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광주포충서원재회소(光州褒忠書院齋會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光州褒忠書院齋會所 古阜儒林 1顆(墨印, 6.5×4.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2989 1877년 4월 21일 1877년 4월 21일 광주 포충서원 재회소에서 고부유림에 부안면에 사는 정은필의 순수하고 독실한 실적을 조정에 알려서 그가 발탁되는 은전을 입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 1877년(고종 14) 4월 21일 광주 포충서원 재회소 17인이 고부유림(古阜儒林)에 부안면에 사는 정은필(鄭溵弼)의 순수하고 독실한 실적을 조정에 알려서 그가 발탁되는 은전을 입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알린 통문이다. 서두에 "자하가 말하기를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되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고,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한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말하겠다"는 『논어』 문장을 인용하여 인효(仁孝)의 중요성을 언급한 뒤, 고부군(古阜郡) 부안면(富安面)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16대조인 예문관 응교 승보(承甫)부터 8대조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까지 9대조의 계보를 열거하여 그가 명망있는 문벌 후손임을 말하였다. 실재 정은필의 효행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집이 너무 가난하여 입에 풀칠할 계책도 전혀 없어 품팔이 하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시경』과 『서경』을 읽지 않았는데도 어른을 예의와 공경으로 대하고, 차례가 있음을 잘 알며, 어진이를 여색 좋아하듯 하였으니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도 배움에 능한 선비라고 할 만 하다'고 칭송하였다. 또, '어버이가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자 온갖 방법으로 약물을 써서 온마음으로 치료하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똥을 맛보고 안부를 살펴 거듭 나아지는 효험을 보았다. 부모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여 조문하는 자가 열복(悅服)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 묘 곁에 여묘살이 하며 하루에 3번 성묘하고 밤에 5번 일어나 살아 계실 때처럼 섬기니 정성이 하늘에 닿아 사물의 본성이 감발(感發)되었다. 이때문에 한 쌍의 백조가 몇 떨기 황국(黃菊)을 물고 세 때에 와서 위로함에 네 계절 내내 황국이 피었으니, 하늘에 근본한 효성이 아니라면 물성이 감흥했겠는가?'라며 그의 실적에 감탄하였다. 이어서 정은필이 근 70세에도 부모 산소에 매일 성묘하여 산골짜기에 길이 생기고, 부모 기일 3일 전부터 소식(素食)하고 재계하며 죽을 때까지 부모를 잊지 못한 달효(達孝) 및 수신(修身)의 방도와 제가(齊家)의 절도, 접빈(接賓)의 예 등을 열거한 뒤 '빛나는 덕행이 한 성의 공의에 미쳤으므로 침묵할 수 없어서 이에 통문을 보내니 여러 선비들이 이 순수하고 독실한 실적을 조정에 알려 특병히 발탁되는 은혜를 입으면 매우 다행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포충서원은 현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에 있는 포충사(褒忠祠)로, 임진왜란 초기 호남 지방에서 의병 7천 명을 모집하여 금산성 전투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고종후·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안영 등 5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03년(선조 36)에 건립하여 사액받은 사당이다. 서원철폐령 당시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은 전라도 지방의 2개 서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폐사되었다가 광복 후 지역의 유림에서 재건립하였으며, 1974년 5월에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