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문[나위] 又 [羅褘] 유세차 신해년(1671, 현종12) 10월 기묘삭 16일 갑오에 금성(錦城)의 친척 나위(羅褘)는 맑은 술과 여러 제물로 공경히 남포(南圃) 선생의 영전에 제사하나이다.아! 제가 선생의 문하에 오른 지 무릇 몇 년입니까? 홀연히 상봉했을 때 난초의 방에 들어간 것 같았고,23) 며칠을 서로 대하고는 바로 아교와 칠24) 같은 의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1년 2년 집안의 우호도 더욱 돈독해지고 친애의 정과 깊은 교분은 이미 남의 지목을 받은 것도 오래되었지요. 그런데 어찌 알았겠습니까, 오늘 선생이 갑자기 떠나시어 저에게 끝없는 슬픔을 안겨줄 지를?선생의 선부군(先府君) 어르신은 바로 저의 고조부 직계 후손의 사위이셨는데 어릴 때부터 어진 소문이 났고 집안은 깊은 덕을 쌓았습니다. 선비(先妣)는 나씨(羅氏)로 시집을 와서 예를 받드는데 곤도(坤道)25)가 곧고 조용하여서 인척(姻戚)들은 빛이 나고 거동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복(福)을 끝없이 행하니 남은 경사26)로 보답이 있었습니다. 갑자년(甲子年, 1624)27)에 선생이 탄생하니 영준한 자질이 특출하였고 강하(江河)와 같은 큰 국량 있었습니다. 순수하게 화순 단정하였고 안팎으로 법도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성취가 있었습니다. 주공(周公)과 문왕(文王)의 효상(爻象)28)도 이해하고 스스로 해석하였습니다. 공자(孔子) 성인의 과목을 두루 갖춰 터득하여 돈민(敦敏)의 후예로서 마침내 대유(大儒)가 되었고 사림의 종장이 되니 당시에 "호남부자(湖南夫子)"라고 일컬은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겨우 관례(冠禮)를 한 뒤에 명성이 조정에 널리 퍼지고 천거하는 계문(啓聞)이 멀리 임금에게 들어가니 세자의 보필로 발탁되어 이름이 관원들 사이에서 빛났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귀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뜻이 한가히 사는 데 있었기에, 사은숙배를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산림을 굳게 지켰습니다. 부귀를 뜬구름처럼 본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습니까. 이 이후로 광채를 품어 감추고,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29) 사모하여 영평(永平)의 남쪽에 서재를 짓고 뜻있는 선비들과 날마다 성현의 경전을 강구(講究)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영평(永平)의 선비들이 모두 학문과 실천에 독실하였으므로 다른 고을에도 파급되어 경앙(景仰)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훈도와 인재 육성30)에서 거의 추로(鄒魯)31)의 유풍을 볼 수 있었습니다.말세가 되니 야박함이 많아져서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꺼리며,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함이 예나 지금이나 물결에 휩쓸려가듯 똑 같으니, 숙손(叔孫)이 중니(仲尼)를 비난하는32)것과 불행히도 가까웠습니다. 아 아! 심합니다. 성대한 명성 아래에 훼예(毁譽)가 많았으니 형세가 본디 그러한 것일까요?을사년(1665, 현종5)33) 초봄에 금성(錦城) 서호(西湖) 가의 집으로 옮기고 좌우에는 거문고와 책을 두고 꽃과 대나무로 스스로 즐겼습니다.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난정(蘭亭)에서 계사(禊事)를 행하여34) 돈독하고 화목한 의리를 친소간에 밝게 드러내니, 세속이 숭상하는 아름다움이 원근에 미쳐서 향린(鄕隣)의 행운이 매우 많았습니다.내가 정미년(1667, 현종8)에 반남(潘南)에서 호수로 선생을 찾은 것은 바로 가을 7월 상순이었습니다. 곤궁한 처지라서 피우(避寓)를 해야 하는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선생이 이때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영중(英仲)의 서실이 좁고 누추하지만 외딴 곳이라 사람도 적으니 피해 있을 만하고 독서할 만하며, 또 세상 근심을 달랠 수 있다." 