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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형【진영(震英)】에 대한 만사 挽從兄【震英】 우리 형의 심사 내가 알고 있으니구천(九泉)에서 어느 해에나 눈을 감으련가늦가을의 저물녘 하늘엔 참죽나무 늙으려 하고282)봄 푸른 난실(蘭室)엔 혜초(蕙草) 시든 듯하네283)생전에 일찍이 왕상(王祥)의 한 품었고284)죽은 뒤엔 끝내 등자(鄧子)의 슬픔 품었네285)무엇보다도 형제286)에 대한 무한한 아픔에묵묵히 말없이 눈물만 흘리네 吾兄心事我知之九地何年暝目時秋晩暮天椿欲老春靑蘭室蕙如衰生前夙抱王祥恨身後終懷鄧子悲最是鴒原無限痛默然無語淚漣洟 참죽나무 늙으려 하고 '참죽나무'는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나무로, '참죽나무가 늙으려 한다.' 는 것은 곧 종형 김진영이 세상을 떠났음을 의미한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의 명령은 5백 년을 봄으로 삼고 5백 년을 가을로 삼으며, 상고 시대의 대춘(大椿)은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爲春 以八千歲爲秋]"라 하였다. 봄……듯하네 난초와 혜초는 모두 향초(香草)로, 흔히 현자(賢者)의 고결한 인품이나 높은 지조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내 이미 난초를 구원에 심었고, 또 혜초를 백묘에 심었노라.[余旣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라는 대목이 보인다. 생전에……품었고 '왕상(王祥)'은 진(晉)나라 때의 효자(孝子)다. 자기에게 모질게 대하는 계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했는데, 계모가 한겨울에 잉어회를 먹고 싶어 하자 강가로 내려가 얼음을 깨려 하니 얼음이 저절로 깨지면서 잉어가 뛰어 올라왔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33 王祥列傳》 김진영이 생전에 그 모친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죽은……품었네 '등자(鄧子)'는 진(晉)나라 등유(鄧攸)를 가리킨다. 등유는 건흥(建興) 연간에 하동 태수(河東太守)가 되었는데, 석륵(石勒)의 병란 때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둘 다 보호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는 자기 아들은 버려두어 죽게 하고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을 대신 살렸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해 제사를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90 鄧攸列傳》 김진영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음을 말한 것이다. 형제 원문은 '영원(鴒原)'이다. 들판에 있는 할미새라는 뜻으로, 우애 있는 형제를 뜻할 때 쓰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들판에 있는 할미새처럼, 급하고 어려울 땐 형제들이 돕는다네. 좋은 벗이 매양 있다 해도, 그저 길게 탄식할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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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포를 적어 종제 영중에게 보이다 書懷示從弟英仲 근래에 책 속의 뜻을 터득하고서야마침내 세상살이 어려움을 알았네신맛에 입은 삼척이나 길어지고26)시 읊는 어깨는 두 산처럼 솟았다지27)널리 배우면 마음이 매우 넓어질 테고열심히 밭 갈면 음식을 아끼지 않아도 되리라임천28)의 한없는 뜻을모두 골짜기 속 난초29)에 부치노라 近得書中趣方知世味艱酸喙長三尺吟肩聳二山博學心多廣勤耕食不慳林泉無限意都付谷中蘭 황정견(黃庭堅)의 「제석각화상산옹(題石恪畫甞醋翁)」에 "석온은 신맛 참느라 입이 삼척이나 길어지고, 석파는 맛을 보고는 얼굴이 잔뜩 구겨졌네.[石媪忍酸喙三尺, 石皤甞味面百摺.]"라고 하였다. 시……솟았다지 고민하며 깊이 시상(詩想)에 잠긴 것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서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느라 어깨가 산처럼 솟은 것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12 贈寫眞何充秀才》 임천(林泉) 산림천석(山林泉石)의 준말로, 은자가 사는 곳을 가리킨다. 난초 굴원의 「이소경(離騷經)」에 "그윽한 난초 묶고서 서성이노라.[結幽蘭兮延佇]"라고 하였고, "가을 난초를 꿰어서 허리에 차도다.[紉秋蘭以爲佩]"라고 한 데서 전하여, 이후로 난초는 은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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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잠【임인년(1662, 현종3) 여름에 생도들이 삼학재에 모여 제술을 일삼았는데 이 글을 써서 경계하였다.】 警學箴【壬寅夏。 諸生會三學齋以事製述。 書此以警之。】 머리에 열이 나도관을 벗지 말고몸에 땀이 나도옷을 벗지 말라겉몸이 단정치 않으면안도 안정되지 않으니문장을 펴낸들누가 너를 공경하랴다리가 피곤해도거만하게 앉지 말고기운이 나른해도쭉 펴고 눕지 말라겉모양이 나태해지면뜻도 바르지 못하니글을 써낸들어찌 일정하고 안정되랴재여의 담장35)을 경계하고우의 촌음36)을 아껴야 하니《대학》에선 어긋남을 경계했고37)〈폄우〉에선 장난질을 경계했다38)과업이 비록 말단의 기예라도어찌 실질의 덕을 소홀하랴39)소자들아 공경히 받아들이고내가 미혹되었다 하지 말라마음과 힘을 전일하게 하여시종일관 쉬지 말아야 하리문사와 덕업을둘 다 어긋남이 없게 하라이 글을 서재 벽에 걸어놓고아침저녁으로 보아야 하리 頭雖熱。 冠不可免。 軆雖汗。 衣不可袒。 外軆不端。 內亦不定。 發爲辭章。 孰肯爾敬。 股雖憊。 坐不可倨。 氣雖倦。 臥不可叙。 形貌旣慢。 志亦不正。 出爲文筆。 安得定靜。 宰墻可戒。 禹陰可嗇。 曾書警悖。 砭愚箴謔。 業雖末藝。 焉忽實德。 小子敬受。 毋謂我惑。 一乃心力。 終始不息。 文詞德業。 兩兼無忒。 揭諸齋壁。 朝暮寓目。 재여의 담장 게으른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자, 공자가 이르기를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은 손질할 수 없다.[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하였다. 《論語 公冶長》 우의 촌음 짧은 시간을 말한다. 진(晉)나라 도간(陶侃)이 "대우는 성인이면서도 촌음을 아꼈으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촌음도 마땅히 아껴야 한다.[大禹聖人, 乃惜寸陰, 至於衆人, 當惜分陰.]" 하였다. 《晉書 陶侃列傳》 대학에선 어긋남을 경계했고 '증서(曾書)'는《대학》을 가리킨다. 《대학장구》 전10장에 "말이 도리에 어긋나게 나간 것은 또한 도리에 어긋나게 들어오고, 재물이 도리에 어긋나게 들어온 것은 또한 도리에 어긋나게 나가는 것이다.[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하였다. 폄우에서는 장난질을 경계했다 '폄우(砭愚)'는 송유(宋儒) 장재(張載)의 〈동명(東銘)〉을 가리킨다. 그 첫머리에 "장난하는 말도 생각에서 나온 것이요, 장난하는 행동도 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戲言出於思也, 戲動作於謀也.]"라는 말이 나온다. 과업이……소홀하랴 과거공부를 위한 제술(製述)을 하면서도 마음을 바르게 가지라는 충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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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뢰(愼汝賚)28)【성필(聖弼)】의 시에 차운하다 次愼汝賚【聖弼】韻 경(敬)을 위주로 하는 공부는 참됨[眞]을 쌓는 데 달려 있으며인(仁)을 돕는 충고29)는 벗 사이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네모름지기 고요함 속에도 도리어 사물 머금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행할 때에도 신명(神明)이 있음을 알아야 하네성현(聖賢)이 마음으로 전한 것 오직 경(敬) 한 글자인데미련하고 어리석어 본성을 잃은 이 몇 천 명이네길 잃고 헤맨30) 반평생 끝내 얻은 것 없으니무엇을 가지고 우리 그대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면려할까두 번째사귐은 마음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마음은 참됨을 귀하게 여기니외면으로 친한 것은 결국 마음으로 친한 것만 못하다네십 리 떨어진 교외에 살기에 비록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고요함 속에서 두 사람 각기 정신으로 만난다네들판의 대나무 천 그루 높이 누운 뜻이요차가운 매화 한 가지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일세언제나 묵묵히 향로를 마주하고 앉아천군(天君)31)을 함께 섬기며 오래된 것을 새로이 물들일까 主敬工夫在積眞輔仁忠告貴朋親須知靜裏還含物却認行時亦有神賢聖心傳唯一字頑愚汩喪幾千人倀倀半世終無得爲何吾君勉日新其二交貴知心心貴眞形親終不似心親郊居十里雖違面靜裏雙襟各會神野竹千竿高臥志寒梅一枝病吟人何時默對薰爐坐共事天君舊染新 신여뢰(愼汝賚) 신성필(愼聖弼)을 가리킨다. 여뢰(汝賚)는 그의 자. 호는 경암(敬庵)이다. 감사를 지낸 신희남(愼喜男)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신광익(愼光翊), 형은 참봉 신성윤(愼聖尹)이다. 인(仁)을 돕는 충고 《논어》 〈안연(顔淵)〉의 "군자는 학문을 연구하며 벗을 모으고, 벗들끼리 서로 도와 인덕을 높인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라는 증자(曾子)의 말과 "벗들끼리는 충심으로 말해 주어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忠告而善道之]"라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길 잃고 헤맨 원문은 '창창(倀倀)'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예기(禮記)》 〈중니연거(仲尼燕居)〉에, "예법이 없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소경이 혼자서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창창하여라 과연 어디로 가겠는가.[治國而無禮 譬猶瞽者之無相 倀倀乎其何之]"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천군(天君) 마음을 가리킨다. 《순자》 〈천론편(天論篇)〉에, "마음이 가운데 빈자리에 있으면서 오관을 다스리니, 이를 천군이라 한다.[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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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운을 다시 써서 자술(自述)하다 復用前韻自述 함양(涵養)32)하는 가운데 참됨[眞]을 오묘히 지키니하나의 마음 참된 곳에 기운이 아울러 가까워지네둥글고 밝은 독 속의 구슬 티 한 점 없고한 이랑 네모난 못 속의 거울엔 정신이 있네이날 가을 하늘 바라보며 수렴하는 마음33)지난해 봄물결 노래 부르며 돌아오는 사람34)밝은 창에서 《심경(心經)》35)을 읽으니깊은 병 잊어버려 몸이 마치 새로워지는 듯하네【망각(忘覺)은 망각(忘却)이 되어야 한다.】 涵養中間妙守眞一心眞處氣兼親圓明櫝裏珠無玷方畝塘中鏡有神此日秋天收斂意去年春水詠歸人明窓點撿西山訣忘覺沉疴軆若新【忘覺當作忘却】 함양(涵養) 경(敬)으로써 마음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근사록(近思錄)》 〈위학(爲學)〉에, "함양은 모름지기 경(敬)을 써야 하고, 진학(進學)은 앎을 지극히 함에 달려 있다.[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라고 하였다. 수렴하는 마음 '수렴'은 마음을 고도로 집중함을 말한다. 《심경주부(心經附註)》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서 윤돈(尹焞)이 "경이란 마음을 수렴하여 한 물건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敬者 其心收斂 不容一物之謂]"라 한 대목이 보인다. 지난해……사람 '노래 부르며 돌아온다.'는 것은 한가로이 자연을 노니는 것을 말한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증점(曾點)에게 장래 포부를 물어보자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뒤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 한 데서 온 구절이다. 심경(心經) 원문은 '서산결(西山訣)'이다. 서산(西山)은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호로, '서산결'이란 곧 그가 엮은 《심경(心經)》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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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담승경(龜潭勝景) 10영 龜潭勝景十詠 산세가 물가의 돈대를 평탄히 이루니시원스레 세속의 풍진 위로 높이 솟았네창으로 커다란 천지 곧바로 받아들이니대장부의 마음 절로 열릴 만 하네【위는 호연정(浩然亭)이다.】작은 정자 높이 자리하고 큰 강 잔잔하니강에 뜬 달과 바위에 부는 바람 세상 일 다투지 않네우스워라 영천(穎川)에서 번거로이 귀 씻은 일103)한가로이 누워 마음 씻는 것만 못하다네【위는 침벽정(枕碧亭)이다.】갠 하늘의 기상 강가에 가득하니해 따뜻하고 바람 온화하여 만물에 봄기운이네만약 행단(杏壇)104)에 단비 내린 뒤를 본다면한 곡조 옥 비파 가락에 노래 읊으며 돌아가는 사람 있을 것이네105)【위는 영고정(詠高亭)이다.】정자 아래 맑은 물결 거울과 같이 밝고물가의 모래와 돌 온통 얼음처럼 맑네초췌한 강가의 객이 될 필요는 없으니106)함부로 먼지 쌓인 갓끈 씻어 맑은 물을 더럽힌다네107)【위는 탁청정(濯淸亭)이다.】바위로 이루어진 평평한 돈대에서 푸른 못을 굽어보니은빛 상자에서 꺼낸 새로운 거울처럼 밝네허명(虛明)하여 본래부터 티 없이 맑으니하늘의 빛 비추어 구름 그림자 적실 수 있네【위는 광영대(光影臺)다.】