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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황순주(黃順周)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金商燮 黃順周 □…□(적색, 직방형, 3.5×2.8)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7년 황순주(黃順周)가 호구 현황을 기록하여 완도군(莞島郡)에 제출한 호적표 1907년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薪智面) 대평리(大坪里)에 거주하는 호주(戶主) 황순주가 자신의 호구 내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완도군에 제출한 호적표이다. 1896년 신호적법이 마련됨에 따라 호적작성은 이전의 호구단자와는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먼저 형태면에서 호적표를 인쇄한 종이에 칸을 메우듯이 작성하는 방식으로 바뀌는데, 동일한 표가 좌우 양편에 인쇄되어 있어 양쪽에 모두 작성하여 관에 제출하면, 관에서는 이것을 대조한 후 가운데를 분할하여 좌편은 각호로 돌려보낸다. 내용면에서는 이전의 호구단자에 있던 처(妻)의 사조(四祖)가 기재항목에 빠져있으며 가택(家宅) 소유의 구분과 가옥의 형태가 와가(瓦家)인지 초가(草家)인지 그리고 칸수가 몇 칸인지를 기재하도록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신분제 철폐와 더불어 노비의 존재는 더 이상 호적에 나타나지 않고, 대신 '고용(雇傭)'이라는 단어 아래에 사람 수를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황순주는 현재 38세이고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직업은 농(農)이다. 아버지는 황경현(黃敬顯), 조부는 황귀선(黃貴善), 증조부는 황성달(黃聖達), 외조부는 최귀복(崔貴福)이다. 함께 거주하는 친속은 본관이 인동(仁同)인 처(妻) 장씨(張氏)가 있고, 세 아들이 있다. 직계가족 외에 기구(寄口)나 고용(雇傭)은 없어서 현존인구는 남 4구(口), 여 1구이다. 가택은 자기 소유이고 가옥은 초가 2칸이다. 완도군 신지면에 거주하는 황순주의 호적표가 강진현 고금도에 사는 인동장씨 집안의 고문서에 끼어있는 것은 황순주의 처가 인동장씨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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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이창호(李昌浩)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昌浩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술년 이창호(李昌浩)가 상대방이 부탁했던 지구(紙屨)를 인편을 통해 보내주겠다는 내용의 간찰 무술년 4월 4일에 이창호(李昌浩)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이다. 조부모와 부모를 함께 모시고 지내는 상대방의 안부가 편안한지 물었고, 자신은 부모를 모시며 예전처럼 지내고 있으며 지난달에 뵙고 이별한 뒤로 소식을 듣지 못해 그립다고 안부를 전하였다. 일전에 부탁했던 지구(紙屨)를 때맞춰 보내드리지 못하여 부끄럽지만 그것은 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은 사지 못했기 때문이니 허물하지 말아주시기를 당부하였다. 그리고 주점(酒店)을 하는 이춘삼(李春三) 편에 부쳐 보내니 그렇게 알고 계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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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謹候狀月前奉別之後未聞聲華懷悵之情與日無時謹未審肇夏重侍餘做味萬相慰溯區區之至兒省事依前幸何盡喩就日前下托紙屨趁不推送還爲愧悶然此非情薄之致而實是貿之不貿也則勿咎情薄之致切仰切仰而第因酒店李春三便全恃付送以此知之奈何餘不備禮若有人便莫惜玉音似好似好耳 戊戌四月初四日 兒李昌浩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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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양택사정입국(成造陽宅四正入局)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집을 짓는 사방 방위와 배치를 결정하면서 그에 따른 거주인의 길흉을 판단하여 택일하기 위한 성조 양택 사정입국(成造陽宅四正入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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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成造陽宅四正入局凡成造須得四正位然後推地運不剋本命可以興工可如子年用事以子加寅上丑在卯得四正位辰戌丑未坐向幷吉丑年以丑加寅上寅在卯得四正位寅申巳亥坐向幷吉寅年以寅加寅上卯在卯得四正位子午卯酉坐向幷吉餘皆放此寅午戌生 申子辰生 己酉丑生子午官灾 子午孫亡 子午元敗天才彔丑未多子孫 丑未亂風 癸丁買糴癸丁主死亡 寅申富貴 艮坤大亡寅申得才 卯酉命福 甲庚官灾甲庚人物興 辰戌萬福 乙辛喪事卯酉富貴 己亥年年敗家 寅申主死亡乙辛三年內得才 癸丁年年入喪 己亥富貴辰戌大通 艮坤富貴 卯酉主死亡巽乾年年大亡 甲庚長壽 辰戌大凶艮坤富貴 乙辛富貴 壬丙亂風己亥大亡 巽乾亂風 巽乾大凶壬丙多官灾 壬丙官灾亥卯未生 子午進福乙辛喪事丑未富貴巽乾富貴寅申大凶壬丙多才卯酉死亡癸丁進福己亥大凶艮坤大凶甲庚大凶辰戌亂風壬坐 午丙門生貴子亥乾門加官進福子坐 午丙門生貴子亥 巳丙門聰明富貴 未坤門旺六畜及第戌乾乾門加官進彔 門百事俱吉癸坐 巳丙門主聰明美貌秀才未坤門進橫財黃甲及第戌乾門家和孝順百事皆吉昌丑坐 丑坐與癸坐同艮坐 午丁門出人黃甲及第申庚門進財六畜寅坐 申庚門加官進彔午丁門明六畜田蚕甲坐 申庚門旺田蚕六畜午丁門主出豪强 戌乾門家和而只有外訟卯坐 子癸門富貴雙專 