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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통정대부 좌승지 매곡 정공 유사장 贈通政大夫左承旨梅谷鄭公遺事狀 정복현(鄭福鉉) 군이 그 부형(父兄)의 명으로 그 증대부(曾大父, 촌수가 먼 증조 항렬의 남자) 매곡(梅谷)공의 유적을 받들고 와서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군(君)은 나와 종유하였으니 그 말을 참으로 모른 척 할 수가 없었고, 공은 우리 고을의 선배인지라 그 유풍과 여운이 귀에 익숙하고 마음으로 사모한 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감히 내가 행장을 짓는 데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는 원상(元相)이고, 자는 현직(賢直)이며, 매곡(梅谷)은 그의 호이다. 정씨의 계파는 하동(河東)에서 나왔으며, 밀직사(密直司)를 지낸 휘가 국룡(國龍)을 비조로 삼았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가 인귀(仁貴)라는 분이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분이 참봉을 지낸 휘 주유(由周)를 낳았으며, 휘 주유가 현감을 지낸 휘 지영(之英)을 낳았다. 휘 지영이 호가 둔재(遯齋)인 휘 여해(汝諧)를 낳았는데, 점필재(佔畢齋)8)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정일두(鄭一蠹)9)와 김한훤(金寒暄)10)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4대를 지나서 호가 송암(松庵)인 휘 흘(忔)이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공에게 5대가 된다. 고조는 휘 문규(文奎)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으며, 증조는 복채(復釆)이다. 조부는 탁(鐸)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아버지는 양엽(陽曄)으로 대대로 문행이 있었다. 어머니는 선산 정씨(先山鄭氏) 내광(來光)의 따님으로, 정조 신축년(1781, 정조5)에 능주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순실하고 명민한 자질로 시례(詩禮)가 있고 법도로 보필하는 명가(名家)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가르치고 기르는 데 갖은 방법을 다 하였는데, 하나하나 그대로 따르면서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다. 8세에 《소학》을 배우다가 7세에 남녀가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글에 이르러서 이에 말하기를, "나는 지금 8세인데 7세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녀의 예를 분별하고 잡스러운 놀이를 하지 않았으며 비루하고 속된 말을 하지 않았고 날마다 부모를 곁에서 모시며 응대하기를 조심스럽게 하였다. 어버이가 병환이 있으시면 마음으로도 근심하고 얼굴빛으로도 근심하여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약을 지으며 옷에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비록 특이한 산물이거나 구하기 힘든 약재라도 병에 이롭다는 것은 정성과 힘을 다해 구하여 얻지 못한 것이 없었다. 혼인하여 부인을 맞이함에 부모가 분가시키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형제가 분가하는 것도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부모가 살아계신데 분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부모가 기특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상례(喪禮)를 치르면서 매우 슬퍼하여 거의 생명을 손상하기에 이르렀고, 장례의 모든 도구를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라 유감이 없게 하였다. 기일을 당하여서는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고, 엄숙히 재계하고 깨끗하게 하여 마치 살아계신 듯이 여기는 정성을 다하였다.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었고, 출입을 간소히 하였다. 재주는 문학에 뛰어났으나 부귀영달을 꾀함이 없었으며, 집이 본래 가난하였으나 봉록의 이로움에 뜻이 없었다. 오직 몸을 검칙(檢飭)하고 행실을 닦는 것으로 구경(究竟)11)의 계책을 삼았으니, 이 때문에 자손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향리에서 그 의리에 감복하여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군자다운 어른이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철종 계축년(1853, 철종4)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신산(莘山) 건너 대방(大坊)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뒤에 자손이 장수하고 귀하게 되어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숙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 복헌(復憲)의 따님으로 4남을 낳았는데, 범환(範煥)·영환(英煥)·수환(壽煥)·달환(達煥)이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선을 쌓는 집안에 남은 경사가 있다."12)라고 하였다. 자손에게 남은 경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선조가 선을 쌓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종사(螽斯)13)와 초료(椒聊)14)처럼 자손이 더욱 번성하였고, 효우와 문학의 기풍이 계속해서 실추되지 않았으니,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鄭君福鉉。以其父兄命。奉其曾大父梅谷公遺蹟。來謁狀行之文。君從余遊。其言固難恝。公吾鄕先進也。其遺風餘韻。慣於耳而慕於心久矣。豈敢以非其人辭。公諱元相。字賢直梅谷其號也。鄭氏系出河東。以密直諱國龍爲臭祖入。我朝。有諱仁貴戶曹參判。是生諱由周參奉。是生諱之英縣監。是生諱汝諧號遯齋受。業于佔畢齋門。與鄭一蠹 金寒暄爲道義交。四傳諱忔號松庵丙子擧義。贈判尹。於公爲五世。高祖諱文奎嘉善。曾祖諱復釆。祖諱鐸。贈司僕寺正。考諱陽曄。世有文行。妣先山鄭氏來光女。以正宗辛丑生公于綾州莘山里。公以醇實開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有以早敎豫養者。無所不至。而一一遵循。未嘗有違。八歲授小學。至七年男女不同席之文。乃曰我今八歲而不知七歲之敎乎。自此別於男女之禮。不作戱雜之遊。不出鄙褻之語。日侍親側應對惟謹親有疾。心憂色沮。露禱合藥。衣不解帶。雖異產僻材。可利於病者。殫誠竭力。求無不得。及成昏納婦。父母欲爲之分炊。公曰兄弟分炊。本非美事。況父母在而可乎。父母奇而聽之。執喪甚哀。幾至傷生。送終凡具。一違禮制。俾無餘憾。遇忌辰悽愴怵惕以寓終身之慕。齊肅明潔以盡如在之誠。平居寡言笑。簡出入才優文學而無摹乎榮貴。家素貧窶而無意乎祿利。惟以勅身修行爲究竟計。是以子孫遵其敎。鄕里服其義。知不知。無不以君子長者稱之。哲宗癸丑二月十八日卒。葬莘山越大坊坤坐原。後以孫壽貴。贈左承旨。 配淑夫人淸道金氏復憲女。生四男。範煥英煥壽煥達煥。孫以下不錄。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觀子孫之有餘慶。而其祖先之有積善可知也。今距公之世久矣。而螽斯椒聊。愈爲蕃衍。而孝友文學之風。繼繼不墜此豈無所自而然哉。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이다. 자는 계온(季昷) 혹은 효관(孝盥)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53년(단종1)에 진사가 되고, 1459년(대조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함양 군수,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등 많은 제자를 길렀다. 사후인 1498년(연산군4),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한 후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정일두(鄭一蠧)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자가 백욱(伯勗), 본관이 하동이며, 일두는 그의 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다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90년(성종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되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었다.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본관은 서흥(瑞興),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다.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강학에 전념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스승이 되었는데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궁극(窮極) 구경은 불가(佛家)의 용어로, 궁극에 이르는, 철저하게 체득하는, 완성에 이르는, 최후의 목적 등의 뜻을 갖는바, 여기에서는 최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 혹은 최고의 원리(原理)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자전서(朱子全書)》 권1 학일(學一) 〈소학(小學)〉에 "세간의 온갖 일은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없어지는 것인 만큼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오직 궁리하고 수신하는 것이야말로 구경법이라고 하겠다.[世間萬事, 須臾變滅, 皆不足置胸中. 惟有窮理修身, 爲究竟法耳.]"라고 하였다. 선을……있다 조상의 적선(積善)에 대한 보답으로 후손이 경사(慶事)를 받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였다. 종사(螽斯) 메뚜기로, 자손들이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종사(螽斯)〉에 "수많은 메뚜기들이 화목하게 모여드니, 의당 네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리라.〔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초료(椒聊) 산초나무로, 열매가 많이 달리기 때문에 자손이 많은 것을 비유한다. 《시경》 〈당풍(唐風) 초료(椒聊)〉에 "초료의 열매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네. [椒聊之實, 蕃衍盈升.]"