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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당 이공 유사 梧月堂李公遺事 공의 휘는 민변(敏釆)이고, 자는 달서(達瑞)이며. 호는 오월당(梧月堂)이다. 이씨는 공산(公山) 사람으로,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 이후로 문학과 잠영(簪纓)1)이 대대로 찬란하게 빛났다. 호가 혁회재(衋悔齋)인 휘 위(韡)는 만력(萬曆)2) 연간에 이름난 진사로 사림(士林)이 제사를 모셨으니, 바로 공의 8세이다. 증조는 기형(基馨)이고, 조부는 문갑(文甲)이며, 부친은 택무(擇茂)이고, 모친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순조(純祖) 무자년(1828)에 능주(綾州)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말하거나 웃을 때 복스럽고 장난끼가 있으면서도 출입할 때 걸음걸이가 의젓하여 어른스러운 모습이 있었다.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고 스승과 벗을 따를 때에는 학문을 하는 절차와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운 행실이 성대하여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다. 부모를 섬기고 장사 지내며 제사 지낼 때에는 정성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였고, 직접 제례(祭禮)를 가려 뽑아 집안의 자제들에게 주어 외고 익히게 하였으며.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여러 여식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서 말하길, "제사를 받드는 것은 규문의 큰 예절이니, 반드시 이것을 잘 알아야 출가한 사람으로서 부인의 도리를 이룰 수 있다." 하였다. 항상 "검약한 생활로 잘못되는 경우는 적다.3)"와 "생각함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4)"라는 말을 좋아하여 자리 오른편에 써 붙여 놓고 밤낮으로 반성하며 말하길, "성인의 말씀은 말이 간략하지만 의미가 갖추어져 있고, 글이 비근하지만 뜻이 심원하니, 진실로 이 두 구절을 체득하여 미칠 수 있다면 마음을 보존하고 자신을 지키며,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하는 방법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언젠가 한 번은 밤에 이웃에 사는 아이가 몰래 정원에 들어가 나무에 올라 과일을 따고 있음에도 공은 속으로 참으면서 말하지 않고, 또한 집안사람들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대체로 그 아이가 갑자기 떨어져 다칠까 염려해서였다. 남의 훌륭한 점을 보면 자신이 지닌 듯하였고, 남의 나쁜 점을 보면 자신의 병통인 양하였으며, 마음 씀은 충후(忠厚)했고 일을 함은 꼼꼼하였으니, 향촌에서 안면이 있든 없든 그를 군자로 지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갑술년(1874)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남평(南平) 반계(潘溪)의 뒷산 기슭 경좌(庚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대호(大鎬)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두었다. 지난 경신년(1860)에 내가 약관(弱冠)의 나이로 죽수서원(竹樹書院)5)을 유람하면서 향촌 유생들의 큰 회합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어르신이 있었는데 자태와 형상이 단정하고 후덕하였으며, 풍채와 거동이 온화하고 화락하였으며, 말을 하거나 의론을 내면 사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주목하였다. 그 분이 누구인지 묻고서야 오월당 이공임을 알았다. 여러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 앉아 어수선하였기에 비록 조용히 가르침을 받들지는 못했지만 흠모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다. 그런데 덧없는 인생에 변고가 많아 다시 문안을 여쭈지도 못하였다가 돌아가신 지 수십년이 지난 뒤에서야 공의 아들을 만나 함께 따르고 강마하는 것이 이처럼 친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공의 아들 인환(仁焕)이 울며 말하길, "선군(先君)의 아름다운 이름을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불초(不肖)한 내가 일찍 아버님을 여의었기에 그 분의 실제 행적에 대해 보고 기억한 것이 없고, 유문(遺聞)에서 얻은 것이 단지 그저 몇 단락 말씀뿐이지만 사라지게 내버려둘 수 없으니, 바라건대 글을 지어 없어지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게나." 하였다. 아아,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나이에 선배의 장후한 풍도를 추상하니 구구한 가슴에 사무친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기에 감히 강하게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敏釆。字達瑞。號梧月堂。李氏公山人。恭肅公諱明德後。文學簪纓。世代煒燁。至諱韡。號衋悔齋。爲萬曆名進士。士林俎豆之。卽公八世也。曾祖基馨。祖文甲。考擇茂。妣濟州梁氏聖源女。以純祖戊子。生公于綾州七松。言笑禧戱。出入步趨。疑然有老成風度。至於擩染家庭。從逐師友。爲學節度。孝友行治。蔚然爲儕流之推重焉。生事葬祭。情文備至。手抄祭禮。賜門子弟誦習。每於行祭時。輒令諸女觀之曰。奉祭祀是閨閫大節。必須通此可以適人成婦道。常愛以約失之者鮮。及思不出其位之語。書付座右。日夕顧省曰。聖人之言。言約而意備辭近而旨遠。信能於此二句。體當得及。則存心持己應事接物之方。可以幾矣。嘗夜有隣兒。竊入園中。登樹摘果。公隱忍不發。亦不令家人知之。盖隱其倉卒落傷也。見人之善。若己之有。見人之惡。若己之病。用心忠厚。作事周詳。鄕黨知不知。無不以君子目之。甲戌三月九日卒。葬南平潘溪後麓庚坐原。配驪興閔氏大鎬女。擧一男三女。曩在庚申。余弱冠。遊竹樹書院。見鄕儒大會。而中有一丈人。姿相端厚。風儀愷悌。發言出議。四座屬目。問之乃知爲梧月堂李公也。稠座撓撓。雖未能從容承誨。而滿心欽艷。久而不忘。誰知浮生多故。未及再候。而歿後數十年之餘。乃得其遺胤。與之從逐講磨。若是密勿哉。遺胤仁焕。泣而語曰。先君令名。人誰不知。不肖早孤。其於實行。未有所睹記。而得於遺聞者。只是零星數段語而已。不可任其泯沒。幸爲下筆以惠不朽也。嗚呼。白首頹齡。追想先輩長厚之風。不勝區區感愴之情。有不敢牢辭云耳。 잠영(簪纓) 관(冠)에 꽂는 비녀와 갓끈을 말한 것으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비유한다. 만력(萬曆) 명나라 제13대 황제인 신종(神宗)의 연호로, 1573~1620년에 해당한다. 검약한 …… 적다 공자의 말로 《논어(論語)》 〈이인(里仁)〉 제23장에 보인다. 생각함이 …… 않는다 《주역》 〈간괘(艮卦) 상(象)〉에 "산이 거듭함이 간이니, 군자가 본받아 생각이 그 지위에 벗어나지 않는다.〔兼山艮, 君子以, 思不出其位.〕"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로,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증자가 "군자는 생각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君子 思不出其位〕"라고 하였다. 죽수서원(竹樹書院)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능주(綾州)로 귀양 갔다가 곧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학고 박공의 유사 鶴臯朴公遺事 공의 휘는 준량(準亮)이고, 자는 성지(聖智)이며, 호는 학고(鶴臯)이다. 