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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군(李使君)120)【정(晸)】이 찾아온 데 대해 사례하다 謝李使君【晸】來訪 사군께서 한가한 때를 틈타 물외(物外)를 노니시니물외의 전원 양기(陽氣)를 향해 새롭네121)은색 빗 꽂은 여인들 웃음 머금고서 두모(杜母)122)를 맞이하고철관(鐵官)은 취기 타고 도후(刀侯)123)께 절하네124)이끼 자란 뜰 신선의 신발에 밟혀 뜯어지고125)초가집에 지방관의 수레126) 처음으로 머무르네사람이 강성(江城)을 떠나 승적(勝跡)에 머무르니흰 구름 예전처럼 숲과 언덕을 감싸네 使君投暇物外遊物外田園向九新銀櫛含嚬延杜母鐵官乘醉拜刀侯苔庭踏裂仙鳧舃草屋初停皁盖輈人去江城留勝跡白雲依舊擁林邱 이 사군(李使君) 이정(李晸)을 가리킨다.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함흥 판관(咸興判官), 밀양 부사(密陽府使), 고성 군수(高城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56년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양기(陽氣)를 향해 새롭네 '양기(陽氣)'의 원문은 '구(九)'다. 《주역》에서는 양효(陽爻)를 '구'라 한다. 봄날이 되어 양기가 충만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두모(杜母)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사람 두시(杜詩)가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자, 남양 사람들이 "앞에는 아버지 같은 소신신이 있고 뒤에는 어머니 같은 두시가 있다네.[前有召父 後有杜母]"라 칭송한 데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31 杜詩列傳》 도후(刀侯) 지방관을 뜻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준(王濬)이 어느 날 칼 세 자루를 들보에 걸어 놓았는데, 그날 밤 꿈에 칼 한 자루를 그 곁에 더 걸어놓은 꿈을 꾸고는 이를 불길하게 생각하였다. 이의(李毅)가 그 꿈을 해석하기를, "칼 세 자루는 곧 고을 주[刕] 자인데 칼 한 자루를 더하였으니, 이는 곧 익주(益州)가 된다. 그러니 그대가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될 길몽이다."라 하였는데, 뒤에 과연 왕준이 익주 자사가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42 王濬列傳》 은색……절하네 소식(蘇軾)의 시 〈오잠영조동년야옹정(於潛令刁同年野翁亭)〉에, "산사람은 취하고 나면 철관을 떨어뜨리고, 골짜기 여인들 웃을 적엔 은빗이 나직하구나.[山人醉後鐵冠落 溪女笑時銀櫛低]"라 하였다. 옛날부터 오잠(於潛) 지방의 여인들은 은으로 만든 한 자나 되는 큰 빗을 머리에 꽂았다고 한다. 《蘇東坡詩集 卷9》 이정이 부임해 있는 곳이 남쪽 지역인 전라도 남평이므로, 중국 남부에 해당하는 절강성(浙江省) 오잠의 정경과 풍속을 전고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끼……뜯어지고 원문은 '부석(鳧舃)'이다. 신선이 신는 신발을 말하는데, 흔히 지방 수령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후한(後漢) 사람 왕교(王喬)가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매월 초하루 보름이면 반드시 궁궐에 조회를 하고 나갔는데 뒤따라 온 거기(車騎)도 없었다. 그를 이상히 여긴 황제가 태사(太史)에게 밀령을 내려 지켜보게 하였더니, 그가 올 때쯤에 동남쪽에서 오리 두 마리가 날아오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그물을 던져 잡았더니 속에 오직 신발 한 짝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方術傳》 이정이 자신의 누추한 집을 방문해 준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방관의 수레 원문의 '조개(皁盖)'는 흑색의 수레 덮개라는 뜻으로, 곧 지방관을 가리킨다. 《후한서·여복지 상(輿服志上)》에, "중 2000석과 2000석은 모두 수레 덮개를 흑색으로 한다.[中二千石 二千石皆皁蓋]"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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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죽림사(竹林寺)182)를 노닐며 重遊竹林寺 20년 만에 지금 이렇게 다시 찾아오니골짜기 난초와 숲속 새 마치 지음(知音)과 같네냇물은 거울면을 펼쳐 돌아가는 길을 맞이하고산은 우뚝한 모습183) 활짝 열어 객의 옷깃을 향하네대나무엔 낭간(琅玕) 있으니 봉황이 깃드는 곳이요184)구름은 소나무와 계수나무에 머무르니 난새 묵는 봉우리라네선방(禪房)의 창가에서 3일 동안 분향하고 앉으니고요하고 묵묵하여 도리어 입정(入定)185)하는 마음과 같네 二十年今此重尋谷蘭林鳥若知音川開鏡面迎歸路山豁孱顔向客襟竹有琅玕棲鳳處雲留松桂宿鸞岑禪窓三日焚香坐靜默還如入定心 죽림사(竹林寺)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중봉산에 있는 절이다. 440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종죽암(宗竹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뚝한 모습 원문은 '잔안(孱顔)'이다. 큰 산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말한다. 대나무엔……곳이요 '낭간(琅玕)'은 옥과 비슷한 아름다운 돌인데, 흔히 대나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봉황은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의 전(箋)에,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鳳凰之性 非梧桐不棲 非竹實不食]"라 하였다. 입정(入定) 중이 고요히 앉아 마음을 수렴하여 잡념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한 곳에 고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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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除夕)에 감회를 쓰며 스스로 슬퍼하다 除夕書懷自悼 인간 세상에서 오늘은 마음 아파할 만하니송구영신(送舊迎新)하는 것이 이 날이라네하늘은 하룻밤을 가지고 을(乙)과 병(丙)을 나누고187)땅은 삼경(三更)의 밤을 따라 겨울과 봄을 구분 짓네들판의 뽕나무188)에 온화한 양기가 이르는 것을 차마 보겠는가촌초(寸草)189)에 계절이 새로워지는 것을 견디기 어렵네세 가지 즐거움190)에 대해 누가 감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화락한 형제가 함께 부모를 모셨으면【선생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 평생의 그리움191)이 있었고 의지할 형제192)가 없었으며 30세가 넘도록 대를 이을 자손도 없었다. 그러므로 시의 뜻이 이처럼 슬픈 것이다. '천향(天向)'은 어떤 본에는 '연향(年向)'으로 되어 있고, '지종(地從)'은 어떤 본에는 '시종(時從)'으로 되어 있다.】 人間今日可傷神送往迎來在此辰天向一宵分乙丙地從三夜限冬春原桑忍見陽和至寸草難堪節序新三樂誰能無所感怡怡兄弟共親親【先生桑梓永感。棣花無依。年踰三十。且無血胤。故詩意如此悲悼。天向一作年向。地從一作時從。】 을(乙)과 병(丙)을 나누고 이날이 '을(乙)' 자년에서 '병(丙)' 자년, 즉 을미년(1655, 32세)에서 병신년으로 넘어가는 때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듯하다. 들판의 뽕나무 '뽕나무'는 부모가 살던 고향 또는 고향의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뜻한다. 《시경》 〈소반(小弁)〉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공경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 하였는데, 그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선대에서 심은 것이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촌초(寸草) 한 치의 작은 풀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심을 이르는 말이다. 당(唐)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유자음(游子吟)〉에, "한 치의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을 가지고서, 봄날의 햇볕 같은 어머니의 사랑을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세 가지 즐거움 원문은 '삼락(三樂)'이다. 군자(君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며 형제가 무고(無故)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람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평생의 그리움 원문은 '영감(永感)'이다. 부모(父母)를 모두 여의어 길이 감모(感慕)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부모 모두 생존 시에는 구경(具慶), 부친만 생존 시에는 엄시(嚴侍), 모친만 생존 시에는 자시(慈侍), 부모 모두 여의었을 때에는 영감이라고 하였다. 형제 원문은 '체화(棣花)'다. 곧 상체화(常棣花)로, 꽃이 서로 뭉쳐 피므로 흔히 형제에 비유한다. 《시경》 〈상체(常棣)〉에, "아가위꽃 그 꽃송이 울긋불긋 아름답네. 오늘의 모든 사람 중에 형제보다 좋은 건 없네.[常棣之華 卾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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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愼氏)91)【성필(聖弼)】에게 답하는 편지 答愼【聖弼】書 장암(塲巖)에서 한번 모셨을 때는 몹시도 경황이 없었는데, 헤어진 뒤에 고요히 조섭하시는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이전 편지에서 말씀드린 예(禮)에 대한 의문점은 비록 직접 뵌 자리에서 대략 논하였습니다만, 끝내 결론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상세히 생각해보니,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신 "비록 6, 7대라도 현재의 종자(宗子)와 상의하여 결정한다."라는 것92)은 장방(長房)으로 체천(遞遷)한 종자93)가 여전히 장방의 별묘(別廟)에서 주인이 됨을 말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말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대종자(大宗子)가 되었으면 비록 고조(高祖)의 사당이 헐려서 6, 7대에 이르렀더라도 온 집안이 모두 종통(宗統)으로 받들어 종법(宗法)을 그에게 부친다고 말씀하신 것인 듯합니다. 주자(朱子)께서 말씀하신 "고조의 사당이 헐리면 다시 종통으로 받들지 않는다."라는 것94)은 고조의 신주가 이미 봉사(奉祀) 대수가 다하지 않은 방(房)으로 옮겼다면 봉사 대수가 아직 다하지 않은 손자 가운데서 그 종통을 별도로 세우고 대종(大宗)의 봉사 대수가 다한 자는 다시 종통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보건대 정자의 설은 종법의 총론(統論)이요 주자의 말은 제법(祭法)의 세목으로, 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지만 장방이 제사를 주관하는 데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대개 5대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에 있어 참람된 것이니 지금 마땅히 신주를 묻어야 합니다. 그러나 방계(傍系) 손자의 봉사 대수가 아직 다하지 않아 차마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제사를 대신 주관하는 것입니다. 종자된 자는 복(服)이 다하고 정(情)이 다하여 감히 그 사당에서 참람되이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또한 어찌 감히 참람되이 방친(傍親)의 사당에서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인정(人情)과 천리(天理)로 볼 때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한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고명하신 그대의 뜻은 어떠하십니까?대저 예라는 것은 천리의 절문(節文)95)이니, 천리가 분명하지 않으면 절문이 상세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평소 큰 근본을 세우고 의리를 밝히지 못하여 미발(未發)하였을 때 전체(全體)가 중(中)에 맞지 않고 이발(已發)한 뒤에 대용(大用)이 조화롭지 못하여96) 범상한 일에도 아는 것이 모호하니, 세세하고 정미한 절문과 의도(儀度), 지극히 정밀한 성현(聖賢)의 말뜻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밝게 헤아려 지극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들이 해야 할 오늘날의 급선무는 모두 '경(敬)에 처하여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지극히 한다.[居敬立本窮理致知]'라는 여덟 글자에 있습니다. 여덟 글자의 지름길이 종이 위에 있으니 말하는 자가 마음 위의 길에서 돌이켜 구하여 종이 위와 마음 위를 합쳐서 하나로 만든다면, 이것을 천지만물에까지 미루어 어디를 가든 천리의 절문에 합치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고금의 예설(禮說)에 대한 책은 책상 문서 위에 겹겹이 쌓여 한갓 뜻을 상하게 하는 완물(玩物)97)이 될 뿐일 것입니다.비루한 저는 이러한 점에 대해 견해가 있으나 아직 미치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이에게 질정을 구하고자 하므로 이전 편지의 질문으로 인하여 아울러 언급하는 것이니, 그대98)는 다시 상세히 궁구하여 만약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塲巖一奉。殊甚草草。未知別後靜養何似。前書禮疑。雖略面論。終未歸宿。更詳思之。程子所謂雖六世七世。計會今日之宗子者。恐非謂遞遷長房之宗子。尙爲主人於長房之別廟也。細看語意。似謂旣爲大宗子。則雖高祖廟毁而至於六七世。一家皆宗之而宗法寓焉者也。朱子所謂高祖廟毁。不復相宗者。高祖之主。旣遷於親未盡之房。則別立其宗於親未盡之孫。而大宗親盡者不復爲宗也。作此意看之。程子之說。宗法之統論也。朱子之言。祭法之細目也。各有所主。而不害其爲長房之主祭矣。盖祭及五世。在禮爲僭。今當埋主而支傍之孫親旣未盡。不忍不祭。故遞主其祭。爲宗子者。服盡情盡。不敢僭祀於其廟。則亦安敢僭爲主人於傍親之廟哉。人情天理。的似無疑。未知於高意如何。大抵禮者。天理之節文也。天理未明則節文未詳。吾輩平日不能立大本明義理。未發之前。全體未中。旣發之後。大用未和。尋常事爲。所見糊塗。則至於節文儀度之纖悉深微。聖賢言意之至精至密。以何者而照鑑得至歟。是以吾輩今日急務。全在於居敬立本竆理致知八字上矣。八者蹊徑。在於紙上。說話者反而求之心上路脉。紙上心上合渾爲一。則以此推之天地萬物。無往而不合於天理之節文矣。不然則古今禮說簡冊。堆疊於案牘。徒爲喪志之玩物矣。鄙人有見於此而未及者也。欲求正於同志。故仍前書之問而幷及之。汝賚更加詳究。如有不合者。幸許相敎。 신씨(愼氏) 신성필(愼聖弼)을 가리킨다. 자는 여뢰(汝賚), 호는 경암(敬庵)이다. 감사를 지낸 신희남(愼喜男)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신광익(愼光翊), 형은 참봉 신성윤(愼聖尹)이다. 정자(程子)께서……것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7에, "무릇 소종(小宗)은 5대로 법을 삼아 봉사(奉祀) 대수가 다하면 친족은 흩어진다. 만약 고조(高祖)의 아들이 아직 살아있어서 그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현재 종자(宗子)가 된 자가 비록 6, 7대라도 또한 모름지기 현재의 종자와 상의하여 결정하고, 그런 뒤에 그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 이는 종자에게 군주의 도가 있기 때문이다.[凡小宗以五世爲法 親盡則族散 若高祖之子尙存 欲祭其父 則見爲宗子者 雖是六世七世 亦須計會今日之宗子 然後祭其父 宗子有君道]"라 하였다. 장방(長房)으로 체천(遞遷)한 종자 '체천(遞遷)'은 봉사(奉祀) 대수(代數)가 다한 선조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보통 최장방(最長房)의 집으로 옮기는데, 최장방은 4대 이내의 자손 가운데 항렬이 가장 높은 연장자를 말한다. 주자(朱子)께서……것 《회암집(晦庵集)》 권51 〈답동숙중(答董叔重)〉에, "고조의 사당이 헐리면 이 사당을 함께 하는 자는 단문(袒免)의 친척이 되니, 다시 종통으로 받들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5대가 되면 옮긴다.'는 것이다.[高祖廟毀 則同此廟者 是爲袒免之親 不復相宗矣 所謂五世而遷也]"라 하였다. 천리의 절문(節文) 《논어》 〈학이(學而)〉에 "예를 적용할 때는 차분하고 각박하지 않게 하는 것이 귀중하다.[禮之用 和爲貴]"라 하였는데, 주희(朱熹)는 이를 해설하면서 "예라는 것은 천리에 의해 차등적으로 매겨진 등급이자 인간사에서 마땅히 준수해야 할 법칙이다.[禮者 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也]"라 하였다. 전체(全體)가……못하여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5장에, "대학에서 처음 가르칠 때 반드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그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가지고 더욱 궁구해서 그 지극함에 이르는 것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한다.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아침에 돌연히 관통하게 되면 모든 사물의 표리와 정조가 이르지 않음이 없게 되고 내 마음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을 '격물(格物)'이라 이르며, 이것을 '지지지(知之至)'라 이른다.[大學始敎 必使學者 卽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 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라 한 데서 온 말이다. 뜻을……완물(玩物)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에 몰두한 나머지 소중한 자기의 본심을 잃어버린다는 뜻의 '완물상지(玩物喪志)'에서 취한 말이다.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하찮게 여기면 덕을 잃고, 좋아하는 사물에 빠지면 뜻을 잃는다.[玩人喪德 玩物喪志]"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대 원문은 '여뢰(汝賚)'다. 신성필의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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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愼氏)【성필(聖弼)】에게 답하는 편지 答愼【聖弼】書 일전에 소은공(素隱公)110)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소미성(小微星)이 빛을 숨기는 아픔111)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혹서와 질병으로 인해 아직까지 편지 한 통을 올려 위로를 드리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손수 쓰신 편지를 먼저 받게 되니 열어서 읽고 난 뒤 부끄러운 마음 끝이 없습니다. 하늘이 어찌 유독 우리 호남에만 이렇게까지 액운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학문이 우리나라에 크게 행해진 뒤로 훌륭하고 뛰어난 재사(才士)들이 호남에 많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가법(家法)을 마음에 둔 사람은 존재(存齋)112)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사이에 다행히 성암(惺菴)113)이 나왔으니, 후학들의 기대가 어떠하였습니까? 그러나 우러러볼 곳을 잃은 아픔114)이 농부가 가을 추수를 바라는 듯이 하는 날에 갑자기 일어났으니, 이른바 하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또 생각건대 선생께서 의발(衣鉢)을 전해주신 것이 불행히도 더욱 드무니, 마음으로 전하신 뜻을 계승하여 선생의 명성을 영원히 실추시키지 않을 자는 또한 현공(賢公) 형제 중에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현공께서 자임(自任)하실 중임은 평소 함장(函丈)115)을 가까이서 모실 때와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현공께서는 힘쓰십시오.보내주신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니, 슬프고 애통하며 간절하고 애처로운116) 말에서 저를 비루하다고 하여 외면하시지 않는 뜻을 충분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제넘고 경솔하게 이러한 점을 언급하였으니, 도리어 두렵고도 부끄럽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日前聞素隱公捐館之音。不任小微隱光之痡。顧以酷炎病苦。尙稽一奉書以慰。玆承以手書先之。開讀之餘。愧騂無極。天何獨厄於我南湖一至於此歟。自b036_382a斯學之大行於鰈邦。豪才傑士。非不多於南湖。而至以程朱家法存心者。存齋一人而已。而百年之間。幸得惺菴之出。則後學之望如何如何。而安仰之痛。遽發於如農望秋之日。所謂天者不可諶矣。且念先生衣鉢之傳。不幸又鮮。紹述心傳之旨。永不墜門墻之聲者。亦不在於賢公伯仲間耶。自此賢公自任之重。有大異於平日跬步函丈間也。惟賢公勖之。細讀來書。悲哀懇測之辭。足見不以卑鄙爲外之意。僭率及此。還覺悚愧。伏惟情諒。 소은공(素隱公) 신천익(愼天翊, 1592~1661)을 가리킨다. 소은(素隱)은 그의 호.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거(伯擧)다. 1612년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이조 참의를 지냈는데,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사직하여 전라남도 영암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사간원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54년에 다시 나와서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이조 참의, 이조 참판, 한성부 우윤 등을 역임한 뒤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소미성(小微星)이……아픔 '소미성(少微星)'은 처사(處士)를 상징하는 별이다. 이 별이 희미해지거나 떨어지면 인간 세상의 처사(處士)가 죽는다고 한다. 진(晉)나라 사부(謝敷)는 자가 경서(慶緖)인데, 성품이 맑고 욕심이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태평산(太平山)에 10여 년 동안 은거하였다. 하루는 달이 소미성을 범하자 점치는 사람이 "처사가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명망이 높았던 대규(戴逵)가 죽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부가 죽었다고 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謝敷》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가리킨다. 존재(存齋)는 그의 호.