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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기 石梧記 용한당(容閒堂) 주인은 나의 죽마고우이다. 하루는 그의 족대부 석오당(石梧堂)의 당기(堂記)를 보여 주었는데, 기문을 지은 사람은 금오 산인(金鰲山人) 홍공(洪公)139)이었다.오호라! 내가 석오당에 올라 이른바 석오라는 것을 본 지 오래 되었다. 일찍이 기억하건대, 그 한 구역의 돌이 평평하게 깔려 방정하였는데 넓이는 십여 명을 용납할 만하였고, 한 그루 오동나무는 둥글기가 수레의 일산 같았고 드리운 그늘은 또 족히 그 돌을 덮을 만하였다. 주인옹은 여기에서 노닐며 읊조리고 여기에서 머물며 지냈는데, 그 그윽한 경치는 형언할 수 없었다.몇 해 전에 듣건대 주인옹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고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기를 옹의 흥치로 지금 비록 이 돌과 오동나무를 소유할 수 없지만 새로 우거하는 문 앞에 반드시 어떤 물건이든 다시 돌과 오동나무 같은 것을 두었으리라 여겼다. 지금 당의 기문을 보건대, 바로 다시 석오(石梧)로 자처하였으니, 어찌 옹은 사물에 국한되는 것이 이와 같은가? 아!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로 통달한 것이다.무릇 사물을 완호하면 국한되고 이치를 따르면 통달하니, 돌과 오동나무는 하나의 사물이지만 돌과 오동나무가 될 수 있는 이치는 실로 하나의 사물이 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능히 지절(志節)에 힘쓰고 힘써 확고하여 꺾이지 않는다면 누가 내 마음이 돌이 아니라 하겠으며, 진실로 능히 취사(取舍)를 분별하여 그 큰 것을 확립하면 누가 그 오가(梧檟)를 버리라140)고 하겠는가. 선을 가려서 굳게 지키는 도는 그 대강이 절실하여 은연히 보통의 명물(名物)에 함축시키는 것이다. 이에 옹이 돌과 오동나무를 위한 것은 사물에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안 지가 오래 되었으니, 어찌 한 구역 돌과 한 그루 나무가 있고 없는 것에 얽매이겠는가. 이것이 집을 떠나 임시로 지내는 곳에 돌과 오동나무를 가까이 하지 않지만 옹이 돌과 오동나무를 위하는 것은 실로 여전한 이유이니, 전날 경물의 사이에 서로 기약한 것은 그 알았던 것이 또한 너무 천박하지 않은가.의림(義林)은 비루한 사람이라 본래 족히 따질 만한 것이 없으니, 원컨대 석오옹(石梧翁)의 뒤를 따라 이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또 금오 산인과 용한당 주인과 함께하여 노년의 계획으로 삼기를 바란다. 容閒堂主人。余竹馬友。一日示其族大父石梧堂堂記。記之者。金鰲山人洪公也。嗚乎。余升石梧堂。見所謂石梧者久矣。曾記其一區石。平鋪方正。廣可容十數人。一株梧。團如車盖。所吐之陰。又足以庇其石。主人翁游詠於斯。盤旋於斯。其窈窕景致。不可名狀。數歲前。聞翁移寓他所。余謂以翁之興致。今雖不得有此石梧。而新寓門前。必有何物復有如石梧者。今見堂記。乃復以石梧自居。何翁之局於物如是耶。噫。非局也。乃所以通也。夫玩物則局。循理則通。石梧一物也。而其可以爲石梧之理。固非一物之所獨得。苟能勉勵志節。確然不拔。則孰謂我心匪石。苟能辨别取舍。立乎其大。則孰謂舍其梧檟。擇善固執之道。其梗槩切實。隱然含蓄於尋常名物之地。於是乎知翁之爲石梧。不在於物而在於己久矣。豈繫乎一區右一株木之有無哉。此所以離室僑居。不與石梧相近。而翁之爲石梧。固自若也。前日之相期於景物之間者。其爲知不亦淺乎。義林鄙生也。本不足爲有無。願從石梧翁之後。講明此義。又與金鰲山人容閒主人共之。以爲桑榆之計。 금오 산인(金鰲山人) 홍공(洪公) 홍경고(洪景古, 1645~1699)를 말한다. 호는 팔우(八愚),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오가(梧檟)를 버리라 맹자가 "지금 장사가 오동나무와 개오동나무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기른다면 천한 원예사가 되는 것이다.[今有場師舍其梧檟, 養其樲棘, 則爲賤場師焉.]"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인데, 이는 곧 사람이 중대한 자기의 심지(心志)는 기를 줄 모르고 사소한 구복(口腹)이나 채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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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헌기 瑞軒記 남쪽 지방에 헤아릴 만한 명산이 하나가 아니지만 그 체덕(體德)을 말한다면 모두 서석산(瑞石山)만 못하다. 봉우리는 기울지 않았고 돌은 거칠지 않으며 초목으로는 가시나무가 없고 벌레로는 독충이 없다. 정령(精靈)이 내린 바에 현인이 배출되고 지맥(枝脈)이 뻗은 곳에 명구(名區)가 서로 바라보인다. 아마도 천지가 열리던 초기에 일종의 정숙(禎淑)한 기운이 모여들어 응결된 것이 있을 것이다. 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백 여리를 달려 화순[爾陵]의 경계에 이르러 연화봉(蓮花峰)이 되었다. 나의 벗 사문(斯文) 김성중(金誠仲)이 연화봉 끝자락에 한 채의 정사를 지었는데 서석산과 정확히 마주하고 있다.무릇 군자는 산에 대해서 적취(積聚)한 형상을 보고 그 덕(德)을 기르고, 후중(厚重)한 형상을 보고 그 인(仁)을 돈독히 한다. 더구나 늘어선 봉우리와 여러 산들과 견줄 것이 아니고 마치 거인장자(巨人長者)가 높은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채 엄연히 창문과 궤석의 앞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아서, 출입하고 기거하며 휴식하고 한가로이 지냄에 비록 잠시라도 떨어지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이 헌(軒)이 '서(瑞)'가 된 까닭이다.