 선생과 같은 자는 고금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이 몇 명이 있겠는가. 슬프다. 이 외로운 몸은 바다 모퉁이 누추한 고을에 태어나서 한 뙈기 황량한 밭을 궁박하고 적막한 가운데에서 지키니, 지식은 일신의 일을 주선하지 못하고 견문은 천리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 안 되는 낡은 책에서조차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였으니, 오두막집에서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 잠을 자며 조그마한 득실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며 우매한 사람의 비방과 칭찬에 따라 좋아하고 노여워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100년이 지나 갑자기 순식간에 죽는다면 초목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질 따름이니, 이것으로 선생의 사업에 비교하면 벌레를 붕새에 비교할 정도뿐만이 아니다. 아아, 서글프고 애달프다. 비록 그렇지만 군자의 사업은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을 따름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인색하지 않으니 어찌 유독 고인에게만 넉넉하겠는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또한 그다지 짧지만은 않으니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써 죽은 뒤에 그만둔다는 자세로 매진한다면 비록 만분의 일도 고인과 비슷하지 않더라도 아마 인간이라고 하는 이름을 저버리지 않아 초목과 금수처럼 되는 것은 면할 것이다. 지금 선생의 문집을 보고 홀연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붓 가는 대로 기록하였으니, 후일 공부를 게을리할 때 혹 이 기록을 보고 불현듯 깨닫고 척연히 본보기로 삼아 나태한 뜻을 경계하기를 바란다.5월 4일 신해(辛亥) 소음(少陰)서봉령(徐鳳翎) 군과 대화를 나누었다. 말할 적에 매양 절의를 강조하고 학문은 귀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예경(禮經)은 부질없는 글이라고 하였으니, 말마다 이와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학문과 예경이 과연 헛된 글이어서 귀한 것이 아니라면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모두 학문 가운데 일인데 학문을 배격하고 절의를 구하는 것은 오곡을 농사짓지 않고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이니 괜찮겠는가."라고 하였다. 서군이 인하여 우리나라 고금 인물의 온갖 고사를 두루 말하였다. 그 말이 잔잔한 물결처럼 슬프고 절절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선비이다. 다만 학문이 본원이 되는 곳에서 구하지 않고 매양 외면에 속박되어 고금 인물을 논하여 절의를 귀착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하고 예를 지키는 것을 근신하며 작은 일에 청렴한 정도로 치부하고, 세상일을 경영하는 것을 절의와 충신으로 여긴 것이다. 그 학문은 대개 은봉(隱峯) 안장(安丈 안방준(安邦俊))에게서 나왔고, 안장은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배웠는데, 무엇 때문에 그 학문이 이처럼 너무 조리가 없이 번잡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비록 그렇지만 또한 말세의 퇴폐한 풍속을 면려할 수 있으니, 어찌 일률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 장점을 취하여 벗 삼는다면 괜찮다.5월 5일 계유(癸酉) 대양(大陽)날씨가 아까울 만큼 화창하였다. 집에서 기르는 여마(驪馬)를 앞 비탈에 풀어놓았으니, 정강이까지 자란 푸른 풀을 종일 배부르게 먹게 되었다. 이미 속박하는 재갈이나 고삐가 없어 마음대로 풀을 뜯고, 내려가 샘에 고인 물을 마시고 누웠다가 일어나고 다니면서 먹으며 편안하였으니, 그 뜻이 매우 한가로운 듯 보였다. 집에 또 적마(赤馬)가 있는데 성질은 욕심이 많은 성미라 길들이지 못하므로 마구간에 매어 놓았다. 물을 마시고 여물을 먹는 데 번번이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니, 보기에 매우 고통스러운 듯하였다. 인하여 생각하기를, 비록 기르는 가축이라도 욕심의 정도에 따라 고통과 즐거움이 이처럼 현격히 다르니, 사람이고서 일개 '욕(慾)' 자를 제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41) 욕심을 이기지 못하여 남에게 제재를 받아 수족이 묶인 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어찌 우리 집 적마와 다르겠는가. 보고서 갑자기 경계하고 일에 느낀 점이 있어 기록한다.5월 6일 갑술(甲戌) 대음(大陰)이문석(李文碩)이 찾아와서 작별 인사를 하였다. 성주(城主)의 임기가 차서 돌아가야 하기에 내일 행장을 꾸려 떠나므로 나에게 작별을 고한 것이다. 이 사람과 몇 년 동안 상종해 보니 지의(志意)가 고상하였는데 지금 멀리 떠난다니 서운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나에게 묻기를 "지금 돌아가면 어떤 책을 읽어야 자립(自立)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문장을 짓거나 시구를 다듬는 것은 말류의 학문이니, 나는 감히 그대에게 권하지 않는다. 오직 원하건대, 사서(四書) 가운데 본원적인 곳을 탐구한다면 문장이 이 가운데 있고 의리도 이 가운데 있으니, 어찌 이 외의 것에 마음을 쏟겠는가. 그대를 보니 기질이 깨끗하면서 유약하여 시끄러운 성시(城市)에 오래 거처해선 안 된다. 동호(東湖)에 있는 그대의 별장은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옛 경서를 끼고 독서하여 정신을 수양하고 본원을 함양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황량하고 외진 곳에서 홀로 쓸쓸히 지내는 나 같은 자가 또 그대와 작별하니 서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자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작별하려니 석별의 정이 한층 더하였다.이문석이 말하기를 "사간 이수인(李壽仁)이 올린 사직 상소의 끝에 '본도 감사 김시진(金始振)은 아첨하면서 남의 비위를 맞추기나 하고 진휼 정사에 실효가 없으며,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지 않은 채 공미(貢米)를 독촉하여 거두어들였습니다.……'라고 하니, 감사가 바야흐로 사직 상소를 올려 스스로 해명하였습니다. 사간 이수인의 이러한 행동이 어떠합니까."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은 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다. 고인의 책을 읽고 얻은 것이 또한 많으니, 반드시 의리에 합당한지를 본 뒤에 군주에게 말해야 할 것이다. 다만 도덕과 신의에 대한 말을 진달하여 군주의 덕행을 증익하는 것은 비록 산림(山林)에서 출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혹 아뢸 수 있거니와 남의 장단점과 시비를 논하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네."라고 하였다.5월 7일 을묘(乙卯) 소음(少陰)이문석(李文碩)에게 편지를 보내 떠나는 길을 위로하였다. 또 별구(別句) 세 구절을 부쳤다. 첫 번째는 '남쪽 교외에 적막한 한 초가집이 있네. [南郊寂寞一茅廬]'라는 구절이고, 두 번째는 '동호의 승경은 동쪽 지방에서 독차지 하였네.[東湖形勝擅東隅]'라는 구절이고, 세 번째는 '지각에 차이가 없는 것은 정심에 달려있네.[知覺無差在正心]'라는 구절이다. 이문석이 어제 작별을 고할 때 마음에 새길 말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끝에 언급하였다.저녁에 갑자기 시구를 얻었다.비가 그치자 푸른 하늘 광활하니흰 구름이 먼 산에 생기네외로운 촌락에 날이 저물려 하니나무 끝에는 새들이 집으로 돌아오네이어서 스스로 풀이하기를 "비가 그쳐 하늘이 광활하면 도체(道體)의 광대함을 안다. 구름이 먼 산에 생기면 생의(生意)가 무궁하다는 것을 안다. 외로운 촌락에 날이 저물면 이 몸이 늙기 쉬움을 안다. 나무 끝에 새가 돌아오면 이 마음 귀착할 곳을 깨달을 것이다. 이 시는 대개 눈에 들어오는 사물로 인하여 절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통하여 구가 이루어졌지만 깊이 생각하면 또 이처럼 음미할 것이 있다. 이 시는 성정(性情)에서 발한 것이고 성정은 천리(天理)에서 근본한 것이니, 오묘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5월 9일 소음(少陰)낮에 퇴계의 도산시(陶山詩) 서를 읽었다.42) 나도 모르게 갑자기 너무나 사모하는 마음이 일었다. 이어서 절구 1수를 지었는데 "흰 돌 펼쳐진 맑은 시내는 광풍제월 사이에 펼쳐지네.[白石淸溪光霽間]"라는 구절이 있다.43)5월 13일 신유(辛酉) 소양(少陽)새벽에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여니 맑게 갠 하늘 푸르고, 바람과 이슬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흰 구름이 산을 가리고 자는 새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일체의 경계가 아득한 가운데 오직 새벽닭이 꼬끼오 하며 서로 화답할 따름이었다. 초연히 인간 세상을 굽어보니 세속의 밖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입으로 읊조려 시를 지었는데, "원기가 충만하여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네.[元氣淋漓露濕天]'라는 구절이 있고, 또 '이슬이 쓸쓸히 내리는 가운데 천지가 광활하네.[露氣凄凄天地空]'라는 구절이 있다. 아침에 차를 마시고 '잣나무 잎으로 차를 끓이니 안개가 피어오르네.[柏葉煎茶氣作霞]'라는 구절을 짓고, 또 솔잎을 복용하고 '늠름하게 곧은 마음 눈 속의 청청한 자태일세.[凜凜貞心雪裏顔]'라는 구절을 지었다.5월 14일 임술(壬戌) 대양(大陽)안일대(安一大)가 '천(天)' 자, '원(圓)' 자 운으로 시를 지으니, 그 운을 써서 절구 1수를 지었는데 '천군이 높이 앉아 단전을 세우네.[天君高拱立丹田]'라는 구절이 있다.5월 15일 계해(癸亥) 소양(少陽)새벽에 일어나려 할 때 절구의 시를 지었는데 '지게문과 창문 굳게 닫혀 어둑어둑 밤에.[戶窓深鎖夜茫茫]'라는 구절이다.낮에 안일대(安一大)로 하여금 베로 만든 관(冠)에 검은 물을 들여 직접 단정하게 여며 쓰게 하였으니, 그 관을 '양의관(兩儀冠)'이라고 하였다. 인하여 〈관설(冠說)〉을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 1폭을 사용한다. 그 길이는 머리를 두를 수 있을 만큼에다 1치 8푼을 남긴다. 1치 8푼으로 첩자(㡇子)를 만든다. 첩자의 양식은 4푼 반을 일으킨 다음 오른쪽으로 접고, 4푼 반은 왼쪽으로 접는다. 실로 꿰매어 고정시키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두니 만들어진 첩자는 9푼과 흡사하다. 아직 첩자가 이루어지기 전에 베의 폭 양쪽 변과 양쪽 끝을 포개어 안으로 향하게 한 다음 폭의 한 변을 돌려 첩자를 만든다. 이마의 양쪽 눈썹 위에 맞추고 그 나머지를 머리 좌우로 둘러 뒤쪽 머리에 이르러 꿰매어 그 끝을 합한다. 실로 매어 위쪽 변에 연결하여 꿰맨다. 앞면의 첩자는 그 길이가 관의 가운데 까지 와서 가로로 두 가닥으로 나누어 각각 위쪽 양 모서리에 이른다. 양쪽 모서리에 미치기 전에 또 나누어 두 가닥을 만들고 두 가닥 끝은 두 갈래로 비스듬히 모서리를 만들면 좌우로 모두 사각이 된다. 합하여 논하면 첩자의 9푼은 태극(太極)을 본뜬 것이다. 1첩(㡇)의 끝을 나누어 두 가닥으로 만든 것은 태극이 양의(兩儀)44)를 낳은 것을 본뜬 것이다. 양쪽 가닥을 나누어 네 가닥을 만든 것은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은 것을 본뜬 것이다. 전후 4엽(葉)은 사시(四時)를 본뜬 것이다. 