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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더위 酷熱 겹겹의 더운 구름 자욱하여 걷히지 않고 疊疊炎雲鬱未開축융121)의 엄한 명으로 중복이 돌아왔네 祝融酷令再回庚때때로 두보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으니122) 有時欲發少陵叫어디서 하삭의 술잔123) 기울일 수 있을까 何處能傾河朔杯돌은 벌겋게 달아올라 부술 수 있을 듯하고 石見爍紅疑可碎산은 까맣게 타서 장차 무너질 것만 같네 山經焦黑若將頹만백성을 말끔히 소생시킬 일 머지않았으니 淸蘇萬姓前期在옥우124)에서 하룻밤에 가을바람 재촉하리라 玉宇金風一夕催 疊疊炎雲鬱未開, 祝融酷令再回庚.有時欲發少陵叫, 何處能傾河朔杯?石見爍紅疑可碎, 山經焦黑若將頹.淸蘇萬姓前期在, 玉宇金風一夕催. 축융(祝融) 고대 화신(火神)의 이름이자, 남방(南方) 또는 남해(南海)를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관자(管子)》 〈오행(五行)〉에, "사룡을 얻어 동방을 다스리고, 축융을 얻어 남방을 다스렸다.〔得奢龍而辯於東方, 得祝融而辯於南方.〕"라고 하였다. 두보(杜甫)처럼……싶으니 너무나 더워서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라는 말이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 〈초가을 무더위에 시달리는데 문서가 계속 쌓이네[早秋苦熱堆案相仍]〉에 "관복 띠를 매니 더워 미칠 듯 크게 소리 지르고자 하는데, 문서는 어찌 급하게 서로 이어서 쌓이는가?〔束帶發狂欲大叫, 簿書何急來相仍?〕"라는 구절이 있다. '소릉(少陵)'은 두보의 호이다. 하삭(河朔)의 술잔 무더운 여름철에 피서(避暑)한다는 명분으로 마련한 술자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말에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자제와 하삭에서 삼복(三伏) 무렵에 술자리를 벌이고 밤낮으로 정신없이 마셔댄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初學記 歲時部上 夏避暑飮》 옥우(玉宇) 옥우경루(玉宇瓊樓)라 하여 달 속에 있는 궁궐을 말하는데, 천제(天帝)가 있는 하늘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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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정 윤섭 의 별장에서 崔春汀【潤燮】庄上 덕산 남쪽에서 문을 닫고 높이 누으니 閉門高臥德山陽세상 길 평탄치 않아 온통 태항산98)이네 世路難平盡太行접역99)의 의관에는 전범이 남아 있고 鰈域衣冠餘典範이정100)의 시례는 명성과 영광 이었네 鯉庭詩禮繼聲光책 속의 풍아101)는 모두 세속 초월했고 卷中風雅皆超俗정원의 난초 매화는 색다른 향기 있네 園裏蘭梅別有香만년에야 비로소 함께 시를 주고받으니 始共唱酬遲暮日부생이 무슨 일로 오래도록 겨를 없었나 浮生緣底久無遑 閉門高臥德山陽, 世路難平盡太行.鰈域衣冠餘典範, 鯉庭詩禮繼聲光.卷中風雅皆超俗, 園裏蘭梅別有香.始共唱酬遲暮日, 浮生緣底久無遑. 태항산(太行山)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인데,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삼국 시대 조조(曹操)의 시 〈고한행(苦寒行)〉에 "북쪽으로 태항산을 오르니, 길도 험하여라 어쩌면 이리 높은가. 구절양장 구불구불한 길에, 수레바퀴가 부서지누나.〔北上太行山, 艱哉何巍巍? 羊腸阪詰屈, 車輪爲之摧.〕"라는 구절이 보인다. 접역(鰈域) 가자미 모양으로 생긴 지역 또는 가자미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이다. 이정(鯉庭) 집안에서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그의 아들 이(鯉)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 불러 세우고는 시(詩)와 예(禮)를 배워야 한다고 훈계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論語 季氏》 풍아(風雅) 《시경》의 국풍(國風)과 대아(大雅)ㆍ소아(小雅)를 말하는데, 전하여 바르고 고상한 시문(詩文)의 비유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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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오씨 보의회안》 서문 寶城吳氏輔誼會案序 내가 항상 여씨(呂氏)의 향약(鄕約)124)과 범씨(范氏)의 의장(義庄)125)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삼고(三古) 시대126)의 남은 제도에 가장 잘 맞고, 지금의 시대에 행해질 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삼고 시대의 백성에게 행해졌던 정사(政事)는 물을 담아도 새지 않을 만큼 치밀했다고 이를 만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익을 좇아 시끄럽고 번잡하게 오가면서 점차 쇠락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땅을 쓴 듯 다 사라져 버려졌으니, 선비가 옛날의 도를 배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물러나 시골 마을의 친구들이나 집안의 친족들과 함께 강론하며 행할 수 있는 것들이 어찌 이 두 가지와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나의 벗 송봉옹(松峰翁)은 이릉(爾陵 능주(綾州)의 옛 이름)의 남쪽에 은거하며 함께 거주하는 친족 10여 사람과 의장의 규례를 모방해 모임을 창설하여 '보의회(輔誼會)'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모여 강습함에 때가 있게 하고, 가르치고 봉양함에 재물이 있게 하였으며, 길흉에는 필요한 물건이 있게 하고, 환난에는 도움이 있게 하였으니, 은혜와 정분을 돈독히 하여 서로 지켜주고 돕는 것이 굳고 단단하면서도 주도면밀하고 상세하다고 이를 만하다. 오씨(吳氏)의 후손이 받게 될 복이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나는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처지로 외롭게 떠돌아다니며 거처를 정할 겨를도 없는데, 힘입을 곳이 없는 외로운 사직(社稷)을 탄식하고, 구원을 요청할 곳이 없는 사신(使臣)들을 애통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모임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적으로 감동과 부러움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이 글을 써서 오씨를 위해 축하한다. 余嘗愛呂氏之鄕約。范氏之義庄。最得三古之遺制。而可行於今日。蓋三古維民之政。可謂盛水不漏。而熙往穰來。漸次零替。至於今日。掃地盡矣。爲士者。學古之道。旣不得有爲於斯世。則退而與鄕黨知舊門闌族親。可以講行者。豈非此二事乎。余友松峰翁。隱居爾陵之南。與其族之同居者十餘人。倣義庄之規。倡以設之。命曰。輔誼會。使講聚有時。敎養有資。吉凶有須。患難有助。所以篤恩誼而相維持者。可謂鞏固而周詳矣。吳氏後祿。豈有量哉。余以孤根弱植。煢煢流離。不遑定居。歎杕社之無賴。哀原隰之無求。今於此會之設聞。不勝感艶之私。謹書此爲吳氏賀焉。 여씨(呂氏)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그 규범은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규계하고, 예속(禮俗)으로 서로 사귀고, 환란(患難)을 서로 구제한다는 네 조항이었다. 이것이 후대에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六 善行》 범씨(范氏)의 의장(義庄) 송(宋)나라 때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자신의 봉급과 재산 일부로 전지(田地) 수천 묘(畝)를 사들여 만든 전장(田莊)을 말하는 것으로, 범중엄은 이 땅에서 거둔 조(租)를 저축해 두었다가 혼가(婚嫁)나 상장(喪葬)을 치르지 못한 종족들에게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宋史 卷314 范仲淹列傳》 《小學 卷5 嘉言》 삼고(三古) 시대 중국 고대시대 때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는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이 다스렸던 하(夏)ㆍ은(殷)ㆍ주(周)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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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탄 流民歎 유랑민 유랑민이여 유랑민을 어이하나 流民流民柰流民삼남 땅 모든 곳이 적지137)가 되었구나 赤地三南率土濱부모 처자식이 곡하며 서로 부여잡기를 爺孃妻兒哭相持날 버리고 오늘 어디로 가려는가 하니 棄我今日欲何之말하기를 서북쪽으로 삼천리를 가면 爲言西北三千里공장이 곳곳에 있어 돈이 물 같다 하네 工場處處錢如水항아리의 곡식 팔아 여비를 마련했으나 傾放甁粟作盤纏돈을 입수하지 못해 곤궁하기만138) 하네 錢未入手徒顚連옛날에 맹자가 근심하고 탄식했던 것은 昔在鄒賢已憂歎노약자는 죽고 건장한 자는 흩어짐인데139) 老弱者死壯者散하물며 지금과 같은 변란에 있어서랴 矧在而今之變亂유랑민 유랑민이여 참으로 한탄스러우나 流民流民眞堪歎실로 하늘이 한 일인데 어찌하겠는가 天實爲之柰若何 流民流民柰流民? 赤地三南率土濱.爺孃妻兒哭相持, 棄我今日欲何之?爲言西北三千里, 工場處處錢如水.傾放甁粟作盤纏, 錢未入手徒顚連.昔在鄒賢已憂歎, 老弱者死壯者散.矧在而今之變亂, 流民流民眞堪歎, 天實爲之柰若何? 적지(赤地) 흉년이 들어 거둘 만한 농작물이 하나도 없게 된 땅을 말한다. 곤궁하기만 원문의 '전련(顚連)'으로,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것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온 천하의 쇠잔하고 병든 자, 고아와 독거노인과 홀아비와 과부가 모두 곤궁하여 하소연할 곳 없는 나의 형제들이다.〔凡天下疲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之顚連而無告者也.〕"라는 표현이 있다. 맹자(孟子)가……흩어짐인데 맹자가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제(齊)나라 대부 공거심(孔距心)을 질책한 것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하〉에 "맹자가 말하기를 '흉년이 들어 그대의 백성 중에 노약자는 구렁이에 빠지고 흩어져 사방으로 가는 장성한 사람들도 몇 천 명이 된다.'라고 하자, 말하기를 '이것은 거심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지금 남에게서 소와 양을 받아 대신해서 기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목장과 꼴을 구할 것이다. 목장과 꼴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소와 양을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또한 소와 양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볼 것인가?'라고 하자, 말하기를 '이는 거심의 죄입니다.'라고 하였다.