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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두일【창규】에게 답함 答文斗一【昌奎】 보내온 말이 끊임없이 이어져 편지에 가득한 하였는데 말과 의리가 모두 지극하였으니, 성대한 학업의 조예가 범상치 않음이 있을 뿐 아니라 분을 발하고 사려를 격동시켜 용감하게 곧장 나아가는 뜻이 말 밖에 은연중에 드러났는지라, 여러 차례 읽어봄에 감격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어찌 내 자신이 그렇게 한 것과 다르겠는가? 문목 한 통은 단지 어리석은 나의 견해에 의거하여 가부를 질정하니, 바라건대 회답하여 가르쳐 주시게. "삼년칭고(三年稱孤)……"라 한 것은 제가의 설이 같지 않으니, 혹 장사 뒤에는 효자라고 일컫는다고 하며, 혹 졸곡(卒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부제(祔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연제(練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대상(大祥)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부제 뒤에 효자라 일컫는 것이 합당할 듯하니, 선유의 설 또한 이와 같은 것이 많네. "친진(親盡)69)……"이라 한 것은 이미 친진하였다면 종자(宗子)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하니, 최장방(最長房)70)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만 못하네. "질명(質明)……"이라 한 여기에서의 '질(質)'은 질정(質定)의 뜻이네. 무릇 동이 틀 무렵은 모든 사물의 형상을 질정할 수 있는 때이니, 마치 여러 신하가 조회할 때 색깔을 구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조정에 들어간다는 뜻과 같네. 이미 "날이 샐 무렵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였으니, 한 밤중이 아님이 분명하네, 선유 또한 "5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읍(揖)은 붕우와 빈주가 서로 만났을 때의 의식이고 존자(尊者)에게는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마 또한 그러한 듯하네. 來喩娓娓盈幅。辭義俱到。不惟盛業造詣。有不草草。而所以發憤激慮勇往直前之意。隱然於言外。三復感仰。奚異在已也。問目一紙。只據愚見。以質可否。幸以回敎之也。三年稱孤云云。諸家之說不一。或云葬後稱孝。或云以卒哭後。或云以祔祭後。或云以練後。或云以祥後。然以愚見。則祔後稱孝。似爲得中。先儒說亦多如此。親盡云云。旣已親盡。則用宗子之名。不可不如用最長房之名。質明云云。質是質定之義。夫欲明未明。凡物形可質之時。如群臣之朝。別色始入之義。旣曰質明行祀。則非夜半明矣。先儒亦不曰五更行祭非禮也乎。揖是朋友賓主相接之儀。而於尊者無之云。恐亦然矣。 친진(親盡)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대,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최장방(最長房) 4대 이내의 자손 중에 항렬과 나이가 가장 높은 사람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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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에게 답함 答安慶伯 뜻밖에 심부름꾼이 와 보내준 편지를 받았으니, 감사한 마음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더구나 어버이를 모시는 절도가 알맞고 넉넉한 줄 알았으니, 더욱 듣고 싶었던 마음에 부합하네. 의림(義林)은 명승지에서 여러 뛰어난 분들을 따라 열흘 동안 마음을 펼칠 수 있었으니, 박한 운명에 이런 좋은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만 선장(先丈)께서 이미 돌아가시어 함께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네. 지금 면암(勉庵) 어른75)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영귀정(詠歸亭) 주인 안모(安某)가 돌아가신 소식을 들은 지 오래 되었네. 지금 세상에 이 같은 선인(善人)이 있는데 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애통하고 한스럽네. 자제는 몇이며, 또 모두 혼사를 치렀으며, 또 모두 학문하여 족히 가업을 전술 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선생에게 추중 받은 것을 볼 수 있고, 나의 마음에 또한 위로되는 사사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네. 바라건대 경백은 이 뜻을 헤아려 더욱 힘쓰시게. 돌아오는 길에 작별할 때 애장(艾丈)76)이 경백이 오지 않은 것 때문에 또 책망하는 말을 하였고, 나를 위해 경백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였네. 料外伻來。得奉惠書。感沃曷量。矧審侍節沖裕。尤副願聞。義從諸名勝於名勝之區。以得旬日之暢。誰知薄命有此好事耶。但恨先丈已故。不與之俱耳。今者勉庵丈謂余而言曰。詠歸亭主人安某不淑之報。聞之久矣。今世有如此善人。而未得其壽。誠可痛恨。子弟幾人。又皆成娶。又皆向學足述家業否。此可見見重於先生。而於鄙心。亦不自勝其慰感之私矣。幸慶伯諒此意而加勉焉。回路相別也。艾丈以慶伯不來。亦有致責之言。而爲我言於慶伯云云耳。 면암(勉菴) 어른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군과 싸우다가 대마도에 감금되어 단식하던 중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애장(艾丈)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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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0 卷之三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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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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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에게 화답하다 2수 和剛齋【二首】 뜨락 오동에 바람 일어 잎이 막 떨어지는데 風動庭梧葉落初꿈속 생각 뒤에 새 시가 날아와 떨어졌네 新詩颺墜夢思餘금석처럼 사귀는 정이 두터움을 알고 있으니 已知金石交情重깊은 산에 발걸음 드물어도 한스럽지 않다오 不恨雲山足跡疏인간 만사는 평소의 뜻과 어긋나는 법이니 萬事人間違素志평생토록 서책을 편안한 거처로 삼는다오 百年卷裏作安居푸른 솔과 초록 대가 나뉘어 자라는 곳 蒼松綠竹分棲地조용히 앉아 외로이 의지함은 일반이라네 淸坐孤依一樣如구산7)의 대의는 시종 한결같았으니 臼山大義一終初《춘추》에서 유래한 지 백대 지났네 來自麟經百世餘속임수가 지척에서 일어날 줄 어찌 생각했으랴 豈意謬誣生肘腋마침내 사람들의 이목을 더욱 의심하게 하였네8) 遂令觀聽轉疑疏천 사람의 거짓말이 사실이 되었으니 참으로 염려되고 千人成實誠爲慮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으니9) 누구와 거처할까 七聖皆迷孰與居그대의 정교하고 곡진한 시평에 힘입었으니 賴子詩評精且盡명공의 혜안은 세상에 짝할 이 없다네 明公隻眼世無如 風動庭梧葉落初, 新詩颺墜夢思餘.已知金石交情重, 不恨雲山足跡疏.萬事人間違素志, 百年卷裏作安居.蒼松綠竹分棲地, 淸坐孤依一樣如.臼山大義一終初, 來自《麟經》百世餘.豈意謬誣生肘腋? 遂令觀聽轉疑疏.千人成實誠爲慮, 七聖皆迷孰與居?賴子詩評精且盡, 明公隻眼世無如. 구산(臼山)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또 다른 호이다. 속임수가……하였네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사망할 때 일제 치하에서는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고 유지를 내렸는데, 문인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은 이를 어기고 전우의 문집을 간행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김택술은 동지 59명과 함께 오진영을 성토하였다. 일곱……잃었으니 일곱 성인은 황제(黃帝)ㆍ방명(方明)ㆍ창우(昌寓)ㆍ장약(張若)ㆍ습붕(謵朋)ㆍ곤혼(昆閽)ㆍ활계(滑稽)를 가리킨다. 황제가 대괴(大隗)를 구자산(具茨山)에 가서 보려고 방명(方明) 등 6인을 데리고 떠났는데, 양성(襄城) 들판에 이르러 방향을 몰라서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다[七聖皆迷]는 말에서 온 것이다. 《莊子 徐無鬼》 여기서는 전우(田愚)의 학문이 방향을 잃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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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재12)에 이르렀다가 오씨 여러 벗과 함께 읊다 到禮川齋 同吳氏諸友吟 우연이 명승지에 이르러 멋진 유람하니 偶到名區獲勝遊옛 벗들은 모두 다 백발이 되었구나 舊朋盡是雪莖頭푸른 오동에 바람 일어 책상에 서늘함 생기고 碧梧風動涼生榻높은 산에 구름 걷혀 누대에 푸른 빛 떨어지네 喬岳雲晴翠滴樓술 기울이니 그야말로 근심 씻기에 좋고 傾酒端宜憂慮滌시 지으니 광경을 담기 위해서가 아니네 題詩不爲景光收서로 보며 이별 아쉬워 돌아갈 것을 잊었는데 相看惜別忘歸去뉘엿뉘엿 서쪽 하늘로 해가 지는구나 冉冉西天白日流젊어서 글로만 보다가 비로소 여기에서 노니는데 少爲看書始此遊지금까지 아직도 단두13)를 보지 못했다오 至今尙未見丹頭세상의 새로운 풍속에 이미 놀랐지만 已驚世上新風俗산중의 오래된 누각에는 아무 탈 없네 無恙山中舊閣樓사모는 머나먼 길을 달리지 못하고 四牡脩途靡騁走만우는 기울이진 형세를 회복하지 못하네14) 萬牛傾勢莫回收한가한 틈 내어 한 번 모임은 일이 아님이 없으니 偸閒一會無非事서로 이끌어 사류가 되는 것을 잊지 말게 不忘相將作士流 偶到名區獲勝遊, 舊朋盡是雪莖頭.碧梧風動涼生榻, 喬岳雲晴翠滴樓.傾酒端宜憂慮滌, 題詩不爲景光收.相看惜別忘歸去, 冉冉西天白日流.少爲看書始此遊, 至今尙未見丹頭.已驚世上新風俗, 無恙山中舊閣樓.四牡脩途靡騁走, 萬牛傾勢莫回收.偸閒一會無非事, 不忘相將作士流. 예천재(禮川齋) 전라북도 고부(古阜)의 예천(禮川)에 소재한 오씨(吳氏)의 묘재(墓齋)를 가리킨다. 《艮齋先生文集前編續 卷4 贈吳景現》 단두(丹頭) 도가(道家)에서 정련(精鍊)하여 완성한 단약(丹藥)을 가리킨다. 사모(四牡)는……못하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사모는 네 필의 수말이라는 뜻으로, 왕명을 받들어 사신 가는 것을 말한다. 《시경》 〈사모〉에 왕명을 봉행하는 사신을 위로하여 "네 필의 말이 끊임없이 달려가니, 큰길이 구불구불하도다. 어찌 돌아가길 생각지 않으랴마는, 왕사를 견고히 하지 않을 수 없기에, 내 마음 서글퍼하노라.[四牡騑騑, 周道倭遲. 豈不懷歸, 王事靡盬, 我心傷悲.]"라고 하였다. 만우(萬牛)는 일만 마리의 소처럼 힘이 엄청나게 센 것을 표현하는 말인데, 소식(蘇軾)의 시에 "만우가 땀을 흘리며 힘을 써도 끌어낼 수가 없다.[萬牛喘汗力莫牽.]"