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17956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명옥헌(鳴玉軒)에 제하다【헌의 주인은 상사(上舍) 오이정(吳以井)118)이다.】 題鳴玉軒【軒主卽吳上舍以井】 바위 부딪히는 샘의 현(絃) 옥 구르듯 울리니현을 울리며 흘러 앞 기둥을 휘감네이 사이에서 한가로움 속의 정취 어떻게 얻었는가활수(活水)의 근원 맑기 그지없네119)【위는 샘이다.】원운(原韻)을 붙임섬돌 따라 졸졸 흐르는 작은 시내 소리띳집 쓸쓸하고 대나무가 기둥 이루었네푸른 나무 그늘진 뜰엔 이끼 늙었으니네모난 못 위아래 더없이 맑다네두 번째바람 잔잔히 불어오는 네모난 못에 거울 같은 수면 펼쳐지니아침에 산 그림자 고요하게 솟아 있네한결같은 생동의 뜻 어떠한가이슬이 바위 가를 적셔 푸른 이끼 자라네【위는 아침이다.】원운을 붙임골짜기 가득한 구름 노을 늦게야 열리니어지러운 산 집을 마주하여 푸르고도 높네은거하는 이 식사 마치고 한가하여 아무 일 없으니시냇가로 걸어가 푸른 이끼 위에 앉아보네세 번째산창(山窓) 저녁에 열자 좋은 바람 불어오니바위 수척한 곳엔 솔과 대나무요 돌엔 늙은 이끼라네만물 생동하여120) 모두 자득하였으니물은 흐름 급해지자 부서지며 옥을 이루네121)【위는 낮이다.】원운을 붙임산 속 사립문 날 저물어 찾아오는 이 적으니오래된 오솔길 그윽하고 깊어 푸른 이끼 자랐네작은 폭포 졸졸 바위 아래로 떨어지니날리는 물방울 옥구슬처럼 흩어지는 모습 고요히 바라보네【'경(徑)'은 어떤 본에는 '간(磵)'으로 되어 있다.】네 번째구름 흩어진 푸른 숲에 석양빛 비치니날아 돌아가는 산새 저마다 의지할 곳 아네은거하는 이 시내 아래를 따라 홀로 거니니골짜기 가득한 바람과 노을 초의(草衣)를 적시네【위는 저녁이다.】원운을 붙임아득한 들판에 석양빛 맑으니강촌의 시골 가게 모두 어슴푸레하네즐거이 바라보다 어느덧 황혼에 이르니뜨락 나무에 그늘 생겨 이슬이 옷을 적시네다섯 번째안개와 놀 뼈에 스며들고 밤은 맑고도 차니달빛 아래 거니는 시냇가 오솔길 풀 푸르네이 속이 자연히 참된 경계가 되니안배(安排)하는 것이 마음 불러 깨우는데 무슨 소용이랴122)【위는 밤이다.】원운을 붙임찬 시내에 달 비치고 물은 차가우니두견새 우는 소리에 산 더욱 푸르네한가히 옥 거문고 연주하며 말없이 앉았으니이 마음 텅 비고 고요하여 절로 맑게 깨어 있네123)여섯 번째도(道)를 체행하여 마음을 비운 그대를 홀로 흠모하고124)꽃 중의 은자(隱者) 나와 흉금을 같이 하네125)활짝 핀 꽃의 홍진(紅塵)의 거리 향하지 말라복사꽃 오얏꽃 핀 시냇가에 한 줄기 길이 뚜렷하네126)【위는 국화와 대나무를 심은 것이다.】원운을 붙임국화 아우의 향기는 내가 흠모하는 것이요차군(此君)127)의 풍미는 더욱 흉금을 같이 하는 것이네지금 풍상(風霜)의 약속128)을 함께 맺으니세모(歲暮)에 의(義)에 깊이 의탁하기를 서로 기약하네일곱 번째푸른 줄기 반묘(半畝) 연못에 곧게 뻗어 있으니새잎이 새로이 자라나는 모습 날마다 바라보네상쾌한 바람 불어오는 곳에 꽃이 처음 피어나니단 이슬 떨어질 제 기이한 향 토해내네【위는 군자당(君子塘)이다.】원운을 붙임작은 여울 졸졸 흘러 연못으로 가늘게 들어오니연꽃 싹 물 위로 솟아 점점 자라나네밝은 달 뜨고 상쾌한 바람 부는 저녁 언제인가홀로 한가한 뜰에 서서 아득한 향기 맡네여덟 번째푸른 봉우리 맑게 갠 가을 하늘에 높이 솟아 있으니아래에는 찬 시내 있어 밤낮으로 흐르네합쳐지고 응결되던 초년의 진실된 일은말하고자 해도 혀끝으로는 말할 수 없네【위는 포석봉(匏石峯)이다.】원운을 붙임웅장하게 서린 채 우뚝 솟아 울창하고 가득하니129)기세가 상서로운 돌에 아득히 나뉘어 흐르네더욱 사랑스러운 것은 밤 깊고 산비 그칠 제매화 줄기130) 가장 높은 봉우리에 곧게 올라 있는 것이라네아홉 번째가랑비 부슬부슬 맑고도 짙으니작은 시내 급히 흘러 옥이 서로 부딪히네131)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날 갠 뒤 석양 너머에선명한 만 개의 푸른 봉우리 드러나는 것이라네【위는 석양에 내리는 가랑비이다.】원운을 붙임가랑비 하늘 가득 내려 가늘게 자욱하니석양 비치자 자색 빛으로 부서지네잠깐 사이에 일어났다 사라져 일정한 곳 없으니강교(江郊)를 뒤덮었다가 다시 먼 봉우리에 내리네열 번째천 굽이 높고 낮아 옥을 깎은 듯 뾰족하니비 내린 뒤의 구름 막 흩어져 겹겹의 산 아득하네조화옹(造化翁)의 무한한 마음 누가 알겠는가잠깐 사이에 안개와 노을 만 가지 모습으로 새로워지네【위는 용구산(龍龜山)132)의 비 갠 뒤 풍경이다.】원운을 붙임천 점의 산봉우리133) 아득히 흩어져 있으니맑게 갠 하늘에 푸른 산 빼어나게 솟았네구름 노을 아침저녁으로 기이한 모습 다양하니푸른 빛 비 내린 뒤에 새로워짐이 더욱 사랑스럽네열한 번째한 조각 남은 구름 들 너머에 모여 있으니가없는 저녁 하늘에 학이 날아 돌아오네맑은 시내 깨끗하여 밝은 모래 희게 빛나니백 번 누인 맑은 빛 십 리까지 환하네【위는 긴 물가의 아득한 정경이다.】원운을 붙임십 리까지 비치는 밝은 모래 흰 눈처럼 쌓여 있으니맑은 시내 한 줄기 시야에 들어오네누가 푸른 산의 골짜기를 깎아다은거하는 이에게 실어 주어 눈을 환히 트이도록 하였나열두 번째맑고 맑은 찬 못 거울처럼 맑으니금색 물결의 맑은 그림자 푸른 빛 층층이 생겨나네이 속에서 끝없는 뜻 옮겨 얻었으니태을(太乙)134)이 중천에 뜬 깊은 밤이네【위는 물과 달의 기이한 경관이다.】원운을 붙임찬 시내에 일렁이는 달 텅 비고 밝은 모습 즐기니대나무집 영롱하고 찬 그림자 생겨나네상쾌한 기운 피부에 스며들어 맑은 정신에 잠들지 못하니초연한 모습으로 깊은 밤까지 단정히 앉아 있네 觸石泉絃戛玉鳴鳴絃决决繞前楹這間那得閒中趣活水原頭淡淡淸【右泉】附原韻循除㶁㶁小溪鳴茅屋蕭然竹作楹綠樹蔭庭苔蘚老方塘上下十分淸其二風細方塘鏡面開朝來山影靜嵬嵬一般生意知何許露潤巖邊長碧苔【右朝】附原韻滿壑雲霞晩始開亂山當戶碧崔嵬幽人食罷閒無事步到溪邊坐綠苔其三山窓晩闢好風來巖瘦松筠石老苔萬物流形皆自得水因流急碎成瑰【右晝】附原韻山扉日晩少人來古徑幽深長綠苔小瀑淙淙巖下落靜看飛沫散瓊瑰【徑一作磵】其四雲罷靑林暎落暉飛歸山鳥各知依幽人獨步循溪下滿壑風霞沾草衣【右暮】附原韻漠漠平郊淡夕暉江村野店共依依耽看直到黃昏後庭樹生陰露滴衣其五烟霞襲骨夜淸冷步月溪邊徑草靑箇裏自然眞境界安排何用喚心惺【右夜】附原韻寒溪月照水冷冷杜宇一聲山更靑閒弄玉琴無語坐此心虗靜自惺惺其六軆道空心子獨欽花中隱逸我同襟繁華莫向紅塵陌桃李溪邊一路深【右種菊竹】附原韻菊弟馨香我所欽此君風味更同襟如今共作風霜契歲暮相期託義深其七翠幹亭亭半畝塘日看新葉展新長光風來處花初綻甘露零時吐異香【右君子塘】附原韻小澗潺潺細入塘蓮芽透水漸看長何時霽月光風夕獨立閒庭聞遠香其八碧峯高扱霽天秋下有寒川日夜流融結初年眞實事欲談無語舌尖頭【右匏石峯】附原韻雄蟠特峙欝磅磚氣勢遠分瑞石流更愛夜深山雨歇冰幹直上最高頭其九零雨絲絲淡若濃小溪流急玉相舂最憐霽後斜陽外露出分明綠萬峯【右夕陽踈雨】附原韻踈雨漫空細濛濃斜陽輝暎紫光舂須臾起滅無方所來揜江郊更遠峯其十千曲高低尖削玉霽雲初罷遠嶙峋誰知造化心無限頃刻烟霞萬態新【右龍龜霽景】附原韻千點螺鬟散縹緲晴空秀出碧嶙峋雲霞朝暮多奇態更愛靑光雨後新其十一一抹殘雲野外堆暮天無際鶴飛回晴川歷歷明沙白百練澄光十里開【右長洲遠望】附原韻十里明沙白雪堆晴川一帶望中回誰能剗却靑山谷輸與幽人眼豁開其十二湛湛寒淵一鑑明金波淸影碧層生這間輸得無邊意太乙中天夜午更【右水月奇景】附原韻寒溪漾月弄虗明竹屋玲瓏冷影生爽氣襲肌淸不寐翛然端坐到深更 오이정(吳以井) 1619~1655.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명중(明仲), 호는 장계(藏溪)다. 1639년 사마양과(司馬兩科)에 합격하고 1651년 정시(庭試)에 응하였으나, 자급(資級)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장계유고(藏溪遺稿)》가 있다. 이 사이에서……그지없네 '활수(活水)'는 근원이 있어 항상 흐르는 물을 말한다. 이 대목은 주희(朱熹)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조그맣고 모난 연못에 한 거울이 열리어,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묻거니 어이하여 그처럼 맑은가. 근원에서 활수가 솟아 나오기 때문이라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 한 부분을 끌어온 것이다. 만물 생동하여 원문은 '만물유형(萬物流形)'이다. 만물이 각기 자기의 모습을 갖추고 활동한다는 뜻이다.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구름이 행하고 비가 내리자 만물이 각기 자기 모습을 갖추고 활동하기 시작한다.[雲行雨施 品物流形]"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물은……이루네 급한 물살로 인해 튀는 물방울의 모습을 옥에 비유한 것이다. 안배(安排)하는……소용이랴 '안배(安排)'는 인위적인 힘으로 적당하게 배치 또는 배분하는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64 〈중용(中庸) 3 제25장〉에, "성(誠)은 자연히 성취하는 도리지, 사람이 작위(作爲)하고 안배하는 것이 아니다.[誠者 是箇自然成就底道理 不是人去做作安排底物事]"라 한 대목이 보인다. 또 '마음을 불러 깨운다'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심경부주(心經附註)》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사양좌(謝良佐)가 "경은 항상 성성하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고 한 데 대해, 주희(朱熹)가 "서암의 중은 매일 항상 스스로 '주인옹은 성성한가?'라고 묻고는 '성성하다.'라고 스스로 대답하곤 했다.[瑞巖僧 每日間 常自問主人翁惺惺否 自答曰惺惺]"라 한 대목이 보인다. '성성'은 마음이 항상 맑게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맑게 깨어 있네 원문은 '성성(惺惺)'이다. 도(道)를……흠모하고 대나무에 대해 읊은 구절이다. 대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으므로 '도(道)를 체행하여 마음을 비웠다'고 표현하였다. 꽃……하네 국화에 대해 읊은 구절이다. '꽃 중의 은자(隱者)'는 국화를 은자에 비유한 것으로,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내 생각에 국화는 꽃 중의 은자이고,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予謂菊花之隠逸者也 牡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者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활짝……뚜렷하네 '길이 뚜렷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서 길이 깊이 패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은 복사꽃과 오얏꽃 같이 화려한 꽃을 좋아하지만 자신은 국화와 대나무를 즐길 것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차군(此君) 대나무의 별칭이다. 동진(東晉)의 왕휘지(王徽之)가 남의 빈집에 기거하는 동안에도 대나무를 빨리 심으라고 다그치자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어찌 하루라도 차군이 없이 지낼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邪?]"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풍상(風霜)의 약속 국화‧대나무와 함께 바람과 서리에도 지조를 변치말자는 약속을 맺은 것이다. 국화는 늦가을이나 겨울에 피며,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가득하니 원문은 '방전(磅磚)'인데, '방박(磅礡)'의 잘못으로 보인다. '방박'은 기세가 성대한 모습이다. 매화 줄기 원문은 '빙간(氷幹)'이다. 매화는 희고 아름다운 자태로 인해 '빙설(氷雪)'에 흔히 비유된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막고야산에 신인이 사는데, 살결이 빙설과 같다.[藐姑射之山 有神人居焉 肌膚若氷雪]"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작은……부딪히네 급한 물살로 인해 튀는 물방울의 모습을 옥에 비유한 것이다. 용구산(龍龜山)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과 월산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세가 병풍을 두른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 병풍산이라고도 부른다. 산봉우리 원문은 '나환(螺鬟)'이다. 소라 껍질과 쪽진 머리라는 뜻으로, 산들이 둥글둥글 겹쳐 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태을(太乙) '태일(太一)'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북극성 주위에 있는 별 이름인데, 북극성과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흔히 북극성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도민촌(道民村)282) 道民村 문공(文公)283)의 고을 안의 백공(白公)284)의 다스림천년된 아름다운 명성 야로(野老)들이 알고 있네아직도 오래된 회화나무 서너 그루 있으니285)가지 그늘 예전처럼 그림자 어지럽네 文公鄕裏白公治千載休聲野老知猶有古槐三四樹陰依舊影參差 도민촌(道民村) 김만영이 살던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전라도(全羅道)‧남평현(南平縣)〉에, "도민부곡(道民部曲). 현에서 서남쪽으로 16리 떨어져 있다."라 되어 있다. 문공(文公) 남평(南平)을 관향으로 하는 고려 때 문신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관은 남평, 자는 덕병(德柄)이다. 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 황주 판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등을 맡았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좌정언 때 직언한 일로 화를 면하였고, 1171년에는 우승선 어사중승(右承宣御史中丞)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하였다. 이후 용호군대장군(龍虎軍大將軍), 태자소사(太子少師),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 등을 역임하였다. 