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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관련 인회회순(寅會會順)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 전주최씨문중의 회의 순서.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문중에서 열린 회의록의 회순(會順)이다. 구체적인 작성연대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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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三月 日壇閣修理日記一金貳萬四千九百四拾五圓也 花樹稧金流入一金參百貳拾圓也 享需費殘額流入一金壹万四千參百參拾六圓也 銀杏価入一金七百円也 仝計四萬參百壹円也一金參百五拾圓也 位畓申請用錢七件代一金五百九拾圓也 鐵釘斤代一金四千貳百圓也 昨年得債分竝本利償還⌉一金七百円也 寒碧樓人夫賃一金貳千円也又二百円也 遮日品麻布代一金壹千七百六円也 宗垈地稅一金壹千円也 玉流洞宗土不服申立費⌋銀杏価中支出一金壹万千五百兩也 松板五坪代一金七千円也 木手一金壹千円也 木手 十六日一金七百円也 鐵丁一金參千九百円也 木手賃金中二十日下一金七百円也 鐵丁 二十日一金四千円也 二十五日木手賃金下一金三拾円也 唐黃代一金貳仟三百五十圓也 淸酒五升代二十七日一金壹百円 位土申請費一金六百円 淸酒一升代一金二千八百円 人夫賃一金二千三百円 土手工代一金二千一百円 人夫代一金四仟貳百円 人夫代一金七百円 人夫代一金壹萬二仟円 瓦手工代白灰二叺代 貳仟五百円計六萬九千二百二十六円也南原車費五百円也四月七日計收入四萬0參百壹円也支出六萬九千七百二十六円也加入貳萬九仟四百貳拾五円也--庚戌三月二十六日品記三月二十六日 柳宗玉 崔洛準 柳在成二十七日 崔洛準 柳宗玉二十八日 崔洛準 柳宗玉二十九日 崔洛準 柳宗玉 四月一日貳千八百円去--通文右通諭事文成公祭閣滲漏有載幾至於頹敗者諸宗族旣可目參詳知耳自數年前矣私修理爲計而但伐採許可不可容易得之故迨今遲延而閣之毁敗尤甚前年又物価卒騰以昨冬賣松代金三十万円算之則不過半費是爲可歎耳方今修理業已半程賃金物代不能隨後似幾乎中途而止之故都有司及諸有司相會結議各門中左記派錢配當之願爲諸宗族記念其先閣而配金竭力辦送千万仰望耳年月日都有司外等人白--左記大護軍公派 七万円中郞將公派 十四万円--木手品記 二分每日二千七百圓式計九日姜香來三十日崔殷洪一 買板去姜香來三十一日 姜香來三十二日崔殷洪三姜香來三十三日 崔殷洪 鉅板去午△秉春夕飮 姜香來三十四日崔殷洪三 姜香來三十五日 崔殷洪一 姜香來三十六日姜香來半日三十七日崔殷洪三 姜香來三十八日 崔殷洪三 姜香來三十九日 崔殷洪秉春午夕 二十日朝姜香來三二十日 崔郞一 姜郞一計五十九床代米三斗九升三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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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일기(日記) 고문서-치부기록류-일기 정치/행정-조직/운영-일기 丁巳十一月日 丁巳十一月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정사년 11월에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한 지출일기. 정사년(丁巳年) 11월에 부안(扶安)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한 일기(日記)이다. 1,580냥을 지출한 내역이 기재되어 있다. 석제유사(石堤有司), 백석유사(白石有司)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비역(碑役)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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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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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66년 최문홍(崔文洪) 상서(上書)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丙寅正月 初八日 文洪 族丈 丙寅正月 初八日 1866 崔文洪 族丈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66년(고종 3) 정월에 부안에 사는 최문홍이 문중의 족장들에게 보내기 위하여 작성한 상서의 초안. 1866년(고종 3) 정월에 부안(扶安)에 사는 최문홍(崔文洪)이 문중의 족장(族丈)들에게 보내기 위하여 작성한 상서의 초안이다. 