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19 咏怪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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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기 惺齋記 심(心)은 본래 광명(光明)한 물이니, 어떤 미미함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어떤 그윽함도 비추지 않음이 없어 밝음은 일월과 나란하고 광채는 우주에 통한다. 다만 품부 받은 기에 구애되고 물욕에 가려지게 되면 혹 그 밝음을 훼손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 마치 거울에 먼지가 끼면 아름답고 추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물이 흙탕물이 되면 작은 티끌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른바 광명보장(光明寶藏)173)이라는 것은 한 구역의 암흑 속174)이 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밝음을 회복하고 그 광채를 되돌리는 것은 그 방법을 장차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도에 들어가는 것은 경(敬)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175) 상채(上蔡) 사 선생(謝先生)이 말하기를 "경은 성성(惺惺)하게 하는 법이다."라고 하였으니,176) 이것은 만고 유가의 단전(單傳)177)과 요결(要訣)이다. 그러나 '성성' 두 글자는 갑자기 형성하기 어려운데, 급하게 하면 어지러워지고 느슨하게 하면 폐하게 되니, 반드시 과정과 절도를 두기를 마치 궁격(窮格)178)의 공부와 실천의 실상을 좌우에서 견지하고 안팎으로 서로 기른 뒤에야 조성할 수 있는 것과 같고, 하나의 '성성'자만 지켜서 명료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나의 벗 성재자(惺齋子)가 이것으로 정법안장(正法眼藏)179)으로 간주하여 부지런히 노력한 것이 대개 이미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고생스럽게 이미 시험하여 마음에 묵묵히 계합한 것이 있을 것인데, 모르겠으나 나의 이 말이 자신이 평소 경험한 것과 더불어 크게 어긋남이 있는 데는 이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글을 남겨두어 성성(惺惺)의 주해(註解)로 삼고 그렇지 않다면 육정(六丁)180)에게 맡겨 혹여 도를 어지럽히는 군더더기 말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心是箇合下光明底物。無微不顯。無幽不燭。至於明並日月。而光徹宇宙。但爲氣禀所拘。物欲所蔽。則或不能無虧損其明。如鑑被塵垢而姸媸無分。水攬泥滓。而纖芥不露。所謂光明寶藏者。不過爲一區黑窣窣地耳。然則所以回其明而反其光者。其道將何以耶。程子曰。入道莫如敬。上蔡謝先生曰。敬是惺惺法。此是萬古斯門單傳要訣也。然惺惺二字。猝難湊泊。急之則錯。緩之則廢。必有課程節度。如窮格之功。踐履之實。左右夾持。內外交養。而後可以有造。非守一惺惺字而謂可以了了也。余友惺齋子。以此看作正法眼藏。孜孜用力。蓋已久矣。必有辛苦已試黙契於心者。則未知愚之此言。與自己平日經歷。不至有大悖否。然則留之爲惺惺之註解。不然。付之六丁。無容爲亂道贅言如何耶。 광명보장(光明寶藏) 광명은 불지혜(佛智惠)를 의미하고, 보장은 귀하게 간직된 보물이다. 이 말을 주자가 차용하여 "배우는 사람은 공부를 할 때 반드시 분발하여 마치 안타깝게 무슨 물건을 잃은 사람이 그것을 도로 찾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예컨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하나의 커다란 빛나는 보물[一大光明寶藏]을 다른 사람에게 도둑맞았다면 이 마음에 그냥 버려두고 말겠는가. 반드시 훔친 사람을 추적하여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로 본성이란 뜻으로 쓰였다. 《朱子語類 卷121 訓門人7》 암흑 속 원문의 '흑솔솔지(黑窣窣地)'를 풀이한 말인데, 한밤중처럼 빛이 전혀 없어 새까만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주자가 "사람은 태어날 때 각자 이 이치를 갖추어 태어나는 법이다. 단지 사람으로서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온통 암흑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人之生, 各具此理. 但是人不見此理, 這裏都黑窣窣地.]"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朱子語類 卷31 論語13 雍也篇2》 정자(程子)가……하였고 《근사록》 권4 〈존양(存養)〉에 나오는데, 정이(程頤)의 말이다. 상채(上蔡)……하였으니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에 나온다. 상채 사 선생은 북송(北宋) 때의 학자 사양좌(謝良佐)를 말한다. 단전(單傳) 불교 선종(禪宗)의 교리 전수 방식으로, 문자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여 전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궁격(窮格) 궁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한다.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반성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정법안장(正法眼藏) 학문의 핵심이자 정수라는 의미이다. 원래 불가의 말로 석가가 깨달은 최고의 묘리를 가리킨다. 우주를 밝게 비추는 것을 안(眼), 모든 덕을 포함하는 것을 장(藏)이라 하며, 정법(正法)은 이 안과 장을 구비하는 것이다. 육정(六丁) 도교(道敎)에서 이른바 정묘(丁卯)·정사(丁巳)·정미(丁未)·정유(丁酉)·정해(丁亥)·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다. 《後漢書 卷50 梁節王暢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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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곡 처사 배공 유사장 隱谷處士裴公遺事狀 공의 휘는 상섭(相涉), 자는 군방(君邦), 호는 은곡(隱谷)이니, 배씨는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를 시조로 삼는다. 고려조에 휘 현경(玄慶)은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서 벼슬은 태사(太師)이고 시호는 무열(武㤠)이다. 휘 운룡(雲龍)은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가서 해동 군자(海東君子)로 일컬어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니, 자손들이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정지(廷芝)68)는 합단적(哈丹賊 원의 반란군)을 쳐서 물리쳤고, 탐라(耽羅)를 쳐서 평정했으며, 벼슬은 호부 상서(戶部尙書)와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원우(院宇)69)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성경(成慶)은 벼슬이 통판(通判)인데,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모두 홍의적(紅衣賊)과 싸우다 목숨을 바쳤고, 휘 문우(文祐)는 벼슬이 흥위위(興威衛)이고 호는 회은(晦隱)인데, 고려말에 망복(罔僕)70)하였다. 휘 두유(斗有)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察訪)이고 호는 우재(寓齋)인데, 단종(端宗) 말에 능성(綾城)에 은둔하였으며, 휘 상경(尙絅)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냈는데,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휘 윤덕(允德)은 호가 빙연(冰淵)인데, 효행으로 천거되어 어필 서명(御筆書名)의 포상(褒賞)이 있었고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으며, 휘 경생(慶生)은 진사(進士)로 호가 후송(後松)인데, 인조 갑자년(1624)에 의병을 일으켰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종영(宗泳), 증조의 휘는 득효(得孝), 조부의 휘는 이현(以絢)이고 부친의 휘는 정채(廷綵)이다. 모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이찬지(李贊之)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를 잘 갖추었고, 순조 경인년(1830) 윤4월 20일에 능주(綾州) 대곡리(大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얼굴빛이 좋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온량(溫良)하고 화락(和樂)하여 온화한 기운이 사람을 감화시켰다. 어려서부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공을 사랑하는 한 이웃 노인이 공에게 희롱하는 말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어린아이에게 항상 속이지 않는 것을 보여야 하는데, 어찌 어른으로서 어린아이를 속인단 말입니까."라고 하자, 이웃 노인이 부끄러워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지만 온화한 얼굴빛으로 봉양하는 것[色養]을 모두 지극히 하였고, 집상(執喪)할 때 애훼(哀毁)하고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했으며, 제삿날이 돌아오면 치재(致齊)71)하고 산재(散齊)72)하여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형제 3인 가운데 공이 둘째인데, 위로 공손하고 아래로 우애하여 화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년에 수동(壽洞)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두문불출하여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깊이 감췄으며, 식구 수를 계산하여 밭을 경작하고 옷 입을 사람을 헤아려 누에를 쳤으며, 한가한 날에는 시가를 읊고 서적을 스스로 즐겼다. 겸손하고 온화함으로 몸가짐을 하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친척을 구하여 도와주고 친구를 찾아가 안부 전하는 것을 제때에 빠뜨림이 없었다. 자손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하였고, 시문(時文)73)을 지어 벼슬을 구하려는 계획은 하지 않았다. 후생 가운데 초학자들을 보면 매번 묻기를 "《대학》은 읽었느냐? 이는 학문하는 전지(田地)이고 수신(修身)의 본령이니, 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맹자》의 '잡으면 보존된다.74)'라는 일구(一句)는 성현(聖賢)이 열어 보인 긴요한 말이니, 세상에서 무슨 일이건 마음이 보존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라고 하였다. 