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나주 양 고을의 문예를 겨루기를 요청한 격문 光羅兩邑戰藝檄 삼가 생각건대, 폐읍은 탄환만한 한 작은 현이지만 다행히 귀주(貴州)와 경계를 접하여 닭 울음소리가 서로 들리고 개의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서악(瑞嶽)82)의 신령한 빛이 항상 금수(錦峀)83)를 끌어당길 듯하고, 영탄(靈灘)84)의 상서로운 기운이 멀리 낙포(樂浦)로 통한다. 산천은 아름답고 인물은 많아 곧바로 상하(上下)를 가릴 수 없다.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석덕(碩德)과 홍유(鴻儒)가 전후로 배출되어 역사를 빛낸 사람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호중(湖中) 천리 땅에 바둑알처럼 펼쳐진 군들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마는 명승을 칭할 때 광주(光州)와 나주(羅州)를 나란히 세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더구나 옛적 태평시절 수백 년 동안에 문물이 부려(富麗)하고 신성하신 조종(祖宗)의 단비와 같은 교화로 걸출한 준재들이 이 두 고을에 모여서 사철로 기쁘게 노닐며 서로 어울려 즐긴 것은 시례(詩禮)의 가르침과 현송(絃誦)의 아름다움이 아님이 없었으니, 우리 두 고을 간의 백전(白戰)85)의 놀이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긴급한 주장(奏章)과 격문(檄文)이 대열을 짓고 줄을 이루어 일진일퇴하고 일승일패하면서 자웅이 가려지고 성패가 나뉘었다. 마치 두 적이 서로 맞서 깃발과 북이 진을 이루고 기문(奇門)86)과 정법(正法)으로 각기 그 능력을 결판 짓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전(戰)'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희언(戱言)이었다.임진년(1592, 선조25)과 정유년(1597) 뒤에 군무와 국정에 어려움이 많아지면서 문명(文明)한 모임이 폐지되고 강론하지 않은 지도 수십 년이다. 지난 만력(萬曆)과 숭정(崇禎) 연간에 나라가 중흥하여 바르게 다스려지고 백가지 폐지된 일이 모두 진작되자 사문(斯文)의 이 거동도 더욱 경장(更張)되었으며 예악의 풍도와 재예(才藝)의 풍성함에 아직도 혹 미치는 자들이 있었다. 아!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고87) 맹단(盟壇)도 옛 그대로인데 희생(犧牲)을 진설하는 글을 폐기하고 강론하지 않은 것이 지금 몇 년이나 되었도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장탄식을 금할 수 없다.지난번 우리 명부(明府)의 이(李) 사문(斯文) 선생이 귀주(貴州)에 공문을 보내 옛 의리로 권면을 하였다. 그런데 귀주의 군자들은 숨을 죽이고 움츠리면서 성벽을 견고히 하고 굳게 지키니, 동주(東周)가 합종(合縱)을 맺어88) 연합을 하자 함곡관(函谷關)의 진(秦)나라 군대가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랬으니 폐읍에서는 마땅히 부녀자가 쓰는 두건과 머리 장식물을 만들어 사마중달(司馬仲達)89) 같은 겁쟁이의 나약함을 깊이 꾸짖었던 것이다.그러나 어진 장수는 용서하는 일이 많아서 궁지에 처한 사람을 곤란하게 하지 않고, 병가(兵家)는 정도(正道)를 귀하게 여겨서 불능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위태로운 자는 붙들어 주니 각기 강역을 지키면서 예로써 서로 구휼하는 것만 못하였다. 그러므로 양계(兩階)에서 회군을 하여 문무(文舞)를 춘90) 것이 오래 되었는데 지금 또 생각해보니 한 걸상을 벗어나 강남에서 잠이나 자는 것을 어찌 오랫동안 용납하겠는가? 원컨대 여러 군자와 더불어 문예를 겨뤄야 하지 않겠는가?2월 25일 계유(癸酉)는 수신(受脤)91)하기에 좋은 날이다. 폐읍은 바야흐로 시례(詩禮)를 군율로 삼고 예악(禮樂)을 깃발로 삼는다. 