巳丙門食彔旺人戌乾門加官進財乙坐 子癸門聰明過人戌乾門美貌文章辰坐 戌乾門出色衣人子癸門旺六畜人外申庚門家和孝順巽坐 戌乾門全家孝義申庚門生子聰明子癸門進橫財致富巳坐 丑艮門旺牛亥壬門生色衣人未坤門藝術獲財丙坐 丑艮門進財亥壬門家和孝順未坤門因人富貴午坐 丑艮門因妻致富辰巽門夫婦和順丁坐 艮寅門生人聰明子巽門文武雙全未坐 辰巽門因妻致富丙■巳門出人美貌寅艮門旺牛馬坤坐 寅甲門出人文武之才戌乾門出人志氣之士辰巽門旺六畜申坐 戌乾門富貴辰巽門聰明秀才寅甲門因人進昌財庚坐 戌乾門出義氣辰巽門出人美貌寅甲門進財彔酉坐 未坤門出人孝義辰巽門因妻致富寅甲門進田旺人辛坐 寅甲門加官進財子癸門旺田蚕人丁辰巽門美貌奇童戌坐 辰巽門出人慷慨午丁門旺田蚕寅甲門進財乾坐 寅艮門藝術成家未坤門忠孝俱全亥坐 丑艮門出人秀才寅戌門旺田蚕申庚門家門孝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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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 장무량(張武良)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張武良 康津縣監<着押> 周挾無改印, □…□(적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44년(영조20) 강진현(康津縣)에서 장무량(張武良)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발급한 준호구 1744년(영조20) 강진현에서 갑자년(1744)의 호적대장을 참고하여 발급한 장무량의 준호구이다. 고금도(古今島) 진리(鎭里)에 거주하는 호주 장무량은 현재 41세이고 직역은 군관(軍官)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어서 사조(四祖)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무학(武學) 장홍(張弘), 조부는 장덕룡(張德龍), 증조부는 장구전(張九全), 외조부는 무학(武學) 김선안(金善安)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처 김소사(金召史)는 41세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김소사의 아버지는 김애련(金愛連), 조부는 김실(金實), 증조부는 김연삼(金延三), 외조부는 김원병(金元炳)이다. 어머니 김소사는 86세이고, 아들 금생(今生)은 태언(泰彦)으로 개명하여 현재 11세이고, 둘째 아들 대언(大彦)은 3세이다. 맨 뒷부분에 행현감(行縣監)의 압(押)과 관인(官印)이 찍혀 있고, 장방형의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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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백사형(白思亨)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白思亨 行郡守 白思亨 전남 영암군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816년(순조 16)에 강진군(康津郡) 암천면(唵川面) 개산리(盖山里)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사형(白思亨)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16년(순조 16)에 강진군(康津郡) 암천면(唵川面) 개산리(盖山里)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사형(白思亨)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개산리는 현재의 강진군 옴천면 개산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문서에는 단자의 작성연대가 적혀 있지 않으며, 문서의 끝부분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호주 백사형이 그의 아버지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한 1813년의 호구단자에 당시 30세로 처와 함께 동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 호구단자가 1816년에 작성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에 살다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곳 강진군으로 이사를 해 온 것이다. 백사형은 당시 33세로 수원(水原)이 본관이었고, 호주 백사형의 처(妻) 서씨(徐氏)는 22세로 이천(利川)이 본관이었다. 백사형의 부는 백경옥(白慶玉), 조부는 백창윤(白昌潤), 증조부는 백민징(白敏徵)이다. 백민징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외조부는 장천익(張天翼)으로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처 서씨의 부는 서달효(徐達孝), 조부는 서명백(徐命伯), 증조부는 서태윤(徐泰胤), 외조부는 김리옥(金履玉)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호구단자를 보면, 백사형의 증조부 백민징, 조부 백창윤, 부 백경옥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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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乾隆五十七壬子正月日 白慶玉 行郡守 乾隆五十七壬子正月日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792년(정조 16) 정월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4호에 거주하는 백경옥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 1792년(정조 16)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4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49세로, 