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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신재기 德新齋記 장동(長東)의 덕산(德山) 기슭에 새로 지은 집이 있는데, 바로 난정옹(蘭亭翁)이 만년에 공부하며 노니는 장소로, '덕신(德新)'이라 편액하였다.옹은 일찍이 사방을 경영할 뜻을 가져 세상일을 자세히 살펴보고 시속의 사정을 익숙하게 깨닫고서 자나 깨나 경세제민(經世濟民)할 것을 생각하며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행하고 멈추었으니, 대저 험난하고 평탄한 온갖 풍상들을 천 가지 만 가지 생겨나는 대로 다 받아들이며 낱낱이 겪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견디기 어려워 이제 70을 바라보게 되자, 벼슬길에서 물러나 은거지[莵裘]에 별장을 짓고 수레를 걸어 놓은 채41) 두문불출하며 뜬 생각과 외물에 대한 근심이 연기와 구름이 사라지듯 활짝 개어 마음에 티끌만큼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오직 덕에 나아가는 한 가지 일만이 연연하게 마음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에 높은 집의 커다란 벽에 대단히 상서로운 요결을 큰 글씨로 특별하게 써 놓고 아침저녁으로 항상 눈여겨보았으니, 쇠잔하고 늙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너그럽게 대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로잡고 경계한 뜻이 어찌 위(衛)나라 무공(衛武公)42)과 거백옥(遽伯玉)43)만이 전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장소는 외지고, 인적은 드문데다 산은 고요하고, 햇빛은 오래도록 비치는 이곳에서 한가로이 노닐며 공부하고 휴식을 취함으로써 생강이나 계피처럼 머금은 향기가 늙을수록 더욱 매워지고, 시초(蓍草)나 거북처럼 축적한 정기(精氣)가 오래될수록 더욱 신묘해진다면 극진(棘津)의 호변(虎變)44)과 완성(完城)의 우여(牛轝)가 또 70, 80의 나이에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아, 덕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늙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소년이나 청년처럼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한 사람임에랴. 옹을 모시고 가르침을 따르며 이 덕신재에서 학업을 닦는 자들이 보고서 법으로 삼을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長東德山之趾。有新構。卽蘭亭翁晩年藏修之所。而額以德新者也。翁早有四方之志。備閱世故。練解時情。寤寐經濟。酬酢流坎。凡風霜夷險。千生萬受。無不這這嘗試。而叵耐歲月駸駸。已望七于玆矣。退營莵裘。懸車杜門。浮想外慮。曠然休歇。如烟消雲空。無有芥滯於中。而惟進德一着。變變在念耳。是於高堂巨牓。大書特筆。元符要訣。昕夕常目。其不以衰老自恕。而勉勉規儆之意。豈惟衛武邃玉爲專美哉。境僻人稀。山靜日長。優哉游哉。修焉息焉。如薑桂之含薰。老而愈辣。蓍龜之畜精。久而益神。則安知棘津虎變。完城牛轝。又不在於七十八之年乎。嗚乎。德之日新。老猶如此。況丱角衿佩年富力强之人乎。陪從下風而遊業此齋者。視爲柯則。盍相勉焉。 수레를……채 원문의 '현거(懸車)'을 국역한 것으로,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일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설광덕(薛廣德)이 관직을 사퇴하고 은거할 때 임금이 하사한 안거(安車)를 매달아 놓고 자손에게 전하여 광영(光榮)을 보인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위(衛)나라 무공(武公) 춘추 시대에 위(衛)나라의 제후로, 95세가 되었음에도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경계하기 위해서 〈대아(大雅) 억(抑)〉을 지어 시종(侍從)으로 하여금 날마다 곁에서 외우게 했다고 한다. 《詩經》 거백옥(遽伯玉)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였던 거원(蘧瑗)을 말한다. "나이 50에 49년의 잘못됨을 알았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는 고사가 전해진다. 《淮南子 原道》 극진(棘津)의 호변(虎變)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90의 나이에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한 일을 말하는 듯하다. 《史記 齊太公世家》 참고로 '극진'은 황하에 있는 나루터로,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50세 때에 이곳에서 음식을 팔았다고 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권7에 "그가 나이 50에 극진에서 음식을 팔고, 70에 조가에서 백정의 일을 하고, 90이 되어서야 천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문왕을 만난 것이다.[行年五十, 賣食棘津, 年七十屠于朝歌, 九十乃爲天子師, 則遇文王也.]"라는 말이 나온다. '호변(虎變)'은 호랑이 등의 무늬가 다채롭게 변하듯이 큰 공훈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주역》 〈혁괘(革卦) 구오(九五)〉에 "대인이 범이 변하듯 함이니, 점치지 않고도 믿음이 있다.[大人虎變, 未占有孚.]" 하였고, 〈구오 상(象)〉에 "'대인호변'은 그 문채가 빛나는 것이다.[大人虎變, 其文炳也.]" 하였는데, 정이(程頤)의 전(傳)에 "대인의 도로써 천하의 일을 변혁하면 마땅하지 않음이 없고, 때에 맞지 않음이 없으니, 지나는 곳이 신묘하게 변화되고 사리가 밝게 드러나서 범의 문채와 같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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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기 悔軒記 어떤 객이 회헌(悔軒)의 주인을 힐난하며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후회는 움직이는 데서 생겨나니,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주인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질박하고, 행실이 이미 뒤로 물러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서 젊어서부터 말을 적게 하고 화려한 꾸밈을 생략하였으며, 출입을 간소하게 하고 교유를 끊으면서 문을 닫고 조용히 거처한 지 50년 동안 족적이 일찍이 한 번도 명성과 이욕이 어지럽게 날리는 티끌 사이에 미친 적이 없었으니, 어수선한 세상 사람과 비교하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움직이지도 않고 후회한다고 말하는 것은 음식을 먹지도 않고 목이 메었다고 말하거나 술을 마시지도 않고 취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사람이 상등의 지혜가 아니라면 누구인들 후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평생 졸렬함을 지키면서 요행히 면한 것은 단지 뚜렷한 과실과 후회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태만한 채 더 살피지 않고서 만약 어느 날 만나는 바가 오늘날과 달리 조금씩 발을 내디뎌 다소의 자가당착이 있게 된다면 어찌 지금껏 해오던 습관대로 그럭저럭 넘어가면서 뜻밖의 후회가 없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른바 오늘날 후회가 없다는 것이 바로 훗날 후회가 있게 되는 뿌리가 될 것입니다.병은 발작한 날에 일어나지 않고, 재앙은 발생한 때에 생겨나지 않으니, 병이 없을 때에 병을 다스리고 재앙이 없을 때에 재앙을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회헌(悔軒)'이라 명명한 뜻입니다. 다만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아 나이와 근력이 이미 늙고 쇠약해졌는데, 어스름 날이 저물어 갈 때에 먼 나루터를 묻고, 갈증이 일어날 때에 깊은 우물을 팔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시작이 있고 끝맺음이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과 대현(大賢)뿐이고, 그 다음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모두 온전히 할 수 없습니다. 정원의 꽃을 경계하는 것은 일찍 시들기 때문이고, 뜰의 국화를 아끼는 것은 늦은 계절에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저언회(禇彦回)는 젊었을 때에 아름다운 명망이 없지 않았으나 끝내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고,47) 풍절후(馮節候)는 동우(東隅)에서 약간의 실수가 없지 않았으나 마침내 개국(開國)의 공훈을 세웠습니다.48) 이것으로 보건대, 시작은 있되 끝맺음이 없는 것이 어찌 시작은 없되 끝맺음이 있는 것만 하겠습니까. 더욱이 주인께서는 한창 장년과 노년이 교차되는 시기에 있으니,  훗날을 위해 뿌리를 심고 가꾸는 것이 어찌 늦었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주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객에게 그 말을 적어 회헌의 기문(記文)으로 삼을 것을 부탁하였다. 客有難於悔軒主人曰。凡天下之悔。生於動。不動。何悔之有。主人天姿質樸。行已恬退。自少寡言語。略文華。簡出入。息交遊。杜門潛處五十年。足跡未嘗一及於聲利紛塵之間。視諸世之撓撓者。可謂靜而不動矣。不動而言悔。猶不食而言噎。不飮而言酲。其可乎。主人曰。人非上智。孰能無悔。顧平生守拙所以倖免。只是顯然過悔而已。視以爲足。漫不加省。若一日所遇。異於今日。而有小小出脚。多少撞着。則安得因仍捱過。而保無不虞之悔哉。然則所謂今日之無悔者。政爲他日有悔之根柢也。病不作於作之日。禍不生於生之時。治病於無病。銷禍於無禍。此吾所以名軒之意也。但日月不貸。年力已替。問遠津於薄暮。掘深井於臨渴有是理乎。客曰。有始有終。惟聖人與大賢。其次皆不能兩全。園花之戒。以其早萎也。庭菊之愛以其晩秀也。禇彦回非無少年令望。而卒爲負義之人。馮節侯非無東隅小失。而終作開國之勳。以此觀之。有始而無終。曷若無始而有終乎。況主人方在壯衰之交。所以爲栽種後日之根株者。豈云晩乎。主人逌然而笑。屬客書其語。以爲軒記 저언회(禇彦回)는……되었고 남조(南朝) 송(宋)나라와 제(齊)나라 때의 관리 저연(褚淵)으로, 언회는 그의 자이다. 그는 젊었을 때 청렴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훗날 송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를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南史 卷28 褚裕之列傳》 풍절후(馮節候)는……세웠습니다 풍절후는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의 장군인 풍이(馮異)로, 적미(赤眉)의 난을 토벌하는데 처음에는 대패하였다가 군사를 재정비하여 적미의 군대를 격파하자, 황제가 직접 글을 지어 그 노고를 치하하기를 "처음에 회계(會稽)에서는 날개를 접었으나 끝내 민지(澠池)에서 떨쳐 비상하니, 참으로 '동우(東偶)에서 잃었다가 상유(桑楡)에서 수습하였다.'