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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파기 三坡記 이릉(爾陵)114)의 치소 북쪽 10리에 백암(白巖)이 있는데 대개 이름난 마을이다. 물이 동남쪽으로부터 오는 것의 천만 갈래 물길이 여기에 이르러 합해져 앞에서 멈추어 고이고, 산이 서북쪽으로부터 뻗어 오는 것의 천만 봉우리가 여기에 이르러 그쳐서 좌우로 나열해 있다. 그윽하고 깊으면서 시원하고, 주위를 둘러싸면서도 넓고 평평하여 이미 이름하여 형상할 수 없다. 북쪽에는 상좌봉(上座峰), 남쪽에는 발우봉(拔尤峰), 서쪽에는 응봉(鷹峯)이 있어 셋으로 나열하여 정치(鼎峙)하고 있으니, 마치 거인(鉅人)과 장덕(長德)이 밝은 거울과 그림 병풍 사이에 서로 마주하여 함께 인사하고 있는 것 같다. 대개 백암은 이릉의 빼어난 승경이고, 이 삼봉은 또 백암의 승경이다.나의 벗 삼파자(三坡子)는 이곳에 세거하여 그대로 호로 삼았다. 그러나 '봉(峰)'이라 하지 않고 '파(坡)'라고 하였으니, 또한 설명할 것이 있는가? '봉'은 높은 것이고 '파'는 낮은 것이니, 외면의 이름은 낮게 하려고 하고 내면으로 힘쓰는 실상은 높게 하려고 한다. 하늘의 높음으로 산보다 낮은 것이 축(畜)이 되고,115) 산의 높음으로 땅보다 낮은 것이 겸(謙)이 되니,116) 지금 외면으로는 파이고 내면으로는 산인 것은 또한 어찌 겸손하고 겸손한 대축(大畜)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바로 군자가 경금(褧錦)117)하는 제일의 법이니, 내 알건대 삼파(三坡)의 봉(峯)은 반드시 위승경(魏升卿)의 오천 길118)과 더불어 그 높이를 같이하고 한 지방의 빼어난 승경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爾陵治北十里有白巖。盖名村也。水之自東南來者。千派萬流。至此而合。渟滀於前。山之自西北來者。千峯萬峀。至此而止。羅列於左右。幽深而軒敝。周遭而廣平。已不可名狀。北有上座。南有拔尤。西有鷹峯。參列鼎峙。如鉅人長德。相對拱揖於明鏡畫屏之間。盖白巖爾陵之選勝。三峯又白巖之選勝也。余友三坡子。世居於此。因以號焉。然不曰峰而曰坡。抑有說耶。峯高者也。坡下者也。名之在於外者。欲其下。實之務於內者。欲其高。以天之高而下於山則爲畜。以山之高而下於地則爲謙。今外坡而內山。亦豈非謙謙大畜之義耶。此是君子褧錦第一法。吾知三坡之峯。必得與魏升卿五千仞。同其高。而不止爲一方之選勝也。 이릉(爾陵) 이릉부리현(爾陵夫里縣)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綾州面)의 옛 지명이다. 하늘의……되고 산천대축(山天大畜)의 《주역》 〈대축괘(大蓄卦)〉 형상을 말한다. 산의……되니 지산겸(地山謙)의 《주역》 〈겸괘(謙卦)〉 형상을 말한다. 경금(褧錦) 비단 옷 위에 다시 홑옷을 덧입어서 화려함을 감춘다는 뜻으로, 남에게 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위풍(衛風) 석인(碩人)〉에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옷을 덧입었다.[衣錦褧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위승경(魏升卿)의 오천 길 잠삼(岑參)의 시 〈위승경을 전송하며[送魏升卿]〉에 "그대는 삼봉이 곧장 오천 길을 올라간 것을 보지 못했겠지만, 군의 문장을 보건대 또한 이와 같네.[君不見三峰直上五千仞, 見君文章亦如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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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암기 土庵記 토암옹(土庵翁)은 이름이 학(㙾)이고, 자가 자술(子述)이니, 이는 대체로 선친 겸와공(謙窩公)께서 개미 새끼들이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들어 명명함으로써 부지런히 힘써서 성취를 이루게 한 것이다. 옹은 평소에 이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수용하여 행하였는데, 만년에 이르러 노쇠하여 혹 실추시키게 될까 염려하다가 마침내 '토(土)' 자로 암자의 이름을 짓고 항상 눈앞에 두고 돌아보면서 경계하는 계책으로 삼았다무릇 때때로 익히는 것은 징험할 길이 없지만, 흙을 쌓는 것은 자취가 있으니, 쌓인 흙의 많고 적음을 보고서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알 수 있다. 아, 행실을 보면 그 상서로움을 알 수 있고, 일을 부과하면 반드시 그 공적을 바쳐야 하는데, 이는 몽사(濛汜)로 해가 저물어 갈 때20)에 마지막 결말을 지어 천지 부모(天地父母)와 교환하는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주부자(朱夫子)는 시에서 이르기를, "무두질한 가죽을 차서 부친의 가르침을 따르고, 나무가 뿌리를 감추는 듯 행하여 스승의 전수(傳受)를 삼가 받드네.21)"하였다. 또 침상에는 '위(韋)' 자를 써 놓고, 서재에는 '회(晦)' 자를 걸어 놓고서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옹의 뜻도 이러한 데에 근본을 두고 있을 것이다. 土庵翁名㙾字子述。蓋其考謙窩公。以蛾子述學含土之事。擧而命之。俾其有勤苦作成也。翁平日服膺而受肘焉。及其晩年。恐慮衰而或失墜也。遂以土名庵。爲常目顧警之計。夫時迷無徵。累土有跡。視累土之多寡。而其勤慢可知也。嗚乎。視履可考其祥。賦事必獻其功。此在濛汜殘景。所以爲究竟結杪。而交還於天地父母者。其意豈偶然哉。朱夫子詩曰。佩韋遵考訓。晦木謹師傳。又題韋於寢。揭晦於齋。以寓終身之慕。翁之意。其亦有本於此云爾。 몽사(濛汜)로……때 인생의 노년을 비유한다. 몽사는 해가 지는 곳인데,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올라 몽사로 넘어간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무두질한……받드네 주희(朱熹)가 만년에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의 고정서원(考亭書院)에 적어 놓은 것이다. 앞의 구(句)는 주희의 부친 주송(朱松)이 "조급한 성질이 도를 해친다."라고 스스로 경계하여 자신의 호를 '위제(韋齋)'라고 한 가르침을 이어 따를 것을 다짐한 것이다. 위(韋)는 무두질하여 부드럽게 만든 소가죽을 이르는데,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의 서문표(西門豹)가 급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 이것을 차고 다니면서 느긋하게 처신했다는 고사가 전해지며, 예로부터 성급한 자들이 이것을 차고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뒤의 구는 주희의 스승 유자휘(劉子翬)가 주자에게 전수해 준 "나무는 뿌리를 잘 감추어야 봄에 잎이 무성하게 피고, 사람은 몸을 잘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찌는 것이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는 가르침을 삼갈 것을 다짐한 것이다. 주자가 자로 삼은 원회(元晦)ㆍ중회(仲晦)와 호로 삼은 회암(晦菴)ㆍ회옹(晦翁)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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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봉321) 창렬 을 애도하다 悼崔華峯【滄烈】 깊은 산에 자취 감추고 구산322) 문하에서 배웠으니 跡晦雲山學臼門평생토록 의를 행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네 生平行義出流羣중년에 횡역 만남은 일신의 운세와 관계 있고 中經橫逆關身運늙어서는 참된 공부 배가 되어 도의 근원 찾았네 老倍眞工覓道源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배워 정의 잊기 어려운데 同座春風難忘誼그대 떠난 텅 빈 집에서 이날 무슨 말을 하랴 虛堂此日那堪言계수나무 숲에는 밤마다 늘 달이 걸렸는데 桂林夜夜長懸月초은323)의 노랫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구나 招隱歌聲更不聞 跡晦雲山學臼門, 生平行義出流羣.中經橫逆關身運, 老倍眞工覓道源.同座春風難忘誼, 虛堂此日那堪言?桂林夜夜長懸月, 招隱歌聲更不聞. 최화봉(崔華峯) 최창렬(崔滄烈, 1877~1940)로, 화봉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회경(晦卿)이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농산(農山) 신득구(申得求)에게서 수학하였고 그가 죽자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 입문하였다.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과 교류하였다. 많은 초고를 남겼으나 전화(戰火)로 소실되어 《화봉유고(華峯遺稿)》 2책만 전한다. 구산(臼山)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또 다른 호이다. 초은(招隱) 한(漢)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에게 초빙된 인사들 가운데 소산(小山)이라고 일컫던 이들이 굴원(屈原)의 고사에 감동한 나머지 지은 〈초은사(招隱士)〉라는 시부(詩賦)를 말한다. 그 첫 행에 "계수나무 숲 우거져 산이 그윽하네.[桂樹叢生兮山之幽.]"라고 하였다. 《楚辭 卷8 招隱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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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송331)의 '《주역》을 읽고 우연히 짓다' 시에 차운하다 次林砥松讀易偶成 대역만을 공부하고 온갖 것들 제거하니 專門大易百爲除지송 노인의 근면한 공부 세상에 짝할 이 없네 砥老勤工世莫如사변상점332)의 현묘한 이치가 담겨 있고 辭變象占玄妙理희문주공333)의 성스럽고 신묘한 책이라네 羲文周孔聖神書강절은 수를 추산하매334) 일찍이 흠이 없었고 數推康節曾無欠이천은 도를 말하매335) 또한 여유가 있었네 道說伊川亦有餘그래도 깊이 계합함은 오직 본의336)로 귀결되니 深契惟應歸本義그 가운데 참된 즐거움을 누가 알겠는가 箇中眞樂孰知歟 專門《大易》百爲除, 砥老勤工世莫如.辭、變、象、占玄妙理, 羲、文、周、孔聖神書.數推康節曾無欠, 道說伊川亦有餘.深契惟應歸本義, 箇中眞樂孰知歟? 임지송(林砥松) 임장우(林章佑)이다. 전우(田愚)의 《간재집(艮齋集)》에 그에게 보내거나 답한 편지가 다수 실려 있다. 사변상점(辭變象占) '상기사(尙其辭)', '상기변(尙其變)', '상기상(尙其象)', '상기점(尙其占)'을 줄여서 한 말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에는 성인의 도가 네 가지 있다. 역을 가지고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자는 그 언사를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행동하려는 자는 그 음양 변화를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기구를 만들려고 하는 자는 역의 상을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미래를 점치려는 자는 그 점괘를 숭상해야 한다.[易有聖人之道四焉. 以言者尙其辭, 以動者尙其變, 以制器者尙其象, 以卜筮者尙其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희문주공(羲文周孔) 《주역》을 완성한 복희(伏羲),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줄임말이다. 《주역회통(周易會通)》 범례(凡例)에 의하면, 복희씨는 괘획(卦畫)을 그었고, 문왕은 괘사(卦辭)를 지었고, 주공은 효사(爻辭)를 지었고, 공자는 십익전(十翼傳)을 지었다고 하였다. 강절(康節)은 수를 추산하매 강절은 북송의 학자 소옹(邵雍)이다. 《주역》에 정통하여서, 역전(易傳)에 근거해 팔괘(八卦)를 해석하였고, 도가 사상을 참고해 '상수지학(象數之學)'을 개창하였다. 이천(伊川)은 도를 말하매 이천은 송나라 학자 정이(程頤)이다. 의리(義理)를 위주로 《주역》을 주해(註解)하여 《이천역전(伊川易傳)》을 지었다. 본의(本義) 주희(朱熹)가 《주역》의 점사(占辭)를 위주로 설명한 《주역본의(周易本義)》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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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화대기 望華臺記 사람은 지극히 정든 곳에 대해 그곳을 떠나게 되면 그리워함이 없을 수 없고, 그리워하면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 중에 언덕에 올라 부모님이 계신 곳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고94), 높은 산에 올라 군자가 있는 곳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며, 개암나무와 감초를 노래하며 미인(美人)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니95), 이것은 인정상 그칠 수 없는 것이다.운암(雲巖) 어른은 사문(斯文)의 훌륭한 유학자이자 성대한 조정의 저명한 관리로서 명성과 덕망을 한 몸에 받아 조정과 재야에서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는데, 시사(時事)가 일변하자 홀연히 수레를 돌려 만 길 높이 흩날리는 속세 밖으로 멀리 떠나 10 묘(畝)의 농토 사이에서 한가로이 소요하며 편안히 지냈다. 하지만, 오직 진심어린 단심(丹心)으로 그리워하며 해[임금]를 향한 정성스런 마음만은 막을 수 없었기에 마침내 집 옆에 있는 산 정상의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곳에 하나의 대(臺)를 축조하고 한가한 날에 올라 서울을 우러러 바라보는 장소로 삼았다.