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서문대 經鋤問對 시골 농사꾼은 세상의 일에 대해 알고 힘쓰는 것이 없어 손으로 호미 들고 김매고 농사지어서 어버이 모시는 계책으로 삼고 있다. 날마다 2, 3명의 일꾼을 데리고 동쪽 언덕 아래에서 농사일하느라 체력이 다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면 호미를 놓고 언덕에 올라가 즐겁게 옛 경(經)을 읽는다. 객이 방문하여 길게 읍하고 말하기를 "무의(巫醫)·악사(樂師)·재장(梓匠)·윤여(輪輿)는 천한 기술이지만 본디 밭 갈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하물며 옛 경을 다스리는 것 또한 밭 갈면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농부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신지(莘摯)의 뢰(耒)37)와 원량(元亮)의 서(鉏)38)를 객 또한 들어보았는가?"라고 하니, "들어봤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마음을 세움에 마땅히 이윤(伊尹)을 뜻 삼아 궁(窮)하여도 또한 행하며 달(達)하여도 또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끝내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도연명이 지킨 절개를 지키고 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객이 발끈하여 응대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응결되어 있고 사납습니다. 이윤은 성인이요, 도연명은 현인입니다. 한쪽은 성인이고 다른 한쪽은 현인이지만 성인·현인을 자처하지 않았는데 더군다나 그대가 자처하겠습니까? 그대가 어려서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나이 먹어 이룬 것이 없고 하나의 뜻도 세우지 못하고 많은 허물이 운집하였으며 궁하여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한갓 사체(四體)의 부림을 받고 있는데도 어찌 그대가 높고 크게 뜻을 세워 행동이 미치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농부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고 저 사람이 옳지 않다. 그러나 곤(鯤)이 깃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갈 뜻이 있고,39) 대안(岱鴈)은 털이 없는데도 천 리를 번개처럼 날아갈 마음이 있으니 군자가 담대(膽大)함을 귀하게 여기고, 자중(自重)한 것은 진실로 이 도(道)를 지극히 원대하고 여기고, 이 임무를 지극히 중하게 여겨서이다. 용도(容刀)의 배로는 바다를 건너기 부족하고, 한 척의 칼을 뽑아서는 적을 제압할 수 없으므로 옛사람이 마음에 반드시 성인이 되기로 기약했던 것은 어째서이겠는가? 나와 성인은 처음에는 조금도 다름이 없지만 진실로 그 같음을 알아서 작은 차이도 없게 하면 나 또한 한 사람의 성인일 뿐이니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비록 그렇지만 성인도 사람이니 사람이면서 사람을 배우면 사람이 각각 능하게 된다. 하늘에 대해서는 높고 위대함을 말로 형용할 수 없는데도 옛날 사람들이 하늘과 덕을 나란히 한자가 있다고 한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의(仁義)일 뿐이니 그대의 말이 비루하여 자포자기에 빠진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습니다. 청컨대 그대의 농사짓는 즐거움을 묻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천지는 지극히 크고 만물은 지극히 많아도 도(道)가 그것들 사이에 깃든다. 천지는 부모요, 만물은 동포이니 달(達)하여 구제[濟]를 겸하는 것은 그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이요, 궁(竆)하여 검약[約]을 지킴은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니다. 나의 뜻이 나의 마음의 수고로움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천하와 그 도를 함께하는 것이요, 나의 뜻이 나의 힘의 수고로움을 행할 수 없는 것은 밭고랑 사이에서 그 분수를 스스로 즐기는 것이다. 봄에 밭 갈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은 천시(天時)의 서권(舒捲)를 따르는 것이요, 행(行)을 즐기고 위(違)를 걱정하는 것은 도체(道軆)의 자연(自然)을 감당하는 것이다. 서쪽 들에서 일을 마치고 유연히 돌아오니 책상에는 책이 있어서 흔연히 함영(涵泳)하니 그 가운데에 천지가 있고 그 가운데에 만물이 있다. 부자(父子)가 갖추어져야 군신(君臣)이 갖추어지고 형제(兄弟)가 있어야 부부(夫婦)가 유별하게 된다. 희(羲)·농(農)·요(堯)·순(舜)이 호호희희(皡皡熙熙)40)하고, 공(孔)·맹(孟)·정(程)·주(朱)가 혼혼(混混)41)·원원(元元)하여 모두 거두어 함께 엮어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니 일상생활 사이에 주옹(主翁)은 아마도 그 즐거움이 있지 않겠는가? 별안간 언덕을 지나 골짜기를 찾아서 나의 남쪽 밭을 돌보니 쭉정이가 자라지 않고 오곡이 잘 자라고 있다. 황충이 다 사라지고 때에 맞는 비가 내리니 시골의 백성과 늙은이가 모두 노래 부르고 흥얼거리고 읊조리고 손뼉 치면서 서로 얼싸안고 서로 읍하고 축하하여 한갓 덕색(德色)을 드러내고 발해(哱咳)를 드러내지 않으니, 말하고 웃는 즈음에 주옹은 아마도 그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나의 농사짓는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우리 그대의 즐거움은 이미 들었습니다. 