오산(梧山) 최봉환(崔鳳煥, 1825-1892)의 서자(庶子)였던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부친의 혈육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부친의 양자로 입적한 학홍(學洪)을 파양(罷養)하는 한편, 자신을 양자로 잇게 하여 이를 증빙하는 문서를 발급하여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는 특히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양자조(養子條)를 예로 들면서 처첩(妻妾)에게 자식이 없으면 서자를 양자로 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신재(愼齋) 김집(金集), 그리고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같은 선현(先賢)들도 서자를 후사로 삼았다고 주장하였다. 최문홍은 또한, 지금 양자로 학홍을 입적한 것은 부상(父喪) 중에 임금의 명이 없이 일어난 일로 예법(禮法)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특히 아비를 빼앗고 그 정(情)을 빼앗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말을 인용하여 후사를 세우는 자는 반드시 관에 이 사실을 고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도 양자의 청원을 허가하는 예조(禮曹)의 증명서 예사(禮斜)가 없으면 양자가 아니라고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같은 상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최문홍은 최학홍의 양자 입적이 아직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법전과 선례를 인용하여 서자인 자신을 부친의 후사로 만들기 위하여 절치부심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고 있는 전주최씨족보를 보면 최봉환의 조카인 최학홍이 양자로 입적된 것으로 나온다. 자신의 아버지의 양자로 가기 위한 최문홍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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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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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이정섭(李貞燮) 등 7명 등기신청서(登記申請書) 고문서-소차계장류-신청서 정치/행정-보고-신청서 昭和拾四年壹月貳拾參日 李貞燮 등 7명 全州地方法院扶安出張所 昭和拾四年壹月貳拾參日 李貞燮 全州地方法院扶安出張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39년에 이정섭 등 7명이 전주지방법원 부안출장소에 제출한 등기신청서. 1939년에 이정섭(李貞燮) 등 7명이 부안군 부령면 연곡리 산31번지의 임야 소유권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주지방법원 부안출장소에 제출한 등기신청서이다. 이 문서는 법원에서 등기를 한 뒤에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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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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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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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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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최기홍(崔基洪) 지적계증명원(地籍屆證明願) 고문서-증빙류-증서 경제-회계/금융-증서 昭和拾年壹月參拾日 崔基洪 扶安郡守 昭和拾年壹月參拾日 崔基洪 扶安郡守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35년 2월에 최기홍이 부안군에 제출한 지적계증명원. 1935년에 최기홍(崔基洪)이 작성하여 부안군에 제출한 지적계증명원(地籍屆證明願)이다. 