어머니 김씨(金氏)(74), 처(妻) 장씨(張氏)(43)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47살 먹은 계집종 신량이 있었지만 지난 병인년에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己酉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기유년, 즉 1789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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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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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7년 최상현(崔相鉉) 서간(書簡)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崔相鉉 盧軫永 崔相鉉(원형)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7년 1월 9일에 최상현이 노진영에게 새해 안부를 전한 서간. 1927년 1월 9일에 소생(小生) 최상현(崔相鉉)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새해 안부를 전한 서간(書簡)이다. 국한문혼용으로 세로 줄이 그어진 편지지 1장을 이용하여 작성하였다. 내용은 새해 이후로 잘 계심을 축하드린다는 것, 자신은 전과 같이 지내니 참으로 당신께서 생각해 주심을 깨닫는다는 것, 한번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쓸데없는 일들 때문에 자신의 미음을 이루지 못한다며 작은 편지지로 안부의 글을 올린다고 했다. 나머지는 훗날 다시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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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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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0년 천일관(千鎰貫)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千鎰貫 城主 城主<着押> 谷城郡守之章 (적색, 정방형, 2.5), □…□ 3顆 (적색, 정방형, 4.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179 1900년 3월에 곡성군 예산면 장선리에 사는 천일관·천일권·천일표가 곡성군수에게 동임 이치현이 침해하지 못하도록 전령을 내려줄 것을 청원한 상서 1900년(광무 4) 3월에 곡성군(谷城郡) 예산면(曳山面) 장선리(長善里)에 사는 천일관·천일권(千鎰權)·천일표(千鎰杓)가 곡성군수에게 동임(洞任) 이치현(李致鉉)이 침해하지 못하도록 전령(傳令)을 내려 후폐(後弊)를 막아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천일관 등의 선조 천만리(千萬里)는 임진왜란의 공신(功臣)으로 열성조에서 그의 충의(忠義)를 애석하게 여기고 그의 공렬(功烈)을 밝혀 특별히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그의 얼자(孽子) 천손(賤孫)을 막론하고 잡역을 면제시키라는 전교(傳敎)와 완문(完文)을 내려서 거주하는 곳에서 별 폐단없이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천일관 등이 근래 우거하고 있는 곡성군의 임장(任掌)이 간혹 침해하여 여러 차례 정소(呈訴)하여 은택을 입었다. 그런데 동학란 이후로 인심이 전과 같지 않아 동임 이치현이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관령(官令)을 거역하여 내정(內庭)에 당돌하게 들어와 밥솥을 거둬 갔다. 이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정소하여 동임에게 전령을 내려 뒷날에 생길 폐단을 막아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에 대해 곡성군수는 3월 11일에 형리(刑吏)에게 '동임에게 전령을 내려 금지시키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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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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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49년 최종득(崔宗得)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1849 谷城縣監 崔宗得 谷城縣監<着押> 周挾無改印, □…□(적색, 정방형, 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186 1849년에 곡성현 석곡면에 사는 호주 최종득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 1849년(헌종 15)에 곡성현 석곡면에 사는 호주 최종득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이다. 최종득의 거주지 주소는 곡성현(谷城縣) 석곡면(石谷面) 운와리(雲臥里) 10통 1호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고 올해 나이는 53세 정사생(丁巳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최종득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덕연(德延), 할아버지 학생 동룡(東龍), 증조(曾祖) 학생 귀선(龜善), 외조(外祖) 학생 박광필(朴光弼)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최종득의 아내 정씨(鄭氏)는 나이 53세 정사생이고 본적은 경주(慶州)이다. 