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다른 호는 고봉(高峯)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 병조 좌랑, 이조 정랑,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사헌부 헌납 등을 역임하였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이후 대사성, 대사간, 공조 참의 등을 지낸 뒤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을 편찬하는 등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이황과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일이 유명하다. 성암(惺菴)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을 가리킨다. 성암(惺菴)은 그의 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이다. 1633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 병조좌랑,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42년 재차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사은한 뒤 바로 전리(田里)로 내려갔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우러러볼……아픔 원문은 '안앙지통(安仰之痛)'이다. 훌륭한 스승이 죽은 데 대한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꺾이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 노래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함장(函丈) 한 길[丈]을 용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스승과 강론하는 자리를 의미하며, 스승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만약 음식을 대접하는 손님이 아니고 스승과 강론하는 자리이면 자리를 펴되 한 길쯤 되는 공간을 띄운다.[若非飮食之客 布席 席間函丈]"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애처로운 원문은 '측(測)'인데, 문맥을 살펴 '측(惻)'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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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언(李正言)117)【수인(壽仁)】에게 답하는 편지 答李正言【壽仁】書 신군(愼君) 형제118)가 연이어 방문하여 이를 통해 훌륭한 소식을 가득 얻었으니, 조금이라도 만나서 조용히 이야기 나누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천금과 같이 귀한 편지를 멀리 텅 빈 골짜기119)로 보내주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도(道)를 닦으시는 체후가 맑고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몹시 마음이 확 트입니다.다만 생각건대 선진(先進)이 후진(後進)을 이끌어 나아가게 하는 데 있어서는, 차근차근 순서를 두어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에 이르고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곳에 이르러 발꿈치를 세워 정하고서120) 실제적인 힘을 점차 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보내주신 말씀 가운데 '남쪽 너머에서 우뚝하다', '도의(道義)를 창도하였다'는 등의 몇 마디 말은 비록 초학자를 격동시켜 광대한 전지(田地)에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두터운 뜻이지만, 비루한 저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몇 마디 말들은 비록 노사(老師)나 숙유(宿儒)에게 해당시키더라도 반드시 두려워하며 움츠리고 물러나 감히 자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비루하고 못난 저와 같은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편지지를 앞에 두고서 망연(茫然)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영악(靈岳)에서의 기이한 유람은 평소 꿈에 그리던 것이었으며 도(道)가 높으신 분을 받들어 모시는 것 또한 하나의 성대한 일이니, 한 번에 두 가지를 획득하는 것은 좀처럼 얻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속세의 번거로움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잡다한 일로 인해 기회를 잃고 말았으니, 마시고 쪼아 먹는 데에도 또한 운수가 있음을 비로소 알겠다. 남쪽을 바라봄에 서글픈 마음이 지극하였다.】 愼君兄弟相繼來尋。是用飽得蘭聞。思欲少奉從容而不可得也。何意千金珍札。遠投虗牝。仍審道履淸迪。伏豁伏豁。第念先進之引進後進。當旋旋有序。自近及遠。由下至高。使之立定脚跟。漸用實力。來喩南表之特道義之倡數語。此雖激動初學。使之進步於廣大田地之厚意。然鄙意以爲此數等語。雖使老師宿儒當之。必慄慄退縮而不敢處也。况陋劣者耶。不勝臨紙憮然。【靈岳奇遊。夙日夢想。承接道宇。亦一盛事。一發兩獲難得之擧。而塵煩未幻。冗故有奪。始知飮喙亦有數也。南望悵然之至。】 이 정언(李正言)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을 가리킨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 호는 성암(惺菴)이다. 1633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 병조좌랑,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42년 재차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사은한 뒤 바로 전리(田里)로 내려갔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신군(愼君) 형제 김만영과 교유하던 신성필(愼聖弼) 형제를 가리키는 듯하다. 신성필은 성균관 생원 신광익(愼光翊)의 아들로, 형은 신성윤(愼聖尹), 아우는 신성망(愼聖望)이다. 텅 빈 골짜기 원문은 '허빈(虗牝)'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골짜기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자신이 은거하는 곳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증최립지평사(贈崔立之評事)〉 시에, "가련하다. 쓸데없이 정신만 허비할 뿐, 황금을 텅 빈 골짜기에 던지는 것과 같도다.[可憐無益費精神 有似黃金擲虛牝]"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韓昌黎集 卷4》 발꿈치를 세워 정하고서 원문은 '입정각근(立定脚跟)'이다. '각근'은 기초‧기본‧근저를 의미하는 말로, '발꿈치를 세워 정한다'는 것은 곧 학문의 기초‧기본을 튼튼히 다진다는 뜻이다. 《소학집주(小學集註)》 총론에서 주희(朱熹)가 "지금은 모두 소학의 공부를 놓치고 지나쳐 버려 다시 돌아가 공부할 수 없으니, 다만 지금의 처지에 의거하여 곧바로 머물러 발꿈치를 세워 정하고 공부해야 한다. 30세에 깨달았다면 곧 30세부터 발꿈치를 세워 정하고 공부를 하며 곧 나이 8, 9십 세에 깨달았다면 또한 마땅히 현재 처한 상황에서 공부해야 한다.[今都蹉過了 不能更轉去做 只據而今地頭 便劄住立定脚跟做去 如三十歲覺悟 便從三十歲立定脚跟做去 便年八九十歲覺悟 亦當據現在劄住做去]"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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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李生)【유인(有仁)】에게 주는 편지 與李生【有仁】書 누추하고 궁벽한 곳에 거듭 방문해주시고 또 지은 글을 보여 주시니, 배움에 대한 뜻이 두텁고 논의가 넓음을 흠모하고 공경합니다. 기본이 이와 같으니, 수립하는 것의 어려움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몹시 탄복할 따름입니다.다만 세상에서 이 일을 하는 자는 두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마음 지키기만을 전적으로 하는 자는 문자를 천하게 여기고 언사(言辭)를 풍부하게 하는 자는 본체를 소홀히 여기니, 이는 고금의 공통되는 근심입니다. 초학자는 다만 마땅히 옛 사람이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하고 법도를 어기지 않아 견문을 넓히고 몸소 실천하며 몸소 실천하고 마음과 몸을 밝게 한 뒤에야 말을 하고 글을 이루어 선현(先賢)들에 부합하고 후세에 모범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육경(六經)의 전술(傳述)이 천하를 두루 방문한 뒤에 이루어졌고143) 두 책의 장구(章句)가 기유년(1189년)에 지어졌던 것144)이니, 도(道)가 무르익고 덕(德)이 이루어진 때에 말을 세운 것은 도가 행해지지 않은 뒤에 지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 글자라도 혹 잘못되어 후세 사람을 그르칠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루하고 못난 견해로 평소 정한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에 감히 대략 언급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어진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말에 병통이 있다면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대가 지은 글 가운데 두세 군데 의문이 있는 곳에 모두 먹을 칠하여 표시하거나 각주를 달아 두었습니다. 비루한 견해가 맞는지 틀린지를 또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찾아와 주신 데 감격하여 광망함과 경솔함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몹시도 부끄럽습니다. 봄이 저물기 전에 혹 직접 만나서 물을 수 있겠습니까? 重臨陋僻。又辱眎所製文篇。欽尙向學意篤。論議廣博。根基若此。何患樹立之難也。傾服傾服。但世之爲此事者有二病。專內守者賤文字。富言辭者忽本軆。此古今之通患。初學但當遵守古人成法。不違繩墨。聞見博而踐履實。踐履實而心體明。然後吐言成章。可以有符於往哲。垂法於來世。是以六經傳述。成於歷聘之後。二書章句。述於己酉之年。盖以言立於道熟德成之日者。非徒不行而後作也。亦恐一字或舛。以誤後人也。鄙拙之見。素定如此。故玆敢略及。未知賢意以爲如何。其言有病。幸相箴可也。賢述文字二三所疑處。皆以墨抹以標之。或有註脚。鄙見得失。亦可回敎。感惠顧之勤。狂率至此。愧仄萬萬。春未暮。或可面扣耶。 육경(六經)의……이루어졌고 '육경(六經)'은 유가(儒家)의 여섯 가지 경서를 말한다. 곧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로,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뒤인 말년에 편찬하였다고 전해진다. 두……것 주희(朱熹)가 60세 되던 1189년에 《대학장구》와 《중용장구》를 완성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희는 〈대학장구서〉와 〈중용장구서〉를 각각 1189년 2월과 3월에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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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직(鄭處直)152)에게 부치는 편지 寄鄭處直帖 요즈음 평소 한가하게 지내시는 체후를 진중히 하고 계십니까? 듣건대 어제 공들이 거문고를 가지고 함께 노래 부르며 월연대(月延臺) 위에서 성대한 모임을 가지셨다고 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국상(國祥)153)이 바로 이 달에 있어 군부(君父)께서 아직 담복(禫服)154)을 입고 계신데, 신민(臣民)이 된 자가 높은 곳에 올라 음악을 연주한다면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처(私處)에 있더라도 오히려 해서는 안 될 일인데, 하물며 전패(殿牌)155)를 봉안하는 읍부(邑府)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해서는 안 될 일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공들은 평소에 원래 마음을 다하고 독실하게 행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이가 이미 연로하였으니,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재(齋) 안의 신진(新進)으로서 배움에 뜻을 둔 사람들이 반드시 공들을 모범이 되는 선진(先進)으로 여길 것이요, 이러한 일 또한 반드시 본보기로 삼을 것이니, 이는 경계하고 두려워할 지점이 아니겠습니까? 비루한 제가 공들에 대해 소회가 있어 굳이 이와 같이 고하였으니, 바라건대 주제넘고 경솔한 점에 대해 노여워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此日雅况珍嗇。聞昨日公輩。携琴與歌。高會月延臺上云。未知果然耶。國祥未經本月。君父尙在服禫之中。爲臣民者登高作樂。無乃未安耶。在於私處。猶爲不可。况邑府殿牌奉安之地乎。决知其不可爲也。公輩平日。元非苦心篤行之人。而年已老矣。不足云矣。齋中新進向學之人。必以公輩爲先進表率之人。如此等事。亦必爲準式。則此非警懼處乎。鄙人於公輩。有懷必告如此。幸怒僭率如何。 정처직(鄭處直) 정지(鄭榰)를 가리킨다. 자세한 사항은 미상이다. 국상(國祥) 국상(國喪)의 소상(小祥)이나 대상(大祥)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효종(孝宗)의 대상을 가리킨다. 담복(禫服) 대상(大祥)을 치른 다음 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담제(禫祭) 때 입는 옷을 말한다. 전패(殿牌)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봉안한 '전(殿)' 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다.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관리 전부가 모여 배례(拜禮)하였다. 훼손이나 모독하면 불경(不敬)으로 처리되어 당사자는 물론이고 수령(守令)과 그 고을까지 처벌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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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 백민징(白敏徵) 교지(敎旨) 3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白敏徵 英祖 서울 종로구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773년(영조 49)에 국왕이 백민징(白敏徵)을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 1773년(영조 49) 3월에 국왕이 백민징(白敏徵)을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조선시대 무신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명으로 해당 관직에는 중추부(中樞府)의 첨지사(僉知事)가 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는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정원은 8명이다. 위로 영사(領事) 정1품 1원, 판사(判事) 종 1품 2원, 지사(知事) 정2품 6원, 동지사(同知事) 종2품 8원이 있고, 아래로 종4품인 경력(經歷) 1원과 종5품인 도사(都事) 3원이 있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이 교지를 포함하여 백민징의 교지가 4건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80세가 넘어 수직(壽職)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실직(實職)에 임명된 것은 아니다. 이 교지가 소장된 영암의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의 호구단자를 포함하여, 그의 아들 백창윤(白昌潤), 손자 백경옥(白慶玉), 증손 백사형(白思亨) 등의 호구단자 11점이 소장되어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작성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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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五十一年丙午正月日靈巖郡昆二始面長田里戶籍單子第二統統首白慶玉第一戶幼學白慶玉年四十三甲子 本水原奉母金氏齡六十八己亥籍光山父學生 昌潤祖嘉善大夫中樞府事 敏徵曾祖學生 信憲外祖學生 金壽龍本光山妻張氏年三十七庚午籍仁同父學生 天翼祖學生 漢佑曾祖學生 善長外祖學生朴師德 本密陽賤口婢信良年四十一乙丑丙寅逃亡等庚子戶口相凖者行郡守[署押] [周挾 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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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乾隆五十一年丙午正月日 白慶玉 行郡守 乾隆五十一年丙午正月日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786년(정조 10) 정월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長田里) 2통 1호에 거주하는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 1786년(정조 10) 정월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2통 1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43세로, 어머니 김씨(金氏)(68), 처(妻) 장씨(張氏)(37)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은 당시 2통의 통수(統首)이기도 하였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41살 먹은 계집종 신량이 있었지만 지난 병인년에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庚子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경자년, 즉 1780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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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잠 自警箴 하늘이 너를 낳고세상에 내리면서이름을 사람이라 하고너의 사체를 갖춰주었다선한 성품을 부여하고아름다운 자질 주면서심을 그 장수로 삼고지를 그 병졸로 삼았다[어떤 본에는 '기'로 되어 있다.]밖에 몸을 이룬 건이목구비요안에 정해진 건인의예지다상제가 너에게 일러"너에게 허령40)을 주니안으로 너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지 말고밖으로 너의 몸을 태만하게 하지 말라" 했으니오직 공경하고 의롭게 하여곧게 하고 바르게 하라상제가 너에게 일러"너에게 지각을 주니너의 기를 태만히 펴지 말고너의 사욕을 지나치게 하지 말라" 했으니오직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라상제가 너에게 일러"너에게 천명을 주니너의 행위를 경솔히 하지 말고너의 동정을 잊지 말라" 했으니오직 장중하고 신중히 하여진실로 그 성을 따라야 하리상제가 너에게 일러"명철해야 성스럽게 되니흐리멍덩 어둡지도 말고꼿꼿하여 광망하지 말며선을 숨겨 감추지 말고악을 가려 키우지 말라" 했으니밝게 하고 드러내서너의 빛을 나타내라아 너 소자여상제가 이미 너에게 명했으니너의 몸을 태만히 하지 말고진실로 상제의 명을 받들라홀로 있으니 삼가지 않는다 하지 말고어두운 곳이라 공경하지 않는다 하지 말라상제가 너를 굽어보고반드시 너에게 재앙을 내리리라안과 밖을 장중하고 공경히 하여혹시라도 감히 잊지 말라겉과 속을 단정하고 전일하게 하여너의 지조를 소홀히 말라상제가 너를 굽어보고반드시 너에게 복을 내리리라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너의 용의를 태만히 하지 말고취하고 버림을 공명히 하여너의 심사를 음탕하게 하지 말라상제가 너를 굽어보고반드시 너에게 죄를 내리리라의롭지 않은 재물을 탐하지 말고예가 아닌 부귀를 부러워 말지니상제가 너를 굽어보고반드시 큰 복록을 주시리라아 너 소자여반드시 삼가고 독실하게 하며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상제의 명을 어기지 말라 天乃生汝。 降之于世。 名之曰人。 具汝四軆。 稟之以善性。 投之以美質。 心爲之師。 志 一作氣 爲之卒。 軆之於外。 耳目口鼻。 定之於內。 仁義禮智。 上帝謂汝。 投爾虛靈。 勿內荒爾心。 勿外慢爾形。 惟敬惟義。 以直以方。 上帝謂汝。 稟爾知覺。 勿怠舒爾氣。 勿放過爾慾。 惟精惟一。 以克以復。 上帝謂汝。 賦爾于命。 勿輕爾作爲。 勿忘爾動靜。 惟莊惟愼。 允率厥性。 上帝謂汝。 惟明作聖。 勿汶汶而昏。 勿狷狷而狂。 勿隱善而藏。 勿揜惡而長。 惟明惟顯。 用表爾光。 嗟汝小子。 帝旣命汝。 毋怠汝躬。 允承帝命。 毋謂獨而不愼。 毋謂暗而不敬。 上帝臨汝。 必降爾殃。 內外莊敬。 毋或敢忘。 表裏端一。 毋忽汝執。 上帝臨汝。 必降汝福。 夙興夜寐。 毋怠爾容儀。 取舍公明。 毋淫爾心思。 上帝臨汝。 必降爾罪。 毋貪不義財。 毋慕非禮貴。 上帝臨汝。 必投介祿。 嗟汝小子。 必愼必篤。 夙夜孜孜。 毋虧上帝命。 허령(虛靈) 텅 빈 가운데 신령하다는 뜻으로 마음을 가리킨다. 《대학장구》 경1장 명덕(明德)의 주에서 주희(朱熹)는 "밝은 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만사에 수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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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가장 家狀 [羅晩成] 선생의 휘는 만영(萬英)이요, 자는 영숙(英叔)인데 뒤에 군실(羣實)로 고쳤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선계는 당악(棠岳)에서 나왔다. 정유년(1597, 선조30)의 전란 때 가보(家譜)를 지키지 못해 고려(高麗) 이상은 징험할 수가 없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서 휘 인(忍)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는데 묘소가 나주(羅州)에 있어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부총관의 손자 휘 종(琮)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다. 정언의 아들 휘 효정(孝禎)은 진사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는데 선생에게는 5대조가 된다.고조 휘 두(㪷)는 진사(進士)로 호가 모암(慕庵)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를 당해서 본주[羅州]의 진사 11인과 함께 성균관에서 의리를 주창하며 특별히 정암(靜菴)1) 조 선생(趙先生)의 원통함을 변론하였다. 증조 휘 태각(台角)은 관직이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에 이르렀다. 조부 휘 원록(元祿)은 사암(思菴) 박 상공(朴相公)2)에게 수업하였는데 뜻을 독실하게 하고 몸을 삼갔는데 왜노(倭奴)의 변란에 참혹하게 일가의 화를 당했고 이때부터 과거(科擧) 공부에 대한 뜻을 끊었다. 부친 휘 태읍(泰洽)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향해(鄕解)3)에 여러 번 수석을 하였으나, 광해군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한 번도 복시(覆試)에 나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개연(慨然)히 생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고, 송호(松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송호공은 나주 나씨(羅州羅氏) 생원 원길(元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4) 2월17일 귀업리(龜業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이 태어나던 밤, 모친의 꿈에 어떤 사람이 명주(明珠) 하나를 주니 광채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선생이 태어났다. 