여기에 부안군에서 최기홍 소유의 부동산이 지적과 상위 없음을 증명하는 증명서가 첨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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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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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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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최창수(崔昌洙) 등 입의(立議) 고문서-증빙류-입의 사회-조직/운영-입의 戊戌二月初吉日 門長 崔昌洙 등 戊戌二月初吉日 崔昌洙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98년 최창수가 입의한 사항을 정리한 문서 1898년(광무 2) 2월 초, 최창수(崔昌洙) 등 27명이 함께 모여 입의(立議)한 내용을 정리한 문서이다. 옹암공파(甕菴公派) 종원들의 화목을 다지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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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산송문서철(山訟文書綴) 1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경제-토목/건축-치부 扶安全州崔氏門中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 전주최씨 산송문서철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산송문서철(山訟文書綴)로 16가지의 증거 서류들이 있다. 증거 서류의 번호는 1~17까지이나 13번 서류는 결락이 되어있다. 증1. 회사관(會査官)의 발사(跋辭)이다. 발사는 조사관의 의견서이다. 그 내용은, "석동산(席洞山)에 대한 송사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석동산의 산형(山形)을 살펴보면 산이 천(川) 자(字) 모양인데 동쪽 두 기슭은 김씨 산이고 서쪽 한 기슭은 최씨 산으로 각자 누대 장사를 지내고 있다. 김소윤묘(金少尹墓)는 최산(崔山)의 서쪽 골짜기 아래에 있는데, 최인감(崔仁鑑) 등의 선세(先世) 7총이 광중(壙中)이 파헤쳐져 거의 유골이 드러나고 사토(莎土)가 벗겨져 있으니 누군가 무덤을 파낸 형국이 확실하다. 김씨측에서 작벌한 최씨산의 소나무 값에 대해 최씨의 소장에는 5, 6만 냥, 김씨의 소장에는 70냥이라고 한다. 솔밭의 너비와 둘레를 볼 때 1만여 주(株)가 된다. 아름드리 소나무 1만 여주를 작벌한 것은 양심불량이고 7총을 파낸 것은 매우 패악스럽다."라고 조사 사실을 보고하였다. 증2. 1872년(고종 9) 2월 1일에 형조(刑曹)에서 관찰사에게 보낸 관문(關文)이다. '부안현(扶安縣)에 사는 최광권(崔光權)과 김방제(金邦濟) 등의 산송(山訟)에 관한 사안(査案)을 살펴보았다. 대원위(大院位)가 "산송(山訟)은 선조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싸우는 일인데, 이번 산송(山訟)은 위선(爲先)에 있지 않고 오로지 이익을 꾀하는 데에 있으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최씨 산의 소나무를 김씨가 작벌하였다는 내용이 영읍(營邑)의 사안(査案)에 있으니, 소나무 값을 거둬들여 봉류(捧留)하고 보고하라. 다시 혹 이처럼 건송(健訟)하고 산송을 빙자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자는 모두 엄하게 다스리며, 징수하여 속공(屬公)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라."라고 분부하였다. 그래서 관문을 발송하는 것이니 즉시 거행하라.'는 내용이다. 증3. 경조관문(京兆)관문(關文)이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전라관찰사에게 보낸 관문으로, 부안 유학 최준환(崔俊煥)의 소장을 살펴보고 처결한 내용이다. 최준환(崔俊煥)은 김홍제(金弘濟) 등이 7개의 최씨 무덤을 파내고 1만여 그루의 소나무를 발매(拔賣)한 일로 정소하였다. 한성부에서는 김홍제 등이 1860년 그들 편을 들어준 문권을 빙자하여 남의 묘소를 파냈으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권을 환수하여 올려보내고, 김홍제(金弘濟), 김용균(金用均), 김문제(金文濟)는 죄를 주며, 산지(山地)와 소나무값은 빠른 시일 안에 일일이 추급(推給)하여 공안(公案)을 만들라고 하였다. 증4. 1872년(고종 9) 8월 8일 부안현감 정우현(鄭友鉉)의 서목(書目)과 8월 10일 전라관찰사의 제사(題辭)이다. 김홍제의 소나무 값을 재감(裁減)해 달라는 부안현감의 서목에 대해 임의로 수를 증감할 수 없으니 빠른 시일에 독촉하여 받아들이라는 전라관찰사의 답변이다. 증5. 1873년(고종 10) 2월 4일에 전라관찰사가 부안현감에게 보낸 감결(甘結)이다. 관찰사는 형조의 관문을 받고 그 내용을 부안현감에 그대로 전달한 뒤 시행할 일을 지시하였다. 