아, 문정(文正)은 강호로 물러나 있으면서 임금을 걱정하였고96), 횡거(橫渠)는 명아주와 콩잎 같은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임금을 그리워하였으니97), 이는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동서양의 나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여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에 대한 생각98)을 그만둘 수 없는 지금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알지 못하겠지만, 어른께서 대에 올라 서울을 향해 바라보는 날에 과연 어떠한 감회에 젖어 들었을까? 천고토록 다 없어지지 않을 슬픔에 반드시 노래하고 통곡하더라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아, 서산(西山)99)은 어디이며, 동해(東海)100)는 어느 곳인가? 구름이 깔리고 달이 밝은 산중의 망화대(望華臺)의 한 구역을 어느 누가 오늘날의 서산이 아니며, 동해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入於至情之地。離之則不能無思焉。思之則不能無望焉。古人有陟岵屺而望父母。陟崔嵬而望君子。歌榛苓而望美人。此人情之所不能已也。雲巖丈人。以斯文偉儒。熙朝名宦。聲望期注。朝野拭目。及其時事一變。而幡然回轍。乃遠引遐舉於萬丈軟塵之外。而棲遲偃仰於十畝農圃之間也。惟是赤際丹心戀戀向日之誠。遏住不得。遂就舍傍山頂可舒遠眺處。占築一臺。以爲間日登臨瞻望京華之所。嗚乎。文正江湖之憂。橫渠藜藿之戀。此在平時而猶然。況今東塵西氛。瀰漫天地。而匪風下泉之思。有不可已。未知丈人臨望之日。果作如何懷緖也。其千古不盡之悲。必有非歌哭可足者。噫。西山何地。東海何處。雲月山中一區望華臺。誰謂非今日之西山東海也耶。 언덕에…… 있었고 고향을 떠난 사람이 부모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로, 《시경》 〈척호(陟岵)〉에 "저 산에 올라서 아버지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저 민둥산에 올라서 어머니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陟彼岵兮, 瞻望父兮.……陟彼屺兮, 瞻望母兮.]"라고 하였다. 개암나무와……있었으니 미인(美人)은 훌륭한 임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진펄에는 감초가 있도다. 누구를 생각하는가, 저 미인은 서방 사람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다. 문정(文正)은……걱정하였고 문정은 북송 초기의 명재상이자 문장가였던 범중엄(范仲淹)의 시호이다. 범중엄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에 처하면 군주를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라는 말이 보인다. 《范文正公集 卷7 岳陽樓記》 횡거(橫渠)는……그리워하였으니 횡거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그는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왕안석(王安石)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신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며 자신을 등용하고자 했던 신종(神宗)을 염려하였다. 비풍(匪風)과……생각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은 《시경》 〈회풍(檜風)〉과 〈조풍(曹風)〉의 편명으로, 모두 주(周)나라의 왕업이 쇠망해 가는 것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외세로 인해 점차 쇠망해가는 조선 말기의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염려를 말한다. 서산(西山)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은거했던 수양산(首陽山)을 가리키는 듯하다. 백이ㆍ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으려 할 적에 불렀다는 채미가(采薇歌)〉에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포악함을 포악함으로 바꾸었으면서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구나. 신농과 우순과 하우가 문득 없어졌으니 나는 누구를 의지해서 돌아가야 하나. 아아, 가야지. 명이 쇠하였구나.[登彼西山兮, 采其薇兮. 以暴易暴兮, 不知其非兮.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兮. 於嗟徂兮, 命之衰矣.]"라는 내용이 보인다. 동해(東海) 전국 시대 제(齊)나라  의사(義士)였던 노중련(魯仲連)이 절개를 지켜 빠져 죽고자 했던 동해(東海)를 가리키는 듯하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고서 위(魏)나라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제국(帝國)으로 섬긴다면 포위를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은 저들이 천하를 차지하고 천자가 된다면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은 되지 못하겠다고 한 고사가 전해진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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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 영모재 중수기 具氏永慕齋重修記 죽수(竹樹)106)의 동쪽 연주산(聯珠山)은 고 평장사 구공(具公)의 묘소가 있는 곳이고, 산 아래에 날개를 펼친 듯 운림(雲林)의 끝에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손들의 영모재(永慕齋)이다. 대개 상재(桑梓)의 생각107)과 상로(霜露)의 감회108)를 깃들이고, 노래하고 곡하며 종족을 모으는 장소로 삼았으니, 마치 진씨(甄氏)의 사정(思亭)109)과 황씨(黃氏)의 망고정(望考亭)110)과 같았다. 오직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무궁하다면 이 재사 또한 장차 자손과 더불어 시종 함께 할 것이니 다르게 보아서는 불가하다. 이 때문에 전후로 수백 년 동안 무너지는 대로 수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후손 본수(本修)가 개탄스러운 심정으로 생각을 내어 도모가 여러 종친에게 미쳤는데, 모모가 그 일을 주관하고 모는 그 재정을 담당하고 모모는 그 일을 감독하여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5개월 만에 공사가 끝났다. 기울어진 것은 바로 세우고 느슨해진 것은 견고하게 하고 세월이 흘러 퇴색 된 것은 깨끗하게 새롭게 하여, 청(廳)·당(堂)·문(門)·무(廡)가 환하게 모습을 바꾸었으니, 《서경》의 이른바 "긍구긍당(肯構肯堂)"111)과 《시경》의 이른바 "사속비조(似續妣祖)"112)를 모두 볼 수 있다.오호라! 고심하고 정성과 힘을 다해 애써 주선하여 여기에 이른 것은 단지 조석으로 첨모(瞻慕)하여 저존(著存)의 정성113)을 지극하게 하고 밤낮으로 강론하고 수양하여 계술(繼述)할 방범을 궁구하여 안으로는 집안의 기대가 되고 밖으로는 나라의 빛이 되는 것이니, 이 재사에 노니는 사람은 어찌 서로 면려하지 않겠는가. 竹樹之東。聯珠之山。故平章事具公衣履之藏。山下翼然。在雲林之端。卽其子孫永慕之齋也。盖以寓桑梓之思。霜露之感。而爲歌哭聚族之地。如甄氏之思亭。黃氏之望考亭也。惟是慕先之心爲無窮已。則此室亦將與子孫相終始。而不可以差殊觀也。是以前後數百年。隨敝隨補。非止一再。後孫本修。慨然發慮。謀及諸宗。某某尸其事。某掌其財。某某董其役。首尾五朔。功役告訖。傾側者峻直。縱弛者鞏固。漫漶者鮮新。廳堂門廡。煥然改觀。書所謂肯構肯堂。詩所謂似續妣祖。皆可見。嗚乎。苦心血力。拮据至此者。只是朝夕瞻慕以致著存之誠。夙夜講修以究繼述之方。內以爲門戶之望。外以爲邦國之光。遊此室者。盍相勉焉。 죽수(竹樹)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의 옛 이름이다. 상재(桑梓)의 생각 부모가 살던 고향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반(小弁)〉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로(霜露)의 감회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슬퍼하며 사모한다는 뜻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씨(甄氏)의 사정(思亭) 송(宋)나라 때 진씨(甄氏) 집안의 사람인 진군(甄君)의 정자인데, 조상을 추모하기 위한 정자를 가리킨다. 진씨 집안은 원래 서주(徐州)의 부호였는데, 진군 때에 이르러 집안이 가난해졌다. 이에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라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영구(靈柩)를 여럿 마련하여 함께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집을 지었다. 그러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황씨(黃氏)의 망고정(望考亭) 오대(五代) 남당(南唐) 때 황자릉(黃子稜)이 아버지의 무덤을 멀리 바라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긍구긍당(肯構肯堂) 자손이 선조의 유업(遺業)을 잘 계승한다는 뜻이다. 《서경》 〈주서(周書) 대고(大誥)〉에 "만일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이미 그 규모를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의 터도 마련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당을 짓고자 하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속비조(似續妣祖) 자손이 선조의 유업(遺業)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시경》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妣祖, 築室百堵.]"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저존(著存)의 정성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해 사랑과 정성을 다 들이면 살아 계신 듯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공경히 제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후손이 조상에 대하여 "사랑을 다하면 혼령이 보존되고, 정성을 다하면 혼령이 드러난다.[致愛則存, 致慤則著.]"라는 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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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헌기 瑞軒記 남쪽 지방의 산 가운데 혹 서석산(瑞石山)119)보다 큰 것이 있겠지만 그 모습의 단엄(端嚴)함과 기상의 명수(明秀)함은 마치 대인 장자(大人長者)가 높이 공수하여 우두커니 서 있음에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공경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것은 서석산이 실로 제일이다. 옛날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120)께서 이 산을 가장 사랑하여 소싯적에 유람해 보았고 만년에 마주보이는 곳에 집을 지어 조석으로 바라보았으니, 대개 천지의 정대한 기상은 사람과 산이 차이가 없다.오호라! 하늘이 돌보지 않아 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뒤에 태어나 늦게 배운 사람이 갈팡질팡하여 귀의할 곳이 없는데, 당시 첨앙하던 마음을 깃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서석산만 존재하네. 돌아보건대 이 비천한 목숨이 유랑하다 궁벽한 곳에 머물러 노쇠함과 병이 침범하여 문을 닫고 세상을 사절하다보니, 드디어 이 산과 아울러 모두 잃게 되었다.안군(安君) 공삼(公三)121)은 상서로운 사람이다. 이 산의 끝에 살면서 이 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 그 전 면목을 안석과 뜰 사이에 드러내지 않음이 없게 하였고, 심지어 기거하며 출입하고 주선하며 돌아보는 사이에도 단엄 명수한 기상이 아님이 없으니, 이 헌(軒)이 서(瑞)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숭악(崧岳)의 준천(峻天)은 길보(吉甫)를 찬미하기 위한 것122)이고, 태산(泰山)의 암암(巖巖)함은 자여(子輿)를 찬미하기 위한 것123)이네. 군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하였지만 또한 선생의 문도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산을 보고 뒤미처 상상함에 광감(曠感)124)한 마음이 없겠는가. 선생께서 사랑하시던 것을 사랑하고 선생께서 마주하시던 것을 마주하면 그 기상과 체덕(體德)이 말씀으로 가르치던 것 보다 친절한 것이 어찌 문하에서 직접 배운 사람들의 뒤에 있겠는가. 군은 그칠 곳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네. 내 비록 병들었지만 장차 한번 행차를 준비하여 그대를 따라 서헌에 올라 늦게 태어나 사모하면서도 우러르지 못한 무궁한 회포를 위안 받으려 하네. 南方之山。或有大於瑞石者。而若其體容端嚴。氣象明秀。如大人長者。高拱凝立。使人仰止而不敢慢焉。則瑞石固第一也。昔我蘆沙先生。最愛此山。少時杖屨及焉。晚年築室相對之地。朝夕贍望。盖天地正大之氣。人與山不異也。鳴乎。昊天不弔。泰山已頹。後生晚進。倀倀靡歸。而可以寓當日瞻仰之餘者。惟是瑞石獨存。顧此賤命。流泊僻左。衰病侵尋。杜門謝世。遂幷與此山而失之。安君公三瑞人也。居山之趾。而對山之面。使其全幅無不呈露於几席庭。石之間。以至起居出入。周旋顧眄。無非是端嚴明秀之象。此軒之所以爲瑞者歟。然崧岳峻天。所以美吉甫也。泰山巖巖。所以贊子輿也。君雖不及先生之門。亦不可謂非先生之徒。則見此山而豈無追想曠感者乎。愛先生之所愛。對先生之所對。其氣象體德。所以親切於言語之外者。豈惟不在於及門者之後而已哉。君可謂知所止矣。吾雖病。將一理巾屐。從子登軒。以慰晚慕靡仰無窮之懷云爾。