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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회락】1)에게 주다 與梁處中【會洛】 상단(上段)에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人生氣稟, 理有善惡】"라고 한 구절은, 품부받은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이로부터 나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단(下段)에 "악함도 또한 성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惡亦不可不謂之性】"라고 한 구절은, 유행(流行)하는 측면에 있어서 과함과 모자람의 차이가 있는 것은 그 근본이 모두 성(性)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풀이하신 "품부받은 기질에는 반드시 선과 악의 차별이 있는 까닭도 또한 성의 이이다【所稟之氣, 所以必有善惡之殊者, 亦性之理】"라는 말은, 바로 '이에도 성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과 악의 분별이 있게 되는 것도 또한 애초부터 이가 아님이 없다【以爲氣有淸濁粹駁, 而爲善惡之分者, 亦未始非理】'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칫 그 '이(理)'라는 글자가 '실리(實理)'의 '이'로 간주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다시 말하기를 "여기서 '이'는 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치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理當如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또한 하단을 해석한 부분에서 바로 '유행(流行)' 및 '과함【過】과 모자람【不及】' 등의 용어에 대해 말한 것은 볼 만합니다. '미발(未發)'은 본시 마음【心】의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니, 품부받은 기질의 측면에서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래 '미발(未發)'이라는 글자가 상단과 하단에 나뉘어서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되어 있는 것도, 또한 본래 나의 의견이 아닙니다.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경우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材料)이니, 때에 따라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때【未發時】의 경우에는, 다만 전고의 인용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내가 일찍이 '이치상 선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구절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시절이며, 다만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만을 언급한 것이겠습니까.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것【未發】보다 어질다고 하는 것은, 품부받은 기질에 선과 악이 없다고 한다면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이 오로지 이 마음을 일으켜서 유행한 후의 사물을 보는 것은 아마도 옳지 않아 보이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논의한 여러 조목이 혹 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어느 곳에서는 "발현이 되지 않은 때에는 기질에 청탁(淸濁)이 마구 뒤섞여 있다"고 하였고, 또한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않지만 악이 본디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선과 악이 상대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것이 과연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잘못 이해하신 것이니, 이것은 내가 말한 뜻이 아닙니다. 기질이 일에 쓰이지 않으면 담연하고 허정(虛靜)하여서, 진실로 청탁(淸濁)이 없다고 말할 만한데, 하물며 선악이 있다고 말할 만하겠습니까. 다만 그 품부받은 기질의 본질은 아주 잠깐의 미발(未發)로 갑자기 성인(聖人)과 같이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설을 멀리서 인용할 필요가 없어서, 다만 그대【高明】가 알려준 '맑고 깨끗한 기질【澄淸之氣】은 성인(聖人)이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것이나, 뭇 사람들은 홀연히 그것을 잃는다'라고 한 말을 그대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홀연히 그것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별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니, 바로 자기의 품부받은 기질이 같지 않은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지 않은 구별이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입니다.