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호은처사 위공 유사장 湖隱處士魏公遺事狀 공의 성은 위(魏), 휘는 상리(相履), 자는 덕희(德希), 호는 호은(湖隱)이다. 시조 휘 경(鏡)은 당나라 학사로 신라에 벼슬하여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는데, 회주는 지금의 장흥이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신라부터 고려까지 높은 공훈과 높은 작위가 혁혁히 이어졌는데, 합문기후(閤門祇侯)를 지낸 휘 충(种)에 이르러서는 우리 조정이 하늘에 순응한 처음이었는데, 시중(侍中) 김종연(金宗衍) 등과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30) 곤장형을 받고 먼 지방으로 귀양에 처해졌다. 이분이 휘 진용(悳龍)을 낳았으니 통덕랑을 지냈고, 휘 진용이 휘 자양(自良)을 낳았으니 통덕랑을 지냈으며, 휘 자양이 휘 종복(宗復)을 낳았으니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지냈다. 휘 종복이 휘 유형(由亨)을 낳았으니 습독(習讀)을 지냈으며, 장릉(莊陵)31) 말에 바닷가로 은거하여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32) 영천(靈川) 신잠(申潛)33)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휘 유형(由亨)이 휘 진현(晉賢)을 낳았으니, 효로 추천받아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후사가 없어 백씨(伯氏) 진수(晉秀)의 둘째 아들을 후사로 삼았다. 진사 휘 곤(鯤)은 호가 당곡(唐谷)이며, 휘 곤이 덕의(德毅)34)를 낳았으니 병조 참의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에 임금을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별칭)까지 호종(扈從)하여 세상에 청계선생(聽溪先生)이라 일컬어졌으며, 죽천사(竹川祠)에 제향하였는데,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정헌(廷獻), 호는 국천(菊泉)으로 진사를 지냈으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동명(東蓂), 호는 상봉(觴峯)으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익무(翊武)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아버지의 휘는 ▣▣으로 문학과 행의가 있어 한 세상에 추존을 받았다. 어머니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목사 성인(成仁)의 증손녀로 유순하고 정갈하며 규범(閨範)이 매우 지극하였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 10월 6일에 부(府)의 옥산(玉山)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다. 서당에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문리(文理)가 날로 향상되었다. 하루는 촌사(村社)에서 잡희(雜戱,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니 달려가 구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공만이 홀로 가지 않아 서당의 스승이 기특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써 장차 사자(四子)35)와 성리학과 관련된 많은 책을 밤낮으로 연구해서 의취(意趣)를 다하는 데 힘썼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올리는 예절을 빠뜨리는 일이 없었으며, 안부를 묻는 일과 달고 연한 음식을 장만하여 올리는 일에 정성과 힘을 다하여 모든 것을 다 갖추어드렸다. 늙어서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는데, 쇠하고 늙었다고 스스로를 관대하게 대하지 않고 한결같이 예제를 따랐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날마다 한 번씩 성묘를 하였고,36)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으니 집안사람들이 그 오고 가는 수고로움을 가엽게 여겨 여막을 무덤 곁에 지어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시묘살이를 한다는 이름을 표방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제삿날이 되면 엄숙히 재계하고 정결하게 하여 그 정성을 다하고,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정을 다하였다. 형제 여섯 명이 낮에는 책상을 나란히 하여 공부하고 밤이면 베개를 함께하며 매우 즐겁고 화락하게 지내 늙어서도 변치 않았다. 친척과 벗, 이웃과 향당 간에도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는 일을 때에 따르고 절후에 맞추어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늙어서는 더욱 숨어 지내면서 세상의 어지러움을 사절하고 조용하고 묵묵히 수양하여 참다운 마음이 안에서 넉넉하였다. 생도를 가르침에 엄격히 등급37)을 두어 차근차근 잘 이끌어 주니 성취한 바가 많았다.매번 따뜻한 봄날과 서늘한 가을이 되면 한두 명의 오랜 벗들과 한가로이 강호(江湖)에서 거닐며 시를 읊조리고 시원스레 속세를 떠날 의표를 가지고 있었다. 경물을 바라보면 감회가 생겨서 붓 가는대로 적었는데 문자를 수식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대명일월숭정유민(大明日月崇禎遺民)' 여덟 자를 벽에 써서 자신의 뜻을 기록하였다. 자손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유해지면 사치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치스러워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교만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만함이 이르게 된다. 교만과 사치가 이르면 패망이 뒤따르는 법이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반성하며 남을 보살피고 외물을 접할 때에도 털끝만큼의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자신이 화락한38) 사람이 되고 집안에 효도하고 삼가는 기풍이 있다면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음에 거의 가까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조 병자년 9월14일에 생을 마쳤으며, 남면(南面) 장생원(長栍院) 선영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만진(萬震)의 딸로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다.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인(道仁)이며, 딸은 김봉채(金鳳彩)·윤신동(尹新東)·변정홍(卞廷弘)·마인학(馬仁㶅)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영백(榮百)·영직(榮直)·영의(榮義)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포부가 담대하고 넉넉하며 조예가 깊고 치밀하여 우뚝하게 한 시대의 촉망을 받았는데도, 바다 모퉁이에서 숨어 지내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아 확고한 뜻을 동요시킬 수 없는 점이 있었으니, 유운(遺韻)과 암장(闇章)39)을 추앙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하였다. 5세손 계창(啓昌)이 그 아들 대량(大良)을 시켜 행장을 청하였는데, 아, 고금의 감회에 어찌 행장을 쓸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겠는가. 公姓魏,諱相履。字德希。號湖隱。始祖諱鏡。以唐學士仕新羅。封懷州君。懷州今長興。子孫仍貫焉。自羅之麗。崇勳嵬爵。赫赫相承。至諱种官閤門祇侯。當我朝應順之初。與侍中金宗衍等謀復。事覺。杖流遠地。生諱悳龍通德郞。生諱自良通德郞。生諱宗復漢城參軍。生諱由亨習讀。莊陵末。遯處海濱。與南秋江孝溫申靈川潛爲道義交。生諱晉賢。以孝薦。授光陵參奉。無嗣。以伯氏晉秀第二子爲後。諱鯤進士號唐谷。生諱德毅兵曹參議。壬辰扈從龍灣。世稱聽溪先生。享竹川詞。於公爲五世。高祖諱廷獻號菊泉進士贈掌樂院正。曾祖諱東蓂號觴峯贈戶曹參議。祖諱翊武。有隱德。考諱文學行義。見重一世。妣咸陽朴氏牧使成仁曾孫女。柔婉靜嘉。閨範備至。肅廟辛未十月六日。公生于府之玉山第。幼穎悟異於凡常。就塾授課。文理日就。一日村社設雜戲。莫不奔觀。公獨不往。塾師奇之。及長專心爲己。將四子及性理群書。晝夜硏究。務盡意趣。事親至孝。晨昏定省。未嘗有闕。寒暄之節。甘腰之供。殫誠竭力。無不畢給。老而遭故。不以衰艾自恕。一從禮制。旣葬而日一展省。風雨不廢。家人閔其往來之勞。欲爲之結盧墓側。公止之曰。吾不欲有盧墓之名。遇忌諱之辰。齊肅明潔以盡其誠。悽愴怵惕以盡其情。兄弟六人。晝則連榻。夜則同枕。怡怡湛樂。老而不替。族戚朋友。隣里鄕黨。存訊周恤。隨時及節。未嘗有闕。老益沈晦。謝絶世紛。潛修黙養。眞情內腴。訓進生徒。嚴有科級。循循引誘。多所成就。每當春和秋淸。一二朋舊。逍遙諷詠於江湖之曲。灑然有出塵之標。覽物敍懷。信筆輒寫。而不有拘拘雕飾之意。嘗題大明日月崇禎遺民八字於壁。以識其志。戒子孫曰。富不期奢而奢至。貴不期驕而驕至。驕奢至則敗亡隨至。此理勢之必然。持身省己。酬人接物。亦不可存一毫驕肆之心。使身爲愷弟之人。家有孝謹之風。則其於無忝所生。不其幾矣乎。英宗丙子九月十四日考終。葬南面長柱院先隴乙坐原。配珍原朴氏萬震女。婦德醇備。生一男四女。男道仁。女適金鳳彩尹新東卞廷弘馬仁㶅。孫男榮百榮直榮義。曾孫以下不盡錄。嗚呼。抱負贍富。造詣邃密。偉然爲一時之屬望。而沈淹海曲。終始不渝。有確乎不可拔者。遺韻闇章。追仰彌至。五世孫啓昌。伻其子大良。請狀行之文。嗚呼。緬古感今。豈以非其人辭。 시중……발각되어 김종연(金宗衍, ?~1390)은 고려 시대의 무인이다. 1390년(공양왕2)에 김종연이 이방춘(李芳春)ㆍ김식(金軾)ㆍ이중화(李仲和)ㆍ윤귀택(尹龜澤) 등과 함께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이성계를 죽이기 위해 모의를 꾀하다 윤귀택의 밀고로 발각된 사건이다. 이때 김종연은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고 위충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高麗史 卷45 恭讓王2年》 장릉(莊陵)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능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4리에 있다. 여기서는 단종을 말한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양 출신으로 김종직(金宗直) 의 문인이다. 