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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추웠다. 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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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二十七日 칠패에 가서 윤 생원을 보고 왔다. 往七牌見尹生員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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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비가 내렸다. 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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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겨우 21냥의 돈만 받고 마필(馬匹)을 팔아 보청(譜廳)에 지급하였다. 남은 돈은 천노에게 보내려고 하였는데 날이 저물어서 보내지 못했다. 나와 화옥(華玉)은 각각 헤어졌다. 只捧二十一兩錢, 放賣馬匹, 以給譜廳, 零錢資送千奴, 而以日暮不得發送。 余與華玉, 各各分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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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함께 머물렀던 염상(鹽商)에게 짐을 지게하고 동틀 무렵에 출발하였다. 낙수(洛水)에 이르러 공서와 헤어지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객지에서 우연한 만나니 기약했던 것보다 기쁜데(客地偶逢勝有期)중양절이라 누런 국화꽃마저 한창이네(維當重九菊花時)한 달 남짓 함께 고생하여 서운한 맘 사무치니(月餘同苦猶餘愴)이별에 임하여 다시 석별의 시를 읊노라(臨別還成惜別詩)공서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중도에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만나(中路相逢以不期)저물면 머물고 새벽에 길 떠나기를 각각 때를 따랐네(夕留晨發各隨時)동행하여 동종의 정의가 배나 간절한지라(同行倍切同宗誼)이별에 임하여 몇 구의 시를 읊어보노라(臨別吟來數句詩)또 내가 한 수를 읊었다.다리 가 갈림길에 흰 구름이 일어나고(別路橋邊起白雲)낙엽 진 이별의 정자에서 헤어짐이 애석하네(離亭葉下惜相分)재삼 우두커니 서서 앞으로 가는 길 물어보고(再三立立前頭問)강가로 고개를 돌리며 어서어서 가시라 하네(回首江頭早早云)공서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고개 돌려 남쪽 팔영산의 구름 바라보다(回首南看八影雲)걷고 걷다 낙수에 와서 함께 온 길 갈라지네(行臨洛水路相分)동쪽 강물 하나의 띠처럼 넘실넘실 흘러가는데(東流一帶洋洋去)누구에게 이별하는 심회의 장단시를 말할거나(誰與離懷長短云)그길로 작별하였는데, 천리 길을 함께 고생을 한 뒤라서 그 서운한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길을 재촉하여 낙안의 기동(基洞) 어귀 정문등(旌門登)에 이르러 요기하였다. 주막 앞에서 여러 차례 이경오(李敬五)를 불렀는데 끝내 답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기별을 통하게 하였으나 경오(敬五)는 출타 중이고, 그의 대인(大人, 경오의 아버지)이 문 앞에 서서 내가 바로 지나가는 것을 알고는 내게 그 집에 들어가 묵어가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탓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령(西嶺)을 넘어 추동(楸洞) 주막에 이르렀다. 염상(鹽商)과 서로 헤어지고 나서 짐을 지고 벌교 시장 근처에 이르러 윤동(輪東) 군직(君直) 씨를 만나서 동행하였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밤을 틈타 용전(龍田) 무안(茂安) 댁에 들어가 유숙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안 소식을 알게 되었다. 우선 별탈이 없다고 운운(云云)하니 매우 다행이었다. 90리를 갔다. 負卜於同留鹽商, 平明發抵洛水。 與公瑞相分, 仍吟一絶曰: "客地偶逢勝有期, 維當重九菊花時。 月餘同苦猶餘愴, 臨別還成惜別詩。" 公瑞次曰: "中路相逢以不期, 夕留晨發各隨時。 同行倍切同宗誼, 臨別吟來數句詩。" 又吟一絶曰: "別路橋邊起白雲, 離亭葉下惜相分。 再三立立前頭問, 回首江頭早早云。 " 公瑞次曰: "回首南看八影雲, 行臨洛水路相分。 東流一帶洋洋去, 誰與離懷長短云。" 仍與作別, 千里同苦之餘, 其懷難抑。 促行抵樂安 基洞前旌門登療飢。 於幕前頻呼李敬五, 則終不答, 故使人通奇, 則敬五出他, 其大人立于門前, 知余之直過, 請余入于其家留宿而去云云, 而以行忙之致, 不得入去, 越西嶺, 抵楸洞酒幕。 與鹽商相分, 仍爲負卜, 抵筏橋市邊, 逢輪東 君直氏, 仍爲同行, 日已暮矣。 乘夜入龍田 茂安宅留宿, 始知家間消息。 姑無故云云, 幸幸。 