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 行狀 [任遠] 선생의 휘는 만영(萬英)이요, 자는 영숙(英叔)인데 군실(羣實)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金氏)로 선계가 당악(棠岳)에서 나왔다. 정유년(1597, 선조30) 전란 때 가보(家譜)를 지키지 못하여 먼 선대는 징험할 수가 없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인(忍)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는데 묘소가 나주(羅州)에 있어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부총관의 손자 휘 종(琮)은 정언(正言)을 지냈다. 이 분이 휘 효정(孝禎)을 낳았는데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선생에게는 5세조가 된다.고조 휘 두(㪷)는 호가 모암(慕庵)인데 이른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효행으로 누차 어사의 포계에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를 당해서는 본주[羅州]의 여러 진사 공과 특별히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의 원통함을 변론하였다. 증조 휘 태각(台角)은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지냈다. 조부 휘 원록(元祿)은 박사암(朴思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뜻을 독실하게 하고 몸을 삼가면서 과거 공부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친 휘 태읍 (泰洽)은 문장으로 세상이 이름이 났고 향해(鄕解)에 여러 번 수석을 하였으나 광해군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한 번도 복시(覆試)에 나가지 못하였으니, 마침내 개연(慨然)히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고 송호(松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송호공은 나주 나씨(羅州羅氏) 생원 원길(元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42) 2월17일 나주 귀업리(龜業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이날 밤 모친이 꿈에서 명주(明珠) 하나를 얻었는데 광채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선생을 낳았다.선생은 나면서부터 빼어나고 준수하였으며 기민하게 깨닫는 것이 범상치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말을 배울 때부터 이미 문자를 이해하였다. 나이 겨우 7세일 때도 말과 행동이 신중하고 법도가 있었다. 아이들과 놀 때도 싸우거나 장난질을 한 적이 없었다.12~3세 때 처음 《대학》과 《중용》을 읽고는 깊이 잠기고 반복하면서 반드시 궁격(窮格)43)을 위주로 하였다. 손수 〈중용도(中庸圖)〉44)를 그리고 또 설을 짓고는 자리에 걸어 두고 항상 보았다. 또 《논어》·《맹자》·《시경》·《서경》 및 《주역》 등 책을 차례로 읽는 데도 부지런히 하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자서(諸子書)와 사학(史學)에 이르러서도 한 번 보면 문득 기억하고 널리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당시 본 사람들이 모두 성덕군자(成德君子)로 지목하였다.무인년(1638, 인조16)에 송호공이 역병에 걸리자 선생은 손수 탕약을 달이면서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함이 예제를 넘을 정도였다. 이에 앞서 한 집안의 남녀노소 가운데 이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거의 십여 명이었다. 이에 조모와 모친이 남은 화가 선생에게도 미칠까 깊이 두려워하여 성복(成服)한 날에 억지로 이웃집으로 나가 머물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선생도 이 병에 걸렸다. 선생이 울면서 일러 말하기를 "죄지은 고아가 상차(喪次)을 떠난 것은 본디 스스로를 아끼려는 계책이 아니라 두 분의 분부를 어길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병이 들었으니 밖에 있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하고는 두 부인께 고하고 돌아가서 궤연(几筵)을 모셨다. 그 곡읍(哭泣)의 절도와 궤전(饋奠)의 예를 병독(病毒)을 이유로 한 번도 폐한 적이 없었다. 삼년 안에 여러 번 침과 뜸을 놓고 천초환(川椒丸)을 복용하니 병든 몸이 소생했다. 항상 탄식하며 말하기를 "부여받은 명이 기박하여 거상(居喪)하면서 예도 다하지 못했으니 천지간의 한 죄인이다." 