청컨대 성인을 배우는 도를 듣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농부가 배움은 소를 채찍질하여 부지런히 밭을 가는 일뿐이다. 쟁기를 잡는 손은 실제로 리(理)를 탐구하는 손이 아니니 권농가를 부르는 입술이 어찌 도를 강론하는 입이겠는가? 성현(聖賢)의 모범(模範)이 책에 밝게 빛나 천년 만 년 빛이 해·달과 같을 것이니 진실로 바보가 아니면 누가 보고 아는 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지극히 은미한 것은 드러나기 어렵고 지극히 위태로운 것은 타기[乘] 쉬우니 하나의 근본이 비록 같더라도 만 가지로 각각 달라지니42) 만 가지의 다름으로써 타기 쉬움의 위태로움에 골몰하면 동일한 하나의 근본이 더욱 은미해진다. 정주(程朱) 이후로 위아래 천년 백 년 동안 하나로 꿰뚫는 전통 위에서43) 공자·맹자를 접한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옷깃은 푸르고 소매는 노란 고준한 담론을 하는 자가 분분하게 함께 일어나 각각 논한 것이 달라서 대도(大道)를 잃어버렸다. 지금의 학자는 그 만 가지 다른 것을 하나로 하여 근본 하나에 함께 귀착시키고 그 지극히 위태로운 것을 눌러서 그 은미한 것을 드러내게 하니 그 요체는 치지(致知)·역행(力行)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치지(致知)의 잘못은 쉽게 박잡(博雜)한 데에 이르고 역행(力行)의 잘못은 쉽게 고루(固陋)한 데에 흐르는 것이니 박잡한 것은 구이(口耳)의 학문44)이 되고 고루한 것은 황로(黃老)의 학문45)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묘목을 심어놓고 김매지 않아 도리어 쭉정이만 자라고, 오동나무를 심고 가꾸지 않아 가시덤불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반드시 앎은 잡다한 것에 흐르지 않아야 하고, 행동은 누추한 곳에 흐르지 않아서 정일(精一)하고 택집(擇執)하고46) 먼저 박(博)하고 나중에 약(約)한 연후에 큰 근본이 세워져서 그 쓰임이 행해지게 되고 몸가짐이 약(約)하고 시행하는 것이 넓게 된다.47) 이것이 성인을 배우는 대강이다."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치지(致知)라고 할 만하며48) 어떻게 하여야 역행(力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만물·만사의 이치를 미루어 내 마음에서 이루는 것을 '치지(致知)'라고 하고, 이미 알아서 내 몸에서 행해지면 '역행(力行)'이라고 한다. 앎이 부진하면 마음이 넓지 못하여 막힌 것이 많게 되고 행동이 힘이 약하면 아는 것이 헛된 것을 갖추게 되어 무용하게 된다. 비록 그렇지만 이 마음이 경(敬)에서 먼저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가 앎이 정일(精一)하고 택집(擇執)하지 못하여 잡다함에 흐르고, 우리의 행동이 굳게 지키지 못하여 누추한 데에 흐르게 된다.49) 이런 까닭에 군자는 거경(居敬)을 크게 여기고 궁리(竆理)를 귀하게 여겼다.50) 아! 후세에 한 무리의 선비가 성리(性理)를 고준하게 담론하고51) 고금(古今)을 달려가 말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수천 번 재잘거려 아침부터 하루를 다 하여도 아직 귀일한 자를 보지 못했으니 그가 큰 근본에 과연 세운 것이 있는가? 슬프도다!"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세상의 군자는 학문(學問)·절의(節義)를 둘로 나누어 절의를 실제 행동으로 생각하고 학문을 귀히 여기지 않으니 이런 논의는 어떠한지요?"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이런 논의가 바로 말세의 탄식이다. 중고(中古) 이전에 어찌 이런 논의가 있었겠는가? 대저 절의는 바로 학문 중에 하나의 일이니 만약 절의를 중하게 여긴다면 주공·공자는 백이(伯夷)만 못하고 육수부(陸秀夫)52)·문천상(文天祥)53)은 정주(程朱)보다 뛰어나겠지? 주공·공자가 백이에 대해서는 일지(一指)에서 견배(肩背)이고 육수부·문천상이 정주에 대해서는 근본(根本)에서 일지(一枝)이니 나란히 놓고 논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후세의 사람이 명(名)을 학문이라고 여기는 자가 있는데 군신의 큰 절의에 대해서도 도리어 범인의 아래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말세의 논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세상의 군자는 도를 행하는 것을 절의(節義)라고 생각하여 도를 행하지 않으면 절의가 아니라고 하는데 진실로 그러합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이것 또한 말세의 탄식이다. 중고(中古) 이전에 어찌 이런 논의가 있었겠는가? 옛날의 군자는 대본(大本)과 달도(達道)54)가 세워지지 않음을 걱정했지, 절의가 행해지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대본·달도가 이미 세워지면 절의는 논할 것이 못 된다. 만약 도를 행하는 것을 절의로 삼는다면 이부주소(伊傅周召)55) 등의 무리를 모두 절의의 선비라고 지목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한다.'56)라고 하였고, 또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유하고 또 귀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57)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써 본다면 비록 나라를 위해서 죽더라도 그 도를 선하게 하지 못하면 절의가 아니다. 