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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寄一歸於理眞光陰如客夢中新更途床瑟前生樂 永植庭蘭三朶春高山流水過時景急兩烈風去路塵百 年人事虛無理薤露歌聲散四隣 一善后人 金鎬旭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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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욱(金鎬旭)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鎬旭 李殷弼 金鎬旭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호욱(金鎬旭)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호욱(金鎬旭)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호욱은 유학자로, 일선(一善)의 후인이다. 그는 스스로를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스스로를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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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리(權五利)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권오리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오리(權五利)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오리(權五利)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권오리는 안동(安東)권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생(侍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보다 나이가 어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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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경(金鳳卿)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봉경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봉경(金鳳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봉경(金鳳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봉경은 명주(溟州), 곧 강릉김씨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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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길식(權吉植)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吉植 李殷弼 權吉植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길식(權吉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길식(權吉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길식은 유학자로, 본관은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동계생(同契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동계생이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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浦純仁性質自由天牗下安閒白髮年 溫飽平生傳世業聲名一代任才賢三山鶴 駕歸華表千載塵寰認謪仙泉路無窮敀莫懶夜坮寶瑟續前緣 侍生 悉直沈周鐸謹再拜哭輓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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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주탁(沈周鐸)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沈周鐸 李殷弼 沈周鐸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주탁(沈周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주탁(沈周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심주탁은 유학자로, 본관은 삼척(三陟)이다. 만장에 쓴 다직(悉直)이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삼척에 있었던 부족 국가 이름이다. 따라서 '다직'은 삼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생이란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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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 등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午 掌議 金壽甲 壬午 1822 전북 남원시 [着名]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4월 23일에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 등이 작성한 회문(回文) 1822년(순조 22) 4월 23일에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과 색장(色掌) 한경열(韓敬烈) 등이 작성한 회문(回文)이다. 회문이란 여러 사람들이 돌려 보도록 쓴 글을 의미한다. 장의는 향교(鄕校)의 임원 가운데 으뜸 자리를, 색장은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齋會)의 간부 가운데 하나를 지칭한다. 따라서 본 회문은 향교의 임원들이 쓴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김수갑 등이 본 회문을 돌린 이유는 삼리(三里)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삼리는 세 개의 거리가 만나는 삼거리를 말할 텐데, 여기서는 남원군 기지방에 속한 삼리였다. 본 회문에 따르면 박인필은, 당시 17세에 불과한 아이였지만 품성(稟性)부터 진정한 효자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 박동정은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병으로 수 년 동안 고생하고 있었는데, 특히 지난 신사년(辛巳年) 12월 경에는 병세(病勢)가 위중하고 몸에 피가 흐르지 못할 정도로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박인필은 자기 엉덩이 살을 떼어 내어 아버지께 드시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돌아가실 위기로부터 구해 냈다. 그로 인해 아버지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었는데, 이러한 박인필의 효행을 감히 드러내지 않을 수 없어 본 회문을 작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수갑 등이 박인필의 위와 같은 효행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없지만, 박인필의 효행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박인필의 집안은 박인필만이 아니라 박인필의 아버지 박동정(朴東禎) 또한 이름난 효자였는데, 박동정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해 작성된 기지풍헌서목(機池風憲書目)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어찌 보면 효자를 기리기 위해 통문이나 회문을 발송하는 일이 그리 중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대가 아니었겠느냐 하는 생각도 가질 법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전통과 효자에 대한 생각은 조선 후기라도 조선 초기나 조선 중기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침략을 받았던 그 암물한 시기에도 또는 해방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전통이 이제는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1950년도 혹은 1960년대라도 지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전통의 유습(遺習)은 질겼던 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던 점("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을 고려하여 이를 1822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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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通諭事橘有渡淮之欲而終知其爲橘花有落溷之髮是知其爲花今花何爲泥橘何爲柚哉然則可以人而不如淮之橘溷之花乎盖貴坊士人朴東禎仁碩叔侄粤自密城君後裔本以淸州木果洞人也簪纓世族詩禮古家論其世德則恭孝公其十一代祖也訥齋公其九代祖也江波先生之八代孫也棄窩先生之四代孫也棄窩公隱德不仕棄世於本府本坊者取不才明主棄之意而退世於山林中勝探者也不幸此家興替有數科?