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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의 새 사찰 台山新寺 무슨 일로 명산의 절 문에서 쫓겨나 何事名山黜寺門여기에 와서 창졸간에 띠집 세웠나 來玆倉卒起茅椽불상은 옛 터에 남아 있던 바위에 봉안했고 佛安舊址餘存石비용은 이웃마을서 조금씩 돕는 돈에서 나왔네 費出隣村小助錢법계에서 편안히 하루를 머물고 나니 法界居然成一日복전283)에서 길이 천 년을 지낸 듯하네 福田遠矣閱千年우리 사림엔 어찌 맑은 수사가 적은가 吾林豈少淸修士풍상에 부서진 집에 밥짓는 연기도 식었네 風霜破屋冷人煙 何事名山黜寺門, 來玆倉卒起茅.椽佛安舊址餘存石, 費出隣村小助錢.法界居然成一日, 福田遠矣閱千年.吾林豈少淸修士, 風霜破屋冷人煙. 복전(福田) 복(福)을 낳게 하는 밭이라는 뜻인데, 부처를 섬기면 복이 생기는 것이 마치 밭에서 곡식이 나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이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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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행130) 【봉흠】에게 답함 答白景行【奉欽】 한 모퉁이의 진귀한 편지가 3년 동안 격조했던 오랜 뒤에 나왔으니, 그 위로되고 시원한 마음 과연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경서를 공부하는 기거가 시절 따라 평안한 줄 알았음에랴. 실로 두 손 모아 축원하던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노쇠한 질병으로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이치이니, 어찌하겠는가? 다만 옛날부터 먹었던 옛 학업에 대한 마음은 성취한 것도 없는데 엄자(崦嵫)131)의 광경이 갑자기 여기에 이르렀으니, 단지 인생은 되돌리기 어려운 한이 절실할 뿐이네. 보내온 편지에서 나에 대해 일컬은 것은 이것이 어찌 알맞게 비긴 말이라 하겠는가? 매우 부끄럽고 송구하여 감당할 수 없네. 보여준 〈착정동금조(鑿井洞琴操)〉132)는 표격(標格)이 고매(高邁)하고 사운(詞韻)이 청절(淸絶)하여 읊조린 뒤에 마치 천년 위에서 경착(耕鑿) 호호(皥皥)의 기상133)을 보는 것 같았네. 그렇다면 오늘 주인이 요순의 도를 즐기면서 만족하여 욕심이 없는 것을 대략 상상할 수 있겠네. 운자에 따라 지어 지성스러운 뜻에 만분의 일이라도 답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필력이 졸렬하고 의사가 껄끄러워 묘사해 낼 수 없고, 단지 한 수 절구를 지어 대신하네. 문채가 없음이 심하니, 바라건대 보고나서 한 번 웃으며 적료함을 깨뜨리는 자료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착정산 중의 우물 파는 노인 鑿井山中鑿井老지금 우물 몇 길이나 팠는가 如今鑿到幾尋深끊임없이 흐르는 물 솟아나는 것 볼 터이니 會看活水源源出마른 곳 적실 한 잔의 물 따라주길 사양 말게 霑涸休辭一勺斟 一角珍緘。出於三載阻違之久。其爲慰豁。果何如哉。矧審經體起居。對時安謐者乎。實協拱祝。義林衰替病痼。日就澌頓。理也奈何。但宿心舊業。未有所就而崦嵫光景。遽至於此。只切人生難追之恨而已。來喩所以稱道者。此豈着題可擬之語哉。愧悚萬萬。不敢承當。俯示鑿井洞琴操。標格高邁。詞韻淸絶。諷詠以還。如見耕鑿皥皥之象於千載之上。然則今日主人所以樂堯舜之道而囂囂焉者。槩可想矣。切欲追步。以答勤意之萬一。而筆拙意澁。摸寫不得。只構得一絶詩以代之。不文甚矣。幸加視至。以爲一笑破寂之資如何。鑿井山中鑿井老。如今鑿到幾尋深。會看活水源源出。霑涸休辭一勺斟。 백경행(白景行) 백봉흠(白奉欽, 1859~1909)을 말한다. 자는 경행, 호는 명강(明岡),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저서로는 《명강유고(明岡遺稿)》가 있다. 엄자(崦嵫) 엄자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해가 져서 이 산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만년 또는 노년의 비유로 쓰인다. 착정동금조(鑿井洞琴操) 《명강유고》권1에 실려 있다. 경착(耕鑿) 호호(皥皥)의 기상 태평성대의 기상을 말한다. 경착은 밭 갈고 우물 판다는 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뜻이다. 요 임금 때에 어느 노인이 지었다는 〈격양가(擊壤歌)〉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면서, 내 우물 파서 마시고 내 밭을 갈아서 먹을 뿐이니, 제왕의 힘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호호는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덕으로 왕업을 이룬 임금의 백성은 태평하다.〔王者之民, 皥皥如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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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원123) 【병춘】에게 답함 答閔士元【內春】 이미 안부 편지를 보내 주었고 또 장차 잠시 머물고 있는 평수(萍水)124)를 찾아오려고 하였는데 나를 향한 마음을 알겠으니, 어찌 감사한 마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모르겠으나 편지를 받은 이후 여러 날이 되었으니 여행하는 절도는 어떠한가? 병을 조리하는 중에는 바깥으로 사모하는 것을 단절하면 이 때는 독서와 학문에 가장 용이하게 힘쓸 수 있네. 고인 중에 이와 같이 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그대의 옥성(玉成)125)이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우러러 위로하는 마음 매양 진지하네. 또 편지 가득한 말과 뜻은 후회하고 감발하는 지극함이 아님이 없었으니, 이와 같이 마음을 세운다면 어찌 얻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궁벽한 곳에 벗들과 떨어져 쓸쓸히 지내고 있어 보고 들으며 상종할 유익한 벗이 적을 것이니, 이것이 매우 근심스럽네. 양(羊)으로 소[牛]를 대신 하게 한 것은 만약 다른 온당한 방법이 있었다면 맹자가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선왕(宣王)이 행한 것과 맹자가 말한 것이 바로 온당한 방법이었네. 등문공(勝文公)이 끝내 큰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멀리 헤아리는 것은 불가하니, 고인이 이른바 의심스러운 것은 놓아둔다[闕疑]는 것은 정히 이러한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네. 이지(夷之)가 다시 찾아뵙고 다시 찾아뵙지 않은 것에 대해 또한 어찌 헤아려 추측할 수 있겠는가? 문인이 매번 찾아가 뵙는 것은 다른 말로 서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실로 번거롭게 다하려는 것은 불가하네. "곡종(穀種)……"이라 한 것은 자라서 결실을 거두니, 이것은 행하여 사업이 된 곳이네. 만약 인의(仁義)의 단서라고 말하면 불가하다고 한 것은 인의의 단서는 정(情)이 아닌가? 인의예지는 성(性)이고, 측은(惻隱)과 수오(羞惡)는 정(情)이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과 정의 경계를 말한 것이 극도로 분명하네. 만약 "측은지심은 인(仁)이다."라고 한다면 정을 인식하여 성으로 여기는 듯하니, 이 때문에 한유(韓愈)의 박애(博愛)를 인(仁)이라 한다는 설126)이 후세 사람에게 비판을 당했던 것이네. 다만 맹자 시대에는 성선설(性善說)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 혹 성이 악하다고 여기고 혹 성이 선악이 섞여 있다고 여겼네. 그러므로 맹자가 사단(四端)을 설명해 내어 성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밝혔네. 대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가리킨 뜻이니, 절대로 한유가 정을 인식하여 성으로 여긴 것과 견줄 것이 아니네. 형이상(形而上)의 것은 도(道)이니, 형상화 된 뒤의 것[形而後]과 함께 상대해서 거론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하네. 기질(氣質)의 성(性)은 실로 성인이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본연(本然)의 성은 비록 하우(下愚)라도 또한 가지고 있으니, 어찌 성을 회복하는[復性] 전후를 가지고 기질의 성과 천지의 성을 나누겠는가?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하였는데, 성(性)은 인의(仁義)이고, 정(情)은 희노(喜怒)이네. 이 성을 갖추어 이 정을 발하는 것은 심(心)이니, 심이 성정을 통솔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성(性)은 공경(公卿)과 같다고 한 것은 또한 말이 되지 않네. 성(性)은 비유하자면 임금이고, 심(心)은 비유하자면 장수이고, 기(氣)는 비유하자면 졸도이네. 이것으로 보면 심과 성의 구분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네. 旣垂惠存。又且相尋於萍水一宿之地。仰認傾嚮。曷勝感感。未審伊後有日。旅節何似。調病之中。斷制外慕。此時讀書學問。最易爲力。古人多有如此者。則安知吾友玉成。亦不在此乎。慰仰每摯。且滿幅辭意。無非悔恨感憤之至。如此立心。安有不得之理。但僻處離索。少聞見過從之益。此爲悶悶也。以羊易牛。若有他穩當道理。孟子何不言之。宣王之所行。孟子之所言。便是穩當道理也。滕文公之終未有爲。不可懸度。古人所謂闕疑。正指此等事而言也。夷之之更見不更見。亦何可揣測也。門人之每每進見。非有異言可述。則固不可煩悉也。穀種云云。長而結實。是行之爲事業處。若曰仁義之端則不可。仁義之端非情耶。夫仁義禮智性也。惻隱羞惡情也。故孟子曰。惻隱之心。仁之端也此言性。情界至。極其分明。若曰惻隱之心仁也。則似乎認情爲性。是以。韓子博愛謂仁之說。見譏於後人。但孟子時性善之說。不明於世。而或以性爲惡。或以性爲善惡混。故孟子說出四端。以明性之本善。蓋沿流指源之意也。切非韓子認情爲性之比也。形而上是道。不可與形而後。對擧而言之也。氣質之性。固聖人之所無。而本然之性。雖下愚亦有之。豈可以復性前後。分氣質之性。天地之性耶。心統性情云云。性是仁義。情是喜怒。具此性而發此情者。是心也。心之統性情。不亦宜乎。性如公卿。亦不成說。性譬則君也。心譬則將也。氣譬則卒徒也。以此見之。心性之分。槩可知矣。 민사원(閔士元) 민병춘(閔丙春, 1878~?)을 말한다. 자는 사원,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평수(萍水) 부평초가 물위에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객지를 뜻한다. 옥성(玉成) 사람을 옥처럼 훌륭히 완성시켜 준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빈천과 우척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한유(韓愈)의……설 한유가 〈원도(原道)〉에서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博愛之謂仁]"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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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칠127) 【권주】에게 답함 答金應七【權柱】 노쇠하여 칩거하고 있어 하나의 식지 않은 시체일 뿐이니, 어찌 족히 있으나 마나 한데 사람들 축에 끼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버리지도 멀리하지도 않고 매번 찾아와 주고 거듭 안부 편지를 보내어 전후로 끊임이 없음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네. 이것은 필시 선대인(先大人) 어른께서 살아 계실 때 종유하던 계분을 잊지 않고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일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니, 고상한 의리에 감복하는 마음이 또 어찌 단지 보통 왕복하던 것과 견줄 뿐이겠는가? 이 한 가지 일을 살펴보면, 그 몸가짐과 행동을 삼가고 경계하여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뜻이 대단히 지극하다고 하겠네.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 석과(碩果)128)의 소식이니, 매우 기쁘고 기쁘네. 고인의 시에 "이미 밭 갈고 또 씨 뿌려 놓았으니, 때때로 돌아와 내 읽고 싶은 책을 읽노라.[旣耕亦已種 時還讀我書]"라고 하였으니,129) 이것은 그대의 오늘 일이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쓰시게. 다시 기원하건대 더욱 아끼고 보중하여 그대에게 향하는 나의 마음을 위로 해주게. 의림(義林)은 쌓인 병이 오래 되어 원기가 점점 탈진되어 숨이 끊어져 거의 다하려하는 것은 형세이니 어찌하겠는가? 단지 그대로 맡겨 둘 뿐이네. 衰朽跧蟄。一未令尸耳。曷足爲有無。而可以比數於人哉。然而座右。不棄不遐。每賜枉顧。荐辱書存。前後源源。至於如此。此必不忘先大人丈當日遊從之契。而繼其志述其事者也。感服高義。又豈止爲尋常往復之比而已。觀此一事。則其謹身勅行。無忝所生之意。何所不至。先丈逝後。碩果消息。可喜可喜古人詩曰。旣耕亦已種。時還讀我書。此非座右今日事耶。勉之勉之。更祈加愛增重。以慰相向義林積瘁之久。元氣漸奪。㱡㱡垂盡。勢也何爲。只得任之耳。 김응칠(金應七) 김권주(金權柱, 1878~?)를 말한다. 자는 응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석과(碩果)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고인의……하였으니 도잠(陶潛)의 시 〈산해경을 읽고[讀山海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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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산이 찾아왔는데 과암도 자리에 있었다 2수 圭山見訪, 果菴亦在座【二首】 아침에 봉필190)의 먼지를 깨끗이 쓸고 朝來蓬蓽掃塵淸잠시 만나 우연히 진솔함을 이루었네 少會適然眞率成머리털 일천 가닥은 온통 눈빛이고 鬢髮千莖皆雪色오동나무 한 잎엔 또 가을소리 나네 梧桐一葉又秋聲이치 형세는 웅어191)를 겸하기 어려우나 理形難得熊魚幷심법은 멀리 물과 달처럼 밝기를 생각하네 心法遙思水月明시와 술로 수창하는 우호뿐만이 아니니 不啻詩樽酬唱好서로 도의로써 남은 생애를 권면하세 胥將道義勉餘生오래도록 황하 맑아짐192)을 보지 못했다고 누가 말했나 誰言久不見河淸내 몸을 옥처럼 이루지 못한 것이 스스로 한스럽네 自恨吾身未玉成운당포에선 그래도 금단 소식을 바랄 수 있지만193) 篔鋪猶堪望丹信여릉194)처럼 가을소리를 읊을 필요는 없네 廬陵不必賦秋聲선비가 노년이 되면 절조를 지키기 어렵나니 士當晩節難持守좋은 벗 도움 받아 학문을 더욱 강명해야 하네 學籍良朋愈講明바라건대 오늘 술동이 안의 술을 가져다가 願把樽中今日酒세 물건195) 대신해 올리고 평생을 맹세하세 替供三物誓平生 朝來蓬蓽掃塵淸, 少會適然眞率成.