그 높이가 1자 2치인 것은 12월을 본뜬 것이다. 나는 태극의 체(體)가 확립된 뒤에 양의와 사상이 나누어지고, 양의와 사상의 도가 행해진 뒤에 사시와 12월의 공이 이루어지고 만물이 각각 본성을 따라 천지의 도가 이루어진다고 여겼으므로 합하여 '양의관(兩儀冠)'이라고 하였다. 100년 사이에 나의 원복(元服)45)을 만들어 그 머리에 갓을 썼으니, 이름을 돌아보고 의리를 생각하여 내 마음의 태극에서 돌이켜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갓이 완성되자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 것이 예이다. 그대는 어찌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을 입지 않고 마음대로 갓을 만드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1000년 뒤에 그 제도를 잘못 전하여 참되지 않은데, 더구나 옛날과 지금은 풍속이 달라져서 놀랄 만큼 괴상해졌다. 이 때문에 부자(夫子)가 봉액(縫掖)과 장보(章甫)를 지역에 따라 바꾸어 썼으니,46) 이는 풍속과 너무 괴리되어 놀라게 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만든 갓이 비록 옛 제도를 계승하지 못했지만 그 취한 상(象)은 모두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 있고 기수(氣數 길흉화복의 운수)가 운행하는 것이다. 평상시 머리에 써서,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묘미와 본체는 하나로되 만 가지로 형상이 드러나는 도를 상상하면 절로 내 마음의 천리에 묵묵히 부합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내가 이 관을 만든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관은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사시(四時), 십이월(十二月)을 본뜬 것인데 굳이 '양의(兩儀)'라고 명명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태극의 이치는 매우 은미한 것이다. 사상, 사시, 십이월은 기(氣)의 분수(分殊)47)이다. 양의와 같은 것은 이(理)가 이미 나누어져 사상(四象)과 시세(時歲)가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통틀어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여 본받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베 1폭을 사용하여 검은 물을 들이면 힘이 덜 들고 마련하기 쉽고, 뜻은 심원하고 이치가 갖추어지니, 가난 속에서 질박함을 숭상하는 곤궁한 선비에게 알맞다."라고 하였다. 힐난한 자가 물러나자, 아울러 그 말을 기록한다.5월 19일 을축(乙丑) 소양(少陽)집에 흰 염소가 있는데 암컷과 수컷이 교배하여 검은 염소를 낳았다. 온 몸이 청흑색이고 흰 털이라곤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모든 사물은 부모의 혈기를 받아 태어나는데 흰 염소가 검은 염소를 낳은 것은 어째서인가? 이 또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자가 궁구할 수 있는 사물의 지극한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근본을 찾아 궁구하여 말하기를 "천하에는 다만 한 음(陰)과 한 양(陽)이 있을 따름이다. 저 날짐승은 양물(陽物)이고, 달리는 짐승은 음물(陰物)이다. 음은 변하지만 양은 변하지 않으므로 무릇 나는 새의 색은 모두 일정한 색이 있다. 이를테면 까마귀[烏], 까치[鵲], 기러기[鴈], 오리[鴨], 제비[鷰], 참새[雀], 해오라기[鷺], 황새[鸛] 따위가 모두 이것이다. 또 양 가운데 음인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병아리[鷄雛]와 같은 것으로, 검은 닭이 흰 병아리를 낳는 것이 이것이다. 무릇 달리는 짐승은 모두 그 형체와 색을 바꾸니, 이를테면 개[犬], 말[馬], 고양이[猫], 소[牛], 염소[羔], 양[羊] 따위가 이것이다. 또한 음 가운데 양인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사슴[鹿], 노루[獐], 여우[狐], 이리[狸]와 같은 따위로, 모두 일정한 색이 있는 것이 이것이다. 가축 가운데 일정한 색이 있는 경우가 있으니, 털이 달린 부류로는 돼지[猪]가 있고, 깃털이 달린 부류로는 오리[鴄]가 있다.48) 털이 달린 산짐승은 일정한 색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 또한 음양(陰陽)의 뜻이다. 오직 양기(陽氣)가 귀하므로 양기를 많이 품부받은 금수의 경우는 암수에 정한 짝이 있다. 음기를 많이 품부받은 금수의 경우에는 암수에 정한 짝이 없으니, 제 짝이 있는 경우에는 일정한 색이 있고, 제 짝이 없는 경우에는 일정한 색이 없다. 양은 귀하고 음은 천하며, 양은 바르고 음은 순일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저녁에 고요히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사람의 일신상 모든 행위가 모두 한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이 청명하면 화평하지 않은 일이 없고, 마음이 혼잡하면 어지럽지 않은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유가의 사업은 전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다. 천고의 성현이 경계한 말씀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요체는 '마음을 다스린다.[治心]'라는 2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사서(四書)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사서 가운데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더욱 긴요하다. 송(宋)나라 학자의 설 가운데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이 가장 긴요하다. 《대학》, 《중용》, 《심경》, 《근사록》, 가운데 또한 긴요한 몇 마디 말이 있으니, 위로는 요순(堯舜)의 한 '중(中)' 자49) 및 부자(夫子)의 이른바 "하나로 관통한다."라는 묘리50)를 접할 수 있다. 일찍이 그 가르침을 받았으니 내 마음의 정중(靜中)한 묘리와 묵묵히 부합한다면 천고에 전해지지 않은 비결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매양 여기에 마음을 기울이지만 더욱 깨닫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요사이 아침저녁 사이에 확실치는 않으나 참 묘미를 환하게 터득한 곳이 있는 듯하였다. 비록 공부가 익숙하지 않아 갑자기 잃어버리는 탄식이 있지만 멀지 않아 다시 올 조짐이 있었으니, 주자(朱子)가 '오래도록 힘을 쓰다가 하루아침에 환하게 관통한다.[用力之久 一朝豁然貫通]'라고 한 말을 이로 인하여 혹 그 만에 하나라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이러한 곳에 이르러 한 발을 잘못 내디디면 곧 바뀌어 불교의 교리에 빠질 것이니, 알지 않아선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한다.이날 홍자일(洪自一)이 금성(錦城)에서 돌아왔다. 전 현감 나염(羅袡) 자상(子尙)이 오늘 죽었다고 한다. 자상은 바로 나의 외가 경주 부윤(慶州府尹) 나공(羅公) 휘 소(素)의 아들이다. 은진현(恩津縣),태인현(泰仁縣),운봉현(雲峯縣) 등지에서 수령을 지냈는데, 재능으로 이름이 났고 고을을 다스릴 적에 치적이 있었다. 운봉 현감이 되었을 때 잠시 남원(南原) 수령을 겸하여 맡았는데, 남원의 백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감사에게 모두 청하여 나후(羅侯)를 태수로 임명해 주기를 원하였으니,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서필원(徐必遠) 군이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나 군(羅君)을 으뜸으로 여겨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오. 다만 고을이 작은 것이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서군은 평소 뜻이 높아 남들을 허여하는 경우가 적다고 일컬어지는데 이처럼 칭찬하였으니 그 사람됨이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애석할 따름이다.내 갑오년(1654, 효종5)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여염집에 역병이 돌았는데, 나군이 먼저 와서 문상하고, 부수(賻襚)51)를 마련해 주었으니, 그 후의는 숭상할 만하다. 지금 그 부음을 듣고 또한 슬퍼할 따름이다.5월 20일 무진(戊辰) 소양(少陽)낮에 종갓집 숙모 오씨(吳氏)의 부음을 듣고【바로 7촌 숙부 동추공(同樞公) 휘 김전(金悛)의 처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했을 때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공만 홀로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20년 동안 이역(異域)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수은(睡隱) 강항(姜沆) 공들과 절개를 저버리지 않고 귀향하였다. 건장한 다섯 아들을 낳아 자손이 끊기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의 절의와 용기, 정성과 효성이 드러난 결과이다. 스스로 편찬한 문집 1권이 있다. 외손인 간의대부 나만성(羅晩成)이 서문과 묘지명을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진다.】 즉시 상차(喪次)로 달려갔는데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하여 흑립(黑笠)과 소대(素帶) 차림으로 들어가 곡하고 재배하였다. 마침내 나와서 변복(變服)하고는 상주를 조문하였다. 셋째 아우 김한걸(金漢傑)이 초종(初終)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마시게까지 하였는데, 비록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그 효성은 숭상할 만하다. 나는 그가 이로 인하여 생명을 해치지 않을까 근심하여 직접 그 손가락을 펴서 보니, 네 번째 손가락이 다 잘렸다. 즉시 사람을 시켜 붕사(朋沙)를 구하여 발라 주게 하였다. 대개 이 아우는 평소 효성이 남달랐다. 오씨는 모두 다섯 아들을 낳았다. 모두 다 분가시키고 김한걸의 집에서 봉양을 받으며 살았는데, 오씨는 늘 효성으로 봉양한다고 그를 칭찬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러한 행실이 있었으니, 사람이라면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되지 않겠는가마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사람은 만에 하나도 없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자 하지 않겠는가마는, 자신을 희생하여 효도를 다하는 것으로 말하면 옛날에도 이러한 사람은 드물었다. 다행히 우리 가문의 형제 사이에서 이러한 사람을 보니 공경할 만하다. 일가 사람이 다 모여 장사를 지냈다.5월 23일 신묘(辛卯) 대양(大陽)상차(喪次)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좌랑 임위(林㙔)에게 인사드렸다. 운봉(雲峯) 나염(羅袡)의 상에 가서 조문하니, 그 아들 나두삼(羅斗三),나두장(羅斗章), 그 아우 도사 나진(羅袗)이 조문을 받았다. 조문한 뒤에 그대로 수운정(峀雲亭)으로 가서 경주공(慶州公)을 위문하였다. 그 차자(次子)인 정읍(井邑) 수령 나반(羅襻)이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여든 노인이 울면서 슬픈 마음을 비치니 보기에 참담하였다.성암(惺菴) 이수인(李壽仁) 공이 별세하였다고 한다. 