박씨(朴氏)의 선계는 밀양(密陽)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규정(糾正)을 지낸 휘 현(鉉)이 중조(中祖)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강생(剛生)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휘 절문(切問)은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휘 중손(仲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난 공신(靖難功臣)에 녹훈되어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고, 휘 미(楣)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으며, 휘 광영(光榮)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낸 밀성군(密城君)이고, 휘 난(蘭)은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밀평군(密平君)이며, 휘 숭원(崇元)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밀천군(密川君)이고, 휘 기현(耆賢)은 충청 감사(忠清監使)를 지낸 밀계군(密溪君)이며, 휘 안길(安吉)은 동중추(同中樞)를 지낸 밀흥군(密興君)이니, 이들이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 휘 선증(善曾)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증조 휘 기환(起煥)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재욱(載郁)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부친 휘 세진(世鎭)은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모친 증 정부인(贈貞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증 참의(贈參議) 덕기(德機)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8월 15일에 공을 낳으니, 기운과 골격이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자질과 성정이 영특하고 비범하자 그의 대부(大父)가 사랑하여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집안을 일으켜 세울 희망이 이 아이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착하여 부모가 병에 걸리면 곧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지 않았고, 8세에 공부를 시작해서는 번거롭게 과정(課程)을 정해 독려하지 않아도 여러번 독송하는데 매우 근실하였고, 조금 장성해서는 같은 고을에 사는 만희재(晚羲齋) 양 상사(梁上舍)를 따라 의혹을 질정하고 변별하며 스스로를 넓혀갔다.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잠자리를 살피는 예절과 맛있는 음식을 바치는 도리를 일찍이 어긴 적이 없었는데, 일찍이 한 번은 여러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효도하려 한들 미치지 못하고 우애하려 한들 때가 없는데, 지금 우리 형제들은 위로 부모님이 모두 생존해 계시고 아래로 변고가 없다. 이러한 때는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두렵게 여겨야 할 시기이니,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침이 되면 나가서 밭 갈고, 저녁이 되면 글방에 들어와 책상을 마주한 채 책을 읽되 확실하게 과정을 두었으며, 상례를 다스릴 때에는 슬퍼하면서도 인정과 예법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겸손함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공손함으로 남을 대했으며, 모든 일을 처리할 때에는 이해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흉년이 든 해를 만나게 되면 의복을 줄이고 음식을 절약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휼해 주어 공에게 힘입어 살아간 사람들이 자못 많았다. 언젠가 한 번은 흥양(興陽)으로 가는 길에 구걸해 먹고 사는 여인이 맨땅에서 아이를 낳은 것을 보고 때가 한겨울인지라 공이 전대를 털어 객점 주인에게 넉넉히 주어 따뜻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잘 조리하고 보양하게 하였다. 갑오년(1894)의 변란 때에는 자제와 친척들을 경계시켜 물들지 않게 하였다. 만년에는 화학산(華鶴山) 아래 산림과 계곡, 괴석 등의 경치가 있는 곳에 집 한 채를 지어 문을 닫아걸고 행적을 숨겨 종유를 끊고 교류를 그만둔 채 흔들흔들 한가로이 거닐며 애오라지 스스로를 즐기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다. 하루는 병에 걸려 자손들이 의원을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의원이라 하더라도 어찌하겠는가. 단지 너희들이 몸가짐을 조심하여 집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책을 읽고 학문하여 가업을 실추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무술년(1898)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나니, 신풍방(新豊坊) 강촌(江村) 뒤 기슭의 갑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윤해(潤海)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으며, 계배(系配)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영환(永煥)의 따님이다. 1남인 흥래(興來)는 김씨의 소생이고, 손자는 노삼(魯三)ㆍ노언(魯彥)ㆍ노홍(魯洪)이다. 증손자 동규(東奎)는 첫째 노삼의 소생이고, 정규(井奎)는 둘째 노언의 소생이며, 승규(承奎)는 셋째 노홍의 소생이다. 노삼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길 글을 청하니,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대략 가다듬고 꾸며서 그의 뜻에 부응하였다. 公諱準亮。字聖智。號鶴臯。朴氏系出密陽。以高麗紏正諱鉉爲中祖。入我朝。有諱剛生。副提學。諱切問。左贊成。諱仲孫。文科策靖難勳封密山君。諱楣。文科禮議。諱光榮。文科刑曹參判密城君。諱蘭贈領議政密平君。諱崇元。文科漢城判尹密川君。諱耆賢。忠清監使密溪君。諱安吉。同中樞密興君。皆其顯祖也。高祖諱善曾。壽陞通政。曾祖諱起煥。贈司僕寺正。祖諱載郁。贈左承旨。考諱世鎭。贈戶曹參判。妣贈貞夫人全州李氏贈叅議德機女。有婦德。純廟甲申八月十五日生。公氣骨峻茂才性穎異。其大父撫愛之曰。家戶之望。其在於此乎。幼有至性。父母有疾。輒涕泣廢食。八歲上學。不煩程督而誦數甚勤。稍長。從同郡晚羲齋梁上舍。質疑辨惑。以自展拓。定省之節。甘脆之供。未嘗有違。嘗語諸兄弟曰。孝有不及。悌有不時。今吾兄弟。上則俱存。下則無故此是一喜一懼之日也。盍相勉焉。朝而出耕。夜而入塾。對床讀書。的有課程。執喪哀毀。情文無闕。持身以謙。接人以恭。凡百處事。不以利害爲取舍。遇饑歲。縮衣節食以周貧乏賴活頗多嘗於興陽路中見乞婆露地産兒。時維隆冬。公傾行橐。厚給店人。使之携入溫室。善爲調養。甲午之亂。戒子弟族戚。俾勿梁。晩築一室於華鶴山下。有邱林泉石之勝。杜門斂跡。絶遊息交。婆娑徜徉。聊以自娛。以壽陞同中樞。一日屬疾。子孫將迎醫。公曰。死生天也。雖醫何爲。只願汝輩持身謹勅。居家孝弟。讀書學問。勿墜家業也。以戊戌八月十九日終。葬新豊坊江村後麓甲坐原。配貞夫人慶州金氏潤海女。有女士行。系配南原梁氏永煥女。一男興來。金氏出也。孫男魯三魯彥魯洪。曾孫男東奎長房出。井奎二房閏。承奎三房出也。魯三奉家狀來。謁不朽之文。謹據狀而略加修潤。以塞其意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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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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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동중추 농은 박공 유사 同中樞農隱补公遺事 공의 휘는 국서(國瑞)이고, 자는 내명(乃明)이며, 호는 농은(農隱)이니, 대제학을 지낸 충의공(忠義公) 휘 첨(瞻)이 그의 비조(鼻祖)이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휘 희중(熙中)은 호가 위남(葦南)이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진원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이분이 휘 희생(暉生)을 낳았고, 이분이 휘 문기(文基)를 낳았고, 이분이 휘 윤원(胤原)을 낳았고, 이분이 휘 위(衛)를 낳았으니, 이상 4대가 모두 사마(司馬)에 올랐다. 이분이 낳은 휘 이인(而認)은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과 도의로 교제하였고, 병자란(丙子亂) 때에는 그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분이 낳은 광보(光輔)는 죽천(竹川) 선생과 종조형제(從祖兄弟)가 되어 문학과 의로운 행실로 한 시대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잠(岑)은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고, 이분이 낳은 휘 영립(英立)은 봉사(奉事)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필(應弼)을 낳았고, 이분이 휘 경호(慶顥)를 낳았고, 이분이 휘 진해(振海)를 낳았으니, 호는 겸암으로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휘 동수(東壽)는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성우(成祐)는 호가 매죽헌(梅竹軒)으로 보성(寶城)에서 능주(綾州)로 우거(寓居)하였으며, 호조 참의(户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부친 휘 명혁(命爀)은 호가 용암(龍庵)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고, 모친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는 아무개의 따님이다. 