鬢髮千莖皆雪色, 梧桐一葉又秋聲.理形難得熊魚幷, 心法遙思水月明.不啻詩樽酬唱好, 胥將道義勉餘生.誰言久不見河淸? 自恨吾身未玉成.篔鋪猶堪望丹信, 廬陵不必賦秋聲.士當晩節難持守, 學籍良朋愈講明.願把樽中今日酒, 替供三物誓平生. 봉필(蓬蓽) '봉문필호(蓬門蓽戶)'의 줄인 말로 쑥대나 싸리로 만든 문이라는 뜻인데, 가난하여 누추한 집을 이른다. 웅어(熊魚) 곰 발바닥 요리와 생선 요리라는 뜻으로, 의리와 이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생선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바이며,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하였다. 황하(黃河) 맑아짐 성인이 다스리는 태평성대가 도래하였음을 뜻하는 말이다. 황하는 천 년에 한 번 맑아진다고 하는데, 남당(南唐)의 이강(李康)이 지은 〈운명론(運命論)〉에 "대저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태어나고, 이사가 울면 성인이 나온다.〔夫黃河淸而聖人生, 里社鳴而聖人出.〕"라고 하였다. 《文選 卷27》 운당포(篔簹鋪)에선……있지만 늙어서도 학문을 이룰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주희(朱熹)가 젊은 시절에 운당포(篔簹鋪)에서 쉬다가 그 벽에 "빛나는 영지는 일 년에 세 번 꽃이 피는데, 나는 유독 어찌하여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하는가.〔煌惶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라고 쓰인 시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공감한 적이 있었다. 40여 년이 지난 뒤에 우연히 다시 그곳에 왔을 땐 그 시가 이미 없어졌지만,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시를 지어 "언뜻 지나가는 백 년 세월 얼마나 되랴. 세 번 꽃 피는 영지는 무엇을 하려는가. 말년에도 금단은 소식 없으니, 운당포 벽 위의 시가 거듭 한탄스럽네.〔鼎鼎百年能幾時? 靈芝三秀欲何爲? 金丹歲晩無消息, 重歎篔簹壁上詩.〕" 하였다. 《朱子大全 卷84 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금단'은 도가에서 말하는 복용하면 장생불사한다는 단약(丹藥)으로, 여기에서는 진정한 학문을 이루는 것을 비유한다. 여릉(廬陵) 북송(北宋)의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이기 때문에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가을 기운이 만물을 숙살 조락(肅殺凋落)시키는 데에 느낌이 있어 〈추성부(秋聲賦)〉를 지었다. 세 물건 맹약할 때 쓰이는 닭ㆍ개ㆍ돼지의 세 가지 동물을 말한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백씨가 질나팔을 불거든 중씨는 젓대를 부는지라, 너와 더불어 한 꿰미에 있는 듯하노니 진실로 나를 모른다고 할진댄 이 세 물건을 꺼내어 너와 맹약하리라.〔伯氏吹壎,仲氏吹篪,給爾如貫,諒不我知,出此三物,以詛爾斯.〕"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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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암 김장 휴철 에 대한 만시 輓可菴金丈【休哲】 한국 유민의 선비로서 韓國遺民士연재198) 문하에 일찍 귀의했으니 淵門早依歸성실하고 한결같아 다른 재주 없으며 斷斷無他技온화함은 오직 덕의 바탕이었네 溫溫惟德基도공처럼 항상 좋은 안색을 지니고199) 陶公常好顔노생처럼 혼자서 심의를 입었으니200) 盧生獨深衣조문석가201)의 뜻을 朝聞夕可志초당의 편액에서 짐작할 수 있네 菴扁可揣知차마 서하의 아픔202)을 말하랴 忍言西河痛의지할 데 없어 늙을수록 슬프니 煢獨老益悲보답함이 어찌 그리도 어긋났나 報施一何錯하늘은 믿을 수가 없네 上天難諶斯이제 옥국203)의 신선이 되어 今作玉局仙만사를 모두 잊었을 것인데 萬事都忘之하물며 다시 이 세상에 산다면 矧復此世生영화가 아니고 도리어 치욕이네 非榮反辱而아, 뒤에 남은 자들이 堪嗟後死者공을 흠모해마지 않을 때이네 羡公無已時 韓國遺民士, 淵門早依歸.斷斷無他技, 溫溫惟德基.陶公常好顔, 盧生獨深衣.朝聞夕可志, 菴扁可揣知.忍言西河痛? 煢獨老益悲.報施一何錯? 上天難諶斯.今作玉局仙, 萬事都忘之.矧復此世生, 非榮反辱而.堪嗟後死者, 羡公無已時.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호이다. 도공(陶公)처럼……지니고 안빈낙도의 삶을 영위하였다는 말이다. 도잠(陶潛)의 〈의고(擬古)〉 9수 중 제5수에 "동방에 선비 하나, 옷차림 늘 허름하네.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만나고, 십 년 동안 갓 하나 썼다네. 고달픔 이에 비할 바 없지만, 언제나 즐거운 얼굴이라네.〔東方有一士, 被服常不完. 三旬九遇食, 十年著一冠. 辛苦無此比, 常有好容顔.〕" 하였다. 노생(盧生)처럼……입었으니 일제 치하에서도 전통 선비의 복장을 고수하였다는 말이다. '노생'은 노중(盧中, 1327~1390)으로, 원(元)나라 중기에 태어났으나 유생(儒生)의 복장을 하고 예법을 지켰다. 《遜志齋集 卷22 盧處士墓銘》 '심의(深衣)'는 선비들이 편안하게 거처할 때 입던 편복(便服)으로, 유학자들이 주로 입었다. 조문석가(朝聞夕可)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를 줄인 말이다. 서하(西河)의 아픔 자식을 잃은 아픔을 의미한다. 《사기(史記)》 권67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자하(子夏)는 서하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위 문후(魏文侯)의 스승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죽자 통곡하다가 눈이 멀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옥국(玉局) 송대(宋代)의 저명한 도관(道觀)인 옥국관(玉局觀)으로, 소동파(蘇東坡)가 영주(永州)에서 사면을 받고 돌아와 옥국관 제거(提擧)가 되어 한가하게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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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박씨전 孺人朴氏傳 유인 박씨(孺人朴)는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임진왜란 때 충신인 지수(枝樹)의 후손이다. 고조는 경옥(慶沃)이며, 증조는 문환(文煥)으로 진사를 지냈다. 조부는 재두(在斗)로 절충 장군(折衝將軍)에 올랐으며, 아버지는 영진(英鎭)으로 온화하고 자혜로웠다. 어려서부터 효행(孝行)이 있고 유순(柔順)하여 부모에게 사랑을 받았다. 19세에 사인(士人) 이승우(李承愚)에게 시집갔는데, 남편을 섬기고 시부모를 봉양함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공경하여 부덕이 두루 지극하였다. 남편 집안은 대대로 문학을 일삼아 매우 청빈하였으므로 유인이 집안일을 맡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살림을 꾸려감에 검소하여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잠시도 한가할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집안의 형세가 점차 펴져서 어버이에게 올리는 좋은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 하루는 그 시어머니의 옷상자를 모르게 열어보고는 마침내 자신이 시집올 때 보관해둔 화려한 옷을 꺼내어 빨아서 바꿔 넣었다. 시부모의 물건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이처럼 하였다. 만년에 집안이 횡액(橫厄)을 당한 것은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유인(孺人)은 조금도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수숙(嫂叔)172) 사이에도 공경이 쇠하지 않았고, 동서 간에 화목함을 잃지 않았으며 어린 조카아이들에게 자애로움이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형제가 한솥밥을 먹으며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겨우 6살이 되었을 때 유인이 세상을 떠났다. 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한미한 선비의 아내와 약한 나라의 신하는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라 여겼으니, 사람을 보는 데 있어서 쉬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지 말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인의 행실과 도덕 같은 경우는 옛날의 정숙한 여인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시경(詩經)》에,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로다.'173)하였으니, 지금 남겨진 아들이 어찌 장래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그 어머니의 어짊을 드러내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孺人朴氏。貫密陽。壬辰忠臣枝樹后。高祖慶沃。曾祖文煥進士。祖在斗折衝。考英鎭。溫仁慈惠。自幼以孝順。鍾愛於父母。十九歸士人李承愚。事君子奉舅姑。必誠必敬。婦德周至。夫家世業文學。淸貧殊甚。孺人勤於幹理。儉於調度。夙興夜處。暫不暇逸。是以家力稍紓。而親旨不匱。一日密啓其姑衣篋。遂出己于歸時所貯華服。澣替其色納之。待乏又如之。晩年家遭橫厄。人所不堪。而孺人少無幾微色。平日敬不衰於嫂叔。和不失於娣姒。慈不替於兒姪。是以終孺人之身。兄弟共爨。未有分離。晩得一子。甫六歲。而孺人謝世。君子曰。寒士之妻。弱國之臣。自古以爲難。觀人不於其所易。而於其所難。若孺人之行之德。視諸古之貞女淑媛。可以無愧矣。詩曰。釐爾女士。從以孫子。今所遺子。安知不將來立揚以顯其母氏之賢也耶。 수숙(嫂叔) 형제와 형제의 아내들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시경(詩經)에……준다 《시경》은 대아(大雅)의 〈기취(旣醉)〉편을 이른다. 이 시에,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로다.[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 하였는데, 주자는 《집전》에서 '釐' 자를 '주다'라는 의미의 '予'로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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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정씨 십충전 河東鄭氏十忠傳 정공(鄭公) 열(悅)은 자가 구남(懼南)이고 호가 모암(慕庵)이다. 고조 여해(汝諧)는 일두 선생(一蠹先生)121)과 종형제가 되고, 호는 둔재(遯齋)로 지평(持平)을 지냈다. 공은 지향하는 뜻이 고결하고 문장은 해박(該博)하였으니, 어린 나이에 학교에 가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 막사로 달려가 계책을 도운 것이 많았고, 갑자년(1624, 인조2)에 같은 고을 양위남(梁渭南)122)과 배경생(裵慶生)123) 등과 함께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에 달려갔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또 의병을 모집하여 난리에 달려가다가 완산(完山)에 이르렀을 때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일이 《절의록(節義錄)》에 실려 있다. 칙(恜)은 자가 충보(忠甫), 호가 우수(愚叟)이며 열의 종형제[從父弟]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였으며, 문학이 화려하고 풍부하여 효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임진년에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유격대로 적을 정탐하다가 적에게 잡혔는데, 절개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얼마 뒤에 군수 김득광(金得光, 당시 보성군수)이 왜노를 기습하여 격파하니 마침내 풀려날 수 있었다. 예교(曳橋)·첨산(尖山)·노양(露梁)·안치(鴈峙) 등지에서 힘써 싸우다가 많은 적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갑자년과 정묘년에 종형(從兄, 정열을 말함)과 함께 난리에 달려갔다. 인기(仁紀)는 자가 원기(遠期)로 열의 사종제이다. 영특하고 웅대한 자질로 '충의(忠義)' 2자를 허리에 찬 칼에 새겼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자년의 변란에 선전관(宣傳官)으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124)의 막사에 나아가 사흘 동안 연달아 싸워 이겼는데 갑자기 탄알을 맞고 죽었다.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다. 문상(文翔)은 자가 일경(一卿)이며 호가 화은(華隱)으로 칙의 아들이다. 강개한 절개가 있어 정묘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의병으로 나아갔다. 