형조의 관문 내용은, "부안(扶安)에 사는 김홍제(金弘濟)에게 징봉(徵捧)한 소나무 값 2만5천 냥 가운데 1만 냥은 봉류(捧留)하고, 1만 냥은 최광권(崔光權)에게 내준 뒤에 수표를 받고, 5000냥은 돌려준 뒤 성책하라. 대원위(大院位)가 봉류(捧留)한 소나무값 1만 냥은 조영소(造營所)에 속히 올려보내고, 김홍제의 전후 송첩(訟牒)은 관정(官庭)에서 효주(爻周)하며 다시는 이 일로 송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주라고 분부하였다."라는 것이다. 관찰사는 부안현의 김최산(金崔山)의 송사(訟事)가 지금에서야 결말이 나서 매우 후련하다며 봉류전(捧留錢) 1만 냥은 조영소에 올려보낼 것, 최광권에게는 1만 냥을 받았다는 수표를 받아 영진고(營賑庫)에 둘 것, 김홍제에게는 송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侤音)을 받고 풀어 줄 것을 지시하고 첩보하도록 하였다. 증6. 1873년(고종 10) 2월 19일에 부안현감이 전라관찰사에게 올린 첩보(牒報)이다. 부안현감은 김홍제(金弘濟)와 최광권(崔光權) 등을 모두 불러들여 관찰사의 감결대로 효유하였고, 전후의 송첩(訟牒)을 하나하나 바치도록 하였음을 보고하면서 양측의 주장을 기술하였다. 김방제는 "이번 송사는 1860년(철종 11)에 처음 시작되었고, 그때의 송사 문권(文券) 12장은 1861년 4월에 정계를 나누고 식송(息訟)을 하려고 최씨측의 문권(文券)과 함께 영문(營門)에 올려보냈다. 그 뒤에 근거할 만한 문권(文券) 6, 7장이 나와서 1872년(고종 9) 운현(雲峴)에게 정소(呈訴)할 때 원장(原狀)에 첨부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문권은 1860년 결송(決訟)할 때의 산지(山地) 입안(立案) 1건과 1861년 형배(刑配)될 때 원통함을 호소한 등장(等章) 26장(丈)이다. 이것을 현납(現納)하고 더 이상 남아 있는 문권은 없다.'라고 하였다. 최광권(崔光權)은 '김홍제 등이 1860년에 송사를 일으킨 것은 실로 강희(康熙) 연간의 위첩(僞牒)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최씨측의 김홍제가 수십 여장을 바쳤지만 중요한 문권은 감추고 있다는 주장에 따라 김씨 문권을 살펴보니 중요한 것은 없고 단지 영읍(營邑)에 올린 소장만 있었다. 최씨의 주장 중 김씨측이 1860년에 송사(訟事)를 일으킨 것은 실로 강희(康熙) 무신년(1788, 정조 12)의 위첩(僞牒)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하니 이번에 문권을 말소할 때 이것을 포함 시켜야 하며, 김홍제가 운현(雲峴)에게 호소할 때에 「근거로 삼을 만한 누락 되었었던 문서를 점련하였다」고 했으니 김홍제를 별도로 엄히 신칙하여 문권(文券)을 현납(現納)하도록 해야 한다고 첩보하였다. 증7. 1872년(고종 9) 2월 20일에 부안현감이 전라관찰사에게 올린 서목과 2월 23일 전라관찰사의 제사(題辭)이다. 부안현감은 김홍제를 가두고 문권을 현납(現納)하게 하였다고 서목으로 보고하였다. 전라관찰사는 문권을 바치는 대로 효주(爻周)하고 다짐을 받는다면 혹 감춰둔 문권이 있더라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속히 거행하라고 하였다. 증8. 1865년(고종 2) 전라관찰사의 완문(完文)이다. 최(崔)・김(金)의 석동산을 둘러싼 산송을 처결하면서 석동산이 최씨 소유임을 확인하여 준 문서이다. '부안현 석동산은 최봉환(崔鳳煥)의 13세조 이하를 계장(繼葬)하고 400여 년 동안 수호되었다. 이 사실은 김씨 족보와 읍안(邑案)에 실려 있다. 100여 년 전에 김달수(金達壽) 등이 최씨 산 국내(局內)에 예로부터 있던 하나의 큰 죽분(竹墳)을 그들의 선조(先祖) 소윤(少尹)의 묘라고 하여 수호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860년(철종 11) 겨울에 김달수의 후손 김방제(金邦濟)와 김홍제(金弘濟) 등이 한성부의 관문(關文)을 받고는 감영을 속여 소나무를 발매(拔賣)하고 오래된 7개의 최씨측 무덤을 몰래 파내었다. 이에 최민(崔民)이 두 차례 격쟁(擊錚)하여, 파낸 무덤은 도로 봉축(封築)하고 산지의 소나무도 찾게 되었다. 이때 김방제는 옥에 갇히고 김홍제 등은 정배 되었는데 얼마지 않아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그들은 다시 사굴(私掘)한 7총이 최총(崔塚)은 하나뿐이고 여섯은 고총(古塚)이라 주장하며, 계하(啓下) 받아 도로 봉분한 무덤을 다시 파내려고 했고 산지도 자기들의 산이라고 주장하였다. 김방제 등에게 있다는 완문(完文)은 전관(前官)을 속여 몰래 만든 것으로 도(道)에서 조사하여 임금에게 보고하고 바로잡았으니 쓸모없는 것이다. 김방제 등이 산지와 소나무를 차지하려고 정계를 정하자고 하는데 이른바 소윤의 묘 전후좌우는 모두 최씨의 분묘이니 경계를 정할 수 없다. 