어느 해에 조화옹이 쇠를 정밀하게 단련하였는가벽돌 두른 못 속에 만고(萬古)의 정 품고 있네맑고 탁함과 얕고 깊음 때에 따라 숨었다 드러나니옥은 천질(天質)과 같아 더욱 굳세고 곧네【위는 은현암(隱見巖)이다.】여섯 마리 자라 그 당시 삼신산(三神山)을 잃었으니108)한 점 서쪽으로 흘러 이곳에 떨어졌네봉우리 가득한 옥 나무 겹겹이 푸른빛 짙으니이슬이 바윗가의 향초 자란 물굽이에 떨어지네【위는 적취봉(滴翠峯)이다.】학 기르는 고고한 사람 이미 선골(仙骨)을 이루었으니서호(西湖)의 풍물(風物) 달이 천년 동안 비추네109)이곳을 서호라 명명한 것 어찌 뜻이 없겠는가매화 핀 정자 저녁 안개에 잠겨 있음을 길이 아쉬워하네【위는 서호다.】평평한 들판 일대의 작은 시냇가정자 앞에 이르자마자 곧장 합류하네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깊은 밤 밝은 달 아래여울물 굽이굽이 옥경(玉磬)110) 소리 내는 것이라네【위는 동계(東溪)다.】맑은 강 남쪽 두둑 작은 물가의 모래붉은 여뀌와 푸른 잔디 그 사이엔 들꽃 피었네언덕 위 몇 집에서 연기 가늘게 피어나니한 가닥 고르게 펼쳐 푸른 노을을 두르네【위는 남주(南洲)다.】 山勢平成水上臺廓然高出世風埃軒窓直納乾坤大大丈夫心自可開【右浩然亭】小亭高壓大江平水月巖風世不爭堪笑穎川煩洗耳不如閒臥洗心情【右枕碧亭】晴天氣象藹江濱日暖風和萬物春若見杏壇時雨後一聲瑤瑟咏歸人【右詠高亭】亭下澄瀾似鏡明水邊沙石盡冰淸不須憔悴江潭客慢濯塵纓汚淨泓【右濯淸亭】石作平臺俯碧潭瑩如新鑑啓銀函虗明本自澄無累能照天光雲影涵【右光影臺】何年造化鍊金精盤磚潭心萬古情淸濁淺深隨隱見玉如天質更堅貞【右隱見巖】六鰲當日失三山一點西流落此間滿峯瓊樹濃層翠露滴巖邊芳草灣【右滴翠峯】養鶴高人骨已仙西湖風物月千年此中名命寧無意長恨梅亭鎖暮烟【右西湖】平郊一帶小溪頭纔到亭前便合流最愛夜深明月下灘聲曲曲玉鳴球【右東溪】淸江南畔小汀沙紅蓼靑莎間野花岸上幾家烟細起平鋪一抹帶靑霞【右南洲】 영천(穎川)에서……일 요(堯)임금 때의 은사(隱士)인 허유(許由)가 일찍이 기산(箕山) 아래 영천(穎川)에 은거하였는데, 요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귀를 씻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행단(杏壇) 공자가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장자(莊子)》 〈어부(漁父)〉에, "공자가 치유의 숲에 노닐고 행단의 위에 앉아 쉴 적에 제자들은 글을 읽고 공자는 노래하며 거문고를 탔다.[孔子遊於緇帷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라 하였다. 한……것이네 '노래 읊으며 돌아간다'는 것은 한가로이 자연을 노니는 것을 말한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증점(曾點)에게 장래 포부를 물어보자 그가 타고 있던 비파를 내려놓으며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뒤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초췌한……없으니 초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키는 말이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쫓겨나 강담에서 노닐고 못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리매 안색이 초췌하고 행색에 생기가 없었다.[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라 하였다. 함부로……더럽힌다네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진속(塵俗)을 초탈하여 자신의 고결한 신념을 지키는 것을 뜻하는 행위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여섯……잃었으니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방호(方壺)‧영주(瀛洲) 세 신산(神山)을 가리킨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에는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라는 다섯 신산(神山)이 있는데, 이 산들이 조수(潮水)에 밀려 표류(漂流)하여 정착하지 못하므로, 천제(天帝)가 이 산들이 서극(西極)으로 흘러가 버릴까 염려하여 큰 자라 열다섯 마리로 하여금 이 산들을 머리에 이고 있게 하였다. 이에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는데, 뒤에 용백국(龍伯國)의 거인(巨人)이 단번에 자라 여섯 마리를 낚아감으로 인하여 대여, 원교 두 산은 서극으로 표류해 버리고, 방호, 영주, 봉래 세 산만 남았다고 한다. 학……비추네 '서호(西湖)'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서쪽 고산(孤山) 옆에 있는 호수다. 송(宋)나라 때의 처사 임포(林逋)가 이곳에 은거하여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처자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사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 일컬었다. 《宋史 卷457 林逋列傳》 옥경(玉磬) 원문은 '명구(鳴球)'로, 곧 옥경을 가리킨다. 《서경》 〈익직(益稷)〉에, "명구를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노래를 읊으니, 조고가 오시어 우빈의 자리에서 제후들과 덕으로 사양한다.[戞擊鳴球 搏拊琴瑟 以詠 祖考來格 虞賓在位 群后德讓]"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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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항전【병서】 公孫航傳【並序】 공손항(公孫航)24)은 강동인(江東人)이다. 혹자는 육인(六人)이라고도 한다. 자는 해경(海卿)으로 황제(黃帝)의 아들이다. 황제는 형호(荊湖)25)에서 솥을 주조하였다. 공고(共鼓)와 화적(化狄)26)이 따르고 있었는데, 호수 가운데 뜬 잎을 보고 황제가 감응하여 항(航)을 낳아서 두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되게 하였다. 황제가 용을 어거하여 멍에하고 하늘로 올라가자27) 항은 호해(湖海) 사이에 살면서 공손(公孫)이라는 성(姓)을 썼다.우(禹) 임금 때 이르러 우 임금을 도와 물길을 유도하는 데 공적이 있었고, 용문(龍門)을 뚫은 일28)과 물길을 강한(江漢)으로 흘러가게 하는 데29) 항의 공적이 많았다. 우 임금은 현규(玄圭)를 올려 치수의 완성을 아뢰고30) 항을 임명하여 구주(九州) 통진백(通津伯)으로 삼았다. 일찍이 우 임금과 강을 건너는데 배가 황룡의 등에 얹히는 바람에 거의 건널 수 없게 되었다. 항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선제(先帝)께서 정호(鼎湖)에서 용을 어거하였는데 나 또한 용의 등에 얹혔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안색을 변치 않았는데 곧 용이 사라지고 말았다.항이라는 사람은 신장이 수 십 장(丈)이요 몸집의 크기가 백 여 아름인데 헌걸차고 씩씩하니 맨 발로 황하를 건널 힘과 바다를 항해할 위력이 있었다. 그 성품은 능히 세상과 함께 부침할 수 있으며 사람을 대하는데 선악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귀의한 자들을 모두 수용하였다. 다만 산을 유람하며 육지로 다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우 임금이 붕어하고 하(夏)나라의 덕이 쇠퇴하자 항 또한 늙었다. 이계(履啓)31)가 즉위하여서는 날마다 음란과 포학을 일삼으면서 항과 함께 주지(酒池)에서 밤새도록 즐겼다. 항의 아들인 도(刀)가 간언을 했으나 듣지 않으니, 도는 무광(務光)32)과 함께 강호로 들어가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탕(湯)이 걸(桀)을 주벌하게 되자 항은 초택(楚澤)33)으로 달아났다. 주(周)나라 소왕(昭王)이 남방을 순수(巡狩)하여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초택에서 같이 배를 탔다가 왕과 함께 익사했다.34)항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함(艦), 막내는 방(方)이고, 도(刀)는 바로 가운데 아들이다. 은(殷)나라 말기에 도(刀)는 여상(呂尙)과 동해에서 낚시를 하고 살았는데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서 여상이 주(周)나라로 귀의하자35) 도는 정색하며 불쾌해하고 강 입구 맑은 물가를 오가다가 그 몸을 마쳤다. 그 자손은 천택(川澤)에 흩어져 살았는데 모두 청고(淸高)하게 스스로 면려하면서 벼슬자리에 나간 적이 없었으니 모두 도의 유풍(遺風)이었다. 그 뒤에 월(越)나라 범려(范蠡)·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진(晉)나라 도원량(陶元亮)·당(唐)나라 장지화(張志和)·송(宋)나라 임군복(林君復) 같은 청절지사 들이 모두 도의 자손들과 함께 어울렸다. 항의 막내아들인 방(方)은 별다른 기예나 능력이 없어 대대로 나루터 관리가 되어 그 삯을 취하여 살아갔다.장남 함(艦)은 사람됨이 굉걸(宏傑)하고 관대하며 원대한 지략이 있었는데 아버지 항을 따라서 초나라에서 살았다. 진시황(秦始皇) 때 서불(徐市)과 서로 좋게 지면서 서불에게 말하기를 "시황이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백성들을 들볶으니 물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은데36) 그대는 어찌하여 신선술로 황제를 설득해서 도생(圖生)의 바탕으로 삼지 않는가." 하였다. 서불이 이에 서쪽으로 관문에 들어가 황제를 뵙고 청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하겠습니다." 하였다. 황제는 바야흐로 신선술을 찾고 있었기에 서불의 말을 믿고 따라주니 서불은 함과 함께 3천명을 싣고 바다 섬으로 들어가 살았다. 산동(山東)의 호걸들이 모두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무리 수 천 명과 함께 해안을 따라 황하에 도착해서, 장차 패공(沛公)과 병력을 합쳐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 때 장한(章邯)37)이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초(楚)나라가 구원하였다. 항적(項籍)은 경자관군(卿子冠軍)38)을 살해하고 군대를 거느려 황하에 도착하였다. 함이 항우(項羽)를 설득하며 말하기를 "장한을 공격할 것도 없다. 조고(趙高)39)가 궁중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데 장한과 틈이 벌어졌으니 이는 안과 밖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나와 함께 황하로 떠가서 직접 함곡관에 이르러 패공와 합세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다. 뿌리를 제거하고 나면 장한은 공격할 것도 없다." 하였다.항우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십만의 무리를 통솔하여 무도한 진(秦)나라를 공격하려는데 함이 얄팍한 꾀로 나를 흔들어 대고 병사들의 마음을 꺾는다." 하면서 함을 황하에 가라앉히고 그의 무리 수천 명도 모두 가라앉혔다.40) 함은 몰래 탈출하여 그의 무리와 함께 남쪽으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로 흘러가서 장차 한왕(漢王)과 합종하려 하였다. 마침 항우가 강 가운데서 의제(義帝)를 시해하자, 한왕이 삼로(三老)의 계책41)을 써서 흰 상복을 입고 항우를 주벌하고 남쪽으로 장강과 한수로 배를 타고 내려왔다.함은 비장(裨將)인 소(艘)로 하여금 십만의 무리를 이끌고 왕을 따라 팽성(彭城)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함은 황하로부터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소하(蕭何)와 더불어 육로와 수로로42) 군량을 운송하니 시종 식량이 끊어지지 않았다. 한나라가 이로써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고조(高祖)는 함을 봉하여 하간왕 겸 전운사(河間王兼轉運使)로 삼았다. 무제(武帝)가 사방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모두 육군으로 승리를 취했는데 함은 육상전투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공적이 없었다.예관(兒寬)과 복식(卜式)43)의 무리가 소금과 철로 이익을 삼기에 미치자 함은 군량 운송으로 공을 세워 크게 총애를 받았다. 마침내 그의 죽음에 미쳐서 그의 아들 축(軸)은 광무제(光武帝)가 호타하(滹沱河)를 건널 때 미처 따라가지 못했고 이 때문에 축출을 당했다.44) 촉한(蜀漢)의 적벽(赤壁) 전쟁에서는 와룡(臥龍)45)을 따라서 큰 공을 세웠다. 이 때부터 그 자손은 대대로 수군의 장수가 되었고 공을 세운 자도 이루 다 기술할 수가 없다.가장 애석한 것은 송(宋)나라 때 애산(崖山)의 전쟁46)이다. 축(軸)의 자손 만여 무리가 장세걸(張世傑)의 통솔을 받았는데 세걸의 전략이 뛰어나지 못하여 마침내 수만의 무리를 견양(犬羊) 같은 적에게 먹히게 하고 말았으니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 자손으로 사방의 오랑캐 땅에 흩어져 사는 자가 천하에 가득했다. 다만 북호(北胡)의 땅에서는 살지 않았는데 북호는 또한 외축(畏縮)되어 감히 그 틈을 탈 수가 없었다. 상고시대 신명(神明)의 종족으로 아! 기특하도다.사관은 판단하여 말한다."인재를 쓸 때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있는 자가 잘 쓰면 천하에 어질지 않은 자가 없고 잘 쓰지 못하면 천하에 악하지 않는 자가 없다. 공손항은 한 몸이로되 우임금을 도와 공을 세우고 물과 땅을 평정하였으니 걸출하여 볼 만하였으나, 끝내는 걸임금과 음탕에 빠졌고 결국 초택(楚澤)에서 아교가 풀리어47) 죽었으니 어찌 그리도 잘못되었던가!또한 출신을 가지고 인재를 써서는 안 된다. 항의 아들 도(刀)는 청고(淸高)함이 비할 바가 없었고, 함(艦)은 웅장한 지략이 매우 뛰어났으며, 방(方)은 나루터 아전으로 늙어 남에게 부림을 받았다.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현우(賢愚)와 청탁(淸濁)이 이렇게 현저히 다르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이 대대로 봉록은 주되 대대로 관직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니 인재를 쓰는 자는 신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도(刀)의 후손으로 이름이 부(桴)48)인 자와 가장 친한데 장차 그와 함께 타고 바다에 뜰 뜻49)이 있다. 