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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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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54년 국용헌(鞠龍憲) 다짐(拷音)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寅二月卄六日 甲寅二月卄六日 鞠龍憲 興德縣 전라북도 고창군 行官[署押], 白[着名] 3개(적색, 정방형) 흥덕 석호 담양국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외 옮김, 『유서필지』,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김도형, 「고문서 해석과 문학적 전용(轉用)」,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16. HIKS_Z026_01_A00004_001 1854년(철종 5) 2월에 국용헌(鞠龍憲)이 흥덕현(興德縣)에 제출한 다짐으로 한순업(韓順業)과의 송사에 패한 후에 처부(妻父) 재산에 관한 일체 문서를 내어주겠다는 내용. 1854년(철종 5) 2월 26일에 59세 된 국용헌(鞠龍憲)이 흥덕현(興德縣)에 제출한 다짐이다. 한순업(韓順業)과 국용헌의 소송 과정에서 생산된 문서이다. 작년 4월부터 진행된 한순업과 송사에서 패배한 뒤, 한순업을 처부(妻父)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처부가 전한 선주인(船主人) 문권(文券) 및 시장(柴場) 문권을 낱낱이 내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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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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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甲寅五月十八日興德下吏鞠▣▣(龍憲)白等矣身妻父無后身死後矣(身)妻本情理所在致願三年奉祀到有官決矣不意今者承重孫韓順業又爲惹鬧有此宣營之擧措以法禮勢所當然依分付妻父几筵卽爲出給爲去乎日後更有起鬧之端以此憑考處里敎味白[着名]官[着押][印][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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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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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54년 국영범(鞠英範) 등 소지(所志) 고문서-증빙류-다짐 법제-소송/판결/공증-다짐 甲寅正月 使道 甲寅正月 鞠英範 興德縣 전라북도 고창군 行官[着押] 5개(적색, 정방형) 흥덕 석호 담양국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외 옮김, 『유서필지』,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김도형, 「고문서 해석과 문학적 전용(轉用)」,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16. HIKS_Z026_01_A00004_001 1854년(철종 5) 5월에 국영범(鞠英範) 등이 흥덕현감(興德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외조의 제사와 재산을 두고 한순업(韓順業)과 벌인 송사 사건. 1854년(철종 5) 5월에 국영범(鞠英範), 행범(行範) 등이 흥덕현감(興德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국영범과 영범은 국용헌의 두 아들이며, 한순업의 소송에 대해 반박하는 소지이다. 이 사건은 작년(1853년) 4월 달에 한순업의 소송으로 시작되었는데 그간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순업의 종조는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는데, 한순업은 그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자신을 후사로 정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신이 증조의 유언에 따라 가문을 이어받아 상을 주관하려고 했는데, 종조의 사위인 국용헌이 자신을 가족이 아니라고 하면서 집안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배척하였다고 하소연 하였다. 또 한순업은 종손이 외인(外人)이 되고 외손(外孫)이 주인이라는 말하는 것은 인륜과 의리에 어긋나는 궤변이고, 외손이 제사를 받든다는 것은 후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였다. 반대로 국용헌의 입장에서 한순업의 종조의 딸은 자신의 아내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 가족으로서 초상과 제사를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촌수로 따져도 1촌, 외손은 2촌에 해당하므로 종손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더군다나 한순업이 종조의 유언을 듣고 후계자를 자처하였지만 이를 증빙하는 입안이 없다고 반박하였다. 