고허(孤虛)·왕상(旺相)92)의 천시(天時)는 《주역》을 쓰고 상벌(賞罰)·여탈(予奪)의 권한은 《춘추》를 법으로 삼는다. 대장기는 장원봉(壯元峯) 아래에 세우고 육화진(六花陣)93)은 인덕지(仁德池) 가에 펼친다. 사자(四子)94)의 엄밀함과 칠서(七書)95)의 책략에 예의(禮儀) 삼백과 위의(威儀) 삼천96)을 겸하여 모두 거두어 함께 들어서 좌우로 배열하여 정렬하고, 연후에 중군의 장수로 아름답게 있는97) 자는 반마(班馬)와 장한(莊韓)98)이고 용기를 사서99) 남보다 먼저 오른 자는 이두(李杜)와 구소(歐蘇)100)이다. 산경(山經)과 지지(地誌)101)의 백가(百家)들에 이르러서는 양식을 나르고 군량을 실으며 군수물자를 공급하기를 청하지 않음이 없다. 또한 헌창(軒倉)의 육체(六體)102)·이채(李蔡)의 팔분(八分)103)·종장(鍾張)과 왕조(王趙)104)의 수백 수천 형태의 글자는, 비단을 펴고 흰 배를 펼쳐놓고 팔뚝을 걷어붙여 휘갈겨 쓰며 혹 명령을 받아 격문을 기초하고 혹 나무를 깎아 흰 바탕에 쓰니,105) 붕새가 묵지(墨池)106)에서 날고 용이 붓끝에서 뛰어오른다. 이것이 대략 폐읍의 군대 진용이다.또 순풍(淳風)107)에게 점대를 뽑게 하니 효상(爻象)이 모두 길하고 초공(焦貢)108)에게 거북껍질을 지지게 하니109) 조짐도 좋다. 원컨대 여러 군자는 속히 행장을 꾸려 음주례와 조도제(祖道祭)110)를 행하고 대오(隊伍)를 지어서 오라. 한(韓)·조(趙)에 지원을 청하고 제(齊)·초(楚)에 구제를 구하라. 손빈(孫臏)의 십만 개의 아궁이111)·항적(項籍)의 사흘 치 식량112)·전단(田單)의 죽기를 각오한 마음113)·맹시사(孟施舍)의 두려움 없는 의지114)로 당당하게 깃발을 끌고 정연하게 출병하라. 한 띠 같은 영강(榮江 영산강)의 만경창파를 장강(長江) 같은 천연의 참호로 여겨서 건너기 어렵다고 스스로 제한하지 말라. 천 길이나 되는 금악(錦嶽 금성산)의 구름 속 하늘로 솟은 봉우리를 팔공산(八公山)115) 같은 산색으로 보지를 말고 저상된 기운을 진무하라.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붙잡은 것은 서촉(西蜀)의 형세요116) 세 번 싸워 세 번 패배한 것은 동오(東吳)의 형세이다.117)폐읍(弊邑)을 위한 계책으로는 우리의 군대를 정비하고 우리의 문덕(文德)을 펼쳐서, 귀주(貴州)가 무장을 해제하고 붓을 던지며 우리의 춘풍(春風) 같은 은택에 모여들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만약 부득이 하책을 내야한다면, 맑은 휘파람 한 소리로 돌아가려 생각하는 무리를 앉아서 물러가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옥 같은 모습에 몇 마디 말로 온 진(秦)나라의 군대를 쓸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만약 성도(成都)의 노장(老將)118)이 먼저 항복 깃발을 세운다면 쇠고기와 술로 대접하여 보살피고 위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로잡고 풀어주며 붙잡고 버리는 것은 내 손바닥 안의 일처럼 쉬우니 어찌 넉넉히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아! 앞의 말은 희언일 뿐이고 또한 한결같은 법칙이 있다. 모(某) 등이 평일에 옥녀봉(玉女峯) 아래로 길을 가다가 포충사우(褒忠祠宇)119)를 쳐다보니 문장과 절의가 늠름하여 엊그제 같았다. 망천산(望川山) 앞을 지나다가 존재(存齋)120) 서원(書院)의 뜰에서 재배를 올리니 학문(學文)과 종파(宗派)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듯하였다. 더구나 만취(晩翠) 평원에 유지(遺址)가 여전히 남아있으니 한 줄기 맑은 얼음이 황연히 정신을 접한 듯하고, 천 길 비단 봉우리에 눈과 달이 서로 빛나니 창의(倡義)의 충심이 백대를 격동시킨다. 그러니 우리 문도된 자들은 주선읍양(周旋揖讓)하면서 정학(正學)을 격려하고 책선보인(責善輔仁)121)해야지 문(文)으로써만 벗을 모은다면 옳겠는가?122) 술잔을 잡고 필묵을 희롱하며 오로지 꾸밈만을 일삼아 장단(長短)을 다퉈 겨루며 한묵(翰墨)으로만 각축을 벌인다면 옳겠는가? 