間寂班名世守者鄕中表族俱是姻婚之家道內美閥亦是戚紀之地則愚夫蠢童咸知其班脉之昭然常人庸士亦誦其來歷之閥閱而去甲乙大無哀我生靈黃口簽丁白骨徵布之餘士人東禎混入虛名故盖有齊顙之呈此終見頉給之題矣傳聞今又其侄仁碩不幸橫侵云然則仁碩之家便是常人樣卽亦不無齒寒之歎然尊卑有等上下有分則極守班名者必無是理而況我鄕知名之族有此橫侵之獘者豈不寒心而若使其淸州鄕人聞知則必有一正論於本府矣玆敢齋參通告窃願上有司與益尊特出齊憤之義一以明同濟之有等一以杜任掌之橫侵無至玉石之俱樊千萬幸甚右敬通于機池上有司癸未十一月初六日龍湖祠會所友通 幼學崔漸翼 李亨來 金星德 房基亨 盧學文 趙重伯 丁孝達 安錫宗 楊大壽 金星燁 房海相 李觀淵 朴鼎權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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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西隣蘭報忽傷神苽葛親情更不眞歌往哭來 無限地醉生夢死片時春三山百歲遐蹤客蓬海孤 墳曠漢濱寶樹成行麟瑞又好看餘慶也應臻 江陵后人金振明 謹再拜 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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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惟公德性稟於天寬厚爲心福祿連身且全歸方見 孝壽何多辱去登仙五畝桑麻場圃濶一床詩礼 子孫賢泉坮若見茅先考報以平安二字傳 溟州后人 金頤卿 謹拜 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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蘤 篁翁餘蔭有期仁仁善風儀古逸民處世持 身無俗態愛人接物露天眞了債塵間完 命道全歸唍簀上仙倫杖屨從玆花何日覿 碧棲堂上感如好新 査下生 眞珠沈儀燮 謹再拜哭輓 {艹/靑+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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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추(金必追)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必追 李殷弼 金必追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필추(金必追)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필추(金必追)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필추는 유학자로, 경주(慶州)의 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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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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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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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大正八年己未閏七月十五日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伏在寶節面筏坪宁字員㱏斗只卜數幾負幾束㐣價折錢金㱏佰肆拾兩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憑考事地主 金日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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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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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이홍기(李泓器)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三年甲寅陰二月初六日 李泓器 大正三年甲寅陰二月初六日 李泓器 전북 남원시 [印] 1개 1.0*1.0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4년 음력2월 초6일에 이홍기(李泓器)가 남원군(南原郡) 보현면(寶玄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4년 음력2월 초6일에 이홍기(李泓器)가 남원군(南原郡) 보현면(寶玄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홍기는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았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보현면 동좌평(洞左坪) 2두락지(斗落只) 호자답(乎字畓)으로 수확량이 82석이고 부수(卜數)로는 7부(負) 5속(束), 2배미의 논이다. 방매 가격은 330냥이다. 매도인 이홍기는 새로 작성한 매매문서를 매수인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문서의 끝에는 만일 뒷날 이 거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이 문기에 토지소재지로 명기된 보현면은 오늘날 남원시(南原市) 보절면(寶節面)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남원시 보절면은 보현면과 고절면(高節面)에서 한 자씩 따서 보절면으로 불리게 되었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 삼종질(三從姪) 이홍기와 증필(證筆)로는 삼종(三從) 이교전(李敎典)이 참여하였다. 논의 주인 이홍기만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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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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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朴春三 米三十二斗蘇俊明 米一石金成八 米一石 又二斗 盧石奉 獨芸姜士洪 米十斗利鄭東勉 利米一石 又五斗 姜士洪來姜成式 利米一石柳明軌 米一石高岩宅 米三十二斗 二十斗 李恒采獨芸 米十一斗水南谷 米十四斗丁成文 米四十六斗內十斗崔鳳獨芸 十斗德獨芸 五斗二 二今獨芸在一石一斗 十斗內實獨芸 米十斗長利崔鳳 十四斗 又十斗 丁成文獨条柳明軌 次子 美八斗 庚申賭米条 新成後本米上次金頤 七十二斗 又昨条十四斗內十斗二束獨芸 在七十六斗木洞宅 二十斗成祚 二十四斗京七 八斗 又柿谷宅 二十斗李泰永 達文 在二斗 再 二十八斗 又昨条二斗 金哥条 三十斗吳明五 上在 一同金命道 三十四斗 在文二同柳一鳳 米十斗 明五處標給利丁鴨谷 在十四斗 二升 又米五斗姜制大 四斗二升德洞宅 二十四斗內 二月減次金東順 米二斗 己未 条 米九斗 庚申 条 合十一斗 価七十七兩魯平洞 租十八斗梁堯洞 米十二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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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남원(南原)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추수기(秋收記) 1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庚申 庚申 1920 南原 全州李氏門中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0년에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회계기(會計記) 전북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경신년 회계기(會計記)이다. 경신년은 1920년으로 추정된다. 어느 누가 얼마만큼의 쌀을 빌려갔는지, 빌려 간 쌀에 대한 이자는 어느 정도인지, 빌려 간 후 얼마를 갚았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본 회계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25명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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