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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文右回諭事惟吾處菴公派稧日字來月十日完定也故玆以發文于各處稧員與用錢人一齊來會于席洞齋閣脩稧無至一員不知之弊幸甚乙卯十月二十九日 發文元齋中 錢 二百三十八兩二戔升 △一百十九兩一戔四卜杏山 宋良皓 租㱏石十七斗五升五合 △十八斗五升一合 辛亥年 利 一石租杏下里 宋熙文 〃五石十斗二升五合 〃二石十五斗一升鳳頭山 金興万 〃十七石九斗四升二合 △八石九斗七升一合麻谷 崔孝明 戔 五十兩六戔三卜 利二十五兩三戔一卜九也里 張殊玉 錢 三十三兩七戔五卜 利十六兩八戔八卜元齋中 錢 二十五兩三戔二卜 利 十二兩六戔六卜〃〃〃 租 二十石五斗 二十石二斗五升母加山 金億万 〃 十七石十二斗九升五合 利八石十一斗四升五合杏山 崔仁甫 〃 八斗四升三合 利四斗二升二合麻谷 崔孝明 〃 六十九石十一斗八升七合 己酉年至乙卯 六石愚西里 崔京長 〃 五石一斗二升 利二石十斗五升鳳頭山 金興万 〃 三石 利一石十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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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하파계(參奉公下派稧)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寅十月初六日 壬寅十月初六日 1842 全州崔氏門中 參奉公下派稧員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문중에서 종원들에게 보낸 1842년(헌종 8) 회문 1842년(헌종 8) 10월 6일, 부안(扶安)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참봉공파(叅奉公派) 문중에서 종원(宗員)들에게 보낸 회문이다. 계회일자(稧會日字)를 통보하고, 전유사(錢有司)들의 회계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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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년 다사소(多土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丁巳三月 日 金洛震 등 13명 金氏門中 丁巳三月 日 金洛震 金氏門中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정사년 3월에 김낙진과 이병민 등 다사소에 속한 유림 13명이 김씨문중에 보낸 통문. 정사년(丁巳年) 3월에 김낙진(金洛震)과 이병민(李炳敏) 등 다사소(多土所)에 속한 유림 13명이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 1567~1621)의 묘도(墓道) 훼손을 보수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면서 김씨문중(金氏門中)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최명룡(崔命龍 : 1567~1621)은 본관이 전주이고 호가 석계(石溪)이며, 현감 최위(崔渭)의 양자이다. 이우기(李迂棋)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역(周易)과 수학(數學)에 능통했으며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그림도 잘 그렸다. 유작으로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가 있다. 석계의 묘도에 있는 묘갈(墓碣)이 훼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자손들이 무력하여 다시 고쳐 세울 여력이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유림들이 김씨문중에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한 것은, 바로 사계 김장생이 석계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석계의 묘갈명을 써주었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사계는 석계를 추모하는 묘갈명에서 그가 일찍이 변산의 어느 절에 들어가 10년 동안 나오지 않고서 천하의 이치를 탐구하기로 다짐하였다가 때마침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오게 된 일화를 소개하고, 석계가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을 때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석계를 보고 감탄하고서 우리의 도를 전할 사람이 있다고 