어려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전에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고 상소한 일로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으나, 중종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숙종 때 고양의 문봉서원과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고, 다시 정조(正祖)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추강집(秋江集)》ㆍ《추강냉화(秋江冷話)》ㆍ《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등이 있다. 신잠(申潛) 1491~1554.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자이며, 신종호(申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파방(罷榜)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던 중에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덕의(德毅) 위덕의(魏德毅, 1540~1613)는 임진왜란 때 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에서 90일 간 걸어서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임금을 알현하니 군신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호종(扈從)의 공으로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호종원종훈(扈從原從勳)에 녹훈(錄勳)되고 사후에 병조참의(兵曹叅議)에 추증(追贈)됐다. 사후 죽천사(竹川祠) 입사(立祠)와 함께 주벽(主壁)으로 배향되고, 또 광주광역시 대촌동 황산사(黃山祠)에도 배향됐다. 사자(四子)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언행록이라 할 《논어》, 《대학장구》, 《중용장구》, 《맹자》를 가리키는데, 이 저술들의 저자는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로서 4명의 이름에 자(子) 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사자(四子)'라고 칭한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05에 "사자는 육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요, 《근사록》은 사자로 올라가는 계단이다.〔四子六經之階梯 近思錄四子之階梯〕"라는 말이 실려 있다. 한……하였고 주희(朱熹)는 "상주가 장례를 치르고 나면 신주가 이미 집으로 돌아와 집이 거상(居喪)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상주는 더 이상 산소 옆의 여묘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끝내 잊히지 않으면 아우들에게 묘소 옆에서 머물며 때로 한 번씩 성묘하게 할 수 있다.[主喪者旣葬當居家 蓋神已歸家 則家爲重 若念不能忘 却令弟輩宿墓 時一展省可也]"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다. 《朱子大全 卷63 答胡伯量》 등급 원문의 '과급(科級)'은 단계를 밟아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의 〈근사록 서제(近思錄書題)〉에 "강학하는 방법과 일상생활에 몸소 행하는 실제로 말하면 모두 등급이 있으니, 이를 따라 나아가 낮은 데로부터 높은 곳에 오르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곳에 이른다면 거의 이 책을 찬집한 본의를 잃지 않을 것이다.[講學之方, 日用躬行之實, 具有科級, 循是而進, 自卑升高, 自近及遠, 庶幾不失纂集之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화락한 원문의 '개제(愷弟)'는 '개제(豈弟)'라고도 하며 기상(氣象)이 단아하고 화락함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 〈한록(旱麓)〉에서 문왕(文王)의 덕을 칭송하며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하였다. 암장(闇章)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의 준말로, 군자는 도덕이 심원하여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지만 속에 있는 도덕이 안으로부터 절로 우러나와 그 광채가 날로 드러나 빛난다는 뜻이다. 《中庸章句 第33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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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운와 처사 정공 유사장 贈童蒙敎官朝奉大夫雲窩處士鄭公遺事狀。 아, 호남에 사는 우리 종족은 그 숫자가 적지 않지만, 문망(門望)과 가운(家運)이 영락(零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었다.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로 알려지고 인망이 있으면서 근세에 훌륭한 자는 오직 운와(雲窩)40) 처사일 것이다. 공의 휘(諱)는 홍규(弘規), 자는 사건(士建)이다. 정씨는 계통이 광주(光州)에서 나왔고, 고려 찬성(贊成) 휘 신호(臣扈)41)를 비조(鼻祖 시조(始祖))로 삼는다. 대대로 높은 벼슬과 문학으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다. 국조(國朝) 중엽에 이르러서 휘 질(晊)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휘 응종(應鍾)42)은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휘 서(犀)43)는 지평(持平)을 지냈고, 휘 인녕(仁寧)44)은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휘 만근(萬謹)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니, 이들은 공의 5대 이상이다. 고조 휘 금(錦)은 참의(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득생(得生)은 벼슬이 별제(別提)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시익(時益)은 수직(壽職)45)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부친 휘 광훈(光勳)은 호가 남당(南堂)인데 은덕(隱德)이 있어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세위(金世緯)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고, 모친 숙부인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전익겸(全益謙)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고요하고 아름다워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갖추었으니 영종(英宗) 계유년(1753) 12월 26일에 나주의 거평리(居平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7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전씨가 하종(下從)46)을 결의(決意)하여 전혀 음식을 드시지 않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간하여 마침내 정성으로 감동시켜 모친의 마음을 돌렸다. 평소에 시봉(侍奉)할 때 정성과 삼감을 모두 다하였고, 앉고 먹으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 명령하지 않으면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하루는 모친에게 묻기를 "선고(先考)께서 살아 있을 때 무슨 일을 업으로 삼았습니까?"라고 하니, 모친이 "서책을 읽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사람들이 훌륭한 선비라고 칭송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 눈물을 떨구며 "소자가 마땅히 선업(先業 선대의 기업(基業))을 계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이고 게을리하지 않아 성동(成童 15세가 된 사내아이)에 이르러 경사(經史)를 모두 통달하고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가 문채나고 아름다웠다. 관례를 올린 뒤에는 원근의 훌륭한 명망이 있는 사우(士友)들과 종유하여 연마하고 담금질하여 더욱 확충시켜 나아갔다. 유학(遊學)하여 밖에 있더라도 반드시 열흘에 한 번은 모친을 찾아뵈었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드시 이를 저장해두었다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드렸다. 부모를 위해 과거에 응시했으나 득실(得失)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 정문(程文)47)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고인(古人)의 학문하는 차례에 따라 가르쳤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불훼(不毁)의 나이로 극도로 몸을 훼손하는 데에 잘못하였고,48) 생강과 계피49)를 입에 넣지 않았고, 최마복(衰麻服)50)을 몸에서 벗지 않았으며, 곡읍(哭泣)하는 소리가 여막(廬幕)에서 끊어지지 않았는데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애통해하는 것이 조괄(祖括)51)하는 때와 다름이 없었고, 아침마다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묘(墳墓)에 전배(展拜)하였으며, 중월(仲月)52)에는 시제(時祭)를 행하였고, 제사를 지낸 뒤에 자손들에게는 《소학》과 《대학》을, 부녀(婦女)들에게는 〈내칙(內則)〉과 《열녀전(列女傳)》을 강하였으니, 내외가 엄격하여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말년에 한 구역에 서사(書社)를 지어 '운와(雲窩)'라고 편액하고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유유자적하기도 하였으니,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글 36편을 지어 '《운와경필(雲窩警筆)》'이라 하였는데, 그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도와 사람과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은 성현이 남긴 경전을 보좌하여 이 세상을 도와 보탬이 될 수 있으니, 공의 포부와 조예도 이러한 데에서 그 대략적인 줄거리를 대강 짐작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11월 28일에 고종명(考終命)하였으니 향년 84세이고, 백룡산(白龍山) 서쪽 기슭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35년 뒤 경오년(1870) 봄에 도내의 유생 조철호(趙喆浩) 등이 조정에 공을 천거하는 내용으로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고, 가을에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며, 노사(蘆沙)53) 기 선생(奇先生)이 이에 대한 기문(記文)54)을 지었다. 