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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날씨가 자못 따뜻하였다. 日氣頗溫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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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청배에 가서 집에 보낼 편지를 부치고 왔다. 날씨가 매우 흐렸다. 往靑排付家書而來。 日氣甚陰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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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맑았다. 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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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몹시 추웠다. 병세가 위중한데 약효가 전혀 없고 원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동(注洞)의 종인 익정(翼貞)이 와서 보고 갔다. 極寒。 病勢沈重, 專無藥效, 眞元漸奪, 奈何? 注洞宗人翼貞來見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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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19일 十八日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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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밤에 눈이 내렸다. 아침에 청파에 가서 고을 사람 편에 집에 보낼 편지를 부쳤다. 夜雪。 朝往靑坡。 付家書於邑人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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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17일 十一日二日三日四五六七日 몹시 추웠다. 極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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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아침을 먹은 뒤에 비가 올 기색이 잠시 멈추기에 즉시 길을 떠났다. 차령(車嶺)에 이르자 비가 세차게 쏟아져 어쩔 수 없이 원터에서 머물렀다. 朝飯後雨意乍止, 卽爲發程。 至車嶺雨大作, 不得已留院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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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소사(素沙)의 아교(阿橋)에 이르니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한참을 지체하다가 간신히 강을 건넌 뒤에 점심을 먹고, 화성(華城) 용주사(龍珠寺)에 이르러 묵었다. 至素沙 阿橋, 水漲不得渡。 移時遲滯, 艱辛濟江, 因爲中火, 至華城 龍珠寺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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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새벽에 출발하여 덕촌(德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물 무렵 영귀정(詠歸亭)에 이르러 묵었다. ○曉發抵於德村中火, 暮抵詠歸亭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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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아침 전에 비가 내렸다. 느즈막이 길을 떠나 고개를 넘어 장수동(長水洞)에 이르렀다. 안 서방(安書房) 내외와 어린아이 모두 병이 없으니 매우 다행이었다. 그대로 머물렀다. ○朝前雨。 晩後發程, 越嶺抵長壽洞。 安書房內外與幼兒, 皆無病幸幸。 