그래서 그의 세계(世系)를 특히 자세하게 기술하는 바이다." 公孫航江東人也。 或曰六人。 字海卿。 黃帝子也。 帝鑄鼎於荊湖。 共化狄從焉。 見浮葉在湖中。 帝感而生航。 使二人爲傅。 及帝御龍駕而賓天。 航乃居于湖海間。 ▩公孫姓。 至禹時。 佐禹導水有功。 龍門之役。 江漢之注。 航之功居多焉。 及禹玄圭告成。 拜航爲九州通津伯。 嘗與禹濟江。 爲黃龍所負。 幾不渡。 航笑曰: "先帝御龍於鼎湖。 予又爲龍所負。 豈非命歟?" 顔色不變。 俄而龍乃去。 航爲人身長數十丈。 大可百餘圍。 軒騰磊落。 有憑河之力駕海之威。 其性能與世浮沉。 接人不分善惡貴賤而皆受容歸。 但不喜遊山與陸行矣。 及禹崩夏德衰而航亦老矣。 履啓卽位。 日事淫虐。 與航爲長夜之樂於酒池中。 航之子刀諫不聽。 刀與務光走于江湖終不出。 至湯伐桀。 航走于楚澤。 周昭王南廵至楚。 同載于楚澤中。 與王同溺焉。 航有三子。 長曰艦。 季曰方。 刀乃其中子也。 殷末刀與呂尙釣于東海。 及西伯將獵。 呂尙歸周。 刀愀然不悅。 去來江口淸涯。 以終其身。 其子孫散居川澤者。 皆以淸高自厲。 未嘗至於宦海要津。 盖刀之遺風也。 其後越范蠡·漢嚴子陵·晉陶元亮·唐張志和·宋林君復淸節之士。 皆與刀之子孫同遊焉。 季子方無他技能。 世爲津吏。 以取其直爲生。 其長子艦。 爲人宏傑寬大有大略。 從父航居於楚。 秦始皇時。 與徐市相善。 謂市曰: "始皇貪戾暴虐。 生民煎熬。 如水益深。 子何不以神仙之術說上。 仍爲圖生之地?" 市乃西入關。 見上請與童男女三千人。 入海求三神山不死藥。 上方求仙術。 信市言從之。 市乃與艦載三千人入居海島。 聞山東豪傑並起。 與其徒數千。 沿海至河。 將與沛公合兵入關。 時章邯擊趙。 楚救之。 項籍殺卿子冠軍。 以兵至河。 艦說羽曰: "邯不足擊也。 趙高用事于中。 與邯有隙。 是內外不相應也。 爲今之計。 不若與艦浮于河。 直抵函谷關。 與沛公合勢攻秦。 根本旣鋤則邯不足擊也。" 羽怒曰: "我方率十萬之衆。 攻無道秦。 艦乃以淺謀撓我。 以沮士卒心。" 乃沉艦于河。 其徒數千皆沉焉。 艦潛出。 與其徒南流江漢。 將與漢王合從。 會羽弑義帝於江中。 漢王用三老策。 縞素伐羽。 南浮江漢而下。 艦使裨將艘將數十萬衆。 從王下彭城。 艦自河入關。 與蕭何轉漕運糧。 終始不絶。 漢以此得天下。 高祖封艦爲河間王兼轉運使。 至武帝征伐四夷。 皆以陸軍取勝。 艦不習陸戰。 故無功。 及兒寬卜式之徒。 以塩鐵爲利。 艦以轉漕立功。 大得寵焉。 及卒其子軸當光武渡滹沱河時。 不及從焉。 以此見黜。 及蜀漢赤壁之戰。 從臥龍大有功焉。 自此其子孫世爲水軍帥。 立功者不可勝記。 惟最可惜者。 宋崖山之戰。 軸之子孫萬餘衆。 統於張世傑。 世傑謀猷不長。 竟使數萬之衆。 爲犬羊之所呑。 通天之痛。 曷其極哉? 故其子孫散居四方外夷者。 彌漫天下。 而獨不居北胡之地。 北胡亦畏縮不敢乘其間。 上古神明之種。 吁亦奇矣。 史斷曰: "用人材。 不可不愼也。 在上者能用之則天下莫不賢。 不能用之則天下莫不惡。 航一軆也。 佐禹立功。 平定水土。 傑然可觀也。 卒與桀沉淫。 竟死於楚澤之解弛。 何其累也! 亦不可以世類用人材也。 航之子刀淸高莫比。 艦壯略魁偉而方老津吏。 爲人所役。 一本之出而賢愚淸濁若此懸絶。 此先王之所以世祿而不世官者也。 用人材者。 可不愼歟? 余與刀之族裔名捊1)者最相親。 將有同載浮海之志。 故述其世傳獨加詳焉。" 공손항전 우임금이 탔던 배[航]를 의인화하여 쓴 것이다. 형호(荊湖) 형산(荊山) 아래 있는 정호(鼎湖)를 가리킨다. 옛날 황제(皇帝)가 여기에서 솥을 주조하였던 곳이다. 《史記 封禪書》 공고(共鼓)와 화적(化狄) 황제의 신하로 배와 노를 만든 사람들이다. 《설문(說文)》 〈주부(舟部)〉에 "옛날에 공고와 화적이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노를 만들어서 통하지 못했던 곳을 건넜다.[古者共鼓,貨狄刳木爲舟, 剡木爲楫, 以濟不通.]"고 하였는데 서개계(徐鍇繫)의 전(傳)에 "공고와 화적 두 사람은 황제의 신하이다.[共鼓,貨狄二人, 黃帝臣也.]" 하였다. 하늘로 올라가자 원문의 '빈천(賓天)'으로, 하늘의 손님이 되었다는 뜻인데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용문(龍門)을 뚫은 일 '용문'은 산 이름이다.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에 "우 임금이 용문을 뚫고 구하(九河)를 소통시킬 때 손발이 부르트고 얼굴이 누렇게 초췌하였다.[禹鑿龍門, 疏九河, 手足胼胝, 面目黧黑.]" 하였다. 강한(江漢)으로……데 '강한(江漢)'은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이른다. 《서경》 〈우공(禹貢)〉에 "파총산에서 양수를 유도하여 동쪽으로 흘러 한수(漢水)가 되게 하며……남쪽으로 강수(江水)에 들어가게 하셨다.[嶓冢導漾, 東流爲漢……南入于江.]" 하였다. 현규(玄圭)를……아뢰고 '현규'는 검은 옥이다.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권한을 맡겨 수토(水土)를 평정하게 하였는데 "우가 현규를 올려 그의 성공을 순 임금에게 아뢰었다.[禹錫玄圭, 告厥成功.]" 하였다. 《書經 禹貢》 이계(履啓) 하(夏)나라의 폭군인 걸(桀)의 이름이다. 무광(務光) 탕(湯) 임금이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왕위를 그에게 양보하려 했던 인물이다. 《莊子 讓王》 초택(楚澤) 옛날 초(楚)나라 지역에 운몽(雲夢) 등 7개의 연못이 있었다. 주(周)나라……익사했다 소왕이 초(楚) 땅을 순수하다가 강가에서 배를 타게 되었는데 초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 아교로 접합시킨 배를 바치니 이에 소왕이 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아교가 녹아 배가 해체되어[膠液船解]'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다. 《帝王世紀 周》 서백(西伯)이……귀의하자 서백(西伯)은 주 문왕(周文王)을 말한다.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 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함께 돌아와 사(師)로 삼았다. 《史記 齊太公世家》 물이……같은데[如水益深] 학정이 더욱 심해진다는 말이다. 《孟子 梁惠王下》 장한(章邯) 진섭(陳涉)을 멸망시키고 항량(項梁)과 위구(魏咎)를 격파한 진(秦)나라의 맹장(猛將)이었다. 그런데 간신 조고(趙高)의 전횡에 실망하여 그 후 항우(項羽)에게 항복하여 옹왕(雍王)이 되었다가 유방(劉邦)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경자관군(卿子冠軍)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상장군(上將軍)인 송의(宋義)를 가리킨다. 진(秦)나라 장감(章邯)이 황하를 건너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거록(鉅鹿)을 포위하자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項羽)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송의가 안양(安陽)에 이르러 46일간을 형세만 엿보며 공격하지 않자, 답답하게 여긴 항우는 송의가 제(齊)나라와 모의해 초나라를 배신하려 한다며 그를 살해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조고(趙高) 진(秦)나라 때 환관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죽자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거짓 조서를 만들어 장자(長子) 부소(扶蘇)에게 죽음을 내리고 이세(二世) 호해(胡亥)를 세웠으며, 이사를 죽이고 승상이 되어 대소사를 제멋대로 하다가 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함을……가라앉혔다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 싸우러 가면서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沈船破釜甑]'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 양식을 지니고서 사졸에게 반드시 죽을 것임을 보여 주었던 것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項羽本紀》 삼로의 계책[三老策] 삼로(三老) 동공(董公)의 계책을 말한다. 항우가 의제(義帝)를 시해한 사실을 알게 된 유방(劉邦)이 삼로(三老) 동공(董公)의 진언을 받아들여 의제를 위해 상(喪)을 발표하고 통곡한 다음, 군사들에게 소복을 입히고 천하의 제후들에게 항우를 토벌할 것을 호소하자, 많은 제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유방은 이들을 거느리고 항우를 죽이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漢書 高帝紀上》 육로와 수로로 원문의 '전조(轉漕)'로 식량을 운반할 때, 육로(陸路)를 통해 수레로 운반하는 것을 전(轉)이라 하고,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배로 운반하는 것을 조(漕)라 한다. 예관(兒寬)과 복식(卜式) 예관과 복식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신하들이다. 축출을 당했다 이때는 배를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와룡(臥龍) 와룡은 제갈량(諸葛亮)의 호이다. 애산(崖山)의 전쟁 '애산(崖山)'은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 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인데, 형세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남송 말기에 원병(元兵)의 공격을 받았을 때, 보강군 승선사(保康軍承宣使) 장세걸(張世傑)이 위왕(衛王) 병(昺)을 모시고 애산으로 가 있었다. 원병이 다시 애산을 공격해 오자, 장세걸은 군함 10여 척을 가지고 도망을 쳤고, 좌승상(左丞相) 육수부(陸秀夫)는 형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마침내 위왕 병을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한편 장세걸은 뒤에 다시 애산에서 군졸을 수습하여 송나라 황실의 후예를 찾아서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바다의 큰바람을 만나서 익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남송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宋史 忠義列傳》 아교가 풀리어 아교로 접합시킨 배를 탔다가 아교가 풀리고 배가 해체되어[膠液船解]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말한다. 《帝王世紀·周》 부(桴) 원문은 '捊'로 되어 있는데 공손항의 후손들의 이름은 모두 '배'와 관련된 것이므로 '桴'의 잘못이다. 바다에 뜰 뜻 '부해(浮海)'는 은거하겠다는 뜻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천하가 어지러움을 탄식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浮于海.]" 하였다. 捊 공손항의 후손들의 이름은 모두 '배'와 관련된 것이므로 '桴'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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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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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 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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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졸을 효유하는 격문61) 喩氣卒檄 유년월일에 단양(丹陽) 도총대장(都總大將) 지수(志帥)는 기졸(氣卒) 군인 등에게 반포하여 고하노라. 준동하는 4적(四賊)의 추한 무리는 실로 칠전(七田)62)의 모얼(耗孼)이다. 벌과 전갈과 짐새의 독,63) 사나운 말과 날선 칼날 같은 것들이어서 나의 빈틈을 엿보다가 이렇게 지키지 않는 틈을 타서 공격한다. 처음에는 우씨(虞氏)에게 길을 빌리듯 사사로운 것으로 점차 설득하고64) 끝내는 험윤(玁狁)이 태원(大原)을 점거하듯65) 도리어 포학을 자행하며, 산택(山澤)을 마시고 불어댈 듯 순식간에 천 개의 쇠뇌를 쏘고 풍운을 질타하듯 잠깐사이에 만 가지 변화를 어지럽힌다. 오는 것은 번개를 놀라게 하고 가는 것은 강물을 모는 것 같다. 안택(安宅)66)을 점거하여 위태롭게 하고 예문(禮門)67)을 타고 난을 일으키니, 불이 아니어도 뜨거워져서 집이 불타고 얼음이 아니어도 차가워져서 계곡이 언다.이에 나의 주군(主君)68)은 기산(岐山)의 한 모퉁이에서 형세가 급박하여 태왕(太王)이 어려운 것 같고,69) 서촉(西蜀)의 삼위산(三危山)에서 사태가 위급하여 상황(上皇)이 피난을 간 것 같다. 뜨거운 화로를 설치해도 하늘을 덮는 흰 눈을 녹이기 어렵고 현석(玄錫)의 공을 이루지 못해 황하가 땅을 가르며 흐르는 것을 여전히 볼 수 있다.70) 누가 능히 이 음험하고 흉악한 것들을 쓸어버리고 주군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인가? 흰 무지개가 해를 범하니71) 진(秦)나라 군대가 승기를 탔고, 누런 안개가 들판을 덮으니72) 한(漢)나라의 태양이 밝지 못했다.주수(主帥)는 한 편의 의성(意城)이요 삼전(三田)73)의 주장(主將)으로, 산하가 옛날과 다르니 백인(伯仁)의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나 닦았던가.74) 그리하여 처첩들을 항오에 편입시키고 제나라 사람처럼 판자와 삽을 놓지 않았다.75) 한 밤중에 종치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추향하는 바가 이미 밝아지고, 관중(關中)에 물기(勿旗)76)를 세우자 흉악한 무리의 안색이 변하니 오히려 차마 적과 양립하랴, 한 하늘을 같이 이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이에 바로 옛 성인의 계책을 계승하고 천명을 받들어 하늘의 토벌을 행하여 삼부(三符)가 이미 수립되니 부죽(剖竹)의 형세가 이뤄지고, 일기(一機)가 이에 펼쳐지니 균석(鈞石)77)도 뽑을 수가 있다. 육비(六轡)78)가 손에 있으니 사마(駟馬)가 어긋나게 달리지 않고, 사유(四維)79)가 앞에 펼쳐지니 수레가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반드시 적을 섬멸하여 남겨 기르는 일이 없으니80) 어찌 남은 싹이 있게 하겠는가?아! 나의 기졸(氣卒) 군인 등은 구태를 혁파해 제거하고 새로운 명을 모두 따르라. 옛날에는 마음이 외물에 변화되었음을 깨닫고 오늘엔 하늘에 통함을 각성하여, 칼날을 맹렬히 갈아 적세(賊勢)의 요충을 끊고 문호를 한결같이 지켜서 외객(外客)이 와서 엿보는 것을 막아라. 