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1662) 壬寅 1월 26일 경자(庚子) 동인괘(同人卦) 구오(九五) 소양(少陽)근래 일이 없어 고요히 앉아 심신을 수렴하는 여가에 한가로이 《송사(宋史)》를 읽어 보았다. 광종(光宗)과 영종(寧宗) 연간에 이르러 간신이 권력을 장악하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고 지목하니44) 이를 살펴보고 견딜 수 없이 답답하였다. 이를 보면 오늘날의 일과 같아서 수백 년 전의 일인 줄도 모를 정도이니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1월 27일 신축(辛丑) 동인괘(同人卦) 상구(上九) 소양(少陽)나는 전에 인심(人心)의 오묘함은 본래 하늘에 부합하나 다만 한 겹의 사심을 뚫고 위로 천리를 통달해야 세상만사를 총괄하여 꿸 수 있고 이를 이루지 못하면 비록 모든 역사를 두루 살펴보더라도 결국은 나의 일에 유익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역사책을 읽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 한가로이 지내는 여가에 《송사》를 두루 읽어 보니, 엄숙하여 마치 내 자신이 조정에 있으면서 위로는 군부를 따르고 아래로는 재상의 반열에 들어 안으로 각종 정무를 처결하고 밖으로 국경의 변란을 방어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정신은 안정되고 숙연해지며 외면은 단정하고 엄숙해져서 태만한 기운이 심신에 일지 않고 궤안(几案)과 당실(堂室)이 엄숙하여 마치 조정인 것 같았으니 내가 학문을 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이는 역사책을 읽는 방법으로 삼을 만하므로 기록해 둔다.1월 28일 임인(壬寅) 임괘(臨卦) 초구(初九) 대음(大陰)동풍이 때때로 일고 비가 내릴 기미가 다분하였다.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미 지나간 세월을 때때로 되돌아보니 사소한 허물과 큰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하늘에 부끄러워졌다. 이제부터 우뚝하게 뜻을 세우고 의연하게 분발하여 옛 습속을 제거하고 날마다 새롭게 터득한다면 죽기 전에는 허물이 적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몸의 과실을 없애기는 쉽거니와 마음의 과실을 없애기는 어렵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몸의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책망할 수 있거니와 마음의 과실이 있으면 신이 비난할 수 있다." 하였으니,45) 이 말은 응당 종신토록 외워야 한다.1월 30일 갑진(甲辰) 임괘(臨卦) 육삼(六三) 소양(少陽)하루 종일 조용히 지냈다. 오후에 일어나 동쪽 언덕에서 매화를 구경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절구(絶句) 한 수46)를 읊었다.듣건대 동산에 벌써 매화가 폈다 하기에지팡이 짚고 이끼 덮인 길을 한가로이 거닐었네꽃 찾는 흥취를 아무도 아는 이 없어서나 혼자 소매 가득히 맑은 향기 담아 돌아왔네봄비가 막 개니 고아한 정취가 이와 같았다.2월 14일 무오(戊午) 절괘(節卦) 구오(九五) 소양(少陽)문팔주(文八柱)가 와서 삼인도(三寅刀)를 주었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제련하여 주조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세 번의 인일에 걸쳐 제련하여 주조한 것입니다. 금년 1월 4일이 무인일이고 16일이 경인일이고 28일이 임인일이니 이 3일에 걸쳐 이 도를 완성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임인년, 임인월, 임인일에 완성하고 또 중간에 무인일과 경인일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무(戊)는 중앙의 정색(正色)47)이고 경(庚)은 서방(西方)의 정금(正金)48)이고 임(壬)은 북방(北方)의 매서운 기운49)인 데다 5개의 인(寅)은 맹호의 신(神)이다. 그 기운들을 합하여 이 도에 모았으니 신물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장차 주옹(主翁)의 쓰임이 되려는가.2월 19일 계해(癸亥) 중부괘(中孚卦) 육사(六四)한식절(寒食節)에 큰 비바람이 치던 날씨가 오늘에야 갰다. 그러자 따사로운 기운이 충만하여 만물의 형상이 드러났다. 언덕의 매화는 반이나 떨어지고 정원의 풀은 막 돋아났다. 사물을 관찰하여 이치를 고찰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아 마음을 살피니 새롭게 터득하는 재미가 있고 옛 습속의 싹이 없어졌다. 《심경(心經)》을 강학하러 온 사인(士人)이 있어 단정히 공수(拱手)하고 조용히 읽으니 깊은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되었다. 가령 내가 이와 같은 기상을 길이 보존하여 본심을 보존하고 주장하여 잃지 않는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신체에 질병이 많아 외모가 장엄하지 않고 마음이 본래 나약하여 속의 뜻이 확고하지 않은지라 마음이 다스려지는 날은 적고 어지러운 날은 많으며 공경하여 깨어 있는 상태는 적고 혼매하고 나태한 기운은 공경하는 마음을 이김으로써 천리가 발현함은 매우 드물고 외물에 유혹됨은 매우 많게 하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있겠는가. 마음이 발하는 바를 붓 가는 대로 기록하여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갖추는 바이다. 다만 붓을 거두고 일기책을 덮은 뒤에 이 생각이 이미 사라지고 다른 생각이 또 생겨나는 것이 두려우니 삼가고 삼가야 한다.이날 화제(花堤)의 평민이 와서 배알하고 말하기를 "본현에 적을 두고 있는 기민에게 죽을 쑤어 먹였습니다. 그런데 기민의 수가 1000명을 헤아릴 정도라서 먹을 사람들은 이미 대단히 많으나 먹을 죽은 매우 적은 데다 관아의 아전들이 또 이를 악용해 농간을 부려서 죽에다 물을 부어 불려서 먹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황달을 앓고 사망자도 매일 1, 2명씩이나 됩니다. 다른 현에서 흘러들어 온 백성들은 죽을 먹이는 것이 또 본현 사람만 못하므로 길가에 버려진 굶어 죽은 시신들이 즐비합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서 참담해졌다.이어 기억하건대 며칠 전 내가 광주 목사(光州牧使)50)와 대화할 때 굶어 죽은 기민의 시신이 낭자한 문제를 언급하자 광주 목사는 대답하기를 "이들은 비록 풍년이 들더라도 농사와 길쌈에 즐겁게 종사하지 않고 하는 일이 없으니 산다고 해도 세상에 유익함이 없고 죽는다고 해도 국가에 손해가 없습니다." 