백공(白公) 남평 현감(南平縣監)을 지낸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이다. 1537년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예조 좌랑을 지냈고, 남평 현감이 되어 학당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이후 대사간, 대사헌, 병조 참판, 공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아직도……있으니 주(周)나라 때 궁정의 바깥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었는데, 삼공이 천자를 조회할 적에 이 회화나무를 바라보고 서 있었으므로, 후대에는 이를 인해 정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周禮 秋官》 과거 도민촌에서 배출된 고관(高官)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4월306)에 배를 띄우다【병소서(幷小序)】 淸和泛舟【幷小序】 4월의 맑고 화창한 초파일작은 배307) 금강 물결에 가볍게 띄우네전생에 신선의 짝이었음을 알겠으니기쁜 마음으로 호산(湖山)에서의 속세 밖 유람을 즐기네두 번째작은 배에 노 하나로 창주(滄洲)308)를 내려가니물결 위에 둥둥 떠 마음대로 노니네머리 돌려 천지가 늙어감을 탄식하니오늘의 이 삶 하루살이와 같구나세 번째강산이 합쳐지고 응결되어 절로 하늘이 열렸으니만고의 흥망 속에 너는 무성한 모습이네이전 시대의 어떤 사람이 나처럼 한가로웠던가한 척 배 타고 밝은 달 곁을 길게 떠다니네【경술년(1670, 47세) 4월 초파일 낮의 조수가 잔잔하기에 내가 형제 몇 사람과 함께 작은 배를 띄워 우로포(尤老浦)에서 출발하여 강 위를 떠다니며 가는대로 내맡겨 두었다. 세심정(洗心亭) 아래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장춘정(藏春亭)309)을 거쳐 석관정(石串亭)310)에 이르러 배에서 내려 언덕에 올랐다. 동행한 몇 사람들은 바람이 두려워 모두 강굽이에 몸을 숨겼는데, 나는 홀로 바윗길을 오르내리며 조는 갈매기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맑은 여울을 손으로 튕기기도 하였으며 향기로운 풀 자란 물가를 거닐어 아름다운 화초를 꺾고 돌 모서리에 서서 하늘너머를 바라보기도 하였다. 자득한 마음을 시로 읊어 뜻과 생각이 무한하였으니 실로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요, 참으로 태허(太虛)와 오묘하게 계합하는 점이 있었다. 날 저물자 돌아와 이에 멋대로 읊고서 나의 신세를 돌아보니 또한 감개한 마음이 뒤따랐다.】 四月淸和初八日蘭舟輕泛錦江流前身認是神仙侶喜作湖山物外遊其二扁舟一棹下滄洲泛泛中流漫浪遊歎息回頭天地老此生今日等蜉蝣其三江山融結自開天萬古興亡爾菀然前世何人閒似我一舟長泛月明邊【庚戌四月初八日。午潮方平。余與昆季數人。泛小舟發尤老浦。中江容與。任其所之。小泊于洗心亭下。由藏春亭至石串亭。舍舟登岸。同行數子畏風皆伏河曲中。余獨上下巖徑。或戱押眠鷗。或手激淸湍。步芳洲而折瓊草。立石角而望天表。吟哦自得。無限意思。實非傍人所及知。而眞妙契於太虛者存焉。日晩歸來。仍成浪吟。回▦身世。亦有感慨隨之。】 4월 원문은 '청화(淸和)'다. 진(晉)나라 사영운(謝靈運)의 〈유적석진범해(遊赤石進帆海)〉에, "초여름 4월이라 맑고 화창하니, 향기로운 풀들이 끝없이 돋았네.[首夏猶淸和 芳草亦未歇]"라 한 데서 유래하여, 4월의 이칭으로 쓰인다. 작은 배 원문은 '난주(蘭舟)'다. '목란주(木蘭舟)'의 준말로, 결이 곱고 향기 좋은 목련나무로 만든 작은 배를 말한다. 흔히 조각배의 미칭으로 쓰인다. 창주(滄洲) 산수가 아름다운 은사(隱士)의 거처를 뜻하는 말이다. 위(魏)나라 완적(阮籍)의 〈위정충권진왕전(爲鄭冲勸晉王牋)〉에, "창주에 가서 지백에게 인사하고 기산에 올라 허유에게 읍을 한다.[臨滄洲而謝支伯 登箕山以揖許由]"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장춘정(藏春亭)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多侍面) 죽산리(竹山里) 화동마을에 있는 정자다. 석관정(石串亭)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多侍面) 동당리(東堂里) 동백마을에 있는 정자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나 동지72)에 대한 만사【나위소이다】 挽羅同知【緯素】 지극한 효성으로 여경73)을 여니명공이 음덕으로 백 년 만에 나왔도다젊은 시절74) 부모를 거듭 여의고계방과 연방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네75)태상시에서 교외 제사를 흠향하고76)교문에서 도 강론하는 연석을 접하였다오77)성상의 노고 육부에서 나누어 맡았고78)은수는 지하에 계신 부모에게까지 미쳤도다79)이품관으로 영예롭게 금의환향하였고80)여든 넘게 장수하여 천수를 누렸네81)문은 돌아가는 새를 등지고서 열렸고처마는 피어오르는 구름 가에 기대었네낙사82)에는 관개83)가 모여들고평천84)에서 복전85)을 누렸도다북신은 갑적을 무너뜨리고86)남극성은 정전에서 빛을 거두었네87)발자국 소리는 마름 돋은 물가에 남았고지팡이 소리는 향초 자란 밭두둑 너머에서 들려오네석성88)의 보석89)을 감춰두고난옥90)같은 어진 자제들 경사를 잇는도다요행으로 외람되이 어머니의 가속으로서인하여 온전한 지우를 입었었네평생 한 줌의 눈물을저물녘 안개 자욱한 강에 흩뿌리리라 至孝開餘慶明公蔭百年深憂冠闋立通籍桂兼蓮太寺欽郊畤橋門接道筵聖勞分六府恩數逮三泉貳秩榮還錦期髦考順天門開歸鳥背軒倚出雲邊洛社傾冠盖平泉享福田北辰虧甲籍南曜斂丁躔屐齒留蘋渚筇音隔蕙阡石城藏寶舃蘭玉慶諸贒幸辱孃家屬仍蒙眷遇全平生一掬淚灑向暮江烟 나동지(羅同知) 나위소(羅緯素, 1583~1666)이다. 나주(羅州)에서 출생하여 1623년(인조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형조 좌랑을 지낸 후 정묘호란 때에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군량 조달에 힘썼다. 1650년(효종1) 9월부터 1652년 4월까지 경주 목사(慶州牧使)를 지낸 뒤에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와 산수를 즐기며 살다가 80세가 되어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여경(餘慶) 조상의 은택(恩澤)으로 자손이 번창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 원문의 '冠闋立'은 약관(弱冠)의 나이인 스무 살부터 이립(而立)의 나이인 서른 살 무렵까지로, 젊은 시절을 의미한다. 계방(桂坊)과……올렸다네 나위소가 34세 때이던 광해군 8년(1616)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5년 후 삼남(三南) 지역에서 선비를 시취(試取)할 때 장원으로 합격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되어 급제한 것을 말한다. 계방은 대과(大科)에 급제한 사람을 적은 방목이고, 연방(蓮坊)은 소과(小科)인 생원과와 진사과에 입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방목(榜目)이다. 곧 여기에서는 나위소가 소과와 대과에 모두 급제하였음을 의미한다. 태상시(太常寺)……흠향하고 태상시는 봉상시(奉常寺)이다. 이는 나위소가 인조 12년(1634)에 태상시 첨정(太常寺僉正)에 제수된 것을 가리킨다. 교문(橋門)……접하였다오 교문은 성균관을 가리키는 말로, 주위에 물이 흐르고 다리를 통해 네 개의 문으로 들어가므로 이른 말이다. 이는 나위소가 1630년(인조8)에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에 제수되고, 1644년(인조22)에 다시 사예(司藝)에 제수된 것 등을 가리켜 한 말이다. 성상의……맡았고 이는 나위소가 형조 좌랑(刑曹佐郎), 공조 좌랑(工曹佐郎), 예조 정랑(禮曹正郎) 등을 두루 역임한 것을 의미한다. 육부(六府)는 이조(吏曹)ㆍ호조(戶曹)ㆍ예조(禮曹)ㆍ병조(兵曹)ㆍ형조(刑曹)ㆍ공조(工曹)를 가리킨다. 은수(恩數)는……미쳤도다 나위소의 돌아가신 부모까지 추증(追贈)해주었다는 말인 듯하다. 원문의 '三泉'은 무덤 속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진시황의 무덤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삼천까지 뚫고 들어가 구리를 녹여 붓고 그 속에 관을 넣었다.[穿三泉, 下銅而致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품관(二品官)으로……금의환향하였고 나위소가 종2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된 일을 가리킨다. 여든……누렸네 나위소는 85세에 별세하였다. 낙사(洛社) 낙양(洛陽)에서 결성한 원로들의 모임으로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나라 때에 백거이(白居易)가 주도하여 호고(胡杲), 길민(吉旼), 정거(鄭據), 유정(劉貞), 노진(盧眞), 장혼(張渾), 적겸모(狄兼謨), 노정(盧貞) 등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후대에 이를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라 하였다. 둘째는 북송 때에 낙양 유수(洛陽留守) 문언박(文彦博)이 부필(富弼), 석여언(席汝言), 왕상공(王尙恭), 조병(趙丙), 유궤(劉几), 풍행기(馮行己), 초건중(楚建中), 왕신언(王愼言), 왕공신(王拱辰), 장문(張問), 장도(張燾), 사마광(司馬光) 등과 함께 결성한 모임으로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라고 칭하였다. 여기에서는 김만영의 집에 고관이나 사대부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관개(冠蓋) 관원의 관복과 수레를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관원의 행차나 관모(冠帽)와 수레를 갖춘 사대부(士大夫)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평천(平泉) 평천장(平泉莊)으로, 당나라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이다. 하남(河南) 낙양현 남쪽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고 기이한 초목과 돌이 많아 그 경치가 선경(仙境)과도 같았다고 한다. 《舊唐書 卷174 李德裕列傳》 여기에서는 나위소가 7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금호(錦湖) 가에 수운정(峀雲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고 지낸 일을 빗댄 것인 듯하다. 이곳은 평천장과 마찬가지로 경치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복전(福田) 봄에 씨 뿌리고 가꾸면 가을에 수확할 수 있는 것처럼, 공양(供養)하고 보시(布施)하며 선근(善根)을 심으면 그 보답으로 복을 받는다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북신(北辰)은……무너뜨리고 북신은 천지(天地)ㆍ오제(五帝)ㆍ군신(群神)을 호령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가 위치하는 자리이다. 갑적(甲籍)은 명적(命籍)과 같은 말로, 상천이 사람의 생사요수(生死夭壽) 등을 기록해 두었다는 명부를 가리킨다. 곧, 여기에서는 나위소가 수명이 다하여 죽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남극성(南極星)은……거두었네 위와 마찬가지로, 나위소가 죽은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남극성은 장수를 주관하는 별로, 노인성(老人星)이라고도 한다. 석성(石城) 전설 속의 산 이름이다. 《장자(莊子)》 「설검(說劍)」에 "천자의 검은 연계와 석성을 칼날 끝으로 삼고, 제나라와 대산(岱山)을 칼날로 삼고, 진나라와 위나라를 칼등으로 삼고, 주나라와 송나라를 칼자루의 테로 삼고, 한나라와 위나라를 칼자루로 삼는다.[天子之劍, 以燕谿石城爲鋒, 齊岱爲鍔 晉魏爲脊, 周宋爲鐔 韓魏爲夾.]"라고 하였다. 보석(寶舃) 나라나 집안의 동량이 될 만한 재목을 말한다. 《시경》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조래산의 소나무와 신보산의 잣나무를, 자르고 쪼개고 재고 맞추어서, 커다란 재목 만드니 웅장한 궁궐이 완성되네.[徂來之松, 新甫之柏, 是斷是度, 是尋是尺, 松桷有舃, 路寢孔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난옥(蘭玉) 지란옥수(芝蘭玉樹)의 준말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들을 예찬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현(謝玄)이 숙부인 사안(謝安)에게 "비유하자면 지란옥수가 집안 섬돌에 피어나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게 하겠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庭階耳.]"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晉書 卷79 謝安傳》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성암91)에 대한 만사【수인】 挽李惺庵【壽仁】 호남에는 정학이 없었는데천년 만에 존옹92)이 계셨네끊어진 실마리를 누가 이었는가선생이 크게 공이 있었네초년에는 계적93)에 올랐고중년에는 진충94)을 깨달았지역은 선천학95)을 궁구하였고마음은 미발의 중96)을 보존하였네현묘한 도를 탐구함은 격물치지97)로부터 하였고오묘한 이치에 나아감은 절차탁마로부터 하였네나라에 몸을 바칠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요몸을 성실히 함은 공부하는 순서가 있었네윤음98) 내려오면 자주 골짜기로 달려갔고뜻을 돈독히 하여 끝내 곤궁함을 편안히 여겼네사도의 운이 장차 어두워지려나철인이 이제 갑자기 끝나버렸도다그 마음 항상 깨어있더니99)훌쩍 하늘로 떠나버렸네공손하게 연전에 절을 올리니정성스레 몽매함 깨우쳐 주었네산재에서 다시 토론하자 약속하였는데구름은 걷히고 태허에는 바람이 이네홀로 먼지 쌓인 책 속에서길 잃어 소경과 귀머거리처럼 서있누나짤막한 애사를 짓고 나니다시 눈동자에 눈물 맺힘을 깨닫누나 湖南無正學千載有存翁絶緖誰能繼先生大有功初年登桂籍中歲悟眞衷易究先天學心存未發中鉤玄從格致造妙自磨礱許國非無意誠身序有工恩綸頻赴谷篤志竟安竆斯道運將晦哲人今遽終惺惺心上事忽忽化中空怵下年前拜殷勤爲發蒙山齋重討約雲斂太虛風獨向塵編裏迷塗立瞽聾哀詞成短闋更覺涕凝瞳 이성암 이수인(李壽仁, 1601~1661)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 호는 성암(惺菴)이다. 1633년(인조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성균관 직강,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존옹(存翁)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계적(桂籍)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놓는 책을 말한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극선(郤詵)이 현량대책(賢良對策)에서 천하제일로 뽑혔는데, 무제가 소감을 묻자, "계수나무 숲의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은 격이고,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을 손에 쥔 격이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것을 '계수나무를 꺾었다[折桂]'고 표현하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를 계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진충(眞衷) 참된 도리를 가리킨다. '衷'은 하늘이 내려준 도리를 의미한다. 