정묘(正廟 정조(正祖)) 을묘년(1795) 2월 19일에 능주의 용두리(龍頭里)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히 착해 부모를 섬기며 오직 부모의 말씀만을 따랐고, 취학(就學)해서는 번거롭게 이끌거나 독려하지 않아도 과정(課程)을 준수하였다. 하루는 '제자는 들어와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며, 이렇게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6)'라는 말을 읽고서 말하기를, "효도와 공경은 자식된 직분이니, 하루라도 닦지 않으면 안 된다. 봉양을 돌보지 않고 한갓 독서만 잘한다면 이런 사람을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이 때부터 집안 일을 겸하여 주관하면서 집안의 재력이 조금 펴졌고, 부모의 뜻에 빠뜨리는 것이 없게 되었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는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자며 게으른 기색이 낯빛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겸손과 공경으로 몸을 단속하고 근면과 검약으로 집안을 다스려서 온 집안 내에 가르침이 시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일이 거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도리와 규범이 반듯하였고 은혜와 정의(情誼)가 화기로웠으며, 이를 미루어 친척과 벗에게 이르렀으며, 도의를 귀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다. 만년에는 집안일을 전가(傳家)한 채 한 방을 깨끗하게 다스리고 서적에 깊이 빠졌는데, 이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젊었을 때 노력하지 않다가 늙어서 후회됨을 알겠구나."하고서 여러 자제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전거지감(前車之鑑)7)으로 삼아 제 때에 힘써서 너희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한을 위로하거라."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고, 정축년(1877) 3월 29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용두리 뒷산 위 봉우리 묘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성추(星秋)의 따님으로 2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덕현(德鉉)과 기현(箕鉉)이고, 딸은 민치황(閔致璜)과 이승규(李承奎)에게 시집갔다. 첫째 덕현은 자식이 없어 태영(泰瑛)을 후사로 삼았고, 둘째 기현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태영(泰瑛)ㆍ태섭(泰燮)ㆍ태규(泰奎)이고, 딸은 임만갑(林萬甲)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집에 거처할 때에는 효도와 우애의 행실이 있었고, 마을에 거처할 때에는 화락한 풍모가 있었으며, 평소에 은덕을 쌓아 안팎으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고 대질(大耊 80세)에 오르도록 장수하였으며, 자손들이 번성하여 문학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니, 천도가 선한 사람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태규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을 글을 부탁하니, 내가 마을의 후배로 평소에 우러러 사모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國瑞。字乃明。號農隱。大提學忠義公諱瞻。其鼻祖也。至我朝。有諱熙中。號葦南官直提學封珍原君。子孫因貫焉。生諱暉生。生諱文基。生諱胤原。生諱衛。以上四世。皆登司馬。生諱而認。與牛山安先生爲道義交。丙子亂。與之擧義。生諱光輔。與竹川先生爲從祖兄弟。文學行義。一時齊名。生諱岑。通政。生諱英立。奉事。生諱應弼。生諱慶顥。生諱振海。號兼巖。於公爲高祖。曾祖諱東壽。贈軍資監正。祖諱成祐。號梅竹軒。自寶城寓居綾州。贈户曹參議。考諱命爀。號龍庵。贈吏曹參議。妣淑夫人金氏某女。正廟乙卯二月十九日。公生于州之龍頭里。幼有至性。事父母。惟命是聽。就學不煩提督。遵循課程。一日讀弟子入則孝。出則弟。行有餘力則以學文之語。乃曰。孝悌是入子職分。不可一日不修。不顧其養而徒能讀書。是果何用也。自是兼幹家務。家力稍舒。親旨無闕。平居夙興夜寐。懈慢之氣。不形於色。持身以謙恭。御家以勤儉。一家之内。敎無不行。事無不擧。倫理井井。恩誼融融。推而至族戚朋友。貴義輕財。賙窮恤匱。晚年傳家事。淨討一室。沈潛墳典。乃歎曰。少而不力。老而知悔。顧諸子曰。爾輩以我爲前車之鎰。及時勉力。以慰乃父未就之恨也。以壽陞同中樞。丁丑三月二十九日。考終于正寢。葬龍頭里後山上峯卯坐原。配宜寧南氏星秋女。舉二男二女。男德鉉箕鉉。女適閔致璜李承奎。長房無育。泰瑛爲後。次房有三男一女。泰瑛泰燮泰奎。女適林萬甲。曾孫以下不錄。嗚呼。居家有孝友之行。居鄕有愷悌之風。平生積累。內外無怨。壽隮大耋。螽斯蕃衍。文學不墜。天道福善。豈不信然。泰奎奉家狀。有不朽之托。余以鄉里後生。慕仰有素。不敢辭。 제자(弟子)는 …… 한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전거지감(前車之鑑) 앞의 실패가 뒤의 교훈이 됨을 비유하는 말로, 《한서》 권48 〈가의전(賈誼傳)〉에 "앞서가는 수레가 전복되면 뒷수레가 조심을 한다.〔前車覆 後車戒〕"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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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호 민공 유사 竹湖閔公遺事 공의 휘는 치석(致奭)이고, 자는 윤화(潤華)이며, 호는 죽호(竹湖)로 여흥(驪興) 사람이다. 평장사 휘 영모(令謨)와 상서(尙書) 휘 식(湜), 여흥군(驪興君) 휘 지(漬)가 모두 현조(顯祖)로, 함께 《고려사》에 실려 있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이고, 유일(遺逸)로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세조조(世祖朝)에 대정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다가 풀려나 돌아왔는데, 이로 인하여 능주(綾州)에 거주하면서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이분의 현손(玄孫) 휘 대승(大昇)은 호가 농은(農隱)으로,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병자년(1636)에 의병을 창도하여 그 일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렸으니, 공의 8세이다. 고조의 휘는 제범(濟範)이고, 증조 휘 일신(一臣)은 문학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조부의 휘는 백렬(百烈)이고, 부친의 휘는 진현(振顯)이며, 모친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수속(遂續)의 따님으로 문충공(文忠公) 지연(芝衍)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정해년(1827) 5월 8일에 부춘(富春)의 용두리(龍頭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바탕이 온화하고 인자했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데 법도가 있었고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어 일찍이 장난하거나 방만한 기색이 없었으며, 몸을 비스듬하게 하거나 한쪽 다리에 의지해 서는 모습이 없어 어린 시절부터 남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였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효성이 지극하여 뜻과 몸을 봉양하는 것이 모두 갖추지 않음이 없었고, 집상(執喪)할 때에는 한결같이 예법과 제도를 따랐다. 집안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도리와 규범이 엄정하였고, 종족을 대함에 있어서는 은덕과 정분이 두루 미쳤으며, 벗들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온화함과 공경함이 모두 지극하였다. 무릇 굶주리거나 병든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어 내버려두지 않았다. 대대로 가학으로 향리의 명가가 되었는데, 공이 이를 계승하고 훈육되어 감히 실추시킴이 없었다. 