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계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듯한 애통함이 있다고 명민한 제자를 잃은 아픈 마음을 묘갈명에서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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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화양간소(華陽刊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戊戌三月十五日 宋奎洙 등 6명 門中 戊戌三月十五日 1898 宋奎洙 門中 충청북도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98년 3월에 화양간소에 있는 도유사 송규수 등 유생 6명이 성담 송환기의 유집을 간행하는데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면서 전국의 각 문중에 보낸 통문. 1898년 3월에 화양간소(華陽刊所)에 있는 도유사(都有司) 송규수(宋奎洙)와 문의(文義), 대구(大邱), 초계(草溪), 진산(珍山), 청주(/淸州) 출신의 유생 등 6명이 각 문중에 보낸 통문(通文)으로,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의 유집(遺集)을 간행하는데 필요한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담이야말로 백세(百世)의 종사(宗師)인데도 타계 후 백년이 다 되도록 그 유집이 간행되지 못한 것은 조가(朝家)의 흠전(欠典)일 뿐만 아니라, 사림의 불행이라고 하였다. 작년 봄에 영 호남의 사림들이 발의하여 본가와 후학들이 협력하여 몇 권을 상재(上梓)하였으나 그 일이 워낙 방대하여 작업이 중지될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간소에서는 전국에 있는 문중에 통문을 보내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송환기는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으로,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 성담(性潭) 등이다. 1766년(영조 42)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순조(純祖)의 조정에서 형조참의, 예조참판, 공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등을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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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通諭事夫崇奉先賢係是士林之先務而其於俗頹之日尤復萬萬用力以樹風敎之餘縷也伏惟 石溪崔先生以沙溪金先生之高弟麗澤乎諸賢啓牖乎後學道德行義卓冠一世吾鄕文明之氣莫非先生闡發之力也其所慕向展於他郡矣今其墓道之石碣剝落無形子孫無力不能改竪誠所慨歎處也其所向慕之地安可坐視恬然竟使大賢之墓所歸於泯沒無據乎仰惟 僉君子思念累世沾濡之澤矜憐後孫單孑之狀特出優助以竣巨事之地幸甚右 敬 通 于金 氏 門 中 丁巳三月 日 多士所 金洛震 李炳敏 朴勝旭 許淑 鄭昌洙 尹熙春 吳禧善 沈相舜 高稷相 徐炳一 崔源轍 蔡東勳 崔杞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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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송자대전중간소(宋子大全重刊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宋子大全重刊所 宋子大全重刊所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13년 송자대전중간소의 통문 1913년 5월 15일에 송자대전중간소(宋子大全重刊所)에서 도유사(都有司) 김종한(金宗漢) 등이 최씨문중(崔氏門中)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중간에 필요한 인출지(印出紙) 3괴(塊)를 미리 도와준다면 원대전(原大全) 102권과 속대전(續大全) 8권을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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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이영백(李永白) 임야(林野) 증명원(證明願) 고문서-증빙류-증명서 법제-소송/판결/공증-증명서 大正拾五年拾壹月拾九日 李永白 扶安郡守 大正拾五年拾壹月拾九日 李永白 扶安郡守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6년 이영백이 부안군수 앞으로 제출한 부안군 부령면 연곡리 소재 임야 증명원 1926년 11월 19일 부안군(扶安郡) 부령면(扶寧面) 서외리(西外里)에 사는 이영백(李永白)이 부안군수 앞으로 제출한 증명원이다. 