선생은 용모가 단정하고 장중하였으며 말을 배울 때부터 이미 문자를 알았다. 나이가 7~8세 되자 말과 행동이 차분하고 무거웠으며 시를 지으면 항상 놀랄만한 시어가 있었다. 비록 남이 보지 않는 방에서도 반드시 종일토록 바르게 앉았고, 아이들과 어울릴 때도 싸우거나 빠르게 달린 적이 없었다. 12세에《대학》과 《중용》을 읽었는데 깊이 잠기고 반복하면서 한밤중까지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는 과거공부에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권하면 웃기만 하고 답을 하지 않았다.하루는 송호공에게 여쭈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거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선비의 포부는 매우 중대한지라 진실로 이것에 전념할 수는 없습니다. 옛 사람 중에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善)으로만 이름을 이루지 않았던 자가 있으니5) 이것이 가장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마침내 다시는 사장(詞章)을 강제하지 않았다. 손수 《용학도(庸學圖)》6)를 그리고 또 설을 지어서 자리에 걸어 두고서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였다.13세에 《논어》·《맹자》·《주역》 등 여러 책을 가지고 차례로 읽으면서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의리가 귀착되는 취지에 대해 하나라도 알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새도록 자지 않고 반드시 끝까지 연구한 뒤에야 그쳤다. 또 《시경》·《서경》·《예경》·《춘추》 및 제자서(諸子書)와 사서(史書)에도 널리 통하여 한 번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 그러나 요점은 심오한 뜻을 깊이 찾는 데 있는 것이니 훑고만 지나가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이로부터 학업이 날로 성취되고 덕이 날로 높아졌으며 그 학문은 《주역》에 더욱 깊어졌다. 나이 겨우 14세 때, 만나본 자들이 더욱 공경하여 성덕군자(成德君子)로 지목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고을의 관아를 지나는 선비들도 만나보려는 자가 많았다.이 때 선생 일가의 남녀노소가 폐병으로 죽는 자가 이미 십여 인이었다. 송호공도 마침 남평(南平)의 집에서 그 질병에 걸렸다. 선생은 약물로 시봉(侍奉)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병이 더욱 심해지자 송호공이 일러 말하기를 "우리 집안 형제와 숙질들이 사망하여 다 사라지게 되었고 나 또한 불행히도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는 형제가 없다. 너는 나이가 어리고 자녀도 없으니 너는 의당 멀리 피해서 살기를 도모해야 한다. 네가 차마 나로 하여금 후사(後嗣)가 없는 죄를 지게 하려느냐?" 하고는 마침내 강제로 떠나게 하였다. 선생이 울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자 공은 또 계속 화를 내며 꾸짖었다. 선생은 그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항상 몸을 숨기고서 좌우에서 약을 드렸다.급기야 공이 위독해지시니7) 모친이 선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들으니 폐병에는 병충이 있어서 항상 절명할 때 남을 감염시킨다고 한다. 너는 우선 잠시 피해 기다리고 있어라." 하였다. 선생이 놀라서 울며 말하기를 "사람 자식이 죽게 되면 죽을 뿐이지 어찌 차마 부친을 버리고 저만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하면서 모친이 누차 말해도 선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모친이 울면서 밖으로 나가서 말하기를 "남편8)을 이미 살릴 수가 없는데 하나 있는 아들도 장차 보전할 수 없게 되니 박복한 이 몸은 죽어버려서 모르는 것이 낫겠다." 하고는 바로 줄을 당겨 스스로 목을 맸다. 선생이 황급히 구하여 풀고는 울면서 또 간했으나 모친은 띠로 선생의 손을 묶어놓고 또 칼로 스스로를 겨누며 떠날 수 없음을 보였다. 이 때 조모 서씨(徐氏)도 집에 있었는데 선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 어미가 너로 인해 죽게 되면 네가 어찌 자식이 되겠느냐." 하고는 외손인 나적(羅襀) 등으로 하여금 굳게 지키게 하고 다시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선생이 머리를 땅에 찧어 혼절했다가 다시 소생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그 날 송호공을 과연 구할 수 없었다. 선생은 호곡(號哭)을 상례대로 하고 정침(正寢) 문 밖에 상차(喪次)를 설치하였다. 상복을 입고 곡용(哭踊)을 하며 슬퍼하는 모습에 조문한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상복이 이루어졌을 때 모친이 또 꾸짖으며 선생에게 떠나게 하며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있으면 내가 진실로 나갈 수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만이지만 장차 나를 어느 곳에 두려 하느냐." 하였다. 선생이 붙들어 안고 울면서 간하기를 종일토록 하였는데도 끝내 청을 들어주지 않으니 곧바로 모친을 모시고 다른 마을에서 우거했다. 자신 또한 산암(山菴)에서 거처했는데 이 때 선생의 나이 15세였다.거처한 지 수 개월이 되었을 때 선생도 이 질병에 걸렸다. 선생이 울면서 말하기를 "죄를 지은 고아가 상차(喪次)를 떠났던 것은 감히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분부를 어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병이 들었으니 밖에 있은들 무엇 하겠는가." 하였다. 이어 모친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알리고 즉시 도보로 상차로 돌아와서 장구(葬具)를 준비하고 날을 잡아 장례를 치렀다.아침저녁 사이로 호곡을 하고 지나치게 슬퍼하니 병이 점차 심해져서 몸이 앙상하게 야위었으나 여전히 잠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이에 의원을 불러 침을 맞으며 뜸을 뜨고 또 천초환(川椒丸)을 복용하면서 3~4년이 흘러서야 죽음을 면하였다. 이에 탄식하기를 "운명이 기박하여 거상(居喪)에 예도 다하지 못했으니 천지간에 죄인이다. 농사를 지으며 세상을 마치는 것이 낫다." 하고는 그 당(堂)에 '명농(明農)'이라 편액하고 '남포병일(南圃病逸)'이라 자호(自號)하였다.병으로 폐기된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두문불출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한 숨이라도 남아있으면 잠시라도 태만하고 방기해서는 안 된다." 하면서 혹은 책을 펴고 익숙히 반복하여 성현의 경계에 마음을 쏟고, 혹은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에 대해 마음을 기울였다. 마음에 계합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책에 썼는데 당시에 기록한 것으로 《완물편(玩物篇)》이 있다. 향리의 관동(冠童)들이 왕래하며 학업을 물으면 그 재질에 따라 자상하게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놓쳐버린 마음을 거둬들이고 외물(外物)을 끊으면 심기가 넓고 평탄해져 저절로 즐거운 경지가 있다. 어찌 꼭 외우고 쓰는 것을 익히는 데에만 전력하겠는가." 하였다.선생은 외따로 살면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나 명예가 원근에 퍼졌고, 사람들은 친소 없이 일제히 '임하제일인(林下第一人)'이라고 칭송하였다. 벼슬아치들과 장자(長者)들도 비록 서로 대면하지는 않았더라도 또한 모두 그 명성을 부러워하고 칭찬하였다.기축년(1649, 인조27)에 향천(鄕薦)으로 선생을 교관(敎官)으로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마침 인묘(仁廟)가 승하9)하였다. 선생은 분곡(奔哭)을 하러 한양에 도착하여 다음 날 분곡의 예를 행하였다. 또 다음 날엔 사은숙배(謝恩肅拜)의 예를 행하고는 바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경인년(1650, 효종1)에 판서 민정중(閔鼎重)10)이 본도의 어사(御史)가 되었는데 선생을 한 번 보고 재기(才器)를 중히 여겨서 선생을 포계(褒啓)하였다. 그러나 당시 당동벌이(黨同伐異)11)의 풍조가 심하여 아래로 민간의 사서인(士庶人)들까지도 또한 사람들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엿보아서 지지와 반대, 비방과 칭찬의 징후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선생을 추천하는 일12)이 마침 용주(龍洲) 조경(趙絅)13)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선생을 헐뜯으려 했다가 이유를 찾을 수 없자 이내 말하기를 "선생의 부친상 때 선생은 밖에 있었다." 하였다. 이어 서로 더하고 늘리며 모으고 보태서 날조하고 구설을 만들어 내니 식자들이 통탄하였다.선생이 집안에 거처할 때 모친을 모시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비록 집이 가난하여 자주 쌀독이 비었어도14)"안회(顔回)는 도(道)에는 거의 이르렀으나, 쌀독이 자주 비었다.[回其庶幾乎, 屢空.]"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先進》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드렸다. 갑오년(1654, 효종5)에 모친상15)을 만나서는 상제(喪祭)를 한결같이 《가례(家禮)》16)를 따르면서 3년 동안 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17) 상을 마치고는 더욱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고 오직 청정한 마음을 지키고 본성을 기르는 것을 일삼았다. 때로 봄가을 좋은 절기를 만나면 산수 사이에서 노닐고 시를 읊으면서 그윽한 정을 후련하게 풀었다. 초목과 금수 하나하나까지도 따라 보면서 돌이켜 자신을 돌아보고 이치를 깊이 연구하며 스스로 경계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으로 《남교일기(南郊日記)》가 있다.기해년(1659, 효종10)에 효묘(孝廟)가 승하하였다.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들어가서 분곡(奔哭)의 예를 행하고 돌아왔다. 현종(顯宗)이 처음 즉위하여 분곡한 현사(賢士)들에 대해 묻자 재신(宰臣)들이 팔현(八賢)18)을 가려서 아뢰었는데 선생도 그 가운데 끼어있었다. 이 때는 대송(大宋)과 소송(小宋)19)의 명망이 조정을 기울일 정도였으니 사류(士流)로 칭하는 자들이 모두 분주히 달려갔으나 선생은 끝내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이윽고 돌아왔는데 선생을 사용(司勇)에 제수했으나 선생은 나아가지 않았다.향리에서 선생을 공격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나 선생은 또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해 조정의 권력을 쥔 자들도 대부분 불쾌하게 여겼다. 마침 호남 어사(湖南御史)가 된 자가 있었는데 친히 선생의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함께 대화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군자다운 사람이다." 하면서 단번에 보고 판가름하였다. 마침내 그 행실을 상소하여 진술하였고 또 조정에서 크게 소문을 내면서 찬탄하고 애석해 마지않으니 선생을 미워하는 자들도 막지 못하였다.신축년(1661, 현종2)에 과연 선생을 의망(擬望)하여 교관(敎官)으로 삼았으나 선생은 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앞서 대비(大妃)의 복제(服制)에 대한 의론으로 조야에서 큰 싸움이 벌어져 시비를 다투었다.20) 문생 중에 선생에게 논란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서 재야인사가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당시에 예 (禮)를 논한 여러 차자(箚子) 및 미야(眉爺)와 백호(白湖)21)의 장서(長書)를 꺼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충분히 그 시비를 판정할 만하다." 하였다. 또 송시열의 차자 가운데 있는 '문최(免衰)의 설22)'에 대해 묻자 선생은 실망한 듯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있다가 말하기를 "공론(公論)이 정해지는 데에 꼭 백년을 기다릴 것도 없다. 너희들도 따라서 마땅히 알게 될 것이다." 하고는 낯빛을 바꾸며 불쾌해 하였다. 향리에서 시세(時勢)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 말을 듣고는 이때부터 선생을 공격하는데 날로 더욱 힘을 썼다.황산서원(黃山書院)을 창건할 때에 대송(大宋 송시열)이 여산(礪山)에서 벗들과 만났는데 봉안(奉安)하는 날에 도내(道內)의 지조를 아끼는 사류들도 알현(謁見)을 청하지 않음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선생에게 고하기를 "유림의 큰 행사입니다. 선생께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송시열의 뜻도 선생께서 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 병이 많아 친구의 상장(喪葬)에도 달려갈 수 없다. 더구나 지금 수 백리 밖인데 달려 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 송시열이 그 뜻을 알고는 크게 유감스럽게 여겼다.이때 고을 친지들이 자제들을 위하여 세 재실(齋室)을 건립하고 선생을 추대하여 학업을 마쳐줄 것을 청하였다. 선생은 그 재실의 이름을 삼학(三學)·몽양(蒙養)·열락(悅樂)이라 짓고 강규(講規)를 엄격히 세웠는데 대략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23)를 본뜬 것이었다. 초하루와 보름날에 분읍례(分揖禮)를 행하고 그 배울 것을 부과하니 청아(菁莪)24)의 교화가 얼마 되지 않아 진작되었다. 마침 송공(宋公)의 동생 송시걸(宋時杰)이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되어 또한 선생을 크게 해쳐서 세상에 용납을 받지 못하게 하려 했다. 애초에 선생의 부인 오씨(吳氏)가 잉태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선생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부인이 해산을 했을 때는 마침 상중(喪中)이었다. 이에 옛 일들을 주워 모으며 손뼉을 치고 서로 축하하면서 상동 (喪童)25)의 설을 만들어 냈다. 선생의 죄안(罪案) 하나를 더 지어낸 것이다.선생이 문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감정을 쌓아온 것이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다. 끝내는 반드시 집을 헐고 흔적을 없앤 뒤에야 그칠 것이니 내가 근신하여 피하는 것이 낫겠다. 너희들은 내가 떠난다고 해서 강규(講規)를 태만히 하여 폐기하지 말고, 의당 끝까지 그 학문을 스스로 성취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날 문도들은 엎드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마침내 선생은 가족을 데리고 나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는 현종(顯宗) 을사년(1665, 현종5)이었다. 고을의 자제로 다시 찾아와 배우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여전히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선영(先塋)26) 아래에 서재를 세우게 하였다. 일가 사람이 혹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남녘에 이론(異論)을 가진 자들이 그대를 종장으로 여긴다.'라고 하여 다투어 서로 비방을 만들어낸다. 지난 번 영평(永平 남평)에서 화를 입었으니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생도들을 사절해 보내서 사람들의 말을 잠재우지 않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저들이 배우러 오는 데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혹시 다시 화를 당한다 해도 문을 닫고 구멍을 막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어서 조용히 생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 정곤재(鄭困齋)27)가 귀양을 갈 때 그 문하에서 종유하던 자들도 그 화를 맞이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너희들이 장차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렵다. '홀로 걸어갈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부자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28)는 것이 바로 우리 당의 십자부(十字符)29)《주역》에서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을 얻었으니, 이른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不遠復]'이란 구절이 나의 '삼자부(三字符)'이다."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이다. 너희들은 의당 이를 가슴에 새기고 잃지 말라." 하였다. 궁고(竆苦)와 곤액(困阨)을 당해 한 번도 그 마음이 동요된 적이 없었다.선생의 종족으로 본주[羅州]에 있는 몇 사람이 마침내 약속하여 계(契)를 만들고, 서로 우호하자는 뜻으로 권면하였다. 한 해 봄가을로 매번 한 번 종족을 모아 스스로 즐기면서 혹 자질(子姪)들로 하여금 좌우에 서서 지은 시가를 읊고 술을 권하게 하니, 온 자리에 숙연히 감흥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선생이 비록 일찍 쇠약하고 병이 많았으나 배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아서, 거처하는 몇 칸 집에는 쌓인 책자가 수 백여 편이었다. 선생은 반드시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았고 종일토록 부지런하였다. 붓과 벼루·책과 책상 및 국화화분 외에는 적막하여 다른 물건이 없었다. 자리 모퉁이에는 한 장의 단금(短琴)을 두고 때로 간혹 술대를 뽑아 현을 탔다. 악보(樂譜)를 따라 옛 곡조를 연주하면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도 화평하였다. 손님이 오면 당 아래로 내려 공경을 다해 맞이하였다. 서로 마주하면 말이 그침이 없었으나 일언반구도 인간 세상에 대한 비평30)은 하지 않았다.신해년(1671, 현종12) 5월 10일에 병이 깊어져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31) 향년 48세였다. 문생들이 모두 상차(喪次)에 모여 서로 마주하고 곡을 하는데32)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 같았다. 이 해 모월 모일에 남평(南平)의 장암산(墻巖山)에 안장하였다.선생은 덕성이 엄숙하고 단정하며 풍도가 맑고 시원스러웠다. 사람들과 말할 때면 온화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많은 사람이 넓게 앉은 가운데서 애초 반면(半面)의 친분조차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 접하면 선생의 됨됨이를 알았고, 거칠고 사나운 무뢰배들이라도 만나보고는 절로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서모(庶母)을 대우하는 데 그 정성을 다하였다. 서제(庶弟)를 가르치는 데도 애정을 지극히 하였고, 전장(田庄)과 노비도 균평하게 나눠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본디 외가(外家)에서 받은 전답과 노비가 있으니 정말 차마 너희를 굶주리고 춥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족인(族人)에게는 먼 친족33)이라도 형제처럼 대하였다. 종가(宗家)의 아비를 여읜 조카를 보살펴 기르면서 자기 자식처럼 하여 혹시라도 질환이 있으면 아침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치료하는 방도를 다하였다.매번 선대(先代)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비록 한겨울이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며 장차 제사를 지내려는 날 밤에는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기다렸다. 제수(祭需)는 모두 친히 점검하여 지극히 정결하게 하였다.그 학문은 마음에서 터득하고 스승을 거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심오한 뜻으로 난해한 것과 변례(變禮)로서 난처한 것을 사람들이 혹 질정을 구해오면 얼음이 풀리듯 명확히 해석해주고, 근거로 끌어댄 설이 각각 합당하니 듣는 자들이 기뻐하고 설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명예와 현달을 추구하지 않아 사람들과 접촉은 드물었으나 당세의 일에 대해서 꿰뚫어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정 일의 대체와 내용 및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 마치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한 것 같았다.그 자품(姿稟)이 고상하고 재품(才品)은 호방하여 하는 일마다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선생이 지은 〈만언소(萬言疏)〉를 보았는데, 성정(誠正)34)의 요체에 근본을 두고 세상의 일 10가지에 미루어 나간 것이었는데, 점괘가 불길하여 결국 상소하지는 않았다. 또 일찍이 《경세통전(經世通典)》 한 부를 지어서 사(士)·농(農)·공(工)·상(商)·병(兵)·승(僧)의 제도를 논하였는데, 만일 나를 써주는 자가 있다면 거행하여 조치하겠다는 뜻이었으니 선생이 과연 세상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난 때가 좋지 못하여 광채를 품어 감추고 누추한 집35) 가운데서 스스로 즐겼으니 이른 바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36) 것은 선생이 이에 해당된다. 저술한 《완물편(玩物篇)》·《남교일기(南郊日記)》·《경세통전(經世通典)》 및 《역상소결(易象小訣)》·〈우산답문질의서(牛山答問質疑書)〉 및 시와 문 약간 편이 집안에 간직되어 있다.아! 선생은 어려서부터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37)을 할 줄 알았고 장성해서는 문을 닫고 성리서(性理書)를 읽은 것이 거의 40년이다. 그 조예의 깊이는 후학들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고 그 행동거지와 위의(威儀) 사이에 드러난 것은 덮을 수가 없다. 그 학문은 오현(五賢)38)의 적전(嫡傳)에 기치를 세우고, 평탄하고 드넓은 길로 법도에 맞게 나아간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선생의 생전에는 자기를 알아주는 선비가 없고 죽어서는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이 없었다. 