정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대익(大益), 할아버지 학생 치성(致成), 증조 학생 인국(仁國), 외조 학생 권재필(權在弼)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가족으로 모시고 있는 어머니 박씨는 나이 76세 계사생(癸巳生)이며, 소유하고 있는 종으로는 상원(尙元)이 있다. 이 문서에 '호구단자(戶口單子)'라고 적혀 있고 호구단자의 기재 형식인 열서(列書)로 되어 있으나 곡성 현감의 서압(署押)과 관인(官印) 및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이 찍혀있고, 주묵(朱墨)의 오가작통 통호(統戶)와 1846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병오상준(丙午相凖)'이 적혀 있다. 이는 제출한 호구단자를 구호적(舊戶籍)과 대조 확인을 마친 뒤에 최종득에게 다시 돌려준 것이므로 준호구로 분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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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지학(志學)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志學 志學<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신축년에 장지학(張志學)이 족보 값 50냥을 받고서 써 준 수표 신축년 8월 14일에 장지학이 족보 값으로 50냥을 받고서 받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써 준 영수증 성격의 수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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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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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武七年癸卯二月日 前明文右明文事段流來■〔畓〕田累年耕食是如可當此今春私債許多故島內西面新里井墱家后坪伏在相字丁五斗落並負數卜束廤價折錢文壹百十兩交易依數捧上爲遣以新文記一章右前永爲放賣爲去乎日后若有相佐則以此文記憑考事田主張明化[着名]訂人李益守[着名]朴京信[着名]筆 任在孝[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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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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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중선(仲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仲善 張文守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자형(姊兄)인 중선(仲善)이 처남인 장문수(張文守)에게 보낸 간찰 자형(姊兄)인 중선(仲善)이 손아래 처남인 장문수(張文守)에게 보낸 간찰이다. 작성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편지를 받은 당일에 곧바로 써서 보낸 것이다. 우선 장모의 건강이 심하게 손상되지 않았는지, 아이들은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안부를 물었고, 자신은 부모님이 오래 병중에 있어서 속이 타들어가는 듯 답답한 상황이라고 전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토하고 설사를 한지 여러 날이 되어 원기가 다 없어진 상태라서 부득이 날계란을 써야 하니 네댓 개라도 구해서 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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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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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文守甫孝中卽傳省禮言卽問伊來孝履連得萬相曁氷母主氣體候無甚損節兒輩亦得無恙善養否切欲願聞姊兄親候長在患中焦悶郍斗第幼兒以吐瀉症進退者已爲多日元氣澌盡不可不用生鷄卵故玆以專兒期於四五介求得以送如何餘不備疏禮卽日姊兄仲善拜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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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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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3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5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張明化 張明化<着名>, 李益守<着名>, 朴京信<着名>, 任在孝<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3년 장명화(張明化)가 도내(島內) 서면(西面) 신리(新里) 정등평(井墱坪)에 있는 자신의 밭 5두락지를 전문(錢文) 110냥을 받고 누군가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1903년 장명화(張明化)가 자신의 밭을 누군가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이다. 