行九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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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해가 뜰 무렵 행장을 꾸려 천노를 보냈다. 平明治送千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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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노구암(老狗巖)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全州) 부내(府內)에서 묵었다. 가서 김 동지(金同知)를 만나 16냥의 돈을 남겨 주고 항선(缸鐥)을 사 오도록 하였다. 中火老狗巖, 宿全州府內。 往見金同知, 留贈十六兩錢, 使貿缸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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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증산(甑山)에서 점심을 먹고 오수(獒樹)에서 묵었다. 中火甑山, 宿獒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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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初九日 삼례(參禮)에 이르자 비가 내려서 머물렀다. 우연히 장성(長城)에 사는 벗 임후장(林厚長)을 만나서 동행하였다. 至參禮, 雨作因留。 偶逢長城 林友 厚長, 因與同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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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밤에 눈이 내렸다. 새벽에 출발하여 임실(任實) 읍내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고개를 넘어 간신히 현동(玄洞) 송기렴(宋基濂)의 집을 찾아갔으나 기렴은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고, 그 아들 전(椣)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돈학문적(遯壑文蹟)》을 보고자 하였다. 그 문적이 모두 신안서원(新安書院)61)에 있다고 하므로 신안서원(新安書院)에 이르렀다.신실(神室)은 동서로 나누어 만들었는데, 서실(西室)은 주부자(朱夫子)의 영정(影幀)을 걸어 쌍창(雙窓)으로 여닫게 되어 있고, 동실은 돈학(遯壑) 송경원(宋慶元, 1419~1510)·신재(新齋) 한호겸(韓好謙, 1535~1579)·만회당(晩晦堂) 한필성(韓必聖, 1625~1691)·홍운정(鴻雲亭) 한명유(韓鳴愈)·거묵당(巨墨堂) 송시태(宋時態) 등 6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신실(神室)은 새로 만들어 깨끗하였지만 서원의 사당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어진 이를 사모하는 도리가 매우 개탄스럽고 애석하였다. 참배하고 봉심(奉審)한 뒤에, 송연영(宋延英)과 한원택(韓元宅)에게 요구하여 문적(文蹟)을 보여 달라고 하였더니, 전주의 이 생원(李生員)이 지난번에 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문적을 볼 수 없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대로 길을 나서 대곡(大谷)의 송낙철(宋洛哲) 집에 이르러 묵었다. 20리를 갔다. 夜雪。 曉發抵任實邑內朝飯, 越嶺艱尋玄洞 宋基濂家, 則基濂出他, 不得相面, 只與其子椣暫敍, 欲見《遯壑文蹟》矣。 其文蹟盡在新安書院云, 故抵新安書院, 則神室分作東西, 而西室則掛朱夫子影幀, 以雙窓開閉, 東室則宋遯壑、韓新齋、晩晦堂、鴻雲亭、宋巨墨堂六賢妥靈之所也。 神室則新創鮮明, 而院貌尙未成樣, 其於慕賢之道, 甚爲慨惜。 參謁奉審後, 要宋延英及韓元宅, 欲見文蹟, 則全州 李生員, 頃來持去云, 故不得尋見, 可歎耳。 仍爲發程, 抵大谷 宋洛哲家留宿。 行二十里。 신안서원(新安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에 있는 서원으로, 1588년(선조21)에 신재(新齋) 한호겸(韓好謙)의 문하들이 스승을 위해 세웠으며,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1669년(현종10)에 다시 복립하였다. 처음에는 이서(李舒, 1332~1410)와 한호겸만을 봉안하였으나, 1788년(정조12)에 사림들의 결의에 따라 돈학(遯壑) 송경원(宋慶元), 만회당(晩晦堂) 한필성(韓必聖), 홍운정(鴻雲亭) 한명유(韓鳴愈), 거묵당(距墨堂) 송시태(宋時態)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훗날 김수(金洙)·강백진(康伯珍)을 추가하여 모두 8현을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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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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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아침을 먹은 뒤에 가교(柯橋) 댁에 갔다가 머물다 가라 붙잡았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렀다. 