신(神)이 지키는 고을을 영원히 귀신이 엿보는 집이 되지 하지 말라.81) 만약 나와의 약속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이 처벌을 명할 것이다. 너희가 혹시 나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천군(天君)의 기상을 와서 보라. 이는 나의 충고이니 격문이 이르는 대로 글과 같이 시행하라. 維年月日。 丹陽都總大將志帥。 頒告于氣卒軍人等。 蠢爾四賊醜儔。 實是七田耗孼。 蜂蠆鴆毒。 悍馬銛鋒。 覘我空虛。 乘此不守。 初虞氏之假道。 漸喩以私。 卒玁狁之據原。 反肆其虐。 呴噓山澤。 放千弩於斯須。 叱咤風雲。 紛萬變於頃刻。 來如驚電。 去若驅河。 據安宅而爲危。 乘禮門而作亂。 非火而熱。 室廬斯焚。 不冰而寒。 谿壑乃凍。 肆我主君。 岐山一隅。 勢迫太王之艱難。 西蜀三危。 事急上皇之播越。 紅爐雖設。 難消白雪之蔽天。 玄錫未功。 尙見黃河之擘地。 誰能掃此陰獰。 重見主君容顔? 白虹犯陽。 秦兵乘勝。 黃霧蔽野。 漢日難明。 主帥一片意城。 三田主將。 山河異昔。 幾拭伯仁之涕流。 妻妾編行。 不釋齊人之板鍤。 聞扣鍾於夜半。 所嚮已明。 立勿旗於關中。 兇徒變色。 尙忍與賊兩立。 誓不共戴一天。 玆乃繼往聖謨。 奉命天討。 三符旣立。 剖竹勢成。 一機斯張。 鈞石可拔。 六轡在手。 駟不詭馳。 四維張前。 車不亂序。 必殲滅無遺育矣。 焉使其有餘㕀哉? 咨! 我氣卒軍人等。 革去舊塵。 咸聽新命。 悟昔時之物化。 覺今日之天通。 勇礪劒鋩。 割賊勢之要路。 一守門戶。 防外客之來窺。 毋使神守之鄕。 永作鬼瞰之室。 若不從我約束。 必有天命誅譴。 爾倘不信我言。 來見天君氣象。 是余忠告。 檄到如章。 기졸을 효유하는 격문 〈喩氣卒檄〉 지(志)를 장수(將帥)로 기(氣)를 군졸(軍卒)로 의인화하여 쓴 격문이다. 4적(四賊)의……칠전(七田) '4적'은 미상이고, '칠전'은 칠정(七情)을 비유한 듯하다. 짐새의 독[鴆毒] 짐조(鴆鳥)의 깃을 술에 담가 마시면 그 독이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춘추 좌씨전(春秋左氏傳)》 민공(閔公) 원년에 "안일함은 짐새의 독이니,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宴安鴆毒, 不可懷也.]"라는 말이 나온다. 우씨(虞氏)에게……설득하고 '우씨'는 '우공(虞公)'을 말한다. '가도멸괵(假道滅虢)'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희공(僖公) 2년에 진(晉)나라가 순식(荀息)이 굴(屈)에서 나는 네 필의 말과 수극(垂棘)에서 나는 옥을 우(虞)나라에 뇌물로 주고서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쳐서 하양(下陽)을 멸망시키고, 희공(僖公) 5년에 다시 길을 빌려 괵(虢)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虞)까지 멸하는 내용이 나온다. 《春秋左氏傳 僖公 2年, 5年》 험윤(玁狁)이 태원(大原)을 점거하여 '험윤(玁狁)'은 북방 오랑캐이다. 《시경》 〈유월(六月)〉 제5장에 "잠깐 험윤을 쳐서 태원에 이르렀으니 문무를 겸비한 길보여, 만방이 법으로 삼도다.[薄伐玁狁, 至于大原. 文武吉甫, 萬邦爲憲.]" 하였다. 안택(安宅) 인(仁)을 뜻한다. 《孟子 離婁上》 예문(禮門) 예(禮)를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의(義)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고, 예(禮)는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니, 오직 군자만이 이 길을 다닐 수 있고 이 문을 출입할 수 있다.[夫義, 路也, 禮, 門也. 惟君子能由是路, 出入是門也.]" 하였다. 주군(主君) 마음을 가리킨다. 기산(岐山)의……같고 주 태왕(周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빈(邠) 땅에 있을 때 적인(狄人)이 쳐들어오자 백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빈을 버리고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갔다는 고사를 말한다. 《孟子 梁惠王下》 현석(玄錫)의……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현석(玄錫)은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권한을 맡겨 수토(水土)를 평정하게 하였는데 "우가 현규를 올려 그의 성공을 순 임금에게 아뢰었다.[禹錫玄圭, 告厥成功.]" 한 것을 말한다. 《書經 禹貢》 흰……범하니 불길한 징조이다. 진 시황(秦始皇)을 암살하기 위해 형가(荊軻)가 떠날 때, 연나라 태자 단(丹)이 흰 무지개가 해를 꿴 것을 보고 실패를 예견하였다.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에 "옛날에 형가가 연나라 태자 단의 의리를 사모했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니 태자가 두려워했다.[昔者, 荊軻慕燕丹之義, 白虹貫日, 太子畏之.]" 하였다. 누런……덮으니 불길한 징조이다. 《한서(漢書)》 〈성제기(成帝紀)〉에, 한 성제(漢成帝) 원년에 공이 없는 태후의 여러 아우들을 후(侯)로 봉하자 "여름 4월에 누런 안개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夏四月, 黃霧四塞.]"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간대부 양흥 등이 대답하기를 '(누런 안개가 가득 메운 것은) 모두 음이 성하여 양을 침해한 기운입니다. 고조의 약속에 공신이 아니면 후를 봉하지 않기로 하셨는데, 지금 태후의 여러 아우들이 모두 공이 없이 후가 되었으니, 외척이 〈후에 봉해진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였다.[諫大夫楊興等, 對皆以爲陰盛侵陽之氣也. 高祖之約, 非功臣不侯, 今太后諸弟, 皆以無功爲侯, 外戚, 未曾有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삼전(三田) '삼단전(三丹田)'으로 도가에서 말하는 세 곳의 단전인데,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산하가……닦았던가 어지럽혀진 마음을 빼앗긴 산하에 비유한 것이다. 백인(伯仁)은 동진(東晉) 사람 주의(周顗)의 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전한다. 서진(西晉)이 유송(劉宋)에게 쫓겨 장강(長江)의 동남쪽으로 건너가 동진(東晉)이 되었는데, 신하들이 신정(新亭)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주의가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산하는 정히 절로 다름이 있구나.[風景不殊, 正自有山河之異.]"라고 하자, 좌중이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처첩들을……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해이해진 의성(意城)을 다시 쌓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전국 시대의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연(燕)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 '몸소 판자와 삽을 잡고 병사들과 함께 일을 하였고 처첩(妻妾)들을 군대의 항오에 편입시키고[乃身操版揷, 與士卒分功, 妻妾編於行伍之間, 盡散飮食饗士.]' 음식을 모두 풀어 병사들을 먹여서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史記 田單列傳》 물기(勿旗) '사물(四勿)'의 깃대[旗]라는 뜻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41 〈안연편(顔淵篇)〉에서 '비례물시(非禮勿視)'를 논하면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물(勿) 자는 깃발과 비슷하여, 이 기를 한 번 흔들면 삼군(三軍)이 모두 물러난다.'라고 하였으니, 공부는 단지 이 '물' 자에 달려 있다.[說文謂勿字似旗脚, 此旗一麾, 三軍進退, 工夫只在勿字上.]" 하였다. 균석(鈞石) 고대 무게의 단위로 가장 무거운 저울추이다. 《서경》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에 "통용되는 석과 공평한 균이 왕부에 있다.[關石和鈞, 王府則有.]" 하였는데, 채침의 주에 "균과 석은 5권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이다.[鈞與石, 五權之最重者也.]" 하였다. 육비(六轡) 여섯 개의 말고삐라는 말인데, 네 필 말의 고삐 여덟 개 중에서 양편 참마(驂馬)의 두 고삐는 식(軾)의 고리 속에 넣고 손에는 여섯 개의 고삐만 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시경》 〈사철(駟驖)〉에 "검붉은 네 필의 말 통통하게 살졌나니, 여섯 개의 고삐를 손 안에 쥐었도다.[駟驖孔阜, 六轡在手.]"라는 말이 나온다. 사유(四維) 나라의 벼리가 되는 4가지로 예(禮)·의(義)·염(廉)·치(恥)를 말한다. 《管子 牧民》 섬멸하여……없으니 《서경》 〈반경(盤庚)〉에 "불선하고 무도한 자들이 타락하여 공손하지 않거나 잠시 만남에 간악한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이들을 남기어 기르지 않고 코를 베고 죽여서 새 도읍에 그 종자를 퍼트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乃有不吉不迪, 顚越不恭, 暫遇姦宄, 我乃劓殄滅之無遺育, 無俾易種于茲新邑.]" 하였다. 신이……말라 '경(敬)'으로 마음을 수양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희(朱熹)의 제자인 임용중(林用中)이 지은 〈주일명(主一銘)〉에 "마음에 주재가 있으면 텅 비게 되니, 신이 그 성곽을 지키고, 주재가 없으면 실하게 되니, 귀신이 그 집을 엿본다.[有主則虛, 神守其都, 無主則實, 鬼闞其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귀신이 집을 엿본다는 것은 곧 마음에 사욕(邪慾)이 들어옴을 의미한다. 《性理大全 권32 性理4 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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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횡론 田橫論 내가 살펴보건대, 전횡(田橫)8)이 2빈객과 500명의 사(士)를 데리고 섬으로 들어갔을 때 한(漢)나라가 왕후(王侯)로 예로 부른 것은 그가 혹 난을 일으킬까 우려해서였다. 이에 전횡이 역마를 타고 낙양(洛陽)에 이르렀는데 조정에 도착하기 30리 전에서 자살하였다. 그가 자살한 뒤 2빈객과 사(士) 500사람도 모두 자살하였다. 가령 502사람이 목숨을 버리면서 의리를 취하여 죽음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여러 전씨(田氏) 종족들은 이미 멸망했고 전횡도 세울 후사(後嗣)가 없었으니, 저 502사람은 무슨 바랄 것이 있어 그 의리를 이룰 수 있겠는가. 호인(胡寅)의 《독사 관견(讀史管見)》9)에 이른바 "어떤 것을 위하는 바가 없이 행하였으니 참된 의사(義士)이다."10)라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비록 그렇지만 나는 일찍이 그 중도를 잡아 논하여 "전횡의 죽음은 높다고 할 만하고, 사(士)의 죽음도 의롭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저 전횡은 제(齊)나라의 공자(公子)이다. 건(建)11)의 객들이 부른 송백(松栢)의 노래는 천년 후에도 사람의 이목이 살펴보는 바로 매우 답답하게 하지 않음이 없는데 더구나 전횡의 경우이겠는가?전횡의 현명함으로 502사람의 의리를 믿고서, 패공12)이 의리를 붙들어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던 날에 검을 차고 황하를 건너 자방(子房)·소하(蕭何)·조참(曹參)13)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관대한 장자14)의 대업을 도와 이루고, 함곡관을 점거하여 한 번 호령하며 송백(松栢)과 아사(餓死)의 치욕을 씻고, 연후에 서책(署冊)에 이름을 나열해 쓰며 금궤(金櫃)15)의 맹약을 하고, 제나라 한쪽 지방에서 왕 노릇하면서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하고,16) 전씨의 조종(祖宗)으로서 백세토록 제사를 받아먹었다면,17) 사람들 가운데 누가 대장부라 하지 않았겠는가?이렇게 하지를 않고 사나운 조무래기들과 일을 함께 하다 끝내는 전복되고 말았다. 이는 왕릉의 어미18) 같은 일개 부녀자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인데 전횡은 하였단 말인가? 설사 전횡이 한(漢)나라를 미처 섬기지 못하여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온 제나라 70여 성이 한신(韓信)의 손에 한 번 깨져서 나라가 멸망하고 군주는 죽어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니, 전횡의 큰 원수로서 한(漢)나라 또한 진(秦)나라와 같은 것이다. 전횡을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통곡하며 하늘에 부르짖고 복수를 기약하면서 500인의 목숨을 내놓은 의사들과 연계해 십이(十二)19)의 강력한 제나라의 변경으로 들어가 웅거하였다면, 백만의 무리도 한 번 호령하여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견고한 사방의 요새를 등지고 임치(臨淄)20)에서 예의를 갖추면서 천하의 선비들을 초치하고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에 격문을 전하여 의를 떨쳐 서쪽으로 갔다면, 그 당시 중원의 병사들은 유방과 항우가 서로 백전백패하는 나머지 피폐해져 부상에 신음하는 소리가 사방에 달했고, 팽왕(彭王)의 변란21)에 황제가 직접 출정을 하였으나 조(趙)나라와 대(代)나라 변경의 부대가 하나도 조정의 부름에 오지 않았으며, 백등(白登)의 포위22)에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손을 거두어 계책을 낸 바도 없었으니, 더구나 돌진해오는 500 의사(義士)들의 예봉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했다면 한 나라와 제 나라의 자웅은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오호라, 전횡의 현명함으로도 계책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던가? 