중년에 선생을 헐뜯는 말이 실로 초년에 선생을 칭찬했던 사람에게서 나왔고 결국엔 간사한 자의 무함을 당해 폐해지고 말았으니, 슬프도다! 선생은 평생 퇴도(退陶)39)를 특히 독실하게 믿어서 말을 세우고 마음을 쓰는 데 계승한 바가 많았다.숭정기원(崇禎紀元) 후 기미년(1679, 숙종5) 10월 보름에 문인 통덕랑 전 행 성균관 학유(通德郞前行成均館學諭) 나만성(羅晩成)40)이 삼가 쓰다.【문인인 도사(都事) 이석삼(李錫三)·진사(進士) 홍최일(洪最一)이 선생의 학문과 행실이 오래되면 사라지고 희미해 것을 매우 염려하여 행장(行狀)을 지어 완성할 방도를 논의하였다. 중론으로 나를 추대하여 말하기를 "그대가41) 일찍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서 몸소 친히 그 거동과 법도를 보았고, 또 덕업과 행의(行義)를 훈도 받은 것이 두텁고도 오래되었다. 그러니 그대가 사실을 모으고 선양하여 후세에 보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기에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위와 같이 썼다.】 先生諱萬英字英叔。 後改羣實。 姓金氏。 系出棠岳。 丁酉之亂。 家譜失守。 麗以上無徵。 入我朝有諱忍官副摠管。 墓羅州。 子孫仍家焉。 副摠之孫諱琮文科正言。 正言之子諱孝禎。 俱中進士生員不仕。 於先生爲五代祖。 高祖諱㪷進士號慕庵。 性至孝。 當己卯之禍。 與本州進士十一人。 倡義泮中。 特卞靜菴趙先生之冤。 曾祖諱台角。 官止內資寺主簿。 祖諱元祿受業於思菴朴相公。 篤志謹身。 倭奴之變。 慘遭一家之禍。 自是絶意擧業。 考諱泰洽以文名世。 累魁鄕解。 爲光海時人所斥。 一不得赴覆試。 遂慨然以敎授生徒爲業。 自號松湖。 松湖公娶羅州羅氏生員元吉之女。 以崇禎甲子二月十七日。 生先生于龜業里第。 生之夜。 母夫人夢人授一明珠。 光耀滿室。 旣覺而先生生。 先生形容端莊。 自學語已知文字。 年七八歲。 言動沉重。 賦詩輒有警語。 雖暗室必危坐終日。 與羣兒遊。 未嘗爭鬪疾走。 十二歲讀大學中庸。 沉潛反覆。 不舍中夜。 遂不復留念於科業。 人勸之則笑而不答。 一日稟于松湖公曰: "世之人皆業科。 然士之抱負甚重大。 固不可專意於此。 且古人有寧學聖人而未至。 不以一善成名者。 此最可爲法也。" 公嘉其意。 遂不復强以詞章。 手畫庸學圖。 又作說揭之座。 以自警省焉。 十三歲取論語孟子周易諸書。 次第讀之。 頃刻不懈。 至於義理歸趣。 一有未達。 則終夜不寐。 必極其究硏而後已。 又博通詩書禮春秋及諸子史。 一覽輒記。 然要在探賾蘊奧。 不以涉獵爲事。 自是業日就德日卲。 其學尤邃於易。 年纔十四。 見之者莫不加敬。 以成德君子目之。 搢紳之過州家者。 亦多求見。 是時先生一家男女長少以瘵疾殞者。 已十有餘人。 而松湖公又適遘其疾于南平之寓舍。 先生侍藥物。 晨夕不懈。 夜未嘗脫衣。 疾且甚。 公謂曰: "吾家兄弟叔侄。 死亡殆盡。 而吾又不幸至此。 汝未有弟兄。 汝年少且無子女。 汝宜遠遁以圖生。 汝忍使我負無後之罪耶?" 遂勒使去。 先生涕泣不忍則公又繼之以怒呵。 先生恐傷其志。 常隱身左右以供藥。 及大漸。 母夫人謂先生曰: "吾嘗聞瘵有虫。 常以絶命時染人。 汝姑小避。 以俟。" 先生驚且泣曰: "人子死卽死耳。 安忍棄父而自謀?" 累言而先生終不可。 母夫人哭出於外曰: "所天已不可救。 一子又將不保。 薄命之身。 不如死而無知。" 卽引索自縊。 先生顚倒救解。 哭且諫。 母夫人以帶結先生手。 且以刀自擬。 以示不可離。 時王夫人徐氏亦在堂。 謂先生曰: "汝母由汝而死。 汝何以爲子?" 使外孫羅襀等固守。 使不得復入戶。 先生以頭叩地。 悶絶復蘇者累矣。 其日松湖公果不救。 先生號哭如禮。 設喪次於正寢門外。 以成服哭踊。 哀戚之狀。 吊者莫不流涕。 服且成。 母夫人又責先生去曰: "汝在此。 吾固不出。 死父已矣。 將欲置吾何地也?" 先生扶抱泣諫者盡日。 終不得請。 卽奉母夫人寓于別村。 身且棲于山菴。 時先生年十五矣。 居數月。 先生又得是疾。 泣而語曰: "罪孤之離喪次。 非敢以逃死重違父母之戒也。 今病如此。 在外何爲?" 乃伻告于母夫人。 卽徒步歸喪次治葬具。 卜日永窆。 朝夕之間。 號哭過哀。 病且漸劇。 以至柴毁。 而猶未嘗暫脫衰麻。 於是延醫鍼且灸。 且服川椒丸。 迨三四年得免死。 乃嘆曰: "賦命奇薄。 不能居喪盡禮。 天地間罪人也。 莫如爲農圃以終世。" 乃扁其堂曰明農。 自號南圃病逸。 自任病廢。 閉門不出曰: "人生一息尙存。 不可暫時怠惰放過。" 或開卷熟覆。 玩心聖賢之戒。 或閉眼嘿坐。 游心天人之際。 心有所契。 必書之冊。 當時所記。 有玩物篇焉。 鄕里冠童往來問業。 則莫不隨其才而諄諄。 且曰: "人能收得放心。 剗却外物。 則心氣寬平。 自有樂地。 何必專力於記誦著述之習哉?" 先生索居不求聞。 而名譽騰播遠邇。 人無親踈。 翕然稱林下第一人。 至於搢紳長者。 雖不相面。 亦皆歆艶其名而稱道之。 歲己丑用鄕薦除先生敎官不就。 未幾又除翊衛司洗馬。 時適仁廟賓天。 先生奔哭到京師。 翌日行奔哭禮。 又明日行肅謝禮。 卽以病辭歸。 歲庚寅閔判書鼎重爲本道御史。 一見先生器重之。 卽褒啓先生。 然時黨同伐異之風甚。 下及委巷士庶。 亦莫不覘人一動一靜。 以爲向背毁譽之候。 而先生吹噓適出於龍洲趙公絅之手。 由是人多猜惡。 始欲訾毁先生而不得說。 乃曰: "先生父喪。 先生嘗在外。" 仍相與增衍裒益。 構捏作口語。 識者痛之。 先生家居養母夫人至孝。 雖家貧屢空而朝夕必有甘旨。 歲甲午遭終天之痛。 喪祭一遵家禮。 三年未嘗見齒。 服闋益無意仕進。 惟以守靜養性爲事。 時値春秋佳節。 則逍遙吟詠於山水之間。 以暢敍幽情。 以至一草一木一禽一獸。 莫不隨覽而反求諸己。 以爲竆格自警之資。 其所錄則有南郊日記焉。 歲己亥孝廟昇遐。 先生扶病入洛。 行奔哭禮而歸。 顯宗初卽位。 訪問賢士之奔哭者。 宰執揀八賢以奏之。 先生參其中。 是時大小宋名望傾朝。 以士流稱者皆奔波。 先生終不造其門。 旣歸除先生司勇。 先生不赴。 鄕之攻先生者益衆。 而先生又不求知於人。 由是秉朝權者亦多不快。 會有爲湖南御史者。 親造先生廬一宿。 與語大悅曰: "此君子人也。" 一見決矣。 遂疏陳其行。 且揚言於朝。 歎惜不置。 惡先生者亦莫之沮。 歲辛丑果擬先生爲敎官。 先生又不赴。 先是大妃服制之論大鬨朝野。 爭其是非。 門生有難于先生者。 先生曰: "朝家大禮。 非在野之人所敢議也。" 仍出當時論禮諸箚及眉爺白湖長書曰: "此足以定其是非矣。" 又問宋箚中免衰之喩。 先生憮然不答。 久乃曰: "公論之定。 必不待百年。 爾輩從當知之。" 因愀然不樂。 鄕中趍時之徒。 得聞其說。 自是攻先生日益力。 及黃山書院之刱。 大宋會儕朋于礪山。 奉安有日。 道內自好之流。 莫不干謁。 人或告先生曰: "儒林大擧也。 子不可不往。 宋意亦欲先生來。" 先生曰: "我平生多病。 親舊喪葬。 且不能匍匐。 况今數百里外。 其能馳赴乎?" 竟不往。 宋知其意大憾焉。 是時鄕中親知爲子弟立三齋。 推先生請卒業。 先生名其齋曰三學曰蒙養曰悅樂。 嚴立講規。 略倣白鹿洞遺意。 朔望行分揖禮。 課其所學。 菁莪之化。 將不日而振。 會宋公弟時杰爲南平守。 亦欲大害先生。 使不容於世。 初先生夫人吳氏有孕。 未久而先生丁內艱。 夫人解胞適在喪中。 於是捃摭舊事。 拍手相賀。 做出喪童之說。 添作先生一罪案。 先生謂門徒曰: "此人輩畜憾。 非一朝一夕之故。 終必毁舍削迹而後已。 吾不如謹避之。 爾等勿以我去。 怠棄講規。 宜終始其學。 以自成就焉。" 是日門徒無不俯伏流涕者。 遂挈家歸于羅州之故里。 時則顯宗乙巳歲也。 州之子弟復多來學者。 先生猶敎之不倦。 使立齋于松楸之下。 一家之人或曰: "人皆謂南中異論。 以子爲宗。 競相造謗。 向也永平之禍。 宜可以懲。 何不謝去生徒。 以息人言耶?" 先生曰: "彼以學來。 何忍拒之? 儻復有禍患。 非閉門塞竇所可避也" 仍從容謂生徒曰: "昔鄭困齋之竄。 遊其門者無不延其禍。 爾等將恐不免。 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乃吾黨十字符也。 汝等宜服膺而勿失之矣。" 未嘗以竆苦困阨。 一動其心。 先生宗族之在本州者幾人。 遂約束立契。 勉以相好之意。 歲春秋每一合族以自娛。 或使子侄左右立。 詠所製歌詞以侑酒。 滿座無不肅然起感者。 先生雖早衰多病。 而好學之心。 始終不倦。 所居數架屋。 積冊子累百餘篇。 先生必昧爽而起。 整衣巾端坐。 終日矻矻。 筆硯書床及菊盆外。 蕭然無他物。 座隅置一張短琴。 時或抽匙撫絃。 按譜作古調。 其聲雄遠和平。 客至則下堂迎致敬。 相對語亹亹。 一言半辭。 未嘗及人世雌黃。 辛亥之五月初十日寢疾。 易簀于正寢。 得年四十八。 門生皆會于喪次。 相向而哭若斬齊焉。 是年月日。 葬于南平之墻巖山。 先生德性嚴整。 風度淸爽。 與人語則和氣盎然。 雖稠人廣坐之中。 初無半面之分者。 一接皆知爲先生。 雖麤悍無賴之徒。 見之自不覺屈膝。 待庶母盡其誠。 敎育孼弟。 情愛備至。 田庄臧獲平均分給曰: "我自有外家田民。 誠不忍汝飢寒也。" 其於族人。 雖緦免之親。 待之如同氣。 撫育宗家孤侄若己出。 或有疾患則達朝不寢。 以盡救療之方。 每遇先代諱日。 雖隆冬必澡浴。 將祭之夜。 必整衣冠。 危坐以待。 祭需無不親檢。 以致精潔。 其學得於心而非由師傅。 然奧旨之難解者。 變禮之難處者。 人或就正則莫不渙然明釋。 援引各適其當。 聽者悅服。 雖不求聞達。 罕與人接。 而其於當世之務。 無不通解。 以至朝廷軆例及外國風土。 有若目擊而親驗之者。 盖其姿稟之高。 才品之豪。 觸處無所不長。 嘗觀先生著萬言疏。 本之誠正之要而推而及乎世務十事。 以筮不吉不果上。 又嘗著經世通典一部。 論士農工商兵僧之制。 盖如有用我者。 擧而措之之意也。 則先生果非無意於世者。 而遭時不淑。 含光晦彩以自樂於蓽門圭竇之中。 所謂不見是而無悶者。 先生足以當之矣。 所著玩物篇·南郊日記·經世通典及易象小訣·牛山答問·質疑書及詩若文若干篇藏于家。 嗚呼! 先生自幼少。 已知爲爲己之學。 及長閉戶讀性理書。 盖將四十年。 其造詣淺深。 有非後學所可推度。 而其見於動止威儀之間者。 有不可掩。 其學盖立幟乎五賢之嫡傳。 而繩趍尺步於坦蕩之途者也。 惜先生生無知己之士而死無傳鉢之人也。 中年毁先生之言。 實出於初年譽先生之人。 而畢竟爲壬人所構陷以廢悲夫! 先生平生尤篤信退陶。 其立言處心。 多所祖述云。崇禎紀元後己未陽月望日。 門人通德郞。 前行成均館學諭羅晩成謹狀。【門人李都事錫三,洪進士最一深懼先生之學問橾行。 久而泯晦。 議所以撰成行狀。 僉議咸推於晩成曰: "尹1)早趍先生之門。 身親見其動作䂓矩。 且薰炙於德業行義。 旣厚且久。 則惟君捃摭揄揚。 以視來後。 不亦宜乎?" 晩成不獲辭。 乃撰次如右。】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趙光祖)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사암(思菴) 박 상공(朴相公) 박순(朴淳)으로,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이다. 1572년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했다. 향해(鄕解) 향시(鄕試)를 말한다.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 이 해는 숭정(崇禎)에 해당하지 않고 숭정(崇禎) 이전인 천계 (天啓) 4년에 해당한다. 연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옛……있으니 이 말은 여대림(呂大臨)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애사(哀詞)를 지으면서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으로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고, 차라리 한 사람이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으로 자신의 병통을 삼을지언정 일시적인 이익으로 자신의 공을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寧學聖人而未至, 不欲以一善成名, 寧以一物不被澤, 爲己病, 不欲以一時之利爲己功.]"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近思錄 觀聖賢》 용학도(庸學圖) 《중용》과 《대학》의 이치를 도표로 그린 것을 말한다. 위독해지시니 원문의 '대점(大漸)'으로, 《서경》 〈고명(顧命)〉에 "아, 병이 크게 번져 위태하다.[嗚呼, 疾大漸, 惟幾.]"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남편 원문의 '소천(所天)'으로, 하늘처럼 받들면서 의지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로, 여기서는 남편을 말한다. 승하 원문의 '빈천(賓天)'으로, 하늘에 손님이 되었다는 뜻인데, 임금의 승하를 가리킨다. 민정중(閔鼎重)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1649년에 문과에 장원해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당동벌이(黨同伐異)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은 편들고, 뜻이 다른 사람은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추천하는 일 원문의 '취허(吹噓)'로, 입으로 불어 바람을 일으켜서 깃털을 날려 보내는 것으로, 남을 칭찬하고 장려하여 추천함을 이른다.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주봉(柱峯)이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 받아 형조 좌랑 등을 지냈고, 1626년 정시 문과에 장원하여 지평·헌납 등을 역임했다. 대제학 및 각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자주 쌀독이 비었어도 원문의 '누공(屢空)'으로, 살림살이가 빈궁한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모친상[終天之痛] 몸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는 슬픔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상을 가리는데 여기서는 모친상을 말한 것이다. 가례(家禮)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일반 사가의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절차와 예법을 정리한 책이다. 이를……없었다 매우 슬퍼하여 웃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고자고가 어버이의 상을 집행할 적에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고 일찍이 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高子皐之執親之喪也, 泣血三年, 未嘗見齒.]"라고 보인다. 팔현(八賢) 《남포집(南圃集) 부록(附錄)》 권2의 〈서술(敍述)〉편에 8인의 이름이 나온다. 대송(大宋)과 소송(小宋) 대송(大宋)은 송시열(宋時烈), 소송(小宋)은 송준길(宋浚吉)이다. 대비(大妃)의……다투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느냐, 삼년복을 입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서인(西人)의 송시열(宋時烈) 등은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 (尹善道) 등은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당의 극렬한 논쟁은 서인이 주장한 대로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미야(眉爺)와 백호(白湖) 미야(眉爺)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가리킨다. 백호(白湖)는 윤휴(尹鑴)의 호이다. 문최(免衰)의 설 송시열이 허목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거론한 이른바 단궁의 문(免)과 자유 최(衰)[檀弓之免 子游之衰]의 설인데, 《송자대전(宋子大全)》 권26 헌의(獻議) 〈대왕대비복제의(大王大妃服制議)〉에 나온다. 문최(免衰)는 노(魯)나라 공의중자(公儀仲子)의 상사 때 단궁이 예가 아닌 단문(袒免)을 한 채 조문하여 공의중자가 맏손자를 상주로 세우지 않고 서자를 상주로 세운 것을 기롱했던 고사와,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상사 때 자유가 예가 아닌 마최(麻衰)를 입고 조문하여 혜자가 맏아들을 폐하고 서자를 상주로 세운 것을 기롱했던 고사를 가리킨다. 《禮記 檀弓上》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이다. 청아(菁莪)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말한다. 청아(菁莪)는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내용이다. 상동(喪童) 부모 상중(喪中)에 아이를 가졌다는 뜻이다. 선영(先塋) 원문의 '송추(松楸)'로, 소나무와 가래나무인데 주로 묘 둘레에 심었기 때문에 무덤이나 선영(先塋)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정곤재(鄭困齋) 정개청(鄭介淸, 1529~1590)으로, 자는 의백(義伯)이며, 곤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전라남도 나주 출신이다. 1590년 5월 정여립과 동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홀로……한다 송대(宋代)의 유학자인 채원정(蔡元定)이 도주(道州)에 유배되어 있을 때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훈계하기를 "홀로 걸어갈 때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부자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니, 내가 죄를 얻었다고 하여 해이해지지 말라.[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勿以吾得罪故遂懈.]" 하였다. 《宋史 권434 蔡元定列傳》 십자부(十字符) 10개의 글자로 된 신표인데, 좌우명이나 학문의 요결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초년 시절에 스승인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에게 성인의 도(道)로 들어가는 차례를 묻자 "내가 비평 원문의 '자황(雌黃)'은 원래 유황(硫黃)과 비소(砒素)를 혼합하여 만든 안료(顔料)이다. 자구(字句)를 첨삭(添削)할 때 쓰는데, 여기서는 세상에 대한 평론을 말한다. 세상을 마치니 원문의 '역책(易簀)'으로, 스승이나 현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禮記 檀弓上》 서로……하는데 원문의 '상향이곡(相向而哭)'으로 제자들이 스승의 상에서 서로 마주하고 곡을 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옛날에 공자가 죽자 제자들이 3년이 지난 후 행장을 꾸려 돌아갈 때 "서로 통곡하면서 모두 목이 쉬었다.[相嚮而哭, 皆失聲.]"라는 말이 나온다. 먼 친족 원문의 '시문(緦免)'으로, 상례(喪禮) 때 상복 가운데 가장 가벼운 복(服)인 시마복(緦麻服)과 그 아래인 문복(免服)을 가리키는데 관계가 먼 친족을 말한다. 성정(誠正) 《대학장구》의 팔조목(八條目)에 속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가리킨다.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이른다. 누추한 집 원문의 '필문규두(蓽門圭竇)'로, 필문(蓽門)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을 말하고, 규두(圭竇)는 담장을 뚫어 만든 규(圭) 모양의 창문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한다. 옳다는……없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論語 憲問》 오현(五賢)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다섯 명의 유현(儒賢)을 가리킨다. 퇴도(退陶) 이황(李滉)의 호이다. 나만성(羅晩成) 1646~? 자는 대로(大老),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678년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國朝文科榜目 肅宗 4年 戊午 增廣試》 그대가 원문의 '尹'은 '君'의 잘못인 듯하다. 尹 '君'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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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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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행장 行狀 [任遠] 선생의 휘는 만영(萬英)이요, 자는 영숙(英叔)인데 군실(羣實)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金氏)로 선계가 당악(棠岳)에서 나왔다. 정유년(1597, 선조30) 전란 때 가보(家譜)를 지키지 못하여 먼 선대는 징험할 수가 없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인(忍)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는데 묘소가 나주(羅州)에 있어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부총관의 손자 휘 종(琮)은 정언(正言)을 지냈다. 이 분이 휘 효정(孝禎)을 낳았는데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선생에게는 5세조가 된다.고조 휘 두(㪷)는 호가 모암(慕庵)인데 이른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효행으로 누차 어사의 포계에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를 당해서는 본주[羅州]의 여러 진사 공과 특별히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의 원통함을 변론하였다. 증조 휘 태각(台角)은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지냈다. 조부 휘 원록(元祿)은 박사암(朴思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뜻을 독실하게 하고 몸을 삼가면서 과거 공부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친 휘 태읍 (泰洽)은 문장으로 세상이 이름이 났고 향해(鄕解)에 여러 번 수석을 하였으나 광해군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한 번도 복시(覆試)에 나가지 못하였으니, 마침내 개연(慨然)히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고 송호(松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송호공은 나주 나씨(羅州羅氏) 생원 원길(元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42) 2월17일 나주 귀업리(龜業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이날 밤 모친이 꿈에서 명주(明珠) 하나를 얻었는데 광채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선생을 낳았다.선생은 나면서부터 빼어나고 준수하였으며 기민하게 깨닫는 것이 범상치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말을 배울 때부터 이미 문자를 이해하였다. 나이 겨우 7세일 때도 말과 행동이 신중하고 법도가 있었다. 아이들과 놀 때도 싸우거나 장난질을 한 적이 없었다.12~3세 때 처음 《대학》과 《중용》을 읽고는 깊이 잠기고 반복하면서 반드시 궁격(窮格)43)을 위주로 하였다. 손수 〈중용도(中庸圖)〉44)를 그리고 또 설을 짓고는 자리에 걸어 두고 항상 보았다. 또 《논어》·《맹자》·《시경》·《서경》 및 《주역》 등 책을 차례로 읽는 데도 부지런히 하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자서(諸子書)와 사학(史學)에 이르러서도 한 번 보면 문득 기억하고 널리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당시 본 사람들이 모두 성덕군자(成德君子)로 지목하였다.무인년(1638, 인조16)에 송호공이 역병에 걸리자 선생은 손수 탕약을 달이면서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함이 예제를 넘을 정도였다. 이에 앞서 한 집안의 남녀노소 가운데 이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거의 십여 명이었다. 이에 조모와 모친이 남은 화가 선생에게도 미칠까 깊이 두려워하여 성복(成服)한 날에 억지로 이웃집으로 나가 머물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선생도 이 병에 걸렸다. 선생이 울면서 일러 말하기를 "죄지은 고아가 상차(喪次)을 떠난 것은 본디 스스로를 아끼려는 계책이 아니라 두 분의 분부를 어길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병이 들었으니 밖에 있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하고는 두 부인께 고하고 돌아가서 궤연(几筵)을 모셨다. 그 곡읍(哭泣)의 절도와 궤전(饋奠)의 예를 병독(病毒)을 이유로 한 번도 폐한 적이 없었다. 삼년 안에 여러 번 침과 뜸을 놓고 천초환(川椒丸)을 복용하니 병든 몸이 소생했다. 항상 탄식하며 말하기를 "부여받은 명이 기박하여 거상(居喪)하면서 예도 다하지 못했으니 천지간의 한 죄인이다." 하였다.마침내 당세에 뜻을 끊고, 스스로 농사를 업으로 삼았다. 그 당(堂)에 남포(南圃)라고 현판을 걸고 밝은 창과 조용한 책상에서 날마다 경적(經籍)을 탐구하였다. 혹 때로 눈을 감고 말없이 앉아서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에 대해 마음을 두었고, 마음에 계합한 바가 있으면 그때그때 반드시 기록하였다.