하였다.마침내 당세에 뜻을 끊고, 스스로 농사를 업으로 삼았다. 그 당(堂)에 남포(南圃)라고 현판을 걸고 밝은 창과 조용한 책상에서 날마다 경적(經籍)을 탐구하였다. 혹 때로 눈을 감고 말없이 앉아서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에 대해 마음을 두었고, 마음에 계합한 바가 있으면 그때그때 반드시 기록하였다.선생은 평소 명예와 현달을 추구하지 않았으나 명예가 원근에 퍼지니 사람들이 친소 없이 일제히 '임하고사(林下高士)'라고 칭송하였다. 벼슬아치와 장자(長者)들도 모두 그 명성을 부러워하며 흠모하였고 고을을 지나가는 인근의 관장(官長)은 반드시 와서 만나기를 구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향천(鄕薦)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용주(龍洲) 조경(趙絅) 공이 추천한 것이다. 이 때 인묘(仁廟)가 승하하니 선생은 분곡(奔哭)하러 한양에 도착해서 은명(恩命)에 숙배(肅拜)한 뒤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경인년(1650, 효종1)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공이 본도의 어사(御史)로서 선생을 한 번 보고는 재기(才器)를 중히 여겨서 성대하게 계문(啓聞)하여 포장(褒奬)하였다.갑오년(1654, 효종5)에 모친상을 만나 상제(喪祭)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르면서 허물이 없었다. 기해년(1659, 효종10)에 효묘(孝廟)가 승하하자 선생은 또 분곡(奔哭)하고 돌아왔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여 초야의 선비로서 분곡을 한 자들에 대해 물으니, 조정에서는 팔현(八賢)45)을 가리어 아뢰었는데 선생도 그 한 사람이었다. 이에 군직(軍職)을 부여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에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46) 공이 어사로서 친히 선생의 집으로 와서 하룻밤을 자면서 대화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군자다운 사람이다." 하였다. 마침내 그의 행의(行誼)를 상소로 진술하여 포계(褒啓)하였다. 신축년(1661, 현종2)에 다시 교관(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이에 앞서 예송(禮訟)이 일어나서 조야가 어지러웠는데 선생에게 논란하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서 재야의 사람이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어 미천(眉川)47)의 장서(長書)와 회천(懷川)48)의 차록(箚錄)을 꺼내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보면 시비가 저절로 정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미천(眉川)의 뜻을 주로 삼는 것이었다. 선생은 다시 한양으로 들어가 당시 사문(斯文)의 장자(長者)를 두루 찾아보지 않음이 없었는데, 다만 회천(懷川) 송 상국(宋相國)에게는 끝내 가보려 하지 않았다.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창건할 때에 회천이 여산(礪山)에 와서 머물자 도내의 지조를 아끼는 사류들도 대부분 분주히 달려갔다. 사람들이 선생에게 권하기를 "유림의 큰 행사이니 선생께서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송공(宋公)의 뜻도 또한 오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 병을 안고 사는데 어떻게 수 백리 지역에 달려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선생이 이전에 상기(喪期)를 마친 후부터 남평(南平)의 석면촌(石面村)에 우거하였는데49) 향리의 사우(士友)들이 세 재실(齋室)을 세워 강습소로 삼았다. 선생은 그 재실의 이름을 삼학(三學)·몽학(蒙養)·열락(悅樂)이라 짓고 강규(講規)를 엄정히 세웠는데 한결같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50)를 본뜬 것이었다. 초하루와 보름날에 분읍례(分揖禮)를 행하고 날마다 그 배울 것을 부과하니 문사(文士)들이 부쩍 흥기하고 청아(菁莪)51)의 교화가 얼마 되지 않아 진작되었다. 이 때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고을 수령이 되자 고을 사람이 거짓말을 지어내고 관장(官長)에게 부탁하여 선생을 해치려 하였다. 선생이 문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근신하여 피해야겠다. 너희들은 내가 떠난다고 해서 태만히 하지 말고 의당 끝까지 노력해서 성취를 보아야한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하였다.