병자년에 안문강공(安文康公)125)을 가서 방략(方略)을 많이 도왔다. 문웅(文熊)은 자가 우경(虞卿)이며 호가 회은(晦隱)으로 열의 아들이다. 지극한 행실이 있으며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 문리(文鯉)는 열의 종자이다. 의기(義氣)를 좋아하여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갑자년에 의병으로 나아가고, 병자년에는 문강공을 따라갔으나 얼마 뒤 그만두고 돌아왔다. 부자형제, 숙질 조손이 전후로 의병을 일으켰는데, 모두 10명이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온 고을 전체에서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고, 하북(河北)의 열읍(列邑)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다126) 하였다. 이는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와 같이 성대한 시대에도 그러한데, 지금 정씨(鄭氏) 한 집안 안에 어찌 충신(忠信)과 의사가 이와 같이 성대하단 말인가. 아, 상(庠)ㆍ서(序)와 학(學)ㆍ교(校)는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127)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에 성스러운 임금이 잇달아 일어나 유현(儒賢)이 성대하게 일어나고 예의의 가르침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기풍이 가득하여 막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그렇다면 정씨(鄭氏)의 열 충신이 어찌 다만 한 집안과 한 고을의 광택이 될 뿐이겠는가. 鄭公悅。字懼南。號慕庵。高祖汝諧。與一蠹先生爲從昆季。號遯齋。官持平。公志尙高潔。文章該洽。早年上庠。聲望藹蔚。壬辰亂。赴崔忠毅公慶會幕。多贊畫。甲子與同郡梁渭南裵慶生等。赴賊适之變。丁卯又募義赴難。至完山。聞賊退還鄕。事載節義錄。恜字忠甫。號愚叟。悅之從父弟也。事親至孝。文學華贍。以孝廉薦除順陵參奉。壬辰從李忠武公舜臣。遊軍覘候。爲賊所執。抗節不屈。旣而爲郡守金得光襲破賊奴。遂得脫。力戰于曳橋尖山露梁鴈峙等地。多所斬獲。甲子及丁卯。與從兄共赴難。仁紀字遠期。悅之四從弟也。英邁雄偉。忠義二字。銘佩腰劒。登武科。甲子之變。以宣傳官赴都元帥張晩幕。三日連捷。忽中丸而死。贈濟用監正。文翔字一卿。號華隱。恜之子也。慷慨有節。丁卯侍親﨣義。丙子從安文康公。多贊方略。文熊字虞卿。號晦隱。悅之子也。有至行。擧孝廉。文鯉悅之從子也。好氣義有膽略。甲子赴義。丙子從文康公。尋罷還。父子兄弟。叔姪祖孫。前後起義。凡十人。外史氏曰。闔郡大都。不擧忠信一人。河北列邑。未有一人義士。此在漢唐之盛而猶然。今鄭氏一家之內。何忠信義士若是彬彬耶。嗚乎。庠序學校。所以明人倫也。恭惟我朝聖聖繼作。儒賢蔚興。禮義之敎浹骨淪膚。而親上死長之風。有藹然不可遏者。然則鄭氏十忠。豈徒爲一家一鄕之光澤哉。 일두 선생(一蠹先生) 일두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오현(五賢)의 한 분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선생유집(一蠹先生遺集)》이 있다. 양위남(梁渭南) 1574~1633.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섭(景涉), 호는 구봉(九峯)으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현손이다. 무과에 급제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며 1610년(광해군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재행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불렀으나, 권문(權門)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안방준(安邦俊)과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괄의 난에 격문을 돌리고 정열(鄭悅)·배경생(裵慶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에도 1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전주까지 나아갔으나 적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배경생(裵慶生)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유선(由善), 호는 후송(後松)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의리(義理)를 강구하였다. 1618년(광해군10)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624년(인조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양위남(梁渭南)·정열(鄭悅)·홍덕임(洪德任)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거의(擧義)하였다. 정읍에 이르렀을 때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후송정(後松亭)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가르쳤다. 장만(張晩) 1566~1629.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1624년 이괄의 반란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진압한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에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앞서 세운 공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한다.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서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안문강공(安文康公) 안방준(安邦俊, 1573~1654)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ㆍ빙호(氷壺)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 조익(趙翼)의 천거로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 《항의신편》, 《혼정편록(混定編錄)》, 《기묘유적(己卯遺蹟)》 등이 있는데, 문집인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하북(河北)에……없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북 지역이 모두 항복하였다. 현종이 처음 이 소식을 듣고, "하북 24군(郡)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는가?"라고 탄식하였으나, 나중에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顔眞卿)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물리쳤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크게 기뻐하였다. 《古今歷代標題註釋十九史略通攷 卷5 唐 玄宗 天寶14年》 상(庠)……것이다 《맹자》 〈등문공 상〉에 "상, 서, 학, 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입니다. 하나라에서는 교라 하였고, 은나라에서는 서라 하였고,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하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으니,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인륜이 위에서 밝으면 소민들이 아래에서 친해집니다.[設爲庠序學校, 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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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헌 이군 행장 敬軒李君行狀 군(君)의 성은 이(李), 휘는 인환(仁煥), 자는 덕재(德哉), 호는 경헌(敬軒)이다. 공주(公州) 사람으로 철종(哲宗) 무오년(1858)에 태어났다. 개국 초기에 공숙공(恭肅公)은 휘가 명덕(明德),82) 호가 사봉(沙峯)으로 좌의정에 증직되었는데, 목은(牧隱)83)의 고제(高弟)로 태조의 명신이 되었으니 바로 군(君)의 17대조이다. 16대조 휘 효근(孝根)은 참판을 지냈고, 15대조 휘 종림(宗琳)은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4대조 휘 공필(公弼)은 철산 부사(鐵山府使)를 지냈고, 13대조 휘 교맹(嶠孟)은 현감을 지냈으며, 12대조 휘 시돈(時敦)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11대조 휘 경운(慶雲)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고, 10대조 휘 영숙(靈肅)은 공조참의를 지냈다. 9대조는 휘가 위(韡)84), 호가 혁회재(衋悔齋)이고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우산(牛山)85)의 고제(高弟)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으니, 사림이 제사를 지냈다. 8대조 휘 동명(東鳴)은 진사를 지냈고, 7대조 휘가 만시(萬蒔)이며 호가 석련(石蓮)은 진사를 지냈으며, 6대조는 휘 계제(桂齊), 5대조는 휘 재후(載厚), 고조는 휘 기형(基馨), 증조는 휘 문갑(文甲), 조부는 휘 택무(擇茂), 아버지는 휘 민채(敏采)이며 문행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군은 타고난 자질이 돈후하고 품성이 인자하였다. 어려서부터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였으며, 말하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보는 자들이 칭찬하였다. 군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었으나 위기(爲己)의 학문86)을 알아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스스로 손수 베꼈다. 남의 선을 보기를 자기가 지닌 것처럼 하고, 남의 악을 보기를 자기 몸의 병처럼 여기니 원근의 붕우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실로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밤낮으로 책상을 대하였는데, 만약 의아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장덕(長德, 나이 많고 덕행이 있음)인 계남(溪南)87)과 애산(艾山) 및 최면암(崔勉庵)과 기송사(奇松沙)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니, 제대로 알지 못하면 놓아두지 않는88) 뜻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어버이가 연로한 날에 곁에 형제가 없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몸에 병이 있었기 때문에 멀리 유람하여 그 문하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봄날 날씨가 따뜻할 때나 가을바람이 쓸쓸할 때마다 번번이 벗을 맞이하여 술을 싣고서 높은 곳에 올라 소요(逍遙)하다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으니, 그 드넓은 흉금과 표일한 자취가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초월한 기상이 있었다. 평소의 몸가짐은 법도가 있고 말을 냄에 문장이 있었으며, 자상한 뜻은 가정에 넘쳐나고 화락한 풍모는 고을에 두루 미쳤다. 남이 곤경에 처함을 보면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한 줄 모르고 반드시 구휼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흉년을 만나면 의식을 절약하여 그 남은 것을 미루어 친족과 이웃의 가난한 자들에게 이르게 하였다. 갑오년(1894)의 난리 때 마을이 흉흉하였는데, 군(君)은 태연히 스스로의 지조를 잘 지키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산으로 골짜기로 피난가는 매우 험난한 상황에 처하여도 자정(自靖)하려는 뜻이 더욱 확고하였다. 을미년(1895) 단발의 변란에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89)은 한강 북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송사 기우만은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나는 군(君) 및 여러 벗들과 약속하여 송사에게 가서 원수를 함께 치려고 하였는데90) 그 울분과 강개함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평소에 권문세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고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 세속의 명성이나 이로움,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친척의 무리가 혹여 당시에 등용되어도 돕지 않았으며, 수령의 관원이 혹 세력을 이용해 불러도 가지 않기도 하였으니, 남의 권세를 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임인년(1902) 5월 18일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 도장면(道莊面) 정천촌(淨川村) 뒤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해남 윤씨(海南尹氏) 주봉(柱琫)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기일(基一)과 기복(基福)이며, 딸은 하동(河東) 정귀채(鄭貴采)와 제주(濟州) 양모(梁某)에게 시집갔다. 