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이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진산이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웅대해 성산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무진악, 신라 때는 무악, 고려 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무당산·무덕산 등으로도 불렸다.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안군(安君) 공삼(公三) 안규용(安圭容, 1860~1910)을 말한다. 자는 공삼, 호는 서헌(瑞軒),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숭악(崧岳)의……것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고 높은 산악이 치솟아 하늘에 이르도다. 산악이 신을 내려 보와 신을 낳았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 시는 선왕(宣王)의 외숙인 신백(申伯)이 나가 사읍(謝邑)에 봉해지자 윤길보(尹吉甫)가 시(詩)를 지어 그를 전송한 것이다. 길보를 찬미한 것이라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태산(泰山)의……것 《근사록》 권14 〈관성현(觀聖賢)〉에서 정자(程子)가 "공자는 천지와 같고, 안자는 온화한 바람, 상서로운 구름과 같으며, 맹자는 태산에 바위가 중첩하듯 우뚝한 기상이다.[仲尼天地也, 顔子和風慶雲也, 孟子泰山巖巖之氣象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여(子輿)는 맹자의 자이다. 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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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기 省野記 성(性)은 실로 동일하여 사람에게 보존 된 것 또한 그다지 서로 멀지 않다. 그러나 지우(知愚) 현불초(賢不肖)의 나뉨과 길흉화복(吉凶禍福) 성패존망(成敗存亡)의 자취는 천차만별이어서 끝이 없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대개 호리(毫釐)의 즈음에 향배(向背)의 기미는 단지 성찰함과 성찰하지 못함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제순(帝舜)께서는 대성(大聖)인데도 자주 성찰하라는 경계를 받았고,125) 증자(曾子)는 대현(大賢)인데도 삼성(三省)126)의 말이 있었는데, 더구나 그 보다 못한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성(省)'이라는 한 글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날마다 사용하는 제일의 참 진리여서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불가한 것이다.나의 벗 오군(吳君) 영지(永之)127)가 문미에 붙일 만한 한 마디를 청하였다. 영지는 지사(志士)인지라, 그 뜻은 반드시 보통 바라보려는 계획에 있지 않을 것이니, 표시하여 새겨서 항상 바라보는 것의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은 어찌 이것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단목씨(端木氏)의 서(恕)128)와 원성공(元城公)의 성(誠)129)과 더불어 전후로 일자부(一字符)가 되고 종신토록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몽매하여 의리에 의심스러움이 있으면 비록 스스로 성찰하려고 해도 그 방법은 말미암을 것이 없을 것이다. 원컨대 영지는 독서하여 궁구하는 공부를 더욱 더하여 시비(是非)와 진망(眞妄)으로 하여금 구분되는 것이 있게 하면 성찰하는 공부를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심술(心術) 염려(念慮)의 은미함과 용모(容貌) 위의(威儀)의 사이와 사물(事物) 응접(應接)의 즈음에 무엇인들 내가 마땅히 성찰해야할 곳이 아니겠는가. 어느 곳인들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인들 그러하지 않음이 없어 흠뻑 젖어들어 융화되어 날마다 원대함을 궁구하면 문미 끝의 한 '성' 자가 순임금의'누성(屢省)'과 증자의 '삼성(三省)'을 이어서 이 세상에 명성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性固一也。而其存乎人者。亦不甚相遠也。然而知愚賢不肖之分。吉凶禍福成敗存亡之跡。千差萬別。有不可紀極者何歟。蓋其毫釐之際。向背之幾。只在於省不省如何耳。帝舜以大聖而有屢省之戒。曾子以大賢而有三省之語。況其下者乎。然則省一字。是人生日用第一眞詮。而不可斯須去身者也。余友吳君永之。請一語可以鎭楣者。永之志士也。其意必不在於尋常觀瞻之計。所以標銘而爲常目之要者。豈有以加於此者哉。可與端木氏之恕。元城公之誠。前後爲一字符。而有終身用之者矣。然知識蒙蔽。義理有疑。則雖欲自省。其道無由。願永之更加讀書窮索之功。使是非眞妄。有所分落。可以下省之之功。凡心術念慮之微。容貌威儀之間。事物應接之際。夫孰非吾合省之地哉。無處不然。無時不然。沈浸融洽。日究遠大。則安知楣端一省字。不繼屢省三省而有聲於斯世也耶。 제순(帝舜)께서는……받았고 《서경》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제순(帝舜)이 "하늘의 명을 삼갈진댄 때마다 삼가고 기미마다 삼가야 한다.[則天之命, 惟時惟幾.]"라고 하고, 이에 노래하기를, "고굉이 기쁘게 일하면 원수가 흥기하고 백공이 기뻐한다.[股肱喜哉, 元首起哉, 百工熙哉.]"라고 하니, 고요(皐陶)가 "유념하시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일을 일으키시되 법도를 삼가 공경하시며, 일이 이루어지는가를 자주 살펴 공경하소서.[念哉, 率作興事, 愼乃憲, 欽哉, 屢省乃成, 念哉.]"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삼성(三省) 《논어》 〈학이(學而)〉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나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한가? 붕우와 더불어 사귐에 성실하지 못한가?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는가? 이다.[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고 한 것을 말한다. 오군(吳君) 영지(永之) 오장섭(吳長燮, 1862~?)을 말한다. 자는 영지,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단목씨(端木氏)의 서(恕) 단목은 자공(子貢)의 성(姓)이고 이름은 사(賜)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종신토록 행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라고 묻자, 공자가 "서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원성공(元城公)의 성(誠) 원성공은 송(宋)나라의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키는데 그가 원성에 살았으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유안세는 성격이 강직하여 휘종(徽宗) 때 간신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에게 미움을 받고 7번이나 유배를 당하여, 멀리 광주(廣州) 및 광서(廣西) 지방을 전전하였으나 하루도 병든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비결을 묻자 "성실함[誠]뿐이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스승 사마광(司馬光)이 평생토록 마음을 다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요체로 꼽은 덕목이었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宋元學案 卷20 元城學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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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0 卷之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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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遺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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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 참판 행 부산 첨사 오공 유사장 贈兵曹參判行釜山僉使吳公遺事狀 예로부터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있으면, 위로는 국사(國史)에 밝게 실려 있고 아래로는 야사(野史)에 흩어져 나오거나 혹은 쇠와 돌에 새겨져 후대에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붓을 들어 쓴 말은 부회(附會)한 것을 답습하기도 하고 혹 아부하는 것에 가깝다. 금석(金石)이 아무리 견고하다 하더라도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면 연기나 구름처럼 사라져 봄날의 새와 가을날의 곤충처럼 아득하여 소리가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성대한 덕과 지극한 인(仁)은 세상을 두루 덮어준 것이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아래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마음에 부합하여 여항의 궁벽한 곳에 자자하니, 이것이야말로 믿을 만한 사승(史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이며, 오래 갈 수 있는 금석(金石)인 것이다. 우리 고을에, 옛날 오공이란 분이 있었는데 휘가 방한(邦翰)이고 자는 원중(元仲)이며, 보성(寶城) 사람이다. 묘년(妙年, 스물 안짝의 나이)에 죽천 선생(竹川先生) 박공(朴公) 광전(光前)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2)하여 벼슬이 개운 만호(開雲萬戶)를 지내고 부산 첨사(釜山僉使)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에 정예병(精銳兵) 수백 명을 모아 행재소(行在所)3)로 달려갔는데, 임금이 위로의 말을 해 주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시며 영남을 방비하게 하니 공이 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주로 들어갔다. 그때에 같은 고을의 진사 문홍헌(文弘獻)이 최경회(崔慶會)의 종사관으로 있었는데, 공을 추천하여 막좌(幕佐)로 삼고 항상 전략을 세우는데 참여하게 했다. 성이 함락되자 공이 성에 올라가 크게 소리치며 쏘아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자 문홍원과 같은 날 순절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계사년(1593, 선조26) 6월 29일이었다. 그 강개(慷慨)한 절개와 충렬(忠烈)의 의리는 함께 순절한 여러 공들과 그 자취가 같았는데, 다만 명성과 지위가 드러나지 못하고 후손들이 쇠락하여 오랜 세월이 흐름으로 인해 묻혀서 을사년의 녹훈(錄勳)을 받지 못하고 진주(晉州)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공조(公朝)의 사첩(史牒)과 초야의 기문(記聞)에는 모두 전해지지 않았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만 적막하게 몇 마디 말에 그쳤을 뿐이니 어찌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다만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당일의 일들을 말해줌에 눈으로 직접 보는 듯 역력하기에 부녀자나 아이들, 하인이라도 감개(感慨)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들이 없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였다. 아, 당일의 의로운 처신이 만약 명백하고 직절(直截)하지 않으면서 유전(流傳)되고 부회(附會)하여 제동 야인(齊東野人)4)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찌 오래될수록 이처럼 절실하게 되었겠는가. 사승(史乘)은 더러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부로(父老)와 부유(婦孺)는 기망(欺罔)할 수 없고, 금석(金石)도 때로 사그라지는 때가 있지만 병이(秉彝)와 호덕(好德)5)의 본성은 실추시킬 수 없으니, 그 믿을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는 것이 어찌 사승, 금석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을유년(1885, 고종22)에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아울러 병조 참판에 추증하였으니, 또한 공의 여러 사람의 칭찬이 민멸하지 않고 덕을 좋아하는 본성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서는 한 세상의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죽어서는 장홍(臧洪)의 무리들6)과 지하에서 노니니 어찌 장쾌하지 않겠는가. 나는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에 보고 들어서 추앙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였고, 또 명보(名寶)의 구분에 우연히 느낀 바가 있어 삼가 이와 같이 기록한다. 自古人物有聞於世者。上焉則昭載國乘。下焉則散出野史。或刻之金勒之石。以壽其傳。