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나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는 현묘(顯廟) 을사년(1665, 현종5)이었다. 고을의 자제로 다시 찾아와 배우는 자가 많았고 선생은 여전히 가르치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선생의 거처는 부서진 가옥 몇 칸에 불과하고 허름한 집52)은 쓸쓸하였으니,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지만 선생의 처신은 여유로웠다. 반드시 이른 새벽에 일어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몸가짐에 조금도 태만한 기운이 없었다. 서적과 책상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질서정연하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제를 대하듯53) 홀로 의리(義理)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뜰에는 노란 국화 수십 본을 심고 율리(栗里)54)의 한가하고 담백한 아취를 깊이 얻었으며, 현금(玄琴) 한두 곡조를 손수 타면서 옛사람의 〈양보음(梁甫吟)〉55)을 본떠 추구하였다. 매번 좋은 때와 아름다운 철이 되면 반드시 대여섯 관동(冠童)과 함께 산수 사이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였는데 이때 쓴 《남교일기(南郊日記)》가 있다.신해년(1671, 현종12) 5월 10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48세였다. 같은 해 모월 모일에 남평의 장암산(墻巖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낙천 오씨(洛川吳氏) 희일(喜馹)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는데 한림(翰林) 빈(賓)의 증손녀로서 군자의 덕성과 짝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선생보다 4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여기에 합장하였다. 딸 다섯을 두었다. 장녀는 나재흥(羅再興)에게, 다음은 나재우(羅再祐)에게, 다음은 문과에 급제한 도사(都事) 이석삼(李錫三)에게, 다음은 이사존(李師存)에게, 다음은 정만규(鄭萬奎)에게 시집을 갔다. 아! 백도(伯道)처럼 후사가 없었고56) 외손 약간 명이 있다.무오년(1678, 숙종4)에 문인과 자제들이 향리의 이웃 사우(士友)들과 앞장서 논의하여 재물을 모으고, 풍산(楓山)에 사우(祠宇)를 세워서 제물을 갖춰 제사를 올렸다. 아! 선생은 유서 깊은 집안의 쇠퇴한 종족으로 호남의 한쪽 누추한 고을에서 태어났다. 가정에 물려받은 가업57)이 없었고 사우연원(師友淵源)의 학통이 없었지만, 걸출하게 우뚝 서서 사도(斯道)를 자기의 임무로 여기고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진실의 영역에 발을 붙였다.그 사생활을 살펴보면 진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처럼 진중하였고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봄바람처럼 화기가 넘쳤다.58) 많은 사람이 널리 앉은 자리에서 애초에 본디 반면식도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 접하면 모두 선생의 됨됨이를 알게 되었다. 부모를 모시는 데는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어버이 상을 지낼 때는 그 예를 다하였다. 서모(庶母)을 대우할 때는 그 마음을 감동시켰고 서제(庶弟)를 기를 때는 애정을 지극히 하였다. 일가의 먼 친족59)이라도 동기(同氣)60)처럼 대하였다. 종가(宗家)의 아비를 여읜 조카를 보살펴 기를 때는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게 하였다. 매번 선조의 기일에는 비록 한겨울이라도 반드시 목욕을 하고 제수(祭需)는 친히 점검하며 힘써 정결하게 하였다. 제삿날에는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바르게 앉아서 밤이 샐 때까지 기다리면서 슬피 사모하여 부여잡고 울부짖음이 초상 때와 같았다. 모두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요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평생 학문을 하며 퇴도(退陶)61)를 독실하게 믿어서, 말을 세우고 마음을 씀에 계승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역상소결(易象小訣)〉·〈우산질의(牛山質疑)〉 등 글을 저술하였다. 