족숙(族叔) 사애 선생(沙厓先生 민주현(閔胄顯))이 바로 매산(梅山) 홍문경공(洪文敬公 홍직필(洪直弼))의 뛰어난 제자로 학문에 연원이 있었기에 공은 사애를 따라 그 학문의 일부를 들으며 사숙(私淑)의 의리를 붙일 수 있어 학문의 조예가 높고 깊었으며, 명성과 인망이 성대하고 장중하여 당시 사우(士友)들에게 의지함과 우러름을 받았다. 일찍이 격언(格言)이나 중요한 말을 모아 자리의 오른쪽에 붙여두고 스스로를 비추어 살폈고, 또 그 말을 들어서 자제와 제자들을 경계하였다. 계유년(1873) 5월 29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세청면(世清面) 어촌(漁村) 오른쪽 세동(細洞)의 경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재찬(在燦)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유순하였으며, 부인으로서의 법도를 잘 갖추었다. 자녀는 4남1녀를 두었으니, 선호(善鎬)는 백부(伯父)의 양자로 나갔고, 다른 아들은 계호(啓鎬)ㆍ상호(尚鎬)ㆍ창호(昌鎬)이며, 딸은 공주(公州) 이병귀(李秉龜)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영하(泳夏)ㆍ영은(泳殷)ㆍ영주(泳周)이고, 나머지는 어렸다. 아아, 공은 우리 마을에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우며 화락한 행실이나 문학과 시례(詩禮)의 풍모가 마을 자제들의 모범이 되었는데, 수명이 오십도 되지 못하고 갑자기 이 세상을 버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옛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오늘을 슬퍼하니 단지 남은 생애의 한이 절실할 뿐이다. 영하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니, 감히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致奭。字潤華。號竹湖。驪興人。平章事諱令謨。尚書諱湜。驪興君諱漬。皆顯祖也。俱載麗史。至我朝。有諱懷參。號義庵。逸執義。世祖朝謫守大靜縣。放還因居綾州。子孫世居焉。至玄孫諱大昇。號農隱官奉事。丙子倡義旅。事載節義錄。於公爲八世。高祖諱濟範。曾祖諱一臣。文行著世。祖諱百烈。考諱振顯。妣河東鄭氏遂續女。文忠公芝衍後。純廟丁亥五月八日。生公于富春之龍頭里。天資溫仁。語默有常。動靜有節。未嘗有戱嬉放慢之色。傾側跛倚之容。自在髫齡。人皆敬之。事親至孝。志體之養。無不畢給。執喪要遵禮制。御家人倫理嚴正。待宗族恩誼淶洽。接朋友和敬備至。凡有饑饉疾戚。隨力扶恤。未有關遺。世以詩禮爲鄕里名家。公承襲擩染。無敢失墜。族叔沙厓先生。卽梅山洪文敬公高第弟子也。學有淵源。公從沙厓得聞其緖餘。以附私淑之義。造詣崇深。聲望隆重爲。一時士友所倚仰。嘗聚格言要語。貼于座右。以自鏡考。又舉以戒子弟及生徒。癸酉五月二十九日考終。葬世清面漁村右細洞庚坐原。配密陽朴氏在燦女。貞靜柔嘉。閫儀甚備。四男一女。善鎬出爲伯父后。啓鎬尚鎬昌鎬。女適公州李秉龜。孫男泳夏泳殷泳周。餘幼。嗚呼。公吾鄉先進宿儒也。其孝友愷悌之行。文學詩禮之風。爲鄉子弟所矜式。豈知壽未半百而遽棄斯世也耶。緬古傷今。只切餘生之恨。泳夏奉家狀。有不朽之託。不敢以非其人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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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춘헌 임공 유사 樂春軒任公遺事 공의 성은 임(任)이고, 휘는 수환(秀煥)이며, 자는 윤문(允文)이다. 시조(始祖) 휘 호(灝)가 중국 소흥부(紹興府)에서 동쪽으로 와서 회주(懷州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아래에 정착하면서 자손이 그대로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작위와 공훈으로 저명한 석학들이 대대로 찬란하였다. 휘 광세(光世)에 이르러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졌으며, 이분의 손자 발영(發英)이 임진년 변란 때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용만(龍灣 의주)까지 호송하였는데, 선묘(宣廟 선조)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 시를 지어 말하기를, "하늘이 임발영을 낳으니, 우리 사직의 신하라네[天生任發英, 爲我社稷臣.]"하고 정훈 이등(正勳二等)으로 예양군(汭陽君)에 봉하였다. 이분의 손자 설(渫)에 이르러 훈련 부정(訓錬副正)으로 발포(鉢浦)의 전쟁에서 순절하자,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으니, 공에게는 7세조가 된다. 증조 휘 명중(命重)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시오(時五)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휘 흥언(興彦)은 통덕랑(通德郞)에 올랐고, 모친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광직(光稷)의 따님으로 순묘(純廟) 신미년(1811) 9월 16일에 공을 낳았다. 형제 셋에 공이 막내였는데, 집안이 대대로 매우 가난하였기에 맨손으로 분가하여 고생고생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일하였다. 일의 형세와 재력이 조금 펴지자 항상 말하기를, "나이든 부모님이 집에 계시고 두 형님이 모두 가난하여 콩죽이나 물을 바쳐 기쁘게 해드리니, 이 몸이 전적으로 책임질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자신은 묵은 솜의 베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부모님의 몸에 편안한 옷과 입에 맞는 음식을 모두 갖추어 드리지 않음이 없었고,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상사(喪事)를 치르는 데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모두 자신이 마련하여 남은 유감이 없게 하였으며, 두 형님을 섬길 때에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있든 없든 함께하였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여러 조카들을 보살펴 양육함에 자기에게서 나온 자식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마음가짐은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몸가짐은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며, 근면과 검약으로 집안을 다스렸고 온화함과 너그러움으로 다른 사람을 대했으니, 이 때문에 각기 환심을 얻어 안팎으로 원망이 없었다. 일찍이 한 번은 길을 가는 중에 도적을 만나 지니고 있던 자기의 물건과 이웃 사람이 맡긴 물건을 모두 잃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잃은 것을 말하지 않고 이웃의 물건을 하나하나 갖추어 주었고, 이웃에 사는 사람이 밤에 수확한 벼를 훔치다 다른 사람에게 붙잡히자, 공이 말하기를, "훔쳐간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그에게 준 것이다." 하였으니, 그의 너그러움이 이와 같았다. 길에서 술에 취한 사람을 만나 상해를 입었을 때에 여러 자제들이 이를 분하게 여기자, 공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는데, 무슨 따질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싸우는 실마리는 모두 남의 옳지 못한 것만 보고 자기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못한 데에서 비롯하니, 만약 마음과 생각을 평안하고 너그럽게 하여 자기자신처럼 남을 용서할 수 있다면 어찌 다툼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 때문에 평생 동안 남과 화를 내며 다투어 화평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두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사람은 하나의 몸으로 밭을 갈고 책을 읽는 일을 겸하였는데, 하물며 너희 형제들은 두 개의 몸으로 도리어 이것을 하는데 부족함이 있겠는가. 형은 책을 읽고 동생은 밭을 가는 것도 또한 집안을 위한 계책으로 삼을 만하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하에 휼륭한 일은 모두 갖은 어려움을 겪고 애써 힘쓰는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이것으로 부지런함은 복을 일구는 밭이고, 나태함은 화를 부르는 계제임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은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이니, 이 마음의 바름은 바야흐로 봄기운이 화창하고 따사로울 때에 볼 수 있다." 하고서 인하여 '낙춘(樂春)'을 헌(軒)의 편액으로 걸어두었다. 