이 문서에서 영범 등은 한순업이 소송을 일으킨 원인으로 종조의 선주인문권(船主人文券) 때문이라고 말하는 한편, 한순업이 본래 부랑하여 무뢰한에 가깝기 때문에 그의 손에 넘어가면 곧 다른 사람의 물건이 되고 결국 외조부의 제사가 끊길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였다. 또 영범 등은 며칠 전에는 한순업의 종형제와 그의 인척 박경준(朴景俊) 등을 불러 한자리에 모여서 선주인문권을 꺼내준 뒤, 한순업이 삼년 제전(祭奠)을 착실하게 정성을 다한다면 수반되는 공납과 도조 등을 그들이 차지하도록 하며, 또 그들이 올린 소송문서를 일일이 불태운다는 뜻으로 명문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한순업은 선주인 문권을 가져갔음에도 그간의 소송한 문서들을 불태우지 않고 있으니 이들을 잡아다가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흥덕현감은 "그 외가의 끊긴 대를 이어 후사를 세운 것은 인륜의 당연한 것이고 문권과 집물을 다시 돌려 준 것은 진실로 지극히 가상하다. 장축(狀軸)을 주지 않은 한순업과 증인으로 참여한 여러 사람의 소행은 지극히 악행을 거듭하였다. 사실 조사를 다 끝낸 후에 잡아 올 일이다."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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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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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24년 부안군수(扶安郡守) 지령(指令) 고문서-첩관통보류-지령 법제-소송/판결/공증-지령 大正十三年十二月十日 扶安郡守 崔炳郁 大正十三年十二月十日 扶安郡守 崔炳郁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4년 12월에 부안군수가 최병욱에게 면담차 출두를 요청하는 지령. 1924년 12월에 부안군수(扶安郡守)가 최병욱(崔炳郁)에게 사유지 임야생지 벌채허가원에 대하여 면담차 출두를 요청하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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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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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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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23년 윤충구(尹衝求)·이용구(李用求) 연대보증서(連帶保證書) 고문서-증빙류-증서 경제-회계/금융-증서 大正十二年陰正月九日 尹衡求 大正十二年陰正月九日 尹衡求 전라북도 부안군 원형 적색2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3년 음력 정월에 윤형구가 이용구와 함께 작성하여 지주 아무개에게 건네준 연대보증서. 1923년 음력 정월 9일에 윤형구(尹衡求)가 부안군(扶安郡) 행안면(幸安面) 신기리평(新基里坪)의 논 7두락에 있는 소작 논의 세금(稅金)과 소작료(小作料)를 연체할 경우에 연대보증인이 이를 일체 부담하기로 연대보증인과 함께 약속하면서 지주(地主) 아무개에게 건네준 연대보증서이다. 당시 지주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소작인 윤형구(尹衡求), 연대보증인 이용구(李用求)가 함께 참여하여 연대보증서에 날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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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連帯保証書一. 扶安郡幸安面新基里坪畓之七斗落小作權를借得而地稅金과小作料에対야些少라도愆期時連帯保証人이一切負担기로成証홈大正十二年陰正月九日扶安郡幸安面元墨榜里小作人 尹衡求[印]仝郡 仝面 仝里連帯保証人 李用求[印]地主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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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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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산송문서철(山訟文書綴) 2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경제-토목/건축-치부 扶安全州崔氏門中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 전주최씨 산송문서철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산송문서철(山訟文書綴)로 17종의 증거 서류들이 있다. 같은 내용의 문서 2묶음이 합철된 것으로 첫 번째 문서 묶음에는, 회사관(會査官)의 발사(跋辭), 경조관문(京兆關文), 1872년(고종 9) 8월 부안현감 서목(書目), 1873년(고종 10) 2월 4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1873년 부안현감의 첩보(牒報), 1872년 2월 부안현감 서목과 전라관찰사의 제사, 1865년(고종 2)전라관찰사의 완문(完文), 1898년(고종 35) 재판소 판사 이완용(李完用)의 판결서(判決書), 1898년 김주상의 다짐, 1898년 부안현감의 고시(告示), 1910년 농상공부산림국(農商工部山林局)의 석동산(席洞山)에 대한 지적계증명서(地籍屆証明書), 1921년 3월 부안군수(扶安郡守)의 벌채 허가서, 1921년 10월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1923년 부령면장(扶寧面長)의 동일산명증명서(同一山名証明書), 부안김씨세보권지일(扶安金氏世譜卷之一) 등이 순서대로 묶여 있다. 