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馮異列傳》 동우는 해가 뜨는 곳으로 젊은 날을, 상유는 해가 지는 곳으로 만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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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헌기 鶴軒記 죽수(竹樹 능주(綾州)) 남쪽 20리에 화학산(華鶴山)50)이 있는데, 산이 높고 골짝이 깊어 구름 낀 숲이 창연하였기에 예로부터 많은 일인(逸人)과 달사(達士)들이 그 사이에서 소요하며 머물렀다. 그런데 김공 석문(金公錫文)이 이곳에 터를 잡고서 30여 년 동안 발이 산에서 나가지 않은 채 어리석음을 껴안고 졸렬함을 지켰으며, 쟁기와 괭이를 잡고 굶주리면서 목석과 함께 늙어 갔으니, 자신을 감추는 것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산 밖 사방의 이웃들이 이미 그의 이름을 알았고, 단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뒤이어 학헌 거사(鶴軒居士)라 불렀다.《시경》에 이르기를,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울음소리가 들녘에 들리도다."51) 하였고, 《주역》에 이르기를,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52) 하였다. 무릇 지성(至誠)이 밖으로 드러나고, 믿음이 만물에 미쳐가는 것이 본래 이와 같은 점이 있으니, 이 이후로 그 소문이 미쳐가는 바가 또 어찌 단지 여기에 그치겠는가.맏아들 기경(箕敬)이 나를 따라 공부하였기에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竹樹南二十里。有華鶴山。山高谷邃。雲林蒼然。自古多逸人達士。盤旋其間。金公錫文卜築於此。三十餘年足不出山。抱愚守拙。把犂鋤而餓。同木石而老。其所以輡晦者。可謂至矣。而山外四隣。己知其名。不但知其名。又從以號之曰鶴軒居士。詩曰。鶴鳴九皐。聲聞于野。易曰。嗚鶴在陰。其子和之。夫誠之著外。孚之及物。自有如此者。自玆以往。其所聞所及。又豈但止此哉。允子箕敬從余遊。請爲之記。 화학산(華鶴山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과 도암면에 걸쳐 있는 산(614m)으로, 산세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학이……들리도다 《시경》 〈학명(鶴鳴)〉에 나오는 구절로, 학은 보통 은거하는 현자를 상징하고, 깊은 산중에서 우는 학의 울음소리가 들녘에 들린다는 것은 아무리 깊은 곳에 은둔하더라도 진실한 덕은 감출 수 없어 저절로 알려지게 된다는 말이다. 우는……화답하도다 《주역》 〈중부괘(中孚卦) 구이(九二)〉에 나오는 말로,  지성(至誠)에 감통(感通)하여 동류들이 서로 응함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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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에 선군의 〈무술년 제석〉 시의 운을 써서 여안을 그리워하다 除夕 用先君戊戌除夕韻 懷汝安 바로 섣달 그믐날 되니 그대가 그리워서 懷君正屬歲除時서쪽 바라보며 상체 시39)에 세 번 탄식하네 西望三嘆常棣詩오늘 아침에 달력풀 서른 잎이 떨어지고40) 蓂落今朝三十葉봄 기운은 매화 정남쪽 가지를 재촉하네 梅催春氣正南枝신산한 마음으로 새로운 이웃집을 보겠고 辛酸應見新隣屋조상의 사당에 술잔 올리지 못해 슬퍼하리 怊悵難參祖廟巵다만 원컨대 한 마음으로 세업을 이어서 但願同心承世業여생에 촌음이 지체되는 것도 아껴야 하리 餘生須惜寸陰遲 懷君正屬歲除時, 西望三嘆常棣詩.蓂落今朝三十葉, 梅催春氣正南枝.辛酸應見新隣屋, 怊悵難參祖廟巵.但願同心承世業, 餘生須惜寸陰遲. 상체 시(常棣詩) '상체(常棣)'는 《시경》의 편명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읊은 시이다. 오늘……떨어지고 오늘이 섣달의 마지막 날이라는 뜻이다. 원문의 '명(蓂)'은 '명협(蓂莢)'을 말하는데, 전설상의 상서로운 풀 이름이다. 초하루부터 매일 한 잎씩 나서 자라다가 16일부터는 매일 한 잎씩 져서 그믐에는 다 떨어지기 때문에 이것으로 날을 계산하여 달력을 만들었다는 고사가 있다. 《竹書紀年 卷上 帝堯陶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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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년(1930) 정월 초하루 경오년 아래도 같다. 庚午元日【庚午下同】 천도는 돌고 돌아 가면 다시 오나니 天道循環往復來이 해 이 날도 차례 따라 처음 돌아왔네 此年此日第初回수면에 얼음 녹아 물고기 아가미 움직이고 氷消水面魚顋動강둑에 바람 따듯해 기러기 떼 재촉하네 風暖江干鴈陣催노인에게 절하는 의관에서 옛 풍속 보겠고 拜老衣冠看古俗봄에 부응하는 시율 짓기에 영재들 모였네 酬春詩律聚羣才새해부터는 사람의 일도 새롭게 해야하니 却從新歲新人事붉은 마음을 재처럼 식게 하지 말아야지 莫遣丹心死似灰 天道循環往復來, 此年此日第初回.氷消水面魚顋動, 風暖江干鴈陣催.拜老衣冠看古俗, 酬春詩律聚羣才.却從新歲新人事, 莫遣丹心死似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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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생일아침에 감회가 일어 8수 五十歲生朝有感【八首】 자세히 따져보니 이미 경강61)할 때가 지나 細算已過庚降辰쏜살같이 흐른 세월이 몸속에 가득 찼구나 光陰忽忽滿中身곧바로 죽는다 해도 요절하는 건 아니지만 便令歸去亦非夭알려짐이 없어 부끄럽게 되었으니 어찌할까 柰作無聞可愧人북당62)께서 낳아준 때가 옛날 언제였던가 北堂劬勞昔何辰지금은 어느덧 어버이를 여윈 몸이 되었네 遽作如今孤露身아이들아 이것을 축수의 잔이라 말하지 말라 兒輩且休稱壽酌늙어갈수록 더욱 부모 생각이 간절하구나 老來益切念先人쇠약한 가문에 하늘이 창성할 때를 주지 않아 衰門天不錫昌辰사대 선조63)들이 회갑을 지내지도 못했다네 四代未經回甲身만약 내 나이에 네댓 살을 보태준다면 若將賤年加四五우리 세대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 될 텐데 最爲吾世壽祺人기이하기도 해라 아우와 생일64)이 같아 奇哉阿仲同弧辰세 살 차이에 몸도 같이 늙어간다네 三歲相差亦老身평생 무척 노력하여 쉴 겨를이 없었는데 勤苦平生無暇息부끄럽게도 난 도리어 게으른 사람이었네 愧余還是懶散人집안일을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듯 하기 어려운 건 家政難能星拱辰모두 이 도리를 몸소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네 總由此道未行身처자식에게 직접 겪은 말로 판단해 보고서 卜諸妻子親經語선현이 사람을 그르치지 않았음을 다시 깨달았네 更覺前賢不誤人내가 불운한 때에 태어난 건 유감없으나 不恨此生丁不辰실제공부가 심신에 미치지 못해 부끄럽네 實工愧未及心身선비는 궁해진 뒤에 높은 절개가 드러나니 士窮然後見高節예로부터 원래 죽지 않는 사람은 없었네 從古元無無死人가정에서 시례의 교육 받던 때65)를 추억하니 憶承詩禮過庭辰어찌 이런 기량을 지니게 되리라 생각했겠나 豈意成玆伎倆身지금부터라도 지난날의 잘못을 알게 된다면 苟得從今知往錯위나라 현인66)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리라 衛賢非是別般人지금보다 음이 성하고 양이 미약한 때가 없어 陰盛陽微莫此辰사도를 지키느라 거의 내 몸을 보전하지 못했네 衛師殆不保吾身하늘이 남은 수명을 몇 해나 빌려줄지 모르지만 未知天假餘年幾부지런히 공부하여 더욱 진보한 사람이 되리라 庶作孜孜更進人 細笑己過庚降辰, 光陰忽忽滿中身.便令歸去亦非夭, 柰作無聞可愧人?北堂劬勞昔何辰? 遽作如今孤露身.兒輩且休稱壽酌, 老來益切念先人.衰門天不錫昌辰, 四代未經回甲身.若將賤年加四五, 最爲吾世壽祺人.奇哉! 阿仲同弧辰, 三歲相差亦老身.勤苦平生無暇息, 愧余還是懶散人.家政難能星拱辰, 總由此道未行身.卜諸妻子親經語, 更覺前賢不誤人.不恨此生丁不辰, 實工愧未及心身.士窮然後見高節, 從古元無無死人.憶承詩禮過庭辰, 豈意成玆伎倆身?苟得從今知往錯, 衛賢非是別船人.陰盛陽微莫此辰, 衛師殆不保吾身.未知天假餘年幾, 庶作孜孜更進人. 경강(庚降) 장경성(長庚星)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장경성은 금성(金星)의 별칭으로, 태백성(太白星)이라고도 하는데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 이 별이 낮에 나타나는 것을 흉한 조짐으로 여겼다. 북당(北堂) 주부의 거실이라는 점에서 모친의 거처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는데, 전하여 어머니를 상진한다. 《시경》 〈위풍(衛風) 백혜(伯兮)〉에 "어떡하면 원추리를 얻어서 북쪽 뒤꼍에 심어 볼까. 떠난 사람 생각에 내 마음만 병드누나.〔焉得萱草, 言樹之背? 願言思伯, 使我心痗.〕"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대(四代) 선조(先祖)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조(祖)ㆍ고(考)를 말한다. 생일(生日) 원문의 '호신(弧辰)'은 남자의 생일을 가리킨다. 옛 풍습에 아들이 태어나면 세상에 큰 뜻을 펴도록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봉초(蓬草)로 화살을 만들어 천지 사방에 쏘았다고 한다. 《禮記 內則》 가정에서……때 가정에서 부친에게 배우는 가학(家學)을 말한다. 공자(孔子)의 아들 이(鯉)가 뜰에서 공자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가 공자로부터 시(詩)와 예(禮)를 배웠느냐는 말을 듣고 그것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던 일에서 유래한다. 《論語 季氏》 위(衛)나라 현인(賢人)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거백옥(蘧伯玉)을 가리킨다. 거백옥이 나이 육십이 되었을 때 그동안의 잘못을 깨닫고 고쳤다는 고사가 있다.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거백옥은 나이 60살이 되자 60살에 변화하였다.[蘧伯玉, 行年六十而六十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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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잔령을 넘으며 踰開棧嶺 여산101)이 높디높고 촉도102)가 험난해도 廬岳高高蜀道難험준함이 이 산보다 더하지는 않으리라 崎嶇未必過此山내려갈 땐 벌써 천 길 함정에 추락할 듯 下來已墜千尋穽오를 때는 만 척의 장대를 타는 듯하네 上去如緣萬尺竿돌에 부딪혀 두 무릎 깨질까 몇 번 걱정하고 觸石幾愁雙膝碎벼랑에 임해서는 온 가슴이 섬뜩함을 느끼네 臨崖還覺一心寒조심조심 내딛어 끝내 험한 곳을 넘고나니 兢兢進步終踰險고생을 겪어야 안락함 맛보게 됨을 알겠네 辛苦方知見樂安 廬岳高高蜀道難, 崎嶇未必過此山.下來已墜千尋穽, 上去如緣萬尺竿.觸石幾愁雙膝碎, 臨崖還覺一心寒.兢兢進步終踰險, 辛苦方知見樂安. 여산(廬山)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남쪽에 있는 수려한 산이다. 촉도(蜀道) 중국 사천성(泗川省)인 촉 땅으로 가는 길인데, 매우 험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아아 험하고도 높구나.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워라.