비록 몸이 도덕적이라고 하더라도 도가 없는 세상에서 행해지지 않는 것을 또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사(時事)가 어떠한가를 헤아리지 못하면서 반드시 도를 행하는 것으로 뜻 삼고, 반드시 절의를 세우는 것을 뜻 삼고도 도의 선(善), 불선(不善)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 대본이 이미 잘못된 것이니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자사(子思)는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는 자기 뜻을 표현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해야 하겠지만,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는 침묵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58)라고 하여 이미 명철(明哲)하게 그의 몸을 보존하였으니 사군자(士君子)의 도와 덕을 품은 자가 어찌 이 말로써 종신의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객이 말하기를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그 도가 같지 않으니 공자가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많았고, 증자는 명덕설(明德說)59)을 좇고, 자사는 성도설(性道說)을 좇고, 맹자는 항상 인의(仁義)를 말했습니다. 송(宋)의 선정신(先正臣)60)은 경(敬)을 위주로 했고, 횡거(橫渠)61)의 가르침은 예(禮)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성인 문하에서 당(堂)에 올라간 자가62) 많게는 70명에 이르렀는데 성(性)과 천도(天道)는 오직 증자(曾子)·자공(子貢)만이 들을 수 있었고,63) 이미 대의(大意)를 보았던 증칠(曾漆)64) 이하는 참여하여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중용》·《대학》의 책은 근본을 맨 먼저 드러내어 미묘함을 드러내 밝혔고, 송나라의 선정신(先正臣)이 초학자를 가르치고 인도함에 반드시 본원(本源) 함양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성리(性理)를 담론하는 학문은 그 흐름의 폐단이 정문(程門)의 고학(高學)에서 점점 선불교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 태반이어서 강서(江西)의 학문65)은 머리를 치며 울부짖는 자가 현자의 뜻을 훼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만약 고정(考亭) 선생66)이 백 가지 지류를 막아서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천하에 유가의 의관을 몰아서 불교의 신자에 들어가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강호(江湖)의 이설을 다 제거하지는 못해서 천 년이나 폐단이 흘러 지금까지도 끊지를 못하였습니다. 명대의 학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닌데 옛길로 함께 향하여 붉은 깃발을 이미 세우고 상제가 곁에 있어도 몽매하여 높일 줄을 모릅니다. 지금의 학자가 만약 대로를 평이하게 걷고자 한다면 거의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을 면할 것이니 무슨 도를 써야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농부가 머릴 긁적이며 용모를 고치고 대답하여 말하기를 "아! 우리 그대와 도를 말할 수 있겠구나. 옛날에 주공이 예를 제정하면서 문(文)으로 최상 삼았으니 빛나도다! 문(文)이여. 빈빈(彬彬)함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67) 선배 야인(野人)에 미쳐서 그 혜택이 이미 끊어졌다. 후배 군자(君子)가 문(文)이 그 질(質)을 멸하여68) 무무(貿貿)69)하게 예악(禮樂)을 꾸미고 장식하여 옛 도가 이미 없어지자 이 때문에 공자께서 가르침을 설하고 먼저 말과 행동을 보고 듣고 따르게 하고 음탕한 음악과 간악한 예가 그치게 하여 귀와 눈으로 접하지 못하게 한 연후에 큰 근본이 세워질 수 있었다. 이른바 밖을 다스려서 그 가운데를 정성스럽게 하고자 한 것이므로 안자(顔子)가 우뚝 뜻을 세운 것이 극기(克己)70)·사물(四勿)71)의 뒤에 있었고 증자(曾子)의 일관충서(一貫忠恕)는 하루에 몸을 세 번 살핀 후에 있었다. 이것이 성인 문하의 가르침이니 마치 천지의 생물이 알맹이에서 움이 트고, 움이 터서 싹이 나고, 싹이 자라 가지가 되고, 가지에서 잎이 나고, 잎에서 꽃이 피고, 꽃에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공자께서 이미 돌아가심에 미쳐서 문하의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각각 들은 것만을 높였으니 사문의 도가 밝지 않게 되었다. 증자(曾子)·자사(子思)가 깊이 걱정하고 염려하여 사도(師道)가 전해지지 못할까 고민하고, 구이(口耳)72)의 학문에 황홀(怳惚)해짐을 아파하여 이내 표준을 세워 본체(本體)를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 발명(發明)하였으니 대개 부득이한 가르침이었다. 맹자의 법통은 대개 여기에서 얻어졌으나 선인(善人)과 신인(信人)의 사이에 위치하고, 미인(美人)·대인(大人)·성인(聖人)·신인(神人)의 아래 위치한 악정자 극(樂正子克)도73) 마침내 전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시서(詩書)는 열렬하게 불탄 나머지에 겨우 동자(董子)74)를 얻었고, 장구(章句)·문사(文辭) 가운데에서는 다행히 한공(韓公)75)이 있었는데 붓을 빼서 글자나 윤택하게 하여 한갓 조화(藻華)만을 숭상하다가 오계(五季)76)에 극에 이르렀다. 염락(濂洛)77)의 현인들이 천장(千丈)이나 우뚝 서서 한당(漢唐)을 굽어보고, 높고 오묘함을 다하여 위로는 공맹을 접하여 우리 도(道)의 소재를 깨닫고 큰 근본이 세워지지 않은 것을 개탄하였다. 