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인가【臨發而排定耶】'란 것에 대해서는, 만약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이면, 정자(程子)는 마땅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이 동요하여 선악이 있게 된다'라고 하지, '이(理)에 선악이 있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理)가 비록 선하거나 악하더라도 그 이는 아직 형질을 갖추지 않는다면, 청탁(淸濁)이 섞여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선악(善惡)이 상대적이라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비록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어도 가만히 머물러서 동요하지 않으면, 그 더러움이 발동하지 않으나, 그 맑은 것이 깨끗한 그릇에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이 설명에 어찌 조금의 의심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극념(克念)과 망념(罔念), 공(公)과 사(私), 향(向)과 배(背)로써 구별하여 말한 것이니, 어찌 기질(氣質)의 선악으로 갑자기 성인이 되고, 갑자기 광인이 된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안자(顔子)의 홍로지설(洪爐之雪)2)이나 시우지화(時雨之化)3)와 같다면, 한 번 맑아져서 곧바로 변화하여서 성인(聖人)의 기질과 다름이 없게 됩니다. 큰 근본도 또한 어찌 보면 기질을 떠나서 세운 것이니, 다만 기가 용사(用事)하지 않은 상태에서 늘 맑고 고요함은, 이 큰 근본이 서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한 설은, 내가 일찍이 미발(未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단에서 유행(流行)을 설명한 곳과 비교하여서 단락이 없을 수 없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올바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이에 "곧바로 말하지 않고 우회해서 말했다"고 하겠습니까. 다시 상세히 살펴봐주길 바랍니다. 변별한 것은 많으나, 구별한 것은 단지 한 곳밖에 없으니, 한 곳이 합당하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대저 '기불용사(氣不用事)' 네 글자를 상세하게 보아서 알아차린다면, 마땅히 막히고 통하지 않던 많은 내용들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떠하겠습니까. 다시 지극히 타당한 결론을 보여주십시오. 上段人生氣稟。理有善惡。是氣稟有淸濁粹駁。而爲善爲惡。於此分焉之謂也。下段惡亦不可不謂之性是就流行上有過不及之差者。其本皆出於性之謂也。朱子解之曰。所稟之氣。所以必有善惡之殊者。亦性之理。此是解理有善惡一句。以爲氣有淸濁粹駁。而爲善惡之分者。亦未始非理云爾。然怕人將此理字。作實理看。故旋又曰。此不是說實理。猶云理當如此。又於解下段處。卽以流行及過不及等語。言之此可見矣。未發。本是心上說。不當於氣稟上。下未發字。分上下段。作未發已發。亦本非愚意也。淸濁粹駁。此是氣稟之本色材料。不可以隨時有無。而於未發時。則但不用事焉耳。況愚未嘗以理有善惡爲未發時節。而特以氣稟上本色材料言之耶。賢於未發。謂無氣稟善惡則可矣。而若以淸濁粹駁。專作此心流行後物事看。恐不然矣。更詳之如何。所論諸條。或不無不諒鄙意處。有曰。未發時。氣有淸濁駁混。又曰。氣不用事。而惡自在。又曰善惡相對云云。鄙說若果如此則誠誤矣。然此非愚之言也。氣不用事。澹然虛靜。固無淸濁之可言。況有善惡之可說乎。但其氣稟本質。有不可以霎刻未發。而遽變如聖人。今不必遠引他說。只以高明所諭澄淸之氣。聖人常久而不失。衆人忽然而失之之言。言之。其常久而不失。其故何在。忽然而失之。其故何在。其故不在別處。不在別人。而在於自己氣質所稟之不同。然則其不同之分。自來已然耶。至於臨發而排定耶。若臨發而排定。則程子當曰。人生氣稟。動有善惡。不當曰理有善惡。理雖善惡。而其理未形。則不可謂淸濁混。亦不可謂善惡對矣。水雖在濁器。而止而不動。則濁不用事。而其淸與在淨器者。無異。此說何須疑也。作聖作狂。以克念罔念。公私向背言之。何嘗以氣質善惡。忽然而聖。忽然而狂耶。如顔子洪爐之雪。時雨之化。則一澄淸便渾化。却與聖人氣質無異矣。大本亦何嘗離氣質而立。但氣不用事而湛一虛靜。此大本所以立也。人生氣質理有善惡之說。愚未嘗認作未發看。但比下段說流行處。不能無段落耳。如此看。恐爲正當。而乃曰迂回耶。更詳之爲望。所辨雖多。而所分只在一處。一處合則無不合矣。大抵氣不用事四字。詳細看取。宜無許多窒礙矣。如何如何。更示至當之歸也。 양회락(梁會洛, 1862~1935)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홍로지설(洪爐之雪) 큰 불화로 속에 하나의 눈송이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안연(顏淵)이 인을 지키다가 잠시 벗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마치 큰 화로 속에 눈송이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어서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시우지화(時雨之化) 초목이 철 맞게 내린 비에 잘 자라듯이 교화가 미침을 말한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가르침이 다섯 가지인데, 때맞게 감화하듯 한 것이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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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직접 찾아와 준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섣달 추위에 덕을 함양하면서 신명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의 생활도 평안하신지요?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그저 궁벽한 시골집에 칩거하면서 나날이 더욱 쇠약해져만 갑니다. 