그 난해한 깊은 뜻과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해 얼음이 풀리듯 명확히 해석하여 각각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당세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일마다 훤히 꿰뚫어서 조정의 고사(古事)나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도 마치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한 것 같았다. 여기에서도 선생의 높은 재주와 식견이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일찍이 선생이 지은 〈만언소(萬言疏)〉 한 편을 보았는데 대개 성정(誠正)62)의 요체에 근본을 두고서 세상의 일 10여 가지로 미루어 나가 지극하게 말하고 남김없이 논하였는데, 모두 조리가 있었으나 둔괘(遯卦)가 나와63) 결국 상소하지는 못했다. 만약 이 말이 임금의 귀에 한 번 들어가서 시행되었다면 풍화(風化)의 다스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소장은 상달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격언과 훌륭한 의론도 한갓 먼지 낀 상자 속의 빈 말이 되게 하였으니 아! 슬프도다. 또 일찍이 《경세통전(經世通典)》을 지어서 사(士)·농(農)·공(工)·상(商)·병(兵)·승(僧)의 부류를 논하였는데, 대개 만일 나를 등용해주는 자가 있다면 거행하여 조치하겠다는 뜻이었다. 아! 이 몇 가지로 본다면 선생이 과연 당세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난 때가 좋지 못하여 광채를 품어 감추고 누추한 집64) 가운데서 스스로 즐겼으니 이른 바 '옳다고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65) 것은 실로 선생을 이른 것이다.아! 하늘이 호남의 한 도에 선생을 낸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수명을 늘리고 그 역량을 채워서 대현(大賢)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무슨 까닭인가? 세상에 뜻을 달리하는 자들은 선생이 상려(喪廬)를 지키지 않았다고 문제를 삼아, 거짓을 퍼뜨리며 비방을 만들어 내고 참소하는 혀를 시끄럽게 놀려서, 지난날의 화를 점차 이루게 했던 것이다. 아! 애통하다. 말세의 인심이 험악하도다. 선생 집안의 화가 이미 세속에서 이른 바 채질(瘵疾)에서 비롯되어 한 집안이 사망하고 거의 남은 사람이 없었기에 두 대부인(大夫人)이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권유한 것은 남은 고아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혹 울면서 이끌고 혹 붙잡아 떠나게 하면서 밧줄을 당기고 칼로 찌르려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때를 당해 선생의 입장에서 어찌 감정을 억제하고 애써 복종하여 두 부인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선생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평일에 어버이를 모시면서 한결같이 뜻을 따르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비록 엄중한 상사(喪事)에 슬피 울며 가슴을 치는 중에 있더라도 두 분 늙으신 자당(慈堂)께서 몹시 다그치는 명령이 그지없이 절절한데에야 어찌하겠는가?화변(禍變)이 황급한 즈음에 설사 의(義)에 대처함이 지극히 좋지는 못한 점이 있었더라도 선생의 당시 나이는 15세였다. 아! 경도(經道)와 권도(權道)66)를 중도(中道)에 맞게 하는 것은 노성(老成)한 사람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아동 때의 일로 성덕(成德)한 뒤에까지 뒤미처 흠을 잡는다면 공자께서 '그의 진보를 허여할 뿐 지난날의 잘잘못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67) 라고 하신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심하구나, 소인(小人)은 남의 미덕을 이뤄주기를 좋아하지 않도다.아! 선생은 나에게 멀리 외재종척조(外再從戚祖)가 되고, 나의 백부(伯父)와 중부(仲父) 및 동당 제부(同堂諸父)들이 모두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백부(伯父)인 상상공(上庠公)이 가르치기를 "남포(南圃)는 남녘의 도학지사(道學之士)이다." 하였고, 중부(仲父) 또한 말하기를 "바라보면 진중하여 참된 군자이다." 하였으며, 동당 제부들도 일찍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내가 옛날 명재(明齋)68) 윤 선생(尹先生) 문하에서 유학할 때 (명재)선생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남녘 고을에 김만영(金萬英) 군이 있는데 참으로 호걸지사이다." 하였다. 나는 어려서 한양에서 자랐고 선생에게 세대가 뒤이며 지역도 멀어서 비록 선생의 언행 사이에서 친히 훈도를 받을 수 없었으나, 부형과 사문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미 익숙하게 들었다. 