금상(今上 고종(高宗)) 계유년(1873) 5월 23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享年) 63세였으며, 웅치(熊峙) 梨木嶝(이목등) 진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종유(宗瑜)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봉규(奉奎)ㆍ태규(台奎)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현(金在鉉)에게 시집갔다. 손자 삼현(三鉉)ㆍ오현(五鉉)은 첫째 봉규에게서 나왔고, 철현(喆鉉)ㆍ문현(文鉉)은 둘째 태규에게서 나왔다. 아, 충직하고 참되며 질박하고 성실함은 순박하고 고아한 선진(先進)의 풍모이니, 그 남은 운치와 향기는 비록 풍속이 야박해지고 사라진 때라 하더라도 또한 다하는 날이 있지 않음을 공에게서 알 수 있다. 태규가 칠순의 노쇠한 나이에 눈보라를 맞으며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니, 그의 뜻을 애닯게 여겨 감히 번다하게 사양하지 못했다. 公姓任。諱秀煥。字允文。始祖諱灝。自中國紹興府東來。止於懷州天冠山下。子孫仍貫焉。自是爵勳名碩。世代煒燁至諱光世。封冠山君。有孫發英。壬辰之變。奉廟社。扈于龍灣。宣廟嘉之。有詩曰。天生任發英。爲我社稷臣。以正勳二等封汭陽君。至孫渫。以訓錬副正。殉節于鉢浦之役。命旌閭。於公爲七世。曾祖諱命重。贈司僕寺正。祖諱時五。贈左承旨。考諱興彦。通德郞。妣仁川李氏光稷女。以純廟辛未九月十六日生。公兄弟三人。公其季也。家世貧甚。赤手分炊。而辛勤拮据。事力稍紓。常曰。老親在堂。二兄皆貧。菽水供歡。其非此身之專責乎。自衣縕袍。自喫處糲。而所以安其體適其口者。無不畢給。遭內外艱。初終凡具。皆自營辦。俾無餘憾。事二兄。友悌甚篤。有無共之。及其歿。撫養諸姪。無間已出。宅心醇實。持身謙恭。御家勤儉。接物和裕。是以各得歡心。内外無怨。嘗路中遇賊。所携己物及隣人所付物。竝失之。歸家不言所失。隣物一一備給。隣氓夜竊穫禾。爲人所執。公曰非竊也。吾固與之耳。其含容如是。路次遇酗酒人見傷。諸子忿之。公曰。彼卽酒妄。有何計較也。嘗曰。人之爭端。皆由於只見人之不是不見己之不是處也。若能平心坦慮。恕人類己。則豈有爭也。是以平生未嘗與人忿爭以失其和也。戒二子曰。古人以一箇身。兼耕讀之業。況汝兄弟以二箇身。而乃有闕於此乎。兄讀弟耕。亦可爲家户之計也。又曰。天下好事。皆自艱難辛苦中來。是知勤苦爲福田。懶怠爲禍階。汝等戒之。又曰。仁者天地生物之心。此心之正於方春和煦之時可見。因以樂春揭軒。今上癸酉五月二十三日卒。享年六十三。葬熊峙梨木嶝辰坐原。配天安全氏宗瑜女。有婦德。生二男一女。男奉奎台奎。女適光山金在鉉。孫三鉉五鉉長房出。喆鉉文鉉次房出。嗚呼。忠信質慤。此是醇古先進之風也。其餘韻遺馥。雖在風澆俗喪之日。而亦未有可盡之日。觀於公可以知矣。台奎七耋衰齡。觸冒風雪。有不朽之託。悲其意不敢多辭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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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 김공 유사 莘溪金公遺事 공의 휘는 만원(萬源)이고, 자는 명은(明恩)이며, 호는 신계(莘溪)이다. 김씨(金氏)는 본래 경주(慶州) 사람으로, 고려조에 휘 충한(冲漢)이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는데, 이분이 계보(系譜)에 오른 시조(始祖)이다. 휘 대기(大器)는 호가 경재(警齋)이고, 진사(進士)였는데,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에게서 수업하여 마침내 선생의 학문을 전했으며, 이분이 낳은 휘 명철(命哲)은 임진년(1592)에 의병을 일으켰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으며, 이분이 낳은 휘 횡(鑅)은 호가 태암(泰巖)으로 동중추(同中樞)를 지냈고 병자란(丙子亂) 때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 안방준(安邦俊))을 따라 의병을 창도하였으니, 이분들이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 휘 희학(希學)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증조 휘 지형(之炯)은 문학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조부 휘 홍기(鴻基)는 호가 농와(聾窩)로 은덕(隱德)이 있었으며, 부친 휘는 종국(鍾國)이고, 모친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욱해(郁海)의 따님이다. 헌종(憲宗) 임인년(1842) 12월 12일에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이 태어났다. 7세에 학문을 시작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이끌거나 독려하지 않아도 과정(課程)을 준수했다. 장성해서는 이웃 마을의 지남(芝南) 이공(李公)을 통해 비로소 과거 공부가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이 아님을 알고서 마침내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받아 읽으며 나아갈 방향을 밝혔고, 이로 인해 사자(四子)와 육경(六經)8)에 미쳐가면서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처음부터 그친 적이 없었다. 집안 형편이 평소 넉넉하지 않았기에 산에서 나무하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으며, 밭을 일구고 힘써 거두어 좌우에서 봉양하는 것이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형제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재물을 함께하고 한솥밥을 먹으며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공의 형체와 관상은 질박하고 예스러웠으며, 풍모와 거동은 너그럽고 평이하였으며, 말은 어눌하게 하여 민첩하지 않았고, 문장은 서툴게 표현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천성에 맡기고 분수를 지킨 채 구구하게 꾸미는 태도가 없고 쉴 새 없이 일에 빠져 몰두하려는 뜻이 없어 일상생활의 말과 행동이 곤곤한 하늘의 조화 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다툼이 없었고, 일에 임해서는 겉으로 공을 드러냄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매번 곤궁한 집과 차가운 걸상이나 푸성귀 아침과 소금국 저녁을 볼 때마다 담박한 맛이 손으로 움켜 쥘 만큼 넘쳐흘렀다. 신묘년(1891) 가을에 향촌 내의 여러 벗들과 함께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화엄사(華巖寺)에 가서 최계남(崔溪南)9)ㆍ정애산(鄭艾山)10)과 종유하며 여러날 강학하고 토론하였는데, 천성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이 없는 듯하였지만 벗들과 술마시는 흥취에는 남보다 뒤질까 두려워하였으며, 매번 산중 누각에 달이 떠오르는 밤이나 강둑에 봄바람이 불 때에는 몇 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화락하게 도취하여 그윽한 감상의 흥취를 다하였다.임인년(1902) 10월 7일에 삶을 마치니, 신산(莘山) 오른쪽 기슭 갑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계진(啓鎭)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1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권주(權柱)이고, 딸은 정재우(鄭在禹)에게 시집갔다. 아아, 공은 세상에 발을 내딛지 않고 세속에 머리를 적시지 않은 채 백발이 되도록 경서를 궁구하고 유유자적하게 스스로를 즐기면서 만년의 행로에 때 묻지 않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친구 중에 매우 얻기 쉽지 않다. 공의 풍모를 우러러 추억하니 어찌 참담한 슬픔을 가눌 수 있겠는가. 이에 행적을 기록해 달라는 권주의 부탁을 차마 번다하게 사양하지 못했다. 公諱萬源。字明恩。號莘溪。金氏本慶州人。麗朝有諱冲漢。官禮儀判書。是爲登譜之祖。至諱大器。號警齋進士。受業于重峯趙先生。遂傳其學。生諱命哲。壬辰擧義。贈掌樂院正。生諱鑅。號泰巖同中樞。丙子亂。從牛山安先生倡義旅。皆其顯祖也。高祖諱希學。贈戶曹參議。曾祖諱之炯。文行著世。祖諱鴻基。號聾窩。有隱德。考諱鍾國。妣商山金氏郁海女。憲宗壬寅十二月十二日。公生於莘山里。七歲上學。幼儀不待提督而遵循課程。及長。因隣閈芝南李公。始知功令之業。非爲己之學。遂授讀石潭要訣。以明其趨向。因以及於四子六經。研精覃思。未始有己。家泰不贍。樵山漁水。服田力穡以爲左右就養者。無所不至。與其弟友愛甚篤。同財共㸑未有分異。公體相質古。風儀坦夷。言語訥而不捷。文辭拙而不巧。任眞推分。無拘拘矯飾之態。無營營汨没之意。而日用云爲。無非自滾滾天機中出來。是以接人無爭競。臨事無表襮。處事無逕庭。每見其窮齋寒榻。朝齏暮鹽。澹泊氣味。津津可掬。辛卯秋。與鄕裏諸友。往從崔溪南鄭艾山於方丈之華巖寺。累日講討。性恬淡。若無所嗜好。而於朋酒興致。惟恐不先於人。每於山樓夜月。江堤春風。携多小知舊。觴咏陶暢。俾盡幽賞之趣。壬寅十月七日卒。葬莘山右麓甲坐原。配坡平尹氏啓鎭女。有婦德。生一男一女。男權柱。女適鄭在禹。鳴呼。公不出脚於世。不濡首於俗。而白首窮經。囂囂自樂。不失爲晚路之完人。此在知舊。甚不易得。追仰風韻。曷勝悲愴。茲於權柱誌行之託。有不忍多辭焉。 