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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갑인) 十六日 甲寅 갬. 장동의 종매 이근옥(李根沃)의 집에 도착하였다. 晴。到章洞從妹李根沃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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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을묘) 十七日 乙卯 흐리고 비. 유희적(柳羲迪)의 집에 도착하여 계속 머물렀다. 陰雨。到柳羲迪家留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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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임자) 十五日 壬子 맑음. 몸이 조금 아팠기[採薪之憂] 때문에 한가하게 ≪미암선생유고(眉岩先生遺稿)≫를 보았다.그가 지은 〈정심명(正心銘)〉을 기록했다.〈정심명〉(正心銘)이 마음을 보존하여 기르기를,(存養此心)거울의 투명과 저울의 공평같이 하며,(鑑空衡平)물(物)이 오거든 순히 응하여,(物來順應)정대하고 광명하게 하라.(正大光明)또 '덕(德)'자의 해석을 기록했다. "주상께서 이르기를, '경이 만든 ≪대학석소(大學釋疏)≫나 ≪신증유합(新增類合)≫은 모두 정밀하고 심오하오. 다만 ≪유합≫의 글자풀이에 가끔 사투리를 썼고, 또 간혹 온당치 못한 곳도 있었소. 예컨대 '덕(德)' 자를 '어질 덕'이라 했는데 덕은 흉함도 있고 길함도 있으니, 어찌 선(善)으로만 풀이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신 (유희춘)이 대답하기를, "사투리는 신이 본래 외방 고을[해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란 글자는 원래 좋은 글자입니다. 다만 부덕(否德)이나 흉덕(凶德)처럼 좋지 않은 글자를 덕 자 위에 덧붙임으로써 불길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陽。有因採薪之憂。 閒看 ≪眉岩先生遺稿≫。記其所作〈正心銘〉。〈正心銘〉存養此心。鑑空衡平。物來順應。正大光明.記德字釋。"上曰 '卿所修 ≪大學釋疏≫及 ≪類合≫。 皆精深。但 ≪類合≫。 釋字間有使土俚。 又或有未穩處。如德字釋어딜덕。 德有匈有吉。 豈可專以善釋之?' 臣曰 '土俚則臣本外方鄕産。 故實不免有之。若德字。 則元是好字。只有否德匈德。 加不好之字於德上。 故爲不吉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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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계축) 十六日 癸丑 흐리고 비. 陰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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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정미) 十二日 丁未 흐림. 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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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무신) 十三日 戊申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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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기유) 十四日 己酉 흐림. 눈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陰。雪寒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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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기해) 五日 己亥 흐림. 듣자니 지난 정월 7일 밤에 혈우(血雨)가 태인과 금구 경계에 내렸다고 한다. 또 듣자니 중국 사람이 와서 하서선생(河西先生)의 시를 전해주었다고 한다.그대가 언젠가 주었던 것 생각나니(憶君何所贈)한 개의 먹을 주었었지(贈以一端墨)먹은 금강의 달로 변화되었으니(墨化錦江月)달이 밝으면 달과 함께 생각나네(月明共相憶) 陰。聞去正月初七日夜。 血雨於泰仁金溝接界。又聞中原人來傳河西先生詩。憶君何所贈。 贈以一端墨。 墨化錦江月。 月明共相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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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경자) 六日 庚子 흐림. 