그 반드시 변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바라건대 모름지기 여러 군자가 강회(講會)하는 날에, 정숙자(程叔子)가 시험을 고쳐 과제물로 하는 것으로123) 마음을 세우고 호 문정(胡文定)이 소호(蘇湖)에서 가르쳤던 경의(經義)를 규칙으로 삼아서124) 걸음걸이 하나도 법도에 맞게 하고 오르내릴 때 예로써 하되, 고하(高下)를 살펴 평가하거나 교졸(巧拙)을 비교해 재는 데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바라건대 정학일통(正學一統)의 종지(宗旨)를 높이고 삼사(三舍)가 경박하고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면해야 한다. 그런다면 농담을 잘 하면서도 지나치지는 않고125) 늦추고 당기는데 법도가 있으며126), 문장과 덕행 두 가지를 행하는데 어긋나지 않고 전현(前賢)에게 부끄러울 바가 없어서 후세에게 길이 교훈을 드리울 것이다. 원하노니 여러 군자는 부디 또한 힘쓸지어다! 竊惟弊邑。 以彈丸一小縣。 幸得接壤於貴州。 鷄鳴相聞。 犬牙互錯。 瑞嶽神光。 常挹于錦峀。 靈灘休氣。 遠透於樂浦。 山川之美。 人物之庶。 直不相上下。 而名公巨卿。 碩德鴻儒。 前後輩出。 炳耀竹帛者。 亦不相優劣。 則湖中千里地。 列郡碁布者何限。 而稱之名勝。 並數光羅者。 豈偶然哉? 况在昔者昇平數百年。 文物富麗。 聖祖神宗。 時雨之化。 而髦俊傑出之才。 萃於玆二邦。 四時嬉遊。 相與娛樂者。 無非詩禮之敎。 絃誦之懿。 則吾二邑白戰之戲。 於是焉肇矣。 馳章走檄。 列隊成行。 一進一退。 一勝一負。 雌雄判矣。 成敗分焉。 有似乎兩敵相對。 旗鼓成陣。 奇門正法。 各決其能。 故名之曰戰。 盖戲之也。 壬丁之後。 軍國多艱。 文明之會。 廢而不講者凡數十年。 往在萬曆崇禎間。 中興正治。 百廢具振。 斯文此擧。 又得更張。 禮樂之風。 才藝之富。 尙或有因及之者矣。 嗚呼! 息壤在彼。 盟壇依舊。 而載牲之書。 棄而不講者。 今幾年矣。 興言及此。 不勝長息。 頃在我明府李斯文先生。 移書貴州。 勖以古義。 而貴州僉君子屛氣脅息。 堅壁固守。 東周之約從纔合。 而函關之秦兵不出。 則弊邑當製巾幗婦人之服。 深責仲達之㥘弱。 而仁將多恕。 不困人於竆。 兵家貴正。 矜不能而持危。 不若各守封壃。 以禮相恤。 故班師兩階。 舞文舞者有年矣。 今又思之。 一榻之外。 豈可久容江南之盰睡哉? 願與僉君子其肯戰否乎? 二月十五日癸酉。 乃受脤之佳期也。 弊邑方將以詩禮爲師律。 禮樂爲旌。 孤虛旺相之天時。 用大易。 賞罰予奪之權衡。 法春秋。 建大將旗於壯元峯下。 布六花陣于仁德池邊。 四子嚴密。 七書方略。 兼之以禮儀三百威儀三千。 具收幷擧。 左右排行。 然後中軍而作好者。 班馬莊韓。 賈勇而先登者。 李杜歐蘇。 至於山經地誌百家。 莫不輸糧載糗。 請供軍需。 又若軒倉六軆。 李蔡八分。 鍾張王趙千狀百態者。 陳縑布素。 奮臂揮灑。 或承令草檄。 或斫樹白書。 鵬飛墨池。 龍躍毫戈。 此弊邑軍容之大槩也。 又使淳風抽筳。 爻象並吉。 焦貢灼繩2)。 兆體亦賢。 願僉君子。 速裝飮祖。 結什而來。 請援於韓趙。 求救於齊楚。 孫臏十萬之竈·項籍三日之糧·田單有死之心。 孟施無懼之志。 堂堂引旗。 整整行師。 榮江一帶碧萬頃。 勿以長江天塹。 難以飛渡自畫。 錦嶽千丈聳雲霄。 勿視八公山色而撫喪氣。 七縱七擒。 西蜀之勢也。 三戰三北。 東吳之形也。 爲弊邑計者。 整我師旅。 敷我文德。 貴州解甲投筆。 囿我春風者上計也。 若不得已出於下策。 則淸嘯一聲。 坐退思歸之衆可也。 玉貌片言。 却掃全秦之師可也。 亦若使成都老將先竪降幡。 則餉以牛酒。 存撫而慰諭之亦可也。 擒縱操捨。 吾掌中事。 豈不綽綽然有餘裕哉? 嗚呼! 前言戲耳。 抑有一規。 某等平日路出玉女峯下。 瞻仰褒忠祠宇。 則文章節義。 凜若隔晨。 經由望川山前。 再拜存齋院庭。 則學文宗派。 若或可泝。 况乃晩翠平原。 遺址尙存。 而淸冰一條。 怳接精神。 錦峯千仞。 雪月交輝。 則倡義忠肝。 能激百代。 爲吾徒者周旋揖遜。 勉勵正學。 責善輔仁。 文以會友可乎? 操觚弄墨。 專事雕篆。 爭長競短。 馳逐翰墨可乎? 其必有能辨之者矣。 幸須僉君子講會之日。 以程叔子改試爲課立心。 胡文定蘇湖經義爲規。 繩趍尺步。 升降以禮。 無庸關心於考定高下。 較量巧拙。 庶幾崇正學一統之宗。 免浮靡三舍之譏。 則善戲不謔。 弛張有道。 詞文德行。 兩行不悖。 無所愧於前脩。 永垂訓於來世。 竊願僉君子。 尙亦勖哉! 서악(瑞嶽) 서석산(瑞石山) 즉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금수(錦峀) 전라도 나주(羅州)의 금성산(錦城山)을 말한다. 영탄(靈灘) 광주와 나주를 경유해 흐르는 영산강(榮山江)을 말한다. 