〔凶年饑歲, 子之民, 老羸轉於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曰: 此非距心之所得爲也. 曰: 今有受人之牛羊而爲之牧之者, 則必爲之求牧與芻矣. 求牧與芻而不得, 則反諸其人乎? 抑亦立而視其死與? 曰: 此則距心之罪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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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정150)에서 송심석151) 어른의 시에 차운하다 龜巖亭, 次心石宋丈韻 백일홍이 만발하여 맑은 물가에 잠겼는데 赬桐滿發蘸晴汀하늘이 이름난 정자 가져다 승지에 두었네 天把名亭勝地停맑은 절조는 당시에 세속을 일찍 벗어났고 淸節當年曾脫俗남긴 꽃다운 이름은 천년 뒤에도 향기 나네 遺芳千載尙聞馨옥봉에 달빛이 비추면 먼저 문을 열고 玉峯月照先開戶하포에서 바람 불어도 사립문 닫지 않네 荷浦風來不掩扃산인동의 바위는 얘기를 나눌 만하였으니 散人洞裏石堪語원방 계방 같은 형제라는 말도 들을 만하네152) 元季雙難更足聽 赬桐滿發蘸晴汀, 天把名亭勝地停.淸節當年曾脫俗, 遺芳千載尙聞馨.玉峯月照先開戶, 荷浦風來不掩扃.散人洞裏石堪語, 元季雙難更足聽. 구암정(龜巖亭)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장군목길 1028에 있는 정자로, 구암(龜巖) 양배(楊培)의 덕망을 흠모하여 1898년에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송심석(宋心石) 심석은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의 호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두문불출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은사금을 가져왔으나 거절했고, 일제가 경학원 강사로 천거하자 거절한 뒤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저서에 〈학문삼요(學問三要)〉·〈사례축식(四禮祝式)〉·〈용학보의(庸學補疑)〉 등이 있다. 산인동(散人洞)의……만하네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양배(楊培)와 양돈(楊墩) 형제가 벼슬에 나아갈 뜻을 끊고 순창군 구미리 서쪽의 산인동에 은거하여 자연과 벗한 일을 말한다. 산인동 물가에 이들이 분점(分占)하여 낚시했던 '배암(培巖)'ㆍ'돈암(墩巖)'이라는 형제바위가 있다. 《旅庵遺稿 卷4 散人洞記》 《頤齋遺藁 卷23 梅堂慕亭二楊公小傳》 원방(元方)과 계방(季方)은 후한(後漢)의 진기(陳紀)와 진심(陳諶)의 자(字)인데,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나 난형난제(難兄難弟)로 불렸다. 《後漢書 卷62 陳寔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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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운약에게 써 준 서문 贈鄭君雲躍序 지금까지 영남 내의 여러 군(君)들을 전별하며 말을 해준 것이 다소 없지 않지만, 유독 운약(雲躍)의 요청에 더욱 감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나와 운약은 지난봄에 뇌룡정(雷龍亭)127)에서 한 번 만나고, 지금 또 화엄사(華巖寺)에서 다시 만났으니, 교분이 오래되고 마음이 맞았다. 게다가 운약이 애산옹(艾山翁)128)의 종부제(從父弟)가 됨에랴. 그 교분과 정분으로 보면 구구하나마 한마디 말을 해주는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뒤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발굽에 고인 물은 바다를 구경한 눈에는 물로 보이기 어렵고, 반딧불의 빛은 촛불을 마주한 자리에서 빛이 되기 어렵다. 나는 운약에게 발굽에 고인 물이나 반딧불이 되겠지만 사양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털끝만큼이나마 보탬이 되려함은 어째서인가? 말을 해주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군이 애산옹의 아우이기 때문이고, 감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도 군이 애산옹의 아우이기 때문이다.명(明)나라의 유학자 방손지(方遜志 방효유(方孝孺))의 말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저명한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음이 없지만, 일반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비단 자손만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친속(親屬 친족)의 경우도 그렇다. 선(善)은 크지 않으면 책무에 걸맞을 수 없고, 악은 비록 작더라도 오히려 조롱을 끼칠 수 있으니, 운약은 이것을 알고 있는가? 내가 운약에게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말을 해준다면 이 말보다 먼저 말해줄 것이 없으니, 운약은 힘쓰기 바란다. 今爲嶺中諸君之別。不無多少贈言。而獨於雲躍之請。尤有所不敢者何哉。吾與雲躍。去年春。一見於雷龍亭。今又再見於華巖寺。舊交矣心契矣。而又爲艾山翁從父弟乎。以其契誼。則區區一言之贈。必不在他人之後矣。然蹄涔之滴。難爲水於觀海之眼。螢爝之光。難爲照於對燭之筵。吾於雲躍。爲蹄涔螢爝。有所不辭。而其絲毫之補何。不欲無言者。爲艾翁之弟故也。不敢有言者。亦艾翁之弟故耳。明儒方遜志有言曰。人莫不喜爲名人子孫。而不知其尤難於衆人。非但子孫爲然。在親屬亦然。善不大。則不足以稱其責。惡雖小。而猶足以貽其譏。雲躍知之乎。吾於雲躍。不告則已。如告之。則無有先於此者。願雲躍勉之。 뇌룡정(雷龍亭)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45세 때 모친의 상을 당하고 고향인 삼가(三嘉) 토동(兎洞)에서 여묘를 마친 뒤에 이곳에 세운 정자로, 60세까지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애산옹(艾山翁)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으며,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ㆍ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더불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리었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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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탄 無薯歎 대지의 백성 식량은 날로 어려우나 大地民食日以艱나는 구학125)의 근심을 먼저 끊었네 吾人先切溝壑憂벼 조 기장 피는 원래 분수 아니고 稻梁黍稷元非分밀 보리 팥 콩도 도모하기 어렵네 來牟豆菽猶難謀고구마만이 내 식량으로 적당하니 惟有甘薯宜吾食곡물에 비해서 거두기가 용이하네 比諸穀物容易收봄에 싹 터 여름에 심고 가을에 캐니 春苗夏種秋而採팔뚝만큼 큰 뿌리가 내 집에 가득하네 根大如腕盈我屋생으로 먹든 익혀 먹든 불가함이 없고 生食熟食無不可술 밥 떡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네 酒飯與餠惟所欲줄기는 나물로 잎으로는 국을 만들고 莖爲菜兮葉爲羹넝쿨도 땔감으로 만들려면 말려야 하네 蔓亦爲薪須乾曝청성126)이 이 물건 있는 줄 일찍 알았다면 淸聖早知有此物수양산 기슭에서 고사리 캘 필요 없었으리 不必采薇首陽麓나에게 황무지를 새로 개간한 밭이 있으니 我有荒地墾新田이걸 심으면 풍족한 생활 되기에 넉넉하리 種此優作餘生活그 가운데에 말만큼 커다란 초가집을 짓고 中置草廬如斗大담서실이란 세 글자로 편액을 달았네 扁以三字啖薯室여기서 담소하고 여기에서 먹고 휴식하며 爰是言笑爰食息게로기 먹었던 채옹127)과 짝이 되고 싶었네 蔡翁啖薺擬作匹어찌하여 금년엔 날씨가 너무나 가물었나 夫何今年天亢旱봄에 난 싹이 일찌감치 쑥쑥 자라지 못했네 春苗早已未長茁심은 것이 많지 않은데다가 말라 죽었으니 種不多兮更枯死백지128)에는 부질없이 잡초만 무성해졌네 白地空自草桀桀아, 하늘이 우리들에게 嗚呼皇天於我輩이런 곤궁함을 내리니 얼마나 큰 액운인가 降此窮困一何厄걱정 번뇌가 옥처럼 이룬다129)고 말하지 말라 莫云憂戚庸玉成건어물 가게에서 찾을 신세130)를 어찌하겠나 其如薧魚肆中索요절과 장수함에 의심하지 않을131) 뿐 아니라 除非夭壽無貳心하늘의 처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이네 俟天處分靜屛息다행히도 그날그날 견디며 살아가다 보면 如幸得過且過也내년에는 그래도 다시 고구마를 먹게 되리 明年猶復此薯食 大地民食日以艱, 吾人先切溝壑憂.稻梁黍稷元非分, 來牟豆菽猶難謀.惟有甘薯宜吾食, 比諸穀物容易收.春苗夏種秋而採, 根大如腕盈我屋.生食熟食無不可, 酒飯與餠惟所欲.莖爲菜兮葉爲羹, 蔓亦爲薪須乾曝.淸聖早知有此物, 不必采薇首陽麓.我有荒地墾新田, 種此優作餘生活.中置草廬如斗大, 扁以三字啖薯室.爰是言笑爰食息, 蔡翁啖薺擬作匹.夫何今年天亢旱? 春苗早已未長茁.種不多兮更枯死, 白地空自草桀桀.嗚呼皇天於我輩, 降此窮困一何厄?莫云憂戚庸玉成, 其如薧魚肆中索.除非夭壽無貳心, 俟天處分靜屛息.如幸得過且過也, 明年猶復此薯食. 구학(溝壑) 시궁창과 산골짜기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청성(淸聖) 깨끗한 성인(聖人)이라는 뜻으로, 백이(伯夷)를 가리킨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윤(伊尹)ㆍ백이(伯夷)ㆍ유하혜(柳下惠)ㆍ공자(孔子)의 행적을 열거하면서, "이윤은 성인 중에 천하를 구제하기로 자임한 자이고, 백이는 성인 중에 깨끗한 자이고, 유하혜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이고, 공자는 성인 중에 때에 알맞게 행한 자이다.〔伊尹聖之任者也, 伯夷聖之淸者也, 柳下惠聖之和者也, 孔子聖之時者也.〕" 하였다. 게로기 먹었던 채옹(蔡翁) 송(宋)나라 유학자 채원정(蔡元定)이 서산(西山)에서 공부할 적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게로기를 캐어 먹었던 일을 말한다. '제(薺)'는 제니(薺苨) 혹은 게로기라고도 하는데, 사삼(沙蔘)과 비슷한 다년생 식물이다. 《송사(宋史)》 〈채원정열전(蔡元定列傳)〉에 "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배고픔을 참고 게로기를 캐어 먹으며 글을 읽다가, 주희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고자 하였다. 주희가 그의 학문 실력을 시험해 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이 사람은 나의 오래된 벗이라고 할 것이니, 제자의 반열에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登西山絶頂, 忍饑啖薺讀書, 聞朱熹名, 往師之. 熹扣其學, 大驚曰: 此吾老友, 不當在弟子列.〕"라는 기록이 나온다. 백지(白地)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거두어들일 것이 없게 된 땅을 말한다. 걱정……이룬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사람이 옥처럼 훌륭하게 완성된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빈천과 우척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 하였다. 