食後往柯橋宅, 以挽留之致, 仍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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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정해) 1827年(丁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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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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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五月 정해년(1827, 순조27) 5월 순찰사(巡察使)가 먼저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으므로 감사의 뜻을 표하려고 하였다. 丁亥五月, 巡相以書先問, 故以回謝之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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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아침을 먹고 일찍 출발할 때 눈이 내렸다. 이에 눈을 맞으며 유치(峙)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기에 가까스로 영귀정(咏歸亭)에 이르러 묵었다. 80리를 갔다. 仍朝飯早發時雪作, 仍爲冒雪, 抵峙中火。 大雪作咫尺不辨, 艱抵咏歸亭留宿。 行八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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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계미) 1823年(癸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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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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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서 순자강(蓴子江)을 건너고, 주포(周浦) 주막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돈 1전(錢)을 주인집 사내에게 주며 《서재실기(西齋實記)》를 도산(道山)의 송필흥(宋弼興) 집에 전해 달라고 하였다. 길을 떠나 남원읍(南原邑)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나는 먼저 향교(鄕校)로 출발하여 실기(實記) 한 권을 전한 뒤 곧바로 출발하여 전석치(磚石峙)2)를 넘어 임실(任實) 야당(野塘)에 이르렀다. 동행은 먼저 주막으로 가고, 나는 송필동(宋弼東) 씨의 집에 들러 실기 한 권을 신안서원(新安書院)에 전하게 하였는데, 예조에 재록(載錄)했는지에 대해 묻기에 아직 재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서원을 세운 지가 이미 오래인데 어째서 재록하지 않았느냐며, 신안서원(新安書院)은 작년에 실었는데 들어가는 것이 적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장계의 초고를 청하여 주막으로 가지고 와서 여환(汝煥)에게 베껴 오도록 하였는데, 이는 나도 예조에 소장을 올리려는 계획에서였다.-등서한 장본(狀本)은 뒤에 붙였다.-저녁을 먹은 뒤에 주막으로 나와 동행들과 함께 머물렀다. 90리를 갔다. 낮에 남원 길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천릿길 동행한 열세 사람(千里同行十有三)호남에서 북쪽 여행길 떠나 왔네(北征行色自湖南)며칠이나 걸려야 경성에 도착할꼬(間開幾日京城到)훗날 고생한 만큼 즐거움도 볼 수 있으리(可見他時苦盡甘)정 진사(丁進士)가 화답하였다.늦봄 삼월 서쪽으로 떠나는 천릿길(西行千里暮春三)산색은 푸르르고 물은 남쪽으로 흘러가네(山色蒼蒼水盡南)천 자나 높은 용문 계수나무 잡은 곳에서(千尺龍門攀桂地)오늘 함께한 고초와 즐거움 떠오르리(却思今日共辛甘)신윤보(申允甫)가 화답하였다.곤륜의 한 줄기 빼어난 삼각산(崑崙一脈三角秀)천지간에 정신 온통 남쪽에 있네(天地精神盡在南)천릿길 떠나온 노고 도리어 잊어버리고(千里還忘勞苦我)어사화 어주가인 듯 술동이 가득 달기만 하네(賜花御酒滿樽甘)정 진사(丁進士)가 또 읊었다.