공은 청련공(靑蓮公) 이후백(李後白)의 증손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벼슬하지 않았고, 두 조정에 걸쳐 정언에 제수되었지만 직임에 나아가지 않았고, 효종조(孝宗朝)에 수찬, 교리, 집의 등의 직임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초기에 선왕의 상차(喪次)에 달려가 조문하고, 이어서 국장을 치른 뒤에 부수찬에 제수되었지만 숙배하지 않고 돌아왔다. 올봄에 또 사간에 제수되었지만 사직 상소를 올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일찍이 월출산(月出山) 아래 안정동(安靜洞)에 집을 지어 방 안 가득히 책을 쌓아 두고 고요히 정양(靜養)한 지 무릇 20년인데, 역학(易學)에 더욱 힘을 쏟았다. 내가 일찍이 가서 절하고 《계몽(啓蒙)》52)을 논하고, 또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가운데 의심나는 부분을 질정하였다. 말이 카랑카랑하고 동정(動靜)이 편안하니, 참으로 세상을 피해 행실을 깨끗하게 한 선비였다.53) 다시 월출산의 산사에 함께 가서 조용히 학문에 대해서 토론하기를 기약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약 강론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 명칭을 싫어하니 비웃음이 따를 것이다. 그 명칭을 버리고 그 실지를 얻어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면 참으로 즐거운 점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우리들이 힘써야 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밖을 제어하는 것은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공자와 안자(顔子)의 학문은 먼저 시청언동(視聽言動)을 삼가 하였고,54)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은 더욱 내면과 외면을 함께 기르는 데 삼가였으니, 어찌 세상 사람들을 도외시한 채 성현의 학문으로 내면을 수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개 공은 마음이 염정(恬靜)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지만 혹 외면을 단속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내가 넌지시 풍자한 것이다. 공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 뒤에 나도 병이 많아 오히려 산방(山房)에서 강론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서로 편지로 학문을 논할 따름이었다. 지금 그 부음을 들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이날 정읍 수령 나반(羅襻)과 문답하였다. 나반이 말하기를 "세속에서 초상이 나면 조석상식(朝夕上食)에 고기반찬을 올리지 않습니다. 우리 집안에서도 선대로부터 모두 소선(素膳)을 올렸으니,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예(禮)에 조석전(朝夕奠)에 포해 (脯醢)를 쓴다고 하였으니, 상식에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듯하다."라고 하였다. 나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세속에서 소선을 사용하는 것은 무슨 도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옛사람은 반드시 본 것이 있어 소선을 올리는 풍속을 만들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옛날에 지방의 풍속이 전적으로 불교의 예법을 따랐다. 사람이 처음 죽으면 재를 올려 승려에게 밥을 먹였으니,55) 이 풍속은 대개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유자의 집안은 지방의 풍속을 따라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나반이 수긍하였다.5월 25일 계유(癸酉) 대양(大陽)집안의 생질(甥姪) 문봉의(文鳳儀)가 영암(靈巖)에서 돌아와 신성필(愼聖弼)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편지 내용은 제 9권 〈서찰편〉에 자세히 보인다.】6월 22일 기해(己亥) 대양(大陽)남자종 말생(末生)으로 하여금 두레박으로 샘물을 퍼 올리게 하여 며칠 동안 애써서 겨우 몇 되지기의 땅에 모내기를 하였다.56) 이를 기록하여 농가의 재앙이 극심함을 드러낸다. 대개 5월 2일 비가 내린 뒤에 아직 쟁기질할 정도의 비가 내리지 않아 검붉게 타 버린 땅이 1000리이니 그 참담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우선 오늘 본 것을 가지고 말하면 백성들의 목숨이 가을이나 겨울이 되기 전까지 붙어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백성들은 서로 골목 사이에 마주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따름이다. 이러한 때 백성들의 윗사람이 된 자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지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백성들을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수령과 관찰사의 직임을 맡은 자는 바야흐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날마다 형륙(刑戮)을 가하면서 사랑하거나 돌볼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불쌍한 이 죄 없는 백성들은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나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 여기에 기록한다.6월 29일 병오(丙午) 대양(大陽)낮에 가랑비가 동남서쪽에서 내리다가 순식간에 그치니, 백성들의 정상이 더욱 가련하다. 정재(鄭榟)가 와서 말하기를 "이달 25일에 능주(綾州) 어느 읍의 깊은 우물에서 얼음 두 덩어리가 얼었는데, 길이가 1자 남짓이었다. 물을 기르는 사람이 보고 많은 사람이 모여 보는 가운데 끄집어내어 손바닥 위에 올리니 갑자기 녹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올해처럼 큰 가뭄은 고금에 드문 변고이다.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목숨이 아침에 저녁을 보장할 수조차 없는데 6월에 얼음이 얼었으니, 이것이 어떤 일의 조짐인가. 두렵고 두렵다.7월 1일 무신(戊申) 대양(大陽)오래도록 너무나 가물어 농토가 황폐해졌다. 더구나 여러 해 계속 혹독한 기근이 들었으므로 모든 백성이 다급한 나머지 토지와 재물, 노비, 노리개를 파는 자가 길에 가득하였지만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마다 틀림없이 죽게 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보기에 참담하였다. 아, 평생 독서하였으니 어찌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구제할 방법이 없다. 남을 구제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처자식조차 오히려 구제하지 못하여 굶주림에 울부짖는 소리가 집 안에 가득하니 어찌 한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옛날 이윤(伊尹)은 한 백성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한 백성을 하나라도 보면 마치 자기가 그들을 떠밀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것처럼 여겼으니,57) 학자는 마땅히 이윤의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하지만 재주가 없어 시행하지 못하고 뚜렷한 행실이 없어 알아주지 않으니 어찌하랴. 날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며 탄식할 따름이다. 오늘 장차 배고픔을 면하려고 종을 시켜 남에게 전답을 팔게 하였는데 팔지 못하고 왔기에 느꺼운 마음이 들어 기록한다. 자신의 궁핍함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요, 시절을 아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3일 경술(庚戌) 대양(大陽)새벽에 전 감찰 홍종문(洪鍾聞)과 관정(館庭)에 들어가 배곡례(拜哭禮)를 행하였으니, 바로 선왕의 담제일(禫祭日)58)이다. 이날 전 한성부 우윤 신천익(愼天翼) 공의 부음을 들었다. 공은 감사 신희남(愼喜男)의 손자이다. 공의 선고(先考)가 자식이 없어 선비(先妣) 아무개와 함께 지리산(智異山)에서 기도드리고서 잉태하였다. 선비가 푸른 새 한 쌍이 품속에서 나와 한 마리는 하늘로 오르고 한 마리는 바다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윽고 출산하니 바로 쌍둥이였다. 장자의 이름을 천익(天翼), 차자를 해익(海翼)이라고 지었으니, 꿈에 나타난 징조를 따라 지은 것이다. 형제는 어릴 때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았다. 어려서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에게 배웠는데 아이 때부터 사부(詞賦)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맏이는 20세에 급제하였고, 차자는 21세에 알성시(謁聖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차자의 관직은 원외랑(員外郞)에 이르렀고, 26세의 나이에 졸하였다. 다음은 차자가 졸한 뒤의 이야기이다. 원주(原州)의 문관 최문환(崔文煥)과 아우 최문욱(崔文煜)도 어릴 적에 또한 문사(文詞)에 능하였다. 하루는 형제가 함께 고을의 향교에서 노닐었다. 달 밝은 밤에 최문욱이 나가서 마당을 거닐다가 홀연히 몽롱한 상태에서 어떤 산 위에 이르자, 문사(文士) 10여 인이 둘러 앉아 있었는데 말과 모습이 맑고 준수하였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최문욱에게 말하기를 "나는 영암(靈巖)의 신해익(愼海翼)이다. 나의 형이 지금 영암에 있으니, 그대가 나의 소식을 내 형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최문욱이 "예예"라고 대답하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최문욱의 집 사람들이 온 산천을 뒤져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니 최문욱이 덩굴 위에 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옷자락을 보니 둥근 뭉치 하나가 있었다. 깨뜨려 보니 천에 가득 사(辭)가 적혀 있었는데, 바로 신해익의 필체였다. 원주와 영암이 멀리 떨어져 있어 최문욱은 신해익이 누구인지 들은 적이 없다. 신천익 공이 이 이야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찾아서 그 글씨를 보니, 과연 바로 동생의 필체였다. 그 뒤에 최문환은 급제하였고, 최문욱은 진사시에 합격한 다음 더 이상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이 일에 대해서 나는 참봉(參奉) 최익(崔瀷)에게 들었다. 최익은 신씨와 한 동네 사람이어서 전말을 자세히 아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뒤에 최문환이 영암 군수(靈巖郡守)가 되자 최문욱이 따라갔다.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이 사실인지 묻자 최문욱이 자세히 말하였다고 한다.대개 이 일은 괴이하고 허황한 듯하다. 그리고 공에게 평소 청요직에 오르기를 기대하였지만 한번도 출사하지 않았다. 명성이 당대에 자자하였지만 보통 사람처럼 마음껏 술을 마시고 청담(淸談)59)하며 작은 절개에 구애받지 않았다. 문을 닫아걸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으니 얼굴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혹 사람을 만나면 즉시 술을 가지고 오라고 하며 함부로 말하는 것이 방약무인(傍若無人)하였다. 