정중한 하교와 영읍(營邑)의 단안(斷案)이 있으니, 산지와 소나무는 최민(崔民)에게 전속시키고 이른바 소윤묘만 김씨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지금 이후로 산지(山地)와 소나무는 영원히 최민(崔民)에 소속시키고 김민은 다시 범죄하지 말라는 뜻으로 완문(完文)을 작성하여 준다.'라고 하였다. 증9. 1898년(고종 35) 10월에 전라관찰사 겸 재판소판사(裁判所判事) 이완용(李完用)의 판결서이다. "부안(扶安) 석동산(席洞山)에 함께 있는 김주상(金周相)과 최두영(崔斗榮) 두 집안의 선영에 관한 여러 해에 걸친 산송은 득실(得失)이 반반이다. 전주부의 관정에 양측을 불러 여러 차례 대질(對質)하고 소송문서들을 참고하였더니, 최총을 파내도록 한 것은 이치로 볼 때 부당한 일이고, 소나무값을 김씨측에 되돌려 주는 것은 논의할 일이 아니다. 오직 송사를 쉬게 하는 방법은 경계를 정하여 각각 수호(守護)하는 것뿐이다. 양측을 산으로 불러 군수 입회하에 경계를 정한 뒤에 양측의 다짐(侤音)을 받고, 두 집안의 그동안 소송문서들을 모두 소각한다. 판결서 5건(件)을 작성하여 1건은 고등재판소, 2건은 부군(府郡), 2건은 양측에 주라."라고 판결하였다. 증10. 1898년 10월 5일에 김주상(金周相)이 관에 올린 다짐(侤音)이다. 김주상은 '두 집안의 선영(先塋)을 이미 관찰사가 친심(親審)하고 경계를 정하였으며, 양쪽의 문축(文軸)도 그 자리서 모두 소각하였다. 양쪽 사이에 혹 누락된 것이 있으면 서로 말거리가 되겠기에 지금 집에 누락되어 있던 7장을 또 찾아내 납부하여 불태웠고, 더는 다른 문축이 없다.'라고 하였다. 증11. 1898년 10월 29일에 부안군수(扶安郡守)가 최씨문중에 보낸 고시(告示)이다. 그 내용은, '김(金)・최(崔) 양가의 산지를 분계(分界)하고 수본(手本)을 받아 관찰부에 보고하니 회답하기를, 소나무는 최씨(崔氏)가 기른 것이니 이미 작벌한 것을 돌려준 뒤에 다시 보고하라고 하였다. 김씨문중에 이미 이런 뜻을 고시하였으며, 최씨측은 지금 즉시 나무를 베도록 하되 그 상황을 치보(馳報)하라.'라고 하였다. 증12-1923년 2월 4일 석동산에 대한 지적계증명서(地籍屆証明書)이다. 부안군(扶安郡) 부령면 연곡리 임야에 대한 최병욱(崔炳郁)의 지적계증명원(地籍屆証明願)에 대해 소유사실을 확인하여 준 것이다. 증14. 1921년 3월 5일 부안군수의 벌채(伐採) 허가서(許可書)이다. 최병욱(崔炳郁)이 3월 16일에 석동산에서 침엽수 100그루를 벌채하겠다고 신청하자 부안군수가 이를 허가하였다. 증15. 1921년 10월 25일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이다. 최병욱(崔炳郁)이 11월 5일에 연곡리(蓮谷里) 서록(西麓)에서 침엽수 1,500속(束)을 벌채하겠다고 신청하자 부안군수가 이를 허가하였다. 증16. 1923년 12월 10일 부안군(扶安郡) 부령면장(扶寧面長) 신성석(辛聲錫)이 작성해준 동일산명증명서(同一山名証明書)이다. 최병욱(崔炳郁)이 그의 선조 묘소가 있는 석동산이 일명 도동산(道洞山)임을 증명해 달라고 신청하자 부령면장이 틀림없음을 증명하였다. 석동산은 일명 저동(猪洞)이며 이 산은 1699년(숙종 25) 발행된 부안군(扶安郡)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김최송(金崔宋)의 산이라고 되어있음을 등사하여 부기하였다. 증17. 1846년(헌종 12)에 발행된 부안김씨세보권지일(扶安金氏世譜卷之一)의 내용이다. 군사공 최광서(崔光敍)의 묘가 석동산에 있고 그 자손들이 옹정촌(瓮井村)에 거주하며 대대로 석동산에 입장(入葬)되었다는 내용과 석동산을 저동산(猪洞山) 혹은 도동산(道洞山)으로 불렀음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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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辭 証第一爲等如各人等招辭是置有亦蓋此山一訟厥有層節積年擾鬧無異吳楚之爭牒歷世怨嫌不啻越秦之視瘠屢犯蹕路是非各歸一邊互陳狀辭曲直不待兩招是如乎先審山形更詳輿論則席洞之山斗起一峰向南之麓列如川字東二麓爲金山西一麓爲崔山累累入葬世世聚骨是乎所今此少尹墓在於崔山之西合谷之下而東邊有崔仁鑑等先世六塚西邊有崔榮權之高祖一塚或掘壙中幾至屍骸或去莎土纔經分寸此則掘塚之形止也松楸段大者如柱小者如椽長養蓊蔚延袤廣濶樵牧之所指點行路之所健羨是去乙拓開墓門斫去山麓此多彼寡雖難準信執端折衷庶可斟量崔狀五六萬云者頗近增価金招七十兩云云者亦涉減竈執此幅圓較彼松田則竝其大小洽爲萬餘株是乎乃根之見在者少掘去者多而已掘者爲莎所塡摘奸時猝難執數以若臆料不可質言此則斫松之大槪也斫彼萬株連抱之松已是不良掘此七箇枯骨之塚尤極絶悖竊念七月短宵之時非獨辦之事而掘律恐或及已諸金具曰不知中略會査官行郡守 華押行府使 華押--同治十一年二月初一日 証第二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道內扶安縣崔光權金邦濟等山訟査案入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山訟者爲先血爭之事而今此山訟心不在於爲先計專在於牟利倫理之斁絶俗習之駭悖莫此爲甚分叱除良崔松金斫營邑之査案自在是去乙敢以松価不報之計藉以金山還掘之說者究厥心腸尤極狡惡松価刻期督捧督捧捧留報來以待 