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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拜追謝狀.屢書情益勤矣. 感荷無量, 而所布不隱, 情緖又可見. 君子用心之忠厚, 仰賀仰賀.書後有日,朞服體候連護保重, 仰溸不任勞祝. 弟山頹虞外頭擢失懷, 慟哭失聲, 罔知所措, 承訃之日病未奔哭, 望北發喪三日成服而已. 三事之理, 安任哉運氣, 劑別無記, 未副請悶悶. 但某生某生書擲生年月日時, 則以思量劑呈矣. 放學在那日, 而明春期某業耶.歲除不遠, 餘只祝餞迓茂祉. 不備, 追謝狀.丙二之日望, 心制人 金斗衡 拜謝.某年某月某日某時, 如此書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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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년 이백운(李白雲)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李白雲 綾州牧使之印(7.0x7.0), 周挾字改印 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35년 능주목에서 북면 화남리에 거주하는 이백운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이백운에게 발급한 준호구 1735년 능주목에서 북면 화남리에 거주하는 이백운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이백운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이백운은 71세이고 본관은 광산이며 직역은 업유(業儒)이다. 업유는 유학을 닦는 서자(庶子) 출신으로 손자나 증손 대에 가서야 유학(幼學)으로 불릴 수 있었다. 호주 이백운의 사조(四祖) 즉 부·조·증조·외조를 기재하고, 67세의 처(妻) 한소사(韓召史), 그리고 한소사의 사조가 기재되어 있다. 노비는 여종 1구(口)가 있다. 이백운 65세 때의 준호구에는 자녀가 올라있지 않은데 이 준호구에는 사망한 8세의 딸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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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나순좌(羅舜佐)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羅舜佐 同福縣監 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715 1792년 나순좌가 자신의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노비 현황을 기록하여 동복현에 제출한 호구단자 1792년 나순좌가 자신의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노비 현황을 기록하여 동복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나순좌와 처(妻) 방씨(房氏), 아들 나득검이 가족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나순좌의 거주지는 동면 삼지천리이고, 나이는 62세이다. 나순좌의 사조(四祖)와 처 방씨의 사조가 기재되어 있는데, 나순좌의 사조에는 생부(生父)도 함께 기재되어 있다. 소유노비는 앙역비(仰役婢)와 각거질(各居秩)로 나누어 기재하였는데, 앙역비는 1구(口)이고 각거질은 4구이다. 각거(各居)는 외거(外居) 노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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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面)麗澤契中雲際天冠益縹緲 而不見景仰之心 無日不憧憧 謹未審陽復靜棣體候連護萬相 允玉處侍 一勤課否 幷溸不任區區頂祝 査弟 王考丈緬事 年久經營 而未遂情禮矣 今得高眼 今二十八日窀窆卜吉 事多拘掣 未得抽身 私悶何喩 就婚說頃書以開春言之矣 昨聞鄙宗之言 則雖歲內亦有請期之意 則於 兄意何如耶下諒處之企仰耳 餘掛漏 不備狀禮丁酉至月念六日 査弟 鄭欽萬 頓(後面)雲際天冠 益縹緲而不見憧憧 無日於心矣 謹未審陽復靜體候連護萬相 允玉安侍 一勤課否 幷仰溸不任區區頂祝 査弟 王考緬事 年久經營 而未遂情禮矣 今得高眼 今二十八日窀窆卜吉 事多拘掣 未得抽身 私悶何喩 就婚事頃書明開春言之矣 昨聞鄙宗之言 則雖歲內亦有請期之意 則於 兄意何如耶 下諒處之企仰耳 餘掛漏 不備狀禮丁酉十一月二十六日 査弟 鄭欽萬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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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윤재업(尹在業)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尹在業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신○년 2월 22일, 윤재업이 혼인의 성사를 위하여 형님의 뜻을 물으며 형의 말씀대로 책임지고 혼인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 신○년 2월 22일, 제(弟) 윤재업(尹在業)이 혼담에 대한 형님의 뜻을 물으며 자신은 형님의 말씀에 따라 먼저 정했던 곳을 물리었으므로 책임지시고 혼담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취지로 보낸 편지이다. 