밤새 비는 강남에 쏟아져 다리가 잠기고(夜雨江南水沒橋)푸른 회화나무 길을 막고 보리는 허리까지 잠겼네(靑槐擁路麥齊腰)이번 길 용꿈을 꾼 나그네 누구인가(此行誰是龍夢客)들새가 노래하는 것도 비웃는 것도 같구나(野鳥如歌又似嘲)내가 화답하였다.짚신 신고 지팡이 끌며 오작교3)를 걷노라니(竹杖芒鞋步鵲橋)잘록한 허리의 미인들 성에 가득하네(盈城美女盡纖腰)이번 길 봄을 만끽하기 위해 온 게 아니건만(此行不是貪春客)혹여 옆 사람 비웃을까 두렵구나(或恐傍人有笑嘲) 早朝發程, 越蓴子江, 至周浦酒幕朝飯。 傳《西齋實記》於道山 宋弼興家之意, 出給錢一戔主漢。 發行抵南原邑, 乃中火秣馬。 余則先發鄕校, 傳實記一卷, 卽發越磚石峙, 抵任實 野塘。 同行則先去酒幕, 余則入宋弼東氏家, 傳實記一卷于新安書院, 問禮曹載錄, 故姑未載錄云爾, 則建院已久, 而何其不載乎? 新安書院則昨年載, 而所入不小云, 故請其狀草, 持來酒幕, 使汝煥謄書以來者, 余亦欲呈禮曹計耳【謄書狀本附後】。 夕飯後, 出來酒幕, 與同行同留。 行九十里。 午間南原路上, 咏一律曰: "千里同行十有三, 北征行色自湖南。 間關幾日京城到, 可見他時苦盡甘。" 丁進士和曰: "西行千里暮春三, 山色蒼蒼水盡南。 千尺龍門攀桂地, 却思今日共辛甘。" 申允甫和曰: "崑崙一脈三角秀, 天地精神盡在南。 千里還忘勞苦我, 賜花御酒滿樽甘。" 丁進士又號曰: "崑崙一脈三角秀, 天地精神盡在南。 千里還忘勞苦我, 賜花御酒滿樽甘。" 余和曰: "竹杖芒鞋步鵲橋, 盈城美女盡纖腰。 此行不是貪春客, 或恐傍人有笑嘲。" 전석치(磚石峙) 일명 '박석고개'로 전라북도 남원시 광치동과 사매면 대율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박석치는 비포장 시절에 고갯마루가 지표 유출에 의한 토양침식으로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얇고 넓적한 돌을 깔아 놓은 데서 유래하였다. 오작교 원문의 '작교(鵲橋)'는 남원 광한루(廣寒樓)에 있는 오작교(烏鵲橋)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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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晦日 아침을 먹은 뒤에 빗줄기가 약간 누그러졌기에 길을 나서 정오에 오촌(鰲村)으로 들어갔다. 장석(丈席)을 들어가 뵙고 그 내부인(內夫人)의 상(喪)을 위로한 뒤 물러나 상제(喪制)7)에게도 또한 위로하였다. 장석(丈席)의 건강이 근래에 더욱 악화되어 몇 년 사이에 모습이 더욱 쇠약해지니 걱정스러웠다.잠시 쉬고 나서 행랑으로 나와 점심을 먹은 뒤에 실기(實記) 한 권과 가지고 온 약간의 물건을 드렸다. 장석(丈席)이 먼저 세충사(世忠祠)8)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지난번 흥양(興陽)의 송원(宋)이 왔을 때 한 말이 있었는데, 육(六)자를 세자(世字)로 고치라는 뜻의 편지였다고 하였다. 내가 "출발하기 며칠 전에 편지를 살펴보았습니다."라고 답하자 장석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육충사(六忠祠)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교하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대로 묵었다.저녁을 먹은 뒤에 임실(任實) 종인 두 사람도 왔다. 행랑에 한 객이 머물고 있기에 거주하는 곳을 물었더니 같은 도에 사는 광양(光陽)의 박정일(朴楨一)이라 하였다. 그를 만난 반가움은 다른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달리 더욱 컸다. 그대로 함께 머물렀다. 30리를 갔다. 食後雨勢稍歇, 故發程午時入鰲村, 入謁丈席, 致慰其內夫人喪, 退與喪人亦致慰, 丈席氣候近以添重, 數年之間, 衰象漸甚悶悶。 暫憩後, 出來廊底, 午飯後, 入納實記一卷與持來略干物。 丈席先言以世忠祠之事, 頃者興陽 宋來到, 有云云說話, 以六字改世字之意折簡矣, 故余答曰: "臨發前數日奉覽矣。" 丈席曰: "與人相話, 不可以六忠祠爲可"云, 故答曰: "依敎施行矣。" 仍爲留宿。 夕飯後, 任實宗二人亦來。 廊底留一客, 故問其所居, 則乃同道光陽 朴楨一也。 其喜與他有別, 幸幸。 仍爲同留。 行三十里。 상제(喪制) 부모나 조부모가 세상을 떠나 상중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세충사(世忠祠)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 여산송씨 송간(宋侃)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 김시습(金時習) 등 11위를 향사하는 사우(祠宇)인 서동사(西洞祠)의 이전 명칭으로, 1785년 최초 건립 당시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1796년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으며, 1801년(순조1)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배하여 일문 육충사(一門 六忠祠)라 이름하였다. 이후 1833년 세충사, 1846년(헌종12)에 매월당 김시습을 함께 봉안하면서 서동사로 칭하였고, 1868년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56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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