시사에 대해 언급하면 괴이하고 허황된 말로 장난삼아 대답할 따름이었다. 이것으로 본다면 그가 자처한 도리에 필시 뜻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 부음을 듣고 고인(高人)이 세상을 떠난 것을 개탄하고 아울러 그 이야기를 기록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공의 이력을 알게 하고자 한다.7월 7일60) 갑인(甲寅)한밤중에 비가 내려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을 먹은 뒤에 비가 내렸다. 대개 5월 2일 이후로 오늘 내린 비가 자못 세찼다. 다만 아직 논에 심지 못한 못와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콩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내가 방서(方書)에 적힌 속담을 보니 뚜렷한 효험이 많았다.61) 방서에 "입춘(立春)이 드는 날짜가 천간(天干)으로 갑(甲)과 을(乙)에 해당하면 풍년이 든다.[立春日甲乙 則歲豐]"라고 하였다. 또 "여름 초하룻날에 비가 내리면 배가 마을까지 들어온다.[夏上甲雨下 則船入村巷]"라고 하였다. 올해 1월 5일 을묘일(乙卯日)은 바로 입춘(立春)이고, 5월 16일 상갑(上甲)62)에 잠깐 비가 내렸지만 모두 효험이 없었다. 속담에 "정월 보름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면 조만간 풍년이 든다.[元望月光澤 早晩占豐]"라고 하였는데 올해 정월 보름에 달이 떴으므로 농민들은 풍년의 조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속담에 "양맥(兩麥 보리와 밀)은 추수를 할 수 있다.[兩麥占西成]"라고 하였는데, 올해 보리농사가 풍년이 들었다고 할 수 없으니,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 앞으로 옛말이 이처럼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한번 맞는 경우는 있다. 속담에 봄비가 자주 내리는 것으로 가모(家母)의 손이 커지는 것에 비유하였는데, 올봄에 봄비가 매우 자주 내려 그 말이 부합하였으나 더러 부합하지 않는 해가 있다.낮에 문입주(文入柱) 등이 방문하여 전 판서 조경(趙絅)이 작성한 상소의 초고를 볼 수 있었다. 이는 오랜 가뭄으로 상께서 정전(正殿)을 피하고 조언을 구하자. 조경이 성지(聖旨)에 응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두려워하고 삼가서 재변을 경계하시니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만 유독 심리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윤선도의 죄악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개하는 것이고 성상께서 통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조경이 도리어 감히 방자하게 두둔하여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여 현혹하였고, 끌어다가 비유하는 것이 음흉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왕명을 출납하는 도리로 볼 때 흐리멍덩하게 입계해선 안 되지만 우선 봉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이렇게 음흉하고 참담한 상소는 본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즉시 도로 내주라."라고 하였다. 처음에 예법을 논쟁하는 일로 인하여 계속 악화되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화란(禍亂)의 기미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차마 말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나라의 일이 망극하다고 할 수 있다.7월 12일 기미(己未) 소양(小陽)낮에 동남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온갖 봉우리가 빼어남을 다투어 짙은 옥색을 띠었다. 바라봄에 예사롭지 않아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옥처럼 기이한 봉우리 수천 개가 솟아 남극성의 반허리와 나란하네.[玉作奇峯列百千 平排南極半腰天]"라는 구절이다.7월 13일 경신(庚申) 소양(小陽)한밤중에 일어나 보니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여 달의 기상이 담박하였다. 입으로 한 구절을 읊조렸으니, "폭풍우 몰아쳐 신거(神車)63)를 움직이네.[顚風急雨運神車]"라는 구절이다.7월 14일 신유(辛酉) 대양(大陽)낮부터 별안간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다가 저물녘에 그치니 달이 밝고 상쾌하였다. 또 절구 1수를 지었으니 "용이 창해의 물결을 몰아쳐 큰 바람을 타고 가네.[龍驅滄海駕雄風]"라는 구절이 있다.7월 15일 임술(壬戌) 소음(少陰)신성필(愼聖弼)이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또 소은(素隱) 신천익(愼天翼) 공의 부음을 알렸는데 6월 15일에 별세하였다고 한다. 또 그 장인 성암(惺菴 이수인(李壽仁))의 상을 애통해하였으니, 말뜻이 간절하였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9권 〈서찰〉에 자세히 보인다.】 낮에 '남국 고인 이미 하늘로 올랐네.[南國高人已上天]'라는 구절을 지었다. 이는 소은을 위해 지은 것이다. "바른 도가 전하지 않은 지 이미 백 년이 되었네.[正道無傳已百年]"라는 구절을 지었다. 이는 성암을 위해 지은 것이다.7월 28일 을해(乙亥) 소음(少陰)당질(堂侄) 김이상(履相)이 묻기를 "사람이 윤달에 죽으면 기제사는 본달에 붙어 있는 달에 지내는 것이 예법에도 분명히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기일에 윤달이 든다면 윤달에 제사 지냅니까?"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이는 변례(變禮)이고 옛 예법에는 상고할 것이 없어서 억측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윤달이라는 것은 천시(天時)의 일정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본달에 제사 지내야 할 듯하다."라고 하였다. 正月初九日。 己未。 少陽訪尹保氏兄弟于蓬山山室。 尹公與兄儆。 築室于其先塋之下。 兄弟率妻子卜居。 一室相對。 友于耽樂。 不出洞門。 今十有餘年。 年亦七十矣。 二人雖非學古踐跡之士。 志行之高有可尙者。 余往訪焉。 命酒。 穩話移時而來。 山趣頗有動人意思者。十一日。 辛酉。 少陽往見主倅。 主倅設酒穩話。 聞自上蠲減海邑災損人民今年田稅。 以賑飢民。 山邑則減上細布。 其人木方物等賦云云。 南平名雖山邑。 災損與海邑無異。 本道監司金始振。 別啓請與海邑一體施行。 自上下該曹。 戶判許積防啓。 人民㤪之云。 聞吏曹判書宋浚吉。 在家上疏辭職。 上命遞云。 主倅又言: "余欲括富民粟。 救濟飢民。 其事已定奪。 而別有司約正輩。 憑依官令。 私斂民財者。 多有之。 余懲是。 方欲革破括粟救民之令矣。" 余答曰: "分出富民之財。 救恤將死之民。 亦隣里相救之義。 今仍約正之濫而廢之。 則無乃近於仍噎而廢食耶?" 又曰: "歲饑民困。 主少國疑。 世臣連喪。 國將奈何?" 主倅曰: "自上蠲減賦稅。 爲民撫養之道至矣。 但十六司貢物。 則不論歲之豐凶。 而一定無進退。 今年田結過半損縮。 而各司貢物之納。 依前無減。 守令無路變通。 而飢民坐受其苦。 可憫可憫。" 余曰: "如此之事。 未可報使通變乎?" 曰: "監司雖啓請。 該司例必防啓。 奈何奈何?" 余曰: "聞我朝祖宗朝。 田一結賦米一斗。 經一年。 無他役矣。 海州地有其故事。 栗谷建請行之八方。 竟不得行。 今之大同。 則一結十三斗。 而亦不足於國用云。 何歟?" 主倅曰: "世變可知矣云。"二月初八日。 戊午。 風寒午潭陽居呂益吉來見。 呂云: "潭陽士人柳震碩。 眉庵之曾孫也。 年今二十有餘。 篤志古學。 結屋于雲巖李公興浡之隱處。 讀書爲學。 不出山口。 今數年云。" 余聞斯人之名久矣。 仍其言而記之云。二十七日。 丁未。 少陽三學齋儒生等。 請書齋規儀。 乃敍二十四條而贈之。【詳見經義說】二十八日。 戊申。 少陽余於春夏。 例患上氣。 氣神昏眩。 口焦體勞。 頭重脚憊等症。 種種不佳。 余深憫之。 年前得修養要訣一冊於靜軒高公之舊庄。 試用其法。 今年則氣頗小平。 無乃得其驗耶? 今朝點檢神氣。 仍記之以愼疾之戒云。 靜軒乃余之妻外祖諱循厚。 霽峯之第三子。 精於禮學。 氣像古朴。 行操端重。 眞古之學者。 余少登其門。 觀感實多。 而倏焉二十年。 鬂髮欲斑。 而病宂懶習。 一無小成。 言念及此。 不覺浩歎也。 公官至刑曹正郞。 年七十二。 而卒於庚辰十二月十日。 平生操履端方。 守貧不屈。 緇冠布褐。 糲飯茅屋。 未免飢寒。 而怡然不以慮。 廷臣交薦。 職命屢下。 而竟不起。 丁卯胡亂。 奮然以出義勤王爲志。 與士人安邦俊趙坪等。 召募義士。 方欲赴難而死於節。 辭義凜烈。 有不可犯之氣象矣。 俄而亂平之報至。 敗師而歸。 終身恬靜。 不動聲色。 守道而歿。 嗚呼! 非有道之士。 而能然乎? 深居僻巷。 不求人知。 世未有知其操者。 身後無聞於人。 可歎也。 仍念及而興感。 記于此。二十九日。 己酉。 大陰靜坐看書終日。 仍思人之病痛。 都由氣質上出。 若按伏得這般氣上罪過。 使氣之濁者淸。 偏者正。 躁者靜。 急者緩。 懶者勤。 隨其所偏。 一歸於中。 氣之中。 性自然復其中矣。 余之氣質病痛。 每生於昏弱懶濁。 又麤而不細。 或和則易流。 急則易暴。 至於兩斧之害。 亦未免牽慮。 今麴糱之嗜。 斷念有年。 若夫遠色之戒。 雖每用鋤割之功。 而暮歸喜獵之念。 或不能不萌于中。 此皆氣之所使。 從此定可猛省痛絶之。 仍記于此。 自午後雨作。 戌時地震。 終夜雨不止。 春雨之數。 農談忌之。 地震之變。 《春秋》所書。 爲民爲國。 其無憂乎?三月十七日。 丙寅。 大陰尹俶以太守言來言曰: "當此大饑之歲。 十六司貢物。 無一毫蠲減。 濟用監正布。 方在輸納。 而本縣災結外所餘者。 僅二百夫。 而當平歲貢物之元數。 公私俱竭。 無由出辦。 今欲仍人民等呈狀。 轉報監司。 以爲入啓。 姑請待秋輸納。 而難於措辭。 請得一轉語以助之。" 余對曰: "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必有所濟。 方今生民之困極矣。 余安敢以他辭辭也。" 遂構狀辭以送之。 聞監司金公始振。 以祭無等山來光州。 蓋以民間多厲疫來祭云。十八日。 丁卯。 少陰尹生先夔文君晩郁來見。 聞綾州士人及本縣士人等。 會于熊岾寺。 通文于道內及長興。 蓋長興人金公光遠。 配享于靈川書院。 物論短金公。 欲仍書院重修。 仍出其位板。 文致郁李漙等。 先發通文。 金公子孫又囑生員曺德吉。 通文于列邑。 告其毁出之非義。 當時配享之論。 首發於安牛山邦俊。 故牛山子若孫輩。 勸起綾州士人。 通文伸救云云。 余嘗執其中。 而論之曰: "金公之出處言行。 余雖未能詳知其首末。 不敢輕議。 然書院之名。 則所關至重。 必也有功於吾道。 任重於斯文。 爲一邦之宗儒。 作百代之師表。 士林欽仰。 公論齊發。 然後立廟妥靈。 一以崇道學之先正。 一以振儒林之元氣。 傳之百代而無愧。 倡示天下而有辭。 今則不然。 一名之士。 稍有硜硜之行。 而其子孫枝屬。 蟠據於一鄕。 則遽出享祀之論。 遂建巋然之宇。 諂祀非禮。 擧世滔滔。 彼所謂先儒者。 雖道德不及於眞賢。 廉恥一念。 必有過於凡人。 倘使已死而有知。 寧不自愧於心。 而安受其非禮之享乎? 况世習日降。 士風澆漓。 春秋之祭。 名之曰享賢。 而屯聚廟宇。 醉飫終日。 喧呼叫讙。 放縱自恣。 仍之以爭鬪日起。 讎㤪遽作。 其流之弊。 可勝言哉! 世道至此。 誰能挽回而廓淸之耶? 悲夫!" 夕宿于三學齋。 諸生三十餘人會宿。 曉鷄初鳴。 諸生起而講學。 頗有菁莪之樂矣。二十八日。 丁丑種柳于門前及大小陰陽四泉之邊。 幹其事者。 乙生及道乙伊兩童奴也。 四泉及岸邊者。 通三十餘根也。 不知何時綠陰成蹊。 隱映園林。 而護我門戶。 怳然有風來月上之懷也。 令人不覺起意焉。 余自少酷有山水之癖。 見一山一石園林澗泉之勝。 終日忘歸。 歸來數月。 亦不覺意牽而神。 半世貧病。 兼之以憂患。 尙未得一山一水之勝而卜居焉。 吁可嘆矣! 雖然。 郊野田園。 亦足以藏棲遁之跡。 而寄棄世之懷。 今新卜。 雖無山水形勝。 而郊原泉脉。 若加粧點。 庶有荷鋤帶月之興。 而民田相雜。 無資可買。 而俗亦不佳。 長懷茂林崇山。 不勝鳥歸之情。 而無可爲矣。 奈何奈何? 雖然。 大隱隱城市。 苟有吾之至樂。 自有眞得之妙。 可樂於人不及知之間。 而至於篤信無疑之地。 則彼山水亦一外物耳。 豈可牽懷於其中也哉? 自此可不勖哉? 仍記自警焉。四月初九日。 戊子聞主倅以飢民賑給事。 去于將多勿坪。 今年飢饉。 振古所無。 號饑官門者。 日數百人。 塡咽於官道。 太守定十日一開倉門賑救之。 設幕于官庭。 作粥而食飢民。 飢民之就食者。 日三百餘人。 預作太醬七十餘甕。 貿海菜百餘石。 作羹食之。 飢民大悅。 又於兩大路上。 令僧徒設幕作粥。 他鄕流民之入境者。 賑救活之。 四方聞聲雲集者。 無數矣。 又慮農民不能遠來官門。 親駄米粟。 而往賑之。 邑民誦恩不已。 太守之愛民如此。 太守卽李侯晸也。十一日。 庚寅雲升于天。 細雨欲下。 微風不動。 草木枝葉皆踈直上向于天。 有若冀蒙雨露之意。 細看其氣象。 令人起感發之意。 植物之無知者。 而亦有感應於二氣相交之際。 况此有運動知覺。 而受性命於天者哉? 是日坐迎春齋。 令兒僕取小陽泉水。 