《서경》 「상서(商書) 탕고(湯誥)」에 "상제께서 충을 백성에게 내리셨다.[惟皇上帝, 降衷于下民.]"라고 하였다. 선천학(先天學) 소옹의 역학(易學)을 가리킨다. 그는 《주역》을 설명하면서 복희(伏羲)의 역(易)을 선천(先天), 문왕(文王)의 역(易)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복희선천괘위도(伏羲先天卦位圖)」를 만들었다. 미발(未發)의 중(中)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발하지 않았을 때의 편벽되거나 치우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이 발하기 이전을 중이라고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라고 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지극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대학장구(大學章句)》의 팔조목(八條目)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윤음(綸音)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임금의 말은 명주실과 같고 나오면 밧줄과 같다.[王言如絲, 其出如綸.]"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임금의 윤음, 조칙(詔勅), 조서(詔書) 등을 가리킨다. 그 마음 항상 깨어있더니 원문의 '惺惺'은 원래는 선불교에서 참선을 통해 마음이 최고조로 각성되어 있는 상태를 이른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하여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또렷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본 것인데, 송나라 때 사양좌(謝良佐)가 이를 차용하여 경(敬)을 해석하면서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것[常惺惺然.]'이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3 卷之三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녹동서원에 최산당150)을 추배하는 제문 祭鹿洞書院崔山堂追配文 명도의 저명한 망족으로곤육의 경사를 쌓으니151)어진 선비와 큰 학자가대대로 후손152)에 이어졌네금서를 즐기는 명절이요존양153)하는 숙덕으로밝고 진실한 선생은집안에서 정학을 전했도다물고기와 시내처럼 새와 구름처럼의탁할 때 친할 사람을 잃지 않았고154)단비처럼 교화하니위대한 현인의 가문이로다아 대동에서어진 현인의 은택이 끊어졌는데155)신라에서 고려까지도학은 오천156)을 종조로 삼네금오157)가 재전하여점필재158)가 사숙하였고수옹과 훤옹159)은학문을 더욱 닦고 입실했네160)선생의 심법은사문에 오묘하게 나아가서그 도가 넓고 넓어손쓰고자 해도 끝이 없었네윤리를 밝히고 가르침 세움에장님처럼 밤길을 더듬을 때161)선생을 존숭하고 믿음은부모와 천지신명 같았네성과 명162)은 형체가 없으나존양성찰에는 법도가 있었으니경과 성을 규칙으로 삼아사씨처럼 부연하고 정자처럼 본받았네163)선생이 가슴에 새겨황연히 스스로 터득하고산당으로 물러나서이윤에 뜻을 두고 안자를 희구했네164)전은 무명165)에 견주고시는 격양166)을 사랑했으며한가로이 역리를 탐구했고167)내가 그칠 바를 알았네이단의 교를 힘써 배척하고바른 이치를 앞장서 밝혔네체가 확립됨은 형체의 뒤요용은 형체가 시작되기 전에 갖춰졌다고 한168)분명한 한 마디의 말은근본이 하늘에서 나온 것이네안생169)처럼 일찍 세상 떠나격언은 전해지지 않고백순170)처럼 먼저 떠났으나이름은 사람에게 알려져서남은 향기가나약한 자 세우고 완악한 자 깨우치네황폐한 고을이 비루하여성대한 의전을 오래 미뤄왔는데백대의 공론은시대가 멀어져도 변하지 않아선비들171)이 모두 찬사하여묻지 않았어도 도모함이 맞았네영봉172)의 서쪽 산기슭덕수의 남쪽 물가에우뚝한 사당이 있으니명조의 신령스런 사우로다분향할 날을 가려 배향하고같은 사당에서 함께 제사하여덕을 존숭하고 절개 숭상하니길이 전해져 끝이 없으리라두 공께 사사로이 대함이 아니고후세를 모두 권면하려 함이라네 名都著望。 慶積坤六。 吉士弘儒。 世襲蘭玉。 琴書名節。 存養宿德。 顯允先生。 家傳正學。 魚川鳥雲。 因不失親。 時雨而化。 鉅賢之門。 於惟大東。 澤斬仁賢。 降羅迄麗。 學祖烏川。 金鰲再傳。 齋私淑。 睡翁暄翁。 操戈入室。 先生心法。 妙詣師門。 斯道浩浩。 下手無垠。 明倫立敎。 摘埴冥行。 先生尊信。 父母神明。 形命1)無形。 養省有法。 敬惺規則。 謝衍程式。 先生服膺。 怳然自得。 卷懷山堂。 志莘希巷。 傳擬無名。 詩愛擊壤。 寬閑弄丸。 得我攸止。 力排異敎。 倡明正理。 軆立形後。 用具未始。 一言昭晣。 原本出天。 顔生早世。 格言無傳。 伯淳先亡。 名聞播人。 餘芳遺馥。 立懦惺頑。 荒鄕鄙汚。 久稽褥2)儀。 百代公論。 愈遠不淄。 縫掖咸辭。 不咨謀諧。 靈峯西麓。 德水南滸。 有堂巋然。 名祖神宇。 配享涓苾。 合祀同室。 崇德尙節。 永傳無極。 非私二公。 幷勸來億。 녹동서원에 최산당 '녹동서원'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에 있는 서원이다. 1630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존양(存養)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양사(存養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713년에 '녹동(鹿洞)'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산당(山堂)'은 최충성(崔忠成, 1458~1491)의 호이다. 최덕지의 손자이다. 곤육(坤六)의 경사를 쌓으니 군자의 도를 실천하고 선행을 쌓은 것을 말한다. '곤육(坤六)'은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공경히 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롭게 하여 밖을 방정하게 한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원문의 '경적(慶積)'은《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게 마련이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남은 재앙이 돌아오게 마련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후손 원문의 '난옥(蘭玉)'으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를 예찬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여러 자제들에게 어떤 자제가 되고 싶은지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대답하기를 "비유하자면 지란과 옥수가 뜰에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 하였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뜻이다. 《孟子 盡心上》 의탁할……않았고 《논어》 〈학이(學而)〉에 "의탁할 때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종주로 삼을 수 있다.[因不失其親, 亦可宗也.]" 하였다. 은택이 끊어졌는데 원문의 '택참(澤斬)'으로,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군자의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어지고, 소인의 영향도 5대가 지나면 끊어진다.[君子之澤, 五世而斬, 小人之澤, 五世而斬.]"라고 하였는데, 이는 선대(先代)의 일이 후손에게서 끊어졌음을 말한다.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이다. 오천은 연일(延日)의 옛 이름으로, 정몽주의 본관이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60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으며, 유학을 크게 진흥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끝까지 고려 왕조를 받들며 절의를 지키다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다. 금오(金鰲) 길재(吉再, 1353~1419)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는 조선 왕조의 부름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정몽주에게 수학하였고, 그의 학맥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졌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이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수옹과 훤옹 정여창(鄭汝昌, 1450~1504)과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다. 정여창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이다.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학문을……입실했네 원문의 '조과입실(操戈入室)'로, 본래는 《후한서(後漢書)》 〈정현열전(鄭玄列傳)〉에서 유래하여 상대의 논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스승의 학문을 더욱 더 닦았다는 뜻이다. 원문의 '입실(入室)'은 도(道)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감을 뜻한다. 《論語 先進》 장님처럼……때 학문의 나아갈 길을 잘 모름을 비유한 말이다. 한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수신편(修身篇)〉에 "소경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면서 길을 찾아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게 될 뿐이다.[擿埴索途, 冥行而已矣.]" 하였다. 성과 명 원문의 '形命'은 문맥상 맞지 않아, 최충성(崔忠成)의 《산당집(山堂集)》 〈산당선생 배향축문(山堂先生配享祝文)〉을 참고하여 '性命'으로 번역하였다. 경과……본받았네 '경(敬)'은 유가의 가장 중요한 수양법인데 정이(程頥)가 강조한 것이다. '성(惺)'은 항상 깨어 있는 것으로, 《심경부주(心經附註)》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사양좌(謝良佐)가 "경은 항상 성성하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윤에……희구했네 '신(莘)'은 유신(有莘)으로 옛날 명재상 이윤(伊尹)이 이곳에 살았다. 이윤은 농사를 짓다가 탕왕(湯王)의 정중한 초빙을 받고 세상에 나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추방하고 상(商)나라 왕조를 건립하였다. 《孟子 萬章上》 '항(巷)'은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의 안빈낙도했던 누추한 곳이다. 《論語 雍也》 무명(無名) 송(宋)나라 소옹(邵雍)을 말한다. 《주역》의 이치에 정통하고 상수학(象數學)에 능하였다. 낙양(洛陽)에 살 때에는 공중누각(空中樓閣)을 지어 자호를 무명공(無名公)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는 〈무명공전(無名公傳)〉을 지어 명리와 차별을 초월하겠다는 자신의 지향을 전(傳)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性理大全 권13 無名公傳》 격양(擊壤) 송나라 소옹(邵雍)의《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에 나오는 시를 말한다. 우주 만물의 이치를 담아서 노래한 시가 많다. 역리를 탐구했고 원문의 '농환(弄丸)'으로 태극(太極)과 같은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말로, 역리(易理)를 탐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송나라 소옹(邵雍)의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권12 〈자작진찬(自作眞贊)〉에 "구슬을 가지고 노는 여가에, 한가로이 왔다 갔다 하노라.[弄丸餘暇, 閑往閑來.]"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주(自註)에 "환(丸)은 태극이다."라고 하였다. 체가……한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1 〈도체(道體)〉에 "邵子가 말하기를 "용(用)은 천지 이전에 일어나고 체(體)는 천지 이후에 확립되었다.[邵子曰, 用起天地先, 體立天地後.]"라는 내용이 보인다. 안생(顔生)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를 말한다. 공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32세에 요절하였다. 백순(伯淳) 송나라 학자 정호(程顥)의 자이다. 신종(神宗) 때에 왕안석(王安石)과의 불화로 언직(言職)을 버리고 외관말직으로 물러났었는데, 그 뒤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종정승(宗正丞)의 벼슬을 제수하여 불렀으나 부임하기 전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宋史 권427 程顥列傳》 선비들 원문의 '봉액(縫掖)'으로 유자(儒者)들이 입은 옷소매가 넓은 복장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선비를 지칭한 것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저(공자)는 어려서 노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 옷을 입었고, 장성하여 송나라에 살 때에는 장보의 관을 썼습니다.