아, 이같이 순후한 자질과 화통한 재주로 마음을 세우고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며 종유하고 강마(講磨)하여 안목이 점차 열리고 기세가 한창 올랐으니, 누가 천 리를 가는 수레를 중도에 그치고 백 번 단련한 금을 중간에 훼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군보다 나이가 좀 더 많고 교분을 맺음이 조금 늦었지만 서로 뜻이 맞아서 험난한 상황 속에서 서로 종유하며 세한(歲寒)91)에도 서로 지키려는 생각을 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지금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났단 말인가. 종유했던 오랜 벗들은 열에 여덟아홉은 없으니 군을 아는 자가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고 난 뒤에 사적을 길이 전할 책임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있겠는가. 그 대강을 간략히 서술하여 그의 아들에게 주어 그가 조금 자라거든 이 글을 보고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고 계술(繼述)할 방법을 생각하게 하노라. 君姓李。諱仁煥字德哉。號敬軒。公州人。以哲宗戊午生。國初恭肅公諱明德號沙峯贈右議政。以牧隱高弟爲太祖名臣。卽君之十七世祖也。十六世諱孝根參判。十五世諱宗琳吏曹參議。十四世諱公弼鐵山府使。十三世諱嶠孟山縣監。十二世諱時敦戶曹參判。十一世諱慶雲同知敦寧府事。十世諱靈肅工曹參議。九世諱韡號衋悔齋中生員。以牛山高弟。倡丙子義旅。士林俎豆之。八世諱東鳴進士。七世諱萬蒔號石蓮進士。六世諱桂齊。五世諱載厚。高祖諱基馨。曾祖諱文甲。祖諱擇茂。考諱敏采。以文行著世。君天姿敦厚。稟性仁慈。自幼入孝出恭。語輒驚人。見者稱之。君早孤靡依。知爲己之學。心經近思錄等書。自手謄書。見人之善。若已有之。聞人之惡。若已之病。朋友遠近。莫不心悅誠服。日夕對案。若有疑訝。則必走書於諸長德溪南艾山及崔勉庵奇松沙而咨決之。其不得不措之意如此。然親老之日。傍無兄弟。親沒之後。身有疾病。是以未得遠遊以造其門。常以爲恨。每當春日和煦。秋風蕭散之時。輒邀友載酒。登臨徜徉。竟日而歸。其曠襟逸躅。悠然有出俗超塵之象。平日持身有法。出言有章。慈詳之意。溢於家庭。愷悌之風。遍於鄕閭。見人在阨。不知己力之不逮。而必周恤之無已。遇飢歲縮衣節食。推其所餘以及族戚隣里之貧者。甲午之亂。閭里汹汹。君晏然自持。少不爲撓。至於奔山竄谷。備極艱險。而一端自靖之志。愈益確如也。乙未薙削之變。柳毅庵麟錫擧義漢北。奇松沙擧義湖南。余約君及諸友。擬赴松沙同仇。見其忿憤慷慨。終始不渝也。平日不入要門。不見要人。於聲利芬華。漠然若無所好。親表之屬。或爲時用而不援之。守宰之官。或以勢邀而不往之。其忘人之勢如此。壬寅五月十八日。以疾終於家。葬道莊面淨川村後庚坐原。配海南尹氏柱琫女。生二男二女。男基一基福。女適河東鄭貴采濟州梁某。嗚乎。以若醇厚之質。開爽之才。立心爲己。遊從講磨。眼目漸滑。步趨方張。誰爲千里之駕。止於中途。百鍊之金。毁於半功哉。余於君。雖年紀稍長。結交差晩。而密勿相得。間關相從。爲歲寒相守之計者。顧何如。而今乃棄我如遺耶。從遊知舊。十亡八九。知君者不可謂非我。然則身後不朽之責。豈在於他人乎。略敍其梗槪而授之遺胤。待其稍長而見之。俾知厥者之心。而思所以繼述云爾。 명덕(明德) 이명덕(李明德, 1373~ 1444)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시호는 공숙(恭肅),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1396년(태조5)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보직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ㆍ장령(掌令)ㆍ사인(舍人)ㆍ집의(執義)ㆍ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ㆍ형조참의(刑曹參議) 겸 지도관사(知都官事) 등을 역임했다.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자는 영숙(穎叔),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성균시에 합격하여 대제학,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벼슬하지 않아 포은(圃隱),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위(韡) 이위(李韡, ?~?)이다. 화순 출신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안방준(安邦俊)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을 성취하고, 「분의편(奮義篇)」과 「계자서(戒子書)」를 저술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동지들과 안방준을 도와 서기가 되고, 말을 달려 여산까지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1660년(현종 1)에 생원시에 올랐고, 효행으로 여러 번 도천(道薦)에 올랐으며, 뒤에 수직(壽職)으로 가선 대부 동지중추에 제수되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충효전(忠孝傳)」을 지어 극찬하였다. 사림이 칠송리에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춘추로 향사한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호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또 다른 호는 은봉(隱峰)이다.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박광전과 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효종 초에 공조 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을 거쳐 공조 참의가 되었다. 《은봉전서》ㆍ〈항의신편(抗義新編)〉ㆍ〈호남의록(湖南義錄)〉ㆍ〈혼정편록(混定編錄)〉ㆍ〈기묘유적(己卯遺蹟)〉 등을 남겼다 위기(爲己)의 학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제대로……않는 《중용장구》 제20장에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면 잘하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弗措也.]"라고 하였다.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조선 말기의 의병으로,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여성(汝星), 호는 의암(毅庵)이다.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어받았고,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5년 12월 24일 의병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만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며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저서로 《의암집》이 있다. 원수를……하였는데 원문의 '동구(同仇)'는 원수를 함께 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무의(無衣)〉에, "어찌 옷이 없다 해서, 그대와 솜옷을 같이 입으리오.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우리들 창과 모를 손질하여, 그대와 함께 원수를 치리.[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修我戈矛, 與子同仇]"라고 하였다 세한(歲寒) 의지를 굳게 가져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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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대곡처사 김공 경범전 大谷處士金公景範傳 공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석귀(錫龜),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이며, 계파는 가락(駕洛)에서 나왔다. 6대조 재록(載祿)이 남양(南陽)에서 남원(南原)으로 와 머물렀는데, 자손들이 그곳에 그대로 살았다. 증조는 정삼(鼎三), 조부는 재곤(再坤), 아버지는 낙현(洛賢)으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공은 헌종 을미년(1835, 헌종1)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처음 학교에 나아가 동학(同學)들이 《소학》을 읽는 것을 보고 곁에서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더니, 앉을 때에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행동할 때에 반드시 삼가고 찬찬히 하였으며, 쇄소(灑掃)와 정성(定省)128)을 하나하나 준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소학》을 수업 받기를 청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8세에 들어가는 《소학》은 지금은 행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책을 끼고 집으로 돌아가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강습함에 법도가 있었다. 그때에 곡성 땅에서 살고 있었는데, 같은 고을에 사는 이곤수(李崑壽)129)라는 분이 명망이 높은 선배 대학자로 행의가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그를 따랐다. 18세에 노사선생에게 폐백을 갖춰 찾아뵙고서 학문하는 방법을 듣고 가족을 이끌고 광주(光州)의 대곡(大谷)에 우거하였으니, 이는 대개 사문(師門)을 가까이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마저 자주 걸렀으며, 직접 밭을 갈고 손수 호미질하여 어버이의 음식을 장만하였다. 학당에 들어가 독서130)하며 생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곁에서 부지런히 시중들며 안팎으로 수응(酬應)하였다. 다시 여가의 시간이 나면 시를 수창하고 정서를 함양하여 성현의 뜻을 구하였으며, 면밀히 연구하고 생각을 펼쳐서 사물의 은미한 뜻을 끝까지 궁구하였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몸소 살펴 실천하는 실상을 다하였으며, 평온하고 조용하며 과묵하게 본원의 요체를 함양하였다. 그 일상생활의 절도는 정확한 규범이 있었으니, 마음을 세우는 것은 충신(忠信)을 위주로 삼아 비록 홀로 방구석131)의 깊고 은밀한 곳에 있을지라도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였고,132) 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함으로 근본을 삼아 비록 평소 사사로운 자리에서 다급한 때라도 언제나 우뚝하게 산처럼 서있었다. 스스로 기약함은 성인으로 기준을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미치지 않으면 문득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라 하였고, 스스로의 임무는 천하를 자신의 법도로 삼아 한 가지라도 빠짐이 있으면 반드시 나의 기운이 관여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 뜻을 바르게 하여 따지거나 피하려는 뜻이 없었고, 남을 대할 때에는 인(仁)을 드러내어133) 시기하거나 원망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청렴하고 절개가 있어 4,000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며,134) 기량(氣量)은 바다가 만곡(萬斛)을 실은 배를 포용하듯 그 끝을 볼 수 없었다. 문사(文辭)로 말하자면 숙속(菽粟)과 포백(布帛)처럼 실용적이어서135) 비록 그다지 귀하지는 않아도 일상생활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았고, 출처(出處)할 때에는 궁벽한 마을에서 늙어 죽더라도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136)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바가 있었다.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에서부터 일용의 전례(典禮)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고 분석[勘覈]하여 조리가 서로 이어졌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자 자잘한 것이 완전히 이해되고 긍지(矜持)하던 것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마디 말과 행실에 이르러서는 안배(按排)하거나 조작(造作)한다든지 주저하거나 구차스러운 모양이 전혀 없었다. 노선생(老先生, 노사(蘆沙) 선생을 가리킴)의 초상 때 장례에 모인 수천 명이 공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을 추대하여 상례(相禮)137)로 삼았으니, 제작(制作)의 근원을 미루어 근본하고, 손익(損益)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의절(儀節)을 정하여 행하였다.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늙어 집으로 물러나서는 스승의 도가 전해지지 못할까, 예전의 학업이 성취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조금도 자신에게 관대함이 없었다. 을유년(1885, 고종21) 8월 8일 묵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1세였다. 