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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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신축) 七日 辛丑 흐림. 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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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기해) 三日 己亥 흐림. 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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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정미) 十日 丁未 석전일(釋奠日)이다. 흐림. ≪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을 보았다. 선생의 '서시학자(書示學者)'를 보고 기록한다.선생이 말하기를 "주렴계의 〈도설(圖說)〉은 도리가 정미하고 문장이 간략하며 뜻이 충분하다. 장자(張子, 장횡거)의 〈서명(西銘)〉58)은 규모가 광활하지만 건너뛰지도 않고 빠뜨리지도 않았다. 만일 타고난 천품이 대단히 고명하다면 먼저 태극 위에서 공부해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또 ≪서명≫을 깨달아 앎으로써 태극에 미쳐야 한다. 태극은 덕성의 본령이고, 〈서명〉은 학문의 기강이니, 요컨대 끝내 어느 한쪽을 폐할 수 없다."라고 했다.또 시를 지어 걸어두고서 문인들에게 보였으니, "천지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중니(仲尼)가 원기(元氣)라면 자양(紫陽)은 진수일세. 잠심하여 다른 갈래의 미혹에 향하지 않음으로서 이 쇠퇴하고 병든 몸을 위로할지어다."라고 하였다.선생은 대개 '서계(書契, 문자)가 생긴 이래로 여러 성인이 극(極, 표준)을 세웠지만, 그것이 쇠퇴함에 이르러서는 공자가 없었다면 여러 성인의 도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공자 이후에는 여러 현인이 계승해갔지만, 어두짐에 이르러서는 주자가 없었다면 공자의 도가 밝아지지 못했을 것이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시에서 드러낸 것이다. 釋奠日也。陰。看 ≪河西先生集≫。 見先生書示學者。 記之。先生曰。 "濂溪之圖說。 道理精微。 文簡意足。張子之銘。 規模廣闊。 不泛不漏。若天資大段高明。 則先從太極上用工。不然則且理會〈西銘〉。 以及乎太極。太極德性之本領。〈西銘〉學問之綱紀。 要之終不可偏廢云云。" 又作詩揭示門人。 "天地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潛心勿向他歧惑。 慰此摧頹一病身。" 先生蓋以'書契以來。 群聖立極。 而及其衰也。 無孔子則群聖之道不傳。孔子以後。 群賢繼統。 而及其晦也。 無朱子則孔子之道不明'。 故發諸詞詩。 서명(西銘) 장횡거가 서재의 서쪽 창문가에 써서 걸어 놓은 글 이름으로, 인의(仁義)에 입각한 유가의 윤리설을 요약해서 서술한 것인데, 주희가 별도로 주를 달아 해설하면서부터 세상에 크게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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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무신) 十一日 戊申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어버이에게 감사하는 정과 송구한 마음에 종일토록 경황없이 보냈다. ≪염락(濂洛)≫을 보다가 '학사 장역(張繹)59) 사숙(思叔)이 이천선생(伊川先生)을 제사한 글'에 이르렀는데, 그 속에 "천지가 우리를 용납함에 부모가 그것을 생겨나게 하셨고, 군친(君親)이 우리에게 임하심에 부자께서 그것을 이루게 하셨네."라는 말이 있어서 기록하였다. 卽吾生日也。感親之情。 悚惕之心。 終日無況而過。看 ≪濂洛≫。 至 '張學士繹思叔祭伊川先生文'中有曰。 '天地其容我兮。 父母其生之。君親其臨我兮。 夫子其成之'語。 而記之。 장역(張繹) 자는 사숙(思叔)이며, 하남성(河南省) 수안(壽安) 사람이다. 정이(程頤)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윤돈(尹焞)과 함께 정이가 만년에 얻은 두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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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무술) 二日 戊戌 흐림. 장동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주인이 출타한 것으로 인하여 한적하던 중에 시리고상(視履考祥, 지난 행동을 살펴 길흉을 상고)하였다. 문득 전일에 예전의 의관(衣冠)이 소용이 없다는 비난을 많이 받은 일을 생각하고 말을 기록하여 뜻을 드러낸다. 옛날 곽임종(郭林宗)81)이 곧아도 속세를 끊지 않은 것이 어찌 감히 어긴 것이겠는가? 다만 시대가 같지 않고 만나는 바가 또한 다른데, 옛 것을 바꾸어 새로운 것을 따르고 오랑캐로 중화를 변화시키려 하니, 만 번 죽어도 차마 하지 못할 짓이다. 