和松葉一器而下之。 精神頗覺明爽矣。 余素多病。 探考方書。 節食服餌。 以養精神。 得服松葉法于《本草》。 服之有年。 今日覺有興趣。 仍記于此。 是日空齋孤坐。 闃無來人。 春鳥聲嬌。 趁簷尋巢。 飛繞於楹棟之間。 而前山邱隴。 菜童牧竪。 短歌輕笑。 往來相戲。 耕夫野老。 牽牛荷鋤。 相尋於野田草林之際。 此間儘有眞意。 靜觀不覺起感。 仍起逍遙于泉畔。 趁興而歸。 則空堂寥寂。 春日方午數秩書史。 自能捲舒於微風之過也。十四日是日南郊精舍乘茅于屋。 手治庭梅之雜茂者。 僮子掃庭。 小婢掃室。 庭宇無塵。 茅簷齊整。 靜對書冊。 益覺有味。 但歲饑民困。 滿目愁㤪。 田園之樂。 恐亦難得。 時未免出位之憂。 可嘆可嘆! 是夜吟成一絶。 有"亂叫群蛙說箇心"之句。 蓋前郊稻田新耕。 群蛙亂鳴。 潛思彼虫無知一物耳。 其鳴聲或作或止。 若有節次。 况其自得於溝瀆之間。 其鳴也必有其樂。 噪噪之聲。 亦若相道其心情者。 天機自動。 至發於聲者。 亦一箇心也。 這間眞箇意思。 暗有相感於知覺本源之地。 吾亦不覺自發於吟哦之間者。 亦可見物我之無間矣。 是所謂藹然天理。 隨事發見者也。 夜分就枕。 又成一絶。 有"調氣怡神整枕衾"之句。十五日。 甲午夜天月爽朗。 獨倚小窓而坐。 吟成一絶。 有"獨倚松窓夜已深"之句。十六日。 乙未淨掃庭宇。 塵事不有相撓者。 默坐一室。 靜對案上聖賢。 若此之際。 豈無眞境意思哉? 但懼守之未一。 物接之後。 易爲牽去耳。 無時無處。 而存此間氣象。 則於道庶有可入之徑蹊矣。 勉夫!二十三日。 壬寅喜雨新晴。 萬物皆有歡顔。 但飢歲食絶。 麥尙未登。 閭里之間。 滿目愁嘆。 余家素貧。 况値凶歉。 饘粥難繼。 則家屬或有慍見者。 余本心慮寬緩。 居産之間。 不爲掛意。 不以豐約爲欣慼。 然到此思之。 士夫之有家屬。 猶國家之有臣民。 爲君父而使臣民未免飢寒。 責有所歸。 爲家長而使家屬至於飢怨。 獨無惻隱哉? 古人簞瓢屢空。 而能得其樂者。 能令家屬喩於義。 寧飢死而無非義之慕故也。 今我之仁。 旣不能化僮僕至於義。 而飢寒困厄。 迫乎其身。 則非但於我心有不忍之惻。 僮僕之仍無恒心。 爲不善於隱暗之際。 安可保也? 爲今之計。 在平歲。 董令僮僕。 勤耕力穡。 令家間節用尙儉。 常蓄不虞之備。 免餓餒於凶歲可也。 然在吾之大本未立。 先事於營産。 計校豐約之念。 或作仍賓作主之勢。 則浸浸然流入於邪吝犯義之歸。 大可懼也。 故記于此。 以戒於嚴立本源之地。 然後推其餘以及於事務而無過不及之患云。 是日雨後。 風氣淸和。 牛眠橫坂。 而麥浪飜風矣。 鷺下平郊。 而稻田水漲矣。 足以敍田間之興致矣。 余近日每坐新齋。 見原野間。 有小鳥。 其鳴甚輕巧。 飛自草蓬間。 漸漸飛舞。 翻翻直向于天。 百般弄舌。 便捷輕姣。 其聲初暫低緩。 高極于天。 則節節細數。 細數之極。 則又旋旋飛下。 而其聲差緩。 至于地而止。 其名俗稱鍾至理鳥。 吾聞其聲。 有高下長短踈數之節。 其飛有周旋進退上下之漸。 看來亦有理趣。 仍思凡生天地之間者。 莫非理氣之發見。 而各有知覺。 屬氣。 知覺之本。 屬理。 乃天命之性也。 吾人與物。 本無殊也。 但有偏正之分而已。 雖然。 聲音出於心。 而運動由於氣。 旣有知覺。 故有運動聲音。 則彼物之有聲而鳴呼者。 必有意味。 而道其情者。 而但人不解聽耳。 夫人哀則哭。 樂則歌。 相逢而語其情。 讀書而長其聲。 我自各有其意。 而彼鳥獸。 亦不能解聽。 亦如人之不能解聽禽語也。 而其間至理所寓。 則彼與我無間也。 詩曰: "鳶飛戾天。 魚躍于淵。" 子思引是語。 發明君子之道。 亦有見乎此也。 是以古人。 聞鳳鳴上下。 而作十二律。 則鳳與此小鳥。 其爲鳥。 則一也。 其同得理氣而生。 亦一也。 何間焉? 古之至人。 見一物必窮其理。 羲之仍馬爲圖。 禹之見龜畫疇。 至於程子之見兎起數此也。 故余每見一微物聞一禽語。 未嘗不詳致意焉。 但恨見未透。 故理難窮耳。 今仍小鳥而謾記之。 又曰: "人知吾心之通乎天地。 周乎萬物。 無內外無彼此無物我。 同是一體之理。 則自然心不淺狹。 而器量亦宏大矣。 人徒知有我。 不知有物。 一身區殼之外。 氣全不通。 故心不廣而量小矣。" 午後有鄕中知舊者過門外。 不入相見而去。 是人曾與我相從。 而與我亦有姻婭之分矣。 昔或相從。 而今過門不見。 何耶? 細思其由。 近有鄕之一二少年。 亦余之外屬族眷也。 往來學文字頗頻。 稍得解蒙。 頃者鄕人有來言: "某學書於子。 人多不好。 子何不停寢而止謗耶?" 余曰: "經傳。 聖賢之公言。 我幸先覺其糟粕。 人之欲學。 亦天下之公心也。 余安可絶人之誠心學古哉? 人亦豈可謗人之公心爲學耶?" 其人嘿嘿而去。 其後隣鄕某人。 昌言于衆曰: "金某與某人爲黨論云。 豈儒者之事耶?" 聞者來傳于余。 蓋鄕人之造訛傳播故也。 我國自東西黨分之後。 自朝廷至鄕曲。 指點名目。 黨同伐異。 光海朝以是亡國。 其論尙今不息。 右所謂少年來學者。 卽鄕人之有名目者子弟。 故他邊人忌而造謗及於余。 而今之過門不相訪者。 必含忌而然耳。 可笑可笑。 夫人心。 天下之公器也。 稟天理之大中。 爲天下之公器。 如衡之平。 如水之明。 苟有偏係於一隅。 則喪失天所賦之正理。 入於自私自賊之邪境矣。 人而尙忍此哉? 故余嘗立論曰: "文如韓范。 學如程朱。 若或拘係於今之所謂偏黨。 其人不足觀。" 又常言曰: "若爲今之黨論。 則一朝而至萬鍾之富五鼎之貴。 我不爲也。 若秉心中正。 不偏不倚。 則枯死於蓬蓽之間。 我自甘心矣。" 是以凡平日與人往來及立論措語間。 平生未嘗片言自偏於黨論。 故東西之人。 皆致疑惑。 或曰"某爲東論"。 以其雖西人。 理曲則非之故也。 或曰"某爲西論"。 以其雖東人。 非義則斥之故也。 或曰中無所主。 以其兩非則兩非之。 兩是則兩是之故也。 今者某人來學。 而某人忌之。 至於蔽面過門。 人之偏嗇。 至於此耶? 甚可笑也。 以余至公至正之心。 居鄕而鄕人如此。 立朝而朝人亦如此。 推可知矣。 世道如此。 其可行乎? 余有數畝野田。 力耕而歲豐。 則妻子不至於飢寒矣。 新構頗淨。 前有泉而後有柴矣。 又有數帙經書。 足以治吾心而復吾性矣。 從此閉門淨掃。 養氣頥神。 安父母之遺體。 服往哲之至訓。 順天命樂閑靜。 足以安過一生。 沒吾寧也。 豈不樂哉? 但自古國之將亡。 必有朋黨相傾。 不公不正。 而國隨以亡。 言之至此。 誠可寒心。 老婆心切。 奈何奈何? 近看《退溪先生文集》。 吾東義理之文。 無出於此? 今看集中。 有曰"某與南時甫論花潭之學之病處。 許太輝聞之。 有一書相詰。 與黃仲擧論學。 偶及松堂白鹿洞規解。 未免指摘其差失。 其門人見之。 多不平云云。" 今見此言。 忽憶十年前牛山安公著〈牛山答問書〉。 余偶發未解處若干3)條。 奉質牛山門下。 往來人見誚不貲。 至今不已。 蓋天下義理之是非。 乃公共底事也。 後覺之於先覺。 就質證正。 或論難是非。 亦天下之公道也。 今之人不然。 各護其所好。 而一槩崇奉。 不許人論質疑惑。 甚可笑也。 今仍此書偶見此論。 漫記之。 蓋牛山林下之士。 氣象甚好。 但本源之地。 或欠於涵養沈潛。 專以記聞敍述爲學。 故論議多激揚發露而少溫厚得中底氣意矣。 余嘗有解人心虛靈之說曰: "理本虛。 兼乎氣。 然後有靈。 氣本不靈。 資於理而有靈。" 今見朱子理與氣合。 便能知覺之說。 果與瞽說偶合。 仍此用工。 或可小進於見道耶? 朱子又曰: "譬如燭火。 因得脂膏。 便有許多光焰。" 又曰: "所覺者。 心之理也。 能覺者。 氣之靈也。" 余乃解火膏之說曰: "膏不能自光焰。 得火然後光焰。 火不能自發光焰。 得膏而光焰發。" 此理氣相合。 生知覺之說也。 夕奴輩覓牛不得而來曰: "牛之見盜丁寧矣。" 余曰: "歲饑民困。 赤子將死。 雖良民變而爲盜。 將以免死也? 奈何奈何? 况我雖失。 人則得之。 何慮焉? 毋更求也。"二十七日。 丙午。 少陽朝起而坐。 霽天氣佳。 草木滋潤。 有一野鶴獨立泉源。 俄然而飛。 仍興到成一絶。 有"玄裳素服一仙童"之句。 又成一絶: "甘雨新晴麥已秋。 滿園芳草氣淸幽。 靜看萬物生生意。 還向吾心一理求。" 近來心氣頗穩當。 本源之妙。 庶可仍此得見。 恒日孜孜。 或於發見之際。 倏覺有好意思。 而俄然之頃。 自不覺其爲他慮引去。 蓋工夫未熟故也。 今朝仍觀物而有省悟。 至發於吟詠不已。 記之以戒雪消草生之患云。 午洪兄鍾華氏來。 話于新齋。 爲陳鄕黨和厚之義曰: "凡鄕黨隣里之道。 以忠厚敦睦爲重。 有過申申相戒。 不可遽加揮斥。 有善循循相勉。 不可輒生猜疑。 老者敬之。 賢者尊之。 幼者導之。 弱者植之。 强者戒之。 務相竝至於寡過之地。 則鄕里之風。 漸可變而爲厚矣。 鄕中以此事爲相勉者。 在於兄輩數人。 其勖之!" 蓋近者鄕風似有不好之漸。 故言及之。二十八日。 丁未。 大陽霽後氣象。 此日尤佳。 步出前蹊。 點檢新栽楊柳。 前月久旱。 故枯死者三分之二矣。 生存者新葉已抽可愛。 仍思天之生物。 其品萬殊。 而其生理亦有萬不同。 然花而結實。 實而又生。 其無實者。 必移其根荄而種植。 然後乃生者。 草木莫不皆然。 獨楊柳。 刈取其枝。 扱于土而得生。 何哉? 蓋此木得天地陽生之氣。 最先且富。 故先春草木未榮。 而此木先着葉矣。 得陽先。 故初秋之日。 易感於陰氣。 其葉先零。 古人制字。 從"木"從"昜"。 古"陽"字意以此歟? 其扱地易生者。 稟得陽生之氣富盛。 故陽氣上升之時。 易得其氣。 而爲生也明矣。 譬若稟氣淸明之人。 先覺於天理之本源。 易於爲善者也。 細思其理。 有感於心。 記于此。 儻此樹綠葉成陰。 嫩茂條暢之時。 主人亦有長進志意。 上達本源之地。 而發揚於云爲之際。 與此樹而同敷也歟! 戒之哉! 仍成一絶。 有"數株楊柳種門前"之句。 又成一句。 有"野居新卜傍淸漪"之句。 李仁老言"渠高祖生員李應霖。 卽我太祖朝駙馬都尉李䔲之孫也。 葬于楓山楸松谷。 今二月術士李啓玄來言'此墓地甚凶。 子孫當有凶疾'。 蓋其子孫方有其事。 仁老聞極大駭。 卽卜日遷葬。 其生員公。 墓道有水氣。 若潮水新退之狀。 白骨爲水浮沉。 積置一邊。 浮漚濕淤。 宛然如潮退水涯之形。 而其內墓。 則有一木根自地板下潛入。 大小根荄。 締結於骸骨者無數。 纏繞不可解開"云。 聞之不覺悚然。 蓋子孫之於祖先。 若枝葉之於根本。 程子彼安此安之說。 甚爲近理。 今李姓之人。 以瘡疾致死者。 一家皆然。 只餘仁老輩數人而已。 雖不知其墓山之應。 術人之言。 適然符驗。 此亦不可不知底事也。 記之以爲塋窆不密者之戒云。 又曰: "壙中之用石灰。 將防木根螻蟻虫蛇之患也。 今人惑於地家吉氣不升之語。 地板底例不用石灰。" 余嘗極言其非。 地板之下。 若厚築三物以凝堅。 木根何從而入哉? 送終誠孝者。 不可不知云。 午後披閱《圃隱集》。 歷覽其往來中國時詩什。 數千里道途。 山川物色。 盡入吟哦牙頰之間。 使後人追詠章句。 怳若親見神州之形勝。 其馳車往還之狀。 得句呻吟之象想形神。 思若在今日之目中。 而不覺已經三百年事也。 欽愴之餘。 仍念男兒生世。 事業至重。 上可以達天地無窮之理。 下可以跡萬里山川之勝。 前可以通千古已往之事。 後可以立萬代不朽之名。 若先生者。 俛仰今古。 其人有幾? 哀此孤露之生。 生於海隅偏陋之鄕。 守一畝荒田於窮原寂寞之中。 知不周一身之事。 見不出千里之外。 殘編破冊。 尙不能通其理。 朝飮夜伏於蓬蒿之下。 未免欣慽於一毫之得失。 喜怒於愚夫之毁譽。 百年之過。 倏若一瞬之後。 草木塵土。 同歸於泯滅而已。 則以此方之於先生事業。 不翅壤虫之於鵬翼也。 嗚呼噫嘻! 可傷也已。 雖然。 君子事業。 不出於方寸間而已。 方寸一物。 在我非嗇。 豈獨豐於古人哉? 自此至于蓋棺日。 亦不甚促。 孶孶日夕。 死而後已。 雖不能彷彿於古人之萬一。 庶幾不負爲人之名。 而免於草木禽獸之同歸矣。 今見先生文集。 倏然有驚惕之心。 不覺隨筆而記。 他日進業怠惰之時。 或可目寓於此手記。 冀有翻然覺悟惕然矜式之念。 而警其頹懦之志云。五月初四日。 辛亥。 少陰與徐君鳳翎語。 語間每以節義爲言。 以學問爲不足貴。 以禮經爲虛文。 言言若是。 余曰: "學問禮經。 果是虛文。 而不足貴。 則三綱五常。 皆學問中事。 排去學問。 而求節義。 則是不耕五糓。 而求腹飽也。 而可乎?" 徐君仍歷陳吾東古今人事實累數百言。 其語輕浪慨切。 信奇士也。 但學不求之本源之地。 每每牽掣於外面。 論古今人物。 而歸宿於節義。 故以學問守禮。 爲曲謹小廉。 經涉世務。 爲節義忠信。 其學蓋出於隱峯安丈。 安丈嘗學於牛溪。 何故其學至於如此太支離也? 雖然。 亦足以勵末世頹惰之習也。 豈可以一槩非之? 取其長處而友之可也。初五日。 癸酉。 大陽日氣淸和可愛。 放家畜驪馬于前坂。 綠草沒脛。 終日飽吃。 旣無鉗勒轡銜之牽縶。 任意齕草。 下飮泉瀆之水。 臥起行齕自在。 其意看甚閑放。 家又有赤馬。 性多慾不馴。 故縶繫于槽櫪之間。 一飮一齕。 動須于人。 看甚苦楚。 仍思雖在物畜。 因其慾之多寡。 而苦樂懸殊如此。 人而不可按4)伏得一慾字耶? 不能克慾。 而受制於人。 拘縶其手足。 而不能自爲者。 何異於吾家赤馬耶? 看來忽有警惕。 而感於事者記之。初六日。 甲戌。 大陰李文碩來見敍別。 蓋以城主秩滿當歸。 以明日內行發程。 故告別于余矣。 此人相從數年。 志意雅尙。 今成遠別。 不任悵然。 問余曰: "今歸當讀何書。 以自立歟?" 余曰: "文章辭藻。 末流之學。 吾不敢相期於君。 惟願於四子中。 探其本源之地。 則文章在玆。 義理在玆。 何用馳心於餘外哉? 見君氣質淸弱。 不宜久居於城市囂鬧之中。 聞君有東湖別墅。 境極淸勝。 可抱遺經於此。 養精頥神。 涵養本源。 是吾之望也。 若余者索居荒僻。 又別吾君。 能不悵然哉?" 言竟雨作。 冒雨別去。 多有惜別之思。 李文碩言: "李司諫壽仁辭職疏末款言'本道監司金始振阿謏苟容。 賑政無實。 不恤窮民。 督捧貢米云云。' 監司方上辭職疏。 仍自分疏。 李司諫此擧如何?" 余曰: "此老高臥不出。 已十年餘矣。 讀古人書。 所得亦多。 必見合義而後。 發言於君父矣。 但進陳德義之言。 長益君德。 則雖山林未進之人。 或可爲矣。 至於論人長短是非。 則未知如何也。"初七日。 乙卯。 少陰送書于李文碩問行。 且寄三章別句。 其一有"南郊寂寞一茅廬"之句。 其二有"東湖形勝擅東隅"之句。 其三有"知覺無差在正心"之句。 文碩昨日告別之時。 請敎佩服之言。 故末篇及之矣。 夕忽得句有曰: "雨霽碧天闊。 白雲生遠山。 孤村日欲暮。 木末鳥知還。" 仍自解曰: "雨霽天闊。 則知道體之廣大。 雲生遠山。 則知生意之無窮。 孤村日暮。 則知此生之易老。 木末鳥還。 則覺此心之歸宿。 此詩蓋因寓目之物。 自不覺心會句成。 而深思之。 又有味如此。 此詩之發於性情。 而性情之本於天理者。 可謂妙乎妙矣。"初九日。 少陰午讀退陶山詩序。 不覺爽然起慕之至。 仍成一絶。 有"白石淸溪光霽間"5)之句。十三日。 辛酉。 少陽曉早起開窓。 霽天蒼翠。 風露滿空。 白雲在山。 棲鳥不起。 人聲寂然。 萬境具敻。 惟有晨鷄喔然相唱而已。 超然有俯視人寰。 獨立物表之意。 口吟成律。 有"元氣淋漓露濕天"之句。 又有"露氣凄凄天地空"之句。 朝飮茶。 有"栢葉煎茶氣作霞"之句。 又服松葉。 有"凜凜貞心雪裏顔"之句。十四日。 壬戌。 大陽安生一大。 有"天"。 "圓"字韻。 用其韻。 遂一絶。 有"天君高拱立丹田"之句。十五日。 癸亥。 少陽曉欲覺之時。 得一絶。 有"戶窓深鎖夜茫茫"之句。 午令安一大染皁冠布。 手自整疊而服之。 名其冠曰"兩儀冠"。 仍作〈冠說〉曰: "用布一幅。 其長足繞頭。 而剩一寸八分。 