그의 벗 정의림(鄭義林)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시대가 정주(程朱)로부터 멀어져 의론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후생(後生)이 늦게 진출하여 어디로 향해야 할 바를 모르지만, 그 대공지정(大公至正, 지극히 공변되고 올바름)하여 사람들을 모아 절충하여 정주(程朱)의 강토(疆土)를 예전처럼 깨끗할 수 있게138)138) 깨끗할 수 있게 : 원문의 '확청(廓淸)'은 부정(不正)ㆍ악습(惡習)ㆍ부패(腐敗) 등을 없애어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한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 그러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하에 만약 공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천고에 전해지지 않는 비결(祕訣)에 대해 선생께서 한마음으로 홀로 터득한 신묘한 이치를 가슴속에 품어둔 채로 거의 누구에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천 년에 한 번 있을 특별한 지우(知遇)라고 할 만하고 세대를 뛰어넘어 마음으로 통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벗을 사귐에 그 뜻이 숭상하는 바를 살펴봄이 매우 많았다. 그 평생에 소소한 출사(出仕)가 없는 것을 보더라도 지적하여 논의할 수 있는데, 초연히 멀리 떠나와서 종시토록 얽매임이 없는 자는 누구이며, 갖은 고생 끝에 야유(揶揄, 남을 빈정대며 놀림)가 심한데도, 당당하게 어떠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학문을 널리 닦고 예(禮)로 자신을 검속하는 공부139)가 서로 닦여 함께 이르렀는데도,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용(體用)이 있는 자는 누구이며, 넓으면서도 잡스럽지 않고 번다하고도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를 가지고 있되 속이 좁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화락하게 절로 탄복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아, 나는 공에게서 이러한 것을 보았도다. 공의 도는 비록 그 시대에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공의 풍도를 듣고 공의 글을 읽는 자는 반드시 이 말이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세 뒤에도 그와 함께 마음으로 이해하고 정신으로 사귀고자140) 하는 것임을 알리라. 옛날 채백개(蔡伯諧)가 곽유도(郭有道)의 비명(碑銘)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141) 나도 내가 지은 이 전(傳)에 대해 또한 그렇게 말할 뿐이다. 公姓金。名錫龜。字景範。號大谷。系出駕洛。六世祖載祿。自南陽寓南原。子孫仍居焉。曾祖鼎三祖再坤考洛賢世有隱德。公以憲宗乙未生。幼而岐嶷。初就塾。見同學有讀小學者。側聽其所受。坐必端拱。行必周折。灑掃定省。一一遵循。因以小學請業。塾師曰。八歲小學。今不可行也。遂挾冊歸家。淨掃一室。講習有程。時寓谷城地。聞同縣李崑壽。以先進宿碩。行義偉然。遂從之。十八贄謁蘆沙先生。得聞爲學之方。挈家寓光州之大谷。蓋就近師門計也。家貧甚。菽水屢空。躬耕手鋤。供給親旨。入塾行墨。課授生徒。左右服勤。內外酬應。更於暇日餘力。諷詠涵暢以求聖賢之旨。硏精覃思以極事物之蘊。鞭辟體察以盡踐履之實。恬靜澹默以養本源之要。其日用節度。的有成規。立心以忠信爲主。雖幽獨屋漏之地。而可以對越上帝。持己以端莊爲本。雖燕私造次之時。而常若卓然山立。自期以聖人爲準。以爲一毫不及。便是吾事未了。自任以天下爲度。以爲一物有闕。便是吾氣不管。處事則正其義而無計較趨避之意。接物則顯諸仁而無忌克怨尤之心。廉介則係馬千駟而不顧也。氣量則海涵萬斛而不見其涯也。文辭則菽粟布帛。雖不甚貴而日用不可無也。出處則老死窮巷而枉尺直尋。有所不屑也。自太極性命。至於日用典禮。鑽硏窮覈。倫類相次。日久月深。零碎者融會。矜持者純熟。至於一言一行。絶無安排造作依違苟且之狀。老先生之喪。會葬者數千人。推公及艾山載圭爲相禮。推本制作之源。參酌損益之宜。定爲儀節以行之。持服三年。退老於家懼師道之無傳。舊業之未就。刻苦激勵。不以衰且病有少恕焉。乙酉八月八日。以宿疾終。享年五十一。其友鄭義林曰。程朱世遠。議論多門。後生晩進。莫適所向。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者。惟我(老)先生生其人也。然先生之門。若未有公。則其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不其幾於懷之卷之而無可告語耶。此可謂千載奇遇。曠世神會也。義林自少小。取友視志。非不多矣。觀其平生無小小出脚。可以指議。而超然遐擧。終始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倂臻。而天德王道。有體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起敬。怡然自服者何人。嗚乎。吾於公見之矣。公之道。雖不得行於一時。而聞公之風。讀公之書者。必有知斯言之非阿好。而欲與之心會神交於百世之下矣。昔蔡伯諧以郭有道碑銘爲無愧。余於此傳亦云爾。 쇄소(灑掃)와 정성(定省) 쇄소는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제자(弟子)된 예의를 말하며, 정성은 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는 일을 말한다. 이곤수(李崑壽) 1808∼1888. 자가 이회(而晦)이고 호가 심재(心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천품이 단아하고 효도의 마음을 극진히∨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관통하였으며. 홍매산(洪梅山)과 기노사(奇蘆沙)에게 출입하며 종유(從遊)하였다. 저서로는 《심재집(心齋集)》이 있다. 독서 원문의 '행묵(行墨)'은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깊은 이치를 탐구하지 않고 글자만 따라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독서에 대한 겸사이다. 방구석 원문의 '옥루(屋漏)'는 고대에 실내(室內)의 서북쪽 모퉁이에 장막을 치고 신주(神主)를 모시던 곳을 이르는데, 전하여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네가 홀로 방안에 있음을 보니, 여기서도 방 귀퉁이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게 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게 한다.[詩云: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故君子不動而敬, 不言而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고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듯 경건한 자세를 가져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하였다. 인(仁)을 드러내고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인에 드러나며 용에 감추어져, 만물을 고무하되 성인과 함께 근심하지 않으니, 성덕과 대업이 지극하도다.[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至矣哉.]"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것은 인자한 공덕을 발휘하여 만물에 은혜를 입히고, 그 공적을 은밀히 감추어 알지 못하게 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유능한 인재가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비유한다. 말……않았으며 신념이 확고하여 부귀공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가 상탕(商湯)의 현상(賢相)인 이윤(伊尹)의 마음가짐을 설명하면서, "의롭지 못하거나 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천하를 그에게 녹봉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4000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不顧也, 繫馬千駟, 不視也.]"라고 말한 대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숙속(菽粟)과 포백(布帛)처럼 실용적이어서 곡식이나 포백은 의식(衣食)의 주요 물품으로서, 이것은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전하여 극히 평범하면서도 대단히 유익한 사물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일상생활에 절실한 문장을 의미한다. 한……펴는 큰 이익을 위하여 작은 도리를 굽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는 것은 이(利)로써 말한 것이다. 만일 이로써 말한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펴 이로울 경우에도 그것을 하겠는가?[夫枉尺而直尋者, 以利言也. 如以利, 則枉尋直尺而利, 亦可爲與?]"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상례(相禮) 관례를 올리는 당사자를 인도하여 예를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학문을……공부 박문(博文)은 학문을 널리 하여 사물의 이치를 모두 알고자 하는 것으로 도문학(道問學)에 속하고, 약례(約禮)는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는 것으로 존덕성(尊德性)에 속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이르기를 "군자가 문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하였다. 정신으로 사귀고자 원문의 '신교(神交)'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다만 정신으로 사귄다는 말이다. 채백개(蔡伯諧)가……하였으니 사실에 입각하여 비문을 지었다는 뜻이다. 곽유도는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곽태(郭太, 128~169)를 가리킨다. 채옹(蔡邕)이 그의 비문을 〈곽유도비문(郭有道碑文)〉이란 제목으로 짓고 노식(盧植)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명(碑銘)을 지은 것이 많았는데, 모두 그 덕(德)에 부끄러움이 있었으나 오직 이 사람의 비문은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8 高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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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묵재 문공전 敬默齋文公傳 문공의 휘는 영찬(永瓚), 자는 사규(士圭), 경묵(敬默)은 그이 서재 이름이다. 계파는 남평(南平)에서 나왔으며, 중엽(中葉)에 단성(丹城)으로부터 능주(綾州)로 옮겨와 머물러서 대대로 유림(儒林)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증조는 휘 명오(命吾)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는 휘 희맹(喜孟)으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아버지는 휘 필진(弼鎭)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흥양 이씨(興陽李氏) 형구(馨久)의 따님으로 영조 기묘년(1759, 영조35)에 능주 백암리(白巖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4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프고 그리운 마음에142) 지나치게 애통해하니 이웃 사람들도 이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집안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부지런히 일해 봉양하고 입에 맞는 음식이나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계모(繼母) 정씨(鄭氏)를 섬김에 그 순순히 받들기를 지극히 하니 조금도 흠잡는 말이 없었다. 무신년(1788, 정조12)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3년 동안 바람과 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여막을 이용해 서실을 지어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드러내니 무덤 아래 마을 사람들이 그 뜻에 감동하여 온 산 하나를 문씨의 땅이라고 하고 서로 경계하며 침범하지 말도록 하였다. 아우 2명은 영권(永權)과 영국(永國)이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말 한 마디도 화순함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공이 문묘(文廟)에 예기(禮器)가 부서진 것을 보고 이에 법제를 강구해서 중수하여 한껏 새롭게 하였다. 능주의 북쪽에 개와 평전(蓋瓦坪田) 수천 이랑이 있었는데, 예부터 도랑에 물을 댈 수가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당한 적이 많았다. 그러므로 공이 형세를 헤아려 둑을 쌓고 도랑을 통하게 하였으니 이에 땅이 비옥하게 되고 풍년이 들었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물을 건너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공이 돌을 운반하여 다리를 놓아 옷을 입거나 걷고 건너는143) 근심을 없게 하였다. 갑술년(1754, 영조30)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 이가 많았는데, 공이 의연금을 내고 진대(賑貸, 진휼(賑恤)하여 빌려 주던 일)하여 살아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 자상하고 화락하며 넓고 단아하고 후덕하여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사물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마음을 쏟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일가친척들로부터 효성스럽다는 칭찬을 받고 향당으로부터 공손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붕우(朋友)는 그 믿음을 칭찬하고 사림(士林)은 그의 현명함을 칭찬하여 아녀자와 종들까지도 군자다운 사람으로 그를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을해년(1815, 순조15) 2월 10일 정침(正寢, 평소에 거처하던 곳)에서 향년 57세로 생을 마쳤다. 