지난 편지를 쓴 후 2일이 지났다며 어버이 모시고 잘 계신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어제 들어왔다고 한 후 혼인은 사람 사는 세상의 큰일로 우리들이 서로 편지로 증거 하였던 것을 형께서는 편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으니 형님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평소 형님을 믿었기에 먼저 정했던 혼처를 물리었으니 형이 책임을 지시고 혼인이 깨지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청했다. 또한 상대의 어머니 잃은 삼종(三從) 형님은 어찌 지내는지 물으며 직접 편지 쓰지 못하니 안부를 전해주기를 청했다. 상대의 막내 동생을 되는대로 이곳으로 보내주기를 청하고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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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금구향교(金溝鄕校) 통문(通文) 4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金溝鄕校 全州鄕校 金溝鄕校(4.0×4.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3109 1959년 3월에 전라도 금구향교 전교 임종호·장의 경인근 등 유림 15인이 전주향교에 금구군에 사는 배병주의 돌아가신 모친 조양 임씨의 효행과 열녀의 실행을 함께 찬양해 윤리강상을 부지해 줄 것을 알린 통문 1959년 3월에 전라도 금구향교(金溝鄕校) 전교(典校) 임종호(林鍾鎬)·장의(掌議) 경인근(景寅根) 등 유림 15인이 전주향교(全州鄕校)에 금구군(金溝郡)에 사는 배병주(裵秉周)의 돌아가신 모친 조양 임씨(兆陽林氏)의 효행과 열녀의 실행(實行)을 함께 찬양(賛揚)해 윤리강상을 부지해 줄 것을 알린 통문이다. 옛날 성대한 시절에는 교화가 크게 행해지고, 윤리와 기강이 갖추어져 신하는 신하로서의 도리를,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부인은 부인으로서의 도리를 잃지 않고, 젊은이는 어른을 능멸하지 않았으며, 선을 권하고 인(仁)을 도왔다. 만약 그 도를 극진히 한 자가 있으면 사림(士林)이 천거하고, 임금이 듣고 포양(褒揚) 할 때에 정려하기도 하고 관작을 내려주기도 하여 소문이 퍼지면 천하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치고 싸늘한 비가 내려 50년 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먹고사는 데 바빠서 직분을 제대로 수행한 자가 드물게 되었다. 금구군 선비 달성 배익수(裵益洙)의 부인 조양 임씨는 벌열고가(閥閱故家) 출신의 여자로 성품이 정숙하고 단아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효행으로 부모를 섬겼다. 결혼해서는 시부모를 친정부모 섬기듯 하였으며, 큰 손님 대우하듯 남편을 받들고, 남편은 그 집안을 화목하게 하였다. 하지만 남편이 선영(先塋) 일 때문에 피로가 쌓인 나머지 병이 들어 22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남겨진 어린 아들이 울어댔으나 그녀는 얼굴에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세월이 흘러 소상을 정성껏 지내고 3년상을 마친 뒤, 배익수의 동생 택수(澤洙)가 매우 급하게 형수 임씨를 찾았으나 그녀는 이미 뒤뜰 나뭇가지에 목을 맨 뒤였다. 이를 발견하고 급히 형수를 나무에서 내려 구한 뒤, 택수가 땅에 엎드려 울면서 "백세토록 아름다운 이름이 열녀라지만 불쌍한 저 혈혈단신 아들은 누구에게 의지하겠으며, 쓸쓸하고 가난한 집안 살림은 누가 맡아 처리하겠습니까?"라고 하며 서로 바라보며 통곡하니 측은한 감정이 들어 마음을 돌리고 곡기를 먹기 시작하여 훗날 집안의 명성을 세우고 늙을 때까지 정절을 지켰다. 이는 포장(褒獎)할 만한 일이지만 시대가 달라져 이러한 실적이 사라져서 소문나지 못하였으나 그녀는 성냄 없이 1957년(정유) 겨울에 천수를 누리고 생을 마쳤다. 임씨의 효자 배병주(裵秉周)가 차마 어머니의 아름다운 실적을 침묵할 수 없어 상복을 입은 채 금구향교에 울며 호소하였다. 이에 떳떳한 본성은 같은지라 너무 개탄스러워 금구향교에서 광주향교로 통문을 보내 이 엉망이 된 세상에 아름다운 본보기를 행한 실적을 찬양하는 데 함께 동참하여 윤리강상을 부지해 줄 것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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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박준학(朴準學)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朴準學 牧使<押> 綾州牧使之印(7.0×7.0), 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058 1891년에 능주목에서 박준학에게 발급한 준호구 이 문서는 1891년에 박준학이 능주목(綾州牧)으로부터 발급받은 호구증명서인 준호구(準戶口)이다.