가령 천명과 인심이 이미 한(漢)나라로 돌아가서, 사람의 지모가 비록 훌륭한들 어쩔 수 없더라도 마땅히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 복수의 대의에 죽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漢)나라 사신을 한 번 만나보고는 '크게는 왕을 시켜주고 작게는 제후를 시켜주겠다.'23)는 이끗에 유혹되어서 천리를 역마를 타고 가면서 명을 받드는데 분주하다가, 계책이 바닥나고 형세가 곤궁해진 뒤에야 구독(溝瀆)에서 칼에 엎드려 죽었으니 이 무슨 의리인가. 내가 그러므로 "전횡은 작은 은혜로 인심을 결집한 일은 있으나, 그 대의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하는 것이다. 삼가 논한다. 愚按田橫以二人客五百士。 入于島。 漢招以王侯之禮。 盖慮其或作亂也。 橫乘傳至洛陽。 未及朝三十里死之。 死之後。 二人者與士五百皆自殺。 夫使五百二人。 捨生而取義。 視死如歸。 諸田宗已滅而橫亦無後可立。 彼五百二人者。 有何所望而能成其義歟? 胡管見所謂無所爲而爲之。 眞義士也者。 是也非耶? 雖然愚嘗執其中而論之曰: "橫之死。 可謂高矣。 士之死。 亦可謂義矣。" 彼橫者齊之公子也。 建客松栢之歌。 使千載下。 耳目所照。 莫不絶悒。 况橫者耶? 以橫之賢。 挾五百二人之義。 當沛公扶義入關之日。 仗劒渡河。 與子房蕭曹共肩而贊成寬大長者之業。 據關一號。 雪松栢餓死之恥。 然後列書署冊。 金櫃之盟。 王齊一方。 南面稱孤。 使田氏之宗。 血食百世。 則人誰不曰大丈夫哉? 此之不爲。 與慓悍小兒同事。 竟致顚覆。 此王陵母一婦女所羞而橫爲之耶? 設使橫未及事漢。 而事已至此則全齊七十餘城。 一破於韓信之手。 而國滅君亡。 宗廟邱墟。 橫之大讎。 漢亦秦也。 爲橫之計。 當痛哭號天。 期以復讎。 連五百之死士。 入據十二强齊之境。 則百萬之衆。 可一呼而得矣。 負四塞之固而揖讓臨淄之上。 以致天下之士。 傳檄韓魏。 奮義而西。 則當其時。 中國之兵。 罷於劉項百戰百敗之餘。 呻痛瘡痍之聲。 達于四境。 彭王之變。 帝自出征。 而趙代邊兵。 一不庭召。 白登之圍。 蕭曹斂手。 計無所出。 則况可當於五百義士衝突之鋒耶? 然則漢齊雄雌。 未可必矣。 嗚呼! 以橫之賢。 計未及此耶? 假使天命人心已歸於漢。 人謀雖臧。 無可奈何。 則當背城一戰。 死於復讎之大義可也。 一見漢使。 誘於大王小侯之利。 千里乘傳。 奉命奔走。 至於計縮勢竆然後。 伏劒溝瀆。 是何義耶? 愚故曰: "橫以小惠結人心則有之。 不聞其大義也。" 謹論。 전횡(田橫) 전횡은 조카인 제왕(齊王) 전광(田廣)이 한신(韓信)에게 사로잡혀 죽자 자립하여 제왕이 되었다. 얼마 뒤 한 고조 유방이 황제가 되니, 전횡은 주벌될까 두려워 500여 명의 무리와 바다 섬으로 들어가서 살았다. 유방이 사신을 보내 전횡의 죄를 용서하고 부르기를 "전횡아, 오너라. 크게는 왕으로 봉하고 작게는 후(侯)로 봉하겠지만, 오지 않으면 군사를 보내어 주벌하겠다."라고 하였다. 전횡이 이에 빈객 두 사람과 낙양으로 가다가 30리를 남겨 두고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한왕(漢王)과 나란히 왕이라 칭하다가 지금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망국의 포로가 되어 그를 섬기게 되었으니, 너무도 부끄럽다."라고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며 두 사람에게 자신의 수급을 바치게 하였다. 한 고조가 왕자의 예법으로 전횡을 장사 지내 주었다. 두 빈객과 섬에 있던 500명도 모두 자결하였다. 《史記 권94 田儋列傳》 호인(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 원문의 '호관견(胡管見)'으로, 송(宋)나라의 학자인 호인(胡寅)이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주요 사건마다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독사관견(讀史管見)》 30권을 엮었다. 어떤……의사(義士)이다 사심 없이 오직 의리에 따라 행동한 것을 말한다. 예양(豫讓)의 고사를 말한다. 예양은 전국(戰國)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지백(智伯)을 섬겨 총애를 받았는데,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을 쳐서 멸망시키자, 지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양자에게 잡히자 자결하였다. 《史記 권86 刺客列傳 豫讓》 건(建) 초나라 평왕(平王)의 태자로 비무극(費無極)의 참소를 당해 쫓겨나서 객사한 건(建)을 말한 듯하나 확실치 않다. 《春秋左氏傳 昭公27年》 패공(沛公)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의 칭호이다. 패(沛)에서 기병(起兵)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자방(子房)·소하(蕭何)·조참(曹參) 세 사람 모두 한(漢)나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자방(子房)은 장량(張良)으로, 그의 자가 자방이다. 관대한 장자[寬大長] 한고조 유방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지금 항우는 강하고 사나우니 지금 항우를 보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패공만이 관대한 장자이니 그를 보내야 합니다.[今項羽彊悍, 今不可遣. 獨沛公素寬大長者, 可遣.]" 하였다. 금궤(金櫃) 금으로 만든 궤로, 옛날에 중요한 문서나 물건을 보관하던 곳인데, 흔히 공신들의 녹권을 보관하는 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공신(功臣)에 책록(策錄)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 하〉에 "또 공신들과 부절을 쪼개어 서사를 지어서 단서 철계를 금궤 석실에 봉함하여 종묘에 갈무리했다.[又與功臣剖符作誓, 丹書鐵契, 金櫃石室, 藏之宗廟.]" 하였다.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하고 군주가 된다는 말이다. 남면은 군주는 조정에서 북쪽에 앉아 얼굴을 남쪽으로 향했으므로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하고, 고(孤)는 제후가 자신을 가리키던 호칭이므로 역시 군주가 되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받아먹었다면 원문의 '혈식(血食)'으로, 희생(犧牲)을 잡아 생육(生肉)을 바쳐 제사함을 말한다. 여기서는 제사를 받는 것을 말한다. 왕릉(王陵)의 어미 유방이 항우와 패권을 다툴 때에 왕릉이 유방의 편이 되었다. 항우는 이에 왕릉의 어머니를 군중에 붙잡아 두었다. 왕릉의 사자(使者)가 항우의 진영으로 오자 왕릉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심부름꾼을 보내 "'한왕(유방)은 장자이다. 늙은 나 때문에 두 마음을 품지 말아라. 내가 죽음으로써 심부름꾼을 보낸다.' 하고는 칼에 엎드려 죽었다. 항우는 노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삶아 죽였다. 왕릉은 마침내 한왕을 따라서 천하를 평정하였다." 하였다. 《史記 권56 陳丞相世家》 십이(十二) 10분의 2라는 뜻으로 천혜의 요새지임을 말한다. 《사기》 고조기(高祖紀)에 "(제나라는) 땅은 사방으로 2천 리나 되고 제후국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으니 제후국의 군사가 1백만이라면 10분의 2인 20만의 군사만으로도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地方二千里, 持戟百萬, 縣隔千里之外, 齊得十二焉.]" 하였다. 임치(臨淄) 전국 시대 제(齊)의 수도이다. 팽왕(彭王)의 변란 '팽왕'은 팽월(彭越)을 말한다. 항우(項羽)를 섬기다 한(漢)나라에 귀순하여 기공(奇功)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공신인 한신(韓信)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고조(高祖)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史記 권90 彭越列傳》 백등(白登)의 포위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흉노의 묵특 선우(冒頓單于)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는데, 도리어 평성(平城) 부근의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 동안 흉노의 30만 대군에게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가 선우의 부인 연지(閼氏)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겨우 포위에서 벗어났다. 《史記 권93 韓信列傳》 크게는……시켜주겠다 한 고조가 전횡에게 사신을 보내 회유하기를 "전횡은 오라, 크게는 왕을 시켜주고 작게는 제후를 시켜 주겠다[田橫來, 大者王, 小者乃侯耳.]" 하였다. 《史記 권94 田儋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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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잡저】 傳【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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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나주 양 고을의 문예를 겨루기를 요청한 격문 光羅兩邑戰藝檄 삼가 생각건대, 폐읍은 탄환만한 한 작은 현이지만 다행히 귀주(貴州)와 경계를 접하여 닭 울음소리가 서로 들리고 개의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서악(瑞嶽)82)의 신령한 빛이 항상 금수(錦峀)83)를 끌어당길 듯하고, 영탄(靈灘)84)의 상서로운 기운이 멀리 낙포(樂浦)로 통한다. 산천은 아름답고 인물은 많아 곧바로 상하(上下)를 가릴 수 없다.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석덕(碩德)과 홍유(鴻儒)가 전후로 배출되어 역사를 빛낸 사람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호중(湖中) 천리 땅에 바둑알처럼 펼쳐진 군들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마는 명승을 칭할 때 광주(光州)와 나주(羅州)를 나란히 세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더구나 옛적 태평시절 수백 년 동안에 문물이 부려(富麗)하고 신성하신 조종(祖宗)의 단비와 같은 교화로 걸출한 준재들이 이 두 고을에 모여서 사철로 기쁘게 노닐며 서로 어울려 즐긴 것은 시례(詩禮)의 가르침과 현송(絃誦)의 아름다움이 아님이 없었으니, 우리 두 고을 간의 백전(白戰)85)의 놀이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긴급한 주장(奏章)과 격문(檄文)이 대열을 짓고 줄을 이루어 일진일퇴하고 일승일패하면서 자웅이 가려지고 성패가 나뉘었다. 마치 두 적이 서로 맞서 깃발과 북이 진을 이루고 기문(奇門)86)과 정법(正法)으로 각기 그 능력을 결판 짓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전(戰)'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희언(戱言)이었다.임진년(1592, 선조25)과 정유년(1597) 뒤에 군무와 국정에 어려움이 많아지면서 문명(文明)한 모임이 폐지되고 강론하지 않은 지도 수십 년이다. 지난 만력(萬曆)과 숭정(崇禎) 연간에 나라가 중흥하여 바르게 다스려지고 백가지 폐지된 일이 모두 진작되자 사문(斯文)의 이 거동도 더욱 경장(更張)되었으며 예악의 풍도와 재예(才藝)의 풍성함에 아직도 혹 미치는 자들이 있었다. 아!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고87) 맹단(盟壇)도 옛 그대로인데 희생(犧牲)을 진설하는 글을 폐기하고 강론하지 않은 것이 지금 몇 년이나 되었도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장탄식을 금할 수 없다.지난번 우리 명부(明府)의 이(李) 사문(斯文) 선생이 귀주(貴州)에 공문을 보내 옛 의리로 권면을 하였다. 그런데 귀주의 군자들은 숨을 죽이고 움츠리면서 성벽을 견고히 하고 굳게 지키니, 동주(東周)가 합종(合縱)을 맺어88) 연합을 하자 함곡관(函谷關)의 진(秦)나라 군대가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랬으니 폐읍에서는 마땅히 부녀자가 쓰는 두건과 머리 장식물을 만들어 사마중달(司馬仲達)89) 같은 겁쟁이의 나약함을 깊이 꾸짖었던 것이다.그러나 어진 장수는 용서하는 일이 많아서 궁지에 처한 사람을 곤란하게 하지 않고, 병가(兵家)는 정도(正道)를 귀하게 여겨서 불능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위태로운 자는 붙들어 주니 각기 강역을 지키면서 예로써 서로 구휼하는 것만 못하였다. 그러므로 양계(兩階)에서 회군을 하여 문무(文舞)를 춘90) 것이 오래 되었는데 지금 또 생각해보니 한 걸상을 벗어나 강남에서 잠이나 자는 것을 어찌 오랫동안 용납하겠는가? 원컨대 여러 군자와 더불어 문예를 겨뤄야 하지 않겠는가?2월 25일 계유(癸酉)는 수신(受脤)91)하기에 좋은 날이다. 폐읍은 바야흐로 시례(詩禮)를 군율로 삼고 예악(禮樂)을 깃발로 삼는다. 고허(孤虛)·왕상(旺相)92)의 천시(天時)는 《주역》을 쓰고 상벌(賞罰)·여탈(予奪)의 권한은 《춘추》를 법으로 삼는다. 대장기는 장원봉(壯元峯) 아래에 세우고 육화진(六花陣)93)은 인덕지(仁德池) 가에 펼친다. 사자(四子)94)의 엄밀함과 칠서(七書)95)의 책략에 예의(禮儀) 삼백과 위의(威儀) 삼천96)을 겸하여 모두 거두어 함께 들어서 좌우로 배열하여 정렬하고, 연후에 중군의 장수로 아름답게 있는97) 자는 반마(班馬)와 장한(莊韓)98)이고 용기를 사서99) 남보다 먼저 오른 자는 이두(李杜)와 구소(歐蘇)100)이다. 산경(山經)과 지지(地誌)101)의 백가(百家)들에 이르러서는 양식을 나르고 군량을 실으며 군수물자를 공급하기를 청하지 않음이 없다. 또한 헌창(軒倉)의 육체(六體)102)·이채(李蔡)의 팔분(八分)103)·종장(鍾張)과 왕조(王趙)104)의 수백 수천 형태의 글자는, 비단을 펴고 흰 배를 펼쳐놓고 팔뚝을 걷어붙여 휘갈겨 쓰며 혹 명령을 받아 격문을 기초하고 혹 나무를 깎아 흰 바탕에 쓰니,105) 붕새가 묵지(墨池)106)에서 날고 용이 붓끝에서 뛰어오른다. 이것이 대략 폐읍의 군대 진용이다.또 순풍(淳風)107)에게 점대를 뽑게 하니 효상(爻象)이 모두 길하고 초공(焦貢)108)에게 거북껍질을 지지게 하니109) 조짐도 좋다. 원컨대 여러 군자는 속히 행장을 꾸려 음주례와 조도제(祖道祭)110)를 행하고 대오(隊伍)를 지어서 오라. 한(韓)·조(趙)에 지원을 청하고 제(齊)·초(楚)에 구제를 구하라. 손빈(孫臏)의 십만 개의 아궁이111)·항적(項籍)의 사흘 치 식량112)·전단(田單)의 죽기를 각오한 마음113)·맹시사(孟施舍)의 두려움 없는 의지114)로 당당하게 깃발을 끌고 정연하게 출병하라. 