이 때문에 후배를 장려하고 인솔하여 맨 먼저 하나의 근본을 세우고 만 가지 다른 것을 각각 바르게 하고 성(誠)·명(明) 둘을 끌어들여 내외(內外)를 교차하여 수양하였다. 자사·증자【한 편에서는 맹자】의 끊어진 학문이 여기에 이르러서 다시 이어졌으나 문인의 고제(高弟)가 일변에 떨어짐을 면치 못했으니 이것이 있구나! 유학의 도가 행해지기 어려움이여. 육씨(陸氏)의 형제78)가 어질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아호(鵝湖)에서 한 번 만난 것은79) 처음부터 끝까지 합당하지 않아서 마침내 천 년간 이 유가의 도에 큰 하자가 되었으니 주문공 선생의 걱정이 어찌 크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삼가 이편을 지은 것을 고찰해보면 마땅히 갑오년(1654, 효종5) 사이인데 혹 내간(內艱)을 만나 마치지 못한 것인가? 이 아래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동방(東方)과 관계될 터인데 도대체 선생의 깊은 뜻에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지연시킨 것인가? 당일에 선생님에게 질정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經鉏野夫。 於世上事。 無所識務。 手執鉏耰役。 以爲供親計。 一日携園丁二三。 從事於東臯之下。 力倦神疲。 舍鉏登隴。 快讀古經。 有客來過。 長揖而問曰: "巫醫樂師梓匠輪輿。 工之賤者也。 固不可耕且爲也。 况治繹古經。 亦可耕且爲歟?" 野夫笑曰: "莘摯之耒。 元亮之鉏。 客亦聞之歟?" 曰: "聞之矣。" 曰: "士君子立心。 當以尹爲志。 竆亦可行。 達亦可行矣。 倘終不遇。 以陶之所守爲守可也。" 客然應曰: "子之爲言。 癡且狷矣。 伊尹聖也。 淵明賢也。 旣聖且賢。 聖賢不居。 况吾子自居歟? 吾子少雖好學。 晩無所成。 一志未立。 衆咎蝟積。 竆未固守。 徒役四軆。 何子之立志太高而行之不逮耶?" 野夫菀爾對曰: "子言是哉? 夫夫非矣。 然鯤羽未成而有扶搖九萬之志。 岱鴈未毛而有掣電千里之心。 君子之所貴乎膽大而自重者。 誠以斯道至遠。 斯任至重。 容刀之舟。 不足以濟海。 經尺之挺。 未可以制敵。 故古人爲心。 必以聖人自期何者? 我與聖人。 初無小異。 苟知其同而使無小異。 我亦一聖人也。 吾何異哉? 雖然聖人人也。 人而學人。 人各能之。 至於天者。 巍巍惟大。 不可名狀。 而古之人。 有與天合德者。 其故何也? 仁義而已。 子之言。 無乃卑陋而流於自棄耶?" 客曰: "子之言然矣。 請問吾子經鉏之樂?" 曰: "天地至大。 萬物至衆。 而道寓於其間。 天地父母而萬物同胞也。 達而兼濟。 同其樂也。 同其樂也而守約。 不同樂也。 我志可行勞吾心。 與天下同其道也。 我志不可行勞吾力。 自樂其分於畎畝之間。 春耕秋穫。 順天時之舒捲。 樂行憂違。 任道軆之自然。 事畢西疇。 悠然而歸。 有書在床。 欣然涵泳。 其中有天地焉。 有萬物焉。 父子具而君臣備。 兄弟在而夫婦別。 羲農堯舜。 皡皡熙熙。 孔孟程朱。 混混元元。 具收幷集。 萃爲一家。 俯仰之間。 主翁其有樂乎? 俄而經邱尋壑。 睠我南畝。 稊秕未成而五穀克秋。 耗蝗遠蟄而時雨施澤。 村氓里老。 歌者謳者詠者抃者。 提携傴僂。 相揖而賀。 徒見德色。 未覩哱咳。 言笑之際。 主翁其有樂乎? 此吾經鉏之樂也。" 客曰: "吾子之樂。 旣聞命矣。 請聞學聖之道。" 曰: "農夫所學。 策牛勤耕而已。 把犁之拳。 實非探理之手。 農歌之唇。 豈是講道之口? 聖賢模範。 昭在方策。 千秋萬世。 炳若日月。 苟非昏盲。 孰不能見知? 雖然至微者難著而至危者易乘。 一本雖同而萬殊各異。 以萬殊之異。 汨易乘之危。 一本所同者。 微而又微。 程朱以來。 上下千百載。 未聞有以一貫之統上接鄒魯者。 領靑手黃。 高談者紛然並起。 各異所論而大道喪矣。 爲今之學者。 齊其萬殊者而同歸一本。 抑其至危者而使著其微。 其要不過致知力行而已。 然致知之失。 易流於博雜。 力行之失。 易流於固陋。 博雜者爲口耳之學。 固陋者爲黃老之學。 此所謂種苗不耔而反成莠。 樹梧不治而變成棘者也。 必也所知不流於雜。 所行不流於陋。 精一而擇執。 先博而後約。 然後大本立而其用行矣。 所操約而所施博矣。 此學聖之大槩也。" 客曰: "如何斯可謂之致知。 如何斯可謂之力行?" 曰: "萬物萬事之理。 推而致之吾心曰'致知'。 旣知而行之吾身曰'力行'。 知不盡則心不廣而多滯矣。 行不力則所知者爲虛具而爲無用矣。 雖然此心未能先立乎敬。 則吾之所知。 未能精擇而流於雜。 吾之所行。 未能固守而流於陋。 是故君子大居敬而貴竆理矣。 嗚呼! 後世有一種士子。 高談性理。 驟語古今。 對人談說。 喋喋累千而竟朝盡日。 未見歸宿者。 其於大本。 果有所立乎? 悲夫!" 客曰: "世之君子。 有以學問節義。 歧而爲二。 以節義爲實行。 學問爲不足貴。 此論何如?" 曰: "此論乃衰世之嘆也。 中古以上。 豈有此論哉? 大抵節義。 乃學問中一事。 若以節義爲重。 周公孔子不如伯夷。 秀夫天祥過於程朱耶? 周公孔子之於伯夷。 肩背之於一指。 秀夫天祥之於程朱。 一枝之於根本。 比而論之可乎? 後世之人。 有名爲學問。 而至於君臣大節。 反出凡人之下者。 故曰'衰世之論也'。" 客曰: "世之君子。 有以行道爲節義。 不能行道。 爲非節義。 誠然耶?" 曰: "是亦衰世之嘆也。 中古以上。 豈有此論哉? 古之君子。 以大本達道之不立爲憂。 而不憂節義之不行。 大本達道旣立則節義非所論也。 若以行道爲節義則伊傅周召之徒。 皆可目之曰'節義之士'耶? 孔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又曰: '邦無道富且貴焉恥也。' 以此見之。 雖死於國。 不能善其道則非節義也。 雖身抱道德。 不行於無道之世。 亦可見矣。 不度時事之如何。 而必以行道爲志。 必以立節爲意。 而不顧是道之善不善。 其大本旣誤矣。 何足論歟? 子思曰: '邦有道。 其言足以興。 邦無道。 其默足以容'。 旣明且哲。 以保其身。 士君子抱道懷德者。 盍以此言爲終身戒哉?" 客曰: "聖賢敎人。 其道不同。 孔子敎人。 多從日用行事上。 曾子從明德說。 子思從性道說。 孟子常說仁義。 宋之先正以敬爲主。 橫渠之敎以禮爲先。 聖門升堂者。 多至七十。 而性與天道。 惟曾子子貢得聞。 己見大意之曾漆以下。 不得預聞。 自庸學之書首闡根本。 發明微妙。 宋之先正敎導初學。 必以涵養本源爲先。 談說性理爲學。 其流之弊。 程門高學漸流禪佛者太半。 而江西之學拍頭叫喚者。 多損賢者之志。 若非考亭夫子障百川而東之。 豈不庶驅天下之衣冠。 盡入天竺之卒徒乎? 雖然江湖異說。 不能盡去。 而流弊千年。 訖今未斬。 皇明學者不爲不多。 而並鄕故路。 赤幟已竪。 帝在旁州。 蒙不知尊。 今之學者。 若欲平步大路。 庶免偏重之弊。 用何道而可耶?" 野夫點頭改容而對曰: "嗟乎! 吾子可與語道矣。 昔者周公制禮。 以文爲上。 郁郁文哉! 彬彬可象。 