하니, 내가 이르기를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각각 자기 아들이라 말할 것입니다.51) 저들이 비록 잔민(殘民)이라 하더라도 부모 된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애휼의 정은 백성이 현명하거나 우매하거나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목민관이 되어서 그 언사가 이와 같고 속리(俗吏)의 견해가 늘 이런 식으로 나오니 이 곤궁한 이들이 가엾다52)고 할 만하다.2월 25일 기사(己巳) 귀매괘(歸妹卦) 구사(九四) 소양(少陽)광주(光州)의 송후(宋垕)53)가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박치도(朴致道)54)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치도는 고 진사 박충정(朴忠挺)의 아들이다. 박충정의 아비55)가 부유하여 도적에게 피살되었는데 박충정은 도적이 한 마을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3년 뒤 박충정이 그의 종을 시켜 도적 집에서 세포(細布)를 구입하게 하였는데 그 서명을 보니 곧 그 아비의 수표(手標)였다. 또 다른 종을 시켜 도적을 미행하게 하였더니 가게에 의복을 팔았는데 바로 그 아비의 의복이었다. 박충정은 몰래 주관(州官)에게 가서 그 사유를 울면서 고하였다. 이에 주관이 급히 도적들을 체포하여 형신하니 도적들이 곧 자복하였으므로 그 무리를 사형에 처하였다. 박충정은 그 아비가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해하여 그 아비가 이식을 낸 재물 문권을 가져다가 소각하였다. 또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고 거의 외출하지 않으니 향리에서 그 얼굴을 본 자가 드물었다.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3년 동안 염탐하여 차분하게 도리를 다함이 이러한 데까지 이르렀다. 문권을 소각하고 과거를 그만두어 영리(榮利)를 초탈하였다. 또 난적에게서 그 아비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여 종신토록 자책하여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니 그 독실한 효성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 그 아들 박치도는 젊은 나이로 소과에 합격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사람들이 장차 원대하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아마 박충정이 행한 효행의 보응인 듯하다.각 읍에서 기민들에게 죽을 쑤어 주는 곳에 시신이 쌓여 있는데 본읍이 한층 심각하여 사망자가 날마다 4, 5인 이상이므로 관아 거리와 골목길에 쌓인 시신이 낭자하여 차마 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말을 듣고서 참담해졌다.2월 29일 계유(癸酉) 규괘(睽卦) 구이(九二) 소양(少陽)현리(縣吏)가 이조의 관문(關文)을 받들고 와서 배알하였다. 그 관문의 내용을 살펴보니 '이달 9일 정사(政事)에서 신(臣) 만영(萬英)을 거두어 서용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였으므로 제때 공무를 행하도록 독책하라.'라는 내용이었다. 성상의 하늘 같은 은혜가 미친 바이니 황감하기 그지없다.3월 2일 을해(乙亥) 규괘(睽卦) 구사(九四) 소양(少陽)스스로 생각건대 초야의 어리석고 비루한 내가 관직에 임명된 것이 지금까지 세 조정에 이르렀으나 평소의 자취는 조정과 동떨어져 있었다.56) 그런데 관직에 임명하는 과분한 은혜를 외람되이 누차 받게 되니 비록 순박함을 지키면서 분수에 만족하여 감히 무릅쓰고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항상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두렵고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이로 인하여 경계하여 밤낮없이 전전긍긍 삼가면서 글을 읽고 허물을 반성하며 나태한 태도를 채찍질하여 죽기 전에 혹 비루한 기질을 변화시켜 미세하게나마 진보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만분의 일이나마 누조(累朝)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 한편으로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의 선량한 품성을 회복한다면 행여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 사람이 된 도리57)에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하여 마음과 뼈에 새기는 경계로 삼는다.3월 4일 정축(丁丑) 규괘(睽卦) 상구(上九) 소양(少陽)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맛이 없는 가운데의 맛을 음미하였다.58) 인하여 절구(絶句) 한 수59)를 이루니 "고요함을 주장해야 마음이 비고 전일해진다.[主靜方虛一]"라는 구절이 있다.3월 7일 경진(庚辰) 이괘(履卦) 육삼(六三)60)하루 종일 북풍이 불어 누런 먼지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낮에 임면(任冕)이 내방하였다. 그를 통해 우암(尤庵)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병조 판서에 임명되고 동춘당(同春堂) 송공(宋公 송준길(宋浚吉))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공은 효종의 지우를 입어 작위가 지극히 높아졌으나 금상이 즉위하고 나서 칩거하며 소명에 응하여 나아가지 않은 지가 지금까지 4년이 되었다. 이번에 큰 관직에 임명되어 과연 수레에 멍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갈 것인지 모르겠다.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때에 하늘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 기근이 거듭 닥친 결과 들에는 굶어 죽은 시신이 쌓여 있다. 인심은 이반되고 조정의 기강은 문란하고 대신은 연달아 사망하였다. 그러니 기왓장이 깨지듯 흙이 무너지듯 나라가 망하는 형세가 머잖아 닥칠 것이다. 초야의 천하고 어리석은 나 같은 자도 나도 모르게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하고 의지할 데가 없는 슬픔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선왕의 특별한 지우를 입어 작위가 이미 삼공에 오른 두 공은 오히려 오두막에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나도 모르게 들보를 쳐다보며 장탄식을 하게 된다. 