남쪽의 전리(田里)로 돌아갈 때에 한 번 사우(祠宇)를 참배하고 또 선생의 가장(家狀)69)과 행록(行錄) 및 유문(遺文) 여러 편을 본 연후에야 비로소 선생의 심오한 학문과 무거운 명망이 일세의 표준으로 후학들이 우러르는 태산북두(泰山北斗)가 되어서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가령 국자 사유(國子師儒)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여 인재70)를 인도했다면 인재를 육성하는 효과가 꼭 여기에만 그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제는 죽어 묻혀서 배운 바를 펴지도 못한 채 몽매한 이를 기르고 교도하는 공효가 단지 한 문하의 선비들에게만 미치고 말았으니 그 또한 개탄스러울 뿐이다.아! 나의 선친께서 선생보다 연세가 조금 어린지라 종유하지는 못하였으나 평일에 사모함이 또한 많았다. 일찍이 선생이 지은 〈중용훈해(中庸訓解)〉을 보고 조금 윤색을 가하여 저술하신 일설(一說)이 있는데, 그 사이에는 이론(異論)이 없지 않지만 그 큰 개요를 말하자면 똑같이 도리는 하나였다.지난 모년(某年)에 사론(士論)이 일제히 목소리를 내어 선친을 풍우(楓宇)에 함께 제향하였다.71) 이때부터 매년 봄가을 제향 때 항상 제사에 달려가 참여하였으니 소자(小子)의 구구한 애모의 정성을 어찌 다른 사람들에 비하겠는가?선생은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일찍이 사장(詞章)에는 힘을 쏟지 않았지만, 무릇 읊은 시들은 모두 성정(性情) 속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중 〈사시가(四時歌)〉는 가사의 기운이 온통 온화하여 바로 정백순(程伯淳)의 기상이 있으니, 한 번 읊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공경심이 일었다. 내가 일찍이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기아(箕雅)》72)를 보았는데 선생의 시가 【서술(叙述)에 자세히 보인다.】 또한 그 가운데 들어있어서, 비로소 선생의 문장이 풍아(風雅)73)의 반열에 뽑혔음을 알게 되었다.또 명재(明齋) 선생의 유집을 살펴보니, (명재)선생이 일찍이 탄옹(炭翁) 권시(權諰)74) 공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위포(韋布)75)로 자처하는 경우가 있다. 김만영군 같은 사람은 더욱 태학(太學)에 두어 그 재능을 성취할 수 있게 함이 좋다." 하였다. 또 〈임사가를 보내는 서[送林士駕序]〉에서 말하기를 "내가 남녘의 선비에 대해 들은 사람은 김만영 군이니 그대가 돌아가면 그를 찾으라." 하였으니, 그 평일에 유문(儒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 또한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일전에 선생의 서종자(庶從子)인 국상(國相)이 와서 말하기를 "제 숙부의 행장(行狀)이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으니 그대가 기록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비록 사람이 미천하여 선생의 덕을 찬양하는 글을 감히 감당할 수 없으나, 다만 나의 제부(諸父)들이 이미 문생(門生)의 반열에 있었고, 나의 선친 또한 따라서 한 사우(祠宇)에서 함께 배향되었으니, 정으로나 의리로나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는 없었다.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고, 평일에 가정과 사우들에게 들은 것을 간간히 덧붙여서 세상의 상덕군자(尙德君子)가 사실을 고찰하는 바가 있기를 기다리노라.경신년(1680, 숙종6) 2월 하순에 후학 서하(西河) 임원(任遠)이 삼가 짓다. 先生諱萬英字英叔。 一曰羣實。 姓金氏。 系出棠岳。 丁酉兵燹。 家譜失守。 遠代無徵。 入我朝諱忍官副摠管。 墓在羅州。 子孫仍家焉。 摠管之孫有諱琮。 官正言。 是生諱孝禎生進俱中。 於先生爲五世祖也。 高祖諱㪷號慕菴。 早登司馬。 以孝行累登繡褒。 當己卯士禍。 與本州進士諸公。 特卞靜庵趙先生之冤。 曾祖諱台角官內資寺主簿。 祖諱元祿受業於朴思菴門下。 篤志謹身。 不屑擧業。 考諱泰洽以文名世。 屢魁鄕解。 爲光海時人所擯。 一不得赴覆試。 遂慨然以敎授爲業。 自號松湖。 松湖公娶羅州羅氏。 生員元吉之女。 以崇禎甲子二月十七日。 生先生于羅州龜業里。 是夜母夫人夢得一明珠。 光輝滿室。 旣覺而娩解。 先生生而英秀。 警悟異常。 人皆見而奇之。 自學語已解文字。 而年甫七歲。 言動擧止。 沉重有度。 與羣兒遊。 未嘗爭鬪嬉戲。 十二三歲。 始讀大學中庸。 沉潛反覆。 必以竆格爲主。 手畫中庸圖。 又作說揭之座右。 常目焉。 又取論孟詩書及周易等書。 次第讀之。 孜孜不懈。 至於諸子史學。 一覽輒記。 靡不博通。 當時見者咸以成德君子目之。 歲戊寅松湖公遘病癘。 先生手自煎湯。 夜不解帶。 及喪哀毁踰禮。 先是一家男女老少。 以是疾致殞者幾十餘人。 兩世慈堂深恐餘禍之及於先生。 服成之日。 强令出寓隣舍。 未幾先生又得是疾。 