부안군 부령면 연곡리(蓮谷里)에 있는 임야(林野)의 소유권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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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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督促狀第 一二九口號 府郡 扶寧 町面 瓮中 里 番地 崔基洪 外 三人大正 十年度 大正 十年 二 期分一金 弐拾八錢也 滯納稅金一金 督促手數料右 三月 二十七日限 扶安郡ケ゠納付スヘレ此ノ期限ヲキ完納セサルトキハ財産▣▣ノ處分ヲ▣…大正 十一年 三月 二十二日扶安 府尹郡守[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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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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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부안군수(扶安郡守) 납세(納稅) 독촉장(督促狀) 2 고문서-증빙류-증서 경제-회계/금융-증서 大正 十一年 三月 二十二日 扶安郡守 崔基洪 外 三人 大正 十一年 三月 二十二日 扶安郡守 崔基洪 전라북도 부안군 [署押]1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2년에 부안군수가 부안군 부령면 옹중리에 사는 최기홍 등 3명에게 발부한 납세 독촉장.○ 해제/ 1922년에 부안군수(扶安郡守)가 부안군(扶安郡) 부령면(扶寧面) 옹중리(瓮中里)에 사는 최기홍(崔基洪) 등 3명에게 발부한 납세 독촉장이다. 부안군수는 부령면 옹중리에 사는 최기홍 등 3명이 같은 해 2분기 세금 28전(錢)을 체납(滯納)하였으므로 이 체납세금을 3월 27일까지 납부하여 세금을 완납하라며 발부한 독촉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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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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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23년 최병욱(崔炳郁) 변무서(辨誣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장 법제-소송/판결/공증-소장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3년 최병욱 변무서 1923년 10월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우동리에 사는 최병욱(崔炳郁)이 총독부기수출장소(總督府技手出張所)에 제출한 것이다. 김규상(金珪相) 측이 입증할 목적으로 최관석(崔觀錫) 등의 소장이라고 한 것을 보니 허위무근(虛僞無根)한 말이며 소장 안에 열서(列書)한 사람 중에 94인 중 48인은 무증부지(無証不知)한 사람이고, 14명은 혹 100여년, 혹 몇십년 전에 사망한 사람과 15세 혹은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를 입록(入錄)한 것으로 보아 위조한 사실이 분명하다며 이유를 참고하여 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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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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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835년 묵재 최활(崔活) 묘표(墓表)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崇禎紀元後四乙未季春日 宋穉圭 崇禎紀元後四乙未季春日 宋穉圭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35년 최관석이 지은 묵재 최활의 묘표 1835년(헌종 1) 최관석(崔觀錫)이 지은 묵재(默齋) 최활(崔活)의 묘표(墓表)와 묘지(墓誌), 그리고 행장(行狀)과 행장서(行狀序)다. 행장은 2편이다. 