건어물……신세 현재의 곤경을 해결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을 말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붕어 한 마리가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있으면서 길 가는 장주(莊周)에게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가 자신을 살려줄 수 있겠느냐고 하므로, 장주가 장차 오월(吳越) 지방으로 가서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다 대주겠다고 하자, 그 붕어가 화를 내며 "나는 지금 당장 한 말이나 한 되쯤의 물만 얻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하니 일찌감치 나를 건어물 가게에서 찾는 것이 낫겠다.〔吾得斗升之水然活耳, 君乃言此, 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요절과……않을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이는 말로, "마음을 보존하여 성(性)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받들어 섬기는 일이고,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의혹을 품지 않고서 몸을 닦으며 기다리는 것은 천명을 세우는 일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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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의사155)를 기리며 3수 설진영(薛鎭永)이 순창에서 거주하였는데 성씨를 바꾸는 변고가 생기자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贊薛義士【鎭永2)居淳昌, 改姓之變, 投井而死.○三首】 공과 같은 높은 절개는 세상에 없었으니 高節如公世所無의리 취해 저버리지 않은 선유를 배웠네 取熊不負學先儒성명을 보전하여 돌아가 조상을 모시니 保全名姓歸陪祖그 하늘만을 보았지 몸을 보지 않았네 但見其天不見軀큰 것을 잃고 작은 살갗 기를 줄만 아니156) 失大惟知養小膚분분한 속인들은 눈썹 수염에도 부끄러우리 紛紛俗輩愧眉須청컨대 우뚝 선 동전자157)를 보라 請看卓立銅田子너무 차이가 나 품성이 다른가 의심스럽네 懸絶還疑稟性殊공을 조문하여 공연히 탄식할 필요 없으니 吊公不用謾歎吁우리 유림에 장부 있음을 스스로 축하하네 自賀吾林有丈夫멀리서 서풍 아래 세 번 술을 따라 올리니 遙酹西風三酌酒긴 무지개가 저녁에 해산 모퉁이에 일어나네 長虹暮作海山隅 高節如公世所無, 取熊不負學先儒.保全名姓歸陪祖, 但見其天不見軀.失大惟知養小膚, 紛紛俗輩愧眉須.請看卓立銅田子, 懸絶還疑稟性殊.吊公不用謾歎吁, 自賀吾林有丈夫.遙酹西風三酌酒, 長虹暮作海山隅. 설 의사(薛義士)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을 말한다.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이다.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1895년(고종32)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ㆍ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0년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저서로 《남파유고(南坡遺稿)》가 있다. 큰……아니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 "먹고 마시기만 하는 사람은 남이 천하게 여기니, 작은 것을 길러 큰 것을 잃기 때문이다.〔飲食之人, 則人賤之矣, 爲其養小以失大也.〕"라고 한 대목을 말한다. 동전자(銅田子) 설진영(薛鎭永)을 가리킨다. 순창 설씨는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등에 가계가 이어져 동전리의 지명을 본 따 동전 설씨(銅田薛氏)로도 불린다. 永 底本에는 "泳".《淳昌薛氏族譜》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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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치실 신연 과 이별하며 5수 別黃致實【信淵○五首】 천리 길을 왕래하는데 往來千里路아쉽게 설날160)에 이별하네 怊悵三朝別어찌하여 너무나 바쁜가 胡爾太悤悤슬프게도 궁귀161)가 빼앗네 傷哉窮鬼奪술도 없이 즐겁게 노닐다가 無酒以遨遊죽을 끓여 마주 앉아 마시네 煮饘相對歠누가 예절이 엉성하다 말하랴 誰言禮節疎친의가 친밀하기 때문이었네 爲是親誼密선군 생각하라는 말로 그대 권면하니162) 勖子先君思수없이 꺾이더라도 굽히지 말게 不回經百折그저 증별의 말로 대신하였으니 聊將當贈言아무쪼록 오늘을 잊지는 말게나 愼勿忘此日구당163)은 지금 세상의 길이요 瞿塘今世程구렁텅이는 내 집안의 방이네 溝壑吾家室훗날의 만남이 있을까 없을까 後會有乎不근심하는 마음만 괜히 산란하네 憂心空惙惙행색이 차츰차츰 멀어지니 行色看看遙무엇을 잃은 듯 멍해지네 茫然如有失눈이 희미해져 머리 돌리니 眼迷方首回나도 모르게 눈물 쏟아지네 不覺淚河決 往來千里路, 怊悵三朝別.胡爾太悤悤? 傷哉窮鬼奪.無酒以遨遊, 煮饘相對歠.誰言禮節疎? 爲是親誼密.勖子先君思, 不回經百折.聊將當贈言, 愼勿忘此日.瞿塘今世程, 溝壑吾家室.後會有乎不? 憂心空惙惙.行色看看遙, 茫然如有失.眼迷方首回, 不覺淚河決. 설날 원문의 '삼조(三朝)'는 세(歲)ㆍ월(月)ㆍ일(日)의 아침으로, 정월 초하루를 일컫는 말이다. 궁귀(窮鬼) 항상 사람에게 달라붙어서 그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일찍이 자신을 괴롭히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궁귀(窮鬼)를 쫓아 버리겠다는 뜻으로 〈송궁문(送窮文)〉을 지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선군……권면하니 《시경》 〈연연(燕燕)〉에 "선군(先君)을 생각하라는 말로써 과인을 권면하도다.〔先君之思, 以勖寡人.〕"라고 한 표현을 끌어온 것이다. 구당(瞿塘) 중국 사천성(泗川省) 삼협(三峽)의 하나인 구당협(瞿唐峽)을 말한다. 이곳은 강 양쪽 언덕이 가파르게 높이 치솟은데다가 골짜기 어귀의 강 가운데 염여(灎澦)라는 큰 바위가 서 있어 물살이 몹시 사납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전복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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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의 〈증과암〉 시에 보운(步韻)497)하다 2수 步敬山《贈果菴》韻【二首】 예로부터 한 뜻이 삼군보다 나았으니498) 從來一志勝三軍이해에 대해 언제 무게를 따졌던가 利害何曾較兩斤모두 가르침 받들고 스승 높일 책임 있으니 奉訓尊師均有責원컨대 힘을 합쳐 음산한 구름을 쓸어내세 願言同力掃陰雲인은 곡식 씨앗 같고499) 씨앗엔 뿌리 있으니 仁爲穀種種有根가을 열매가 끝내 익는 것도 봄에 시작되네 秋實終成厥始春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그대는 어진 사람이니500) 好惡知君仁者是향리에서는 드물게 그 후손을 번창케 하리라 必昌其後罕鄕隣 從來一志勝三軍, 利害何曾較兩斤?奉訓尊師均有責, 願言同力掃陰雲.仁爲穀種種有根, 秋實終成厥始春.好惡知君仁者是, 必昌其後罕鄕隣. 보운(步韻) 두 수 이상으로 된 다른 사람의 연작시 운을 따라서 차례대로 차운(次韻)하여 시를 짓는 것을 이른다. 화답시 중에 뜻은 문답하는 것 같으나 다른 운부(韻部)를 사용하는 것을 '화시(和詩)'라고 이르며, 운부는 같으나 글자가 다른 것을 '화운(和韻)', 글자는 같으나 순서가 다른 것을 '용운(用韻)', 순서까지 모두 같은 것을 '보운(步韻)'이라고 한다. 한……나았으니 《논어》 〈자한(子罕)〉에 "삼군을 거느리는 장수(將帥)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인(仁)은……같고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인은 인심이다.〔仁, 人心也.〕"라고 말한 것에 대해, 주희가 주석에서 "정자가 말한 '마음은 곡식의 씨와 같고 인은 생생의 이치이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程子所謂心如穀種, 仁則其生之性是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능히……사람이니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말하기를 "오직 인자만이 사람을 제대로 좋아하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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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유고》129) 서문 雲巖遺稿序 《주역》에 이르기를, "절개가 돌처럼 단단한지라 하루를 마치지 않고 떠나가니, 정하고 길하다."130)라고 하였는데, 부자(夫子 공자)가 이 말을 찬미하여 말하기를, "절개가 돌처럼 단단하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바로 결단함을 알 수 있다. 군자는 기미를 알고 드러남을 알며, 유순함을 알고 강함을 아니, 수많은 사람이 우러러본다."131)라고 하였다. 송자(宋子 송시열)가 《춘추》나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소중옹(疏仲翁)132)을 안타깝게 여겨 대서특필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운암옹(雲巖翁)은 젊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라 대직(臺職)133)을 역임하고, 명성과 덕망이 드높아 융중한 자리에 의망(擬望)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니,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어 어버이를 빛나게 하고 만종(萬鍾)의 봉록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들이 앞날에 차례대로 있을 일로 기약되었다. 그러나 기미를 보고 용감하게 결단하여 호연(浩然)하게 〈귀거래사(歸去來辭)〉134)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구름이 걸쳐 있는 적막한 숲속에서 화락한 모습으로 유유자적하며 노닐었다. 아,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며, 얻을 줄만 알고 잃을 줄 몰라 승두(升斗)만한 조그마한 이익에 턱을 늘어뜨린 채 부유한 사람들이 가엾게 여기며 주는 음식에 침을 흘리는 사람이 어찌 이러한 의리를 알 수 있겠는가.평소에 지었던 문고(文稿)는 산실되어 수습하지 못하였고, 만년에 주워 모은 것들 사이에서 얻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춘추》나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의 붓을 잡는 사람들이 송자(宋子)가 소중옹(疏仲翁)을 가엾게 여긴 것처럼 반드시 그를 대서특필하여 백세토록 썩지 않게 할 것이니, 보잘 것 없는 문고가 있든 없든 또는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다만 자손의 마음에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삼가 모아서 약간을 엮었을 따름이다. 易曰。介于石。不終日貞吉。夫子贊之曰。介如石。焉用終日。斷可識矣。君子知微知彰。知柔知剛。萬夫之望。宋子哀疏仲翁所以見與於春秋綱目之書。