然載筆之言。或襲附會。或沙阿好。金石雖固。而時移世變。烟消雲空。如春鳥秋蟲。漠然無聲也。惟其盛德至仁。徧覆宇宙者尙矣。下至一言一行。合乎匹夫匹婦之心。而藉藉於委巷窮曲之間者。此是可信之史乘。可久之金石也。吾鄕古有吳公諱邦翰。字元仲。 寶城人。妙年受學于竹川先生朴公。光前之門。 登武科。 官開雲萬戶。 移釜山僉使。壬辰之變募精兵數百。赴行在。上慰論之。賜弓矢。使備嶺南公拜命南下。入晉州。時同郡文進士弘獻爲崔公慶會從事官。薦公爲幕佐。常參謀畵。及城陷。公登城大呼。射殺甚多。及矢盡力窮。與文弘獻同日殉節卽。癸巳六月二十九日也。其慷慨之節。精烈之義。與同殉諸公同軌一轍。而但名位不揚。雲仍零替。時久歲移。因以堙沒。未蒙乙巳之錄勳。未配晉州之彰烈。至公朝史牒。草野記聞。皆無傳焉。而於湖南節義錄。止寂寞數語耳。豈不可憾。但鄕父老相傳。說當日事。歷歷如目擊。雖婦孺隷儓。未嘗不感慨歡仰。嘖嘖不容口。嗚呼。當日處義。若不明白直截。而流傳附會。出於齋東野人之口。則豈愈久而愈不忘。至於若是之切耶。史乘或不能盡信。而父老婦孺不可以欺罔。金石或有時銷泐。而秉彛好德。不可以失墜。其可信可久。豈史乘與金石之比耶。及夫乙酉。命旌閭。兼有兵參之。贈。亦可以見其公誦詩之不泯而好德之攸在也。生而扶一世之綱常。死而與臧洪輩遊於地下。豈不快哉。余以鄕里後生。平日瞻聞。偏切追仰之誠。又於名寶之分。偶有所感。謹述之如此云爾。 박공(朴公) 광전(光前)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항(李恒)·유희춘과 함께 호남5현의 한 사람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이 되어 싸웠다. 학문에 있어서 지행의 어느 하나만을 내세울 수는 없으며, 그 둘은 서로 의지하여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지행호진의 관계를 강조했다. 저서로 《죽천집》이 있으며, 퇴계 이황과 학문적 교류를 보여주는 《상퇴계선생문목(上退溪先生問目)》은 그의 깊은 성리학적 식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보성 용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이다. 무과에 급제 오방한은 무예가 뛰어나 경인년(1590, 선조2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무슨 일로 인하여 대궐을 떠나 있을 경우, 임금이 머물고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한 곳을 말한다. 제동 야인(齊東野人) 제 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로, 그 말은 근거가 없는 황당한 이야기여서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에 "이는 군자의 말이 아니다. 제나라 동쪽 시골 사람의 말이다.[此非君子之言, 齊東野人之語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병이(秉彝)와 호덕(好德) 병이는 하늘이 부여한 떳떳한 본성을 말한다. 호덕은 사람이면 모두 천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다. 《시경》 〈증민(烝民)〉에 "사람이 떳떳한 본성을 가진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民之秉彝, 好是懿德.]" 하였다. 장홍(臧洪)의 무리들 함께 죽은 이들을 뜻한다. 장홍은 삼국 시대 사람으로 자가 자원(子源)이다. 그가 원소(袁紹)에게 생포되어 죽을 때 평소 장홍과 동향(同鄕) 사람으로 장홍을 흠모하던 진용(陳容)이 원소에게 장홍을 죽이는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이에 좌우의 사람들이 진용을 끌어내면서 "그대는 장홍의 무리도 아닌데 공연히 이와 같은 말을 하는가." 하니, 진용이 "대저 인의(仁義)란 어찌 일정한 기준이 있겠는가. 이를 실천하면 군자요 이를 저버리면 소인이다. 오늘 차라리 장홍과 같은 날 죽을지언정 장군과 같은 날 살지는 않겠소."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臧洪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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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가선대부 호조참의 매죽헌 박공 유사장 贈嘉善大夫戶曹參議梅竹軒朴公遺事狀 공의 성은 박씨이며 휘는 성우(成祐)이고, 자는 화언(華彦)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대제학(大提學) 충의공(忠義公) 휘 첨(瞻)이 그의 비조(鼻祖)이다. 휘가 희중(煕中)이며 호가 위남(葦南)에 이르러서는 도덕과 문장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는데, 사신으로서 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다. 또 중국에 사신으로 갔으며,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으므로 자손들이 이를 인하여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문학과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다. 증조는 휘가 경호(慶顥)이며, 조부는 휘가 진해(振海), 호가 겸암(兼巖)으로 행의가 세상에 드러났다. 아버지는 휘가 동수(東壽)이며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병절(秉節)의 따님으로, 영조 갑진년(1724, 영조1)에 보성 마흘치(馬屹峙)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뛰어나고 재능이 영특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시험을 좋아하지 않아 개연히 자기를 위한 학문에 뜻을 두었고, 책 상자를 짊어지고 폐백을 갖추어 섬촌(蟾村)의 민 선생 우수(閔先生遇洙)7)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함양(涵養)과 치지(致知)를 안팎으로 서로 닦고 뜻을 굳게 지키고 힘써 행하여 동과 정이 서로 의지하였으며, 한 치를 얻으면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한 자를 지켜 일찍이 하루라도 놓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앎이 더욱 정교하고 학업이 더욱 치밀해져 한 때의 선비들이 모두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정조 신축년(1781, 정조5) 4월 21일에 생을 마쳤으며, 능주 풍류치(風流峙)의 노상(路上) 병좌(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제범(濟範)의 따님으로 3남을 낳았는데, 중혁(重赫)·재혁(再赫)·명혁(命赫)이다. 현손(玄孫)인 태근(泰根)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나는 병으로 문필을 폐하여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다만 향리의 후생으로 선진(先進)을 사모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으므로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해서 대략 다듬고 윤색하였다. 公姓朴氏。諱成祐。字華彦。號梅竹軒。大提學忠義公諱瞻。其鼻祖也。至諱煕中號葦南道德文章。冠冕一世。奉使日本還。又使上國。封珍原君。子孫因貫焉。自是文學忠孝。世代箸聞。曾祖諱慶顥。祖諱振海號兼巖。行義著世。考諱東壽 贈軍資監正。妣興德張氏秉節女。英廟甲辰。生公于寶城馬屹峙第天稟挻異。才性穎悟。自少小不屑功令。慨然有志於爲己之學。負笈齎贄受業於蟾村閔先生遇洙之門。涵養致知。內外交進。持守力行。動靜互資。得寸守寸。得尺守尺。未嘗有一日之放過。至於晩年。知愈精而業愈密。一時士類。無不倚重焉。正廟辛丑四月二十一日考終。葬綾州風流峙路上丙坐原。配驪興閔氏濟範女。生三男。重赫再赫命赫。玄孫泰根奉家狀。謁余文爲不朽計。余病廢鉛槧。不敢承膺。而但以鄕里後生。慕仰先進之意。有倍餘人。謹据家狀。略爲之修潤云爾。 민 선생 우수(閔先生遇洙) 1694~175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庵)이다. 김창협(金昌協)ㆍ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 이후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영조 대에 등용되어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저서에 《정암집(貞菴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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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재기 觴山齋記 천관산(天冠山)32)은 본디 남쪽 지방의 명승지이고, 상산(觴山)은 그 산이 품고 있는 곳 중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강과 산이 도와 분발하게 해서 예로부터 많은 위인(偉人)과 일사(逸士)들이 이따금 그 사이에서 머물러 지냈으니,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린 마을의 고사에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죽은(竹隱) 위공 계창(魏公啓昌)은 산 아래에 사는 원로 대가(元老大家)로, 은거하며 의를 행하여 풍도와 자태가 뛰어났다. 하루는 산기슭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만년에 공부하는 장소로 삼고, 겸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는데, 대체로 달빛과 바람이 모이고, 산과 물이 합쳐져서 집의 기운이 맑고 상쾌하며, 창문에 스며드는 기운이 밝고 깨끗하였으니, 참으로 여기에서 웃고 이야기하며 거처하고 오르내릴 만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정성을 다하고 바쁘게 일한 것이 이미 본받을 만한 데 이른 것은 산수나 경치에 빠지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즐기기 위한 계책도 아니며, 또 문장을 지어 벼슬길을 구하기 위한 계책도 아니다. 단지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마음과 본성을 다스리고 길러서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 이것이 정성을 다하며 그치지 않았던 뜻이다.선성(先聖 공자)이 말하기를, "무릇 효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고, 부모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33) 하였으니, 이 집에서 노니는 자들이 각기 힘쓴다면 어찌 오늘날 도와 분발하게 하는 것이 지난날만 못할 줄 알겠는가. 天冠固南方勝區。觴山其懷抱中最勝處也。江山助發。自古多偉人逸士。往往盤旋於其間。輿地勝覽。洞中古事。班班可考。竹隱魏公啓昌。山下老宿也。隱居行義。風韻偉然。一日就山之麓。結構數椽。爲晩年藏修之所。兼爲諸子孫肄業之方。蓋其風月之會聚。山水之統合。軒宇之蕭灑。窓牖之明淨。信可以爰笑爰語。攸芋攸躋。雖然血心拮据。旣底于法者。非爲山水景物役也。又非文酒遊衍計也。又非纂組干進計也。只是講明義理。治心養性。以爲修身齊家之地。此其所以惓惓不已之意。先聖有言曰。夫孝者。善繼人之志。善述人之事。遊此室者。其各勉焉。安知今日之助發不如前日也。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무릇……것이다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효를 '달효(達孝)'라고 규정하며 말한 것으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9장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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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하기 竹下記 죽하옹(竹下翁)은 내가 약관(弱冠) 시절에 교분을 맺었던 옛 친구이다. 임술년(1862) 봄에 서울에서 만났고, 이로 인하여 서로 따르며 여러 날 즐겁게 정담을 나누었는데, 이윽고 각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 만나지 못한 지 40년이 되었다. 임인년(1902) 가을에 옹이 일 때문에 영귀정(詠歸亭)에 와서 만났는데, 하얗게 센 귀밑머리와 수염이 다시 옛적에 마주했던 모습이 아닌지라 슬픔과 위로의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가 떠나면서 죽하기(竹下記)를 부탁하였는데, 모르겠지만, 옹의 뜻은 대나무에서 무엇을 취했을까?예전 모두 묘령(妙齡 스무살 안팎)의 청춘으로 태평무사한 때에 한묵(翰墨)과 문예(文藝)의 장에서 함께 상종했던 것이 어제의 일처럼 역력한데 그 사이 시속이 변한 지난 세월 동안 겪어온 풍상이 몇 번이겠으며, 상전벽해가 몇 번이나 일어났겠는가? 옹은 풍도와 기상이 시종 엄격하여 병들고 쇠약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병을 무릅쓰고 도보로 다니면서 무고를 밝히고 도를 지키는 의론을 창도하였으니, 이른바 '세한후조(歲寒後凋)34)'라는 말이 이를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옹의 뜻은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바로 나이와 정력이 더욱 들어가고 쇠약해질수록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마음이 바뀌기 쉽고, 세상의 변고가 끝이 없을수록 명예와 절개를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때에 이러한 마음이 단청처럼 밝게 빛나니, 이 때문에 차군(此君)35)에 붙여서 마지막 자정(自靖)의 도36)로 여겼을 것이다. 이전에 이미 그러함이 이와 같았다면 이후에도 장차 그러할 것임을 따라서 알 수 있는데, 더욱이 절차탁마하여 날로 대나무와 같은 푸른 기상으로 나아가고, 또 위 무공(衛武公)37)처럼 늙어서도 나태하지 않는 자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나는 가죽나무나 참나무처럼 졸렬한 품질이어서 비록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을지라도 단풍나무에 뻗어 있는 덩굴이나 겨우살이처럼 남아있는 풍교에 의지하여 스스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데, 모르겠지만 기꺼이 허락해 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竹下翁余弱冠舊契也。