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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발휘 詩學發揮 내가 일찍이 망령되게도 옛날의 이른바 '음영대가(吟詠大家)'를 평론하여 말하기를 "청련(靑蓮)24)의 시는 마치 곤륜산의 봉황이 흐르는 노을을 희롱하고 태화산(太華山)의 봉우리에서 연꽃이 터지는 것 같아서 단지 천연(天然)의 자태(姿態)만을 볼 수 있고 부착(斧鑿)의 흔적이 있지 않으니 조물주와 더불어 서로 표리(表裏)가 되고 왼손·오른손이 될 수 있다. 초당(草堂)25)의 시는 파리하기는 나는 학과 같고 깨끗하기는 항해(沆瀣)26) 같고 강건하기는 오백 의사(義士)27)같고 고고하기는 삼동(三冬)의 설죽(雪竹)과 같으니 그 심장을 쪼개고, 담장을 가르는 곳에서는 귀신을 흐느끼게 하고 지사(志士)를 격동시키는 것과 같다. 창려(昌黎)28)의 시는 혼혼(混混)은 원기(元氣)와 같고 유행(流行)은 하해(河海)와 같고 우뚝 서 있기는 오악(五岳)과 높이가 나란하고 못이 깊기로는 사독(四瀆)과 깊이를 함께하니 내가 일찍이 시 가운데 성경(聖經)으로 생각했다. 양사홍(楊士弘)이 편찬한 〈당시삼등음률(唐詩三等音律)〉29)에서 비유하기를 '화타(華佗)와 편작(扁鵲)30)이 세상의 모든 기이한 재료를 합하여 명약(名藥) 한 제를 만들면서, 창양(昌陽)31)·옥찰(玉札)·단사(丹砂)32)를 구하여 신(辛) 것은 단 것을 보충하고, 찬 것은 따뜻한 것을 섞고, 높은 것은 누르고 낮은 것은 끌어올려 사람에게 한 번 복약으로 백해(百骸)의 아양(疴痒)을 치료할 수 있게 한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러므로 상품(上品)의 재주로 마땅히 이백·두보·한유 세 사람을 끌어들이고, 중하(中下) 이후로는 당연히 삼당(三唐)33)을 준거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余嘗妄自評論古之所謂'吟詠大家'。 以爲"靑蓮詩。 若昆山彩鳳。 飛弄流霞。 太華高峯。 玉綻芙蓉。 只見天然之態。 未有斧鑿之痕。 可與造化相表裏左右手矣。 草堂詩。 瘦若飛鶴。 淸若沆瀣。 健若五百義士。 苦若三冬雪竹。 其刳心剖膽處。 可以泣鬼神而激志士矣。 昌黎詩。 混混如元氣。 流行如河海。 卓立者與五岳比高。 淵深者與四瀆幷沉。 余嘗以爲詩中之聖經也。 若楊士弘所編唐詩三等音律。 譬若華佗扁鵲輸天下四海之奇材異料。 合爲一劑名藥。 參求昌陽玉札丹砂。 辛者補之以甘。 凉者濟之以溫。 高者抑之。 下者揚之。 令人一服藥。 可以打疊了百骸疴痒矣。 余故導上品之才。 當以李杜韓三家。 若自中下以後。 當以三唐爲準云。" 청련(靑蓮)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701~762)을 말한다. 이백은 자가 태백(太白), 호가 청련(靑蓮)·취선옹(醉仙翁)으로 시선(詩仙)으로 불리며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한시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그의 시는 서정성이 뛰어나 감각과 직관에서 독보적이며, 낭만적이고 귀족적인 시풍을 지녔다. 저서로는 《이태백 시집》 30권이 있다. 초당(草堂) 두보(杜甫, 712~770)의 호이다. 자는 자미(子美)이다. 성당(盛唐) 시대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되었으나 탈출하여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좌습유(左拾遺)에 올랐다.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사천성(四川省)의 성도(成都)에 정착하여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세웠다. 그 후 방랑 중에 동정호(洞庭湖)에서 병을 얻어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항해(沆瀣) 신선이 마신다는 밤사이 내린 맑은 이슬을 이르며, 흔히 신선이 마시는 귀한 음료수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육기를 먹고 항해를 마심이여, 정양으로 양치질하고 아침노을 머금는다.[飡六氣而飮沆瀣兮, 漱正陽而含朝霞.]"라고 하였다. 오백 의사(義士) 한 고조(漢高祖)가 제위에 올랐을 때, 제왕(齊王) 전횡이 한 고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의사 500인만을 데리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다. 한 고조가 그를 불러오게 하자 자결하였고, 그를 따르던 500 의사도 모두 자결하였다. 전횡도의 오백 의사란, 이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창포의 기세가 늠름함을 비유한 것이다. 창려(昌黎) 창려백(昌黎伯)에 추봉된 당대(唐代)의 유자(儒者)이며 문장가인 한유(韓愈)의 호이다. 〈당시삼등음률(唐詩三等音律)〉 원(元)나라 양사홍(楊士弘)이 편찬한 당시(唐詩) 선집(選集)으로, 이는 본디 양사홍의 《당음(唐音)》에 포함되어 있는 책이다. 《당음》은 총 14권인데, 1권은 '당시시음(唐詩始音)', 2권에서 7권까지는 '당시정음', 8권에서 14권까지는 '당시유향(唐詩遺響)'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타(華佗)와 편작(扁鵲) 모두 중국 고대의 명의(名醫)이다. 창양(昌陽) 석창포(石菖蒲)로 좋은 약재이다. 단사(丹砂) 단사는 주사(朱砂)라고도 불리듯이 붉은빛이 도는 광물인데 광명사(光明砂)·진사(辰砂)·영사(靈砂)라고도 부른다. 주된 성분은 수은(水銀)이어서 소량을 복용한다. 삼당(三唐) 초당(初唐)·성당(盛唐)·만당(晩唐)을 가리킨다. 이는 시작(詩作)이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졌던 당대(唐代)를 세 단계의 시기로 나누어 부른 데서 연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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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거지 閒居誌 시골 노인이 평소에 성질이 졸렬하고 어그러져 인간 세상에서 부앙(俯仰)할 수 없었다. 나이 40에 비로소 들판의 남쪽에 집을 지어 '남교(南郊)'라고 하고, 반무(半畝)의 채소밭을 일구어 스스로 만족하고 살면서 또 '노포(老圃)'라고 불렀다. 집 주변에 언덕이 있는데 모두 9개여서 혹자는 '구고주인(九臯主人)'이라고 불렀고, 집 뒤에 푸른 소나무를 손수 심어놓고 그 집을 '만취(晩翠)'라고 전각하였다. 작은 채는 직각으로 네모지고 겨우 무릎을 허용하였는데 그 벽에 '직재(直齋)'라고 써 놓았고, 이웃 학생이 두 개의 언덕에 서실을 지어놓고는 '양정(養正)'·'열락(悅樂)'이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곳에는 이름난 산과 아름다운 강이 없어서 바탕이 소박하기가 마치 그 사람과 같다고 하여 혹 '야옹(野翁)'이라고 칭하였다. 야옹은 일찍이 책보기를 좋아했는데 병치레가 잦아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어서 서가에 수백 권을 꽂아두고 때때로 열람하여 단지 우리 마음의 기(氣)에 물을 대줄 뿐이었다. 나머지는 심사숙고의 뜻을 붙이지 않았는데 천연(天然)의 뜻에 병통이라고 여겼으니 대개 성품이 그러하였다.성품(性品)을 기르는 방법을 대충 깨닫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가 거칠어서 정진(精進)할 수 없었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때때로 혹 참여하여 들었지만 나태하고 둔하여 실행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행동이 온통 어둡고 졸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르다고 하고 단점으로 여겨도 효효(囂囂)34)하였으니 대개 그의 뜻이 너그럽고 느슨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책상 정리를 하고는 묵연하게 정좌(靜坐)하여 마치 의도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실제는 얻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침잠하여 시를 읊어 기(氣)를 펼치고 우주(宇宙)를 살펴보고는 운행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고금(古今)을 통달하였어도 그 귀착점은 즐기는 것에 참여함이 없었다.봄에 채소가 채원에 가득하고 가을 곡식이 밭에 가득함에 이르러서는 혹은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을 신고, 혹은 작은 아이와 파리한 말을 타고 풀잎에 이슬 맺힌 들녘 사이를 다니며 시를 읊으니 그의 즐거움은 농포(農圃)에 있는 것 같았다. 온화한 바람이 꽃을 재촉하고, 드러난 하늘에 달이 흘러가면 가야금 한 번 타고 술 한 잔 마셨는데 스스로 술을 따르고 스스로 가야금을 켜고 좌우에 관동(冠童)이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어서 그의 환락을 도우니 그의 즐거움은 가야금과 술에 있는 것 같았으며 혹은 맑은 강에 달이 뜨면 비록 멀더라도 반드시 가서 암학(巖壑)에서 느긋하게 소요하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으니 아마도 산수를 즐기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 사람의 즐거움은 저절로 그에 맞는 즐거움이 있으니 반드시 깊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그 마음에 대해서는 항상 그의 입으로 말하기를 "지극히 높은 것은 하늘이요, 지극히 넓은 것은 땅이지만 일원(一元)35)의 뒤에는 다 매몰되고 사라져서 그 자취 또한 청소해 버린 것처럼 될 것이니 하물며 우리 인간은 작기가 한 덩어리의 고깃덩어리라서 100년을 살지 못하고 흙과 함께 썩으니 어찌 스스로 있다·없다 할 것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나에게는 또한 천지와 그 이치를 함께 하는 것이 있으니 밝고 밝은 마음의 사이에 붙어서 선을 기르고 확충해 간다면 천지만큼 높고 큼을 채워서 일원(一元)과 더불어 처음과 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려(思慮)가 여기에 이르면 저 뜬구름 같은 세상의 근심과 즐거움, 우연히 찾아오는[倘來]36) 비방이나 명예가 어찌 그의 즐거움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몇 가지 즐거움은 백 년의 한가로운 마음을 맡길 수 있을 것이고, 뒤에서 언급한 마음의 즐거움은 천지의 묘용(妙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모아서 정리하여 〈한거지(閑居誌)〉에 쓰지 않겠는가?을사년(1665, 현종6) 3월 10일 구고주인(九臯主人) 쓴다. 郊老平日。 性質拙訛。 不能俯仰於人間世。 其年四十。 始築室于郊之南。 仍號'南郊'。 半畝蔬園。 自足爲生。 又號'老圃'。 宅邊有臯凡九墩。 或稱'九臯主人'。 屋後手種蒼松。 篆其軒曰'晩翠'。 小室直而方。 僅取容膝。 題其壁曰'直齋'。 隣生葺書室于二臯。 曰'養正'曰'悅樂'。 所居無名山佳水。 質素如其人。 或稱曰'野翁'。 翁嘗好看書。 多病未能劇讀。 架有冊數百卷。 有時披閱。 只取有灌漑吾心氣而已。 餘不着意苦思。 以病其天然之志。 盖性然也。 養性之方。 非不粗覺而氣麤不能精進。 治心之法。 時或預聞而懦鈍不能力行。 是以行之多暗劣。 人皆非短之。 亦囂囂焉。 盖其志寬緩故也。 嘗淨掃庭室。 几案斯整。 默然靜坐。 若有所思。 而其實無味乎所得矣。 沉吟叙氣。 俛仰宇宙。 繹思運意。 通達古今。 而其歸無預於所樂矣。 至於春蔬滿圃。 秋糓盈疇。 或竹杖草屨。 或短童羸馬。 行吟於野田草露之間則其樂似在於農圃矣。 和風促花。 露天流月。 一琴一樽。 自酌自彈。 而左右冠童。 咏歌吟詩。 以助其歡則其樂似在於琴酒矣。 而或泛月淸江。 雖遠必臻。 優遊巖壑。 不憚其勞則無乃樂於山水者耶? 其人之樂。 自有其樂。 不必深辨。 其心常語其口曰: "至高者天。 至大者地。 而一元之後。 澌盡泯滅。 其迹如掃。 况吾人眇然一塊肉。 未及百年。 與塵土同朽者。 何足自以爲有無哉? 雖然在我者。 亦有與天地同其理者。 昭昭然寄寓於方寸之間。 善養而擴充之則可以塞天地之高大而與一元同終始矣。" 思慮之至此則彼浮世之憂樂。 倘來之毁譽。 豈足以動其樂哉? 然則前所稱數者之樂。 足以寄百年之閒情矣。 後所稱方寸之樂。 可以達天地之妙用矣。 合而收之。 書用誌哉? 乙巳暮春上浣。 九臯主人識。 효효(囂囂) 스스로 만족하여 욕심이 없는 모양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어떻게 해야 효효할 수 있느냐는 송구천(宋句踐)의 질문에 맹자께서 말씀하기를 "덕을 높이고 의를 즐거워하면 효효할 수 있다.[尊德樂義, 則可以囂囂矣.]"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조기(趙岐)의 주에 "효효는 스스로 만족하여 욕심이 없는 모양이다.[囂囂, 自得無欲之貌.]"라고 하였다. 일원(一元)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주장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설에 나오는 용어로, 이 세계가 생성했다가 소멸하는 1주기(周期)를 말한다. 그 학설에 따르면 30년이 1세(世), 12세가 1운(運), 30운이 1회(會), 12회가 1원(元)이니, 일원은 모두 12만 9600년이 된다. 《皇極經世書 권2 纂圖指要下》 당래(倘來) 당래(儻來)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자신의 몸에 우연히 찾아오는 것을 이른다. 《장자》 〈선성(繕性)〉의 "요즘 사람들은 높은 관직을 얻고는 뜻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몸에 속한 것이지 성명(性命)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우연히 찾아와 몸에 잠깐 붙어 있는 것이다.[今之所謂得志者, 軒冕之謂也, 軒冕在身非性命也, 物之儻來寄也寄之.]"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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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문대 經鋤問對 시골 농사꾼은 세상의 일에 대해 알고 힘쓰는 것이 없어 손으로 호미 들고 김매고 농사지어서 어버이 모시는 계책으로 삼고 있다. 날마다 2, 3명의 일꾼을 데리고 동쪽 언덕 아래에서 농사일하느라 체력이 다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면 호미를 놓고 언덕에 올라가 즐겁게 옛 경(經)을 읽는다. 객이 방문하여 길게 읍하고 말하기를 "무의(巫醫)·악사(樂師)·재장(梓匠)·윤여(輪輿)는 천한 기술이지만 본디 밭 갈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하물며 옛 경을 다스리는 것 또한 밭 갈면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농부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신지(莘摯)의 뢰(耒)37)와 원량(元亮)의 서(鉏)38)를 객 또한 들어보았는가?"라고 하니, "들어봤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마음을 세움에 마땅히 이윤(伊尹)을 뜻 삼아 궁(窮)하여도 또한 행하며 달(達)하여도 또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끝내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도연명이 지킨 절개를 지키고 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객이 발끈하여 응대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응결되어 있고 사납습니다. 이윤은 성인이요, 도연명은 현인입니다. 한쪽은 성인이고 다른 한쪽은 현인이지만 성인·현인을 자처하지 않았는데 더군다나 그대가 자처하겠습니까? 그대가 어려서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나이 먹어 이룬 것이 없고 하나의 뜻도 세우지 못하고 많은 허물이 운집하였으며 궁하여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한갓 사체(四體)의 부림을 받고 있는데도 어찌 그대가 높고 크게 뜻을 세워 행동이 미치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농부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고 저 사람이 옳지 않다. 그러나 곤(鯤)이 깃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갈 뜻이 있고,39) 대안(岱鴈)은 털이 없는데도 천 리를 번개처럼 날아갈 마음이 있으니 군자가 담대(膽大)함을 귀하게 여기고, 자중(自重)한 것은 진실로 이 도(道)를 지극히 원대하고 여기고, 이 임무를 지극히 중하게 여겨서이다. 용도(容刀)의 배로는 바다를 건너기 부족하고, 한 척의 칼을 뽑아서는 적을 제압할 수 없으므로 옛사람이 마음에 반드시 성인이 되기로 기약했던 것은 어째서이겠는가? 나와 성인은 처음에는 조금도 다름이 없지만 진실로 그 같음을 알아서 작은 차이도 없게 하면 나 또한 한 사람의 성인일 뿐이니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비록 그렇지만 성인도 사람이니 사람이면서 사람을 배우면 사람이 각각 능하게 된다. 하늘에 대해서는 높고 위대함을 말로 형용할 수 없는데도 옛날 사람들이 하늘과 덕을 나란히 한자가 있다고 한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의(仁義)일 뿐이니 그대의 말이 비루하여 자포자기에 빠진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습니다. 청컨대 그대의 농사짓는 즐거움을 묻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천지는 지극히 크고 만물은 지극히 많아도 도(道)가 그것들 사이에 깃든다. 천지는 부모요, 만물은 동포이니 달(達)하여 구제[濟]를 겸하는 것은 그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이요, 궁(竆)하여 검약[約]을 지킴은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니다. 나의 뜻이 나의 마음의 수고로움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천하와 그 도를 함께하는 것이요, 나의 뜻이 나의 힘의 수고로움을 행할 수 없는 것은 밭고랑 사이에서 그 분수를 스스로 즐기는 것이다. 봄에 밭 갈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은 천시(天時)의 서권(舒捲)를 따르는 것이요, 행(行)을 즐기고 위(違)를 걱정하는 것은 도체(道軆)의 자연(自然)을 감당하는 것이다. 서쪽 들에서 일을 마치고 유연히 돌아오니 책상에는 책이 있어서 흔연히 함영(涵泳)하니 그 가운데에 천지가 있고 그 가운데에 만물이 있다. 부자(父子)가 갖추어져야 군신(君臣)이 갖추어지고 형제(兄弟)가 있어야 부부(夫婦)가 유별하게 된다. 희(羲)·농(農)·요(堯)·순(舜)이 호호희희(皡皡熙熙)40)하고, 공(孔)·맹(孟)·정(程)·주(朱)가 혼혼(混混)41)·원원(元元)하여 모두 거두어 함께 엮어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니 일상생활 사이에 주옹(主翁)은 아마도 그 즐거움이 있지 않겠는가? 별안간 언덕을 지나 골짜기를 찾아서 나의 남쪽 밭을 돌보니 쭉정이가 자라지 않고 오곡이 잘 자라고 있다. 황충이 다 사라지고 때에 맞는 비가 내리니 시골의 백성과 늙은이가 모두 노래 부르고 흥얼거리고 읊조리고 손뼉 치면서 서로 얼싸안고 서로 읍하고 축하하여 한갓 덕색(德色)을 드러내고 발해(哱咳)를 드러내지 않으니, 말하고 웃는 즈음에 주옹은 아마도 그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나의 농사짓는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우리 그대의 즐거움은 이미 들었습니다. 청컨대 성인을 배우는 도를 듣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농부가 배움은 소를 채찍질하여 부지런히 밭을 가는 일뿐이다. 쟁기를 잡는 손은 실제로 리(理)를 탐구하는 손이 아니니 권농가를 부르는 입술이 어찌 도를 강론하는 입이겠는가? 성현(聖賢)의 모범(模範)이 책에 밝게 빛나 천년 만 년 빛이 해·달과 같을 것이니 진실로 바보가 아니면 누가 보고 아는 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지극히 은미한 것은 드러나기 어렵고 지극히 위태로운 것은 타기[乘] 쉬우니 하나의 근본이 비록 같더라도 만 가지로 각각 달라지니42) 만 가지의 다름으로써 타기 쉬움의 위태로움에 골몰하면 동일한 하나의 근본이 더욱 은미해진다. 정주(程朱) 이후로 위아래 천년 백 년 동안 하나로 꿰뚫는 전통 위에서43) 공자·맹자를 접한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옷깃은 푸르고 소매는 노란 고준한 담론을 하는 자가 분분하게 함께 일어나 각각 논한 것이 달라서 대도(大道)를 잃어버렸다. 지금의 학자는 그 만 가지 다른 것을 하나로 하여 근본 하나에 함께 귀착시키고 그 지극히 위태로운 것을 눌러서 그 은미한 것을 드러내게 하니 그 요체는 치지(致知)·역행(力行)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치지(致知)의 잘못은 쉽게 박잡(博雜)한 데에 이르고 역행(力行)의 잘못은 쉽게 고루(固陋)한 데에 흐르는 것이니 박잡한 것은 구이(口耳)의 학문44)이 되고 고루한 것은 황로(黃老)의 학문45)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묘목을 심어놓고 김매지 않아 도리어 쭉정이만 자라고, 오동나무를 심고 가꾸지 않아 가시덤불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반드시 앎은 잡다한 것에 흐르지 않아야 하고, 행동은 누추한 곳에 흐르지 않아서 정일(精一)하고 택집(擇執)하고46) 먼저 박(博)하고 나중에 약(約)한 연후에 큰 근본이 세워져서 그 쓰임이 행해지게 되고 몸가짐이 약(約)하고 시행하는 것이 넓게 된다.47) 이것이 성인을 배우는 대강이다."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치지(致知)라고 할 만하며48) 어떻게 하여야 역행(力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만물·만사의 이치를 미루어 내 마음에서 이루는 것을 '치지(致知)'라고 하고, 이미 알아서 내 몸에서 행해지면 '역행(力行)'이라고 한다. 앎이 부진하면 마음이 넓지 못하여 막힌 것이 많게 되고 행동이 힘이 약하면 아는 것이 헛된 것을 갖추게 되어 무용하게 된다. 비록 그렇지만 이 마음이 경(敬)에서 먼저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가 앎이 정일(精一)하고 택집(擇執)하지 못하여 잡다함에 흐르고, 우리의 행동이 굳게 지키지 못하여 누추한 데에 흐르게 된다.49) 이런 까닭에 군자는 거경(居敬)을 크게 여기고 궁리(竆理)를 귀하게 여겼다.50) 아! 후세에 한 무리의 선비가 성리(性理)를 고준하게 담론하고51) 고금(古今)을 달려가 말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수천 번 재잘거려 아침부터 하루를 다 하여도 아직 귀일한 자를 보지 못했으니 그가 큰 근본에 과연 세운 것이 있는가? 슬프도다!"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세상의 군자는 학문(學問)·절의(節義)를 둘로 나누어 절의를 실제 행동으로 생각하고 학문을 귀히 여기지 않으니 이런 논의는 어떠한지요?"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이런 논의가 바로 말세의 탄식이다. 중고(中古) 이전에 어찌 이런 논의가 있었겠는가? 대저 절의는 바로 학문 중에 하나의 일이니 만약 절의를 중하게 여긴다면 주공·공자는 백이(伯夷)만 못하고 육수부(陸秀夫)52)·문천상(文天祥)53)은 정주(程朱)보다 뛰어나겠지? 주공·공자가 백이에 대해서는 일지(一指)에서 견배(肩背)이고 육수부·문천상이 정주에 대해서는 근본(根本)에서 일지(一枝)이니 나란히 놓고 논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후세의 사람이 명(名)을 학문이라고 여기는 자가 있는데 군신의 큰 절의에 대해서도 도리어 범인의 아래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말세의 논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세상의 군자는 도를 행하는 것을 절의(節義)라고 생각하여 도를 행하지 않으면 절의가 아니라고 하는데 진실로 그러합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이것 또한 말세의 탄식이다. 중고(中古) 이전에 어찌 이런 논의가 있었겠는가? 옛날의 군자는 대본(大本)과 달도(達道)54)가 세워지지 않음을 걱정했지, 절의가 행해지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대본·달도가 이미 세워지면 절의는 논할 것이 못 된다. 만약 도를 행하는 것을 절의로 삼는다면 이부주소(伊傅周召)55) 등의 무리를 모두 절의의 선비라고 지목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한다.'56)라고 하였고, 또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유하고 또 귀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57)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써 본다면 비록 나라를 위해서 죽더라도 그 도를 선하게 하지 못하면 절의가 아니다. 비록 몸이 도덕적이라고 하더라도 도가 없는 세상에서 행해지지 않는 것을 또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사(時事)가 어떠한가를 헤아리지 못하면서 반드시 도를 행하는 것으로 뜻 삼고, 반드시 절의를 세우는 것을 뜻 삼고도 도의 선(善), 불선(不善)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 대본이 이미 잘못된 것이니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자사(子思)는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는 자기 뜻을 표현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해야 하겠지만,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는 침묵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58)라고 하여 이미 명철(明哲)하게 그의 몸을 보존하였으니 사군자(士君子)의 도와 덕을 품은 자가 어찌 이 말로써 종신의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그 도가 같지 않으니 공자가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많았고, 증자는 명덕설(明德說)59)을 좇고, 자사는 성도설(性道說)을 좇고, 맹자는 항상 인의(仁義)를 말했습니다. 송(宋)의 선정신(先正臣)60)은 경(敬)을 위주로 했고, 횡거(橫渠)61)의 가르침은 예(禮)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성인 문하에서 당(堂)에 올라간 자가62) 많게는 70명에 이르렀는데 성(性)과 천도(天道)는 오직 증자(曾子)·자공(子貢)만이 들을 수 있었고,63) 이미 대의(大意)를 보았던 증칠(曾漆)64) 이하는 참여하여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중용》·《대학》의 책은 근본을 맨 먼저 드러내어 미묘함을 드러내 밝혔고, 송나라의 선정신(先正臣)이 초학자를 가르치고 인도함에 반드시 본원(本源) 함양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성리(性理)를 담론하는 학문은 그 흐름의 폐단이 정문(程門)의 고학(高學)에서 점점 선불교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 태반이어서 강서(江西)의 학문65)은 머리를 치며 울부짖는 자가 현자의 뜻을 훼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만약 고정(考亭) 선생66)이 백 가지 지류를 막아서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천하에 유가의 의관을 몰아서 불교의 신자에 들어가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강호(江湖)의 이설을 다 제거하지는 못해서 천 년이나 폐단이 흘러 지금까지도 끊지를 못하였습니다. 명대의 학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닌데 옛길로 함께 향하여 붉은 깃발을 이미 세우고 상제가 곁에 있어도 몽매하여 높일 줄을 모릅니다. 