陰。歸章洞。 適因主人出他。 閒寂中。 視履考祥。輒思前日多被舊衣冠無所用之譏。 記言而著意。昔郭林宗貞不絶俗。 豈敢違也? 但時代不同。 所値亦異。改舊從新。 用夷變夏。 萬死不忍。 곽임종(郭林宗) 후한(後漢) 때의 명사(名士)인 곽태(郭泰, 128~169)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곽태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나 두건의 한 귀퉁이가 꺾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본받아서 일부러 두건의 한 귀퉁이를 꺾어서 쓰고 다니며 임종건이라고 하였다 한다.(≪후한서≫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 혹자가 "곽임종(郭林宗)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자, 범방이 "그는 세상을 피해 숨어도 개지추(介之推)처럼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유하혜(柳下惠)처럼 속세와 단절하지 않으며, 천자도 신하로 삼을 수 없고, 제후도 벗으로 삼을 수 없다. 나는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隱不違親, 貞不絶俗, 天子不得臣, 諸侯不得友. 吾不知其他.]"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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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경자) 四日 庚子 흐리다가 맑음. 陰而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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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임인) 六日 壬寅 맑음. 〈임회처사실기(臨淮處士實記)〉를 보았다.공의 성은 박씨이고, 휘(諱)는 희권(希權), 자는 천경(天經)으로, 반남인(潘南人)이다. 단종의 신하로 김매월(金梅月)82)・남추강(南秋江)83)・원관란(元觀瀾)84)・조어계(趙漁溪)85)・성문두(成文斗)86)・이경은(李耕隱)87) 등 여섯 선생이 있었는데, 자연에 자취를 감추고 세상을 영영 버리고 은둔하였으니, 그 고충(孤忠)과 과절(姱節)은 백대의 스승이 될 만하다. 당시에 또 공이 있었는데 스스로 정절을 지키다 죽었다.대개 공이 눈물로 그의 아버지에게 권하여 진산(珍山) 군수의 관직을 버리고 사육신(死六臣)과 일을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부자가 함께 금산(錦山)의 장평(獎坪)에 은거하여 시골 사람들과 자취를 섞여 당세에 일을 하려는 뜻을 끊었다. 매번 24일을 만나면 집의 북쪽에 단을 설치하고, 영월을 바라보고 곡을 하고 혼을 불러 제사를 지냈다.또 기록한 것이 있는데,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등이 당시 군주의 뜻에 영합하여 상왕을 밖으로 축출하기를 청하였고, 또 안에서 밀지를 내려 조정을 몰래 풍자하였다. 소계(疏啓)를 진달하여 청할 때에는 매번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이름을 머리에 올렸는데, 이 당시에 양녕대군은 관서지방에 여행 중이어서 실로 알지 못하였기에 전가(轉嫁)한 허물이 있었다."라고 하였다.또 공의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인 진산 군수(珍山郡守)의 묘갈문(墓碣文)을 저술하였다.아, 불초한 제가 일찍이 듣건대 선유는 '군자는 그 친을 사사로이 여기지 않고 또 그 친을 친압하지 않는다.[君子不私其親, 亦不昵其親]'라고 말하였는데, 우리 황고(皇考, 아버지)의 행적을 기술함에 실제의 근거를 얻지 못한다면 장차 친을 사사로이 여기고 친을 친압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기 때문에 실적을 기록하여 신천(新阡)에 표한다.아, 우리 황고께서는 비조(鼻祖)인 호장공(戶長公)의 구세손이요, 사온(司醞) 직장공(直長公)의 현손이며, 문정공(文正公) 반남선생의 종현손이다. 가정과 백성을 잘 다스려 은혜와 위엄을 병행했으니, 이것이 그 실적(實蹟)이다.부군(府君)의 성은 박씨이며, 계통은 반남이고, 휘는 린(麟), 자는 성상(聖祥)으로, 영락(永樂)88) 갑오년(1414) 2월 3일에 태어나셨다. 경태(景泰)89) 원년 경오년(1450)에 처음으로 벼슬하였는데, 단종 계유년(1453)에 음직으로 진산군수가 되었다. 을해년(1455)에 선위(禪位)의 명이 있자, 불초고(不肖孤)가 영월의 행재소로 달려가 알현하려 했으나 구질(九耋)의 노모 김씨가 훈계하시길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은 의리상 당연하지만, 너희 부자가 천리를 달려가 의리를 붙들 때 늙은 나는 누구를 의지하겠느냐? 너희는 그것을 헤아려 보라.'