一寸八分爲㡇子。 㡇子之制。 提起四分半摺向右。 四分半摺向左。 用線綴住。 而空其中。 則成㡇恰九分矣。 當未成㡇之初。 布幅兩邊及兩端疊向裏。 然後就幅一邊。 而作㡇子。 當額兩眉上。 以其餘繞頭左右。 至後腦。 縫而合其端。 用線綴之。 而連上邊爲縫。 前面㡇子。 其長及冠之中。 橫分兩脉。 而各至上兩隅。 未及兩隅。 而又分爲兩脉。 兩脉之端。 作兩橫隅。 而左右凡四角也。 合而論之。 㡇子九分。 象太極也。 一㡇之端。 分爲兩脉。 象太極生兩儀也。 兩脉分爲四脉。 象兩儀生四象也。 前後四葉。 象四時也。 其高一尺二寸。 象十二月也。 余惟太極之體立而後。 二儀四象分焉。 二儀四象之道行。 然後四時十二月之功成。 萬物各遂其性。 而天地之道成矣。 故合而名之曰'兩儀冠'。 百年之間。 作我元服。 而冠其首矣。 庶可顧名思義。 反之於吾心之太極。 而有所省悟也云。" 〈兩儀冠前後分釋之圖〉 冠成。 客有難者曰: "非先王之法服。 不敢服。 禮也。 子何不服先王之法服。 自作冠制耶?" 曰: "先王法服。 非不美也。 千載之下。 其制承訛而不眞。 况古今異俗。 駭矚取怪。 是以夫子縫掖章甫。 隨地而變。 以其不欲大異於俗以取駭也。 今余冠雖不能祖述古制。 其所取象者。 皆至理之所寓。 而氣數之流行者也。 居常戴之於元首。 象想其天理流行之妙一本萬殊之道。 自有嘿符於吾心之天者。 此吾之所以製是冠者也。" 難者曰: "子之冠。 取象太極二儀四象四時十二月也。 而必名之以兩儀者。 何居?" 曰: "太極理之至隱者也。 四象四時十二月。 氣之分殊者也。 若兩儀者。 理之旣分。 而四象時歲含在其中也。 故統之以名之者也。 然此非欲廣傳於人而取法者也。 用布一幅而緇染之。 功省而易備。 意遠而理具。 合乎守貧尙質之窮儒矣。" 難者退。 竝記其語云。十九日。 乙丑。 少陽家有白羔。 牝牡相交。 生黑羔。 滿體靑黑。 無一白毛。 有問者曰: "凡物得父母血氣而生。 則白羔之生黑羔。 何耶? 此亦格物者之所可窮至底理也。" 余索其本。 而格之曰: "天下只有一陰一陽而已。 彼飛禽。 陽物也。 走獸。 陰物也。 陰變而陽不變。 故凡禽鳥之色。 皆有常色。 如烏鵲鴈鴨鷰雀鷺鸛之屬皆是也。 又有陽中之陰者。 如鷄雛。 黑鷄生白雛是也。 凡走獸皆變化其形色。 如犬馬猫牛羔羊之屬是也。 亦有陰中之陽者。 如鹿獐狐狸之屬。 皆有常色是也。 家畜有常色者。 毛族有猪。 羽族有鴄6)。 山之毛族有常色者多。 亦陰陽之義也。 惟陽氣爲貴。 故禽獸之稟陽氣多者。 雌雄有正配。 稟陰氣多者。 牝牡相混。 正配者多常色。 混雜者無常色。 陽貴陰賤。 陽正陰駁者。 可見矣。" 夕嘿坐自思。 人之一身凡百事爲。 皆係於心之一本。 一心淸明。 無事不和。 一心渾雜。 無事不亂。 是以儒家事業。 專在治心。 千古聖賢垂戒之言。 不勝其多。 而其要不過治心二字。 治心之法。 莫要於四書。 四書之中。 學庸尤緊。 宋氏諸說。 《近思》 《心經》爲最緊。 《學》《庸》《心》《近》之中。 亦有緊要數語。 上可接堯舜一中字及夫子之所謂一貫之妙者。 嘗授其語。 默符於吾心靜中之妙。 可達千古不傳之秘矣。 余每留心於此。 而益覺其難悟。 近日朝暮之間。 依依然若有透得其眞妙處。 雖用工不熟。 俄頃有失去之歎。 不遠而似有來復之狀。 朱子所謂"用力之久。 一朝豁然貫通"者。 仍此或可得窺其萬一耶? 雖然。 到此地頭。 蹉一足。 則便化爲禪空去矣。 不可不知。 故記于此。 是日洪自一自錦城歸。 聞前縣監羅袡子尙今日亡逝。 子尙卽余外族慶州府尹羅公緯素之子也。 仕守恩津泰仁雲峯等縣。 以才能名。 治郡多聲績。 爲雲峯時。 以兼官暫守南原。 南原人民老少咸乞於監司。 願得羅侯爲太守。 其得民心可見。 徐君必遠爲方伯。 以羅君爲最曰: "牛刀割鷄。 但恨邑小云。" 徐君素稱高亢小許可。 而見稱如此。 其爲人可見其才矣。 聞其死。 可惜也已。 余於甲午年丁內憂時。 厲氣滿于閭閻。 羅君趁先來問。 賻襚備至。 其厚意可尙。 今聞其訃。 亦可哀也已。二十日。 戊辰。 少陽午聞宗家叔母吳氏【卽七寸叔父同樞公諱悛之妻。 當壬丁之兵燹。 全門殘破。 公獨被擄于倭。 卄年異域。 萬死千生。 與姜睡隱沆諸公。 全節歸鄕。 有五丈夫子。 以永其嗣續。 此皆公義勇誠孝之致也。 有自叙文集一卷。 外孫羅諫議晩成作序誌。 行于世。】訃。 卽奔赴喪次。 臨夕而至。 以黑笠素帶入哭再拜。 乃出變服。 與諸哀相吊。 第三弟漢傑於初終時。 斷指出血以進。 雖不見效。 其孝心可尙。 余憂其仍此傷生。 手開其指見之。 則第四指斷割已盡矣。 卽遣人得朋沙塗之。 蓋是弟於平日。 誠孝出人。 吳氏凡五男子。 皆有室居産。 而依養於漢傑家。 吳氏每以孝養稱之。 至是有是行。 人誰不爲人子? 而以孝事親者。 萬不有一。 人誰不欲以孝事親? 而至於忘身盡孝。 古亦罕見其人。 幸於吾一家兄弟之間而得是人。 可敬也夫! 一家咸會治喪。二十三日。 辛卯。 大陽自喪次歸家。 來時歷拜林佐郞㙔。 往吊羅雲峯袡喪。 其子斗三,斗章。 其弟都事袗受吊。 吊後仍赴峀雲亭。 致慰于慶州公。 其次子井邑倅襻侍側焉。 八十老人。 涕泣陳哀。 見之慘矣。 聞惺菴李公壽仁下世。 公靑蓮李公後白之曾孫。 登第後不仕。 仁祖朝除正言。 不拜職。 孝宗朝拜修撰校理執義等職。 皆不就。 今上卽位初。 奔赴先王喪次。 仍經國葬。 除副修撰。 不拜而歸。 今春又拜司諫。 上疏辭不起。 嘗築室月出山下安靜洞裏。 滿室圖書。 沉潛靜養者。 凡二十年。 尤用力於易學。 余嘗往拜。 論至啓蒙。 又質《心經》《近思》中疑義。 言語淸朗。 動靜恬淡。 眞遯世7)淸修之士也。 期以更與相就於月出山寺。 穩討所學。 且曰: "若稱以講論。 則世厭此名。 嘲笑隨之。 去其名。 而得其實。 同世人。 而有所眞樂。 此吾輩之所可勉也。" 余曰: "制乎外。 所以養其中。 孔顔之學。 先謹乎視聽言動。 程朱之學。 尤愼於內外交養。 則安有外世人。 而內聖賢之學乎?" 蓋公恬靜好學。 而或不致念於檢束外貌。 故余微諷焉。 公微笑而頷可之。 其後余亦多病。 尙未踐山房之約。 而相致書論學而已。 今聞其訃。 不勝痛悼。 是日與羅井邑襻語問。 羅曰: "世俗於喪初。 朝夕上食不用肉膳。 吾家亦自先世皆用素膳。 此事如何?" 余曰: "禮朝夕奠用脯醢。 則上食之不用肉。 甚似無謂矣。" 羅曰: "然則世俗之用素。 未知甚道理耶。 古人必有所見。 而爲用素之俗矣。" 余曰: "我國古者土俗。 專用佛敎。 人之初死。 設齋8)飯僧。 此俗蓋仍於此矣。 儒者之家。 不宜遵俗。" 羅頷可。二十五日。 癸酉。 大陽家甥文鳳儀歸自靈巖。 寄愼聖弼書。【辭義詳見第九卷書札類。】六月二十二日。 己亥。 大陽令奴末生桔槹泉水。 數日致力。 扱秧僅數升地。 記之以見農家災殃之極。 蓋自五月初二日雨下之後。 尙未注一犁之雨。 赤地千里。 其慘不可言。 姑以今日之所見言之。 生民之命。 保生於秋冬之前。 不可必也。 人民相與偶坐於閭巷之間。 仰天垂泣而已。 當此時。 爲民上者。 所當竭心殫志。 至誠感天。 以求活民之道。 而任專城之責。 寄司牧之道者。 方且剝民之財。 刑戮日加。 而小無字恤之念。 可勝痛哉? 哀此無辜之赤子。 擧將何依? 不覺惻隱之發。 記于此。二十九日。 丙午。 大陽午微雨自東南西方來。 霎然而止。 民情尤悶。 鄭榟來言: "今月二十五日。 於綾州邑深井中。 結二條氷。 長可一尺餘。 汲水人見之。 多人聚看。 摘之置于掌上。 俄然而解云。" 今年大旱。 古今所罕之變。 人心危懼。 朝夕難保。 而六月堅氷。 是何影耶? 可懼可懼。七月初一日。 戊申。 大陽久旱之極。 田野已荒。 况連年饑甚。 四民遑遑。 田財奴僕寶玩鬻賣者盈于道路。 而人無求買者。 人人有必死之心。 而無樂生之氣。 見之慘矣。 嗚呼! 半生讀書。 豈無愛物之心? 而無術以濟之。 非徒不能濟物。 自己妻孥。 猶且不能濟。 飢嘆之聲盈室。 豈勝嘆哉? 昔伊尹見一民之不得其所。 若己推而內之溝壑。 學者當志伊尹之志可也。 而無才不可施。 無行不見知。 奈何? 日對飢民。 嘆咄而已。 今日將以救飢。 使奴賣田于人。 不售而來。 仍感而記。 非惜己之窮也。 不無傷時念也。初三日。 庚戌。 大陽曉與前監察洪鍾聞入館庭。 行拜哭禮。 乃先王禫日也。 是日聞前右尹愼公天翼之訃。 公監司喜男之孫。 公考無子。 與妣某氏禱于智異山而孕。 妣夢靑鳥一雙從懷中出。 一上天一入海。 而已解胎。 乃㝈也。 長曰天翼。 次曰海翼。 蓋從夢徵也。 兄弟自孩提神表異凡。 丱年。 從趙玄洲纘韓學。 自童時。 以詞賦名世。 伯年二十登第。 次年二十一擢謁科壯元。 官至員外郞。 年二十六而卒。 卒後。 原州文官崔文煥及弟文煜。 在童年。 亦能治文詞。 一日兄弟俱遊于州校。 月夜文煜出步于庭除間。 忽於怳惚身到一山上。 文士十餘人羅坐。 言貌淸俊。 其中一人言文煜曰: "余靈巖愼海翼也。 余兄今在靈巖。 君幸傳我消息于余兄。 如何?" 崔"唯唯"。 因忽不見。 翌日崔之家人。 遍求山澤。 深入山中。 則崔坐于藤蘿上。 歸家見衣裾中。 有一圓石子。 綻而視之。 滿裾書辭。 乃海翼筆也。 原與靈地遠。 崔曾不聞愼姓名爲何。 愼公天翼聞其事。 跟尋而至。 見其書。 果乃弟筆也。 其後文煥登第。 文煜中進士。 不復科。 此事。 余聞于參奉崔瀷。 崔乃愼同閈人。 審知始終無疑。 其後文煥爲靈巖郡守。 文煜從焉。 人皆問其事虛實。 崔丁寧言之云。 蓋此事似涉怪誕。 而覬公平生。 官極淸要。 而一不出。 名藉一時。 而若凡人。 縱酒淸談。 不拘小節。 杜門深居。 人罕識面。 或對人。 卽命酒放言。 傍若無人。 語及時事。 以詭言戲答而已。 以此見之。 其自處之道。 必有所志矣。 故今聞其訃。 慨高人之化去。 而竝記其語。 使後人知公之大槩云。初七日9)。 甲寅自夜半雨作曉止。 朝食後雨作。 蓋自五月初二日後。 今日之雨頗沛然也。 但秧未扱疇。 菽未立苗者也。 已無及矣。 余看方書諺語。 多有明驗。 方書云: "立春日甲乙。 則歲豐。" 又曰: "夏上甲雨下。 則船入村巷。" 今正月初五日乙卯。 是立春也。 五月十六日上甲乍雨。 而皆不驗。 諺曰: "元望月光澤。 早晩占豐。" 而今年元望之月。 農民贊其有豐象。 諺曰: "兩麥占西成。" 而今年麥農。 不10)可謂登熟。 皆不符。 今而後。 知古言不相符也如此。 但有一驗。 諺以春雨頻數。 譬家母手大。 今年春雨頗頻而符其言矣。 然或有不符之歲矣。 午文入柱等來拜。 得見前判書趙絅疏草。 蓋以久旱。 自上避正殿求言。 趙應旨封疏。 其大略曰: "殿下側身警災。 審理冤獄。 第一義也。 尹善道之獨不入審理。 何哉?" 疏入。 政院啓曰: "尹善道之罪惡。 國人之所共憤。 聖明之所洞燭。 而趙絅。 乃敢肆然扶植。 譸張眩亂。 引喩陰慘。 略無忌憚。 其在出納惟允之道。 不當矇然入啓。 故捧入之意。 敢啓。" 傳曰: "如此陰慘之疏。 覽之何益? 卽爲還出給云。" 初因論禮之故。 而轉輾至此。 駭機之不測。 有不忍言者。 國家之事。 可謂罔極矣。十二日。 己未。 小陽午雲起東南方。 千峯競秀。 色若濃玉。 望之非常。 口成一律。 有"玉作奇峯列百千。 平排南極半腰天"之句。十三日。 庚申。 小陽夜半起視。 天月淸霽。 氣象澄湛。 口成一絶。 有"顚風急雨運神車"之句。十四日。 辛酉。 大陽自午雷雨甚急。 至暮而止。 天月明快。 又成一絶。 有"龍驅滄海駕雄風"之句。十五日。 壬戌。 少陰愼聖弼專人以書來問。 且告素隱愼公天翼之訃。 六月十五日下世云。 又痛其舅惺菴之喪。 辭意懇惻。 卽答書以送。【詳見第九卷書札中。】 午有"南國高人已上天"之句。 右爲素隱作也。 有"正道無傳已百年"之句。 右爲惺菴作也。二十八日。 乙亥。 少陰堂侄履相問"人之死於閏月者。 忌祭用本月。 所付之月。 禮有明文。 若遇閏月於忌日。 以閏月祭之否?" 曰: "此變禮而古無考。 難以臆決。 然閏者非天時之常也。 恐當以本月爲祭。" 기인목(其人木) 기인(其人)이 바치는 무명을 이른다. 기인은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 궁중과 관청에 숯과 땔감 등을 공물(貢物)로 바치던 공인(貢人)을 말한다. 《大典會通 工典 京役吏》 약정(約正) 향약(鄕約)의 임원(任員)으로 도약정(都約正)과 부약정(副約正)이 있다. 양부(兩斧) 주색(酒色)을 가리킨다. 술은 창자를 가르는 도끼이고, 여색은 심성(心性)을 가르는 도끼이다.《宋子大全隨箚 권5 隨箚》 다른……하더라도 관녕이 어릴 적에 친구인 화흠(華歆)과 함께 채마밭을 매다가 황금을 발견하였는데, 관녕은 마치 돌을 본 듯 개의치 않으며 호미로 밀쳐 내고 밭을 맸으나, 화흠은 한번 집어 보고서야 내던졌다.《世說新語 德行》 어려서 화흠과 자리를 함께하여 글을 읽다가 화흠이 문밖에 지나가는 벼슬아치를 보러 나가자 관녕은 즉시 그와 자리를 나누어 앉았고 그 후로는 그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일전어(一轉語) 선가(禪家)에서 선승(禪僧)이 선기(禪機)를 드러내는 한마디 말로, 사람의 심기(心機)를 깨우치는 것을 가리킨다. 김광원(金光遠) 1478~1550).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언명(彦明), 호는 월봉이다. 교리(校理) 김괴(金塊)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사사(賜死)되자, 장흥(長興) 월봉산(月峰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영변(寧邊)에 유배되었고, 1533년 고향에 돌아와 후진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큰……법이니 진(晉)나라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 "작은 은자는 산림 속에 숨고, 큰 은자는 조시에 숨는 거라, 백이는 수양산에 숨었고, 노자는 주하사 벼슬에 숨었네.[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 伯夷竄首陽 老聃伏柱史]" 하였다. 옛사람이……것 《논어》 〈옹야(雍也)〉에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는다.[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라고 하였다. 고인이……만들었다 십이율은 음악의 표준인 육률(六律)과 육려(六呂)이다. 황제(黃帝)가 악관(樂官) 영윤(伶倫)에게 악률(樂律)을 만들라고 명하자, 영윤이 해계(嶰谿) 골짜기의 대나무를 취하여 12개의 통(筒)을 만들고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12음률을 구별했는데, 수컷 울음소리로 육률을 삼고 암컷 울음소리로 육려를 삼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仲夏紀 古樂》 복희씨(伏羲氏)는……그렸고 복희씨가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하도(河圖)를 등에 지고 나오자 그것을 보고 팔괘(八卦)를 그었고 이를 다시 64괘로 만들었으며, 그 뒤에 문왕(文王)이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지었고, 공자(孔子)가 십익(十翼)을 지어서 《주역》이 완성되었다. 