泣而謂曰: "罪孤之離喪次。 本非自愛計。 惟兩親之戒莫違。 而今病如此。 在外何爲?" 仍告于兩夫人而歸侍几筵。 其哭泣之節。 饋奠之禮。 未嘗以病毒而一廢焉。 三年之內。 多試鍼灸。 且服川椒丸。 病得蘇。 常歎曰: "賦命奇薄。 不能居喪盡禮。 天地間一罪人。" 遂絶意當世。 以農圃自業。 扁其堂曰南圃。 明窓靜几。 日討經籍。 或時閉眼嘿坐。 遊心於天人之際。 心有所契。 輒必箚記。 先生平居不求聞達。 而名譽騰播。 人無親踈。 翕然稱林下高士。 至於搢紳長者。 亦皆艶慕其名。 而隣近官長過州里者。 必來求見。 己丑以鄕薦除童蒙敎官不就。 又除翊衛司洗馬。 皆龍洲趙公絅之吹噓也。 是時仁廟賓天。 先生奔哭至京。 肅命後卽棄歸。 庚寅老峯閔公鼎重以本道繡衣。 一見先生器重之。 盛加啓褒。 甲午遭母夫人喪。 喪祭一遵家禮罔愆。 己亥孝廟昇遐。 先生又奔哭而歸。 顯宗初服。 詢問草野士流奔哭者。 廟堂揀八賢以奏之。 先生亦其一也。 仍付軍啣不就。 其年藥泉南公九萬以御史親造先生廬下一宿。 與語大悅曰: "此君子人也。" 遂疏陳其行誼以褒之。 辛丑復除敎官又不赴。 先是禮訟作。 朝野紛紜。 有人難之于先生者。 先生曰: "朝家大禮。 非在野之人所敢議也。" 仍出眉川長書懷川箚錄而視之曰: "有見于此。 是非自定。" 盖以眉川意爲主矣。 先生再入京輦。 當時斯文長者。 無不遍尋周訪。 而但於懷川宋相。 終不肯往見。 及黃山書院之刱也。 懷川來留礪山。 道內自好之流。 擧皆奔波。 而人或勸先生曰: "儒林大擧。 子不可不往。 宋公之意。 亦欲來之矣。" 先生曰: "我素抱病。 何能馳往於數百里之地乎?" 竟不赴。 先生頃自免喪後。 矯2)居南平石面村。 而鄕中士友爲築三齋室。 以爲講習之所。 先生名其齋曰三學曰蒙養曰悅樂。 嚴立講規。 一倣白鹿遺意。 朔望行分揖禮。 日日課學。 文士蔚興。 菁莪之化。 將不日而振矣。 時有不悅先生者爲地主。 鄕人做讏言囑官長。 欲害先生。 先生謂門人曰: "禍將不測。 吾當謹避而已。 諸君勿以我去怠忽。 宜終始努力。 以見成就。 是吾之願也。" 遂挈家歸于羅州故里。 時顯廟乙巳歲也。 州之子弟復多來學者。 先生猶敎之不倦。 先生所居。 不過破屋數間。 環堵蕭然。 人不堪其憂而先生處之裕如。 必昧爽而起。 終日危坐。 設於身軆。 少無惰慢之氣。 以至書籍几案。 皆秩然整頓。 潛心對越。 獨以義理自怡悅。 庭栽黃菊數十本。 深得栗里閒澹之趣。 手彈玄琴一二曲。 擬追古人梁甫之吟。 每當佳辰令節。 必與五六冠童。 嘯詠山水之間。 有所著南郊日記。 歲辛亥之五月初十日。 以病考終于第。 得年四十八。 同年月日。 葬于南平墻巖山卯坐之原。 室洛川吳氏喜馹之女。 翰林賓曾孫女也。 配德無違。 後先生四歲而沒。 合祔于玆。 有女五。 長適羅再興。 次適羅再祐。 次適李錫三文都事。 次適李師存。 次適鄭萬奎。 嗚呼! 伯道無嗣。 有外孫若干人。 戊午門人子弟。 與鄕隣士友。 唱議鳩財。 建祠于楓山。 俎豆以享之。 嗚呼! 先生以故家衰替之族。 生湖南僻陋之鄕。 無家庭箕裘之業。 乏師友淵源之緖。 傑然特立。 以斯道爲己任。 竱心於性理之學。 着跟於眞實之域。 窺其私則凝然如泥塑。 與人語則盎然若和風。 雖稠人廣座之中。 初無半面之雅者。 一接皆知爲先生也。 事父母至孝。 居親喪盡其禮。 待庶母感其心。 育庶弟情愛備至。 雖一家緦免之親。 視之如同己3)。 撫養宗家孤侄。 無異己出。 每於祖先諱日。 雖隆冬必澡浴親檢祭需。 務致精潔。 祭之日。 必整衣冠正坐。 達宵而待之。 哀慕攀號如初喪。 皆出於至誠而非强作爲也。 平生爲學。 篤信退陶。 其立言處心。 多所祖述。 而嘗著易象小訣,牛山質疑等書。 其奧旨之難解。 變化之不測者。 莫不渙然明釋。 各適其當。 其於當世之務。 亦皆觸處洞透。 以至於朝廷古事。 外國風土。 有若目擊而親驗之者。 於此可見先生才識之高有如是夫。 嘗觀先生有著萬言疏一篇。 盖本之誠正之要。 而推而及乎世務十餘事。 極言竭論。 儘有條理而遇遯不果上。 儻使此言一徹天聽。 施以行之。 則其有補於風化之治者。 庶不少矣。 惜乎疏未達而意未遂。 至使格言徽論。 徒爲塵篋中空言。 吁! 可悲矣。 又嘗撰經世通典。 論士農工商兵僧之流。 盖亦如有用我者。 擧而措之之意也。 噫! 以此數者觀之。 則先生果非無意於當世者。 而遭時不淑。 含光晦彩。 甘老於蓽門圭竇之中。 所謂不見是而無悶者。 實先生之謂也。 嗚呼! 天之所以生先生於湖南一道者。 實非偶然。 而惜不能假之年而充其量。 以臻大賢之域。 此亦何故歟? 世之異趣者。 以先生不守喪廬爲病。 興訛造謗。 讒舌囂囂。 馴致曩日之禍。 噫噫! 痛矣。 末路人心之險巇也。 先生之家禍。 旣由於俗所謂瘵疾。 而一門死亡。 殆無餘類。 則兩大夫人所以勸移者。 盖出於保護遺孤之意。 或涕泣而導之。 或扶將而去之。 至於引索擬刃之境。 當此時爲先生者。 顧安得不抑情勉從。 以順兩夫人之心乎? 先生性至孝。 平日事親。 一以順志爲本。 雖在嚴喪號擗之中。 其於兩老慈敦迫之命切切不已何哉? 禍變蒼皇之際。 設有處義之未盡善者。 而先生時年十五歲矣。 噫! 經權之得中。 在於老成尙難。 况以童兒時事。 追疵於成德之後。 則吾夫子與其進不保其往之意。 果安在哉? 甚矣。 小人之不樂成人之美也。 嗚呼! 先生於遠爲外再從戚祖。 而遠之伯仲父及同堂諸父。 俱遊先生之門。 嘗聞伯父上庠公之敎曰: "南圃爲南中道學之士。" 仲父亦有言曰: "望之凝然爲眞箇君子。" 同堂諸父亦嘗稱頌不已。 遠昔遊於明齋尹先生門下。 先生謂余而言曰: "南州有金君萬英者。 眞豪傑士也。" 遠少長於洛中。 於先生世相後地相遠。 雖不能親炙于先生言行之間。 而嘗因父兄及師門之敎而聞之已熟。 及其南歸田里。 一者瞻拜祠宇。 又得見先生家莊行錄及遺文諸篇。 然後始知先生邃學重望。 爲一世標準而後學山斗之仰。 有不勝言者也。 誠使國子師儒之席。 爲其所據。 以迪俊造則其樂育之效。 必不但已。 而今乃沉淪埋沒。 不展所學。 蒙養敎導之功。 正及於一門之士。 其亦可慨也已。 嗚呼! 吾先子於先生。 年歲差後。 未及從遊。 而平日景慕則亦多矣。 嘗見先生所撰中庸訓解。 稍加櫽栝。 著有一說。 其間不無同異之論。 而語其大要則同一揆也。 頃於某歲。 士論齊聲。 並享先人于楓宇。 自玆以往。 