오호라! 헌이 이미 상서로우니, 사람이 유독 상서롭게 되지 않겠는가. 감히 침을 뱉지 못하는 것이 청성(靑城)의 산과 같고145) 감히 거만하지 못하는 것이 남간(南澗)의 돌146)과 같아 담담하게 마주하고 묵묵히 계합하며, 가만히 수양하고 고요히 함양하여 낮은 곳으로부터 높이 올라가고 작은 것을 쌓아 큰 것을 이루어 명망과 실상이 높고 무거우며 기풍과 운치가 높고 가파른데 이른다면 한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장차 경성(景星)과 경운(慶雲)147) 같이 우러르고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 같이 사모할 것이니, 그 사람 가운데 상서로움이 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서헌(瑞軒)의 주인이 된 것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南方名山可數者非一。而言其體德。則皆莫若瑞石焉。峯不偏側。石不麤厲。草無荊棘。虫無虺蝎。精靈攸降。賢人輩出。枝脈攸及。名區相望。蓋開闢之初。一種禎淑之氣。有以鍾聚融結者也。山之一支。南走百餘里。至爾陵界爲蓮花峰。余友金斯文誠仲。就峯之趾。築一區精舍。與瑞石的對。夫君子之於山。觀積聚之象以育其德。觀厚重之象以敦其仁。況非列峯群巒之比。而如巨人長者。峩冠博帶。儼然峙立於窓牖几席之前。出入起居。遊息燕閑。雖欲頃刻離之而不可得。此軒之所以爲瑞也。嗚乎。軒旣㙐矣。人獨不爲瑞矣乎。不敢唾如靑城之山。不敢慢如南澗之石。澹對黙契。潛修靜養。自卑而高。積小而大。以至望實隆重。風韻崢嶸。則一世之人。必將仰之如景星慶雲。慕之如祥鳳瑞麟。其爲人中之瑞。果何如哉。庶無負爲瑞軒主人也。 감히……같고 당(唐)나라 두보(杜甫, 712~770)의 시 〈장인산(丈人山)〉에 "청성에서 나그네살이 하게 되면서, 청성 땅에는 침을 뱉지 못하였네.[自爲靑城客, 不唾靑城地.]"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杜詩詳註 卷10》 감히……돌 주자의 시 〈운곡26영(雲谷二十六詠)〉가운데〈북간(北澗)〉에 "흙 끊어지고 시내 또한 나누어지니, 북쪽 아래에 어두운 시내 이루어졌네. 빼어난 돌이 아름다운 이름 얻었으니, 가슴에 새겨 내 감히 거만하랴.[土斷川亦分, 北下成陰澗. 秀石得佳名, 服膺吾敢慢?]"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이 시의 주석에 "시내에 인의석이 있다.[澗有仁義石]"라고 하였다. 남간(南澗)은 북간의 착오로 보인다. 경성(景星)과 경운(慶雲) 고대에 태평 시대에 나타난다고 인식했던 상서로운 현상들이다. 경성은 대성(大星), 덕성(德星)이라고도 하고, 경운은 오색의 채운(彩雲)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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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포기 錦圃記 염계(濂溪)는 용릉(舂陵)에 있는 것이 아닌데 주자(周子)가 호로 삼았고,193) 자양(紫陽)은 건양현(建陽縣)이 아닌데 주자(朱子)가 제호(題號)로 삼았으니,194) 대개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부터 나온 바를 즐거워한 것이다.나의 벗 최 사문(崔斯文) 치화(致和) 씨는 그의 10대조 승지공(承旨公)부터 처음 강진(康津)의 금천(錦川)에 살았고 증조 때 이르러 강진의 성전(城田)에 우거하였는데, 치화는 지금 또 행정(杏亭)에 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장수유식(藏修遊息)195)하는 곳을 금포서실(錦圃書室)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생각건대 몸과 집이 떨어져 그 거처가 일정하지 못해도 부터 나온 바를 잊지 않는 것이니, 염계·자양의 경우와 같다고 말하지 않겠는가.오호라! 월(越) 땅의 새와 호(胡) 땅의 말도 오히려 남쪽 가지에 깃들고 북풍에 의지할 생각이 있는데,196) 더구나 사람은 만물의 영장인데 그 근본을 생각하고 선조를 사모함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스승이나 어른의 행차가 방문 했던 어떤 물과 언덕도 오히려 장차 기록하여 보존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 더구나 선조의 지행(志行)과 도모[謨猷]가 가정에 전해지는 것은 어찌 혹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이런 뜻을 가지고 본령을 삼은 연후에야 자신의 몸을 스스로 아낄 줄 알아 포기하는데 이르지 않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아낄 줄 알면 힘써 배우고 독실하게 행하여 집안에 마땅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것은 모두 차례대로 되어갈 일이다. 나는 치화가 잘 계승하고 전술하여 앞으로 그 집안을 창성하게 날이 있을 것임을 알겠으니, 힘쓸지어다! 濂溪非春陵而周子號焉。紫陽非建陽而朱子題焉。蓋不忘其本而樂其所自生也。余友崔斯文致和甫。自其十世祖承旨公。始居康津之錦川。至曾祖寓同縣之城田。而致和則今且見居于杏亭矣。然於其修息之所。題以錦圃書室。維身家流離。不恒厥居。而不忘其所自生。得非如濂溪紫陽之謂耶。嗚乎。越鳥胡馬。猶有巢南倚北之思。況人爲萬物之靈。而其於懷本慕先。謂何如耶。杖屨所過。某水某邱。猶且記存如是。況祖先之志行謨猷。貽傳於家庭者。豈容晷刻可忘耶。人有此意。爲之本領。然後知自愛其身。而不至於暴棄。知自愛其身。則力學篤行。宜家保族。皆其次第事。吾知致和之善繼善述。昌大其門。將有日矣。勉之哉。 염계(濂溪)는……삼았고 염계는 중국 호남성(湖南省) 도현(道縣)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물 이름이다. 