우(禹)……만들었다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이른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우(禹) 임금이 정한 정치 도덕의 아홉 가지 원칙이 실려 있다. 구주는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 육극(六極)이다. 정자(程子)로……것 정자는 정이(程頥)를 말한다. 정이가 어떤 사람이 토끼를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보고 8괘를 그으셨다. 그러나 이 어찌 하도와 낙서를 보고서만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 토끼만 보고도 8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수(數)는 이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곧 평범한 사물에도 역수(易數)가 담겨 있다는 말이다. 《二程遺書 권18》 《易經蒙引 권11 상》 옛사람의 찌꺼기 글로 전해진 성현의 말씀을 뜻한다. 남포가 겸사로 쓴 표현이다. 당동벌이(黨同伐異) 일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는 서로 돕고 그렇지 않은 무리는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오정(五鼎) 소, 양, 돼지, 생선, 순록의 다섯 가지 고기를 다섯 솥에 각각 담아 먹는 것을 이르는 말로, 고관 귀족의 대단히 호사스러운 진찬(珍饌)을 뜻한다.《儀禮 少年饋食禮》 허태휘(許太輝) 허엽(許曄, 1517~1580)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 호는 초당(草堂)이다.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아버지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황중거(黃仲擧) 중거는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자이다. 호는 금계(錦溪), 이황의 문인이다. 송당(松堂)의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조선 중종 때의 무신(武臣)인 박영(朴英, 1471~1540)으로,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사직 후 정붕(鄭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호이다. 1573~1654.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峯) 또는 우산(牛山), 시호는 문강이다. 1591년 성혼(成渾)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우산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내가……발견하고 원문은 '余偶發未解處若千條'인데, 문맥을 살펴 '千'을 '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지각하는……영특함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말이다. 절구 1수를 지었으니 본서 권4에 수록된 〈양류음(楊柳吟)〉이다. 〈양류음〉은 칠언절구 2수로 되어 있다. 사람이고서……있겠는가 원문은 '人而不可案伏得一慾字耶'인데, 《심경(心經)》에 근거하여 '案'을 '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퇴계의……읽었다 《퇴계집》 권3에는 〈도산잡영(陶山雜詠)〉이라는 제하에 칠언절구가 18편, 오언절구가 26편 실려 있다. 〈도산잡영〉에 병기(幷記)가 있는데, 이를 서문이라고 한 듯하다. 흰……지었다 원문은 '有白石淸溪光霽問之句'인데, 문맥을 살펴 '問'을 '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양의(兩儀) 음양(陰陽)을 가리킨다. 태극(太極)에서 음(陰)과 양(陽)의 양의가 생기고, 양의에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 등 사상(四象)이 생긴다. 원복(元服) 관례(冠禮)를 치를 때 착용하던 어른의 의관이다.《儀禮 士冠禮》 부자(夫子)가……썼으니 봉액(縫掖)과 장보(章甫)는 선비의 의관(衣冠)을 말한다. 봉액은 의복의 한 종류이고 장보는 관(冠)의 한 종류이다. 공자가 어린 시절 노(魯)나라에 살 때는 봉액을 입고, 자란 뒤에 송(宋)나라에 살 때는 장보를 썼다.《禮記 儒行》 분수(分殊) 이는 '이일(理一)'이 전제된 말로, 보통 '이일분수(理一分殊)'로 많이 쓰인다. '이일'이란 우주의 근원은 유일(唯一)의 이치 한 가지라는 뜻이고, '분수'란 이 유일의 이치가 나뉘면 천만 가지 현상으로 분리되어 각각 다른 형태와 성질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朱子語類 권1 理氣上 太極天地上》 털이……있다 원문은 '羽族有匹家鵝'인데, 문맥을 살펴 "匹"을 "鴄"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家鵝'는 연문인 듯하여 번역하지 않았다. 요순(堯舜)의……자 '중(中)'이라는 것은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전해 준 도통(道統)의 심법(心法)을 이른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만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부자(夫子)의……묘리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공자가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하느니라.[參乎! 吾道, 一以貫之.]"라고 한 데에 나오는 말이다. 부수(賻襚) 부의(賻儀)의 명칭은 보내는 종류에 따라 다르다. 재화는 '부(賻)', 수레와 말은 '봉(賵)', 의복은 '수(襚)', 가지고 노는 물건은 '증(贈)', 패옥은 '함(唅)'이라 한다. '부'와 '봉'은 살아 있는 이를 돕는 데 쓰는 것이고, '증'과 '수'는 죽은 이를 송별하는 데 쓰는 것이다. 계몽(啓蒙) 주희가 초학자를 위해 지은 《주역》의 해설서인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말한다.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186년에 완성했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일찍이 간행되어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연구되었으며 역대 왕들이 강독했다. 참으로……선비였다 원문은 '眞遯士淸修之士也'인데, 문맥을 살펴 '士'를 '世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공자와……것이고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를 억제하여 언어 행동으로 하여금 예에 합치하도록 하는 것이 인(仁)을 한 것이다.'라고 하니, 안연이 그 조목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재를……먹였으니 원문은 '設齊飯僧'인데, 문맥을 살펴 '齊'를 '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겨우……심었다 원문은 '扱秧僅數升地'인데, 문맥을 살펴 '扱'을 '移'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윤(伊尹)은……여겼으니 또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들을 떠밀어 구렁텅이에 집어넣은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思天下之民匹夫匹婦, 有不被堯舜之澤者, 若己推而內之溝中.]"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담제일(禫祭日) 상제(祥祭) 후 1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초상에서 27개월 만이다. 청담(淸談) 중국의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시대에 예법을 무시하고 노장(老莊)의 사상을 숭상하여 현묘한 이치를 담론하는 것을 이른다. 진나라 말기에 팔달(八達)이라고 일컫던 호무보지(胡毋輔之), 사곤(謝鯤) 등 여덟 사람이 예법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청담을 나누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7일 원문은 '初七夕'인데, 문맥을 살펴 '夕'을 '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뚜렷한 효험이 많았다 원문은 '多有明驗'인데, 문맥을 살펴 볼 때 '多'는 '未'의 오자로 추측된다. 하지만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상갑(上甲) 상갑(上甲)은 춘·하·추·동 각 철마다 첫 번째에 든 갑자일을 가리키는데, 농가에서는 이날의 일기를 가지고 해의 풍흉 등을 점친다고 한다. 신거(神車) 회오리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신선의 수레를 이른다. 干 千 按 案 間 問 원문은 羽族有匹家鵝인데。 "匹"은 "鴄"의 오기이고。 "家鵝"는 연문인 듯하다。 世 士 齋 齊 日 夕 不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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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水白 處付無他 上典宅 要用所致 傳來田畓安山草山面勿項洞還沙隈伏在 淡字六百九十七分畓一斗五升落只三卜五束庫果 同字六百九十八■■■■■(畓一斗五升)落只一卜八束庫果 同字■■■■(田春牟四)斗落只六百八十九二卜五束廤乙 願買人處 準価納上是遣 永永放賣爲乎矣 本文記段它田畓幷付乙仍于 不得許給是在 此牌子導良 明文成給向事甲午 十一月二十一日上典 李 [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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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이생원 패자(牌子) 고문서-명문문기류-배지 甲午 十一月二十一日 上典 李 奴水白 處付 甲午 十一月二十一日 李氏 水白 ○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774년 11월 21일에 상전 이생원이 노(奴) 수백(水白)에게 토지 매매를 위임하면서 발급한 패자(牌子) 상전댁에서 긴요한 일로 전래해온 전답 안산 초산면 물항동 환사외(還沙隈)의 담자(淡字) 697분답 1두5승락지 3복5속과 동자(同字) 698답 1두5승락지 1복8속, 동자전(田) 춘모(春牟) 4두락지 689 2복5속을 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격에 맞게 팔아 상전댁에 바치라고 하였다. 답주는 상전 이생원이며, 수결이 있다. 피위임자는 노 수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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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이교달(李敎達)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酉九月卄四日 李敎達 李敎成 辛酉九月卄四日 李敎達 李敎成 경상북도 김천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21년 9월 24일에 이교달이 《안우산문집》 중에 조남명에 대한 각 정보와 공교분회소 개회식 등의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21년 9월 24일에 경북 금천군(金泉郡) 조마면(助馬面) 백화동(百花洞) 공교분회소(孔敎分會所)의 이교달(李敎達)이 전남 보성군 문전면(文田面) 가천리(可川洞)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안부를 묻고 항상 누각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먼저 몇 해 전에 존형(尊兄)의 책상 위에 쌓여있는 《안우산문집(安牛山文集)》 중에 조남명(曺南溟)은 한 때 토호(土豪)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평하였는데, 조남명은 조식(曺植, 1501~1572)을 가리킨다. 