백전(白戰) 시인(詩人)들이 서로 재능을 겨루는 것을 말한다. 본래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특정한 어휘를 쓰지 못하게 하고 시를 짓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기문(奇門) 기문둔갑(奇門遁甲)으로 길흉을 점치는 술수(術數)의 일종인데, 흔히 병법에 많이 이용되었다.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고 굳게 맹세한 일을 가리킨다. 식양은 전국(戰國) 시대 진(秦)나라의 읍명(邑名)이다. 진나라 무왕(武王)이 장수 감무(甘茂)에게 의양(宜陽)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감무는 왕이 도중에 후회할까 염려하여 식양에서 굳게 맹세하게 하였다. 후에 왕이 정벌에 대해 회의를 느끼자, 감무가 글을 올려 "식양이 저기에 있습니다.[息壤在彼.]"라고 하였고 드디어 의양을 함락시켰다. 《戰國策 秦策》 합종(合縱)을 맺어 원문의 '약종(約從)'으로,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세객인 소진(蘇秦)이 강성한 진(秦)나라를 두려워하는 산동 지역의 제후국을 찾아다니며 6국(六國)의 연합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창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진나라의 장의(張儀)가 여섯 나라가 동맹을 깨고 진나라를 섬기자는 연횡책(連橫策)을 폈다. 장의의 계책대로 여섯 나라가 각각 분리되어 결국 진나라에게 모두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史記 권70 張儀列傳》 부녀자가……사마중달(司馬仲達) 원문의 '건괵(巾幗)'으로, 부녀자들의 두건과 머리 장식인데, 못난 사내를 부인에 빗대는 경멸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마중달은 사마의(司馬懿)의 자(字)이다.촉한(蜀漢)의 제갈량이 위(魏)나라 사마의(司馬懿)와 대적할 때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사마의가 응하지 않으므로 일부러 '부녀자가 쓰는 장식물[巾幗婦人之飾]'을 보내 조롱하였다. 《晉書 宣帝紀》 양계(兩階)에서……춘 양계(兩階)는 주인과 손님의 섬돌인데, 여기서는 모여서 문장을 겨루던 회합 장소를 말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禹가) 회군을 하고 군대를 거두자 순 임금이 문덕을 크게 펴고 방패와 깃을 들고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었는데, 70일 만에 유묘가 귀순해왔다.[班師振旅, 帝乃誕敷文德, 舞干羽于兩階, 七旬有苗格.]" 하였다. 문무(文舞)는 칼이나 창을 들지 않고 문관(文官)의 차림으로 열을 지어 추는 춤이다. 수신(受脤) 제사 고기를 받는 것으로, 출병(出兵)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문예를 겨루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민공(閔公) 2년 조에 "군대를 거느린 자는 종묘에서 명령을 받고 사에서 제육을 받는다.[帥師者, 受命於廟, 受脤於社.]" 하였다. 고허(孤虛)·왕상(旺相) 술법가에서 날과 계절의 길흉을 따지는 방법이다. '고허'는 일진(日辰)에 기운이 완전하지 않음을 이르는바, 예를 들면 갑자일(甲子日)로부터 계유일(癸酉日)까지가 10일간인데, 여기에는 지지(地支) 중 술(戌)과 해(亥)가 빠지므로 술과 해는 고(孤)가 되고, 술과 해의 반대 방향인 진(辰)과 사(巳)는 허(虛)가 되는 따위이다. '왕상'은 기운이 왕성하고 딴 기운이 도와줌이 있음을 이른다. 이를테면 봄에는 나무의 기운이 왕성하여 목왕(木旺)이고 화상(火相)이며, 여름에는 불의 기운이 왕성하여 화왕(火旺)이고 토상(土相)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육화진(六花陣)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법(八陣法)에 기초하여 당(唐)의 이정(李靖)이 만든 진법이다. 