[丘少居魯, 衣縫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영봉 전라도 영암(靈巖)의 월출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形命 문맥상 '性命'의 잘못인 듯하다。 최충성(崔忠成)의 《산당집(山堂集)》 〈산당선생배향축문(山堂先生配享祝文)〉에 '性命'으로 되어있다。 褥 '縟'의 잘못인 듯하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구담의 강가 집의 터를 닦을 때 제문【조카 오재발을 위해 짓다.】 祭龜潭江舍開基文【爲吳侄再發作。】 오산현173) 남쪽이요구담 물가의 북쪽에한 언덕이 둥글고 깨끗한데빼어난 풍경들이 다 모였습니다흐름은 금단으로 통하고산은 광악에서 뻗어 나와가까이는 남덕을 향하고멀리 영월을 당길 듯합니다큰 들판이 넓고 평평하여앞뒤로 담요를 펼친 듯하고용이 사리고 범이 웅크리듯산천이 융결하였습니다마침내 명승이 되어서누대가 있고 연못이 있습니다상상컨대 옛날 선인들이화려한 서까래를 높이 가설하여나는 듯한 용마루와 서까래에붉고 흰 장식 성대했을 것입니다174)난옹이 벽에 시를 짓고태로가 문미에 시를 썼으나정유년의 병란175)에천지가 모두 걸려들었습니다재앙이 화재176)로 이어져서집이 다 재가 되고 말았고황폐해진 지가 백년이라행인들도 탄식하였습니다작은 이 몸이 먼 후손으로선인의 뜻을 받들어서무성한 초목 베어 없애고황폐해진 터 헤쳐서 여니화려한 창은 비록 없으나소박한 집은 세울 수 있습니다붉은 여지177)는 나지 않아도음식과 술로 정성껏 차리고목욕하고 옷을 털며 머리 감고 관을 털고마음을 단정히 하고 감정을 단속했습니다기가 이내 훈호178)하여저의 충심에 복을 내리고저를 돕고 저를 보호함은오직 신이 복을 주는 바이니영원히 재앙을 없애고강녕과 길함을 길이 늘여 주소서집은 구름과 남기에 잠겨있고난간은 바람과 안개를 들입니다마음이 한가롭고 뜻이 즐거워늙어가며 고기 잡고 하늘 낚으니후세에 오래도록 전하여저의 복전179)을 잇게 하소서 烏山縣南。 龜潭磯北。 一邱圓淨。 衆秀咸集。 流通錦湍。 峙自光嶽。 近拱南德。 遠引靈月。 大野寬平。 前後鋪氈。 龍虎蹲。 融結山川。 聿爲名區。 有臺有淵。 想昔先人。 高架華椽。 翼然甍桷。 丹堊奐侖。 蘭翁詠壁。 苔老題楣。 赤鷄兵燹。 天地交罹。 禍延回祿。 棟宇成燼。 荒榛百年。 行路嗟愍。 藐余裔雲。 克承先志。 芟蕪除䔿。 啓荒頹址。 文窓縱乏。 白屋可起。 荔丹非産。 麪醑將誠。 浴振沐彈。 齊心約情。 氣仍薰蒿。 嘏我衷赤。 佑我保我。 惟神所福。 永蠲災眚。 長延康吉。 戶鎖雲嵐。 軒納風烟。 心閑志樂。 老漁釣天。 久傳來世。 承我福田。 오산현(烏山縣) 전라남도 나주(羅州)시 남평(南平)면의 옛 이름이다. 성대했을 것입니다 원문의 '환윤(奐侖)'으로, 흔히 '윤환(輪奐)'으로 쓰인다. 규모가 웅장하고 성대하다는 뜻으로, 건물이 낙성된 것을 축하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晉)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신축하여 준공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아름다워라, 웅장한 집이여! 아름다워라, 성대한 집이여! 제사를 지낼 때에는 여기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를 당했을 때는 여기서 곡읍을 하고, 여기서 국빈과 종친들을 모으게 될 것이다[美哉輪焉, 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축사하였다. 《禮記 檀弓下》 정유년의 병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말한다. 원문의 '적계(赤鷄)'로 정유년(1597, 선조30)이다. 십간(十干) 중의 정(丁)은 오행에서는 화(火)에 해당하고 색채로는 적색에 해당하며, 십이지(十二支) 중의 유(酉)는 닭을 뜻하는 글자이다. 화재 원문의 '회록(回祿)'으로, 화신(火神)의 이름이다. 화재의 의미로 쓰였다. 붉은 여지 '여단(荔丹)'으로 붉은 여지 열매를 말한 것인데, 여기서는 특별한 제물(祭物)을 비유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들소의 희생을 올리고 닭 뼈로 점을 치며 우리 술잔 올리니, 아, 찬란한 붉은 여지와 황금색 파초라오.[犦牲鷄卜羞我觴, 於粲荔丹與蕉黃.]"라는 구절이 있는데 특산물로 제물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훈호(薰蒿) 귀신의 기(氣)를 형용한 것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생물들은 반드시 죽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나니 이를 귀라고 이른다. 뼈와 살은 땅속에서 썩어 흙이 되고 이것이 야토가 되면 그 기는 발하여 위로 올라가서 소명, 훈호, 처창이 된다.[衆生必死, 死必歸土, 此之謂鬼. 骨肉斃于下, 陰爲野土, 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 소명, 그 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훈호, 사람의 정신을 두렵게 하는 것이 처창이다.[鬼神之露光處是昭明, 其氣蒸上處是焄蒿, 使人精神竦動處是悽愴.]" 하였다. 복전(福田) 봄에 씨 뿌리고 가꾸면 가을에 수확할 수 있는 것처럼, 공양(供養)하고 보시(布施)하며 선근(善根)을 심으면 그 보답으로 복을 받는다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성암에 대한 제문을 또 짓다【봉산서원141) 유생 등을 위해 지었다.】 又祭李惺菴文【爲蓬山書院儒生等作。】 명유의 적통이요은현의 가법을 이었도다자품이 이미 뛰어나고대대로 학문하여 가업 전했네일찍 국빈으로 뽑히고142)중년엔 도의 요점 깨우쳤네명산의 고요한 방은좌우로 도서와 문적이로다《역》은 선천143)을 궁구하고마음은 미발144)을 보존하였네조존양성145)에 방도가 있었으니《근사록》의 진결이었네흠흠한 정자의 경과성성한 사씨의 학문146)을참으로 따르고 독실하게 믿어서끝내 지극하기를 기약했도다실질이 채워지니 이름이 퍼지고집안에 있어도 명성이 알려지니윤음이 여러 번 내려와서역마로 부르는 일이 잦았네칠조개처럼 자신하지 않고원헌처럼 벼슬하지 않으며검약함을 지키고 거경하며대의를 볼 것을 기약하였네포거147)를 멍에하기도 전에백순148)처럼 먼저 졸했으나좋은 금은 깎여 정밀해지고순수한 옥은 다듬어져 빛나리남은 글은 주인이 없으니어두운 후학은 누굴 본받을까영평의 동쪽 언덕중봉의 북쪽 기슭에글을 지어 현인을 제사하고나에게 글을 꾸미게 함은소자가 옷을 여미고 모시며149)깊이 장려를 받아서이리라이제 장차 누구를 우러를까덕을 상고할 곳이 없구나삼가 하찮은 제물을 갖춰진실로 정성을 아뢰오니깨어서 어둡지 않으시거든저의 충심에 강림하소서 名儒宗適。 隱賢家法。 姿稟旣異。 世學傳業。 早擢國賓。 中悟道的。 名山靜室。 左圖右籍。 易左圖右籍先天。 心存未發。 操養有方。 近思眞訣。 欽欽程敬。 惺惺謝學。 誠服篤信。 終期其極。 實充名發。 在家聲達。 綸音累降。 馹召頻篤。 柒雕未信。 原生不仕。 守約居敬。 期見大意。 蒲車未駕。 伯淳先亡。 良金鏟精。 粹玉理光。 遺篇無主。 瞽學奚式。 永平東崖。 中峯北麓。 命詞祀賢。 作我矜飾。 小子摳衣。 深荷奬則。 玆將安仰。 無所考德。 謹具菲薄。 誠陳悃愊。 惺一不昧。 降格衷曲。 봉산서원(蓬山書院)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을 제향하는 전라도 나주(羅州) 남평(南平)에 있는 서원으로 1650년(효종1)에 창건되어 1667년(현종8)에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5)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6 全羅道》 국빈으로 뽑히고 과거에 급제한 것을 말한다. 《주역》 〈관괘(觀卦)〉에 "육사는 나라의 광휘를 관찰함이니, 왕에게 빈이 되는 것이 이롭다.[六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선천(先天) 우주의 본체와 만물의 본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송(北宋)의 소옹(邵雍)이 진단(陳摶)의 학문을 터득하여 《주역》을 설명하면서 복희(伏羲)의 역(易)을 선천, 문왕(文王)의 역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복희선천괘위도(伏羲先天卦位圖)〉를 만들었다. 그래서 소옹의 역학을 선천학(先天學)이라 한다. 미발(未發) '중(中)'을 말하는 것으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발하지 않았을 때의 편벽되거나 치우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이 발하기 이전을 중이라고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하였다. 조존양성 성리학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방법인 '조존(操存)'과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잡아 두면 있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는 것으로서,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것이 마음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하였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의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하였다. 흠흠한……학문 《이정수언(二程粹言)》 권상(卷上)에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을 '경(敬)'이라 하고,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감이 없는 것을 '일(一)'이라 한다.[主一之謂敬, 無適之謂一.]"라고 한 정이(程頥)의 말이 나온다. 성성(惺惺)은 마음이 깨어 있게 한다는 뜻으로 본래 불교 용어인데, 송유(宋儒) 사양좌(謝良佐)가 "경은 항상 깨어 있게 하는 방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고 말한 뒤로부터 유가(儒家)에서 경(敬)을 해석하는 하나의 유력한 용어가 되었다.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인용되어 있다. 포거(蒲車) 덜거덕거리지 않게 부들 잎으로 바퀴를 싼 수레로, 현사(賢士)를 초빙할 때에 쓴다. 백순(伯淳) 송나라 학자 정호(程顥)의 자이다. 신종(神宗) 때에 왕안석(王安石)과의 불화로 언직(言職)을 버리고 외관말직으로 물러났었는데, 그 뒤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종정승(宗正丞)의 벼슬을 제수하여 불렀으나 부임하기 전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宋史 권427 程顥列傳》 옷을 여미고 모시며 원문의 '구의(摳衣)'로, 윗사람에게 몸가짐을 공손히 하는 태도이다. 《예기 (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어른이 계신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옷자락을 치켜들고 모퉁이로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 다음, 대답하는 것을 반드시 삼가서 해야 한다.[摳衣趨隅, 必愼唯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사 후 토지신에 대한 제문【을축년180) 정월 16일 을해】 祭移家後土神文【乙丑正月十六日乙亥】 남양(南陽)181)에 초가집을 처음 완성한 것은 공경심을 지키려함이지 음풍농월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회암(晦菴)182)도 토지에 제사할 때 의례를 두었으니, 미리 재계하고 감히 짧은 글을 고합니다. 공경하되 멀리해야 하니 하물며 신을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183)주인 모(某)는 주경야독하는 신세로 청근(淸謹)함은 멀리 연명(淵明)184)을 사모하고, 산수에서 소박한 마음으로 유한(幽閑)함은 가까이 퇴도(退陶)185)를 배웠습니다. 감히 몸을 고상히 하려 함이 아니라, 외람되이 은거하여186) 산수를 즐기면서 차라리 인(仁)과 지(智)를 배워187) 이루지는 못할지언정, 명예와 이익을 구하면서 세상에 아첨하여 작게 이루는 일은 멀리 배척하겠습니다. 당체(棠棣)의 시를 읊으면서 원컨대 오직 부모님이 편안하고188) 곤이(坤二)의 경계를 외우면서 다만 경의직방(敬義直方)을189) 추구하겠습니다.이제 도민(道民)190)의 옛 마을은 세칭 '시중(侍中)'의 옛 땅으로 솔과 대는 순박한 옛날의 풍치를 띠고 있고, 짐승과 새는 산인(山人)의 의로운 집을 기뻐합니다. 이에 왕통(王通)의 허름한 집191)을 지어서 몇 질의 경전과 역사서를 살림살이로 삼고 옥천(玉川)의 부서진 집의 지붕을 이어서 마음으로 춘추삼전(春秋三傳)192)을 기약하고 맛 좋은 술 한 잔 따르기를 기약하면서 감히 토지신께 바치고 재배합니다. 재계하고 정결히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니 황홀하게 처창훈호(悽愴薰蒿)193)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엄숙하고 장엄히 행하니 양양하게 위에 계시는 듯합니다.194)제물이 비록 보잘 것 없으나 정성은 흠향하실 만합니다. 신께서는 달밤에 호미를 멘195) 이 몸을 보호하시고 경서를 품고 의리를 간직했던 처음의 뜻을 편안케 하소서. 무망(誣罔)196)한 일이 이르면 얼음이 풀리고 안개가 사라지듯 하게하고, 불상(不祥)한 일이 오면 구름이 걷히고 자리가 걷히듯 하게 하소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며197) 백년토록 봄바람을 차지하게 하시고, 집안을 마땅하고 즐겁게 하여 만세토록 화락을 길이 누리게 하소서. 南陽之草廬始成。 持敬乃非長嘯。 晦菴之土祀有禮。 宿齋敢告短辭。 敬以遠之。 矧可射也? 主人某。 經鋤身世。 淸謹遠慕淵明。 山水素心。 幽閑近學陶退。 非敢蠱上。 竊濫乾初。 樂峙樂流。 寧學仁智而未就。 求名求利。 遠唾阿世而小成。 詠棠棣之詩。 惟願父母其順。 誦坤二之戒。 但求敬義直方。 今玆道民舊村。 世稱侍中故地。 松篁帶淳古之風味。 禽鳥喜山人之義軒。 肆築王通之弊廬。 生涯數秩經史。 乃葺玉川之破屋。 心期三傳春秋。 期酌醴醑一觴。 敢獻后土再拜。 齊明盛服。 怳怳乎悽愴薰蒿。 寅畏肅莊。 洋洋乎若在其上。 薄奠雖賤。 誠意可歆。 神其祐月夕荷鉏之此身。 