지금의 학자가 만약 대로를 평이하게 걷고자 한다면 거의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을 면할 것이니 무슨 도를 써야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농부가 머릴 긁적이며 용모를 고치고 대답하여 말하기를 "아! 우리 그대와 도를 말할 수 있겠구나. 옛날에 주공이 예를 제정하면서 문(文)으로 최상 삼았으니 빛나도다! 문(文)이여. 빈빈(彬彬)함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67) 선배 야인(野人)에 미쳐서 그 혜택이 이미 끊어졌다. 후배 군자(君子)가 문(文)이 그 질(質)을 멸하여68) 무무(貿貿)69)하게 예악(禮樂)을 꾸미고 장식하여 옛 도가 이미 없어지자 이 때문에 공자께서 가르침을 설하고 먼저 말과 행동을 보고 듣고 따르게 하고 음탕한 음악과 간악한 예가 그치게 하여 귀와 눈으로 접하지 못하게 한 연후에 큰 근본이 세워질 수 있었다. 이른바 밖을 다스려서 그 가운데를 정성스럽게 하고자 한 것이므로 안자(顔子)가 우뚝 뜻을 세운 것이 극기(克己)70)·사물(四勿)71)의 뒤에 있었고 증자(曾子)의 일관충서(一貫忠恕)는 하루에 몸을 세 번 살핀 후에 있었다. 이것이 성인 문하의 가르침이니 마치 천지의 생물이 알맹이에서 움이 트고, 움이 터서 싹이 나고, 싹이 자라 가지가 되고, 가지에서 잎이 나고, 잎에서 꽃이 피고, 꽃에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공자께서 이미 돌아가심에 미쳐서 문하의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각각 들은 것만을 높였으니 사문의 도가 밝지 않게 되었다. 증자(曾子)·자사(子思)가 깊이 걱정하고 염려하여 사도(師道)가 전해지지 못할까 고민하고, 구이(口耳)72)의 학문에 황홀(怳惚)해짐을 아파하여 이내 표준을 세워 본체(本體)를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 발명(發明)하였으니 대개 부득이한 가르침이었다. 맹자의 법통은 대개 여기에서 얻어졌으나 선인(善人)과 신인(信人)의 사이에 위치하고, 미인(美人)·대인(大人)·성인(聖人)·신인(神人)의 아래 위치한 악정자 극(樂正子克)도73) 마침내 전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시서(詩書)는 열렬하게 불탄 나머지에 겨우 동자(董子)74)를 얻었고, 장구(章句)·문사(文辭) 가운데에서는 다행히 한공(韓公)75)이 있었는데 붓을 빼서 글자나 윤택하게 하여 한갓 조화(藻華)만을 숭상하다가 오계(五季)76)에 극에 이르렀다. 염락(濂洛)77)의 현인들이 천장(千丈)이나 우뚝 서서 한당(漢唐)을 굽어보고, 높고 오묘함을 다하여 위로는 공맹을 접하여 우리 도(道)의 소재를 깨닫고 큰 근본이 세워지지 않은 것을 개탄하였다. 이 때문에 후배를 장려하고 인솔하여 맨 먼저 하나의 근본을 세우고 만 가지 다른 것을 각각 바르게 하고 성(誠)·명(明) 둘을 끌어들여 내외(內外)를 교차하여 수양하였다. 자사·증자【한 편에서는 맹자】의 끊어진 학문이 여기에 이르러서 다시 이어졌으나 문인의 고제(高弟)가 일변에 떨어짐을 면치 못했으니 이것이 있구나! 유학의 도가 행해지기 어려움이여. 육씨(陸氏)의 형제78)가 어질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아호(鵝湖)에서 한 번 만난 것은79) 처음부터 끝까지 합당하지 않아서 마침내 천 년간 이 유가의 도에 큰 하자가 되었으니 주문공 선생의 걱정이 어찌 크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삼가 이편을 지은 것을 고찰해보면 마땅히 갑오년(1654, 효종5) 사이인데 혹 내간(內艱)을 만나 마치지 못한 것인가? 이 아래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동방(東方)과 관계될 터인데 도대체 선생의 깊은 뜻에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지연시킨 것인가? 당일에 선생님에게 질정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經鉏野夫。 於世上事。 無所識務。 手執鉏耰役。 以爲供親計。 一日携園丁二三。 從事於東臯之下。 力倦神疲。 舍鉏登隴。 快讀古經。 有客來過。 長揖而問曰: "巫醫樂師梓匠輪輿。 工之賤者也。 固不可耕且爲也。 况治繹古經。 亦可耕且爲歟?" 野夫笑曰: "莘摯之耒。 元亮之鉏。 客亦聞之歟?" 曰: "聞之矣。" 曰: "士君子立心。 當以尹爲志。 竆亦可行。 達亦可行矣。 倘終不遇。 以陶之所守爲守可也。" 客然應曰: "子之爲言。 癡且狷矣。 伊尹聖也。 淵明賢也。 旣聖且賢。 聖賢不居。 况吾子自居歟? 吾子少雖好學。 晩無所成。 一志未立。 衆咎蝟積。 竆未固守。 徒役四軆。 何子之立志太高而行之不逮耶?" 野夫菀爾對曰: "子言是哉? 夫夫非矣。 然鯤羽未成而有扶搖九萬之志。 岱鴈未毛而有掣電千里之心。 君子之所貴乎膽大而自重者。 誠以斯道至遠。 斯任至重。 容刀之舟。 不足以濟海。 經尺之挺。 未可以制敵。 故古人爲心。 必以聖人自期何者? 我與聖人。 初無小異。 苟知其同而使無小異。 我亦一聖人也。 吾何異哉? 雖然聖人人也。 人而學人。 人各能之。 至於天者。 巍巍惟大。 不可名狀。 而古之人。 有與天合德者。 其故何也? 仁義而已。 子之言。 無乃卑陋而流於自棄耶?" 客曰: "子之言然矣。 請問吾子經鉏之樂?" 曰: "天地至大。 萬物至衆。 而道寓於其間。 天地父母而萬物同胞也。 達而兼濟。 同其樂也。 同其樂也而守約。 不同樂也。 我志可行勞吾心。 與天下同其道也。 我志不可行勞吾力。 自樂其分於畎畝之間。 春耕秋穫。 順天時之舒捲。 樂行憂違。 任道軆之自然。 事畢西疇。 悠然而歸。 有書在床。 欣然涵泳。 其中有天地焉。 有萬物焉。 父子具而君臣備。 兄弟在而夫婦別。 羲農堯舜。 皡皡熙熙。 孔孟程朱。 混混元元。 具收幷集。 萃爲一家。 俯仰之間。 主翁其有樂乎? 俄而經邱尋壑。 睠我南畝。 稊秕未成而五穀克秋。 耗蝗遠蟄而時雨施澤。 村氓里老。 歌者謳者詠者抃者。 提携傴僂。 相揖而賀。 徒見德色。 未覩哱咳。 言笑之際。 主翁其有樂乎? 此吾經鉏之樂也。" 客曰: "吾子之樂。 旣聞命矣。 請聞學聖之道。" 曰: "農夫所學。 策牛勤耕而已。 把犁之拳。 實非探理之手。 農歌之唇。 豈是講道之口? 聖賢模範。 昭在方策。 千秋萬世。 炳若日月。 苟非昏盲。 孰不能見知? 雖然至微者難著而至危者易乘。 一本雖同而萬殊各異。 以萬殊之異。 汨易乘之危。 一本所同者。 微而又微。 程朱以來。 上下千百載。 未聞有以一貫之統上接鄒魯者。 領靑手黃。 高談者紛然並起。 各異所論而大道喪矣。 爲今之學者。 齊其萬殊者而同歸一本。 抑其至危者而使著其微。 其要不過致知力行而已。 然致知之失。 易流於博雜。 力行之失。 易流於固陋。 博雜者爲口耳之學。 固陋者爲黃老之學。 此所謂種苗不耔而反成莠。 樹梧不治而變成棘者也。 必也所知不流於雜。 所行不流於陋。 精一而擇執。 先博而後約。 然後大本立而其用行矣。 所操約而所施博矣。 此學聖之大槩也。" 客曰: "如何斯可謂之致知。 如何斯可謂之力行?" 曰: "萬物萬事之理。 推而致之吾心曰'致知'。 旣知而行之吾身曰'力行'。 知不盡則心不廣而多滯矣。 行不力則所知者爲虛具而爲無用矣。 雖然此心未能先立乎敬。 則吾之所知。 未能精擇而流於雜。 吾之所行。 未能固守而流於陋。 是故君子大居敬而貴竆理矣。 嗚呼! 後世有一種士子。 高談性理。 驟語古今。 對人談說。 喋喋累千而竟朝盡日。 未見歸宿者。 其於大本。 果有所立乎? 悲夫!" 客曰: "世之君子。 有以學問節義。 歧而爲二。 以節義爲實行。 學問爲不足貴。 此論何如?" 曰: "此論乃衰世之嘆也。 中古以上。 豈有此論哉? 大抵節義。 乃學問中一事。 若以節義爲重。 周公孔子不如伯夷。 秀夫天祥過於程朱耶? 周公孔子之於伯夷。 肩背之於一指。 秀夫天祥之於程朱。 一枝之於根本。 比而論之可乎? 後世之人。 有名爲學問。 而至於君臣大節。 反出凡人之下者。 故曰'衰世之論也'。" 客曰: "世之君子。 有以行道爲節義。 不能行道。 爲非節義。 誠然耶?" 曰: "是亦衰世之嘆也。 中古以上。 豈有此論哉? 古之君子。 以大本達道之不立爲憂。 而不憂節義之不行。 大本達道旣立則節義非所論也。 若以行道爲節義則伊傅周召之徒。 皆可目之曰'節義之士'耶? 孔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又曰: '邦無道富且貴焉恥也。' 以此見之。 雖死於國。 不能善其道則非節義也。 雖身抱道德。 不行於無道之世。 亦可見矣。 不度時事之如何。 而必以行道爲志。 必以立節爲意。 而不顧是道之善不善。 其大本旣誤矣。 何足論歟? 子思曰: '邦有道。 其言足以興。 邦無道。 其默足以容'。 旣明且哲。 以保其身。 士君子抱道懷德者。 盍以此言爲終身戒哉?" 客曰: "聖賢敎人。 其道不同。 孔子敎人。 多從日用行事上。 曾子從明德說。 子思從性道說。 孟子常說仁義。 宋之先正以敬爲主。 橫渠之敎以禮爲先。 聖門升堂者。 多至七十。 而性與天道。 惟曾子子貢得聞。 己見大意之曾漆以下。 不得預聞。 自庸學之書首闡根本。 發明微妙。 宋之先正敎導初學。 必以涵養本源爲先。 談說性理爲學。 其流之弊。 程門高學漸流禪佛者太半。 而江西之學拍頭叫喚者。 多損賢者之志。 若非考亭夫子障百川而東之。 豈不庶驅天下之衣冠。 盡入天竺之卒徒乎? 雖然江湖異說。 不能盡去。 而流弊千年。 訖今未斬。 皇明學者不爲不多。 而並鄕故路。 赤幟已竪。 帝在旁州。 蒙不知尊。 今之學者。 若欲平步大路。 庶免偏重之弊。 用何道而可耶?" 野夫點頭改容而對曰: "嗟乎! 吾子可與語道矣。 昔者周公制禮。 以文爲上。 郁郁文哉! 彬彬可象。 及其先進野人。 其澤已斬。 後進君子。 文滅其質。 貿貿焉粉飾禮樂。 古道已去。 是以夫子設敎。 先從視聽言動。 止淫樂慝禮。 使不接耳目。 然後大本可立。 所謂制乎外。 所以誠其中也。 故顔子之卓然有立。 在於克己四勿之後。 曾子之一貫忠恕。 在於日三省身之後。 此聖門之敎。 如天地生物。 勾而萌萌而苗苗而枝枝而葉葉而花花而實者也。 及夫子旣沒。 門弟子散在四方。 各尊所聞而斯道不明。 曾子子思深憂且慮。 悶師道之無傳。 痛口耳之怳惚。 乃立準的。 直指本體以發明之。 盖不得已之敎也。 孟子之統。 盖得乎此。 而二中四下之克。 竟未聞有傳而不絶。 豈不惜哉? 詩書烈焰之餘。 僅得董子。 章句文辭之中。 幸有韓公。 而抽毫潤墨。 徒尙藻華而極乎五季矣。 濂洛羣賢。 特立千丈而俯視漢唐。 極盡高妙而上接鄒魯。 覺吾道之所在。 慨大本之未立。 是以奬率後進。 首以一本先立而萬殊各正。 誠明兩進而內外交養。 思曾【一作孟】絶學。 至此復續。 然門人高弟往往未免落於一邊。 有是乎! 斯道之難行也。 陸氏兄弟。 非不賢矣。 鵝湖一會。 終始不合。 竟爲千秋斯道之大疵。 文公夫子之憂。 豈不大乎?"【謹按此篇之作。 當在甲午年間。 或以丁內艱而未畢耶? 此下想必係之以東方。 抑先生深意有所待而遲回耶? 恨不就質於當日函丈也。】 신지(莘摯)의 뢰(耒) 신지는 이윤을 말한다. 신(莘)은 이윤이 농사짓고 살던 신야(莘野)이며 지(摯)는 이윤(伊尹)의 이름으로, 이윤이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원량(元亮)의 서(鉏) 원량은 도잠(陶潛, 365~427)의 자이다. 도잠의 또 다른 자는 연명(淵明)이며 시호는 정절이다. 팽택의 현령(縣令)이 되었으나, 80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였다. 곤(鯤)이 …… 있고 곤(鯤)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장자》 〈소요유〉에,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모른다. 변화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짝은 몇 천 리인지 모른다. 기운차게 떨쳐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끝의 검푸른 바다로 날아가려고 한다. 남쪽 바다란 하늘의 못이다.[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라고 하였다. 호호희희(皡皡熙熙) 화락(和樂)하고 자득(自得)한 모양을 말하는데, 전하여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성왕의 백성은 호호한 듯하느니라.[王者之民, 皥皥如也.]"라고 하였고, 《노자(老子)》 제20장에 "세속의 중인들 희희낙락하여, 마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봄날의 누대에 오른 듯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고 하였다. 혼혼(混混) 혼혼은 근원이 있는 물을 말한다. 공자가 자주 물을 일컬은 뜻을 두고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에 대한 서자(徐子)의 질문에 대해 맹자가 말하기를, "근원이 있는 물이 용솟음쳐서 밤낮을 쉬지 않아 구덩이에 찬 후에 나아가 바다에 이르니 근본이 있는 것이 이와 같은지라 이것을 취한 것이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라고 한 말이 있다. 《孟子 離婁下》 하나의 …… 달라지니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설명하는 말로 이치는 한가지이지만 현상은 다르다는 의미이다. 우주의 근원은 유일(唯一)의 이치인데, 그것이 천만 가지 현상으로 분리되어 각각 다른 만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면 수많은 사물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그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서 천 개의 달로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이(理)를 수많은 존재들이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천 개의 강마다 흐리거나 탁한 서로 다른 차이 때문에 하나의 달은 천 개의 강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로 …… 위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의미하는 말로, 공자가 제자 증삼(曾參)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예, 그렇습니다. [唯]"라고 곧장 대답하고는,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바로 충서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설명해 준 내용이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구이(口耳)의 학문 귀로 듣고 입으로 곧장 내놓는다는 뜻으로, 되새김질해서 소화하려고는 하지 않고 얼른 밖으로 드러내어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의 "소인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 귀로 듣고는 곧바로 입으로 내놓는다. 입과 귀의 거리는 불과 네 치일 따름이니, 일곱 자나 되는 이 몸을 어떻게 아름답게 할 수가 있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 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황로(黃老)의 학문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문으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 발전하였다. 도가(道家)의 학설을 가리킨다. 신불해(申不害)·한비(韓非)는 법가(法家) 사상가로, 《사기(史記)》에 "신자(申子)의 학문은 황로(黃老)에 근본을 두고 형명(刑名)을 주로 한다."라고 하였고, 《사기》의 색은(索隱)에 "황로는 번화한 것을 싫어하는데, 간솔(簡率) 무위(無爲)하면 군신(君臣)이 저절로 바르게 된다. 한비는 부박한 것을 배격하고 법제(法制)는 사(私)가 없는 것이니 명실이 상부한다. 그러므로 황로로 귀결된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권63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제3. 정일(精一)하고 택집(擇執)하고 정일집중(精一執中)을 말하는 것으로, 정일집중은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면서 말한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을 줄인 말로,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먼저 ‥‥ 된다 박문약례(博文約禮)를 설명하는 구절로, 스승에게 배워 식견을 넓히고, 그 지(知)를 예(禮)로 요약하여 행(行)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는 내용이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어떻게 ‥‥ 만하며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설명한 구절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지극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학장구》 경 1장에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을 지극히 하였으니,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라고 하였다. 마음이 …… 된다 '경'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의'는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성리학자들의 중요한 수행 방법에 속하는 것들이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군자가 경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로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라고 하였다. 참고로 명도(明道) 정호(程顥)는 "경과 의를 서로 잡아 지키면 곧바로 올라가 천덕을 통달함이 이로부터 시작된다.[敬義夾持, 直上達天德, 自此.]"라고 하였다. 《近思錄 권2 爲學》 거경을 …… 여겼다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설명하고 있다. 거경궁리는 정주학(程朱學)의 학문 수양 방법으로 '거경'은 내적 수양 방법을 가리키는 말로 《논어》 〈옹야(雍也)〉에 처음 보인다. 경(敬)이란 인간에게 품부(稟賦)된 천명(天命)으로서의 선성(善性)이 순수하고 곧게 발할 수 있도록 성(性)에 영향을 주는 의식 작용을 미연에 없애버리는 수양법을 말한다. 이것은 조용히 앉아서 모든 잡념을 끊어버리는 정좌(靜坐)의 방법을 쓰거나, 한 가지 일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방법을 많이 활용한다. '궁리'는 외적 수양 방법을 가리키는 말로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처음 보이는데, 인간에게 품부된 천명으로서의 선성이 이미 욕심의 영향을 받아 굴절되려고 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순수하고 곧게 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적극 노력하는 수양법으로, 격물(格物)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말한다. 후세에 …… 담론하고 육왕학(陸王學)을 가리킨다. 육왕학은 주희(朱熹)의 이학(理學)에 반대하여 심학(心學)을 제창한 송(宋) 나라 육상산(陸象山)의 학문과 이를 계승하여 양명학(陽明學)으로 집대성한 명(明) 나라 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을 병칭하는 학술 용어이다. 육수부(陸秀夫) 1236~1279. 남송 말기 충신으로, 자는 군실(君實)이다. 육수부(陸秀夫)는 송(宋)나라 말엽의 충신이다. 육수부(陸秀夫)는 송나라가 원(元)나라에 의해 패망하자, 복주(福州)에서 익왕(益王)을 세우고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으며, 익왕이 죽자 다시 위왕(衛王)을 세우고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는데, 원나라 군사가 송의 최후 보루(堡壘)이던 애산(厓山)을 격파하자,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는 칼을 들고 처자를 바다에 빠져 죽게 한 다음 곧 위왕을 등에 업고 함께 바다에 빠져 죽었다. 《宋史 권451 陸秀夫列傳》 문천상(文天祥) 1236~1283. 중국 남송(南宋) 말기의 재상으로, 자는 송서(宋瑞) 혹은 이선(履善)이며 호는 문산(文山)이다. 1256년(이종4) 진사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후 원(元)나라에 대하여 시종 강경책을 주장하고 천도(遷都)를 반대하여 면직되기까지 하였다. 1275년(공종1) 원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당시 우승상이었던 문천상은 가산(家産)을 내어 의용군을 조직, 임안(臨安)을 지켰다. 다음 해에 공종(恭宗)의 명을 받아 원나라에 강화를 청하러 갔으나 포로가 되었고 겨우 탈출하여 돌아왔다. 원나라 세조(世祖)가 벼슬하기를 간절히 권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옥중에서 지은 장시(長詩) 〈정기가(正氣歌)〉를 부른 후 연산의 시시(柴市)에서 처형당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저서에 《문산전집(文山全集)》이 있다. 《宋史 권418 文天祥列傳》 대본(大本)과 달도(達道) 대본은 하늘이 명한 성(性)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이 미발한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해서 다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니, 중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하였다. 주희는 이 구절에 대해 주석하기를 "대본은 하늘이 명한 성이니, 천하의 이치는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도의 체이다. 달도는 성을 따름을 말하니, 천하와 고금에 함께 행하는 것으로 도의 용이다.[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 皆由此出, 道之體也. 達道者, 循性之謂,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라고 하였다. 이부주소(伊傅周召) 이는 은탕(殷湯)의 현상(賢相) 이윤(伊尹), 부는 은 고종(殷高宗)의 현상 부열(傅說), 주는 주실(周室)의 기초를 세우고 예악 제도(禮樂制度)를 제정한 주공(周公), 소는 주공과 함께 주실을 일으킨 소공(召公)을 가리킨다. 독실하게 …… 좋아한다 《논어》 〈태백(泰伯)〉에, "독실하게 믿으면서 배우기를 좋아해야 한다. [篤信好學]"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나라에 …… 것이다 《논어》 〈태백(泰伯)〉에, "돈독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착한 도를 지켜라.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문란한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세상에 도리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도리가 없으면 물러나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 가난하고 비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리가 없는데 부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耻也, 邦無道, 富且貴焉, 耻也.]"라는 말이 나온다. 나라에 …… 것이다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에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에는 자신의 뜻을 표현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해야 하겠지만,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침묵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 《시경》에 '현명한데다가 사려가 깊어서 자기 몸을 보전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國有道, 其言足以興, 國無道, 其默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라는 말이 나온다. 명덕설(明德說) 《대학장구》에 나오는 "〈강고(康誥)〉에 '능히 덕을 밝힌다.'라고 하였고 〈태갑(太甲)〉에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라고 하였고 〈제전(帝典)〉에 '능히 큰 덕을 밝힌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스스로 밝힌 것이다.[康誥曰: "克明德." 太甲曰: "顧諟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선정신(先正臣) 고인이 된 바른 신하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주희를 가리킨다. 횡거(橫渠)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 1020~1077)로, 자는 자후(子厚), 시호는 헌공(獻公)이다. 횡거(橫渠)는 그의 호이다. 저서에 《정몽(正蒙)》, 《장자전서(張子全書)》 등이 있다. 성인 …… 자가 단계적으로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자로(子路)는 마루에는 올랐으나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由也, 升堂矣, 未入於室也.]"라고 하였다 자공(子貢)만이 …… 있었고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자공이 "부자의 문장은 들을 수 있었지만, 부자께서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한 데 대해, 주희가 주석에서 "성인의 문하에서는 가르침이 등급을 뛰어넘지 않기에, 자공이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자에게 성과 천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그 훌륭함에 감탄한 것이다.[蓋聖門敎不躐等, 子貢至是, 始得聞之而歎其美也.]"라고 하였다. 증칠(曾漆) 공자의 제자 증자와 칠조개(漆雕開)를 병칭한 말이다.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을 권했을 때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吾斯之未能信]"라고 대답하자, 공자가 기뻐했다는 말이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온다. 강서(江西)의 학문(學問) 송(宋) 나라의 육구연(陸九淵, 1139~1193)의 학문을 말한다. 그가 강서의 금계(金溪)에서 출생했으므로 그의 학술을 강서학파라고 한다. 육구연의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象山)이다. 중국 남송(南宋)의 철학자로, 끊임없는 탐구와 연구를 강조한 주희(朱熹)와 달리 내면의 성찰과 자습(自習)을 중시하였다. 사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여 그 선이 물욕으로 더럽혀지고 소멸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다시 생성, 발전시킬 수 있고, 그러한 과정에서 도(道)의 가장 높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사상을 심학(心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육구연의 사상은 3세기 이후 명나라의 성리학자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완성되었고, 따라서 이들을 통틀어 육왕학파(陸王學派)라고 불러 정주학파(程朱學派)와 구별하였다. 고정(考亭) 선생 고정은 남송의 철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호이다. 원래는 지명으로 지금의 건양시(建陽市)이다. 주희가 63세 때인 1192년 6월에 이곳에 고정서원(考定書院)을 짓고 강학하였기 때문에 주자를 고정 선생이라고도 불렀다. 이를 기반으로 고정학파(考亭學派)가 형성되었는데, 뒤에 이를 존숭하여 민학(閩學)으로 부르게 되었다. 빈빈(彬彬)함을 …… 있었는데 문질빈빈(文質彬彬)을 설명한 말로 문채와 본바탕이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잘 조화된 군자라는 말이다. 문(文)이 …… 멸하여 《논어》 〈옹야(雍也)〉에 "바탕이 문채보다 지나치면 촌스럽게 되고, 문채가 바탕보다 지나치면 겉치레에 흐르게 되나니, 문채와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무무(貿貿) 무식하고 뒤떨어짐이다. 극기(克己) 자기의 사욕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가는 것이 인을 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가면 천하가 인을 허여할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고 하였다. 《論語集註 顔淵》 사물(四勿) 네 가지 하지 말라는 것으로,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묻자,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구이(口耳) 구이지학(口耳之學)의 준말로, 천박한 공부를 뜻한다. 