사자(四子)와 육경(六經) 사자는 공자(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 네 선생의 가르침이 담긴 《논어(論語)》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ㆍ《맹자(孟子)》를 가리키며, 육경은 유가의 여섯 가지 경전으로,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예경(禮經)》ㆍ《악경(樂經)》ㆍ《역경(易經)》, 《춘추(春秋)》를 가리키는데 《악경》은 진(秦)나라 분서갱유(焚書坑儒) 때에 없어져 지금은 오경(五經)만 남아 있다. 최계남(崔溪南) 조선 후기와 개항기의 유학자인 최숙민(崔琡民, 1837~1905)으로 계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이고, 호는 존와(存窩)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으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삭발령이 내렸을 때 죽을지언정 삭발할 수 없다고 항거하는 등 유학의 도를 지키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정애산(鄭艾山) 조선 후기와 개항기의 유학자인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죽기까지 15년간 학문에 몰입하였으며,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猥筆辨辨)〉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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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덕재 윤공 유사 贈通政大夫德齋尹公遺事 공의 휘는 필중(必中)이고, 자는 익서(益瑞)이다. 윤씨(尹氏)의 계보는 파평(坡平)에서 나왔으니, 고려 태사(太師) 휘 신달(莘達)을 시조로 삼았으며, 문정공(文靖公) 휘 집형(執衡)ㆍ문숙공(文肅公) 휘 관(瓘)ㆍ문헌공(文獻公) 휘 위(威)가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문헌공이 적을 토벌하여 남원(南原)에서 공을 세우고 남원을 식읍(食邑)으로 삼았기에 자손들이 그대로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휘 만동(萬東)에 이르러 능주(綾州)에 우거하였다. 고조 휘 상양(商鍚)은 호가 신재(愼齋)로 은거하여 도의를 행하였는데, 언제가 한번은 흉년을 만나 한 마을의 조세를 대신 내주자 마을 사람들이 비(碑)를 세워 칭송하였으며,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 증조 휘 홍도(弘道)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조부 휘 창종(昌宗)은 호가 계남(溪南)이며, 부친 휘 일주(壹周)는 호가 봉남(鳳南)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모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덕립(德立)의 따님이다. 공은 정종(正宗) 기유년(1789)에 능주(綾州) 동면(東面) 회덕리(懷德里)에서 태어났다. 풍채와 기골이 뛰어났고, 성품과 기질이 온유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응대하는 것이 공손하였고, 받들어 따르는 것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스승에게 나아가 《소학》 책을 받아 읽게 되어서는 일상생활의 절도를 하나하나 준수하여 입으로는 비루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내지 않았고, 손으로는 부잡한 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무릎을 모으고 단정히 않는 모습이 성인처럼 의젓하였으니, 이웃 마을에 사는 통정 대부 이공(李公) 인석(寅錫)이 공의 남다름을 듣고서 딸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아우들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재산과 집기를 있거나 없거나 함께하였고, 내외의 친척에게 은덕과 정의가 융성하고 흡족하여 각기 환심을 얻었다. 일찍이 한번은 크게 흉년이 든 적이 있었는데, 대소 가솔이 모두 한 집에 모여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집안에 불화가 없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몸이 상할 정도로 슬픔이 깊었고, 수질과 요대를 벗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온갖 정성과 형식을 한결같이 예법과 제도를 따랐다. 공은 평소에 명예나 이익을 바라지 않았고 평판이나 권세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분수에 편안하고 천성에 따라 유유자적하였다. 일찍이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선(善)을 쌓으면 반드시 훗날 복이 있을 것이고, 불선(不善)을 쌓으면 반드시 훗날 재앙이 있을 것이다. 복과 재앙은 자기 자신이 구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병진년(1856) 2월 5일에 삶을 마치니, 본면(本面) 원산(院山) 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이씨(李氏)는 정숙하고 온유하였으며 규문의 법도에 빠짐이 없었다. 1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태행(泰行)이고, 딸은 여흥(驪興) 민치호(閔致鎬)와 김해(金海) 김규엽(金圭燁)에게 시집갔다. 태행은 외아들 병임(秉臨)이 일찍 죽어 자식이 없자 종부제(從父弟) 태승(泰勝)의 아들 병현(秉玹)을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병현의 아들 정섭(定燮)이 나와 종유(從遊)하였는데, 하루는 대인(大人)의 명으로 가장(家狀)을 안고 와서 한마디 말을 적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오래도록 굳게 사양하였으나 정섭의 요청이 갈수록 간절하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수식하고 윤색하였다. 公諱必中。字益瑞。尹氏系出坡平。以麗太師諱莘達爲始祖。文靖公諱執衡。文肅公諱瓘。文獻公諱威。皆其顯祖也。文獻討賊南原。有功食米南原。子孫仍貫焉。至諱萬東。寓綾州。高祖諱商鍚。號愼齋。隱居行義。嘗遇饑歲。替納一鄕之稅。鄉人立碑頌之。贈參判。曾祖諱弘道。通政。祖諱昌宗。號溪南。考諱壹周。號鳳南。通政。妣金海金氏德立女。公以正宗己酉。生綾之東面懷德里。風骨岥嶷。性氣溫裕。事親至孝。應對唯諾。承順如流。就傳授讀小學書。日用節度。一一遵循。口不出鄙悖之言。手不作浮雜之戱。端坐斂膝。偉然如成人。隣里通政李公寅錫。聞其異。以女妻之。與其弟友愛甚至。財產什物。有無共之。內外族戚。恩誼隆洽。各得歡心。嘗遇大無。大小家眷。渾聚一室。同鼎綴食。而庭無間言。遭內外艱哀毀過甚。不脱絰帶。不御酒肉。凡百情文。一遵禮制。平日不慕名利。不遂聲勢。安分任眞。囂囂如也。嘗戒子孫曰。積善必有餘慶。積不善必有餘殃。惟慶惟殃。無非自已求之。何怨天尤人之有。丙辰二月五日考終。葬本面院山壬坐原。齊李氏貞靜溫柔。閫範無闕。舉一男二女。男泰行。女驪興閔致鎬金海金圭燁。泰行有一男秉臨早死無育。取從父弟泰勝子秉玹爲後。秉玹子定燮。從余遊。一日以其大人命抱家狀。有一言之託。余牢辭久之。而定燮之請愈勤。謹据狀以修潤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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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倫吟示族孫正遠 欲孝學先務。移忠功亦然。造端由此出。燕毛率是傳。至哉五行土。箇箇隨處圓。五者如可能。不負所生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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戱次外孫【任泰默】觀漲韻 白馬御鞍走。黃鳥舊翼飛。安將萬斛水。濯了人間衣。急如曺瞞走。勇似黃盖飛。臥龍高處坐。談笑撫氅衣。觸地靑山動。參天白鍊飛。應知銀河渚。雲孫落錦衣。觸處雷霆怒。走時泡沫飛。仙子生塵襪。步步著鮮衣。波底潛龍動。洲邊濕鳥飛。行客躕躇立。渡頭未褰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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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처사 선생 명촌86)【기현】의 운에 삼가 차운하다 謹次黃處士先生明村【紀顯】韻 산속에 천지가 열려 일월이 밝으니 (山闢乾坤日月明)선생의 고아한 아취 속세의 때가 적었네 (先生高趣世塵輕)숭정87) 이후로 천년의 한이 서렸고 (崇禎以後千年恨)대은88)은 이 사이에서 백세의 맹세를 하였네 (大隱斯間百歲盟)율리89)의 맑은 바람에 도연명은 취하고 (栗里淸風陶老醉)안풍90)의 아침 햇살에 동생은 밭을 가네 (安豐朝日董生耕)춘추대의의 한 맥이 문미에 있으니91) (陽秋一脈楣端在)예사롭게 붙인 이름 아니라네 (不是尋常以寓名) 山闢乾坤日月明。先生高趣世塵輕。崇禎以後千年恨。大隱斯間百歲盟。栗里清風陶老醉。安豐朝日董生耕。陽秋一脈楣端在。不是尋常以寓名。 명촌(明村) 황기현(黃紀顯)의 호이다. 