본관이 창녕(昌寧), 자가 건중(楗中)이며, 남명이 호이다. 지금 도통사(道統祠) 공교분회소에서 크게 일어난 토론을 언급하고 있는데, "오직 우리 동방에서는 조남명 선생이 성리학(性理學)의 시조인데 우산(牛山)의 천박(淺薄)한 토호(土豪)의 일로 돌아가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선비가 이 말을 듣고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다."는 언론이 분분하여 한 가지 묻고자 하니 이른바 《안우산문집》에 실려 있는 이 말은 몇 권 몇 장에 있는지와 우산의 이름, 자호(字號), 관직을 알려주고 각판(刻板)인지 활판(活版)인지 상세히 알아서 회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산집이 이미 발간되어 각 집에 퍼져 있으나 종씨(宗氏)에게는 혐의가 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기록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다음 달 4일 공교분회소에 개회식이 있으니 회답하여 주시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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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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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6년 김택경(金澤卿) 간찰(簡札) 4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子五月十二日 金澤卿 李敎成 丙子五月十二日 金澤卿 李敎成 강원도 강릉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773 1936년 5월 12일에 김택경이 저포를 속히 부쳐달라는 부탁, 마종 값, 길을 떠날 계획, 《소의신편》 전달 등의 내용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6년 5월 12일에 강원도 강릉군 성산면(城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사는 동생 김택경(金澤卿)이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형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지난번에 부친 서찰을 받아 보았는지, 근래 춘부장(春府丈)님의 기력은 강건한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저포(苧布)는 매우 급하니 만약 2필을 얻기 어려우면 1필이라도 속히 부쳐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마종(麻種) 값은 근래 들여왔는지를 묻고 이곳은 들여오는 원래 금액이 33원이라고 하였다. 지난번에 말한 개화(開花)는 아직 보지 못하였고 영서(嶺西)를 찾아보니 또한 이 종자가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본래 10일에 길을 떠나려고 하였으나 비가 와서 마침내 눌러 앉았고 여름에는 더위와 장마로 나아가기 어려워 가을이 되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으며, 그곳에는 근래 비와 가뭄이 물러났는지를 묻고서 이곳은 조금 비가 왔으나 흡족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 물품은 보냈는지 회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소의신편(昭義新編)》을 정오제(丁梧齋)에게 전해 주었는지 회답해 달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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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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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17년 개와가(蓋瓦價) 명부(名簿)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丁巳閏二月 丁巳閏二月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7년 윤2월 13명의 택호와 개와가로 입금된 돈을 기록한 장부 1917년 윤2월 13명의 택호(宅號)와 개와가(蓋瓦價)로 입금된 돈을 기록한 장부이다. 노촌댁(老邨宅) 2냥(兩)부터 강구댁(江旧宅) 2냥(兩)까지 모두 13집의 명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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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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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5년 이당(李鐺)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丑八月初旬日 李鐺 伊彦宅 乙丑八月初旬日 李鐺 伊彦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OD_F1050-01-230823 1925년 8월 10일에 재종질 이당이 일미(一米)를 자금 100원으로 이익을 붙여 빚을 탈출하는 등의 내용으로 이언에게 보낸 간찰 1925년 8월 10일에 재종질 이당(李鐺)이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언(伊彦)에게 보낸 간찰이다. 이번 초순에 답장한 한 통의 서찰은 받아 보았을 것이라고 하고 재종조부(再從祖父)의 기체와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상대방의 체후와 자제들도 잘 성장하고 집안도 편안한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재종질 자신은 집안 형편을 전에 보낸 서찰에서 자세히 말하였다고 하고, 오는 9월 사이에 일미(一米)를 집안의 자금 100원으로 이익을 붙여서 빚을 탈출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이번 그믐 안에 광주로 표행(漂行)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며 멀리서 정성스럽게 인사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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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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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 상중인 아우가 수신자의 아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말을 타게 하라고 권유하는 간찰 모년 상중인 아우가 수신자 아무개에게 수신자의 아들에 대해 말한 편지이다. 수신자의 안부를 물은 뒤에 상중인 자신은 질긴 목숨을 구차히 늘이고 있다고 하고, 수신자의 아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아드님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장차 맹렬히 공부하라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잘할 것이다. 커가는 아이는 옥보다 귀하니 부득이 가마를 버리고 말을 대신 타게 하는 것도 상관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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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凡天地間萬物 必皆有根源 而成就焉 根固源深 然後可以大達繁茂 每觀木之枝 達水之派 分最明白可知矣 木而其根不固 則枝枯 水而其源不深 則波渴 此天地間必然之理也 能成扶廈之材 能就達海之功者 其豈偶然成就者哉 噫 彼衆物之無情 亦皆有根源而成就 況人而具四端七情 爲萬物中最靈者 豈其無所本而有子孫榮昌門戶盛大之理乎 讀古觀今 子孫賢哲 氏族繁茂 稱以國士大夫之家 必自祖宗積德累仁 固樹基本 如木之根固 水之源深 然後百子千孫 繼繼承承 世愈遠而連綿不絶 輝赫當世 芳流百代 或有愚子頑孫 不脩孝悌之行 毁祖之仁 損祖之德 悖誼傷倫 墳墓不守 祭祀不誠 則根枯源塞 而運衰祚薄 門寒身孤 然則人之根源 在乎祖宗 祖宗墳墓 不可不守護也 祖宗祭祀 不可不誠奉也 故朱夫子居家要訣 祖宗雖遠 祭祀不可不誠云者 寔由是耳 前賢豈欺後生哉 嗚呼 我李自高祖考僕正公 落南居鄕 祖宗墳墓 嶺右京北 間隔千里 守護奉祀之節 行員來往之費 極難方便 弱子孱孫 有志莫遂 今年壬戌 始發門議 老少咸集 脩我宗稧 諸從昆季 並心合力 逐年畜大 廣置義田 分定位土 自始祖隴西公 以至高祖僕正公 十六世墳墓守護 祭祀奉行之節 竭誠盡禮 神鬼安享 子孫保全 我祖宗創樹無窮之志 庶幾報效其萬一 而吾族敦睦之誼 亦隨而愈厚尤篤 則范文正義庄 不足專美於古 而隴西桃李 復有不言成蹊之春矣 惟吾族勉乎哉 惟吾族勉乎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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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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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이교성(李敎聲)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舊十一月八日 李敎聲 李正淳 舊十一月八日 李敎聲 李正淳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 11월 8일 이교성이 이정순에게 관함(官銜)을 보거나 내어 보이는 것에 대한 의견을 말한 간찰 모년 11월 8일 이교성(李敎聲)이 이정순(李正淳)에게 관함(官銜)을 보거나 내어 보이는 것에 대한 의견을 말한 편지이다. 교궁(校宮, 향교)에서 말할 때에 관함을 내어 보이는 것은 문주토(門主土)를 문중에서 열명(列名)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정당하다고 응낙(應諾)했으나, 실지로 나아가 보는 것은 명에 따라 해나가는 것이 공적인 문중의 일이다. 같이 이전하는 절차에 이르더라도 곡성(谷城)과 보성(寶城) 양 고을에 없어서는 안 되니, 아뢰는 중에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결정이기 때문에, 이에 감히 통보한다. 그대의 사촌이 근래 성에 들어올 때에 특별히 면대(面對)해서 의논하여 바른 데로 돌아가면 우리 가문은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피봉이 있는데 윗부분이 찢어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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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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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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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서신·통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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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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