선생은 평소 명예와 현달을 추구하지 않았으나 명예가 원근에 퍼지니 사람들이 친소 없이 일제히 '임하고사(林下高士)'라고 칭송하였다. 벼슬아치와 장자(長者)들도 모두 그 명성을 부러워하며 흠모하였고 고을을 지나가는 인근의 관장(官長)은 반드시 와서 만나기를 구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향천(鄕薦)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용주(龍洲) 조경(趙絅) 공이 추천한 것이다. 이 때 인묘(仁廟)가 승하하니 선생은 분곡(奔哭)하러 한양에 도착해서 은명(恩命)에 숙배(肅拜)한 뒤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경인년(1650, 효종1)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공이 본도의 어사(御史)로서 선생을 한 번 보고는 재기(才器)를 중히 여겨서 성대하게 계문(啓聞)하여 포장(褒奬)하였다.갑오년(1654, 효종5)에 모친상을 만나 상제(喪祭)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르면서 허물이 없었다. 기해년(1659, 효종10)에 효묘(孝廟)가 승하하자 선생은 또 분곡(奔哭)하고 돌아왔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여 초야의 선비로서 분곡을 한 자들에 대해 물으니, 조정에서는 팔현(八賢)45)을 가리어 아뢰었는데 선생도 그 한 사람이었다. 이에 군직(軍職)을 부여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에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46) 공이 어사로서 친히 선생의 집으로 와서 하룻밤을 자면서 대화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군자다운 사람이다." 하였다. 마침내 그의 행의(行誼)를 상소로 진술하여 포계(褒啓)하였다. 신축년(1661, 현종2)에 다시 교관(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이에 앞서 예송(禮訟)이 일어나서 조야가 어지러웠는데 선생에게 논란하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서 재야의 사람이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어 미천(眉川)47)의 장서(長書)와 회천(懷川)48)의 차록(箚錄)을 꺼내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보면 시비가 저절로 정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미천(眉川)의 뜻을 주로 삼는 것이었다. 선생은 다시 한양으로 들어가 당시 사문(斯文)의 장자(長者)를 두루 찾아보지 않음이 없었는데, 다만 회천(懷川) 송 상국(宋相國)에게는 끝내 가보려 하지 않았다.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창건할 때에 회천이 여산(礪山)에 와서 머물자 도내의 지조를 아끼는 사류들도 대부분 분주히 달려갔다. 사람들이 선생에게 권하기를 "유림의 큰 행사이니 선생께서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송공(宋公)의 뜻도 또한 오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 병을 안고 사는데 어떻게 수 백리 지역에 달려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선생이 이전에 상기(喪期)를 마친 후부터 남평(南平)의 석면촌(石面村)에 우거하였는데49) 향리의 사우(士友)들이 세 재실(齋室)을 세워 강습소로 삼았다. 선생은 그 재실의 이름을 삼학(三學)·몽학(蒙養)·열락(悅樂)이라 짓고 강규(講規)를 엄정히 세웠는데 한결같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50)를 본뜬 것이었다. 초하루와 보름날에 분읍례(分揖禮)를 행하고 날마다 그 배울 것을 부과하니 문사(文士)들이 부쩍 흥기하고 청아(菁莪)51)의 교화가 얼마 되지 않아 진작되었다. 이 때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고을 수령이 되자 고을 사람이 거짓말을 지어내고 관장(官長)에게 부탁하여 선생을 해치려 하였다. 선생이 문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근신하여 피해야겠다. 너희들은 내가 떠난다고 해서 태만히 하지 말고 의당 끝까지 노력해서 성취를 보아야한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하였다.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나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는 현묘(顯廟) 을사년(1665, 현종5)이었다. 고을의 자제로 다시 찾아와 배우는 자가 많았고 선생은 여전히 가르치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선생의 거처는 부서진 가옥 몇 칸에 불과하고 허름한 집52)은 쓸쓸하였으니,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지만 선생의 처신은 여유로웠다. 반드시 이른 새벽에 일어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몸가짐에 조금도 태만한 기운이 없었다. 서적과 책상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질서정연하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제를 대하듯53) 홀로 의리(義理)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뜰에는 노란 국화 수십 본을 심고 율리(栗里)54)의 한가하고 담백한 아취를 깊이 얻었으며, 현금(玄琴) 한두 곡조를 손수 타면서 옛사람의 〈양보음(梁甫吟)〉55)을 본떠 추구하였다. 매번 좋은 때와 아름다운 철이 되면 반드시 대여섯 관동(冠童)과 함께 산수 사이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였는데 이때 쓴 《남교일기(南郊日記)》가 있다.신해년(1671, 현종12) 5월 10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48세였다. 같은 해 모월 모일에 남평의 장암산(墻巖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낙천 오씨(洛川吳氏) 희일(喜馹)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는데 한림(翰林) 빈(賓)의 증손녀로서 군자의 덕성과 짝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선생보다 4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여기에 합장하였다. 딸 다섯을 두었다. 장녀는 나재흥(羅再興)에게, 다음은 나재우(羅再祐)에게, 다음은 문과에 급제한 도사(都事) 이석삼(李錫三)에게, 다음은 이사존(李師存)에게, 다음은 정만규(鄭萬奎)에게 시집을 갔다. 아! 백도(伯道)처럼 후사가 없었고56) 외손 약간 명이 있다.무오년(1678, 숙종4)에 문인과 자제들이 향리의 이웃 사우(士友)들과 앞장서 논의하여 재물을 모으고, 풍산(楓山)에 사우(祠宇)를 세워서 제물을 갖춰 제사를 올렸다. 아! 선생은 유서 깊은 집안의 쇠퇴한 종족으로 호남의 한쪽 누추한 고을에서 태어났다. 가정에 물려받은 가업57)이 없었고 사우연원(師友淵源)의 학통이 없었지만, 걸출하게 우뚝 서서 사도(斯道)를 자기의 임무로 여기고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진실의 영역에 발을 붙였다.그 사생활을 살펴보면 진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처럼 진중하였고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봄바람처럼 화기가 넘쳤다.58) 많은 사람이 널리 앉은 자리에서 애초에 본디 반면식도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 접하면 모두 선생의 됨됨이를 알게 되었다. 부모를 모시는 데는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어버이 상을 지낼 때는 그 예를 다하였다. 서모(庶母)을 대우할 때는 그 마음을 감동시켰고 서제(庶弟)를 기를 때는 애정을 지극히 하였다. 일가의 먼 친족59)이라도 동기(同氣)60)처럼 대하였다. 종가(宗家)의 아비를 여읜 조카를 보살펴 기를 때는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게 하였다. 매번 선조의 기일에는 비록 한겨울이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고 제수(祭需)는 친히 점검하며 힘써 정결하게 하였다. 제삿날에는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바르게 앉아서 밤이 샐 때까지 기다리면서 슬피 사모하여 부여잡고 울부짖음이 초상 때와 같았다. 모두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요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평생 학문을 하며 퇴도(退陶)61)를 독실하게 믿어서, 말을 세우고 마음을 씀에 계승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역상소결(易象小訣)〉·〈우산질의(牛山質疑)〉 등 글을 저술하였다. 그 난해한 깊은 뜻과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해 얼음이 풀리듯 명확히 해석하여 각각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당세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일마다 훤히 꿰뚫어서 조정의 고사(古事)나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도 마치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한 것 같았다. 여기에서도 선생의 높은 재주와 식견이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일찍이 선생이 지은 〈만언소(萬言疏)〉 한 편을 보았는데 대개 성정(誠正)62)의 요체에 근본을 두고서 세상의 일 10여 가지로 미루어 나가 지극하게 말하고 남김없이 논하였는데, 모두 조리가 있었으나 둔괘(遯卦)가 나와63) 결국 상소하지는 못했다. 만약 이 말이 임금의 귀에 한 번 들어가서 시행되었다면 풍화(風化)의 다스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소장은 상달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격언과 훌륭한 의론도 한갓 먼지 낀 상자 속의 빈 말이 되게 하였으니 아! 슬프도다. 또 일찍이 《경세통전(經世通典)》을 지어서 사(士)·농(農)·공(工)·상(商)·병(兵)·승(僧)의 부류를 논하였는데, 대개 만일 나를 등용해주는 자가 있다면 거행하여 조치하겠다는 뜻이었다. 아! 이 몇 가지로 본다면 선생이 과연 당세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난 때가 좋지 못하여 광채를 품어 감추고 누추한 집64) 가운데서 스스로 즐겼으니 이른 바 '옳다고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65) 것은 실로 선생을 이른 것이다.아! 하늘이 호남의 한 도에 선생을 낸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수명을 늘리고 그 역량을 채워서 대현(大賢)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무슨 까닭인가? 세상에 뜻을 달리하는 자들은 선생이 상려(喪廬)를 지키지 않았다고 문제를 삼아, 거짓을 퍼뜨리며 비방을 만들어 내고 참소하는 혀를 시끄럽게 놀려서, 지난날의 화를 점차 이루게 했던 것이다. 아! 애통하다. 말세의 인심이 험악하도다. 선생 집안의 화가 이미 세속에서 이른 바 채질(瘵疾)에서 비롯되어 한 집안이 사망하고 거의 남은 사람이 없었기에 두 대부인(大夫人)이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권유한 것은 남은 고아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혹 울면서 이끌고 혹 붙잡아 떠나게 하면서 밧줄을 당기고 칼로 찌르려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때를 당해 선생의 입장에서 어찌 감정을 억제하고 애써 복종하여 두 부인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선생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평일에 어버이를 모시면서 한결같이 뜻을 따르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비록 엄중한 상사(喪事)에 슬피 울며 가슴을 치는 중에 있더라도 두 분 늙으신 자당(慈堂)께서 몹시 다그치는 명령이 그지없이 절절한데에야 어찌하겠는가?화변(禍變)이 황급한 즈음에 설사 의(義)에 대처함이 지극히 좋지는 못한 점이 있었더라도 선생의 당시 나이는 15세였다. 아! 경도(經道)와 권도(權道)66)를 중도(中道)에 맞게 하는 것은 노성(老成)한 사람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아동 때의 일로 성덕(成德)한 뒤에까지 뒤미처 흠을 잡는다면 공자께서 '그의 진보를 허여할 뿐 지난날의 잘잘못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67) 라고 하신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심하구나, 소인(小人)은 남의 미덕을 이뤄주기를 좋아하지 않도다.아! 선생은 나에게 멀리 외재종척조(外再從戚祖)가 되고, 나의 백부(伯父)와 중부(仲父) 및 동당 제부(同堂諸父)들이 모두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백부(伯父)인 상상공(上庠公)이 가르치기를 "남포(南圃)는 남녘의 도학지사(道學之士)이다." 하였고, 중부(仲父) 또한 말하기를 "바라보면 진중하여 참된 군자이다." 하였으며, 동당 제부들도 일찍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내가 옛날 명재(明齋)68) 윤 선생(尹先生) 문하에서 유학할 때 (명재)선생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남녘 고을에 김만영(金萬英) 군이 있는데 참으로 호걸지사이다." 하였다. 나는 어려서 한양에서 자랐고 선생에게 세대가 뒤이며 지역도 멀어서 비록 선생의 언행 사이에서 친히 훈도를 받을 수 없었으나, 부형과 사문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미 익숙하게 들었다. 남쪽의 전리(田里)로 돌아갈 때에 한 번 사우(祠宇)를 참배하고 또 선생의 가장(家狀)69)과 행록(行錄) 및 유문(遺文) 여러 편을 본 연후에야 비로소 선생의 심오한 학문과 무거운 명망이 일세의 표준으로 후학들이 우러르는 태산북두(泰山北斗)가 되어서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가령 국자 사유(國子師儒)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여 인재70)를 인도했다면 인재를 육성하는 효과가 꼭 여기에만 그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제는 죽어 묻혀서 배운 바를 펴지도 못한 채 몽매한 이를 기르고 교도하는 공효가 단지 한 문하의 선비들에게만 미치고 말았으니 그 또한 개탄스러울 뿐이다.아! 나의 선친께서 선생보다 연세가 조금 어린지라 종유하지는 못하였으나 평일에 사모함이 또한 많았다. 일찍이 선생이 지은 〈중용훈해(中庸訓解)〉을 보고 조금 윤색을 가하여 저술하신 일설(一說)이 있는데, 그 사이에는 이론(異論)이 없지 않지만 그 큰 개요를 말하자면 똑같이 도리는 하나였다.지난 모년(某年)에 사론(士論)이 일제히 목소리를 내어 선친을 풍우(楓宇)에 함께 제향하였다.71) 이때부터 매년 봄가을 제향 때 항상 제사에 달려가 참여하였으니 소자(小子)의 구구한 애모의 정성을 어찌 다른 사람들에 비하겠는가?선생은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일찍이 사장(詞章)에는 힘을 쏟지 않았지만, 무릇 읊은 시들은 모두 성정(性情) 속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중 〈사시가(四時歌)〉는 가사의 기운이 온통 온화하여 바로 정백순(程伯淳)의 기상이 있으니, 한 번 읊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공경심이 일었다. 내가 일찍이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기아(箕雅)》72)를 보았는데 선생의 시가 【서술(叙述)에 자세히 보인다.】 또한 그 가운데 들어있어서, 비로소 선생의 문장이 풍아(風雅)73)의 반열에 뽑혔음을 알게 되었다.또 명재(明齋) 선생의 유집을 살펴보니, (명재)선생이 일찍이 탄옹(炭翁) 권시(權諰)74) 공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위포(韋布)75)로 자처하는 경우가 있다. 김만영군 같은 사람은 더욱 태학(太學)에 두어 그 재능을 성취할 수 있게 함이 좋다." 하였다. 또 〈임사가를 보내는 서[送林士駕序]〉에서 말하기를 "내가 남녘의 선비에 대해 들은 사람은 김만영 군이니 그대가 돌아가면 그를 찾으라." 하였으니, 그 평일에 유문(儒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 또한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일전에 선생의 서종자(庶從子)인 국상(國相)이 와서 말하기를 "제 숙부의 행장(行狀)이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으니 그대가 기록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비록 사람이 미천하여 선생의 덕을 찬양하는 글을 감히 감당할 수 없으나, 다만 나의 제부(諸父)들이 이미 문생(門生)의 반열에 있었고, 나의 선친 또한 따라서 한 사우(祠宇)에서 함께 배향되었으니, 정으로나 의리로나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는 없었다.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고, 평일에 가정과 사우들에게 들은 것을 간간히 덧붙여서 세상의 상덕군자(尙德君子)가 사실을 고찰하는 바가 있기를 기다리노라.경신년(1680, 숙종6) 2월 하순에 후학 서하(西河) 임원(任遠)이 삼가 짓다. 先生諱萬英字英叔。 一曰羣實。 姓金氏。 系出棠岳。 丁酉兵燹。 家譜失守。 遠代無徵。 入我朝諱忍官副摠管。 墓在羅州。 子孫仍家焉。 摠管之孫有諱琮。 官正言。 是生諱孝禎生進俱中。 於先生爲五世祖也。 高祖諱㪷號慕菴。 早登司馬。 以孝行累登繡褒。 當己卯士禍。 與本州進士諸公。 特卞靜庵趙先生之冤。 曾祖諱台角官內資寺主簿。 祖諱元祿受業於朴思菴門下。 篤志謹身。 不屑擧業。 考諱泰洽以文名世。 屢魁鄕解。 爲光海時人所擯。 一不得赴覆試。 遂慨然以敎授爲業。 自號松湖。 松湖公娶羅州羅氏。 生員元吉之女。 以崇禎甲子二月十七日。 生先生于羅州龜業里。 是夜母夫人夢得一明珠。 光輝滿室。 旣覺而娩解。 先生生而英秀。 警悟異常。 人皆見而奇之。 自學語已解文字。 而年甫七歲。 言動擧止。 沉重有度。 與羣兒遊。 未嘗爭鬪嬉戲。 十二三歲。 始讀大學中庸。 沉潛反覆。 必以竆格爲主。 手畫中庸圖。 又作說揭之座右。 常目焉。 又取論孟詩書及周易等書。 次第讀之。 孜孜不懈。 至於諸子史學。 一覽輒記。 靡不博通。 當時見者咸以成德君子目之。 歲戊寅松湖公遘病癘。 先生手自煎湯。 夜不解帶。 及喪哀毁踰禮。 先是一家男女老少。 以是疾致殞者幾十餘人。 兩世慈堂深恐餘禍之及於先生。 服成之日。 强令出寓隣舍。 未幾先生又得是疾。 泣而謂曰: "罪孤之離喪次。 本非自愛計。 惟兩親之戒莫違。 而今病如此。 在外何爲?" 仍告于兩夫人而歸侍几筵。 其哭泣之節。 饋奠之禮。 未嘗以病毒而一廢焉。 三年之內。 多試鍼灸。 且服川椒丸。 病得蘇。 常歎曰: "賦命奇薄。 不能居喪盡禮。 天地間一罪人。" 遂絶意當世。 以農圃自業。 扁其堂曰南圃。 明窓靜几。 日討經籍。 或時閉眼嘿坐。 遊心於天人之際。 心有所契。 輒必箚記。 先生平居不求聞達。 而名譽騰播。 人無親踈。 翕然稱林下高士。 至於搢紳長者。 亦皆艶慕其名。 而隣近官長過州里者。 必來求見。 己丑以鄕薦除童蒙敎官不就。 又除翊衛司洗馬。 皆龍洲趙公絅之吹噓也。 是時仁廟賓天。 先生奔哭至京。 肅命後卽棄歸。 庚寅老峯閔公鼎重以本道繡衣。 一見先生器重之。 盛加啓褒。 甲午遭母夫人喪。 喪祭一遵家禮罔愆。 己亥孝廟昇遐。 先生又奔哭而歸。 顯宗初服。 詢問草野士流奔哭者。 廟堂揀八賢以奏之。 先生亦其一也。 仍付軍啣不就。 其年藥泉南公九萬以御史親造先生廬下一宿。 與語大悅曰: "此君子人也。" 遂疏陳其行誼以褒之。 辛丑復除敎官又不赴。 先是禮訟作。 朝野紛紜。 有人難之于先生者。 先生曰: "朝家大禮。 非在野之人所敢議也。" 仍出眉川長書懷川箚錄而視之曰: "有見于此。 是非自定。" 盖以眉川意爲主矣。 先生再入京輦。 當時斯文長者。 無不遍尋周訪。 而但於懷川宋相。 終不肯往見。 及黃山書院之刱也。 懷川來留礪山。 道內自好之流。 擧皆奔波。 而人或勸先生曰: "儒林大擧。 子不可不往。 宋公之意。 亦欲來之矣。" 先生曰: "我素抱病。 何能馳往於數百里之地乎?" 竟不赴。 先生頃自免喪後。 矯2)居南平石面村。 而鄕中士友爲築三齋室。 以爲講習之所。 先生名其齋曰三學曰蒙養曰悅樂。 嚴立講規。 一倣白鹿遺意。 朔望行分揖禮。 日日課學。 文士蔚興。 菁莪之化。 將不日而振矣。 時有不悅先生者爲地主。 鄕人做讏言囑官長。 欲害先生。 先生謂門人曰: "禍將不測。 吾當謹避而已。 諸君勿以我去怠忽。 宜終始努力。 以見成就。 是吾之願也。" 遂挈家歸于羅州故里。 時顯廟乙巳歲也。 州之子弟復多來學者。 先生猶敎之不倦。 先生所居。 不過破屋數間。 環堵蕭然。 人不堪其憂而先生處之裕如。 必昧爽而起。 終日危坐。 設於身軆。 少無惰慢之氣。 以至書籍几案。 皆秩然整頓。 潛心對越。 獨以義理自怡悅。 庭栽黃菊數十本。 深得栗里閒澹之趣。 手彈玄琴一二曲。 擬追古人梁甫之吟。 每當佳辰令節。 必與五六冠童。 嘯詠山水之間。 有所著南郊日記。 歲辛亥之五月初十日。 以病考終于第。 得年四十八。 同年月日。 葬于南平墻巖山卯坐之原。 室洛川吳氏喜馹之女。 翰林賓曾孫女也。 配德無違。 後先生四歲而沒。 合祔于玆。 有女五。 長適羅再興。 次適羅再祐。 次適李錫三文都事。 次適李師存。 次適鄭萬奎。 嗚呼! 伯道無嗣。 有外孫若干人。 戊午門人子弟。 與鄕隣士友。 唱議鳩財。 建祠于楓山。 俎豆以享之。 嗚呼! 先生以故家衰替之族。 生湖南僻陋之鄕。 無家庭箕裘之業。 乏師友淵源之緖。 傑然特立。 以斯道爲己任。 竱心於性理之學。 着跟於眞實之域。 窺其私則凝然如泥塑。 與人語則盎然若和風。 雖稠人廣座之中。 初無半面之雅者。 一接皆知爲先生也。 事父母至孝。 居親喪盡其禮。 待庶母感其心。 育庶弟情愛備至。 雖一家緦免之親。 視之如同己3)。 撫養宗家孤侄。 無異己出。 每於祖先諱日。 雖隆冬必澡浴親檢祭需。 務致精潔。 祭之日。 必整衣冠正坐。 達宵而待之。 哀慕攀號如初喪。 皆出於至誠而非强作爲也。 平生爲學。 篤信退陶。 其立言處心。 多所祖述。 而嘗著易象小訣,牛山質疑等書。 其奧旨之難解。 變化之不測者。 莫不渙然明釋。 各適其當。 其於當世之務。 亦皆觸處洞透。 以至於朝廷古事。 外國風土。 有若目擊而親驗之者。 於此可見先生才識之高有如是夫。 嘗觀先生有著萬言疏一篇。 盖本之誠正之要。 而推而及乎世務十餘事。 極言竭論。 儘有條理而遇遯不果上。 儻使此言一徹天聽。 施以行之。 則其有補於風化之治者。 庶不少矣。 惜乎疏未達而意未遂。 至使格言徽論。 徒爲塵篋中空言。 吁! 可悲矣。 又嘗撰經世通典。 論士農工商兵僧之流。 盖亦如有用我者。 擧而措之之意也。 噫! 以此數者觀之。 則先生果非無意於當世者。 而遭時不淑。 含光晦彩。 甘老於蓽門圭竇之中。 所謂不見是而無悶者。 實先生之謂也。 嗚呼! 天之所以生先生於湖南一道者。 實非偶然。 而惜不能假之年而充其量。 以臻大賢之域。 此亦何故歟? 世之異趣者。 以先生不守喪廬爲病。 興訛造謗。 讒舌囂囂。 馴致曩日之禍。 噫噫! 痛矣。 末路人心之險巇也。 先生之家禍。 旣由於俗所謂瘵疾。 而一門死亡。 殆無餘類。 則兩大夫人所以勸移者。 盖出於保護遺孤之意。 或涕泣而導之。 或扶將而去之。 至於引索擬刃之境。 當此時爲先生者。 顧安得不抑情勉從。 以順兩夫人之心乎? 先生性至孝。 平日事親。 一以順志爲本。 雖在嚴喪號擗之中。 其於兩老慈敦迫之命切切不已何哉? 禍變蒼皇之際。 設有處義之未盡善者。 而先生時年十五歲矣。 噫! 經權之得中。 在於老成尙難。 况以童兒時事。 追疵於成德之後。 則吾夫子與其進不保其往之意。 果安在哉? 甚矣。 小人之不樂成人之美也。 嗚呼! 先生於遠爲外再從戚祖。 而遠之伯仲父及同堂諸父。 俱遊先生之門。 嘗聞伯父上庠公之敎曰: "南圃爲南中道學之士。" 仲父亦有言曰: "望之凝然爲眞箇君子。" 同堂諸父亦嘗稱頌不已。 遠昔遊於明齋尹先生門下。 先生謂余而言曰: "南州有金君萬英者。 眞豪傑士也。" 遠少長於洛中。 於先生世相後地相遠。 雖不能親炙于先生言行之間。 而嘗因父兄及師門之敎而聞之已熟。 及其南歸田里。 一者瞻拜祠宇。 又得見先生家莊行錄及遺文諸篇。 然後始知先生邃學重望。 爲一世標準而後學山斗之仰。 有不勝言者也。 誠使國子師儒之席。 爲其所據。 以迪俊造則其樂育之效。 必不但已。 而今乃沉淪埋沒。 不展所學。 蒙養敎導之功。 正及於一門之士。 其亦可慨也已。 嗚呼! 吾先子於先生。 年歲差後。 未及從遊。 而平日景慕則亦多矣。 嘗見先生所撰中庸訓解。 稍加櫽栝。 著有一說。 其間不無同異之論。 而語其大要則同一揆也。 頃於某歲。 士論齊聲。 並享先人于楓宇。 自玆以往。 每年春秋之享。 輒乃趍與於籩豆之間。 小子區區慕悅之誠。 豈餘人比也? 