及其先進野人。 其澤已斬。 後進君子。 文滅其質。 貿貿焉粉飾禮樂。 古道已去。 是以夫子設敎。 先從視聽言動。 止淫樂慝禮。 使不接耳目。 然後大本可立。 所謂制乎外。 所以誠其中也。 故顔子之卓然有立。 在於克己四勿之後。 曾子之一貫忠恕。 在於日三省身之後。 此聖門之敎。 如天地生物。 勾而萌萌而苗苗而枝枝而葉葉而花花而實者也。 及夫子旣沒。 門弟子散在四方。 各尊所聞而斯道不明。 曾子子思深憂且慮。 悶師道之無傳。 痛口耳之怳惚。 乃立準的。 直指本體以發明之。 盖不得已之敎也。 孟子之統。 盖得乎此。 而二中四下之克。 竟未聞有傳而不絶。 豈不惜哉? 詩書烈焰之餘。 僅得董子。 章句文辭之中。 幸有韓公。 而抽毫潤墨。 徒尙藻華而極乎五季矣。 濂洛羣賢。 特立千丈而俯視漢唐。 極盡高妙而上接鄒魯。 覺吾道之所在。 慨大本之未立。 是以奬率後進。 首以一本先立而萬殊各正。 誠明兩進而內外交養。 思曾【一作孟】絶學。 至此復續。 然門人高弟往往未免落於一邊。 有是乎! 斯道之難行也。 陸氏兄弟。 非不賢矣。 鵝湖一會。 終始不合。 竟爲千秋斯道之大疵。 文公夫子之憂。 豈不大乎?"【謹按此篇之作。 當在甲午年間。 或以丁內艱而未畢耶? 此下想必係之以東方。 抑先生深意有所待而遲回耶? 恨不就質於當日函丈也。】 신지(莘摯)의 뢰(耒) 신지는 이윤을 말한다. 신(莘)은 이윤이 농사짓고 살던 신야(莘野)이며 지(摯)는 이윤(伊尹)의 이름으로, 이윤이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원량(元亮)의 서(鉏) 원량은 도잠(陶潛, 365~427)의 자이다. 도잠의 또 다른 자는 연명(淵明)이며 시호는 정절이다. 팽택의 현령(縣令)이 되었으나, 80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였다. 곤(鯤)이 …… 있고 곤(鯤)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장자》 〈소요유〉에,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모른다. 변화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짝은 몇 천 리인지 모른다. 기운차게 떨쳐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끝의 검푸른 바다로 날아가려고 한다. 남쪽 바다란 하늘의 못이다.[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라고 하였다. 호호희희(皡皡熙熙) 화락(和樂)하고 자득(自得)한 모양을 말하는데, 전하여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성왕의 백성은 호호한 듯하느니라.[王者之民, 皥皥如也.]"라고 하였고, 《노자(老子)》 제20장에 "세속의 중인들 희희낙락하여, 마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봄날의 누대에 오른 듯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고 하였다. 혼혼(混混) 혼혼은 근원이 있는 물을 말한다. 공자가 자주 물을 일컬은 뜻을 두고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에 대한 서자(徐子)의 질문에 대해 맹자가 말하기를, "근원이 있는 물이 용솟음쳐서 밤낮을 쉬지 않아 구덩이에 찬 후에 나아가 바다에 이르니 근본이 있는 것이 이와 같은지라 이것을 취한 것이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라고 한 말이 있다. 《孟子 離婁下》 하나의 …… 달라지니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설명하는 말로 이치는 한가지이지만 현상은 다르다는 의미이다. 우주의 근원은 유일(唯一)의 이치인데, 그것이 천만 가지 현상으로 분리되어 각각 다른 만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면 수많은 사물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그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서 천 개의 달로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이(理)를 수많은 존재들이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천 개의 강마다 흐리거나 탁한 서로 다른 차이 때문에 하나의 달은 천 개의 강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로 …… 위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의미하는 말로, 공자가 제자 증삼(曾參)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예, 그렇습니다. [唯]"라고 곧장 대답하고는,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바로 충서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설명해 준 내용이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구이(口耳)의 학문 귀로 듣고 입으로 곧장 내놓는다는 뜻으로, 되새김질해서 소화하려고는 하지 않고 얼른 밖으로 드러내어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의 "소인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 귀로 듣고는 곧바로 입으로 내놓는다. 입과 귀의 거리는 불과 네 치일 따름이니, 일곱 자나 되는 이 몸을 어떻게 아름답게 할 수가 있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 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황로(黃老)의 학문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문으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 발전하였다. 도가(道家)의 학설을 가리킨다. 