仍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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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무자) 1828年(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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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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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닭이 울 때 길을 나서 함녕(咸寧)까지 20리를 갔다. 동쪽 하늘에 먼동이 트기 시작했지만 비가 내린데다가 홍 첨지의 말이 복통이 있었으므로 막소에서 조금 쉬었다. 비는 개지 않았으나 말의 병에 조금 차도가 있어 길을 떠났다. 봉산(鳳山) 10리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여러 방법으로 말을 치료했으나 끝내는 나아질 기세가 없으므로 결국 홍 첨지는 뒤쳐지고 말았다.이에 시종 혼(混)과 길을 나섰더니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간신히 동선령(洞仙嶺)48)을 넘었다. 조남발소(鳥南撥所)에 이르러 국수와 떡을 사 먹었는데, 봉산(鳳山)이 그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황주(黃州) 읍내까지 10여 리를 가서 묵었다. 날도 저물었지만 바람이 차고 길이 얼어붙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조남(鳥南) 객점에 이르니 또한 명승지였다. 두 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엄연히 석문(石門)이 되었는데, 바위의 형상은 층층이 바둑돌을 쌓아 놓은 듯하였고, 박계(朴桂)49)로 지탱한 듯 중천에 높이 솟아 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절묘한 곳이었다. 절구 한 수를 읊었다.찬비 개니 세찬 바람 불어오고(冷雨初晴風力緊)동선령 위에 눈이 흩날리네(洞仙嶺上雪浮浮)밤낮없이 서도50) 길 떠나 얻은 것 무엇이런가(日夜西征何所得)묘향산 풍물을 비단 주머니51)에 담았노라(香山風物錦橐捉)조남산성(鳥南山城)에서 또 한 수를 읊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열성조 서쪽 변방 근심 예사롭지 않아(列聖西憂不等閑)동선령 아래에 겹겹의 관문 만들었네(洞仙嶺下設重關)산성의 초목 몇 겁이 지났던가(山城草木何年劫)초막살이 형편 풍년에도 고달프도다(峽戶生涯樂歲艱)정갈한 솔떡은 진귀한 맛을 뽐내고(精白松餻誇異味)맑고 단 차조술은 쇠한 얼굴 따뜻하게 하네(淸甘秫酒煖衰顔)서툰 시 낭랑히 읊조리며 홀홀히 떠나니(浪吟拙句忽忽去)정겨운 풍경 나 돌아오기를 기다리리(風景多情待我還) 鷄鳴登程, 至咸寧二十里。 天始開東, 而雨作且洪馬腹痛, 故小歇幕所。 雨雖不霽, 馬病小差, 離發到鳳山十里, 朝飯秣馬。 多方治馬, 而終無差勢, 洪遂落後。 遂與混傔登程, 則寒風大作, 艱辛踰洞仙嶺。 至鳥南撥所, 買食麵餠, 盖鳳山之有名故也。 至黃州邑內四十里留宿。 日力雖暮, 而風寒冷凍, 無前進之路。 至鳥南之店, 亦名勝之地。 兩山相拱, 儼作石門, 而石狀疊積如累碁, 如撑朴桂, 高揷半天, 信奇絶處也。 吟一絶, "冷雨初晴風力緊, 洞仙嶺上雪浮浮。 日夜西征何所得, 香山風物錦橐捉。" 鳥南山城又吟一律, "列聖西憂不等閑, 洞仙嶺下設重關。 山城草木何年劫, 峽戶生涯樂歲艱。 精白松餻誇異味, 淸甘秫酒煖衰顔。 浪吟拙句忽忽去, 風景多情待我還。" 동선령(洞仙嶺) 현재의 황해북도 사리원시, 황주군, 봉산군과의 분기점에 위치한 고개로 정방산(正方山)의 동남쪽에 있는 험준한 요새이며 서북의 관문이다. 옛날에 신선이 내린 고개라 하여 '동선령'이라 한다. 박계(朴桂)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해서 네모진 모양으로 납작하게 빚어 바싹 말린 뒤에 기름에 튀겨 꿀을 바르고 그 위에 튀밥이나 깨고물을 앞뒤에 입힌 유밀과(油蜜果)를 말한다. 서도 서도(西道)는 서관(西關)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통칭하는 말이다. 묘향산……주머니 보관할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시를 비유한다. 원문의 '금탁(錦槖)'은 금낭(錦囊)과 같은 말로 시를 적어서 넣는 비단 주머니이다. 