인하여 여기에 기록해 둔다.3월 8일 신사(辛巳) 이괘 구사(九四)61)날씨는 어제와 같되 북풍과 뿌연 먼지는 더욱 심하였다. 몸이 편치 않아 문을 닫고 꼼짝 않고 앉아 신심(神心)을 완양(完養)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읍에 마련된 죽을 쑤어 주는 곳에서 하루 동안 사망한 자가 7명이나 되고 두 처를 둔 이웃 마을 백성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는데 두 처가 달아나서 마을의 개가 그 시신을 다투어 물어뜯는데도 족인(族人)들 역시도 수습하지 않았으며, 또 두 아들을 둔 어미가 길가에서 사망하여 개 떼가 다투어 물어뜯는데도 그 아들들이 상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참혹한 인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곧 죽어 가는데도 부자와 부부조차 서로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을까.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3월 22일 을미(乙未) 대축괘(大畜卦) 상구(上九)남구만(南九萬) 공이 진휼 어사(賑恤御史)62)로 영남에 갈 때 상이 인견하여 인재를 발굴하라고 명하였다. 남구만은 물러나 상소63)하여 아뢰기를, "이전에 신이 조정에 김만영(金萬英)을 천거하였으나64) 상께서는 임용하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지금 신이 비록 인재를 발굴하더라도 결국 나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상이 특별히 전조(銓曹)에 전지(傳旨)를 내려 조속히 관직에 붙이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동몽교관을 제수한 것이고, 이조 참의 유계(兪棨) 공도 논하여 천거하였다는 말을 들었다.5월 5일 정축(丁丑) 구괘(姤卦) 초육(初六)5월은 벽괘(辟卦)65)가 구괘66)인 때이면서 이번 단오는 또한 구괘의 초육이 되니 천시(天時)와 괘기(卦氣)67)가 이와 같이 절로 서로 부합하였다. 천도(天道)의 유행은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하나의 음(陰)이 막 싹트는 초기에 대해 옛사람이 경계하는 말을 세운 것이 지극하였다. 엄동설한의 매서움은 한여름에 음(陰)이 처음 생겨나는 초기에 싹트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크게는 국가의 군자와 소인의 진퇴(進退) 소장(消長)의 기미와 은미하게는 내 마음의 천리와 인욕의 공사(公私)와 사정(邪正)의 구분과 그대로 합치하지 않음이 없다. 그 단서는 매우 은미하여 보기 어렵고 그 자라남은 천지에 가득 미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오묘하고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가운데 하나의 음(陰)의 숙연한 기운이 여러 양(陽)의 아래에 이미 조짐이 드러났다. 돌이켜 나의 마음에서 찾아볼 때 남은 알지 못하고 나만이 홀로 아는 곳이 몇 번 음이 자라고 몇 번 양이 회복되었는지 모르겠다. 순 임금이 말한 유정(惟精) 공부68)는 이때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천시를 대하여 여기에 기록함으로써 스스로를 성찰하는 바이다.5월 19일 신묘(辛卯) 정괘(鼎卦) 구삼(九三) 대음(大陰)아침에 종가에서 연제(練祭)를 거행하였는데 나는 몸이 편치 않아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푸른 소나무가 골짝에 가득하고 푸르른 나무가 섬돌을 따라 서 있었으니 옛일을 생각하여 감개에 젖는 회포를 가누지 못하였다. 나의 고조이신 진사공(進士公)69)의 생질인 박사암(朴思庵 박순(朴淳))이 선묘조(宣廟朝) 때 정승이 되어 휴가를 청해 귀향하여 외선조의 묘소를 살폈다. 진사공께서 이를 영예롭게 여겨 이곳에 재소(齋所)를 건립하여 흥경사(興慶寺)라고 명명하셨는데 정유재란 때 사찰이 병화로 무너졌다. 나의 조부공70)께서 터의 동북쪽에 작은 집을 짓고 벽송당(碧松堂)이라고 명명하셨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다. 현재의 이 벽송당은 내가 여러 족인과 함께 도모하여 건립한 것이다. 인하여 생각건대 어릴 적에 선부형(先父兄)과 여러 어른을 따라서 선대의 묘소를 왕래하며 보살피고 이곳에 나아가 묵었던 것이 완연히 어제 일 같은데 벌써 30년이 지난 옛 자취가 되었다. 가만히 깊이 생각하매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6월71) 27일 무진(戊辰) 송괘(訟卦) 구사(九四) 소음(少陰)저녁에 문삼고(文三古)72)가 영암(靈巖)에서 와서 절하였는데 곧 나의 외가 친척 동생이다. 그가 묻기를 "형께서 전에 강진(康津)의 청련(靑蓮)을 모신 사우(祠宇)73)에 보내는 통문(通文)을 작성하여 성암(惺庵) 이수인(李壽仁)을 본사(本祠)에 배향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영암의 사인(士人)들은 대부분 성암은 본사에 배향할 만한 인물이 못 될 뿐더러 권하여 배향하도록 한 것은 또한 지나친 처사라고 하면서 비난하는 말을 시끄럽게 전하고 들은 자들도 휩쓸리고 있습니다. 형께서는 그 비방에 대해 해명할 말이 없습니까?" 하니, 내가 이르기를 "그럴 만도 하겠지. 명월주(明月珠)나 야광벽(夜光璧)을 어두운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던져 줄 경우 칼을 어루만지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은 어째서이겠나?74) 과거에 드물게 보던 것을 갑자기 대하면 마음이 떨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도 모르게 대로하기 때문이니 이는 곧 인지상정이라네. 지금 이공(李公)은 궁벽한 골짜기에 깊이 은거하여 사람들이 공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고 비록 어쩌다 사람들과 접하는 경우라도 말하고 웃거나 행동하는 것이 남들과 같고 음식을 먹거나 기거하는 것이 남들과 같아서, 공을 본 자들이 평소 내심 공을 만만하게 봤다가 이제 큰일을 도모하는 나의 말을 듣고 모두들 놀랍고 괴이쩍게 여기는 것이니 또한 인지상정이네. 지금 속인들은 속으로 유자(儒者)의 생김새나 안색, 먹는 음식이나 행동은 반드시 일반 사람과는 판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막상 만나보고 다른 사람들과 같으면 '저 사람 역시 평범한 사람이지 유자가 아니다.' 하니, 이것이 맹자(孟子)가 부득이 요순(堯舜)도 일반 사람과 똑같으셨다75)고 발언한 까닭이네. 저 이공은 만년에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문을 닫아걸고 뜻을 구한 인물이라네. 