선인(善人)과 …… 악정자 극(樂正子克)도 맹자는 자신의 제자 악정자(樂正子)를 평해서 선인(善人)과 신인(信人)의 사이에 위치하고, 미인(美人)·대인(大人)·성인(聖人)·신인(神人)의 아래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孟子 盡心下》 동자(董子) 한대(漢代)의 학자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로, 서한의 사상가, 금문경학(今文經學)의 대가이다. 《춘추(春秋)》의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고 《공양전(公羊傳)》을 정밀하게 연구했다. 경제 때 박사가 되었고 무제 때 현량문학지사(賢良文學之士)가 되어 강도왕(江都王)의 재상이 되었다. 후에 교서왕(膠西王)의 재상이 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수학하며 저술하였다. 조정에 큰일이 있으면 늘 사람을 보내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지금 전하는 그의 저술로는 《춘추번로(春秋繁露)》가 있다. 한공(韓公) 당나라 한유를 가리킨다. 오계(五季) 오대(五代)라고도 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분열이 심하고 왕조의 교체가 짧은 기간에 자주 일어난 시기로 당(唐)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의 약 50년간의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의 왕조로는 후량(後梁, 907~923), 후당(後唐, 923~936), 후진(後晉, 936~946), 후한(後漢, 946~950), 후주(後周, 950~959)가 있다. 염락(濂洛)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頥),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頥) 형제를 가리키지만, 통상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로,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 등 송대(宋代)의 성리학자들을 함께 지칭한다. 육씨(陸氏)의 형제 송나라 육구령(陸九齡, 1132~1180)·육구연(陸九淵, 1139~1193) 형제를 가리킨다. 아호(鵝湖)에서 …… 것은 아호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신주(信州) 연산현(鉛山縣)에 있는 산으로,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주희와 육구령(陸九齡),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이 산의 아호사(鵝湖寺)에 모여 논쟁을 펼친 바 있다. 논쟁의 핵심은 학문하는 방법에 있어서 주희는 성현의 책을 널리 공부한 뒤에 요약하기를 주장하고, 육씨 형제는 사람의 본심을 발명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를 주장한 것인데, 주희는 육씨에 대하여 '태간(太簡)'이라 비판하고, 육씨는 주희에 대하여 '지리(支離)'라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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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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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태극도 人具太極圖 살펴보면 마음에는 태극(太極)83)이 있고 또한 음양동정(陰陽動靜)의 리(理)가 있다. 정(靜)한 것은 형(形)이 생(生)한 것이고 동(動)한 것은 신(神)이 발(發)한 것이니 바야흐로 그 동정(動靜)이 미형(未形)에 그 리(理)가 이미 갖추어지니 이것을 일러 '태극(太極)'이라고 한다. 한 번 동(動)하고 한 번 정(靜)하는데 미쳐서는 서로 근본이 되니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그곳에 갖추어진다. 인의예지의 성이 갖추어지면 인의예지의 단(端)이 그곳에서 발하게 된다. 사단(四端)이 발하여 선악이 나누어져서 만 가지 일이 나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복희(伏羲)·요순(堯舜) 이후 공맹(孔孟) 이전에 서로 전하고 서로 주고받은 심법(心法)이니 그 말이 성인의 경(經)과 현인의 전(傳) 가운데에 자세히 갖추어 실려 있다.맹씨 이후에는 정확하게 발하여 전하는 자가 없어서 천년의 뒤에는 오직 염계(濂溪) 선생만이 《역전(易傳)》 중에서 태극(太極) 두 글자를 얻어 그려서 도(圖)를 만들고 발(發)하여 설(說)을 지어84) 우리 도의 일관된 목적으로 삼았다. 우리 자양선생(紫陽先生)에 미쳐서 그 도(圖)와 그 설(說)이 또 크게 펼쳐지고 분명하게 드러나85) 삼재(三才)의 일리(一理)가 서로 합한 것이 마치 부절(符節)이 서로 들어맞는 것 같았으니 아!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주자(周子)가 편찬한 〈자양석전조절(紫陽釋傳條節)〉을 줍고 모아서 개인적으로 〈인구태극도(人具太極圖)〉를 지어 자성(自省)의 도구로 갖추어놓았으니 내가 망령된 것이 아니라 자양 주자의 뜻이다.또 살펴보건대 희(羲)·우(禹)의 도서오수(圖書五數)86)의 중(中), 요(堯)·순(舜)의 인심도심(人心道心)의 기미(幾微),87)문(文)·무(武)·주공(周公)의 건중건극(建中建極)의 묘(妙),88) 공자(孔子)의 역유태극(易有太極)·오도일관(吾道一貫)의 리(理),89) 자사(子思)의 계신공구(戒愼恐懼)90)의 전(前), 증자(曾子)의 명덕(明德)91)의 처음, 맹자(孟子)의 본선지성(本善之性)92)은 이른바 동정(動靜)이 아직 형태가 없어도 그 리(理)가 이미 갖추어진 때라는 것이다. 희·우의 오승십지후(五乘十之後), 요·순의 유정유일지시(惟精惟一之時),93)문·무·주공의 경의상승지제(敬義相勝之際), 공자의 시생양의지발(是生兩儀之發), 증자의 명명덕지지선지후(明明德止至善之後), 자사의 은미근독지중(隱微謹獨之中), 맹자의 인유사단지설(人有四端之說)은 이른바 동정이 서로 뿌리가 되어 사덕(四德)·사단(四端)에 갖추어져 발한 것이다. 여기서 그 일체(一軆)·일용(一用)은 비록 동정(動靜)의 다름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체가 세워져야만 용이 쓰임이 있게 되니 그 실제는 일본(一本)일 뿐이다.한 번 동정하여 서로 시작이 되고 끝이 되는 것은 경(敬)일 뿐이다. 또 오성(五性)의 차례는 본도(本圖)의 오행(五行) 차례와 다른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형(形)은 음(陰)이 하는 것이고, 신(神)은 양이 발한 것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중(中)이다', '인(仁)이다.'라고 하는 것이 이른바 양이고 '정(正)이다', '의(義)이다.'라고 하는 것이 이른바 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인례(仁禮)를 왼쪽에 두고 의(義)를 오른쪽에 두었는데 인(仁)은 사성(四性)의 처음이기 때문에 왼쪽의 머리에 두고, 의(義)는 인의 상대이기 때문에 오른쪽의 위에 두는 것이니 스스로 천착한 것이 아니다. 계신공구(戒愼恐懼)의 전에는 태극(太極)의 체(軆)를 볼 수 있고, 발하여 중절(中節)한 때에는 태극의 용(用)을 볼 수 있다. 진묘(眞妙)의 정(精)을 체득하는 것은 마땅히 야기(夜氣)가 깨끗한 아침에 얻을 수 있다. 按心有太極。 亦有陰陽動靜之理。 靜者形之生。 動者神之發。 方其動靜未形。 其理已具。 是謂太極。 及其一動一靜。 互相爲根。 則仁義禮智之性具焉。 仁義禮智之性具則仁義禮智之端發焉。 四端發而善惡分萬事出矣。 此乃伏羲堯舜以下。 孔孟以前。 相傳相受之心法。 其言具載於聖經賢傳之中。 孟氏以後。 無有的發而傳之者。 千載之下。 惟有濂溪夫子得太極二字於易傳之中。 畫而爲圖。 發而作說。 爲吾道一貫之的。 及我紫陽老先生而其圖其說。 又大暢明較著。 而三才一理之相合。 若符節之相契。 嗚呼! 無以加矣。 謹掇拾周子洎紫陽釋傳條節。 私作人具太極圖。 以備自省之具。 非愚之妄。 紫陽之意也。 又按羲禹圖書五數之中。 堯舜人心道心之幾。 文武周公建中建極之妙。 孔子易有太極吾道一貫之理。 子思戒謹恐懼之前。 曾子明德之初。 孟子本善之性。 乃所謂動靜未形。 其理已具之時也。 羲禹以五乘十之後。 堯舜惟精惟一之時。 文武周公敬義相勝之際。 孔生是生兩儀之發。 曾子明明德止至善之後。 子思隱微謹獨之中。 孟子人有四端之說。 乃所謂動靜相根。 四德具四端發者也。 是其一軆一用。 雖有動靜之殊。 必其體立而用有以行。 其實一本而已。 一動靜而相終始者。 敬而已矣。 又五性之次。 與本圖五行之次不同者。 朱子曰: "形陰之爲。 神陽之發。" 又曰: "中也仁也。 所謂陽也。 正也義也。 所謂陰也。" 故今以仁禮居左。 以義居右。 仁爲四性之首。 故居左之上。 義爲仁之對。 故居右之上。 非自鑿也。 戒愼恐懼之前。 可見太極之軆。 發而中節之時。 可見太極之用。 軆眞妙之精。 當於夜氣淸朝見得。 태극(太極) 태극은 최초의 혼돈(混沌)한 상태로 있는 기운으로 우주 만물의 근본이 된다.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역에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라고 하였다. 태극(太極) …… 지어 주돈이(周敦頥)가 지은 《태극도설》은 그림인 〈태극도〉와 그에 대한 주돈이 자신의 해설인 〈태극도설〉로 구성되어 있다. 천지가 나누어지기 이전을 태극이라 하는데, 《주역》에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음(陰)과 양(陽)을 낸다.[易有太極, 是生兩儀.]"라는 말에 근본하여, 태극도를 그리고 설명을 가한 것이다. 자양(紫陽)선생에 …… 드러나 주희(朱熹)는 주돈이의 〈태극도〉와 《태극도설》에 주석을 달았는데, 이를 각각 〈태극도해(太極圖解)〉와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라고 부른다. 《태극도해》는 그가 지은 태극도에 대한 해설서인 《태극해의(太極解義)》를 가리킨다. 《태극해의》는 도(圖)의 해설인 〈태극도해〉와 도설(圖說)의 해설인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로 구분되는데, 〈태극도해〉 또는 〈태극도설해〉라고 말하면서 책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리대전》 권1에 수록되어 있다. 도서오수(圖書五數) 도서는 하도낙서(河圖洛書)를 말한다. 하도는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黃河)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새겨진 그림으로, 1에서 10까지의 수가 반점의 형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복희씨가 이를 보고 《주역》의 팔괘(八卦)를 그렸다고 한다. 낙서는 하(夏)나라 우(禹) 임금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1에서 9까지의 수가 역시 반점의 형식으로 배열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우 임금이 이를 보고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지었다 한다. 기미(幾微) 《주역》 계사에 기자동지미(幾者動之微)라 하여, 군자는 미(微)도 알고 창(彰)도 안다 하였으며, 기(幾)를 아는 것은 신(神)이라 하였거니와 기미는 동정(動靜)의 은미한 데서 극치의 경지를 찾는 것이다. 건중 건극(建中建極)의 묘(妙) 중정(中定)의 도(道)를 정(定)하여 만민(萬民)의 모범적인 법칙을 세우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오도일관(吾道一貫)의 리(理) 공자가 제자 증자에게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하느니라.[參乎 吾道一以貫之]" 하니, 증자가 '예' 하고 대답했다. 공자가 밖으로 나간 뒤, 대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다른 문인(門人)이 증자에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서일뿐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대답해 주었다. 《論語 里人》 계신공구(戒愼恐懼) 경계하고 근신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명덕(明德) 《대학장구》 경1장에 "대학의 도는 명명덕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고,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라고 하였다. 본선지성(本善之性) 존양(存養)은 본심(本心)을 잘 보존하고 선성(善性)을 잘 기르는 것으로, 유가(儒家) 가운데 자사(子思)와 맹자(孟子)는 사람의 성품은 본디 선하므로 이를 잘 보존하고 기르면 하늘도 섬길 수 있다고 여겼다. 유정유일지시(惟精惟一之時) 순 임금이 우(禹)에게 제위를 선양하며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해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大禹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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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수장지도 中庸首章之圖 삼가 살펴보건대 《중용(中庸)》 수장(首章)의 수절(首節)은 '성도교(性道敎)'94)를 나누어 말했다. 이절(二節)은 도(道)의 떨어질 수 없음과 존양(存養)의 일을 말했다.95) 삼절(三節)은 성찰(省察)의 일을 말하고, 사절(四節)은 중화(中和)의 대본달도(大本達道)를 말했다. 마지막 절에서는 중화(中和)의 지극한 공을 말했다. 이것은 주자장구(朱子章句)에서 이미 분명하게 해석했으니 다시 어찌 터럭 하나라도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다만 '성도교(性道敎)' 세 글자는 한 장의 강령(綱領)이 되고 서로 맥락(脉絡)이 되니 그 문장이 비록 서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뜻은 실로 서로 관통(貫通)한다.그 '희로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다.'96)라고 하고, '중(中)은 천하의 대본이다.'97)라고 말한 것은 성(性)의 대본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그 '도(道)란 잠시도 떨어질 수 없으니 떨어지면 도가 아니다.'98)라고 하고, 또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99)라고 하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100)라고 한 것은 도의 전체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그 '보지 않는 것에도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않는 것에도 두려워한다.'101)라고 한 것은 존양(存養)의 일이고 성을 따르는 법이다. 그 '숨은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작은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으므로 군자는 그 혼자 있을 때를 삼간다.'102)라고 한 것은 성찰(省察)의 일이고 도를 닦는 법이다. 그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103)라고 한 것은 중화(中和)의 지극한 공(功)이고 성인의 가르침이니 실로 성(性)과 도(道)에 근본 한 것이다. 삼가 조목을 나누어 도(圖)를 작성하여 잊지 않고 때때로 익히도록 갖추어놓고, 또 지혜 있는 자의 교정을 기다린다. 謹按中庸首章之首節。 分言性道敎。 二節言道之不可離及存養之事。 三節言省察之事。 四節言中和之大本達道。 終言中和之極功。 此朱子章句已分明釋之矣。 更何毫髮之可間哉? 但性道敎三字。 爲一章之綱領。 而相爲脉絡。 其文雖不相續。 其義實相貫通。 其曰: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中者天下之大本也者'。 指性之大本而言。 其曰: '道也者不可須臾離。 可離非道也'。 又曰: '發而皆中節謂之和。 和也者天下之達道也者'。 指道之全軆而言。 其曰: '戒愼乎其所不覩。 恐懼乎其所不聞者'。 存養之事而率性之法也。 其曰: '莫顯乎隱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者'。 省察之事而修道之法也。 其曰: '致中和天地位萬物育者'。 中和之極功而聖人之敎敎。 實本於性與道也。 謹條分作圖。 以備時習之不忘。 且待智者之較正焉。 성도교(性道敎) 《중용장구》 제1장에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품절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하였다. 참고로 이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에 "사람과 물건이 각기 그 성(性)의 자연을 따르면 그 일상생활 하는 사이에 각기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이른바 '도(道)'라는 것이다.[人物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間,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라고 하였다. 이절(二節)은 …… 말했다.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하고, 일단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게 되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한 말을 합쳐서 동(動)할 때의 공부와 정(靜)할 때의 공부를 설명한 말이다. 희로애락이 …… 중이다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한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라는 말이 나온다. 중(中)은 …… 대본이다 《중용장구》 제1장에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라는 말이 나온다. 도(道)란 …… 아니다 《중용장구》 수장(首章)에 자사가 말하기를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라고 하였다. 발하여 …… 화(和) 《중용장구》 제1장에 "일단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게 되는 것을 화라고 한다.[發而皆中節謂之和.]"라는 말이 나온다. 화라는 …… 도이다 《중용장구》 제1장에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는 말이 나온다. 보지 않는 …… 두려워한다 《중용장구》 수장(首章)에 자사가 말하기를 "군자는 보지 않는 것에도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않는 것에도 두려워한다.[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하였다. 숨은 …… 삼간다 《중용장구》 수장(首章)에 자사가 말하기를 "숨은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작은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하였다. 중(中)과 …… 길러진다 《중용장구》 제1장에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될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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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분절변의 中庸分節辨義 삼가 생각건대 《중용(中庸)》 한 권의 책은 자사(子思)가 도를 전한 글이다. 우러러 옛날을 상고해보면 복희(伏羲)108)는 획(畫)을 긋고, 문왕(文王)은 단(彖)을 쓰고,109) 주공(周公)은 사(辭)를 쓰고, 공자(孔子)는 십익(十翼)을 지었다.110) 《시(詩)》·《서(書)》·《예(禮)》·《악(樂)》의 경(經), 《논어(論語)》·《맹자(孟子)》·《춘추(春秋)》의 책에 이르러서는 간절(切)하고 명적(明的)하고 온인(溫仁)하고 정려(正厲)한 자태가 수연(粹然)하게 성현(聖賢)의 성정(性情)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로 한두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때에는 고금이 있고 풍속에는 순박함과 경박함이 달라서 그 한때의 언어가 규침(規箴)·경절(警切)의 사이에서 발한 것이 혹, 상략(詳略)의 같지 않음이 있고, 고하(高下)의 난이(難易)가 있어서, 혹 당겨도 펼쳐지지 않고, 펼쳐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쉽게 그 단서(端緖)를 볼 수 없다. 그 체용(體用)·본말(本末)·거세(巨細)·대소(大小)를 모두 포함(包含)하여 스스로 하나의 책을 만들었는데 하나의 책 가운데에 다 포괄하여 철두철미하게 시종을 갖춘 것으로 《중용》 한 책의 상세함과 절실함만 같은 것이 아직 없다.일찍이 이 책을 읽고 자사(子思)가 앞 성인이 발하지 않은 온축된 도를 발한 것을 알았고, 또 《장구(章句)》를 읽고 주자가 앞의 현인이 발하지 않은 뜻을 발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근본을 구하여 말에 미치게 하고, 그 흐름을 얻어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 것을 아침에 생각하고 저녁에 읽어도 좁은 소견[蠡測]111)에 만에 하나 없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감히 말하기를 "자사가 성도교 (性道敎) 세 글자를 한 편의 강령(綱領)으로 삼은 것은 명명덕(明明德) 세 글자를 대학의 강령으로 삼은 것과 같다. 한편 가운데에 만 가지 말과 만 가지 일이 성도교 세 가지 것의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않고, 다시 실마리가 절이 되니 뜻이 매우 분명하고 맥락(脉絡)·조리(條理)가 저절로 단서(段緖)가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대개 주자가 사절(四節)로 나누고 요씨(饒氏)112)가 육절(六節)로 분절한 것은 비록 차이가 있더라도 뜻과 맥락은 모두 통하니 후생 말학인 내가 어찌 입을 놀리겠는가? 다만 내 뜻에서 망령되이 성도교(性道敎) 세 글자를 미루어 한 편의 강령으로 삼고 31장 가운데에서 구하였으니 그 강령의 요지는 각각 분파가 있고 상고할 만한 분단(分段)과 입절(立節)이 있는 것 같다.가만히 생각건대 주자가 공맹과 밝음을 나란히 하여 어린 나이에 이 책을 받아 읽고 침잠(沉潛)하기를 반복하여 60세라는 오래된 이후에 《장구(章句)》를 이내 이루었으니 반드시 이 부분에 소견이 있을 것인데 끝내 상고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과연 망령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수백 번을 읽고 3개월을 생각하였지만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그 의혹이 더욱 깊어짐을 보고는 과연 나의 의혹을 끝내 풀 수 없고, 의혹하면서도 풀 수 없어 차록(箚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이치에 박식한 군자의 질정을 기다린다. 특별히 나의 이론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고, 전에 연구해놓은 것과는 다른 이론을 구할 뿐이다. 謹惟中庸一書。 子思子傳道之文也。 仰稽于古。 羲有畫而文有彖。 周有辭而孔作翼。 至於詩書禮樂之經。 語孟春秋之書。 切明的。 溫仁正厲之態。 粹然畫出聖賢之性情者。 誠非一二言而止耳。 然時有古今。 俗異淳澆。 其一時言語。 發於規箴警切之間者。 或有詳略之不同。 高下之難易。 或引而不伸。 伸而不反。 未易見其端緖。 其體用本末巨細大小。 俱含並包。 自爲一家。 咸括於一篇之中而徹上徹下。 該始該終者。 未有若中庸一書之詳切。 嘗讀是書。 知子思發前聖未發之蘊。 又讀章句。 知朱夫子發前賢未發之意。 求其本而及之末。 得其流而泝其源。 朝思暮讀。 不能無管窺蠡測之萬一。 乃敢言之曰: "子思子性道敎三字。 爲一篇之綱領者。 若明明德三字。 爲大學之綱領。 一篇中萬言萬事。 不出於三者之中。 而更端作節。 意甚分明。 脉絡條理。 自有段緖。" 盖朱夫子四節之分。 饒氏子六節之辨。 雖有異同而意脉皆通。 後生末學。 何所容喙? 但於愚意妄以性道敎三字推之。 以爲一篇之綱領。 而求之於三十一章之中。 則其綱領旨趣。 各有分派。 似有分段立節之可考。 竊念朱夫子以並駕鄒魯之明。 受讀是書於早歲。 沉潛反復。 至於六十年之久而後。 章句乃成。 則必有所見於此。 而終無可考。 是知愚累之見。 果有妄矣。 讀之屢百遍。 思之三閱月。 愈久而愈見其惑。 則果知愚累之惑。 終莫能釋。 惑而不釋。 未免箚錄。 以待求正於博理君子。 非敢別執已論。 求異於前脩也。 복희(伏羲) 중국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복희(宓羲), 포희(包犧), 포희(庖犧), 복희(伏戱), 여희(慮犧), 희황(犧皇), 황희(皇犧)라고도 한다.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처음 팔괘를 그리고 서계(書契)를 만들었다고 한다. 복희씨(伏羲氏) 때에 등에 1에서부터 10까지의 문양이 그려진 용마(龍馬)가 나왔는데 이것이 하도(河圖)로, 복희씨가 이를 보고 세 획으로 이루어진 팔괘(八卦)를 그렸다고 한다. 또 하(夏)나라 우(禹) 임금 때 등에 1에서 9까지의 점이 박혀 있는 거북이 나왔는데 이것이 곧 낙서(洛書)로, 우 임금이 이를 보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고 한다. 《尙書正義 洪範, 顧命》 문왕(文王)은 …… 쓰고 상(商)나라 말기에 주(紂)의 신하 숭후호(崇侯虎)가 성인의 덕을 지닌 서백(西伯) 문왕을 시기하여 주에게 참소하여, 문왕은 유리(羑里)의 감옥에 갇혔다. 이때 문왕은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리면서 64개의 괘마다 단사(彖辭)를 붙였다고 한다. 《周易 繫辭》 공자(孔子)는 …… 지었다 공자의 십익(十翼)은 《주역》 가운데 공자(孔子)가 지은 〈단전 상(彖傳上)〉·〈단전 하(彖傳下)〉·〈상전 상(象傳上)〉·〈상전 하(象傳下)〉·〈계사전 상(繫辭傳上)〉·〈계사전 하(繫辭傳下)〉·〈문언(文言)〉·〈서괘(序卦)〉·〈설괘(說卦)〉·〈잡괘(雜卦)〉의 십전(十傳)을 가리킨다. 《역(易)》의 작자에 대해선 여러 이설(異說)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복희씨(伏羲氏)가 팔괘(八卦)와 64괘(卦)를 그렸으며, 문왕(文王)이 이것을 연역하여 괘사(卦辭)를 짓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짓고, 공자가 십익(十翼)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여측(蠡測) 고둥 껍데기로 바다의 깊이를 측량하는 것처럼 자신의 국량과 식견이 천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터득한 점이 없지 않다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의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고둥 껍데기로 퍼서 바닷물을 재며, 풀줄기로 종을 치는 격이다.[以管窺天, 以蠡測海, 以筳撞鍾.]"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文選 권45 答客難》 요씨(饒氏) 송나라 말기의 이학가(理學家)인 요노(饒魯)를 가리킨다. 그는 여간(餘干) 사람으로, 자가 백여(伯與), 중니(仲尼)이며, 황간(黃幹)의 문하(門下)로서 석동서원(石洞書院)을 세우고 강학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희를 근본으로 하였으나, 주희의 학설을 그대로 고수하지만은 않았다. 《오경강의(五經講義)》·《어맹기문(語孟紀聞)》·《근사록주(近思錄注)》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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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분위오대절 中庸分爲五大節 수장(首章)이 저절로 제일대절(第一大節)이 된다. 이 절에서는 '성도교(性道敎) '세 글자를 말하니 한 편의 강령(綱領)이 된다.중니(仲尼)의 '왈장(曰章)'으로부터 '귀신장(鬼神章)'까지가 제이대절(第二大節)이 된다. 이 절은 성도교 세 글자 중에 도(道)를 끄집어내어 말했다. 맨 먼저 '도지난행난명(道之難行難明)'을 말하고, 이어서 '지인용(知仁勇)' 세 글자를 말해 도(道)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았다. 