사자(四子)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언행록이라 할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지칭한다. 칠서(七書) 중국의 병법(兵法)에 관한 7종의 병서(兵書)이다. 《손자(孫子)》·《오자(吳子)》·《육도(六韜)》·《사마법(司馬法)》·《삼략(三略)》·《울료자(尉繚子)》·《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이다. 예의(禮儀)……삼천 큰 예와 작은 예를 말한 것이다. 《중용장구》 제27장에 "크고 넉넉하도다. 예의가 3백 가지요, 위의가 3천 가지로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는 말이 나온다. 예의(禮儀)는 기본적인 대강령(大綱領)인 경례(經禮)를 말하고, 위의(威儀)는 구체적인 소절목(小節目)인 곡례(曲禮)를 말한다. 《예기》 〈예기(禮器)〉에 "경례가 3백 가지요, 곡례가 3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는 말이 나온다. 중군의……있는 《시경》 〈정풍(鄭風) 청인(淸人)〉에 "청읍 사람이 축 땅에 있으니, 네 마리 갑옷 입힌 말이 유유자적하도다. 왼쪽 사람은 수레를 돌리고 오른쪽 사람은 칼을 뽑거늘, 중군의 장수는 아름답게 있도다.[淸人在軸, 四介陶陶, 左旋右抽, 中軍作好.]"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반마(班馬)와 장한(莊韓) '반마(班馬)'는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병칭이다. '장한(莊韓)'은 장주(莊周)와 한비자(韓非子)의 병칭이다. 용기를 사서 원문의 '고용(賈勇)'으로,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 고고(高固)가 진(晉)나라 군대 속으로 돌진하여 위세를 떨치고 돌아와서 자기 군사의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하여 "용맹을 떨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나에게 남아 있는 용기를 사 가라.[欲勇者, 買余餘勇.]"라고 외쳤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이두(李杜)와 구소(歐蘇) '이두(李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병칭이다. 구소(歐蘇)는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의 병칭이다. 산경(山經)과 지지(地誌) 산경(山經)은 산맥과 지리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지지(地誌)는 방역(方域), 산천(山川), 풍속, 산물(産物)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헌창(軒倉)의 육체(六體) '헌창(軒倉)'은 고대 글자를 만들었다는 창힐(倉頡)을 말한다. '육체(六體)'는 서체를 가리킨다. 이채(李蔡)의 팔분(八分) '이채(李蔡)'는 이사(李斯)와 채옹(蔡邕)이다. 이사는 진나라 때의 재상으로 문자를 통일하기 위해 대전(大篆)에 바탕을 두고 소전(小篆)을 제정했다고 한다. 채옹은 후한 말기의 문신이자 서법가(書法家)로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팔분체(八分體)와 비백체(飛白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팔분(八分)'은 서체(書體)의 하나로, 예서 (隷書)와 전서(篆書)를 절충하여 만든 서체이다. 종장(鍾張)과 왕조(王趙) '종장(鍾張)'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종요(鍾繇)와 동한(東漢)의 장지(張芝)로,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 높았다. '왕조(王趙)'는 서예에 뛰어났던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의 병칭이다. 