그 행위와 언동은 본래 세속을 놀라게 하는 사업은 없었으니 오늘날 속인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유자는 일반 사람들과 다를 수는 없습니까?" 하니, 내가 이르기를 "깊이 은벽(隱僻)한 이치를 찾은 뒤라야 속인의 마음을 놀라게 할 수 있다거나 지나치게 괴이한 짓을 행한 뒤라야 세인의 이목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이 두 가지 말은 유가(儒家)가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일세. 그래서 군자의 말은 일반인과 같으면서도 같은 가운데 절로 같지 않은 것이 있고, 군자의 행실은 일반인과 같으면서도 같은 가운데 또한 같지 않은 것이 있네. 같은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같지 않은 것은 어찌 일반인의 이목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겠나. 미처 알지 못한 이상 그들이 공을 폄훼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공을 폄훼한 것은 아니네." 하였다.8월 13일 계축(癸丑) 돈괘(遯卦) 초육(初六)날씨는 환하고 상쾌하며 당실은 한갓진 가운데 홀로 책상 앞에 앉거나 누워서 고서를 보았다. 절구(絶句) 한 수76)를 입으로 읊었는데 "푸르고 맑아라 가을 하늘 개니[碧淨秋天霽]"라는 구절이 있다.9월 10일 경진(庚辰) 점괘(漸卦) 육사(六四)《역도설(易圖說)》77)을 보고 느낌이 있어 이런 절구(絶句) 한 수를 이루었다.주역의 도 밖에 존재하는 천지는 없거니와복희와 문왕은 그림자와 형체를 그렸을 뿐이네모름지기 천지의 이면을 따라서괘획의 이름을 점검해 보아야 하리《주역》의 도는 천지간에 유행하여 모든 초목금수와 멀게는 고금, 가깝게는 한순간까지 한 물건, 한 시각도 역이 아닌 것이 없으니 역의 전체가 천지에 깃들어 있거니와 저 복희의 괘획(卦劃)과 문왕의 괘사(卦辭)는 다만 그림자와 형체를 그려냈을 따름이다. 상지(上智)는 괘획과 괘사가 없어도 진실로 하늘에 있는 역을 묵묵히 알 수 있고, 중지(中智) 이하의 선비 또한 괘사를 통해 괘획을 알고 괘획을 고찰하여 하늘을 알 수 있다.10월 18일78) 무오(戊午) 췌괘(萃卦) 육이(六二) 대양(大陽)금성(錦城)의 유점(柳簟)이 내방하였는데 효자 유공신(柳公信)79)의 아들이고 나에게 외가 8촌이다. 유공신은 어릴 적에 부모님을 여의자 장성해서 6년 동안 추복(追服)하고 종신토록 묘소 아래 거처하면서 조석으로 성묘하되 날씨가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그만두지 않으니 묘전(墓前)의 부복(俯伏)한 곳은 이 때문에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 목사 이여익(李汝翊)80)이 그의 효행에 대해 듣고서 그를 내방하고 문밖에 있는 고송(孤松)을 봉하여 효자송(孝子松)이라고 명명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그의 효행에 대해 보고를 받고 그 문에 정표(旌表)하였다.10월 29일 기사(己巳) 관괘(觀卦) 구오(九五) 소음(少陰)종을 시켜 황두(黃豆) 4말을 가지고 시장에서 목(木)을 구입해 오게 하였으나 구입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금년 봄과 여름 사이에 굶어 죽은 시신이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인 가운데 목 1필에 대해 미(米) 2되 값을 쳐 주고 두(豆) 4되로 교환하고자 해도 사람들이 오히려 구입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런데 몇 달 뒤 작황이 평작보다 조금 나아지니 목 1필이 조(租) 8, 9말 값이 되고 두 5, 6말에 교환되며, 물고기 1미(尾)는 곡물 몇 말 값이 되었다. 또 시장에 주육(酒肉)이 넘쳐나고 여항(閭巷) 구석구석에서 떼 지어 가무를 하니 낭비하기 좋아하고 안일해지기 쉬운 인정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현재는 농사가 비록 평작보다 조금 낫다고 해도 다년간 체납된 공채(公債)며 사채(私債)에 대해 일시에 징수를 독촉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이 시기에 또 시행하여 다년간 거두지 못한 각 관사의 공물(貢物)에 대해 또 긴급하게 규정대로 독촉하고 있다. 백성들이 먹을 식량의 여유분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민심이 우매하여 미거(未擧)하게도 경계할 줄 모르니 국사와 민심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보인다. 서글픈 마음으로 기록한다.11월 11일 신사(辛巳) 복괘(復卦) 육삼(六三)동짓날이니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를 참배하였다. 눈보라가 아주 매서워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앉아 미양(微陽)을 길렀다.81) 지은 시에 "일양이 회복된 것이 천근이다.[一陽來復是天根]"82)라는 시구가 있다.12월 7일 병오(丙午)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 대음낮에 이서(里胥)가 와서 환곡을 매우 절박하게 독촉하였다. 또 산성에 쌀을 운반하고 경대동미(京大同米)를 납부하고 관사에 땔감을 납부하는 등의 역(役)에 대해 매우 철저하게 독촉하였다. 3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장기간 관곡(官穀)을 거두지 않다가 올해 농사가 조금 잘되었다고 하여 다년간 체납된 빚에 대해 일시에 징수를 독촉하고 다른 군에 옮겨 진휼하거나 산성에 운반하는 쌀과 대동의 무거운 부세를 중첩적으로 각박하게 거두고 있다. 올해 농사가 다소 풍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유랑하는 백성들이 아직 안착하지 못하였고 굶주려 고달픈 고통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다. 올해 목화 농사가 또 너무도 시원찮아 굶주림을 겪고 난 백성들이 몸에 온전하게 옷을 갖추어 입은 자가 없다. 군현의 감옥은 꽉 차 있는데 더군다나 한정(閑丁)을 색출하여 충정(充定)하라는 명령이 아침저녁으로 성화처럼 다급하여 일족들까지 침탈을 당하는 화가 소란스럽게 여염에 가득하다. 근심에 젖어 탄식하는 얼굴빛과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도로에 넘쳐나고 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르기를 "연전의 기근 때 죽지 못하여 이런 온갖 재앙에 걸려들게 된 것이 한스럽구나." 한다. 