安懷經抱義之初志。 無罔3)之至。 冰釋霧消。 不祥之來。 雲捲席撤。 浴乎沂風乎舞。 長占百年春風。 宜爾室樂爾家。 永享萬世和樂。 을축년 김만영의 생존 기간 동안에 을축년에 해당하는 해는 1625년인데, 이 때는 김만영의 나이가 2살 때여서, 연도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남양(南陽)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를 만나기 전에 초옥(草屋)을 짓고 농사지으며 은거했던 곳이다. 《三國志 권35 蜀書 諸葛亮傳》 회암(晦庵) 남송(南宋)의 학자 주희(朱熹)의 호이다. 공경하되……있겠습니까 토지신을 공경한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번지(樊遲)가 지혜에 대해 묻자 공자가 "사람의 도의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한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智矣.]"라고 하였다. 또 《중용장구》 제16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신이 이르는 것을 헤아릴 수 없거니, 더구나 신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라고 하였다 연명(淵明) 동진(東晉)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자이다. 퇴도(退陶) 원문에는 '도퇴(陶退)'로 되어있는데, '퇴도(退陶)'의 잘못인 듯하다. 이황(李滉)의 자이다. 몸을……은거하여 원문의 '고상(蠱上)'은 《주역》 〈고괘(蠱卦)〉의 상구(上九)에 "왕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고상히 한다.[不事王候, 高尙其事.]"라고 한 것을 말한다. '건초(乾初)'는 《주역》 〈건괘(乾卦)〉 초구(初九)에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潛龍勿用]"라고 한 데서 원용한 것으로 은거함을 뜻한다. 산을……배워 공자(孔子)가 일찍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라고 한 데서 원용한 것이다. 《論語 雍也》 당체(棠棣)의……편안하고 '당체(棠棣)'는 '상체(常棣)'와 같은 뜻인데, 《시경》의 〈당체〉는 형제간의 우애를 읊은 시이다. 《중용장구》 제15장에 "《시경》 〈당체〉에 '처자와 잘 화합하면 금슬을 타는 것과 같고, 형제들과 우애하면 화락하고 즐겁나니, 너의 가정을 잘 다스리며 처자를 기쁘게 하라.' 하였는데, 공자가 '그러면 부모님도 편안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詩曰, 妻子好合, 如鼓瑟琴, 兄弟旣翕, 和樂且耽, 宜爾室家, 樂爾妻帑, 子曰, 父母其順矣乎.]" 하였다. 곤이(坤二)의……경의직방(敬義直方)을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육이는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다.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六二, 直方大, 不習无不利.]"라고 나오고, 〈곤괘(坤卦) 문언(文言)〉에는 "군자는 경하여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워 외면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이 도학(道學) 공부의 가장 중요한 요결이 되었다. 도민(道民) 김만영이 우거하던 고을이다. 왕통(王通)의 허름한 집 자신의 집을 낮춰 말한 것이다. 왕통(王通)은 수(隋)나라 말기의 대학자이다. 20세에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바쳤다가 채택되지 않자 초야로 물러나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에 의하면, 당시에 양소(楊素)가 왕통에게 벼슬할 것을 권하자 왕통이 "선인에게서 물려받은 폐려(敝廬)가 있어서 비바람을 가리기에 충분하고, 박전(薄田)이 죽을 끓여 먹기에 충분하고, 책을 읽고 도를 얘기하니 스스로 즐기기에 충분합니다.[有先人之敝廬, 足以庇風雨, 薄田足以具餰粥, 讀書談道, 足以自樂.]" 하면서 벼슬을 사양하였다. 옥천(玉川)의……춘추삼전 허름한 집 두어 칸을 짓고 살겠다는 말이다. 옥천(玉川)은 당(唐)나라 때 시인인 노동(盧仝)의 자호(自號)이다. '춘추삼전'은 《춘추》의 주석서인 《좌씨전(左氏傳)》,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을 가리킨다. 노동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하였다. 한유(韓愈)의 〈기노동(寄盧仝)〉에 "옥천 선생은 낙양성 안에 부서진 집 두어 칸뿐일세.……춘추삼전은 높은 다락 위에 묶어 놓고, 성인이 남긴 경만 안고서 시종 연구한다.[玉川先生洛陽裏, 破屋數間而已矣.……春秋三傳束高閣 獨抱遺經究終始.]" 하였다. 처창훈호(悽愴薰蒿) 귀신의 기(氣)를 형용한 것이다. 《禮記 祭義》 양양하게……합니다 역시 귀신의 기를 형용한 것이다. 《中庸章句》 달밤에 호미를 멘 유유자적 은거하는 삶을 말한다. 도잠(陶潛)의 〈귀전원거(歸田園居)〉에 "남산 아래 콩을 심었더니 잡초가 무성해 콩 싹이 드물구나. 새벽에 일어나 잡초를 매고 달빛 띠고 호미 메고 돌아오네.[種豆南山下, 草盛豆苗稀. 晨興理荒穢, 帶月荷鋤歸.]" 하였다. 무망(誣罔) 원문엔 '無罔'으로 되어있으나, 문맥상 '誣罔'의 잘못인 듯하다. 기수에서……쐬며 도를 즐기며 유유자적함을 말한다. 《論語 先進》 無罔 문맥상 '誣罔'의 잘못인 듯하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13 卷之十三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논 論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춘추론〉에 대한 반론 反春秋論論 내가 생각건대 노천 소씨(老泉蘇氏)1)의 〈춘추론(春秋論)〉에 "위(位)는 공적(公的)인 것이요, 도(道)는 사적(私的)인 것이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을 이길 수 없다." 하였는데, 그 뜻은 '부자(夫子, 공자)가 비록 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지위는 얻지 못하였고 사적인 도는 공적인 것이 아니니, 한 사람의 사적인 것으로 천하의 상벌을 공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여긴 것이다. 마침내는 은연중에 스스로 해석하기를 "부자가 노나라에 천자의 권위를 빌려주고, 부자는 스스로 노나라 역사의 명칭을 빌려서 《춘추》를 지었다." 하였다. 나는 감히 그 설을 반박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다."노소(老蘇)의 설은 잘못이다. 범인(凡人)의 소견으로 성인의 뜻을 역탐(逆探)하면서 에둘러서 교묘하게 왜곡하니 합당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아서 《춘추》의 본뜻을 크게 잃었다. 왜 그런가?천지에 통하고 사사롭지 않은 것을 덕(德)이라 하고, 고금에 달하고 크게 공정한 것[大公]을 도(道)라 한다. 도(道)를 사사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위(位) 또한 공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천지에 통하고 사사롭지 않기 때문에 덕이 천지에 합치하는 것이다. 고금에 달하고 크게 공정하기 때문에 도가 귀신에 합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夫子)는 천지이고 귀신인 것이다.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것은 천지요, 변화하고 신묘하여 알 수 없는 것이 귀신이니, 나의 덕이 능히 그에 배합하다면 일개 작위(爵位) 따위는 얻어도 되고 얻지 못해도 되는 것이다.주공(周公)이 죽고 나니 대도(大道)가 서지 못했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이미 멀어지고 나니 왕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 난신적자들이 천하에 자취를 이으니 삼강(三綱)과 구법(九法)2)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무너지듯 하여, 천지가 천지답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자(夫子)가 천지처럼 우뚝 홀로 섰으니 부자께서 어찌 구구한 작위(爵位)를 혐의하여 도(道)로써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춘추》를 지은 것이다.그러므로 《춘추》의 법은 천지이고 귀신인 것이다. 천지와 귀신이 부자의 붓에 붙어서 상벌을 준 것이다. 부자가 상벌을 준 것은 바로 하늘이 상벌을 준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요, 나를 죄 주는 것도 《춘추》이다."3) 한 것이다. 이것이 부자의 큰 뜻이다. 그런데 만약 '지위는 공적인 것이고 도는 사적인 것이다.'라고 한다면 걸왕(桀王)·주왕(紂王)·유왕(幽王)·여왕(厲王)4)이 공(公)이요 주공(周公)과 부자는 사(私)이니 옳겠는가.'부자가 노나라에 천자의 권위를 빌려주었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그 잘못을 볼 수 있다. 노나라의 체(禘)제사를 공자가 보려 하지 않은 것은5) 그것이 예(禮)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구나 천하를 상벌하는 권한을 노나라에 빌려주고 스스로 빌릴 수 있겠는가? 결단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하가 유도(有道)하면 도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천하가 무도(無道)하면 도는 하늘에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있는 천도 (天道)는 지성(至誠)하여 쉼이 없는 것이다.6) 그러니 나에게 있는 천도로써 하늘에 있는 명을 받들고 천하의 선악에 대해 상벌을 주어서 만세의 윤기(倫紀)를 바로잡도록 하늘이 부자에게 책임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을 알고서도 도리어 작위의 혐의 때문에 상천(上天)의 무거운 책임을 저버린다면 그것이 어찌 부자의 뜻이겠는가? 이 때문에 《춘추》를 지은 것이다.소자(蘇子)는 하찮은 소견으로 천지와 귀신을 역탐하여 추측하려다 헤아릴 수 없게 되자 사사로운 뜻으로 견강부회하고, 그럴듯한 설을 찾다가 되지 않자 노권(魯權)의 설7)을 가탁하여 성인의 뜻을 밝혀보려 했으니 아! 졸렬하고도 천박하도다. 내가 그래서 '범인의 소견으로 성인의 뜻을 역탐하여 《춘추》의 본 뜻을 크게 잃었다.'라고 한 것이다." 愚按老泉蘇氏春秋論曰: "位者公也。 道者私也。 私不勝公。" 其意以爲夫子雖有道未得其位。 私道而不公。 以一人之私。 公天下之賞罰非也。 卒乃隱然自解曰: "夫子借魯以天子之權。 夫子自借以魯史之名而作春秋。" 愚敢反其說而論曰: "老蘇之說非也。 以凡人之見。 逆聖人之意。 迂回巧曲。 不合不公。 大失春秋之本旨也何則? 通天地而不私謂之德。 達古今而大公謂之道。 道而可私。 位亦公乎? 通天地而不私。 故德合天地。 達古今而大公。 故道合鬼神。 然則夫子天地也鬼神也。 至大至廣。 不可名狀者天地也。 變化神妙。 不可知之者鬼神也。 吾之德能配合于彼。 則一箇爵位。 得亦可也。 不得亦可也。 周公旣沒。 大道不立。 文武已遠。 王綱墜地。 亂臣賊子。 接跡天下。 而三綱九法。 海渴山崩。 天地不得爲天地。 而夫子之天地卓爾獨立。 則夫子豈可以區區爵位之嫌而不援之以道乎? 此春秋之所以作也。 故春秋之法。 天地也鬼神也。 天地鬼神。 寓於夫子之筆而賞罰之。 其所以賞罰。 乃天賞罰之也。 故曰: '知我者春秋也。 罪我者春秋也。' 此夫子之大意也。 若曰: '以位爲公而道爲私。' 桀紂幽厲公也。 周公孔子私也。 而可乎? 至於借魯以天子之權者。 尤見其誤矣。 魯之禘。 夫子之不欲觀。 以其非禮也。 則况可以賞罰天下之權。 借魯而自借之歟? 決知其大不然也。 故天下有道則道在於人。 天下無道則道在於天。 在我之天。 至誠無息。 則以在我之天。 奉在天之命。 賞罰天下之善惡。 以正萬世之倫紀。 非天之所以責之夫子者耶? 知是責之在我而反以爵位之嫌。 負上天責任之重。 豈夫子之意耶? 此春秋之所以作也。 蘇子以煦煦小見。 逆測天地鬼神而不可量。 附會以私意。 求其說而不得。 假魯權之說而欲明聖人之意。 吁亦拙矣亦淺矣。 愚故曰: '以凡人之見。 逆聖人之意。 大失春秋之本旨也。'" 노천 소씨(老泉蘇氏) '노천(老泉)'은 소순(蘇洵, 1009~1066)의 호이다. 구법(九法) 《서경》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가리킨다.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이다. 나를……춘추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것도 《춘추》이고, 나를 죄 주는 것도 《춘추》일 것이다.'라고 말했다.[春秋, 天子之事也. 是故孔子曰, 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 하였다. 걸왕(桀王)……여왕(厲王)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나라를 망하게 한 폭군(暴君)의 상징이고, 주(周)나라의 12대 유왕(幽王)과 10대 여왕(厲王)은 나라를 어지럽힌 혼군(昏君)의 상징이다. 노나라의……것은 《논어》 〈팔일(八佾)〉의 "체제사는 강신주를 따른 뒤로부터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다.[禘, 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지성(至誠)하여……것이다 《중용장구》 제26장에 "그러므로 지성은 쉼이 없으니, 쉬지 않으면 영구하고 영구하면 징험이 나타난다.[故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하였다. 노권(魯權)의 설 공자가 '노나라에 천자의 권위를 빌려주었다[借魯以天子之權]'는 설을 말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지담에서 비를 비는 제문【신축년 여름(1661, 현종2) 영평 사군 채충립198)을 위해 짓다.】 祭砥潭祈雨文【辛丑夏。 爲永平使君蔡忠立作。】 