단지 절절하게 그리워하며 만나 뵙지 못하는 아쉬움만 더할 뿐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러운 이 시기에 실심(實心)으로 이 일을 대하는 이는 오직 그대【高明】 한 사람뿐입니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애초부터 가졌던 구구한 소원이 아님이 없었지만, 험하고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나아갈 만한 여력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보여주신 문목(問目)은 조목마다 응답해 나아갔으니, 다시 상세하고 확실하게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음양(陰陽)·강유(剛柔)·인의(仁義)에는 삼재(三才)의 도(道)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섞이지 않은 본체의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陰陽)·강유(剛柔)는 진실로 도(道)가 아니며, 체용이 떨어지지 않은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과 강유는 '도가 아니다【非道】'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理)가 이(理)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세심하게 살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말하길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장자(張子)는 "기화(氣化)로 말미암아 도(道)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도의 체용(體用)은 음양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 모두를 참고할 만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한데, 어째서 선한지 않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성악설(性惡說)을 논파할 만한 때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덕(先德)께서 '기질성(氣質性)' 세 글자를 설명하여서, 성선설(性善說)을 보완하고 성악설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후인(後人)들은 이(理)가 기(氣)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여기고, 나아가 미발(未發)도 또한 기질지성이며, 요순(堯舜)도 또한 기질지성이라 여깁니다. 오호라, 선덕(先德)들이 논리를 세워서 장차 성악설을 배척하려고 하였는데, 후인들이 이 세 글자를 가지고 도리어 성악설을 증명하는 말로 사용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만약 기(氣)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여긴다면, 천하의 어떤 이(理)인들 기(氣)에 갖추어져 있을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공허한 의론에 묶이고 얽매일 것이니, 우뚝 홀로 선 연후에야 본연의 성품이 될 것입니다. 이(理)의 묘처(妙處)를 신(神)이라고 하는데, '묘(妙)' 자와 '신(神)' 자를 만약 기(氣)에 속해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理)는 완전히 공허하여 하나라도 쓸 데가 없는 물건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 용(用)의 측면에서 신(神)이라고 한 상단과 하단의 글들은 태극(太極)의 참다운 면목을 말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어찌 중단(中段)의 '신(神)' 한 글자에 대해서만 홀로 기(氣)에 대해 말한 것이겠습니까. 칠정(七情)은 사람의 정(情)을 통틀어 말한 것이니, 사단(四端)은 특히 이 칠정 중에 나아가, 그 선한 것만을 끄집어낸 것입니다. 칠정과 사단은 본래 양단으로 나뉜 것이 아니니, 어찌 내외로 구별을 두었겠습니까. 옆에서 자라 나오고 곁에서 빼어난 것도4) 또한 불가한 것이니, 다만 사단(四端)과 상대되어 말한 것일 뿐입니다. 委枉何等感荷。未審臘寒養德有相。動止珍休。馳仰不任。義林跧伏窮廬。衰索日甚。只切悠悠靡逮之恨而已。缺界滔滔。實心此事者。惟高明其人也。昕宵遊從。未始非區區之願。而崎嶇險釁。無力可就。奈何奈何。所示問目。逐條塡去。更加詳確如何。陰陽剛柔仁義。三才之道備矣。以不雜者言之。陰陽剛柔固非道也。而以不離者言之。陰陽剛柔不可謂非道也。理之爲理。正在於此。惟細心看之可得。是故孔子曰一陰一陽之謂道。張子曰。由氣化有道之名。朱子曰。道之體用。不外乎陰陽。此皆可攷也。人性本善而何故而有不善只此不善二字。若不區處。則性惡之說。無時可破。是故。先德說氣質性三字。以補性善之說。以斥性惡之論。後人以理之具於氣者。統謂之氣質之性。至以爲未發亦有氣質之性。堯舜亦有氣質之性。嗚乎。先德立論。將以斥性惡之論。豈知後人將此三字。反以爲性惡之證佐耶。若以具於氣者。統謂氣質之性。則天下何理有不具於氣者。必懸空係虛。兀然獨立然後。爲本然之性耶。理之妙處謂之神。妙字神字。若屬氣邊看。則理是空空一殼無用之長物矣。況其用則謂之神上下文段。無非太極眞面說。豈於中段神一字。獨言氣乎。七情統言人之情。四端特就七情中剔出其善者矣。七情四端。本非兩端。則何嘗有內外之別也。謂之旁榮側秀亦不可。但與四端對言云然耳。 옆에서 자라 나오고 곁에서 빼어난 것도 《심경부주》 권2 〈성의장〉에 조치도(趙致道)가 주자에게 질문한 것으로 "혹 옆에서 나와 꽃이 피고 곁에서 빼어나 기생하는 겨우살이나 사마귀와 혹과 같은 것은 이것도 비록 성이 동한 것이기는 하나 인심의 발현이요 사욕의 유행이니, 이른바 악이라는 것입니다.【其或旁榮側秀, 若寄生疣贅者, 此雖亦誠之動, 則人心之發見, 私欲之流行, 所謂惡也.】"