而大書特書者。其不以是耶。雲巖翁少年釋褐。歷踐臺職。聲望藹蔚。期擬隆重。專城之榮。萬鍾之養。此其前頭次第事耳。然而見幾勇決。浩然賦歸。囂囂徜徉於雲林寂寞之中。嗚呼。知進而不知退。知得而不知喪。朶頤於升斗之利。垂涎於輕肥之憐者。曷足以知此等義諦耶。平日文稿散逸不收。而得於晩後掇拾之間者。亦無幾焉。然世之秉春秋綱目之筆者。必將大書特書。使之不朽於百世。如宋子哀疏仲翁。何待於區區文稿之有無與多寡哉。但子孫之心。不欲其泯然。謹輯之爲若干編云耳。 운암유고 대한제국 때 장흥(長興) 출신의 문신 정두흠(鄭斗欽, 1832~1901)의 문집인 《雲巖集》을 말하는 것으로, 1918년에 아들 제하(濟夏)가 편집ㆍ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의림(鄭義林)의 서문이 있고, 4권2책이며, 목활자본이다. 운암은 정두흠의 호이고, 자는 응칠(應七)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처음 최상관(崔相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항로(李恒老)를 사사하였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이르렀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을 올렸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개가……길하다 《주역》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보인다. 절개가……우러러본다 《주역》 〈계사하전(繫辭下傳)〉에 보인다. 소중옹(疏仲翁) 벼슬길에서 한창 득의(得意)했을 때 미련 없이 물러나 초야에서 자신의 지조를 지켰던 옛 인물이다. 대직(臺職) 대간(臺諫)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을 말한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중국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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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경에게 써 준 서문 贈曺彛卿序 조군 이경(曺君彛卿)은 선정신(先正臣)의 후예이며 법도 있는 집안의 자제로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있고, 현철한 사우(師友)가 있어서 시례(詩禮)135)와 학문의 가르침에 종사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고,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다."136)라는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겠다.아, 서계(書契)137)가 만들어진 이후로 책 읽는 사람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으며, 십실(十室)138)이 형성된 이후로 충신(忠信)의 자질을 지닌 사람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그 도를 듣고 천하 후세에 법을 드리운 사람은 얼마 없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바라건대 이경은 이것을 돌이켜 구하여 통렬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사람으로 말하면 성인을 표준으로 삼고, 학문으로 말하면 도를 표준으로 삼아서 털끝만큼이라도 지극하지 못하거든 우리의 일에 결함이 있다고 여긴다면 자연히 이치를 가까이 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저절로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이다. 훗날 호남 고을에서 도를 창도한 기풍이 동남쪽 사이에서 크게 떨쳐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나는 이경의 한 무리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曺君彛卿。以先正裔孫。法家子弟。有姿質之美。有師友之賢。而從事於詩禮學問之敎。眞所謂可與共學。可與適道者也。嗚呼。書契以後。讀書者何限。十室以往。忠信之質何限。然而聞其道而垂法於天下後世者。無幾焉。其故何居。願彛卿於此。反求而痛省之。言人則以聖爲準。言學則以道爲準。以爲一毫未至。便是吾事有闕。則自然切實近理。自住不得矣。他日湖鄕。若聞有倡道之風。大振於東南之間。則吾以爲出於彛卿一隊人也。 시례(詩禮) 가정에서 조부나 부친으로부터 전해지는 가학(家學)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뜰에 혼자 서 있을 때에 아들 이(鯉)가 지나가자 그에게 시(詩)와 예(禮)를 배웠는가 물어보고 그것의 중요성을 일러 주며 공부하라고 훈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더불어……있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말하기를 "더불어 학문을 함께 할 수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서계(書契) 상고 시대에 나무에 새겨 썼다는 최초의 문자를 말하는 것으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에는 노끈을 묶어 뜻을 전하여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서계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라는 글이 보인다. 십실(十室) 조그마한 고을을 비유하는 말로,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말하기를 "10여 가구 되는 조그만 고을에 반드시 나[丘]처럼 충신한 자가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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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천태산에 오르다 2수 偶上天台山【二首】 유유한 내 그리움은 강물처럼 길어 悠悠我思漢河長아득한 하늘 한쪽을 멀리 바라보네 極目杳然天一方무슨 생각으로 숲에서 앉고 눕는가 底意林間聊坐臥무단히 바위 위에서 혼자 방황하네 無端石上獨彷徨다정한 이웃 떡으로 배고픔 달래고 多情隣餠療飢腹사리 아는 아이의 술로 갈증을 푸네 解事兒樽沾渴腸가슴속 번뇌를 씻어내는 게 상쾌하나 滌過胸煩雖一快읊으며 돌아온 증광164)을 배우려 할까 詠歸詎擬學曾狂오래 세상 구경하며 길이 해를 보내고 싶어 久觀我欲度年長세상 밖으로 벽곡165)의 방법을 찾아 나섰네 物外行尋辟穀方유럽 아시아의 풍조에 질병의 고통이 생겨 歐亞風潮生疾痛영주산 천태산의 산천에서 혼자 방황하네 瀛台泉石獨彷徨어찌 성현이 남긴 가르침을 생각지 않는가 盍思聖哲曾垂訓한스럽게 선비의 무리도 마음을 바꾸었네 可恨儒流亦變腸아무리 따져 봐도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니 算去算來皆謾想무하향166)에서 술에 취해 광인이 되리라 無何鄕裏醉成狂 悠悠我思漢河長, 極目杳然天一方.底意林間聊坐臥? 無端石上獨彷徨.多情隣餠療飢腹, 解事兒樽沾渴腸.滌過胸煩雖一快, 詠歸詎擬學曾狂?久觀我欲度年長, 物外行尋辟穀方.歐亞風潮生疾痛, 瀛台泉石獨彷徨.盍思聖哲曾垂訓? 可恨儒流亦變腸.算去算來皆謾想, 無何鄕裏醉成狂. 증광(曾狂) 광(狂)은 뜻만 크고 행실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데, 광이란 호칭을 받았으므로 증광이라 한 것이다. 《論語 先進》 벽곡(辟穀) 화식(火食) 하지 않고 생식을 하는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을 말한다. 무하향(無何鄕)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흔히 이상향(理想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가 혜자(惠子)와 더불어 논변하면서 말하기를 "현재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데가 없다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나무를 아무것도 없는 고장, 광막한 들판에다가 심어 놓고서,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에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는가?〔今子有大樹, 患其無用, 何不樹於無何有之鄕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라고 하였다. 《莊子 逍遙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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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501)의 〈야귀재〉 시에 차운하다 次吳極卿《夜歸齋》韻 일만 솔 깊은 곳에 초가집 하나 있으니 萬松深處一茅堂자나 깨나 안풍502)을 누가 감히 잊으랴 寤寐安豊詎敢忘물 맑은 밭고랑엔 싹이 크는 걸 보겠고 水白田間看苗碩등불 푸른 책상에는 운초503)의 향기 있네 燈靑案上有芸芳문을 나섬에 어디에 발을 디딜 수 있을까 出門何地堪投足도를 걱정해 애가 끊이지 않은 적 없었네 憂道無時不斷腸썰렁한 지금의 사업일랑 얘기하지 말게나 泠淡休言今事業훗날 태괘의 양이 자라는504) 좋은 기반이니 好基他日泰陽長 萬松深處一茅堂, 寤寐安豊詎敢忘?水白田間看苗碩, 燈靑案上有芸芳.出門何地堪投足? 憂道無時不斷腸.泠淡休言今事業, 好基他日泰陽長. 오극경(吳極卿) 극경은 오병수(吳秉壽, 1883~1961)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수산(壽山)이다. 사호(沙湖) 오익창(吳益昌)의 후손으로, 전북 고창군 아산면 죽산(竹山)에서 출생하여 종숙 호산(壺山) 오죽하(吳竹下)의 문하에서 배웠다. 저서에 《수산집》 5권 3책이 있다. 안풍(安豐)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에 은거한 고사(高士) 동소남(董召南)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오병수를 가리킨다. 동소남은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면서 살림을 잘 꾸려서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니, 그의 벗 한유가 〈동생행(董生行)〉이란 노래를 지어 그를 칭찬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운초(芸草) 향내 나는 풀로 책이 좀먹는 것을 방지한다. 태괘(泰卦)의 양(陽)이 자라는 1월에 해당하는 태괘는 양(陽)인 군자가 안에 있고 음(陰)인 소인이 바깥에 있으니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소멸되는 것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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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치실 군이 멀리서 찾아왔다가 이별할 때에 최여중의 집에 함께 가서 세 사람이 회포를 펴다 무인년(1938) 黃君致實遠訪別時, 同至崔汝重家, 三人敍懷【戊寅】 세 벗505)의 난초 같은 말에 한 방이 향긋하나 三益蘭言一室芳문을 나서면 풍상이 들이치지 않는 곳이 없네 出門無處不風霜진나라 피할 망상에 복사꽃 뜬 물506)을 찾으나 避秦妄想尋桃水공자를 배우는 단방507)은 주자를 본받는 것이네 學孔單方法紫陽북리의 두터운 정에 돌아보는 마음 많았는데 北里厚情多眷眷서원의 높은 의기 또한 당당하네 西原高義亦堂堂하룻밤 옛사람의 글을 읽는 것보다 나으나 一宵勝讀前人語나는 무지하여 부끄럽고 감사하기 그지없네 而我空空愧感長 三益蘭言一室芳, 出門無處不風霜.