작자가 10세에 황기현 선생에게『소학(小學)』을 배웠다. 숭정(崇禎) 숭정은 명(明)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라는 말이다. 대은(大隱) 몸은 번잡한 세상에 있으면서 뜻은 속세를 벗어나 고원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진(晉)나라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 "소은은 산속에 숨고, 대은은 시조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市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율리(栗里)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지명으로, 진(晉)나라가 쇠망의 길로 들어서자 도잠(陶潛)이 팽택 현령(彭澤縣令)의 벼슬을 버리고 율리에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晉書 隱逸列傳 陶潛』 은자의 거처를 뜻하는 대명사로 쓰인다. 안풍(安豐) 당(唐)나라 때 동소남(董邵南)이 은거한 곳이다. 그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면서 주경야독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韓昌黎文集 卷2 古詩 嗟哉董生行』 춘추대의의……있으니 원문 '양추(陽秋)'는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이 사람의 호가 명촌(明村)으로, 즉 명나라 마을이기 때문에 한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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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학헌115) 양장【상정】께 드리다 呈心學軒梁丈【相鼎】 골짜기 협소하여 우물 안과 같으니 (峽裏小如井底天)때때로 돌아보매 옛 감회에 잠겨 정히 끝이 없네 (時回曠感正無邊)높아서 파도가 미치지 못하니 지주116) 바라보는 듯하고 (屹不逐波瞻砥柱)가난 속에서 지조를 지키니 탐천117)을 따르는 듯하네 (窮加勵操酌貪泉)재능을 숨긴 채118) 다만 허물을 없애려 노력하고 (蘊櫝但勤磨玷力)무리를 떠나니 누가 소금 수레119)를 끄는 채찍을 잡으랴 (漏群誰着服鹽鞭)선생은 근래 무슨 일을 하시는가 (先生近日干何事)바람 불고 달 뜬 한가한 뜰에 우두커니 앉았으리 (風月閒庭坐嗒然) 峽裏小如井底天。時回曠感正無邊。屹不逐波瞻砥柱。窮加勵操酌貪泉。蘊櫝但勤磨玷力。漏羣誰着服鹽鞭。先生近日干何事。風月閒庭坐嗒然。 심학헌(心學軒) 양상정(梁相鼎)의 호이다. 전라남도 화순 능주(綾州) 출신으로 가선대부 부호군을 거쳐 1893년 호군을 역임하였다. 지주(砥柱) 황하(黃河) 중류에 우뚝 서 있다는 돌기둥을 말한다. 역경과 고난에 맞서서 변함없이 버티어 나가는 큰 인물의 지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탐천(貪泉) 중국 광주(廣州) 땅에 있는 샘이다. 진(晉)나라 오은지(吳隱之)가 광주 자사(廣州刺史)로 부임하였는데, 그곳에는 욕심을 일으킨다는 탐천(貪泉)이라는 샘이 있었다. 그는 청렴한 사람은 탐천을 마셔도 지조를 변치 않을 것이라는 시를 지었다.『晉書 良吏列傳 吳隱之』 재능을 숨긴 채 『논어』「자한편(子罕篇)」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좋은 옥이 여기 있습니다. 독(櫝)에 넣어서 감추어 두겠습니까, 비싼 값을 줄 사람을 구해서 팔겠습니까?' 하였다."라고 하였다. 소금 수레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吊屈原賦)」에 "천리마가 두 귀를 늘어뜨리고 소금 수레를 끌도다.[驥垂兩耳兮服鹽車]"라고 하였는데, 이는 훌륭한 자질을 가진 인물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천한 역(役)에 종사함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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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386) 3장. 선사 간옹을 추모하다 彌山三章 慕艮翁先師 우뚝한 저 미산이여 節彼彌山바위가 우람하도다 維石巖巖혁혁하신 선생이여 赫赫先生사림이 첨앙하도다 士林所瞻만세의 진택387)이여 萬世眞宅저기에 묻히셨도다 于彼藏焉바라보매 감개 일어 望之興感공경하고 삼가노라 式敬且虔-부(賦)이다.-우뚝한 저 미산이여 節彼彌山산빛이 푸르고 푸르도다 維色蒼蒼선생의 도여 先生有道그 광채 바래지 않았도다 不渝其光소자가 그 가르침 받들었으니 小子守訓어찌 감히 왜곡하겠는가 豈敢邪回시절 오래되어 의리 바꾸면 時久義變저 산이 무어라 하겠는가 彼何謂哉-부이다.-우뚝한 저 미산이여 節彼彌山오를 수가 없도다 不可陟兮아 우리 선생이여 嗟我先生일으킬 수 없도다 不可作兮충심을 아뢰려고 하나 縱欲陳衷그렇게 할 수 없도다 不可得兮근심이 바다처럼 커서 憂心如海헤아릴 수 없도다 不可測兮-부이다.- 節彼彌山, 維石巖巖.赫赫先生, 士林所瞻.萬世眞宅, 于彼藏焉.望之興感, 式敬且虔.【賦也】節彼彌山, 維色蒼蒼.先生有道, 不渝其光.小子守訓, 豈敢邪回?時久義變, 彼何謂哉?【賦也】節彼彌山, 不可陟兮.嗟我先生, 不可作兮.縱欲陳衷, 不可得兮.憂心如海, 不可測兮.【賦也】 미산(彌山)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낭산면, 삼기면에 걸쳐있는 미륵산(彌勒山)을 가리킨다. 참고로 전우(田愚)의 묘소는 현재 삼기면 현동(玄洞)에 있다. 진택(眞宅) 사람이 죽은 뒤에 돌아가는 진정한 집, 곧 무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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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포388)에서 열장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多佳浦訪悅丈 不遇 고생고생하며 90리를 와서 辛苦來三舍바닷가에 있는 집에서 만나려고 하였네 歸虛會一堂백산엔 구름 그림자 흩어지고 柏山雲影瑣가포엔 물이 유장하게 흘러가누나 佳浦水流長범조를 어찌 문에다 쓸까389) 凡鳥豈題戶백구만 부질없이 마당에 묶었네390) 白駒謾縶場아아 인간 세상만사 吁嗟人世事삼상391)처럼 어긋난 듯하구나 有若錯參商 辛苦來三舍, 歸虛會一堂.柏山雲影瑣, 佳浦水流長.凡鳥豈題戶? 白駒謾縶場.吁嗟人世事, 有若錯參商. 다가포(多佳浦) 전라북도 익산시 만석동에 있었던 포구이다. 범조(凡鳥)를……쓸까 범조는 '봉(鳳)'을 파자(破字)한 것이다.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매우 친하여 서로 생각만 나면 천 리 먼 길이라도 즉시 달려가 만나곤 했다. 한번은 여안이 혜강의 집을 찾았을 때, 마침 혜강은 출타 중이어서 그의 형인 혜희(嵇喜)가 나와서 여안을 맞았으나, 여안은 들어가지 않고 문 위에다 '봉' 자만 써 놓고 가 버렸다. '봉' 자를 파자(破字)하면 '범조(凡鳥)'가 되므로, 즉 혜희를 범인(凡人)이란 뜻으로 우롱한 것이다. 《世說新語 簡傲》 백구(白駒)만……묶었네 백구는 현자(賢者)나 은사(隱士)가 타고 다니는 말인데, 말을 묶어 놓아 어진 이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는 것이다. 《시경》 〈백구〉에 "깨끗한 흰 망아지가 내 밭곡식 먹었다 핑계 대고 발을 동여매고 고삐를 묶어서 오늘 아침 더 오래 있게 하여 귀한 이 손님을 더 놀다 가게 하리라.[皎皎白駒, 食我場苗, 縶之維之, 以永今朝, 所謂伊人, 於焉逍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삼상(參商)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을 말하는데 삼성은 서쪽에, 상성은 동쪽에 있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동시에 두 별을 함께 볼 수 없으므로, 전하여 친구 간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하는 경우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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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남 종일 과 함께 청덕령을 넘으며 2수 同金小南【鍾一】, 踰淸德嶺【二首】 깊은 가을에 먼 길손이 산골을 가노라니 深秋遠客峽中行길은 인심과 같아 갈수록 울퉁불퉁하구나 路似人心轉不平신 신고 두건 쓰고 옛 벗과 함께해 좋으니 堪喜舃巾聯舊友시 한 수를 주고받으매 새 곡조가 있구나 一詩唱和有新聲예전에 몇 번이나 이곳을 지나갔던가 幾度曾年此地行스승을 모시고 치평의 도를 강론했네 爲陪三席講治平스승 죽고 나라 망한 걸 어이 말하랴153) 樑摧社屋那堪說한이 새 시에 들어가니 오열하고 싶네 恨入新詩欲咽聲 深秋遠客峽中行, 路似人心轉不平.堪喜舃巾聯舊友, 一詩唱和有新聲.幾度曾年此地行? 爲陪三席講治平.樑摧社屋那堪說? 恨入新詩欲咽聲. 스승……말하랴 원문의 '양최(樑摧)'는 훌륭한 스승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저자의 스승인 전우(田愚)가 죽은 일을 말한다. 