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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돈태(崔燉泰)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燉泰 李殷弼 崔燉泰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돈태(崔燉泰)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돈태(崔燉泰)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돈태는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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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규(李弘圭)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홍규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홍규(李弘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홍규(李弘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홍규는 완산(完山)이씨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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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年一契誼承則活相怡暫阻雪寒節因違看花時窓風如聽嘯樑月 完懸儀短誄寂情爲頌稱五福宜寂寂掩山扉世情太半 非寄歸孰未有眞惜大仁歸 契下生 善山后 金鎬俊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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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谷風飄紼路臨歧百感應非此一時齒德終鮮鄕邑老歌謠不絶巷閭兒滿齋蕙葉空多碧繞圃篁隂自不移眷眷年來陪誨席長旁犻有在傍知 侍下生水原白達燮再拜謹輓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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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달섭(白達燮)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白達燮 李殷弼 白達燮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백달섭(白達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백달섭(白達燮)이 이은필(李殷弼)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백달섭은 유학자로,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자신을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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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名家司馬世家瀛向九旬齡上九京袵髮能存前聖法粉旌獨潔學生名盟寒鏡水春鷗券嘯冷篁林夜月觥矍圃杳期觀的德先人舊契哭吾情 侍生 安東權寧機謹奉哭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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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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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忽接訃音孰不驚百年人事夢中成家傳蓮一情親載庭 秀蘭三哭弟兄烟月平生帝刀玉樓此日籍仙名堪憐以 會頻頻席誨語丁寜我耳明 溟州后契生 金俊起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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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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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최만길(崔萬吉)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최만길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만길(崔萬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만길(崔萬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만길은 자신을 사하생(査下生)으로 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 사돈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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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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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19년 김일선(金日先)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八年己未閏七月十五日 金日先 大正八年己未閏七月十五日 金日先 전북 남원시 0.8*0.8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9년 윤7월 15일에 김일선(金日先)이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있는 전답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9년 윤7월 15일에 김일선(金日先)이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벌평(筏坪)에 있는 저자(宁字) 전답 1두락지를 140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 문서에는 거래물건이 논인지 밭인지 밝혀 있지 않다. 김일선은 이 전답을 자신이 매득하였다고 하였으나 거래사유는 밝히지 않았다. 자신을 '地主'라고 적었으나 문서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증인이나 필집 등 거래 입회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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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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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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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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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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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41년 이동기(李東器) 추천장(推薦狀)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昭和十六年 李正根 昭和十六年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1년 4월에 이정근(李正根) 등이 작성한 이동기(李東器) 추천장(推薦狀) 1941년 4월에 이정근(李正根) 등이 작성한 이동기(李東器) 추천장(推薦狀)이다. 추천인은 다수였는데, 이를 보면 국정풍(國定豊), 대금현석(大金鉉奭), 송촌두남(松村斗南) 등이었다. 국정풍은 이정근이 창씨개명(創氏改名)한 이름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금현석은 김현석(金鉉奭)이 창씨개명한 이름이고. 송촌두남은 이두용(李斗用)이 창씨개명한 이름이다. 본 추천장의 내용은 남원군(南原郡) 사매면(巳梅面) 관풍리(官豊里) 95번지(番地)에 살고 있는 매촌동기(梅村東器)를 도의회(道議會) 의원 후보로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매촌동기는 이동기의 창씨개명 이후의 이름이다. 이동기가 명문성족(名門盛族)의 출신으로 덕행(德行)이 뛰어나고, 일찍이 서울의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를 졸업한 후 고향 남원으로 돌아와 농산촌구제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서, 두뇌가 명석하고 인품도 매우 훌륭함으로 남원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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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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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省禮言謹詢請和重侍哀體度萬支大小各宅均泰否仰溸區區至祝弟客味如作爲幸之耳就向日相別時所託時計與他事件은其間多少間運動則以此海諒如何不再多言云고書到卽時回示切仰之耳餘在五初相逢面敍之意不備䟽禮乙丑四月念九日 弟南廷晳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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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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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을축년(乙丑年) 남정석(南廷晳)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丑 弟南廷晳 乙丑 南廷晳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을축년(乙丑年)에 남정석(南廷晳)이 보낸 서간(書簡) 을축년(乙丑年)에 남정석(南廷晳)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을축년은 1925년으로 추정된다. 국한문혼용(國漢文混用)으로 쓰여 있다. 수신인은 알 수 없다. 본 편지를 보낼 당시 남정석은 집을 떠나 있는 상태였는데, 편지에서 남정석은 최근 자신의 상황을 알린 후, 시계(時計) 등 상대방이 부탁하였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울러 본 편지를 받는 즉시 회답도 부탁한다는 점과 함께, 더 자세한 이야기는 5월 초에 서로 만날 때 하자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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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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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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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32년 남원군(南原郡)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서식(書式)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昭和七年參月拾七日 昭和七年參月拾七日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32년 3월에 남원군(南原郡)에서 작성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의 서식(書式). 1932년 3월에 남원군(南原郡)에서 작성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의 서식(書式)이다. 같은 내용의 서식이 지주(地主) 이용기(李容器)의 소작계약서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용기가 소작인들과 소작계약을 할 때 이용한 서식으로 추정된다. 이용기는 남원군 보절면 신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던 전주이씨 문중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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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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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28년 이철수(李喆壽)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 상장(賞狀) 고문서-증빙류-상장 사회-조직/운영-상장 昭和三年三月卄三日 寶節公立普通學校 李喆壽 昭和三年三月卄三日 寶節公立普通學校 李喆壽 전북 남원시 3.7*3.7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8년 3월에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에서 4학년 이철수(李喆壽)에게 발급한 정근(精勤) 상장(賞狀). 1928년 3월 23일에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에서 4학년 이철수(李喆壽)에게 발급한 정근(精勤) 상장(賞狀)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출석하여 받는 개근상(皆勤賞)과는 달리, 출석일수에서 하루 이틀 빠졌을 때 받는 상이다. 이철수는 1929년에도 똑같이 4학년으로 정근상장을 받았는데,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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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契約書右契約事白米一石을以四利得去이고十月晦內에並利야報還之意로玆에成契約홈大正十一年壬戌閏五月二十五日 契約主李秉錫[印]印章遺失故指章捺再米十斗 李承旨宅 出標米三斗 丁仁同 出標已上十三斗除下後合計條自逋條十六斗三升內에米三斗二升을丁成文處에出標야合爲一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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