避秦妄想尋桃水, 學孔單方法紫陽.北里厚情多眷眷, 西原高義亦堂堂.一宵勝讀前人語, 而我空空愧感長. 세 벗 원문의 '삼익(三益)'으로, 세 사람의 유익한 벗이라는 말이다.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으니, 정직하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는 말이 나온다. 복사꽃 뜬 물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곳 또는 이상향을 비유한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하면, 동진(東晉)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의 한 어부가 일찍이 시내를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가 문득 도화림(桃花林)이 찬란한 선경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진(秦)나라 때 피란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단방(單方) 원래는 민간에서 전래되는 약방문으로, 한두 가지 약재를 쓰지만 신통하게 효력이 잘 나타나는 약을 말한다. 전하여 여기서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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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회안》 서문 興學會案序 완도군(莞島郡)은 남해(南海)의 궁벽하고 삭막한 바닷가에 있고, 서울에서 천여 리나 떨어져 있어 문물(文物)과 예교(禮敎), 의장(儀章)의 등위(等威)가 내륙 지역의 여러 군(郡)들보다 조금 손색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오래되었다.해의 운세가 양구(陽九)139)를 침범하고, 구야(九野)140)가 막혀 이단의 학설과 가르침이 날로 치성하고 달로 확장하면서 바람에 휩쓸리고 파도에 진탕되어 마르고 깨끗한 땅이 없게 된 듯하였다. 그러나 완도의 선비들이 먼저 부자묘(夫子廟)를 세우고, 그 다음에 학문을 진흥시키는 규례를 갖추어서 학교에 모여 시서(詩書)의 학업을 강습하고, 제물을 진설하여 읍(揖)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익히는 것이 성대하게 바람이 불 듯 유행하여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이는 내륙 지역의 여러 군에는 없는 것이니, 어찌 기수(氣數)가 순환하여 드러나고 감추어짐에 때가 있어서 그렇겠는가. 어쩌면 하늘이 사문(斯文)을 다 잃지 않고자 하여 한 줄기 양맥(陽脈)을 한 모퉁이 지역에 모아 두게 함으로써 훗날 크게 올 장본(張本 일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것인가?무성(武城)에서 소 잡는 칼을 사용했다고 한 것은 대체로 자유(子游)가 홀로 실행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서인데141), 하물며 오늘날 같은 세상에 궁벽하고 삭막한 바닷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문고를 타며 시 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랴. 만약 부자(夫子 공자)가 살아계셨다면 어찌 빙그레 웃을 뿐이겠는가.민중(閩中)142)은 예로부터 먼 남쪽 오랑캐 지역으로 일컬어졌는데, 치산(廌山)과 구산(龜山)143) 두 선생을 얻고 나서 마침내 천하의 문명한 고을이 되었으니, 지금의 완도군이 다만 당시의 민중이 되지 않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 오직 완도군의 선비들은 노력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이 계(契)는 김군(金君) 석욱(錫旭)이 창도하였는데, 그의 벗 관산(冠山 장흥(長興))의 김군(金君) 영엽(泳燁)을 통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莞之爲郡在南海窮漠之濱。去京師千餘里。文物禮敎。儀章等威。不能無少遜於內地諸郡久矣。歲侵陽九。九野閉塞。異說異敎。日熾月張。風靡波盪。無地乾淨。然而莞之士。先立夫子廟。次設興學之規。講聚乎庠塾詩書之業。遊習乎樽俎揖讓之節。蔚然風行。俗以丕變。此是內地諸郡所未有也。豈氣數循環。而顯晦有時者然耶。抑天不欲盡喪斯文。而使一縷陽脈。收斂翕聚於一隅之地。以爲他日大來之張本耶。武城牛刀。蓋善子游之獨行。況在今日域中。而得聞其一隊絃誦之聲於窮漠之濱。若使夫子而在焉。則豈惟莞笑而已哉。閩中古稱蠻荒之區。而得廌山龜山兩先生。遂爲天下文明之鄕。安知今日之莞。獨不爲當日之閩耶。惟莞之士。勉之勉之。是契也。金君錫旭倡之。因其友冠山金君泳燁。問序於余云。 양구(陽九) 음양도(陰陽道)에서 수리(數理)에 입각하여 4천 5백년 되는 1원(元) 중에 다섯 번 발생하는 양액(陽厄)과 네 번 발생하는 음액(陰厄)을 합한 말로, 극에 달한 재액(災厄)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대한제국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을 비유한다. 구야(九野) 하늘의 팔방과 중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온 세상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성(武城)에서……여겨서인데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악(弦樂)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공자가 무성에 가서 그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鷄焉用牛刀?]"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論語 陽貨》 민중(閩中) 지금의 복건성(福建省)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회암(晦庵) 주희(朱熹)가 이곳에서 강학하며 성리학을 대성하였다. 치산(廌山)과 구산(龜山) 치산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유초(游酢, 1053~1123)의 호로, 당시 지부구현(知扶溝縣)이었던 정호(程顥)의 부름을 받아 학사(學事)를 맡고 그때부터 정호 형제를 사사하였다. 구산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양시(楊時, 1053~1135)의 호로, 정호 형제를 사사한 뒤 이정자(二程子)의 도학을 발전시켜 낙학(洛學)의 대종이 되었고, 주자(朱子)를 비롯하여 장식(張栻)ㆍ여조겸(呂祖謙) 등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은 여대림(呂大臨)ㆍ사량좌(謝良佐)와 함께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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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동노인수연시집》의 서문 禮洞老人壽筵詩輯序 인생 육십을 옛사람은 하수(下壽)라 하였으나, 세대가 내려오면서 운수(運數)가 모질어져 백성들이 요절한 경우가 많았고, 요행히 이 나이에 이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 병들어 쇠약하고 곤궁하여 외롭게 지내며 삭막하게 세상사는 재미가 없게 되었다. 대체로 사람 중에 하수를 얻은 자가 열에 둘이 되지 않고, 하수까지 살면서 운수에 별 탈이 없는 자가 또 다섯에 하나가 되지 않으니, 이른바 "양(陽)은 획[━]이 하나이고, 음(陰)은 획[╍]이 둘이기에 길함은 적고, 흉함은 많다."라는 것이 바로 이치와 형세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내가 듣건대 예동(禮洞) 하군(河君)의 구갑(舊甲 환갑(還甲))이 되는 생일이 올봄에 있어서 여러 날 동안 장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집안사람은 온화하고 자신은 건강하여 안으로는 함께 늙어가고, 밖으로는 별 탈이 없으며, 아래로는 여러 자제들이 난초의 뿌리처럼 함께 자라고, 손자들이 난초의 잎처럼 서로 비추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복의 풍성함이 오늘날 같은 말세에 견줄만한 이가 드물었다. 모르겠지만, 어떻게 수양(修養)했기에 향유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인가? 듣건대, 맏아들 해수(海秀)가 부지런히 일하며 봉양을 극진히 하여 효성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의복과 음식을 절약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휼해 주었다고 하니, 상서로움을 가져오고 복을 받는 것이 또한 여기에서 한 단서를 증험해 볼 수 있다.고을 사람들이 서로 경축하고, 벗들이 모여 축하하며 시를 읊어 주고받은 것이 책을 이룰 만큼 쌓이자, 그해 가을에 손주를 안은 성욱(性煜)이 초라한 내 집으로 찾아와 그 일에 대한 서문을 지어 첫 부분을 장식해주길 요청하였다.아, 나도 올해 또한 회갑이 되는 사람이지만, 이미 병으로 피폐한데다 또 홀로 곤궁하게 지내고 있으니, 덕과 복이 있는 집안사람과 비교하면 그 운수가 미치지 못함이 어찌 30리 뿐이겠으며, 옥돌 잔에 들어있는 술과 질항아리에 담긴 평범한 음식을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이에 감히 병을 무릅쓰고 글을 지어 부럽게 여기는 뜻을 담아 보내고, 또 같은 세상을 함께한 동경(同庚 동갑(同甲))으로 인생의 막바지에 만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칠 따름이다. 人生六十。古人謂之下壽。然世降氣促。民多夭折。幸而至於此者。又多衰癃窮獨。索然無聊。蓋於人而得下壽者。未爲十之二。下壽焉而氣數無恙者。又未爲五之一所謂陽一而陰二。吉少而凶多者。乃理勢之使然也。余聞禮洞河君舊甲晬日。在於今春。而行壽老之宴者。有日矣。家溫身康。內而偕老。外而無故。下而羣蘭倂茁。孫葉交映。其天餉之豊。在今衰叔而鮮見其比。未知何修而所享若是。聞其胤子海秀。服勤致養。以孝著聞。縮衣節食。以賙貧乏。其所以致祥受福。亦可卽此而驗其一端矣。鄕閭相慶。朋友聚賀。歌詠酬唱。積爲卷軸。其年秋。抱孫性煜過敝廬。請序其事以弁其端。嗚呼。余於今年。亦爲回甲人矣。而旣病廢矣。又窮獨矣回視德門福家。其氣數之不相及。奚啻三十里哉。瑟瓚黃流。瓦缶褻味。蓋不可易也。玆敢力疾行墨。以酬歆艶之意。又以寄倂世同庚戀戀覯降之思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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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구씨 행장 淑夫人具氏行狀 부인은 성이 구씨이고 세계(世系)는 능성(綾城)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휘 민첨(民瞻)이 상세(上世)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고조인 휘 삼익(三益)은 진사(進士)였고 증조인 휘 채(埰)도 진사였으며 조부인 휘 찬원(贊源)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 상윤(相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비(妣)는 고성 이씨(固城李氏) 석윤(錫淵)의 딸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 12월 14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이 어려서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첨지중추부사공이 언문(諺文)으로 《소학(小學)》을 적어 부인을 가르쳤다. 