물은 감의 덕199)으로양은 정이고 음은 중입니다더구나 이 맑은 연못은용200)의 신령한 궁입니다능히 비를 내리는 은택을 일으켜우리 백성을 살지게 할 수 있는데시국이 어려움을 만나고기근에 거듭 걸렸습니다백성들이 곤액을 당하고시신이 구렁을 메우는데신께서는 내려다보면서왜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까더구나 지금 백성의 목숨이모두 보리농사에 달렸는데가뭄이 두 달이나 되도록초목을 다 태우고 있습니다불쌍한 우리 하늘의 백성들급박한 목숨이 괸 물의 고기라어제는 구름이 일어나기에소생하리라 갈망하였는데어찌하여 가랑비조차아침나절도 다 못 내립니까고을 수령이 직분을 잘못해신께서 벌을 내린 것이라면그 죄는 이 몸이 당해야지백성들이 무슨 죄입니까이에 심히 두렵고 놀라워마음과 몸을 깨끗이 씻고성의를 경건하게 펼쳐서공손히 충심으로 고합니다정결한 희생과 향기로운 술향기로운 제물 함께 올리니신께서는 오르내리시면서저의 붉은 정성을 흠향하소서바람을 몰고 천둥을 채찍질해하늘로 오르고 땅에서 솟구쳐패연히 단비를 내리시어온 세상에 함께 혜택을 주소서철철 연못에 이르게 하여만물을 모두 흠뻑 적시면영원히 보답의 제사 올리리니신께서는 그 복을 누리소서 水維坎德。 陽正陰中。 矧玆澂潭。 乾九靈宮。 能興雨澤。 膏我羣生。 屬時艱虞。 饑饉荐嬰。 生靈困厄。 屍塡溝壑。 維神降監。 詎無矜恤。 况今民命。 都係麥農。 旱暵兩月。 焦盡芃茸。 哀我天民。 命迫涔魚。 昨日油然。 喁望其蘇。 云胡霎。 曾不崇朝。 邑宰不職。 神誅所攄。 罪丁厥躬。 赤子何辜。 玆深恐惕。 洗心滌膚。 虔誠披悃。 恭修忠告。 潔牲香醑。 兼陳芬苾。 維神陟降。 歆我赤愊。 駕風鞭霆。 騰天聳地。 霈霈甘澍。 八區同惠。 淫淫至澤。 萬品俱沐。 永世報祀。 神享厥福。 채충립(蔡忠立) 《승정원일기》 현종 2년(1661) 11월 10일 기사에 채충립이 남평 현감에 제수된 기록이 보인다. 감의 덕[坎德] 《주역》 〈설괘(說卦)〉에 "감괘(坎卦)는 물[水]이니 구독(溝瀆)이 된다.[坎爲水, 爲溝瀆.]" 하였다. 용 건구(乾九)는 용(龍)을 가리킨다. 건괘(乾卦)는 모두 양효(陽爻)로 이루어졌는데, 《주역》에서 양효를 '구(九)'라 칭한다. 건괘의 양효는 용을 상징한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묘지명 墓誌銘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어모장군 남도포만호 양공 묘지명【병서】 禦侮將軍南挑浦萬戶梁公墓誌銘【幷序】 우리 고을의 어모장군 만호(禦侮將軍萬戶) 양공(梁公)이 세상을 떠난 뒤 장사를 며칠 앞두고 공의 적손고(適孫孤)인 유원(有源)씨가 나에게 묘지(墓誌)를 세우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정의(情義)상 교분이 친밀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전말을 기록하여, 길이 보존하는 데에 만분의 일이라도 대비하였다.《동한사쇄(東韓史鎖)》를 살펴보건대, 양씨(梁氏)의 선계는 탐라(耽羅)에서 나왔고 【▣】부(婦)의 종(種)으로 마침내 양씨 계보의 비조가 되었다. 역사가가 이미 전기(傳紀)에 쓴 것은 해와 달처럼 밝아 동방 사람들의 이목에 비춰진 것이었으니 또한 어찌 억지로 기록하였겠는가. 후손에 이르러 휘 태시(泰始) 공이 백제에서 벼슬을 하면서 대방(帶方)201)에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는데, 관향으로 용성(龍城)202)을 하사 받았고 그 후 광산(光山)으로 옮겨 살았다. 공의 증조인 직장공(直長公)에 이르러 육봉(六峯) 박우(朴祐)203) 선생과 함께 나의 선대에 사위로 들어와서 그대로 나주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바로 성균생원 김효상(金孝祥)의 사위이다. 고조의 휘는 현민(顯民)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을 지냈다. 증조의 휘는 철형(鐵衡)으로 선무랑(宣務郞) 사옹원 직장(司甕院直長)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징(澄)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에 추증되었다. 부친의 휘는 복수(福壽)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배위는 파주(坡州) 염씨(廉氏) 종사랑(從仕郞) 관(寬)의 따님으로, 명나라 만력(萬曆)기원 계유년(1573, 선조6) 정월 24일에 공을 나주(羅州)의 치소 남쪽 마산면(馬山面) 귀업리(龜業里) 별장에서 낳았으니 실로 우리나라 선묘조(宣廟朝) 6년이다.공의 휘는 시립(時立), 자(字) 【▣】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기백과 풍도가 범상치 않았다. 성동(成童) 때부터 의젓하게 성인(成人)의 의기가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이르러 국운이 중도에 비색(否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으르렁댔고, 6년이 지난 정유년(1597, 선조30)에는 왜적이 양호(兩湖)204)를 유린했다. 공의 일가 부자형제는 모두 적의 흉포한 칼날에 희생되었는데, 오직 공 한 사람이 천지가 화를 당한 가운데서도 생명을 겨우 홀로 보존하였다. 공은 이 때 나이 겨우 20여 세였는데 부모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영 옆에 귀장(歸葬)하고 3년 거상(居喪)하면서 예절을 벗어나지 않았다.【'유(踰)'가 어떤 본에는 '위(違)'로 되어있다.】상을 마친 뒤에는 비분강개하여 무예에 뜻을 두고 문묵(文墨)에는 자잘하게 마음을 두려 하지 않았으니 대개 뜻한 바가 있어서였다. 4년이 지난 계묘년(1603, 선조36)에 국가에서 정시(廷試)를 치러 인재를 취할 때 공이 이 선발에 발탁되어 끼게 되었으니 전라병사(全羅兵使) 신경유(申慶裕)의 방하(榜下)였다.205)광해군 6년 계축년206)에 공은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었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기미년(1619, 광해11)에 남도보 만호(南挑堡萬戶)로 제수되었고 신유년(1621, 광해13)에 체직되었다. 당시는 혼암한 조정이라서 권귀(權貴)들이 권력을 농락하고 여우처럼 아첨하는 자들이 요직을 담당하니 아부하여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공이 홀로 호연히 초탈한 뜻을 갖고 선공(先公)이 경영하던 삼향(三鄕)의 별장으로 물러날 것을 결정하여 서호(西湖)의 물가에 집을 지었다. 세상일은 사절하고 휘파람불고 읊으면서 몸을 마치도록 변치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명나라가 남쪽으로 건너간207)지 4년 만에 위청(僞淸)이 참람하게 황제를 칭하고 개원(改元)208)하였는데, 순치(順治) 6년 무자년209) 6월 29일 삼향(三鄕)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 76세였다. 이 해 모(某) 월일에 화산(華山)의 선영에 귀장(歸葬)하였는데 묘역은 같으나 묘혈은 달리 하였고 모좌(某坐) 모향(某向)의 언덕이다.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과단했으며 의연히 뜻을 세운 바가 있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 하며 소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다. 중도에 불행을 만나서 한 집안의 부자(父子)가 전부 왜적의 손에 함몰되자 분연히 불공대천의 원수로 삼고 마침내 무예(武藝)로 몸을 일으킨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작은 데 있었겠는가? 그러나 호산(湖山)에서 초탈하게210) 마치고 말았으니 아! 애석하도다.우승지 한호(閑好) 임련(林堜)211) 영공이 시를 지어 공을 애도하기를 "소년 시절에 붓을 던지고 봉후(封侯)에 뜻을 두고서,212) 남북의 비린내와 먼지213)를 깨끗이 소탕하려 했다네. 애석하다 초나라 벽옥214)을 알아주는 이 없으니, 차질을 빚어 흰머리 되도록 끝내 이루지 못했구나."라고 하였다. 대개 그의 지조와 절개를 한 시대 사대부들이 추앙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공의 배위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섬(暹)의 따님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열(悅)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학생 홍검(弘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보다 8년 먼저 세상을 떴다. 다음은 흘(忔)·협(協)·수견(秀堅)인데 후사가 없이 요절하였다. 막내아들 흡(恰)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학생 윤(玧)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학생 나치소(羅致素)에게 시집을 갔는데 보은 현감(報恩縣監) 덕준(德峻)의 아들이다. 손자는 5남으로 유원(有源)·차일(次一)·후일(後一)은 장남 열(悅)의 소출이다. 후원(厚源)·달원(達源)·국일(國一)은 막내아들 흡(恰)의 소출이다. 손녀는 셋이다. 장손녀(長孫女) 하나는 사인(士人) 김숙(金俶)에게 시집을 갔고, 하나는 선전관(宣傳官) 최원립(崔元立)에게 시집을 갔고, 하나는 유학(幼學) 김상겸(金尙兼)에게 시집을 갔다. 계손녀(季孫女)는 몇이다.유원(有源)은 전취(前娶)가 당악 김씨(棠岳金氏) 학생 태협(泰浹)의 딸이고, 재취(再娶)는 조양 임씨(兆陽林氏) 첨지(僉知) 시윤(時潤)의 딸이다. 지금 적손(適孫)으로서 거상(居喪) 중인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으며 문장이 남보다 뛰어났다. 차일(次一)은 먼저 요절하였고, 후일(後一)은 아직 미혼이다. 후원(厚源)은 금성 오씨(錦城吳氏) 학생 이망(以望)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달원(達源)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유학(幼學) 상의(尙倚)의 딸에게 장가들었다.측실에 5남 1녀가 있는데 첫째는 수()·둘째는 경(憬)·셋째는 운(惲)·넷째는 칙(恜)·다섯째는 변(忭)이다. 딸은 김덕승(金德昇)에게 시집갔다. 집에서 유원(有源)씨가 손수 기록한 가장(家狀)에 따라 대략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영해215)의 신령한 기운과방장216)의 순정한 정신 지녔으니공은 백대토록그 향기 영원하리라의연히 굳세고 과감하며걸연히 빼어나고 특출했는데칠순을 호수와 산에서맑은 복을 누렸구나신세를 돌아보니육십에도 한관이라사람들이 공을 애석해 했으나공은 도리어 편안히 여겼네화산의 옛 언덕금리의 새 묘도에사라지지 않은 영혼이 계셔서천만년 함께 하리라 吾鄕之禦侮將軍萬戶梁公下世之後。 襄事將有日。 公之適孫孤有源甫。 屬于不佞以相樹誌之使。 不佞以情義分密。 莫能辭。 略誌顚末。 以備不朽之萬一。 竊按東韓史鎖。 梁氏之先。 出于耽羅。【缺】婦之種。 遂爲梁係之鼻祖。 史氏已書于傳紀。 昭然若日月而照于東土人耳目。 又何强記? 逮至後昆。 有諱泰始公仕于百濟。 世居帶方。 賜貫龍城。 其後移居于光山。 至公曾王父直長公。 與六峯朴先生祐。 贅入于吾先代。 仍居于羅州。 乃成均生員金孝祥之女婿也。 高王父諱顯民通訓大夫弘文館典翰。 曾王父諱鐵衡宣務郞司甕院直長。 王父諱澄贈通訓大夫軍資監副正。 考諱福壽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配坡州廉氏從仕郞寬之女。 以皇明萬曆紀元癸酉正月二十四日。 生公于羅州治南馬山面龜業里別墅。 實我國宣廟朝六年也。 公諱時立字【缺】。 公生有美質。 氣度不羣。 自在成童。 儼有成人之意氣。 及至壬辰之歲。 國祚中否。 島夷外狺。 越六年丁酉。 賊兵蹂躙兩湖。 公之一家父子兄弟盡衂兇鋒。 惟公一人僅獨保生於乾坤瘡痏之中。 公時年才二十有餘。 收拾父母軆骸。 歸葬于先塋之側。 居憂三年。 不踰【一作違】禮節。 服闋慨然以弓馬爲意。 不肯屑屑留心於文墨之上。 盖意有所在也。 越四年癸卯。 國家設廷試取人。 公擢參是選。 全羅兵使申慶裕榜下也。 至光海六年癸丑。 除公守門將。 加資禦侮將軍。 己未除南挑堡萬戶。 辛酉遞職。 時當昏朝。 權貴弄柄。 狐媚當途。 阿幸市利者盈路。 而公獨浩然脫意。 卜藏于先公所營三鄕別業。 築室于西湖之涯。 謝絶世事。 嘯詠自許終其身而不變。 至皇明南渡四年。 僞淸僭號改元。 順治六年之戊子六月二十九日。 卒于三鄕第。 享年七十六歲。 是年某月日。 歸窆于華山先塋。 同兆異穴。 某坐某向之原。 公自小少。 聰明果斷。 毅然有立。 疾惡好善。 不拘小節。 中遭不幸。 一家父子全陷于賊手。 憤然以爲不共戴天之讎。 而竟以弓馬發身者。 志豈在小? 而本以湖山實4)宕見終。 嗚呼惜哉! 右承旨林閑好令公堜作詩挽公曰: "少年投筆封侯志。 南北腥塵擬掃淸。 可惜無人知楚璧。 蹉跎白首竟無成。" 盖其志槩。 爲一時士大夫所推許者如此。 公配全義李氏通禮院引儀暹之女。 有丈夫子五女子一。 長曰悅娶南平文氏學生弘儉之女。 先于公八年而卒。 次曰忔曰協曰秀堅。 無後而夭折。 季曰恰娶利川徐氏學生玧之女。 女適學生羅致素。 報恩縣監德峻之子。 孫男五人曰有源曰次一曰後一。 長子悅之出。 曰厚源曰達源曰國一。 季子恰之出。 孫女三。 長孫女一適士人金俶。 一適宣傳官崔元立。 一適幼學金尙兼。 季孫女幾。 有源前娶棠岳金氏學生泰浹之女。 再娶兆陽林氏僉知時潤之女。 今以適孫居憂。 博聞强記。 英藻過人。 次一先夭。 後一未娶。 厚源娶錦城吳氏學生以望之女。 達源娶光山金氏幼學尙倚之女。 側室子五人女子一。 一曰二曰憬三曰惲四曰恜五曰忭。 女適金德昇。 家旣仍有源甫手錄之狀。 略叙而係之銘。 銘曰: 瀛海靈氛。 方丈精純。 惟公百代。 乃永厥芬。 毅然剛果。 傑然英特。 七旬湖山。 能享淸福。 顧閱身世。 六秩寒官。 人爲公惜。 公反爲安。 華山舊隴。 錦里新阡。 不泯者存。 於千萬年。 대방(帶方) 전라도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용성(龍城) 역시 전라도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육봉(六峯) 박우(朴祐) 육봉은 박우(朴祐, 1476~1547)의 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방 (昌邦)이다. 151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승지·강원도 관찰사·개성 유수 등을 지냈다.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를 말한다. 신경유(申慶裕)의 방하(榜下)였다 '신경유(申慶裕)'는 '신경유(申景)'의 잘못인 듯하다. '방하'는 같은 방(榜)에 하위로 급제한 사람을 가리킨다. 《선조수정실록》 1603년 1월 1일 기사에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문과(文科) 이명준(李命俊) 등 10인과 무과(武科) 신경유(申景) 등 1천 6백여 인을 선발하였다."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광해군 6년 계축년 원문에 '光海六年癸丑'으로 되어 있으나 광해군 6년은 계축(癸丑)이 아니고 '갑인(甲寅)'이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명나라가 남쪽으로 건너간 1644년 북경이 청(淸)에 의해 함락되자 명(明) 왕실의 일족이 화중 (華中)·화남(華南)에 남명(南明)을 세운 것을 말한다. 위청(僞淸)이……개원(改元) '위청(僞淸)'은 청(淸)나라를 거짓된 왕조로 폄칭한 것이다. '개원'은 연호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순치(順治) 6년 무자년 '순치(順治)'는 청(淸)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644~1661년이다. 