다음으로 '군자(君子)의 도'를 말했으니 가깝게는 부부(夫婦)로부터 멀리는 천지(天地)에 이르고 '귀신 불견불문지극(鬼神不見不聞之極)'에 이른 연후에 그쳤다.'순기대효장(舜其大孝章)'으로부터 '애공문정장(哀公問政章)'까지가 제삼대절(第三大節)이 된다. 이 절은 상절(上節) '지비지은지도(至費至隱之道)'를 이어서 성인의 가르침이 또한 지비(至費)하고 지은(至隱)함을 말했다. 대개 맨 먼저 성인의 가르침은 한 가정에서 말미암고 한 가정의 가르침은 효보다 큰 게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대순(大舜)·문무(文武)·주공(周公)의 효로써 말했다. 다음으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극치를 말했으니 성인의 가르침 또한 여기에 이르러 더할 것이 없게 된다.'성명장(誠明章)'부터 '유천하지성장(惟天下至誠章)'까지가 제사대절(第四大節)이 된다. 이 절은 상절(上節) '천도인도지언(天道人道之言)'을 이어서 '성도교(聖道敎)' 세 가지 것의 의(義)를 통론(統論)했다. 대개 천도(天道)·인도(人道)의 의(義)는 다음 장이 앞장보다 점점 고원해져서 천도를 말하면 '진기성(盡其性)'에서 시작하여 '천류돈화지극(川流敦化之極)'에서 끝마치고, 인도를 말하면 '치곡(致曲)'113)에서 시작하여 '발육만물지성(發育萬物之盛)'에서 끝마치니, '성도교(性道敎)' 세 가지 것의 의(義)는 그 안에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말장(末章)은 저절로 제오대절(第五大節)이 된다. 이 절은 제일절(第一節)과 서로 합치된다. 다만 제일절(第一節)은 은(隱)은 말하여 비(費)에 이르고, 여기의 일절(一節)은 비(費)를 말하여 은(隱)에 이른다. 대개 수장에서 '근독지사(謹獨之事)'를 말하고 미루어 '천하평지성(天下平之盛)'에 이르고, 말장(末章)은 '화민지교(化民之敎)'의 말로 시작하여 다음으로 '덕유여모(德輶如毛)'를 말하여 솔성(率性)의 도(道)를 풀이했다. 마지막에는 '무성무취(無聲無臭)'를 말하여 천명(天命)의 성(性)을 풀이했다. 정(程) 선생의 이른바 '마지막에 다시 합하여 일리(一理)를 만들었다.'114)라는 것이 이것이다. 首章自爲第一大節。 此節言性道敎三字。 爲一篇之綱領。 自仲尼曰章至鬼神章。 爲第二大節。 此節於三字中拈出道字言之。 首言道之難行難明。 仍發知仁勇三字。 爲入道之門。 次言君子之道。 近自夫婦。 遠至天地。 以至於鬼神不見不聞之極然後已焉。 自舜其大孝章。 至哀公問政章爲第三大節。 此節承上節至費至隱之道。 言聖人之敎。 亦至費而至隱。 盖首言聖人之敎。 由於一家。 一家之敎。 莫大於孝。 故以大舜文武周公之孝言之。 次引夫子之言。 以言治天下國家之極致。 聖人之敎。 至此無以加矣。 自誠明章。 至惟天下至誠章爲第四大節。 此節承上節天道人道之言。 而統論聖道敎三者之義。 盖天道人道之義。 一章深於一章。 漸漸高遠。 言天道則始於盡其性而終於川流敦化之極。 言人道則始於致曲。 終於發育萬物之盛。 而性道敎三者之義。 無不備於其中矣。 末章自爲第五大節。 此節與第一節相合。 但第一節言隱而至於費。 此一節言費而至於隱。 盖首言謹獨之事。 推而至於天下平之盛。 末章始言化民之敎。 次言德輶如毛。 以釋率性之道。 終言無聲無臭。 以釋天命之性。 程夫子所謂末復合爲一理者此也。 치곡(致曲) 성(誠)이 미흡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대현(大賢) 이하의 사람들도 자기의 부분적인 선단(善端)을 확대하여 지성(至聖)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3장에 "천하지성의 성인 다음가는 사람도 부분적인 선을 점차 확대해서 지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부분적인 선단으로도 내면이 성실해질 수 있으니, 내면이 성실해지면 밖으로 금방 드러나고, 일단 드러나면 갈수록 현저해지고, 현저해지면 환히 밝아지고, 환히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이 감동을 하면 변화되고, 변화되면 동화된다. 이와 같이 오직 천하의 지성이어야만 남을 동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其次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라는 말이 나온다. 마지막에 …… 만들었다 《중용》의 체제에 대해 정자가 "《중용》은 처음에 일리를 말하고, 중간에 흩어져서 만사가 되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합하여 일리가 되었다.[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중용장구》 제1장 원문 아래 주석으로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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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문학도 德性問學圖 《중용(中庸)》의 이 일절(一節)은 학문하는 본말공부 (本末工夫)를 다 갖추고 있어서 선유(先儒)가 이것에 삼가지 않음이 없었지만 다만 우리 자양(紫陽)115)선생만이 더욱 이것에 정밀(精密)하였다. 평소에 힘쓰는 것이 이 두 가지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116) 이에 삼가 손으로 그려서 도(圖)를 만들어 항상 마음과 눈으로 관찰하고 살피었고, 또 진서산(眞西山)117)의 《심경心經》 말장(末章)과 황돈(篁敦)이 주워 모은 전체 대용(大用)의 설을 참고하였다.118)오명중(吳明仲)119)이 나를 용두초사(龍頭草舍)로 방문하여 며칠간 머무르 면서 〈퇴계심통성정도(退溪心統性情圖)〉120)를 읽고,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의 말에 이르러 명중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리(理)는 본래 적연부동(寂然不動)하니 어찌 리가 먼저 발하는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당연히 처음에는 그의 말을 잠시 의심하여 답을 하지 못하였다. 물러감에 미쳐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性)은 곧 리이니 그것이 미발(未發)을 당하여 리는 성에 갖추어져 있다. 그것이 기발(旣發)에 미쳐서 리기(理氣)가 동(動)하여 정(情)이 된다. 그렇다면 이 리의 미동(未動)은 성이 되고 기동(旣動)은 정이 되기 때문에 리는 본래 적막한 느낌이 있는데 적(寂)이라는 것은 체(軆)요 감(感)이라는 것은 용(用)이다. 이미 감(感)이라고 했다면 동(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리가 먼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다. 리의 지선(至善)은 혹 어둡고 혹 박잡한 기에 섞이지 않으니 이것이 중절(中節)의 정이 되고, 기가 발하여 리가 따르는 것은 지선의 리가 기에서 명(命)을 들으니 이것은 부중(不中)의 정이 된다.121) 어찌 리의 적연부동함이 마치 고목의 죽은 재처럼 반드시 기가 발하기를 기다린 후에 리가 따라서 발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그 후에 황면재(黃勉齋)122)가 "사물에 감응하여 동하는 경우, 혹은 기가 동하고 리가 따르며 혹은 리가 동하고 기가 낀다. 이로 말미암아 지선의 리가 기의 명령을 들으니 이로 인하여 선악이 갈라진다."라고 말한 것을 보았다. 그런 연후에 왕성히 크게 깨달았고, 또 퇴계 리발의 설을 알았으니 나의 소견이 아니고 유래가 있는 것이다.【명중의 이름은 이정(以井)이고 한림(翰林) 희도(希道)의 아들인데 상상(上庠)123)에 올랐다가 일찍 죽었다.】주자(周子)가 말하기를 "태극(太極)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는다."124)라 하니 대개 태극은 리이다. 만약 "리는 전혀 발한 것이 없다."라고 한다면 주자가 무엇 때문에 "태극이 동한다."라고 말했겠는가? 주자(朱子) 또한 말하기를 "기에 이미 동정이 있으면 실린 리 또한 어찌 동정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개 기란 리의 기(器)이다. 지금 기를 보니 또한 미악(美惡)이 있다. 만약 여기에서 리라고 한다면 하늘에 있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본래 선악의 다름이 없다. 혹자가 주자에게 묻기를 "성(誠)이란 이 책의 추뉴(樞紐)이고 수장(首章) 한편의 요체인데 성(誠)을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수장의 천명지성(天命之性)의 성(性) 자는 21장 자성명(自誠明)의 성(誠)과 동의어이고,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도(道) 자는 20장의 성지(性之)의 성(誠)과 서로 유사하며,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의 교(敎) 자는 25장의 성자비자성기야(誠者非自成己也)·소이성물(所以成物)의 성(誠) 자와 서로 흡사하다. 계구신독(戒懼愼獨)125) 즈음에 성(誠)이 없으면 진실로 망령되지 않을 수 없어서 존양성찰(存養省察)의 공부126)가 세워지지 않게 된다. 미발에 중정(中靜)이 성(誠)이고 기발에 화동(和動)이 성(誠)이다.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지는 데에 이르면 지성(至誠)의 도(道)가 천지에 참여하여 화육(化育)을 돕는 극치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장(首章)에서 비록 성(誠) 자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성(誠)의 도가 그 가운데에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2장의 물건을 그릇에 담는 것에 이르러서는 담긴 물건이 움직이면 그릇이 따라서 움직이고 그릇이 움직이면 담긴 물건 또한 움직일 것이다. 리와 기가 어찌 항상 서로 떨어짐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리가 발하면 기가 따른다.'라는 것이 과연 근거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매번 《중용》 수장에서 '천명을 일러 성이라고 한다.'라고 하고, 《장구》에서 '기가 형을 이루면 리 또한 그곳에 부여된다.'127)라고 하는 구절을 읽음에, 대개 자사(子思)가 다만 리를 말하고 기를 말하지 않았는데 주자(朱子)가 한 개 기(氣)자를 첨가해서 리는 허투루 행할 수 없으니 반드시 기에 깃들게 하고 기는 스스로 선할 수 없으니 반드시 리에 도움을 받도록 밝혀놓았다. 이곳이 주자장구에서 앞에 현인이 발하지 못한 것을 발하여 크게 공이 있는 곳이다. 기가 비록 혼(昏)·명(明)의 다름이 있더라도 리의 밝은 것은 본디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이미 밝은 리를 따른다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은 즉 형을 이룬 기이니 또한 하늘의 명이고, 사람의 기질에서 미악(美惡)의 다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음이 없다.혹자가 묻기를 "《중용》은 실로 중화의 뜻을 겸했는데 기발의 뒤에 또한 중(中) 자를 썼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렇다. 발이중절(發而中節)의 중(中), 용기중어민(用其中於民)의 중(中), 군자시중(君子時中)의 중(中)은 기발의 중이고, 천하대본(天下大本)의 중(中), 치중(致中)의 중(中), 중립불의(中立不倚)의 중(中)은 미발의 중이다. 군자중용(君子中庸)의 중(中), 택호중용(擇乎中庸)의 중(中)은 기발·미발을 겸해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혹자가 묻기를 "수장에 또한 비은(費隱)의 도(道)가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12장에서 '비이은(費而隱)'을 말했고, 수장에서 '은이비(隱而費)'를 말함에 대개 비(費)와 은(隱)128)의 도는 일이 그렇지 않음이 없고, 물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크게는 천지요 은미하게는 부부(夫婦)이다. 티끌 하나의 작은 것과 만사의 광대함에도 리가 있지 않음이 없고 리에 은(隱)이 있고 비(費)가 있지 않음이 없다. 만약 수장으로 논한다면, 성(性)에서는 성 가운데에 비은(費隱)이 있으나 도(道)에서는 성(性)은 은이고 도는 비이다. 만약 오로지 도를 말하면 도 가운데 또한 비은이 있다. 교(敎)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비하여 은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예악(禮樂)·형정(刑政)의 소이연(所以然)129)을 구한다면 또한 지극히 은(隱)한 것이 그곳에 있게 된다. 그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은 비이고, 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은이다. 그 '희로애락의 미발'이라고 한 것은 은이고 그 '발하여 절도에 맞다.'라고 한 것은 비이다. '은미한 곳에서 신독한다.'는 것은 은이고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는 것은 비이다. 그러나 비 가운데 은이 있고, 은 가운데 또한 지극한 은이 있으니 일면을 통찰하여 숙독하고 정밀하게 탐구하면 그 맛이 무궁할 것이다. 몸가짐을 지극히 단속하고 미치는 것이 지극히 넓은 것은 비은(費隱) 두 글자가 최고일 테니 지극히 정미함을 미루고 만 가지 변화를 확대하여 비은(費隱) 위에서 공부한다면 얻는 것이 매우 넓을 것이니 학자는 마땅히 백배로 사색해야 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按中庸此一節。 該盡爲學本末工夫。 先儒莫不致謹於此。 而獨我紫陽老先生尤爲精密於此。 平生用力。 不外此二者。 玆謹手畫爲圖。 常常觀省于心目。 而又以心經末章及篁敦所摭全體大用之說參看。 吳明仲訪余於龍頭草舍留數日。 讀退溪心統性情圖。 至理發而氣隨之語。 明仲疑曰: "理本寂然不動。 安有理先發之理哉?" 余當初暫疑其言而不能答。 及退而自思。 以爲'性卽理也。 當其未發。 理具於性。 及其旣發。 理氣動而爲情。 然則是理之未動爲性。 旣動爲情。 故理固有寂感。 而寂者軆也。 感者用也。 旣曰感則非動而何? 故理先發而氣隨之。 理之至善。 不渾於或昏或駁之氣則是爲中節之情。 氣發而理隨之。 理之至善。 聽命於氣則是爲不中之情。 安有理之寂然不動。 如枯木死灰。 必待氣發而後理隨而發哉?' 其後見黃勉齋氏之說曰: "及其感物而動則或氣動而理隨之。 或理動而氣挾之。 由是至善之理。 聽命於氣。 善惡由之而判矣。" 然後汪然大覺。 又知退溪理發之說。 非自家所見而有自來矣。【明仲名以井。 翰林希道之子。 登上庠早歿。】 周子曰: "太極動而生陽。" 盖太極理也。 若曰'理全無所發'。 周子何以曰'太極動'云哉? 朱子亦曰: "氣旣有動靜則所載之理。 亦安得無動靜。" 盖氣者理之器也。 今觀氣亦有美惡。 若此理則在天在人。 固無善惡之殊。 或問朱子曰: "誠者此篇之樞紐。 首章一篇之軆要。 而不言誠何也?" 曰: "首章天命之性性字。 與二十一章自誠明之誠同意。 率性之謂道道字。 與二十章性之之誠相類。 修道之謂敎敎字。 與二十五章誠者非自成己也。 所以成物之誠字相似。 戒懼愼獨之際。 非誠不能眞實无妄。 而存養省察之工夫。 不能以立矣。 未發而中靜而誠也。 旣發而和動而誠也。 至於天地位萬物育則至誠之道。 可以參天地贊化育之極矣。 然則首章雖不言誠字。 誠之道貫徹於其中矣。 至於二章以物盛於器。 所盛之物動則器隨而動。 器動則所盛之物亦動。 理與氣何常有相離哉? 然則理發而氣隨者。 果無據歟?" 每讀中庸首章曰'天命之謂性'。 章句曰'氣以成形。 理亦賦焉'。 盖子思但言理而不言氣。 朱子添得一氣字。 以明理不可虛行而必寓於氣。 氣不能自善而必資於理。 此朱子章句發前賢之未發而大有功處也。 氣雖有昏明之殊。 而理之明者固自若也。 循其已明之理則可以變化氣質矣。 天命之謂性則成形之氣。 亦天之命也。 而人之氣質有美惡之殊者可見。 在天之以下無不皆然。 或問"中庸實兼中和之意。 則旣發之後。 亦下中字否?" 曰: "然。 發而中節之中。 用其中於民之中。 君子時中之中。 旣發之中也。 天下大本之中。 致中之中。 中立不倚之中。 未發之中也。 君子中庸之中。 擇乎中庸之中。 兼旣發未發而言也。" 或問"首章亦有費而隱之道歟?" 曰: "十二章言費而隱。 首章言隱而費。 盖費隱之道。 無事不然。 無物不有。 大而天地。 微而夫婦。 一塵之細。 庶事之廣。 莫不有理。 而理莫不有隱有費。 若以首章論之。 在於性則性之中有費隱。 在於道則性隱而道費。 若專言道則道之中亦有費隱。 至於敎則似若專費而無隱處。 然求其禮樂刑政之所以然則亦有至隱者存焉。 其曰: '不可須臾離者費也。' 而其曰: '不睹不聞者隱也。' 其曰: '喜怒哀樂之未發者隱也。' 而其曰: '發而中節者費也。' '愼獨於隱微者隱也。' 而天地位萬物育者費也。 然費之中有隱。 隱之中亦有至隱。 透得一面。 熟讀精探。 其味無竆。 所操至約而所及極博者。 無過於費隱二字。 推之至精。 擴之萬變。 費隱上做工夫。 所得甚廣。 學者當可百倍思索處。" 자양(紫陽)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여기서는 송(宋)나라 주희를 가리킨다. 주희의 아버지 주송(朱松)이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에 있는 자양산(紫陽山)에서 독서하였는데, 주희가 그곳에 청사(廳事)를 자양서당(紫陽書堂)이라 하였으므로, 자양은 주희의 호(號)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흡현에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세웠다. 평소에 …… 않는다 《중용》에 보이는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7장에 "군자는 덕성(德性)을 높이며 학문(學問)을 말미암는다.[君子尊德性而道問學.]"라고 하였다. 존덕성(尊德性)은 나에게 내재해 있는 천부(天賦)의 덕성을 지켜 가는 것으로 성의 정심(誠意正心)이 이에 해당되고 도문학(道問學)은 외재해 있는 온갖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터득해 가는 것으로 격물 치지(格物致知)가 이에 해당된다. 정주학파(程朱學派)에서는 도문학을 중시하는 한편 존덕성도 강조하였으며, 육왕학파(陸王學派)는 존덕성에 치중하였다. 진서산(眞西山) 남송(南宋)의 학자 진덕수(眞德秀, 1178~1235)로, 자는 경원(景元), 호는 서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복건성(福建省) 포성(浦城) 출신으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는데 강직하기로 유명하였다. 주자의 재전제자(再傳弟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성경현전(聖經賢傳)의 긴요한 내용을 뽑아 《심경(心經)》을 편찬하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대학연의(大學衍義)》·《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문장정종(文章正宗)》·《서산문집(西山文集)》 등이 있다. 황돈(篁敦)이 …… 참고하였다 황돈은 명(明)나라의 학자 정민정(程敏政, 1445~1499)의 별호로,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에 여러 학자의 주석을 첨부하여 해설한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저술하였다. 오명중(吳明仲) 오이정(吳以井, 1619~1655)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명중(明仲), 호는 장계(藏溪)이다. 1639년 사마양과(司馬兩科)에 합격하고 1651년 정시(庭試)에 응하였으나, 자급(資級)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장계유고(藏溪遺稿)》가 있다. 〈퇴계심통성정도(退溪心統性情圖)〉 심통성정(心統性情)은 장재(張載)가 만든 개념으로서 주희가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장재의 이 개념은 심(心)과 성정(性情)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지만, 이후로 이 개념을 발전시켜서 이(理)와 기(氣), 체(體)와 용(用)의 개념을 도입하여 심(心)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퇴계 이황은 임은 정씨(林隱程氏) 정복심(程復心, 1257~1340)의 《사서장도(四書章圖)》에서 영향을 받아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만들었는데, 그중 제6도 해당하는 것이 〈심통성정도〉이다. 리가 …… 된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은 '이도 발하고 기도 발한다.[理氣互發]'라는 뜻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제창한 설이다. 그가 처음에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주장했다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의 토론을 거친 끝에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수정하며 논쟁을 마무리 지은 고사가 있다. 반면에, 율곡(栗谷)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모두 기(氣)가 발하는데 이(理)가 이에 타는 것(주재)이다.[四端七情, 皆氣發而理乘之.]" 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說)을 주장하였다. 황면재(黃勉齋) 남송(南宋)의 성리학자 황간(黃榦, 1152~1221)으로,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민현(閩縣) 장계(長溪) 출신으로, 주희(朱熹)와 유청지(劉淸之)에게 수학하였는데, 주자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학문을 전수하고 사위로 삼았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강학하였으며, 주자의 뜻에 따라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을 편찬하였다. 저서에 《오경통의(五經通義)》, 《사서기문(四書記聞)》, 《면재집(勉齋集)》 등이 있다. 상상(上庠) 태학(太學)을 말하는 것으로 곧 성균관(成均館)이다. 소과(小科)에 급제한 자들이 들어갔으므로 초시에 합격했다는 말로도 쓰인다. 태극(太極)이 …… 낳는다 주돈이(周敦頥)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아 동이 극에 달하면 정하고, 정하여 음을 낳아 정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된다.[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라고 하였다. 계구신독(戒懼愼獨)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章)에 보인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아도 조심하는 것이요, 들리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하였고, 바로 뒤에 "숨겨진 것보다 잘 드러난 것이 없고 작은 것보다 잘 나타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하였다. 존양성찰(存養省察)의 공부 정(情)이 발동하기 이전의 정시(靜時)에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함양하는 공부와 발동한 뒤의 동시(動時)에 인욕이 싹트려는 기미에 살피는 공부를 말한다. 《중용장구》 제1장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한 것은 존양공부를 가리키며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必愼其獨也.]" 한 것은 성찰 공부를 말한다. 기가 …… 부여된다 《중용장구》 제1장에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注)에 "하늘이 음양(陰陽)·오행(五行)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할 적에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 또한 부여하니 명령함과 같다. 이에 사람과 물건이 태어남에 각각 부여받은 바의 이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健順)·오상(五常)의 덕을 삼으니, 이른바 성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費)와 은(隱) 《중용장구》 제12장에 "군자의 도는 비하고 은하다.[君子之道, 費而隱.]"라고 하였는데, 그 주를 참고하면 "군자의 도는, 그 작용은 광대무변하지만 그 본체는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역시 《중용장구》 제12장 중 "《시경》에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라고 하였으니, 천지의 도가 위아래로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의 주에 "자사는 이 시를 인용하여 만물을 낳고 기르는 천지의 기운이 흐르고 퍼져서 위아래에 분명히 드러남은 모두 이 이치의 운용임을 밝혔으니, 이른바 비이다. 그러나 그리된 까닭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른바 은이다.[子思引此詩, 以明化育流行, 上下昭著, 莫非此理之用, 所謂費也. 然其所以然者, 則非見聞所及, 所謂隱也.]"라고 하였다. 소이연(所以然) 그렇게 된 원인, 즉 본체를 일컫는 말로 형이상자(形而上者)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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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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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왕씨 인심도심도부 魯齋王氏人心道心圖附 삼가 살펴보건대 왕씨(王氏)139)가 말하기를 "원(原) 자는 밖에서 미루어 들어간 것이니 그 본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미(微)'라고 한다."140)라고 하였다. 제가 보건대, 원(原)은 근원(根源)과 같으니 도심(道心)이 성명(性命)에서 나온다는 말은 나무가 뿌리에서 발하고 물이 원천에서 흐르는 것과 같다. 대개 원(原) 자에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발하는 뜻이 있으니 '밖으로부터 미루어 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미 밖으로부터 미루어 들어갔다고 말한다면 그 본래 있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 의심할 만하다. 이 도(圖)에서 특히 위에 정(正) 자를 쓰고 아래에 미(微) 자를 쓴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 성명(性命) 양변 4개 조목의 장화(長畫)와 미(微) 자 위에 횡화(橫畫) 또한 어떤 물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그 의심난 것을 이상과 같이 다 기록하여 지혜 있는 자를 기다린다."공자는 네 가지를 끊어 없앴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고, 기필함이 없고, 집착함이 없고, 아집이 없었다."141)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매번 유쾌하지 못한 뜻이 있어서 말하기를 "성인께서 의필고아(意必固我)에 대해 어찌 논이 없을 방법이 있겠는가? 절(絶)이라는 말은 공부를 끊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성인의 마음은 천지(天地)의 조화(造化)와 위아래에서 함께 흘러가니 힘쓰지 않아도 교화가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정성스럽게 되니 어찌 의필고아(意必固我)의 싹을 힘써 끊어가는 이치가 있겠는가? 안자(顔子)142)의 지위에서도 조금 싹에 뜻을 두는 것을 면치 못했으나 곧 끊어졌다. '필(必)'이라고 하고, '고(固)'라고 하고, '아(我)'라고 하는데 이르러서는 비록 안자(顔子)도 곧 싹이 없어졌는데 하물며 공자이겠는가? 그렇다면 네 가지를 끊는 공부는 공자 문하에 염민(冉閔)143)의 무리가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 내가 그러므로 매번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 반드시 왈(曰) 자를 자(子)자 아래에 더하여144) 공자께서 문인을 힘써 나아가게 하는 말로 삼았다. 이 뜻이 모르겠지만 어떠한가?"라고 하였다.묻건대 "《대학(大學)》에서는 존양(存養)을 말하지 않고 성찰(省察)만을 자주 말했고, 《중용(中庸)》에서는 존양성찰(存養省察)145)을 겸하여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말하기를 "이른바 '명덕(明德)'146)은 미발(未發)·기발(旣發)을 다 포함해서 말했다. 