[噫吁嚱,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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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봉에 올라서 上昆盧峯 봉래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한 번 오르니 一陟蓬萊上上峯땅이 동해에 다하여 동쪽 땅이 다시 없네 地窮東海更無東눈 아래에 운하가 희어서 갑자기 놀라고 乍驚眼底雲霞白머리 가에 일월이 붉은 줄 문득 깨닫네 忽覺頭邊日月紅득실과 영고는 모두 헛된 꿈이요 得失榮枯都幻夢존망과 흥폐도 다 헛것이 되었구나 存亡興廢總成空중생들이 언제나 일제히 여기에 올라 衆生安得齊登此흉금을 넓게 열어 큰 공평함을 지을까 恢拓胸衿作大公 一陟蓬萊上上峯, 地窮東海更無東.乍驚眼底雲霞白, 忽覺頭邊日月紅.得失榮枯都幻夢, 存亡興廢總成空.衆生安得齊登此, 恢拓胸衿作大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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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삼117) 【규용】에게 답함 答安敬三【圭容】 은미한 양(陽)의 기운이 처음 움직여 맑은 기운이 바야흐로 올라오니, 이는 군자의 도가 자라는 때인지라 그리운 마음 더욱 간절하네. 마침 묵계(墨溪)118)에 갔다가 그대가 보내준 한 통의 편지를 받아 펼쳐 읽어본 뒤에 참으로 서로 그리워하고 감응하는 뜻이 말하지 않아도 백 리 밖에서 묵묵히 계합하는 것이 있음을 알았으니, 더욱 마음이 경도되었네. 편지를 받은 이후로 다시 생각건대 어버이를 모시는 여가에 경서를 공부하는 체후는 한결같이 넉넉하고 좋으신가? 편지에서 말한 "몸소 사무를 집행하고 남는 여가에 글을 배운다."라고 한 것 이것은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한 입장에서는 용이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매우 좋네. 무릇 이 일은 쉬운 듯하지만 실제로는 어려우니, 오직 정성과 노력이 지극히 독실하여 외면의 일과 함께 따라가지 않아야 바야흐로 가할 것이네. 주자가 말하기를 "매사에 도리를 보고 쉽게 지나치지 않게 하고, 다시 그 속에서 평소의 병통을 간파하여 통렬하게 잘라버리면 학문을 하는 방도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물리쳐버리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치와 일이 도리어 두 가지로 나누어지니 독서 또한 쓸데가 없습니다."라고 하였고,119) 남헌(南軒) 장자(張子)120)가 말하기를 "어버이 곁에서 모시는 잡무는 자식의 직분 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니, 구차하게 지나쳐 버려서는 불가하다. 다만 경(敬)으로 위주로 삼아 일마다 살피는 것이 학문하는 방도이다."라고 하였으니, 원컨대 그대는 이 몇 마디 말에 깊이 더욱 체득하여 평소 복행하는 요체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微陽初動。淑氣方升。此是君子道長之時。懷仰尤切。適到墨溪。得高明所惠一度心畫。披繙以還。儘知相懷相感之意。有不言而默契於百里之外者矣。尤用傾倒信後更惟侍旁經履。一直崇裕。示中躬執事務。餘日學文者。此在家貧親老之地。有所不容易者。甚善甚善。大抵此事似易而實難。惟誠力篤至。不與外面事俱往。方可。朱子曰。每事看得道理。不令容易放過。更於其間。看得平日病痛。痛加剪除。爲學之道。何以加此。若起一排遣厭苦之意。則理事却成兩截。讀書亦無用處。南軒張子曰。侍旁雜務。子職所當爲。不可苟且放過。但敬以爲主。而事事必察焉。學之道也。願吾友於此數語。深加體當。以爲平日服用之要。如何。 안경삼(安敬三) 안규용(安圭容, 1873∼1959)을 말한다. 자는 경삼, 호는 회봉(晦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묵계(墨溪)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마을 이름이다. 주자가……하였고 《주자대전》권49 〈진부중에게 답함[答陳膚仲]〉제6서에 나오는데 내용의 출입이 있다. 남헌(南軒) 장자(張子) 남송(南宋)의 성리학자 장식(張栻, 1133~1180)을 말한다.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ㆍ낙재(樂齋), 호는 남헌이다. 호굉(胡宏)에게 정자(程子)의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주희(朱熹)와 절친한 벗이기도 하다.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여 남헌 선생(南軒先生)이라 불렀으며, 주희ㆍ여조겸(呂祖謙)과 더불어 '동남(東南)의 삼현(三賢)'이라 불렸다.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說)》, 《남헌역설(南軒易說)》, 《남헌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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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락【내귀】에게 답함 答趙仲洛【來龜】 오래 격조하던 차에 한 폭의 고마운 편지는 어찌 보배로운 큰 옥98)과 같을 뿐이겠는가? 더구나 여행하는 체후가 손상이 없음을 알았으니, 위로되고 후련한 마음 말할 수 없네. 모르겠으나 가르치고 배우는 여가에 옛날 학업은 한결같이 긴요한데 착수하여 실마리를 찾았는가? 이 일은 단지 뜻 세움에 책임이 있으니, 뜻을 세우지 못하면 실로 말할 만한 것이 없네. 뜻이 진실로 서면 그 면려하고 신칙하는 것은 어찌 곁에 있는 사람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마치 나그네가 집으로 가고 밥 먹는 사람이 배부르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계단과 길, 절도는 스스로 아는 곳이 있을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세월은 쉽게 흘러가고 공부는 진보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걱정스러운 것이네.[문]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궁리(窮理)', '진성(盡性)', '지명(至命)'이라 하였는데, '궁(窮)', '진(盡)', '지(至)'라고 한 것은 대개 천하의 사물은 이(理)가 있지 않는 것이 없지만 오직 이(理)에 궁구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에 그 지(知)가 다하지 못함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반드시 궁구한 뒤에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궁' 자를 놓았던 까닭입니다. 성(性)은 나에게 있는 것이고 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니, 다만 능히 들어서 다할 뿐입니다. 또 만물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데 잠시 외면하는 마음이 있으면 문득 성을 다하지 못하니, 이것이 '진' 자를 놓았던 까닭입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는데, 이미 성을 다하면 명(命)에 이르기 때문에 "성을 다하여 명에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지' 자를 놓은 까닭입니다.[답] '궁' 자는 '궁구 사색[窮索]'의 공이 될 뿐 아니라, 또 '궁극(窮極)'의 뜻이 있네. 그대가 논한 것은 의의가 있는 듯 하지만 다만 '재유외지지심(纔有外之之心)'은 '일리미명(一理未明)'으로 고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문] 이(理)는 철두철미하여 포함하지 않음이 없으니, 선과 악은 이(理)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이 이를 말함에 대부분 모두 선을 말하고 악을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개 이것은 세상을 따라 교구(矯捄)하는 뜻입니다. 고인은 이를 말하지 않았으나 다만 '중(中)', '충(衷)', '칙(則)', '이(彝)'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중', '충', '칙', '이' 등의 글자는 변하여 하나의 '이' 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 자를 "순전히 선하여 악이 없다.[純善而無惡]"라고 하는 까닭입니다.[답] 이는 비록 포함하지 않음이 없지만 또한 어찌 일찍이 그 가운데 악을 포함하였던가? '무소불포(無所不包)' 네 글자는 실로 모르는 사람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데, 더구나 하문에 지금 사람은 이를 선으로 말하고 악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크게 실언한 것에야 어떠하겠는가?[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부린다.[以心使心]"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보건대, 정 선생의 뜻은 스스로 주재가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단지 하나의 심(心)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함으로 인해 도리어 두 개가 있는 듯하니, 자세히 보면 이것은 하나의 심이다."라고 하였으니,99) 어떻게 스스로 주재가 될 수 있습니까?[답] 스스로 주재가 된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곳이네. 안배하고 조작하여 종종 병통이 생기는 것은 모두 능히 스스로 주재가 되지 못하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네. 阻閡之久。一幅惠墨。何趐爲尺葵拱璧也。矧審旅體無損。慰豁不可言。未知斅學之餘。舊業一着。喫緊就緖否。此事只在責志。志不立。則固無話可說。志苟立矣。則其勉勵勸勅。豈在傍人之頰舌哉。如行者之赴家。食者之求飽。而其階逕節度。自有領略處矣。如何如何。日月易得。功夫難進。此是可憂也。窮理盡性至命。曰窮曰盡曰至者。蓋天下之物。莫不有理。惟於理有未窮。故其知有不盡。是以必窮之而後可知。此所以下窮字。性是在我者。非由外而得。但能擧而盡之而已。且萬物皆備於我。纔有外之之心。便是不盡性。此所以下盡字。天命之謂性。旣盡性則可以至命。故曰盡性知命。此所以下至字。窮字。非惟爲窮索之功。且有窮極之義。所論似有義。但纔有外之之心。改以一理未明。如何。理是徹頭徹尾。無所不包。善惡莫非理。然則今人言理。擧皆以善言。而不以惡言之者。何也。蓋是隨世矯捄之義。古人不言理。但有曰中曰衷曰則曰彝之語。及至乎今。中衷則彝等字。變而爲一理字。此所以以理字。謂純善而無惡。理雖無所不包。亦何嘗包惡在其中。無所不包四字。固不可對不知者言之。況下文今人言理以善。不以惡者。大是失言。程子曰。以心使心。朱子曰。觀程先生之意。說自作主宰耳。只是一箇心。被他說得來。却似有兩箇。仔細看來。只是這一箇心。如何可以自作主宰。自作主宰。此是要處。安排造作。種種病痛。皆從不能自作主宰中出來 보배로운 큰 옥 저본의 '척규공벽(尺葵拱璧)'을 풀이한 말이다. '葵'는 '圭'의 오자로 보인다. 정자(程子)……하였으니 《주자어류》권34〈논어16(論語十六) 술이편(述而篇)〉인원호재장(仁遠乎哉章)에 나오는데, 글자의 출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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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에게 부치려고 지은 시 5수 擬寄敬山【五首】 기러기 끊기고 물고기 잠긴196) 지 삼 년이라 鴈斷魚沈三載今교분 맺은 마음을 서로 저버려 한탄스럽네 却歎相負定交心산중에는 아마도 새로운 시흥이 있을 텐데 山中應有新詩興침상에서 혼자 병중에 읊노라니 가련하네 枕上堪憐獨病吟한겨울 북방의 눈발을 지금 당하니 朔雪窮陰見卽今일만 수목 조락하여 살 마음 닫았네 萬林凋落閉生心누가 푸른 솔처럼 서 있는 몸이 되어 孰能身作蒼松立웅장한 용울음 같은 풍랑 소리 들으랴 自聽風濤龍壯吟밝은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昭然天理古猶今무슨 일로 인생에 문득 마음을 어길까 底事人生却昧心유생들이 도의를 말하는 걸 들어보면 試聽儒冠談道義나무꾼 목동의 요란한 노래만 못하네 不如樵牧亂謳吟앞서지도 처지지도 않고 지금 만남을 不先不後適丁今우습게도 옛사람은 도리어 고심하였네 堪笑前人却惱心지사가 쇠란한 세상을 만나지 않으면 志士未逢衰亂世문장이 풀벌레 소리처럼 공허해지네 文章空似候蟲吟큰소리만 치는 지금과 섞이기 싫은데 嘐嘐不欲混當今지금 세상에 누가 이 마음을 알겠는가 今世誰能識此心한 베개 꿈에 삼고197) 세상에서 놀다가 一枕夢遊三古世깨어나서 문득 혼자 큰소리로 읊조리네 覺來忽復獨高吟 鴈斷魚沈三載今, 却歎相負定交心.