순치 6년은 기축년(1649)이고, 무자년(1648)은 순치 5년이다. 연호와 간지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호산에서 초탈하게 끝마쳤으니 원문의 '本以湖山實宕見終'에서 '本'의 뜻은 미상이다. '實'은 '佚'의 잘못인 듯하다. 한호(閑好) 임련(林堜) 한호(閑好)는 임련(林堜, 1589~1648)의 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동야(東野)이다. 사간·집의·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붓을……두고서 문(文)을 버리고 무(武)에 종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반초전(班超傳)〉에 "반초는 집안이 가난해 항상 관리에게 고용되어 글 써주는 일로 먹고 살아 오랫동안 수고로웠다. 한번은 일을 그만두고 붓을 던지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다른 뜻과 지략이 없으면 오히려 부개자와 장건을 본받아 이역에서 공을 세워 봉후의 자리에 올라야 하거늘, 어찌 오래 붓 잡는 일에 종사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超家貧, 常爲官傭書以供養, 久勞苦. 嘗輟業投筆, 歎曰, 大丈夫無他志略, 猶當效傅介子張騫立功異域, 以取封侯, 安能久事筆硯間乎.]" 하였다. 비린내와 먼지 원문의 '성진(腥塵)'으로, 누린내 나고 더럽다는 말로 오랑캐를 가리킨 것이다. 초나라 벽옥 '초벽(楚璧)'은 양시립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초왕(楚王)에게 바쳤다는 보옥(寶玉)을 가리킨다. 《韓非子 和氏》 영해(瀛海) 큰 바다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이러한 주가 아홉 개가 있고 영해가 그 밖을 에워싸고 있다.[如此者九, 乃有大瀛海環其外.]" 하였다. 방장(方丈) 신선이 산다는 산이다. 《史記 秦始皇本紀》 實 '佚'의 잘못인 듯하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제문[나위] 又 [羅褘] 유세차 신해년(1671, 현종12) 10월 기묘삭 16일 갑오에 금성(錦城)의 친척 나위(羅褘)는 맑은 술과 여러 제물로 공경히 남포(南圃) 선생의 영전에 제사하나이다.아! 제가 선생의 문하에 오른 지 무릇 몇 년입니까? 홀연히 상봉했을 때 난초의 방에 들어간 것 같았고,23) 며칠을 서로 대하고는 바로 아교와 칠24) 같은 의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1년 2년 집안의 우호도 더욱 돈독해지고 친애의 정과 깊은 교분은 이미 남의 지목을 받은 것도 오래되었지요. 그런데 어찌 알았겠습니까, 오늘 선생이 갑자기 떠나시어 저에게 끝없는 슬픔을 안겨줄 지를?선생의 선부군(先府君) 어르신은 바로 저의 고조부 직계 후손의 사위이셨는데 어릴 때부터 어진 소문이 났고 집안은 깊은 덕을 쌓았습니다. 선비(先妣)는 나씨(羅氏)로 시집을 와서 예를 받드는데 곤도(坤道)25)가 곧고 조용하여서 인척(姻戚)들은 빛이 나고 거동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복(福)을 끝없이 행하니 남은 경사26)로 보답이 있었습니다. 갑자년(甲子年, 1624)27)에 선생이 탄생하니 영준한 자질이 특출하였고 강하(江河)와 같은 큰 국량 있었습니다. 순수하게 화순 단정하였고 안팎으로 법도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성취가 있었습니다. 주공(周公)과 문왕(文王)의 효상(爻象)28)도 이해하고 스스로 해석하였습니다. 공자(孔子) 성인의 과목을 두루 갖춰 터득하여 돈민(敦敏)의 후예로서 마침내 대유(大儒)가 되었고 사림의 종장이 되니 당시에 "호남부자(湖南夫子)"라고 일컬은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겨우 관례(冠禮)를 한 뒤에 명성이 조정에 널리 퍼지고 천거하는 계문(啓聞)이 멀리 임금에게 들어가니 세자의 보필로 발탁되어 이름이 관원들 사이에서 빛났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귀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뜻이 한가히 사는 데 있었기에, 사은숙배를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산림을 굳게 지켰습니다. 부귀를 뜬구름처럼 본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습니까. 이 이후로 광채를 품어 감추고,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29) 사모하여 영평(永平)의 남쪽에 서재를 짓고 뜻있는 선비들과 날마다 성현의 경전을 강구(講究)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영평(永平)의 선비들이 모두 학문과 실천에 독실하였으므로 다른 고을에도 파급되어 경앙(景仰)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훈도와 인재 육성30)에서 거의 추로(鄒魯)31)의 유풍을 볼 수 있었습니다.말세가 되니 야박함이 많아져서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꺼리며,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함이 예나 지금이나 물결에 휩쓸려가듯 똑 같으니, 숙손(叔孫)이 중니(仲尼)를 비난하는32)것과 불행히도 가까웠습니다. 아 아! 심합니다. 성대한 명성 아래에 훼예(毁譽)가 많았으니 형세가 본디 그러한 것일까요?을사년(1665, 현종5)33) 초봄에 금성(錦城) 서호(西湖) 가의 집으로 옮기고 좌우에는 거문고와 책을 두고 꽃과 대나무로 스스로 즐겼습니다.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난정(蘭亭)에서 계사(禊事)를 행하여34) 돈독하고 화목한 의리를 친소간에 밝게 드러내니, 세속이 숭상하는 아름다움이 원근에 미쳐서 향린(鄕隣)의 행운이 매우 많았습니다.내가 정미년(1667, 현종8)에 반남(潘南)에서 호수로 선생을 찾은 것은 바로 가을 7월 상순이었습니다. 곤궁한 처지라서 피우(避寓)를 해야 하는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선생이 이때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영중(英仲)의 서실이 좁고 누추하지만 외딴 곳이라 사람도 적으니 피해 있을 만하고 독서할 만하며, 또 세상 근심을 달랠 수 있다." 하기에 즉시 영중과 함께 가서 보고는 몇 달을 머물렀습니다. 선생의 거처와 거리가 만 2리쯤도 안되니 도보로 왕래하면서 서로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시편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아양곡(峨洋曲)〉에 부치니35) 친밀한 교분과 신뢰하는 정의(情義)는 이전보다 갑절이나 더해졌습니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목이 타고 굶주린 것 같았습니다. 만날 때마나 기뻐하여 마치 폐간(肺肝)을 서로 비춰보는 것 같았습니다. 다소라도 마음에 품은 것은 반드시 말하여 숨김이 없었습니다. 친족의 의리에 분수가 있다는 것도 도리어 잊고 문득 사제(師弟)36)간이 되어 노닐었습니다.내가 이때 얻은 것은 전일과는 크게 달랐으니 요컨대 가슴속으로부터 환히 밝아져서 마음이 난초의 방에 이끌려 마치 꽃향기에 적신 것 같았습니다. 중간에 이별하여 별처럼 서로 흩어졌는데 번잡한 세상일까지 또 따라서 침범하니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벌써 여러 해를 지났습니다. 그런데 잠깐 머리를 돌리는 사이에 조물주가 많이 시기하여 백우(伯牛)처럼 병들고 안자(顔子)처럼 불행할37) 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지위는 그 덕에 차지 못하였고 나이는 50을 넘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빼앗아 감이 이렇게 빠른 것입니까?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누가 그렇게 시켰습니까? 신선의 풍골이라고 하여 하늘이 풍진 세상에 오랫동안 놓아두지 않으려 한 것입니까? 아니면 시운이 쇠하려고 하니 호걸 재사로 하여금 쓰러지려는 국가를 부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도(道)가 심히 곤궁해지니 군자로 하여금 시들어가는 사문(斯文)을 진작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하늘에 닿는 영기(英氣)와 고금을 꿰는 식견을 이내 생애 천지에서 다시 어찌 대할까요?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봄여름 사이 역병이 전화(戰禍)와 같아서 제가 임시 거소에 몸을 기탁한 지 7일 째에 선생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또 며칠 만에 흉음(凶音)이 갑자기 전해지니 꿈입니까, 참입니까? 막 밥을 먹으려다 수저와 젓가락을 던지며 슬피 부르짖고 길이 통곡하면서 한참을 얼굴을 가리고 울었습니다. 옆 사람들도 참담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데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원근에서 선생의 부음을 듣고 와서 저를 위로한 사람 또한 많았으니 평일에 저와 선생의 정의(情義)가 골육(骨肉)과 같아서였겠지요.제가 듣건대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한다던데,38) 우리 선생의 순명성덕(純明盛德)으로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제가 또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가 있다던데,39) 말세의 풍속을 돌아보면 흉한 자와 간사한 자가 늙도록 죽지 않은 자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우리 선생처럼 순명성덕한 사람을 빼앗아 가며 화를 참혹하게 내립니까? 이른 바 하늘이라는 것도 불인(不仁)하고 이치라는 것도 믿기 어렵습니다.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후손이 고아하고 수려한 데서 천륜(天倫)을 볼 수 있습니다. 임종할 때 한 마디 말도 끝내는 백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영중(英仲)과 사형(士亨) 또한 호우(湖右)의 명사로 칭송을 받고 있으니 훗날 집안의 명성이 더욱 커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의탁했던 옛정이 변치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 구구한 저의 바람이니 이를 믿을 따름입니다. 더구나 제 선조(先祖)의 유장(遺狀)을 선생이 기초하다가 완성하지 못했으니 천추에 이 한을 이승과 저승사이에 영원히 맺게 되었습니다. 포복하여 오늘 와서 상여 줄을 잡고 크게 통곡하며 변변찮은 술과 짧은 제문으로 정을 다할 수 없음을 선생께서는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 維歲次辛亥十月己卯朔十六日甲午。 錦城戚人羅褘謹以淸酌庶羞之奠。 敬祭于南圃先生之靈。 嗚呼! 自我登先生門凡幾年乎? 忽然相逢。 如入芝蘭之室。 數日相對。 便有膠漆之義。 一年二年。 世好益篤。 親愛之情。 契托之深。 旣爲人指者久矣。 那知今日。 先生逝之奄忽。 令我抱無涯之戚耶? 伏惟先府君尊丈。 卽我高祖考直派贅郞也。 夙歲仁聞。 家積玄德。 而先妣羅氏于歸奉禮。 坤道貞靜。 姻族有輝。 壼儀是式。 福行無彊。 餘慶有報。 歲在蒼鼠。 降生先生。 英姿特異。 江河偉量。 粹然和正。 內外規度。 髫齡志學。 不敎有成。 周文爻象。 理會自解。 孔聖科目。 紆餘備得。 敦敏之後。 遂成大儒。 爲士林之宗匠則當時稱湖南夫子者有由然矣。 甫及冠後。 聲名洋溢乎朝廷。 薦聞遠入於九重。 擢爲儲輔。 名耀縉紳。 而性不喜貴。 志在投閑。 肅謝還鄕。 固守山林。 其視富貴如浮雲。 豈偶爾哉? 自玆以往。 含光蘊彩。 慕誨人之不倦。 結書舍於永平之南。 與有志之士。 日日講究於聖經賢傳者有年。 厥後永之士皆篤於文行。 故延及他鄕。 莫不景仰。 薰陶樂育。 庶見鄒魯之風矣。 亥世多薄。 人情忌殊。 媢疾彦聖。 今古滔滔。 叔孫譏仲尼不幸近之。 噫噫! 亦甚矣。 盛名下多毁譽。 勢固然歟? 靑蛇春初。 移寓錦西湖上之宅。 左琴右書。 花竹自娛。 悅親戚之情話。 修禊事於蘭亭。 敦睦之義。 昭彰親疏。 俗尙之美。 攸曁遠近。 鄕隣之幸。 已萬萬矣。 余於丁未歲。 自潘而訪先生於湖。 卽秋七月上浣也。 竆困避寓。 無處可往。 先生時謂余曰: "英仲書室。 雖窄陋。 地僻人小。 可以爲避寓。 可以爲讀書。 亦可以消遣世慮。" 卽與英仲往觀而仍留數月。 距先生居不滿二里許。 徒步往來。 相尋者數矣。 唱酬詩篇。 付心峨洋。 交契之深密。 情義之相孚。 尤倍前矣。 一日不見。 如渴如飢。 見輒歡猶肺肝相照。 多小所懷。 必陳無隱。 而還忘族義之有分。 轉作函丈間從容。 余時所得。 與前日大異。 要自胸中豁然以明。 嬰情芝室。 如襲馨香。 中間聚散。 若星相離。 塵宂世故。 又從而侵之。 不獲承誨。 已經年所。 豈料轉頭之間。 造物多倪。 伯牛斯疾。 顔子不幸? 位不滿其德。 年不踰知命。 而天奪之速耶? 嗚呼哀哉! 嗚呼痛哉! 夫孰使然耶? 以神仙中骨。 天不欲久落於風塵者乎? 抑時運欲衰。 不令豪傑之才有扶於家國之將顚耶? 吾道竆甚。 不令君子之流。 有振於斯文之凋喪耶? 竆天之英。 貫古之識。 此生天地。 更於何相對耶? 嗚呼哀哉! 嗚呼痛哉! 春夏癘疫。 有同兵燹。 余自寓所。 寄身佛舍之七日。 聞先生遘疾。 又數日凶音忽傳。 夢耶眞耶? 方對食投匙箸。 悲呼長慟。 掩泣者良久。 傍人之慘顔出涕。 有如親戚之喪。 遠邇之聞先生訃而來慰我者亦多。 則平日吾於先生。 情義若同骨肉者然歟。 吾聞大德必得壽。 以吾先生之純明盛德。 何爲而至斯耶? 吾又聞福善禍淫之理。 顧瞻末俗。 兇者奸者老而不死者多矣。 何奪於吾先生純明盛德者而禍之慘耶? 所謂天者不仁矣。 理者難諶也。 嗚呼哀哉! 嗚呼痛哉! 嗣胤之雅麗明秀。 可見天倫。 臨終一語。 竟爲百年之型範。 而英仲士亨亦見湖右之名稱。 他日家聲。 知有更大。 舊情推托。 不替不衰。 區區所願。 惟恃而已。 况我先祖遺狀。 先生能構草而未及成章。 千秋此恨。 永結幽明。 匍匐今來。 執紼增慟。 薄醪短篇。 情不可盡。 先生其知也耶? 其不知也耶? 嗚呼痛哉! 난초의……같았고 훌륭한 인품에 감화되었다는 말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지초와 난초의 방에 들어간 것 같아서 오래되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니 곧 그에게 동화된 것이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矣.]" 하였다. 