미발의 전에는 존양할 수 없으니 어찌 헛되이 중리(衆理)를 갖출 수 있겠는가? 기발의 후에는 성찰할 수 없으니 또 어찌 신령하게 만사에 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증자·자사가 서로 전수한 전(傳)이 한 터럭의 어긋남도 있지 않다. 그러나 경계하고 삼가는 공부를 적확하게 드러내어 분명하게 도를 말한 것은 의심컨대, 《중용》이 더욱 절실하다.내가 일찍이 옛 성현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의 독실함을 보고는 돌이켜 내 몸에서 구하고, 그 하는 바를 살펴보고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얼굴이 빨개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비록 한밤중이라도 사색이 여기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분발하여 일어나 정좌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혹 화창한 봄과 비 갠 가을에 환한 천기(天氣)를 만나고, 혹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움직임이 다 사라진 적막함을 만나고, 혹 이름난 산과 아름다운 강에서 상쾌한 경계를 만나면 곧 심기(心氣)가 화평하고 태평해짐을 깨닫고는 다소 함양(涵養)의 기상(氣象)이 있고, 의연(依然)히 시를 읊고 돌아오는 흥취[咏歸之興]가 있었다.147) 이것으로써 본다면 비록 최고 어리석은 기질이라도 모두 이 성(性)의 밝음을 얻어서 때때로 그 부분적인 선을 발현해 갈 수 있지만 치곡(致曲)148)할 수 없을까 걱정될 뿐이다.내가 학문한 지 10여 년인데 다만 우리 유자가 불교를 피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불교의 학문이 어떠한가는 깊이 알 수 없었다. 해 병술년(1646, 인조24) 봄에 우연히 용산승사(龍山僧舍)에서 한 늙은 중이 불씨 학문의 불경 한 권을 보여주어 읽어보고는 곧 선배 선생들이 이단을 배척하는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謹按王氏曰: "原字。 自外推入。 知其本有。 故曰'微'。" 以愚見之。 原猶根源也。 言道心之出於性命。 猶木自根而發。 水自源而流也。 盖原字。 有自內發外之意。 不可曰'自外推入'。 旣曰'自外推入'則其本有者何物歟? 可疑。 其圖特書正字於上而書微字於下者。 未知何意。 其性命兩邊四條長畫及微字上橫畫。 亦未知指何物。 盡錄其所疑處如右。 以待知者。 "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 愚嘗讀至此。 每不快意。 曰: "聖人之於意必固我。 豈可以有無論也? 絶之爲言。 用工夫絶去之謂也。 聖人之心。 與天地造化。 上下同流。 不勉而化。 不思而誠。 則安有意必固我之萌而用力絶去之理哉? 在顔子地位。 未免些有意之萌而便絶之矣。 至於曰'必'曰'固'曰'我'則雖顔子便不萌矣。 况夫子乎? 然則絶四工夫。 在聖門冉閔之徒。 所當勉勵者也。 愚故每讀至此。 必以曰字加子字下。 以爲夫子勉進門人之辭。 此意未知如何?" 問: "大學不言存養而多言省察。 中庸兼存養省察而言何也?" 曰: "所謂明德。 該未發旣發而言。 未發之前。 不能存養則安能虛而具衆理哉? 旣發之後。 不能省察則又安能靈而應萬事哉?" 此曾思相授之傳。 未有毫髮爽也。 然戒懼之工的發而分明說道者。 疑中庸爲尤切。 余嘗看古聖賢操心律己之篤。 反求之於吾身。 省其所爲。 未嘗不汗流浹背。 面發赤色。 雖中夜思至于此。 不覺發憤起坐。 以至達曙。 或値春晴秋霽。 天氣昭朗。 或値月明夜靜。 羣動俱寂。 或値名山麗水。 爽塏境上。 便覺心氣和泰。 多有涵養氣象。 依然有咏歸之興。 以此可見雖下愚之質。 皆得是性之明。 時時發見其曲。 但患其不能致曲耳。 余向學十年餘。 但知吾儒之可以辟佛。 而未能深知佛氏之學何如。 歲丙戌春。 偶在龍山僧舍。 有一老衲示所謂佛氏學文一經披覽。 便知先進諸老先生深排異端之意。 왕씨(王氏) 노재(魯齋) 왕씨(王氏)는 송나라 때 절강성(浙江省) 금화(金華) 출신의 학자 왕백(王柏, 1197~1274)을 말한다. 자는 회지(會之)·백회(伯會), 호는 장소(長嘯)·노재(魯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황간(黃榦)의 제자 하기(何基)에게서 배웠다. 하기(何基)·김이상(金履祥)·허겸(許謙)과 함께 금화(金華)의 네 선생, 북산(北山)의 네 선생으로 일컬어졌다. 주요 저술로는 《독역기(讀易記)》·《독서기(讀書記)》·《시변설(詩辨說)》·《천문고(天文考)》·《지리고(地理考)》 등이 있다. 원(原)자는 …… 한다 왕백(王柏)이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에서 "원(原)자는 밖에서 안을 미루어 그 본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으므로 미(微)라하고, 생(生)자는 사물에 감응하여 동함에 그 본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위(危)라 한다."라고 한 것과 "정(正)자와 사(私)자는 모두 밖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인심을 인욕이라 이를 수 없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공자는 …… 없었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는 네 가지를 끊어 없앴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고, 기필함이 없고, 집착함이 없고, 아집이 없었다.[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안자(顔子) 공자의 제자이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때 공자는 "안회라는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더니,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라고 대답했다. 《論語 雍也》 염민(冉閔) 공자 문하 열 명의 고제(高弟) 중에 염백우(冉伯牛)·민자건(閔子騫)을 가리킨다. 왈자(曰子)를 …… 더하여 '자절사(子絶四)'를 '자왈절사(子曰絶四)'로 고쳐서 해석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경우 "공자께서 네 가지를 끊으셨다."를 "공자께서 네 가지를 끊을 것을 말씀하셨다."라고 고쳐 해석할 수 있다. 존양성찰(存養省察) 존양은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는 것[存心養性]을 이르며, 성찰은 자신의 사욕을 살펴 이를 막는 것을 이른다. 《중용장구》 제1장에 "군자는 보지 않는 데에도 삼가며 듣지 않는 데에 두려워한다.[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하였는데, 이것은 정(靜)할 때의 존양공부를 말한 것이며, 이어 "숨겨진 것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작은 일보다 나타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하였는데, 이것은 동(動)할 때의 성찰공부를 말한 것이다. 주자는 《집주(集註)》에서 제1장의 이 부분을 "존양·성찰의 요점[存養省察之要]"이라고 주하였다. 명덕(明德) 주희가 삼강령(三綱領)의 첫 번째인 명명덕(明明德)의 명덕(明德)을 풀이하면서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서, 텅 비고 신령스럽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구비하여 온갖 일에 대응하는 것이다.[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 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시를 …… 있었다 《論語 先進》 자로(子路)·염구(冉求)·공서적(公西赤)·증점(曾點)이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는 제자들에게 각각 뜻을 말하라 하였다. 자로를 비롯하여 염구·공서적은 각각 정치에 대한 것을 말했다. 공자는 비파를 타고 있던 증점에게 너도 말하라고 하니, 증점은 비파를 놓고는 "저의 뜻은 저들과는 다릅니다.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 5, 6명과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며, 시를 읊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외물(外物)에 구하지 않는 그의 높은 뜻을 가상히 여겨 "나는 증점을 허여(許與)한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자(程子)는 "그의 가슴속이 유연하여 곧바로 천지만물과 상하에서 함께 통한다.[其胸次悠然, 直與天地萬物, 上下同流.]"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치곡(致曲) 성(誠)이 미흡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대현(大賢) 이하의 사람들도 자기의 부분적인 선단(善端)을 확대하여 지성(至聖)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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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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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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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선생집후서 南圃先生集後序[金裕憲] 기자(箕子)1)가 〈홍범(洪範)〉에서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다.[無偏無黨]"2)라고 하였고, "음탕한 벗을 두지 아니한다.[無有淫朋]"3)라고 하였으니, 이는 붕당(朋黨)에 대해 깊이 마음을 쓴 것이다.4) 우리 동방은 기자를 조종(祖宗)으로 삼아서 역사서에서는 "어진 이의 교화[仁賢之化]"라고 일컬었는데,5) 붕당에 대한 의론이 우리나라에 가장 성행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온 나라 사람이 탕평(蕩平)하고 정직(正直)한 길로 나아가는 이가 거의 없는 것은 또한 유독 어째서인가.금성(錦城) 김군 명수(金君明叟)6)가 그의 선조인 남포선생(南圃先生)의 유집(遺集)을 보여주었는데, 단지 두 책(冊) 뿐이었다. 시문(詩文)ㆍ서(書)ㆍ소(疏)ㆍ기사(記事) 몇 편뿐이었으나, 그 언의(言義)의 공정함과 기상(氣像)의 광대함은 거의 근세의 문장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으니, 오호라! 선생은 참으로 홀로 우뚝이 선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일컬을 만하도다.효종(孝宗)과 현종(顯宗) 무렵에 당론(黨論)이 더욱 거세져 현자(賢者)들까지도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서7) 허둥지둥 쫓아다니는 지경이었는데, 선생은 이러한 때에 숲속에서 도(道)를 강론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저마다 문호(門戶)를 세운 자들이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좌지우지해서 득세하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선생은 우뚝이 홀로 서서 편벽되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으면서 논의하는 사이에 오직 올바른 것만을 허여하니, 알지 못하는 자들은 떠들썩하게 촉(蜀)나라 해를 보듯이 하였으나,8) 공론(公論)도 또한 이 때문에 선생을 훌륭하게 여겼다.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일제히 천거하여 초빙하는 활과 깃발9)이 여러 차례 사립문에 이르렀으니, 성대하도다. 확연(廓然)히 매우 공정하여10) 털끝만큼도 사호(私好)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그 마음을 보존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시문(詩文)에 발로 된 것이 모두 유연(悠然)히 자득하고 만물과 화락하여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기상11)이 있었던 것이다. 〈경세통전(經世通典)〉은 간략하고 요약되면서도 광대하였고, 세밀하고 자세하면서도 균평하여 위로는 〈주관(周官)〉의 육전(六典)12)의 뜻을 좇고 아래로는 병농합일(兵農合一)의 부위(府衛)의 제도13)를 잃지 않았다. 〈만언소(萬言疏)〉 한 소장은14) 민생(民生)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더욱 간곡하였으니, 그 귀결점은 군상(君上)의 한 마음이 천지를 제자리에 있게 하고 만물을 잘 기르는15) 근본이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둔괘(遯卦)를 만나16) 침묵하고서 꼭꼭 싸서 골수에 간직해 두었으나,17) 가슴 속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대강 알 수 있었다.오호라! 말이란 마음의 발로요, 글은 그 마음이 더욱 드러난 것이다. 이 마음이 한번 편당에 의해 가려지면 시비(是非)에 대해 어두워지고 의론이 협소해지는 법이니, 비록 꾸미고 수식하여 가린다 한들 눈이 있는 자라면 어찌 분별하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말하기를 "밝으면 통하고, 공정하면 넓어진다.[明則通, 公則溥.]"18)라고 하였으니, 선생은 이에 가까울 것이다. 선생이 비록 당시에는 쓰이지 못하였으나 선생의 글은 반드시 후세에까지 전해질 것이니, 명수는 그날을 기다릴지어다.신묘년(1831, 순조31) 맹하(孟夏 4월)에 지제교(知製敎) 석릉(石陵) 김유헌(金裕憲)19)은 삼가 쓴다. 箕子洪範言無偏無黨。言無有淫朋。盖三致意焉。東人祖箕子。史稱仁賢之化。而朋黨之論。莫盛於我國。滔滔一國。殆無出於平蕩正直之路者。抑獨何哉。錦城金君明叟示其先祖南圃先生遺集。集僅二冊。詩文書疏記事若干篇。而其言議之公正。氣像之廣大。殆近世文字之所未見。嗚呼。先生眞可謂特立豪傑之士矣。孝顯之際。黨論益橫。賢者亦未免褰裳而趍之。先生於是時。講道林樊。華聞大彰。各立門戶者。無不欲藉公左右而輕重焉。先生挺然獨立。不偏不倚。論議之間。惟正是與。不知者譁然如見蜀日。而公論亦以此多之。公卿大夫交口尉薦之。弓旌之招。累及衡門。盛矣哉。非廓然大公無一毫私好。惡有以服人之心者能如是乎。其存心如是。故發之詩文者。皆悠然自得。與物煕煕。有沂水舞雩之氣像。經世通典。?要而廣大。纖悉而均平。上可追周官六典之意而下不失爲府衛兵農之制。萬言一疏。尤惓惓於民生之休戚。而其究則以君上一心。爲位天地育萬物之本。雖其遇遯嘿嘿。緘封骨髓。而胷中所存。槩可見矣。嗚呼。言者心之發而文尤其著者也。此心一蔽於偏黨則是非闇而議論狹。雖粉飾藻繪以揜之。具眼者豈有不卞者哉。周子曰明則通公則溥。先生其庶幾乎。先生雖不用於時。先生之書。必傳於後。明叟其竢之。辛卯孟夏。知製敎石陵金裕憲謹書。 기자(箕子) 기자는 비간(比干)ㆍ미자(微子)와 더불어 은(殷)나라 삼인(三仁) 중의 한 사람이다. 은나라가 멸망한 후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물음에 답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대법(大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고는 조선의 평양(平壤)으로 옮겨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홍범(洪範)〉에……없다 〈홍범〉은 《서경》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기자가 지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도가 평탄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도가 안정되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할 것이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하였다. 음탕한……아니한다 위와 마찬가지로, 《서경》 〈주서 홍범〉에 나오는 말이다. 참고로, 그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그 서민이 음탕한 벗을 두지 아니하며, 사람이 사사로운 덕을 두지 아니함은 오직 임금이 극을 짓기 때문이다.[凡厥庶民, 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라고 하였다. 깊이……것이다 《사기(史記)》 권84 〈굴원전(屈原傳)〉에 "군주를 보호하고 나라를 일으키며 그것을 반복하려거든 한편 가운데 깊이 마음을 쓸 것인저.[其存君興國, 而欲反復之, 一篇中, 三致意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사서에……일컬었는데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기자가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쳐서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푸니, 어진 이의 교화가 있었다.[周武王, 封箕子于朝鮮, 敎民禮義, 設八條之敎, 有仁賢之化.]"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금성(錦城) 김군 명수(金君明叟)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서 남을 따르는 것을 형용한 표현이다. 《시경》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여 그리워할진댄, 내 치마를 걷어 올리고서 진수를 건너가리.[子惠思我, 褰裳涉溱.]"라고 하였다. 이 시에서의 치마는 아래옷의 옷자락을 의미한다. 촉(蜀)나라……하였으나 당시에 선생처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선생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였음을 의미한다. 유종원(柳宗元)의 〈답위중립논사도서(答衛中立論師道書)〉에 "굴자의 부에 이르기를 '고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는 것은 괴이한 것을 보고 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지난번에 들으니 '용ㆍ촉의 남쪽에는 항상 비가 내리고 해 뜨는 날이 적어 해가 뜨면 개가 짖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지나친 말이라고 여겼었는데, 지난 6, 7년 전에 내가 남쪽지방으로 온 지 2년째 되던 겨울에 다행히 큰 눈이 고개를 넘어 남월 가운데의 여러 고을에 눈이 덮이니, 여러 고을의 개들이 모두 창황히 짖고 물고 미쳐 달리기를 여러 날 동안 하여 눈이 녹아 없어진 뒤에 이르러서야 그만두니, 나는 그런 뒤에야 전에 들은 바를 믿게 되었노라.[屈子賦曰, 邑犬群吠, 吠所怪也. 僕往聞庸蜀之南, 恒雨少日, 日出則犬吠. 予以爲過言, 前六七年, 僕來南二年冬, 幸大雪踰嶺, 被南越中數州, 數州之犬, 皆蒼黃吠噬狂走者累日, 至無雪乃已然後, 始信前所聞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에서 굴자는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초빙……깃발 원문의 '궁정(弓旌)'은 고대에 선비를 초빙할 때 신물(信物)로 쓰이던 활과 깃발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보통 현자를 초빙하는 예물의 뜻으로 쓰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召公) 20년 조(條)에 "활로 사를 초빙하고 정으로 대부를 초빙한다.[用弓招士, 用旌招大夫.]"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확연(廓然)……공정하여 정호(程顥)가 《정성서(定性書)》에서 "확연히 크게 공평하여 사물이 오면 순히 응한다.[廓然大公, 物來而順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二程文集 卷3》 기수(沂水)……기상 인욕(人慾)이 없고 천지의 만물과 함께 유행하여 천리(天理)가 충만한 기상을 말한다. 각자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제자 증점(曾點)이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을 쓴 어른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주관(周官)〉의 육전(六典) 〈주관〉은 《서경》의 편명이다. 육전은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가지 방면의 법으로, 치전(治典)ㆍ교전(敎典)ㆍ예전(禮典)ㆍ정전(政典)ㆍ형전(刑典)ㆍ사전(事典)을 말한다. 병농합일(兵農合一)의……제도 부위제(府衛制)이다. 서위(西魏)에서 시작되어 북주(北周)와 수(隋)를 거쳐 당(唐)나라 초기까지 실시된 군사 제도로, 부병(府兵)들이 경사(京師)에 와서 숙위(宿衞)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부병제(府兵制)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의 부병은 종신토록 복역하고, 정벌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각자 별기(別騎)와 군량을 마련해서 출정하며, 정기적으로 경사에 숙위하거나 변경에 수자리를 섰다. 《新唐書 卷50 兵志》 〈만언소(萬言疏)〉 한 소장은 〈만언소〉는 구언(求言)에 응하여 1659년(효종10) 효종 승하 후 지어졌으나, 점괘가 불길하여 실제로는 올리지 않은 상소이다. 대동법(大同法)이 근기(近畿) 지방에는 유효하나, 원방(遠方)인 경우에는 적실하지 못하며, 향병(鄕兵)의 창설을 주장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천지를……기르는 《중용장구》 제1장에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둔괘(遯卦)를 만나 소장을 올리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영종(寧宗) 경원(慶元) 연간에 한탁주(韓侂冑)가 승상 조여우(趙汝愚) 등을 무함하여 축출하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주희가 봉사(封事)를 올려 한탁주의 간사함을 밝히고 조여우의 억울함을 변호하려고 하였는데, 제자들이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올리는 것을 말렸다. 주희가 계속 뜻을 굽히지 않자 채원정(蔡元定)이 점을 쳐볼 것을 권하였다. 점을 쳐보니, 소인이 뜻을 얻은 상황에서 군자는 집 안에 들어앉아 집 안의 일만 돌본다는 의미의 둔(遯)의 가인괘(家人卦)가 나와 상소의 초고를 불태우고 호를 둔옹(遯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周易筮述 卷8 推騐》 《吹劍錄外集》 《朱子大全 附錄 卷6 年譜》 꼭꼭……두었으나 한유(韓愈)의 〈귀팽성(歸彭城)〉에 "상소문을 꼭꼭 싸서 골수에 간직한 채, 그래도 훌륭하다 부질없는 혼자 생각.[緘封在骨髓, 耿耿空自奇.]"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2》 주자(周子)가……넓어진다 주자는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킨다. 주돈이의 《통서(通書)》 권20 〈성학(聖學)〉에 "밝으면 통하며, 동할 때에 마음이 곧아지면 공정하고, 공정하면 넓어지니, 밝고 통하며 공정하고 넓으면 거의 배울 수 있는 것이다.[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김유헌(金裕憲) 1781~?. 자는 치간(穉間), 본관은 안동이다. 부친은 김수신(金秀臣), 조부는 김성한(金星漢)이다. 상세하지는 않으나, 유학(幼學)으로서 순조(純祖) 4년(180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를 친 기록이 남아있다. 《국조방목(國朝榜目)》 석릉(石陵)은 안동의 옛 지명이다.

상세정보
저자 :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남포집(南圃先生集) 南圃先生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고서 국역 南圃先生集 金萬英 金萬英 미상 미상 남포(南圃) 김만영(金萬英, 1624~1671)의 문집 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 해제 나천수/나주시 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1. 생애와 출신 배경 남포 김만영1)1) 이하 선생이라 호칭한다. 은 당악김씨 9세로 자는 영숙(英叔) 호는 남포(南圃)로 아버지 김태흡(金泰洽)과 어머니 나주나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1624년에 태어나 1671년에 졸하였다. 살아생전에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 그리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이 화려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심오한 경지에 몰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집에 수록된 작품만 보더라도 매우 심오한 학문의 경지를 득도한 것 같다. 이처럼 그가 문학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당대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문학적 자질 또는 문학적 DNA가 핏줄로 이어 온 것 같아, 선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여기에 소개 하고자 한다. 선생은 당악김씨 9세인데 그의 5대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주 왕곡면 귀업리(龜業里)에 자자일촌을 이루며 살았던 당악김씨 터와 당악김씨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 있으니, 바로 진사 김효정(金孝禎)이다. 당악김씨 4세 진사 김효정은 충주박씨 박우(朴祐)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로는 대체로 부유하게 살았던 김효정은 사위 박우를 나주 처가 쪽으로 불러들여 공부를 시켜 마침내 1510년(중종5) 식년시 문과에 16위를 급제를 하였으니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더더욱 김효정의 외손자 사암 박순(朴淳)은 1553년(명종8)에 문과 장원 급제하고, 이조참의, 대사헌,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문신이 되었으니, 나주 당악김씨는 더더욱 빛을 보았을 것이다. 한편 1519년 기묘사화 때에 나주출신 선비 11명이 성균관에서 숙식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두 명이 바로 김효정의 두 아들 김구(金臼)와 김두(金㪷)도 있었다. 이들 11명이 궁궐에 가서 조광조를 신원하는 하소연을 하다가 쫓겨나게 되자, 그러한 정치상황에서 벼슬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11명 모두 나주로 낙향하여 소위 「금강11인 현계(錦江11人賢禊)」를 결성하여 매양 좋은 날에 영산강을 선유하며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여지승람과 나주읍지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에 지었던 정자와 글이 모두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오로지 김두의 시한수와 당시 회원인 나일손의 아들 나창[羅昶, 세자시강원 필선]이 남긴 차운 시 한수만 남아 있다. 선생의 가승을 보면 김효정- 김두 –김태각- 김원록- 김태흡- 김만영의 핏줄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남평에서 활동하다가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정유재란 이후에 맥이 끊어진 「금강11인 현계」의 계칙을 복원하고 현계 회원의 후손들 간에 모임을 계속 이어지도록 복원 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숨은 공로가 오늘날 왕곡면의 금사정(錦社亭)에 담겨져 있다. 「금강11인 현계」가 태동한지 어언 500년이 흘렀지만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교류를 하고 있어 이 분야도 학문적으로 연구해 볼 만하다. 2. 《남포선생집》 서지(書誌) 사항과 문집 구성내역 《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은 1831년에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권수제나 판심제나 모두 같으며, 권책은 원집(原集) 16권, 부록(附錄) 2권의 2책으로 행자는 10행 20자에 규격은 25.7×18.1(cm)이다 어미는 상일엽화문어미(上一葉花紋魚尾)이다. 