당(唐)나라의 시인인 이하(李賀)가 날마다 명승지를 다니면서 해(奚)라는 어린 종에게 비단 주머니[錦囊]를 지고 따르게 하여 시를 짓는 즉시 주머니에 담았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新唐書 卷203 文藝列傳下 李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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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소교점(燒橋店)·안성발소(安城撥所)·차령(車嶺)·세교(細橋)·병풍암(屛風巖)을 지나 서흥(瑞興, 황해도 중북부에 있는 군) 읍내까지 50리를 갔다.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이며 그 평원의 넓은 들판을 살펴보니 논은 한 뙈기도 없고 온통 밭이었다. 남중(南中, 호남) 사람의 소견으로 말하자면, 만들어 놓은 논이 곳곳에 있긴 하지만 애초에 수답(水畓)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 밭에서 나오는 것이 논보다 낫기 때문일 것이다.서흥읍은 민가가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경기(京畿)에서부터 지나온 고을은 송도(松都)를 빼고는 작은 고을이 아닌 곳이 없었는데, 이 서흥읍은 매우 큰 고을이었다. 북쪽에 있는 산성은 그 둘레와 터가 평산(平山)의 태백성(太白城)에 비해서는 자못 웅장했으나, 송도(松都)의 대흥산성(大興山城)47)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름은 태양(太陽)이라고 했다. 말에게 꼴을 먹인 뒤에 수월점(水越店)·차령(車嶺)·서산발소(西山撥所)·흥수원(興水院)·검수(黔數) 등 40리를 가서 묵었다. 이날 90리를 갔다.대개 산천의 기세가 장파(長坡)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는데, 혹 산세(山勢)가 좌우로 서로 이어지고 둘러쌓여 물이 흐르는 곳이 없었으니 매우 괴이하다. 그 가운데 움푹 파인 구멍이 있어 빗물이 쏟아지면 반드시 그 구멍으로 새니 괴이하고도 괴이하였다. 凌晨上程。 過燒橋店、安城撥所、車嶺、細橋、屛風巖, 至瑞興邑內五十里。 朝飯秣馬, 觀其平原曠野, 無一片水田, 皆是田也。 以南中所見言之, 則作畓處處有之, 而初無水畓者, 盖其田之所出, 勝於畓故也。 瑞之爲邑, 閭閻擳比。 自畿至此所過之邑, 惟松都外無非殘邑, 而此邑則極雄府也。 北有山城, 其周回基址, 比於平山之太白, 頗雄壯, 而不及松都之大興, 名謂太陽云矣。 秣馬後, 過水越店、車嶺、西山撥所、興水院、黔數四十里留宿。 是日行九十里。 盖山川氣勢, 太不及長坡, 或有山勢左右相連回抱, 無水流之處, 甚可怪也。 其中空陷有穴, 天水所注, 必漏其穴, 可怪可怪。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부(開城府)의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중간에 있는 석축(石築) 산성으로 1676년(숙종2)에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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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밤을 새고 닭이 울 무렵에 눈이 비로소 개었는데 호랑이의 피해가 많은 곳이어서 일찍 출발하지 못하였다. 행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중원(中原)의 호랑이가 강을 건너와 안주(安州) 경내에서 죽인 사람의 수가 5~60명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먼동이 틀 무렵 길을 떠나 안주 읍내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요기를 한 다음, 백상루(百祥樓)62)에 올랐다. 백상루는 성의 서쪽께에서 청천강(晴川江)과 안주성 안의 천만 호 집들을 굽어보고 있으니, 참으로 빼어난 모습이었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지었다.서쪽 변방 빼어난 경관 참으로 끝이 없어(西塞奇觀儘不窮)안주에서 또 백상루의 풍광 얻었어라(安州又得百祥樓)청천강은 난간을 휘감고 넘실넘실 흘러가고(晴川繞檻鳴濤漲)묘향산은 난간에 임하여 자욱한 안개 떠 있네(香嶽臨軒積氣浮)부벽루 아래로 시원스레 툭 트여 거침이 없고(爽豁不居浮碧下)월파루 끝은 웅장하고 드높음 독차지하였네(雄高剩占月波頭)전생 인연에 행여 이런 강산 있었던가(夙緣倘有江山否)우리 동방 최고의 명승지 맘껏 보았도다(看盡吾東最勝區)망일문(望日門)으로 나와 청천강을 건너 수종점(樹宗店)까지 60리를 가서 아침을 먹었는데, 날이 이미 저물어서 그대로 묵었다. 達夜鷄鳴時, 雪始霽, 而虎患大盛, 不得早發。 行人皆言, "中原之虎, 渡江而來, 安州一境殺人, 迨五六十命"云。 開東登程, 至安州邑內, 秣馬療飢, 遂上百祥樓。 樓臨城西, 俯壓晴川江, 及城中千萬家, 儘勝區也。 遂吟一律, "西塞奇觀儘不窮, 安州又得百祥樓。 晴川繞檻鳴濤漲, 香嶽臨軒積氣浮。 