壬戌春。邂逅漢師。因以追從。數日款洽。旣而各還其家。不相見爲四十年。壬寅秋。翁以事來會于詠歸亭。皤然鬚髮。非復昔時相對。悲慰有不勝情。其發也。以竹下記託焉。未知翁之意何取乎竹也。曩也。俱以靑春妙齡。在昇平無事之時。與之相從於翰墨文藝之場。歷歷如昨日。而時變世劫之經過於其間者。爲幾番風霜。幾番滄桑也。翁風裁標致。終始彌礪。至於癃疾衰境。力疾徒步。以倡辨誣衛道之論。所謂歲寒後凋。非是之謂歟。但翁之意。則有不在是。正以年力愈邁。宿心易替。世變無窮。名節難保。此日此心。炳炳如丹。所以寓諸此君。視爲究竟自靖之道耳。已然於前者如是。則將然於後者。從可知矣。況切磋琢磨。日臻乎綠猗。又有如衛武公老而不怠者乎。余樗櫟劣品也雖不足惜而願得庇倚餘風以自植之如蔦蘿之施楓。未知以爲肯可否耶。 세한후조(歲寒後凋) 날씨가 추워진 뒤에 시든다는 뜻으로, 군자의 절개는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알 수 있음을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았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차군(此君) 대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남의 빈 집에 잠시 거처할 동안에도 사람들에게 대나무를 빨리 심도록 다그쳤는데, 그 이유를 묻자 "하루라도 이 군이 없을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하였다. 자정(自靖)의 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 미자에게 "자신의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사람마다 선왕에게 그 뜻을 바칠지니, 나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위 무공(衛武公) 춘추 시대에 위(衛)나라의 제후로, 무공은 그의 시호이다. 그는 나이 95세 때에 조정에 포고문을 내려 "모든 벼슬하는 사람은 내가 늙었다고 여기지 말고 번갈아 나를 규간(規諫)하라."고 하면서 거처하는 곳마다 나태함을 경계하는 말을 붙였고, 또 〈억(抑)〉 시를 지어 날마다 곁에서 외우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였다고 한다. 《詩經 大雅 抑》 《國語 楚語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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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헌기 愚軒記 사람들은 항상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말하고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말하는데, 이때의 어리석음은 현명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에 대한 일컬음이다. 공부자(孔夫子)가 안연(顔淵)을 일컬어 어리석다고 하였고38), 또 영무자(寗武子)를 일컬어 어리석다고 하였는데39), 이때의 어리석음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에 대한 일컬음이다.우헌 홍공(愚軒洪公)은 천태산(天台山)40)의 작약봉(芍藥) 속에 은거하여 고요하고 말없이 지내면서 세상에 대해서는 경영하는 것이 적었고, 사람에 대해서는 맞이하여 만나는 것이 적었으며, 일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적었다. 오직 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것과 시를 짓고 예를 익히며 글을 짓는 것을 자신과 가족, 자손을 위한 계책으로 삼고서 명성이나 권세, 이익, 영달에 대해서는 더욱 담담하였다.기교를 부리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고, 통달한 자의 입장에서 봐도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음은 현명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을 일컫는 것인가? 아니면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을 일컫는 것인가? 오직 말을 아는 자만이 이를 알 것이니, 굳이 애써 변별하고 해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공의 손자 병희(秉憙)가 나와 여러 해 종유하였기에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人有恒言。曰賢愚曰智愚。此愚是不賢不智之稱也。孔夫子稱顔淵愚。又稱寗武子愚。此愚是爲賢爲智之稱也.愚軒洪公。隱於天台之芍藥。恬靜簡黙。於世少營爲。於人少容接。於事少表襮。惟以耕稼漁樵詩禮文墨。爲身家子孫計。而於聲勢利達。尤泊如也。以奇巧者觀之。則可謂愚矣。以通達者觀之。則可謂愚矣。然則是愚也。乃不賢不智之稱耶。抑爲賢爲智之稱耶。惟知言者知之。不必苦苦辨解也。公抱秉憙。從遊有年。請爲之記。 공부자(孔夫子)가……일컬었고 안연은 공자의 제자인데, 공자가 일찍이 안연에 대해 말기를, "내가 안회와 함께 온종일 이야기를 하였으나 내 말을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인 듯하더니, 그가 물러간 뒤에 그 사생활을 살펴보았는데 그대로 행하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도다.[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하였다. 《論語 爲政》 영무자(寗武子)를……일컬었는데 영무자는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大夫)로, 문공(文公)이 도로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성공(成公)이 무도함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나아가 나라를 잃을 위험에서 구제하였는데, 공자가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는 따라갈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따라갈 수 없다.[甯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하였다. 《論語 公冶長》 천태산(天台山)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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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에서 밤마다 두견새 소리를 듣다 山堂 每夜聞鵑 가엾어라 한 마리 두견새는 어디에서 와서 憐爾何來一鵑鳥밤마다 참으로 은자의 곁에서 운단 말인가 夜夜正傍幽人啼봄이 다 지나고 긴 여름이 되었는데 過盡三春屇長夏하룻밤도 울음 그친 것을 보지 못했다오 未見或闕一夜兮울음소리 참으로 괴로워 끊겼다 이어지니 聲聲正苦斷復續사람의 심장을 흔들어 더욱 서글프구나 攪人心腸轉悲悽달 지고 밤 깊어도 울음 그치지 않으니 月落更深啼未已나는 잠 못 이룬 채 닭 우는 새벽 되었네 我不成眠到唱鷄새도 수심 겹고 사람도 수심 겨우니 禽是愁禽人愁人빈산 깊은 숲에서 그저 함께 산다오 空山深林聊同棲유유상종은 이치상 본래 그러한 법 以類相聚理固然나의 고적함 달래줌은 처자식보다 낫구나 慰我孤寂勝子妻그저 밤에 괴로운 울음 줄이기를 바랄 뿐 但願減却夜苦啼막다른 길에서 좋은 벗과 보는 것이 좋으니 好是窮途良友睇이 몸 푸른 도포 차림으로 절하지 못하나 縱不此身靑袍拜어찌 남이 황금 탄환을 휴대하도록 두랴337) 豈容別人金彈携아아 嗟呼세간의 득실을 어찌 따질 것 있으랴 世間得失何足較촉나라의 지난 일338) 뜬구름처럼 희미하네 蜀國往事浮雲迷다시 시운이 있어 피할 수 없다면 更有時運逃未得당시에 사향노루가 배꼽 깨물 듯339)해서는 안 되리 不須當年麝噬臍나 또한 천만 가지 일을 겪었지만 我亦閱歷千萬事모두 아무것도 없어 잡을 수 없다오 幷皆烏有不足提봄바람 불고 가을 달 비치는 멋진 산수에서 春風秋月好山水그대와 나 동쪽 서쪽 오가며 여유롭게 노니세 爾我優遊東復西 憐爾何來一鵑鳥, 夜夜正傍幽人啼?過盡三春屇長夏, 未見或闕一夜兮.聲聲正苦斷復續, 攪人心腸轉悲悽.月落更深啼未已, 我不成眠到唱鷄.禽是愁禽人愁人, 空山深林聊同棲.以類相聚理固然, 慰我孤寂勝子妻.但願減却夜苦啼, 好是窮途良友睇.縱不此身靑袍拜, 豈容別人金彈携.嗟呼世間得失何足較? 蜀國往事浮雲迷.更有時運逃未得, 不須當年麝噬臍.我亦閱歷千萬事, 幷皆烏有不足提.春風秋月好山水, 爾我優遊東復西. 이……두랴 두보(杜甫)처럼 두견새를 위해 재배하는 시를 지을 수 없지만, 남이 두견새를 잡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두보가 일찍이 촉제(蜀帝)의 넋이 두견(杜鵑)으로 화(化)했다는 전설에 의거하여 두견행(杜鵑行)이란 시를 지어서, 외로이 피를 토하며 울어대는 두견새의 정상을 간절하게 읊었으므로, 황정견(黃庭堅)의 〈제마애비(題磨崖碑)〉에 두견행의 의미를 들어, "신 원결은 용릉행 이삼 책의 시를 읊었고, 신 두보는 두견에 재배하는 시를 지었었네.[臣結舂陵二三策, 臣甫杜鵑再拜詩.]"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前集 卷5》 촉(蜀)나라의 지난 일 전설에 촉나라의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재상 별령(鱉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는 원통함과 한을 품고 죽었는데, 그 후 두견새 한 마리가 날아와 궁궐 앞에서 슬피 울자, 촉나라 사람들이 이 새를 망제의 혼으로 여겨 망제혼이라 하였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166》 사향노루가……듯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사향노루가 배꼽에 있는 향 주머니 때문에 사람에게 잡혔다면서 아무리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6년 조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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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은 오공 유사장 溪隱吳公遺事狀 공의 성은 오씨(吳氏), 휘는 치상(致祥), 자는 성로(聖老), 호는 계은(溪隱)이며, 그 선조는 보성사람이다. 고려조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이 그의 시조이다. 6대가 지나 휘 현필(賢弼)은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고, 휘 안주(安宙)는 호가 봉은재(鳳隱齋)로 율곡 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낳은 휘 방한(邦翰, 1574~1593)은 죽천(竹川) 박선생(朴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임진년 전란에 진주(晉州)에서 용맹을 떨쳐15)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휘 진찰(震札)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후유(厚有)는 호가 석계(石溪)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장원(章元)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석윤(錫胤)이며, 생모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필연(必鍊)의 따님으로 순조 기사년(1809, 순조9) 11월 8일에 능주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기량이 크고 넓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다. 9세에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이 지나쳐 거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는데, 그 대인(大人)이 생명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매번 위로하여 억누르니, 이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곡을 하지 못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공이 몸소 집안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여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고 여가에 글공부에 힘써 정해놓은 과정(課程)을 폐하지 않았다. 소후모(所後母, 후사로 들어간 집의 양어머니) 김씨는 성품이 준엄하여 화합하기 어려웠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순종하니 마침내 기뻐하는 데16)에 이르렀다. 백씨(伯氏) 지상(志祥)과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책을 물려받아 공부하였으며17) 서로 우애함이 매우 돈독하여 재산과 집물(什物, 집안 살림의 온갖 세간)이 있으나 없으나 공유하였다. 매부(妹夫) 김씨 집안이 공포(公逋)18)가 너무 많았으므로 공은 어버이께 근심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남몰래 자기 땅을 팔아 그 체납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밭과 집을 마련해주어 그들이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하도록 하고 함께 이웃하여 살았다. 두 집안에 화재(火災)를 당한 자가 있거든 공이 물력(物力)을 내어 집을 지어주고 흩어져 사는 일이 없게 하였다. 남에게 돈을 내어주었다가 여러 해 동안 받지 못한 것은 공이 대인(大人)에게 아뢰어 그 문서를 불태웠다. 전후로 상을 당하자 애훼(哀毁)함이 예제(禮制)에 지나쳐 정리(情理)로나 예법(禮法)으로나 모두 지극하였다. 