라고 하시자, 자친(慈親)의 명을 받아들여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금산 장평으로 물러나 살다가 무인년(1458) 정월 4일에 졸하였다. 13일에 본군[금산] 부동면(富東面) 양각산(羊角山) 아래 내장리(內腸里) 뒤쪽 인질산(釼叱山) 손하병좌(巽下丙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우자 영인(令人)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오른쪽에 부장했다.공(公)의 고(考) 휘는 두언(諱杜)이고, 자는 칠회(七晦)로,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을 지냈다. 모 숙부인(淑夫人)은 연안김씨(延安金氏)로 부는 찬성(贊成)인 휘가 수(修)인 분이다. 조고(祖考)의 휘는 충(冲)이며, 자는 군유(君幼)로 태종조에 문과에 합격해 교서정자(校書正字)에 올랐다. 조비(祖妣) 숙부인은 무송윤씨(茂松尹氏)로 부는 사직(司直)인 휘가 변(汴)인 분이다. 증조고(曾祖考)의 휘는 힐(詰), 자는 원직(元直)이다. 태종조에 은둔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자, 임금이 그 절개를 가상히 여겨 제용감(濟用監) 벼슬과 동리에 집터[家垈]를 하사했으나 받지 않았다. 증조비(曾祖妣) 유인(孺人)은 철원최씨(鐵原崔氏)로 부는 간성도사(杆城都事) 인두(仁㺶)이다. 고조고(高祖考)의 휘는 상경(尙褧)으로 사온직장(司醞直長) 벼슬을 지냈고, 고조비(高祖妣) 단인(端人)은 서원염씨(瑞原廉氏)로 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유(大有)이다.공의 배우자 영인(令人) 청풍김씨(淸風金氏)는 부가 좌의정(左議政) 달도(達道)인데, 2남 3녀를 낳았다. 첫째 아들은 희권(希權)이고, 둘째 아들 희손(希遜)인데 요절했다. 첫째 딸은 이신지(李新之)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중명(仲命)에게 시집갔는데, 문과 출신이다. 셋째 딸은 김구영(金九英)에게 시집갔는데, 예조정랑(禮曺正郞)이다. 희권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호인(好仁)과 부사과(副司果) 호의(好義), 생원(生員) 호례(好禮), 호지(好智), 호신(好信)이다. 딸은 김양손(金陽孫)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현손(曾玄孫)을 모두 기록하지 못하고 위와 같이 찬차(撰次)한다. 불초고가 추모의 뜻을 명문(銘文)으로 짓는다.우리 황고께서는(惟我皇考)높은 절개가 산과 같아라.(峻節如山)우리 황고를 생각하면,(念我皇考)순수한 효성이 샘물처럼 끝없네.(純孝如泉)새로 쓴 무덤 위에는,(新阡之上)푸른 산이 창창하고,(有山蒼蒼)새로 쓴 무덤 아래엔(新阡之下)끝없는 강물이 앙앙하도다.(有水泱泱)군자의 덕을 갖추시고(君子之德)동정에 떳떳함이 있으셨네.(動靜有常)경태(景泰) 10년 기묘년(1459) 3월 상완(上浣)에, 불초고(不肖孤) 희권(希權)이 삼가 찬하고 아울러 쓰다. 陽。看〈臨淮處士實記〉。公姓朴氏。 諱希權。 字天經。 潘南人。魯陵之臣。 有金梅月・南秋江・元觀瀾・趙漁溪・成文斗・李耕隱六先生。 放迹山水。 長往不返。 其孤忠姱節。 可以爲百世師。時又有公。 自靖以歿其身。蓋公泣勸其父。 投珍山郡紱。 而欲與死六同事不得。 則遂父子俱隱于錦山之獎坪。 混迹漁樵。 絶意當世。每値十月二十四日。 設壇家北。 哭望寧越。 招魂以祭。又有所錄。 "鄭麟趾鄭昌孫等。 迎合時君之意。 請黜上王于外。 而且內降密旨。 陰諷朝廷。陳請疏啓。 每以讓寧大君名爲首。此時讓寧出遊關西。 實不知而有嫁累"云。又著公先考珍山郡守府君墓碣文。嗚呼! 不肖孤嘗聞之。 先儒曰 '君子不私其親。 亦不昵其親。' 述我皇考行蹟。 不得據實。 則將不免私親昵親之譏。 故記以實蹟。 表于新阡。嗚呼。 惟我皇考。 鼻祖戶長公九世孫也。 司醞直長公之玄孫也。 文正公潘南先生之從玄孫也。克居家莅民。 恩威竝行。 此其實蹟也。府君姓朴氏。 系潘南。 諱麟。 字聖祥。生於永樂甲午二月三日。 筮仕於景泰元年庚午。 端廟癸酉蔭珍山。當乙亥禪代命。 不肖孤欲赴謁寧越行在所。 而九耋老母金氏戒之曰 '臣之死君。 義則當然。 而汝之父子。 千里扶義。 老我何依? 汝其諒之。'。 拜受慈親之命。 卽日投紱。 退居錦山獎坪。 而戊寅正月四日卒。三月十三日葬于本郡富東面。 羊角山下。 內腸里後釼叱山巽下丙坐原。配令人淸風金氏附右。公之考諱杜彦。 字七晦。 世宗朝文科。 承文院校勘。妣淑夫人延安金氏。 父贊成諱修。祖考諱冲。 字君幼。太宗朝文科。 校書正字。祖妣淑夫人茂松尹氏。 父司直諱汴。曾祖考諱詰。 字元直。太宗朝隱遯不仕。 上嘉其節。 賜濟用監。 洞家垈不受。曾祖妣孺人鐵原崔氏。 父杆城都事諱仁㺶。高祖考諱尙褧。 官司醞直長。高祖妣端人瑞原廉氏。 父密直副使諱大有。配令人淸風金氏。 父左議政諱達道。 生二男三女。長希權。 次希遜早圽。女長適李新之。 次適仲命文科。次適金九英。 禮曺正郞。希權五男一女。男好仁・好義副司果・好禮生員・好智・好信。女金陽孫也。內外曾孫。 多不盡錄。 而撰次如右。不肖孤追慕之志。 爲之銘。曰 惟我皇考。 峻節如山。 念我皇考。 純孝如泉。新阡之上。 有山蒼蒼。 新阡之下。 有水泱泱。君子之德。 動靜有常。景泰十年己卯三月上浣。 不肖孤希權。 謹撰。竝書。 김매월(金梅月) 김시습(金時習, 1435~1493)으로,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설잠(雪岑),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널리 알려졌는데, 21세 때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른 뒤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었고, 31세 되는 해에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에 머물며 성리학과 불교를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으며, 다시 방랑생활을 계속하다가 59세에 별세하였다. 