하기에 즉시 영중과 함께 가서 보고는 몇 달을 머물렀습니다. 선생의 거처와 거리가 만 2리쯤도 안되니 도보로 왕래하면서 서로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시편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아양곡(峨洋曲)〉에 부치니35) 친밀한 교분과 신뢰하는 정의(情義)는 이전보다 갑절이나 더해졌습니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목이 타고 굶주린 것 같았습니다. 만날 때마나 기뻐하여 마치 폐간(肺肝)을 서로 비춰보는 것 같았습니다. 다소라도 마음에 품은 것은 반드시 말하여 숨김이 없었습니다. 친족의 의리에 분수가 있다는 것도 도리어 잊고 문득 사제(師弟)36)간이 되어 노닐었습니다.내가 이때 얻은 것은 전일과는 크게 달랐으니 요컨대 가슴속으로부터 환히 밝아져서 마음이 난초의 방에 이끌려 마치 꽃향기에 적신 것 같았습니다. 중간에 이별하여 별처럼 서로 흩어졌는데 번잡한 세상일까지 또 따라서 침범하니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벌써 여러 해를 지났습니다. 그런데 잠깐 머리를 돌리는 사이에 조물주가 많이 시기하여 백우(伯牛)처럼 병들고 안자(顔子)처럼 불행할37) 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지위는 그 덕에 차지 못하였고 나이는 50을 넘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빼앗아 감이 이렇게 빠른 것입니까?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누가 그렇게 시켰습니까? 신선의 풍골이라고 하여 하늘이 풍진 세상에 오랫동안 놓아두지 않으려 한 것입니까? 아니면 시운이 쇠하려고 하니 호걸 재사로 하여금 쓰러지려는 국가를 부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도(道)가 심히 곤궁해지니 군자로 하여금 시들어가는 사문(斯文)을 진작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하늘에 닿는 영기(英氣)와 고금을 꿰는 식견을 이내 생애 천지에서 다시 어찌 대할까요?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봄여름 사이 역병이 전화(戰禍)와 같아서 제가 임시 거소에 몸을 기탁한 지 7일 째에 선생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또 며칠 만에 흉음(凶音)이 갑자기 전해지니 꿈입니까, 참입니까? 막 밥을 먹으려다 수저와 젓가락을 던지며 슬피 부르짖고 길이 통곡하면서 한참을 얼굴을 가리고 울었습니다. 옆 사람들도 참담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데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원근에서 선생의 부음을 듣고 와서 저를 위로한 사람 또한 많았으니 평일에 저와 선생의 정의(情義)가 골육(骨肉)과 같아서였겠지요.제가 듣건대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한다던데,38) 우리 선생의 순명성덕(純明盛德)으로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제가 또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가 있다던데,39) 말세의 풍속을 돌아보면 흉한 자와 간사한 자가 늙도록 죽지 않은 자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우리 선생처럼 순명성덕한 사람을 빼앗아 가며 화를 참혹하게 내립니까? 이른 바 하늘이라는 것도 불인(不仁)하고 이치라는 것도 믿기 어렵습니다.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후손이 고아하고 수려한 데서 천륜(天倫)을 볼 수 있습니다. 임종할 때 한 마디 말도 끝내는 백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영중(英仲)과 사형(士亨) 또한 호우(湖右)의 명사로 칭송을 받고 있으니 훗날 집안의 명성이 더욱 커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의탁했던 옛정이 변치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 구구한 저의 바람이니 이를 믿을 따름입니다. 