每年春秋之享。 輒乃趍與於籩豆之間。 小子區區慕悅之誠。 豈餘人比也? 先生專意性理之學。 不曾致力於詞章之間。 而凡有吟詠。 皆從性情中流出。 其中四時歌。 辭氣渾和。 便有程伯淳氣象。 每一諷誦。 不覺起敬。 遠嘗見南尙書龍翼所抄箕雅。 先生之詩【詳見叙述】亦入其中。 始知先生之文章。 被選於風雅之列也。 又按明齋先生遺集。 先生嘗引炭翁權公諰之言曰: "韋布自處者有之。 如金君萬英者。 尤可使置太學成就其才可也。" 又送林士駕序曰: "吾於南中士所聞則金君萬英。 吾子歸而求之。" 其平日見許於儒門者。 亦不泛矣。 日者先生之庶從子國相來曰: "吾叔父行狀尙未成。 子其識之。" 遠雖人微不敢當贊德之文。 而顧我諸父旣在門生之列。 吾先子又從以同享一宇。 則以情以義。 不可以不文辭。 謹依家狀而序次如右。 間附平日所聞於家庭及師友者。 以俟夫世之尙德君子有所考信焉。 歲庚申仲春下澣。 後學西河任遠謹狀。 숭정(崇禎) 갑자년(1624, 인조2) 이 해는 숭정(崇禎)에 해당하지 않고 숭정(崇禎) 이전인 천계 (天啓) 4년에 해당한다. 연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궁격(窮格) 궁리격물(窮理格物)의 준말이다.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연구하여 물리(物理)의 극치에 도달하는 일이다. 중용도(中庸圖) 《중용(中庸)》의 이치를 도표로 그린 것을 말한다. 팔현(八賢) 《남포집(南圃集) 부록(附錄)》 권2의 〈서술(敍述)〉편에 8인의 이름이 나온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이다. 1656년 과거에 급제하여 교리, 대사성, 형조 판서 등을 거치고 삼정승을 역임하였다. 남구만은 1659년 4월 호남 암행어사(湖南暗行御史)로서 호남 지역을 순행하였다. 《孝宗實錄 10年 4月 18日》 《韓國文集叢刊解題 4 藥泉集》 미천(眉川) 허목(許穆)을 가리킨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회천(懷川) 회덕(懷德)에 살던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우거하였는데 원문의 '矯居'는 '僑居'의 잘못인 듯하다.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 백록동 강규(白鹿洞講規)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이다. 《朱子大全 권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청아(菁莪)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말한다. 청아(菁莪)는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내용이다. 허름한 집 원문의 '환도(環堵)'로,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일묘의 집과 환도의 방을 둔다.[儒者有一畝之宮, 環堵之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사방의 흙 담장이 각 면마다 한 발 길이가 되는 협소하고 비루한 집을 비유한다. 마음을……듯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 듯 하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하였다. 율리(栗里) 동진(東晉)의 도잠(陶潛)이 은거하던 곳이다. 양보음(梁甫吟) 악부(樂府)의 곡명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제갈량(諸葛亮)의 〈양보음〉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이 도량이 좁아 세 명의 용사를 죽이고야 만 일을 한탄하는 내용이며, 이백(李白)의 〈양보음〉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울분을 서술한 것이다. 백도(伯道)처럼 후사가 없었고[伯道無嗣]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백도(伯道)'는 진(晉)나라 때에 하동 태수(河東太守)를 지낸 등유(鄧攸)의 자이다. 그가 석륵(石勒)의 병란 때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둘을 모두 보호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자기 아들은 버려두어 죽게 하고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을 대신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하늘이 무지해서 등백도에게 아들이 없게 했다.[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 하였다. 《晉書 권90 鄧攸列傳》 물려받은 가업 원문의 '기구(箕裘)'는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을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궁인의 아들은 반드시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 하였다. 