글을 읽다가 격언과 중요한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치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못하면 곧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몸가짐이 법도가 있고 집안을 다스림에 예가 있으며, 사람을 접함에 의(儀)가 있고, 일을 처리함에 방도가 있어 모든 것을 시행함에 환하게 조리를 갖추었다.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고 깊이 스스로 숨어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권문(權門)에 출입하지도 않았다. 오직 경서를 궁리하고 이치를 연구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닦는 것을 자신과 집안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다. 부춘(富春)의 칠송리(七松里)에 집을 짓고 계은(溪隱)이라 자호(自號)하고는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연하에 유유자적하면서 초연히 세상을 벗어날 기상이 있었다. 일찍이 고산 임공(鼓山任公)19)의 문하에 한 번 찾아가서 여러 날을 강론하고 토론하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장수(長壽)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곧이어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 무인년 8월 16일에 생을 마쳤으며, 단양면(丹陽面) 다년부(多年富)20) 마을 뒤 기슭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합봉하였다. 부인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경우(警禹)의 따님으로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하였다.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태(壽泰)·수화(壽華)·수형(壽衡)·수영(壽泳)·수기(壽奇)이며, 딸은 대구 배달진(裴達鎭)과 파평 윤씨(坡平尹氏) 자성(滋城)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몽섭(蒙燮)이고, 둘째 집의 손자는 장섭(長燮)과 덕섭(德燮)이며, 셋째 집의 손자는 명섭(命燮)과 경섭(景燮)이고, 넷째 집의 손자는 문섭(文燮)과 인섭(仁燮)이며, 다섯째 집의 손자는 원섭(元燮)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효우(孝友)의 행실과 삼가고 성실한 풍도가 향리 인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송(傳誦)되었으니 지금 장섭(長燮)의 청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公姓吳氏。諱致祥。字聖老。號溪隱。其先寶城人。麗朝文襄公諱延寵。其始祖也。六傳而諱賢弼。封寶城君。諱安宙號鳳隱齋。受學于栗谷李先生之門。贈吏曹參判。是生諱邦翰。受學于竹川朴先生之門壬辰之後。立憧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七世高祖。諱震花。贈戶曹參議。祖諱垕有號石溪僉樞。贈戶曹參判。考諱錫永號竹湖。贈戶曹參判。妣光山金氏章元女。生考諱錫。妣咸陽朴氏必煉女。純祖己巳十一月八日。生公于綾之七松里。姿相粹美。器量寬弘。幼有至性。事親克孝。九歲遭生庭內艱。擗踊幾絶。其大人慮其傷生。每慰抑之。是以不敢任情號哭。家甚貧。公躬幹凡務。以供甘旨。餘力讀書。不廢課程。所後母金氏。性峻難諧.至誠承順。竟底豫。與伯氏志祥。同案連業。友愛甚篤。財産什物。有無共之。妹夫金氏家。公逋甚多。公恐貽親憂。潛賣已土以脫其逋。又備給田廬。使之安業同隣。二家有被火災者。公出力營構。俾無離散。出錢於人而積年未捧者。公稟於大人。焚其券。遭前後艱。哀毁過制。情文兩至。讀書至有格言要誨。擊節嗟賞曰。若不如此。便不成人。平居持身有法。治家有禮。接人有儀。處事有方。以至凡百施爲。莫不粲然有條。杜門斂迹。深自鞱晦。不見要人。不到要門。惟以窮經硏理。修身勅行。爲身家究竟計。築室於富春之七松。自號溪隱。逍遙文酒。徜徉煙霞。超然有遺世之象。嘗一造鼓山任公之門。講討數日而歸。以壽除僉樞。尋陞同知。戊寅八月十六日考終。契丹陽面多年富村後麓巽坐原。合封。配豐山洪氏警禹女。甚得婦道。生五男二女。男壽泰壽華壽衡壽泳壽奇。女適大邱裴達。鎭坡平尹滋城。長房孫蒙燮。二房孫長燮德燮。三房孫命燮。景燮四房孫文燮仁燮。五房孫元燮。曾孫以下不盡錄。嗚呼。公孝友之行。謹慤之風。爲鄕里人士所傳誦。今於長燮之請。有不敢辭, 용맹을 떨쳤고 원문의 '입근(立慬)'은 절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기뻐하는 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순 임금이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자 고수가 기뻐하게 되었고,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가 교화되었으며,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의 부자의 도가 정해졌으니, 이것을 일러 대효라고 하는 것이다.[舜盡事親之道而瞽瞍底豫, 瞽瞍底豫而天下化, 瞽瞍底豫而天下之爲父子者定, 此之謂大孝.]"라고 하였다. 같은……공부하였으며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 〈형제(兄弟)〉에 "자식들이 어릴 적에, 부모는 왼쪽에서 손잡고 오른쪽에서 끌며, 앞으로는 품에 안고 뒤로는 소매를 잡는다. 밥은 같은 밥상에서 먹고, 옷은 물려 입으며, 공부는 형이 보던 책을 그대로 쓰고, 놀 때는 같은 방소로 함께 간다.[方其幼也, 父母左提右挈, 前襟後裾. 食則同案, 衣則傳服, 學則連業, 遊則共方.]"라는 말이 나온다. 공포(公逋) 국가에 빚을 지거나 또는 국가의 돈을 축내는 것을 말한다. 고산 임공(鼓山任公)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ㆍ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학자로서 이름이 알려지자 1858년(철종9)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74년(고종11) 대사헌이 되고 이어 좨주(祭酒)가 되었다. 천주학을 극력 배격했다. 저서에는 《고산문집(鼓山文集)》ㆍ《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단양면(丹陽面) 다년부(多年富) 단양마을은 원래 템부라 부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다년부(多年富)라고 했으며 한편으로 점촌이라 하였는데 단양마을의 원래의 뜻은 도자기를 굽던곳을 불무골 또는 불무실이라 하는데 바로 불무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불무 = 붉다 = 단(丹)」, 「골, 또는 실자는 마을을 의미하는 양(陽)자를 각각 취하여 단양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세분하면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된다. 1896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전라남도 능주군 단양면이었으나, 1913년 능주군의 폐지로 화순군 단양면,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변경에 의해 화순군 춘양면(春陽面) 양곡리(陽谷里)(장곡리, 단양리, 해하리)로 편입되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성균관 대사성 신재 조공 유사장 成均館大司成愼齋趙公遺事狀, 공의 성은 조씨(趙氏), 휘는 림(琳), 자는 백원(伯瑗), 호는 신재(愼齋)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고려 평장사 휘 조정(趙鼎)21)이 족보에 오른 시조가 된다. 덕곡 선생(德谷先生) 휘 승숙(承肅)이 그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종례(從禮), 호가 율정(栗亭)으로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 염(琰)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경서에 밝고 행실이 조촐하여 세상에 추중을 받았다. 아버지는 휘가 계조(繼祖)이며, 세상에 풍암처사(楓庵處士)라고 불리었고 힘써 배우고 독실히 행하며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공이 태어난 간지(干支)는 산일(散佚)되어 전하지 않는다. 빼어나고 맑으며 총명한 자질로 시례(詩禮)가 있고 법도로 보필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조예가 있고 자라서는 덕이 있어 우뚝하게 자신을 세움이 뭇사람들과 크게 달랐다.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17)에 진사가 되고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병과(丙科)에 뽑혀 양덕(陽德)·흥해(興海)·무주(茂朱)의 현감을 지냈으며 재차 청성(靑城)을 맡았고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관직에 임하여서는 집안일처럼 처리하였고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청송(靑松)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한가로이 지냈다. 일찍이 시(詩)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바위 곁의 초가 정자 신령한 골짜기에 있는데 (巖上茅亭洞壑靈)정자에 올라보니 비와도 좋고 개어도 좋아라 (登臨宜雨又宜晴)고향의 형승은 노년을 보낼만하니 (故國形勝堪終老)부질없이 홍진 속을 달려 온 이내 몸 우습구나 (浪走紅鹿笑此生)라고 하였다. 하서(河西) 김선생(金先生, 김인후(金麟厚))과 도의의 교분을 맺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강론하고 연마하기를 계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갑오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나 남원 견소곡(見所谷) 풍산(楓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제주 고씨(濟州高氏) 정랑(正郞) 명손(命孫)의 따님이다. 계배(系配)는 동복 오씨(同福吳氏) 원동(元童)의 따님으로 4남을 낳았는데, 아들 희광(希匡)은 참봉을 지냈으며 이름이 문행록(文行錄)에 실렸고, 희정(希鼎)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냈다. 희문(希文)은 교리를 지냈고 호가 월계(月溪)이며, 희무(希武)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덕곡의 학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서 연원하였는데, 도덕과 절의가 우뚝하고 밝아서 끼친 교화와 남긴 공렬이 공에게까지 끊이지 않았다. 공은 풍암처사(楓庵處士)가 아버지가 되고 하서 선생이 벗이 되며, 아들로는 월계공(月溪公) 사형제(四兄弟)가 있는데, 어질었다. 그 성대한 만남과 계술(繼述)의 아름다움이 백세(百世)에 전해졌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손이 영락(零落)하여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행실이 모두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5대손 익제(翼濟)가 가장을 받들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해 주길 청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公姓趙氏。諱琳。字伯瑗。號愼齋。貫咸安。高麗平章事諱鼎。爲登講之祖。德谷先生諱承肅。其高祖也。曾祖諱從禮號栗亭直提學。祖諱琰參奉。明經潔行。爲世推重。考諱繼祖。世稱楓庵處士。力學篤行。隱居不仕。公寅降干支。逸而不傳。以秀爽穎悟之資。生於詩禮法拂之家。幼而有造。長而有德。靳然樹立。大異衆人。成化丙午進士。正德癸酉擢丙科。歷宰陽德興海茂朱。再莅靑城。至成均館大司成。處官如家。視民如子。淸謹廉眞。蔚有聲績。靑松民立詞享之。晩年致仕還鄕。杜門養閒。嘗有詩曰。巖上茅亭洞堅靈。登臨宜雨。又宜晴。故國形勝堪終老。浪走紅塵笑此生。可以見其志矣。與河西金先生爲道義交。往復講磨。源源。不絶。甲午十一月十三日卒。葬南原見所谷楓山癸坐原。配濟州高氏正郞命孫女。系配同福吳氏元童女。四男。希匡參奉。名載文行錄。希鼎承仕郞。希文校理號月溪。希武從仕郞。孫以下不錄。嗚呼德谷之學。淵源圃隱。而道德節義。磊落光明。遺風餘烈至於公而未斬矣。公以楓庵處士爲父。河西先生爲友。在子而有月溪公四昆季之賢。會遇之盛。繼述之美。流傳百世。曷不偉然。子孫零替。其嘉言善行。不盡傳於世。是爲可慨也。已十五代孫翼濟奉家狀。託以不朽。牢辭不獲, 조정(趙鼎) 함안 조씨 시조로, 자(字)는 우보(禹寶)이며, 호는 모당(慕唐)이다. 본래 당나라 사람이었는데, 신라 경애왕(924~927) 때 두 아우인 부(釜)와 당(鐺)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권행(權幸)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陜川)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931년(태조14)에 고창성(古昌城)에서 후백제 진훤군을 대파하여 동경주현(東京州縣)을 공략하여 장악하였으며 고려 통일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咸安)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 병조참판 행 군자감 주부 백담 최공 유사장 贈兵曹參判行軍資監主簿柏潭崔公遺事狀 공의 성은 최(崔), 휘는 여호(汝箎), 자는 대숙(台叔), 호는 백담(柏潭)으로 낭주(朗州) 사람이다. 휘 지몽(知夢)이라는 분은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시호가 민휴(敏休)인데, 그의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는 우리 조정에 군기소감(軍器小監)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며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여러 세대를 내려와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이며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치호(致湖)는 호가 상덕재(尙德齋)이며 좌승지를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결(潔)로 참봉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 경남(慶男)으로 판관을 지냈고, 아버지 정언(廷彦)은 별제(別提)를 지냈다. 