山中應有新詩興, 枕上堪憐獨病吟.朔雪窮陰見卽今, 萬林凋落閉生心.孰能身作蒼松立? 自聽風濤龍壯吟.昭然天理古猶今, 底事人生却昧心?試聽儒冠談道義, 不如樵牧亂謳吟.不先不後適丁今, 堪笑前人却惱心.志士未逢衰亂世, 文章空似候蟲吟.嘐嘐不欲混當今, 今世誰能識此心?一枕夢遊三古世, 覺來忽復獨高吟. 기러기……잠긴 소식이 끊긴 것을 말한다. 기러기의 왕래는 때가 일정하므로 비단을 기러기의 발에 매달아 멀리 서신을 전달했다는 설과 한(漢) 나라 때의 악부(樂府)에 "나그네가 멀리서 찾아들어와 내게 잉어 한 쌍을 주고 가기에, 아이 불러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는 한 자의 비단 편지.〔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童烹鯉魚, 中有尺素書.〕"에서 나온 말이다. 삼고(三古) 상고(上古)ㆍ중고(中古)ㆍ하고(下古) 시대를 아울러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태평성대를 누린 당우삼대(唐虞三代)와 같은 이상적인 옛 시대를 범범하게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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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바람에 초당이 벗겨지고 부서졌기에 두 공부173)의 〈띳집이 가을바람에 부서진 것을 한탄하는 노래[茅屋爲秋風所破歌]〉에 화운하다 大風雨捲破草堂, 和杜工部《茅屋爲秋風所破歌》 하늘에서 홀연히 성난 소리가 내려 上天忽然降怒號우사와 풍백이 지붕 이엉 말아가니 雨師風伯捲屋茅들판으로 멀리 가버릴까 근심했네 心之憂矣行邁郊부서진 집의 옥천자174)가 우스우니 堪笑破廬玉川子누가 맹성요175)에 집을 새단장하랴 誰能新家孟城坳돌아와 누워 무력함을 탄식하는네 歎息歸臥無毫力간적 같은 파리와 모기 가증스럽네 可憎蠅奸與蚊賊수리할 온갖 계책 떠오르지 않으니 百計葺理無所出어떡하면 파리 모기 몰아낼 수 있을까 那由此物驅除得하늘 우러러 몰래 바라는 게 무엇인가 仰天暗祝何攸願즉시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나온다면 卽時雲開見日色반쯤 검게 타버린 내 마음 풀어지리라 紓我心肝半焦黑방 구들장은 밤새도록 쇠처럼 차갑고 房突連夜冷似鐵창문 종이는 조각조각 전부 찢어졌네 牕紙片片盡破裂또한 어찌하여 하늘가의 무정한 비는 又何天邊無情雨때때로 이어져 잠시도 그치지 않는가 時時續續不暫絶방 부숴도 노지에서 잔다176)고 예전에 들었는데 昔聞掀却臥房露地睡회옹의 한마디 말에서 통철한 이치를 보겠네 晦翁一語見理徹온 세상 둘러보매 비바람이 험악하니 環顧擧世風雨惡몇이나 이런 일 당해 시름을 함께할까 幾人遭此同愁顔그저 태산처럼 본분 지켜 자중할 뿐이네 只可安分自重如泰山아, 죽으면 골짝에 묻히는데 집을 어디에 쓰랴 嗚呼死卽在壑安用屋내 신사177)를 보전하여 돌아가면 만족하리라 全吾神舍而歸可自足 上天忽然降怒號, 雨師風伯捲屋茅.心之憂矣行邁郊, 堪笑破廬玉川子, 誰能新家孟城坳?歎息歸臥無毫力, 可憎蠅奸與蚊賊.百計葺理無所出, 那由此物驅除得? 仰天暗祝何攸願?卽時雲開見日色, 紓我心肝半焦黑.房突連夜冷似鐵, 牕紙片片盡破裂.又何天邊無情雨? 時時續續不暫絶.昔聞掀却臥房露地睡, 晦翁一語見理徹.環顧擧世風雨惡, 幾人遭此同愁顔? 只可安分自重如泰山.嗚呼死卽在壑安用屋? 全吾神舍而歸可自足. 두 공부(杜工部)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을 지낸 당나라의 두보(杜甫)를 말한다. 부서진 집의 옥천자(玉川子) 허름한 집에 거처하는 작자 자신을 비유한 말이다. 옥천은 당나라 시인인 노동(盧仝)의 호이다. 노동은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옥천자라고 불렀다.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몇 칸짜리 모옥(茅屋)에서 살았는데, 한유(韓愈)가 몹시 예우하였다. 한유의 〈기노동(寄盧仝)〉 시에 "옥천 선생 낙성 안에 살고 있는데, 몇 칸짜리 부서진 집뿐이로구나.〔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5》 맹성요(孟城坳) 맹성(孟城) 입구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당(唐)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별장이 있었다. 맹성은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 종남산(終南山) 자락의 망천(輞川)에 있는 옛 성이며, '요(坳)'는 지형이 움푹 패여 요철(凹凸)이 있는 곳을 말한다. 자던……잔다 이는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답한 편지에 보이는 말로, 이 편지에 이르기를, "맹자의 '대인에게 유세할 때에는 그 지위를 하찮게 여겨야 한다.'라는 말을 논해보건대, 맹자는 진실로 대인을 경외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다만 그 높은 지위를 하찮게 여긴 자일 뿐입니다. 이 마음을 체득하면 누워서 잠자던 방을 무너뜨리더라도 태연히 노지에서 잠잘 수 있으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진정 큰 영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은 도리어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가에 다가간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는 데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혈기가 거칠면 도리어 조금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嘗論孟子說大人則藐之, 孟子固未嘗不畏大人, 但藐其巍巍然者耳. 辨得此心, 卽更掀却臥房, 亦且露地睡, 似此方是眞正大英雄人. 然此一種英雄, 却是從戰戰兢兢臨深履薄處做將出來. 若是血氣粗豪, 却一點使不著也.〕"라고 하였다. 《晦菴集 卷36 答陳同甫》 신사(神舍) 신명(神明)의 집이란 뜻으로, 마음을 뜻한다. 송(宋)나라 황간(黃榦)이 "심이란 신명의 집이니, 허령하고 통철하여 뭇 이치를 갖추고서 모든 사물을 수응하는 것이다.〔心者神明之舍, 虛靈洞徹, 具衆理而應萬物者也.〕" 하였다. 《勉齋集 卷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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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에 여중과 정토사에서 놀다 2수 七月旣望, 與汝重遊淨土寺【二首】 병이 나아도 태양과 맞설 수 없어 病起難能敵老陽한낮에 칠성당으로 달아나 피했네 午天走避七星堂매미들이 함께 울어 소리 씩씩하고 萬蟬幷噪聲何壯외론 길손이 조니 꿈이 길어지네 孤客閒眠夢欲長동인185)이 강개하여 시에 눈물 나고 慷慨同人詩有淚옛 교분 은근하여 술에 향기가 나네 殷勤舊契酒生香천 년 뒤에 아득히 소동파 생각하니 千秋緬憶東坡子이날 하늘 한쪽에서 누굴 바라보았나 此日望誰天一方절기가 삼음에 이르러 점차 양을 깎나니 節屆三陰漸剝陽세월은 물과 같아서 당당하게 지나가네 居諸如水去堂堂풍년이라 민생이 풍족하다 다퉈 말하나 爭言歲稔民生足무슨 일로 가을 되면 길손의 한 많아지나 底事秋來客恨長길의 가시나무를 없애지 못해 한탄스럽고 途棘堪歎無與掃방의 난초는 오래 향기 머무니 기쁘네 室蘭猶喜久留香어떡하면 영균186)처럼 세상을 살아갈까 靈均度世那由得단가187)에게 오묘한 처방을 묻고 싶네 欲向丹家問妙方 病起難能敵老陽, 午天走避七星堂.萬蟬幷噪聲何壯? 孤客閒眠夢欲長.慷慨同人詩有淚, 殷勤舊契酒生香.千秋緬憶東坡子, 此日望誰天一方?節屆三陰漸剝陽, 居諸如水去堂堂.爭言歲稔民生足, 底事秋來客恨長?途棘堪歎無與掃, 室蘭猶喜久留香.靈均度世那由得? 欲向丹家問妙方. 동인(同人) 서로 마음이 맞는 벗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동인괘(同人卦)〉를 풀이한 말에 "두 사람이 한마음이면 그 예리함이 쇠를 끊고, 한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영균(靈均) 전국 시대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충신이자 문장가인 굴원(屈原)의 자(字)이다. 그는 삼려대부(三閭大夫)로서 직간을 하다가 조정에서 모함을 받아 좌천된 후,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읊은 〈이소(離騷)〉 등을 짓고 상강(湘江)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단가(丹家) 연단술(煉丹術)을 행하는 도사(道士)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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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겸 경연참찬관 월헌 조공전 贈通政大夫兵曹參議兼經筵參贊官月軒曺公傳 조공(曺公)의 휘는 현(顯), 자는 희경(希慶)이며 월헌(月軒)은 그의 호이다. 신라 태사 계룡(繼龍)이 비조(鼻祖)가 되고, 고려평장사(高麗平章事) 자기(自奇), 비서소감(祕書少監) 사단(思旦),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장양공(莊襄公) 저(著)가 그의 현조(顯祖)이다. 조부 세창(世昌)은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으며, 아버지 억년(億年)은 참봉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에 태어났다. 공은 지기(志氣)가 무리보다 뛰어나고 강개함이 장대하여 붓을 던지고 무과에 급제하여 명종(明宗) 을묘년(1555, 명종10)에 나가 달량진(達梁鎭, 해남 달랑포)을 지켰다. 그 당시 섬 오랑캐들이 침범해오자 변방 성의 바다를 지키는 수군115)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났는데, 공이 휘하를 독려하여 성에 올라 힘써 싸우자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는데도 밖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다. 적들이 성을 수겹으로 에워싸자 칼을 뽑아 공격하여 수십여 수급을 베었고 검도 부러졌다. 그리하여 지붕의 기와를 걷어 던져 적을 죽이고 부상을 입힌 것이 매우 많았으나 기와가 다 떨어져 성은 함락되었다. 적들은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음을 분하게 여겨 공을 굴복시키고 등을 갈라 간을 드러내기까지 하였는데, 도적을 꾸짖는 소리가 오히려 끊이지 않았다. 적들이 이를 의롭게 여겨 관을 갖추고 시체를 거두었으니, 그때의 나이가 21세였다. 3년이 지난 정사년(1557, 명종12)에 병조 참의에 추증하였고, 선조 무인년(1578, 선조11)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116) 효종 을미년(1655, 효종6)에는 포충사(褒忠祠)117)에 올려 제향하였고, 숙종 계미년(1703, 숙종29)에는 정려를 명하였다. 