선영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후생 정의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지금 공이 세상을 떠난 지가 100년 안팎이 되었다. 우리 조정의 문명(文明)이 전성(全盛)한 운세가 공의 대에 와서는 해가 중천에 뜰 정도일 뿐만이 아니었다. 매번 당시의 공경대부 및 향리 사족들을 볼 때마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으며, 풍류가 돈후하고 기상이 드높아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 왕왕 이와 같았으니, 이는 열성(列聖)께서 배양하심이 깊고 선정(先正)이 찬조(贊助)한 두터운 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문묘(文廟)에 들어가 제사 돕는 일을 맡은 적이 여러 번이었으며, 개와평(蓋瓦坪)을 지나 백암교(白巖橋)를 건넌 것도 또한 여러 번이었지만, 아직껏 뇌준(罍樽)144)과 변두(籩豆)145)를 수리하고, 관개(灌漑)와 제도(濟渡)를 설행한 것이 일찍이 공에게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 이목(耳目)의 고루함이 어쩌면 이 정도란 말인가. 아, 백성들 일상생활의 중대한 일들이 그의 공로에 힘입었는데도 그 공로를 알지 못하고, 그의 덕을 누리고도 그 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만 이 한 가지일 뿐이겠는가. 불행히 문명이 전성한 날에 태어나지 못하고, 또 불행히 선진(先進)146)이 계시던 100년 전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여 그 글을 읽고 그 풍성을 칭송함에 한갓 사람으로 하여금 통탄스럽고 더욱 그리워하게 할뿐이다. 이에 감히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전을 짓는다. 文公諱永瓚。字士圭。敬默其齋號也。系出南平。中葉自丹城寓綾州。世爲儒林名家。曾祖諱命吾贈掌樂院正。祖諱喜孟贈戶曹參議。考諱弼鎭贈戶曹參判。妣興陽李氏馨久女。以英宗己卯。生公于州之白巖里。幼而岐嶷。異於凡兒。四歲遭內艱。孺慕過哀。隣里釀涕。家素貧甚。服勞就養。適口便身。無不周備。事繼母鄭氏。極其承順。了無間言。戊申丁外艱。廬墓三年。風雨不廢。服闋。因廬爲齋。以寓終身之慕。墓下村人感其義。環一山爲文氏地。相戒勿侵焉。弟二人。曰永權永國。友愛甚篤。自幼至老。未有一言違和也。公見文廟禮器殘缺。乃講求法制。重修而一新之。州之北。有蓋瓦坪田。可數千頃。古無溝洫可漑。民多見旱。公相度形便。築堤通渠。於是土沃而歲熟。所居濱江。人常病涉。公運石成橋。俾無揭厲之患。甲戌大無。民多餓殍。公出義賑貸。所活爲數百人。其慈祥愷悌。博雅長厚。眷眷於利人澤物者。皆此類也。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朋友稱其信。士林稱其賢。以至婦孺輿儓。莫不以君子人目之。乙亥二月十日。考終于正寢。享年五十七。葬于親塋丑坐之原。後生鄭義林曰。今去公之世爲一百內外年矣。我朝文明全盛之運。至公之世。不啻爲日中之昃。而每見當時公卿大夫及鄕里士族。治家有法。行己有恥。風流篤厚。氣像藹蔚。可以爲後世模範。往往如此。列聖培養之深。先正贊助之厚。可以推矣。余嘗入文廟而執助祭之役者累矣。過蓋瓦坪。渡白巖橋者。亦數矣。而尙未知罍樽籩豆之修。灌漑濟渡之設。曾在於公。其耳目固陋。一至於是耶嗚乎。民生日用大小大事。賴其功而不知其功。食其德而不知其德者。豈但此一事也。不幸而不生於文明全盛之日。又不幸而不生於先進百年之世。讀其書誦其風。徒使人痛歎而增懷也。玆不敢以昧劣辭。謹爲立傳云爾。 슬프고 그리운 마음에 원문의 '유모(孺慕)'는 어린아이가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듯 깊이 사모함을 말한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유약(有若)이 자유(子游)와 함께 어린애처럼 사모하는 자를 보고 자유에게 말하기를 "나는 상중에 발을 구르는 의미를 전혀 몰라서 없애고자 한 지가 오래였는데, 슬퍼하는 정이 이 발 구르는 데에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옷을……건너는 원문의 '게려(揭厲)'는 《시경》〈패풍(邶風) 포유고엽(匏有苦葉)〉에 "깊거든 옷 입은 대로 건너고, 얕거든 옷을 걷고 건널 것이다.[深則厲 淺則揭]"를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시경》 주(註)에 "옷 입은 채로 건너는 것을 여, 옷을 걷고 건너는 것을 게라 한다.[以衣而涉曰厲 蹇衣而涉曰揭]"라고 하였다. 뇌준(罍樽) 청동으로 만든 호형(壺形)의 술 단지이다. 양효왕에게는 뇌준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값이 천금이나 나가는 것이었다. 양효왕이 죽을 적에 많은 재산과 보물이 있었는데도 유독 이 뇌준을 아끼어 "이 뇌준을 잘 보전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마라."하였다. 그 뒤에 이 뇌준을 차지하기 위하여 친족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史記 卷58 梁孝王世家》 변두(籩豆) 변(籩)은 과일이나 포(脯)를 담기 위하여 대를 엮어서 만든 그릇이고, 두(豆)는 식해나 김치 등을 담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그릇이다. 흔히 제기(祭器)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선진(先進) 학문이나 지위가 남보다 앞서거나, 어떤 분야에서 연령, 지위, 기량 등이 앞서는 사람, 즉 선배와 같은 뜻이다. 공자가 "선진이 예악에 야인이요, 후진이 예악에 군자라고 하나니,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선진의 것을 쓰리라.[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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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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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취곡 조공전 翠谷曺公傳 공의 휘는 여흠(汝欽)이고, 자는 사명(士明)이며, 취곡(翠谷)은 그의 호이다. 조씨의 계파는 창녕(昌寧)에서 나왔는데 대악서(大樂署)를 지낸 승겸(承謙)이 그의 원조(遠祖, 고조 이전의 먼 조상)가 된다. 철야군(鐵冶君)을 지낸 정통(精通)과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경식(景湜)은 모두 중엽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부 청(淸)은 문과 급제하고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으며, 증조부 효신(孝信)은 유일(遺逸)147)로 광양 현감(光陽縣監)에 제수되었다. 조부 걸(傑)은 호가 묵헌(默軒)이며 은덕(隱德)이 있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 언인(彦仁)은 호가 만은(晩隱)으로 장예원(掌隷院)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의젓하고 총명하며148) 재주가 영민하였다. 3세에 육갑(六甲)을 외우고, 4세에 《효경》을 배웠으며, 5세에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한번 보면 외웠다. 6~7세에 글을 짓고, 9세에 《대학》을 읽어 대의(大義)를 살폈다. 이때부터 사자 육경(四子六經)을 차례로 관통하였다. 한문공(韓文公)의 '눈물을 머금고 패수를 건넌다'[含淚渡灞]'는 구절149)을 읽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자신에게 있는 도리를 힘쓸 뿐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15세에 율곡 선생에게 폐백을 갖춰 찾아뵙자 선생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칭찬하고 매우 아꼈다.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떨쳐버리고 오로지 심성(心性)을 보존하여 기르고 독실히 실천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 기쁜 얼굴빛과 부드러운 태도로 지물(志物)의 봉양150)에 빠뜨림이 없었다. 병환이 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간호하였으며,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한데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며 자신의 몸으로 어버이의 병을 대신하도록 빌었다. 정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니151) 대개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힌 것152)이었다. 용강(龍岡)의 기슭에 학당을 짓고서 두문불출하며 자취를 끊고 학문을 익히는 데에 마음을 다하니 원근의 사우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모인 자가 매우 많았다. 은병학규(隱屛學規)153)에 의거하여 과정(課程)을 세우고 정성껏 인도하여 성취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사람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학문은 남보다 낫기를 힘쓰고 처신함은 항상 남에게 낮추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또 시문(時文, 과거시험을 위한 문체)을 일삼는 자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덕을 지닌 자는 훌륭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154) 성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끝내 문장의 오묘함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55), 지천(芷川) 김공희(金公喜)156),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7), 서곡(書谷) 임분(林賁, 1501~1556) 등 명가(名家)들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석천이 공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호산의 비범한 기상에 규성이 내려와158) (湖山奇氣降奎躔)젊은 나이159)에 남두160)의 향기로운 명성 떨쳤네 (南斗香名屬妙年)문장의 이치 깨우침은 오히려 여사요 (文章契悟猶餘事)집안에서 의를 행함은 천성대로 하는구나 (行義居家素性然)만력 기묘년(1579, 선조12)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31세였다. 2남을 두었는데, 주부를 지낸 장일(長日)과 장두(長斗)이다. 외사씨(外史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공은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161) 학문을 연마하고 넓혀나간 것이 이처럼 성대하였지만, 멀고 외진 곳에서 재능을 감추고 수명도 또 길지 않아서, 나아가서는 그 의를 행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그 도를 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과 사람이 서로 도모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아, 우리 조정의 명종(明宗)과 선조(宣祖)께서 다스리던 밝은 세상에 태어나 살았으며,162) 이 문성 선생(李文成先生, 이율곡)을 스승으로 삼아 수사낙민(洙泗洛閩)163)의 학문을 얻어 들었으니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고, 또한 훌륭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저 지위의 높고 낮음과 수명의 길고 짧음이 어찌 경중이 되겠는가. 公諱汝欽。字士明。翠谷其號也。曺氏系出昌寧。以大樂署承謙爲遠祖。鐵冶君精通。忠淸監司景湜。皆其中葉顯祖也。高祖淸文科淸道郡守。曾祖孝信遺逸除光陽縣監。祖傑號默軒。隱德不仕。考彦仁號晩隱。以掌隷直長。歸老鄕里。以嘉靖己酉生。公體質岐嶷。才性穎悟。三歲誦六甲。四歲授孝經。五歲讀小學。一覽成誦。六七歲能綴文占句。九歲讀大學。究見大義。自是四子六經。次第淹貫。讀韓文公含淚渡灞之句。歎曰。君子自處。當勉其在我者而已。何必乃爾。成童贄謁栗谷先生。先生見而異之。稱許甚重。自是刊落擧業。專以存養踐履爲主。事親也怡色婉容。志物無闕。有疾則衣不解帶。夜不就枕。露禱稽顙。祈以身代丁卯中司馬。蓋爲親屈也。結塾於龍岡之麓。杜門絶迹。專心治學。遠近士友。聞風來集者甚衆。依隱屛學規以立課程。諄諄誘掖。多所成就。嘗戒人曰。學問則務勝於人。處己則常屈於人。又戒人之業時文者曰。有德者有言。全昧性理之學者。終不得文章之妙。與林石川金芷川白玉峯林書谷諸名勝爲道義交。石川贈公詩曰。湖山奇氣降奎纏。南斗香名屬妙年。文章契悟猶餘事。行義居家素性然。萬曆己卯終。享年三十一。二男。曰長日官主簿。曰長斗外史氏曰。公以英才偉器。早年發軔。琢磨展拓。若是其盛。而潛光遐隅。壽又不遐。使進不得行其義。退不得傳其道。豈天人之不相謀。有如是耶。嗚乎。生於我朝明宣日中之世。以李文成先生爲師而得聞洙泗洛閩之學。則不可謂不遇於世矣。亦不可謂不遇於人矣。彼位之崇卑。壽之長短。曷足爲軒輊哉。 유일(遺逸) 숨은 인재, 즉 산림의 선비로서 학문이 높고 명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유일로 천거되면 왕이 불러서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다. 의젓하고 총명하며 원문의 '기억(岐嶷)'은 《시경》 〈대아(大雅) 생민(生民)〉에 "실로 기어서 능히 숙성(夙成)하였다.[誕實匍匐, 克岐克嶷.]"고 한 데서 온 말로, 총명하고 조숙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형용할 때 쓰는 말이다. 한문공(韓文公)의……구절 한유(韓愈)의 시 〈현재에서 생긴 감회[縣齋有懷]〉에 "서책을 품고 황도를 떠나, 눈물을 머금고 푸른 파수 건너네.[懷書出皇都, 銜淚渡淸灞.]"라고 읊은 구절이 있는데, 이 시는 한유가 정원(貞元) 11년 박학굉사시(博學宏詞試)에 급제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경사(京師)를 떠나 낙양(洛陽)으로 간 사실을 읊은 것이다. 