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호주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현재의 등본이 신분을 증명하는 것으로 활용되었다면, 준호구는 신분 증명 이외에도 소송관련 사건이 있을 때나 도망간 노비를 찾을 때, 부역을 부과할 때에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준호구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신청인의 주소와 가족 구성원 등의 정보를 담은 호구단자(戶口單子)를 관에 먼저 제출해야 했다. 관에서는 호구단자를 살펴본 뒤 내용상 문제가 없을 경우 새로운 종이에 준호구를 작성하여 신청인에게 발급하였다.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작성하는 서식은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용문자식(用文字式)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부터는 이러한 절차가 점차 간소화되어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신청인이 준호구 형식의 문서를 작성하여 관에 제출하면, 관에서는 이를 살펴본 뒤 수령의 서명과 관인을 찍어 돌려주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준호구에 따르면 박준학의 주소는 능주목 오도면(吾道面) 오도곡(吾道谷) 1통 3호이다. 박준학의 현재 나이는 52세이고 처 이씨(李氏, 53세)를 가족으로 두었다. 이밖에 귀매(貴每, 21세)라는 이름의 비(婢)를 소유하고 있다. 준호구에 답인한 [周挾無改印]은 삭제[周挾]하거나 수정[改]한 글자가 없다는 의미인데, 변경사항이 있을 경우 [周挾改幾字]를 답인하고 '幾'부분에 변경된 사항이 몇 개인지 숫자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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敦基頓首再拜言. 不意凶變,先府君奄違色養, 今才承報, 驚怛不能已已. 伏惟孝心純至, 思慕號絶, 何可堪居. 日月流邁已忽經時,哀痛奈何, 罔極奈何. 不審自罹茶毒,氣力何如. 伏願强加疏食, 俯從禮制. 敦基役事所縻,未卽奔慰悲係曾深, 謹奉疏. 伏惟鑑察. 不備, 謹疏.丙辰四月十日, 延安 金敦基 疏上.楊 生員 大孝 苫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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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李錫)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錫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갑○년 9월 14일, 부종질 이석이 고모댁에 보낸 안부 서간. 갑○년 9월 14일, 부종질(婦從侄) 이석(李錫)이 고모댁에 보낸 안부 서간이다. 우리 종조모의 회갑을 축하하려고 했던 것이 백지로 돌아간 일을 언급하며 이곳의 상황이 어떠할는지는 상대가 알 것이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요사이 사장(査丈)께서 먼 여정에서 돌아오셨는지 묻고 상대방과 종고씨(從姑氏)가 평안한지 물었다. 부종질(婦從侄)인 자신은 두 집안의 노인(老人)이 어떤 일로 인하여 손상을 입으시어 걱정이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지난달에 화선(花宣) 나들이를 가셨는데 돌아오시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 종고씨의 근친이 마침내 허사로 돌아갔기에 매우 슬프다는 내용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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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吾從祖母氏回甲專人二百里,情理則固然, 而只增祖母氏不耐諸疚懷耳. 稱慶二字已無白論, 而如何得從飭寬譬, 而此間景色想應黙會, 更何煩說.書候後有日, 謹詢査丈遠旆倘伊間返稅, 而苦病奇蔗境, 侍餘體履曁從姑氏並泰平, 區區更溸, 非比前常. 婦從侄 兩家老人, 欲有緣境, 疚損節焦悶奈何. 家君月前作花宣之旆,而返次去人卜日, 然未前瑖熏,不尠, 從姑氏覲旆, 竟歸奉虛望, 誠薪悵不可言. 餘姪擾,不備謝上.甲九十四日, 婦從侄 李錫▣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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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 유재호(柳在浩)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柳在浩 羅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진년 4월 1일, 죄시생 류재호가 나생원에게 상대에 대한 그리움과 안부 및 자신의 근황, 집을 거의 다 지었다는 소식, 창호지가 필요하니 구해주기를 바란다는 부탁 등의 내용을 전하기 위해 보낸 서간. 무진년 4월 1일, 죄시생(罪侍生) 류재호(柳在浩)가 나생원(羅生員)에게 상대에 대한 그리움과 안부 및 자신의 근황, 집을 거의 다 지었다는 소식, 창호지가 필요하니 구해주기를 바란다는 부탁 등의 내용을 전하기 위해 보낸 서간이다. 