한 띠 같은 영강(榮江 영산강)의 만경창파를 장강(長江) 같은 천연의 참호로 여겨서 건너기 어렵다고 스스로 제한하지 말라. 천 길이나 되는 금악(錦嶽 금성산)의 구름 속 하늘로 솟은 봉우리를 팔공산(八公山)115) 같은 산색으로 보지를 말고 저상된 기운을 진무하라.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붙잡은 것은 서촉(西蜀)의 형세요116) 세 번 싸워 세 번 패배한 것은 동오(東吳)의 형세이다.117)폐읍(弊邑)을 위한 계책으로는 우리의 군대를 정비하고 우리의 문덕(文德)을 펼쳐서, 귀주(貴州)가 무장을 해제하고 붓을 던지며 우리의 춘풍(春風) 같은 은택에 모여들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만약 부득이 하책을 내야한다면, 맑은 휘파람 한 소리로 돌아가려 생각하는 무리를 앉아서 물러가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옥 같은 모습에 몇 마디 말로 온 진(秦)나라의 군대를 쓸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만약 성도(成都)의 노장(老將)118)이 먼저 항복 깃발을 세운다면 쇠고기와 술로 대접하여 보살피고 위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로잡고 풀어주며 붙잡고 버리는 것은 내 손바닥 안의 일처럼 쉬우니 어찌 넉넉히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아! 앞의 말은 희언일 뿐이고 또한 한결같은 법칙이 있다. 모(某) 등이 평일에 옥녀봉(玉女峯) 아래로 길을 가다가 포충사우(褒忠祠宇)119)를 쳐다보니 문장과 절의가 늠름하여 엊그제 같았다. 망천산(望川山) 앞을 지나다가 존재(存齋)120) 서원(書院)의 뜰에서 재배를 올리니 학문(學文)과 종파(宗派)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듯하였다. 더구나 만취(晩翠) 평원에 유지(遺址)가 여전히 남아있으니 한 줄기 맑은 얼음이 황연히 정신을 접한 듯하고, 천 길 비단 봉우리에 눈과 달이 서로 빛나니 창의(倡義)의 충심이 백대를 격동시킨다. 그러니 우리 문도된 자들은 주선읍양(周旋揖讓)하면서 정학(正學)을 격려하고 책선보인(責善輔仁)121)해야지 문(文)으로써만 벗을 모은다면 옳겠는가?122) 술잔을 잡고 필묵을 희롱하며 오로지 꾸밈만을 일삼아 장단(長短)을 다퉈 겨루며 한묵(翰墨)으로만 각축을 벌인다면 옳겠는가? 그 반드시 변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바라건대 모름지기 여러 군자가 강회(講會)하는 날에, 정숙자(程叔子)가 시험을 고쳐 과제물로 하는 것으로123) 마음을 세우고 호 문정(胡文定)이 소호(蘇湖)에서 가르쳤던 경의(經義)를 규칙으로 삼아서124) 걸음걸이 하나도 법도에 맞게 하고 오르내릴 때 예로써 하되, 고하(高下)를 살펴 평가하거나 교졸(巧拙)을 비교해 재는 데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바라건대 정학일통(正學一統)의 종지(宗旨)를 높이고 삼사(三舍)가 경박하고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면해야 한다. 그런다면 농담을 잘 하면서도 지나치지는 않고125) 늦추고 당기는데 법도가 있으며126), 문장과 덕행 두 가지를 행하는데 어긋나지 않고 전현(前賢)에게 부끄러울 바가 없어서 후세에게 길이 교훈을 드리울 것이다. 원하노니 여러 군자는 부디 또한 힘쓸지어다! 竊惟弊邑。 以彈丸一小縣。 幸得接壤於貴州。 鷄鳴相聞。 犬牙互錯。 瑞嶽神光。 常挹于錦峀。 靈灘休氣。 遠透於樂浦。 山川之美。 人物之庶。 直不相上下。 而名公巨卿。 碩德鴻儒。 前後輩出。 炳耀竹帛者。 亦不相優劣。 則湖中千里地。 列郡碁布者何限。 而稱之名勝。 並數光羅者。 豈偶然哉? 况在昔者昇平數百年。 文物富麗。 聖祖神宗。 時雨之化。 而髦俊傑出之才。 萃於玆二邦。 四時嬉遊。 相與娛樂者。 無非詩禮之敎。 絃誦之懿。 則吾二邑白戰之戲。 於是焉肇矣。 馳章走檄。 列隊成行。 一進一退。 一勝一負。 雌雄判矣。 成敗分焉。 有似乎兩敵相對。 旗鼓成陣。 奇門正法。 各決其能。 故名之曰戰。 盖戲之也。 壬丁之後。 軍國多艱。 文明之會。 廢而不講者凡數十年。 往在萬曆崇禎間。 中興正治。 百廢具振。 斯文此擧。 又得更張。 禮樂之風。 才藝之富。 尙或有因及之者矣。 嗚呼! 息壤在彼。 盟壇依舊。 而載牲之書。 棄而不講者。 今幾年矣。 興言及此。 不勝長息。 頃在我明府李斯文先生。 移書貴州。 勖以古義。 而貴州僉君子屛氣脅息。 堅壁固守。 東周之約從纔合。 而函關之秦兵不出。 則弊邑當製巾幗婦人之服。 深責仲達之㥘弱。 而仁將多恕。 不困人於竆。 兵家貴正。 矜不能而持危。 不若各守封壃。 以禮相恤。 故班師兩階。 舞文舞者有年矣。 今又思之。 一榻之外。 豈可久容江南之盰睡哉? 願與僉君子其肯戰否乎? 二月十五日癸酉。 乃受脤之佳期也。 弊邑方將以詩禮爲師律。 禮樂爲旌。 孤虛旺相之天時。 用大易。 賞罰予奪之權衡。 法春秋。 建大將旗於壯元峯下。 布六花陣于仁德池邊。 四子嚴密。 七書方略。 兼之以禮儀三百威儀三千。 具收幷擧。 左右排行。 然後中軍而作好者。 班馬莊韓。 賈勇而先登者。 李杜歐蘇。 至於山經地誌百家。 莫不輸糧載糗。 請供軍需。 又若軒倉六軆。 李蔡八分。 鍾張王趙千狀百態者。 陳縑布素。 奮臂揮灑。 或承令草檄。 或斫樹白書。 鵬飛墨池。 龍躍毫戈。 此弊邑軍容之大槩也。 又使淳風抽筳。 爻象並吉。 焦貢灼繩2)。 兆體亦賢。 願僉君子。 速裝飮祖。 結什而來。 請援於韓趙。 求救於齊楚。 孫臏十萬之竈·項籍三日之糧·田單有死之心。 孟施無懼之志。 堂堂引旗。 整整行師。 榮江一帶碧萬頃。 勿以長江天塹。 難以飛渡自畫。 錦嶽千丈聳雲霄。 勿視八公山色而撫喪氣。 七縱七擒。 西蜀之勢也。 三戰三北。 東吳之形也。 爲弊邑計者。 整我師旅。 敷我文德。 貴州解甲投筆。 囿我春風者上計也。 若不得已出於下策。 則淸嘯一聲。 坐退思歸之衆可也。 玉貌片言。 却掃全秦之師可也。 亦若使成都老將先竪降幡。 則餉以牛酒。 存撫而慰諭之亦可也。 擒縱操捨。 吾掌中事。 豈不綽綽然有餘裕哉? 嗚呼! 前言戲耳。 抑有一規。 某等平日路出玉女峯下。 瞻仰褒忠祠宇。 則文章節義。 凜若隔晨。 經由望川山前。 再拜存齋院庭。 則學文宗派。 若或可泝。 况乃晩翠平原。 遺址尙存。 而淸冰一條。 怳接精神。 錦峯千仞。 雪月交輝。 則倡義忠肝。 能激百代。 爲吾徒者周旋揖遜。 勉勵正學。 責善輔仁。 文以會友可乎? 操觚弄墨。 專事雕篆。 爭長競短。 馳逐翰墨可乎? 其必有能辨之者矣。 幸須僉君子講會之日。 以程叔子改試爲課立心。 胡文定蘇湖經義爲規。 繩趍尺步。 升降以禮。 無庸關心於考定高下。 較量巧拙。 庶幾崇正學一統之宗。 免浮靡三舍之譏。 則善戲不謔。 弛張有道。 詞文德行。 兩行不悖。 無所愧於前脩。 永垂訓於來世。 竊願僉君子。 尙亦勖哉! 서악(瑞嶽) 서석산(瑞石山) 즉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금수(錦峀) 전라도 나주(羅州)의 금성산(錦城山)을 말한다. 영탄(靈灘) 광주와 나주를 경유해 흐르는 영산강(榮山江)을 말한다. 백전(白戰) 시인(詩人)들이 서로 재능을 겨루는 것을 말한다. 본래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특정한 어휘를 쓰지 못하게 하고 시를 짓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기문(奇門) 기문둔갑(奇門遁甲)으로 길흉을 점치는 술수(術數)의 일종인데, 흔히 병법에 많이 이용되었다.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고 굳게 맹세한 일을 가리킨다. 식양은 전국(戰國) 시대 진(秦)나라의 읍명(邑名)이다. 진나라 무왕(武王)이 장수 감무(甘茂)에게 의양(宜陽)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감무는 왕이 도중에 후회할까 염려하여 식양에서 굳게 맹세하게 하였다. 후에 왕이 정벌에 대해 회의를 느끼자, 감무가 글을 올려 "식양이 저기에 있습니다.[息壤在彼.]"라고 하였고 드디어 의양을 함락시켰다. 《戰國策 秦策》 합종(合縱)을 맺어 원문의 '약종(約從)'으로,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세객인 소진(蘇秦)이 강성한 진(秦)나라를 두려워하는 산동 지역의 제후국을 찾아다니며 6국(六國)의 연합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창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진나라의 장의(張儀)가 여섯 나라가 동맹을 깨고 진나라를 섬기자는 연횡책(連橫策)을 폈다. 장의의 계책대로 여섯 나라가 각각 분리되어 결국 진나라에게 모두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史記 권70 張儀列傳》 부녀자가……사마중달(司馬仲達) 원문의 '건괵(巾幗)'으로, 부녀자들의 두건과 머리 장식인데, 못난 사내를 부인에 빗대는 경멸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마중달은 사마의(司馬懿)의 자(字)이다.촉한(蜀漢)의 제갈량이 위(魏)나라 사마의(司馬懿)와 대적할 때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사마의가 응하지 않으므로 일부러 '부녀자가 쓰는 장식물[巾幗婦人之飾]'을 보내 조롱하였다. 《晉書 宣帝紀》 양계(兩階)에서……춘 양계(兩階)는 주인과 손님의 섬돌인데, 여기서는 모여서 문장을 겨루던 회합 장소를 말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禹가) 회군을 하고 군대를 거두자 순 임금이 문덕을 크게 펴고 방패와 깃을 들고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었는데, 70일 만에 유묘가 귀순해왔다.[班師振旅, 帝乃誕敷文德, 舞干羽于兩階, 七旬有苗格.]" 하였다. 문무(文舞)는 칼이나 창을 들지 않고 문관(文官)의 차림으로 열을 지어 추는 춤이다. 수신(受脤) 제사 고기를 받는 것으로, 출병(出兵)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문예를 겨루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민공(閔公) 2년 조에 "군대를 거느린 자는 종묘에서 명령을 받고 사에서 제육을 받는다.[帥師者, 受命於廟, 受脤於社.]" 하였다. 고허(孤虛)·왕상(旺相) 술법가에서 날과 계절의 길흉을 따지는 방법이다. '고허'는 일진(日辰)에 기운이 완전하지 않음을 이르는바, 예를 들면 갑자일(甲子日)로부터 계유일(癸酉日)까지가 10일간인데, 여기에는 지지(地支) 중 술(戌)과 해(亥)가 빠지므로 술과 해는 고(孤)가 되고, 술과 해의 반대 방향인 진(辰)과 사(巳)는 허(虛)가 되는 따위이다. '왕상'은 기운이 왕성하고 딴 기운이 도와줌이 있음을 이른다. 이를테면 봄에는 나무의 기운이 왕성하여 목왕(木旺)이고 화상(火相)이며, 여름에는 불의 기운이 왕성하여 화왕(火旺)이고 토상(土相)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육화진(六花陣)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법(八陣法)에 기초하여 당(唐)의 이정(李靖)이 만든 진법이다. 사자(四子)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언행록이라 할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지칭한다. 칠서(七書) 중국의 병법(兵法)에 관한 7종의 병서(兵書)이다. 《손자(孫子)》·《오자(吳子)》·《육도(六韜)》·《사마법(司馬法)》·《삼략(三略)》·《울료자(尉繚子)》·《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이다. 예의(禮儀)……삼천 큰 예와 작은 예를 말한 것이다. 《중용장구》 제27장에 "크고 넉넉하도다. 예의가 3백 가지요, 위의가 3천 가지로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는 말이 나온다. 예의(禮儀)는 기본적인 대강령(大綱領)인 경례(經禮)를 말하고, 위의(威儀)는 구체적인 소절목(小節目)인 곡례(曲禮)를 말한다. 《예기》 〈예기(禮器)〉에 "경례가 3백 가지요, 곡례가 3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는 말이 나온다. 중군의……있는 《시경》 〈정풍(鄭風) 청인(淸人)〉에 "청읍 사람이 축 땅에 있으니, 네 마리 갑옷 입힌 말이 유유자적하도다. 왼쪽 사람은 수레를 돌리고 오른쪽 사람은 칼을 뽑거늘, 중군의 장수는 아름답게 있도다.[淸人在軸, 四介陶陶, 左旋右抽, 中軍作好.]"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반마(班馬)와 장한(莊韓) '반마(班馬)'는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병칭이다. '장한(莊韓)'은 장주(莊周)와 한비자(韓非子)의 병칭이다. 용기를 사서 원문의 '고용(賈勇)'으로,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 고고(高固)가 진(晉)나라 군대 속으로 돌진하여 위세를 떨치고 돌아와서 자기 군사의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하여 "용맹을 떨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나에게 남아 있는 용기를 사 가라.[欲勇者, 買余餘勇.]"라고 외쳤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이두(李杜)와 구소(歐蘇) '이두(李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병칭이다. 구소(歐蘇)는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의 병칭이다. 산경(山經)과 지지(地誌) 산경(山經)은 산맥과 지리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지지(地誌)는 방역(方域), 산천(山川), 풍속, 산물(産物)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헌창(軒倉)의 육체(六體) '헌창(軒倉)'은 고대 글자를 만들었다는 창힐(倉頡)을 말한다. '육체(六體)'는 서체를 가리킨다. 이채(李蔡)의 팔분(八分) '이채(李蔡)'는 이사(李斯)와 채옹(蔡邕)이다. 이사는 진나라 때의 재상으로 문자를 통일하기 위해 대전(大篆)에 바탕을 두고 소전(小篆)을 제정했다고 한다. 채옹은 후한 말기의 문신이자 서법가(書法家)로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팔분체(八分體)와 비백체(飛白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팔분(八分)'은 서체(書體)의 하나로, 예서 (隷書)와 전서(篆書)를 절충하여 만든 서체이다. 종장(鍾張)과 왕조(王趙) '종장(鍾張)'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종요(鍾繇)와 동한(東漢)의 장지(張芝)로,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 높았다. '왕조(王趙)'는 서예에 뛰어났던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의 병칭이다. 