용릉(舂陵)은 호남성 영원현(寧遠縣)에 있는 지명인데, 주돈이(周敦頤)의 출신지이다. 출신지를 호로 삼지 않고 염계를 호로 삼은 것을 말한다. 자양(紫陽)은……삼았으니 자양은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의 자양산을 말한다. 주희의 아버지 주송(朱松)이 여기에서 독서하였는데, 후에 주희가 청사(廳事) 이름을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고 하여 부친을 잊지 않는 뜻을 나타낸 것을 말한다. 건양현은 복건성에 있는데, 주희가 운곡(雲谷)에 회암초당(晦庵草堂)을 짓고 살았다. 장수유식(藏修遊息) 늘 학문에 전념함을 뜻한다. 《예기》 〈학기편(學記篇)〉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 息焉游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월(越) 땅의……있는데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에 "호 땅의 말은 북풍에 몸을 의지하고, 월 땅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짓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심정을 말한다. 《文選 卷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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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고 2수 觀海【二首】 큰 바다가 서쪽으로 연주 청주와 접했는데 大溟西接兗靑濱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진정 장관임을 알았네 壯觀今朝始得眞천하의 팔십일분은 모두 물이요 八十一分都是水백만 천만의 백성들 얼마나 많은 사람인가 百千萬衆幾多人산가지 쌓여 해옥에 가득한들25) 누가 육지를 볼까 積籌盈屋誰看陸삼신산에서 약을 찾으니26) 내가 진나라를 비웃네 求藥三山我笑秦작은 나루터인양 두 바다를 건넜다 들었으니 聞涉二洋如小渡지금 세상에 새로운 전쟁을 더욱 탄식하네 更歎今世戰爭新만 리의 넓은 바다라 물가를 묻지 않으니 萬里滄溟不問濱물이 되기 어렵다27)는 말 진짜임을 알겠네 難爲水說覺爲眞배들이 왔다 가듯이 어수선한 일이 많고 舟來舟去紛多事조수가 밀려왔다 밀려가듯 늙어서 다 죽지 潮落潮生老盡人도를 잃을까 걱정한 선니는 뗏목 띄우려 했고28) 宣尼欲浮憂喪道진나라 높이길 부끄러워한 중련은 바다에 빠지려 했네29) 仲連願蹈恥尊秦바다를 보니 흉금이 탁 트인다고 누가 말했던가 誰云觀海胸懷豁안개 낀 물결이 눈에 가득하니 감개가 새롭도다 滿目煙波感慨新 大溟西接兗、靑濱, 壯觀今朝始得眞.八十一分都是水, 百千萬衆幾多人?積籌盈屋誰看陸? 求樂三山我笑秦.聞涉二洋如小渡, 更歎今世戰爭新.萬里滄溟不問濱, 難爲水說覺爲眞.舟來舟去紛多事, 潮落潮生老盡人.宣尼欲浮憂喪道, 仲連願蹈恥尊秦.誰云觀海胸懷豁? 滿目煙波感慨新. 산가지가……가득한들 장수를 축원할 때 쓰는 표현이다. 해옥(海屋)은 신선이 사는 해상의 집을 말한다. 노인 세 사람이 만나서 나이를 물어보니,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바닷물이 말라서 뽕나무밭이 될 때면 내가 산가지 하나를 내려놓는데, 그동안 내가 헤아린 산가지가 열 칸의 내 집에 벌써 가득 찼다.〔海水變桑田時 吾輒下一籌 邇來吾籌已滿十間屋〕"라고 했다는 해옥첨주(海屋添籌)의 이야기이다. 소식(蘇軾)의 《동파지림(東坡志林)》 〈삼로어(三老語)〉에 나온다. 삼신산(三神山)에서 약을 찾으니 진 시황(秦始皇) 28년에 제(齊)나라 사람 서불(徐巿) 등이 글을 올려 바닷속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재계하고 동남동녀와 함께 신선을 찾으라고 권하자, 진 시황은 서불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딸려서 삼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물이 되기 어렵다 큰 바다를 보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지간한 물은 물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진심 상(盡心上)〉에 "바다를 구경한 자에게 웬만한 물은 물이 되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자에게 웬만한 말은 말이 되기 어려운 법이다.〔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 하였다. 선니(宣尼)는……했고 선니는 공자의 별칭으로, 한 평제(漢平帝) 원시(元始) 원년에 공자를 추시(追諡)하여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하였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천하의 어지러움을 탄식하며,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浮于海.〕" 하였다. 중련(仲連)은……했네 전국 시대 제(齊)나라 노중련(魯仲連)의 고사이다. 