전 달에 돌아가면서 산문(山門)을 지났지만 그 때 여정이 잠시도 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워하기만 하고 방문하지 못했다는 것, 요즘의 날씨에 상대가 어찌 계신지 궁금하다는 안부 인사, 아드님은 아버지 모시고 공부 잘하는지, 주인장 및 여러 이웃들은 다 평안한지에 대한 물음, 상을 지내는 자신은 여러 가지 일들이 다 힘들다는 것, 연이어 말을 달리느나 본래의 질환인 격담(膈痰)과 기체(氣滯)가 왔고, 설사증세도 심했다는 것, 여러 번 창약을 먹고 어제 겨우 위급함을 면하였지만 원기가 다 사라졌고 완쾌의 기약이 없다는 것, 무언가를 조성하는 일은 거의 완료하기에 이르렀지만 범절을 처리함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 약 열흘 정도면 택일(擇日)하고 들어갈 계획이라는 것, 자신이 이곳에 살면, 장차 좌우 친지들이 이후로 이곳에 들어올 것인데, 한 사람도 원하는 자가 없는 것은 자신이 근사하지 않고, 가난하기 때문인 것 같다는 한탄, 창호지 3~4장이 절실히 필요하니 이 뜻을 문오(文五) 보(甫)에게 말하여 사서 수일 내로 찾아와 준다면 매우 감사하겠다는 부탁의 내용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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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禮. 月前大歸路過山門, 其時行李, 不容蹔息, 瞻望空過, 迨切伏悵, 一聲曉鐘. 維夏代序, 伏惟靜候對時萬康, 令胤侍做亦能佳穩. 主人丈曁左右芳隣, 俱得平安耶. 種種哀慰, 伏不任下誠. 罪侍生 孤寓凡百辛酸無比, 而連月驅馳之餘, 素患膈痰幷作於氣滯, 重以泄痢, 直瀉四日四夜, 蒼黃經過, 孤露危遑之情, 益切於四無親之地矣. 屢用湯藥, 昨纔免危,而元氣澌瀎, 蘇完無期, 伏悶何達. 成造事, 幾至完役, 而入處凡節, 亦多難狀, 將以旬間擇日入居伏計耳. 侍生之寓於斯也, 所將者, 盖左右親知, 而入此以後, 竟無一人肯願者,此莫非侍生人無似且貧焉故也. 拊念世情, 自知分內之固然而已. 窓戶紙三四張, 切欲求得, 而此處無可求之道, 此意 布諭于文五甫, 使之買得於那邊紙筒, 數日間兼之袖得一次惠訪, 則感幸當如何哉. 君昇亦平安▣…村消▣…聞▣…示伏▣…萬, 病餘手戰, 不備. 伏惟下察.戊辰四月初一日, 罪侍生 柳在浩 ▣…(背面)羅 生員 靜案下執事.謹候疏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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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년 통문(通文)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綾州鄕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7년 3월에 능주향교 등에서 국채보상 운동 등의 건에 대해 받은 통문의 초본. 1907년 3월에 능주향교 등에서 받은 통문 등 4건을 베껴 놓은 초본이다. 문서의 앞부분과 뒷부분의 일부가 결락되어 있다. 4건의 통문은 모두 정미년 3월일자로 발송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에 대구의 廣文社에서 담배 소비를 줄이고 이를 통해 국채를 갚아 나가자고 제창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통문이 작성된 연도는 이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발흥되기 시작할 때인 1907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첫 번째 통문은 1907년 3월 5일에 능주향교로 보낸 것이고, 두 번째 통문은 같은 해 3월 9일 期成會長 朴源奎에게 보냈다. 세 번째 통문은 작성일자는 적혀 있지 많고 능주향교에 보냈다. 네 번째 통문은 1907년 3월 22일에 기성회장에게 보냈다. 세 통문 모두 '梁會源'이라는 인물의 현재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여기서 기성회장은 어떤 사업을 위해 결성된 기성회의 회장을 가리키는 것인지 직접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통문에서 주로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 六忠臣을 모시는 院宇 건립의 반대하는 인물의 행태를 알리고 있는 사실로 볼 때, 이 사업을 위한 기성회장일 가능성이 높다. 첫 번째 통문은 국채보상운동을 핑계로 太學을 멸시하고 의리를 뒷전에 두는 형태를 멈추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향회원의 의중을 급히 살펴 알려드리겠다고 하고 있다. 두 번째 통문은 六忠臣을 모시는 院宇를 건립하고자 하고 있는데, 일전에 광주향교에서 양회원이 말도 안되는 말을 명륜당에 크게 적어 걸어놓는 행위를 했다고 알리고 있다. 세 번째 통문은 마찬가지고 六忠臣을 모시는 원우의 건립 운동을 저지하고 있는 양회원을 비난하고 있다. 