先生專意性理之學。 不曾致力於詞章之間。 而凡有吟詠。 皆從性情中流出。 其中四時歌。 辭氣渾和。 便有程伯淳氣象。 每一諷誦。 不覺起敬。 遠嘗見南尙書龍翼所抄箕雅。 先生之詩【詳見叙述】亦入其中。 始知先生之文章。 被選於風雅之列也。 又按明齋先生遺集。 先生嘗引炭翁權公諰之言曰: "韋布自處者有之。 如金君萬英者。 尤可使置太學成就其才可也。" 又送林士駕序曰: "吾於南中士所聞則金君萬英。 吾子歸而求之。" 其平日見許於儒門者。 亦不泛矣。 日者先生之庶從子國相來曰: "吾叔父行狀尙未成。 子其識之。" 遠雖人微不敢當贊德之文。 而顧我諸父旣在門生之列。 吾先子又從以同享一宇。 則以情以義。 不可以不文辭。 謹依家狀而序次如右。 間附平日所聞於家庭及師友者。 以俟夫世之尙德君子有所考信焉。 歲庚申仲春下澣。 後學西河任遠謹狀。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 이 해는 숭정(崇禎)에 해당하지 않고 숭정(崇禎) 이전인 천계 (天啓) 4년에 해당한다. 연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궁격(窮格) 궁리격물(窮理格物)의 준말이다.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연구하여 물리(物理)의 극치에 도달하는 일이다. 중용도(中庸圖) 《중용(中庸)》의 이치를 도표로 그린 것을 말한다. 팔현(八賢) 《남포집(南圃集) 부록(附錄)》 권2의 〈서술(敍述)〉편에 8인의 이름이 나온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이다. 1656년 과거에 급제하여 교리, 대사성, 형조 판서 등을 거치고 삼정승을 역임하였다. 남구만은 1659년 4월 호남 암행어사(湖南暗行御史)로서 호남 지역을 순행하였다. 《孝宗實錄 10年 4月 18日》 《韓國文集叢刊解題 4 藥泉集》 미천(眉川) 허목(許穆)을 가리킨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회천(懷川) 회덕(懷德)에 살던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우거하였는데 원문의 '矯居'는 '僑居'의 잘못인 듯하다.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 백록동 강규(白鹿洞講規)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이다. 《朱子大全 권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청아(菁莪)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말한다. 청아(菁莪)는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내용이다. 허름한 집 원문의 '환도(環堵)'로,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일묘의 집과 환도의 방을 둔다.[儒者有一畝之宮, 環堵之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사방의 흙 담장이 각 면마다 한 발 길이가 되는 협소하고 비루한 집을 비유한다. 마음을……듯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 듯 하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하였다. 율리(栗里) 동진(東晉)의 도잠(陶潛)이 은거하던 곳이다. 양보음(梁甫吟) 악부(樂府)의 곡명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제갈량(諸葛亮)의 〈양보음〉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이 도량이 좁아 세 명의 용사를 죽이고야 만 일을 한탄하는 내용이며, 이백(李白)의 〈양보음〉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울분을 서술한 것이다. 백도(伯道)처럼 후사가 없었고[伯道無嗣]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백도(伯道)'는 진(晉)나라 때에 하동 태수(河東太守)를 지낸 등유(鄧攸)의 자이다. 그가 석륵(石勒)의 병란 때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둘을 모두 보호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자기 아들은 버려두어 죽게 하고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을 대신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하늘이 무지해서 등백도에게 아들이 없게 했다.[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 하였다. 《晉書 권90 鄧攸列傳》 물려받은 가업 원문의 '기구(箕裘)'는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을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궁인의 아들은 반드시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 하였다. 진흙으로……넘쳤다 원문의 '이소(泥塑)'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한다. 송나라 사양좌(謝良佐)가 스승인 정호(程顥)의 인품을 평하기를 "종일토록 앉아 있는 모습이 진흙으로 빚은 소상 같았으나, 사람을 접할 때는 온전히 한 덩어리의 화기였다.[終日坐如泥塑人, 然接人, 則渾是一團和氣.]" 하였다. 《上蔡語錄 권2》 먼 친족 원문의 '시문(緦免)'으로, 상례(喪禮) 때 상복 가운데 가장 가벼운 복(服)인 시마복(緦麻服)과 그 아래인 문복(免服)을 가리키는데 관계가 먼 친족을 말한다. 동기(同氣) 원문의 '同己'는 '同氣'의 잘못인 듯하다. 퇴도(退陶) 이황(李滉, 1501~1570)의 호이다. 성정(誠正) 《대학장구》의 팔조목(八條目)에 속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가리킨다.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이른다. 둔괘(遯卦)가 나와 원문의 '우둔(遇遯)'으로, 점을 쳐서 둔괘(遯卦)가 나왔다는 뜻인데, 써놓은 상소문을 올리지 못할 때에 쓰는 표현이다. 한탁주(韓侂胄)가 정권을 잡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지목하자, 주희(朱熹)는 수만 언(數萬言)에 달하는 봉사(封事)를 초(草)하였다. 이에 자제와 문인들이 화를 사게 될 것이라고 간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자, 채원정(蔡元定)이 들어가서 점을 쳐서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점을 쳐서 둔지가인괘(遯之家人卦)를 만나 '둔(遯)의 꼬리이다. 좋아하지만 은둔한다.[遯尾好遯]'는 점사(占辭)가 되었다. 이에 그 초고(草稿)를 불에 넣었다 한다. 《晦庵別集 권1 劉德脩》 누추한 집 원문의 '필문규두(蓽門圭竇)'로, 필문(蓽門)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을 말하고, 규두(圭竇)는 담장을 뚫어 만든 규(圭) 모양의 창문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한다. 옳다는……없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하였다. 경도(經道)와 권도(權道) 경(經)은 변할 수 없는 도이고, 권(權)은 임시로 변통하는 도를 말한다. 그의……않는다 공자 당시에 풍속이 나쁜 호향(互鄕) 사람들과는 같이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공자가 그곳 아이를 만나주자 제자들은 당황하였다.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그 진보를 허여할 뿐이요 그의 퇴보를 허여하는 것은 아니니, 어찌 심하게 할 것이 있겠는가. 사람이 몸을 깨끗이 하여 찾아오면 그 깨끗이 한 것을 허여할 뿐이요 지난날의 잘잘못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하였다. 《論語 述而》 명재(明齋) 윤증(尹拯)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인경(仁卿)·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이다. 가장(家狀) 원문의 '家莊'은 '家狀'의 잘못인 듯하다. 인재 원문의 '준조(俊造)'로, 준사(俊士)와 조사(造士)를 합칭(合稱)한 말이다. 준사는 주나라 때의 학제(學制)에서 서인의 자제로 학덕이 뛰어나 태학(太學) 입학을 허가받은 사람을 말하고, 조사는 인격이 성취된 선비라는 뜻으로 특히 태학의 진사(進士)에 선발될 자격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禮記 王制》 선친을……제향하였다 '풍우(楓宇)'는 '풍산사우(楓山祠宇)'를 말한다. 임원(任遠)의 선친은 임세복(任世復, 1655~1703)으로 사후에 증통덕랑(贈通德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고, 남평면 풍산사(楓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기아(箕雅) 조선 숙종(肅宗) 때 남용익(南龍翼)이 엮은 시집이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조선 현종(顯宗) 때의 김석주(金錫胄)에 이르기까지 497인의 시를 모아 엮었다. 조선 후기에 널리 읽힌 시집이다. 풍아(風雅) 《시경》의 〈국풍(國風)〉 및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말하는데, 바르고 고상한 시문(詩文)을 비유한 것이다. 탄옹(炭翁) 권시(權諰) 1604~1672. 탄옹은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이다. 위포(韋布) 가죽 띠를 띠고 베옷을 입은 사람을 말하는데, 옛날에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나 빈한한 평민의 대칭으로 사용하였다. 矯 '僑'의 잘못인 듯하다。 己 '氣'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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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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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묘지명【병서】 墓誌銘【幷序 李明迪】 남포(南圃) 김 선생은 인효(仁孝)한 세상을 만나 옥을 품고 보배를 쥐고서도76) 숲 울타리 아래에서 40여 년을 은둔하며 살았다.77) 그 덕성이 순수하게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가득 넘치며 마음속에서 발하여 겉으로 드러났으니, 야광과 명월주가 있어 절로 그 산의 광휘와 시내의 아름다움78)을 감출 수 없는 것처럼 명성이 자자했고 이에 용주(龍洲) 조 선생(趙先生)79)이 추천하였다.80) 벼슬아치들과 선비들도 그 명성을 부러워하고 몸소 그의 집에 와서 선생을 보기를 바랐다. 어사(御使)로 안렴(按廉)하는 지위에 있는 자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니 조정에서 예를 갖춰 초빙을 한 것이 두 번이었다.처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였고, 이어서 익위세마(翊衛洗馬)에 제수한 명이 있었으니,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성조(聖朝)의 숭덕상현(崇德象賢)81)의 교화가 이렇게 지극하였다. 그런데 근세의 학자들이 혹 괴이한 말에 침해를 받아, 물에 물결이 일고 거울에 먼지가 낀82) 것처럼 되었으니 따라서 모진(茅榛)83)의 탄식이 있었다. 혹 설(說)이 상세하지 않은데도 대번에 한 마디 말로 그 극단을 찾으려다가 도리어 엽등(躐等)84)의 혐의가 있었으니, 자취를 끊고 길이 은둔하여 홀로 자기 몸을 선하게 하면서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었다.선생은 남녘에서 흥기하여 그 학문은 고정(考亭)85)에 바탕을 두었고, 퇴도(退陶)86)를 독실하게 신봉했다. 성명(性命)의 근원에 마음을 두고 의리(義理)의 분별을 연구하면서, 깊이 잠기고 반복하여 대체로 《중용(中庸)》을 귀착처로 삼았다. 고금의 치란(治亂)과 당세의 사무에 이르기까지 미루어 나가서 사소한 것87)도 빠뜨리지 않았고 하찮은 일88)도 모두 합당하게 하였다. 은거하며 한가롭게 사는89) 즐거움을 가지면서도, 이름을 날려 수제치평(修齊治平)90)의 공을 이루었으니 이 어찌 "임하제일인(林下第一人)"이 아니겠는가.삼가 그 행장을 살펴보니 선생은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91) 2월 27일에 귀업리(龜業里) 집에서 태어났다. 모친의 꿈에 어떤 사람이 명주(明珠) 하나를 주었는데 꿈에서 깨어나서 선생을 낳았다. 이를 갈 무렵부터 조숙하여 총명하였고, 풍범(風範)이 단중(端重)하고 언행이 신중하여 바라보면 성덕군자(成德君子) 같았다.12세 때 《대학》·《중용》을 읽었고, 과거공부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13세 때 《논어》·《맹자》·《주역》·《예경》을 읽고 제자백가의 책에 이르러서도 한 번 보면 줄줄 외웠고 심오한 뜻을 깊이 찾으면서 훑고 지나가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남이 보지 않는 방에 있더라도 바르게 앉아서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이 이후로 강마(講磨)하여 뜻을 추구하니 학업이 날로 성대해졌다.사(士)·농(農)·병(兵)·승(僧)의 제도, 초목금수(草木禽獸)의 미물, 조정의 법도, 외국의 풍토와 같은 것도 모두 훤히 꿰뚫고 두루 포괄했음을 〈만언소(萬言疏)〉·《경세통전(經世通典)》·《남교일기(南郊日記)》·《역상소결(易象小訣)》·〈우산문답(牛山問答)〉 등 여러 편에서 볼 수 있다. 그 학력의 조예와 견문의 엄박(淹博)함은 후생 말학이 작은 소견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만언소〉에서 이르기를 "마음 다스리는 법은 방책(方策)에 실려 있고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약이니 나의 병폐를 고칠 수 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시종일관 한결같은 마음으로 독실하게 보좌하는 사람을92) 의심하지 말고 함께 지극한 치세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경세통전(經世通典)》에서는 "과거로 인재를 취하는 것은 본래 삼대(三代)93)의 제도가 아닌데, 과거 제도가 또 이처럼 난잡하다면 도(道)를 잃어버린 가운데 또 심히 도를 잃은 것이니, 정인군자(正人君子)가 무엇을 좇아 본조(本朝)에 서겠는가." 하였다.《남교일기(南郊日記)》에서 말하기를 "자양(紫陽) 선생이 일찍이 '외(畏)'자로써 '경(敬)'자를 풀이하였는데,94) 근래에 대략 그 방도를 터득해서 이 마음을 해이하고 태만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겨울날의 해는 여름날의 해와 같은 것인데 열기가 판이한 것은 그 때의 천기(天氣)가 그렇게 한 것이다. 인하여 생각해보건대 사람의 성품에 현우(賢愚)가 있는 것은 기질(氣質)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말이 푸른 풀을 뜯는 것에 사욕을 극복하는 경계를 붙이고, 국화를 위쪽 계단으로 옮기면서 등급을 구별하는 요점을 둔 것으로 말하면, 하찮은 것이라도 그 이치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어떤 사물도 의리에 갖다 붙이지 않는 것이 없어서 이기(理氣)와 지행(知行)의 심오한 뜻을 도처에서 발현하여 부류에 따라 확장하였다.95)〈만언소〉도 바로 자양(紫陽)이 했던 봉사(封事)의 유규(遺規)를 추구한 것이다. 오로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성군을 만들고 충성을 다하려는 정성이 마음에 가득하였으니, 만약 현양(顯揚)하여 조정의 위에 두었다면 일세를 삼대(三代)의 경지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또 〈원리기설(原理氣說)〉·〈춘풍루기(春風樓記)〉·〈삼학재규의(三學齋規儀)〉·〈완물편(玩物篇)〉·〈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가 있다. 모두 천리와 인도(人道)의 관계에 근본을 두고, 희문(羲文)96)의 도를 묵묵히 이해하며, 태극(太極)을 연구하고 그것을 마음에 돌이켜 구하였는데 광미장밀(廣彌藏密)97)하여 만 가지 다른 일에 응접하니 거의 어디를 가도 안 될 것이 없었다. 평생의 학문의 힘은 《중용》에서 터득하였고, 행동거지는 법도에 맞았다. 반드시 평탄하고 넓은 길을 경유하고 편향되지 않는 곳에 기치를 세웠다.동인(東人)·서인(西人)을 표방할 때를 당해서는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예송(禮訟)98)이 한 번 터져 나와 시비가 분분한 때에 선생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구실을 주워 모아 공격하였다. 이에 고향의 허름한 집으로 자취를 거두고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규칙을 본떠서 생도를 가르쳤는데 지친 기색이 없었다. 항상 방을 깨끗이 소제하고 진중하게 단정히 거처하면서 종일토록 책상을 마주하고 좌우에는 경적(經籍)을 두었다. 왕왕 지은 시문에는 기수무우(沂水舞雩)의 기상99)이 있었다. 일찍이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산은 고요하고 숲은 깊으며 해 또한 더디니, 한 책상에서 서적을 읽다가 해질 녘 되었네. 화정처사(和靖處士)는 한가한 일 중에 거름을 지고 바둑 두는 일은 배우지 않았다네."100)라고 하였다. 선생이 마음에 간직하고 지킨 바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몇 송이 국화 화분 외에는 쓸쓸하여 다른 물건이 없었다. 북창에 둔 한 장의 거문고로 때로 간혹 현을 튕기며 마음을 풀었다. 사람들이 혹시 예송(禮訟)을 가지고 질정해오면 항상 말하기를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서 재야인사가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니지만 공론(公論)이 정해지는 데 꼭 백년을 기다릴 것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 지조가 확고하여 분육(賁育)101)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기축년(1649, 인조27)에 교관(敎官)에 배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인묘(仁廟)가 승하하자 선생은 분곡(奔哭)하러 한양으로 갔다. 기해년(1659, 효종10)에 효묘(孝廟)가 승하하자 또 처음처럼 분곡을 하였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여 현사(賢士)로서 분곡한 자에 대해 묻자 재신(宰臣)들이 팔현(八賢)102)을 아뢰었는데 선생은 그 한 사람이었다. 경인년(1650, 효종1)에 민노봉(閔老峯)이 어사(御史)로서 선생을 칭찬하여 천거하였고, 그 뒤 남약천(南藥泉)이 또 어사로서 선생을 한 번 만나 대화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조정에 곧장 천거하였다. 이렇게 선생의 훌륭한 명성이 크게 드러나서 두 번이나 어사의 포양(襃揚)을 받고 연이어 이름 있는 벼슬에 제수된 것이다.선생은 어버이를 모시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거상(居喪)에는 예를 다했다. 서제(庶弟)를 가르치고 우애가 두터웠으며 종질(宗侄)을 돌보기를 자기 자식처럼 하였다. 먼 친족을 대우하는데도 지극히 돈목하였으며 제삿날이 되면 목욕을 필히 정결하게 하였다.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상이 흠모하는 바였는데, 공격하는 자들은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 설로 선생을 억지로 몰아세웠다. 선생이 약관(弱冠)의 나이 때에 한 집안이 병에 걸려 거듭 화를 당했다. 당시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모친이 선생을 누누이 타이르면서 잠깐 피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울면서 간했으나 할 수 없게 되자 잠시 산 암자에 우거했으니, 실로 모친의 뜻을 따르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인심이 험악하여 거짓말이 그치지 않았으니 심하다, 소인(小人)은 남의 미덕을 기꺼이 이루어 주려고 하지 않았도다.선생의 휘는 만영(萬英)이요, 자는 영숙(英叔) 또는 군실(羣實)이다. 성은 김씨(金氏)로 선계가 당악(棠岳)에서 나왔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휘 인(忍)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는데 묘소가 나주(羅州)에 있어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부총관의 손자 휘 종(琮)이 정언(正言)을 지냈고, 이 분이 낳은 휘 효정(孝禎)은 진사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선생에게는 5세조가 된다. 고조인 휘 두(㪷)는 이른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호가 모암(慕庵)인데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에 본주의 여러 진사 공들과 특별히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의 원통함을 변론하였다. 증조 휘 태각(台角)은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지냈다. 조부 휘 원록(元祿)은 박사암(朴思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몸가짐이 신중하고 독실하였으나 과거 공부는 일삼지 않았다. 부친 휘 태읍(泰洽)은 향해(鄕解)에 여러 번 수석을 하였으나 송호(松湖)라고 자호(自號)하며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송호공은 나주 나씨(羅州羅氏) 생원 원길(元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다. 배위는 낙천 오씨(洛川吳氏) 희일(喜馹)의 따님인데 후사를 두지 못했고 외손(外孫) 약간 명이 있다. 선생은 신해년(1671, 현종12) 5월 10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48세였다. 남평(南平)의 장암산(墻巖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오씨는 선생보다 4년 뒤에 졸하여 공의 왼쪽에 합장하였다.아! 하늘이 이 분에게 장차 임무를 내리려고 하였는데 명이 박하여 중수(中壽)만 누렸고 관직은 처음 벼슬103)에 그쳐서 세상에 뜻을 크게 펼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무슨 까닭인가? 선생은 성대한 세상104)을 맞아 솜옷도 화려하게 여겼고 물을 마시는 것도 달게 여기며 마음을 침잠하여 도를 즐겼다. 부지런히 학문을 하여 매양 앞에 서적이 가득한 서재에 조용히 앉았을 때는 엄숙하여 마치 진흙으로 빚은 소상 같았고, 사람들을 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온화하여 봄바람이 자리에 넘쳤다. 성명이기(性命理氣)의 근원과 산림경제(山林經濟)의 방책은 사람들이 그 깊은 뜻을 엿볼 수 없으니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한다.이제 그 손자 병규(秉圭)씨가 비석105)을 다듬고 그 글을 나에게 쓰게 하였는데 내가 문장에 능한 자가 아니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선생을 위해 문장을 쓴 것은 평일에 경앙(景仰)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있기 때문이다. 삼가 채 중랑(蔡中郞)의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뜻106)을 부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뜻을 두텁게 하고 업을 부지런히 하며의로 적시고 인으로 다듬었네가까이는 퇴도를 숭모하고멀리는 낙민107)을 배웠네성인의 가르침은 반드시 기록하여태극도로 펼쳤네앎을 넓혀 사물의 이치 궁구하고행실을 닦아 몸을 신중히 했네명예가 남쪽 지역에 퍼지고대궐의 은혜가 융숭하니골목엔 수레가 들어차고문에는 선비들이 찾았다네가난한 살림에도 봉양을 다했고엄중한 여막에서는 예를 따랐네올리지 못한 봉사108)에서는임금에 충성했고 백성을 걱정했네표방109)하는 때를 만나서는자취를 흐려 은둔하였네처신하기는 늘 탄탄한 길을 밟았고110)두려워하기는 나루가 없는 듯했네111)성대한 저 언덕 전원에기상이 새롭구나한 책상의 경적을 대하니정결하여 티끌도 없구나시에 드러난 것은넘치는 봄기운이라아래에 처해도 근심이 없었으나말이 사라질까 두렵도다학술과 경제는숲 아래 제일인이라내가 지은 묘지명이비석에 부끄럽지 않도다숭정(崇禎) 기원후 정미년(1667, 현종8) 한 여름에 무령 태수(武靈太守) 지제교(知製敎) 연안(延安) 이명적(李明迪)이 삼가 쓰다. 