묘표는 송치규(宋穉圭)가, 묘지는 최관석(崔觀錫)이, 행장은 송일홍(宋一洪)가. 행장서는 서기순(徐耆淳)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모두 작성 년대는 1895년(고종 32)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본 문서는 그 때의 것을 옴겨 적은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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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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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竹村崔公墓表全州崔公諱秉璣號竹村卽敬菴諱興洪之子也余旣狀敬菴公德今公之隧亦難可固辭爲表遂爲之按狀其世德則始祖文成公諱阿以下有若月塘先生諱霮甕菴公諱生明固窮堂公諱秀孫處士公諱弼成其道學文章忠孝節烈俎豆科宦步武煇爀與東方大姓可甲乙而旣悉於敬庵公狀錄不必疊床置論有曰諱萬興諱命翼諱其彩於公高曾若祖也妣金海金氏正三外王考也其行治曰生有異質儀容淸秀才藝聰敏其進退周旋不待勉勵自合繩尺不知何者爲不孝不弟不睦不婣此不翅良能盖其親側見聞有素習與成性故也其就學也不煩課督自知讀書之方其於所受字字句句不置尋常看過精思熟讀曉得其旨然後而上少年工夫如是眞摯莫不日就而月將塾師期以大著時則 國家飜覆新舊相雜公有所觀感以其所志遂告于大人乃學新書不幾而博通鄕里莫不驚異此成童前後事也十八與朴公象基金公琫燮設舟山學校廣募學徒躬自授業以敎育英才爲畢生己任以其所受月捧資其親旨及行翫之贐親年至耊一不慽窮也或以利達勸公公愀然不悅曰如今 國破君亡之日與讐共戴不得已也况富且貴耶以若國恥未復寧安吾貧敎我國民以待他日有事之爲愈也其徒數千而顯者多出於公之所授也士友重之稱竹村先生未嘗呼其名也其齊及子姓曰齊樂安金氏 女德配君子至今無{虫+恙}男鍾烈女全洪根朴炯德孫圭權圭彦圭泰公生于 高宗辛丑三月十日己丑七月十四日皐復于寢得年四十九訃發鄕里知舊多士以及村老野氓吊哭塡門曰善人逝矣葬于下西面靑湖里先塋下枕子原其徒欲主葬之時値浩劫時事搶攘因以未果噫公自弱齡設庠垂敎以育英爲沒世之任士友知其需世之用勸之利達而莫之得其傷時憂道之志始松栢之挺然若使公假年則後學之依歸想有大於天下而未之及其在後學不能無憾焉以是使之入刻其請文者鍾烈歲丁酉仲秋日 高興柳石承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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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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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21년 사유임야(私有林野) 벌채(伐採) 허가통지서(許可通知書) 고문서-첩관통보류-지령 법제-소송/판결/공증-지령 大正十年 三月 五日 崔炳郁 扶安郡守 大正十年 三月 五日 崔炳郁 扶安郡守 전라북도 부안군 [署押]1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1년에 부안군수가 최병욱에게 보낸 사유임야 벌채 채취 허가통지서. 1921년에 최병욱(崔炳郁)이 부안군(扶安郡) 부령면(扶寧面)에 있는 사유임야(私有林野)의 벌채(伐採) 채취(採取)의 허가를 부안군에 신청하자 부안군수(扶安郡守)가 이를 허가하는 통지서이다. 최병욱은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부령면 연곡리(蓮谷里) 석동산(席洞山) 삼림의 침엽수(針葉樹)를 벌채 또는 채취하기 위하여 부안군에 요청하였다. 벌채할 면적은 15정(町) 중에 2정이며 벌채할 수량은 200본(本)이다. 벌채 채취 기한은 3월 16일이며, 벌채 채취 제한은 생장연한이 20년 미만의 침엽수와 10년 미만의 활엽수에 한하여 허가하였다. 만약 이 조건을 위반하면 벌채 채취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부서 제2891호에 이어져 통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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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崖先生神道碑銘先生諱匡之號松崖系出全州高祖諱阿門下侍中平章事封完山君諡文成三傳至諱霮號月塘始仕我朝三十二登科檢校戶曺叅議集賢殿提學七十致仕大歸還鄕不求聞達因作寒碧堂東有邀月坮西有百華潭岩刻光風霽月鳶飛魚躍等字宛然如昨晩暮頤養心身遊賞逍遙無以加焉享年八十九生於丙戌卒于世宗甲寅配淑夫人全州朴氏經德齋從壽女圃隱鄭先生外孫天性寬婉婦德極備閨門雍睦庭無間言府君甚敬重焉是生四子長卽先生次諱直之文科集賢殿提學次諱得之生進俱中朝散大夫典農少尹陞奉正大夫大司憲号栗軒諡孝烈次諱德之乙酉文科入玉堂坮閣文宗辛未召拜藝文館提學号烟村諡文肅四昆季同▣▣▣(受月塘)學于圃隱鄭先生門先生生長忠孝之門(家)內受月塘賢父兄(府君)之嚴訓外受(承)圃隱經德兩先生之指導自在幼冲器宇方直禀賦淸高聰明邁倫才藝卓犖日乾夕惕文理密察經傳子集無不該博儀禮心經渙然氷釋先生愛而重之曰斯君之琢磨用工超乎等夷軆用圓融精粗貫一玉蘊珠懷需世大用國家之蓍龜士林之泰斗也與權陽村近鄭復齋坤李容軒原道義交日月講磨進德修業平生自治一於居敬誨人不倦淳淳雅飭變化氣質爲務十八進士二十登第陞承政院都承旨在職 