處分是遣復或以此等事健訟爲習憑藉山訟計在財利者一倂嚴繩懲捧屬公之意著爲定式事奉 分付玆以發關爲去乎到卽時星火擧行爲旀先從松価數爻而枚擧回移以爲入 鑑受 處分之地宜當向事照驗施行須至 關者右關全羅道觀察使關 [華押]--京兆關文 証第三漢城府爲相考事卽接道內扶安幼學崔俊煥所訴則金弘濟等之誣捏罪惡萬戮猶輕七塚分叱除良私掘而以有主謂無主誣圖關文今欲更掘凶莫凶矣渠墓旣失於高麗之世而做此借葬之說欲奪四百年守護之地拔賣萬餘株連抱之松潛掘二百年年久之塚變莫變矣曲直自歸於强弱是非亦判於緊歇其在按公寧不憤痛哉卽蒙 啓敎之截嚴還推山地還封七塚而今又圖去關文囑囚崔民謀奪謀掘敢藉庚申暗造之券此不知 王章之爲鄭重但知欺瞞之爲得計究厥所爲萬萬驚駭不能的知渠墓之眞贋構捏謀掘者專爲奪松之計也設令渠祖借葬於四百年之前欲奪於四百年之後以彰其祖之惡抑何道理甚至於天聽文字亦皆誣罔專事圖奪揆以典憲不可揜過玆以發關爲去乎到卽嚴關於該邑日前爲金之關文還收上送是遣金弘濟金用均金文濟依律定罪謀掘之塚嚴飭禁斷前後構誣文券卽推燒火山地及松価不日內一一推給仍成公案俾戢狡獝之惡習卽爲馳報宜當者--부안현감書目 証第四本縣民金弘濟等所納松価幾許間裁減事處分行下狀同治十一年八月初八日行縣監 鄭松價之定數營亦不可增減是在果大抵以其數不可擬議更加嚴督期於不日收屬後形止馳報向事壬申八月初十日右兼使 華押--癸酉二月初四日 甘結 証第五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幷爲入 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萬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送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者兼使 華押--癸酉二月十九日 証第六爲牒報事卽得到貴移刑曹關據 使甘結內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万兩捧留一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竝爲入鑑是在果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万兩卽速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處前後訟牒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 鑑憑處之地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上使以爲上送之地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者甘結是置有亦本縣民金弘濟崔光權等竝招致謹將甘辭仍各曉諭前後訟牒一一責現於金弘濟處則其所告內今此訟斷始起於去庚申年間而同決訟時文券十二丈其翌辛酉四月日因營甘分界息訟次幷與崔隻文券而上送營門仍爲未推是乎乙遣其後可據文券六七丈昨年間呈籲 雲峴時粘連原狀以上矣未承題敎旋有矣身押付完營之處分蒼黃赴捉之際果未知狀卷之下處下落而目今矣身處留在之卷只是庚申決訟時山地立案一卷辛酉刑配時卞誣與松価寃懲呼訴等狀二十六丈故玆以現納而更無餘存是如爲乎旀崔光權所告內金弘濟等之庚申起訟實因於康熙年間僞牒留在之故而哲廟朝判決嚴明之有刑配之典猶不知戢出沒京鄕惹起鬧端矣今番京營關敎深軫後弊前後文券現納使之爻周然後可杜後弊是如爲有置蓋此前後訟券之爻周寔出於杜後弊之處分則自邑擧行有不容疏忽是如乎金弘濟所納之券雖爲數十餘張而崔民所供之中旣以緊藏歇現爲告故果爲訴考金券則初無立落緊切之案只有營邑尋常之狀以若積年互相勝負之訟豈無得失可據之蹟哉緊藏歇現果如崔說分叱除良崔說中金民等之庚申起訟實緣康熙戊申僞牒留在云者於此可驗而其所日後更鬧之計不見是圖今若任他匿券不入於爻周則恐難免不審之責故前後訟牒嚴加申飭使之逐一現納則惟彼弘濟只懷落科之憾瞀不畏法自同几肉屢度責現一直拒納雖以雲峴呈籲時可據文券粘連遺落之說觀之計出粧撰極涉痛惋而文券捧侤反致葛藤其在奉分付擧行之道事甚憂悶乙仍于同金弘濟嚴囚緣由槪報使敎是別般嚴飭現納文券事處分爲只爲巡營官 華押--부안현감書目 証第七本縣民金弘濟嚴囚現納文券事緣由狀同治十二年二月二十日行縣監 鄭所謂文券隨所納一一爻周亦捧侤音則設或有如干藏置之文券焉敢更起卽速擧行向事癸酉二月卄三日 右兼使 [華押]--營門完文 乙丑十二月 証第八右完文事段扶安士人崔鳳煥十三世以下繼葬數百墓之地在於本縣席洞山西一麓無弊守護爲四百餘年而昭載於金譜及邑案矣粵在百餘年前縣人金達壽等以崔山局內自古諺傳一大竹墳謂渠遠祖少尹失傳之墓而始自尋護此雖未能的知其墓之眞贋而渠旣稱渠祖之墓則祗守其墓於理當然不意去庚申年冬達壽之後孫金邦濟弘濟等敢生壑慾暗圖京兆關文欺瞞營門而發賣松楸奪燒文蹟酷刑四人兼奪山地潛掘年久七塚則崔民兩次鳴金至蒙截嚴之 判敎被掘之塚還爲封築山地松楸始得還推 啓下一律罪人金邦濟止爲久囚弘濟等皆爲定配而見斫松楸姑未推価囚竄諸金族卽蒙放可謂於渠則幸矣而至於崔民被掘之寃尙未快伸況此四百年禁護之地及屢萬株連抱之松一朝見失於讎人之手其所血寃容有極乎凶彼弘濟等素以蔑法流甚至於天聽文字亦皆誣罔以私掘七塚一曰崔塚六曰古塚云究厥所爲死有餘罪而不遵 啓敎之嚴重不有營邑之査決藉渠吏族之權恃渠賂囑之勢而以 啓下還封之塚謂之以私封更欲謀掘以 啓下還推之地稱之以渠山而渠亦有完文云此是前前官見欺暗造者也且其後以爲道査至於上徹始爲歸正則此文將焉用之乎每率無賴更斫餘木甚至於旌閭前各種屢百年古木近又亂斫謀毁旌閭墓幕內懷都占之計外做定界之言果欲定界則所謂少尹墓前後左右皆是崔塚則何以定界乎强欲定界則此亦法外之悖類抑亦化外之亂氓大抵累百年守護之地忽於一朝圖奪凶習旣至此極而亦將越視則民何保其先塋 國安用乎定法蔽一言旣有 啓敎之鄭重且有營邑之斷案則山地松楸專屬崔民所謂少尹墓則使金守護事合穩當矣自今以往山地松楸永屬崔民雖一片土一箇木莫非崔民之有則金民更不得犯着之意成給完文日後諸金中不悛前習若更起鬧則非徒荷杖且係不法以此文永久遵行宜當事.