총392쪽으로 되어 있다. 《남포선생집》은 문인 나만성(羅晩成/金漢明의 외조카, 1678년 문과급제)의 편집을 거쳐 1831년(손조31)에 5세손 김양국(金亮國)이 주축이 되어 간행하였다. 목활자본이 간행되기까지의 과정은 세 사람의 권수(卷首) 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발문은 1698년(숙종24)에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게 써 받았는데, 이현일은 1627-1704년대 인물로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인데, 선생의 제자이며 당시 사헌부 지평 나만성(羅晩成,1646-1700)이 서울의 이현일 집을 찾아가 《남포선생집》의 서발(序跋)을 창하였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후 이현일은 1697년 광양현에 이배(移配)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로 귀양 온 이현일을 선생의 외손자 나경성(羅景聖)이 찾아가 남포집 발문을 예전 나만성이 부탁한 바를 상기시키면서 마침내 써 받은 듯하다. 그렇다면 이때는 필사본으로 된 《남포집》이 먼저 탈고되었을 것으로 유추되나 그 흔적을 알 수 없고 나만성, 나경성 사후 여러 해를 미루었다가 선생의 5세손 김양국(金亮國/字 明叟)이 목활자본으로 발간하고자 1831년 지제교(知製敎) 안동김씨 김유헌(金裕憲)에게 부탁하여 후서(後序)를 써 받고, 또한 1831년 무안 현감 한용간(韓用幹)에게 신간발(新刊跋)을 써 받았다. 그리하여 이현일의 발문을 구발(舊跋)로 넣어 목활자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김양국의 가승을 보면 다음과 같다. 台角-元福-泰溟-百英-國亨-汝澤- 命祚-禎瑜-亮國이다. 《남포선생집》은 제목으로 보아도 총565편의 많은 글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 작품을 쓴 간지(干支)를 거의 기록해 놓지 않아서 작품 생산의 연보를 쓸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다. 다만 몇 군데 글만 간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오언고시 〈감흥(感興)〉에서 "나이 14살에 짓다"란 기록 한곳이 있다. 오언고시 132연의 시를 14살에 지었다는 것은 천재성을 보여준 것이다. 둘째, 1831년 간행본을 발간하면서 특히 시에서 "일작(一作)" 즉 어떤 본에는 글이 다르게 써졌다는 것을 13번이나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1831년 이전에 미상(未詳)의 초간본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1831년 간행하면서 무안현감 한용간에게서 써 받은 발문이 "신간발(新刊跋)"로 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최초 간행본은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그 해답은 「갈암집 제21권 〉 발」에 써진 이현일이 쓴 〈書南圃金公行狀後〉에 그 해답이 있다. 여기에서 "호남(湖南)의 징사(徵士)인 남포 김공 만일(金公萬鎰)은 죽은 지 이미 28년이 된다. 그 문인인 간의(諫議) 나만성(羅晩成)이 서울 집으로 나를 찾아와 그의 유문(遺文) 3권을 주고"라 한 것을 보면, 남포의 최초 문집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만일(萬鎰)로 하였는데, 만영(萬英)의 오기(誤記) 같다. 그러므로 "구발(舊跋)"은 '나간의(羅諫議/나만성)가 써달라고 한 것을 미루다가 이현일이 1697년 광양현에 이배(移配)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로 귀양 온 이현일을 외손자 나경성(羅景聖)이 찾아가 1698년도에 써 받은 것으로 유추되며, 구발(舊跋)의 기록 내용과 일치한다. 셋째, 문집의 발문(跋文)을 권수(卷首)에 놓아 서문(序文)역할을 하게 한 점이다. 서문(序文)은 대체로 선생 살아생전에 교유했던 문장가에게 받아야 맞는데, 이때를 놓치고서 훗날 후세사람에게 서문을 써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후 28년만[1698년]에 써 받은 발문을 1831년에 문집 간행하면서 책머리에 넣어 간행하면서 '舊跋'이라고 한 것이다. 선생의 사승(師承)관계는 문집에 특별히 기록해 놓지 않아서 글의 내용이나 족보기록으로 유추해 낼 수밖에 없다. 족보에 보면 아버지 김태흡(金泰洽)은 문장과 학행이 뛰어나, 당세에 향시(鄕試)에서 1등을 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생의 유년 스승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한편 문집 서간문 편에 보면 스승을 대체로 유추할 수 있는데, 그런 맥락으로 보면 우산 안방준(安邦俊)과 이수인(李壽仁)을 스승으로 볼 만하다. 안방준은 1573-1654년 대 인물이니 선생의 51년 대선배이다. 서간문 편 첫 번째 수록된 편지가 〈상우산질의서(上牛山質疑書)〉인데 이는 '이때에 우산 안방준이 〈우산답문〉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그 의론이 편벽되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변론을 지어 질의하신 것이다.'라 기록해 놓고 있으며, 글의 내용을 보면 사제 간 자신의 견해를 논하여 스승께 올리는 편지임을 알 수 있다. 이수인(李壽仁)은 1601-1661년대 인물이니 나이로 보아도 선생보다 23살 위이다. 1633년 문과급제하고 전적, 병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54년 홍문관교리·집의·장악원정·사간·부수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경사·성리학에 모두 밝았다. 이수인에게 올리는 답서의 글과 〈부시선생이심경질문(附時先生以心經質問)〉를 보면 사승관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남평과 고향 나주 귀업리에 와서 살 때 배우러 오는 제자들을 물리치지 않고 가르쳤다. 특히 남평에서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와 같이 하였는데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는 또한 이론가(異論家)의 자제들이 있어 마침내 문생(門生)과 자제(子弟)들이 심히 미워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로 헐뜯고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었기에 마침내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나주(羅州)의 고향으로 왔다. 나주에서도 배우는 자가 끊이지 않으니 그의 평생은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수범이 된 듯하다. 3. 문집 항목별로 특이점 시편을 보면 그는 평생 460제목에 534수의 시를 지었다. 특히 본 유집에는 13세 때부터 지은 시가 수록되었는데 14세 때 지은 오언고체시 〈감흥〉은 총132연으로 그가 시의 천재임을 여기서 보여준다 하겠다. 이현일도 '나이 겨우 훼츤(毁齔 이를 갈 정도의 나이인 7, 8세)에 언어와 행동이 보통의 아이와 달랐고, 나이 12, 3세 때에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배웠다'라 한 것을 보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벼슬을 제수하여도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에 몰두 한다. 그가 지은 시제(詩題)를 보면 자연의 사물, 현상, 경치 등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쓴 시가 매우 많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자연이 경승(景勝)으로 보인다. 자신의 서재인 구암서실(龜巖書室)에서 이른 바 팔경을 읊었는데, 1경 구암효운(龜巖曉雲), 2경 오령만하(鰲嶺晩霞), 3경 죽포어적(竹浦漁篴), 4경 송암범종(松庵梵鍾). 5경 북록청송(北麓晴松), 6경 동정제월(東亭霽月), 7경 봉악조돈(鳳岳朝暾) 8경 저탄모범(猪灘暮帆)이다. 영암 구림에 종제 해영(海英)이 사는데 아마 해영의 구호정사(鳩湖精舍)에서도 팔경(八景)을 지었으니 1경 서호추월(西湖秋月), 2경 용산락조(龍山落照), 3경 강촌모연(江村暮烟), 4경 전교춘흥(前郊春興), 5경 동원청견(東園聽鵑), 6경 남맥문앵(南陌聞鸎), 7경 학령귀운(鶴嶺歸雲), 8경 구봉만풍(龜峯晩風)이다. 이러한 시문은 장차 향부(鄕富)의 자원으로 상품화가 될 여지가 매우 많다. 소(疏)편을 보면 단 두 편만 수록된 것을 보면 그가 정치 지향적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산릉분곡후언사소(山陵奔哭後言事疏)〉는 인조 승하 후 올린 상소로, 국론이 분열된 현실과 국론 분열이 망국의 길임을 역설한 후,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시기하고 편당하는 구습(舊習)을 일소해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음을 주장한 상소이다. 〈만언소(萬言疏)〉는 지었지만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인데, 1659년 효종에는 기근이 매우 심하였다. 내용 가운데 대동법이 근기(近畿) 지방에는 유효하나 원방(遠方)인 경우에는 적실하지 못하다는 주장과 향병(鄕兵)의 창설 주장 등은 조세(租稅)와 병제(兵制) 개혁 논의가 활발했던 당시 시대상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서간문은 총 16편인데, 스승 안방준과 이수인과의 학문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편지가 돋보인다. 기타 편지를 보면 영암의 효자 신성필(愼聖弼)에게 답하는 편지가 4편이고, 나머지도 제자나 벗들에게 답하는 글이다. 권10은 序(11), 記(9), 跋(3) 편인데, 모두 청탁을 받아 쓴 것이지만 유독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禊序)〉는 1665년 남평에서 나주 고향마을로 돌아와 기묘사화 때 결성된 〈금강11인현계〉의 후손들과 수계를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더더욱 선생의 고조부 김구와 김두는 11인중에 두 분이 참여하였기에 〈금강11인 현계〉에 연민의 정이 많았던 것 같다. 서문에 보면 '기묘사화 때 결성된 수계가 정유재란 때 끊어졌는데, 1603년 조부 김원록(金元祿)이 이를 이어 받았다가 1665년 선생이 남평에서 고향 나주로 와서 계부 김태윤(金泰潤)과 상사 정국현(鄭國賢)과 함께 계칙을 중수하였다.'라 하였으니 그 중수계칙의 서문에 쓴 글이다. 한편 그의 조카 김이상(金履相)은 〈중수계안후서〉를 썼다. 이렇게 계칙을 복원하고 매년 후손 자손들이 만남의 장을 갖게 되었고, 그 후 1869년 나주 도약장(都約長)을 역임한 나동륜(羅東綸)은 이를 이어 받아 금사정(錦社亭)을 개축한 기록이 현재에도 금사정에 현판으로 게첨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미미하기는 하나 〈금강11인 현계〉가 오늘날까지 회장 총무가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다만 옛일로 간과해서 아니 될 것 같다. 권11은 경의설(經義說)인데 주로 경문(經文)에 관한 것으로 〈중설(中說)〉, 〈중용스장지도(中庸首章之圖)〉, 〈중용수장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 〈중용분절변의(中庸分節辨義)〉, 〈중용분위오대절(中庸分爲五大節)〉,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 등 중용(中庸)에 대한 글들이 많다. 중용(中庸)에 관한 도설(圖說)에도 그의 독자적인 해석이 드러난다. 중용수장지도(中庸首章之圖)는 성(性), 도(道), 교(敎)를 주제어로 파악해 도표화 한 것이며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는 왕백(王白)의 「인심도심도」의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그린 것이다. 이 두 도표는 주자(朱子)와 왕백(王白)의 해석과 일정하게 변별되는 독자성을 갖는다. 그는 또 중용장구 제1장의 존양, 성찰에 해당하는 부분을 중시하여 중용수장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를 별도로 그렸는데 존양공부와 성찰공부를 통해 지정(至靜), 지동(至動)에 이르러 치중화(致中和)함을 도표화 한 것이다. 또한 「중용장구」 제27장의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을 존심(存心)과 치지(致知)로 나누어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를 그렸다. 〈역상소결(易象小訣)〉은 "경술년(庚戌年, 1670년, 현종11)에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저술하기 시작했으나, 병이 위독하여 송괘(訟卦)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부기(附記)가 있다. 특히 경의(經義說)은 곧 경서의 뜻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조 하반기 1894년 식년시를 마지막으로 문과 과거 시험이 폐하게 되자 많은 선비들이 대거 반발하자, 조선정부는 1904년과 1907년 두 번에 걸쳐 성균관에서 경의 묻고 답하는 경의문대(經義問對)의 시험을 치러 인재 발탁을 끝으로 조선조의 과거제도는 막을 내렸다. 권12는 찬(贊), 명(銘), 송(頌), 잠(箴), 상량문(上梁文), 제문(祭文), 묘갈명(墓誌銘) 등 총24편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잠(箴/경계)을 보면, 마음을 오로지하여 잡된 것을 들이지 말라는 주일잠(主一箴), 배움을 경계하는 경학잠(警學箴), 자신을 경계하는 자경잠(自警箴), 자신을 새롭게 한다는 자신잠(自新箴), 술을 조심하라는 계주잠(戒酒箴), 여색을 조심하라는 계색잠(戒色箴), 게으름을 조심하라는 계타잠(戒惰箴), 몸가짐에서 족(足), 수(手), 목(目), 구(口), 성(聲), 두(頭), 기(氣), 입立), 색(色)의 아홉 가지에 있어서 군자가 지녀야할 자세를 말하는 구용잠(九容箴)에서 선생의 철학이 무엇이고 행동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권13은 논(論), 전(傳), 격(檄), 의(義)로 총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유기졸격(喩氣卒檄)〉은 지(志)를 장수로 기(氣)를 병졸로 의인화하여 지수(志帥)가 기졸(氣卒)에게 명을 따를 것을 효유하는 격문이다. 〈광나양읍전예격(光羅兩邑戰藝檄)〉은 나주 유생의 입장에서 광주 유생들에게 서로 만나서 문예(文藝)를 겨룰 것을 요청한 격문으로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을 문장에 결부시켜 비유하고 있다. 권14~15는 남교일기(南郊日記)로, 김만영이 남평에서 살고 있을 때인 1649년(효종 즉위) 7월부터 1665년(현종 6) 2월까지의 일기이다. 그는 시편에서 「제일기(題日記)」라는 시를 지어 인간사를 사절(謝絶)하고 소책자에 한가한 생활을 기록한다고 하여 일기를 처음 쓰게 된 배경을 밝혔다. 일기는 매일 매일의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날짜의 것만 있다. 이 일기의 하권에는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남인·서인 사이에 있었던 예설 논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당쟁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그리고 남평⋅나주 지역 양반들의 동향이나 선생의 지인⋅제자 동향, 그리고 기근이나 세금 등 지역사회의 생생한 모습이 이 일기에 담겨 있다. 권16은 〈경세통전(經世通典)〉으로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ㆍ병(兵)ㆍ승(僧)을 조치하는 데 있어서의 타당한 방도를 논하였다. 부록 권1에는 나만성(羅晩成)이 지은 가장(家狀), 임원(任遠)이 지은 행장(行狀), 이명적(李明迪)이 지은 묘갈명(墓誌銘)이 수록되었고, 말미에 심계석(沈啓錫)이 지은 후서(後敍)가 있다. 부록 권2에는 윤증(尹拯)의 《명재유고(明齋遺稿)》,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 등 각종 문헌에 실린 저자 관련 기사와 저자 문인(門人)들의 기록, 남용익(南龍翼)의 《기아(箕雅)》에 실린 저자의 시 등을 수합한 〈서술(敍述)〉과 문봉의(文鳳儀), 나위(羅褘)가 지은 제문, 유명현(柳命賢)이 지은 〈풍산사우춘추향축문(楓山祠宇春秋享祝文)〉이 수록되어 있다. 4. 마무리 글 남포 김만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강11인 현계」의 연구가 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묘사화 이후 500년이 흘렀고,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19년 현재 348년이 지났으나 〈금강11인현계〉의 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는 당악김씨 김승병이 회장이고 나주나씨 나종석이 총무로 일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선생의 사당 풍산사(楓山祠)가 남평에 있었던 것을 2005년경에 나주 귀업리 고향으로 이축된 것이 변화의 모습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선생의 유집 속에 녹아있는 선생이 혼이다. 선생의 문집이 학계에서 관심을 두고 번역과 학술적 재조명을 하게 되니 만시지탄이지만 참으로 호남학 연구에 다행한 일 아니겠는가.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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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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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남포선생집 신간 발문 南圃先生集新刊跋[韓用幹] 옛날에 사마천(司馬遷)20)이 〈백이전(伯夷傳)〉을 지어서 허유(許由)의 광의(光義)가 매우 높다고 하는데, 문사(文辭)에서는 그 대강도 볼 수가 없다21)고 탄식하고는 말하기를 "암혈(巖穴)에 사는 선비는 진퇴(進退)에 알맞은 때가 있는지라, 이 같은 부류는 이름이 매몰되어 일컬어지지 않은 경우이니, 슬프도다."라고 하였고, 한창려(韓昌黎)22)는 〈송서무당남귀서(送徐無黨南歸序)〉에서 또한 학자들이 옛 성현을 사모하여 자신의 한 일생을 부지런히 문자 사이에 마음을 다하며 보내다가 끝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슬퍼할 만하다고 탄식하였으니,23) 나는 이 말은 모두 고인(高人)과 지사(志士)가 생을 마칠 때까지 이름이 일컬어지지 못한 데에 감개가 일어 한 말이라 생각되는데, 나 또한 일찍이 이것을 크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내가 근래에 면성(綿城)24)의 인끈을 차고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승선(承宣) 김치문(金稚問)25)이 내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故) 세마(洗馬) 남포(南圃) 김 선생(金先生)은 현종(顯宗)ㆍ숙종(肅宗)의 시대를 당하여, 약천상공(藥泉相公)26)이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을 때에27) 별단(別單)으로 선생을 포창하며 추천한 일이 있습니다. 그 뒤에 상이 약천상공에게 인재(人才)에 대해 묻자, 공이 일전에 추천하였던 김 아무개가 아직도 등용되지 못하였다고 대답을 하니, 곧바로 선생을 교관(敎官)에 제수하였습니다. 《명재집(明齋集)》28)에도 자주 칭찬하고 있는데, 본집 가운데 〈남유기문(南遊記聞)〉과 〈송임사가서(送林士駕序)〉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남포 선생의 구세손(九世孫) 김양국(金亮國)29)을 보내며 부탁하노니, 이 사람은 옥처럼 매우 아름다운 인물입니다. 거의 남쪽으로 와서는 거의 보지 못한 인물이니, 정답게 대해 주십시오."내가 마침내 김아(金雅)를 읍하고서 맞이하고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고 나자,30) 김아가 남포 선생의 유집(遺集) 두 국(局)을 손수 떠받들고서 나에게 서발(序跋)을 부탁하는지라, 내가 무릎을 꿇고서 그것을 받아 손을 씻고 공경히 완미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해 읽어보았다.그 시는 온아(溫雅)하고 간담(?淡)하여 염락(濂洛)31)의 풍아의 의취가 있고, 그 글은 전중(典重)하고 화섬(華贍)하여 구소(敺蘇)32)의 거려(巨麗)한 풍취가 있었다. 그 경술(經術)은 고정(考亭)33)에 뿌리를 두었는데 이따금씩 이전에 발명되지 않은 것을 많이 발명하였고, 그 경륜(經綸)은 한 통의 〈만언소(萬言疏)〉에 보이니, 가생(賈生)의 〈치안책(治安策)〉34)과 매우 유사하였는데, 군심(君心)의 바름과 시폐(時弊)의 구제에 대해 온 마음을 쏟았으니 완곡하면서도 측달(惻怛)한 뜻이 말 밖에 넘쳐났다. 〈경세통전(經世通典)〉은 또한 《주례(周禮)》의 육전(六典)과 비슷하였는데, 조리가 정연하고 핵심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남교일기(南郊日記)〉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르며 몸을 닦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 관한 자경편(自警編)이 아님이 없었는데, 그 붕당의 편파성에 대해 논하면서 "글은 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과 같고 학문은 정자ㆍ주자와 같더라도 만일 혹 지금의 편당에 얽매인다면 그 사람은 볼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가 세상에 뛰어나 우뚝이 선 군자임을 알 수 있다.그런데도 일사로서 산림에 숨어35) 은거하여 의를 행하면서36) 비록 예를 갖추어 초빙하여도 지절(志節)을 숭상하여 일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다만 한 고을의 선사(善士)37)일 뿐이겠는가.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건마는 자취를 먼 구석 땅에 숨기고 이름을 누추한 시골 골목에 감추어서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개탄할 만하다.선생이 일찍이 《포은집(圃隱集)》을 보고서 스스로 그 바닷가 모퉁이 구석진 고을에 태어나 백 년 뒤에 초목과 함께 사라질 것을 탄식하고, 포은이 불후지명(不朽之名)을 세운 것에 감동하였다. 나는 이에 선생이 가장 슬퍼한 것은 이름을 전하지 못하는 데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자장(子長)과 퇴지(退之)의 말을 서술하여 대략이나마 선생의 지행(志行)과 문자(文字)의 대강을 쓰고서 김아에게 돌려주고, 또 한 마디 말을 다시 김아에게 전하기를 "샘물에 근원이 있으면 반드시 도달하고 옥에 온기가 있으면 반드시 빛나는 법이니, 선생의 이름은 이 문집이 간행되기만 하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그대는 어찌 판각할 것을 도모하여 선생의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가. 그대는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신묘년(1831, 순조31) 단월(端月 음력1월) 하한(下澣)에 면성 읍재(邑宰) 한용간(韓用幹)38)은 삼가 발문을 쓴다. 昔司馬遷作伯夷傳。歎由光義至高。文辭不可摡見。曰巖穴之士。趍捨有時。若此類名湮沒而不稱悲夫。韓昌黎送徐無黨南歸序。亦嘆學者慕古聖贒。勤一世而盡心文字之間。終歸於泯滅爲可悲。余以爲斯言皆因激感於高人志士之沒世名不稱而發也。未嘗不喟然歎也。余間佩綿城紱。赴任未幾。金承宣稚問馳書於余曰。故洗馬南圃金先生。當顯肅之間。藥泉相公繡衣時。別單褒薦。其後自上問人才於藥泉相。對以前薦金某尙未用。卽除敎官。明齋集亦亟稱詡。本集中南遊記聞及送林士駕序可按也。仍送南圃先生五世孫亮國甫曰。此雅亦絶佳如玉。殆南來所未見之人。要其款接。余遂揖迎金雅。敍寒暄畢。金雅手擎南圃先生遺集二局屬余以序跋。余跪而受。盥手敬玩。繙閱其首末。其詩溫雅?淡。有濂洛風雅之意。其文典重華贍。有敺蘇巨麗之風。其經術本之考亭而間多發前未發。其經綸觀乎萬言一疏。殆類賈生之治安策。惓惓於君心之正時弊之捄。婉曲惻怛之意。溢於辭表。至於經世通典。亦類周禮之六典。井井有條。鑿鑿中窾。其南郊日記。無非存心養性修身潔行之自警編。而其論朋黨之偏曰文如韓,范。學如程,朱。若或拘繫於今之偏黨。其人不足觀。於此可知其爲高世卓立之君子也。然而逸士山潛。隱居行義。雖有旌招而尙志不起。奚但爲一鄕之善士。可以爲後世之師表。而遯跡遐陬。藏名陋巷。未克顯揚。可慨也已。先生曾覽圃隱集。自歎其生於海隅偏鄕。百年之後同歸於草木之泯滅。而感圃隱立不朽之名。余於是知先生之悲者。最在於不能傳名。故爲敍子長,退之之言而略書先生志行文字之槩。以歸于金雅。且以一語復于金雅曰。泉有本則必達。玉有蘊則必輝。先生之名。待斯集之刊行。知其必彰。子盍謀其剞劂。以彰先生之名。子其勉諸。辛卯端月下澣。綿城宰韓用幹謹跋。 사마천(司馬遷) 사마천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가(史家)로, 자는 자장(子張)이다. 전한(前漢)의 태사령(太史令)이었기에 흔히 태사공(太史公)이라고 한다. 《사기(史記)》를 지었다. 허유(許由)의……없다 《사기(史記)》 권21 〈백이열전(伯夷列傳)>에는 "내가 들은 바로는 허유는 광의가 매우 높다고 하는데, 문사에서는 그 대강을 조금도 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余以所聞由光義至高, 其文辭不少槪見, 何哉.]"라고 되어 있다.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로, 당나라의 문인이자 사상가이다. 자는 퇴지(退之)이며, 선조가 창려(昌黎) 출신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송서무당남귀서(送徐無黨南歸序)〉……탄식하였으니 〈송서무당남귀서〉는 사실 한유가 아닌 구양수(歐陽修)의 글로 확인된다. 그 글에 "지금 배우는 자들은 옛 성현의 불후를 사모하여 한 세상을 부지런히 힘써서 문자 사이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는 모두 슬퍼할 만하다.[今之學者, 莫不慕古聖賢之不朽而勤一世, 以盡心於文字間者, 皆可悲也.]"라고 하였다. 《唐宋八大家文鈔 卷46》 《古文眞寶 後集 卷7》 면성(綿城) 전라남도(全羅南道) 무안(務安)의 별칭이다. 승선(承宣) 김치문(金稚問)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약천상공(藥泉相公) 남구만(南九萬, 1629~1711)으로, 약천(藥泉)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약천집(藥泉集)》,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 등이 있다. 암행어사(暗行御史)……때에 남구만은 31세 때인 1659년(효종10)에 호남 암행어사, 1662년(현종3)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간 바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31, 132輯 藥泉集》 《명재집(明齋集)》 조선 후기 학자인 윤증(尹拯, 1629~1714)의 문집인 《명재유고(明齋遺稿)》를 가리키는 것으로, 명재는 그의 호이다. 윤증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또 다른 호는 유봉(酉峯)이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부친은 윤선거(尹宣擧)이다. 권시(權諰),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김양국(金亮國) 글을 통해 저자인 김만영(金萬英)의 5대손으로 확인될 뿐, 누구인지는 상세하지 않다. 간단한……나자 원문의 '寒暄'은 날씨의 춥고 따뜻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겨울에는 춥고 봄에는 따뜻한 것과 같은 것이다. 전하여 간단한 안부 인사를 의미한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 〈거가잡의(居家雜儀)〉에 "날씨를 말하거나 기거를 여쭌 뒤에 또 세 번 재배하고 그친다.