《禮記 檀弓上》 '사옥(社屋)'은 토지신(土地神)을 제사 지내는 곳에 지붕을 덮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망국(亡國)을 의미한다.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망국의 사에는 지붕을 만들어 덮어서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喪國之社, 屋之, 不受天陽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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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준의 〈호석정〉 시에 차운하다 次金□□【致駿】《湖石亭》韻 사람과 정자 둘 모두 기이하니 人幷亭子兩皆奇명성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으리 應使聲名久不虧난간 두른 비단 호수는 승경을 바치고 繞檻錦湖呈地勝창 앞에 모인 돌은 천연의 자태 드러내네 當牕鍾石見天姿도원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모르지만 未知桃源覓何處청산은 이런 때에 살기에 적합하네 只合碧山棲此時본디 한가한 중에 노력할 일 있으니 自是閒中勤有事경서 연구는 원래 성현 되는 기초네 窮經元作聖賢基 人幷亭子兩皆奇, 應使聲名久不虧.繞檻錦湖呈地勝, 當牕鍾石見天姿.未知桃源覓何處, 只合碧山棲此時.自是閒中勤有事, 窮經元作聖賢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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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등의 〈두어〉 시에 차운하다 次郭登《蠹魚》韻 유독 책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偏向書中藏貌形어찌하여 어류의 이름을 덮어썼는가 胡然水族冒之名글 뜻을 전혀 모른다고 비웃지 말라 莫嘲全不知文意그래도 글자 먹으며 일생을 지낸다네 食字猶能度一生 偏向書中藏貌形, 胡然水族冒之名?莫嘲全不知文意, 食字猶能度一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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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명 병회 을 찾아가다 절구 3수 訪楊克明【秉晦○三絶】 십 년 만에 그대 얼굴 보았으니 十載見君面이번 행차는 참으로 어려웠네 此行良亦難마음속에 산천이 있으니 心中山水在옛 곡조를 탈 필요가 없네 古調不須彈대견하게 그대는 제 힘으로 먹길 좋아하니 多君力食好감과 밤이 있어 온전히 가난한 것 아니네 柹栗未全貧가족 이끌고 깊이 들어가 살길 경영하니 挈眷營深入맑은 풍도가 다시금 사람을 감동시키네 淸風更動人연원은 낙건149)을 따랐고 淵源從洛建의리는 《춘추》를 본받았네 義理準春秋한 줄기 계화도 문하 학문을 一脈華門學세한에도 힘써 함께 닦으세 歲寒勉共修 十載見君面, 此行良亦難.心中山水在, 古調不須彈.多君力食好, 柹栗未全貧.挈眷營深入, 淸風更動人.淵源從洛建, 義理準《春秋》.一脈華門學, 歲寒勉共修. 낙건(洛建) 정주학(程朱學)을 말한다. 정자(程子)는 낙양(洛陽)에서 살고 주자(朱子)는 복건(福建)에서 살며 강학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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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초하루 孟夏初吉 봄 보내고 돌아와 푸른 그늘 정자에 누웠는데 送春歸臥綠陰亭술병으로 무거운 몸 어찌 이리 깨지 않는가 病酒沈沈柰未醒초협에선 책 꾸러미가 아침이슬에 촉촉하고 楚峽書裝朝露濕봉산에선 고향생각이 저녁구름에 깊어지네 蓬山鄕思暮雲冥하목327)의 기이한 재주에 천재인가 놀라고 才奇霞鶩驚天授아양328)의 옛 거문고에 속된 이목 깨우치네 琴古峨洋砭俗聽요즈음 영동329)에는 멋진 일들 많을테니 近日瀛東多勝事가벼운 신으로 새 답청놀이 다시 기약하네 更期輕屐踏新靑 送春歸臥綠陰亭, 病酒沈沈柰未醒.楚峽書裝朝露濕, 蓬山鄕思暮雲冥.才奇霞鶩驚天授, 琴古峨洋砭俗聽.近日瀛東多勝事, 更期輕屐踏新靑. 하목(霞鶩) '낙하고목(落霞孤鶩)'의 준말인데 낙하는 지는 노을을, 고목은 외로운 따오기라는 뜻이다. 왕발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넓은 하늘과 한 빛이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고 하였는데, 강가의 저녁 경치를 절묘하게 표현한 명구로 평가받는다. 아양(峨洋)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타고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 곡조로, 여기서는 뛰어난 거문고 연주 솜씨를 가리킨다. 거문고의 명인인 백아가 높은 산을 연주하면 친구인 종자기가 "태산처럼 높고 높도다.[峨峨兮若泰山.]"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을 연주하면 "강하처럼 양양하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列子 湯問》 영동(瀛東) 전라북도 고부(古阜) 영주산(瀛州山)의 동쪽, 지금의 정읍시 고부면을 말한다. 영주(瀛州)는 고부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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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중 태일 의 별장에서 김견암 어른 태희 에게 드리다 崔汝重【泰鎰】庄上呈堅菴金丈【泰熙】 요란한 천지에도 하나의 복전464)이 있어 擾攘乾坤一福田북산의 별장으로 봉래산 신선 찾아갔네 北山庄上訪蓬仙역 광장의 연기나는 전차엔 오랑캐465) 바쁘고 驛場烟電奔夷卉땅 위 절의 풍경소리에 불경466)을 외우네 土寺鈴鍾誦佛蓮밤에 홀로 밝은 달 아래 높이 노래하고 獨夜歌高明月下늘그막의 도는 옛 서적 옆에 있었구나 晩齡道在古書邊뜬 인생에 맑은 인연 적어 한스러웠는데 浮生却恨淸緣少삼십년 만에 비로소 새 시를 드리네 始贈新詩三十年 擾攘乾坤一福田, 北山庄上訪蓬仙.驛場烟電奔夷卉, 土寺鈴鍾誦佛蓮.獨夜歌高明月下, 晩齡道在古書邊.浮生却恨淸緣少, 始贈新詩三十年. 복전(福田) 복(福)을 낳게 하는 밭이라는 뜻인데, 부처를 섬기면 복이 생기는 것이 마치 밭에서 곡식이 나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이른 말이다. 오랑캐[夷卉] 원문의 '이훼(夷卉)'는 훼복(卉服)을 입은 오랑캐를 말한다. 훼복은 풀 옷으로, 미개한 섬 오랑캐로 여기서는 일본인을 지칭한 말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섬 오랑캐는 풀 옷을 입는다.[島夷卉服]"라고 하였다. 불경[佛蓮]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말한 것인데 불경(佛經)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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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운을 써서 여안에게 주다 用前韻 贈汝安 요즈음 홀로 문 닫고 그대 생각하니 近日思君獨閉門흰 머리가 몇 가닥 더 늘었는고 幾莖添得鬢霜繁선대의 고향에서 되레 부평초 신세 되어 先鄕還作水萍迹새해에야 서로 고향47)에서 만나는구나 新歲相逢桑梓村옥을 다듬는 공정으로 좋은 기물 이루면서 琢玉工程成美器벌단의 생활48)로 공밥 먹는 걸 경계해야지 伐檀生活戒空飧어느 때나 한 집에서 단란한 모임 갖고 何時一室營團聚상체49) 꽃 앞에서 함께 술잔 기울일까 常棣花前共酌罇 近日思君獨閉門, 幾莖添得鬢霜繁.先鄕還作水萍迹, 新歲相逢桑梓村.琢玉工程成美器, 伐檀生活戒空飧.何時一室營團聚, 常棣花前共酌罇. 고향 원문의 '상재(桑梓)'는 《시경》 〈소반(小弁)〉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공경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부모가 살던 고향을 뜻한다. 벌단의 생활 '공밥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비유한 것이다. 《시경》 〈벌단(伐檀)〉에 "끙끙 박달나무를 베어, 하수(河水)의 물가에 놓아두니, 하수가 맑고도 찰랑이네. 벼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아니하면, 어떻게 벼 삼백 단을 얻을 수 있으며, 사냥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네 뜰에 매달린 담비를 볼 수 있겠는가. 저 군자여, 공밥을 먹지 않는도다.[坎坎伐檀兮, 寘之河之干兮, 河水淸且漣猗. 不稼不穡, 胡取禾三百廛兮, 不狩不獵, 胡瞻爾庭有縣貆兮. 彼君子兮, 不素餐兮.]"라고 하였다. 상체(常棣) 나무 이름인데 《시경》 〈상체(常棣)〉시에 유래하여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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