爽豁不居浮碧下, 雄高剩占月波頭。 夙緣倘有江山否, 看盡吾東最勝區。" 自望日門出, 渡晴川江, 至樹宗店六十里朝飯, 日已夕矣, 因留宿焉。 백상루(百祥樓)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 있는 고려 시대의 누정으로 청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백상루란 이름은 여기서 백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볼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관서팔경 중 으뜸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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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동틀 무렵 출발하여 노복과 말을 영변(寧邊)의 주인집으로 먼저 보내고는 시종 혼(混)과 대동루(大同樓)에 올라 두루 살펴본 뒤에 이어서 연광정(練光亭)54)에 올랐다. 사방 벽에 걸린 제영시(題咏詩)가 선배들의 저술(著述)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그 풍 중에 "긴 성벽 한 면55)에는 넘실넘실 흐르는 물이요, 큰 들판 동쪽 언저리에 점점이 솟아 있는 산이로세.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56)라는 시구는 참으로 그림으로 그려낸 듯하였는데, 큰 글자로 새겨 두 기둥에 붙여 놓았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하루에 서쪽으로 백 리 길 달려왔건만(一日西驅百里餘)단군 기자 묵은 자취 이미 페허가 되었네(檀箕陳跡已丘墟)높다란 성은 천년을 흘렀고(高城閱劫千年後)넓은 벌판엔 시월 초순의 서리가 내렸네(大野經霜十月初)얼어붙은 먼 포구에 돛 그림자 차갑고(遠浦氷生帆影冷)물에 비친 장림의 언덕 풍경 멀도다(長林水落岸容疏)고요히 기댄 난간 옆으로 강물은 흘러가는데(欄頭靜倚江聲立)빼어난 경치 졸필로 다 형용하기 어렵구나(勝槩遍難拙筆書)다시 성 위의 영명사(永明寺)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가 모란봉(牧丹峯)과 을밀대(乙密臺)를 보고, 능라도(凌羅島)와 백운탄(白雲灘)이 보았다. 마침내 성 바깥쪽으로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석벽이 우뚝 솟아 있고, 가운데에 '청류벽(淸流壁)'이라 새겨져 있었다. 큰 강을 굽어보니 길이가 10리 남짓 되었다. 장도문(長渡門)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니 여염집이 즐비하여 송도보다 나았는데, 대개 그 내룡(來龍)57)이 매우 완만하여 한 곳도 높은 봉우리가 없고 모두 평지행룡(平地行龍)58)의 지세였다. 영주인 집에서 아침을 먹고 부벽루에서 〈삼연(三淵)〉59)의 시에 차운하였다.평양이 좋다는 말 예전부터 들었노니(昔聞平壤好)하루아침의 유람 하늘이 빌려준 것이라(天借一朝遊)산세는 황량한 벌판을 담아내더니(山勢容荒野)물빛은 높은 누각에게 양보하였네(水光讓高樓)누대에 머물며 을밀을 불러보고(臺留招乙密)우뚝한 벼랑에 서서 맑은 강물을 굽어보네(壁立俯淸流)기이한 경치 따로 있노니(別有奇觀處)텅 빈 강의 달빛 배를 가득 채우네(江空月滿舟)칠성문(七星門)60)에서 나와 채 1리(里)를 못 가 송림 안 기자묘(箕子墓)61)로 들어갔다. 묘 앞에 작은 비각(碑刻)이 세워져 있고, 기자묘 좌우에는 각각 두 석인(石人)을 세웠다. 묘 뒤에는 작은 돌을 세워 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용미(龍尾)임을 알 수 있다. 마침내 뒤 기슭에서 큰길로 나와 순안(順安)까지 50리를 갔다. 말에게 꼴을 먹이고 길을 나서 청치천점(晴雉川店)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平明離發, 先送奴馬於寧邊主人家, 遂與混傔, 上大同樓周觀後, 因上練光亭。 四壁題咏, 無非前輩著述, 而其風則所謂, "長城西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一句眞畵出矣, 以大字刻之, 付兩柱之中矣。 遂吟一律, "一日西驅百里餘, 檀箕陳跡已丘墟。 高城閱劫千年後, 大野經霜十月初。 遠浦氷生帆影冷, 長林水落岸容疏。 欄頭靜倚江聲立, 勝槩遍難拙筆書。" 自城上又上永明寺、浮碧樓, 見牧丹峯、乙密臺望, 見凌羅島、白雲灘。 遂自城外沿江而下, 石碧斗起, 中刻淸流壁, 俯臨大江, 長可十里餘。 自長渡門, 入見城中, 閭閻櫛比, 優勝松都, 而盖其來龍甚婉嫩, 無一處高峯, 都是平地行龍矣。 朝飯於營主人家, 於浮碧樓, 次三淵韻, "昔聞平壤好, 天借一朝遊。 山勢容荒野, 水光讓高樓。 臺留招乙密, 壁立俯淸流。 別有奇觀處, 江空月滿舟。" 出自七星門, 未滿一里餘, 自松林中, 入箕子墓。 墓前立小碑刻, 箕子墓左右, 各立兩石人, 墓後立小石, 是知爲龍尾也。 