전국(戰國) 시대 때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할 때, 위(魏)나라의 신원연(新垣衍)이 진나라가 군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진나라를 황제로 높이자고 제의하자, 당시 조나라에 와 있던 제(齊)나라 노중련이 분개하며 말하기를, "불의한 진나라가 황제가 되어 천하에 정사를 펴게 된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東海)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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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에게 답함 答洪士拯 지난 편지에 인편이 없어 답장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풍영정(風詠亭)109)에서의 만남 역시 갑자기 취소되어 회포를 풀지도 못하였습니다. 편지에 있는 차문(箚問)의 뜻을 그 뒤에 생각해보니 슬픔과 서운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어버이를 모시며 경서를 공부하는 정황은 연이어 편안하신지요? 그리운 마음이 깊어집니다. 의림(義林)은 옛날부터 좋지 못한 재주뿐인데, 어찌 번거롭게 이끌어주시는지요. 《신안기행록(新安紀行錄)》 근래 비로소 읽어보니 완연히 몸이 방장산(方丈山)과 백운산(白雲山)에 있으면서 문장과 술 사이를 노닌 듯하였습니다. 말의 배치와 취사 선택, 그리고 묘사가 어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내 벗의 문사(文詞)에 대한 공력이 근년에 더욱 발전하였으니 또한 기뻐할 만합니다. 바라건대 더욱 힘을 쓰고 더욱 정밀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되【矧翔】110)은 【부모의 병이 나으면】 예전처럼 회복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걱정으로 인하여 일상적인 것을 변경시키고 병이 회복하면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을 특별히 말한 것일 뿐이니 다른 것은 족히 변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병이 들어도 감히 효를 잊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병이 나았다고 갑자기 그 효를 잊어버려서 마음대로 방탕하게 술을 마시는 데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잇몸이 드러나게 웃어 모습이 변하는 것을 꾸짖은 것이지 본래 마음대로 방탕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처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담소하던 모습을 생각한다.……"111)라고 하였는데 비록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사람은 그 슬픔과 그리움이 분명 다른 사람보다 곱절일 것입니다. 어찌 그 모습과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살아계실 때의 모습과 방불(髣髴)함이 없겠습니까? 시조(始祖)와 초조(初祖)의 제사는 체제(禘祭)와 협제(祫祭)로 하니 어찌 일찍이 그 음성과 용모를 볼 수 있었겠습니까? 다시 상세히 살펴야 합니다. 向書無便稽謝。而詠亭之遇。亦坐忽撓未敍。書中箚問之意。追後思之。不勝悵缺。未審侍中經履。連衛錦安。懸溯罙至。義林昔時伎倆而已。有何煩提。新安紀行錄。近始讀之。完然身在方丈白雲文酒遊歷之間也。其措辭去就。何其模寫至此也。吾友文詞之工。近年進進。亦可喜也。願益加勉力。精之又精如何。矧翔復故云云。特言其致憂變常。與夫疾止復故之義而已。他無足辨也。且以有疾而不敢忘孝如此。則豈以疾止而遽忘其孝。以至於任情縱酒者乎。又詈矧變貌。本非任情縱酒之謂也。思其居處。思其笑語云云。雖早而孤露。未及逮事者。其哀慕感想。必有倍於他人矣。豈以未見其音容笑語。而無髣髴如在之儀乎。始祖初祖之祭。若褅若祫。何嘗逮見其音容乎。更詳之。 풍영정(風詠亭) 광주의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김언거(金彦琚)가 지은 것으로, 그는 이곳에서 김인후, 이황, 기대승 등과 교유를 나누었다.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되【矧翔】 《소학(小學)》에 나오는 말로, 부모가 병중일 때 몸가짐의 도리를 가리키는데, "잇몸이 드러나게 웃지 않으며, 활개를 치면서 걷지 않는다.【笑不至矧, 行不翔.】"라고 하였다. 그 거처하던 …… 모습을 생각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나오는 말로, "그 거처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담소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뜻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 좋아하던 바를 생각하고, 그 즐기던 바를 생각한다.【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耆.】"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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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72) 【창섭】에게 답함 答安慶伯【昌燮】 지난번 보내준 한 통의 편지에 결국 답장도 못했는데 또 이렇게 편지를 받게 되니,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심정이 함께 생기네. 빼어나고 영특한 재주로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신 무고한 날에 있으니, 이것은 정히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있는 때이네. 