어머니는 장흥 위씨(長興魏氏) 형(衡)의 따님이다. 생부는 휘가 정준(廷俊)이며, 생모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희열(希烈)의 따님이다. 사나운 호랑이가 뜰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으니 바로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 1월 5일이다. 공은 풍골(風骨)이 빼어나고 지기(志氣)가 크고 넓어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에 대열을 나누고 대오를 지어 포진(布陣)과 행군(行軍)의 의식을 행하였는데 뭇 아이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 서당에 나아가 글을 읽고 남은 날에는 병략(兵略)을 함께 익혔는데, 일찍이 《한서(漢書)》를 읽다가 '마혁과시(馬革裹尸)'22)에 이르러서는 책상을 치고 탄식하기를,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붓을 던지고 무과에 합격하였다. 시험에 임하여 병서를 강론하고 책략을 변론하니 여러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였는데, 감독관이 높은 점수에 뽑아 두며 말하기를, "이번 시험에서 간성(干城)의 재목을 얻었구나."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에 금나라 사람들이 의주를 함락하자 거가(車駕)가 강도(江都)로 거둥하였다. 공은 주부(主簿)로 원사(元師) 남이흥(南以興)23)을 따라 안주(安州)에 이르러 백상루(百祥樓)24) 아래에서 진을 치고 앞장서 공격하여 적을 무수히 살상하자 적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물러났는데, 얼마 뒤 적들이 병력을 총동원해서 이르자, 공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굴복하지 않고 전사(戰死)하였다. 다만 종과 말만이 그 집으로 돌아와서 지동(枝洞) 뒤 기슭 계좌(癸坐)의 언덕에 의리장(衣履葬)25)하였다. 공훈을 기록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일이 「정묘록(丁卯錄)」과 강화충절비(江華忠節碑)에 실렸다. 부인은 남원 여씨(南原盧氏) 사양(士良)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사 상률(尙嵂)과 참봉 상업(尙嶪), 문과 급제한 상헌(尙巘)과 생원 상억(尙嶷)이며, 딸은 이환(李晥)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한제(漢齊)이고, 둘째 집의 손자는 한우(漢宇), 한주(漢宙)이며, 셋째 집의 손자 한진(漢軫)은 효행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넷째 집의 손자는 참봉을 지낸 한익(漢翼)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금나라가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중국을 삼킬 뜻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먼저 병력을 동원한 것은 우리나라가 그 허점을 틈타 그 뒤를 밟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당시 의주(義州)의 전투에서 김완(金菀)의 순국이 없고, 안주의 전투에서 만약 공과 김준(金浚)26) 등 여러 현인들이 순절한 일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대한 치욕은 굳이 연장되어 병자년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27) 명실(明室)의 옥사(屋社)의 화(禍)28)는 굳이 갑신년29)에 멀리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 성취한 바는 한 시대와 한 나라의 공이 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의리가 또한 백세(百世)에 찬란히 빛나 길이 전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후손이 영락하여 유적이 산일되었으니 이것이 개탄스럽다. 10세손 동민(東珉)과 동섭(東燮)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행장을 부탁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公姓崔。諱汝箎字台叔。號柏潭。朗州人有諱知夢封東萊侯謚敏休。其鼻祖也。至諱安雨。我朝軍器小監。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累傳諱湫號蘭溪戶曺參判。生諱致湖號尙德齋在左承旨。公之高祖也。曾祖諱潔參奉。祖諱慶男判官。考諱廷彦別提。妣長興魏氏衡女。生考諱廷俊。妣淸州韓氏希烈女。夢猛虎入庭而産公。卽萬曆壬辰正月五日也。風骨岐嶷。志氣磊落。幼與兒戱。分隊作伍。爲布陣行軍之儀。群兒莫敢違其令。就塾讀書。餘日兼習兵略。嘗讀漢史。至馬革裹尸。擊案而歎曰。大丈夫當如是。累擧不中。投筆登榜。臨試講兵書。辨論籌略。諸人莫及。考官擢置高第曰。今試得干城之才。甲子除訓鍊院奉事。丁卯金人陷義州。車駕幸江都。公以主簿從元師南以興至興安州。陳于百祥樓下。挺身奮擊。殺傷無數。賊披靡而退。己而賊悉衆而至。公力戰不屈而死。只有奴與馬歸其家。以衣履葬于枝洞後麓癸坐原。錄勳贈兵曹參判。事載丁卯錄及江華忠節碑。配南原盧氏士良女。生四男一女。尙嵂進士。尙嶪參奉。尙巘文科。尙嶷生員。女適李晥。長房孫漢齊。二房孫漢宇漢宙。三房孫漢軫。孝行著世。四房孫漢翼參奉。曾玄以下不錄。金氏之在瀋陽也。志在於中國而先加兵於我國者。恐我國之乘其虛而躡其後。當時義州之戰。者無金菀之立憧。安州之役。若無公及金浚諸賢之死節。則我國南漢之辱。不必延在丙子。明室屋社之禍。不必遠在甲申。然則公之所就。非止爲一時一國之功。其義又足以輝映百世而不朽也。雲仍零替。遺蹟散逸。是爲可慨也。十世孫東珉東燮持家狀。謁狀行之文。牢辭不獲云, 마혁과시(馬革裹尸) '말가죽에 시체를 싼다'라는 뜻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서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장군 마원(馬援)이 "남아는 마땅히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죽어서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야지 어찌 아녀자의 손에 죽을쏘냐.[男兒當以馬革裹尸還葬 安可死於兒女手乎"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54 馬援列傳》 남이흥(南以興) 1576~16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이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 나가 후금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때 후금의 주력부대 3만여 명이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이르렀다. 이에 목사 김준(金浚),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강계 부사 이상안(李尙安) 등을 독려하여 용전하다가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백상루(百祥樓) 평안도 안주(安州) 서북쪽에 청천강(淸川江)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있는 누대로,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다.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6년(615)에 건립되었다 한다. 의리장(衣履藏) 유골이 없을 경우 옷이나 신발 등을 가지고 장례를 지내는 것을 의리장(衣履葬)이라고 한다. 김준(金浚) 1582~1627. 본관 언양(彦陽)이며 자는 징언(澄彦)으로 정읍 정문(旌門) 출생이다. 1605년(선조38) 나이 24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발되었고 승진되어 교동 현감(喬桐縣監)으로 나갔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 뒤에 여러 벼슬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에 안주 목사 겸 방어사를 지냈고, 안주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분신 자결을 하였다. 병자년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1636년(인조14)에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의 태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같은 해 12월, 청나라는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을 말한다. 명실(明室)의 옥사(屋社) 의 화(禍) 옥사는 패망한 나라의 사직(社稷)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햇볕을 막는 것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1644년 3월에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군이 명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의종(毅宗)과 황후 주씨(周氏)가 목을 매어 자살한 사건을 말한다. 갑신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완전히 멸망한 1644년(인조22)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도정 박창현전 朴都正昌鉉傳 도정(都正) 박창현(朴昌鉉)은 자가 영화(永化)이고, 밀양(密陽) 사람으로 강진현(康津縣)에 살았으며, 도정은 그의 직함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칭송이 일찍 드러났다. 아버지의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3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어머니 김씨가 풍비(風痺)를 앓아 앉거나 누울 때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자, 사방을 다니면서 훌륭한 의원을 두루 구하였고, 온갖 초목(草木)의 자미(滋味)196)와 침과 뜸의 방법을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끝내 낫지를 못했다. 이에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행한 것이 몇 개월이 되었지만 또한 낫지를 않았다. 그래서 낭주(朗州, 전남 영암의 옛 지명)의 소금강(小金剛, 월출산을 가리킴)으로 들어가 산신령에게 기도하였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빙설이 뒤덮혀도 매달의 상례로 삼았는데, 어느 하루 저녁 꿈에는 다른 징조가 있어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김씨 또한 이날 밤에 꿈속에 어떤 한 노인이 두 개의 흰 대나무로 아픈 곳을 세 번 쳤는데, 이때부터 병세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가자 김씨가 놀랍고 기쁜 마음에 갑자기 일어났는데, 걸음걸이가 평상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한 소치라 여겼다.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지기가 우뚝하여 일찍이 개연(慨然)히 절의(節義)로 자부하기를, "내가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하는 것에는197) 기필할 수 없지만 절의를 위하여 죽는 일이라면 어찌 남에게 양보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임진왜란의 삼장사(三壯士)198)를 논하여 말하기를, "그 절개는 높고 아름답지만, 다만 곧장 앞으로 나아가 적을 참수하지 못하고, 먼저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은 것이 한스러운 뿐이다."라고 하였다. 중년 이후로는 문을 닫고 《삼략(三略)》과 《육도(六韜)》199), 《병학지남(兵學指南)》200)과 《연기신편(演機新篇)》201) 등의 책 읽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았고, 포진(布陣)과 행군(行軍), 진퇴(進退)와 합변(合變)하는 방도202)에 대해 연구하여 자세히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오년에 동학 교도(東學敎徒)들이 맹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이 북받쳐 가서 절도사(節度使)를 만나 소탕할 계책을 진달하고 마침내 옆 고을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민병(民兵) 700명을 얻어 나주 영장(羅州營將)과 합병(合兵)하여 전주(全州)로 향하다가 옥과(果果)의 경계에 이르러 군대를 해산하라는 전지를 받고 돌아왔다. 적들이 전주를 함락시킨 이후로부터 곳곳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날로 더욱 불어나더니, 6월에는 적 수천 명이 장흥(長興)에서 강진(康津)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공이 절도사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저에게 포군(砲軍) 백 명을 빌려주면 가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지만 따라주지 않자 공은 혀를 차며203)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적들은 공을 매우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다. 