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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領收證)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각종 영수증을 넣은 피봉. 각종 영수증(領收證)을 넣은 피봉(皮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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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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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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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 영암(靈嚴) 통문(通文)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寅正月 日 靈巖崔門 全州宗中 壬寅正月 日 靈巖崔門 全州宗中 전라남도 영암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임인년에 영암의 최씨문중에서 전주 종중에 보낸 통문의 피봉. 임인년(壬寅年) 영암(靈嚴)의 최씨문중에서 전주종중(全州宗中)에 보낸 통문(通文)의 피봉(皮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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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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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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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領收證第四六八號 昭和十六年度 農會費 地主 邑面 新波里 李敎政 外 一人 代理人 邑面 里 納一金 參拾錢也 (會員割)一金 貳拾六錢也 (地稅割)計 金 ,五六右 領收候也昭和 年 月 日南原郡農會 邑面分區取扱者注意一 期限內納付セラルベシ(할)事二 期限經過セバ(하면)過怠金ヲ(을)賦課ス(함)三 過怠金賦課納入告知書ヲ(을)受ク(하고도)尙完納セサルトニキハ(치아니한時는)財産押差ノ(의)處分ヲ(을)爲スベシ(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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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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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심상준(沈相駿)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심상준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상준(沈相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상준(沈相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심상준은 실직(悉直) 곧 삼척심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시생(侍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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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花陽春時節物甦醒人何長逝絶回程年深揄社承先業雨冷棣原割半情黃鶴千秋身已遠白鶴一夜夢維驚經歲七旬如許速箇中無不歎浮生 利川后人徐相魯 謹再拜哭輓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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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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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蒼蒼松栢木貫四倚欄干春若長爲此柰何奉有寒 千里孤征客 登程幾顧回不待冬至後陽生奇又來 南陽后生 洪極厚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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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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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홍극후(洪極厚)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洪極厚 李殷弼 洪極厚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홍극후(洪極厚)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홍극후(洪極厚)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홍극후는 유학자로, 남양(南陽)의 후생이다. 그는 스스로를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스스로를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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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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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松還出人間八十載命之有限天門開富貴如夢世外翁片西升下玉京臺三山採藥長生草屳酒手傾不老盃一曲薣歌永別席王孫何事敀無來金海后人金河植謹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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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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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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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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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이극환(李極煥)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극환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극환(李極煥)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극환(李極煥)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극환은 망자의 족질(族姪)이었다. 족질이란 성과 본이 같은 한 일가로서 동종(同宗)·유복친(有服親) 안에 들지 않는 조카 뻘 항렬 정도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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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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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금창수(琴昌洙)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琴昌洙 李殷弼 琴昌洙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금창수(琴昌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금창수(琴昌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금창수는 유학자로, 본관은 봉성(鳳城)이다. 그는 자신을 계하생(契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계하생이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 중 나이가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을 의미한다. 계하생이라고 하였으니 금창수는 망자에 비해 나이가 어린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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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35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35년(순조 35) 3월 13일에 박인필이 정속엽으로부터 산지를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 1835년(순조 35) 3월 13일에 유학(幼學) 박인필(朴仁弼)이 정속엽(鄭速燁)으로부터 산지(山地)를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明文)이다. 정속엽은 안흘미동(鴈屹薇洞)에 선산이 있어서 여러 해 동안 수호해 왔으나, 지난 계미년 즉 1823년(순조 23)에 박인필이 친산(親山)을 이곳에 쓰기 위하여 선산의 좌우 용호(龍虎) 국내(局內)를 매입할 수 있도록 간절히 부탁하자 25냥을 받고 팔았다. 여기에 더하여 정속엽은 금년에 흉년이 들어 마침 살아갈 방도가 없던 터여서 선산 주룡(主龍)의 일맥(一脉)을 3냥을 받고 팔았다. 매매시 이곳과 관련된 전후 문서를 박인필에게 넘겨주었다. 정속엽은 이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만일 가까운 친척이 이의를 제기하여 시끄럽게 한다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거래할 때 증인으로는 유학 황상언(黃相彦)이, 보증인으로는 양진문(梁鎭文)이 참여하여 서명하였으며, 유학 오대연(吳大寅)이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당시 양진문은 상중(喪中)이었지만 문서에 서명하였다. 거래의 대상이 된 산지가 있는 안흘미동이 남원의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박인필이 이보다 훨씬 전인 1824년에 기지방(機池坊)의 미곡원(薇谷員)에 있는 산지를 매입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기지방, 즉 오늘날의 남원시 금지면에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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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機池風憲書目旌褒大孝聖朝之盛典也何則惟皇上帝降衷下民而惇典敷敎者於書垂戎天生蒸民有物有則而秉彛好德者於詩揚訓若是乎天於萬物其爲一大父也而子之於父也亦爲一大父之天也地於萬物抑爲一大母也而子之於母也亦是一大母之地也父如天而生之義莫大焉如地而育之恩莫重焉然則匪父何匪母何恃若當危迫之際而雖委身以死之何爲而有恨乎或或値侍病之日而雖割肉以食之何爲而有惜乎然而挽近以來有如是之行者幾希矣至於本坊三里居密城後人江叟公諱薰九代孫幼學朴東禎以無何之疾數年呌楚病勢漸劇而食飮專廢飢膚漸瘠長委枕席萬身黃脹水不能下咽氣不能開眼命在如縷而幾絶之際者乃去年十二月之時也當此之際其子十七歲兒仁弼遑遑不暇求以身代矣儵然而稟天本然之性自發於幼叺衷生三如一之孝激動於微腔斯須之間欺其渾家乘其時之便隙而蘇子刺股之手執介子割股之刀天然而割其右股從容隱炙至於其父之前呼以稱之曰黃雀炙云云則怳若玉祥之黃雀炙乎如此蒼黃之時將死之厥父隱隱然不知感動而樂食其子之股肉矣自是闕後自有天雷勿藥之慶而次次漸蘇至今復初則其或有天感地激之理而然乎抑亦有鬼護神助之妙而然乎哉以夙成之長者尙不可作意以爲之之事也況以齡妙志微之兒有如此孝感所致者也歟豈不休哉其不歎哉如此之至孝古但聞而今始見也玆以目今見不勝敬歎以不可泯滅之意不待村狀而從坊論緣由馳報爲臥乎事狀壬午閏三月 日風憲金[着名]使[署押](題辭)聞甚嘉尙 從當博採向事卄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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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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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鶴 未聞憂報計音傳世事奔忙㧾彼天自若吐論還昨日是何 惡夢到斯年時期正暮白花節海{止+鳥}應多白髮仙情告友親襄 奉夕煌煌帳燭照靈前 草溪 后人 鄭鎬駿 謹拜哭輓 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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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맑은바람결에 寒菊의 薰香이 짙으온데 임께서 거니시던 四野에는 風霜이 依旧하건만 그 尊顔 뵈올길없고 그 玉聲들을 길 없으니 浮雲같은 世上事에 嗚咽은 더하옵니다. 부디 極樂風韻과 더불어 永生누리옵소서. 宣鎬相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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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 惟人生死摠關天呼弟呼兄度幾年彈琴舘裏 知音少飮酒床邊酌獨憐積德行仁誰未恨寒 風白雪世無緣輀前更問來頭約不答不言淚{氵+林/日}潛 然 益城后人 姻弟金榮億 謹拜 哭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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