여기서 양회원은 기묘명현인 梁學圃의 후손인데도 사림에게 치욕을 끼친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네 번째 통문은 저쪽의 의도는 국채를 갚기 전에는 院宇를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본 통문 초본은 1907년 당시 六忠臣을 모시는 院宇를 건립하기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능주향교에 소속된 朴源奎이 회장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당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광주향교를 중심으로 기성회의 활동을 비난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사실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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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謹拜拜候. [着名](簡紙)歲初違拜, 迨不能寒情, 而只切停雲之懷而已. 忽於弟氏兄枉臨, 略聞近節, 乃新年平安, 㝡消息也. 慰豁十分. 凭審載陽旅上經體玉嗇所做溫理有序, 何等慰沃. 弟家慶患候,迨未復常, 焳遑焳遑. 而惟諸節之無擾爲幸耳.竊念吾兄櫟守有素, 其於▣▣之工, 不爲産累之所奪也. 此人無似上面說悚恧悚恧, 而只爲邯耶, 富貴吳楚風物,出沒於心胸中矣. 其於自反, 未免爲穹壤間蠹色耳.何以則祛此病根耶. 幸 賜誨以牖昏迷, 伏望耳. 呵呵. 餘掛, 不宣候.癸巳二月九日, 弟 曺基周 二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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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현(林相鉉)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林相鉉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사제 임상현이 사돈에게 혼례를 잘 치른 것을 축하하고 인사한 서간의 일부. 사제(査弟) 임상현(林相鉉)이 사돈에게 혼례를 잘 치른 것을 축하하고 인사한 서간의 일부이다. 사돈에게 길례(吉禮)를 잘 치른 것이 두 집안의 경사스런 일이라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추운 날씨에 어버이 모시고 잘 계시냐는 인사를 물은 내용이다. 편지의 일부가 잘려서 나갔기 때문에 차후의 내용과 발신자, 작성일자 등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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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謹拜候上.(피봉_뒷면)謹拜候上.謹封.(簡紙)日吉辰良, 吉禮利成, 兩家慶行, 曷有其極. 謹伏審至冱孝中體候神護萬重, 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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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 김상현(金翔鉉)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金翔鉉 李亨裕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신묘년 5월 22일에, 제 김상현이 이형유에게 보낸 서간. 신묘년 5월 22일, 제(弟) 김상현(金翔鉉)이 이형유(李亨裕)에게 보낸 서간이다. 오랫동안 소식이 막혀 슬펐다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요즈음 고요히 계시는 형제분들이 잘 계신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역(役)을 하는 생활이 전과 같다고 한 후 주요내용을 전했다. 아버지의 기일(忌日)이 가까이에 있으니, 닭 20마리와 계란 50개를 사서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다음 달 초2이일에 시장에 나간 인편에 들여 보내줄 것과 값을 알려 줄 것을 청했다. 발신자 김상현은 자신을 '본 사위〔本胥〕'라고 적었고, 수신자 이형유는 송월(松月)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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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호(姜在皥) 서간(書簡)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姜在皥 李曰聖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편지를 받자마자 제 강재호가 학사 이왈성에게 11일 오후에 자신의 집으로 오시어 함께 하자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 편지를 받자마자 제(弟) 강재호(姜在皥)가 학사(學士) 이왈성(李曰聖)에게 11일 오후에 자신의 집으로 오시어 함께 하자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이다. 편지가 오가며 소식이 길게 이어지니 서로 위로 된다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했다. 편지를 받고 어른을 모시고 연구를 하고 지내는 상대의 안부가 평안함을 알았다며 시를 짓는 솜씨와 글씨쓰는 것에 있어서도 품격이 올라갔으리라 생각한다고 축하하였다. 자신은 모시는 어르신 평안하고, 계(契)와 관련한 일로 어제 박(朴) 형의 편지를 받아 동쪽으로 답장을 하려고 했는데 죽이 잘 맞는 사람의 응답처럼 또 하나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고 했다. 11일 오후에 자신의 집으로 오시면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하고 편지를 마쳤다. 