南圃金先生遭際仁孝之世。 懷瑾握瑜。 肥遯于林樊之下餘四十年。 粹於面而盎於背。 發於中而著於外。 夜光明月。 自不掩其山輝而川媚。 名聲藉甚。 於是乎龍洲趙先生吹瑩4)之。 縉紳章甫亦莫不艶其名而躬造其廬。 求見先生。 持斧按廉之地。 交口尉薦。 旌招者再。 始除童蒙敎官。 繼而有翊衛洗馬之命。 於休盛哉! 聖朝崇德象賢之化。 若是乎至矣。 近世學者。 或爲異言侵牟。 水波鑑塵。 從而有茅榛之歎。 或說之未詳而遽欲一言探其極致。 反有躐等之嫌。 抑鏟迹長往。 獨善其身。 於世務茫然也。 惟先生起自南服。 其學則本諸考亭。 篤信退陶。 存心乎性命之原。 硏究乎義理之分。 沉潛反覆。 率以中庸爲歸宿。 推以至於古今治忽。 當世事務。 銖兩不遺。 履屐俱當。 隱焉而有考槃薖軸之樂。 揚焉而可以致修齊治平之功。 斯豈非林下第一人乎。 謹按其狀。 先生以崇禎甲子二月十七日。 生于龜業里第。 母夫人夢有人授一明珠。 覺而生先生。 自在齠齔夙就穎悟。 風範端凝。 言動沉重。 望之如成德君子。 十二歲讀大學中庸。 於科業不屑意也。 十三歲讀論孟易禮。 以至於諸子百家之書。 無不寓目成誦。 探賾其蘊奧。 不以涉獵爲事。 暗室危坐。 頃刻不懈。 自是以後。 講磨求志。 學業日盛。 而若士農兵僧之制。 草木禽獸之微。 朝廷之法度。 外國之風土。 皆有以貫穿通透。 泛包該括。 觀於萬言疏·經世通典·南郊日記·易象小訣·牛山問答等諸篇。 其學力之造詣。 聞識之淹博。 有非後生末學之可以管窺。 其萬言疏。 有曰: "治心之法。 載在方策。 一字一藥。 可醫吾病。 臣願殿下終始一心。 篤棐無疑。 共成至治也。" 其經世通典。 有曰: "科擧取人。 本非三代之制。 而科擧之制。 又亂襍如是。 則失道之中。 又甚失道焉。 正人君子。 何從而立於本朝乎?" 南郊日記曰: "紫陽先生嘗以畏字訓敬字。 近者粗得其方。 使此心不得入於解弛怠惰之地。" 又曰: "冬日之日。 是5)夏日之日。 寒熱判異。 以其時氣之使然。 仍念人之性有賢愚者。 氣質之使然。" 至若馬齕綠草。 寓克慾之戒。 菊移上級。 有品別之要。 無微而不究其理。 無物而不附於義。 理氣知行之奧旨。 隨處發見。 觸類而長之。 至於萬言疏。 卽追紫陽封事遺規也。 專以正君心爲本。 其致君願忠之誠。 寸丹藹然。 使揚顯而置諸廊廟之上。 可以導一世於三代之域。 豈不偉乎哉? 又有原理氣說·春風樓記·三學齋規儀·玩物篇·德性問學圖。 皆原本於天人之際。 默契乎羲文之道。 游心於太極。 反求乎方寸。 廣彌藏密。 應接萬殊。 殆無適不可。 平生學力。 得之於中庸。 繩趍尺步。 必由於坦蕩之途。 立幟於不偏倚之域。 當東西標榜。 世無完人。 禮訟一出。 是非紛然之日。 而先生亦爲人捃摭。 乃斂跡於故里蓬圭之下。 倣白鹿規式。 敎授生徒無倦色。 常淨掃一室。 凝然端居。 竟日對案。 左右經籍。 往往發之詩文。 有沂水舞雩之氣象。 嘗口占一絶曰: "山靜林深日又遲。 一牀書史到曛時。 和靖處事閒中事。 不學擔糞與着祺。" 先生之所存所守。 此亦可驗矣。 數叢菊盆外。 蕭然無他物。 北窓一張琴。 時或拂絃以適意。 人或以禮訟就質則輒曰: "朝家大禮。 非在野之人所敢議也。 公論之定。 必不待百年。" 其操守之確然。 雖賁育莫奪矣。 己丑拜敎官。 未幾又除洗馬。 仁廟賓天。 先生奔哭到京師。 己亥孝廟昇遐。 又奔哭如初。 顯宗卽位。 詢問賢士之奔哭。 宰執以八賢啓之。 先生其一也。 庚寅閔老峯以御史褒薦先生。 而其後南藥泉又以御史一見先生。 與語大悅。 亟薦于朝。 此先生華聞大彰。 再膺繡褒。 連除名宦者也。 先生事親至孝。 居喪盡禮。 敎庶弟而友于篤。 撫宗侄而若己子。 待踈族而敦睦備至。 遇祭日而澡浴必潔。 斯皆一世之所欽慕。 而操戈者乃勒驅先生以千不近似之說。 盖先生於弱冠。 一家染疾荐禍。 而時當嚴喪。 母夫人屢屢有敎。 使之姑避。 先生泣諫不得。 暫寓於山菴。 寔出於順志之義。 而人心險巇。 讏言不已。 甚矣。 小人之不樂成人之美也。 先生諱萬英字英叔。 又曰羣實。 姓金氏。 系出棠岳。 入我朝諱忍官副摠管。 墓在羅州。 子孫仍居焉。 摠管之孫有諱琮官正言。 是生諱孝禎生進俱中。 於先生爲五世祖也。 高祖諱㪷早登司馬號慕菴。 當己卯之禍。 與本州進士諸公。 特卞靜庵趙先生之冤。 曾祖諱台角官內資主簿。 祖諱元祿受業於朴思菴。 持身謹篤。 不事科業。 考諱泰洽累魁鄕解。 自號松湖。 以敎授諸生爲己任。 松湖公娶羅州羅氏生員元吉之女生先生。 配洛川吳氏。 喜馹之女。 不育。 有外孫若干人。 先生以辛亥五月初十日。 考終于家。 得年四十八。 葬于南平墻巖山卯坐之原。 吳氏後先生四歲而歿。 合祔于左。 嗚呼! 天將降任於斯人。 而命嗇中壽。 官止筮仕。 使不得大展布於世。 此其故何哉? 先生當大有之世。 縕袍華而飮水甘。 潛心樂道。 孜孜爲學。 每靜坐書室。 緗帙滿前。 儼然若泥塑人。 及夫對人接物。 溫溫然滿座春風。 性命理氣之原。 山林經濟之策。 人莫窺其蘊奧。 而民到于今稱之。 今其孫秉圭甫。 治麗牲之石。 而以其文命明迪。 明迪非能言者。 而不辭爲先生言者。 以其平日景仰之心。 有倍餘人。 竊附蔡中郞獨無愧色之義焉。 銘曰:篤志勤業。 漸義磨仁。 近慕退陶。 遠學洛閩。 聖訓必箚。 極圖以陳。 知淹格物。 行修側身。 譽播南服。 恩隆北宸。 巷塡輪蹄。 門登衿紳。 寒廚養備。 嚴廬禮遵。 未徹封事。 忠君憂民。 時際標榜。 跡混隱淪。 處每履坦。 惕若無津。 賁彼邱園。 氣象維新。 一床經籍。 淨無纖塵。 發之於詩。 藹然者春。 處下无悶。 恐言斯湮。 學術經濟。 林下一人。 我爲作銘。 無愧珉。 崇禎紀元後丁未仲夏武靈太守知製敎。 延安李明迪謹撰。 옥을……쥐고서도 재덕을 갖춘 것을 말한다. 《초사(楚辭)》 〈구장 회사(九章 懷沙)〉에 "옥을 품고 보배를 쥐고서도,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끝내 모르겠다.[懷瑾握瑜兮, 窮不知所示.]" 하였다. 은둔하며 살았다 원문의 '비둔(肥遯)'으로, 《주역》 〈둔괘(遯卦) 상구(上九)〉에 "살지는 은둔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肥遯, 無不利.]" 하였다. 산의……아름다움 훌륭한 재덕(才德)을 품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육기(陸機)의 문부(文賦)에, "돌이 옥을 간직하고 있으매 산은 빛나고, 물이 구슬을 품고 있으매 냇물은 아름답도다.[石韞玉而山輝, 水懷珠而川媚]" 하였다. 용주(龍洲) 조 선생(趙先生) 조경(趙絅, 1586~1669)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주봉(柱峯)이다. 추천하였다 원문의 '吹瑩'은 '吹噓'의 잘못인 듯하다. 숭덕상현(崇德象賢) 본래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나오는 구절로, 숭덕(崇德)은 '덕이 있는 자를 숭상하여 제사를 받든다.'라는 뜻이고 상현(象賢)은 '선현을 닮은 어진 후손이 있으면 명하여 제사를 모시게 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덕이 있는 자를 높이고 현명한 자를 본받는 것을 말한다. 물에……낀 잔잔한 물에 물결이 일고 밝은 거울에 먼지가 낀 것처럼 마음에 평정심과 분별심을 잃은 것을 말한다. 모진(茅榛) 산길이 띠 풀에 모색(茅塞)되고 개암나무에 막히듯 사람들의 마음이 사욕에 가려진 것을 말한다. 엽등(躐等) 차례를 지키지 않고 등급을 뛰어넘는 폐단을 말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어린아이가 듣기만 하고 묻지 않는 것은 등급을 뛰어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幼者聽而弗問, 學不躐等也.]"라고 하였다. 고정(考亭) 중국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 남서쪽에 있는 정사(精舍)인데, 주희(朱熹)가 이곳에서 강학하여 그의 별호(別號)가 되었다. 퇴도(退陶) 이황(李滉, 1501~1570)의 호이다. 사소한 것 원문의 '수량(銖兩)'으로, 1수(銖)와 1량(兩)으로 아주 적은 분량을 가리킨다. 하찮은 일 원문의 '이극(履屐)'으로, 신발과 같은 하찮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진(晉)나라 극초(郄超)가 사현(謝玄)에 대해서 "내가 일찍이 환공(桓公)의 막부에서 사현과 함께 근무하였는데, 그때 그가 인재를 쓰는 것을 보았더니, 비록 신발을 담당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적임자를 구해서 쓰곤 하였다.[吾嘗與玄共在桓公府, 見其使才, 雖履屐間, 亦得其任.]"라고 하였다. 《晉書 권79 謝玄列傳》 한가롭게 사는 원문의 '고반과축(考槃薖軸)으로,《시경》 〈고반(考槃)〉에 나오는 '석인지과(碩人之薖)'의 '과(薖)'와 '석인지축(碩人之軸)'의 '축(軸)'을 합성한 말인데 은거한다는 뜻이다. 수제치평(修齊治平) 《대학》에 나오는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 이 해는 숭정(崇禎)에 해당하지 않고 숭정(崇禎) 이전인 천계(天啓) 4년에 해당한다. 연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독실하게 보좌하는 사람을 원문의 '독비(篤棐)'로, 《서경》 〈주서(周書) 군석(君奭)〉에 주공(周公)이 소공(召公)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독실하게 보좌할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다.[篤棐, 時二人.]"라고 하였다. 삼대(三代)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하(夏)·은(殷)·주(周)나라 시대를 말한다. 자양(紫陽)……풀이하였는데 자양(紫陽)은 주희(朱熹)의 별칭이다. 《주자어류》 권12에 " '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외' 자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敬有甚物? 只如畏字相似.]" 하였다. 부류에 따라 확장되었다 원문의 '촉류이장(觸類而長)'으로 어떤 한 가지 사물의 원칙을 좇아 같은 부류의 사물로 확대시켜 나아가는 일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이끌어 펴며 유에 따라 확장하면 천하의 능사가 다할 것이다.[引而伸之, 觸類而長之, 天下之能事畢矣.]" 하였다. 희문(羲文) 팔괘(八卦)를 그었다는 복희씨(伏羲氏)와 괘사(卦辭)를 지었다는 주 문왕(周文王)의 병칭인데, 《주역》을 가리킨다. 광미장밀(廣彌藏密) 《중용》에서 말하는 심법(心法)에 통달했음을 뜻한다. 《중용집주(中庸集註)》에 정자(程子)가 중용을 설명하면서 "중은 천하의 정도요, 용은 천하의 정리이다. 이 책은 바로 공문이 전수한 심법이다.……이것을 펼치면 육합[天地四方]에 가득하고, 거두면 은밀한 마음속에 물러가 감추어져서 그 맛이 무궁하니, 모두 진실한 학문이다.[中者, 天下之正道, 庸者, 天下之定理. 此篇, 乃孔門傳授心法,……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其味無窮, 皆實學也.]"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예송(禮訟) 1659년 효종이 승하한 뒤에 일어난 기해예송(己亥禮訟)을 말한다. 기수무우(沂水舞雩)의 기상 외물에 매이지 않고 초연히 도(道)를 즐기며 사는 것을 말한다. 기수는 노(魯)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물 이름이며, 무우는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論語 先進》 화정처사(和靖處士)는……않았다네 원문의 '處事'는 '處士'의 잘못인 듯하다. 자신도 화정처사처럼 산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은사인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임포가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은거하였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상일에 모두 능하지만 오직 거름을 지는 것과 바둑을 두는 것은 능하지 못하다.[逋世界間事皆能之, 唯不能擔糞與著棋.]" 하였다. 《夢溪筆談 人事二》 분육(賁育)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용사인 맹분(孟賁)과 주(周)나라의 역사(力士)인 하육(夏育)을 말한다. 《史記 권120 汲鄭列傳》 팔현(八賢) 《남포집(南圃集) 부록(附錄)》 권2의 〈서술(敍述)〉편에 8인의 이름이 나온다. 처음 벼슬 원문의 '서사(筮仕)'로, 옛사람이 관직에 나아가려 할 때 길흉을 점치는 일인데, 곧 처음 관직에 나아감을 말한다. 성대한 세상 '대유(大有)'는 치세(治世)를 가리킨다. 본래 《주역》의 64괘 중 하나인데, 하늘 위에 불이 떠 있는 상(象)으로 임금이 높은 자리에 있고 천시(天時)에 순응하는 괘이다. 비석 원문의 '이생(麗牲)'으로, 옛날 제사를 지낼 때 희생(犧牲)으로 쓸 짐승을 사당이나 묘소 앞에 세워놓은 돌에 붙잡아 매는 것인데, 전하여 비석(碑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禮記 祭義》 채 중랑(蔡中郞)의……뜻 비명을 모두 진실하게 지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다. 채 중랑은 후한(後漢) 때 좌중랑장(左中郞將)을 지낸 채옹(蔡邕)을 가리킨다. 그가 곽유도(郭有道)의 비문을 짓고 나서 말하기를 "내가 비명을 지은 것이 많지만, 모두 부끄러움이 있었는데,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 하였다. 《後漢書 郭太列傳》 낙민(洛閩) 낙양(洛陽)의 정자(程子)와 민중(閩中)의 주자(朱子)를 말한다. 송대 성리학을 말한다. 올리지 못한 봉사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점괘가 불길하여 실제로는 올리지 않은 것을 말한다. 표방 당파를 서로 표방(標榜)하여 당쟁을 한 일을 가리킨다. 처신하기는……밟았고 정도(正道)를 행했다는 뜻이다. 《주역》 〈이괘(履卦) 구이(九二)〉에 "행하는 도가 탄탄하니 유인이라야 곧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 하였다. 나루가……했네 매우 조심하였다는 뜻이다. 《서경》 〈미자(微子)〉에 "이제 우리 은나라가 빠져 망하는 형세는 마치 큰물을 건널 적에 나루나 물가가 없는 것과 같다.[今殷其淪喪, 若涉大水, 其無津涯.]" 하였다. 瑩 '噓'의 잘못인 듯하다。 是 '與'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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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탄(金梭歎)193) 金梭歎 조물주 아이 지모와 기교 많으니큰 물레194)로 금사 하나를 만들어 내었네일찍이 은하수 가에서 베 짜던 상제(上帝)의 딸과 작별하고물가에서 낚시질하는 어부에게 멋대로 향하네195)만 가닥의 꽃은 촉(蜀) 땅의 붉은 비단196) 이루고천 가닥 버드나무는 제(齊)나라 푸른 비단197) 만드네동방의 나라 오늘날 북과 바디 텅 비었으니198)전부(田婦)가 그를 보고서 몇 번이나 탄식하였나 造物兒郞智巧多洪匀冶出一金梭曾辭帝女河邊織慢向漁夫釣上波萬縷花成紅蜀錦千絲柳作翠齊羅大東今日空杼杻田婦看渠幾咄嗟 금사탄(金梭歎) '금사(金梭)'는 금으로 만든 베틀의 북으로, 북의 미칭이다. 큰 물레 원문은 '홍균(洪匀)'이다. 도자기를 만들 때 돌리는 큰 물레라는 뜻으로, 대자연이 원기(元氣)를 조화시켜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말한다. 일찍이……향하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고사에 의거하여 쓴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서역(西域)에 나가던 길에 황하의 근원을 찾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갔는데, 한 성시(城市)에 이르러 보니 한 여인은 방 안에서 베를 짜고 있었고 한 남자는 소를 끌고 은하(銀河)의 물을 먹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여기가 어디인가?"라고 묻자, 그 여인이 지기석(支機石) 하나를 장건에게 주면서 "성도(成都)의 엄군평(嚴君平)에게 가서 물어보라." 하였다. 장건이 돌아와서 엄군평을 찾아가 지기석을 보이자, 엄군평이 말하기를 "이것은 직녀의 지기석이다. 아무 연월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성과 직녀성을 범했는데, 지금 헤아려보니 그때가 바로 이 사람이 은하에 당도한 때였도다."라 하였다. 《傳物志》 촉(蜀)……비단 사천(四川)에서 생산되는 채색의 비단을 말한다. 염색한 숙사(熟絲)로 짜서 만드는데, 색채가 화려하고 재질이 질기다. 제(齊)나라 푸른 비단 제나라 역시 촉 땅과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좋은 비단이 많이 났다고 한다. 《蜀錦譜》 동방의……비었으니 원문의 '대동(大東)'은 동방의 큰 제후국으로, 곧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형편이 베를 짤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말이다. 《시경》 〈대동(大東)〉에, "소동과 대동에, 북과 바디 모두 비었네.[小東大東 杼柚其空]"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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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고현(道民古縣)199)【선생의 우거지이다.】 道民古縣【先生寓居地】 천년된 옛 고을 터가 아직 남아 있으니산천의 아름다운 기운 들쭉날쭉 무성하네옛날에 문 승상(文承相)200)을 능히 배출하였고당시 도 국사(道國師)201)를 일찍이 기억하네하늘이 아껴서 승지(勝地)를 남겨둔 것 몇 해나 되었나신이 감춰 두고서 남아를 기다렸음을 참으로 알겠네지금 혹시라도 띠풀 벨 계획202)을 이루고자 한다면안개와 노을이 대나무 울타리 감싼 곳을 길이 차지해야 하리 古縣千年基尙遺山川佳氣欝參差能肧昔日文承相曾記當時道國師幾歲天慳留勝地固知神秘待男兒如今倘遂誅茅計長占烟霞護竹籬 도민고현(道民古縣) 과거 전라도 남평현(南平縣)에 속해 있던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남평현(南平縣)〉에, "도민부곡(道民部曲). 현에서 서남쪽으로 16리 떨어져 있다."라 되어 있다. 문 승상(文承相) 남평(南平)을 관향으로 하는 고려 때 문신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관은 남평, 자는 덕병(德柄).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 황주판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등을 역임하였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좌정언 때 직언한 일로 화를 면하였고, 1171년에는 우승선어사중승(右承宣御史中丞)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하고, 무신들에게는 고사(故事)의 자문에 응하였다.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상장군(上將軍)을 겸임, 문무(文武)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태자소사(太子少師), 예부판사, 병부판사 등 역임하고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에 올랐다. 도 국사(道國師) 고려 때의 승려 도선(道詵, 827~898)을 말한다. 호는 연기(烟起). 자는 옥룡자(玉龍子)‧옥룡(玉龍). 성은 김씨(金氏).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다. 15세에 지리산 서봉인 월류봉(月留峰)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동리산(桐裡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다. 운봉산(雲峰山)의 굴속에서 참선삼매(參禪三昧)한 후, 태백산(太白山) 움막에서 고행하였으며, 전라도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머물다 죽었다. 고려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음양풍수설로 특히 유명하다. 띠……계획 은거를 위해 시골에 거처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두보의 〈남목위풍우소발탄(枏木爲風雨所拔歎)〉에, "초당 앞 강가에 녹나무 서 있는데, 이곳 노인들이 이백 년 묵었다 하네. 띠 풀 베고 거처를 정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인데, 오월에도 가을 매미 소리 듣는 것 같았네.[倚江枏樹草堂前 故老相傳二百年 誅茅卜居總爲此 五月髣髴聞寒聲]"라고 한 대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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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한(李典翰)【수인(壽仁)】에게 답하는 편지 答李典翰【壽仁】書 삼가 생각건대 산재(山齋)가 깨끗하고 밝으며 지금의 날씨가 맑고 화창하여 보중(保重)하시는 가운데 도(道)를 음미하시는 일이 날로 참다울 것이니, 우러러 바라보는 마음이 어느 날인들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연전에 나아가 뵈었을 때 올 봄에 산방(山房)에 조용히 나아가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으니, 기대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듣건대 거듭 병을 앓으시어 성상의 소명(召命)이 여러 차례 이르렀음에도 달려가지 못하셨다고 하니, 예사로운 산방의 모임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평소 앓던 풍현(風眩)121)이 봄이 되자 다시 일어나 여름 전에 한 번 인사드리는 일을 점칠 수 없을 듯하니, 우러러보며 서글퍼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덕이 높은 분을 외람되이 모시고 깨우침과 가르침을 받드는 일을 이미 쉽게 이룰 수 없게 되었으니, 편지 한 통을 올려 지극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여 고질적인 병통을 바로잡는 도구로 삼고자 생각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주제넘고 비루하다고 하여 굳게 거부하지 마시고 답장을 보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저는 어린 나이 때부터 비루하고 못난 자질을 헤아리지 않고 망령되이 이 일에 뜻을 두었으나 어리석어 힘을 쓸 방도를 알지 못하였으니, 마침내 이 학문의 본말과 오묘함이 지극히 심오하고 지극히 높아서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발꿈치를 하학(下學)의 일상적인 곳에 두지 않아122) 성정(性情)이 고원하여 행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서로 치달려 저도 모르게 물외(物外)에 마음을 풀어놓는 노장(老莊)이나 텅 비고 적막한 데에서 마음을 노니는 불가(佛家)로 점차 흘러 들어갔습니다. 옆길과 굽은 길을 지나느라 발이 부르트고 허벅지에 알이 배겨 10여 년의 정력(精力)을 허비하고 강건한 시절을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나이가 점차 연로해지고 기운이 점차 쇠약해짐에 이른 뒤에야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는 탄식123)이 일어 비로소 병주(竝州)는 실로 나의 고향이 아님을 깨닫고서124) 머리와 발걸음을 돌린 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은 스승과 힘이 있는 벗으로서 앞장서서 지휘해 줄 사람이 없어 묵은 서적과 해진 종이만을 고집스레 지키고서 얻는 바가 없으니, 한밤중에 스스로 생각함에 저도 모르게 등에서 땀이 흐릅니다.일찍이 듣건대 배움이 넓지 못한데 먼저 자기 몸을 단속한다면 선가(禪家)로 흐르고, 자기 몸을 단속하지 않고서 한갓 널리 배우기만 한다면 잡학(雜學)으로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러 책을 널리 배우고 여러 이치에 모두 이르고자 하는데 총명함이 미치지 못하고 법도가 서지 않아 어지러운 생각이 쌓여 본원(本源)이 도리어 거칠어지니, 이러한 폐단을 징치(懲治)하여 실제적인 곳에 귀결시켜 지극히 고요한 경계에 오로지 힘을 쓰고자 한다면 체(體)는 있으나 용(用)은 없는 데로 흘러가기 쉬울까 염려스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잡학에 빠지지 않고 또 자기 몸을 단속하기만을 고수하지 않아 동정(動靜)이 서로 길러지고 본말이 서로 의지하여 전날의 더러운 습관을 통렬히 씻어내고 날로 새로워지는 걸음에 넉넉히 들어가 중도에서 헤매다가 알려지지 못하고 죽는 일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한 마디 번뜩이는 밝은 말125)을 내려서 중요한 길을 열어 보여주신다면 종신토록 마음에 새겨 두겠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먼저 병통에 걸린 이유를 안 뒤에 증상에 맞는 약제를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때문에 전후로 구구절절 숨김없이 다 말씀드린 것입니다. 