어버이를 섬기는 한 가지 일은 자식이 입신(立身)하는 큰 절도이니, 독서와 학문은 어찌 이것을 밝혀 이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응대(應對)와 진퇴(進退), 온청(溫淸)과 정성(定省)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강구하고 실천하여 반드시 지당하고 흡족한 곳에 이르되 조금도 미적거리거나 유유범범한 뜻이 없다면, 고인이 이른바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겨난다."는 것이 거의 가까울 것이네. 더구나 그대 부친께서 이미 창시(創始)하셨고 그대 형제가 또 다시 계술(繼述)하니, 대대로 유가의 큰 집안이 되지 않겠는가?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하다는 것은 여기에 있을 뿐이네. 질문한 '격물궁리(格物窮理)' 이것은 가장 최초로 착수해야 할 것이니, '절문근사(切問近思)' 또한 이것을 벗어나지 않네. 이것을 놓아두고 이기(理氣)를 말하는 것은 등급과 절도를 뛰어 넘는 것이니, 실로 근래 학자들의 큰 병폐이네.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모사하는 것이니, 무슨 유익함73)이 있겠는가? 무릇 격물(格物)은 실로 한 가지 단서가 아니니, 혹 독서하여 그 의리를 궁구하고, 혹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득실을 분별하고, 혹 사물과 접하여 그 당부(當否)를 처리함에 소당연(所當然)을 궁구하여 그만두지 않고 소이연(所以然)을 궁구하여 바꾸지 않는 것이 있지 않아 이렇게 오래 쌓은 것이 많아진 뒤에는 절로 초탈한 곳이 있을 것이네. 초학자의 병통은 대부분 의도를 두어 조장하는데 있으니, 과연 능히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보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한 것처럼 하면 의도를 두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보존한 것이 절로 익숙할 것이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치지(致知)도 못하고서 갑자기 성의(誠意)를 하려는 것 이것은 등급을 뛰어 넘는 것이라, 힘써 억지로 행하는 자는 어찌 능히 오래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74) 이것을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네. 向書一度。竟未謝復。而又此承貺。感與愧倂。以秀爽開悟之才。在俱存無故之日。此正可與有爲之秋也。事親一事是人子立身大節。讀書學問。豈非所以明此而行此者乎。應對進退。溫淸定省。大小凡百。一一講究。一一踐行。必至乎至當恰好之地。而無一毫因循悠泛之意。則古人所謂本立而道生者。可庶幾矣。況春府丈旣已創始之。君兄弟又復繼述之。則其不爲世世斯文大家耶。周子所謂至尊至貴者。在此而已。俯詢格物窮理。此是最初第一着。切問近思。亦不越乎此也。舍此而曰理曰氣者。末嘗不是躐等凌節。實近日學者之大獘也。捕風摸影。何所禪益哉。大抵格物固非一端。或讀書而窮其義理。或論古今人物而辨其得失。或接事物而處其當否。莫不有以窮其所當然而不容已。與其所以然而不容易。積累多後。自當有脫然處矣。初學之病。多在於着意而助長。果能實見得是。實見得非。如好好色。如惡惡臭。則無待乎着意。而所存自熟矣。程子曰。未致知。遽誠意。是躐等也。勉强行者。安能持久。此當留念也。 안경백(安慶伯) 안창섭(安昌燮, 1874~?)을 말한다. 자는 경백,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유익함 저본에는 '선(禪)'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하여 '보(補)'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정자(程子)가……하였으니 《근사록》권2에 정이천(程伊川)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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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보93) 【장환】에게 답함 答李仁甫【長煥】 세월이 멈추지 않아 여름이 또 깊어졌네. 상중에 보낸 편지를 받고 인하여 이런 즈음에 상중의 절도를 보호하고 있는 줄 알았으니, 얼마나 위로되고 감사한 마음 지극하겠는가? 매번 생각건대, 그대가 연로한 어버이를 모심에 곁에는 형제가 없고 아래로는 자식도 적은데 크고 작은 집안일과 일상생활의 많은 실마리가 또 장차 어버이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는 사이에 자신을 얽매니, 그 고생하는 모습은 나를 대신 걱정스럽게 하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기수(氣數)에 관계 된 것이고 직분이 있는 것이네. 기수에 관계 된 것은 단지 심회를 너그럽고 평탄하게 하여 하늘에 맡겨야 할 것이고, 직분이 있는 것은 정히 마땅히 뜻을 독실하게 하고 사려를 경책하여 성취함이 있기를 기약해야 하니, 오늘의 곤궁함이 훗날 옥성(玉成)94)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오호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모하는 것이 없이 헛되이 살다가 헛되이 죽는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우리 당(黨)에 종유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며 몇 년이나 되었는데, 시종 독실하여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음이 두렵네. 생각건대 그대 또한 응당 생각이 여기에 미쳐 이것을 개연해 할 것이네. 