또 "남자는 요순(堯舜)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여자는 태임(太任)과 태사(太姒)46)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하고, 인하여 학임(學任)으로 이름을 짓고 15세에 계례(笄禮)를 치르자 희임(希任)으로 자(字)를 지어 주었다. 부인은 교도(敎導)와 훈계(訓戒)를 따르며 감히 어기지 않았다. 18세에 처사공(處士公) 이지호(李贄鎬)에게 출가하였다. 공경과 순종으로 시부모를 받들고 남편을 섬겼으며 동서들에게도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목하게 지내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시어머니 박씨(朴氏)가 나이도 많고 병환이 위중하여 항상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보살피고 섬기는 일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비록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한 번도 편안히 쉬지를 않아 보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소박하고 초라한 의복과 음식으로도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이웃의 아녀자가 조롱하며 비웃는 말을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농사를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배부르기를 기약하지만, 유학을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굶주릴 것을 각오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니 어찌 괴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평소 살림살이는 매우 검약하였지만 제사를 받들거나 빈객을 접대하는 일은 어떻게든 주선하고 장만하여 기어코 풍성하고 정갈하게 준비하고자 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고 피땀을 흘리며 고생스럽게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여유롭게 되었다. 일찍이 여러 며느리에게 경계하기를, "아녀자의 행실은 순종이 으뜸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훈계나 명이 규중(閨中)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말소리가 문밖으로 들리지 않았으니, 가풍(家風)이 어떠하였겠는가. 만년에 집안이 어렵고 궁핍해져 여러 아들이 이를 걱정하자 부인이 책망하기를, "가난은 선비의 일상이니 걱정할 일도 아니지만 너희들이 학문을 그만두어 집안의 명성이 실추될까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행동거지가 침착하여 태만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종족(宗族)은 온화하면서도 절도있게 대하고 동복(僮僕)은 은혜로우면서도 엄하게 다스려 가까운 이웃에 이르기까지 기뻐하면서 흡족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갑진년(1904, 고종41)에 숙부인에 봉해졌는데, 이는 추증(追贈)된 남편을 따라 봉호(封號)를 받은 것이다. 무신년(1908, 순종2) 1월 4일에 생을 마쳐 비사등(飛沙嶝) 선영의 오른쪽 산등성이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자는 승우(承愚), 차자는 승정(承正)이고 딸은 동복(同福)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어리다. 아, 내가 지남옹(芝南翁)47)과 종유(從遊)하고 또 그의 윤자(胤子)와 앞뒤로 수십 년간 교유하면서 숙부인이 집안에서 보인 품행이 훌륭하고 자애로운 가르침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오래도록 익히 들었다. 지금 그 집안의 가장(家狀)을 보니 전에 들은 내용과 다르지 않으니 부모를 속이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다. 더욱 힘을 쏟아 학문을 그만두지 않고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당시 숙부인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빛내는 도리일 것이다. 夫人姓具氏。系出綾城。麗朝平章事諱民瞻。其上系顯祖也。高祖諱三益進士。曾祖諱埰進士。祖諱贊源贈戶曹參判。考諱相允僉樞。妣固城李氏錫淵女。以純祖癸巳十二月十四日生。夫人幼而能言。僉樞公以諺文。書小學以敎之。且曰。男子當以堯舜爲法。女子當以任姒爲法。因名之以學任。及笄字之以希任。夫人遵循敎戒。無敢違越。十八歸于處士李公贄鎬。奉舅姑事君子。克敬克順。與娣姒溫恭和洽。未有間言。其姑朴氏年高沈疾。常在床褥。晝夜侍供。殫誠竭力。雖勞苦之極。未嘗就便。見者一辭稱賞。家貧甚。縕袍麤糲。處之裕如。隣家婦女。有譏笑之言。夫人曰。業農之家。其妻必飽。業儒之家。其妻必飢。此是常事。何足怪也。日用調度。極其儉約。而至於奉祭祀接賓客。周旋營辨。期於豐潔。夙興夜寐。血力拮据。以至事力稍紓。嘗戒諸婦曰。女子之行。以順爲上是故敎令不出於閨中言語不聞於門外。其家風爲何如也。晩年家力艱乏。諸子以爲憂。夫人責之曰。貧者士之常。不足爲憂。而但恐汝輩失學以墜家聲也。性度溫仁。動止安詳。怠慢之氣。不形於色。華麗之物。不近於身。待宗族和而節。御僮僕惠而嚴。至於比近隣里。無不懽然稱愜焉。甲辰封淑夫人。蓋從其君子追贈也。戊申正月四日卒。葬飛沙嶝先壟右岡午坐原。生二男一女長承愚次承正。女適同福吳桂泳。孫男女皆幼。嗚乎。余從芝南翁遊。又與其胤子遊。前後數十年。其內行之備。慈誨之美。稔聞久矣。今見其家狀。與前所聞者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更惟勉力。無失其學。無墜家聲如當日之敎也。此實立揚顯親之道。 태임(太任)과 태사(太姒) 태임은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사는 무왕(武王)의 어머니로 모두 어진 후비(后妃)였다. 지남옹(芝南翁) 남편인 이지호(李贄鎬, 1836∼1892)의 자호(自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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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오공 행장 松庵吳公行狀 송암 오공의 휘는 수화(壽華), 자는 태중(泰仲)이다. 고려조의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48)이 공의 시조(始祖)이다. 4대를 내려와 휘 현필(賢弼)에 이르러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지고 이로 인하여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대대로 작위와 공훈이 드러났다. 휘 충을(忠乙)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현손(玄孫)인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다. 보성으로부터 능주(綾州)의 대곡(大谷)에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인하여 무덤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부터 오씨는 능주에 살게 되었다. 증손인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절제사(節制使)로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하여 조정에서 병조 참판에 추증하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공의 8대조이다. 고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후유(厚有)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이다. 고(考)는 휘가 치상(致祥)이고 호는 계은(溪隱)이며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경우(警禹)의 딸로 일송(一松) 홍치(洪治)49)의 후손이다. 헌종 을미년(1835, 헌종1) 11월 무자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스스로 말하고 먹을 줄 알게 되자 응대와 대답에 어김이 없이 순종하였으며, 부모가 병환을 앓으면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8세 때 대인(大人)이 몸소 밭을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몰래 주막으로 가서 술을 사서 대인을 대접하려고 하자, 주막 아낙이 공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겨 안주까지 갖추어 주고서 값을 말하지 않았다. 맏형과 뜻을 같이하고 경서를 물려받아 쓰면서 밤낮으로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세가 되자 맏형에게 이르기를, "집안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셨으니 우리 형제는 형편상 함께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집안일을 맡아 늙은 부모를 편안히 모시고 또 형님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몸소 부지런히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대인(大人)의 성품이 준엄하여 노기를 띨 때마다 집안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지만, 공은 그때마다 온화한 말로 넌지시 간하여 대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대인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둘째 아이와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저절로 풀어진다."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매우 위독해지자 여러 날에 걸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뽑아 바쳤으며 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몸이 말라 뼈만 앙상한 채로 애통해하는 모습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대인이 연로한 나이에 배필을 잃은 것을 보고 마음이 공허하고 적적할 것을 염려하여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가까운 옛친구들을 초빙하여 부친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중년의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분가(分家)를 하였지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그치지 않았다. 집안일은 반드시 부친의 일을 먼저 처리한 뒤 자기 집안일을 처리하였다. 형제 5인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각각 성가(成家)를 하여 차례차례 분가(分家)하게 되자 살림을 차리는 데 필요한 온갖 것에 대하여 공이 반드시 물자를 대어주어 형 집에서 나누어 내는 비용이 없도록 하였다. 