숙종 때 생육신(生六臣)의 일원에 올랐다.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으로,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480년(성종11)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원관란(元觀瀾) 원호(元昊)로,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재(觀瀾齋)・무항(霧巷),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1423년(세종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보고 낙향하여 은둔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어계(趙漁溪) 조려(趙旅, 1420~1489)로,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본관은 함안(咸安),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1453년(단종1, 계유) 성균관 진사가 되어 당시의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성균관에 있다가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西山) 아래에 살았는데, 이 산을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만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자호하였다. 저서로 ≪어계집≫이 있다. 성문두(成文斗) 성담수(成聃壽, ?~?)로, 자는 미수(眉叟)・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 본관은 창녕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이경은(李耕隱) 이맹전(李孟專, 1392~1480)으로,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1427년(세종9) 문과에 급제하여 거창 현감을 지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간 뒤로 30여 년을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영락(永樂) 중국 명나라 성조의 연호로, 1403〜1424년에 해당한다. 경태(景泰) 중국 명나라 대종 때의 연호로, 1450〜1456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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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경자) 五日 庚子 맑음. 조카 아이를 데리고 옥정리(玉井里) 하씨(夏氏) 집에서 혼사를 치르고 문암리로 돌아왔다. 陽。率姪兒。 成婚於玉井里夏氏家。 還門岩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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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신축) 六日 辛丑 맑음. 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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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임인) 七日 壬寅 맑음. 분통리(粉桶里)108) 윤씨(尹氏) 조카사위 집에 위문하러 가서 머물러 잤다. 陽。慰問於粉桶里尹侄婿家。 留宿。 분통리(粉桶里) 현재 전남 담양군 용면 용연리 분통 마을을 가리킨다. 분통 마을은 1670여 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에 분재실(粉在實), 통사(桶事)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지명의 앞글자를 따 '분통'이라 불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흥(大興), 분통(粉桶), 용평(龍平), 소천지(小天持), 세룡동(細龍洞), 용동(龍洞), 등과 함께 용연리(龍淵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1961년 10월 1일자 조례에 의거 용연리 1구 분통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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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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