또 더구나 영귀정(詠歸亭)을 운영한 지 십 년이 못 되어 선배 중 노성한 분들이 거의 모두 돌아가셨으니, 오늘날 지켜서 이루어야할 책임은 그대 주변의 한 무리가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쓰시게. 진학(進學)의 공부는 독서가 아니면 불가하고 독서의 방법은 경(敬)을 위주로 하지 않으면 불가하니, 수레바퀴와 새의 날개에서 비유를 취한 것이 매우 분명하네. 일용의 사이에 단지 이 두 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간단(間斷)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세간의 만사는 잠깐 사이에 변하여 사라지니,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것이 없고, 오직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것을 구경(究竟)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95) 이것은 우리들이 평소 늘 일컫던 말이 아니던가? 작은 것만 보고 큰 것에는 어두우며, 세월만 유유히 보내는 공통된 근심은 맹렬히 반성하고 통렬히 개혁하지 않으면 아마 능히 이 관문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日月不住。夏令又深。承疏。因審此際哀節支衛。何等慰感之至。每念哀侍在篤老下。旁無兄弟。下乏子男。而家事巨細。日用多端。又且絆已於蒙率之間。其困苦之狀。令人代悶。然此皆氣數所關。職分所存。氣數所關者。只要寬心坦懷。而付之於天。職分所存者。正宜篤志策慮。而期於有就安知今日之困。不爲他日之玉成哉。嗚乎士生斯世。無所猷爲。而虛生虛死。豈不可惜。吾黨遊從。爲幾許人。爲幾多年矣。而終始篤實可以寄意者。恐無多焉。想哀侍亦應慮及於此。而爲之慨然也。且況詠亭經始未十年。先輩老成幾盡凋零。而今日守成之任。非哀侍一隊人乎。勉之勉之。夫進學之功。非讀書不可。讀書之方。非主敬不可。車輪鳥翼。取譬甚明。日用之間。只將此二。端無有間斷如何。朱子曰。世間萬事。須臾變滅。皆不足置胸中。惟有窮理修身爲究竟法。此非吾輩平日稱道之言耶。見小闇大。悠悠通患。非猛省而痛革之。恐不能透脫此關也。 이인보(李仁甫) 이장환(李長煥, 1874~?)을 말한다. 자는 인보,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옥성(玉成) 학문과 인격이 시련을 통하여 귀한 옥처럼 훌륭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주자가……하였으니 《회암집(晦菴集)》 속집(續集) 권4 〈답마기지(答馬奇之)〉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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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부안김씨(扶安金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0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辛未 辛未 扶安金氏 門中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모년에 부안의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 부안(扶安)의 부안김씨가(扶安金氏家)에서 작성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지관은 일시를 선택하면서 망자의 사주와 시신이 묻힐 장지, 무덤의 방향과 방위, 지세(地勢)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관련된 사항들이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하관 시 안될 사람들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상주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다. 장사택일지는 통상 안장(安葬)의 날짜, 하관(下棺)의 시각, 개토(開土), 방금(放金), 혈심(穴深), 취토(取土), 납폐(納幣), 파빈(破殯), 발인(發引), 정상(停喪)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와 장례일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그 선택이 자손의 화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孝)를 강조하였던 조선왕조의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지면서 뿌리깊은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예법은 중국보다도 훨씬 더 유교적이었으며 더 엄격하였다. 그 중 상제에 관한 것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이 상제를 둘러싼 예송(禮訟)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부안김씨가에서 작성된 이 문서는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고 있다. 장사택일지에서 망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건곤(乾坤) 즉 하늘과 땅으로 달리 표시하였다. 건은 남자를, 곤은 여자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곤선명(坤仙命)'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의 망자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을묘생으로, 안장일은 신미년 7월 초5일이다. 상주는 아들과 3명의 손자들이다. 이 문서에는 또한 '凶葬不忌'라고 적혀 있다. 