부인 영인(令人)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양엽(李陽燁)의 따님이니 2남 2녀를 낳았고, 계배(系配) 영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이희조(李希祚)의 따님이다. 장남은 정운보(鄭運普)이고 다음은 정운호(鄭運昊)인데 효우(孝友)로 세상에 알려져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장녀는 수원(水原) 최광발(崔光發)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언양(彦陽) 김원택(金元澤)에게 출가했으며, 손자와 증손 이하 약간 명이 있다. 아, 출중하고 비상한 재능으로 일찍 스스로 깨달아 독서를 궁리하고 격물[窮格]하는 문으로 삼고, 경을 주로 하는[主敬] 것을 지수(持守)의 근본으로 삼았다. 궁격(窮格)을 오래 함에 조리와 두서가 모두 두루 미치고, 지수를 익숙히 함에 법도가 굳게 안정되었으며, 이를 가정에 시행함에 효제(孝悌)가 일어나 행해지고, 이를 고을과 나라에 미루어 감에 신의(信義)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광휘(光輝)를 감추고 천진한 성품대로 분수를 지켜 구림(邱林)의 한적한 물가에서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인간 세상에 천사만종(千駟萬鐘)55)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 훌륭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는 우리 가문 일대(一代)의 명석(名碩)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남쪽 지방에서 백 년 동안 유림(儒林)의 모범이 될 만하다. 신축년(1901) 봄에 현손 정위석(鄭暐錫)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나를 찾아와 인하여 한마디 부탁하는 말을 하였다. 내가 공경히 받아 삼가 보고 일어나서 "기 선생(奇先生)이 이미 저술한 것이 있고, 여력재(餘力齋)56) 장 선생(張先生)이 또 그 유서(遺書)에 발문(跋文)을 지었으니, 천만세(千萬世) 영원한 공안(公案 관공서의 문안(文案))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어찌 가문 안의 보잘것없는 한 후생(後生)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현자를 사모하고 덕을 좋아하는 것이 다른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한 가문에서 철식(綴食 배향(配享))하는 상황에 있는 자에게는 어떠하겠는가. 공에게는 진실로 족히 만분의 일도 기릴 것이 못 되지만, 보잘것없는 여생(餘生)의 입장에서는 말광(末光)에 의지할 것을 사모하는 마음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嗚呼。吾宗之居在湖南者。其麗不尠。而門望家韻之零替不振。垂二百餘年于茲矣。若其文學行義之有聞有望。而偉然於近世者。貴惟雲窩處士乎。公諱弘規。字士䢖。鄭氏系出光州。以高麗贊成諱臣扈爲鼻祖。簪纓文學。世有聞人逮至國朝中葉。贈左賛成諱晊。判書諱應鍾。地平諱犀。掌令諱仁寧。贈掌樂院正諱萬謹。寔公五世以上。高祖諱錦贈參議曾祖諱得生官別提贈參判。祖諱時益壽資憲。考諱光勳號南堂。有隱德。贈承旨。妣淑夫人光山金氏世緯女。無育。妣淑夫人天安全氏益謙女。溫仁靜嘉。閨範甚備。以英宗癸酉十二月二十六日。生公于羅之居平里第。七歲遭外艱。全氏決意下從。絶不進飮食。涕泣苦諫。卒以感回親意。平居侍奉。備盡誠謹。坐食進退。不命不敢。一日問于母氏曰。先考在。世所業何事。母氏曰。讀書勅行。人稱善士。公聞之泫然曰。小子當繼述先秦。自是就博受學。刻苦不懈至成童。淹貫經史。詞藻斐蔚。旣冠追從遠近士友有雅望者。磨礱浸淬。以益展拓。遊學在外。必十日一覲。風雨不廢。遇美味。必儲而藏之。待歸而供焉。爲親應擧。不以得失經心。敎生徒。亦不以程文爲急。必依古人爲學之序而授之。遭內艱也。以不毁之年。而過於致毁。薑桂之滋。不入於口。衰麻之服。不釋於身。哭泣之聲。不絶於次。三年如一日。遇忌日。哀痛無異祖括時。每朝謁廟。朔望展墳。仲月行時祭。祭後講子孫以小大學。講婦女以內則列女傳。內外斬斬無有間言。晩築書社一區。扁以雲窩。遊焉息焉。不如年數之不足。著者三十六編。名曰雲窩警筆。其修身齊家之道。酬人應物之方。可以羽翼乎遺經。而裨補乎斯世。公之抱負造詣。亦可卽此而領略其梗槩矣。以憲宗丙申十一月二十八日考終。享年八十四。葬于白龍山西麓甲坐原。後三十五年庚午春道內儒生趙喆浩等剡聞于朝贈童蒙敎官。秋命旋閭。蘆沙奇先生撰其記。配令人陽城李氏陽燁女。擧二男二女。系配令人咸平李氏希祚女。男長運普。次運昊。孝友聞世。贈持平。女長適水原崔先發。次適彦陽金元澤。孫曾以下若干。嗚呼。以若出類不常之才。早自覺悟。以讀書爲窮格之門。以主敬爲持守之本。窮格之久而條緖該浹。持守之熟而規秬堅定。施之家庭而孝悌興行。推之鄕邦而信義著聞。潛光蘊輝。任眞推分。婆娑徜徉於邱林閑寂之濱。而不知入間世有千駟萬鍾之樂也。其偉韻遐躅。不惟爲吾門一代之名碩。而亦可爲南土百年間儒林之標範也。歲辛丑春。玄孫暐錫奉家狀過余。因有一言之託。余祇受而謹閱之。作而曰。奇先生旣有所述。餘力齋張先生又跋其遺書矣。千萬世不朽之公案。無過於此。何待乎門內渺藐一後生之言哉。雖然慕賢好德。他人猶然。況在一門綴食之地。而爲何如耶。在公固不足爲揄揚之萬一。而在區區餘生。思附末光之情。有不能自己云爾。 운와(雲窩) 정홍규(鄭弘規, 1753∼1836)의 호이다. 7세에 부친을 잃고 모친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면서 학업에 열중했다. 그는 서사(書社)를 지어 '운와'라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사후에 고종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동몽교관을 증직했다. 문집으로 《운와유고(雲窩遺稿)》가 있다. 정신호(鄭臣扈) 광주 정씨(光州鄭氏)의 시조로, 고려말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걸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봉은사 진전직(奉恩寺眞殿直)으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三重大匡 門下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추봉되었다.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광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정응종(鄭應鍾) ?~? 자는 자행(子行), 호는 퇴은재(退隱齋)이다. 부친은 참봉(參奉), 병조정랑(兵曹正郞) 정질(鄭晊)이다. 연산군(燕山君) 때 경연(經筵)에서 시폐(時弊)를 아뢰었고 정란(政亂)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시주(詩酒)를 즐기며 유연자적(悠然自適)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정서(鄭犀) ?~? 자는 비연(斐然)이다.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정인녕(鄭仁寧) 1519~? 중종 39년(1544) 갑진(甲辰) 별시(別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수직(壽職)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과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이다. 하종(下從) 아내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는 것을 말한다. 정문(程文) 과거 볼 때 쓰는 일정한 법식의 문장이다. 불훼(不毁)의……잘못하여 이는 거상(居喪)하는 예절을 말한 것으로,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가 되면 몸을 극도로 훼손하지 말고, 60세가 되면 몸을 훼손하지 말며, 70세가 되면 몸에 최마(衰麻)의 상복(喪服)을 입을 뿐,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집 안에서 거처한다.〔五十不致毁, 六十不毁, 七十唯衰麻在身, 飮酒食肉, 處於內.〕"라는 말이 나온다. 생강과 계피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들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되 반드시 초목의 양념도 있어야 한다.'라고 했으니, 생강과 계피를 말한 것이다.〔曾子曰: '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也.〕"라고 한 말이 나온다. 최마복(衰麻服) 부모의 상을 당한 상주가 입는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이다. 조괄(祖括) 초상을 치르는 법도이다. 중월(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로, 음력 2월, 5월, 8월, 11월을 이른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이학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이고, 자는 대중(大中)이다. 저서로는 《납량사의(納凉私義)》·《노사문집(蘆沙文集)》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기문(記文) 《노사집(蘆沙集)》 권22에 〈효자 운와 정공 정려기(孝子雲窩鄭公旌閭記)〉가 실려 있다. 천사 만종(千駟萬鐘) 4천 마리의 말과 1만 종의 많은 녹(祿)이란 뜻으로, 부귀함을 뜻한다.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 1777~1867)의 호이다. 자는 유장(幼長)이다. 1777년(정조1) 9월 27일 나주  다시면 송촌리(松村里)의 구제(舊第)에서 태어났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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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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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 박공 유사장 溪庵朴公遺事狀 호남은 문헌(文獻)의 땅으로 유현들이 배출되었으니, 고(故) 왕자 사부(王子師傳) 문강공(文康公) 죽천(竹川)57) 박 선생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다. 선생의 후손 휘 형덕(馨德) 은 호가 완이당(玩易堂)인데 선생이 가정에서 전한 것을 얻어 산양(山陽)의 서쪽에서 도를 강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그 문하에 나아가 자신의 학업을 마친 자가 많았으니, 근고(近故)의 계암(溪庵) 박공도 그중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재무(載茂)이고 자는 내실(乃實)이니, 바로 죽천 선생의 8세손이고 완이당에게는 족질이 된다. 