나무를……쓰니 전국 시대 제(齊)나라 손빈(孫臏)이 위(魏)나라 방연(龐涓)과 싸울 때 손빈이 방연을 마릉(馬陵)의 좁은 길로 유도한 다음 그곳에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서 큰 나무의 껍질을 하얗게 깎아 내고 거기에 쓰기를, "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을 것이다.[龐涓死于此樹之下.]" 하였는데, 과연 방연이 밤에 도착하여 깎아낸 나무에 쓰인 흰 글자를 보다가[龐涓果夜至斫木下, 見白書.]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은 목을 찔러 자결한 일을 말한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묵지(墨池) 진(晉)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붓을 씻었다는 연못이다. 송(宋)나라 증공(曾鞏)의 〈묵지기(墨池記)〉에 의하면, "신성가에는 우묵하게 패여 있는 장방형의 못이 있는데 이곳은 왕희지의 묵지라고 한다.[新城之上, 有池窪然而方以長, 曰王羲之之墨池者.]" 하였다. 순풍(淳風) 당(唐)나라 이순풍(李淳風)으로 박학하였는데, 특히 천문(天文)과 역산(曆算) 및 음양(陰陽)의 학문에 더욱 정통하여 혼천의(渾天儀)와 황도의(黃道儀) 등을 만들었다. 초공(焦貢) 전한(前漢) 소제(昭帝) 때의 역술 이론가로, 초공(焦贛)이라고도 한다. 거북껍질을 지지게 하니 점을 친 것이다. 원문의 '灼繩'은 '灼龜'의 잘못인 듯하다. 조도제(祖道祭) '조(祖)'는 길을 떠날 때에 길신(神)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손빈(孫臏)의……아궁이 손빈이 제(齊)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위(魏)나라의 장수 방연(龐涓)과 싸우게 되자 첫날에는 취사하는 아궁이를 10만 개 만들었다가 이튿날엔 5만 개로 줄이고 또 그 이튿날엔 3만 개로 줄여 도망친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에 방연이 방심하고 추격을 하다 마릉(馬陵)에서 손빈의 복병을 만나자 자결하였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항적(項籍)의……식량 결사의 각오로 싸우겠다는 결의를 비유한 것이다. 항적이 진(秦)나라와 싸우러 가면서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 양식만 지니고서 사졸에게 필사적으로 싸워야 함을 보여준 것[沈船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을 말한다. 《史記 項羽本紀》 전단(田單)의……마음 전단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나라의 명장(名將)이다. 노중련(魯仲連)은 전단이 즉묵(卽墨)에서 승리했던 이유를 들면서 "그 때에는 장군은 죽으려는 마음이 있었고 군사들은 살려는 기운이 없었다.[當此之時, 將軍有死之心, 而士卒無生之氣.]" 하였다. 《戰國策 齊策6》 맹시사(孟施舍)의……의지 맹시사(孟施舍)는 싸움에서 비록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오직 두려움이 없기만을 기필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孟子 公孫丑上》 팔공산(八公山) 전진(前秦) 왕 부견(苻堅)과 동진(東晉)의 장수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이 대전을 펼친 산이다. 부견이 대패하고 팔공산을 바라보니, 두려운 나머지 산의 초목들이 모두 진나라 군대로 보였다고 한다. 《晉書 권114 苻堅載記下》 일곱……형세요 원문의 '칠종칠금(七縱七擒)'으로, 촉나라 후주(後主) 건흥(建興) 3년(225)에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남이(南貳)를 평정하면서 맹획(孟獲)과 싸우면서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생포하여 심복케 한 일을 가리킨다. 《三國志 권35 蜀書 諸葛亮傳》 세……형세이다 전국시대 월나라가 오나라를 패배시킨 일을 말한다. 《국어(國語)》 〈오어(吳語)〉에 "오(吳)나라 군대가 월(越)나라에게 세 번 싸워 세 번 패배하자 마침내 월(越)나라 군대가 오나라에 들어가게 되었고 곧장 오나라의 국도(國都)에 진입하여 왕궁(王宮)을 포위하였다.[三戰三北, 乃至於吳, 越師遂入吳國, 圍王宮.]" 하였다. 성도(成都)의 노장(老將) 후한(後漢)의 엄안(嚴顔)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는 유장(劉璋)의 부하 장수로 파군 태수(巴郡太守)로 있다가 장비(張飛)에게 잡혔는데 "우리 파주에는 머리 잘리는 장군은 있을지언정 항복하는 장군은 있지 않다.……목을 치려면 칠 것이지 어째서 성을 내는가."라고 의연하게 대답을 하자, 장비가 장하게 여겨 풀어 주고 빈객으로 대접했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권36》 포충사우(褒忠祠宇) 포충사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 등 5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 사당이다.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이다.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72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대사간·공조 참의를 지냈다. 책선보인(責善輔仁) 선한 행동을 권하고 어진 품성을 돕는다는 말로 벗 사이의 바른 도리를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선을 권하지 않는다.[父子之間不責善]" 하였고, 《논어》 〈안연(顔淵)〉에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어짊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하였다 문(文)으로써만……옳겠는가? 문장만이 아니라 덕행도 중시해야한다는 말이다. 정숙자(程叔子)가……것으로 송(宋)나라 유학자 정이(程頥)를 가리키는데, 그의 자가 정숙(正叔)이므로 존칭하여 그렇게 부른다. 그가 학제(學制)를 자세히 살핀 뒤에 시험을 월과(月課)로 고치고, 향공(鄕貢)의 진사(進士) 수를 줄이도록 철종(哲宗)에게 건의한 것을 가리킨다. 《小學 善行》 호 문정(胡文定)이……삼아서 호 문정(胡文定)은 호 안정(胡安定)의 잘못인 듯하다. 호 안정은 송(宋)나라 학자 호원(胡瑗, 993~1059)으로 안정은 호이다. 그는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에서 교수로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가르칠 때는 사제의 예를 엄하게 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법에 있어 과조(科條)를 자세하게 구비하고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致事齋)로 나누어 가르쳤다. 경의재에는 소통하고 기국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거처하게 하고, 치사재에는 사람마다 각각 한 가지 일을 전공하게 하고 도 한 가지 일을 겸하여 익히게 하였다. 《宋元學案 권1 安定學案》 농담을……않고[善戲不謔] '謔'은 '虐'의 잘못인 듯하다. 농담을 하면서도 절도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경》 〈기욱(淇奧)〉에 "농담을 잘 하되 지나치지는 않는구나.[善戱謔兮, 不爲虐兮.]" 하였다. 늦추고……있으며 본래 활줄의 이완과 긴장을 조절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일을 조화롭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禮記 雜記下》 灼繩 '灼龜'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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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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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의 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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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룡재전 이견대인' 의 見龍在田利見大人義 내가 일찍이 《주역》을 읽다가 〈건괘(乾卦〉 이효(二爻)의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 봄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는 설에 이르러서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자가 이 세상에 태어남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천하의 큰 운수와 관계되어 청명한 지기(至氣)를 부여받고 천하의 큰 뜻을 경륜하여 우주의 원대한 계략을 움켜쥐며, 하늘의 기둥이 기우려하면 그 몸으로 받들고 창생들이 도탄에 빠지면 그 몸으로 구원할 수 있다. 그 포부가 이와 같다면 군주가 현자(賢者)를 어찌 소중히 여기지 않겠는가? 진실로 국가의 기용(器用)일 것이다.비록 그렇지만 좋은 값을 기다려127) 저절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현자의 일이고, 몸을 굽혀 널리 인재를 구하는 것은 군주의 도리이다. 동기(同氣)가 서로 찾는128) 일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름을 팔고 저절로 이르게 할 수 있겠는가? 윗사람이 진실로 목마르듯 바라는 정성으로 대하고 사제(思齊)129)의 마음을 보인다면, 인재를 구하는 노고는 악발(握髮)130)보다 심하고 예우 또한 설례(設醴)131)보다 융숭할 것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행실을 본받는 것은 어쩌면 풀이 바람에 눕는132) 것처럼 빠를 것이요, 그림자가 형체의 움직임을 따르는 것은 북채와 북이 서로 호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그러니 저 산림의 초가에 사는 무리와 영해의 먼 구석에 사는 무리 중에 누가 밭 갈기를 그만두고 번연히 마음을 고쳐먹지 않겠으며, 모두 낚시질을 그치고 귀의해 오지 않겠는가? 이에 봉궐(鳳闕)로 날아오르고 용문(龍門)으로 치달려, 명군(明君)을 만나서 재주를 펼치고 성주(聖主)를 만나서 능력을 베풀면, 책략이 부합하고 간쟁이 받아들여져서 "직무를 맡아 저토록 전담하는구나."라고 할 것이다.이 때문에 군주는 현자를 소홀히 하는 잘못이 없고 신하는 멀리 떠나려는 뜻이 없게 되니 용이 나타난 날에 구름이 따르고 범이 포효하는 때에 바람이 맹렬한 것이요, 기러기 날개가 순풍을 타고 큰 물고기가 바다에서 마음껏 노니는 듯 하는 것이다.133) 때를 만남이 이와 같으니 어찌 품은 바를 다 펴지 못할까 걱정하리오? 군주의 신임을 얻음이 저와 같으니 혹시라도 배운 바를 펼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 세상을 태평성대134)에 가져다 놓고 만백성을 수역(壽域)135)에 올려놓을 것이다. 문물은 당우(唐虞)136)의 시대이니 훌륭하도다! 아름다운 징조가 모두 이르고, 예악은 상주(商周)137)의 시대이니 찬란하도다! 좋은 상서가 다투어 오리라.강구(康衢)의 연월(烟月)138)을 구가하니 어찌 방패와 창이 햇빛에 번쩍거릴 날139)이 있겠는가? 나라의 형세가 반석처럼 편안할 것이니 이 무궁한 즐거움을 헤아린다면 《주역》에서 이른 바 '이견대인(利見大人)'의 공효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아! 현룡(見龍)의 재주를 가지고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로운 자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솥을 지던 이윤(伊尹)이 성탕(成湯)을 찾아갔으니140) 성탕은 600년 푸른 역사를 수립하였고, 칼을 두드리던 태공(太公)이 주 문왕(周文王)을 받들었으니141) 주 문왕은 800년 희업(姬業)142)을 이었도다. 백리(百里)는 자신을 팔았고143) 영자(寗子)는 소를 먹이다가144) 진(秦)나라에서 제(齊)나라에서 이룬 공업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견대인(利見大人)'의 공효이니 또 어찌 낱낱이 사례를 들겠는가?옛일을 논하는 것이 무익하다면 이것은 접어두자. 해동(海東) 천년에 삼한(三韓)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성명(聖明)한 군주는 자궁(紫宮)에서 팔짱을 높이 끼고 있고145) 현명한 인재들이 청괴(靑槐)146)에 진열해 있었다. 그런데 다스림은 소강(小康)147)에 지나지 않았고 때가 대도(大道)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원대한 계모와 큰 덕을 지닌 선비가 암혈(巖穴)에 능력을 숨기고 종적을 감추는데, 위에서는 불러주는 군주가 없고 아래에서는 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 재능을 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현자를 구하는 정성이 미진하여 그러한 것이고, 제회(際會)148)의 기약이 막연하여 그러한 것이다. 내가 어찌하여 오늘날에 '이견(利見)'이 되지 않고 있음을 의심하는가? 그 사람이 누구인가? 성은 모(某), 이름은 모(某)이다. 그의 거처는 강호(江湖)이다. 나의 남은 뜻은 이와 같다. 삼가 의(義)를 쓴다. 余嘗讀易。 至于乾之二爻。 有曰: "見龍在田。 利見大人"之說。 未嘗不揜卷而嘆。 君子之於斯世也。 豈偶然哉? 關天下之大數。 稟淸明之至氣。 經綸天下之巨志。 挹握宇宙之遠略。 天柱將傾則可以此身而擎之。 蒼生塗炭則可以此身而援之。 其爲抱負之如斯。 則人君之於賢者也。 顧不重歟? 信乎國家之器用也。 雖然待價自顯。 乃賢者之事。 側身旁求。 是人君之道。 不有同氣之相求。 焉得以致其鬻名而自臻乎? 爲人上者。 苟能推如渴之誠。 示思齊之心。 勞已甚於握髮。 禮亦隆於設醴。 下效上行。 豈能風草之斯速。 影隨形行。 甚於桴鼔之相應。 彼山林草屋之徒。 嶺海遐陬之輩。 孰不輟耕而幡然。 皆爲罷釣而歸來? 於是翺翔乎鳳闕。 駿奔乎龍門。 遇明君而展才。 遭聖主而施能。 運籌之合。 諫諍之聽。 可謂任職之如彼其專也。 是以君無慢賢之失。 臣無長往之意。 而雲從於龍見之日。 風烈於虎嘯之秋。 鴻毛順風。 巨魚縱壑。 逢時如此。 何患所懷之不盡? 得君如彼。 無或所學之不布。 措一世於熙皡。 躋萬姓於壽域。 文物唐虞。 猗歟休徵之畢至。 禮樂商周。 煥乎嘉瑞之爭臻。 謳歌康衢之烟月。 詎有干戈之耀日? 國勢如盤石之安。 擬此樂之無竆。 則易所謂利見大人之功效。 不在玆乎? 嗚呼! 以見龍之才而利見於大人者。 往古來今。 有幾人哉? 負鼎之伊尹聘成湯。 而成湯樹六百之蒼籙。 鼔刀之太公載周文。 