평소에 무당을 쓰지 않았고 장기와 바둑을 대하지 않았으며,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고 권귀(權貴)를 만나보지 않았으며, 함께 종유(從遊)한 자들은 모두 향리(鄕里)에 사는 약간의 가난한 벗이었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대학》 및 《논어》 몇 편 읽기를 마치고, 집안사람들을 불러 면전에서 경계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또 손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되는 도가 있으니 그 도를 잃으면 사람이 아니고, 선비에게는 선비답게 되는 업이 있으니 그 업을 잃으면 선비가 아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75)'라고 하였고, 또 '군자는 밥 한 끼를 먹는 사이에도 인(仁)을 떠나서는 안 된다.76)'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너희들은 마음에 잘 새겨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아라."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오려 할 때 갑자기 병에 걸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베개에 누웠는데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무술년(1898) 9월 13일이다. 장사를 지냈다가 한천면(寒泉面) 산음(山陰) 증봉(甑峯) 아래 간좌(艮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익충(文益忠)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2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경묵(慶黙)과 흥묵(興黙)이고, 딸은 문재황(文載璜)·정석규(鄭錫圭)·이계환(李桂煥)·이병채(李秉采)·임노성(林魯成)에게 출가했다. 아, 내가 동향(同鄕)에 있었기에 외람되이 알게 되어 끊임없이 서로 어울리면서 마음을 터놓고 속마음을 이야기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매번 그 용모는 조용하고 편안하며 그 말은 자상한 것을 보았고, 남에게 이익을 주고 사물에 은택을 끼치는 뜻은 성대하여 존경할 만하였다. 천진한 성품에 맡겨 분수를 지켜 담박하게 영위(營爲)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의리(義理)의 소재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탐하고 사모하며 욕심내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하였다. 이해득실을 따질 때에 묵묵히 분변하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일의 실정에 익숙하고 세상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원용(援用)하여 헤아려 의논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때와 어긋나 자신의 포부를 시험한 적이 없고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종신토록 빛을 감추었으니, 공의 입장에서야 본래 유감이 없겠지만 식자(識者)의 한은 어떠하겠는가. 공의 손자 규덕(奎悳)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고금의 감회가 깊은 나머지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公諱相涉。字君邦。號隱谷。裴氏以文讓公諱祇沱爲始祖。麗朝有諱玄慶。以開國元勳。官太師諡武㤠。諱雲龍聘上國。稱海東君子。封達城君。子孫仍貫焉。諱廷芝。擊却哈舟。討平耽羅。官戶部尙書密直副使。配食院宇。諱成慶官通判。與子光裕。並殉於紅衣賊。諱文祐官興威衛號晦隱。麗季罔僕。諱斗有文科察訪號寓濟。莊陵末。遯居綾城。諱尙絅文科定州牧使。燕山朝。觧印歸鄕。諱允德號冰淵。以孝薦剡。至有御筆書名之褒。除齋郞。諱慶生進士號後松。仁廟甲子擧義旅。於公爲八世祖也。高祖諱宗泳。曾祖諱得孝。祖諱以絢。考諱廷綵。妣完山李氏贊之女。閫範甚備。純廟庚寅閠四月二十日。生公于州之大谷里第。好容顔。美鬚髥。溫良愷悌。和氣薫人。自幼不好戱狎。有隣老愛之。有戱語。公曰。幼子常視無誑。豈長者而誑幼子乎。隣老慚之。家貧躬耕。色養備至。執喪哀毁。一遵禮制。遇忌日。致齊散齊以致如在之誠。兄弟三人。公居其中。上恭下友。未嘗失和。中年移寓壽洞。杜門斂迹。深自韜晦。計口而田。度身而蚕。暇日諷詠書籍以自娛。持身謙和。御家勤儉。親戚賙恤。知舊問訊。隨時無闕。敎子孫必以義方。不爲做時文干祿計。見後生初學。輒問讀大學否。此是爲學田地。修身本領。不可不讀也。又曰。孟子操則存一句。是聖賢開示切要之言。曾見世間甚事有心不存而可爲者乎。平居不用巫覡。不對博奕。不入店肆。不見要貴。所與遊從。皆鄕里多少寒友生也.一日未明而起。讀大學及論語數篇訖。招家人而面戒喩。又招孫兒軰曰。人有爲人之道。失其道則非人也。士有爲士之業。失其業則非士也。孔子曰。朝聞道夕死可矣。又曰。君子無終食之間違仁。此言爾其服膺爲平生家計也。日將明。忽遘疾。左右扶之。就枕而逝。時戊戌九月十三日也。葬而移窆于寒泉面山陰甑峯下艮坐原。配南平文氏益忠女。有婦德。二男五女。慶黙興黙。文載璜鄭錫圭李桂煥李秉釆林魯成。嗚呼。余在同鄕。猥荷辱知。源源相尋。開懷話心。積有年所。每見其容也溫溫。其言也諄諄。利人澤物之意藹然可掬。任眞守分。澹然若無所營爲。而至有義理所在。則耽慕嗜欲。如恐不及。利害得失之際。默然若無所分辨。而練熟事情。曉解世故。所以援引而擬議者。皆鑿鑿有據。入與時違。未有所試。而婆娑林下。潛光沒齒。在公固無憾焉。而識者之恨爲何如哉。奎悳公之抱孫也。持家狀。託以不朽之文。緬古感仐。不敢以非其人辭。 배정지(裵廷芝) 1259~1322. 본관은 대구(大邱), 초명은 배공윤(裵公允),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이다. 1291년(충렬왕17)에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합단적(哈丹賊)을 충청도 연기(燕岐)에서 크게 무찔렀다. 1318년(충숙왕5)에 상호군(上護軍)으로서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가 되어, 목사와 왕자를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킨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김성(金成)·엄복(嚴卜) 등을 토벌하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나주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원우(院宇) 고려 중기 이후,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사(精舍), 영당(影堂) 등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 은(殷)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치재(致齊) 산재에 이어 안에서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산재(散齊) 제사 며칠 전에 밖의 일에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잡으면 보존된다 마음을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잡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이른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아침에……좋다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군자는……된다 《논어》 〈이인〉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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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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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동중추 고공 유사장 同中樞高公遺事狀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시련(時連), 자는 학천(學天), 호는 침암(沈庵)으로 계통은 장택(長澤 장흥(長興))에서 나왔으니, 제봉(霽峯) 충렬공(忠烈公) 휘 경명(敬命)77)은 공의 8대조이다. 증조 휘 한대(漢大)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는데, 광주(光州)에서 남평(南平) 국사봉(國師峯) 아래 침동(沈洞)으로 우거(寓居)했고, 조부 휘 폭(曝)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정흔(廷欣)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지린(金之麟)의 딸이니, 순조 갑자년(1804) 4월 2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골격이 훌륭하고 신체는 매우 크며, 총명하고 민첩하며 영리하여 범상(凡常)한 사람과 크게 달랐다. 6세에 입학하여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고, 7, 8세에 연달아 부모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 뛰며 울부짖어 거의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자, 본 자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하여 믿을 데가 없이78) 외롭고 쓸쓸하게 되자, 남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품팔이하면서 먹고 살았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무리 지어 땔나무하고 가축을 먹였는데, 장난치며 노는 것을 하지 않고 가요(歌謠)의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비린내 나는 물건은 입에 넣지 않고 따뜻하고 두꺼운 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한겨울 심한 추위에 알몸과 맨발로 품팔이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겨 두꺼운 명주로 만든 솜옷 하나를 주었는데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부모님의 체백(體魄 시신(屍身))이 아직 천토(淺土 임시로 매장한 무덤)에 있는데, 제가 어찌 차마 스스로 몸을 편안히 하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자, 마을의 장로들이 모두 찬탄해 마지않고 서로 다투어 의연금을 내어 장례(葬禮)를 맡아서 해주었다. 제삿날이 돌아와 제사 지낼 집이 없자 제수(祭需)를 갖추어 산소 앞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밤새도록 울부짖고 곡하기를 한결같이 처음 상사(喪事)를 당했을 때처럼 하였고79), 곁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를 위해 보호하고 따라가서 밤을 꼬박 새웠다. 가정을 이루자 또 내규(內規)를 두었고, 힘써 부지런히 일하여 사력(事力 사세(事勢)와 물력(物力))이 조금 넉넉해졌다. 