다음 문서 묶음은 위와 동일한 것들이나 1872년 2월 1일 전라관찰사의 관문만 위와 다르다. 순서는, 발사, 1872년 2월 1일 전라관찰사의 관문, 1872년 부안현감의 서목, 경조관문, 1873년 부안현감의 첩보, 1872년 부안현감의 서목, 1865년 전라관찰사의 완문, 1898년 재판소판사 이완용의 판결서, 1898년 김주상의 다짐, 1898년 부안현감의 고시(告示), 1922년 농상공부산림국의 지적계증명서, 1921년 3월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1921년 10월 벌채 허가서, 1923년 부령면장의 동일산명증서(同一山名証書), 부안김씨세보권지일, 1872년 2월 전라관찰사의 관문, 1873년 2월 4일 전라관찰사의 감결이 있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회사관(會査官)의 발사(跋辭) : 최인감(崔仁鑑) 등의 선세(先世) 7총의 광중(壙中)이 파헤쳐져 유골이 드러나고 사토(莎土)가 벗겨져 있으니 누군가 무덤을 파낸 형국이 확실하며, 최씨산의 소나무는 솔밭의 너비와 둘레를 볼 때 1만여 주(株)가 된다는 내용이다. 2. 형조(刑曹)의 관문(關文 : 최씨 산의 소나무를 김씨가 작벌하였다는 내용이 영읍(營邑)의 사안(査案)에 있으니, 소나무 값을 거둬들여 봉류(捧留)하고 보고하라고 하였다. 3. 경조관문(京兆關文) : 김홍제(金弘濟) 등이 위권을 빙자하여 남의 묘소를 파냈으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권을 환수하고 김홍제 등을 처벌할 것과 소나무 값을 받아서 줄 것을 관찰사에게 지시하였다. 4. 1872년(고종 9) 8월 8일 부안현감의 서목(書目) : 김홍제의 소나무 값을 재감(裁減)해 달라고 하였다. 5. 1873년(고종 10) 2월 4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 형조의 관문대로 봉류(捧留)한 소나무값 1만 냥을 조영소(造營所)에 올려보낼 것, 최광권에게 1만 냥을 받았다는 수표를 받아 영진고(營賑庫)에 둘 것, 김홍제에게는 송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侤音)을 받고 풀어 줄 것을 지시하고 첩보하도록 하였다. 6. 1873년 2월 19일 부안현감의 첩보(牒報) : 최씨의 주장 중 김씨측이 1860년에 송사(訟事)를 일으킨 것은 1788년(정조 12)의 위첩(僞牒)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하니 문권을 말소할 때 이것을 포함시켜야 하며, 김홍제가 운현(雲峴)에게 호소할 때에 근거로 삼을 만한 문서를 점련하였다고 하니 이 문권(文券)도 현납(現納)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7. 1872년 2월 20일 부안현감의 서목 : 김홍제를 가두고 문권을 현납(現納)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8. 1865년(고종 2) 전라관찰사의 완문(完文) : 최(崔)・김(金)의 석동산을 둘러싼 산송을 처결하면서 석동산이 최씨 소유임을 확인하여 준 문서이다. 산지와 소나무는 최민(崔民)에게 전속시키고 이른바 소윤묘는 김씨로 하여금 수호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9. 1898년(고종 35) 10월 전라관찰사 겸 재판소판사(裁判所判事) 이완용(李完用)의 판결서 : 두 집안의 산송은 득실(得失)이 반반이다. 식송의 방법은 경계를 정하여 각각 수호(守護)하는 것뿐이니 소송문서들을 모두 소각하라고 하였다. 10. 1898년 10월 5일 김주상(金周相)이 관에 올린 다짐(侤音) : 지금 집에 누락되어 있던 7장을 찾아내 납부하여 불태웠으며 다른 문축은 더 없다고 하였다. 11. 1898년 10월 29일 부안군수(扶安郡守) 고시(告示) : 소나무는 최씨(崔氏)가 기른 것이니 이미 작벌한 것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12. 1923년 2월 4일 지적계증명서(地籍屆証明書) : 최병욱(崔炳郁)의 부안군(扶安郡) 부령면 연곡리 임야에 대해 지적계증명원(地籍屆証明願)에 대해 소유사실을 확인하여 준 것이다. 13. 1921년 3월 5일 부안군수의 벌채(伐採) 허가서(許可書) : 최병욱(崔炳郁) 석동산(席洞山)에서 침엽수 100그루를 벌채하겠다고 신청하자 부안군수가 이를 허가하였다. 14. 1921년 10월 25일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 최병욱(崔炳郁)이 침엽수 1,500속(束)을 벌채하겠다고 신청하자 부안군수가 이를 허가하였다. 15. 1923년 12월 10일 부령면장(扶寧面長)의 동일산명증명서(同一山名証明書) : 최병욱(崔炳郁)의 석동산이 일명 도동산(道洞山)임을 증명해 달라는 신청에 대해 틀림없음을 증명하였다. 16. 1846년(헌종 12)에 발행된 부안김씨세보권지일(扶安金氏世譜卷之一) : 군사공 최광서(崔光敍)의 묘가 석동산에 있고 그 자손들이 옹정촌(瓮井村)에 거주하며 대대로 석동산에 입장(入葬)되었다는 것과 석동산을 저동산(猪洞山) 혹은 도동산(道洞山)으로 불렀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17. 