사람들이 혹 피하기를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삼척의 대환도(大環刀)204)가 있어 적들을 감당할 수 있는데, 어찌 머리와 꼬리를 감추어 구구하게 비겁한 모습을 보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적들은 평소에 그 위엄과 명망을 두려워하여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12월에 적이 장흥과 강진 등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병영을 침범하려고 하여 10리 떨어진 곳에서 묵었는데, 절도사가 급히 공을 불러 의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는 모두 한민(閒民,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고 저들도 오합지졸이니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달아날 것이고, 저들이 먼저 공격하면 우리가 반드시 무너지리라는 것은 참으로 알기 쉬운 형세입니다. 오늘 밤 민병들만으로 성을 지키게 하고 포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습격한다면 썩은 것을 부러뜨리는 형세와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위험한 계획이라 여겨 쓰지 않았다. 단지 본면(本面)의 민병들만 거느리고 성 밖의 채책(寨柵)205)을 지켰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들이 일자(一字)로 포진하여 오자, 공이 말하기를, "벌건 대낮 큰 길에서 행렬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만약 선봉을 패배시킨다면 뒤에 비록 10만의 군사가 이어 온다 하더라도 형세상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중도의 요해지에서 습격하십시오."라고 하였는데, 또 따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적들이 이르자 채책을 지키던 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채책은 비록 온전하나 적들이 다른 채책을 따라 들어온 지 오래되었으니, 홀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성으로 들어가 성 안의 중군과 힘을 합쳐 성을 지키는 것이 낫겠구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성을 들어갔는데, 성 안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남아있는 이가 없고, 적들의 선두 기병이 이미 이따금씩 떼를 지어 거리를 휘젓고 다니니, 공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가 만나는 적들마다 베었다. 얼마 안 있어 많은 무리가 이르렀다. 공이 멀리서 바라보고 군대를 지휘하여 나가 크게 함성을 지르면서 충돌하다 갑자기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적이 죽었다고 여겨 아무 걱정 없이 왔는데, 가까이 이르자 갑자기 몸을 일으켜 적의 수급 몇 명을 참수하고 죽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절도영(節度營, 절도사가 있는 본영)은 바로 한 도(道) 관방(關防)206)의 요해처이며, 절도사는 바로 한 도 도독(都督)의 중대한 직임이다. 성지(城池)가 천험(天險)하고 병갑(兵甲)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5백 리를 호령하고, 기고(旗鼓)와, 부월(鈇鉞)207)이 그 손아귀에 있어 60주(州)를 조발(調發, 군사를 불러 모음)한다면 기계(器械)와 추속(芻粟, 병마(兵馬)의 군량)이 어찌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반란군208)과 유랑민, 좀도둑209)들이 쳐들어오자 넋이 나가 허둥지둥 달아나 숨어서 성지(城池)를 지키지 못하고 국위(國威)를 진작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아, 사람을 얻으면 10만의 적병(敵兵)이라도 많지 않으며, 사람을 잃으면 천리의 관방(關防)이라도 웅대하지 않는 법이다. 당시에 절도영 아래에 오직 박도정 한 사람만이 있었는데, 쓰지 않았으니 패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를 수밖에 없는 형세였다. 이뿐만 아니라 만약 그의 계책이 일찌감치 행해지고 의병을 모집한 군대가 전주(全州)에 도달하였다면 비류(匪類)의 난이 필시 흉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라의 상황이 또한 오늘날과 같은 지경에도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한 도의 성을 지킴에 만전을 기하는 계책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이 관계된 바가 이와 같으니, 어찌 천고 지사(志士)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창 적이 드셀 때에는 술과 고기를 갖추고 북치고 피리 불며 분주하게 보내고 맞이하는 자가 길에서 끊이지 않다가, 매우 두려워져서는 성을 버리고 고을을 떠나 몸을 빼내 구차하게 살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아, 이러한 때에 이러한 사람이 없었다면 호남 지역이 어찌 한 사람도 의로운 선비가 없다는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훌륭한 기품과 곧은 절개가 백세토록 칭송하기에 충분하니 뜻을 펴지 못하고 공을 성취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朴郁正昌鉉。字永化。密陽人。居康津縣。都正其官啣也。天性至孝。稱譽夙著。考病血指。延三日命。妣金氏患風痺。坐臥須人。行四方。遍求良醫。凡草木之滋。針炙之方。無所不試。而竟不愈。於是乃沐浴齊潔。致誠行禱者數月。而亦不愈。於是入朗州之小金岡。禱於山靈。冒風雨藉氷雪。月以爲常。一夕夢有異徵。心竊喜之。金氏亦於是夕。夢有一老人。以兩紈竹。三撾痛處。自是病勢漸減。後數日。下山歸家。呼母而入。金氏驚喜忽起。因以行步如常。人以爲孝感致然。膂力過人。志氣磊落。嘗慨然以節義自許曰。吾於撥亂反正。則有不可必。若伏節死義。則豈讓於人乎哉。又論壬辰之三壯士曰。其節則高矣美矣。但恨不能直前斬賊而先自投死也。中年以來閉門讀三略六韜兵學指南演機新篇等書。晝夜不輟。於布陣行軍進退合變之方。無不硏究而詳熟焉。甲午見東匪大熾。不勝忿憤。往見節度使。陳勦滅之策。遂傳檄傍郡。得民兵七百人。與羅州營將合兵。向全州。至玉果界。得罷兵之旨而還。賊自陷全州以來。在在屯據。日益滋蔓。六月賊數千。自長興將入康津。公請於節度使曰。假我砲軍百人。可以往擒。不從公咄咄歸家。是以賊疾公甚。欲殺之。人或勸之避。公曰。我有三尺大環刀。可以當之。何藏頭隱尾作區區懦夫樣耶。賊素畏其威望。不敢犯之。十二月賊陷長康諸邑。將犯兵營。宿於距十里之地。節度使急邀公議之。公曰。我軍皆閒民彼亦烏合。我先之彼必走。彼先之我必潰此固易知之勢也今夜只以民兵守城。用砲軍。分兩路襲擊。則勢若拉朽矣。衆以爲危計而不用。只得率本面民兵。守城外寨柵。翌朝賊以一字延互而來。公曰。白畫坦路。行不成列。若敗其先鋒。後雖有十萬繼來者。勢何能相及哉。請及其未至而邀擊於中路要險之地。又不從。俄而賊至。守寨者皆遁。公曰我寨雖完賊從他寨入久矣。獨守此何爲。不如入城中軍。合力守城遂入城。城中軍無一人留者。賊先騎。已往往作隊。橫行街路。公奮劒馳逐。逢則斬之。已而大羣至。公望見之。麾軍而出。大呼衝突。忽中丸而仆。賊以爲死。無慮而來。及近。忽起身。斬數賊而死。外史氏曰。節度營是一路關防要害之地。節度使是一路都督重大之任也。城池天險。兵甲山積。號令五百里。旗鼓鈇鉞。在其掌握。調發六十州。器械芻粟。何恨不集。乃於潢池流亡鼠竊狗偸之來。魂飛魄散。蒼黃奔竄。使城池不守。國威不振。其故何哉。嗚呼。得人則十萬敵兵。不足爲衆。失人則千里關防。不足爲壯。當時節度營下。惟有一朴都正而不爲用焉。則其所取敗。勢所必至。非惟此也。若使其計。早見得行。而募義之兵。達於全州。則匪類之亂。必不至鴟張。而國家爻象。亦不至如今日也。豈止爲一路城守萬全之計而已哉。人之用舍。所係如此。詎不爲千古志士無窮之恨乎。然方賊之倔强也。具牛酒張鼓吹。奔走送迎者。絡繹於道。及其甚恐。則棄城亡郡。脫身偸生者。項背相望。噫。此時焉而不有此人焉。則全湖之地。烏得免無一人義士之責乎。偉韻直節。足以有辭於百世。不可以志之未伸功之未就議之也。 초목(草木)의 자미(滋味) 입맛을 돋우기 위해 생강과 계피 등의 양념을 넣어서 만든 음식을 이른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있으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반드시 초목의 자미를 먹는다.'라고 하였으니, 생강과 계피 등을 말한 것이다.[曾子曰: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也.]"라고 하였다. 난세를……것에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애공(哀公) 14년조에, "난세를 다스려 그것을 정도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은 춘추(春秋)보다 좋은 책은 없다.[撥亂世, 反諸正, 莫近於春秋.]"라고 하였다. 삼장사(三壯士) 임진왜란 때 진주의 촉석루에 올라가 당면한 국가의 장래를 통탄(痛歎)하며 죽기로 맹세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세 장사를 말한다. 삼장사는 영남 삼장사, 호남 삼장사로 나누어 말하는데, 여기서는 호남 삼장사인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를 가리킨다. 영남 삼장사는 김성일(金誠一)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를 가리킨다. 《鶴峯集 註》, 삼략과 육도(六韜) 《삼략》은 중국 한(漢)나라 황석공(黃石公)이 지어 장량(張良)에게 주었다는 상ㆍ중ㆍ하 3권의 병서(兵書)로 조선 시대 무과 시험 과목인 무경 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이다. 《육도》는 중국 주(周)나라의 태공망(太公望)이 지었다고 하는 병서(兵書)로, 문도(文韜)ㆍ무도(武韜)ㆍ용도(龍韜)ㆍ호도(虎韜)ㆍ표도(豹韜)ㆍ견도(犬韜)의 6권으로 되어 있다. 병학지남(兵學指南) 명(明) 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 중에서 조련법(操鍊法)을 간추려 편찬한 책이다. 원래 선조(宣祖) 때에 간행되어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군사 훈련 교범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정조(正祖) 때 왕명에 의해 이상정(李象鼎)이 수정하고 주석을 첨부하여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를 만들었다. 연기신편(演機新篇) 조선 중기 안명로(安命老, 1620~?)가 편찬한 병서이다. 1660년(현종1) 진법(陣法)의 비조라 일컫는 풍후(風後)·악기(握奇)의 법에 따라 진법을 논하고, 여기에 척계광(戚繼光)의 병제를 개선하여 음양가(陰陽家)의 제법(諸法)을 덧붙여 《연기신편》 3권 3책을 엮었다. 1664년 안명로가 양산군수로 있을 때 《연기신편》을 조정에 보내어 병제의 개편을 요청하였으나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 다른 병서들과 함께 병사훈련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합변(合變)하는 방법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통하는 병법(兵法)을 말한다. 혀를 차며 원문의 '돌돌(咄咄)'은 속마음은 걱정스러우면서도 밖으로는 표출하지 않는 것으로, 혀 차는 소리를 나타낸다. 진(晉)나라 때 은호(殷浩)가 중군장군(中軍將軍)으로 있다가 모함을 입어 신안(信安)으로 쫓겨났는데, 밖으로는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나 하루 종일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무슨 글자를 썼다. 이에 사람들이 엿보니 '쯧쯧 괴이한 일이로다'란 뜻인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黜免》 대환도(大環刀) 조선시대에는 긴 외날을 가진 칼을 대부분 환도라고 했다. 길이에 따른 분류로 소환도(小環刀), 중환도(中環刀), 대환도(大環刀) 등으로 나누었다. 환도류 무기 중에서도 크기가 큰 대환도는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채책(寨柵) 사방에 울타리를 친 방어진지를 말한다. 관방(關防) 좁고 막힌 험애(險隘)한 곳에 관소(關所)를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켜 방어하는 것, 또 그러한 곳을 말한다. 기고(旗鼓)와 부월(斧鉞) 기고는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데에 쓰이고, 부월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출정하는 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장수에게 정벌과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었다. 여기서는 절도영의 지휘를 맡은 절도사를 가리킨다. 반란군 원문의 '황지(潢池)'는 외지고 좁은 땅이란 뜻으로 반역이 일어난 지역을 가리킨다. 곧 임금의 어진 정치가 미치지 못하는 외진 곳에 사는 백성들이 지방 관리들의 폭정으로 인해 반역을 일으키게 된 것을 비유한다. 한나라 공수(龔遂)가 선제(宣帝)의 하문을 받고 "백성은 기한에 시달리건만 관리들이 돌보아 주지 않자, 폐하의 적자들이 폐하의 병기를 훔쳐 황지 가운데서 장난을 쳐 본 것뿐입니다.[其民困于飢寒, 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 盜弄陛下之兵于潢池中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89 龔遂傳》 좀도둑 원문의 '서절구투(鼠竊狗偸)'는 쥐와 개처럼 몰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인데, 조선 시대에 변경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야인(野人)이나 왜적(倭敵)을 일컫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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