편지지를 말면 내용이 안으로 들어가고 빈 면이 나오도록 해서 그곳에 직접 받는이를 기록한 자봉(自封)의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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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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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계해년 장성준(張成浚) 등 산도(山圖)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張成浚 <押>,張成浚<着名>, 文鎭龜<着名>, 朴致彦<着名>, 朴載鼎<着名> □…□ 3顆(7.0x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1557 계해년 3월 13일에 장성준 등이 산송(山訟) 과정에서 작성한 산도 이 문서는 계해년 3월 13일에 장성준 등이 산송 과정에서 관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산도이다. 앞서 장성준 등은 박치언 등이 마을 뒤편의 제봉(祭峯)에 부모의 묘소를 투장한 것에 대해 즉각 관에 정소하였는데, 이때 산도를 그려 등장과 함께 제출하였다. 산송의 구체적인 내용은 장성준 등이 작성한 등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도는 산의 형세를 그린 그림으로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건축물이나 묘소의 터를 정하기 위해 작성하거나 산송에서 매장된 묘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물로서 작성되었다. 산도의 가장 위쪽에는 '唵川面 蓋山里 山麓圖形記'라고 적혀 있다. 즉 이것은 강진군 옴천면 개산리에 위치한 산록을 그린 그림이다. 아래에는 산의 형세와 여기 매장된 박치언(朴致彦) 부모 묘소의 위치를 그리고 이것이 인가(人家)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보수(步數)로 표시하였다. 이후 소송당사자인 장성준과 박치언이 이름을 적고 착명(着名)하였다. 산도의 뒷면에는 산도를 살펴본 뒤 해남현에서 내린 처분 내용이 적혀있다. 처분에 따르면 묘소가 이미 한 고을의 주맥(主脈)에 걸쳐 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매장을 금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박치언이 이미 다른 산을 찾아 묘소를 옮기겠다고 하였으니 속히 옮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의 처분을 제사(題辭) 혹은 뎨김[題音]이라고 한다. 제사가 기재되었다는 것은 관의 공증을 거쳤다는 의미이므로, 백성들은 제사가 기재된 문서를 소송 자료 또는 권리나 재산 등을 증빙하는 자료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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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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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28년 장윤문(張允文) 소지(所志) 4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張允文 同福縣監 官[着押] 3顆(6.5×6.3)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707 1828년 12월에 전라도 동복현 내서면 학당리에 거주하는 장윤문이 동복현감에게 관령을 피하고 있는 조경원의 죄를 징계하고, 투총을 독굴해줄 것을 청원한 소지 1828년(순조 28) 12월에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내서면(內西面) 학당리(學堂里)에 거주하는 장윤문(張允文)이 동복현감에게 관령(官令)을 피하고 있는 조경원(曺敬源)의 죄를 징계하고, 투총(偸塚)을 독굴(督掘)해줄 것을 청원한 소지이다. 장윤문이 12월 1일에 산송(山訟)으로 고소하니 동복현감이 뎨김에 '가을에 다짐을 바쳤는데 겨울에도 투총을 파 옮기지 않았으니 조 가(曺哥)의 소행을 매우 엄하게 징계한 다음 독굴하기 위해 잡아 올 것'이라고 판결하였다. 이에 뎨김을 바로 조경원 집에 알렸더니 그의 당숙 조한현(曺漢鉉)이 '당질이 외출했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핑계를 대며 관령을 도피하였다. 장윤문은 입을 다물고 속임을 당할 수는 없어서 동복현감에게 '참작하신 뒤에 조경원을 발패(發牌)하여 잡아와서 관령을 꾀를 내어 피한 죄를 엄히 징계하고, 소송한 투총을 독굴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소지를 접수한 동복현감은 12월 11일 장윤문에게 '어디로 도망가 있는지, 이 고을에 있다는 것을 아니 즉시 잡아 오라'는 판결문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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