1872년 2월 1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 형조의 관문대로 대원위(大院位)가 '이 산송(山訟)은 위선(爲先)에 있지 않고 오로지 이익을 꾀하는 데에 있으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최씨 산의 소나무를 김씨가 작벌하였다는 내용이 영읍(營邑)의 사안(査案)에 있으니, 소나무 값을 거둬들여 봉류(捧留)하고 보고하라. 다시 혹 이처럼 건송(健訟)하고 산송을 빙자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자는 모두 엄하게 다스리며, 징수하여 속공(屬公)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라.'라고 하였으니 분부대로 거행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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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跋辭爲等如各人等招辭是置有亦蓋此山一訟厥有層節積年擾鬧無異吳楚之爭牒歷世怨嫌不啻越秦之視瘠屢犯 蹕路是非各歸一邊互陳狀辭曲直不待兩招是如乎 先審山形更詳輿論則席洞之山斗起一峰向南之麓列如川字東二麓爲金山西一麓爲崔山累累入葬世世聚骨是乎所今此少尹墓在於崔山之西合谷之下而東邊有崔仁鑑等先世六塚四邊有崔榮權之高祖一塚或掘壙中幾至屍骸或去莎土纔經分寸此則掘塚之形止也松楸段大者如柱小者如椽長養蓊蔚延袤廣濶樵牧之所指點行路之所健羨是去乙拓開墓門斫去山麓此多彼寡雖難準信執端折衷庶可斟量崔狀五六萬云者頗近增価金招七十兩云云者亦涉減竈執此幅圓較彼松田則竝其大小洽爲万餘株是乎乃根之見在者少掘去者多而已掘者爲莎所塡摘奸時猝難執數以若臆料不可質言此則斫松之大槪也斫彼萬株連抱之松已是不良掘此七箇枯骨之塚尤極絶悖竊念七月短宵之時宵非獨辦之事而掘律恐或及已諸金具曰不知中略會査官行郡守 [華押]行>府使 [華押]--京兆關文漢城府爲相考事卽接道內扶安幼學崔俊煥所訴則金弘濟等之誣捏罪惡萬戮猶輕分叱除良七塚私掘而以有主謂無主誣圖關文今欲更屈凶莫凶矣渠墓旣失於高麗之世而做此借葬之說欲奪四百年守護之地拔賣萬餘株連抱之松潛掘二百年年久之塚變莫變矣曲直自歸於絶約是非亦判於緊歇其在按公寧不憤痛裁卽蒙 啓敎之截嚴還推山之還封七塚而今又圖去關文囑囚崔民謀奪謀掘敢藉庚申暗造之券此不知 王章之爲鄭重但知欺瞞之爲得計究厥所爲萬萬驚駭不能的知渠墓之眞贋而構捏謀掘者專爲奪松之計也設令渠祖借葬於四百年之前欲奪於四百年之後以彰其祖之惡抑何道理甚至於天聽文字亦皆誣罔專事圖奪揆以典憲不可揜過玆以發關爲去乎到卽關於該邑日前爲金之關文還收上送是遣金弘濟金用均金文濟依律定罪謀掘之塚嚴飭禁斷前後構誣文券卽推燒火山地及松価不日內一一推給仍成公案俾戢狡獝之惡習卽爲馳報爲當者--扶安縣監書目本縣民金弘濟等所納松価幾許間裁減事處分行下狀同治十一年八月初八日行縣監 鄭松價之定數營亦不可增減是在果大抵以其數不可擬議更加嚴督期於不日收屬後形止馳報向事壬申八月初十日兼使 [華押]--癸酉二月初四日 甘結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幷爲入 鑑是在果大院位敎是 分付內松価捧留錢一萬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送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者兼使 華押--癸酉二月十九日爲牒報事卽得到貴移刑曹關據使甘結內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竝爲入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万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處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使以爲上送之地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者甘結是置有亦本縣民金弘濟崔光權等竝招致謹將甘辭仍各曉諭前後訟牒一一責現於金弘濟處則其所告內今此訟斷始起於去庚申年間而同決訟時文券十二丈其翌辛酉四月日因營甘分界息訟次幷與崔隻文券而上送營門仍爲未推是乎乙遣其後可據文券六七丈昨年間呈籲 雲峴時粘連原狀以上矣未承題敎旋有矣身押付完營之處分蒼黃赴捉之際果未知狀卷之何處下落而目今矣身處留在之卷只是庚申決訟時山地立案一卷辛酉刑配時卞誣與松価寃懲呼訴等狀二十六丈故玆以現納而更無餘存是如爲乎旀崔光權所告內金弘濟等之庚申起訟實因於康熙年間僞牒留在之故而哲廟朝判決嚴明之有刑配之典猶不知戢出沒京鄕惹起鬧端矣今番京營關敎深軫後弊前後文券現納使之爻周然後可杜後弊是如爲有置蓋此前後訟券之爻周寔出於杜後弊之處分則自邑擧行有不容疏忽是如乎金弘濟所納之券雖爲數十餘張而崔民所供之中旣以緊藏歇現爲告故果爲訴考金券則初無立落緊切之案只有營邑尋常之狀以若積年互相勝負之訟豈無得失可據之蹟哉緊藏歇現果如崔說分叱除良崔說中金民等之庚申起訟實緣康熙戊申僞牒留在云者於此可驗而其所日後更鬧之計不見是圖今若任他匿券不入於爻周則恐難免不審之責故前後訟牒嚴加申飭使之逐一現納則惟彼弘濟只懷落科之憾瞀不畏法自同几肉屢度責現一直拒納雖以雲峴呈籲時可據文券粘連遺落之說觀之計出粧撰極涉痛惋而文券捧侤反致葛藤其在奉分付擧行之道事甚憂悶乙仍于同金弘濟嚴囚緣由槪報使敎是別般嚴飭現納文券事處分爲只爲巡營官 華押--부안현감書目本縣民金弘濟嚴囚現納文券事緣由狀同治十一年二月二十日行縣監 鄭所謂文券隨所納一一爻周亦捧侤音則設或有如干藏置之文券焉敢更起卽速擧行向事癸酉二月卄三日兼使 [華押]--營門完文 乙丑十二月右完文事段扶安士人崔鳳煥十三世以下繼葬數百墓之地在於本縣席洞山西一麓無弊守護爲四百餘年而昭載於金譜及邑案矣粵在百餘年前縣人金達壽等以崔山局內自古諺傳一大竹墳謂渠遠祖少尹失傳之墓而始自尋護此雖未能的知其墓之眞贋而渠旣稱渠祖之墓則祗守其墓於理當然不意去庚申年冬達壽之後孫金邦濟弘濟等敢生壑慾暗圖京兆關文欺瞞營邑而發賣松楸奪燒文蹟酷刑四人兼奪山地潛掘年久七塚則崔民兩次鳴金至蒙截嚴之判敎被掘之塚還封築山地松楸始得還推 啓下一律罪人金邦濟止爲久囚弘濟等皆爲定配而見斫松楸枯(姑)未推価囚竄諸金族卽蒙放可謂於渠則幸矣而至於崔民被掘之寃尙未快伸況此四百年禁護之地及屢萬株連抱之松一朝見失於讎人之乎其所血寃容有極乎凶彼弘濟等素以蔑法流甚至於天聽文字亦皆誣罔以私掘七塚一曰崔塚六曰古塚云究厥所爲死有餘罪而不遵 