더구나 제 선조(先祖)의 유장(遺狀)을 선생이 기초하다가 완성하지 못했으니 천추에 이 한을 이승과 저승사이에 영원히 맺게 되었습니다. 포복하여 오늘 와서 상여 줄을 잡고 크게 통곡하며 변변찮은 술과 짧은 제문으로 정을 다할 수 없음을 선생께서는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 維歲次辛亥十月己卯朔十六日甲午。 錦城戚人羅褘謹以淸酌庶羞之奠。 敬祭于南圃先生之靈。 嗚呼! 自我登先生門凡幾年乎? 忽然相逢。 如入芝蘭之室。 數日相對。 便有膠漆之義。 一年二年。 世好益篤。 親愛之情。 契托之深。 旣爲人指者久矣。 那知今日。 先生逝之奄忽。 令我抱無涯之戚耶? 伏惟先府君尊丈。 卽我高祖考直派贅郞也。 夙歲仁聞。 家積玄德。 而先妣羅氏于歸奉禮。 坤道貞靜。 姻族有輝。 壼儀是式。 福行無彊。 餘慶有報。 歲在蒼鼠。 降生先生。 英姿特異。 江河偉量。 粹然和正。 內外規度。 髫齡志學。 不敎有成。 周文爻象。 理會自解。 孔聖科目。 紆餘備得。 敦敏之後。 遂成大儒。 爲士林之宗匠則當時稱湖南夫子者有由然矣。 甫及冠後。 聲名洋溢乎朝廷。 薦聞遠入於九重。 擢爲儲輔。 名耀縉紳。 而性不喜貴。 志在投閑。 肅謝還鄕。 固守山林。 其視富貴如浮雲。 豈偶爾哉? 自玆以往。 含光蘊彩。 慕誨人之不倦。 結書舍於永平之南。 與有志之士。 日日講究於聖經賢傳者有年。 厥後永之士皆篤於文行。 故延及他鄕。 莫不景仰。 薰陶樂育。 庶見鄒魯之風矣。 亥世多薄。 人情忌殊。 媢疾彦聖。 今古滔滔。 叔孫譏仲尼不幸近之。 噫噫! 亦甚矣。 盛名下多毁譽。 勢固然歟? 靑蛇春初。 移寓錦西湖上之宅。 左琴右書。 花竹自娛。 悅親戚之情話。 修禊事於蘭亭。 敦睦之義。 昭彰親疏。 俗尙之美。 攸曁遠近。 鄕隣之幸。 已萬萬矣。 余於丁未歲。 自潘而訪先生於湖。 卽秋七月上浣也。 竆困避寓。 無處可往。 先生時謂余曰: "英仲書室。 雖窄陋。 地僻人小。 可以爲避寓。 可以爲讀書。 亦可以消遣世慮。" 卽與英仲往觀而仍留數月。 距先生居不滿二里許。 徒步往來。 相尋者數矣。 唱酬詩篇。 付心峨洋。 交契之深密。 情義之相孚。 尤倍前矣。 一日不見。 如渴如飢。 見輒歡猶肺肝相照。 多小所懷。 必陳無隱。 而還忘族義之有分。 轉作函丈間從容。 余時所得。 與前日大異。 要自胸中豁然以明。 嬰情芝室。 如襲馨香。 中間聚散。 若星相離。 塵宂世故。 又從而侵之。 不獲承誨。 已經年所。 豈料轉頭之間。 造物多倪。 伯牛斯疾。 顔子不幸? 位不滿其德。 年不踰知命。 而天奪之速耶? 嗚呼哀哉! 嗚呼痛哉! 夫孰使然耶? 以神仙中骨。 天不欲久落於風塵者乎? 抑時運欲衰。 不令豪傑之才有扶於家國之將顚耶? 吾道竆甚。 不令君子之流。 有振於斯文之凋喪耶? 竆天之英。 貫古之識。 此生天地。 更於何相對耶? 嗚呼哀哉! 嗚呼痛哉! 春夏癘疫。 有同兵燹。 余自寓所。 寄身佛舍之七日。 聞先生遘疾。 又數日凶音忽傳。 夢耶眞耶? 方對食投匙箸。 悲呼長慟。 掩泣者良久。 傍人之慘顔出涕。 有如親戚之喪。 遠邇之聞先生訃而來慰我者亦多。 則平日吾於先生。 情義若同骨肉者然歟。 吾聞大德必得壽。 以吾先生之純明盛德。 何爲而至斯耶? 吾又聞福善禍淫之理。 顧瞻末俗。 兇者奸者老而不死者多矣。 何奪於吾先生純明盛德者而禍之慘耶? 所謂天者不仁矣。 理者難諶也。 嗚呼哀哉! 嗚呼痛哉! 嗣胤之雅麗明秀。 可見天倫。 臨終一語。 竟爲百年之型範。 而英仲士亨亦見湖右之名稱。 他日家聲。 知有更大。 舊情推托。 不替不衰。 區區所願。 惟恃而已。 况我先祖遺狀。 先生能構草而未及成章。 千秋此恨。 永結幽明。 匍匐今來。 執紼增慟。 薄醪短篇。 情不可盡。 先生其知也耶? 其不知也耶? 嗚呼痛哉! 난초의……같았고 훌륭한 인품에 감화되었다는 말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지초와 난초의 방에 들어간 것 같아서 오래되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니 곧 그에게 동화된 것이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矣.]" 하였다. 아교와 칠 '교칠(膠漆)'은 아교나 옻으로 칠을 하면 떨어지지 않으므로 깊은 우정을 비유한다. 곤도(坤道) 부녀자의 순종하는 덕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땅의 도는 그 순하도다. 하늘을 받들어 때로 행한다.[坤道其順乎, 承天而時行.]" 하였다. 남은 경사[餘慶] 조상의 음덕으로 후손이 번창함을 뜻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적선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 원문의 '창서(蒼鼠)'로, 푸른 쥐의 해이다. 푸른 색은 천간(天干)의 '갑(甲)'에 해당하고, 쥐는 지지(地支)의 '자(子)'에 해당한다. 