신불해(申不害)·한비(韓非)는 법가(法家) 사상가로, 《사기(史記)》에 "신자(申子)의 학문은 황로(黃老)에 근본을 두고 형명(刑名)을 주로 한다."라고 하였고, 《사기》의 색은(索隱)에 "황로는 번화한 것을 싫어하는데, 간솔(簡率) 무위(無爲)하면 군신(君臣)이 저절로 바르게 된다. 한비는 부박한 것을 배격하고 법제(法制)는 사(私)가 없는 것이니 명실이 상부한다. 그러므로 황로로 귀결된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권63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제3. 정일(精一)하고 택집(擇執)하고 정일집중(精一執中)을 말하는 것으로, 정일집중은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면서 말한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을 줄인 말로,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먼저 ‥‥ 된다 박문약례(博文約禮)를 설명하는 구절로, 스승에게 배워 식견을 넓히고, 그 지(知)를 예(禮)로 요약하여 행(行)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는 내용이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어떻게 ‥‥ 만하며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설명한 구절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지극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학장구》 경 1장에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을 지극히 하였으니,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라고 하였다. 마음이 …… 된다 '경'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의'는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성리학자들의 중요한 수행 방법에 속하는 것들이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군자가 경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로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라고 하였다. 참고로 명도(明道) 정호(程顥)는 "경과 의를 서로 잡아 지키면 곧바로 올라가 천덕을 통달함이 이로부터 시작된다.[敬義夾持, 直上達天德, 自此.]"라고 하였다. 《近思錄 권2 爲學》 거경을 …… 여겼다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설명하고 있다. 거경궁리는 정주학(程朱學)의 학문 수양 방법으로 '거경'은 내적 수양 방법을 가리키는 말로 《논어》 〈옹야(雍也)〉에 처음 보인다. 경(敬)이란 인간에게 품부(稟賦)된 천명(天命)으로서의 선성(善性)이 순수하고 곧게 발할 수 있도록 성(性)에 영향을 주는 의식 작용을 미연에 없애버리는 수양법을 말한다. 이것은 조용히 앉아서 모든 잡념을 끊어버리는 정좌(靜坐)의 방법을 쓰거나, 한 가지 일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방법을 많이 활용한다. '궁리'는 외적 수양 방법을 가리키는 말로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처음 보이는데, 인간에게 품부된 천명으로서의 선성이 이미 욕심의 영향을 받아 굴절되려고 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순수하고 곧게 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적극 노력하는 수양법으로, 격물(格物)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말한다. 후세에 …… 담론하고 육왕학(陸王學)을 가리킨다. 육왕학은 주희(朱熹)의 이학(理學)에 반대하여 심학(心學)을 제창한 송(宋) 나라 육상산(陸象山)의 학문과 이를 계승하여 양명학(陽明學)으로 집대성한 명(明) 나라 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을 병칭하는 학술 용어이다. 육수부(陸秀夫) 1236~1279. 남송 말기 충신으로, 자는 군실(君實)이다. 육수부(陸秀夫)는 송(宋)나라 말엽의 충신이다. 육수부(陸秀夫)는 송나라가 원(元)나라에 의해 패망하자, 복주(福州)에서 익왕(益王)을 세우고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으며, 익왕이 죽자 다시 위왕(衛王)을 세우고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는데, 원나라 군사가 송의 최후 보루(堡壘)이던 애산(厓山)을 격파하자,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는 칼을 들고 처자를 바다에 빠져 죽게 한 다음 곧 위왕을 등에 업고 함께 바다에 빠져 죽었다. 《宋史 권451 陸秀夫列傳》 문천상(文天祥) 1236~1283. 중국 남송(南宋) 말기의 재상으로, 자는 송서(宋瑞) 혹은 이선(履善)이며 호는 문산(文山)이다. 1256년(이종4) 진사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후 원(元)나라에 대하여 시종 강경책을 주장하고 천도(遷都)를 반대하여 면직되기까지 하였다. 1275년(공종1) 원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당시 우승상이었던 문천상은 가산(家産)을 내어 의용군을 조직, 임안(臨安)을 지켰다. 다음 해에 공종(恭宗)의 명을 받아 원나라에 강화를 청하러 갔으나 포로가 되었고 겨우 탈출하여 돌아왔다. 원나라 세조(世祖)가 벼슬하기를 간절히 권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옥중에서 지은 장시(長詩) 〈정기가(正氣歌)〉를 부른 후 연산의 시시(柴市)에서 처형당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저서에 《문산전집(文山全集)》이 있다. 