아, 민생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도 은택을 베풀기를 건의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고 심지어 견감(蠲減)해 주라는 명령이 비록 성상의 하교로 내려지더라도 부세 징수가 주현에 극도의 해악을 끼치고 있으니 한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한갓 칠실(漆室)의 이부(嫠婦)가 한탄하는 마음83)을 품고 누추한 집에서 탄식만 할 뿐이니 말해 무엇 하랴.12월 30일 기사(己巳) 비괘(賁卦) 육이(六二) 대음(大陰)하루 종일 재계하며 지내면서 세밑을 보내었다. 올해는 봄여름에 대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신이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였다. 또 농사가 비록 평작보다 조금 낫다고 해도 부세 징수가 너무도 가혹하여 여염에는 해를 넘길 거리가 없다. 대체로 여름 동안 주현에 쌓인 시신이 낭자하고 곤경에 처하여 떠도는 유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는데도 수령은 감사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감사는 한갓 수령의 말만 믿고 또한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관채(官債)의 상환이나 대동법의 설행, 군정(軍丁)에 대한 다급한 수괄(搜括)로 위태롭게 독촉하고 그 화가 일족이나 이웃에까지 미쳤다. 그리하여 군현의 감옥에는 수감된 자가 시장에 몰려든 사람처럼 많고 관정 (官庭)에는 매 맞아 흘린 피가 흥건하였으니 차마 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한 해가 장차 저물어 가는 이때 나의 한 해 동안의 몸과 마음의 일이 일상생활에 드러난 것을 묵묵히 생각해 보면 비록 큰 허물은 없었으나 은미한 사려나 학문을 진전시키는 공부, 물들어 버린 기질, 비루한 구습의 측면에서 보자면 확연하게 변화시킨 공효가 없었다. 방 안에 고요히 앉아 이미 지나간 일을 점검해 보니 나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러도 부끄럽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워진다. 여기에 기록함으로써 내년에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근본으로 삼는 바이다.나는 어릴 때 서책의 면지(面紙)나 공행(空行)에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열일곱 살 때 정헌(靜軒) 고공(高公)84)을 뵈었는데【공은 선생의 부인의 외조부이고 제봉(霽峯)의 셋째 아들로 관직은 정랑이다.】 공은 예학(禮學)에 심오하고 기풍이 매우 단중(端重)하였다. 공을 모시고 이야기할 때 마침 서책의 면지에 난잡하게 쓰인 초서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 공이 대뜸 이르기를 "나는 평소 서책을 더럽히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더구나 성현의 경전은 신명처럼 공경하고 부모처럼 존경해야 하거늘 어찌 묵필(墨筆)로 긁적일 수 있단 말인가. 마음 씀이 단정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만하구나."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자마자 두려워지고 얼굴이 발개진 채로 지난날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이때부터는 서책에 점 하나도 함부로 찍지 않았다. 아, 내가 만약 일찍 현명한 스승을 따라서 배움에 힘썼더라면 오늘에 이르러 사람됨이 이와 같겠는가. 우연히 옛일이 생각나서 서글픈 마음으로 기록한다. 正月二十六日。 庚子。 同人九五。 少陽近日無事。 靜坐收斂之暇。 閑閱《宋史》。 至光寧之間。 奸鬼用事。 指道學爲僞。 寓目不堪鬱。 見之若今日事。 不覺累百年前事。 掩卷咄嗟。二十七日。 辛丑。 同人上九。 少陽余嘗以爲人心之妙。 本與天合。 但透一重私己。 上達天理。 人間萬事。 可以總貫。 此而不得其成。 雖歷覽萬古。 竟無益於吾事。 是以余未暇及於讀史。 近者齋居之暇。 閱遍《宋史》。 肅然若身處本朝。 上應君父。 下班宰列。 內辦庶務。 外禦邊事。 自不覺其心神定肅。 外體端嚴。 惰怠之氣。 不起於心身。 而几案堂室。 儼然若朝廷。 於吾爲學。 所補大矣。 此可爲讀史法。 故記之。二十八日。 壬寅。 臨初九。 大陰東風時起。 多有雨勢。 靜坐潛心。 時或念及已往年月。 微愆大過。 不一而足。 追思不覺有愧于天。 自此庶可挺然立志。 毅然發憤。 消除舊習。 日有新得。 未死之前。 得爲寡過之人歟! 先正有言曰: "無身過易。 無心過難。" 又曰: "有身過。 人得而責之。 有心過。 神得而非之。" 此語當終身誦之可也。三十日。 甲辰。 臨六三。 少陽終日靜處。 午後。 起而看梅于東臯。 故吟一絶。 "聞道東山已放梅。 一筇閒步穿莓苔。 無人識得尋芳興。 滿袖淸香獨自回。" 春雨新晴。 雅意如此。二月十四日。 戊午。 節九五。 少陽文八柱來贈三寅刀。 寅年月日所鑄冶。 或曰: "經三寅日鑄冶者也。 今年正月初四日戊寅。 十六日庚寅。 二十八日壬寅。 經此三日而成此刀云。" 然則以壬寅年壬寅月壬寅日成之。 而中經戊寅庚寅。 戊爲中央正色。 庚爲西方正金。 壬爲北方慄烈之氣。 而五箇寅爲猛虎之神。 合其氣鍾于此刀。 其爲神物宜矣。 其將爲主翁之用乎!十九日。 癸亥。 中孚六四寒食之節。 大風雨氣候。 至今日開霽。 和氣藹然。 萬象逞露。 原梅半落。 庭草初生。 觀物察理。 反己省心。 有新得之趣。 無舊染之萌。 士人有來講《心經》者。 端拱靜讀。 益覺深味。 使我長存似此氣象。 存主不失。 其進豈可量哉? 而身多疾病。 外貌不莊。 心本懦弱。 內志不固。 治日少而亂日多。 敬惺寡而昏惰勝。 使天理之發。 一薜居州。 而外物之誘。 衆於宋人。 可勝痛哉? 心之所發。 隨筆而記。 以備警箴。 但恐斂筆掩卷之後。 此念已消而他念又生。 愼之愼之。 是日花堤平人來謁言: "本縣籍飢民設粥飼之。 其數以千計。 口旣煩多。 而所喫之粥稀而小。 官吏又因緣作奸。 和水於粥飼之。 人皆黃病。 而死者日一二人。 他縣之流民。 飼之又不如縣人。 路傍之殍相望云。" 聞之慘矣。 仍記日者。 余與光牧言。 言及飢民之餓殍相藉。 光牧答曰: "此輩雖在豐年。 不能樂業耕織。 無所事爲。 生無益於世。 死無損於國。" 余曰: "才不才。 各言其子。 彼雖殘民。 自其父母者見之。 愛恤之情。 何間於賢愚哉?" 至今思之。 爲牧民之官。 其言如此。 俗吏之見。 每出如此。 可謂哀此煢獨也!二十五日。 己巳。 歸妹九四。 少陽聞光州宋垕參生進兩科。 朴致道參進士。 致道。 故進士忠挺之子。 忠挺之父富給。 爲盜所殺。 忠挺知盜在同閭。 三年後。 忠挺。 使其僕貿細布于盜家。 見其署。 乃其父手標也。 又使他僕潛從盜。 而市衣於肆。 乃其父衣也。 忠挺。 潛往州官。 泣言其故。 急捕盜屬。 而刑之。 盜乃服之。 大戮其類。 忠挺。 痛父非命。 取其父出息資財文券焚之。 終身不赴科試。 杜門罕出。 鄕里見其面者鮮矣。 其爲父報讎。 三年伺察。 從頌盡道。 至於如此。 焚券廢科。 杜絶榮利。 痛不能救其父於亂賊之中。 終身引罪。 閉門囚跡。 其篤於誠孝。 可尙也已。 其子致道。 少年登庠。 而其才也。 人將期於遠大。 或者。 忠挺孝行之報應歟! 聞各邑飢民設粥之所。 死人相積。 本邑尤甚。 死者日不下四五人。 官街巷路。 積屍相藉。 慘不忍見云。 聞之酷矣。二十九日。 癸酉。 暌九二。 少陽縣吏奉吏曹關文來謁。 考其關辭。 以本月初九日政。 收敍臣萬英除童蒙敎官。 