주공(周公)과 문왕(文王)의 효상(爻象) 《주역》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괘사(卦辭)를 짓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남을……것을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성과 인으로 말하면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성(仁聖)의 도를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若聖與仁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하였다. 인재 육성 원문의 '낙육(樂育)'으로, 본래 영재(英才)를 육성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맹자(孟子)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孟子 盡心上》 추로(鄒魯) '추로(鄒魯)'는 공자가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이었고, 맹자가 전국 시대 추(鄒) 땅 사람이었던 데에서 온 말이고, 여기서는 유학을 가리킨다. 숙손(叔孫)이 중니(仲尼)를 비난하는 숙손은 노(魯)나라 대부 숙손 무숙(叔孫武叔)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숙손무숙이 중니를 헐뜯으니, 자공이 말하였다. '그러지 말라,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는 분이다.' 하였다.[叔孫武叔毁仲尼, 子貢曰, 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하였다. 《論語 子張》 을사년(1665, 현종5) 원문의 '청사(靑蛇)'로, 청색은 천간(天干)의 '을(乙)' 해당하고, 뱀은 지지(地支)의 '사(巳)'에 해당한다. 친척들과의……행하여 도잠(陶潛)처럼 전원의 흥취를 즐기고 왕희지(王羲之)처럼 명사들과 어울리며 살았다는 말이다.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푼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하였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영화 9년 계축년 3월 초에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였으니, 계사를 행하기 위해서이다.[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라고 하였다. 마음을 아양곡(峨洋曲)에 부치니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사이가 된 것을 말한다. 원문의 '아양(峨洋)'으로, 거문고 곡 이름이다. 춘추 시대(春秋時代)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鍾子期)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또 유수 (流水)에 뜻을 두자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 《列子 湯問》 사제(師弟) 원문의 '함장(函丈)'인데, 본디 옛날에 스승의 자리와 제자의 자리에 일장(一丈)의 사이를 둔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曲禮上》 백우(伯牛)처럼……불행할 운명으로 단명하였다는 말이다. '백우(伯牛)'는 공자의 제자 염백우(冉伯牛)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염백우(冉伯牛)가 병을 앓자 공자가 문병할 때 남쪽 창문으로 그의 손을 잡고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보다.' 하였다.[伯牛有疾, 子問之, 自牖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하였다. '안자(顔子)'는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수명이 짧아 죽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하였다.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한다던데 《중용장구》 제17장에 "큰 덕을 소유한 사람은……반드시 합당한 수명을 누린다.[大德,……必得其壽.]" 하였다. 선인에게……있다던데 《서경》 〈탕고(湯誥)〉에 "하늘의 도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 화를 내린다.[天道, 福善禍淫.]"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