일찍이 여러 자식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 고아가 되어 어버이를 하루도 봉양한 적이 없다가, 이제 조상의 음덕에 힘입어 조금이나마 그런대로 의식을 댈 것이 있는데 봉양할 계책이 없으니, 이는 평생의 한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는 뒤늦게 봉양할 수 없고, 미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사 지낼 때 그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사판(祀板)을 추조(追造)하고 사당을 세워 봉안(奉安)하여, 초하루와 보름, 봄과 가을, 비 오고 이슬 내리며, 서리 내리고 눈 올 때, 두려워하고 슬퍼하여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회갑 생일날이 돌아와 여러 자식이 헌수(獻壽)의 잔치를 베풀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비통함이 배가 된다80)는 것은 옛사람의 가르침이 아니냐. 내가 일찍 고아가 되어 죽지 않고 오늘을 보니, 그 비통함이 어찌 다만 마땅히 배가 될 뿐이겠는가."라고 하고 굳게 만류하였다. 향리(鄕里)에서 그의 효에 감동하여 관사(官司)에 알리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실상 없는 이름으로 남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면, 이는 나의 불효를 무겁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힘써 저지하였다. 항상 일찍 고아가 되어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서당을 열고 서책을 쌓아 두었으며, 여러 자손을 가르칠 때에 과정(課程)의 법을 두었고, 안팎의 족척(族戚)은 화목으로 풍습을 이루었으며, 원근의 친구들은 신의(信義)로 행실이 드러났고, 우환으로 병든 친척은 구휼(救恤)하기를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때와 절기, 춥고 더울 때 변함없이 안부를 물었고,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매번 혼인에 필요한 물건을 갖추어 도와주었으며, 매장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매번 관곽(棺槨)을 갖추어 부의(賻儀)를 보내주었다. 늘그막에 능주 서쪽 봉학동(鳳䳽洞)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것은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사랑하여 한가롭게 지내면서 노년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고, 임오년(1882) 4월 8일에 세상을 떠나 국사봉 좌측 기슭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김동유(金裕女)의 따님이고 진사(進士) 김사직(金思直)의 손녀로 4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필진(弼鎭)·국진(國鎭)·영진(永鎭)·봉진(鳳鎭)이고, 딸은 정신규(鄭信奎)·문원보(文元保)·조사민(趙士玟)·구모(具某)·이규헌(李圭憲)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제운(濟雲)과 홍우환(洪佑煥)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이 낳았고, 제방(濟邦)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제형(濟珩)과 제일(濟日)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제신(濟紳)은 넷째 아들이 낳았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훼치(毀齒)81)의 나이로 부모를 모두 잃어 외롭고 고달프며 어리고 약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정경(情景)은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험난하고 질색(窒塞 막힘)한 곳에서 스스로 벗어나 능히 가계(家計)를 수립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계승했다. 이에 집안에는 자손의 번성함이 있었고 자신은 장수와 건강의 복을 누렸으며, 노인을 우대하는 은총과 영광이 하늘에서 떨어져 높은 관직과 높은 품계로 마을을 빛냈으니, 그 심력(心力)의 규범(規範)이 남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이는 하늘이 효성스럽고 유순한 사람을 도왔고, 신이 화락한 군자를 위로해주었기에 만년(晩年)의 복록이 이처럼 흘러넘친 것이다. 증손 익주(翊柱)는 넷째 아들이 낳은 손자로 나와 종유(從遊)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공의 덕행을 후세에 영원히 전할 계획을 세웠다. 公姓高氏。諱時連。字學天。號沈庵。系出長澤。霽峯忠烈公諱敬命。其八世祖。曾祖諱漢大司僕寺正。自光州寓居南平國師峯下沈洞。祖諱曝贈左承旨。考諱廷欣贈戶曹參判。皆以公貴也。妣贈貞夫人光山金氏之麟女。以純祖甲子四月二十三日生。公骨骼埈茂。身體碩大。聰敏潁悟。大異凡常。六歲入學。文理日就。七八歲連遭內外艱。擗踊啼呼。幾絶復甦。見者莫不濳涕。靡怙靡恃煢煢孤孑。遂托身人家。賣傭資食。日與村兒樵牧爲群。而不作嬉戱之遊。不聽歌謠之聲。腥躁之物。不入於口。溫厚之衣。不着於身。隆冬盛寒。裸跣行傭。有人憐之。賜一綈袍。公泣曰。二親體魄。尙在淺土。吾何忍爲自身安便計乎。固辭不受。里中長老。皆嘖嘖歎賞。競相出義。以營其葬。遇忌諱之辰。無室屋可以行祭。具祭品。尊於墓前。終夜號哭。一如袒括。傍人多爲之護行以守其夜。及其有室。又有內規。辛勤拮据。事力稍饒。嘗謂諸子曰。吾早孤。未有一日之養。今賴先蔭。粗有衣食之資。而逮養無計。此是終天之恨也。又曰。已沒之親。不可追養。所可追者。惟祭盡其誠而已。遂追造祀板。立廟以安之朔望春秋。雨露霜雪。怵惕悽愴以盡如在之誠。遇回甲晬日。諸子欲設獻壽之宴。公曰。富倍悲痛。非古人之訓乎。余早孤不死。得見今日。其爲悲痛。豈但當倍而已乎。固止之。鄕里感其孝。將聞于官司。公曰。以無實之名。欺人欺君。是重吾不孝也。遂力沮之。常恨早孤失學。開塾儲書。敎諸子孫。克有課法。內外族戚。雍睦成風。遠近知舊。信義著行。憂患疾戚。周恤備至。時節寒暄。問訊不替。有不能婚娶者。輒具資粧以助之。有不能葬埋者。輒其棺槨而賻之。晩年卜築于綾西之鳳䳽洞。愛其山高谷邃。爲養閒終老計。以壽陞同中樞。壬午四月八日考終。葬國師峰左麓艮坐之原。齊慶州金氏東裕女。進士思直孫也。擧四男五女。男弼鎭國鎭永鎭鳳鎭。女鄭信奎文元保趙士玟具某李圭憲。孫男濟雲。女洪佑煥。長房出。濟邦二房出。濟珩濟日三房出。濟紳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嗚呼。公以毁齒之年。俱違怙恃。孤苦稚弱。情景難狀。而自拔於險難窒塞之中。能樹立家計。紹述世業。家有嗣續之蕃。身享壽康之福。優老恩榮。有隕自天。而嵬秩崇品。光輝閭里。其心力規範。非有以過人。何以致此。此所以天相孝順。神勞愷悌。而晩祿之津津有如是矣。曾孫翊柱四房孫也。從余遊有年。一日以其家狀過余。爲不朽計。 고경명(高敬命)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고, 금산에서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저서로는 《제봉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부모를……없이 대본의 시(恃)와 호(怙)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믿는다는 뜻으로, 《시경》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겠는가.〔無父何怙? 無母何恃?〕"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처음……하였고 대본에 '단괄(袒括)'이라고 되어 있는데, 단(袒)은 한쪽 어깨의 옷을 벗는 것이고, 괄(括)은 머리를 묶는 것이다. 이는 처음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하던 예법으로,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주인이 소렴을 마치고 한쪽 어깨의 옷을 벗고 머리를 묶는다.〔主人旣小斂, 袒括髮.〕"라고 하였다. 마땅히……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6에 "부모가 살아계시지 않는 사람은 생일에 마땅히 비통함이 배가 되는데, 다시 어찌 차마 술상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만약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신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人無父母, 生日當倍悲痛, 更安忍置酒張樂以爲樂? 若具慶者可矣.〕"라고 한 데서 나왔다. 훼치(毀齒) 젖니가 빠지는 7, 8세쯤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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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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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은 손공 유사장 楚隱孫公遺事狀 공의 성은 손(孫), 휘는 승경(承憬), 자는 사오(士悟), 호는 초은(楚隱)으로, 계통은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시조 휘 구례마(俱禮馬)82)는 바로 모량(牟梁) 육부(六部) 대인(大人) 가운데 한 명이다.83) 신라부터 고려까지 유명한 재상과 대신이 빛나게 서로 이어졌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책(策)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계경(季敬)은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이분이 낳은 휘 의화(義和)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민(敏)은 현감을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비장(比長)84)은 호가 입암(笠巖)이고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세기(世基)는 덕릉 참봉(德陵參奉)을 지냈고, 조부 휘 중로(重老)는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부친 휘 홍적(弘績)85)은 호가 도봉(道峯)으로 한림(翰林)에 있다가 대교(待敎)로 벼슬이 올랐는데, 을사년(1545)에 안명세(安名世)86) 공과 사국(史局)에 있을 때, 시사(時事)를 직필(直筆)했기 때문에 간사한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위원(渭原)으로 유배당하여 졸하였다.87) 그러나 선조(宣祖) 3년 경오년(1570)에 신원(伸冤)되고 복직되었으며, 부안 옹정원(甕井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모친 공인(恭人) 우주 황씨(紆州黃氏)는 진사 황언규(黃彦珪)의 따님으로, 곧고 조용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규문의 예의가 매우 잘 갖춰졌으니, 가정(嘉靖) 경자년(1540)에 부안 요촌(蓼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매하고, 재능과 국량, 뜻과 기개가 뛰어나고 출중하였다. 