정조 정유년(1777) 9월 19일에 관산(冠山) 삼수리(三水里)에서 태어났는데, 타고난 자품이 총명하고 재기(才器)가 민첩하고 풍부하였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때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공령(功令 과거에 사용하는 시문)과 시격(時格) 및 문장의 각 체에 이르러서는 모두 그 정밀함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자, 사원(詞垣)에서 으뜸으로 추앙하여 훌륭한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어느 날 개연(慨然)히 탄식하며 "유문(儒門)의 사업은 따로 있는데 문사(文詞)를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완이당 선생을 가서 찾아뵙고 학문하는 절도를 들었다. 이때부터 마음을 비워 뜻을 겸손하게 하였고, 전심으로 노력을 다하여 의리(義理)의 깊은 뜻에 침잠하고 본원(本原)의 요점을 잡고 보존하였으며, 연마하고 무젖으며 쌓고 확충시켜 나아가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할 때와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할 때에도 법도를 따라 일찍이 허물이 있지 않았다. 부모를 섬길 때에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고 집상(執喪)할 때에 애훼(哀毁)58)가 매우 지나쳤으며, 3명의 아우와 화락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있고 없는 것을 함께하였다. 평소에 옷깃을 바로 하고 바르게 앉아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비록 아이들과 비천한 무리일지라도 따뜻한 말로 자상하게 타일러 성난 목소리를 가하지 않았다. 생도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치지(致知)와 거경(居敬)으로서 체험하고 실천하여 차근차근 잘 이끌어 주었으니 분명한 성규(成規)가 있었다. 을미년(1835) 3월 6일에 고종명(考終命)하여 살았었던 마을 오른쪽 학송산(鶴松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본관은 진원(珍原)이니, 직제학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59)은 바로 국초(國初)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선비와 고관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광전(光前)에 이르렀으니, 바로 죽천 선생이다. 참봉 만하(萬廈)·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무석(武鍚)·좌승지에 추증된 수원(守遠)·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장근(章根)은 바로 고조 이하 4대의 휘함(諱銜)이다. 모친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세준(張世浚)의 따님이고, 계비(系妣)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이진계(李震啓)의 따님이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으니, 공은 바로 장씨의 소생이다. 공의 부인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선정덕(宣廷德)의 따님이고 2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중흥(重興)과 중회(重會)이고 딸은 관산(冠山) 임채환(任采煥)·진주(晉州) 정방형(鄭邦亨)·진주 정순충(鄭淳忠)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길현(吉鉉)과 명현(命鉉)이며, 증손은 태경(泰敬)·태정(泰禎)·태업(泰業)·태과(泰科)이다. 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이 된 까닭은 과연 무슨 일이겠는가. 이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죽고 난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성함과 쇠함, 빈궁과 영달에 이르러서는 시운(時運)에 따라 우연히 오는 것이니, 그 사람을 논하는 방도가 아니다. 공은 덕망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일찍 스스로 스승을 만나 문로(門路)가 바르고 분명하였으며, 출입하면서 몸에 배어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훌륭하게 이처럼 수립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최고의 사업이고 생순사안(生順死安)60)한 곳이다. 비록 바닷가 궁벽한 마을에 묻혀 살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나에게 있는 것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남긴 여운과 남은 향기가 전해져 사람들에게 있으니, 백세토록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만하다. 湖南文獻之地。儒賢軰出。故王子師傅文康公竹川朴先生。卽其一世。先生後孫。諱馨德號玩易堂。得先生家庭之傳。講道于山陽之西。四方學者。多就其門。而卒其業者。近故溪庵朴公。亦其一也。公諱載茂。字乃實。卽竹川先生八世孫。在玩易堂爲族姪也。正宗丁酉九月十九日。生于冠山之三水里。天姿穎悟。才器敏贍。就傳上學。文理日進。至於功令時格。筆翰各體。無不俱極其精。詞垣推先。聲華藉甚。一日慨然歎曰。儒門事業。自有所在。文詞奚爲。遂往謁玩易堂先生。得聞爲學節度。自是虛心遜志。專意致力。沈潛乎義理之藴。操存乎本原之要。磨礱浸灌。積累展拓。一動一靜一。語一默。遵循規矩。未嘗有過。事父母。忠養備至。執喪哀毁過甚。與弟三人。怡怡湛樂。有無共之平居正衿危坐。不見有怠慢之容。平心率物。不見有暴戾之色。雖在兒侄卑賤軰。溫言諄諄。不以厲聲加之。訓進生徒。必以致知居敬。體驗踐履。循循提誘。的有成規。乙未三月六日考終。葬所居村右鶴松山子坐原。公本珍原人。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卽國初顯祖也。衿紳簪纓。奕世不絶。六傳至諱光前。卽竹川先生也。參奉萬廈。贈司僕寺正武鍚。贈左承旨守遠。贈戶曺參判章根。卽高祖以下四世諱御也。妣興德張氏世浚女。系妣仁川李氏震啓女。皆贈貞夫人。公卽張氏出也。公配寶城宣氏廷德女。生二南三女。曰重興重會。冠山任采煥晉州鄭邦亨晉州鄭涼忠也。孫曰吉鉉命鉉。曾孫曰泰敬泰禎泰業泰科也。嗚呼。人生斯世。其所以爲人者。果何事耶。此是風夜勉勉。死而後已者也.至於陞沈窮通。時爾適爾。非所以論其人也。公生長德門。早自得師。門路端的。出入擩染以至文學行誼偉然樹立如此。此是太上事業。生順死安處。雖沈溣海曲。世不見知。而何損於我之有哉。遺韻餘芬。傳之在人。足令百世起敬。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호이다.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68년(선조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애훼(哀毁)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몹시 슬퍼해서 몸이 허약해진 것을 말한다. 박희중(朴熙中) 1364~1446. 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이다. 1406년(태종6) 군자감승(軍資監丞)으로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에 임명됐고, 이어 세자부(世子傅)·좌정자(左正字), 이듬해에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의 은전을 입었다. 생순사안(生順死安)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내가 천리에 따라 순하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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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十五夜藜村獨宿 歷雲閃炙轂。映谷入秋毫。誰識明窓裏。幽人枕獨高。湧海魚驚眼。亂河免濕毫。今宵天下白。談笑幾人高。至圓難犯手。太白不加毫。晦朔何曾缺。世人見未高。啣盃忝白玉。揮筆失彤毫。起視江南夜。群山突兀高。寒梅粧舊影。瘦鶴浴新毫。耿耿刀頭意。碧天穿眼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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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南溟有詩云。翠竹披風偃。蒼松冒雪折。所以主人心。愛松不愛竹。余惜其厚於松。而薄於竹因步其韻。聊爲竹解嘲。 風竹從容偃。雪松感慨折。若尋難易辨。松自讓頭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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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菊吟 籬有淵明菊。樽空翟氏酒。孤負重陽節。皤然一禿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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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현【옥승】에게 답함 答曺士賢【玉承】 방문을 받은 지 여러 해가 되어 그리운 생각 정히 간절하였는데, 뜻밖에 그대 4촌이 방문하였고 그대 편지가 따라왔으니, 직접 얼굴을 보고 진진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위로되는 마음 많았네. 삼가 노친을 모시고 독서하는 체후가 넉넉한 줄 알았으니, 실로 멀리서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색동옷 입고 어버이를 기쁘게 하여100) 하루의 봉양을 삼공(三公)과 바꾸지 않으니,101) 인생의 좋은 시절은 오직 이 때가 그럴 수 있네. 다시 부모님을 모시는 여가에 고서를 읊조리고 옛날 들은 것을 익힌다면, 그 즐거움을 상상할 수 있고 그 아취를 취할 만 할 것이니, 옛날에 은거하며 어버이를 봉양했던 동소남(董召南)102)과 주인궤(朱仁軌)103) 같은 이가 어찌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겠는가? 의림(義林)은 위아래로 외롭고 곤궁하여 정경을 표현하기 어렵고, 오직 긴 백발만 있어 이것이 그 천업(倩業)일 뿐이니, 곤궁한 집에서 슬퍼 탄식한들 무슨 수로 미칠 수 있겠는가? 우리 두 사람이 교분을 맺어 뜻을 살핀 지 비록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나 그 공부의 절도와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는 모습은 또한 그 속내를 상세히 알 수 없었네. 지금 보내온 한 통의 편지에서 그 독실하고 시원함에 대해 그 만 분의 일이라도 대략 알 수 있었고, 더구나 이른바 "기질이 치우치고 뜻이 또 서지 않아 능히 구습(舊習)을 혁파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 매우 치밀하고 힘을 쓰는 것에 게으르지 않음을 볼 수 있었네. 무릇 공부의 요처(要處)는 단지 그 뜻을 세우고 구습을 혁파하는 데 달려 있으니, 이와 같다면 기습(氣習)이 치우친 것은 별도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또한 없앨 수 있을 것이네. 