責以及期行公云云。 天恩所曁。 惶感無地。三月初二日。 乙亥。 暌九四。 少陽自念余以畎畝愚陋。 獲竊祿秩。 于今三朝。 平生蹤跡。 隔絶朝市。 而除拜誤恩。 猥蒙累次。 雖守愚安分。 不敢冐進。 每念及此。 不覺惶愧。 庶或仍此警惕。 夙夜兢戰。 讀書省愆。 鞭辟頹惰。 未死之前。 或有變化陋質。 進步尺寸。 一以報累朝盛恩之萬一。 一以復天賦本然之良性。 倘無愧於得名爲人之道耶? 仍記于此。 以爲銘心鏤骨之戒。初四日。 丁丑。 暌上九。 少陽靜坐終日。 有味乎無味之中。 仍成一絶。 有"主靜方虛一"之句。初七日。 庚辰。 履六11)三北風終日。 黃塵四塞。 午任冕來見。 聞尤庵宋公拜兵判。 同春堂宋公拜都憲。 二公遭遇孝廟。 位極顯隆。 今上當宁。 杜門不赴命者今四年矣。 未知今蒙大除拜。 果不俟駕耶否? 以余見之。 方此之時。 天心未豫。 饑饉荐臻。 野積餓殍。 人心解離。 朝綱陵替。 大臣連喪。 瓦解土崩之勢。 朝暮且迫。 若余之畎畝賤愚。 不覺中夜起嘆。 有瞻烏爰止之痛。 况二公蒙先王之殊遇。 位已極於台鼎。 尙能安眠於蔀屋之下耶否? 言之至此。 自不知仰樑長吁。 仍記于此。初八日。 履九12)四日氣如昨。 而北風昏塵益甚。 心氣不平。 閉戶凝坐。 完養神心。 夕聞邑中設粥所。 一日死者七人。 隣村民有兩妻者。 以染病死。 兩妻出走。 村犬爭咬其尸。 而族人亦不收。 又有兩子母死于道傍。 群犬爭咬。 而其子不顧云。 人心之慘至此耶? 痛痛。 蓋以死亡將迫。 父子夫妻。 亦不相保故也。 古亦有如是事否? 痛痛。二十二日。 乙未。 大畜上九聞南公九萬以賑恤御史13)往嶺南。 上引見。 命以採訪人才之意。 九萬退。 而上疏言: "臣曾薦金萬英于朝。 自上無採用之意。 今臣雖採訪人才。 竟何補於國哉?" 上特下旨銓曹。 命斯速付職。 故有敎官之除。 而吏曹參議兪公棨。 亦有論薦云矣。五月初五日。 丁丑。 姤初六五月在辟卦爲姤。 今端午又爲姤之初六。 天時卦氣。 自相符合如此。 天道流行。 安可誣也? 一陰初萌之始。 古人之設戒也至矣。 氷雪融寒之慘。 未嘗不萌於夏半陰始之初。 則大而國家君子小人進退消長之幾。 微而吾心天理人慾公私邪正之判。 無不合。 其端甚微而難見。 其長漫天而極地。 可不懼哉? 今日妙冥難測之中。 一陰肅然之氣。 已兆於衆陽之下矣。 反而求之吾心。 人所不知。 己所獨知之地。 未知幾姤而幾復也。 舜之所謂惟精工夫。 可用力於此際矣。 嘿對天時。 用識于此以自省云。十九日。 辛卯。 鼎九三。 大陰朝。 宗家行練祭。 余以氣未平不能參祭。 朝開戶視之。 蒼松滿壑。 綠樹循除。 不勝感古之懷。 蓋我高祖進士公甥侄朴思庵。 作相於宣廟朝。 乞暇還鄕。 參省于外先墓山。 進士公榮之。 作齋所于此地。 仍名曰"興慶寺"。 丁酉之亂。 寺毁于兵火。 我王父公構小屋于基東北。 名之以碧松堂。 歲久而毁。 此室則余與諸族人謀建者也。 仍念兒時陪先父兄諸丈。 往來參省于先墓。 仍就宿此地。 完然昨日事。 而已作三十年舊跡矣。 俯仰思惟。 難以爲懷也。二14)十七日。 戊辰。 訟九四。 少陰夕文三古自靈巖來拜。 卽余外眷戚弟也。 問曰: "戚兄曾作通文抵康津靑蓮祠宇。 喩以李惺菴壽仁配享於本祠云。 然耶否?" 曰: "然。" 曰: "靈巖士人。 多以有惺菴不足配於本祠。 勸而配之。 亦過矣。 口舌喧傳。 聞者附和。 戚兄其無以解其誚乎?" 曰: "固矣。 明月夜光。 以暗投人。 人莫不按劍。 何哉? 曾所罕見。 猝然遇之。 心駭目動。 不覺怒魄。 乃人之情也。 今李公深居窮谷。 人罕其面。 雖或與人接者。 言笑動靜同於人。 飮食起居同於人。 見之者心忽之於平日。 今聞余大言。 莫不驚怪。 亦常情也。 今俗人之心。 以爲儒者之形貌顔色。 飮食事爲。 必頓別於衆人。 及見之。 與別人同。 則曰: '彼亦凡人。 非儒者也。' 此孟子之所以不得已而發堯舜與人同之之語也。 彼李公晩悟志學。 杜門求志之人也。 其事爲言動。 固無驚俗動世之事業。 則俗人今日之此言。 不亦宜乎?" 曰: "儒者。 不能不同於人哉?" 曰: "深求隱僻之理。 然後可以驚俗人之心。 過爲詭異之行。 然後可以動世人之耳。 此二者。 儒家之諱言者也。 是以君子之言。 同於衆人。 而所同之中。 自有不同者。 君子之行。 同於衆人。 而所同之中。 亦有不同者。 其所同者。 人人之所可見。 其不同者。 則豈凡耳目之所可瞻聆者也? 旣不能及知。 則其毁之也。 非故毁之也。"八月十三日。 癸丑。 遯初六天氣明爽。 堂室蕭然。 獨坐牀上。 或臥看古書。 口吟一絶。 有"碧淨秋天霽"之句。九月初十日。 庚辰。 漸六四看《易圖說》。 感成一絶曰: "易外無天地。 羲文畫影形。 須從天地裏。 點檢畫中名。" 蓋大易之道。 流行於天地之間。 一草一木。 一禽一獸。 遠之古今。 近之瞬息。 無一物一時之非易。 則易之全體。 寓於天地。 而彼羲之畫文之辭。 特畫出影形而已。 上智不待畫與辭。 而固可默識在天之易矣。 中智以下之士。 亦可因其辭而知畫。 考其畫而知天矣。十月初15)八日。 戊午。 萃六二。 大陽錦城柳簟來見。 孝子公信之子。 於吾外眷八寸也。 公信少喪父母。 及長六年追服。 終身居于墓下。 晨昏省墓。 寒暑不廢。 墓前俯伏處。 草爲之不生。 太守李汝翊。 聞其孝。 而往見之。 封其門外孤松。 名曰"孝子松"。 後朝廷聞其行。 旌表其門。二十九日。 己巳。 觀九五。 少陰使奴將黃豆四斗買木于市。 不得買而來。 今年春夏間。 積莩成邱。 一匹之木。 直米二升。 易豆四升。 而人猶恐不及買。 數月之後。 得農稍稔。 一匹之木。 直租八九斗。 易豆五六斗。 一尾之魚。 其直數斗。 市場之間。 酒肉狼藉。 閭巷之曲。 歌舞成群。 人情之好糜費而易怠安。 一至此耶! 今農雖曰稍稔。 積年逋欠。 公私之債。 一時懲督。 而大同法又行於此時。 各司積年未捧之貢。 程董又急。 民之所食所餘者幾何。 而民心愚闇。 昏不知戒。 國事民心。 似無可爲者。 悵然而記。十一月十一日。 辛巳。 復六三冬至日也。 晨起。 參拜于家廟。 風雪慘烈。 終日閉關而坐。 以養微陽。 有"一陽來復是天根"之句。十二月初七日。 丙午。 噬嗑六三。 大陰午里胥來。 督還糓甚切。 且以山城運米,京大同納米,官司納柴等役。 董刻甚至矣。 蓋以三年大侵。 久未收官糓。 以今年小稔。 積年逋欠。 一時懲督。 而他郡移賑及山城運米大同重賦。 層疊刻捧。 今農雖曰稍登。 而流徙之民。 尙未安集。 飢困之毒。 尙未蘇健。 而今年綿種之農。 又極不實。 飢餘之民。 體無完衣者。 郡縣之獄。 充塞矣。 加以括充閑丁之令。 朝暮星急。 一族侵漁之禍。 擾塡閭里。 愁嘆之色。 號泣之聲。 道路相望。 人人相謂曰: "恨不死於年前之飢。 而逢此百罹也。" 嗚呼! 民事至此。 國將奈何? 而無一人建白施恩者。 至有蠲減之命。 雖下於聖敎。 而懲輸極毒於州縣。 可勝嘆哉! 徒懷柒室嫠婦之嘆。 而咄咄於蓬蓽之下。 謂之何哉?三十日。 己巳。 賁六二大陰終日齊居。 以送舊歲。 是歲也春夏大饑。 積殍成邱。 農雖稍稔。 賦斂極苛。 閭里之間。 卒歲無資。 蓋夏間州縣積尸相藉。 流民㒹徙者。 塡塞道路。 而守令不以實報于監司。 監司徒信守令之口。 亦不以實聞于朝廷。 是以官債之償。 大同之設。 括丁之急。 水火督董。 延及于一族。 隣里郡縣之獄囚者如市。 官司之庭。 杖血淋漓。 不忍言矣。 一年將暮。 默念余一年身心上事。 著之于日用事爲者。 雖無大過。 思慮之微。 進學之工。 氣質之染。 舊習之陋。 未有能廓然變化之效。 靜坐一室。 點檢已往之事。 不覺仰愧俯怍。 持筆于此。 以爲明年恐懼修省之本云。 余少時。 於書冊面紙。 或空行處。 好寫文字。 年十七歲。 拜靜軒高公。【公卽先生內夫人外祖。 霽峯第三子。 官正郞。】公深於禮學。 氣甚端重。 陪話之際。 適見書冊面紙有雜書草字。 公遽曰: "吾平生甚惡點汚書冊。 况聖經賢傳。 敬之如神明。 尊之如父母可也。 其可以墨筆塗抹耶? 足見其用心不端矣。" 余聞言卽懼然。 面發赤色。 大覺前日之非。 自是。 未嘗妄加一點於書冊。 嗟夫! 使余早從明師而勉學。 則至于今日。 作人如此哉? 偶思古事。 愀然而記。 광종(光宗)과……지목하니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주희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금단한 이른바 경원당금(慶元黨禁)의 사건을 말한다. 