--判決書 証第九扶安金周相崔斗榮兩家先壟俱在於席洞山而積年爭訟曲直之際得失相半京營之間斷案各有矣今又崔佾榮告訴于高等裁判所有承合場質査之指令而兩隻竝招致府庭屢回對質參考狀軸則崔塚之督掘理所不當松価之責還尤非可論惟其息訟之方只在定界而各守故使於今番巡邑之行歷過是郡招待兩隻于山處仍與郡守同往躬審形便劃定界限後兩隻處捧侤音永爲妥帖而兩家前後訟軸一切燒却是遣今此判決書五件成出一本粘付報告于高等裁判所二本分置府郡二本分給兩家是如乎准此憑後事扶安郡席洞山金崔兩塚分界限標自金少尹墓地崔榮權墓爲四十四步四尺內半分二十二步二尺式定界自金少尹墓西至田頭爲七十八步三尺九寸內半分三十九步一尺九寸式定界自金崔塚半分處西至二十五步三尺六寸定界處上至上小路三十七步三尺定界自金少尹墓左東至八步三尺五寸自上北小路下直至南畓頭定界金崔兩家總代員幼學崔斗榮年四十八白啣幼學崔鴻坰年五十一白啣幼學崔仁灃年四十二白啣幼學金周相年六十二白啣幼學金東容年五十五白啣幼學金洛瑾年五十七白啣白等矣等兩家先壟今旣定界準此施行無相起鬧是遣前後兩邊訟軸一切燒火而兩隻文蹟中設或有漏落者此是燼餘之物不足爲憑以此納侤敎事光武二年十月日裁判所判事李完用(印)山在官郡守 兪鎭哲(印)主事 郭昌根(啣)--戊戌十月初五日幼學金周相 証第十年六十二白等矣等兩家先壟旣承觀察使道親審定界而兩隻文軸亦於當場燒却然兩隻間慮有遺漏文軸互相爲言而矣家遺落七張今又覓納付丙則以更無他軸之意納侤以此憑後敎事官 白啣--告示 崔門中 証第十一金崔兩家山地分界各捧手本報告于觀察府回題內松是崔民之養已爲斫伐出給後更報敎是故以此意已爲告示於金門中是在果松楸段令到卽時使之斫伐以去形止馳報以爲轉報之地事再令到形止卽爲馳報次戊戌十月二十九日官--地籍屆証明願 証第十二地籍屆人住所氏名扶安郡保安面牛東里崔炳郁不動産ノ表示扶安郡扶寧面蓮谷里 (席洞山)一.林野拾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右林野林野ニ對スル地籍屆ナシタルコトヲ証明相成度此段奉願候也大正拾貳年貳月四日--扶庶第六四八号 証第十四出願者崔炳郁大正十年二月二十五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左와如히ノ通リ許可ス大正十年三月五日扶安郡守 印記一.林野/所在 扶安扶寧面蓮谷里席洞山麓一.面積 元十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內二町-反-畝-步一.樹種別 針葉樹一.伐採採取數量 一○本一.伐採採取其間 三月十六日迠下略--抹庶第二.八九一号 証第十五出願者 崔炳郁大正十年十月十一日付願私有林伐採採取의ノ件左와如히ノ通リ許可ス大正十年十月卄五日扶安郡守記一.林野/所在 扶安郡扶寧面蓮谷里西麓一.面積 七町-反-畝-步一.樹種別 針葉樹一.伐採採取 數量 壹千五百束一.伐採採取 其間 十一月五日迠下略--同一山名証明願 証第十六右ハ扶安郡扶寧面蓮谷里區內ニ本人ノ先墓所在スル席洞山名ハ在來一名道洞山名相違ナキコトヲ御証明相成度相願候也大正拾貳年拾壹月拾日扶安郡保安面牛東里五八四番地願人 崔炳郁扶寧面長殿右願ノ通リ相違ナキコトヲ証明ス大正十二年十二月十日大正拾貳年拾壹月拾日全羅北道扶安郡扶寧面長辛聲錫謄寫扶安郡輿地勝覽輿地勝覽第二張第三十九行道洞山在縣南五里許或云猪洞或云席洞蓋猪與席俗音與道相近故借稱焉山有三壟金崔宋族山崇禎紀元後再己卯五月下澣修正--扶安金氏世譜卷之一(崇禎四丙午暮春刊印) 証第十七中略光敍[奉正大夫知古阜郡事配淑人開城王氏父高麗宗室昌寧君洞外祖元世祖墓合在席洞山中麓中腦下之中癸坐有表石麗朝亡我朝興公自古阜大歸貫鄕之扶寧卜居縣南五里許瓮井村占兆于村西席洞山川宇局自此以後子孫世世居住於瓮井村世世入葬於席洞山△席洞山或云猪洞山或云道洞山主有兩峙曰望氣峯前有一池曰建善堤左有回顧曰傘頭峙右有環夬曰幸安山中有長谷曰賢孫谷谷有齋實曰德星庵庵之名蓋取林億齡詩金家聚德星之意也川字局西一麓爲崔生明子孫之族山東二麓爲郡事公子孫之世葬松楸蔚蒼碑碣葱立四百餘年守護中略子璫[中略]子悔愼[中略]子銑[中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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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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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6년 박내유(朴乃有) 차용증서(借用證書) 고문서-증빙류-차용증 경제-회계/금융-차용증 大正五年陰十一月十一日 朴乃有 崔氏門中 大正五年陰十一月十一日 朴乃有 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원형 적색 3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16년 음력 11월에 박내유가 최씨문중으로부터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차용증서. 1916년 음력 11월 11일에 박내유(朴乃有)가 최씨문중(崔氏門中)으로부터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차용증서이다. 부안군 백산면에 사는 박내유는 4원(円) 50전(錢)을 빌리면서 정사년, 즉 1917년 음력 10월 그믐까지 갚겠다고 최씨문중에게 약속을 하였다. 