[叙寒暄, 問起居訖, 又三再拜而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염락(濂洛) 염계(濂溪)에 거주하던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에 거주하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의 합칭이다. 구소(敺蘇) 구양수(敺陽修)와 소식(蘇軾)의 합칭이다. 고정(考亭) 송(宋)나라 주희의 별호이다. 이는 원래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 서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주희가 만년에 이곳에 거주하며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세웠는데, 이종(理宗)이 주자를 숭사(崇祀)하기 위하여 고정서원(考亭書院)이라 사명(賜名)하였으므로 뒤에 주희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가생(賈生)의 〈치안책(治安策)〉 가생은 한 문제(漢文帝) 때의 문신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한 문제(漢文帝)에게 시국 구제책으로 〈치안책〉을 올렸는데, 명문(名文)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漢書 卷48 賈誼傳》 《史略 卷2 西漢》 일사로서……숨어 반악(潘岳)의 서정부(西征賦)에 "산림 속에 깊이 숨은 선비여,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음을 깨달았네.[悟山潛之逸士, 卓長往而不返.]"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御製歷代賦彚 外集 卷9》 은거하여 의를 행하면서 한유(韓愈)가 동소남(董召南)이라는 당나라 때 은사(隱士)를 위해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은 것이 있다. 그 가사에 "수주 속현에 안풍이 있으니, 당나라 정원 연간에 이 고을 사람 동소남이 그곳에 은거하여 의를 행했다.[壽州屬縣有安豊, 唐貞元年時, 縣人董生召南, 隱居行義於其中.]"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小學 善行》 한 고을의 선사(善士)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여야 이에 한 고을의 선사를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용간(韓用幹) 1783(정조7)~1829(순조29).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위경(衛卿), 호는 진재(眞齋)ㆍ수목청화관(水木淸華觀)이다. 182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정언(正言)을 지냈다.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서 신위(申緯)와 두터운 교분을 가졌고, 유작으로 「계산만춘도(溪山滿春圖)」가 알려져 있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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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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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남포선생집 옛날 발문 南圃先生集舊跋[李玄逸] 호남(湖南)의 징사(徵士) 남포 선생(南圃先生) 김공(金公)이 죽은 지 이미 28년이 되었다. 그 문인인 간의(諫議) 나만성(羅晩成)39)이 경저(京邸)로 나를 찾아와 그의 유문(遺文) 3권을 주고, 또 그의 평생 행의(行義)에 관한 일의 전말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선사(先師)께서는 자품(資品)이 굳세고 우뚝하였으며 기상이 맑고 시원하였습니다. 젖니를 갈 무렵 7, 8세에 언어와 행동이 보통의 아이와 달랐고, 나이 12, 3세 때에는 《대학》, 《중용》을 전수받았는데, 날로 계발됨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아버지 송호공(松湖公)40)에게 여쭙기를 '선비가 책임지는 것이 매우 크니, 명리(名利)의 사이에서 급급히 다투느라 맡은 책임을 깎아 작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41)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본받을 만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도(圖)와 설(說)을 지어 좌우에 걸어두고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살폈습니다. 나이 14, 5세가 되자 그를 본 장로(長老)들은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성덕군자(成德君子)라고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하로서 사명(使命)을 받고 고을의 경내를 방문한 사람도 그를 찾아와 만나 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집안이 대대로 불행하여 폐질(肺疾)을 앓아 죽은 이가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송호공 또한 그 병에 걸렸습니다. 선생은 울면서 밤낮으로 모시고 옷을 벗지도 않은 채 시탕(視湯)하였습니다. 송호공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도 난처하여 통상적인 이치로는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42) 선생이 이에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였는데, 선생은 독자(獨子)로 형제가 없는 데다 나이가 겨우 18세였습니다. 평생 이를 매우 애통해하며 항상 말하기를 '나는 타고난 명운(命運)이 기박(奇薄)하여 상을 당해 내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천지간의 한 죄인이다. 농사나 지으면서 세상을 마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는, 인하여 남평(南平)43)의 선묘(先墓) 아래에 우거(寓居)하면서 그 당(堂)을 '명농(明農)'이라 편액(扁額)하고 '남포병일(南圃病逸)'이라 자호(自號)하였습니다.성현의 서책을 깊이 연구하여 마음으로 깨닫는 부분이 있으면 곧 책에다 쓰고, 때로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존양(存養)ㆍ신독(愼獨)44)의 공부를 하였습니다. 향리(鄕里)의 소년 중에 와서 배우는 자가 있으면 각기 그 재주에 따라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심신(心身)을 수습하여 외물(外物)에 뜻이 유혹되고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면 자연히 지기(志氣)가 청명(淸明)해져서 성현이 즐기던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배우는 자가 힘쓸 것이 어찌 사장(詞章)을 기억하고 외는 데에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은 퇴도 선생(退陶先生)45)의 학문을 존경하고 신봉하여 몸가짐은 한결같이 거경(居敬)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주고받은 것은 바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이에 그 외면을 제어함으로써 내면을 기르는데 있었으니, 어찌 외면이 방종(放縱)하고 제멋대로이면서 내면이 고요하고 전일(專一)한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이 당시 안방준(安邦俊)46)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편벽된 학문과 잘못된 견해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세를 호령하였습니다. 절의(節義)와 도학(道學)을 나누어 다른 두 갈래라고 하면서 〈우산문답(牛山問答)〉 수천 마디 말을 지어 온 힘을 다해 선현(先賢)을 기롱하고 배척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유학(遊學)하는 자들은 모두 그를 신봉하였습니다. 선생은 그 설이 횡행할까 우려하여 마침내 〈질의서(質疑書)〉를 지어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밝히니, 안방준이 마음속에 앙심을 품었고, 그 무리들은 떠들썩하게 끊임없이 공척(攻斥)하였습니다.공이 비록 대문을 닫고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47) 일찍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한 적이 없었으나 아름다운 명성이 날로 드러나 조정에서 초빙하는 깃발이 여러 번 이르렀는데, 선생은 모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기해년(1659, 효종10) 봄에 효묘(孝廟)께서 하교하여 구언(求言)할 때에 선생은 한 통의 소본(疏本)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성의정심(誠意正心)을 근본으로 하고 당세의 급무(急務)에까지 이를 미루어 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점괘(占卦)가 길하지 못하므로 그만두었습니다. 이때부터 제수(除授)하는 명이 여러 번 내려졌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공에게 배우러 오는 향중(鄕中)의 자제들이 매우 많았는데, 세 채의 서재를 열어 그곳에 거처하게 하면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48)의 유의(遺意)를 본받아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웠습니다.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는 또한 이론가(異論家)의 자제들도 많았는데, 혹자가 물리치며 돌려보내기를 청하면 곧 '경전(經傳)은 성현의 공언(公言)으로 내가 요행히 먼저 그 찌꺼기를 얻은 것이다. 성심(誠心)을 가지고 와서 배운다면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으로 불리던 자가 가까운 경내에 와 있으면서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문생(門生)과 자제(子弟)들이 매우 미워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날조하여 비방하고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어 선생이 몸을 보존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생이 한숨 쉬며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나에 대해 본래부터 유감을 품고 있었거니와 사람을 무함하고 헐뜯기를 이와 같이 하니, 내 마땅히 근신(謹愼)하여 피해야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나주(羅州)의 고향으로 와서 살면서 두문불출하며 자취를 감추니 더욱 당세(當世)에 뜻이 없었습니다. 주중(州中)에서 와서 배우려는 자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또한 사양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한결같이 남평(南平)에 있을 때처럼 과정을 세워 가르쳤습니다.선생의 흉금(胸襟)은 넓고 툭 트여 일찍이 괴상한 행실이 있지 않았는데, 시세(時勢)를 좇는 무리들이 더할 나위 없이 심하게 스스로 방해하고 배척하며 모함하였으나 선생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독실함은 항상 한결같았으며, 생도(生徒)를 교육함에 부지런히 하고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자리 한구석에 가야금 한 장(張)을 놓아두고 때로 현을 퉁기며 곡을 연주하니, 유연히 삼대(三代) 이전의 의취(意趣)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처하더라도 그의 풍표(風標)가 준수하고 의론(議論)이 뛰어나 비록 거칠고 무식한 보통 사람이라도 매번 선생을 대할 때면 일찍이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글에 대해서는 막히는 바가 없었으니, 비록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이라도 사람들이 혹시 와서 질정(質正)하면 얼음이 녹듯 환하게 풀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당세의 급무에 대해서도 모두 관심을 두고 이해하였습니다. 일찍이 《경세통전(經世通典)》 한 부를 지어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ㆍ병(兵)ㆍ승(僧)을 타당하게 조치하는 것에 대해 논하였으니, 또한 일찍이 세상을 잊어 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그 평생 동안 수립한 것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세도가 날로 쇠하여 덕을 알아줄 이가 적었던 데다, 또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에게 헐뜯기다 보니,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대한 구분이 뒤섞여버렸습니다. 군자가 칭술(稱述)하여 드러내어 밝히지 않는다면 어찌 후세에 밝게 보여주며 그 후손을 보살펴주겠습니까. 이에 감히 재배(再拜)하고서 집사(執事)에게 청하는 것이니, 다만 공께서 애처롭게 여겨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지하(地下)에서 반드시 흔연(欣然)히 웃으면서 '세상에 과연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도다.' 하실 것입니다."현일(玄逸)이 같은 시대에 살면서 청탁(淸濁)49)이 서로 달라 비록 미처 공을 알지는 못했으나 그 행장(行狀)에 근거하고 그 글을 읽어보니 또한 그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모범적으로 한 고원(高遠)함과 학문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는 성심(誠心)과 바른 의론을 부지하고 후진을 인도한 공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이에 막 그 사실을 발췌하여 그 일을 그대로 기록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이렇게 화를 만나 삭직(削職)되어 먼 지방에 유배되는 바람에, 감히 다시 붓을 잡아 글을 짓는 일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사면해 주시는 성은을 입어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 풀려나 남쪽으로 옮겨졌을 때50) 공의 외손(外孫) 나군 경성(羅君景聖)이 한두 번 찾아와 나 간의(羅諫議)가 전날에 했던 청을 다시 반복하였다. 내 생각에는 간의의 행장이 자세하고 명백하니, 굳이 다시 사족51)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또 나는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질병으로 기력이 손상되어 다시 이 일에 바칠 만한 심력(心力)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두 군(君)의 정성스런 요청에 답하지 않을 수 없겠기에 행장의 뒤에 써서 보낸다.정축년(1697, 숙종23) 8월 무오에 재령(載寧) 이현일(李玄逸)은 쓰다. 湖南徵士南圃先生金公旣沒二十有八年。其門人羅諫議晩成訪余于京邸。致其遺文三卷。旣又述其平生行義事終始而言曰。先師資稟勁特。氣調淸爽。年才毁齔。言語擧止異凡兒。年十二三。受大學中庸。日有開益。一日稟於其父松湖公曰士之責任甚大。豈可營營名利間。斲而少之。古人有言曰寧學聖人而不至。不以一善成名。此最可法也。遂作圖若說。揭之左右以自警省。及年十四五。長老見之者。莫不稱歎。目之以成德君子。朝紳之銜命過州境者。亦多就見之。家世不幸。病瘵死者十餘人。松湖公又嬰其疾。先生涕泣晝夜侍。不解衣視湯。及松湖公沒。事有至難。不可以常理言者。先生於是未能卽乎其心之安。先生旣獨子無兄弟。時年才十八歲矣。平生以爲至痛。常曰吾賦命奇薄。遭喪不能盡吾心。天地間一罪人也。不如爲農圃以沒世。因寓居南平之先墓下。扁其堂曰明農。自號南圃病逸。潛心聖賢書。有會心處。輒書之冊。有時閉目默坐。做存養謹獨之工。鄕里少年有來學者。各因其才。諄諄敎誨。嘗語學者曰人能收拾身心。不爲外物所誘奪。則自然志氣淸明。聖賢樂處可尋。學者所務。豈在記誦詞章間耶。先生尊信退陶先生之學。持身一以居敬爲主。嘗曰孔顔所授受。乃在視聽言動之間。制乎外所以養其中也。安有外放肆而內靜專者乎。時有安邦俊者。以僻學左見袒臂號於一世。分節義道學爲兩歧。著牛山問答數千言。譏斥先贒不遺餘力。游其門者翕然信之。先生憂其說之肆行。乃作質疑書以明其不然。邦俊心㘅之。其徒譁然攻斥不已。先生雖杜門却掃。未嘗求知於人。而華聞日彰。旌招累至。先生皆不就。己亥春孝廟下敎求言。先生擬上一疏。本之以誠意正心。推之以及當世之務。揲蓍不吉而止。自是除命屢下而終不起。鄕中子弟來學者甚衆。闢三齋以處之。嚴立科條。倣白鹿洞遺意。出入門下者。亦多異論。家子弟或請謝遣之則曰。經傳是聖賢公言。我幸先得其糟粕。以誠心來學。何忍拒之。時號宗匠儒林者。來在近境。欲與相見。辭以病終不往。其門生子弟嫉惡之已甚。飛言造謗。勒成罪案。使不得容身。先生喟然曰此輩啣憾有素。誣毁人若是。吾當謹避之。遂挈家來居于羅州故里。杜門屛跡。益無意於當世。而州中來學者踵相尋。亦不謝遣。立科程敎誨之一如南平時。先生襟懷坦蕩。未嘗有崖異之行。而趍時赴勢之徒。自相廝捱排擯傾軋。無所不至。先生不以爲意。好學之篤。終始如一日。敎授生徒。亹亹忘倦。座隅置一張琴。有時揮絃度曲。悠然有三代上想。處稠人廣坐中。風標俊爽。論議英發。雖麁悍凡流。每對之未嘗不斂袵起敬。於書無所觝滯。雖肯綮難解處。人或就正。莫不渙然冰釋。於當世之務。亦皆經心理會。嘗著經世通典一部書。論士農工商兵僧措置之宜。亦可見其未嘗忘世也。盖其平生所樹立。章章如是。而世道日下。知德者稀。又爲不悅者所齮齕。使是非邪正。幾於溷殽。不有君子稱述而表章之。其何以昭示來世。覆露其後嗣哉。玆敢再拜以請于執事。惟公幸哀而賜之一言。則泉壤之下。必將訢然而笑。以爲世果有知我者矣。玄逸生並一世。淸濁異流。雖未及識公。据其狀讀其書。亦足見其立心制行之高。好學樂善之誠。扶正議接後進之功。方欲摭其實。直書其事。適會此?。削職投荒。不敢更有意筆硯間。迺者獲蒙恩宥。撤棘南遷。公之外孫羅君景聖一再見訪。復申羅諫議前日之請。余惟諫議之狀。該悉明白。不必更着佛頭之糞。且余罪戾之餘。疾病摧頹。無復心力可供此役。惟是兩君勤懇之意。不可以不答也。因書此于行狀之後以歸之。上之二十四年戊寅正月十八日甲午。載寧李玄逸書。 나만성(羅晩成) 1646(인조24)~?. 자는 대로(大老),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678년(숙종4)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國朝文科榜目 肅宗 4年 戊午 增廣試》 송호공(松湖公) 김만영(金萬英)의 아버지인 김태흡(金泰洽)을 가리킨다. 고인(古人)이……것이다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말한 내용이다. 《王文成全書 卷6 與陳惟濬》 송호공(松湖公)이……있었습니다 상세하지는 않으나, 이 당시 일가친지 십여 명이 채질(瘵疾)에 걸려 죽고 부친 또한 이 병에 걸린 상황에 김만영이 집안의 독자인 탓에, 가족들이 전염을 우려하여 시병(侍病)과 치상(治喪)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저자를 공격하는 이들이 이 일을 비난의 빌미로 삼았는데, 이 일련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남평(南平) 현재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에 해당하는 옛 고을의 지명이다. 존양(存養)ㆍ신독(愼獨) 존양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바른 성품을 기르는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신독은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것이다. 《대학장구》 전(傳) 6장에 "악을 미워하기는 악취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는 미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하니, 이것을 자겸(自慊)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라고 하였고, 《중용장구》 제1장에 "숨어 있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퇴도 선생(退陶先生) 이황(李滉, 1501~1570)을 가리킨다. 안방준(安邦俊) 1573(선조6)~1654(효종5).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峯)ㆍ우산(牛山),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전라도 보성(寶城) 출신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때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효종 초에 유일(遺逸)을 등용할 때 천거되었다. 저서로는 《은봉전서(隱峯全書)》가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3 隱峯全書》 참고로, 1652년(효종3) 김만영(金萬英)은 안방준이 지은 〈우산답문(牛山答問)〉에 대해 〈상우산질의서(上牛山質疑書)〉를 지어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명현(名賢)과 진유(眞儒)의 구분, 길재(吉再)에 대한 평가 등에서 이론을 보인다. 대문을……끊고 원문의 '두문각소(杜門卻掃)'는 대문을 닫아 걸고서 정원의 길도 쓸지 않는다는 말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밀(李謐)이 "대문을 닫고서 정원의 길도 쓸지 않았으며, 산업은 돌보지 않은 채 독서만 일삼았다.[杜門却掃, 棄産營書.]"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魏書 卷90 逸士列傳 李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중국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 아래 산골짝에 있는 서원이다. 주희가 남강군 태수(南康軍太守)로 있었을 때, 과거에 그 자리에 있다가 없어진 서원을 재건하여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주희는 유교의 근본 덕목인 오륜(五倫), 배움의 차례, 수신(修身)의 요체, 처사(處事)의 요점, 그리고 대인 관계의 기본자세로 구성된 교칙을 세워 제자들을 엄격히 가르쳤다고 한다. 《宋史 卷429 道學列傳 朱熹》 《朱子大全 卷86 祝文》 청탁(淸濁) 조선 중기 이후에는 당파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졌는데, 그 후 숙종조(肅宗朝)에 들어오면서 남인은 청남(淸南)과 탁남(濁南), 서인은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으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청탁'은 바로 청남과 탁남을 가리키는데, 이현일(李玄逸)은 청남에 속했었다. 마침……때 이현일은 72세 때이던 1698년(숙종24)에 이 발문을 썼다. 이보다 앞서 68세 때이던 1694년(숙종20) 4월에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그 즉시 사헌부의 계청으로 인해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의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다가, 5월에 서울로 되잡혀 와서 신문을 받고 난 뒤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ㆍ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는 1689년(숙종15)에 구언(求言)에 응한 상소에서 당시 폐비(廢妃)되어 사가(私家)에 내쳐져 있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별궁(別宮)에 거처하게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문(疏文)에 있는 몇 구절이 인현왕후를 모해(謀害) 하고자 한 것이라고 꼬투리 잡혀 마침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었다. 이현일은 이후 71세 때이던 1697년(숙종23) 5월에 호남의 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다가, 72세 때이던 1698년(숙종24) 3월에 섬진강(蟾津江) 갈은리(葛隱里)에 우거(寓居)한 바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27, 128輯 葛庵集》 사족 원문의 '불두지분(佛頭之糞)'은 본래는 참새가 부처 머리에 똥을 싸는 모습을 보고 최 상공(崔相公)과 선사가 나눈 문답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후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오대사(五代史)》에 어떤 사람이 서문을 지어 앞머리에 붙이려 하자, 왕안석(王安石)이 이를 인용해 "부처의 머리 위에 어찌 똥을 칠한단 말인가.[釋迦佛頭上, 不堪着糞.]"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이후로는 훌륭한 글의 첫머리에 변변치 못한 서문(序文) 등을 쓰는 것을 비유하는 겸사로 쓰이게 되었다. 《景德傳燈錄 如會禪師條》 《古今事文類聚 別集 卷5 文章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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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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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2 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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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동계(參同契)》271)를 읽었으나 그 오묘한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였다. 국화를 심다가 감회를 일으키다.【나는 평소 병이 많아 약물과 수련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살피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참동계》의 비법을 들었으나 궁벽한 곳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무신년(1668, 45세) 연간에 남운로(南雲路)272) 영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일을 언급하였는데, 남공이 빌려 주기를 허락하였다. 기유년(1669, 46세) 봄 천리 먼 곳에 전해주었기에 한 해 남짓 읽어 보았으나 그 오묘한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였다. 지금 국화를 심다가 문득 생각이 미쳐 그 뜻을 부친다.】 閱參同契。莫究其妙。仍種菊起感。【余平生多病。凡藥餌修鍊之方。無不窮考。嘗聞魏伯陽參同契之術。而僻地無可求。戊申年間。邂逅南雲路令公話及之。南許以㭒2)倩。己酉春。千里遠傳。披閱歲餘。莫究其妙。今仍種菊而忽念及焉。以寓其意也云。】 구전(九轉)의 금단(金丹)273) 만드는 방법 전해지지 않으니솥 안의 용호(龍虎) 끝내 달이기 어렵네274)꽃잎 먹으면서 차라리 도 팽택(陶彭澤)을 배우겠으니동쪽 울타리에 술 취해 누우니 이 또한 신선이네275) 九轉金丹術未傳鼎中龍虎竟難煎啜英寧學陶彭澤醉臥東籬亦是仙 참동계(參同契) 한(漢)나라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책으로, 《주역(周易)》 효사(爻辭)에 맞추어 연단(鍊丹)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남운로(南雲路)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을 가리킨다. 운로(雲路)는 그의 자.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약천(藥泉)이다. 1656년 과거에 급제하여 교리, 대사성, 함경도 관찰사, 형조 판서 등을 거치고 삼정승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4 藥泉集》 구전(九轉)의 금단(金丹) 도가(道家)에서 제조하는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으로, 아홉 번의 단계를 거쳐야 완성된다고 한다. 