《宋史 권418 文天祥列傳》 대본(大本)과 달도(達道) 대본은 하늘이 명한 성(性)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이 미발한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해서 다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니, 중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하였다. 주희는 이 구절에 대해 주석하기를 "대본은 하늘이 명한 성이니, 천하의 이치는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도의 체이다. 달도는 성을 따름을 말하니, 천하와 고금에 함께 행하는 것으로 도의 용이다.[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 皆由此出, 道之體也. 達道者, 循性之謂,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라고 하였다. 이부주소(伊傅周召) 이는 은탕(殷湯)의 현상(賢相) 이윤(伊尹), 부는 은 고종(殷高宗)의 현상 부열(傅說), 주는 주실(周室)의 기초를 세우고 예악 제도(禮樂制度)를 제정한 주공(周公), 소는 주공과 함께 주실을 일으킨 소공(召公)을 가리킨다. 독실하게 …… 좋아한다 《논어》 〈태백(泰伯)〉에, "독실하게 믿으면서 배우기를 좋아해야 한다. [篤信好學]"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나라에 …… 것이다 《논어》 〈태백(泰伯)〉에, "돈독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착한 도를 지켜라.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문란한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세상에 도리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도리가 없으면 물러나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 가난하고 비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리가 없는데 부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耻也, 邦無道, 富且貴焉, 耻也.]"라는 말이 나온다. 나라에 …… 것이다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에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에는 자신의 뜻을 표현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해야 하겠지만,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침묵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 《시경》에 '현명한데다가 사려가 깊어서 자기 몸을 보전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國有道, 其言足以興, 國無道, 其默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라는 말이 나온다. 명덕설(明德說) 《대학장구》에 나오는 "〈강고(康誥)〉에 '능히 덕을 밝힌다.'라고 하였고 〈태갑(太甲)〉에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라고 하였고 〈제전(帝典)〉에 '능히 큰 덕을 밝힌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스스로 밝힌 것이다.[康誥曰: "克明德." 太甲曰: "顧諟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선정신(先正臣) 고인이 된 바른 신하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주희를 가리킨다. 횡거(橫渠)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 1020~1077)로, 자는 자후(子厚), 시호는 헌공(獻公)이다. 횡거(橫渠)는 그의 호이다. 저서에 《정몽(正蒙)》, 《장자전서(張子全書)》 등이 있다. 성인 …… 자가 단계적으로 학문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자로(子路)는 마루에는 올랐으나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由也, 升堂矣, 未入於室也.]"라고 하였다 자공(子貢)만이 …… 있었고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자공이 "부자의 문장은 들을 수 있었지만, 부자께서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한 데 대해, 주희가 주석에서 "성인의 문하에서는 가르침이 등급을 뛰어넘지 않기에, 자공이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자에게 성과 천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그 훌륭함에 감탄한 것이다.[蓋聖門敎不躐等, 子貢至是, 始得聞之而歎其美也.]"라고 하였다. 증칠(曾漆) 공자의 제자 증자와 칠조개(漆雕開)를 병칭한 말이다.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을 권했을 때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吾斯之未能信]"라고 대답하자, 공자가 기뻐했다는 말이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온다. 강서(江西)의 학문(學問) 송(宋) 나라의 육구연(陸九淵, 1139~1193)의 학문을 말한다. 그가 강서의 금계(金溪)에서 출생했으므로 그의 학술을 강서학파라고 한다. 