뜻이 서면 근본이 더욱 견고하고 구습을 혁파하면 덕은 더욱 진보하네. 다만 살피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행하는 것에 힘을 쓰지 않는다면 비록 이 중요한 말이라도 그 요체가 됨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 어떻게 여기는가? 承枉有年。懷想政勤。料襮。令從氏委訪。惠幅隨之。與親承顔範。津津傾倒。何以異哉。慰沃多矣。謹審奉老讀書。候節沖裕。案愜遠外願聞之情。彩趨供歎。一日三公。人生好時節。惟此爲然。更於餘力暇日。諷詠古書。溫理舊聞。其樂可想。可趣可掬。古之隱居養親。如董召南朱仁軌。豈獨專美也。義林上孤下窮。情景難狀。而惟有三千丈白髮。是其倩業耳。窮盧悲歎。何計可追。吾兩人定交視志。雖已有年。而其功夫節度。進修樣轍。亦末得詳悉其裏許。今於來喩一紙。其篤實開爽。可以領略其萬一矣。況所謂氣質偏駁。志又不立。而不能革去舊習云云者。可見自省之甚密。而不懈於用力也。大抵功夫要處。只在於立其志。而革舊習。如此則氣習之偏。不用別方。而亦可銷磨矣。立志則本益固。革舊習則德益進。但恐察之不精。而行之不力。則雖是要語。而不知其爲要矣。如何如何 색동옷……하여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고, 일부러 마루에 물을 뿌려 놓고 미끄러져서 어린애처럼 울기도 하고, 새를 희롱하며 장난치기도 하였다. 《小學 稽古》 하루의……않으니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옛사람은 하루 동안의 부모 봉양하는 기회를 삼공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았네.〔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臨川文集 卷9 送喬執中秀才歸高郵》 동소남(董召南) 당(唐)나라 때 안풍(安豊) 사람으로 은사(隱士)인데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어 동소남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살림을 잘 꾸려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한 것을 노래 하였다. 주인궤(朱仁軌)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덕용(德容)이다. 평생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며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자식들에게는 일생 동안 남에게 밭두둑을 양보해도 1묘(畝)의 밭도 손실되는 것이 아니라고 훈계하였다. 《小學 嘉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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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탄기 竹灘記 옛적 을묘년(1855)에 내가 어린아이로 천관산(天冠山)의 명촌(明村)에서 독서하였을 때 죽탄옹(竹灘翁)도 어린아이로 함께하였는데, 그 타고난 재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추구하는 것이 독실하여 함께 공부했던 자들이 미칠 수 없었다. 얼마 후 남북으로 흩어져서 40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기까지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단지 약관(弱冠)이 되기 전에 선친을 여의고 외로운 몸으로 떠돌다가 만년에야 비로소 집안을 세울 계획으로 산양(山陽 보성(寶城))의 죽천(竹川)에 우거(寓居)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벗이 갑작스럽게 풍상을 만난 뒤에 과연 처음 지녔던 뜻을 바꾸지 않을 수 있을지 없을지 궁금하였다. 그런데 계사년(1893)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한 사람이 천태산(天台山)의 집으로 나를 방문하였는데, 보고도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다가 묻고 나서야 비로소 옹인 줄 알았다.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댄 채 밤새도록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나누어 보니, 학문에 대한 공부와 살아오면서 이룩한 업적이 처음 지녔던 뜻을 바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발하여 확장하고 넓게 펼쳐서 성대하게 노성(老成)다운 풍모가 있었다.아, 옹이 '죽탄(竹灘)'이라 한 것이 어찌 단지 그가 사는 곳만을 표지할 뿐이겠는가. 세한(歲寒)45)에 힘쓸 것을 기약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부들이나 버드나무처럼 잔약한 자질로 항상 가을이 오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먼저 시들어 떨어질게 될까 경계하는 마음46)이 간절하였으니, 어찌하면 여울가 한 가지의 봄기운을 얻어 만년의 풍경을 의지할 수 있을까? 昔在乙卯。余以童丱。讀書于冠山之明村。竹灘翁亦以童丱。與之俱焉。其才性之聰敏。趨向之篤實。同業者莫及。旣而分散南北。至四十年之久。而未得一面焉。但聞其未冠失怙。隻身流離。晩始樹立家計。寓於山陽之竹川。余以爲此友在風霜凌遽之餘。而果能不渝初志否。歲癸巳。有皤然一老人。訪我於天台寓舍。見之不記爲誰。問之乃知爲翁。握手促膝。達夜娓娓。其學問之功。履歷之業。不惟爲不渝初志。奮張展拓。蔚然有老成風範。嗚乎。翁之爲竹灘。豈特誌其所居。所以期勉於歲寒者。可知矣。余以蒲柳孱質。常切望秋之戒。安得灘上一枝春。以庇依晩景耶。 세한(歲寒) 대나무가 엄동설한의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푸른빛을 유지하는 것처럼 만년에 초심을 변치 않고 지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말이 보인다. 가을이……마음 남들보다 일찍 늙고 쇠하는 허약한 체질을 염려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고열지(顧悅之)가 간문제(簡文帝)와 동갑이었는데도 이른 나이에 머리칼이 하얗게 세자 황제가 그 이유를 물으니 "신은 포류와 같은 체질이라서 가을이 가까워지기만 해도 벌써 낙엽이 지고 맙니다.[蒲柳之姿 望秋而落]"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해진다. 《世說新語 言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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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오당기 晩悟堂記 상지(上智)는 깨달을 것이 없고, 하우(下愚)는 깨닫지 못한다. 깨닫는 자는 오직 중품(中品)의 자질뿐이다. 대체로 미혹한 바가 있지 않으면 어찌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으며, 남다른 자질이 있지 않으면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깨달음에는 크고 작음이 있다. 목소리에 드러나고 얼굴빛에 징험되어 한 가지 일에서 깨닫는 경우가 있고, 앞에서 징계되고 뒤에 삼가서 한 때에 깨닫는 경우가 있다. 한 가지 일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일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고, 한 때에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때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오직 탈연(脫然)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각성할 수 있고, 황연(惶然)히 봉사가 눈을 뜨듯 볼 수 있어야 안정되고 견고하게 지켜 넓게 펼쳐 나아갈 수 있다. 모르겠지만, 주인이 깨달은 바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듣기에 주인은 54세에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반드시 갖은 고생을 두루 맛보고 온갖 풍상을 실컷 겪은 다음에 뜬 생각이 사라지고 참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거듭 닦은 거울이 번연(幡然)히 묵은 때가 제거된 것과 같을 것이다. 두텁게 축적한 뒤에 드러나는 것은 그 드러남이 반드시 두텁고, 오랜 막힘 뒤에 통창하는 것은 그 통창함이 반드시 오래가며, 큰소리는 반드시 촉박하지 않고, 큰 걸음은 반드시 좁지 않을 것이니, 나는 주인의 깨달음이 앞으로 여생의 결말이 되어 절대로 한 가지 일이나 한 때의 깨달음에 비견될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아, 나는 주인이 깨달음이 있었던 나이보다 한 살이 더 많음에도 오히려 예전과 같이 흐리멍덩하니, 끝내 깨닫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찌하면 쇠잔한 힘을 채찍질하고 다스려서 주인의 뒤를 좇아 상유(桑楡)49)에 만분의 일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上知無悟。下愚不悟。悟之者。其惟中品之資乎。蓋不有所迷。何以有悟。不有所異。何以能悟。然悟有大有小。發於聲。徵於色。而有悟於一事者。懲於前。毖於後。而有悟於一時者。悟於一事者。他事未必然。悟於一時者。他時未必然。惟脫然如熟寐之得惺。怳然如蒙瞽之得視。可以守定得固。展拓將去。未知主人所悟。果何居耶。聞主人以五十有四之歲。而始有所悟。必其備喫辛苦。飽經風霜。而浮念消歇。眞心呈露。如重磨之鑑。幡然而祛塵也。發於厚積之餘者。其發必厚。暢於久鬱之後者。其暢必久。大音必不促迫。闊步必不窄挾。吾知主人之悟。將爲餘日之究竟。切非一事一時之比。嗚乎。余於主人。有悟之年。加有一歲。而尙懵然如故。其終不悟。可知也已。安得策理殘力。追從主人之後。庶幾乎桑楡萬一之悟也耶。是所望也。 상유(桑楡) 뽕나무와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해가 떨어질 때 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만년을 비유한다. 《회남자(淮南子)》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그림자가 나무 끝에 있는 것을 상유라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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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은에 사례하다 謝李晦隱 몽매한 두 눈에 동쪽 서쪽 혼란스럽고 眛塵雙眼眩西東가슴 속은 다시 근심으로 홀연 풍파 일어나네 胸海還愁忽起風학문 쌓는데 능히 누에처럼 세밀히 맺지 못하고 績學未能蠶結細인을 쏘는데 감히 붉은 정곡 뚫었다고 말하랴 射仁敢道鵠穿紅과한 칭찬이 실정보다 지나쳐 몹시 부끄러우니 深慙過獎浮情外다만 경계하는 가르침이 실지에 맞기를 원한다네 但願規箴實地中감추고 숨어도 날로 드러나 끝내 속되지 않으리니 晦隱日章終不俗참된 사업이 그 무리에서 빼어남을 응당 보리라 應看眞業拔其叢 眛塵雙眼眩西東, 胸海還愁忽起風.績學未能蠶結細, 射仁敢道鵠穿紅.深慙過獎浮情外, 但願規箴實地中.