약관에 종숙 한계공(寒溪公)과 함께 일재(一齋)88)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을 때, 선생이 원대한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사화(史禍) 뒤에 깊이 통한(痛恨)을 품어 모친을 모시고 초산(楚山) 동쪽에 은거하면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지어서 맛있는 음식을 드렸고, 세로(世路)에 출신(出身)하여 나아가 벼슬을 구하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선조조(宣祖朝)에 참봉(參奉) 벼슬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년(1592)의 난에 적의 우두머리가 장차 전주(全州)를 침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한계공 및 물재(勿齋) 안의(安義) 공과 함께 경기전(慶基殿)89)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받들고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이안(移安)하였는데, 조중봉(趙重峯)90)이 금산(錦山)에서 해를 입었다는 것을 듣고 격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정유년(1597)에 적의 세력이 다시 거세지자, 공이 한계공과 물재공에게 이르기를, "어진(御眞)의 봉안(奉安)을 내 장차 공들에게 맡길 것이니, 공들은 힘써 노력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병 수천 인을 모아 행군하여 양성(陽城)에 이르러서 적을 맞아 온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굴하지 않고 죽었다. 가동(家僮) 차곡석(車曲石)과 이악금(李惡金) 등이 공이 순절(殉節)한 것을 보고 모두 적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으니, 바로 9월 5일이었다. 묘소91)는 정읍 용호동(龍虎洞) 앞 기슭 손좌(巽坐)의 언덕에 있고 묘갈(墓碣)이 있다.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참봉 나응기(應箕)의 따님이고, 계배(系配)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익정(金益精)의 따님이니, 아들 한 명은 진종(振宗)이고, 딸은 오충갑(吳忠甲)과 김지영(金地英)에게 출가했다. 손진종의 5남은, 영엽(永燁)·통훈(通訓) 영욱(永煜)·영환(永煥)·영형(永炯)·영위(永煒)이다. 영엽의 1남 처유(處裕)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영욱의 2남은, 참의(參議) 세유(世裕)와 태유(泰裕)이며, 영환의 계자(系子)는 필유(必裕)이고, 영형의 2남은 필유와 후유(後裕)이며, 영위의 3남은 계유(繼裕)·성유(聖裕)·혜유(惠裕)이다. 4세손 봉문(鳳文), 5세손 연(縯), 6세손 경엽(景曄), 7세손 철우(哲宇)와 석량(鍚亮)은 모두 효행으로 널리 알려져 정려(旌閭)를 하사받았으니, 이는 공이 후손을 위하여 남겨준 계책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공은 가학과 법불(法拂)92)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도덕과 연원이 있는 문하에서 종유하였으니, 평소에 영향받은 것이 있고 본성을 확충하여 양성하는 데에 방도가 있었다. 이때문에 비록 위태롭고 떠돌아다니는 상황에 있었지만 향상하는 일념(一念)은 단(丹)과 같이 환하였고, 자신이 끓는 물과 뜨거운 불 속으로 달려가는 데에 이르러서도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하여93) 백세(百世)의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다만 후손들이 영락(零落)하여 아직도 포증(褒贈)의 은전을 받지 못했으니, 그 식자들의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8세손 종순(鍾純)이 흰 머리에 늙은 나이로 고생스럽게 멀리서 건너와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姓孫。諱承憬。字士悟。號楚隱。糸出密陽。姓祖諱俱禮。卽牟梁六部大人之一也。自羅至麗。名公鉅卿。煒燁相承。入我朝。有諱策牧使。是生諱季敬。隱德不仕。是生諱義和縣監。是生諱敏縣監。是生諱比長號笠巖。文科重試副提學。卽公之高祖也。曾祖諱世基德陵參奉。祖諱重老忠順衛。考諱弘績號道峯翰林陞待敎。乙巳與安公名世在史局。以眞書時事。見忤群壬。竄渭原卒。宣祖三年庚午。伸枉復職。享扶安甕井院。妣恭人紆州黃氏進士彦珪女。貞靜柔嘉。壺儀甚備。嘉靖庚子生公于扶安之蓼村。天稟甚高。才局志槩穎脫不群。弱冠與從叔寒溪公。受業于一齋李先生之門。先生以遠器期之。史禍後。深懷痛恨。奉母夫人。隱居楚山之東。漁樵耕稼以奉其旨。未嘗出身世路以有干進之心。宣祖朝。以參奉屢微。不就。壬辰之亂。聞賊酋將犯全州。與寒溪公及勿齋安公義奉肇慶廟御眞。移安于井邑內藏山龍窟庵。聞趙重峯錦山被害。不勝憤激。丁酉賊勢更熾。公謂寒溪勿齋曰。御眞奉安。吾將委之於公。公其勉之。募義旅數千人。行至陽城。遇賊力戰。不屈而死。家僮車曲石李惡金等。見公殉節。皆赴賊而死。卽九月五日也。衣屨之藏。在井邑龍虎洞前麓巽坐原。有碣配羅州羅氏參奉應箕女。系配光山金氏益精女。一男振宗。女適吳忠甲金地英。振宗五男。永燁永煜通訓。永煥永炯永煒。永燁一男。處裕武科宣傳官。永煜二男。世裕參議。泰裕。永煥系子必裕。永炯二男。必裕後裕。永煒三男。繼裕聖裕惠裕。四世孫鳳文。五世孫縯。六世孫景曄。七世孫哲宇鍚亮。命以孝行聞。旋閭。此非公之貽謨攸及耶。公生於詩禮法拂之家。遊於道德淵源之門。擩染有素。充養有方。是以雖在顚沛流離之地。而向上一念。炳然如舟。至於身赴湯火。會魚取熊。使百世綱常。不墜於地。曷不偉哉。但雲仍零替。尙未蒙褒贈之典。其爲識者之恨何如哉。八世孫鍾純。白首頹齡。艱關遠涉。托以不朽之文。辭不獲已。謹據家狀。爲之修潤焉。 구례마(俱禮馬) 신라 시대에 육촌(六村) 중의 하나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을 말한다. 대본에는 구례(俱禮)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시조……명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사로국(斯盧國)에는 원래 6촌이 있었는데, 그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인 구례마가 처음에 이산(伊山)에 하강하여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손비장(孫比長) ?~? 자는 영숙(永叔), 부안 출신이다. 1469년(예종1) 예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世祖實錄)》 및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다. 1485년(성종16)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공조참의·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손홍적(孫弘績) 1510~1549. 자는 언선(彦善), 부안 출신이다. 1540년(중종3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뒤 1543년(중종3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대교·승정원 주서 등을 지냈다. 안명세(安名世) 1518~1548.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혹은 慶應)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예문관 검열 등을 지냈다. 을사년(1545)에……졸하였다 1548년(명종3)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기(李芑) 등의 무고에 의하여 안명세사초사건(安名世史草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평안도 위원(渭原)에 유배당한 일이 있었다. 안명세는 1545년(인종1)에 이기·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1548년(명종3)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인종실록(仁宗實錄)》·《명종실록(明宗實錄)》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경기전(慶基殿) 대본에는 '肇慶廟'로 되어 있는데, 태조의 어진은 경기전에 있었으므로 바로 잡아 번역하였다.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다.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이고 중봉은 그의 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700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묘소 대본의 '衣履之藏'은 시신을 거두지 못했을 때, 초혼장(招魂葬)을 하고 의복 등의 유품으로 장례을 치르는 것으로, 유골은 없다는 뜻이다. 법불(法拂) '법가불사(法家拂士)'의 줄임말로, 법도가 있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현사(賢士)를 말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들어가면 법도 있는 세신과 보필하는 현사가 없고, 나오면 적국과 외환이 없는 자는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한 말이 나온다. 물고기를……취하여 초은 손공이 정유재란 때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했다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맹자가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웅장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한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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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최공 정려기 孝子崔公旌閭記 효자 최공(崔公)의 휘는 시달(時達), 자는 경숙(敬淑), 호는 모와(慕窩), 본관은 해주(海州), 문헌공(文憲公) 휘 충(沖)의 후손이고, 학생 휘 득준(得俊)의 아들이다. 모친은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니, 순조 병자년(1816) 9월 14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성정과 기질이 온량(溫良)하였다. 이를 갈 나이의 어릴 때부터 받들어 순종하고 응대하여 한 번도 어버이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와 드렸고,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독서하여 지물(志物)181)이 갖추어 지극하였다. 병을 시중들 때는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차도를 점검하였고, 상을 치를 때는 슬픔이 너무 심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3년 동안 여묘 살이 하며 조석으로 절하며 곡하여 묘소 앞의 무릎이 닿는 곳에 풀이 시들었다. 전후의 부모상에 모두 이와 같이 하였으니, 향리에서 찬탄하며 한결같은 말로 칭찬하였다.기묘년(1879, 고종16) 9월 18일에 돌아가셨고, 그 뒤 기축년(1889)에 유림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고 수령의 보고가 이어져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정려를 명하여 정미년(1907)에 정려각이 비로소 이루어졌다.오호라! 사람의 떳떳한 본성은 하늘이 다하도록 실추됨이 없어 양지(良知)를 가지고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니, 경금(褧錦)의 문장182)과 고학(皐鶴)의 들림183)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정려각을 지나는 자는 마땅히 공경할 줄 알아 사모하는 마음 일으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孝子崔公。