世廟踐祚之初雅尙儒術任賢使能時稱東邦堯舜增選經學之士日直集賢殿云先生以都承旨被選拜提學入直與徐四佳居正朴翠琹彭年同心協力夙夜靡懈出納王命(盡忠補闕)滿朝淸獻可謂右文之世在直五年殿中豪傑肅然敬憚庚午 世廟賓天先生辭以老病上疏 文宗辛未春例蒙聖上老老之恩得允陞中訓大夫大匡太師禮賓少尹集賢殿提學退歸桑鄕配淑夫人李氏生三男長諱生明号甕菴進士以經明行修薦授京市殿直與金寒暄堂道義交五院瓮井金濯纓誄曰志剛節廉入孝出悌可祭於社於百万世次諱道明次諱誠明甕菴府君生一男三女子諱秀孫号固窮堂成均進士金寒暄堂門人秀才篤行望重當世配食道東女長適詩山許仲民孝㫌閭次適光山金衷孫文科次適昌寧成彭老生員子重淹号晴湖己卯名賢固窮府君生五男長諱順成文科吏曺叅議大司諫次諱克成丁卯生員丙子文科奉列大夫藝文檢閱兼春秋館事以獻納爲親乞外知錦山善治頌碑文科吏曺叅議大司成次諱弼成号處軒進士趙靜菴門人以孝行中廟命㫌配道東次諱繼成成均生員号處菴特孝 明廟朝命㫌事載三綱錄己卯錄享于瓮井趙靜菴門人次諱竟成進士以隱逸拜禮賓寺叅奉與金慕齋成聽私道義交司成公子諱渭文科司評孫諱命龍号石溪金沙溪高弟享于全州麟峰院又享瓮井有曾孫兄弟勮與勁同榜文科俱有靖社功臣錄券處軒公子海德陵叅奉檢閱公子沫吏曺正郎處菴公子諱活号黙齋朴思菴門人恬靜自修克盡孝友薦授禮賓奉事有三孫長諱時立禮賓奉事壽僉知中樞府事次諱山立文科左通禮壬亂扈 聖靖社功臣有錄券贈府事次諱善立孝友克備學問富贍薦授軍資監奉事不就叅奉公子諱濱承仕郞禮賓叅奉孫諱大立壬亂扈 聖靖社功臣有錄券贈判官有曾孫兄弟峻與屹靖社功臣有錄券玄孫處中萬曆戊午虜犯上國以副元帥應 命殉節立功其餘學行忠孝不可盡記猗歟休哉公之後仍不億其麗道學淵源節義文章俎豆棹楔繼繼承承揚名於世以顯父母非月塘公之深仁厚德松崖公之寬裕溫柔豈能若是而孰謂醴泉無源靈芝無根也歟墓在全州所陽面土亭里枕甲原淑夫人李氏墓合祔焉旧碑石頑字文苔沒無以考據後孫慨然今將伐石改竪以賁隧道擧其大致遂爲之記有國葉篤生太師文成玄冑月翁哲胤在朝盡忠有補袞冕 聖上眷允臣僚茹恨安素坦然居仁由義玄明貞珉草木含榮銘此豊碑於萬斯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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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 신도비명(神道碑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문간공 송애 최광지의 신도비명. 문간공(文簡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다. 그는 월당(月塘) 최담(崔霮)의 맏아들로, 1389년(창왕 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였다. 최광지의 첫째아들은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이며, 그 아들, 즉 최광지의 손자가 바로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이다. 최광지는 특히 그가 문과 급제할 때 받았던 합격증서 홍패(紅牌)가 고려시대의 홍패로서는 매우 드물게 오늘날까지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명하다. 이 홍패는 왕명의 직인이 찍혀 있고 형식상 완결성을 갖춘 고려시대의 홍패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공문서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홍패는 2020년 4월에 보물 제2062호로 지정되었다. 최광지는 숙부인 이씨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위에서 언급한 최생명이며, 둘째는 최도명(崔道明), 셋째는 최성명(崔誠明)이다. 최생명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첫째가 최수손으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사위는 허중민(許仲民), 김충손(金衷孫), 성팽로(成彭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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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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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狀童卽有査問決處事石湖朴今玉金蒙同南中極眼同捉待事癸丑十二月初九日官[着押][印][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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