啓敎之嚴重不有營邑之査決藉渠吏族之權恃渠賄囑之勢而以啓下還封之塚謂之以私封更欲謀掘以啓下還推之地稱之以渠山而渠亦有完文云此是前前官見欺暗造者也且其後以爲道査至於上徹始爲歸正則此文將焉用之乎每率無賴更斫餘木甚至於旌閭前各種屢百年古木近又亂斫謀毁旌閭墓幕內懷都占之計外做定界之言果欲定界則所謂少尹墓前後左右皆是崔塚則何以定界乎强欲定界則此亦法外之悖類抑亦化外之亂氓大抵累百年守護之地忽於一朝圖奪凶習旣至此極而亦將越視則民何保其先塋國安用乎定法蔽一言旣有啓敎之鄭重且有營邑之斷案則山地松楸專屬崔民所謂少尹墓則使金守護事合穩當矣自今以往山地松楸永屬崔民雖一片土一箇木莫非崔民之有則金民更不得犯着之意成給完文日後諸金中不悛前習若更起鬧則非徒荷杖且係不法以此文永久遵行宜當事--判決書扶安金周相崔斗榮兩家先壟俱在於席洞山而積年爭訟曲直之際得失相半京營之間斷案各有矣今又崔佾榮告訴于高等裁判所有承合場質査之指令而(兩)隻幷招致府庭屢回對質參考狀軸則崔塚之督掘理所不當松価之責還尤非可論惟其息訟之方只在定界而各守故(護)使於今番巡邑之行歷過是郡招待兩隻于山處仍與郡守同往躬審形便劃定界限後兩隻處捧侤音永爲妥帖而兩家前後訟軸一切燒却是遣今此判決書五件成出一本粘付報告于高等裁判所二本分置府郡二本分給兩家是如乎准此憑後事扶安郡席洞山金崔兩塚分界限標自金少尹墓至崔榮權墓爲四十四步四尺內半分二十二步二尺式定界自金少尹墓西至田頭爲七十八步三尺九寸內半分三十九步一尺九寸式定界自金崔塚半分處西至二十五步三尺六寸定界處上至上小路三十七步三尺定界自金少尹墓左東至八步三尺五寸自上北小路下直至南畓頭定界金崔兩家總代員幼學崔斗榮年四十八白幼學崔鴻坰年五十一白幼學崔仁灃年四十二白幼學金周相年六十二白幼學金東容年五十五白幼學金洛瑾年五十七白白等矣等兩家先壟今旣定界準此施行無相起閙是遣前後兩邊訟軸一切燒火而兩隻文蹟中設有漏落者此是燼餘之物不足憑以此納侤事光武二年十月日裁判所判事 李完用(印)山在官郡守 兪鎭哲(印)主事 郭昌根(印)--戊戌十月初五日幼學金周相年六十二白等矣等兩家先壟旣觀察使道親審定界而兩隻文軸亦於當場燒却然兩隻間慮有遺漏文軸互相爲言而矣家遺落七張今又覓納付丙則以更無他軸之意納侤以此憑後敎事官(印) 白啣--告示 崔門中金崔兩家山地分界各捧手本報告于觀察府回題內松是崔民之養已爲斫伐出給後更報敎是故以此意已爲告示於金門中是在果松楸段令到卽時使之斫伐以去形止馳報以爲轉報之地事再令到形止卽爲馳報次戊戌十月二十九日官(印)--地籍屆証明願地籍屆人住所氏名扶安郡保安面牛東里崔炳郁不動産ノ表示扶安郡扶安面蓮谷里(席洞山)一.林野拾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右林野ニ対スル地籍屆ナシタルコトヲ御証明相成度此段奉願候也大正拾一年貳月四日右崔炳郁扶安郡守 殿前記之通相違無之事証明ス大正拾壹年貳月四日扶安郡守(印)提出ᄒᆞᆫ地籍報告三度ᄂᆞᆫ本日에接受事隆熙四年六月九日農商工部山林局(印)--扶庶第六四八号出願者 崔炳郁大正拾年二月二十五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左와如히ノ通リ許可ス大正拾年三月五日扶安郡守 印記一.林野/所在 扶安扶寧面蓮谷里席洞山麓一.面積 元十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內二町-反-畝-步一.樹種別 針葉樹一.伐採採取數量 一○本一.伐採採取其間 三月十六日迠下略--扶庶第二.八九一号出願者 崔炳郁大正拾年十月十一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左와如히ノ通リ許可ス大正拾年十月卄五日扶安郡守記一.林野/所在 扶安郡扶寧面蓮谷里西麓一.面積 七町-反-畝-步一.樹種別 針葉樹一.伐採採取 數量 壹千五百束一.伐採採取 其間 十一月五日迠下略--同一山名証明願右ハ扶安郡扶寧面蓮谷里區內ニ本人ノ先墓所在スル席洞山名/在來一名道洞山名相違ナキコトヲ証明相成度相願候也大正拾貳年拾壹月拾日扶安郡保安面牛東里五八四番地願人 崔炳郁扶寧面長殿右願ノ通リ相違ナキコトヲ証明ス右ハ扶安郡扶寧面蓮谷里區內ニ本人ノ先墓所在スル席洞山名ハ在來一名道洞山名相違ナキコトヲ証明相成度相願候也大正拾二年拾一月拾日扶安郡保安面牛東里五八四番地願人 崔炳郁扶寧面長 殿大正拾貳年拾壹月拾日全羅北道扶安郡扶寧面長辛聲錫(印)謄寫扶安郡輿地勝覽輿地勝覽第二張第三十九行道洞山在縣南五里許或云猪洞或云席洞蓋猪與席俗音與道相近故錯稱焉山有三壟金崔宋族山崇禎紀元後再己卯五月下澣修正--扶安金氏世譜卷之一(崇禎四丙午暮春刊印)中略光敍[奉正大夫知告[古]阜郡事配淑人開城王氏父高麗宗室昌寧君洞外祖元世祖墓合在席洞山中麓中腦下之中癸坐有表石麗朝亡我朝興公自古阜大歸貫鄕之扶寧卜居縣南五里許瓮井村占兆于村西席洞山川宇局自此以後子孫世世居住於瓮井村世世入葬於席洞山云席洞山或云猪洞山或云道洞山主有兩峙曰望氣峯前有一池曰建善堤左有回顧曰傘頭峙右有環夬曰幸安山中有長谷曰賢孫谷谷有齋室曰德星庵庵之名蓋取林億齡詩金家聚德星之意也川字局西一麓爲崔生明子孫之族山東二麓爲郡事公子孫之世葬松楸蔚蒼碑碣葱立四百餘年守護中略] 子璫[中略] 子悔愼[中略] 子銑[中略]--跋辭爲等如各人等招辭是置有亦蓋此山一訟厥有層節積年擾鬧無異吳楚之爭牒歷世怨嫌不啻越秦之視瘠屢犯 蹕路是非各歸一邊互陳狀辭曲直不待兩招是如乎 先審山形更詳輿論則席洞之山斗起一峰向南之麓列如川字東二麓爲金山西一麓爲崔山累累入葬世世聚骨是乎所今此少尹墓在於崔山之西合谷之下而東邊有崔仁鑑等先世六塚四邊有崔榮權之高祖一塚或掘壙中幾至屍骸或去莎土纔經分寸此則掘塚之形止也松楸段大者如柱小者如椽長養蓊蔚延袤廣濶樵牧之所指點行路之所健羨是去乙拓開墓門斫去山麓此多彼寡雖難準信執端折衷庶可斟量崔狀五六萬云者頗近增価金招七十兩云云者亦涉減竈執此幅圓較彼松田則竝其大小洽爲万餘株是乎乃根之見在者少掘去者多而已掘者爲莎所塡摘奸時猝難執數以若臆料不可質言此則斫松之大槪也斫彼萬株連抱之松已是不良掘此七箇枯骨之塚尤極絶悖竊念七月短宵之時宵非獨辦之事而掘律恐或及已諸金具曰不知 中略會査官行郡守 [華押]行府使 [華押]--同治十一年二月初一日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道內扶安縣崔光權金邦濟等山訟査案入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山訟者爲先血爭之事而今此山訟心不在於爲先計專在於牟利倫理之斁絶俗習之駭悖莫此爲甚分叱除良崔松金斫營邑之査案自在是去乙敢以松価不報之計藉以金山還掘之說者究厥心腸尤極狡惡松価刻期督捧捧留報來以待處分是遣復或以此等事健訟爲習憑藉山訟計在財利者一倂嚴繩懲捧屬公之意著爲定式事奉 分付玆以發關爲去乎到卽時星火擧行爲旀先從松価數爻而枚擧回移以爲入 鑑受處分之地宜當向事照驗施行須至 關者右關全羅道觀察使關 [華押]--부안현감書目本縣民金弘濟等所納松価幾許間裁減事處分行下狀同治十一年八月初八日行縣監 鄭松價之定數營亦不可增減是在果大抵以其數不可擬議更加嚴督期於不日收屬後形止馳報向事壬申八月初十日兼使 [華押]--京兆關文漢城府爲相考事卽接道內扶安幼學崔俊煥所訴則金弘濟等之誣捏罪惡萬戮猶輕分叱除良七塚私掘移以有主謂無主誣圖關文今欲更屈凶莫矣渠墓旣失於高麗之世而做此借葬之說欲奪四百年守護之地發賣萬餘株連抱之松潛掘二百年年久之塚變莫變矣曲直自歸於强弱是非亦判於緊歇其在按公寧不憤痛裁卽蒙 啓敎之截嚴還推山地還封七塚而今又圖去關文囑囚崔民謀奪謀掘敢藉庚申暗造之券此不知 王章之爲鄭重但知欺瞞之爲得計究厥所爲萬萬驚駭不能的知渠墓之眞贋而構捏謀掘者專爲奪松之計也設令渠祖借葬於四百年之前欲奪於四百年之後以彰其祖之惡抑何道理甚至於天聽文字亦皆誣罔專事圖奪揆以典憲不可揜過玆以發關爲去乎到卽嚴關於該邑日前爲金之關文還收上送是遣金弘濟金用均金文濟依律定罪謀掘之塚嚴飭禁斷前後構誣文券卽推燒火山地及松価不日內一一推給仍成公案俾戢狡獝之惡習卽爲馳報爲當者--癸酉二月十九日爲牒報事卽到貴移刑曹關據使甘結內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竝爲入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万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處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使以爲上送之地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者甘結是置有亦本縣民金弘濟崔光權等竝招致謹將甘辭仍各曉諭前後訟牒一一責現於金弘濟處則其所告內今此訟端始起於去庚申年間而同決訟時文券十二丈其翌辛酉四月日因營甘分界息訟次幷與崔隻文券而上送營門仍爲未推是乎乙遣其後可據文券六七丈昨年間呈籲 雲峴時粘連原狀以上矣未承題敎旋有矣身押付完營之處分蒼黃赴捉之際果未知狀卷之何處下落而目今矣身處留在之卷只是庚申決訟時山地立案一卷辛酉刑配時卞誣與松価寃懲呼訴等狀二十六丈故玆以現納而更無餘存是如爲乎旀崔光權所告內金弘濟等之庚申起訟實因於康熙年間僞牒留在之故而哲廟朝判決嚴明之有刑配之典猶不知戢出沒京鄕惹起鬧端矣今番京營關敎深軫後弊前後文券現納使之爻周然後可杜後弊是如爲有置蓋此前後訟券之爻周寔出於杜後弊之處分則自邑擧行有不容疏忽是如乎金弘濟所納之券雖爲數十餘張而崔民所供之中旣以緊藏歇現爲告故果爲訴考金券則初無立落緊切之案只有營邑尋常之狀以若積年互相勝負之訟豈無得失可據之蹟哉緊藏歇現果如崔說分叱除良崔說中金民等之庚申起訟實緣康熙戊申僞牒留在云者於此可驗而其所日後更鬧之計不見是圖今若任他匿券不入於爻周則恐難免不審之責故前後訟牒嚴加申飭使之逐一現納則惟彼弘濟只懷落科之憾瞀不畏法自同几肉屢度責現一直拒納雖以雲峴呈籲時可據文券粘連遺落之說觀之計出粧撰極涉痛惋而文券捧侤反致葛藤其在奉分付擧行之道事甚憂悶乙仍于同金弘濟嚴囚緣由槪報使敎是別般嚴飭現納文券事處分爲只爲巡營官 [華押]--부안현감書目本縣民金弘濟嚴囚現納文券事緣由狀同治十一年二月二十日行縣監 鄭所謂文券隨所納一一爻周亦捧侤音則設或有如干藏置之文券焉敢更起卽速擧行向事癸酉二月卄三日兼使 [華押]--營門完文 乙丑十二月右完文事段扶安士人崔鳳煥十三世以下繼葬數百墓之地在於本縣席洞山西一麓無弊守護爲四百餘年而昭載於金譜及邑案矣粵在百餘年前縣人金達壽等以崔山局內自古諺傳一大竹墳謂渠遠祖少尹失傳之墓而始自尋護此雖未能的知其墓之眞贋而渠旣稱渠祖之墓則祗守其墓於理當然不意去庚申年冬達壽之後孫金邦濟弘濟等敢生壑慾暗圖京兆關文欺瞞營邑而發賣松楸奪燒文蹟酷刑四人兼奪山地潛掘年久七塚則崔民兩次鳴金至蒙截嚴之判敎被掘之塚還封築山地松楸始得還推 啓下一律罪人金邦濟止爲久囚弘濟等皆爲定配而見斫松楸姑未推価囚竄諸金族卽蒙放可謂於渠則幸矣而至於崔民被掘之寃尙未快伸況此四百年禁護之地及屢萬株連抱之松一朝見失於讎人之手其所血寃容有極乎凶彼弘濟等素以蔑法流甚至於天聽文字亦皆誣罔以私掘七塚一曰崔塚六曰古塚云究厥所爲死有餘罪而不遵 啓敎之嚴重不有營邑之査決藉渠吏族之權恃渠賄囑之勢而以啓下還封之塚謂之以私封更欲謀掘以啓下還推之地稱之以渠山而渠亦有完文云此是前前官見欺暗造者也且其後以爲道査至於上徹始爲歸正則此文將焉用之乎每率無賴更斫餘木甚至於旌閭前各種屢百年古木近又亂斫謀毁旌閭墓幕內懷都占之計外做定界之言果欲定界則所謂少尹墓前後左右皆是崔塚則何以定界乎强欲定界則此亦法外之悖類抑亦化外之亂氓大抵累百年守護之地忽於一朝圖奪凶習旣至此極而亦將越視則民何保其先塋國安用乎定法蔽一言旣有啓敎之鄭重且有營邑之斷案則山地松楸專屬崔民所謂少尹墓則使金守護事合穩當矣自今以往山地松楸永屬崔民雖一片土一箇木莫非崔民之有則金民更不得犯着之意成給完文日後諸金中不悛前習若更起鬧則非徒荷杖且係不法以此文永久遵行宜當事--判決書扶安金周相崔斗榮兩家先壟俱在於席洞山而積年爭訟曲直之際得失相反京營之間斷案各有矣今又崔佾榮告訴于高等裁判所有承合場質査之指令而兩隻竝招致府庭屢回對質參考狀軸則崔塚之督掘理所不當松価之責還尤非可論惟其息訟之方只在定界而各守故使於今番巡邑之行歷過是郡招待兩隻于山處仍與郡守同往躬審形便劃定界限後兩隻處捧侤音永爲妥帖而兩家前後訟軸一切燒却是遣今此判決書五件成出一本粘付報告于高等裁判所二本分置府郡二本分給兩家是如乎准此憑後事扶安郡席洞山金崔兩塚分界限標自金少尹墓地崔榮權墓爲四十四步四尺內半分二十二步二尺式定界自金少尹墓西至田頭爲七十八步三尺九寸內半分三十九步一尺九寸式定界自金崔塚半分處西至二十五步三尺六寸定界處上至上小路三十七步三尺定界自金少尹墓左東至八步三尺五寸自上北小路下直至南畓頭定界金崔兩家總代員幼學崔斗榮年四十八白啣幼學崔鴻坰年五十一白啣幼學崔仁灃年四十二白啣幼學金周相年六十二白啣幼學金東容年五十五白啣幼學金洛瑾年五十七白啣白等矣等兩家先壟今旣定界準此施行無相起鬧是遣前後兩邊訟軸一切燒火而兩隻文蹟中設或有漏落者此是燼餘之物不足爲憑以此納侤敎事光武二年十月日裁判所判事李完用(印)山在官郡守 兪鎭哲(印)主事 郭昌根(印)--戊戌十月初五日幼學金周相年六十二白等矣等兩家先壟旣承觀察使道親審定界而兩隻文軸亦於當場燒却然兩隻間慮有遺漏文軸互相爲言而矣家遺落七張今又覓納付丙則以更無他軸之意納侤以此憑後敎事官(印) 白啣--告示 崔門中金崔兩家山地分界各捧手本報告于觀察府回題內松是崔民之養已爲斫伐出給後更報敎是故以此意已爲告示於金門中是在果松楸段令到卽時使之斫伐以去形止馳報以爲轉報之地事再令到形止卽爲馳報次戊戌十月二十九日官(印)--地籍屆証明願地籍屆人住所氏名扶安郡保安面牛東里崔炳郁不動産ノ表示扶安郡扶安面蓮谷里 (席洞山)一.林野拾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右林野ニ對スル地籍屆ナシタルコトヲ証明相成度此段奉願候也大正拾一年貳月四日右 崔炳郁扶安郡守殿前記之通相違無之事證明ス大正拾壹年貳月四日扶安郡守(印)提出ᄒᆞᆫ地籍報告三度ᄂᆞᆫ本日에接受事隆熙四年六月九日農商工部山林局[印]--扶庶第六四八号出願者崔炳郁大正拾年二月二十五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左와如히ノ通リ許可ス大正拾年三月五日扶安郡守(印)記一.