遂自後麓出大路, 至順安五十里。 秣馬登程, 至晴雉川店留宿。 是日行六十五里。 연광정(練光亭) 대동강변 덕바위(德巖)에 있는 정자로 고구려 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장방형 평면의 누정 두 채가 ㄱ자 모양으로 붙은 형태다. 관서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풍치가 빼어나다. 긴 성벽 한 면 저본의 '西'는 '一'의 오기로 보고 고쳐서 번역하였다. 이 글귀는 연광정의 서쪽 주련에 쓰인 고려 때 장원(壯元)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의 <부벽루시(浮碧樓詩)>이다. 김황원이 부벽루(浮碧樓)에 올랐다가 이전 사람들의 제영(題詠)들을 취하여 모두 불살라 버리고 이 한 연(聯)을 얻었는데, 날이 다하도록 잇지를 못하자 통곡하며 내려왔다고 한다.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이 부벽루에서 보는 황홀한 절경을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띄엄띄엄 산들일세(大野東頭點點山)"라고 시를 써내려 가다가 다음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한심스러워서 통곡하며 붓대를 꺾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벽루의 승경을 보고 지은 미완성의 시 두 연이 연광정 주련에 원문과 번역문으로 걸려 있다. 내룡(來龍) 산맥이 시작되는 곳을 가리키는 풍수 용어이다. 평지행룡(平地行龍) 행룡(行龍)은 풍수지리에서, 높고 낮은 산이 멀리 뻗어 나간 산맥을 이르는 말이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이다.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로 김창집(金昌集)과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진도의 배소(配所)에서 사사되자 형들과 함께 경기도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문집에 《삼연집》, 저서에 《심양일기(瀋陽日記)》, 《문취(文趣)》 등이 있다. 칠성문(七星門) 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으로, 전형적인 고구려성이다.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세워 성문을 세웠다. 기자묘(箕子墓) 고대 기자 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의 묘로, 평양시 기림리(箕林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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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대아(大衙)에 머물렀다. 폭설이 내리고 몹시 추웠다. 留大衙。 大雪極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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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8일 十八日 오늘은 바로 약산(藥山)65)의 서장대(西將臺)66)에서 성조(城操, 성에서 하는 군사훈련)하는 날이다. 일단 천주사(天柱寺)67)로 들어가 잠시 쉬면서 추위를 피한 뒤, 채찍을 재촉하여 서장대로 올라갔다. 서장대는 약산(藥山)의 제일봉(第一峯) 서쪽에 있는데, 평안도 전역을 높이 누르고 있고 그 터가 매우 견고하여 철옹(鉄瓮)이라는 호칭에 딱 들어맞았다. 시력(視力)이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저 땅의 산천이 지척에 있는 듯하고, 북쪽으로는 묘향산(妙香山)68)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청천(晴川)을 내려다보았다. 가없이 너른 들판은 무릎 아래에 펼쳐져 있고 뭇 봉우리는 첩첩히 쌓여 마치 돌을 포개 놓은 것 같았다. 이날 3천 병마를 거느리고 성 위에 도열하여 종일토록 무예를 연마하였다. 마침내 율시 한 수를 읊었다.관서에서 일찍 약산이 명성을 드날렸으니(西關夙擅藥山名)기모69)가 남긴 정채 귀신의 도끼로 이루어진 것이리(氣母留精鬼斧成)넓은 벌판에 그 누가 천 자나 우뚝 서는 것을 다투랴(大野誰爭千尺立)끝없는 하늘에 만년토록 혼자서 지탱하였네(長天獨任萬年撑)형세는 제일가는 금성탕지70)의 요충지이며(形便第一金湯地)보루와 장벽71)은 둘도 없는 철옹성이라(保障無雙鉄瓮城)성상은 변방을 향한 근심 잊지 못하여(聖主邊憂猶不忘)태평 시대에도 군대를 단련시키네(太平時節鍊軍兵)밤 2경에 호령하고 횃불을 들어 올리니 멀리서 보면 화성(火城)과 같았다. 