나무를……쓰니 전국 시대 제(齊)나라 손빈(孫臏)이 위(魏)나라 방연(龐涓)과 싸울 때 손빈이 방연을 마릉(馬陵)의 좁은 길로 유도한 다음 그곳에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서 큰 나무의 껍질을 하얗게 깎아 내고 거기에 쓰기를, "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을 것이다.[龐涓死于此樹之下.]" 하였는데, 과연 방연이 밤에 도착하여 깎아낸 나무에 쓰인 흰 글자를 보다가[龐涓果夜至斫木下, 見白書.]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은 목을 찔러 자결한 일을 말한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묵지(墨池) 진(晉)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붓을 씻었다는 연못이다. 송(宋)나라 증공(曾鞏)의 〈묵지기(墨池記)〉에 의하면, "신성가에는 우묵하게 패여 있는 장방형의 못이 있는데 이곳은 왕희지의 묵지라고 한다.[新城之上, 有池窪然而方以長, 曰王羲之之墨池者.]" 하였다. 순풍(淳風) 당(唐)나라 이순풍(李淳風)으로 박학하였는데, 특히 천문(天文)과 역산(曆算) 및 음양(陰陽)의 학문에 더욱 정통하여 혼천의(渾天儀)와 황도의(黃道儀) 등을 만들었다. 초공(焦貢) 전한(前漢) 소제(昭帝) 때의 역술 이론가로, 초공(焦贛)이라고도 한다. 거북껍질을 지지게 하니 점을 친 것이다. 원문의 '灼繩'은 '灼龜'의 잘못인 듯하다. 조도제(祖道祭) '조(祖)'는 길을 떠날 때에 길신(神)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손빈(孫臏)의……아궁이 손빈이 제(齊)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위(魏)나라의 장수 방연(龐涓)과 싸우게 되자 첫날에는 취사하는 아궁이를 10만 개 만들었다가 이튿날엔 5만 개로 줄이고 또 그 이튿날엔 3만 개로 줄여 도망친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에 방연이 방심하고 추격을 하다 마릉(馬陵)에서 손빈의 복병을 만나자 자결하였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항적(項籍)의……식량 결사의 각오로 싸우겠다는 결의를 비유한 것이다. 항적이 진(秦)나라와 싸우러 가면서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 양식만 지니고서 사졸에게 필사적으로 싸워야 함을 보여준 것[沈船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을 말한다. 《史記 項羽本紀》 전단(田單)의……마음 전단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나라의 명장(名將)이다. 노중련(魯仲連)은 전단이 즉묵(卽墨)에서 승리했던 이유를 들면서 "그 때에는 장군은 죽으려는 마음이 있었고 군사들은 살려는 기운이 없었다.[當此之時, 將軍有死之心, 而士卒無生之氣.]" 하였다. 《戰國策 齊策6》 맹시사(孟施舍)의……의지 맹시사(孟施舍)는 싸움에서 비록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오직 두려움이 없기만을 기필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孟子 公孫丑上》 팔공산(八公山) 전진(前秦) 왕 부견(苻堅)과 동진(東晉)의 장수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이 대전을 펼친 산이다. 부견이 대패하고 팔공산을 바라보니, 두려운 나머지 산의 초목들이 모두 진나라 군대로 보였다고 한다. 《晉書 권114 苻堅載記下》 일곱……형세요 원문의 '칠종칠금(七縱七擒)'으로, 촉나라 후주(後主) 건흥(建興) 3년(225)에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남이(南貳)를 평정하면서 맹획(孟獲)과 싸우면서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생포하여 심복케 한 일을 가리킨다. 