《韓昌黎集 卷2 縣齋有懷》 이후 보편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거나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파수를 건넌다[渡灞]'라고 표현한다.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정묘년에……합격하였으니 조여흠은 1567년(丁卯, 명종22) 당시 19세의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 47위로 합격하였다. 어버이의……것 한(漢) 나라 모의(毛義)가, "태수 사령장을 받고 기뻐한 것은 늙은 부모를 위해서이다[奉檄而喜爲親屈也]." 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69 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序》. 은병학규(隱屛學規) 율곡 이이가 해주 석담천(石潭川)에 은거하면서,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았던 것을 본떠서, 1576년(선조9)에 석담천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만든 규약을 말한다. 《輿地圖書 黃海道 海州》 덕을……있고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이르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합당한 말이 있지만, 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고 하였다. 임억령(林億齡) 1496~1568.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태수(太樹), 호는 석천이다. 을사사화 때 아우 임백령(林百齡)이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가담하는 것을 보고 해남(海南)에 은거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저서에 《석천집》이 있다. 김공희(金公喜) 1540~1604.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지명(之明)·지천(芝川)으로 조선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1564년(명종19)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0년(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종사관(從事官), 영광 군수를 거쳐 남원 부사를 지냈다.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이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이라 불리며 당풍의 시들을 남겼다. 28세인 156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를 즐겼다. 저서로 《옥봉집(玉峰集)》이 전한다. 규성이 내려와 규전(奎躔)은 28수(宿)의 하나인 규성(奎星)의 자리로, 그 별자리의 모양이 문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여, 문장(文章) 혹은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젊은 나이 원문의 '묘년(妙年)'은 '묘령(妙齡)'과 같은 말로 20세 전후의 젊고 꽃다운 나이를 뜻한다. 남두 이십팔수의 하나인 두수(斗宿)로, 남쪽 하늘에 여섯 별로 구성되었으며, 북두칠성같이 술구기 모양이어서 남두(南斗)라고 하였다. 벼슬을 시작하여 원문의 '발인(發軔)'은 수레바퀴의 버팀목을 빼고 수레를 출발시킨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젊어서부터 청운의 벼슬길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조여흠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명종(明宗)과……살아 조여흠은 기유년(1549, 명종4)에 태어나 기묘년(1579, 선조12)에 세상을 떠났으니 명종과 선조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수사낙민(洙泗洛閩) 유학을 말한다. 수사는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 곡부 근처를 흐르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인데, 공자가 이곳에서 강학을 하였기 때문에 대개 공자와 그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였으며, 낙민은 송나라 때의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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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돈녕부사 영헌 조공전 同敦寧瀛軒曺公傳 영헌(瀛軒) 조공(曺公)의 휘는 석우(錫祐)이며, 자는 찬경(燦卿)이다. 고려조 평장사 문충공(文忠公)인 휘 용기(用奇)가 그의 중조(中祖)이다. 휘 극인(克仁)에 이르러 우리 단종 조에 흥양(興陽)으로 은둔하였으므로 자손들이 여기에 그대로 살았다. 증조 명상(命祥)은 사헌부 장령에 증직되었고, 조부 윤승(允承)은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순진(順振)은 공조 참판에 증직되었는데 세상에 행의가 드러났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광우(光佑)의 딸로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으며, 순조 임진년(1832, 순조32) 2월 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공손히 응대함과 나아가고 물러남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몸이 바짝 마르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끝없이 슬피 울부짖으니 이웃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친을 섬길 적에 더욱 정성을 다하여 입고 먹는 물질적인 봉양과 마음으로 뜻을 받드는 봉양에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친이 병환이 있을 때 근심을 다하였고 대변의 달고 씀을 맛보아 병세의 덜하고 더함을 징험하기까지 하였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이미 기애(耆艾)164)의 나이인데도 몸을 지나칠 정도로 훼손하였고, 여막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3년을 마쳤다. 이를 미루어서 친척과 붕우에게까지 은혜와 의리가 모두 지극하여 각각 환심을 얻었다. 고을과 도내의 인사(人士)들이 공을 효성스럽고 청렴함으로 천거하니 금상(今上) 임진년(1892, 고종9)에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고, 계사년(1893)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승진하였으며, 갑오년(1894)에 돈녕부 동돈녕(敦寧府同敦寧)으로 승진하여 3대가 추증을 받았다. 경자년(1900) 10월 3일에 생을 마쳤다. 5남을 두었는데, 경수(暻洙)·흥수(興洙)·인수(仁洙)·문수(文洙)·기수(錤洙)이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상고에는 질박함165)이 흩어지지 않고 인문(人文)이 번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속이 순후(醇厚)하고 간략하며, 백성들이 오복(五福)을 누리는 것166)이 두터웠으나 속임수와 간교함이 날로 더욱 무성하여서는 재앙이 일어났다. 공의 평소 행적을 살펴보니 질박하고 성실한 천성을 온전히 하여 꾸미거나 모방하는 뜻이 있지 않았으니 또한 지금 사람이면서 옛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후대 자손이 번성하고 작위와 은총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는 선을 닦아봐야 이로울 것이 없고 악을 행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여기는 자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 瀛軒曺公諱錫祐。字燦卿。麗朝平章事文忠公諱用奇。其中祖也。至諱克仁。際我端宗朝。遯于興陽。子孫仍居焉。曾祖命祥贈司憲府掌令。祖允承贈戶曹參議。考順振贈工曹參判。世著行義。妣貞夫人礪山宋氏光佑女。婦德醇備以純廟壬辰二月七日生公公幼有至性唯諾進退。有異凡兒。早喪所恃。毁瘠骨立。哀號罔極。隣里莫不感涕。事嚴庭。尤盡其誠。口體之奉。心志之養。無不備至。親有疾。極其致憂。至嘗糞甛苦。以驗差劇。及遭艱。年已耆艾。而致毁過甚。廬墓泣血。以終三年。推以至於族戚朋友。恩義兼至。各得歡心。鄕道人士。薦公孝廉。今上壬辰。除司憲府監察。癸巳陞敦寧府都正。甲午陞敦寧府同敦寧。追榮三世。庚子十月三日終。五男。曰暻洙興洙仁洙文洙錤洙。外史氏曰。上古大樸未散。人文未繁。是以風俗醇厚簡質。而民所以嚮用吾福者厚矣。及其變詐巧僞。日以益繁。而灾孽作矣。迹公平日之行。有以全其質實忠慤之天。而未嘗有表襮依樣底意。亦可謂今人而古人矣。祚胤之蕃衍。爵寵之煒煌。不亦宜乎。此可爲謂善無益謂惡無傷之者戒也耳。 기애(耆艾) 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60세를 기(耆)라 하고, 50세를 애(艾)라 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艾)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세를 기(耆)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질박함 원문의 '대박(大樸)'은 원시(原始) 상태의 질박한 대도(大道)를 말한다. 오복(五福)을 누리는 것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의 물음에 대답하여 지은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아홉 번째가 "향함을 오복으로써 한다[嚮用五福]"이다. 여기서 오복(五福)은 장수[壽], 부유함[富], 강녕함[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늙어서 편히 죽는 것[考終命]을 가리킨다. 《書經 洪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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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양씨전 烈婦梁氏傳 열부 양씨(梁氏)는 제주 사람으로 아버지는 상룡(相龍), 조부는 주진(柱震), 증조는 홍우(鴻友)이다. 기묘명현 혜강공(惠康公) 양팽손(梁彭孫)167)의 12세손으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에 능주 초방리(草坊里)에서 태어났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고, 《열녀전》과 《소학》 등의 책을 읽고 대략 그 대의를 깨우쳤다. 부모를 섬김에 온화한 말과 공손한 낯빛으로 말을 듣고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다. 18세에 사인(士人) 박서진(朴瑞鎭)에게 시집갔는데, 박씨의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임진왜란 때 충신인 좌승지에 추증된 박지수(朴枝樹)168)의 후손이다.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서진이 병으로 위독하자 열부(烈婦)가 단지(斷指)하여169) 소생시켰으나 조금 있다 다시 숨이 끊어졌다. 열부는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이라고 맹서하고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는데, 시부모와 집안사람들이 매우 간절히 타이르고 힘써 막으니 열부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혼수로 해온 장신구와 복식(服飾), 금비녀와 옥반지 등을 헐값으로 팔아 상례와 장례의 비용을 마련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전(祭奠)170)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삼갔으며, 비린 고기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시부모를 곁에 모시면서 슬퍼하는 마음이 얼굴과 말에 나타나지 않게 하였으며,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마음을 다해 힘써 장만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힘썼다. 종자(從子, 조카) 준옥(準珏)을 후사로 삼고 가르치고 기름에 법도가 있어 마침내 이름난 선비가 되게 하였다. 하루는 병이 깊어지자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서 그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일찍 남편을 잃었는데 지금까지 죽지 못한 것은 다만 너를 가르치고 성취시켜 너의 아버지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 할 일은 이미 다하였으니 죽은들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다만 너에게 바라는 것은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침상에 드러누워 영면하였다. 고을에서 그 열효(烈孝)를 아름답게 여겨 추천하여 상사(上司, 상급 관청)에 보고함이 전후로 끊이지 않았다. 고을 사람인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나는 일찍이 노사 선생을 모시고 문문산(文文山)171)이 죽지 않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충신과 열부는 그 뜻이 하나다. 부인이 그 남편을 잃었을 적에는 그 궤전을 받들고 그 장례를 경영해야 하며, 자식이 있으면 양육하고 자식이 없으면 이어야 하며, 가르치고 성취시켜 그 후손을 전하고 그 집안을 보존해야 하니, 어찌 다만 남편을 따라 죽는 것만을 열(烈)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셨다. 