진흙으로……넘쳤다 원문의 '이소(泥塑)'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한다. 송나라 사양좌(謝良佐)가 스승인 정호(程顥)의 인품을 평하기를 "종일토록 앉아 있는 모습이 진흙으로 빚은 소상 같았으나, 사람을 접할 때는 온전히 한 덩어리의 화기였다.[終日坐如泥塑人, 然接人, 則渾是一團和氣.]" 하였다. 《上蔡語錄 권2》 먼 친족 원문의 '시문(緦免)'으로, 상례(喪禮) 때 상복 가운데 가장 가벼운 복(服)인 시마복(緦麻服)과 그 아래인 문복(免服)을 가리키는데 관계가 먼 친족을 말한다. 동기(同氣) 원문의 '同己'는 '同氣'의 잘못인 듯하다. 퇴도(退陶) 이황(李滉, 1501~1570)의 호이다. 성정(誠正) 《대학장구》의 팔조목(八條目)에 속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가리킨다.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이른다. 둔괘(遯卦)가 나와 원문의 '우둔(遇遯)'으로, 점을 쳐서 둔괘(遯卦)가 나왔다는 뜻인데, 써놓은 상소문을 올리지 못할 때에 쓰는 표현이다. 한탁주(韓侂胄)가 정권을 잡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지목하자, 주희(朱熹)는 수만 언(數萬言)에 달하는 봉사(封事)를 초(草)하였다. 이에 자제와 문인들이 화를 사게 될 것이라고 간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자, 채원정(蔡元定)이 들어가서 점을 쳐서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점을 쳐서 둔지가인괘(遯之家人卦)를 만나 '둔(遯)의 꼬리이다. 좋아하지만 은둔한다.[遯尾好遯]'는 점사(占辭)가 되었다. 이에 그 초고(草稿)를 불에 넣었다 한다. 《晦庵別集 권1 劉德脩》 누추한 집 원문의 '필문규두(蓽門圭竇)'로, 필문(蓽門)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을 말하고, 규두(圭竇)는 담장을 뚫어 만든 규(圭) 모양의 창문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한다. 옳다는……없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하였다. 경도(經道)와 권도(權道) 경(經)은 변할 수 없는 도이고, 권(權)은 임시로 변통하는 도를 말한다. 그의……않는다 공자 당시에 풍속이 나쁜 호향(互鄕) 사람들과는 같이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공자가 그곳 아이를 만나주자 제자들은 당황하였다.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그 진보를 허여할 뿐이요 그의 퇴보를 허여하는 것은 아니니, 어찌 심하게 할 것이 있겠는가. 사람이 몸을 깨끗이 하여 찾아오면 그 깨끗이 한 것을 허여할 뿐이요 지난날의 잘잘못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하였다. 《論語 述而》 명재(明齋) 윤증(尹拯)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인경(仁卿)·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이다. 가장(家狀) 원문의 '家莊'은 '家狀'의 잘못인 듯하다. 인재 원문의 '준조(俊造)'로, 준사(俊士)와 조사(造士)를 합칭(合稱)한 말이다. 준사는 주나라 때의 학제(學制)에서 서인의 자제로 학덕이 뛰어나 태학(太學) 입학을 허가받은 사람을 말하고, 조사는 인격이 성취된 선비라는 뜻으로 특히 태학의 진사(進士)에 선발될 자격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禮記 王制》 선친을……제향하였다 '풍우(楓宇)'는 '풍산사우(楓山祠宇)'를 말한다. 임원(任遠)의 선친은 임세복(任世復, 1655~1703)으로 사후에 증통덕랑(贈通德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고, 남평면 풍산사(楓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기아(箕雅) 조선 숙종(肅宗) 때 남용익(南龍翼)이 엮은 시집이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조선 현종(顯宗) 때의 김석주(金錫胄)에 이르기까지 497인의 시를 모아 엮었다. 조선 후기에 널리 읽힌 시집이다. 풍아(風雅) 《시경》의 〈국풍(國風)〉 및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말하는데, 바르고 고상한 시문(詩文)을 비유한 것이다. 탄옹(炭翁) 권시(權諰) 1604~1672. 탄옹은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이다. 위포(韋布) 가죽 띠를 띠고 베옷을 입은 사람을 말하는데, 옛날에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나 빈한한 평민의 대칭으로 사용하였다. 矯 '僑'의 잘못인 듯하다。 己 '氣'의 잘못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