諱時達。字敬淑。號慕窩。本海州人。文憲公諱沖後。學生諱得俊子也。妣宜寧南氏。以純祖丙子九月十四日生公。天姿穎悟。性氣溫良。自在髫齡。承順唯諾。未嘗一咈親意。得一美味。必袖而供之。朝耕夜讀。志物備至。其侍疾也。嘗糞甛苦。以試差劇。執喪。哀戚過甚。幾於傷生。廬墓三年。朝夕拜哭。墓前當滕。草爲之枯。前後喪皆如之。鄕里嘖嘖。一辭稱賞。己卯九月十八日卒。後己丑。儒論齊發。剡報相續。贈童蒙敎官。命旌閭。丁未棹楔始成。嗚乎。人之秉彝。極天網墜。有其良知。好是懿德。褧錦之章。皐鶴之聞。其不以是耶。過此閭者。宜無不知欽而興慕也。 지물(志物) 지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은 의복과 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경금(褧錦)의 문장 비단옷의 문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홑옷 안에 은은하게 감추는 것을 말하는데, 군자의 도리가 날로 은은하게 빛남을 비유한다. 《중용》에서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쳐 입는다'고 하니, 그 문채가 드러남을 싫어한 것이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中庸章句 第33章》 고학(皐鶴)의 들림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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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효자 정려기 金孝子旌閭記 효자는 본관이 김해(金海), 이름은 주석(周奭)이니, 절효 선생(節孝先生) 휘 극일(克一)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지어 뜻과 물건을 봉양함에 빠뜨린 것이 없었고, 병이 들면 마음으로 근심하고 기운이 저상되었으며 밤에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그 아내 서씨(徐氏)는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에 넣어 드려 며칠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몸을 훼손함이 너무 심하고 얼굴빛이 검게 변하도록 소식(素食)을 하였으니, 그 상세한 내용은 향도(鄉道)의 천장(薦狀) 및 가전 상언(駕前上言)184)에 갖추어져 있다.오호라! 세도가 떨어지고 풍속이 나빠져 인륜이 밝지 못하니, 자식이 일용의 음식에 있어 부모로 하여금 걱정하게 하고 처자식으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는 사람은 실로 족히 말할 것이 없다. 간혹 마음가짐이 근후하여 자호자(自好者)185)라 불려지지만 그 처자식 때문에 뜻이 쇠하게 되지 않는 사람도 또한 몇 명 없다. 지성(至誠)이 간측(懇惻)하여 옆 사람을 감동시키고, 자신은 효자가 되고 처는 효부가 되어 한 집안에서 환하게 아름다움을 짝하는데 이르러서는 지금 세상에 누가 공과 짝할 수 있겠는가. 서씨의 효성과 의리, 자애애와 순종은 실로 천품에서 나온 것이지만 욱솔(勖帥)의 사이186)에서 얻은 것이 또한 어찌 적겠는가.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다.[孝子不匱]"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줌이로다.[貽爾女士]"187)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학(臯鶴)이 하늘에 들리고188) 임금의 포장이 융숭한 것이 마땅하도다.공은 세 명의 아들이 있고 아래로 증손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적지 않은데, 함께 거처하며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은애(恩愛)가 화목하니, 이것은 그 성효(誠孝)의 감응이 후손에게 넉넉함이 이와 같은지라, 영지(靈芝)와 예천(醴泉)이 어찌 유래한 것이 없겠는가.189) 원컨대 김씨는 더욱 효사(孝思)에 힘써 대대로 실추시키지 말아 조정에서 아름답게 포상한 뜻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증손 재휘(再輝)가 그 장문(狀文)을 안고 벽산(碧山)의 여관으로 나를 방문하여 한 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나는 부족하고 보잘것없어 실로 마땅히 남의 집안을 천양하는 글에 손을 댈 수 없지만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할 뿐이다. 孝子金海人。名周奭。節孝先生諱克一之后也。天性孝友。家貧躬耕。志物無闕。有疾則心憂色沮。夜不解帶。其妻徐氏血指注口。以延數日之命。及遭艱。哀毁過甚。面墨行素。其詳具任鄉道薦狀。及駕前上言。嗚乎。世降俗下。人倫不明。生之滕下日用飮食而使父母戚戚。妻子咨咨者。固不足道。間或持心近厚。號爲自好。而其不爲妻子所衰者。亦無幾人。至於至誠懇惻。感動傍人。己爲孝子。妻爲孝婦。一家之内。炳炳匹休。居今之世。誰與公疇。徐氏孝義慈順。固出於天姿。而其得於勗帥之間者。亦豈少哉。詩曰。孝子不匱。又曰。貽爾女士。其非此謂耶。宜其臯鶴聞天。而天褒隆重也。公有三子。下至曾孫。其麗不尠。同居共爨。恩愛雍睦。此其誠孝之感。裕于後嗣者如此。靈芝醴泉。豈無所自哉。願金氏益勉孝思。世世無墜。以副朝家嘉賞之意也。曾孫再輝。抱其狀文。訪我於碧山旅次。乞一言。予以滅裂無似。固不當下手於人家揄揚之筆。而辭不獲已。謹序次如左云爾。 가전 상언(駕前上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나 호소할 일이 있을 적에 임금의 가거(駕車) 앞으로 나아가 직소(直訴)하는 것을 말한다. 자호자(自好者) 현명한 덕은 없지만 자신의 몸가짐을 깨끗이 지닐 줄 아는 향리(鄕里)의 사람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자신의 지조를 팔아 가며 그 임금을 훌륭하게 성취시키는 짓은 향당(鄕黨)의 자호자도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욱솔(勖帥)의 사이 남편이 이끌어주는 것을 말한다. 《의례(儀禮)》 〈사혼례(士婚禮)〉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술을 부어주고 명령해 말하기를, '가서 너의 내조자를 맞이하여 우리 종묘의 일을 계승하되 힘써 공경한 마음으로 신부를 거느려서 네 어머니의 뒤를 잇게 할 것이니 너는 언제나 변함없이 하라.'라고 한다.[父醮子, 命之曰:往迎爾相, 承我宗事, 勖帥以敬, 先妣之嗣, 若則有常.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너에게……줌이로다 원문의 '이이여사(貽爾女士)'를 풀이한 말이다.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의 졸장에는 '이이여사(釐爾女士)'로 되어 있다. 고학(臯鶴)이 하늘에 들리고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영지(靈芝)와……없겠는가 훌륭한 조상이 있어야 훌륭한 자손이 있다는 뜻이다. 옛말에 "신령한 지초(芝草)와 단맛의 샘물은 반드시 뿌리와 근원이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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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기 敬齋記 자정자(子程子)가 말하기를 "한(漢)나라 이후로'경(敬)'자의 뜻을 안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190) 대개'경'자의 뜻은 요순[唐虞]에서 비롯하여 수사(洙泗)191)에서 발휘되어 소상할 뿐만이 아니었다. 한당(漢唐)의 수천 년 동안 총명하고 뛰어난 선비가 얼마나 많았는데 이에 여기에 대해 몽매함이 있었는가. 여기서'경'자의 뜻이 크고'경'자의 뜻을 아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자와 주자 두 선생에 이르러 이에 비로소 표장(表章)하여 더욱 남은 뜻이 없게 되었다. 그런 뒤에야 세상의 학자들이 단전(單傳)과 요결(要訣)이 여기에 있는 줄을 알아 입을 열어 말을 함에 모든 말들이 이 의체(義諦)192)가 아님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추향을 알았던 견해는 한당보다 뛰어남이 있는 것 같은데 효험을 본 것을 계산해 보건대 도리어 한당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것은 능히 깊이 나아가 자득하지 못하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사이에만 교묘하여 일찍이 '경'자가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과 또한 크게 서로 차이나지 않기 때문이다.나는 듣건대, 경재옹(敬齋翁)이 산림에서 사는 70년 동안 발은 산을 나가지 않고 이름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며, 선한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않고 의로운 물건이 아니면 취하지 않았으며, 문학에 넉넉해도 과거 시험에 나아가지 않았고 경세제민에 뜻을 두었어도 벼슬길에 나아갈 계획을 하지 않고, 오직 성현의 책과 의리의 설로 읊조리고 함양하여 드러내어 자득하고 도도하여 나이가 부족한 줄도 모른다고 하였다. 돌아보건대 그의 평생은 재사의 편액 한 글자로부터 곱씹어 온 것이 아님이 없으니, 이것이'경'자의 뜻을 알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성취한 광결(光潔)이 어찌 이러한 데에 이르렀겠는가.돌아보건대, 산란한 노년인데도 아직'경'자에서 힘을 얻지 못한 지 오래이니, 어찌하면 경재옹의 뒤를 따라 보고 느끼고 부지하여 수립해서 나의 지나간 과거를 만분에 일이라도 수습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이것을 적어 고해본다. 子程子曰。自漢以來。無人識敬字。蓋敬字之義。權輿於唐虞。發揮於洙泗。不啻消詳。漢唐數千年間。聰明俊異之士。何限而乃有懵此耶。此可見敬之義爲大。而知敬之義爲尤難也。至程朱兩夫子。乃始表章之。益無餘藴。然後世之爲學者。知單傳要訣。有在於此。而開口吐辭。凡百云云。無非這箇義諦。然則其識趨見解。若有過於漢唐。而算計見效。反有不及焉何哉。此其不能深造自得。而諓諓於口耳四寸之間。與不曾知有敬字者。亦無以大相遠矣。吾聞敬齋翁居林下七十年。足不出山。名不出世。人非善不交。物非義不取。優於文學。而不赴功令之擧。志於經濟。而不作干進之計。惟以聖賢之書。義理之說。諷誦涵暢。于于陶陶。不知年數之不足。顧其平生。無非自齋顔一字符咀嚼來。此可謂知敬者矣。不然。其所就光潔。何至乃爾也。顧憒憒頹齡。尙有不得力於敬久矣。安得從翁之後。觀感扶竪。爲區區過境萬一之收耶。遂書此以諗焉。 자정자(子程子)가……하였으니 《논어》 〈자한((子罕))〉 제29장 주희의 주에 정이(程頤)의 설을 인용하여 "한나라 유자들은 경도를 뒤집어 도에 합치시키는 것을 권도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권변이니 권술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잘못이다. 권도는 다만 경도일 뿐이니, 한나라 이후로 권도의 '권' 자의 뜻을 안 사람이 없다.[漢儒以反經合道爲權, 故有權變、權術之論, 皆非也. 權, 只是經也, 自漢以下無人識權字.]"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자의 '경' 자에 대한 말은 보이지 않는다. 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노(魯)나라에 있었던 두 물의 이름인데, 공자가 이곳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므로, 곧 공자 및 유학(儒學)을 일컫는다. 