《三國志 권35 蜀書 諸葛亮傳》 세……형세이다 전국시대 월나라가 오나라를 패배시킨 일을 말한다. 《국어(國語)》 〈오어(吳語)〉에 "오(吳)나라 군대가 월(越)나라에게 세 번 싸워 세 번 패배하자 마침내 월(越)나라 군대가 오나라에 들어가게 되었고 곧장 오나라의 국도(國都)에 진입하여 왕궁(王宮)을 포위하였다.[三戰三北, 乃至於吳, 越師遂入吳國, 圍王宮.]" 하였다. 성도(成都)의 노장(老將) 후한(後漢)의 엄안(嚴顔)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는 유장(劉璋)의 부하 장수로 파군 태수(巴郡太守)로 있다가 장비(張飛)에게 잡혔는데 "우리 파주에는 머리 잘리는 장군은 있을지언정 항복하는 장군은 있지 않다.……목을 치려면 칠 것이지 어째서 성을 내는가."라고 의연하게 대답을 하자, 장비가 장하게 여겨 풀어 주고 빈객으로 대접했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권36》 포충사우(褒忠祠宇) 포충사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 등 5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 사당이다.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이다.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72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대사간·공조 참의를 지냈다. 책선보인(責善輔仁) 선한 행동을 권하고 어진 품성을 돕는다는 말로 벗 사이의 바른 도리를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선을 권하지 않는다.[父子之間不責善]" 하였고, 《논어》 〈안연(顔淵)〉에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어짊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하였다 문(文)으로써만……옳겠는가? 문장만이 아니라 덕행도 중시해야한다는 말이다. 정숙자(程叔子)가……것으로 송(宋)나라 유학자 정이(程頥)를 가리키는데, 그의 자가 정숙(正叔)이므로 존칭하여 그렇게 부른다. 그가 학제(學制)를 자세히 살핀 뒤에 시험을 월과(月課)로 고치고, 향공(鄕貢)의 진사(進士) 수를 줄이도록 철종(哲宗)에게 건의한 것을 가리킨다. 《小學 善行》 호 문정(胡文定)이……삼아서 호 문정(胡文定)은 호 안정(胡安定)의 잘못인 듯하다. 호 안정은 송(宋)나라 학자 호원(胡瑗, 993~1059)으로 안정은 호이다. 그는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에서 교수로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가르칠 때는 사제의 예를 엄하게 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법에 있어 과조(科條)를 자세하게 구비하고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致事齋)로 나누어 가르쳤다. 경의재에는 소통하고 기국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거처하게 하고, 치사재에는 사람마다 각각 한 가지 일을 전공하게 하고 도 한 가지 일을 겸하여 익히게 하였다. 《宋元學案 권1 安定學案》 농담을……않고[善戲不謔] '謔'은 '虐'의 잘못인 듯하다. 농담을 하면서도 절도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경》 〈기욱(淇奧)〉에 "농담을 잘 하되 지나치지는 않는구나.[善戱謔兮, 不爲虐兮.]" 하였다. 늦추고……있으며 본래 활줄의 이완과 긴장을 조절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일을 조화롭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禮記 雜記下》 灼繩 '灼龜'의 잘못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