林野/所在 扶安扶寧面蓮谷里席洞山麓一.面積 元十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內二町-反-畝-步一.樹種別 針葉樹一.伐採採取數量 一○本一.伐採採取期間 三月十六日迠下略--扶庶第二.八九一号出願者 崔炳郁大正拾年二月二十五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左와如히通リ許可ス大正拾年十月二五日扶安郡守(印)記一.林野/所在 扶安郡扶寧面蓮谷里西麓一.面積 七町-反-畝-步一.樹種別 針葉樹一.伐採採取 數量 壹千五百束一.伐採採取 其間 十一月五日迠下略--同一山名証明願右扶安郡扶寧面蓮谷里區內ニ本人ノ先墓所在スル席洞山名ハ在來一名道洞山名相違ナキコトヲ証明相成度相願候也大正拾二年拾一月拾日扶安郡保安面牛東里五八四番地願人 崔炳郁扶寧面長殿右願ノ通リ相違ナキコトヲ証明ス大正十二年十二月十日全羅北道扶安郡扶寧面長辛聲錫謄寫扶安郡輿地勝覽輿地勝覽第二張第三十九行道洞山在縣南五里許或云猪洞或云席洞蓋猪與席俗音與道相近故錯稱焉山有三壟金崔宋族山崇禎紀元後再己卯五月下澣修正--扶安金氏世譜卷之一(崇禎四丙午暮春刊印)中略光敍奉正大夫知古阜郡事配淑人開城王氏父高麗宗室昌寧君洞外祖元世祖墓合在席洞山中麓中腦下之中癸坐有表石麗朝亡我朝興公自古阜大歸貫鄕之扶寧卜居縣南五里許瓮井村占兆于村西席洞山川宇局自此以後子孫世世居住於瓮井村世世入葬於席洞山△席洞山或云猪洞山或云道洞山主有兩峙曰望氣峯前有一池曰建善堤左有回顧曰傘頭峙右有環夬曰幸安山中有長谷曰賢孫谷谷有齋室曰德星庵庵之名蓋取林億齡詩金家聚德星之意也川字局西一麓爲崔生明子孫之族山東二麓爲郡事公子孫之世葬松楸蔚蒼碑碣葱立四百餘年守護[中略]子璫[中略]子悔愼[中略]子銑[中略]--同治十一年二月初一日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道內扶安縣崔光權金邦濟等山訟査案入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山訟者爲先血爭之事而今此山訟心不在於爲先計專在於牟利倫理之斁絶俗習之駭悖莫此爲甚分叱除良崔松金斫營邑之査案自在是去乙敢以松価不報之計藉以金山還掘之說者究厥心腸尤極狡惡松価刻期督捧捧留報來以待處分是遣復或以此等事健訟爲習憑藉山訟計在財利者一倂嚴繩懲捧屬公之意著爲定式事奉 分付玆以發關爲去乎到卽時星火擧行爲旀先從松価數爻而枚擧回移以爲入 鑑受處分之地宜當向事照驗施行須至 關者右關全羅道觀察使關 [華押]--癸酉二月初四日 甘結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幷爲入 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萬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送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者兼使 [華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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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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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모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명단(名單)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崔氏門中 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작성된 부안 전주최씨 명단. 모년에 작성된 부안 전주최씨의 명단이다. 성명과 주소가 적혀 있으며, 도장을 찍은 사람도 있다. 이름 중에 최기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920, 30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연유로 작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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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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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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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안복동(安福童)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四二八四年11月4日 扶安郡扶安邑收入員 申泳篤 安福童 四二八四年11月4日 申泳篤 安福童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1년에 부안군 부안읍에서 안복동에게 발급한 영수증. 1951년에 부안군 부안읍에서 호별세와 부가세 등을 받고 안복동에게 발급한 영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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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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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38년 전주최씨전직공파종중(全州崔氏殿直公派宗中) 매도증서(賣渡證書) 고문서-증빙류-증서 경제-회계/금융-증서 昭和拾四年貳月貳日 李貞燮 등 7명 全州崔氏殿直公派宗中 