《禮記 檀弓上》 의체(義諦) 불교용어로서 진체(眞諦)와 같고, 가장 진실한 도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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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휘당기 覽輝堂記 재사는 바로 주씨(朱氏)가 묘소를 바라보기 위해 오래전에 지은 것이니, 화순[竹樹] 치소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옛날 조백강(晁伯彊)이 들에 정자를 짓고 다가(多稼)로 이름하고, 송자비(宋子飛)가 산에 당을 짓고 앙지(仰止)로 이름하였는데, 지금 화순의 비봉산에 재사를 짓고 남휘(覽輝)197)로 이름한 것은 또한 그 뜻이 아니겠는가? 봉황의 신령함은 밝고 밝아 시에 읊조리고 책에 드러나 전기(傳記)에 흩어져 나오고 심지어 부녀자나 어린아이들까지도 높이고 기이하게 여겨 일컫지 않음이 없어 입과 귀에 익숙하여 자자할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주공(周公)의 다스림으로도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함을 두려워하고198) 공자의 성스러움으로도 봉황이 이르지 않음을 탄식하였는데,199) 더구나 열국(列國)이 가시밭이 되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수천 년간에 과연 한 사람이라도 봉황이 날개 짓 하고 어울려 우는 소리를 들은 이가 있었던가. 사람들은 반드시 절대로 없다고 하여 그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아끼고 숭상함이 끝이 없는 것이 이와 같은가?아! 용이 귀하게 되는 것은 잠겨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고, 거북이 신령하게 되는 것은 칩거하여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봉황에게 먹이를 주어 뜰에서 길들일 수 있다면 참새와 무엇이 다르며, 거스르지 않아 새장 속에 키울 수 있다면 닭이나 오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시끄럽게 울며 함께 무리 짓지 않고 한가롭게 나란히 날지 않고 구포(九苞)200)의 먼 곳에 깊이 감추고 천 길 위에 높이 솟아오르니, 이 때문에 신령한 덕이 기쁘고 화락하며 상서로운 광채가 펼쳐 드러나 천하의 지극히 신령한 동물이 되는 것이다. 무도한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무도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문채를 품고 광휘를 온축하여 성현과 함께 귀결되니, 봉황이여 어찌 그리 덕이 성대한가! 저 치효(鴟鴞)의 노함과 응준(鷹隼)의 시기는 족히 비교할 것이 못된다.오호라!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하여 멋대로 하는 말과 기이한 의론이 마치 백 명의 입이 다투어 떠들썩한 것과 같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우뚝이 분발하기를 천길 위에서 나는 것 같이한 연후에야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데, 남휘재(覽輝齋) 주인은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힘쓰고 힘쓴다면 누가 화순의 비봉산은 동방의 군자국201)이 아니라 하겠는가. 齋郎朱氏瞻墓舊構也。在竹樹治飛鳳之山。昔晁伯彊亭於野而名以多稼。宋子飛堂於山而名以仰止。今齋於竹樹之飛鳳。而名以覽輝。亦非其義耶。鳳之爲靈昭昭也。詠於時。著於書。散出於傳記。以至婦女童稚。莫不尊異而稱道之。熟口慣耳。不啻藉藉。然以周公之治而恐其不聞。以孔子之聖而歎其不至。況列國荆榛。風雨漫漫。數千載之間。果有一人得見其翽翽之羽鏘鏘之音者耶。人必謂之絶無。而不信其有矣。何愛尙之無已若是耶。噫。龍之爲貴。以其潛而不見也。龜之爲靈。以其蟄而不露也。苦使鳳率啄而可馴於庭。則與鳥雀何別。勿咈而可畜於籠。則與雞鶩何異。不與啾啾同群。不與提提聯翩。而深藏於九苞之遠。遐擧於千仞之上。是以神德怡融。祥光宣著。而爲天下至靈之物矣。不入於無道之邦。不見於無道之世。含章蘊輝。聖人同歸。鳳兮鳳兮。何德之盛也。彼鴟鴞之嚇。鷹隼之猜。不足爲訐較也。嗚乎。世衰道微。橫言異議。如百舌競噪。必須挺特奮發如翔千仞之上。然後可以有爲。覽輝齋主人。其有以知此乎。勉之勉之。誰謂竹樹飛鳳。非東方君子之國。 남휘(覽輝) 한(漢)나라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봉황은 천 길 높이 날다가, 성인의 빛나는 덕을 보고 내려간다.[鳳凰翔于千仞兮, 覽德輝而下之.]"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주공(周公)의……두려워하고 《서경》 〈주서(周書) 군석(君奭)〉에 주공이 소공(召公)에게 "그대와 같은 구조의 덕을 하늘이 장차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봉황의 소리를 다시 듣지 못할 것이다.[耉造德不降, 我則鳴鳥不聞.]"라고 한 것을 말한다. 공자의……탄식하였는데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도가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그만이구나.[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라고 한 것을 말한다. 구포(九苞) 봉황이 지녔다는 아홉 가지 특징을 말하는데, 구포명(口包命), 심합도(心合度), 이청달(耳聽達), 설굴신(舌詘伸), 채색광(彩色光), 관구주(冠矩州), 거예구(距銳鉤), 음격양(音激揚), 복문호(腹文戶)이다. 《山堂肆考 卷211 羽蟲 鳳》 여기서는 봉황이 사는 곳을 뜻한다. 비봉산은 동방의 군자국 《설문(說文)》에 "봉(鳳)은 신조(神鳥)이다."라고 한 대목에서 천노(天老)가 말하기를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 사해 밖에 날아다닌다.[出東方君子之國, 翱翔四海之外.]"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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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은기 華隱記 나의 벗 양 사문(梁斯文) 순집(順集) 씨가 집안 식구를 데리고 화학산(華鶴山)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간 지 20여 년이 되었다. 산 밖의 친구들이 모두 화은(華隱)으로 부르자 양 사문이 능히 사양할 수 없어 인하여 그 집에 편액으로 삼고 또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내가 말하기를, "예리한 보습을 들고 나가 들에서 농사지었던 것은 그런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고, 길쭉한 낚싯대로 물에서 낚시한 것은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유독 이윤(伊尹)이 신야(莘野)에서 농사지었던 것과 여망(呂望)이 위수(渭水)에서 낚시했던 것202)만을 일컬으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겸선(兼善)203)의 자질이 없으면 출사를 말하기에 부족하고, 독선(獨善)의 실제가 없으면 은거를 말하기에 부족하다. 저 농부가 농사짓고 시냇가 늙은이가 낚시하는 것은 직업일 뿐이니, 어찌 족히 기록하겠는가. 화학산은 큰 산이니, 산을 둘러싼 사방 기슭의 백 리 되는 땅에 거주하며 먹고 사는 사람이 양 사문 한 사람만이 아닌데 유독 은(隱)이라 이르는 것은 또한 그 실상을 걸맞게 채울 수 있는 것이 있어서인가? 행할만한 도를 지녔다면 몸은 성시(城市)에 살더라도 은이라 이르지 않은 적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록 도원(桃源)에 깊이 숨어 살더라도 은이라 이를 수 없다."라고 하였다.양 사문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청컨대 이 호를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양 사문의 겸겸(謙謙)204)한 의를 가진 입장에서는 비록 응당 이와 같이 해야 하겠지만 친구들이 표시하여 일컬은 입장에서는 어찌 그 뜻이 없겠는가. 더구나 자고로 명호(名號)는 모두 고훈 격언(古訓格言)의 말을 사용하여 면려를 기약하는 뜻을 깃들이네. 양 사문이 진실로 능히 이것으로 인하여 성찰하고 두려워하여 혹시라도 실상이 없는 이름에 귀착될까 두려워하여 더욱 그 덕에 힘쓰고 더욱 그 학업을 진보시켜 나아가서는 족히 큰일을 할 수 있고 물러나서는 족히 지키는 것이 있다면 훗날 사관[載筆]이 사책(史策)에 '모 년 간에 모가 화학산 남쪽에 은거하였다.'라고 대서특필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이것을 힘쓸 만하다."라고 하였다. 余友梁斯文順集甫。挈家入華鶴山中最深處。爲二十有餘年矣。山外知舊。皆以華隱號之。斯文不能辭焉。因題其室。又屬余爲記。余曰。畟畟良耟。以耕于野。其人必多。籊籊竹竿。以釣于水。其人何限。然而自古至今。獨稱伊尹耕于華。呂望釣于渭。其故何哉。無兼善之資。則不足以謂之出。無獨善之實。則不足以謂之處。彼野夫之耕。溪叟之釣。職耳。何足記爲。華鶴大山也。環山四麓數百里之地。居而家食者。非斯文一人。而獨謂之隱。抑亦有可以稱塞其實者耶。有可行之道。身居城市。未嘗非隱。否則雖深居桃源。不可謂隱。斯文瞿然曰。然則請去此號可乎。余曰。不然。在斯文謙謙之義。雖應如此。而在知舊標稱之地。豈無其意。況自古名號。皆用訓格之言。以寓期勉之意。斯文苟能因此思省恐畏。恐其或歸於無實之名。益懋其德。益進其業。進足以有爲。退足以有守。則安知後日之載筆者。不大書特書於策曰。某年間。某隱於華山之陽乎。是可勉也。 이윤(伊尹)이……것 이윤이 신야 즉 유신씨(有莘氏)의 들판에서 농사를 짓다가 탕왕(湯王)의 초빙을 받고 상(商)나라를 도와서 왕업(王業)을 이룩하였고, 여상(呂尙)이 위수(渭水) 물가의 반계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에게 발탁되었는데 뒤에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던 일을 말한다. 《史記 齊太公世家》 《孟子 萬章上》 겸선(兼善) 온 천하를 아울러 선하게 한다는 뜻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아울러 선하게 한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겸겸(謙謙) 군자의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 《주역》 〈겸괘(謙卦) 초육(初六)〉에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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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정211)을 지나며 過迎狂亭 마음의 병은 광이 되어서이니 心病是爲狂뜻이 큰 것도 광이라고 하네 志大亦云狂세상엔 실로 마음의 광이 많고 世固多心狂뜻의 광이 있는 건 보기 드무네 罕見有志狂또한 마음과 뜻의 광이 아니라 更非心志狂일종은 거짓으로 광이 되었으니 一種佯作狂전에는 기자의 광212)이 있었고 前有箕子狂나중에는 매월당의 광213)이 있었네 後有梅月狂상전벽해에는 풍조가 광이니 桑海風潮狂기자와 매월당의 광을 흠모해야 하리 應慕箕梅狂나 또한 광과 똑같으니 我亦一同狂정자 안의 광에 끼고 싶네 願參亭中狂 心病是爲狂, 志大亦云狂.世固多心狂, 罕見有志狂.更非心志狂, 一種佯作狂.前有箕子狂, 後有梅月狂.桑海風潮狂, 應慕箕梅狂.我亦一同狂, 願參亭中狂. 