晦隱日章終不俗, 應看眞業拔其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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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對菊 菊爲霜下傑。晩節容顔好。我作書中蠹。枯腸亦足保。淵明一愛菊。天下莫能爭。我雖百番愛。家人不識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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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春雨 부슬부슬 봄비가 산 집에 내리고 紛紛細細下山家뻐꾸기309) 처음 우는데 해는 지려하네 布穀初啼日欲斜한 달째 못 돌아간 나그네 근심도 깊은데 愁煞三旬未歸客천 떨기 늦게 핀 꽃은 푹 젖어 소생하네 洽蘇千朶晩開花잠깐 가벼운 깃 젖은 제비는 장막으로 돌아오고 乍沾輕羽燕回幕한가한 잠 자다 놀란 백로는 물가로 달려가네 驚打閒眠鷺走沙비 개인 뒤에 풍광은 더욱 좋을 것이니 晴後風光應更好초연히 별경에 깃들어 남에게 자랑하리 超棲別境向人誇 紛紛細細下山家, 布穀初啼日欲斜.愁煞三旬未歸客, 洽蘇千朶晩開花.乍沾輕羽燕回幕, 驚打間眠鷺走沙.晴後風光應更好, 超棲別境向人誇. 뻐꾸기[布穀] 포곡은 뻐꾸기의 별칭이다. '뻐꾹뻐꾹[布穀布穀]' 하고 울어 마치 '씨 뿌려라, 씨 뿌려라.' 하는 듯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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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가 다시 방문하여 함께 짓다 松坡復訪同賦 봄풀은 우북히 무성하고 시냇길이 트여서 春草芊芊澗路開쑥 지팡이 짚고 멀리 저녁 안개 속에 왔네 蓬笻遠帶夕霏來굳건한 붓 놀라워라 교룡의 춤보다 낫구나 已驚健筆騰蛟舞천한 솜씨 부끄러워라 소라 술잔 기울이네 堪愧淺工傾蠡杯천년의 불겁 거쳐온 골짜기에 구름 자욱하고 佛劫千年雲鎖壑밤새 객이 근심하는 누대엔 달빛이 가득하네 客愁五夜月盈臺명산에서 한 번 만난 것도 옛 일이 되고마니 名山一會成陳跡새로 지은 시를 돌 이끼에 써서 남겨둔다오 留與新詩寫石苔 春草芊芊澗路開, 蓬笻遠帶夕霏來.已驚健筆騰蛟舞, 堪愧淺工傾蠡杯.佛劫千年雲鎖壑, 客愁五夜月盈臺.名山一會成陳跡, 留與新詩寫石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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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에게 주다 贈士狷 옥을 다듬는데 타산의 돌도 필요하고439) 攻玊須山石구슬을 던져 주었는데 목도로 보답했네440) 投瓊報木桃졸렬한 나의 법도가 부끄럽고 尺繩慙我拙높은 그대의 의표에 못 미치네 標槩讓君高이상한 학설이 우는 때까치와 다투니441) 異舌爭啼鵙예리한 눈으로 털끝까지 모두 분석하리 利眸盡析毫한 잔 술에 봄이 저물려 하는데 一樽春欲暮서로 보매 하얀 머리 괴이하네 相看怪霜毛 攻玊須山石, 投瑗報木桃.尺繩慙我拙, 標槩讓君高.異舌爭啼鵙, 利眸盡析毫.一樽春欲暮, 相看怪霜毛. 옥을 …… 필요하고 《시경》 〈학명(鶴鳴)〉에 "다른 산의 돌을 가지고도 옥을 갈 수 있다네.[他山之石 可以攻玉]"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에서는 사견을 옥으로, 후창 자신을 돌로 비유한 것이다. 구슬을 …… 보답했네 자신이 하찮은 시를 보냈는데 사견이 좋은 시로 보답하였다는 뜻이다. 《시경》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도를 보내 주었는데 내가 아름다운 구슬로 보답하고도 보답하였다고 여기지 않는 것은 길이 우호하고자 해서이다.[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상한 …… 다투니 이단의 학설이 난무한다는 뜻이다. 원문의 '이설(異舌)'과 '제격(啼鵙)'은 이단의 학설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지금 남만의 때까치 소리를 하는 사람의 말이 선왕의 도가 아니다.[今也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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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행에게 답함 答白子行 헤어진 지 오래지 않아 또 편지를 받았고 인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체후가 더욱 복된 줄 알았으니, 실로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설사 증세로 몇 개월 고생하여 원기를 빼앗겨 기식(氣息)이 곧 끊어질 지경이니, 오직 곧장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네. 보여준 "시인(時人)의 문사(文詞)……"라고 한 것은 문장의 폐단을 다 말하여 남은 것이 없다고 할 만 하네. 나에게 달린 문제는 평소에 확충하고 함양하여 의리가 밝아진 연후에 드러내어 문사의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 또한 모두 평직(平直) 통달(通達)하고 위곡(委曲) 조창(條暢)하여 "시유(時儒)……"라고 한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는가?[문]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인심(人心)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인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이다.[仁者 心之德]"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바로 사랑의 이치이다.[便是愛之理]"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마음의 덕이다."라고 하고서 한 번 돌려 "사랑의 이치"라고 하였으니, 체가 되고 용이 됨에 오로지 주가 되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 또 "인(仁)은 인성(人性)이다."라고 하지 않고 곧장 "인심"이라 하고, 또 "이 몸이 온갖 변화에 수작하는 주인이 됨을 볼 수 있다."라고 하여, 이 마음을 말하지 않고 몸을 말하였으니, 또한 마음이 몸이 되기 때문입니까?[답] 마음의 덕이라는 것은 인을 오로지 말한 것이고, 사랑의 이치라는 것은 인을 한쪽으로 말한 것이네. 심(心)을 이(理)로 말한 것이 있고 기(氣)로 말한 것이 있으니, 맹자가 이른바 "인은 인심이다.[仁人心]"라고 한 것과 정자(程子)가 이른바 "심은 생도이다.[心生道]"라고 한 것은 모두 이로 말한 것이네. 심은 한 몸의 주인이 되는데, 만약 그대 말과 같다면 심이 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가하겠는가?[문]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을 안다.[盡其心者 知其性也]"라고 하였는데, 문의로 구해보면 이것은 성을 안 뒤에 마음을 다하는 듯합니다. 하늘을 섬김[事天]에 이르러서는 먼저 마음을 보존한 뒤에 성을 기르니, 또한 운용(運用)으로부터 본원(本源)에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까?[답] 마음을 다하는[盡心] 것은 《대학》의 지지(知至)이고, 성을 아는[知性] 것은 물격(物格)이네. 먼저 마음을 보존한 뒤에 성을 기르는 것은 성현이 성을 논함에 마음으로 인하여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네.[문]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하여 1년 복을 입고 벗으니,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한 면복(緬服)107)의 제도는 바로 3개월을 따라야 합니까?[답] 어찌 이장[緬遷]할 때 3개월의 복을 입는 제도에 압강(壓降)108)의 이치가 있겠는가?[문] 근본이 하나라는 '일본(一本)'의 본 자 가운데 이미 만 가지로 다르다[萬殊]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만수(萬殊)는 다만 그 하나의 근본 가운데에서 조리가 나온 것입니다. '일'과 '만'은 층절(層節)이 없고, '본'과 '수'는 단지 일치하는 것입니다. 다만 유행하는 쪽에 나아가 말하면 차례대로 조금 차례대로 조금 따르는 것이 있지만 그 실제는 경계와 위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답] 설명한 것이 매우 옳네. 지금 주기(主氣) 폐단은 단지 이런 의(義)를 모르는 것이네.[문] 《주역》 〈건괘(乾卦) 단전(彖傳)〉에 "건도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고 하였으니, 각각 바르게 한다는 것에서 만물이 한 근원이라는 것을 볼 수 있고, 각각 바르게 하는 밖에 별도로 한 근원이라는 성(性)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해도 한 근원이라는 것에 해가 되지 않고 한 근원이어도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는 데 해가 되지 않으니, 이것이 이(理)의 묘처(妙處)입니다.[답] 그대가 본 것이 착오일세. 그러나 모름지기 여기에 나아가 이면의 실체를 보아야 바야흐로 참으로 이(理)를 본 것이네. 分離未久。又承華幅。因審侍省增祉。實叶願聞。義林泄痢之證。數朔作苦。元氣見奪。氣息奄奄。惟俟朝夕就盡而已。所示時人文詞云云。可謂說盡文敝無餘蘊。在於我者。充養有素。義理昭明然後。發而見於文詞之間者。亦皆平直通達。委曲條暢。而可免於時儒云云之敝矣。如何如何。孟子曰仁人心也。朱子曰。仁者心之德。又曰便是愛之理。旣曰心之德。而一轉爲愛之理。爲體爲用似無專主且不曰仁人性也。而直曰人心。又曰可見其此身爲酬酢萬變之主。不曰此心而言身。則抑心爲身故歟。心之德。是專言之仁。愛之理。是偏言之仁。心有以理言者。有以氣言者。孟子所謂仁人心。程子所謂心生道。皆以理言者也。心爲一身之主。若如賢言。則心爲心之主。其可乎。盡其心者。知其性也。以文義求之。則似是知性而後盡心也。至於事天。先存而後養性。抑自運用而沂本源乎。盡心是大學之知至也。知性是物格也。先存心後養性者。夫聖賢論性。無不因心而發。父在爲母。期年而除。若父在爲母緬。服制直依三月乎。豈於緬遷三月之制。而有壓降之理乎。一本本字中。已含萬殊意。萬殊特其一本中條理出來者也。一與萬無層節。本與殊只一致。但就流行邊說。似有次第逐些。而其實非有界位也。說得甚是。今日主氣之敝。只是不知此個義。乾道變化。各定性命。各正上。見得萬物之一原。非各正之外。別有一原之性也。各正而不害一原。一原而不害各正。此是理之妙處。見得錯。然須就此。見得其裏面實體。方是眞見理。 면복(緬服) 부모의 무덤을 이장하여 다시 장사 지낼 때 입는 상복을 가리킨다. 압강(壓降) 존자(尊者)에게 눌려서 정해진 예법보다 등급을 낮추어 행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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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경【수혁】에게 답함 答李致慶【洙爀】 처음에 건산(巾山)이 방재(傍材)보다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접때 두 소년이 떠날 때 운여(雲汝)에게는 편지를 쓰고 치경(致慶)에게는 쓰지 않았네. 소년이 돌아와서야 비로소 멀다고 여겼던 곳이 가깝고 가깝다고 여겼던 곳이 먼 줄을 알았고, 심지어 전인(專人)109)이 있었는데도 한 글자의 안부도 묻지 못했으니, 저버린 마음 매우 부끄러워 사례할 길이 없네. 