얼마 뒤 여러 아우에게 이르기를, "아버님의 연세가 매우 많으시다. 공양하는 의절은 나중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찌 오로지 큰형님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있겠는가. 한 달 중에서 15일 치 양식은 내가 드릴 것이니 나머지 15일은 너희 세 명이 각각 5일 치씩 드리거라." 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번갈아 양식을 대어 매우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喪禮)를 치를 때 노쇠했다는 이유로 애통함을 누그러트리지 않았으며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와 산재(散齋)에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큰형을 섬기는 것도 엄부(嚴父)를 섬기는 듯하여 크고 작은 집안일을 반드시 여쭌 다음 거행하였다. 큰형이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설사를 하면 그때마다 자기 손으로 치웠다. 형의 자식을 보살피는 일도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지극하여 갖가지 보살피는 일을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여러 아우와 여러 제부(弟婦)도 역시 서로 친애하여 가진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함께 나누었다. 이를 미루어 친척과 벗에게까지 미치니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한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다. 도중에 그 사람이 병에 걸리자 함께 오던 이들은 모두 먼저 떠났지만, 공은 행낭 안의 물건을 팔아 그를 치료해주고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왔다. 이웃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집을 짓도록 물자를 대주어 편안히 지내도록 하였고 열읍(列邑)의 선비들이 글방을 마련하려고 하자 공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다방면으로 알아보아 일이 진척되도록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마련하여 종족(宗族)을 화목하게 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 고향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였다. 흉년이 들어 빈궁한 교우(交友)나 가난한 친족이 살아가기 어려우면 그때마다 진휼(賑恤)하였고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사망(死亡)과 상사(喪事)에 문안하거나 물품을 보내는 일을 그때마다 빼놓지 않았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비적(匪賊) 무리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공은 자제(子弟)들과 친척을 모아놓고 잘못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평소에 인륜(人倫)을 사랑하고 선(善)을 즐겨 행하며 의(義)를 좋아하였고 화려한 명성이나 영달(榮達)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별서(別墅)를 짓고 작은 길을 내어 오가며 시를 읊조리고 빈객이나 벗이 이르면 그때마다 곧바로 잔을 돌려 술에 취하면서 몹시 즐거워하였다. 평소 행실이 쌓이자 명망이 암암리에 드러나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의 유림이 조정에 천거하고 아뢰어 침랑(寢郞)에 제수되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표창을 받았다. 여러 아들이 정문을 세우려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무엇 하나 잘한 것이 없건만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이 되어 하늘을 속인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고, 굳이 물리쳤다. 이 때문에 여러 아들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을미년(1895) 봄 병이 들어 거의 위태롭게 되자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경계하기를, "효(孝)로 선조를 받들고 의(義)로 자식을 가르치며 선한 자가 아니면 사귀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야 선대의 유업을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다. 보화(寶貨)는 써버리면 다 사라지지만 충효는 누려도 끝이 없다. 학식을 쌓자면 반드시 성취를 이루어야 하고 농사를 업으로 삼자면 반드시 힘을 다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를 기억하거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세상을 떠나니 곧 3월 27일이었다. 향리(鄕里) 인사(人士)들은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칠송(七松)의 가락동(嘉樂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니 곧 전배(前配) 고씨(高氏) 묘의 왼쪽이었다. 고씨는 본적이 장택(長澤)이고 시우(時祐)의 딸이며 참의를 지낸 신부(臣傅)의 후손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다. 계배(系配)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석우(錫祐)의 딸이며 학성군(鶴城君) 완(完)의 후손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장섭(長燮), 덕섭(德燮)이고 딸은 이승정(李承正)에게 출가하였다. 장섭은 재동(在東), 재남(在南), 재경(在慶)을 낳았고 덕섭은 재원(在元)을 낳았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로웠으며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의가 있었다. 또 마음 씀씀이가 후덕함에 가까웠으며, 처신은 주도면밀하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자애롭고 인정이 넘쳤으며 일 처리는 공평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사람이나 외부인이나 공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공을 편안하게 여겼다. 자신은 화락함을 누리고 집안은 이로써 평안하였으며 훌륭한 명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시경》 〈벌목(伐木)〉에서 노래한 '신이 들어주어 마침내 화평하게 되리라.'는 것이 공을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지우(知遇)를 입어 앞뒤로 20년에 걸쳐 논의를 반복하며 깨우침을 얻었고 출입하며 의지하였으니 그 힘이 적지 않았다. 어찌 공이 조금 더 머물지 않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버릴 줄 알았겠는가. 장섭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행장은 평소에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 쓸 수 없습니다. 대인과 서로 잘 알던 분으로 말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식견이 천박하고 고루한 몸이라서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차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어서 대략을 약술하여 돌려 보낸다. 松庵吳公諱壽華。字泰仲。勝朝文襄公諱延寵。其鼻祖。四傳至諱賢弼。封寶城君。因以貫焉。世著爵勳。至諱忠乙。入我朝。官贊成。玄孫諱益孫。以學行除寢郞。自寶城葬其親於綾州大谷。因寓墓下。綾之有吳始此。至曾孫諱邦翰。壬辰之亂。以節制使殉節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八代祖也。高祖諱世觀贈戶曹參判。曾祖諱厚有。僉樞。祖諱錫永號竹湖。考諱致祥號溪隱。孝友著聞。妣豐山洪氏警禹女。一松治后。以憲宗乙未十一月戊子。生公于七松里。自能言能食。應對唯諾。承順無違。父母有疾。涕泣廢食。八歲見大人躬耕。心甚悶然。竊往店幕。將沽酒餉之。酒媼嘉其意。具與肴饌而不言其直。與伯氏共方連業。晝夜不懈。至成童。謂伯氏曰。家貧親老。吾兄弟勢難倂學。吾當幹家。安養老親。又使兄專業。不亦可乎。躬服勤勞。家力稍舒。大人性峻。每有怒色。家人莫出一語。公溫言幾諫。輒廻其意。大人嘗語人曰。吾與二兒言。不覺怒氣自解。母夫人有病甚劇。血指延數日。遭故。毁瘠過甚。哀動傍人。見大人年高喪耦。慮有窮寂之懷。日夕不離側。招致故舊所善以悅其意。中年以親命析箸。而晨昏不廢。家務必先幹父而後及於私。兄弟五人。友愛甚篤。及各有室。次第析箸。而其設産凡百。公必資給。使兄家無分損之費。旣而謂諸弟曰。親年極隆。供養之節。不可歇后。豈可專委於伯氏耶。一月之內。十五日之養。我當供之。餘十五日。君三人各供五日也。自是迭相進供。備極其養。執喪哀戚。不以衰老自恕。遇諱辰。致齋散齋。極其誠敬。事伯氏如嚴父。家事巨細。必稟而行。有疾。晝夜扶持。泄痢輒掬而除之。撫愛兄子恩意甚至。種種周恤。無所吝。諸弟諸婦。亦相親愛。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各得其心。嘗自京還。同行一人。中路遘疾。諸伴皆先去。公賣行槖什物。爲之調治。俟其愈而同歸。隣有火患。出力營構。使之安堵。列邑多士。將營講舍公嘉其意。爲之血力周章。俾就其緖。設門憲以睦宗族。立洞規以和鄕井。遇飢歲。窮交貧族。有難存活。輒加賑恤。吉凶死喪。存訊贈遺。隨時不替。甲午匪徒大熾。公會子弟族戚。戒勿犯。平日愛好人倫。樂善嗜義。於聲華利達泊如也。築室開逕。嘯詠其中。賓朋至。輒行酒酣暢。極其歡洽。平生積累。聲譽闇章。鄕道儒林。薦報於朝。除寢郞。蒙旌褒諸子將營棹楔。公曰。無一善狀而至有此擧是欺天也。人而欺天。於心安乎。固却之。是以諸子不果。乙未春。遘疾幾危。會家衆戒之曰。奉先以孝。敎子以義。非善不交。非禮不行。可以不失先業也。寶貨用之有盡。忠孝享之無窮。績學必要其成。業農必盡其力。爾輩識之。言終而逝。卽三月二十七日也。鄕里人士知不知。莫不痛惜。葬七松之嘉樂洞午坐原。卽前配高氏墓左也。高氏籍長澤。時祐女。參議臣傅后。早逝無育。系配金海金氏錫祐女。鶴城君完后。生二男一女。長燮德燮。李承正也。長燮生在東在南在慶。德燮生在元。嗚乎。公孝於父母。友於兄弟。睦於宗族。信於朋友用心近厚。行己周愼。接物慈惠。處事公平。是以內外懷之。上下安之。身享和樂。家用平康。令聞令望。藉藉人口所謂神之聽之。終和且平者。非公之謂耶。猥受知遇。前後二十年之間。所以往復規警出入倚仗者。其力爲不少矣。豈知公不少留而遽棄乃爾耶。長燮持家狀示余曰。狀行。非平素相熟不可。與大人相熟。匪公伊誰。余以淺陋。固知其有難承膺。而撫念事契。有不忍終辭者。略舒梗槪以還之。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윤관(尹瓘)과 여진을 정벌하는 데 참여하였다. 홍치(洪治) 1441~1513.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여평(汝平), 호는 일송(一松)이다. 저서로 《심학장구집주대전(心學章句集註大全) 》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묵계 박공 행장 贈嘉善大夫戶曹參判黙溪朴公行狀 공의 휘는 장근(章根), 자는 진초(震初)이고 묵계는 그의 호이다. 