아,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는데, 이제야 그러한 사람을 보았도다. 훗날 삼강의 붓을 잡은 자가 마땅히 높은 행실과 훌륭한 여인의 자리에 편입한다면 그들의 아름다운 행적에 필적할 것이다. 烈婦梁氏。濟州人。考相龍。祖柱震。曾祖鴻友。己卯名賢惠康公彭孫十二世孫也。以純廟癸巳生于綾之草坊里。貞靜柔嘉。婦德純備。列女傳小學等書。略曉大義。事父母。溫言恭色。聽從女流。十八歸士人朴瑞鎭。朴氏貫密陽。壬辰忠臣贈左承旨枝樹后。歸未幾瑞鎭得劇疾。烈婦血指得蘇。俄而復絶。烈婦誓下從。絶不飮食。舅姑及家人。諭之甚懇。防之甚力。烈婦不得已而起。斥賣資裝服飾金釵玉環等物。以爲治喪營葬之費。朝夕饋奠。必誠必愼。腥臊之味。不入於口。在舅姑側。悲慘之意。不形於色辭。甘毳之供。極意營辦。務悅其心。以從子準珏爲後。敎養有法。遂成名士。一日沈疾。沐浴着新衣。招其子語曰。早失所天。而至今未亡。只爲汝敎養成就。使汝父不至乏祀也。吾事已畢。死復何恨。只願汝無負吾期汝之意也。言訖就枕而逝。鄕里嘉其烈孝。剡報上司。前後續續。鄕里人鄭義林曰。余嘗侍蘆沙先生。問文文山不死。先生曰。忠臣烈婦其義一也。婦人之喪其夫也。奉其饋奠。營其窆葬。有子則養育之。無子則繼續之。敎誨成就。以傳其後。以存其家。豈只以從夫死爲烈哉。嗚乎。余嘗聞其語而今見其人矣。後之秉三綱之筆者。宜其編入於高行令女之次。與之匹美而齊休也。 양팽손(梁彭孫) 1488~1545.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그 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뒤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나아갔지만, 곧 사임하고 다음 해에 죽었다. 박지수(朴枝樹) 1552~159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무중(茂仲), 호는 모봉(茅峰)으로,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노복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오자 부인 노씨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이 광경을 지켜본 노비 근춘(斤春) 역시 자결하였는데 이에 일문삼절(一門三節)이 배출되었다고 회자되며 이들의 충절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다. 단지(斷指)하여 원문의 '혈지(血指)'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리는 것인데, 효자가 생명이 위독한 부모에게 자신의 피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제전(祭奠) 원문의 '궤전(饋奠)'은 매장하기 전까지 제사 형식을 갖추지 않고 음식을 올리는 예를 말하나, 일반적으로 제물을 갖추어 제사지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문문산(文文山) 문산(文山)은 남송(南宋)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송 이종(宋理宗) 때 우승상(右丞相)으로 화의(和議)하러 원(元)의 궁중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밤에 도망쳐서 온주(溫州)로 돌아왔다. 익왕(益王)이 즉위하여 그를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고 강서(江西)의 도독(都督)으로 삼았으나 또 원군에게 패전하였다. 위왕(衛王)이 즉위하여서는 신국공(信國公)의 봉(封)을 받고 조양(潮陽)에 주둔하였다가 원장(元將) 장홍범(張弘範)에게 패전하여 포로가 되어 연경에 3년 동안 억류(抑留)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신의 충절(忠節)을 나타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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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문집 중 시의 운을 쓰다 用先師集中韻 유유한 만겁에 중생들이 지나갔으니 悠悠萬劫衆生過이름과 성도 어지로워 얼마나 되던가 名姓紛紛問幾何천지를 경륜함은 누가 가장 잘하던고284) 天地經綸誰是最일성 같은 매운 절조 또한 많다 하리라 日星節烈亦云多일원285)이 끝나면 같이 사멸로 돌아가니 一元盡後同歸滅큰 안목으로 보며 홀로 노래 부르노라 大眼看來獨放歌함부로 방명 남기려함은 진정 운수에 어두운 것 妄欲遺芳眞昧數그저 백발이 되도록 직분을 닦을 뿐이네 但修分職到頭皤 悠悠萬劫衆生過, 名姓紛紛問幾何.天地經綸誰是最, 日星節烈亦云多.一元盡後同歸滅, 大眼看來獨放歌.妄欲遺芳眞昧數, 但修分職到頭皤. 천지를……하던고 후창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가리켜 한 말이다. 일원(一元) 오랜 세월을 비유한 것이다. 본래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주장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설에 나오는 용어로, 이 세계가 생성했다가 소멸하는 1주기(周期)를 말한다. 《皇極經世書 卷2 纂圖指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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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 영공이 일흔두 살에 득남한 경사136)를 축하하며 갑술년(1874, 고종11) 賀河叟令公七十二歲璋慶【甲戌】 하옹은 일흔 살에도 기운이 오히려 좋으니 河翁七十氣猶佳하늘이 기린아137)를 이 집안에 내려 보냈네 天遣麟兒降此家반드시 하나의 양이 끝내 돌아올 걸 믿으니 須信一陽終有復문득 고목에 다시 꽃이 피는 것을 보겠네 却看古木更生花활을 매달고 화살을 던져 먼 장래를 기대하고 懸弧投矢期將遠대장장이 이어 갖옷 만드니138) 이치 어긋나지 않네 繼冶爲裘理不差무왕이 성왕에게 전위한 걸 누가 늦었다 말하는가 周武傳成誰道晩한층 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139) 裕餘視彼一層加 河翁七十氣猶佳, 天遣麟兒降此家.須信一陽終有復, 却看古木更生花.懸弧投矢期將遠, 繼冶爲裘理不差.周武傳成誰道晩? 裕餘視彼一層加. 득남(得男)한 경사 원문의 '장경(璋慶)'은, 《시경》 〈사간(斯干)〉에 "이에 아들을 낳아 침상에서 재우며 바지를 입히며 구슬을 갖고 놀게 한다.〔乃生男子, 載寢之牀, 載衣之裳, 載弄之璋.〕"라는 말이 나온다. 기린아(麒麟兒) 재주가 뛰어난 아이를 일컫는데, 흔히 문재(文才)가 있는 남의 자제를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두보(杜甫)가 서경(徐卿)의 두 아들을 칭찬하여 지은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에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아다 주었다니, 두 아이는 모두 천상의 기린아라네.〔孔子釋氏親抱送, 竝是天上麒麟兒.〕" 한 데서 나왔다. 《杜少陵詩集 卷10》 대장장이……만드니 자식이 훌륭한 부친의 가업을 잘 잇는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키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하였다. 무왕(武王)이……주었는데 주(周)나라는 성왕(成王)과 그의 아들 강왕(康王) 2대 40여 년 동안 천하가 안정되고 죄수가 없어 감옥이 텅 비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주 무왕이 죽고 나서 어린 아들 성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숙부인 주공(周公)이 섭정하게 되자, 주공의 형제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공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시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성왕이 주공에게 명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함으로써 난을 평정하였다. 《史記 周本紀》《史記 管蔡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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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의 〈회여안〉 시에 차운하다 次可石懷汝安韻 세상 분위기는 천리가 시커먼데 世氛千里黑서재의 촛불이 한 창가에 붉구나 書燭一牕紅헤어져 사는 걸383) 한스러워 말고 離索不須恨간직한 바가 달라졌는지 묻는다네 所存問異同 世氛千里黑, 書燭一牕紅.離索不須恨, 所存問異同. 헤어져 사는 걸 원문의 '이삭(離索)'은 이군삭거(離群索居)의 준말로, 벗들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사는 것을 뜻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지낸 지가 오래이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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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8 卷之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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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7) 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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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오기 竹塢記 죽오(竹塢) 주인은 내가 만년에 사귄 벗이다. 몸을 지켜 자취를 거두어 천진에 맡기고 본분을 미루어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 늙음에 이르러서도 더욱 스스로 재주와 덕을 숨기고, 오직 학문에 힘썼다.하루는 내가 그를 방문하였는데 그 집이 씻은 듯 깨끗하여 하나의 좋은 물건은 없고 오직 몇 그루 대나무만 뜰 사이에 푸른 것을 보았다. 이에 주인이 그 집에 이름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았고, 또 그 학문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진보하고 몸은 때에 맞게 숨긴 것은 또한 애초에 여기에서 터득함이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대나무의 무성함을 보고 학문에 절차탁마하는 아름다움을 취하고 대나무의 곧음을 보고 명절(名節)을 힘써 닦는 견고함을 생각하는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고인을 보고 본받아 상수(桑收)의 계획141)과 세한(歲寒)의 계책142)으로 삼아 넉넉하게 여유가 있을 것이다.오호라! 고 처사 간재옹(澗齋翁)143)은 바로 주인옹의 원방(元方)144)이다. 나와 막역한 교분이 있어 세한에도 서로 지키자는 약속을 한 것이 실로 얕지 않았는데, 옹이 죽어버리고 이 약속이 또 그 아우에게 있게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고금을 두루 돌아봄에 비탄을 감당할 수 없네. 그러나 오늘 서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당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니, 우리 두 사람은 어찌 서로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 평소 절차탁마하는 공부가 있지 않다면 세한에 힘써 닦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竹塢主人。余晩年友也。守身斂迹。任眞推分。非其力不食。非其義不爲。至於老而益自鞱晦。惟學是力。一日余過之。見其垣宇蕭灑。無一長物。惟有數竽竹。蒼然於庭除間。乃知主人所以名其室者。有在於此。又知其學與年進。身與時晦者。亦未始非有得於此也。瞻彼掎而取學問切磋之美。見其貞而思名節砥礪之固者。想必視法古人而爲桑收之計。歲寒之策。綽有餘地。嗚乎。故處士澗齋翁。卽主人之元方也。與余有莫逆之契。而寄歲寒相守之約。實不淺淺。豈知翁不見留而此約又在於其季難也耶。俯伂今古。不勝悲慨。然今日之不相負約。乃所以爲不負當日之約。吾兩人。盍相共勉焉。非有平日之切磋。無以爲歲寒之砥礪也。 상수(桑收)의 계획 만년에 공적을 거두는 계획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의 장수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가 처음 싸움에서 대패하고, 얼마 뒤에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적미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글을 내려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회계에서 깃을 접었으나 나중에는 민지에서 떨쳐 비상하니, '동우에 잃었다가 상유에 수습하였다.'라고 할 만하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동우(東隅)'는 동쪽 모퉁이로 해가 뜨는 곳인데 젊은 시절을 가리키고, '상유(桑楡)'는 뽕나무와 느릅나무로 지는 해의 그림자가 이 나무의 끝에 남아 있다 하여 해가 지는 곳인데 만년을 가리킨다. 《後漢書 卷47 馮異列傳》 세한(歲寒)의 계책 세한은 해가 저물어 가는 한겨울의 매운 추위를 이르는 말인데, 노년의 지조를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간재옹(澗齋翁) 이기백(李琪白, 1854~1903)을 말한다. 자는 광빈(光彬), 호는 간재(澗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 권19 〈간재 처사 이공 행장(澗齋處士李公行狀)〉에 보인다. 원방(元方) 후한(後漢) 진기(陳紀)의 자이다. 진기와 그의 아우 진심(陳諶) 계방(季方)이 훌륭하여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데서 난형난제(難兄難弟)라는 말이 나왔다. 여기에서는 형님인 이기백을 빗대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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