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중수계서 錦江重修禊序 금강(錦江)에는 예전에 11인 계가 있었는데 대개 난정(蘭亭)의 옛일44)을 행하는 것이었다. 시대를 헤아려보면 우리 중종·인조·명종의 삼대 태평 문명 이백여 년을 당하여 남쪽의 형세에서 우리 고을이 최고였다. 때는 곧 우리 고조할아버지 백중(伯仲)씨와 정자(正字) 임붕(林鵬)45)과 주부(主簿) 나일손(羅逸孫)46) 등 여러 선비가 불계(祓禊)의 모임을 약속하였다. 난새와 봉황이 나는 듯한 것은 승정원 박우(朴佑)47)의 글씨요, 맑은 대나무, 소나무 마음이라고 한 것은 즉 사간원 나일손의 시이니 한 시대의 풍채와 운치를 상상할 만하였다. 이것을 이어서 연파(烟波)48),사암(思庵)49) 두 선생이 밭 갈고 낚시질한 여가와 공퇴(公退)한 틈에 부로(父老)들과 손을 잡고 앞 사람들이 하던 일을 잘 닦아,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돈독해졌으나 불행하게도 섬 오랑캐의 변란으로 6년 동안 전쟁을 치렀으니 대개 만력 정유년(1597, 선조 30)부터 친목을 닦는 믿음이 폐하여 강학을 할 수 없었다.지난 모년 사이에 우리 대부공(大父公)께서 개연히 향당(鄕黨)의 노소(老少)들을 불러서 옛 뜻을 대략 기술하고, 그 불계의 일을 이어서 행하니 전에 계를 받은 후손들이 비록 한 자리에 다 모이지는 못하였지만 온화하고 돈독한 풍은 고을에 진동하였다. 숭정(崇禎)의 말에 시사(時事)가 어려움을 당하여 선배 부형이 연달아 서거한 후에는 이어 가지 못한 것이 여러 해 되었다. 명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간 뒤 21년 을사년(1665, 현종6)에 만영(萬英)이 영평(永平)50)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향당의 여러 부로가 소매에 책 한 권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내가 보니 우리 작은 아버지와 상사(上庠) 정국현(鄭國賢)51)이 구계(舊禊)를 중수(重修)한 계첩이었다. 두 번 절하고 공경히 열람해보고는 한참동안 슬퍼하였다.또 공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계(社禊)52)의 모임은 대개 주나라의 불계(祓禊)53)의 예와 낙읍(洛邑)의 유상(流觴)의 의례54)를 시조로 하였고, 위진(魏晉)시대 후에는 회계(會稽)의 승사(勝事)55)가 천고에 웅대하게 울려 퍼졌는데 그 실제를 상고해보면 청담(淸談)56)일 뿐이요, 시와 술일 뿐이니 어찌 족히 명교(名敎)의 도57)라고 하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금강(錦江)의 계(禊)는 특히 따뜻한 봄날에 복숭아꽃이나 즐기는 것을 경계로 삼았으니, 당일 군자들이 근본을 돈독히 하고 의리를 숭상하여 강마(講磨)로써 인(仁)의 실제로 삼았음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장로들 사이에서 교유하며 준조(樽俎)의 반열에서 읍양(揖讓)하던 자들이 조정에 나가서는 태평성대의 우의(羽儀)58)가 되었으니 이양(二養) 상국(相國)59)이 있었고, 뛰어넘어서는 봉황이 천인(千仞)의 절벽을 비상하는 것과 같았으니 청심(淸心)의 고사(高士)60)가 있었다. 그 향음주례(鄕飮酒禮)61)에서 오르고 내릴 즈음에 덕성을 훈도하고 장액(奬掖)·보도(輔導)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지금 공들이 백 년의 사업을 창시하여 전현(前賢)의 일을 따르니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대체 모르겠지만 봄·가을 좋은 날에 잔을 잡고 높은 곳에 올라가 풍류를 드날렸던 것뿐이었겠는가? 장차 진퇴(進退)할 때 읍하고 사양하고, 겨울에는 예를 닦고 여름에는 시를 지으며 옛 법도를 잘 닦으려고 한 것인가? 관혼상제(冠昏喪祭)의 경조사에 그 정을 다하고 착함에 힘쓰며 허물을 보완하여 출입에 심력을 다하고 우리 향당의 예의와 겸양의 풍을 빚어내어 우리 옛 선대의 부형과 제군자(諸君子)의 책임에서 죄를 얻지 않도록 한 것은 우리 11계원 중에 제공들이 아니겠는가? 또 한마디 말을 하자면 오직 옛 11계원의 자손이 우리 고을에 거처하는 데에 무슨 제한이 있겠는가마는 무슨 까닭에 선조의 금란지교(金蘭之交)와 같은 한마음으로 사귄 정을 망각하고 서로 보기를 진나라와 월나라처럼 멀게 여기는가?62) 이것을 우리 계원들이 서로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모두 대답하기를 "우리가 규약을 공경히 지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그 말들을 기록하여 책의 머리말로 삼는다. 錦江古有十一人禊。 盖修蘭亭舊事也。 以時世較之。 當我中仁明三聖代。 太平文明二百年餘。 南中形勝。 我州爲最。 時則我高王父伯仲氏曁林正字鵬,羅主簿逸孫諸彦。 約爲祓禊之會。 鸞翔鳳翥則有朴銀臺筆。 竹淸松心則有羅諫院詩。 一代風韻。 于可想矣。 繼此之後。 烟波,思庵二老先生耕釣之暇。 公退之隙。 相携父老。 克修前事。 久益敦厚。 不幸島夷之變六載兵燹。 盖自萬曆丁酉。 修睦之信廢而未講。 往在某年間。 我大父公慨然囑鄕黨老少。 略述古意。 繼修其事。 前修後昆雖未克盡會一席。 而和厚之風。 動曜州里。 崇禎末時事艱憂。 而先進父兄踵武而逝後。 無有繼而述之者有年矣。 皇明南渡後二十一年乙巳。 萬英自永平還鄕。 鄕黨諸老袖一冊子來叩。 余目之。 卽我季父公與鄭上庠國賢重修舊禊券也。 再拜敬閱。 愴然久之。且諗于諸公曰: "社禊之會。 