외사씨(外史氏)118)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옛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119)이 회양(睢陽)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논하는 자들이 고금 천지의 쌍혼(雙魂)으로 그들을 인정하였는데, 공이 장순 허원과 함께 고금의 3혼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 조정이 태평할 때에 공이 먼 지방의 보잘 것 없는 관원으로 우뚝하게 떨쳐 한 시대에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풍의(風義)를 빛냈으니, 38년이 지나 임진년의 변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했던 일이 영호남(嶺湖湖) 사이에 잇달아 있었던 것이 공이 이끈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 집에서 잠도 자고 일어나서 날마다 먹고 마시며 은혜를 받은 것이 많았으니, 삼가 전(傳)을 지어 후대의 재필(載筆)120)할 사람을 기다린다. 曺公諱顯。字希慶。月軒其號也。以新羅太師繼龍爲鼻祖。高麗平章事自奇。秘書少監思旦。都僉議政丞莊襄公著。其顯祖也。祖世昌掌隷院判決事。考億年參奉贈刑曹參判。公生于嘉靖乙未。志氣不羣。慷慨磊落。投筆登武科。明宗乙卯。出守達梁鎭。時島夷入寇。邊城海戍。望風奔潰。公督管下。登城力戰。賊不敢近。居數日。矢盡力竭。外援不至。賊圍城數匝拔劒擊斬數十級。劒亦折。捲屋瓦投之。殺傷甚衆。瓦盡城陷。賊憤其久不下。伏公刳背。至於露肝。而罵賊之聲。猶不絶。賊義之。具棺斂尸。時年二十一。越三年丁巳贈兵曹參議。宣廟戊寅。遣官致祭。孝宗乙未。躋享褒忠祠。肅廟癸未。命旌閭。外史氏曰。昔張巡許遠。死於睢陽之戰。論者以古今天地一雙魂。與之。公之於巡遠。謂之古今三魂。非過論也。當我朝昇平恬憘之際。公以遐土冗官。崛然奮張。扶綱常於一時。耀風義於萬目。後三十八年。壬辰之變。倡義殉節。相望於嶺湖之間者。安知非公倡之耶。載寢載興。日用飮食。受賜多矣。謹爲立傳以以俟後之載筆者。 바다를 지키는 수군 원문의 '해수(海戍)'는 바닷가의 수자리이다. 이백(李白)의 자류마(紫騮馬)에 "흰 눈이 덮인 관산은 멀고 누런 구름 자욱해 해수는 아득해라.[白雪關山遠, 黃雲海戍迷.]" 하였다. 관리를……했으며 1578년(선조11)에 예조 정랑(禮曹正郞) 구충연(具忠淵)을 보내어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치루는 제사)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포충사(褒忠祠)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죽수서원 옆에 위치한다. 1610년(광해군2)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장군만 모셨으나, 1630년(인조8)에 당시 이조판서인 이귀(李貴)의 주청으로 문홍헌(文弘獻)을 배향하였다. 이후 1657년(효종8) 을묘왜란때에 해남 달랑포에서 전사한 조현(曺顯)을 추배 했으며, 1860년(철종11)에 구희(具喜)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외사씨(外史氏) 《사기》 등에는 사관이 어떤 일을 논하는 논평의 글이 나오는데, 이 글은 사관의 글이 아니므로 외사씨라고 한 것이다. 소설에서 끝에 작가 개인 의견을 표출하는 대목에서 '외사씨왈(外史氏曰)' 표현을 많이 쓴다.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안녹산의 군대에 맞섰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개월 만에 구원병도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성은 함락되고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 뒤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들의 회유에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재필(載筆)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운문을 '문(文)', 산문을 '필(筆)'이라 하였다. 후대에 재필(載筆)은 '필기도구를 휴대하고 군왕의 언행을 기록한다.'는 것으로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이른다. 또는 '소차(疏箚)나 표문(表文)을 짓는다.'라는 등의 문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양서(梁書)》 권14 〈임방전(任昉傳)〉에 "임방이 매우 글을 잘 지었는데 더욱이 재필을 잘 지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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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미정기 木美亭記 내가 듣건대, 천관산(天冠山)54) 북쪽에 높이 우뚝 서 있는 산을 우산(牛山)이라 하고, 산 아래에 날아오를 듯 있는 정자를 목미정(木美亭)이라 하는데, 고(故) 악와(樂窩) 안 처사(安處士)55)가 축조하고, 금곡(錦谷) 송 선생(宋先生)56)이 이름을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다만 모르겠지만, 그 산의 나무는 맹자 때에 이미 그 기름을 잃어서 민둥산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57), 더욱이 수천 년이나 지난 뒤에 어찌 유독 그렇지 않아서 도리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진(秦)나라 내의 황죽(篁竹)은 옛날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고, 낙양(洛陽)의 모란[牧丹]58)은 과거에 없었으나 후대에는 있게 되었으니, 그 물산(物産)의 번성과 쇠퇴는 또한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매양 한번 찾아가고 싶었지만 병으로 발걸음이 미치지 못하다가 근년에 산 아래의 벗이 찾아와 종유(從遊)할 수 있었는데, 기상과 풍모가 대체로 범상치 않은 것이 요림 옥수(瑤林玉樹)59)와 같아서 매우 애호할 만하였다. 아, 평소 자나 깨나 잊지 못했던 이 산을 방문을 나가지 않고서도 만날 수 있었으니, 물산은 본디 번성과 쇠퇴가 있지만, 진실로 수양함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지속적인 해침에서 벗어나 성취한 바가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아, 맹자는 어느 때 사람이며, 우산(牛山)은 어느 지역에 있었던가? 누가 그 말을 만 리 머나먼 바닷가에서 비로소 서로 얻어 왕춘(王春)60)의 한 가닥 맥으로 하여금 얼음이 어는 한겨울과 같은 시기에 실추되지 않게 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이후로 또 어찌 숭산(嵩山)의 다섯 아름 되는 나무와 형산(衡山)의 천 길 되는 재목이 장차 숲을 이루며 빽빽하게 늘어서서 큰 집을 지탱하고 용마루를 떠받드는 기둥으로 쓰이지 않을 줄 알겠는가. 이것이 악와공이 이 정자를 짓게 된 뜻이다. 그러나 식물도 또한 다양하니, 여름에 휴식을 얻고 가을에 열매를 얻는 것은 어떤 식물이며, 휴식을 얻지 못하고 가시를 얻는 것은 어떤 식물인가? 이는 씨를 뿌리는 초기에 구별되는 바이니, 굳이 성숙해지는 때를 기다려 "좋은 쑥이 아니라 나쁜 쑥이로다."61)라는 탄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양하는 방법은 우산장(牛山章)에 갖추어져 있어 평소에 익혔을 것이니,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나는 잡목 같은 졸렬한 자질로 풍상(風霜)에 곤욕을 당하여 오래도록 사방 한 치 되는 나무조차 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면 남은 풍교를 뒤따라서 구구하나마 상유(桑楡)의 시기62)에 다소간 봉마(蓬麻)의 도움63)을 받을 수 있을까? 余聞天冠之北。有巋然而特立者曰牛山。山之下。有亭翼然曰木美。故樂窩安處士所築。錦谷宋先生所錫名也。但未知其山之木。在孟子時。已失其養而至於濯濯。況後於數千載。何獨不然。而乃以美云耶。然秦中篁竹。昔有而今無。洛陽牧丹。前無而後有。其物産盛衰。又不可以一槩可評。每欲一者屨及。而病未能焉。近年得山下友之過從。氣象風裁。槩不草草。若瑤林玉樹。蔚然可愛。噫。平日所寤寐此山者。不出戶而可以覯降矣。物產固有盛衰。苟非有養焉。則安能免於侵尋。而其所就乃爾耶。嗚乎。孟子何時。牛山何地。誰謂其說乃始相得於海荒萬里之濱。使王春一脈。不墜於窮陰堅冰之時耶。率是以往。又安知無嵩山五園之樹。衝山千尋之材。將林立叢列而爲支厦負棟之用耶。此是樂窩公經始之意也。然植物亦多矣。夏得休息而秋得其實者。何物。不得休息而得其刺者。何物。此在下種之初所當區別。不必待日至之時而有匪莪伊蒿之歎也。若其滋養之術。牛山章備矣。講之素矣。夫何贅焉。余以樸樕劣品。厄於風霜。不得爲方寸之木久矣。安得追躡餘風。以受多少蓬麻之助於區區桑楡之日乎。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면 일원에 위치한 산(723m)이다. 악와(樂窩) 안 처사(安處士) 안국심(安國心, 1838~1890)으로, 악와는 그의 호이다. 금곡(錦谷) 송 선생(宋先生) 조선후기에 부호군, 대사헌, 찬선 등을 역임한 문신 송내희(宋來熙, 1791~1867)로, 금곡은 그의 호이다. 자는 자칠(子七)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838년(헌종 4)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된 후 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등을 거쳐 뛰어난 학행을 인정받아 1853년(철종 4)에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천거되었으며,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857년부터 10년 가까이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고 뒤에 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금곡문집(錦谷文集)》이 있다. 그……이르렀는데 목미정이 자리한 산의 이름이 우산(牛山)인 연유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 우산장(牛山章)에서 맹자가 양심(良心)을 잃게 되는 이유를 말하면서 제(齊)나라 동남쪽에 있는 우산이 무성하게 우거졌지만, 도시 근처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끼로 베어 가고, 또 소와 양이 남은 그루터기의 싹을 뜯어 먹어서 민둥산이 되었다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낙양(洛陽)의 모란 당나라의 측천무후(624~705)가 어느 겨울날, 꽃나무들에게 당장 꽃을 피우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다른 꽃들은 모두 이 명령을 따랐으나 모란만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불을 때 강제로 꽃을 피우게 하려고 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화가 난 황제는 모란을 모두 뽑아서 낙양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이후로 모란은 '낙양화'로도 불리게 되었고, 불을 땔 때 연기에 그을린 탓에 지금도 모란 줄기가 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2004, 나카무라 고이치, 뿌리와이파리.) 요림 옥수(瑤林玉樹) 요림 경수(瑤林瓊樹)와 같은 말로, 옥으로 이루어진 숲의 옥으로 만들어진 나무처럼 인품이나 풍도가 매우 고결하고 훌륭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이 당시의 태위(太尉) 왕연(王衍)을 두고 "태위는 신성한 자태가 고상하여 마치 옥으로 이루어진 숲의 옥으로 만들어진 나무와 같으니 자연히 풍진(風塵) 밖의 인물이다."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43 王戎列傳》 왕춘(王春) 음력으로 신춘(新春)을 말하는 것으로. 