살펴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伏惟山齋淨明。時日淸和。保練之中。味道日眞。瞻望之懷。何日不馳。年前晉拜之時。敎以今春穩就山房之意。企待久矣。頃聞重致愆和。未赴聖召之稠至。則等閑山房之會。安可爲也。萬英亦素患風眩。當春更發。夏前一拜。似未可卜。瞻悵之情。難以名言。叨陪德宇。獲承警誨。旣未易辦。則思奉一書。願得至敎。以爲砭刺痼病之具。伏惟毋以僭陋堅拒。而辱覆之如何。萬英盖自幼少之年。不揣其質之陋劣。妄有意於此事。而昏不知施力之方。遂意此學之源委要妙。至玄至高。而在冥冥難測之中。於是脚跟未住於下學平常之地。而情性交馳於高遠難行之上。不自覺其駸駸然流入於放懷物表之莊老。游心虛寂之幻釋。傍蹊曲徑。足腁股胝。而枉費十許年精力。送了強壯中日月。至於年漸向老大。氣漸垂凋弊然後。有日暮道遠之歎。而始覺並州實非我故鄕。回頭反踵。有餘年矣。而旣無明師疆輔先路而指揮。陳編敗紙。膠守而無得。中夜自思。不覺背汗矣。盖嘗聞之。學不博而先約則流於禪。不約而徒博則流於雜。今欲博學羣書。該格衆理則聰明不及。權度不立。亂想委積而本源反荒。欲懲是弊而歸宿於實地。專用力於至靜之界則恐易流於有軆無用之歸。何以則旣不失乎雜。又不固於約。動靜交養。本末相須。而痛湔前日之染。優入日新之步。以免倀倀中塗。無聞而死也。幸垂一轉明言。開示要路則當終身服膺焉。雖然必先知受病之由然後。當下對症之劑。故前後縷縷。悉陳而無隱。伏惟鑒裁。 풍현(風眩) 몸이 허한 때에 풍사(風邪)가 머리에 침습하여 생기는 어지럼증의 일종이다. 발꿈치를……않아 원문의 '각근(脚跟)'은 기초‧기본‧근저를 의미하는 말로, '발꿈치를 하학(下學)의 일상적인 곳에 두지 않았다.'는 것은 곧 학문의 기초‧기본을 튼튼히 다지는 데 힘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학집주(小學集註)》 총론에서 주희(朱熹)가 "지금은 모두 소학의 공부를 놓치고 지나쳐 버려 다시 돌아가 공부할 수 없으니, 다만 지금의 처지에 의거하여 곧바로 머물러 발꿈치를 세워 정하고 공부해야 한다. 30세에 깨달았다면 곧 30세부터 발꿈치를 세워 정하고 공부를 하며 곧 나이 8, 9십 세에 깨달았다면 또한 마땅히 현재 처한 상황에서 공부해야 한다.[今都蹉過了 不能更轉去做 只據而今地頭 便劄住立定脚跟做去 如三十歲覺悟 便從三十歲立定脚跟做去 便年八九十歲覺悟 亦當據現在劄住做去]"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날은……탄식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초나라 사람 오자서가 자신의 가혹한 복수를 질책하는 신포서(申包胥)에게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기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을 거꾸로 행하며 하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였다.[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병주(竝州)는……깨닫고서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도상건(渡桑乾)〉에, "병주의 나그네살이 십 년이 지나도록, 밤낮으로 고향 함양에 돌아가고 팠어라. 무단히 다시금 상건수 물을 건너니, 돌아보매 병주가 바로 고향처럼 느껴지더라.[客舍幷州已十霜 歸心日夜憶咸陽 無端更渡桑乾水 却望幷州是故鄕]"라 하였다. 본래 타향이라도 오래 살아 정이 들면 고향처럼 느껴짐을 비유할 때 흔히 인용되는 대목인데, 여기서는 자신이 해 오던 학문 방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말 원문은 '일전명언(一轉明言)'으로, 곧 '일전어(一轉語)'를 뜻한다. 일전어는 선가(禪家)에서 유래한 말로,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한마디의 번뜩이는 어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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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록【당시 선생이 《심경(心經)》에 대해 질문한 내용을 덧붙임】 別錄【附時先生以心經質問】 전에 여쭌 몇 가지 조목에 대해서는 곡진하게 내려주신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삼가 받들었습니다.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신 것이 마치 나침반이 남쪽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정확하였으니, 감사드리는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사이에 한두 가지 다시 여쭐 것이 있어 감히 번거롭게 해 드립니다.내려주신 성대한 가르침에서 '경(經) 1장은 비록 성현(聖賢)의 지극한 논의와 격언을 말하였으나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는 별도의 요지가 없다.'라 하셨으니, 이 부분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후학들이 융통성 있게 보지 못하여 혹 격치(格致)와 성정(誠正) 밖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요지를 별도로 구할까 두려우니, 이는 작은 병통이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그 깊은 부분에 나아가 논하자면,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곧 《중용(中庸)》에서의 '하늘이 명한 성(性)'126)이요, '명명덕(明明德)'이라는 것은 곧 '성을 따르는 것'127)을 말함이며, '신민(新民)'은 곧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은 가르침'128)의 효험이고, '격치'라는 것은 곧 성찰(省察)하는 일로서 순(舜) 임금이 말한 '유정(惟精)'이요, '성정'이라는 것은 곧 존양(存養)하는 공부로서 순 임금이 말한 '유일(惟一)'입니다.129) 또 《중용》의 '중(中)과 화(和)의 지극한 경지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는 것130)은 곧 《대학(大學)》의 '평천하(平天下)'의 지극한 공입니다. 그러니 경 1장의 마음을 다스리는 요지가 《중용》 첫 장과 일체 차이가 없어 위로 요순(堯舜)의 뜻에 부합하는 것을 이와 같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서산(西山)131)이 취사한 뜻에 우연히 의문 나는 점이 있었으므로 지난번에 우러러 여쭈었던 것인데 내려주신 성대한 가르침에 "별도의 요지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저의 의혹이 한층 깊어짐을 더욱 면치 못하겠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있는 큰 근본이 밝지 못하여 이치를 살필 때에 보는 것이 투철하지 못하므로 이와 같이 의아해 하는 병통이 있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가르침을 내려 저의 어리석은 의혹을 해소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내려주신 성대한 가르침에, "순 임금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셨기 때문에132) '집중(執中)'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전하셨으나, 우(禹) 임금은 배워서 이치를 아신 성인(聖人)133)이기 때문에 공력(功力)을 쓰는 차례를 가지고 전하신 것이다.134)"라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이전 사람들이 밝히지 못하였던 바이니, 몹시도 흠앙하고 탄복합니다. 다만 '집중'이라고 한 것이 또한 '선(善)을 택하여 굳게 지킨다.'는 말 뒤에 있으니,135)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고하신 것136)은 유독 공력을 쓰고 힘써 행하는 일이 아닙니까?근래 생각을 거듭하여 또 하나의 설을 얻었으니,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도(天道)의 지극히 정성스러움은 곧 성(性)의 큰 근본이요 전체입니다. 이른바 미발(未發)하였을 때의 혼연한 하나의 이치는 실로 힘쓰기를 생각하고 공력을 쓴다고 해도 미칠 수 없는 곳이므로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막 발(發)한 뒤에 이르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기미가 이에 나누어지니, 이른바 '정일(精一)'과 '집중(執中)'의 공력이 여기에 이르러 베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순이 발하여 움직이는 때의 공력을 쓰는 처음을 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저 성인이 학문을 말씀하실 적에 발하여 움직이는 곳을 따라 공력을 더한 부분이 많으니, 공자(孔子)가 안자(顔子)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로 고해 주신 부분137)이 또한 그 증거입니다. 깊이 생각하여 이와 같은 견해에 이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설에 과연 병통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그 본뜻에 가깝겠습니까?또 생각건대, 주자(朱子)께서는 "《대학》의 도는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신 옛날 대성인(大聖人)이라도 또한 여기에서 배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요순이 제위를 서로 주고받을 적에 '정밀하고 전일해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惟精惟一允執厥中]'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라 하셨습니다.138) 이를 통해 미루어보건대,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알아 편안히 행하는139) 성인이라 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선(善)을 택하여 굳게 지키는 학문에 마음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까?내려주신 성대한 가르침에, "애공(哀公)이 정사(政事)를 물은 것은 대개 치도(治道)가 어떠해야 하는지 물은 것이었고 공자의 대답 또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140) 어찌 안연(顔淵)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은 것141)을 보지 않는가?"라 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그러합니다. 다만 안자의 물음에 대해서는 다스림의 대개가 이와 같음을 범범하게 논하셨을 뿐이니, 군신(君臣) 간의 정사에 대한 문답의 경우에는 이와 같이 범범하게 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과인(寡人)은 실로 고루하여 이것을 행하기에 부족합니다."142)는 등의 말뜻을 통해 보건대 당시에 행할 만한 일로 고하였음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前者所稟數條。謹承曲加勤誨。開發聾瞽。的若盤鍼之指南。感佩何量。但其間有一二更稟者。敢瀆焉。盛敎曰經一章雖云聖賢至論格言。而於治心之法。別無要旨云云。此一欵固然矣。然後學不能活看。恐或於格致誠正之外。別求治心之要旨則不是細病。未知如何。盖卽其奧而論之。其曰明德。卽中庸天命之性也。其曰明明德。卽率性之謂也。新民卽修道之敎之效也。其曰格致。卽省察之事而舜之所謂惟精也。其曰誠正。卽存養之功而舜之所謂惟一也。中庸之致中和位育。卽大學平天下之極功。則經一章治心要旨。與中庸首章。一體無間。上而合乎堯舜之旨者。明的可見如此。而西山取舍之意。偶有所疑。故頃發仰稟之端。而盛敎以別無要旨爲喩。則尤未免賤惑之愈深焉。此不過在我之大本未明。見理之際。看得不透。故有如此疑訝之病。伏惟垂敎。以破愚惑如何。盛敎曰舜旣生知。故以執中二字傳之。而禹乃學而知之聖。故以用工次第傳之云者。實前人之所未發。欽服欽服。但執中云者。亦在擇善固執之後。則堯之告舜。獨非用工勉行底事歟。近者思索。又得一說。以爲天道之至誠者。乃性之大本也全軆也。所謂未發之前。渾然一理。固思勉用工之所不及處也。故聖人不言之。及其纔發之後。人心道心之幾。於是焉分。則所謂精一執中之工。至此可施。故堯舜從其發動之際用工之始以言之矣。大抵聖人言學。多從發動處加工。孔子之告顔子以克己復禮。亦其驗也。竆思得到如此見解。未知此說果無病。而或庶幾於其本旨歟。又按朱子曰大學之道。雖古之大聖人生而知之者。亦未有不學乎此者。堯舜相授。惟精惟一。允執厥中者此也云云。以此推之。雖生知安行之聖。亦未嘗不用意於擇善固執之學歟。盛敎曰哀公之問政。槩問治道之如何。孔子之對。亦以治天下國家答之。胡不看顔淵之問爲邦云云。是固然矣。但顔子之問。是泛論爲治之大槩如斯而已。至於君臣爲政問答。恐不可如是之泛論。以寡人實固。不足以行之等語意見之。尤可見其以當日可行之事告之矣。未審如何。 《중용(中庸)》에서의……성(性) 《중용장구》 제1장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한다.[天命之謂性]"라 하였다. 성을 따르는 것 《중용장구》 제1장에 "성(性)을 따름을 도(道)라 이른다.[率性之謂道]"라 하였다. 도(道)를……가르침 《중용장구》 제1장에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修道之謂敎]"라 하였다. 격치라는……'유일(惟一)'입니다 '성찰(省察)'은 자신의 사욕을 살펴 이를 막는 것을 이르며, '존양(存養)'은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는 것[存心養性]을 이른다. 《중용장구》 제1장에, "군자는 보지 않는 데에도 삼가며, 듣지 않는 데에 두려워한다.[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 하였는데 이는 정(靜)할 때의 존양공부를 말한 것이며, "숨겨진 것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작은 일보다 나타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만 아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삼가는 것이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 하였는데 이는 동(動)할 때의 성찰공부를 말한 것이다. 주희(朱熹)는 이 부분을 "존양성찰의 요점[存養省察之要]"이라 해석하였다. 또 '유정(惟精)'과 '유일(惟一)'은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순 임금이 우(禹)에게 제위를 선양하며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해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大禹謨》 《중용》의……것 《중용장구》 제1장에 "중과 화의 지극한 경지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아 편안하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질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 하였다. 서산(西山)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 1178~1235)를 말한다. 서산(西山)은 그의 호. 자는 경원(景元),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심학(心學)의 요지가 되는 성현의 격언을 모아 《심경(心經)》을 편찬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때문에 원문은 '생지(生知)'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성인(聖人)의 자질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고, 또 어떤 이는 많은 노력을 한 뒤에야 안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배워서……성인(聖人) 원문은 '학이지지성(學而知之聖)'이다. 배움을 통해 이치를 깨달아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른 인물을 말한다. 순 임금은……것이다 '집중(執中)'은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순 임금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안 성인이기 때문에 요(堯) 임금이 그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집중(執中)'이라는 말만을 전수하였고, 우 임금은 배워서 이치를 안 성인이기 때문에 순 임금이 그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공력을 쓰는 차례를 가지고 전수한 것이라 말한 것이다. 《중용장구》 서문에, "경(經)에 보이는 말 중에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라 한 것은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전수(傳授)해 주신 것이요,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隱微)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수 있다.'라 한 것은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전수해 주신 것이다. 요 임금의 한 마디가 지극하고 극진한데 순 임금이 다시 세 마디를 보탠 것은, 요 임금의 한 마디는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실천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其見於經 則允執厥中者 堯之所以授舜也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 舜之所以授禹也 堯之一言 至矣盡矣 而舜復益之以三言者 則所以明夫堯之一言 必如是而後可庶幾也]"라 한 대목이 보인다. 집중이라고……있으니 《중용장구》 서문에, "천명(天命)‧솔성(率性)이라 말씀하신 것은 도심(道心)을 이름이요, 택선(擇善)‧고집(固執)이라 말씀하신 것은 정일(精一)을 이름이요, 군자(君子)‧시중(時中)이라 말씀하신 것은 집중(執中)을 이른다.[其曰天命率性 則道心之謂也 其曰擇善固執 則精一之謂也 其曰君子時中 則執中之謂也]"라 하여, '집중'을 '선(善)을 택하여 굳게 지킨다[擇善固執]'는 말 뒤에 둔 것을 말한다. 요 임금이……것 요 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선양하며, "아, 너 순아, 하늘의 역수(曆數)가 너의 몸에 있다. 진실로 중(中)을 잡을지어다. 사해가 곤궁하면 하늘의 복록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其中 四海困窮 天祿永終]"라 한 것을 말한다. 《論語 堯曰》 공자(孔子)가……부분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이르기를 사욕을 극복하여 예로 회복하는 것이 인을 행함이니, 하루라도 사욕을 극복하여 예로 회복한다면 천하가 그 인을 허여할 것이다.[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라 한 것을 말한다. 《論語 顔淵》 주자(朱子)께서는……하셨습니다 《회암집(晦庵集)》 권13 〈계미수공주차 일(癸未垂拱奏劄一)〉에 나오는 대목이다. 편안히 행하는 원문은 '안행(安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알아 편안한 마음으로 행하는 성인(聖人)의 자질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어떤 이는 편안히 행하고, 어떤 이는 이롭게 여겨서 행하며, 어떤 이는 억지로 행하지만, 공을 이루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애공(哀公)이……것이니 《중용장구》 제20장에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정사(政事)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한 내용이 보인다. 안연(顔淵)이……것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안연(顔淵)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는데,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하나라의 달력을 사용하며 은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나라의 면류관을 쓴다.' 하였다.[顔淵問爲邦 子曰 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라 한 부분을 말한다. 과인(寡人)은……부족합니다 《중용장구》 제20장 주석에,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애공(哀公)이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이 아름답고 지극하나, 과인은 실로 고루하여 이것을 이루기에 부족합니다.' 하였다.[公曰 子之言 美矣至矣 寡人實固 不足以成之也]"라는 부분이 인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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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鄭氏)【세륜(世綸)】에게 답하는 편지 答鄭【世綸】書 그대의 나이가 아직 성동(成童)이 되지 않았는데 몸을 가다듬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부모를 섬기고, 그 부모를 섬겨 천지가 사람에게 부여한 이치에 도달하며, 더구나 부모가 질병에 걸린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책망하고 스스로 경계하여 배움을 두터이 하고 몸을 바로 세우는 근본으로 삼을 줄 아니, 기질의 아름다움과 심지(心志)의 순수함을 아름답게 여기고 훌륭하게 여길 만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로 인하여 뜻을 세우고 배움을 부지런히 하고 힘써 행하여 원대한 데까지 이른다면, 성현(聖賢)이 되는 일은 이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요 경공(卿公)이 되는 일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힘쓰십시오.만약 이러한 자질을 가지고서 배움에 힘쓰지 않고 이러한 뜻을 가지고서 행하기를 부지런히 하지156) 않는다면 반드시 시골의 수준 낮은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라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157) 그대는 힘쓰십시오.마음을 평안히 하고 기운을 고르게 하여 그 자질을 고요히 기르고 책 상자를 짊어지고서 학문을 이룬 이에게 속히 의탁하기를 저는 날마다 바랍니다.임인년(1662, 39세) 12월 20일, 남교(南郊)의 병든 이는 쓰다. 爾年尙未成童。能知脩身正心以事父母。事其父母。以達於天地賦人之理。又况仍其疾病。乃知自責自警。以爲篤學立身之根本。氣質之美。心志之純。可嘉可善若此。仍此立志。勤學力行。以至遠大。則爲聖爲賢。自此可始。爲卿爲公。亦不外此矣。爾其勖哉。若有此質而學不力。有此志而行不動。則必不免鄕里下品之人。可不畏哉。日月逝矣。歲不我延。爾其勖哉。平心調氣。靜養其質。負笈擔書。速歸成學。余日望焉。壬寅十二月二十日。南郊病夫書 부지런히 하지 원문은 '동(動)'인데, 문맥을 살펴 '근(勤)'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세월은……않으니 《논어》 〈양화(陽貨)〉에,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라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日月逝矣 歲不我與]"라 하였고, 주희(朱熹)의 〈권학문(勸學文)〉에,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올해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라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 아, 늙었구나,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日月逝矣 嵗不我延 嗚呼老矣 是誰之愆]"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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