영종 경원 연간에 한탁주와 조여우(趙汝愚)가 권력 쟁탈전을 벌일 적에 주희 등이 조여우 편을 들었는데, 한탁주가 득세한 뒤 승상 조여우 이하 59인을 모조리 몰아내는 한편, 도학을 위학이라고 규정하고 일절 금지하도록 하였다.《宋史 권434 蔡元定列傳, 권474 韓侂胄列傳》 선정(先正)이……하였으니 앞 구절은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권12 〈관물편(觀物篇)〉에 보인다. 뒤 구절은 정확한 출전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관물편〉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 몸으로 행하는 것만 못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만 못하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만이 아니 사람의 총명도 오히려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신의 총명에랴.[言之于口, 不若行之于身, 行之于身, 不若盡之于心, 言之于口, 人得而聞之, 行之于身, 人得而見之, 盡之于心, 神得而知之. 人之聰明, 猶不可欺, 況神之聰明乎?]"라는 구절이 있는데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불원복장(不遠復章)에 인용되어 있다. 또 《장자(莊子)》 제23편 〈경상초(庚桑楚)〉에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서 불선을 저지르는 자는 사람들이 그를 처벌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악을 행한 자는 귀신이 처벌한다.[爲不善乎顯明之中者, 人得而誅之, 爲不善乎幽閒之中者, 鬼得而誅之.]"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인용한 첩산 사씨(疊山謝氏)의 말이 《심경부주》 권1 시이우군자장(視爾友君子章)에 나온다. 절구(絶句) 한 수 본서 권4에 수록된 〈동쪽 언덕에서 매화를 구경하다[看梅東臯]〉이다. 무(戊)는 중앙의 정색(正色) 정색은 간색(間色)의 반대말로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 다섯 가지 순정한 오방색(五方色)을 가리킨다. 천간(天干) 무는 황색에 해당하며 황색은 오방색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다. 경(庚)은 서방(西方)의 정금(正金) 천간 경은 오방색 가운데 백색에 해당하며, 백색은 서쪽에 위치한다. 또한 오행으로 보면 정금에 속한다. 임(壬)은……기운 천간 임은 오방색 가운데 흑색에 해당하며, 흑색은 북쪽에 위치한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승정원일기》 현종 2년 7월 12일 기사 및 《광주읍지(光州邑誌)》 등을 참조할 때 이광재(李光載)라는 인물로 보인다. 자는 계장(季章),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재주가……것입니다 이 말은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그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외관(外棺)을 만들기를 청하자, 공자가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즉 공자는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또한 각각 자기 아들이라 말할 것이니, 내 아들 리가 죽었을 때에도 관만 있고 외관은 없었다.[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남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라고 하더라도 보살펴 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 말을 인용하였다. 이……가엾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부자들은 괜찮거니와, 이 곤궁한 이들이 가엾다.[哿矣富人, 哀此煢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구절은 다시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도 인용되어 있다. 송후(宋垕) 이 당시 생원시와 진사시 방목(榜目)에 의하면 후(垕)가 후(堠)로 되어 있다. 자는 자후(子厚),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송수(宋燧)의 아들로 1608년에 출생하여 광주에 거주하였다. 박치도(朴致道) 1642~1697. 자는 학계(學季), 호는 검암(黔巖),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1662년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광주에 거주하였다. 박충정의 아비 박언감(朴彦瑊, 1578~1644)이다. 자는 시헌(時獻)이다. 관직에……있었다 남포는 인조 때 내시교관(內侍敎官), 효종 때 세마(洗馬), 현종 때 동몽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는……도리 《심경부주(心經附註)》 서문(序文)에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 삼재에 참여하여 만 가지 조화를 낼 수 있는 것은 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人之得名爲人, 可以參三才而出萬化者, 以能不失其本心而已.]"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맛이……음미하였다 경전(經傳)을 읽어 음미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절구 한 수 본서 권1에 수록된 〈주정(主靜)〉이다. 육삼(六三) 원문은 '九三'인데, 전후 간지와 효의 순서에 근거하여 '九'를 '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구사(九四) 원문은 '六四'인데, 전후 간지와 효의 순서에 근거하여 '六'을 '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진휼 어사(賑恤御史) 원문은 '賑恤御使'인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使'를 '史'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소 《승정원일기》 현종 3년 2월 2일 기사에 부사과 남구만이 올린 이 상소의 대개(大槪)가 보인다. 김만영(金萬英)을 천거하였으나 남구만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 제3 〈인성변진소회소(因星變陳所懷疏)〉에 남구만이 남포와 담양(潭陽)의 유학(幼學) 유진석(柳震錫)을 천거한 내용이 보인다. 