而周文綿八百之姬業。 百里之自鬻也。 寗子之飯牛也。 於秦於齊。 功業可想。 其爲利見大人之效。 又何能枚擧乎? 談古無益。 請舍是矣。 海東千載。 國有三韓。 聖明高拱於紫宮。 賢材布列於靑槐。 治不過於小康。 時不升於大猷者。 愚未知何故而至於斯乎? 抑無乃宏猷碩德之士。 鞱光晦迹於巖穴。 而上無聘招之君。 下無援引之人。 而未展其才能耶? 然則求賢之誠。 未盡而然也。 際會之期。 邈爾而然也。 愚何有疑於今日之未爲利見乎? 其人爲誰? 某姓某名。 其居則江湖矣。 愚之餘意如是夫。 謹義。 좋은 값을 기다려 자신의 뜻을 알아줄 군주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論語 子罕》 동기(同氣)가 서로 찾는 뜻이 같은 사람끼리 서로 의기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周易 乾卦 文言》 사제(思齊) 《논어》 〈이인(里仁)〉의 "현인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보면 안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악발(握髮) 주공이 천하의 인재를 선발하는데 전념하여 "머리를 한 번 감는 사이 세 번이나 젖은 머리를 움켜쥐고 나갔고, 밥 한 끼를 먹는 사이 세 번이나 입 속의 음식을 뱉어냈다.[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라는 고사를 가리킨다. 《史記 권33 魯周公世家》 설례(設醴) 현사(賢士)를 후한 예로 대우하는 것을 말한다. 전한(前漢)의 초 원왕(楚元王)이 빈객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적에, '술을 좋아하지 않는 목생(穆生)을 위하여 항상 단술을 마련하여[常爲穆生設醴]' 예우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漢書 楚元王傳》 풀이 바람에 눕는 원문의 '풍초(風草)'로, 바람이 불면 풀이 쓸리듯이 윗사람이 인도하면 아랫사람이 따른다는 말이다. 계강자(季康子)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눕는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하였다. 《論語 顔淵》 기러기……것이다 왕포(王褒)의 〈성군이 어진 신하를 얻음에 대하여[聖主得賢臣頌]〉에 "마치 큰 기러기 깃이 순풍을 만난 듯이 순조롭고 신속하며, 마치 큰 물고기를 큰 바다에 풀어놓은 듯이 거침없을 것이다.[翼乎如鴻毛遇順風, 沛乎若巨魚縱大壑.]"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1》 태평성대 원문의 '희호(熙皥)'는 화락(和樂)하고 자득(自得)한 모양을 말하는데, 전하여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노자(老子)》 제20장에 "세속의 중인들이 희희낙락하여,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봄날의 누대에 오른 듯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고 하였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성왕의 백성은 스스로 만족해한다.[王者之民, 皥皥如也.]"라고 하였다. 수역(壽域) 인수지역(仁壽之域)의 준말로, 태평성대를 뜻한다. 《한서(漢書)》 권22 〈예악지(禮樂志)〉에 "구례를 찬술하고 왕제를 밝혀서 온 세상의 백성들을 이끌어 인수의 지역에 오르게 하면, 풍속이 어찌 주나라 성왕과 강왕 때의 태평 시절 같지 않겠으며 수명이 어찌 은나라 고종 때와 같지 않겠습니까.[述舊禮明王制, 驅一世之民, 躋之仁壽之域, 則俗何以不若成康, 壽何以不若高宗.]" 하였다. 당우(唐虞)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시대로, 곧 요순(堯舜) 시대로 태평성대를 말한다. 상주(商周) 상주는 상(殷)나라와 주(周)나라 시대로, 예악이 정비된 때를 말한다. 강구(康衢)의 연월(烟月) 강구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사통팔달의 큰길을 이르고, 연월은 달빛이 연기에 은은하게 비추는 모습으로 태평성대의 평화로운 풍경을 말한다. 방패와……날 전란(戰亂)을 말한다. 솥을……찾아갔으니 불우했던 인물이 성군을 만났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이윤은 이름은 아형이다. 아형이 탕을 만나고자 했으나 길이 없자 유신씨의 잉신이 되어 솥과 도마를 짊어지고 맛난 음식으로 탕에게 유세하여 왕도를 이루었다.[伊尹名阿衡. 阿衡欲奸湯而無由, 乃爲有莘氏媵臣, 負鼎俎以滋味說湯, 致于王道.]"라고 하였다. '이윤(伊尹)'은 상(商)나라를 건국한 탕왕(湯王)의 대신이다. '성탕(成湯)'은 탕왕을 말한다. 칼을……받들었으니 비천한 일을 하다 성군을 만났다는 뜻이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여망이 푸줏간에서 칼을 두드리다 주 문왕을 만나 등용되었네.[呂望之鼓刀兮, 遭周文而得擧.]" 하였다. 희업(姬業) 희성(姬姓)이 왕이 된 주(周)나라의 왕업을 가리킨다. 백리(百里)는 자신을 팔았고 '백리'는 백리해(百里奚)이며, '자육(自鬻)'은 자신의 재능을 파는 것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백리해(百里奚)가 진(秦)나라의 희생을 기르는 자에게 양가죽 다섯 장을 받고 자신을 팔아 그곳에서 소를 먹였다.[百里奚自鬻於秦養牲者五羊之皮, 食牛.]"라고 하였다. 영자(寗子)는 소를 먹이다가 '영자(寗子)'는 영척(甯戚)이며, '반우(飯牛)'는 소를 먹인다는 뜻인데, 춘추 시대 위(衛)나라 영척이 미천했을 때, 제(齊)나라에 들어가 남의 소를 먹이면서 제 환공의 행차를 바라보고는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하자, 환공이 듣고 그를 현자로 여겨 등용했다. 《呂氏春秋 擧難》 자궁(紫宮)에서……있고 자궁(紫宮)은 제왕의 거처로 궁궐을 말한다. '고공(高拱)'은 성군이 팔짱을 낀 채 아무 하는 일이 없이도 천하를 크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청괴(靑槐) 조정(朝廷)을 비유한 것이다. 《주례(周禮)》 〈추관 조사(秋官 朝士)〉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마주 대하는 곳이 삼공의 자리이다.[面三槐, 三公位焉.]"라고 하였다. 소강(小康) 조금 편안한 세상이라는 뜻이다. 《예기》 〈예운(禮運)〉에 의하면, 유가(儒家)에서 이상(理想)으로 삼는 대동사회(大同社會)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세상이다. 제회(際會) 풍운제회(風雲際會)의 준말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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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道民)215)의 옛 집 벽 위에 제하다 題道民舊居壁上 가을 다한 남쪽 교외 처사(處士)의 집작은 정원 남은 대나무에 푸른 노을 둘러 있네서리 견뎌낸 것은 오직 뜰 앞의 잣나무뿐이니여전히 푸른 잎 떨치고서 가을 국화 마주하네 秋盡南郊處士家小園殘竹抹靑霞凌霜獨有庭前栢猶拂蒼髥對晩花 도민(道民) 김만영이 과거에 우거하던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남평현(南平縣)〉에, "도민부곡(道民部曲). 현에서 서남쪽으로 16리 떨어져 있다."라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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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실(龜巖書室)에 부쳐 제하다 寄題龜巖書室 강가의 푸른 산 몹시도 기이하니책상의 서책 읽느라 세상 인정과 멀어졌네향기로운 창에서 《주역(周易)》 읽느라 주묵(朱墨) 모두 갈았으니216)이슬이 처마 소나무 몇 가지나 적셨는가두 번째몇 겹으로 쌓인 구름 산 작은 재(齋)를 감싸고 있으니안개와 노을 아침저녁으로 소나무 섬돌에 잠겨 있네제생(諸生)은 날마다 시서(詩書)의 비결 강론하니진귀한 편지와 서적 책상 가득 쌓여 있네 江上靑山分外奇一床書史世情虧薰窓點易硏朱盡露滴簷松第幾枝其二數疊雲山擁小齋烟霞朝暮鎖松階諸生日講詩書訣寶?珍編滿案排 주역(周易)……갈았으니 비점(批點)과 관주(貫珠)를 치는 데 필요한 주묵(朱墨)을 다 쓸 정도로 《주역》을 열심히 읽었다는 뜻이다. 당나라 고변(高駢)의 〈보허사(步虛詞)〉에, "동구 문은 깊게 잠겼고 푸른 창은 차가운데, 이슬로 주사 갈아 《주역》에 점을 찍네.[洞門深鎖碧窓寒 滴露硏朱點周易]"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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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소식을 듣고 뜻을 말하다 聞北奇言志 평생 손오(孫吳)의 병법247)을 배우지 않은 것이 한스러우니공동산(崆峒山)에서 검을 비껴들고서 크게 한 번 소리쳤으면248)때때로 북쪽의 바람 노기(怒氣) 가득 띠었다는 소식 들려오니남몰래 서릿발 같은 칼날 바라보며 긴 한숨 내쉬네 平生恨不學孫吳倚劒崆峒快一呼時聽北風多怒氣暗看霜刃發長吁 손오(孫吳)의 병법 '손오(孫吳)'는 춘추 시대 제(齊)나라 손무(孫武)와 전국 시대 위(衛)나라 오기(吳起)의 병칭으로, 병법가(兵法家)의 대표적 인물이다. 공동산(崆峒山)에서……소리쳤으면 외적(外敵)을 막아 천하를 평안케 하고 싶다는 뜻이다. 두보(杜甫)가 토번(吐蕃)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공동산(崆峒山)에 주둔하고 있던 가서한(哥舒翰)에게 보낸 〈투증가서개부이십운(投贈哥舒開府二十韻)〉 시에, "몸을 막는 장검 한 자루를, 공동산에서 비껴들고 싶다오.[防身一長劍 將欲倚崆峒]"라 하였다. 《補注杜詩 卷17 投贈哥舒開府二十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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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大學 성인(聖人)의 문하인 증삼(曾參)이 그 종지(宗志)를 얻었으니246)팔조목(八條目)과 삼강령(三綱領)247)에 차례로 통달하였네천하 국가 다스림에는 근본이 있고248)소인과 군자는 도(道)가 같지 않네249)수신(修身)을 통해 신민(新民)의 공효를 볼 수 있고250)신독(愼獨)251)을 통해 비로소 입덕(入德)의 공을 알겠네252)성의관(誠意關)253)의 주인은 누구인가영대(靈臺) 위의 성성옹(惺惺翁)이라네254) 聖門參也得其宗八目三綱次第通天下國家治有本小人君子道無同修身可見新民效愼獨方知入德功誠意關中誰是主靈臺臺上一惺翁 성인(聖人)의……얻었으니 증삼(曾參)은 곧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를 가리킨다. 《대학(大學)》은 증자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팔조목(八條目)과 삼강령(三綱領) 《대학》의 기본인 세 강령과 여덟 조목을 말한다. '삼강령(三綱領)'은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지어지선(止於至善)이고, '팔조목(八條目)'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천하……있고 《대학》의 팔조목을 따르자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하기에 앞서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 등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쳐야 한다. 소인과……않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행실이 판이하게 다름을 말한 것이다. 《대학장구》 전(傳) 3장에, "군자는 그 현명함을 현명하게 여기고 그 친함을 친하게 여기며, 소인은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고 그 이로움을 이로워한다.[君子 賢其賢而親其親 小人 樂其樂而利其利]"라 하였다. 수신(修身)을……있고 '수신(修身)'은 《대학》의 팔강령 가운데 하나로 '몸을 닦는 것'을 말하며, '신민(新民)'은 《대학》의 삼강령 가운데 하나로 '백성을 새롭게 함'을 말한다. 신독(愼獨) 원문은 '신독(愼篤)'인데, 문맥을 살펴 '독(篤)'을 '독(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신독(愼獨)을……알겠네 '신독(愼獨)'은 홀로 있을 때에도 행동을 삼가는 것을 말한다. 《대학장구》 전 6장에,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임이 없는 것이다. 악을 미워하기는 악취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는 미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하니, 이것을 자겸(自慊)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라 하였다. 또 《대학장구》 경(經) 1장 서두에, "정자가 이르기를, '대학은 공 씨가 남긴 책으로 초학자가 덕에 들어가는 문이다.' 하였다.[子程子曰 大學 孔氏之遺書 而初學入德之門也]"라 한 대목이 보인다. 성의관(誠意關) 뜻을 성실히 하는 공부를 관문에 비유한 말이다. 주희(朱熹)는 《대학장구(大學章句)》의 〈성의(誠意)〉 장을 설명하면서 "이 관문을 통과하면 바야흐로 도를 깨달음이 확고해진다.[過此關 方得道理牢固]"라 하였다. 《朱子語類 卷16》 또 "성의는 선악관(善惡關)이니, 뜻을 성실히 하면 선해질 것이고, 뜻을 성실히 하지 못하면 악할 뿐이다. 또 성의는 인귀관(人鬼關)이니, 뜻을 성실히 하면 사람일 것이고, 뜻을 성실히 하지 못하면 귀신일 뿐이다.[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誠意是轉關處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라 하였다. 《朱子語類 卷15》 영대(靈臺) 위의 성성옹(惺惺翁)이라네 '영대(靈臺)'는 신령스러운 대(臺)란 뜻으로 마음을 가리킨다. '성성옹(惺惺翁)' 역시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 깨끗한 마음은 어둡지 않고 항상 깨어 있다 하여 이러한 말로 의인화한 것이다. 《심경부주(心經附註)》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사양좌(謝良佐)가 "경은 항상 성성하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고 한 데 대해, 주희(朱熹)가 "서암의 중은 매일 항상 스스로 '주인옹은 성성한가?'라고 묻고는 '성성하다.'라고 스스로 대답하곤 했다.[瑞巖僧 每日間 常自問主人翁惺惺否 自答曰惺惺]"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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