공자가 《춘추》를 편찬할 때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대일통(大一統)의 사상을 표시하기 위해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 조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쓴 데서 유래하였다. 좋은……쑥이구나 《시경》 〈육아(蓼莪)〉에 보인다. 상유(桑楡)의 시기 저물녘에 떨어지는 해가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만년을 비유한다. 《회남자(淮南子)》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그림자가 나무 끝에 있는 것을 상유라 한다." 하였다. 봉마(蓬麻)의 도움 훌륭한 벗의 도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이 삼대 속에 자라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된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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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헌기 德軒記 호에는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 있는데, 서산(西山)이나 북산(北山) 따위가 이것이고, 그 덕을 표시한 것이 있는데, 경재(敬齋)나 의재(義齋) 따위가 이것이다. 능주 서쪽에 있는 천태산(天台山)는 남쪽 지방의 명승지로, 천태산(天台山)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구불구불 이어져 오다 10여 리 쯤 되는 곳에 이르러 고개를 돌린 채 단정히 선 모습으로 우뚝 수려하게 솟구쳐 있는 봉우리가 있는데, 덕봉(德峯)이라 한다.내 벗 박공 우서(朴公禹瑞)의 집이 그 아래에 있는데, 그 집을 덕헌(德軒)이라 명명하였으니, 대체로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성문(聖門)의 요결(要訣)이 옛 문헌에 드러난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덕' 한 글자처럼 요약되고 극진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비록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덕을 표시한 것도 일찍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공은 몸가짐이 조심스러웠고 세상에 쓰일 재주를 품었으면서도 이 세상에 없는 듯 자취를 감춘 채 조금도 내보이지 않았으니, 덕을 몸에 쌓음이 깊었다.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시례(詩禮)64)를 익히고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자손들이 성대하게 번창하였으니, 덕을 집안에 폄이 두터웠다. 덕을 쌓고 폄이 이미 깊고 두터웠음에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아서 항상 바라보며 경계하고 성찰할 수 있는 것이 비록 수석(水石)의 아름다운 이름에 있더라도 감히 태만하지 않았으니, 이곳에 반드시 덕봉의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모여서 장차 후세에 도와 발현시킬 것을 또한 헤아릴 수 있겠는가.백세 이후에 이 산을 보고서 공의 거처를 알 것이고, 이 산의 모습을 보고서 공이 체득한 덕을 알 것이니, 공은 산이 아니라고 기필하지 못할 것이고, 산 또한 공이 아니라고 기필하지 못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조그만 언덕이나 개밋둑만하니, 비록 바람결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탱하고자 하더라도 높은 산 아래에서는 단지 산이 되기 어렵다는 것만 알게 될 뿐이다. 號有識其居者。西山北山之類是已。有識其德者。敬齋義齋之類是已。綾之西有天台山。盖南方勝區也。山一支北行。透迤至十許里。而有回頭疑立。挺然尖秀者曰德峯。余友朴公禹瑞家其下。名其軒曰德。盖識其居也。然聖門要訣。著於往牒者。不爲不多。而未有若德之一字。爲約而盡也。然則雖識其居。而所以識其德者。又未嘗不在其中。公持身謹勅。才抱需世。而泯然斂迹。不少槩見。則德之畜於身者深矣。孝友詩禮。箕裘承襲。而螽斯椒聊。蔚然茁長。則德之種於家者厚矣。蓄之種之旣深且厚。而猶不自足。有以常目警省者。雖在水石佳名。而不敢慢焉。此必德峯之靈爲之降聚。而將以助發於來許者。又可量乎。百世之下。見此山而識公之居。見此山之容而識公之體德。則公未必非山。而山亦未必非公也。如余培塿邱垤也。雖欲依附風際。以自友爲。而高山之下。秖見其難爲山也。 시례(詩禮) 집안에서 전해지는 가학(家學)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아들 이(鯉)에게 시(詩)와 예(禮)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훈계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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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칠원 현감 퇴은 안공 행장 通訓大夫漆原縣監退隱安公行狀 공의 휘는 신일(信一), 자는 군유(君有), 호는 퇴은(退隱)이며, 고려조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이 그의 현조(顯祖)이다. 문성공의 증손인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은 공로가 있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竹城)을 관향으로 삼았다. 휘 정(挺)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 벼슬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직제학이 휘 을겸(乙謙)을 낳았는데 군수를 지냈다. 군수가 휘 여주(汝舟)를 낳았는데 직장을 지냈으며, 장흥(長興)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직장이 휘 거(矩)를 낳았는데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좌랑이 휘 신동(愼同)을 낳았는데 직장(直長)을 지냈다. 직장이 휘 양필(良弼)을 낳았는데 봉사(奉事)를 지냈고, 봉사가 휘 기(磯)를 낳았는데 부장(部將)을 지냈으며, 부장이 휘 여지(汝止)를 낳았는데 판관(判官)을 지냈다. 판관이 휘 우주(宇宙)를 낳았는데 참봉을 지냈으며,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칠원 윤씨(漆原尹氏)로, 봉사를 지낸 희순(希淳)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 8월 10일에 부(府)의 중산리(中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총명하고 활달하여 또래들보다 훨씬 탁월하였다. 겨우 8~9세 때, 병사 오정방(吳定邦, 1552~1652)이 겸부사(兼府使)로서 연병관(鍊兵館)에서 강무(講武)92)하였는데, 공이 여러 아이들과 함께 가서 구경하니 오정방이 각각 배 하나씩를 주었다. 여러 아이들은 받은 즉시 베어 먹는데, 공만이 홀로 품속에 넣자 오정방이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장차 돌아가 어버이께 드리려고 하는데, 하나가 모자랍니다."라고 하니, 오정방이 기특하게 여겨 곧바로 백여 개의 배와 고기를 주었다. 어버이가 병이 나면 지극히 근심하여 밤에도 띠를 풀지 않았고, 부모가 잠을 자도록 하라고 꾸짖으면 그때마다 물러나 문 밖에 서 있다가 조금 지나서 다시 들어왔으니 그 지성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12세에 족대부(族大父) 동애(桐厓) 휘 중묵(重默)9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국상(國喪)을 당하여 여러 장로(長老)가 모두 관아의 뜰로 달려가 곡을 행하자 공은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단(壇)을 설치하고 재계한 뒤에 망곡례(望哭禮)94)를 행하니 보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18세에 참봉공의 명으로 청음(淸陰) 김선생95)을 가서 뵙고 인하여 수업을 받았는데, 선생이 매번 칭찬함이 끊이지 않았다. 광해군 정사년(1617, 광해군9)에 폐모(廢母)의 변고96)가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이는 천지가 있은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하고는 곧장 소장(疏章)을 지었으나 결국에는 언로(言路, 임금에게 말을 아뢰는 길)에 막혀 결행하지 못했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도적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하기를, "대가가 파천(播遷)하였으니 이 어찌 신하가 집안에 편안히 앉아 있을 때이겠는가."라고 하더니, 칼을 잡고 부원수(副元師) 신경원(申景瑗)97)의 막사에 나아가 군무를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루어, 병절교위(秉節校尉)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 3월98)에 오랑캐인 금나라 침략하자, 공은 전 부사(府使) 민기(閔機)99) 등과 힘을 합해 호종(扈從)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충의위 부사과(忠義衛副司果)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29, 인조7) 봄, 상소를 올려 군사 장비를 정비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리나라 동쪽에 강성한 왜구들이 있어 원망을 맺음이 이미 깊고, 서쪽에는 사나운 북쪽 오랑캐가 있는데, 얕잡힌 것이 이미 많아 위급한 형세가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할 수 없으니 빨리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하니, 식자(識者)들이 그 의견을 옳다고 생각했다. 이때 극악한 역적 백룡(白龍)100)이 도당을 불러 모았는데,101) 남원(南原)이 더욱 심하였다. 부사 박정(朴炡)102)이 편지를 보내 공을 부르며 말하기를, "그대의 계략은 이미 익히 알고 있으니 부디 와주시어 시국의 어려움을 같이 구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편지를 받고 곧장 가서 책략을 도모하여 거의 다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목장흠(睦長欽)103)이 박공(朴公)을 이어 남원(南原)에 부임하여 공이 이룩한 계책에 힘입어 마침내 잔당을 소탕하자 경내가 평안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봄, 경상 우도(慶尙右道)104)가 기근이 심하여 도적이 다투어 일어나자, 박정이 공을 추천하여 칠원 현감(漆原縣監)에 임명되었다. 