벽괘(辟卦) 벽(辟)은 임금[君]이란 말로, 주관 혹은 통솔의 의미이다. 1년 12개월을 《주역(周易)》의 괘에 배치시키는 것으로, 자월(子月)인 11월은 양(陽) 1획인 복괘(復卦), 축월(丑月)인 12월은 양 2획인 임괘(臨卦), 인월(寅月)인 정월은 양 3획인 태괘(泰卦), 묘월(卯月)인 2월은 양 4획인 대장괘(大壯卦), 진월(辰月)인 3월은 양 5획인 쾌괘(夬卦), 사월(巳月)인 4월은 양 6획인 건괘(乾卦), 오월(午月)인 5월은 음(陰) 1획인 구괘(姤卦), 미월(未月)인 6월은 음 2획인 돈괘(遯卦), 신월(申月)인 7월은 음 3획인 비괘(否卦), 유월(酉月)인 8월은 음 4획인 관괘(觀卦), 술월(戌月)인 9월은 음 5획인 박괘(剝卦), 해월(亥月)인 10월은 음 6획인 곤괘(坤卦)에 각각 배치시키는 것이다. 구괘 이는 '음이 처음 생겨 장차 자라는[陰始生而將長]' 괘이다. 괘기(卦氣) 《주역》의 괘를 사시(四時), 월령(月令), 기후(氣候) 등에 배치한 것을 말하며, 서한(西漢)의 맹희(孟喜)가 처음 창안하고 경방(京房)이 발전시켰다. 유정(惟精) 공부 유정은 정(精)하게 살핀다는 의미이다. 《심경부주》 권1 서인심도심장(書人心道心章)에 순임금이 말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나의 고조이신 진사공(進士公) 김두(金㪷)이다. 자는 가균(可均), 호는 모암(慕庵), 본관은 당악(棠岳)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나주(羅州)의 진사 11명과 함께 조광조를 신원하는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조부공 김원록(金元祿)이다.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으로 일가가 화를 입게 되자 이로부터 과거를 단념하였다고 한다. 6월 원문에는 없는데, 간지에 근거하여 '六月'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문삼고(文三古) 1633~1699. 자는 태초(太初),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현(文玹)의 아들이다. 강진(康津)의……사우(祠宇) 강진 서봉서원(瑞峯書院)을 가리킨다. 청련(靑蓮)은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의 호이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이수인(李壽仁)은 이후백의 증손이다. 명월주(明月珠)나……어째서이겠나 이는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의 "신은 들으니, 명월주나 야광벽을 어두운 밤 길 가는 사람에게 던져 줄 경우, 칼을 어루만지며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까닭 없이 보물이 앞에 이르기 때문입니다.[臣聞明月之珠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何則? 無因而至前也.]"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수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다는 의미이다. 요순(堯舜)도……똑같으셨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절구(絶句) 한 수 본서 권1에 수록된 〈책을 보다[看書]〉이다. 역도설(易圖說) 남송 오인걸(吳仁杰)이 지은 책으로, 《주역(周易)》의 괘와 효의 변화 및 점치는 법을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18일 원문은 '初八日'인데, 간지에 근거하여 '初'를 '十'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유공신(柳公信) 1579~1655.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이여익(李汝翊) 1591~1650. 자는 비경(棐卿), 호는 수봉(秀峯),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이응원(李應元)의 아들이다. 1649년(인조27)에 나주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재임 중 관소에서 사망하였다. 미양(微陽)을 길렀다 미양은 곧 동지에 일양(一陽)이 처음 생기는 아주 미약한 양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안정시켜 기른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복괘(復卦) 상사(象辭)에, "우뢰가 땅속에 잠재한 것이 복이니, 선왕이 그것을 인하여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다.[雷在地中復, 先王以, 至日閉關.]"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이(程頥)는 "양이 처음 생겨남에 매우 미미하니 안정한 뒤에야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복괘의 상사에 '선왕이 이것을 보고서 동짓날에 관문을 닫는다.' 하였다.[陽始生, 甚微, 安靜而後能長. 故復之象曰'先王以, 至日閉關.']"라고 하고, 주희는 "하나의 양이 처음 회복함에 양기가 매우 미미하니, 수고롭게 동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안정하여 미미한 양을 길러야 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선한 마음이 막 싹트려고 할 적에 바로 안정하여 기르고자 하여야 비로소 성대해지는 것과 같다.[一陽初復, 陽氣甚微, 不可勞動. 故當安靜以養微陽, 如人善端方萌, 正欲靜以養之, 方能盛大.]" 하였다. 일양이……천근이다 본서 권5에 수록된 〈동짓날에 느낌이 있어 읊다[長至日有感]〉에 보이는 구절이다. 천근(天根)은 소옹(邵雍)의 말인데 그의 시 〈관물음(觀物吟)〉에 "건이 손을 만난 때 달의 굴을 보게 되고, 지가 뇌를 만난 곳에 하늘의 뿌리를 볼 수 있다.[乾遇巽時觀月窟, 地逢雷處見天根.]" 하였다. 천근은 양효(陽爻) 하나가 맨 밑에서 생겨난 지뢰복(地雷復)괘를 뜻한다. 칠실(漆室)의……마음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칠실이라는 읍에 과년한 처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나라의 임금이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의 근심이지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권3 漆室女》 정헌(靜軒) 고공(高公) 고순후(高循厚)이다. 자는 도상(道常), 호는 정헌,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남포의장인인 매백헌(梅栢軒) 오희일(吳喜馹)이 그의 사위이다. 그는 고경명의 넷째아들인데 삼남인 고준후(高遵厚)가 일찍 사망한 관계로 본서에서 셋째아들이라고 일컬은 듯하다. 九 六 六 九 使 史 앞에 六月을 보충해야 함 初 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