만일 채무인(債務人)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고 기한 내에 갚지 않을 때에는 채권인(債權人)이 지불하기로 하였다. 여기에서의 채권인은 일종의 보증인으로 추정되지만, 채권인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 문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 문서에 딸린 별지에 따르면, 박내유는 기한 내에 갚지 않으면 잔액 55냥(兩) 6전(錢) 2복(卜)을 본전과 이자에 합쳐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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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借用証書一.金肆円伍拾錢也一.報償期限은丁巳年陰十月晦日也右金額의対야債務人이債務를復行의懈怡고報償치안이境遇의債權人이支拂긔로如是成証홈大正五年陰十一月十一日扶安郡白山面新野里一統二戶[印]借用人의朴乃有[印][印]崔氏 門中 殿(別紙)此亦中明年期限의報償치안이면殘額金伍拾五兩陸錢二卜을并本利야徵給기로証홈此狀은借用証書의添付홈大正五年陰十一月十一日債務人의朴乃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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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43년 임명근(林明根) 소작계약서(小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昭和拾八年四月拾五日 林明根 昭和拾八年四月拾五日 林明根 전라북도 부안군 원형 적색2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43년 4월에 임명근이 부안군 연곡리에 있는 토지를 경작하려고 작성한 소작계약서이다. 1943년 4월 15일에 임명근(林明根)이 부안군(扶安郡) 연곡리(蓮谷里)에 있는 토지를 경작하려고 작성한 소작계약서이다. 임명근은 연곡리의 토지를 경작하기 위하여 소작계약서를 작성하였으나, 계약서에는 지주(地主)가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소작계약서에는 지주, 소작인, 연대보증인 등의 의무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계약할 당시 소작인(小作人) 임명근(林明根)과 연대보증인(連帶保證人) 배종순(裵種淳)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소작계약서는 활자로 인쇄된 서식에 작성되었으며, 작성연도에는 '昭和'자(字)가 이미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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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38년 전주최씨전직공파종중(全州崔氏殿直公派宗中) 매도증서(賣渡證書) 고문서-증빙류-증서 경제-회계/금융-증서 昭和拾參年拾貳月壹日 李貞燮 등 4명 全州崔氏殿直公派宗中 昭和拾參年拾貳月壹日 李貞燮 全州崔氏殿直公派宗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38년 이정섭 등 4인이 전주최씨 전직공파종중과 체결한 부동산 계약서. 1938년 1월 17일에 이정섭(李貞燮) 4인이 부안군 부령면 연곡리 일대의 임야 2필지를 전주최씨 전직공파종중(전주최씨전직공파종중(全州崔氏殿直公派宗中)과 매도하면서 체결한 부동산 계약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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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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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96년 최규승(崔圭升)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丙申四月 日 崔圭升 各派宗中 丙申四月 日 崔圭升 各派宗中 전라북도 전주시 정방형 흑색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96년에 전주최씨분동보청의 도유사 최규승이 대동보를 만들기 위해 각파 종중에게 보낸 통문 1896년에 전주최씨분동보청(全州崔氏粉洞譜廳)의 도유사 최규승(崔圭升)가 대동보(大同譜)를 만들기 위해 각파 종중(宗中)에게 보낸 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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