공이 혼자 말을 타고 부임하여 세금을 감면해 주고 진대(賑貸)105)하여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나타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평안해졌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상을 주고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크게 쳐들어오자 공이 달려가 감사(監司) 심연(沈演)106)을 만나 일을 의논하니 심연이 말하기를, "급히 본현으로 가서 병사를 모아서 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현으로 돌아와 동구(同仇) 의리로써 타이르니 현의 사람들이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수천 명을 모아 심공과 합세하여 곧장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병사 김준용(金俊龍)이 광교(光敎)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여러 군사가 모두 흩어지자 공이 크게 외치며 말하기를, "군령(軍令)의 무엄함이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본현(本縣)의 장졸들을 불러 말하기를, "오직 내가 여기에 있는데, 너희는 장차 어디로 가려하느냐.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가는 자가 있으면 참형(斬刑)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읍의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칠원의 병사들만은 독전(獨全)하여 영산(靈山)의 수령 윤면지(尹勉之)와 함께 길을 배로 재촉하여 나아갔다. 얼마 안 있어 남한산성에서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는 소식107)을 듣고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윤공과 이별하며 시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통곡하고 어느 곳으로 돌아갈거나 (痛哭歸何處)동쪽 바다 이곳이 살기 좋겠네 (東溟是好居)라고 하였다. 2월에 어버이의 병 때문에 보고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2월에 관직을 버리고 같은 고을 사람 웅천 현감(熊川縣監) 위정렬(魏廷烈, 1580~1644)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숭덕(崇德)108)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모든 서찰 아래에 오직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몇 년이라고만 써서 풍천(風泉)의 생각109)을 부쳤으며, 인산(仁山)의 아래에 집을 지어 '지수정(智水亭)'이라 편액을 걸고 날마다 벗들과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근심을 떨쳐냈다. 그 뒤에 나이가 많아 가선대부 품계로 승진하였는데,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새 직함을 쓰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대개 청국(淸國)의 연호(年號)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오년(1666, 현종7)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2월 수문포(水門浦) 왼쪽 기슭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공은 사문(斯文)의 이름난 가문으로,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현향(賢鄕, 상대방의 고향)의 장덕(長德) 문하에서 공부하여 마음을 세우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의 절도는 진실로 이미 대체(大體)를 터득하였지만, 다만 당시의 세상일이 우환이 많음을 보고 개연(慨然)히 세상에 뜻을 두어 환란에 미리 대비할110) 계책을 세웠다. 또 무략(武略)에 익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매번 한가하고 조용한 틈에 활쏘기와 말타기를 겸하여 익히곤 하였다. 출신(出身)하여 관직에 나가서는111)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분주하게 절충(折衝)112)하고, 드나들며 보위하여 공로를 세운 것이 전후로 이와 같이 성대하였으니, 공은 문무(文武)의 재능과 장상(將相)의 훌륭한 기량을 갖추었다고 이를 만한데, 낮은 관직을 맴돌며 오히려 그가 품은 생각을 크게 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물며 여기에 더 나아가 아무 일이 없는 때를 만나 조용히 간언(諫言)113)하고 임금의 덕을 보좌했다면 이 세상을 도용(陶鎔)114)한 것이 어떠했겠는가. 공이 말한 '학문과 절의는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이는 실제(實際)의 말이니, 백년 뒤에 공의 글을 읽고 공의 세상을 논하는 자가 마땅히 모두 다 알 것이다. 부인은 장연 변씨(長淵邊氏)로, 참봉을 지낸 덕룡(德龍)의 따님이다. 부덕이 있었으며 공의 묘에 합장되었다. 자녀가 없어 종증조(從曾祖) 형 언두(彦斗)의 둘째 아들 인업(仁業)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장손 이행(而行)은 호가 포옹(圃翁)이며, 차손은 이형(而亨)이며, 증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8세손 인환(仁煥)은 어진 선비이니, 그 종질 규칠(圭七)을 보내 나에게 행장의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고루하고 미천하고 용렬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다만 두터운 교분으로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公諱信一。字君有。號退隱。麗朝文成公晦軒先生。其顯祖也。文成公曾孫文惠公諱元衡。以功封竹城君。子孫因貫焉至諱挺。仕我朝官直提學。是生諱乙謙郡守。是生諱汝舟直長。始居長興。是生諱矩佐郞。是生諱愼同直長。是生諱良弼奉事。是生諱磯部將。是生諱汝止判官。是生諱宇宙參奉。卽公之考也。妣漆原尹氏奉事希淳女。以萬曆乙未八月十日。生公于府之中山里。穎悟開爽。絶山等夷。纔八九歲時。兵使吳定邦。以兼府使。講武于錬兵館。公與羣兒往觀之。吳各賜一顆梨。羣兒卽受而啗之。公獨懷之。吳問之曰。將歸遺二親。而但少一顆耳。吳奇之。乃賜百顆及肉物。遇親癠。極其致憂。夜不解帶。父母責令就睡。則輒退立門外。少頃復入。其至誠如此。十二受學于族大父桐厓諱重默之門。一日遭國恤。諸長老皆赴縣庭行哭。公與羣兒設壇齋後。行望哭禮。見者異之。十八以參奉公命。往謁淸陰金先生。因受業焉。先生每稱賞之無已。光海丁巳。聞有廢母之變。歎曰。此是有天地以後所未有之擧。卽製疏章。竟爲言路所沮。未果上。辛酉登武科。甲子賊适之叛。公不勝忿憤曰。大駕播遷。此豈臣子安坐屋裏時乎。杖劒詣副元師申景瑗幕。贊助戎務。多所效績。拜秉節校尉宣傳官丁卯三月。金虜人寇公與前府使閔機等戮力扈從。拜宣略將軍忠義衛副司果。己巳春。上疏請修武備。略曰。我國東有倭寇之强。而構怨旣深。西有建胡之狠。而見弱已多。危急之勢。朝不慮夕。亟令修葺軍器。錬習武士。以備緩急。識者韙之。時劇賊白龍。嘯聚徒黨。南原尤甚。府使朴炡以書邀公曰。吾君算略。已所稔知。庶肯來思共濟時艱。公得書卽行。謀畫方略。斬獲殆盡。睦長欽繼朴公而莅南原。賴公成算。竟勦餘黨。境內晏然。丙子春。嶺右饑甚。盜賊倂起。朴炡薦公爲漆原縣監。公單騎赴任。蠲除賑貸。恩威幷著。民賴以安。朝廷嘉賞之特。賜表裏一襲。冬北寇大入。公馳見監司沈演議事。沈曰。急往本縣收兵以來。公還縣。諭以同仇之義。縣人莫不願從。遂募得數千與沈公合勢。直向南漢。至中路。聞兵使金俊龍敗於光敎。諸軍皆散。公大呼曰。軍令無嚴何至此也。招本縣將卒曰。惟我在。此。汝將何之。若有退一步者斬。是以列邑軍皆散。而漆原兵獨全。與靈山守尹勉之。倍道而行。旣而聞南漢出城之報。痛哭而還。別尹公有詩曰。痛哭歸何處。東溟是好居。二月以親病。申省請遞。不許。十二月。棄官與同郡人熊川宰魏廷烈。同還鄕里。不復仕進。不用崇德年號。凡書尺下。惟書崇禎幾年。以寓風泉之思。築室仁山之下。扁曰智水亭。日與知舊。文酒自遣。後以年老。陞嘉善階。戒子孫曰。我死勿用此新銜。蓋以有淸國年號故也。丙午十二月十日捐館。明年二月葬于水門浦左麓艮坐原。嗚乎。公以斯文名家。稟質挺異。而從事於賢鄕長德之門。立心爲己。學問節度。固已見得大體矣。但見時事多虞。慨然有志於世而所以爲綢繆陰雨之計。又不可以不閒於武略。故每於簡黙之暇。兼習弓馬。至於出身通籍。一心徇國。而奔走折衝。出入捍衛。所以樹立勞勩者。前後磊落如此。公可謂文武全才。將相偉器。而低廻下僚。猶未能大展其所蘊。爲可恨也。況進於此。遭時無事。從容啓沃。輔翼允德。則其陶鎔斯世者。爲何如哉。公所謂學問節義。本非二事者。是實際語也。百歲之下。讀公之書。論公之世者。當有以悉之也。夫人長淵邊氏參奉德龍女。有婦德墓合祔。無育。取從曾祖兄彦斗第二子仁業爲嗣。孫長而行號圃翁。次而亨。曾玄以下不錄。八世孫仁煥賢士也。送其從姪圭七。屬余以狀行之文。余以固陋微劣。有不容承膺。而但以契誼之厚。有不敢終辭云爾。 강무(講武) 조선조 때 1년에 두 번 봄철과 가을철에 행하던 행사의 하나로, 지정(指定)한 곳에 장수와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임금이 주장하여 사냥하여 아울러 무예(武藝)를 연습하던 일을 말한다. 중묵(重默) 안중묵(安重默, 1556~1607)으로, 자는 기현(基賢), 호는 동애(桐崖),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박광전(朴光前)ㆍ정개청(鄭介淸)에게 수학하고, 정구(鄭逑)의 효렴(孝廉) 천거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ㆍ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등을 지냈다. 병법(兵法)에도 능하여 정유재란 중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찾아오자 병론(兵論)을 전수해 주었으며, 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군량을 비축하였다. 저서로는 《동애선생실기(桐崖先生實記)》가 있다. 망곡례(望哭禮) 임금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서울에서는 대궐 문 앞에 모여 곡하고, 지방에서는 서울 쪽을 바라보면서 곡하는 의식을 말한다. 청음(淸陰) 김선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의 영수이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폐모(廢母)의 변고 1617년(광해군9)에 조정에서 이이첨의 주도하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서궁(西宮)에 유폐하자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을 말한다. 신경원(申景瑗) 1581~1641. 본관은 평산, 자는 숙헌이다. 1605년(선조38)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선전관을 거쳐 온성 판관·부사를 지내고, 1619년(광해군11) 영유현령이 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황주 신교에서 패한 관군을 모아 안현에서 반군을 대파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평안·황해·함경·강원 4도 부원수로 맹산 철옹성을 지키다가 포로가 되자 단식으로 항거했다. 정묘년(1627, 인조5) 3월 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청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 전쟁인 정묘호란을 말한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3월 1일(음력 1월 14일) 의주성을, 3월 2일(음력 1월 15일)에는 정주성을, 3월 8일(음력 1월 21일)에는 안주성을 점령했으며, 3월 10일(음력 1월 23일)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청나라에게 빼앗긴 것이다. 민기(閔機) 1568~1641.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선(子善), 호는 서한당(棲閑堂)이다. 1597년(선조30)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주 부윤을 지냈다. 