흉장은 옛날의 환장(還葬)을 뜻하는 것으로, 염을 마친 뒤에 곧바로 장사를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흉년(凶年), 악월(惡月), 천시(天屍), 지살(地殺)의 달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 또는 역병 시에 흔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병길(南秉吉, 1820~1860)이 관상감(觀象監)의 명과학(命課學) 분야 실무관원들과 함께 편찬한 ?선택기요(選擇紀要)?의 순장법(旬葬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산(山)이 열흘〔旬〕 안에 장사를 치르기에 불리한 데 해당되어도 역시 해가 되지는 않는다. 방(方)과 향(向)의 연운(年運)은 따지지 않고 다만 명폐일(鳴吠日)을 선택하여 장사를 치르면 길하다. 세상 사람들은 3일, 5일, 7일, 9일 만에 장사를 치르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을 흉장(凶葬)이라고 말하는데 꺼리는 것이 없어서 세상에서는 이것을 많이 사용한다. 비록 임시변통에 속하지만 필요에 따라 이롭게 사용하는 이치가 여기에 갖추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길일을 선택하여 파토(破土)하고 하루 안에 성분(成墳)을 마쳐서 흉신(凶神)이 그 방위를 지나가게 하고 가토(加土)하고 사묘(謝墓)하면 역시 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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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태인현감(泰仁縣監) 첩보(牒報) 고문서-첩관통보류-첩보 정치/행정-보고-첩보 同治十二年十一月十二日 行縣監趙 兼巡察使 同治十二年十一月十二日 趙中植 兼巡察使 전라북도 태인군 14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편, 『조선시대 전라도의 감사·수령명단』,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5.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1873년(고종 10) 11월 12일에 태인현감(泰仁縣監)이 겸순찰사(兼巡察使)에게 올린 첩보(牒報). 1873년(고종 10) 11월 12일에 태인현감(泰仁縣監) 조중식(趙中植)이 겸순찰사에게 올린 첩보이다. 태인현에 사는 이태한의 의송(議送)에 대해 순찰사는 태인현감에게 도형을 그려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태인현감이 이태한의 소장을 보니, "작년(1872) 4월에 고부(古阜)에 사는 권달진(權達鎭)에게 남촌면 반룡촌의 산지를 사서 아버지를 장사지냈는데 전주에 사는 송진택(宋鎭澤)이 자기가 치표(置標)해 둔 곳이라면서 송사를 벌였고, 또 작년 9월에는 경상도 산청에 사는 김홍건(金弘健)이 자기의 선산이라고 정소(呈訴)하였으므로 다시 값을 물어주고 입지(立旨)를 바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송진택이 그곳은 전에 정소하여 투총(偸塚)을 파낸 곳이라는 이유로 금장(禁葬)을 하였다. 김홍건의 선산 아래나 권달진의 3기의 무덤 아래에는 부지기수의 고총이 있고, 송진택의 묘는 김홍건과 권달진의 묘 아래 55보 떨어진 곳이었다. 월총금장(越塚禁葬)이 법전에 실려 있고, 서로 입장(入葬)할 수 있는 곳이라도 지사(地師)가 불길하다면 아침에 묘를 쓰고 저녁에 파내기도 하는데 송진택은 이런 곳을 모두 자기가 정소하여 파낸 곳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정소하여 도형을 그리게 된 것인데 예리(禮吏)가 그린 도형이 자기가 본 것과 달라 다시 정소하였더니 관에서 적간하기 위해 보낸 좌수(座首)의 말만 믿는 바람에 낙과하여 한계를 정하겠다는 고음(侤音)을 바치게 되었으니 억울하다. 송사를 좋아하는 송진택의 버릇을 엄히 징계하고, 관을 기망한 좌수 김영두(金永斗)의 죄를 엄히 다스려 달라."고 하였다. 태인현감이 판결하면서 양쪽의 문권을 상고하니 송진택이 산소를 쓸 때 조각조각 일곱 사람에게 산지를 사들였음이 드러났고, 산소를 쓴 뒤에 범장(犯葬)한 4기의 무덤을 파낸 상황도 문적에 남아 있어서 이 산의 한 부분은 송진택의 산임이 확실하였다. 그러나 이태한의 문권은 김·권(金權) 두 사람의 두어 장 수표뿐이니 경중(輕重)이 현격히 달라 이태한이 낙과(落科)한 것이었다. 현감은, 이태한의 정소 내용 중에 좌수가 도형을 잘못 그려 관에 보고했다는 등의 말은 송관(訟官)을 은근히 핍박하는 것이니 가볍게 처리할 일이 아니라고 순찰사에게 첩보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송진택의 문권이 이처럼 분명하니 이태한이 억지를 부린 것이므로 즉각 독굴(督掘)하라고 형리(刑吏)에게 제음(題音)을 내렸다. 조중식(趙中植)은 1871년(고종 8) 8월부터 1875년 2월까지 태인현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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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令 首校李太漢之 營題之下一向逃避萬萬痛駭今則別定汝矣出送卽刻捉來是矣此是督掘之事渠答不必入官庭卽其地移去汝看掘去形地▣▣告若一向頑拒▣▣官見辱於渠被誣於渠豈有一毫容恕之意乎依營題必掘乃已汝亦不善擧行當汰去矣十分惕念擧行事癸酉至月卄五日官[着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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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令 