盖祖于成周祓禊之禮。 洛邑流觴之儀。 魏晉之後。 會稽之勝。 雄鳴千古。 而夷考其實則淸談而已。 詩酒而已。 安足爲名敎道哉? 惟我錦江之禊。 特以桃花爛春爲戒。 則當日諸君子敦本尙義。 講磨以仁之實可見矣。 是以從遊長老之間。 揖讓樽俎之列者。 出而爲聖代羽儀則有二養相國。 超而爲鳳翔千仞則有淸心高士。 其薰陶德性。 奬掖輔導於旅酬登降之際者。 爲如何哉? 今諸公刱百年之業。 遵前賢之事。 可謂美矣。 抑未知春秋令日。 把盃臨高。 漂蕩風流而已耶? 將揖遜進退。 冬禮夏詩。 克修古轍之能 一作務 爲耶? 冠昏喪祭。 慶吊之盡其情。 勖善補過。 出入而一乃心。 釀出吾鄕黨禮讓之風。 毋得罪於吾古先父兄諸君子之責。 其不在吾社中諸公耶? 抑有一說。 惟古禊一十一員之子孫。 居吾鄕者何限。 而何故忘祖先一心交契之如金蘭。 而相視之如秦越哉? 此尤吾禊中所相誡者也。" 僉曰: "敬服吾子規。" 仍錄其語。 弁諸卷首云。 난정(蘭亭)의 옛일 난정에서 수계(修禊)한 일로, 수계는 물가에서 노닐면서 불길한 재앙(災殃)을 미리 막던 풍속이다. 보통 3월 3일에 행하였다.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 수계(蘭亭修禊)는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353) 삼월 삼짇날, 즉 상사일(上巳日)에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 42인의 명사(名士)가 난정에서 모여 수계를 행한 뒤에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성대한 풍류를 즐긴 계회가 있었는데,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보인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古文眞寶 後集 권1 蘭亭記》 임붕(林鵬) 1486~1553. 임붕의 자는 중거(仲擧), 호는 귀래당(歸來堂),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호남병마우후(湖南兵馬虞候)를 역임한 임평(林枰, 1462~1522)의 아들이다. 1510년(중종5)에 생원이 되었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일파가 화를 입게 되자 이를 구하기 위하여 상소하고 생원의 신분으로 태학의 제생(諸生) 240여 명을 거느리고 대궐 문밖에 기다리면서 명령을 기다렸는데, 사적이 기묘당적(己卯黨籍)에 있다. 1521년(중종16)에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경주 부윤에 이르렀다. 나일손(羅逸孫) 나창(羅昶)이다. 신유년(1501)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15위에 합격하였고, 경오년(151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에 급제하였다. 1522년에 지평(持平)을 제수받았다가 서경(署經)할 때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체직되고, 그 뒤 형조 정랑(刑曹正郞), 사옹원 주서(司饔院注書)를 지냈다 박우(朴祐) 1476~1546.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본관은 충주이다. 진사 지흥(智興)의 아들이고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아우이며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아버지이다. 1510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이후 내직으로는 전적(典籍)·승지·대사성·이조 참의·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남원 부사(南原府使), 공주 목사(公州牧使), 해주 목사(海州牧使),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김안로(金安老), 허확(許確), 허항(許沆) 등 간신(奸臣)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주로 외직을 많이 지냈다. 연파(烟波) 박개(朴漑, 1511~1586)의 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대균(大均), 호는 연파처사(烟波處士)로 박우(朴祐)의 아들이다. 향시에 합격하고 명종 때 선공감 주부·참봉·고산 현감(高山縣監) 등을 지냈다. 선조 때 암행어사가 되었고, 김제 군수를 지냈다.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의 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서경덕의 문인이다. 1553년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하여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함으로써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1572년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다. 영평(永平) 전라도 나주(羅州) 남평현(南平縣)의 다른 이름이다.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었는데, 신라가 현웅(玄雄)이라 고쳐서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남평현으로 고쳐서 나주에 소속시켰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6 全羅道 南平縣》 정국현(鄭國賢) 1592~?. 