라고 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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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3월 6일에 보내온 편지를 4월 보름에 이르러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소상하게 다 알려주시어,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어찌 감사할 줄 모르겠습니까. 주자(朱子)께서 성(性)을 논한 것에 대해, 어떤 이가 말하길 "비유컨대 약성(藥性)을 논하면, 오한과 발열도 또한 형상을 논한 곳이 없는데, 단지 복용을 완료한 후에야 열이 떨어지기도 하고, 열이 오르기도 하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라고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왕왕 지각(知覺)이 있는 것을 가리켜서 성(性)이라고 여기니, 이는 단지 심(心)에 대해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무릇 오한과 발열은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약을 복용한 후에 곧바로 열이 내리거나 오르는 것이 바로 신(神)인 것입니다. 인성(人性)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는 것을 진실로 신(神)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이(理)가 있어서 곧바로 허다한 일에서 나오게 되어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과 같은 것이 바로 신(神)입니다. 이 때문에 주자께서 신(神)자에 대해 기(氣)로 말한 경우가 있고, 이(理)로 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령(神靈)을 성(性)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신(神)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은 이(理)의 발용(發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혹은 이(理)가 아니라고 말하고, 혹은 기(氣)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신(神)이 바로 이(理)입니다.'라고 하면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謂神卽是理, 却恐未然.】"라고 하고, 뒤이어 "신(神)을 완전히 기(氣)로 간주하여 보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將神全作氣看, 則又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설들을 관찰해보면, 신(神)의 뜻을 분명히 알 게 될 것입니다. 전날에 있었던 한 편의 말은 이(理)로 인정하고, 다른 한 편의 말은 기(氣)로 인정한 것은, 어찌 치우친 의논이 아니겠으며, 왜곡된 견해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에 대해서 너무 놀란 나머지 얼이 빠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로부터 그것을 삼가 지킬 것을 생각해봐야 하니, 그대도 또한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힘써 귀착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상단의 절반과 하단의 절반에서 기(氣)의 신(神)과 이(理)의 신(神) 등에 대한 설명도 또한 옳지 못하니, 신(神)은 두루하여 정해진 방소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상단과 하단의 절반에 옳은 말이 있겠습니까. 신(神)은 하나이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어찌 이(理)와 기(氣)가 각각 그 신(神)과 하나가 된다고 명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명(神明)' 두 글자는 끝내 다 합쳐지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 또한 상세하게 연구해보면, 저절로 바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주서(朱書)에 신명(神明)은 바로 물(物)이라는 논설이 분명히 있는데, 다시 그것을 운운한단 말입니까. 저의 논설이야 진실로 말할 것도 없겠지만, 주서(朱書)의 설은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십니까? 지난번에 〈경함에게 보내는 편지【與景涵書】〉5)가 있었는데, 아울러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三月六日書。四月望間始得見矣。縷縷纖悉。警發多矣。曷不知感。朱子論性有曰。比如論藥性寒熱。亦無討形象處。但服了後。做得寒做得熱。便是性。今人往往指有知覺者。爲性。只說得箇心。夫寒熱固不可以言神。然服了後。便做得寒熱。便是神。人性之有仁義禮智。固不可以言神。然旣有此理。便有許多事出來。如惻隱羞惡辭讓是非。便是神。是以朱子之於神字。有或以氣言。或以理言。如曰神靈不可以言性。及神者理之發用之說是也。有或言非理。或言非氣。如曰謂神卽是理。却恐未然。及以神專作氣看。又誤之說是也。觀是數說。神之爲義。若可領了矣。前日之一邊之言。認以爲理。一邊之言。認以爲氣者。豈非偏論曲見耶。區區於此。不覺瞿然自失。思以爲從此謹守之計。賢亦深思之。而勉爲歸宿也。若其上一半下一半。及氣之神理之神等說。又恐不然。神周而無方者也。豈有上下一半之可言。神一而不二者也。豈有理氣各一其神之可名。且神明二字。終有未盡合處。此亦細細詳究。自有結案之日矣。朱書明有神明是物之論。而乃復有所云爾耶。鄙說固不足道。而朱書說亦將何以區處乎。向有與景涵書。倂以照及如何。 경함(景涵) 조선 말기 유학자인 황철원(黃澈源, 1878~1932)으로, 자는 경함(景涵)이고, 호는 중헌(重軒)‧은구재(隱求齋)입니다.