세계(世系)는 진원(珍原)에서 나왔으며 직제학을 지낸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50)이 공의 중조(中祖)이다. 세자사부(世子師傅) 증 이조 판서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51)이 공의 7대조이다. 죽천(竹川)은 휘 근효(根孝)를 낳았다. 근효는 호가 만포(晩圃)이고 관직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임진년(1592, 선조25)에 공훈(功勳)으로 이름이 났다. 군자감 정은 휘 춘수(春秀)를 낳았다. 춘수는 호가 아수(我誰)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직은 직장(直長)을 지내고 병자년(1636, 인조14)에 의병을 일으켰다. 직장은 휘 몽형(蒙亨)을 낳았다. 몽형은 호가 농은(農隱)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보성(寶城)에서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살았으며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만리(萬履)는 참봉을 지냈고 조부 휘 무석(武錫)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고(考)인 휘 수원(守遠)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진주 소씨(晉州蘇氏) 식(植)의 딸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계비(繼妣)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유중(維重)의 딸로 부덕(婦德)으로 칭송을 받았고 영조(英祖) 계유년(1753, 영조29) 10월 9일에 장흥부의 녹동리(鹿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장난치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부모님 곁을 지키며 공손하고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스승에게 나아가52) 공부하게 되자 송독하여 익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조금 자라서는 직접 집안일을 처리하여 집 안팎을 드나들며 온 힘을 다하였고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일이 끝나고 여력이 있으면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고 책을 읽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문장의 이치와 문사(文詞)의 화려함이 찬연하게 날로 성취를 이루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를 위한 공부는 위기(爲己)의 학문이 아니다. 지금 세상을 살면서 그만둘 수는 없더라도 또한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일 수는 없다." 하였다. 늘 경전의 주지(主旨)에 몰두하고 예설(禮說)의 단서를 찾는 것을 존심치기(存心治己)의 근본으로 삼았다. 집안에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반드시 의절(儀節)을 강구(講求)하여 하나하나 예를 따랐으며 일찍이 임시방편으로 시속(時俗)을 따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친척이나 오랜 벗들이 공을 본받아 행하였으며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앞다투어 공에게 와서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을 당했을 때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애통함에 몸이 무척 수척하게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났다. 봄, 가을이 되면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며 슬퍼하기를 마치 부모를 대하는 듯이 하였고 삭망(朔望)이 되면 분영(墳塋)에 성묘를 빠트리지 않았다. 형제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긴 베개와 큰 이불로 함께 자는 일을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재숙(齋塾)을 세워 서적을 비치하고 사우(師友)를 맞이하며 자손의 과정(課程)을 점검하였는데 분명하여 규정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친척이나 이웃이 병이 들거나 죽어서 상례를 치르거나 굶주리거나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안부를 묻고 진휼하면서도 집안에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선영 아래에 집 한 칸을 짓고 영모(永慕)라고 편액을 걸었다. 매번 경사스러운 날이나 좋은 계절이 오면 친족을 불러 모아 정겨운 담화를 펼치고 벗들을 모아서 그윽한 정취를 드러내고 자제와 향리(鄕里)의 젊은이들을 불러서 강서(講書) 규정이나 독법에 대한 의절을 거행하였다. 평소에 공경과 근신(謹愼)으로 자신을 지키고 충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여 소문이 미치는 곳에서는 애모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군자다운 어른으로 추앙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 6월 4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83세였으며 살던 동네인 시근등(柿根嶝)의 사좌(巳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들 정환(廷煥)이 수직(壽職)53)을 받아 귀하게 되면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흥덕 장씨(興德張氏) 세준(世浚)의 딸로 3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재무(載茂), 재충(載忠), 재철(載喆)이다. 계배(繼配)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진계(震啓)의 딸로 2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계환(桂煥), 정환(廷煥)이며 정환은 수직(壽職)으로 대호군(大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손자는 중흥(重興), 중회(重會)54), 중운(重運)55),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56),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57)이다. 증손(曾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준수하고 특출한 자질로 시(詩)와 예(禮), 문헌을 갖춘 집안에 태어나서 가풍의 영향을 받고 학문과 덕행을 갈고닦아 이처럼 우뚝하게 수립하였다. 마땅히 가슴에 품은 경륜을 펼쳐 한 시대에 쓰여야 했건만 동강(東岡)58)을 굳게 지키고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공에게는 진실로 유감이 없겠지만 사세(斯世)의 아쉬움이 어떠하겠는가. 공의 계윤(季胤)59) 중순(重淳)이 아들 기현(琦鉉)을 보내 공의 덕을 서술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근방에 사는 후생(後生)으로 비록 같은 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삼가 공을 우러러 흠모한 지 진실로 매우 오래되었다. 이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약간의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보태었다. 公諱章根。字震初。黙溪其號也。系出珍原。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其中祖也。世子師傅贈吏曹判書竹川先生諱光前。其七世祖也。竹川生諱根孝。號晩圃。官軍資監正。壬辰著勳。監正生諱春秀。號我誰。中司馬。官直長。丙子擧義。直長生諱蒙亨。號農隱。通德卽。自寶城移寓長興府。是公之高祖也。曾祖諱萬履。參奉祖諱武錫。贈司僕寺正。考諱守遠。贈左承旨。妣晉州蘇氏植女。無育。繼妣寶城宣氏維重女。以婦德稱。以英廟癸酉十月九日。生公于府之鹿洞里。幼而岐嶷。不好戱遊。日侍親側。唯諾唯謹。就傅上學。誦習不放。家貧甚。稍長。躬幹家務。出入竭蹶。備極忠養。行有餘力。輒侍側讀書。以悅親志。文理詞華。斐然日就。嘗曰。功令非爲己之學。居今之世。雖不可廢。而亦不可以專力於此也。每潛沈經旨。紬繹禮說。以爲存心治己之本。家有冠婚喪祭。必講求儀節。一一從禮。未嘗苟且循俗。是以親戚知舊。效而行之。有未瑩處。爭來取決焉。遭前後喪。一遵家禮。哀毁備至。杖而後起。春秋霜露。悽愴如見。朔望墳塋。展省無闕。與兄弟友愛甚篤。長枕大被。老而不替。立齋塾儲書籍。邀師友課子孫。無不的有成規。族戚隣里。有疾病死喪及飢饉匱乏。輒存訊之賙恤之。不知家力之不贍也。晩構一室於先壟下。題其顔曰永慕。每以佳辰良節。會族親以舒情話。聚朋舊以暢幽情。招子弟及鄕里少年。行講規讀法之儀。平居以恭謹持己。以忠慤接物。風聲攸曁。無不愛慕欣欣。以君子長者推之。乙未六月四日考終。享年八十三。葬于所居坊柿根嶝巳坐原。以子廷煥壽貴。贈戶曹參判。配興德張氏世浚女。擧三男。曰載茂載忠載喆。繼配仁川李氏震啓女。擧二男。曰桂煥廷煥。壽陞大護軍。孫曰重興重會重運重玟重萬重龍。重淳官通政。重熙重憲。曾孫以下不盡錄。嗚乎。公以秀爽雋異之資。生於詩禮文獻之家擩染濯磨偉然植立如此宜其有展布蘊藉。以需一時之用。而固守東岡。優遊卒歲。在公固無憾焉。而爲斯世之缺望爲何如耶。公季胤重淳。伻其子琦鉉來謁狀德之文。余以傍近後生。雖靡倂世。而嘗竊慕仰。固已久矣。玆不敢以匪其人牢辭。謹据家狀。略加修潤焉。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 1368?∼1446?. 초명은 희종(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전라도 경차관(全羅道敬差官),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 1526∼1597.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헌릉 참봉(獻陵參奉), 왕자의 사부(師傅), 함열(咸悅)·회덕(懷德)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장이 되었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수직(壽職) 조선 시대에 노인을 우대하여 주는 벼슬로, 노인직(老人職)이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중흥(重興), 중회(重會) 《송사집》에 실린 〈증호조참판박공묘지명(贈戶曹參判朴公墓誌銘)〉에 따르면, 첫째인 재무(載茂)의 아들이다. 중운(重運) 둘째인 재충(載忠)의 아들이다.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 넷째인 계환(桂煥)의 아들이다.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 다섯째인 정환(廷煥)의 아들이다. 동강(東岡)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는 곳을 이른다. 《후한서(後漢書)》 〈주섭열전(周燮列傳)〉에 "선세(先世) 이래로 국가에 대한 공훈과 임금의 은총이 대를 이어 왔는데 그대만 어찌하여 동강의 언덕을 지키려고 하는가?[自先世以來, 勳寵相承, 君獨何爲守東岡之陂乎?]"라는 구절이 있다. 계윤(季胤) 막내아들의 맏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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