자는 이보(而寶)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1624년 식년시 생원 3등 50위로 합격하였다. 사계(社禊)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토지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불계(祓禊) 삼월 상사절(上巳節)에, 재액을 털어 버리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이다. 낙읍(洛邑)의 …… 의례 3월 삼짇날 문인(文人)들이 모여서, 굽이쳐 흐르는 물결에 잔을 띄우며 시(詩)를 짓고 노니는 잔치를 말한다. 《진서(晉書)》 〈속석전(束晳傳)〉에 "진 무제(晉武帝)가 3월 삼짇날 곡수(曲水)하는 뜻을 묻자 속석(束晳)이 말하기를 '옛날에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성을 쌓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으므로 일시(逸詩)에 술잔은 물결을 따라 흐르네.'[羽觴隨波流.]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의 모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하였다. 회계(會稽)의 승사(勝事) 영화 9년 삼짇날 왕희지(王羲之)가 당시의 명사(名士) 40여 명과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모임을 갖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풍류를 즐겼던 일을 〈난정기(蘭亭記)〉라는 글로 기록해 놓았다. 《古文眞寶後集 권1》 청담(淸談) 육조(六朝) 시대에 유행했던 자연주의적 또는 본능주의적 사상가의 일파를 청담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조술(祖述)하여 세속의 일을 떠나서 청정무위(淸淨無爲)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일삼고, 유가의 도덕이나 예의를 무시하고 감정에 따라 유유자적하는 것을 고상하게 여겼다. 《二十二史箚記 六朝淸談之習》 명교(名敎)의 도 명교는 곧 인륜 도덕의 가르침을 말한다. 진(晉)나라 말기에 이른바 팔달(八達)이라고 일컬어졌던 호무보지(胡毋輔之), 사곤(謝鯤), 완방(阮放), 필탁(畢卓), 양만(羊曼), 환이(桓彛), 완부(阮孚), 광일(光逸) 등 여덟 사람이 예법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청담을 나누며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놀아서 방달(放達)하기로 유명했는데, 그중에는 심지어 옷을 다 벗고 알몸을 내놓은 자까지 있었다. 그래서 악광(樂廣)이 그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명교 안에 절로 즐거운 땅이 있는 법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한단 말인가?[名敎中自有樂地, 何爲乃爾也?]"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우의(羽儀) 지위가 높고 재덕이 있어 남의 모범이 되는 것을 뜻한다. 《주역》 〈점괘(漸卦) 상구(上九)〉에 "기러기가 공중으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그 깃이 의법이 될 만하니 길하다.[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 吉.]"라고 하였다. 이양(二養) 상국(相國) 이양(二養)은 이양정(二養亭)을 말하고 상국은 박순을 가리킨다. 박순의 별업(別業)인 이양정은 영평현(永平縣) 영평천(永平川) 가에 있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행장에 따르면, 박순은 1586년 8월에 휴가를 얻어 백운계(白雲溪) 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세상일을 끊었는데, 그곳에 배견와(拜鵑窩)·이양정(二養亭)·청랭담(淸冷潭)·창옥병(蒼玉屛) 등의 명승지가 있다고 하였다. 《白沙集 卷4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朴公行狀, 韓國文集叢刊 62輯》 청심(淸心)의 고사(高士) 연파처사(烟波處士) 박개(朴漑)를 가리킨다. 향음주례(鄕飮酒禮) 삼대(三代)부터 있던 예(禮)로, 한 고을의 사람 중에서 덕이 있는 노인을 빈객(賓客)으로 삼아 거행하는 의례이다. 《의례》 〈향음주례〉에 "문에 들어온 다음, 주인이 빈(賓)과 세 번 읍하고 계단에 이르러 세 번 사양하면 주인이 먼저 당에 올라가고 빈이 뒤에 올라간다. 주인이 당 위의 동쪽 계단 위쪽에서 미(楣) 아래에 위치해 북향하여 재배하면 빈은 당 위의 서쪽 계단 위쪽에서 미 아래에 위치해 북향하여 답배한다.[主人與賓三揖, 至于階, 三讓, 主人升, 賓升, 主人阼階上當楣北面再拜, 賓西階上當楣北面答拜.]"라고 하였다. 진나라 …… 여기는가 진나라는 중국의 서북쪽에 있고 월나라는 동남쪽에 있으므로, 서로 멀리 떨어져서 관계가 소원하다고 하여 관심 없이 냉담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