백룡(白龍) 인조(仁祖) 대에 남원 지역에서 출몰하던 도적의 괴수를 말한다. 《漫浪集 卷9 睦參判墓碑銘, 韓國文集叢刊 103輯》 불러 모았는데 원문의 '소취(嘯聚)'는 도적들이 그들의 도당을 신호인 휘파람을 불어서 모으는 일을 뜻한다. 박정(朴炡) 1596~1632.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곡(霞谷),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박동선(朴東善)의 아들로, 1619년(광해군11) 정시(庭試)에 급제, 춘추관에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고, 훈3등(勳三等)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함평현감ㆍ통정(通政)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좌승지ㆍ대사간ㆍ병조 참의ㆍ참지를 거쳐 1629년(인조7)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강적(强賊)을 평정하여 금주군(錦州君)에 피봉되었다. 이조 참판ㆍ병조 참판ㆍ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목장흠(睦長欽) 1572~1641.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이다. 1599년(선조3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내직을 두루 거친 뒤 이조 정랑이 되었으나 판서 기자헌(奇自獻)의 미움을 받아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1613년에 좌부승지가 되었는데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다가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연좌되어 청풍 군수로 좌천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뒤 승지에 임명되어 판결사, 함경도 관찰사, 경주 부윤 등을 거쳐 호조 참판을 지냈으며, 1641년에 도승지가 되었다. 경상 우도(慶尙右道) 원문의 '영우(嶺右)'는 경상 우도로, 조선 시대 경상도의 서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태종 7년(1407)에 군사 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 서쪽을 경상 우도라고 하였다. 성주(星州)ㆍ선산(善山)ㆍ합천(陜川)ㆍ함양(咸陽)ㆍ의령(宜寧)ㆍ남해(南海)ㆍ거창(居昌)ㆍ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고성(固城)ㆍ창원(昌原) 등 28개의 군현이 여기에 속하였다. 진대(賑貸) 재난이나 흉년이 든 해에 나라의 곡식을 풀어서 어려운 백성에게 꾸어 주던 일을 말하는데, 고구려(高句麗) 때부터 빈민 구제책으로 춘궁기(春窮期)에 관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거두어들이던 제도이다. 심연(沈演) 1587~164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규봉(圭峯)이다. 광산 현감(光山縣監)으로 부임하여 재판을 공정히 하고 선정을 베풀어 현을 주로 승격시키고 그곳의 목사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쌍령(雙嶺)에서 패하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전라도 임피(臨陂)에 유배되었다. 한성부 판윤, 대사간 등을 거쳐 경기 관찰사를 역임한 뒤 함경도 관찰사로 임지에서 죽었다. 남한산성에서……나와 1636년(인조14)에 청나라가 재차 침입하자,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조선이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로 행할 것'을 조건으로 강화한 일을 말한다. 숭덕(崇德) 청나라 태종(太宗)의 연호(1636~1643)이다. 풍천(風泉)의 생각 풍천(風泉)은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다.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조선의 국력이 약해 청나라에 유린당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명(明)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멸망한 명(明)나라를 생각하는 존주 대의(尊周大義)의 뜻이 담겨 있다. 환란에 미리 대비할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조처하여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에 "하늘에서 장맛비가 아직 내리지 않을 때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모아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牑戶, 今此下民, 或敢侮予.]"라고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출신(出身)하여 관직에 나가 '출신'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뜻하며, 원문의 '통적(通籍)'은 문표(門標)에 성명ㆍ연령 등을 올리면 궁문의 출입을 허락하던 명패(名牌)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과거에 급제하고서 처음 관직에 진출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절충(折衝) 절충어모(折衝禦侮)의 준말이다. 적의 침입을 격파하여 모욕당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간언(諫言) 원문의 '계옥(啓沃)'은 내 마음을 열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간언하여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上》 도용(陶鎔) 도용은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고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는 것처럼 인재를 배양해서 육성한다는 뜻으로, 보통 대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비유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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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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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의 운자로 회포를 적어 열재 어른께 드리다 疊前韻述懷 呈悅丈 이 마음은 큰 곳이고 이 몸은 작은데 此心大處此身微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를 아는 이 드무네 微大之間識者稀천지간엔 결점이 없는 양심을 부여받았고 天地降衷無缺點사생간엔 온전히 돌아갈 수 있어86) 부끄럽지 않네 死生不怍可全歸삼순구식해도 오히려 도연명의 밥이 있는데87) 三旬猶有淵明食누더기 옷 입고 어찌 계로의 옷88)을 부끄러워하랴 百結寧慙季路衣요사이 원하는 바에 응대하길 더욱 간절히 하니 轉切邇來酬所願모두 인간만사에 이미 기심을 잊었다네 都將萬事已忘機 此心大處此身微, 微大之間識者稀.天地降衷無缺點, 死生不怍可全歸.三旬猶有淵明食, 百結寧慙季路衣?轉切邇來酬所願, 都將萬事已忘機. 온전하게 돌아갈 원문의 '전귀(全歸)'는 몸을 잘 보존하여 훌륭한 명성을 남기고 생을 마치는 효성을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하게 돌아가야만 효라고 이를 수 있다. 몸을 훼손하지 않고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몸을 온전히 했다고 이를 수 있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라고 하였다. 삼순구식(三旬九食)해도……있는데 삼순구식은 한 달에 아홉 번 식사한다는 뜻으로, 끼니도 잊지 못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의미한다. 도연명의 〈의고(擬古)〉 9수 중 제5수에 "동방에 선비 하나, 옷차림 늘 허름하네.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만나고, 십 년 동안 갓 하나 썼다네. 고달픔 이에 비할 바 없지만, 언제나 즐거운 얼굴이라네.〔東方有一士, 被服常不完. 三旬九遇食, 十年著一冠. 辛苦無此比, 常有好容顔.〕"라는 말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4》 계로(季路)의 옷 계로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의 자인데, 가난하기 때문에 해진 옷을 입은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자로일 것이다.[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 其由也與.]"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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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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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국사흠89) 용환 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도하며 聞鞠士欽【庸煥】云亡有悼 슬프다 살아서는 가난했고 哀哉生旣貧죽어서도 집에 노친이 계셨네 死復堂有老늙은 부모가 이 죽음 싫어하여 老人斯惡之매우 초라하게 고장90)했다지 藁葬極艸艸다섯 아들은 살림을 꾸릴 수 없어 五子無以家이리저리 떠돌며 몹시 고초를 겪었네 漂泊經辛惱그댄 참으로 보통 인물이 아니었으니 君固非凡流신학문을 끊고 오직 옛 것을 배웠네 絶今惟古學가령 그 뜻을 확충했더라면 如使充其志세운 바가 또한 우뚝했을 터인데 所立亦應卓어이하여 객지를 떠돌아다니며 其如長棲屑일이 마음과 서로 어긋났던가 事與心相違예전에 음의 세계로 변하던 날 曩在陰變日명백하게 시비를 변별했으면서 明白辨是非그릇됨을 따른 건 무슨 마음이었나 詭隨何心者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그댈 보았네 視君霄壤懸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今焉至於斯하늘의 보답이 어찌 이리 뒤집혔는가 報施一何顚도도한 그대에겐 괴이할 게 없겠지만 無怪滔滔子저것을 위해 이렇게 하지 않으리라 爲彼不爲此 哀哉! 生旣貧, 死復堂有老.老人斯惡之, 藁葬極艸艸.五子無以家, 漂泊經辛惱.君固非凡流, 絶今惟古學.如使充其志, 所立亦應卓.其如長棲屑, 事與心相違?曩在陰變日, 明白辨是非.詭隨何心者? 視君霄壤懸.今焉至於斯, 報施一何顚?無怪滔滔子, 爲彼不爲此. 국사흠(鞠士欽) 사흠은 국용환(鞠庸煥, 1884~1931)의 자이며, 호는 외재(畏齋)이다. 일제강점기 유학자로 간재(艮齋)의 문인이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저서에 《외재사고(畏齋私稿)》가 있다. 고장(藁葬) 시신을 짚이나 거적에 싸서 예(禮)를 갖추지 않고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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