昭和拾四年貳月貳日 李貞燮 全州崔氏殿直公派宗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38년 이정섭 등 7인이 전주최씨 전직공파종중과 체결한 부동산 계약서. 1938년 12월 1일에 이정섭(李貞燮) 7인이 부안군 부령면 연곡리 일대의 임야 3필지를 전주최씨 전직공파종중(전주최씨전직공파종중(全州崔氏殿直公派宗中)과 매도하면서 체결한 부동산 계약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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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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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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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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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50년 최재홍(崔在洪)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寅二月二十三日 在洪 庚寅二月二十三日 崔在洪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0년에 최재홍이 보낸 서간 1950년 2월 23일에 족제(族弟) 최재홍(崔在洪)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편지를 받고 위로되었다며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치통(齒痛)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였다. 상대방의 말은 잘 이해하였지만 즉시 찾아가지 못하고 다만 보단금(譜單金) 만원을 올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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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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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承慰承慰伏審比日靜中氣候萬安區區不任仰慰族弟以齒痛見苦以是爲悶爲悶耳就悚敎意謹悉而事勢爲右歟未卽進拜而只以譜單金中萬圓仰呈以此考領焉餘不日伏拜不備謝候上庚寅二月二十三日族弟在洪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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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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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51년 신동근(申東根) 납입고지서(納入告知書) 고문서-증빙류-납증서 경제-세금-납증서 四二八四年十月十日 大韓軍事援護會 扶安邑分會長 辛泳東 申東根 四二八四年十月十日 辛泳東 申東根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1년에 대한군사원호회 부안읍분회장이 신동군에게 대한군사원호회비를 납부하라면서 발급한 고지서. 1951년에 대한군사원호회 부안읍분회장(大韓軍事援護會 扶安邑分會長)이 신동근(申東根)에게 대한군사원호회비를 납부하라면서 발급한 고지서이다. 문서의 왼쪽에 신동근이 1천원을 납부한 영수증이 고지서와 함께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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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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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을축년 석동재(席洞齋) 하기(下記)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경제-회계/금융-용하기 乙丑三月 日 席洞齋 乙丑三月 日 席洞齋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을축년에 석동재에서 지출한 내역을 기록한 장부. 을축년(乙丑年) 3월에 석동재(席洞齋)에서 지출한 내역을 기록한 하기(下記)이다. 문장(門長)과 도유사(都有司)와 유사(有司)의 지출내역과, 사성공파, 판관공파, 처사공파 등 각파의 지출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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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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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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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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