아교와 칠 '교칠(膠漆)'은 아교나 옻으로 칠을 하면 떨어지지 않으므로 깊은 우정을 비유한다. 곤도(坤道) 부녀자의 순종하는 덕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땅의 도는 그 순하도다. 하늘을 받들어 때로 행한다.[坤道其順乎, 承天而時行.]" 하였다. 남은 경사[餘慶] 조상의 음덕으로 후손이 번창함을 뜻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적선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 원문의 '창서(蒼鼠)'로, 푸른 쥐의 해이다. 푸른 색은 천간(天干)의 '갑(甲)'에 해당하고, 쥐는 지지(地支)의 '자(子)'에 해당한다. 주공(周公)과 문왕(文王)의 효상(爻象) 《주역》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괘사(卦辭)를 짓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남을……것을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성과 인으로 말하면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성(仁聖)의 도를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若聖與仁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하였다. 인재 육성 원문의 '낙육(樂育)'으로, 본래 영재(英才)를 육성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맹자(孟子)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孟子 盡心上》 추로(鄒魯) '추로(鄒魯)'는 공자가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이었고, 맹자가 전국 시대 추(鄒) 땅 사람이었던 데에서 온 말이고, 여기서는 유학을 가리킨다. 숙손(叔孫)이 중니(仲尼)를 비난하는 숙손은 노(魯)나라 대부 숙손 무숙(叔孫武叔)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숙손무숙이 중니를 헐뜯으니, 자공이 말하였다. '그러지 말라,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는 분이다.' 하였다.[叔孫武叔毁仲尼, 子貢曰, 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하였다. 《論語 子張》 을사년(1665, 현종5) 원문의 '청사(靑蛇)'로, 청색은 천간(天干)의 '을(乙)' 해당하고, 뱀은 지지(地支)의 '사(巳)'에 해당한다. 친척들과의……행하여 도잠(陶潛)처럼 전원의 흥취를 즐기고 왕희지(王羲之)처럼 명사들과 어울리며 살았다는 말이다.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푼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하였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영화 9년 계축년 3월 초에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였으니, 계사를 행하기 위해서이다.[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라고 하였다. 마음을 아양곡(峨洋曲)에 부치니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사이가 된 것을 말한다. 원문의 '아양(峨洋)'으로, 거문고 곡 이름이다. 춘추 시대(春秋時代)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鍾子期)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또 유수 (流水)에 뜻을 두자 "넓고 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 《列子 湯問》 사제(師弟) 원문의 '함장(函丈)'인데, 본디 옛날에 스승의 자리와 제자의 자리에 일장(一丈)의 사이를 둔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曲禮上》 백우(伯牛)처럼……불행할 운명으로 단명하였다는 말이다. '백우(伯牛)'는 공자의 제자 염백우(冉伯牛)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염백우(冉伯牛)가 병을 앓자 공자가 문병할 때 남쪽 창문으로 그의 손을 잡고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보다.' 하였다.[伯牛有疾, 子問之, 自牖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하였다. '안자(顔子)'는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수명이 짧아 죽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하였다.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한다던데 《중용장구》 제17장에 "큰 덕을 소유한 사람은……반드시 합당한 수명을 누린다.[大德,……必得其壽.]" 하였다. 선인에게……있다던데 《서경》 〈탕고(湯誥)〉에 "하늘의 도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 화를 내린다.[天道, 福善禍淫.]"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어떤 사람의 말에 삼신산(三神山)232)이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였는데, 내가 사는 땅이 선포(仙圃)233)이다. 이에 이 시를 지어 감흥을 일으키다 有人言三神山皆在我國。吾所居地是仙圃。仍題此而起興。 부상(扶桑)234)의 푸른 바닷가에 우리 집이 있으니오색구름 깊은 곳이 바로 청구(靑邱)라오큰 붕새 나는 하늘 너머는 선계와 속세 구분 짓고푸른 학 나는 봉우리 앞엔 해와 달 떠오르네향기 나는 옥지(玉芝)235) 봄에도 시들지 않고이슬 젖은 선초(仙草) 객이 거두어 가지 않네섬돌 옆의 흰 사슴236) 한가로이 잠에서 깨어삼청동(三淸洞)237) 안으로 넘어가 노니네 家住扶桑碧海頭五雲深處是靑邱大鵬天外仙凡限靑鶴峯前日月浮香惹玉芝春不老露滋瓊草客無收階邊白鹿閒眠起跨向三淸洞裏遊 삼신산(三神山)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 세 산을 가리킨다. 중국 동쪽의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한다. 선포(仙圃) 신선이 약초를 심어 놓았다는 전설 속의 밭을 말한다. 부상(扶桑)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전설상의 나무의 이름으로 흔히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옥지(玉芝) 선경(仙境)에 있는 영지(靈芝)다. 장형(張衡)의 〈사현부(思玄賦)〉에, "서왕모를 은대로 찾아가서, 옥지를 올려 배고픔 다스리게 하네.[聘王母于銀臺兮 羞玉芝以療飢]"라 한 대목이 보인다. 흰 사슴 선계에서 노니는 동물이다. 《신선전(神仙傳)》 〈유근(劉根)〉에 선인(仙人) 한중(韓衆)이 흰 사슴이 끄는 수레[白鹿車]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으며, 진(晉)나라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 권8 사보(史補)에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선도(仙道)를 좋아하였는데 당시 서왕모가 백록(白鹿)을 탄 사자(使者)를 무제에게 보내 자신이 올 것임을 알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삼청동(三淸洞) 도교에서 말하는 천상 세계로, 삼동(三洞)의 교주(敎主)가 사는 최고의 선경(仙境)인 옥청경(玉淸境), 상청경(上淸境), 태청경(太淸境)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용 中庸 성인(聖人)이 성인의 손자에게 도(道)를 전하니239)만 가지 이치 분명하여 하나의 근원으로 모이네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아 해와 달처럼 밝고240)지극한 정성 쉼 없는 것 천지를 본받았네241)아홉 길 높이로 만든 산242) 참되게 쌓았음243)을 알겠고바다에 이르는 온갖 하천 본원이 있네염락(濂洛)과 신안(新安)244) 지금 적막하니솔개 날고 물고기 뛰어 오르는 이치245) 누가 말할 수 있으리오 聖人傳道聖人孫萬理分明總一元査滓不存昭日月至誠無息體乾坤爲山九仞知眞積達海百川有本源濂洛新安今寂寞鳶飛魚躍孰能言 성인(聖人)이……전하니 《중용(中庸)》은 공자(孔子)의 손자 자사(子思)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찌꺼기도……밝고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불순한 요소들을 깨끗하게 정화한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8장의 주에, "사람의 성정을 함양하며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털어내고 찌꺼기를 말끔히 정화시킨다.[可以養人之性情 而蕩滌其邪穢 消融其査滓]"라 하였고, 《심경부주(心經附註)》 〈예악불가사수거신장(禮樂不可斯須去身章)〉에, "자질이 아름다운 자는 밝히기를 극진히 하면 찌꺼기가 바로 완전히 변화하여 천지와 체가 같아지고, 그다음 사람은 오직 장엄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붙잡아 기를 뿐이지만, 그 귀결점은 하나이다.[質美者明得盡 査滓便渾化却 與天地同體 其次惟莊敬持養 及其至則一也]"라는 정호(程顥)의 말이 나온다. 지극한……본받았네 《중용 장구》 제26장에,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으니, 쉬지 않으면 내면에 오래 간직하게 되고, 내면에 오래 간직하다 보면 밖으로 징험이 드러나게 된다. 밖으로 징험이 드러나면 이 세상에서 길이 지속되고, 길이 지속되면 넓고 두터워지게 되고,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지게 된다. [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라 한 데서 온 말이다. 아홉……산 부지런히 쌓아 올린 공을 말한다. 《서경》 〈여오(旅獒)〉에, "아홉 길 높이의 산을 쌓는데, 공이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는 데서 무너진다.[爲山九仞 功虧一簣]"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참되게 쌓았음 원문은 '진적(眞積)'이다. 학문에 대한 노력을 진실하게 쌓아 나가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참되게 쌓아 가며 오래도록 노력해야만 학문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는데, 학문은 죽음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眞積力久則入 學至乎沒而後止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염락(濂洛)과 신안(新安) '염락(濂洛)'의 '염'은 곧 염계(濂溪)로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이가 거주하던 곳이고, '낙'은 곧 낙양(洛陽)으로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가 거주하던 곳이다. 또한 '신안(新安)'은 중국 안휘성(安徽省)의 지명으로 주희(朱熹)의 관향이다. 곧 송 나라의 성리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솔개……이치 천지에 드러난 도(道)의 오묘한 작용을 이른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시》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천지의 도가 높은 하늘이나 낮은 못이나 모두 똑같이 행해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詩云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비웃으며【제나라 사람처럼 마음속으로 깨닫는 자가 있다면 이 두 수의 시는 나의 찌꺼기임을 충분히 알 것이다.52)】 嘲陷中虎【齊人中若有神會者。 二詩足以知余糟粕。】 세상 사람들이 어찌 참으로 너를 원수로 여기랴너의 아롱진 무늬가 재앙의 빌미 되는 탓이 클 테지차라리 소나 개의 생가죽을 입고추우53)의 마음을 품는 것이 나으리라54) 世豈眞讎汝班文禍祟深寧被羊犬鞹抱得雛虞心 제(齊) 나라……것이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대청 위에서 글을 읽고 있을 때, 마침 장인(匠人)이 그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환공에게 "감히 묻겠습니다. 공께서 읽으시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敢問, 公之所讀者何言耶?]"라고 하였다. 환공이 성인(聖人)의 말씀이라고 하자, 그가 또 성인이 살아 있느냐고 물으므로, 환공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가 "그렇다면 대왕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已夫.]"라고 하고는, 이어서 "수레바퀴를 깎을 때 느리게 하면 헐렁해서 꼭 끼이지 않고, 빨리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는데,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에 익숙해져서 마음에 호응하는 것이라, 입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신의 자식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가 없고 신의 자식도 그것을 신에게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而應於心, 口不能言.……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天道》 추우(騶虞) 모양이 백호(白虎)와 비슷한데 검정 무늬가 있으며 꼬리가 몸보다 긴 짐승으로, 생물을 잡아먹지 않고 생풀을 먹지 않는다 하여 기린과 함께 인수(仁獸)로 알려져 있다. 雛 저본에는 '雛'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근거하여 '騶'로 수정하였다.

상세정보
517956
/25898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