이 밭은 선대로부터 상속받아 수년간 경작해오던 것인데 금년 봄에 많은 사채(私債)로 인해 부득이 방매하게 되었다. 토지 소재지는 도내(島內) 서면(西面) 신리(新里) 정등평(井墱坪)에 있으며, 자호(字號)는 상자(相字)이고 면적은 5두락지이다. 매매가는 전문(錢文) 110냥이다. 이 논의 구문기(舊文記)는 따로 양도하지 않았고 신문기(新文記) 1장만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익수(李益守)와 박경신(朴京信)이 증인으로, 임재효(任在孝)가 필집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각각 착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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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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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九年 月 日康津縣考甲子成籍戶口帳內古今島第 鎭里第 統第 戶軍官張武良年四十一甲申本仁同父武學弘祖學生德龍曾祖學生九田外祖武學金善安本金海妻良女金召史年四十一甲申本金海父愛連祖實曾祖延三外祖金元炳本金海率母金召史年八十六己亥率子今生不喩泰彦年十一甲寅次子大彦年三壬戌等辛酉戶口相准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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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 장대윤(張大允)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張大允 康津縣監<着押>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83년(정조7) 강진현(康津縣)에서 장대윤(張大允)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발급한 준호구 1783년(정조7) 강진현에서 계묘년(1783)의 호적대장을 참고하여 발급한 장대윤의 준호구이다. 고금진리(古今鎭里)에 거주하는 호주 장대윤은 현재 39세이고 직역은 대변군관(待變軍官)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어서 사조(四祖)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 절충장군(折衝將軍) 장무량(張武良)은 사망하여 고(故)로 표시되어 있고, 조부는 장홍(張弘), 증조부는 장덕룡(張德龍), 외조부는 본관이 김해인 김애현(金愛賢)이다. 처(妻)인 김해김씨(金海金氏)는 현재 39세이다. 이어서 김해김씨의 사조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김위재(金渭載), 조부는 김천석(金天碩), 증조부는 김애명(金愛明), 외조부는 정무현(鄭武賢)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무현은 다른 장대윤의 호구문서에는 정무선(鄭武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동일인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장계득(張啓得)은 현재 19세이다. 맨 뒷부분에 행현감(行縣監)의 압(押)과 관인(官印)이 찍혀 있고, 장방형의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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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四十八年 月日康津縣考癸卯式成籍戶口帳內古今島鎭里第 統第 戶待變軍官張大允年三十九乙丑本仁同奉父折衝武良年甲申故祖學生弘曾祖學生德龍外祖學生金愛賢本金海妻金姓年三十九乙丑本金海父渭載祖天碩曾祖愛明外祖鄭武賢本慶州率子啓得年十九乙酉等相准印行縣監[押][周挾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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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 장용이(張龍伊)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張龍伊 康津縣監<着押> 帖子印,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31년(순조31) 강진현(康津縣)에서 장용이(張龍伊)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발급한 준호구 1831년(순조31) 강진현에서 신묘 식년의 호적대장을 확인하여 발급한 장용이의 준호구이다. 고금도(古今島) 진리(鎭里)에 거주하는 호주 장용이는 현재 52세의 홀아비이고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장대운(張大運), 조부는 절충장군 장무량(張武良), 증조부는 장홍(張弘), 외조부는 가선대부 추상련(秋尙連)으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장용이가 홀아비이기 때문에 처(妻)에 대한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함께 사는 가족으로는 14세인 딸 하나가 있다. 이 문서의 마지막 행 '경인년(1830) 9월'은 실제 이 문서가 작성되어 관에 제출된 시기이고 등재된 식년은 이듬해이기 때문에 작성연대는 경인년의 다음 해인 신묘년(1831)이다. 호구단자의 열서(列書) 방식으로 작성된 문서이지만 관에 제출되어 구호적과 대조 확인을 거친 뒤 강진현감의 서압과 관인 및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을 찍어 제출자에게 되돌려준 것이기 때문에 준호구로 분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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