잠시 뒤 불이 꺼지자 파진(罷陳)하였다. 영감(令監)과 모든 사람들이 내려갔는데, 나는 서운사(捿雲寺)에 가서 묵었다. 是日卽藥山西將臺城操日也。 先行入天柱寺, 暫憩禦寒。 遂催鞭上西將臺, 則臺在於藥山第一峯之西, 而高壓平安一道, 其基址甚固, 鉄瓮之號, 眞得題語也。 眼力雖不及, 而彼地山川, 如對咫尺, 北望香山, 西瞰晴川。 大野無邊膝下, 羣峯磊磊, 若累石之狀。 是日率三千兵馬, 羅列城頭, 終日鍊武。 遂吟一律, "西關夙擅藥山名, 氣毋留精鬼斧成。 大野誰爭千尺立, 長天獨任萬年撑。 形便第一金湯地, 保障無雙鉄瓮城。 聖主邊憂猶不忘, 太平時節鍊軍兵。" 夜二更, 號令擧火, 遠若火城。 稍間掩火, 因罷陳, 令監及諸人皆下去, 而余則往留於捿雲寺。 약산(藥山) 조선 태종실록에는 "약산은 사방이 높고 험하고 바위들이 깎은 듯이 서 있어 하늘이 만든 성이라고 일컬으며, 의주와 삭주, 강계 등 여러 고을 중에서 군사를 모으기에 적당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서장대(西將臺)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할 수 있도록 산성 서쪽에 높이 만든 대를 이르던 말이다. 천주사(天柱寺)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남쪽에 있는 절이다. 1684년(숙종10) 창건하였으며, 1722년(경종2) 중수하였다. 진달래가 온 산을 덮는 봄철에는 약산동대와 천주사가 꽃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하다 하여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불렸다. 묘향산(妙香山) 묘향산은 원래 영변군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향산군(香山郡)으로 분할되었다. 주봉은 비로봉(毘盧峰)이다. 기암과 괴봉 등 명승풍치가 둘레 160km나 되는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다. 원래 연주(延州) 고을에 속한 산이라는 뜻에서 '연주산'이라고도 하고 바위들이 유달리 희고 정갈하다는 의미에서 '태백산'으로도 불렸는데, 산세가 기묘하고 수려하여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특히 누운 향나무가 많아 사철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산이라 하여 11세기부터 묘향산이라 하였다. 기모 기모(氣母)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라는 의미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복희(伏羲)가 자연의 대도(大道)를 터득하여 기모(氣母)를 가지게 되었다.[伏戱得之, 以襲氣母.]"라 하였는데, 그 주석에 '기모'는 '원기(元氣)'라고 하였다. 《남명집(南冥集)》 <원천부(原泉賦)> 금성탕지 원문의 '금탕(金湯)'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준말이다. 금으로 조성한 성과 끓는 물이 흐르는 해자라는 뜻으로, 견고한 성지를 말한다. 《한서》 권45 〈괴통전(蒯通傳)〉에 "반드시 성을 고수하려면 모두 금성과 탕지로 만들어야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루와 장벽 원문의 '보장(保障)'은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돌이나 흙 등으로 만든 견고한 보루와 장벽을 말한다. 춘추 전국 시대 조(趙)나라 간자앙(簡子鞅)이 윤탁(尹鐸)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양(晉陽)을 다스리게 하자 윤탁이 "세금을 많이 거둘까요, 보장(保障)이 되게 할까요?"라고 물으니 간자(簡子)가 보장이 되게 하라고 답한 고사가 있다. 《十九史略通攷 卷1 春秋戰國時代》 《通鑑節要 卷1 周紀 威烈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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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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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6일 初六日 비가 내렸다. 근동에 가서 또 한 수의 의(義)를 지었다. 저녁에 함께 한동(翰洞)에 가서 글을 논하고 왔다. 雨。 往芹洞又做一義。 夕間同往翰洞, 論文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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