다만 그대는 이런 것들을 따지지도 않고 이렇게 손수 편지를 보내 정성스러운 뜻이 편지에 넘쳐나니, 넓게 포용하는 마음을 알겠기에 더욱 감탄하네. 모르겠다만 편지를 받은 지 여러 날이 되었으니 어버이를 모시며 경서를 공부하는 체후는 절서에 따라 더욱 진중한가? 그리운 마음 감당할 수 없네. 의림(義林)은 비루하고 용렬함이 어제와 같아 말할 것이 없네.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설은 매우 상세하니, 조예가 정밀하여 참으로 헛되지 않은 줄 알겠네. 중인(衆人)들이 비록 미발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바람이 안정 된 뒤에도 오히려 여파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더욱 온전히 형용해 낸 곳이네. 대개 일이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맞이하고 일이 이미 지나갔는데 그것을 잡으면, 잠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혹 어두웠다가 어지러워져 평온한 경계가 없을 것이네. 그러나 또한 전적으로 미발한 시절이 없다고 해서는 불가하니, 마치 야기(夜氣)가 아침에 갑자기 휴식하여 우연히 순수한데로 돌아가는 곳 같은 것이 이런 경우이네. 공부의 요체는 바로 이런 곳에 있으니, 다만 뜻을 붙여 잡으려고 하다가 병폐를 생기게 해서는 불가할 것이네. 주자가 이른바 "일용의 사이에 장경(莊敬)과 함양(涵養)의 공부가 지극하여 인욕의 사사로움이 어지럽게 하는 것이 없으면 발하기 전에는 맑은 거울 잔잔한 물과 같으며, 발한 뒤에는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만고의 지극한 말씀인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初謂巾山遠於傍材。故向日兩少年之去。修書於雲汝。而未及於致慶矣。其迴也始知遠者近而近者遠。至有專人而無一字相問。愧愧負負。無以謝爲。但賢者不較不猶。致此手訊。繾綣之意溢於幅面。仰認包洪。尤可感歎。未審信後有日。侍旁經履。連序增重。慰溯無任。義林陋劣如昨。無足奉提。未發已發之說。極其詳悉。可認造詣精密。儘不虛矣。衆人雖曰未發。而如風定之後猶有餘波者尤形容十分處。蓋事未至而迎之。事已過而將之。乍起乍滅。或昏或亂。無有妥帖境界。然亦不可謂專無未發時節。如夜氣平朝。霎爾休息。偶然回淳處。是也。工夫要處。正在此處。但不可着意把捉。以生病敗也。朱子所謂日用之間。莊敬涵養之功至。而無人欲之私而亂之。則其未發也。鏡明水止。其發也。無不中節。眞萬古至言也。如何如何。 전인(專人) 어떤 소식이나 물건을 전하기 위해 특별히 사람을 보내는 것 또는 그 사람을 말하며, 전족(專足), 전팽(專伻)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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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영국】에게 답함 答金箕洪【榮國】 푸른 갈대에 흰 이슬 내리니 치달려 가는 마음 얼마였던가? 뜻밖에 영랑(令郞)110)이 나의 집에 찾아왔고 고마운 편지가 나의 책상을 빛나게 하였으니, 오랜 병으로 겨우 숨이 붙어있어 아직 죽기 전에 벗의 자제와 벗의 편지를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위로와 감사함의 지극함은 말로 형언하지 못할 것이 있네. 몇 년 전부터 체후의 절도가 줄곧 보호되어 정길(貞吉)하고, 큰 절도의 모든 것이 한결같이 여전한 줄 알았으니, 화락한 군자를 신명이 돕는 것은 이치가 응당 이와 같네. 어려움이 많았던 끝에 친구의 좋은 소식은 무엇이 이것보다 좋겠는가? 진실로 지극히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노쇠한 몰골이 끝내 심하여 문을 닫고 칩거한 지 이미 지금 몇 년이 되었네. 황천으로 갈 기일이 조석 사이에 있을 것이니, 어찌 제기하여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드님은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 비록 능히 마음속에 온축한 것을 평온하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기골이 준수하며 의용(儀容)이 단정하고 진중한 것을 보았으니, 덕 있는 그대 집안의 가르치는 법도를 볼 수 있었네. 석과(碩果)111)의 소식은 앞길이 만 리이니, 부디 더욱 의로운 방도로 가리켜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보내준 물품은 진심으로 준 것이니 감사하네. 蒼葮白露。馳懷幾時。謂外令郞臨門。惠幅賁案。誰知積病餘喘。及其未死。而得見故人子弟故人心畫哉。慰感之至。有不可以言諭。承審年歲以來。體候節宣。連護貞吉。大節凡百。一視平昔。神相愷悌。理應如此。多艱之餘。知舊好消息。何踰於此。允叶願聞之至。義林衰相卒甚。杜門貞蟄。已有年于玆矣。黃壤行期。非朝則夕。夫何提喩之有哉。令郞稠撓之中。雖未能穩叩所蘊。而見其氣骨峻茂。儀容端詳。可以見德門敎法矣。碩果消息。前程萬里。幸加義方之敎以待之如何。惠饋心貺。可感。 영랑(令郞)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르는 말로 영식(令息), 영윤(令胤)이라고도 한다. 이하는 아드님으로 풀이하였다. 석과(碩果)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서 "하나 남은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아 장차 다시 생겨나게 되는 이치를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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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송 장우 이 찾아오다 3수 林砥松【章佑】來訪【三首】 고상한 자취가 영광스레 멀리서 재차 찾아오니 再荷高蹤遠賁然백발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이라 새삼 감탄했네 更歎未易白頭年한 가닥 명맥을 산이 무너진 뒤에 애통하게 잃고 痛亡一脈頹山後읽다 둔 책을 흙에 묻기 전에 힘써 정리했네 勉理殘書瘞土前나무와 돌은 산중의 좁은 땅에 남아 있고 木石山中餘尺地바람 탄 조수는 문 밖의 푸른 하늘에 닿았네 風潮門外接蒼天다만 소리와 기운이 상응하길 구할 수 있다면 但能聲氣相求應천릿길에 채찍을 주면서 작별해도 무방하리라 千里何妨贈別鞭뜻이 있어도 호연지기를 기르지 못했으니 有志難能養浩然지금까지 육십 년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네 至今虛度六旬年모여 사는 밖에서 산수를 즐긴 게 아니라 非耽泉石群居外죽기 전에 몸과 마음 단련하기 위함이었네 爲鍊身心未死前의리는 지금 실지에서 보아야 하고 義理如今看實地빈궁과 영달은 절로 하늘에 맡겨야 하네 窮通自合任蒼天게으른 소도 조심히 걷지 않을까 걱정한다니 懶牛猶患無輕步곧장 어진 말에 의지하여 회초리를 만들었네 卽賴仁言作箠鞭지송이란 호를 받아 이미 초연했으니 砥松錫號已超然홀로 사문을 지킨 지 칠십 년 되었네 獨守斯文七十年울창하여 찬 겨울이 와도 길이 푸르고 鬱鬱長靑寒歲後정정하여 성난 파도에 흔들리지 않네 亭亭不動怒濤前또 순숙하여 진경에 돌아가길 바랐으니 更要純熟歸眞境어찌 조금 어긋나 별천지에 왔겠는가 詎有毫差到別天어진 분이 준 말씀에 보답할 길 없는데 仁者贈言無以報감히 매진하는 데에 길손 채찍을 도우랴 敢於邁往助征鞭 再荷高蹤遠賁然, 更歎未易白頭年.痛亡一脈頹山後, 勉理殘書瘞土前.木石山中餘尺地, 風潮門外接蒼天.但能聲氣相求應, 千里何妨贈別鞭?有志難能養浩然, 至今虛度六旬年.非耽泉石群居外, 爲鍊身心未死前.義理如今看實地, 窮通自合任蒼天.懶牛猶患無輕步, 卽賴仁言作箠鞭.砥松錫號已超然, 獨守斯文七十年.鬱鬱長靑寒歲後, 亭亭不動怒濤前.更要純熟歸眞境, 詎有毫差到別天?仁者贈言無以報, 敢於邁往助征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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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기 五峯記 오봉산(五峰山)도 능주(綾州) 남쪽의 여러 산처럼 명망이 있는 산으로, 차례대로 나란하게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줄지어 나는 기러기 같고, 뾰족하게 솟구쳐 있는 삼엄한 모습은 적을 상대하는 창 같으며, 동글고 두터우며 한데 뭉쳐있는 모습은 마치 봄기운을 머금은 연꽃 같았으니, 하늘에 배치하고 땅에 펼쳐 놓은 것이 귀신이 그려놓은 그림처럼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곧 이 산이 있었으니, 정령(精靈)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몇 사람이 배출되었겠으며, 수석(水石)을 완상하는 이곳에서 몇 사람이 소요했겠는가? 돌이켜 아스라이 생각하자니 아득하게 연기와 구름처럼 흩어져 사라진다.나의 벗 오군 기서(吳君基瑞)는 산 아래 사람이다.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게 되자 얽매임에서 벗어나 산수에 뜻을 부치고서 지팡이 짚고 거니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유람의 즐거움을 다하면서 문을 닫아건 옛집에서 병든 몸을 돌보고 늙음을 기다리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대체로 그 풍취와 기상은 사람과 땅이 서로 부합하고, 비경과 마음이 서로 맞았다고 이를 만하다.나는 풍파에 시달리는 일개 백성일 뿐으로, 병진년(1856)에 덕동(德洞)에서 산 아래로 옮겨가서 우거하다가 정묘년(1867)에 가족을 데리고 구봉산(九峯)으로 들어갔고, 정해년(1875)에 구봉산에서 산 아래 옛적에 거처했던 곳으로 돌아왔으며, 경인년(1890)에 천태산(天台山)53) 산중으로 들어왔으니, 전후로 30여 년 동안 동서남북으로 무상(無常)하게 옮겨 다녔지만, 산은 진실로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아, 기구하고 험난한 여생 동안 티끌 같은 세상의 인연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명산의 물과 바위 사이에서 평생의 좋은 벗과 함께 늙어가지 못했다. 산은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저버린 적이 많았으니, 그러한즉, 시종 산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으로 또 누가 군만 하겠는가. 오봉산이 훌륭한 주인을 만난 것을 축하하며 인하여 기문(記文)으로 삼기 바란다. 五峰亦綾南群山之望也。列立比次。如鴻雁之聯翩。尖秀森嚴。如戈戟之待敵。圓厚融結。如芰荷之含春。天排地鋪。鬼繪神畵。有不可名狀。噫。自開闢以來。便有此山。精靈所會。鍾得幾人出來。水石所賞。住得幾人盤旋。緬思追想。茫茫然烟銷雲空。余友吳君基瑞。山下人也。早業功令。累試不中。擺脫絆累寓意山水。一笻一屨。極其游歷。杜門舊庄。爲養病待老計。蓋其風韻氣趣。可謂人地相符。境情相得也。余一風波氓耳。歲丙辰。自德洞搬寓山下。丁卯挈家入九峯。丁亥自九峯返山下舊居。庚寅入天台山中。前後三十餘年。東西南北遷徙無常。而山固自如矣。嗚乎。崎險餘生。塵緣未袪。不得與平生好友共老於名山水石之間。山不負人。而人之負山多矣。然則終始不負山。又孰若君。願爲五峯山賀得好主人。因爲之記。 천태산(天台山) 화순군 도암면 천태리에 자리한 산(482m)으로 능주의 서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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