영광정(迎狂亭)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순창지방에 살고 있던 금옹(錦翁) 김원중(金源中)이 뜻을 같이 하는 7명의 동지들과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구하고 일본에 반대하는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21년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에 세운 정자이다. 이들 8명은 고의적으로 광인(狂人) 행세를 하면서 은밀하게 항일 투쟁을 하였다. 기자(箕子)의 광(狂) 기자는 은(殷)나라 군주인 문정(文丁)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왕의 폭정에 대해 간언을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 척하여 유폐되었다. 매월당(梅月堂)의 광(狂) 매월당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다. 그는 21세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는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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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초하루에 여중이 찾아와 함께 시를 짓다 3수 七月一日汝重來訪共賦【三首】 이른 가을과 함께 객이 산골 집에 이르니 客到山牕伴早秋물이 동으로 흐르듯 지난 자취를 회상해보네 回思陳跡水東流정토사의 샘물과 암석은 항상 얻기 어려웠고 淨菴泉石難恒得소노71)의 두건과 지팡이를 만류하지 못했지 蘇老巾筇未可留학업은 예로부터 중도에 끊어지기 쉬우니 學業從來易間斷손님 접대를 삼가여 한가롭게 놀지 말게나 逢迎愼莫作優遊응당 돌아가 은거하며 하늘과 다투어 서면 直須孤往爭天立하나의 즐거움 끝내 온갖 시름에서 보게 되리 一樂終看在萬憂《춘추》를 읽을 곳마저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誰言無地讀春秋그래도 내 마음을 다잡아 홀로 휩쓸리지 않았네 也把吾心獨不流정련한 금과 같은 의리 머지않아 드러나겠지만 義理金精無日見물처럼 달려가는 세월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光陰水走幾時留원사는 정녕 술지게미와 쌀겨 먹어도 배불렀고72) 原思定可糟糠飽대순은 오히려 사슴이며 멧돼지와 논 적 있었네73) 大舜猶曾鹿豕遊산 북쪽 바다 동쪽에는 다행히 이웃이 있으니 山北滄東隣有幸서로 헤어져 사느라 오래 걱정 끼쳤다 말게 莫爲離索久貽憂그대와 서로 알고 지낸 지 몇 해이던가 與君相識幾春秋그 자태는 과격하지도 휩쓸리지도 않았지 不激其姿亦不流처신할 땐 법도를 따라 확립하려 하였고 行己欲從規矩立마음 다스릴 땐 사사로움 남을까 걱정했네 治心應恐妄私留만년에 구산74) 문하의 선비가 되어 晩參臼老門中士홀로 오랑캐 세상을 벗어나 노닐었네 獨出蠻夷世外遊바라노니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디뎌75) 更願竿頭加進步우리의 도를 전승시킬 책임을 떠맡게나 身任吾道失傳憂 客到山牕伴早秋, 回思陳跡水東流.淨菴泉石難恒得, 蘇老巾筇未可留.學業從來易間斷, 逢迎愼莫作優遊.直須孤往爭天立, 一樂終看在萬憂.誰言無地讀《春秋》? 也把吾心獨不流.義理金精無日見, 光陰水走幾時留?原思定可糟糠飽, 大舜猶曾鹿氶遊.山北滄東隣有幸, 莫爲離索久貽憂.與君相識幾春秋? 不激其姿亦不流.行己欲從規矩立, 治心應恐妄私留.晩參臼老門中士, 獨出蠻夷世外遊.更願竿頭加進步, 身任吾道失傳憂. 소노(蘇老) 소학규(蘇學奎, 1859~1948)를 가리킨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화지(化知), 호는 열재(說齋)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원사(原思)는……배불렀고 선비가 가난하게 살았으나 뜻이 굳고 학문을 좋아하여, 청고(淸高)하고 빈한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원사는 공자(孔子)의 제자인 원헌(原憲)으로, 사(思)는 그의 자이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토담집에 거적을 치고 깨진 독으로 구멍을 내서 바라지 문으로 삼았는데, 지붕이 새어 축축한 방에서 바르게 앉아 금슬(琴瑟)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莊子 讓王》 대순(大舜)은……있었네 초야에 묻혀서 지내는 생활을 뜻한다. 대순은 순(舜)임금을 가리키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이 깊은 산속에 살 적에,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사슴이나 멧돼지와 상종하였으니, 깊은 산속의 야인(野人)과 다를 바가 없었다.〔舜之居深山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라는 말이 나온다. 구산(臼山) 원문의 '구로(臼老)'는 구산의 노인이라는 말로, 간재 전우의 별호(別號)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내디뎌 이미 일정한 경지에 올라 있더라도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초현대사(招賢大師)의 게송(偈頌)에 "백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시방세계의 이치가 이 몸에 온전해질 것이라네.〔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라고 하였다. 《書言故事 釋敎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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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 窮途 막다른 길에 생계야 견딜 수 있으나 窮途計活也能堪세상맛 달고 씀을 어찌 꼭 묻겠는가 世味何須問苦甘낙토로 돌아가 편히 살기는 어렵지만 難得爰居歸土樂어찌 탐천277) 마셔 급할 갈증 없애리 肯救急渴酌泉貪시운이 고르지 않으니 풍당278)은 늙었고 不齊時運馮唐老산하가 모습 바뀌니 은사279)는 부끄럽네 改色山河殷士慙저물 무렵 동풍이 부는 강가의 집에서 薄暮東風江上屋시름을 씻으려 그저 술잔을 머금는다오 滌愁只有酒杯含 窮途計活也能堪, 世味何須問苦甘.難得爰居歸土樂, 肯救急渴酌泉貪.不齊時運馮唐老, 改色山河殷士慙.薄暮東風江上屋, 滌愁只有酒杯含. 탐천(貪泉) 중국 광주(廣州)의 석문(石門)에 있는 샘물로, 이 물을 마시면 사람은 끊임없는 욕심을 품게 된다고 전한다. 《진서(晉書)》 〈오은지열전(吳隱之列傳)〉에 "지명은 석문인데 탐천이라는 물이 있어 마시는 자는 끊임없는 욕심을 품는다.[地名石門, 有水曰貪泉, 飲者懷無厭之欲.]"라고 하였다. 풍당(馮唐) 한(漢) 나라 때의 명신(名臣)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풍당(馮唐)이 늙은 나이로 중낭서장(中郞署長)을 거쳐 겨우 거기도위(車騎都尉)에 이르고 말았다. 무제(武帝) 때에 다시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으나, 이미 90여 세나 되어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은사(殷士) 주(周) 나라에 망한 은(殷) 나라의 선비들을 말한다. 《시경》 〈문왕(文王)〉에 "은(殷)나라 선비 중에 아름답고 민첩한 자들이 주나라 서울에서 강신제를 돕는구나.[殷士膚敏, 祼將于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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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 설날 회포를 쓰다 임신년(1932) 아래도 같다. 壬申元日 書懷【壬申下同】 마흔아홉 번째 설날을 맞았는데 四十九回逢日元거울 속엔 백발 점점 무성하네 鏡中漸覺鬢霜繁뜻이 우활하니 세상 사람의 눈에 버려졌고 志迂已棄時人眼거처는 궁벽지니 처사의 촌에 걸맞네 居僻還稱處士村자기를 성찰할 땐 작은 악도 다 없애는 걸 추구하고 省己要求纖惡盡미묘한 이치 연구는 바로 옛 글을 익히는 데 두어야지 硏微定在故書溫잘못을 알았다면 어찌 꼭 내년을 기다리랴 知非何必須明歲이런 뜻을 전현들에게 논해보려 한다네 欲向前修此意論 四十九回逢日元, 鏡中漸覺鬢霜繁.志迂已棄時人眼, 居僻還稱處士村.省已要求纖惡盡, 硏微定在故書溫.知非何必須明歲, 欲向前修此意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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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경 【회덕】에게 답함 答梁而敬【會德】 편지를 받고 답장을 못한 지 지금 두 달이나 되었네. 먼 곳에서 떠도느라 막혀서 인편을 찾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다 헤아려 줄 것이라 생각하네. 그대 부친께서 뜻밖에 방문해 주었으니, 지극히 위로 되고 감사한 마음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인하여 그대가 공부하는 것이 근래 《대학》에 있다고 들었는데, 이 책은 학문을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옳은 방법을 얻은 것인데, 다만 〈대학독법(大學讀法)〉을 먼저 읽었는지 모르겠네. 모름지기 이 독법을 한결같이 따라서 경문과 장구 및 《혹문(或問)》을 가지고 십 분의 공부를 착수하여 십 분의 도리를 투득(透得)하여 평생의 가계(家計)를 세우면 이로부터 기본이 될 것이네. 독서하면서 의심을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을 이경(而敬)이 일찍이 스스로 병통으로 여긴 것인데, 실로 그러하네. 그러나 〈대학독법(大學讀法)〉가운데 이른바 "어떠한 것이 명명덕(明明德)이며, 어떠한 것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가?"라고 한 것 같은 것은 정히 마땅히 의심해야 할 곳이 아니겠는가? 한 곳을 타개하여 마음이 점점 익숙해지면 절로 칼을 대는 대로 잘려 나가는 것91)이 있을 것이네. 고인이 말하기를 "후생의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두려워 할 것이 없고, 오직 글을 읽으며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니,92) 여기에서 대략 볼 수 있네. 의림(義林)은 나이가 들수록 지업은 실추되니, 슬퍼하고 후회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종유하는 입장에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마땅히 나를 거울삼을 수 있을 것이네. 承書未復。今再閱月矣。旅滯迂遠。覓便不得。想爲之諒悉。春府丈料外枉過。慰感之至。如何可量。因聞盛課近在曾傳。此在發軔之初。甚爲得計。但未知先看讀法否。須一依此法。將正經章句及或問。下得十分功夫。透得十分道理。以立平生家計。自此而爲基本也。讀書而不會致疑。此而敬嘗自以爲病者。固然。然如讀法中所謂如何是明明德。如何是止至善。其非正當會疑處耶。一處透打。心路漸熟。則自有迎刃而解者矣。古人曰。後生才性過人。不足畏。惟讀書深思推究者。爲可畏。此槩可見也。義林年邁業墜。悲悔奚補。在遊從之地而年後於我者。宜可以監戒哉。 칼을……것 《진서(晉書)》 권34 〈두예열전(杜預列傳)〉에 "대나무를 자를 때 몇 개의 마디만 지나가면 모두 칼을 대는 대로 잘려 나간다[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고인이……하였으니 《소학》권5〈가언(嘉言)〉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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