솥……어렵네 연단술을 익히기 어렵다는 말이다. '솥'은 도가(道家)에서 단약(丹藥)을 제련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며, '용호(龍虎)'는 도가에서 정기(精氣)를 이르는 말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5 〈참동계(參同契)〉에, "감과 리, 수와 화, 용과 호, 납과 수은 따위는 다만 그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일 뿐이요, 그 실제는 다만 정과 기 두 가지일 뿐이다. 정은 수와 감, 용과 수은이고, 기는 화와 리, 호와 납이다.[坎離水火龍虎鈆汞之屬 只是互換其名 其實只是精氣二者而已 精 水也 坎也 龍也 汞也 氣 火也 離也 虎也 鉛也]"라 하였다. 꽃잎……신선이네 도 팽택(陶彭澤)은 팽택 현령(彭澤縣令)을 지냈던 도연명(陶淵明)으로, 그는 국화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고,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 하였다. 㭒 오자로 추정되나, 어떤 글자의 오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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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이 지내며 성찰하다【4수】 閒居省察【四首】 가슴 속에 하나의 조정을 따로 세우니주객(主客)과 군신(君臣) 간에 분의(分義)가 분명하네만물이 조정에 함께 서서 다 같이 명을 들으니온 당(堂)에 일이 없고 다만 허령(虛靈)할 뿐이네【위는 마음이 만사를 거느림이다.】아침 내내 괴롭게 다퉜으나 전공(戰功)이 없으니어지러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마치 쑥대머리와 같네승패와 흥망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으니잡아 지키는263) 방략(方略)은 원수(元帥)에게 달려 있네【위는 이욕(理欲)이 서로 다툼이다.】기린각(麒麟閣)264) 위에 공신(功臣) 그려져 있으니지수(志帥)265)의 훈공과 명성 첫 번째라네이로부터 태평한 시대 비로소 점칠 수 있으니시를 짓고 서로 이어 화답함에266) 옛 나라 새로워지네【위는 뜻이 기(氣)를 거느림이다.】많은 관원 조회(朝會)에 모였다가 일이 다 끝나 조정이 텅 비니대(臺) 위의 깊은 궁에 상서로운 해 붉네저 속에서 참된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천 길 깊이의 옥연(玉淵) 바람도 없이 맑은 것을 보아야 하리【위는 일이 지나고 사물이 떠남이다.】 胷中別立一朝廷主客君臣分義明萬品同朝咸聽命一堂無事但虛靈【右心統萬事】終朝苦戰戰無功起滅紛紜似亂蓬勝敗興亡猶未判操存方略在元戎【右理欲交戰】麒麟閣上畫功臣志帥勳名第一人自此昇平方可占作詩賡詠舊邦新【右志以御氣】萬官朝虗【恐作處】大庭空臺臺上深宮瑞日紅那裏欲知眞箇意玉淵千仞淡無風【右事過物去】 잡아 지키는 원문은 '조존(操存)'이다. 마음을 잡아 굳게 지키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공자가 이르기를 '잡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를 향할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기린각(麒麟閣)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 등 11명의 공신(功臣)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 이름이다. 후대에는 모든 공신각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漢書 卷54 蘇武傳》 지수(志帥)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지(志)는 기(氣)의 장수이다.[夫志 氣之帥也]"라 한 데서 유래한 말로, 뜻[志]을 장수로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시를……화답함에 원문은 '작시갱영(作詩賡詠)'이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를 권면하며 노래를 수창하는 것으로, 순(舜) 임금과 고요(皐陶)가 노래를 주고받으며 공경히 직무를 수행할 것을 권면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한 노래를 '갱재가(賡載歌)'라 한다. 《書經 益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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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향교 대성전 상량문 錦城鄕校大成殿上梁文 천지를 관(棺)으로 삼고 일월을 장지(葬地)로 삼아도 사십 분의 덕의(德儀)는 쫓아가기 어렵다.【어떤 본에는 '모두 우러른다[咸仰]'로 되어 있다.】 북두성을 향하고 화산과 숭산55)을 당길 듯한 이곳에 어찌 삼백년 구전(舊典)을 창건하지 않겠는가. 이에 택궁(澤宮)56)의 제도를 본받아서 마침내 고을에 학교의 규범을 세웠다. 생각건대 이 고을은 기미성 남쪽 분야57)이며 영해(瀛海)58)의 동쪽 지역으로, 영산강이 바다와 접해 있어 승부(乘桴)의 밝은 교화59)를 부여잡을 수 있고, 금성산이 허공에 서렸으니 소로(小魯)60)의 지극한 뜻을 거의 계승할 만하다.돌아보건대 신라 말엽에 비루해져서61) 바른 학문이 전해지 못했고, 고려조에 경박해져서 쇠퇴한 뒤로 성스러운 은택이 다 미치지 못하였다. 공사(公私) 간에 좌도(左道)62)의 시주(施主)를 다투어 본뜨고, 주군(州郡)에서는 바른 학문을 일으키는 데 매우 어두웠다. 진정한 성인이 5백년의 주기에 응하여 나와서63) 유도(儒道)를 존중하고 학문을 숭상하였는데 다행히도 이 땅에 천재일우의 운수를 만나서 학교를 건립하게 되었으니, 한계(寒溪)의 동문(洞門)은 궐리(闕里)에서 읊조리고 외우는 것과 유사하고64) 광탄(廣灘)의 원파(源派)는 기우(沂雩)에서 목욕하고 바람 쏘이는65) 것과 방불하였다.그러나 명협(蓂莢)이 시들어66) 세월이 흐르니 대부분 이끼가 먹어 비가 세었다. 지금 전하께서 즉위하신지 12년 되는 경술년(현종11, 1670) 봄에 향을 전하께서 내려주니 혼령이 훈호(薰蒿)67)하여 기둥 사이의 제수(祭需)에 접한 듯하고, 물이 땅속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68) 소명(昭明)하여 성령이 이곳에 임한 듯하다. 옛 날 그대로 터를 닦으니 장부(長府)는 민손(閔損)에게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고,69) 학궁 설계에 제도가 있으니 산절(山節)이 어찌 장문중(臧文仲)보다 못하겠는가.70) 증삼(曾參)처럼 재용에는 방도가 있었고71) 맹가(孟軻)처럼 농사철을 빼앗지 않았다.72)상하의 동우(棟宇)는 《주역》 〈대장괘(大壯卦)〉에서 취하였고73) 동서의 서영(序榮)74)은 주나라 제도의 유풍(霤風)을 본뜬 것이다. 승당(升堂)한 십철(十哲)이 열석(列席)해 있고 입실(入室)한 사성(四聖)이 동렬에 있다.75) 우조의란(虞操猗蘭)76)은 제나라에서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던 음악77)을 듣는 듯하고, 희란하행(姬亂河荇)78)은 노나라로 돌아온 칠순의 공자79)를 접하는 듯하다. 쇠퇴한 주(周)나라가 저무는 때에 요순(堯舜)의 기상을 품고, 말기의 송(宋)나라가 스러져가는 날에 우리 정주(程朱)의 정통 학맥을 열었도다. 【단구(短句)가 빠진 듯하다.】 도(道)는 오랑캐와 중화(中華)의 차이가 없으니 사유(四儒)가 동한(東韓)에서 지극한 가르침을 따랐고, 덕이 옛날과 지금이 어찌 다르겠는가, 오현(五賢)은 지결(旨訣)을 북학(北學)80)에서 받들었도다.연이어 합한 궁실에서 함께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니81) 좌우전후에 계신 듯 양양하고82) 우러러 뵈오니 심원하도다.83) 삼강(三綱)이 모두 확립되어 전각과 더불어 하늘을 경영하고 구법(九法)84)이 모두 조화롭게 되어 들보 기둥과 나란히 땅을 다스릴 것이니, 이는 모두 성세(聖世)의 명교(明敎)를 따르고 또한 현부(賢府)의 중창에도 관계되는 일이다. 주자(周子)는 소주(邵州)에서 고명(高明)함이 복서(卜筮)에 부합되었고85) 문옹(文翁)도 금리 (錦里)에서 유학의 교화를 성취하였었다.86) 전당(鱣堂)87)에 경사가 넘치고 접역(鰈域)88)에 환희가 펼쳐지니 이에 아랑(兒郞)의 축문89)을 진술하여 감히 들보 올리는 일을 돕는다.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져라90)서일이 막 솟아 쌓인 기운 토하네성신의 진묘한 자취 알고자 하니바다 하늘에 단비 내리고 춘풍에 화육되네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져라수사의 참된 근원이 바닷가에91) 접했구나조석으로 밀물이 통하여 금수92)에 이어지니이로부터 곧바로 하늘 사다리에 오르리라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져라남극에서 추성93)이 바다로 들어가 잠기네밤낮으로 천지의 축을 부지하고북극성을 마주하며 삼성과 함께 하네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져라뭇별들이 빙 둘러서 북극성을 도네하늘과 사람을 어찌 둘로 나눠 보랴성화는 작위가 아니라 덕에 있다네어영차 들보 위로 떡을 던져라칠요와 삼광94)이 만상을 나누네성스러운 도는 하늘 같으니 어찌 오르랴95)어리석은 무리는 백대토록 흠앙할 뿐이네어영차 들보 아래로 떡을 던져라유생들은 봄가을로 시서를 일삼네육경96)에 분명 도의 진수가 실려 있으니의리에 깊이 잠기면 친자한 것과 같으리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로는 집마다 예의를 말하고 집마다 시서를 외우며, 금석사【어떤 본에는 '사(絲)'가 '생(笙)'으로 되어 있다.】황97)으로 만대토록 제사를 길이 올리고, 문(文)·행(行)·충(忠)·신(信)으로 4교(敎)98)의 법도를 길이 남기며, 많은 선비들이 난새처럼 비상하여 멀리 옛 성인의 전통을 잇고, 여러 현인들은 기러기처럼 점진하여99) 일어나 우리 조정의 유종(儒宗)을 진작할지어다. 棺天地葬日月。 難追【一作咸仰】四十表之德儀。 拱星斗挽華嵩。 盍創三百年之舊典? 玆倣澤宮之制。 聿建州序之規。 竊惟玆州。 箕尾南分。 瀛海東域。 靈江接海。 乘桴之睿化可攀。 錦岳蟠空。 小魯之至意庶述。 顧咮㒧於羅季。 正學無傳。 洎澆喪於麗朝。 聖澤未究。 公私爭效左道之施捨。 州郡專昧右文之作興。 唯眞聖膺五百之期。 重儒崇學。 幸玆土値千一之運。 建塾立庠。 寒溪洞門。 依俙闕里之絃誦。 廣灘源派。 髣髴沂雩之浴風。 逮蓂老而歲遷。 多蘚蝕而雨漏。 維嗣王甲子一紀。 乃歲星庚戌三春。 降香自天。 薰蒿乎楹奠若接。 如水在地。 昭明乎聖靈臨玆。 仍舊修基。 長府無譏於閔損。 畫宮有制。 山節豈歉於臧文? 曾參之財用有方。 孟軻之農時不奪。 上下棟宇。 取雷天於羲經。 東西序榮。 學霤風於周制。 升堂之十哲在列。 入室之四聖班行。 虞操猗蘭。 若聞在齊之三月。 姬亂河荇。 怳接返魯之七旬。 衰周暮天。 孕此堯舜氣象。 晩宋殘日。 啓我程朱嫡傳。【恐闕短句】道無間於夷夏。 四儒遵至敎於東韓。 德何殊於今古。 五賢奉旨訣於北學。 連宮合室。 共苾同芬。 洋洋乎左右後先。 穆穆乎鑽仰瞻忽。 三綱並立。 與殿隅而經天。 九法偕和。 齊杗桷而緯地。 皆仍聖世之明敎。 亦係賢府之重新。 周子邵州。 高明協卜。 文翁錦里。 儒化可成。 慶溢鱣堂。 歡開鰈域。 式陳兒卽之祝。 敢助梁欐之升。 兒郞偉抛梁東。 瑞日初昇積氣融。 欲識聖神眞妙跡。 海天時雨化春風。 兒郞偉抛梁西。 洙泗眞源接海倪。 日夕通潮連錦水。 從玆直到上天梯。 兒郞偉抛梁南。 南極樞星入海涵。 日夜扶持天地軸。 北辰相對共參三。 兒郞偉抛梁北。 衆星連繞環樞極。 天人豈可兩分看。 聖化無爲唯在德。 兒郞偉抛梁上。 七曜三光分萬象。 聖道如天豈可階。 羣蒙百代徒欽仰。 兒郞偉抛梁下。 章甫詩書春及夏。 六籍分明載道眞。 沉潛義理如親炙。 伏願上梁之後。 家談禮義。 戶誦詩書。 金石絲【一作笙】簧。 永奠萬代之樽俎。 文行忠信。 長留四敎之規矩。 羣彦鸞翔。 遠紹往聖之統緖。 諸賢鴻漸。 起作本朝之儒宗。 화산과 숭산 '화숭(華嵩)'은 화산(華山)과 숭산(嵩山)의 병칭이다. 택궁(澤宮) 주나라 때 활쏘기를 하여 사(士)를 선발하던 곳인데, 전하여 태학(太學)을 말한다. 《周禮 夏官 司弓矢》 기미성 남쪽 분야 기미(箕尾)는 28수(宿) 별자리 중 동쪽 별자리인 기수(箕宿)와 미수(尾宿)에 해당하는 즉 조선을 가리키고 남쪽 분야는 나주를 지칭한 것이다. 영해(瀛海) 큰 바다인데 여기서는 황해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이러한 주가 아홉 개가 있고 영해가 그 밖을 에워싸고 있다.[如此者九, 乃有大瀛海環其外.]" 하였다. 황해는 중국 쪽에서는 동쪽이다. 승부(乘桴)의 밝은 교화 공자의 교화를 가리킨다.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니, 이때 나를 따라올 사람은 아마 중유일 것이다.[道不行, 乘桴, 浮于海, 從我者, 其由與.]"라고 하였다. 《論語 公冶長》 소로(小魯) 큰 포부를 비유한 것이다. 나주(羅州)의 금성산에 오르면 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는 것과 같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맹자가 이르기를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비루해져서 원문의 '주리(咮㒧)'로 주리(侏離)와 같은 뜻인데, 오랑캐의 언어 문자를 가리킨다. 공자의 유학을 벗어난 것을 가리킨다. 좌도(左道) 이단(異端)의 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이다. 진정한……나와서 '500년의 주기[五百之期]'란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맹자가 제(齊)나라를 떠나면서 "500년마다 반드시 왕자가 나온다.[五百年, 必有王者興.]"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즉 요순(堯舜)에서 탕왕(湯王)까지, 탕에서 문왕(文王)·무왕(武王)까지 성현이 태어나는 주기를 500년으로 본 것이다. 궐리(闕里)에서……유사하고 나주 한계동에서 글읽는 소리가 마치 공자의 제자들이 궐리에서 글읽는 소리와 유사하다는 뜻이다. '궐리'는 지명으로 《공자가어(孔子家語)》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 "공자가 궐리에서 처음 가르쳤다.[子始敎學于闕里.]" 하였다. 기우(沂雩)에서……쏘이는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曾點)이 마침 비파를 타다가 쟁그렁 소리와 함께 비파를 놓고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5, 6인,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한 데서 온 말이다. 명협(蓂莢)이 시들어 세월이 흘러 건물이 낡은 것을 말한다. '명협'은 요 임금 때 조정 뜰에 났다는 서초인데, 매월 1일부터 15일까지 매일 한 잎씩 나오고, 16일부터 그믐날까지 매일 한 잎씩 떨어졌으므로, 이것으로 날을 계산하여 달력을 만들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竹書紀年 卷上 帝堯陶唐氏》 혼령이 훈호 '훈호(薰蒿)'는 귀신의 기(氣)를 형용한 것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생물들은 반드시 죽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나니 이를 귀라고 이른다. 뼈와 살은 땅속에서 썩어 흙이 되고 이것이 야토가 되면 그 기는 발하여 위로 올라가서 소명, 훈호, 처창이 된다.[衆生必死, 死必歸土, 此之謂鬼. 骨肉斃于下, 陰爲野土, 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 소명, 그 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훈호, 사람의 정신을 두렵게 하는 것이 처창이다.[鬼神之露光處是昭明, 其氣蒸上處是焄蒿, 使人精神竦動處是悽愴.]" 하였다. 물이……것처럼[如水在地]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공의 신이 천하에 있는 것은 마치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아 어디로 간들 있지 않음이 없다.[公之神在天下者, 如水之在地中, 無所往而不在也.]" 하였다. 《東坡全集 卷86》 옛……것이고 원문의 '장부(長府)'는 재화(財貨)를 넣는 창고인데 여기서는 향교의 건물을 가리킨다. 《논어》 〈선진(先進)〉에 "노나라 집정자가 장부를 고쳐 짓자, 민자건이 말하기를 '옛 일을 따르는 것이 어떠한가. 어찌 꼭 고쳐 지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魯人爲長府, 閔子騫曰, 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 하였다. 산절(山節)이……못하겠는가 장식을 제도에 맞게 했다는 뜻이다. '산절(山節)'은 두공(斗栱)에 산 모양을 새기는 것인데, 여기서는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장문(臧文)'은 춘추 시대에 노(魯)나라의 대부인 장문중(臧文仲)이다. 장문중이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을 만들면서 너무 호화스럽게 꾸미자, 공자는 "장문중이 거북껍질을 보관하되, 두공(斗栱)에 산을 그리고 동자기둥에 마름을 새기니, 어떻게 지혜롭다고 하겠는가.[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라고 질책하였다. 《論語 公冶長》 증삼(曾參)처럼……있었고 향교를 짓는데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증삼(曾參)'은 증자(曾子)의 이름이다. 《대학장구》 전 10장에 "군자는 먼저 덕을 삼가니, 덕이 있으면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영토가 있고 영토가 있으면 재물이 있고 재물이 있으면 씀이 있다. 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다.……그렇기 때문에 재물을 모으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백성들이 모이는 것이다.[君子先愼乎德, 有德, 此有人, 有人, 此有土, 有土, 此有財, 有財, 此有用. 德者, 本也, 財者, 末也.……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하였다. 맹가(孟軻)처럼……않았다 향교를 짓는데 농사철은 피했다는 뜻이다. '맹가(孟軻)'는 맹자(孟子)의 이름이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농사철을 빼앗지 않으면 곡식을 이루 다 먹을 수 없고……왕도 정치의 시작이다.[不違農時, 穀不可勝食也,……王道之始也.]" 하였다. 상하의……취하였고 집을 튼튼하게 짓는 것을 말한다. '희경(羲經)'은 《주역》의 별칭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시대에는 사람들이 굴에서 살고 들판에서 살았다. 후세에 성인이 이것을 집으로 바꾸어 위에는 들보를 얹고 아래에는 서까래를 얹어 비바람에 대비하였다. 이것은 〈대장괘〉에서 취하였다.[上古, 穴居而野處. 後世聖人, 易之以宮室, 上棟下宇, 以待風雨. 蓋取諸大壯.]" 하였다. 서영(序榮) '서(序)'는 상(廂)을, '영(榮)'은 처마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동서에 세워진 건물을 말한 것이다. 승당한……있다 원문의 '승당(升堂)'은 학문이나 도의 경지가 어느 정도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을, '입실(入室)'은 승당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을 뜻한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학문 수준을 두고 말하기를 "당에는 올랐고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升堂矣, 未入室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십철(十哲)'은 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계로(季路)·자유(子游)·자하(子夏)·자장(子張)을 일컫는다. '사성(四聖)'은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를 말한다. 우조의란(虞操猗蘭) 상량식에 연주했던 음악을 비유한 것이다. '우조(虞操)'는 우순(虞舜)의 금곡(琴曲)을 가리키고, '의란(猗蘭)'은 공자가 지었다는 금곡(琴曲)인 의란조(猗蘭操)를 말한다. 제나라에서……음악[齊之三月] 매우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께서 제나라에 계실 때에 순 임금의 소악을 들으시고는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 하였다.[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하였다. 희란하행(姬亂河荇) 상량식에서 읊었던 시를 비유한 것이다. '희란(姬亂)'은 뜻이 미상이고, '하행(河荇)'은 《시경》 〈관저(關雎)〉에 "들쭉날쭉한 마름을 이리저리 물 따라가며 취하도다.[參差荇菜, 左右流之.]라고 하였다. 노나라……공자[返魯之七旬] '반로(返魯)'는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로 음악이 바루어져서 아와 송이 각기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하였다. '칠순(七旬)'은 그 당시의 나이가 칠순이었다는 뜻인 듯하다. 공자는 68세 때인 노나라 애공(哀公) 11년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오현(五賢)은 지결(旨訣)을 북학(北學) '오현'은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다섯 명의 유현(儒賢)을 가리킨다. '북학'은 북쪽으로 가서 배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중국의 학문을 비유한 것이다.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니 '필(苾)'과 '분(芬)'은 제물에서 나는 향기를 말하는데 제사의 뜻으로 쓰인다. 《시경》 〈초자(楚茨)〉에 "향기로운 효사에 신이 음식을 즐기네.[苾芬孝祀, 神嗜飮食.]" 하였다. 좌우전후에……양양하고 원문의 '양양(洋洋)'은 신령이 곁에 있는 듯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중용장구》 제16장에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의복을 성대히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는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하였다. 우러러 뵈오니 심원하도다 원문의 '찬앙첨홀(鑽仰瞻忽)'은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안연(顔淵)이 공자(孔子)의 무궁무진(無窮無盡)한 도를 깊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보면 앞에 있는 듯하다가, 홀연히 뒤에 계시도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하였다. 《論語 子罕》 구법(九法) 《서경》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가리킨다.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으로, 곧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이다. 주자(周子)는……부합되었고 주자(周子)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頥)를 가리키는데 그도 소주(邵州)에서 학교를 중수하는 데 관련이 있었다는 뜻인데, 미상이다. 문옹(文翁)도……하였었다 '문옹(文翁)'은 중국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의 문신이다. 촉(蜀) 땅의 군수가 된 후 성도(成都)의 시장 가운데에 관학(官學)을 설치하여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다 배우게 하였다. 입학자는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고을의 관리로 보임하였다. 이에 촉군에 교화를 펼치고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인재를 대거 배출하였다. 이는 무제(武帝) 때 전국의 고을에 관학을 설치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漢書 권89 文翁傳》 전당(鱣堂) 강학하는 장소를 말한다. 한(漢)나라 양진(楊震)이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서도 여러 차례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황새가 강당(講堂) 앞에 전어(鱣魚) 세 마리를 물고 날아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전어는 대부들이 입는 옷의 무늬이고, 세 마리는 삼태(三台)의 조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양진이 과연 태위(太尉)에 올랐다. 《後漢書 권54 楊震列傳》 접역(鰈域) 가자미가 생산되는 지역이란 뜻으로, 조선을 가리킨다. 아랑(兒郞)의 축문 상량문(上樑文)를 말한다. 원문의 '兒卽'은 '兒郞'의 잘못이다. '아랑(兒郞)'은 아량위(兒郞偉)인데 '어영차'의 의성어로, 어영차 올린다는 뜻이다. 들보……던져라 '포량동(抛樑東)'은 상량문 말미의 축송에 상투적으로 붙는 말로, 상·하·사방의 여섯 방위 중 첫째로 동쪽을 든 것이다. 이 같은 투식은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 때부터 전해 내려왔다. 건축물의 기본 골격이 완성된 뒤에 길일(吉日)을 골라 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하는데, 이때 친지들이 음식을 싸와서 축하하고 목수들을 대접한다. 그러면 도목수가 대들보 위에 걸터앉아 만두·떡 등을 상·하·사방으로 던지며 상량문을 읽어 축원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량식도 이와 유사했다. 수사의……바닷가에 나주에 향교가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수사(洙泗)'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공자가 이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공자의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바닷가'는 나주(羅州) 영산강이 닿는 서해를 가리킨다. 금수(錦水) 나주의 영산강(榮山江)을 가리킨다. 추성(樞星) 북두칠성의 첫 째 별인데, 북두칠성을 말한 것이다. 칠요와 삼광 '칠요(七曜)'는 일(日)·월(月) 및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다섯별을 말한다. '삼광(三光)'은 해와 달과 별을 말한다. 성스러운……오르랴 공자의 위대함을 말한 것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子貢)이 스승인 공자의 위대함을 일컬으면서 "우리 선생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마치 사다리를 타고서 하늘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육경 원문의 '육적(六籍)'으로 육경(六經)과 같은 말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의 중요한 경전인 《역경》·《시경》·《서경》·《춘추》·《예경》·《악경》을 말하는데, 이 가운데, 《예경》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책을 가리키기도 하며, 《악경》은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거치면서 없어졌다. 금석사황(金石絲簧) 각종 악기를 가리킨다. 금은 쇠로, 석은 옥으로 만든 악기이며 사는 현악기, 황은 관악기이다. 4교(敎)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4가지로 가르쳤으니, 문(文)·행(行)·충(忠)·신(信)이었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한 것을 이른다. 기러기처럼 점진하여 원문의 '홍점(鴻漸)'으로, 기러기가 낮은 곳에서 점차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점괘(漸卦) 상구(上九)〉의 "상구는 기러기가 공중으로 점점 날아가는 것인데, 그 깃이 의표(儀表)가 될 만하니, 길하다.[上九, 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 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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