육구연의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象山)이다. 중국 남송(南宋)의 철학자로, 끊임없는 탐구와 연구를 강조한 주희(朱熹)와 달리 내면의 성찰과 자습(自習)을 중시하였다. 사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여 그 선이 물욕으로 더럽혀지고 소멸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다시 생성, 발전시킬 수 있고, 그러한 과정에서 도(道)의 가장 높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사상을 심학(心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육구연의 사상은 3세기 이후 명나라의 성리학자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완성되었고, 따라서 이들을 통틀어 육왕학파(陸王學派)라고 불러 정주학파(程朱學派)와 구별하였다. 고정(考亭) 선생 고정은 남송의 철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호이다. 원래는 지명으로 지금의 건양시(建陽市)이다. 주희가 63세 때인 1192년 6월에 이곳에 고정서원(考定書院)을 짓고 강학하였기 때문에 주자를 고정 선생이라고도 불렀다. 이를 기반으로 고정학파(考亭學派)가 형성되었는데, 뒤에 이를 존숭하여 민학(閩學)으로 부르게 되었다. 빈빈(彬彬)함을 …… 있었는데 문질빈빈(文質彬彬)을 설명한 말로 문채와 본바탕이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잘 조화된 군자라는 말이다. 문(文)이 …… 멸하여 《논어》 〈옹야(雍也)〉에 "바탕이 문채보다 지나치면 촌스럽게 되고, 문채가 바탕보다 지나치면 겉치레에 흐르게 되나니, 문채와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무무(貿貿) 무식하고 뒤떨어짐이다. 극기(克己) 자기의 사욕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가는 것이 인을 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가면 천하가 인을 허여할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고 하였다. 《論語集註 顔淵》 사물(四勿) 네 가지 하지 말라는 것으로,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묻자,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구이(口耳) 구이지학(口耳之學)의 준말로, 천박한 공부를 뜻한다. 선인(善人)과 …… 악정자 극(樂正子克)도 맹자는 자신의 제자 악정자(樂正子)를 평해서 선인(善人)과 신인(信人)의 사이에 위치하고, 미인(美人)·대인(大人)·성인(聖人)·신인(神人)의 아래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孟子 盡心下》 동자(董子) 한대(漢代)의 학자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로, 서한의 사상가, 금문경학(今文經學)의 대가이다. 《춘추(春秋)》의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고 《공양전(公羊傳)》을 정밀하게 연구했다. 경제 때 박사가 되었고 무제 때 현량문학지사(賢良文學之士)가 되어 강도왕(江都王)의 재상이 되었다. 후에 교서왕(膠西王)의 재상이 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수학하며 저술하였다. 조정에 큰일이 있으면 늘 사람을 보내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지금 전하는 그의 저술로는 《춘추번로(春秋繁露)》가 있다. 한공(韓公) 당나라 한유를 가리킨다. 오계(五季) 오대(五代)라고도 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분열이 심하고 왕조의 교체가 짧은 기간에 자주 일어난 시기로 당(唐)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의 약 50년간의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의 왕조로는 후량(後梁, 907~923), 후당(後唐, 923~936), 후진(後晉, 936~946), 후한(後漢, 946~950), 후주(後周, 950~959)가 있다. 염락(濂洛)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頥),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頥) 형제를 가리키지만, 통상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로,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 등 송대(宋代)의 성리학자들을 함께 지칭한다. 육씨(陸氏)의 형제 송나라 육구령(陸九齡, 1132~1180)·육구연(陸九淵, 1139~1193) 형제를 가리킨다. 아호(鵝湖)에서 …… 것은 아호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신주(信州) 연산현(鉛山縣)에 있는 산으로,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주희와 육구령(陸九齡),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이 산의 아호사(鵝湖寺)에 모여 논쟁을 펼친 바 있다. 논쟁의 핵심은 학문하는 방법에 있어서 주희는 성현의 책을 널리 공부한 뒤에 요약하기를 주장하고, 육씨 형제는 사람의 본심을 발명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를 주장한 것인데, 주희는 육씨에 대하여 '태간(太簡)'이라 비판하고, 육씨는 주희에 대하여 '지리(支離)'라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