差使李東莢段身爲士子營題截嚴之下又爲納侤于官庭仍卽逃躱捱過爲主是何道理雖曰山慾撑中蔑視官長至於此極乎督掘乃已期於捉來向事癸酉臘月十六日官[着押]此亦中李東莢父子中隨現捉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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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婦吳氏實記烈婦▣(吳)氏系出羅州襄平公諱自治之後幼學敬喆之女▣(也)▣▣(吳氏)自幼天性至孝閨範夙著年才十九爲梁相龍妻事舅姑以誠御婢僕以恩里隣咸稱有婦德焉未期年歸寧遭親母朴氏喪哀毁盡節而待其綺制与舅姑送婢催皈則告以弟男幼雉朝夕上食之節朔望其祭之需非不肖女則無可任使者云舅姑宜其言止之至戊申十二月其夫相龍偶得一疾已過旬朔而吳氏尙在親家未能卽歸者盖其親夫人祥期不遠故也終祥急還則夫病彌留万方無效吳氏不避寒暑食飮藥餌之節無不先嘗以進每隨舅姑審其動靜後獨處小室心褠手祝願以身代而涕泣沾襟舅姑見之則輒愉色怡聲恐貽舅姑之憂亦不敢擅延於病夫之側召有睱則惟動紡績以備艱難焉及其夫病轉至難救而己酉四月初七日奄忽殞命則吳氏出門索刀斷左手中指灌血於其夫中口中而指血已盡矣旋而又斫指乃墮地流血淋漓遂洽灌口果延一時之命而是日竟逝焉吳氏乃盡哀大哭因欲自到以從爲左右所止累陷泥中將有投井之擧家人守之竟不得仗其志矣吳氏泣嘆曰吾不見君子之斂殯而期於必死者非義也卽開篋出布帛欲自制襲衣則血指已斷恐其沾汚使人代之曰君子之服皆用帛而所乏者袴妾之婚時所着袴改制則似無妨矣乃出視之曰斜幅之改製亦不正不如用布袴云及其斂日謂其治喪諸族曰姑勿葬以待數日云其舅姑慮其必死絶不使留之戶傍矣入棺之時託以永訣出門而落於層階下以額叩地以石擊祠曰何必禁我之死乎死人固當然而同日同壙則豈不解吾之至寃乎因臆塞氣絶焉左右力救僅生其舅姑不忍慘景至於絶飮吳氏乃親執粥器以勸進舅姑曰汝飮則吾當飮之吳氏遂先飮含口而待舅姑强飮後必僭吐襟懷間蒼黃之際諸族出殯相龍棺於先塋下五里之地吳氏後覺大嚀曰妾將死於君子棺側而今已出殯死失其所死於何處乎因向壁臥㪅無一言盖自其夫終時所着衣常爲塵垢及指血所染者至於再三自投於泥中則形容之慘已無可言而終不㪅衣其親家婢子來侍焉吳氏曰我將死不必來云其弟男來見而終無苦辭悲語卽爲還送焉自其夫殯後知舅姑左右之晝夜相守必致其生畧示不死之志而至於食飮則絶不下咽者已過五日至十一日朝呼婢曰余之日前斷指出於罔指而父母遺体不覺藉地余甚不肖汝或收拾置乎婢果埋庭中矣卽訪褁衣帶間徐言曰此皆無益之事欲死不得亦將奈何且謂其姑曰前日每營移居矣今至此境雖明日當移居云其舅姑只信其言曰汝之所欲吾當一一從之云是夜若有不勝困睡之狀而頹臥寢房其姑同室相守者已過四夜只信其婦之昏倒而於爲假寐之間吳氏僭起出門矣一家遑遑追蹤則廊門四開而自廊門有徒跣至江邊痕故卽往相尋霜月照崖有半天裳帶而絆以褁指之囊置之小石上矣乃知其投而中央旣深莫知所在舟纜且絶繫在北崖急呼溪村人棹舟以來而審視則烈烈之光尙留於十步之波凜凜之風忽起於一丈之水乃吳氏視死如歸之地也其舅家庶從相結授以短棹則衣裳半濕若有一片清氷宛然如封而無一兩水入口云乃運尸入家則雞已鳴矣翌日午遷尸于床而野人望見則自吳氏尸房之上有一段白氣橫亘半空如匹練長虹而直貫于相龍之殯漸漸消盡矣因衆會相指曰吳氏尸體昨夜始援而已爲出殯耶此必燒衣服尸床等物之烟氣而天以風吹送于其夫之新殯者可怪少異傳相互聞之則吳氏之尸尙在床上而家無烟火之擧衆乃驚嘆曰此乃吳氏之正氣云自是日遠近村女聚街集道相限其不識吳氏之生時韻面矣十四日載吳氏樞啓相龍殯同壙于山汰洞艮唑之原道路觀之涕泣相送雖愚夫愚婦莫不感義嘖舌焉余州相龍之四從矣自吳氏來嫁閾其善事舅姑之節每欲一見息服盡情踈竟未果焉余作而行之時往見相龍之病則似不起矣安知五六問有此不忍之事乎閏四月初六日余始落京城十一日到全州境聞行人言曰羅州松山梁氏爲三綱故家而今又出一烈云余乃驚問則不答去曰南下則當詳知云十三日至蘆嶺則行人相言曰梁氏家烈婦壯哉壯哉瑞氣橫亘云余又問其詳則亦不答而去余乃知吳氏之必死者已有先服故也果到長城聞之則是矣自不覺嗚咽興嘆而至北倉則爭言白氣之亘天如是之云皈家則一家老少及一村男女以其聞見詳言其顚末曰烈婦之行不可不記余乃乃宲畧記因節節痛惜而觧之曰吳氏誠孝吾已欽艶而孝爲百行之源則其烈也固矣若夫正直之節物異之事不可不論也盖斷指事乃愚婦倉卒之或爲而指血已盡旋出又斫者丈夫猶難也果延其夫一時之命而命乃在天烈婦亦何哉因欲自頸累滔泥井者不分天地不擇水火之時也若無家人之扶護則烈婦之死輕於鴻毛矣旣不得侄其决志則爲見君子之斂殯而開篋出帛恐其血指沾汚不能自制者悿不忍言斜幅之袴不正不用云者此古女士所謂斜之有餘不若正之不足也孰謂婦人之不知禮姑勿葬以待數日云者此是已决之言而舅姑私情慮其必死使不留尸房者無或怪矣若先知其幾則必不使累日不食之軟弱躬婦盡力投江而爲一遺限也其夫入棺之時以額叩地以石手朗者同日同壙之意而意不觧烈婦之至寃者其非常情之所恥乎親執粥器勸進舅姑之誠而以若崩城之痛不失出天之性吳氏之孝且烈此可險矣强爲先飮惟復舅姑之旨而潜吐襟懷不欺者心其誰知乎舅姑無他子女則吾劣不死已有血肉則亦劣不死云者此是私語其老婢而亦得中矣今已出殯死失其所死於何處云者其夫之殯在於五里之地而山回谷深不知去路之嘆也終不更衣終不飮水則自盡乃已孰能回匹婦之志乎將死之日必訪其墮指者乃全般之意孰謂夫人之不學也請舅姑移居之語欲緩其晝夜相守之意耶婚時資裝衣服可以免未亡前飢寒而棄若獘屣潛起出廊洞開其門者以其夫病終之隨而就欲自頸且恐其舅姑之覺尋决赴大江則將示其昭昭之跡而使知其死取之意也及其臨江潦指之烈指之裂絶裳帶亦盡死力而路之以褁指之囊置于石上者且慮其尸身之難尋斷指之漂失故也自閨至江不過牛鳴之地而踞則迷矣松影㭗㭗於層崖柳陰翳翳於長堤雖男子剛腸夜深犻行自不覺流汗而况閨中一婦豈欲必投於此水而爲死哉然而莫知烈婦之心者冀其或生而使不得死於其夫之尸傍又不得死於其夫之殯下鐵石如是從容豈不壯哉將欲投水之際必擇其深而波底步痕卽夜可驗則何其勺水之不入口耶始知烈婦之心已决於未投之水而旣投則水亦不爲之深也若知如此則何必待舟乎是可悔耳其他不忍聞事不可枚擧盖片水如封之狀雖聞於相浩而吾獨將信將疑相浩之手援其嫂自有驚愕恐怕之心而眼纈於月色玲瓏之夜耶時當四月必無氷合之理不欲强卞也晩時微霜苟或然矣而是夜江崖履之者如遭此或烈婦之寃耶且聞死徃三日其親夫人來訣則吳氏之尸死如生時而及其出門頃刻忽変云此乃平生愛親之心有感於冥冥之中而欲以好面相菿也至若白氣亘天直貫于相龍之殯者此非一人之犻見而水店溪村觀者如市聞者側耳此不待吾言而由是驗之片氷之封嚴霜之降其亦近理乎嗚呼吾梁氏有八旋而忠一孝二烈有五矣今此吳氏亦以我松川外裔又添一烈于有光焉恨不得旋其模範於閨門而惜乎其無嗣也惟此堂堂之義卓卓之烈爲女於吳門而生色爲婦於梁門而生色烈婦之死眞兩門之表著何必待棹楔而爲榮哉吳氏生於丙戌而在世僅二十四年矣其情則慽矣而其烈也與日月爭光夫何恨乎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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