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2년(광무 6) 전라남도 구례(求禮) 천은사(泉隱寺)에서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과 강론을 벌였고, 스승 정재규의 권유로 「납량사의기의추록변(納凉私議記疑追錄辨)」 등을 지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성리설(性理說)을 논박하였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자 이를 분통하게 여기며 후학들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1932년 6월 20일 광주(光州)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헌집(重軒集)》 10권 4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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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세월은 자꾸 흘러서 거의 한 해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한 번 서로 만나 토론하는 것을 여태까지 빠뜨리고 하지 못하였으니, 가슴 속에 쌓인 슬프고 아쉬운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남쪽을 바라보며 그리운 벗【停雲】6)을 떠올리니, 아침저녁으로 그리운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 보내온 편지를 받고,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시는 생활이 평안하시다는 내용을 상세히 알게 되었으니, 위안이 되고 마음이 트이는 것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義林】는 그저 빈집에 틀어박혀서 그럭저럭 간신히 지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공부했던 것을 다시 음미해보는 것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남은 시간을 보낼 계책으로 삼고 있으나, 온전히 그것을 위해 보내고 있지 못하여서, 매번 개탄할 뿐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구구절절하신 말씀은 재차 제기해보고서 저의 미천한 식견을 알 수 있었으니, 전날의 말들은 분명치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일층이층(一層二層), 미발이발(未發已發)'이라고 한 것은, 그 말의 뜻이 고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도 또한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미발이발(未發已發)'은 바로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지, 기질(氣質)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질은 태어남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니, 진실로 때에 따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의 성품이 혼연하여 도리(道理)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그 청탁(淸濁)과 미악(美惡)의 다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 기질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찌 대본(大本)에 저해가 되며, 어찌 성선(性善)에 해가 되어서, 반드시 이 기질이 발현되지 않는 일층과 이층의 설을 그렇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청컨대 미발(未發) 시에 '성인의 성품이 범인의 그것과 같은가' '성인의 기질은 범인의 그것과 같은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고, 다시금 더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에 《남당집(南塘集)》7)을 보았는데, 이 가운데 '텅 비어 어떠한 조짐도 없다【沖漠無眹】'고 한 부분을 '정(靜)에 속할 수 없다'고 하며, 또한 '비은(費隱)'이라고 한 부분은 '동정(動靜)으로 나누어 배속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 이 말부터 「경함의 편지【景涵書】」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언급을 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비은(費隱)을 동정(動靜)으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은 진실로 옳으나, '텅 비어 어떠한 조짐도 없다【沖漠無眹】'고 한 말이 정(靜)이 아니라고 한 것은 조금 더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부디 이에 대해 답변하여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歲華荏苒。洽已半年矣。而一番握討。尙此闕如。懷緖悵恨。謂何如耶。南望停雲。日夕難任。謂外承備審侍省之餘體節佳適。慰豁不可言。義林係蟄空齋。粗聊捱過。而至於尋溫舊業。以爲多少餘日之計。則全未有之。每用慨然。示喩縷縷。復此提起。可見愚陋前日之言。有未瑩也。但所謂一層二層。未發已發。不惟語意不雅。而求之於心。亦未見其可也。大抵未發已發。此是心上說。非氣質上說也。氣質與生具生。固不可以隨時有無。然在此心未發時。一性渾然。道理全俱。而不見其淸濁美惡之異者。以其氣不用事故也。此何害於大本。何害於性善。而必爲此氣未發一二層之說乃爾耶。且請未發之時。謂聖人之性與凡人同乎。謂聖人之氣質與凡人同乎。試於此而更加思省。如何。向見南塘集謂。沖漠無眹。不可便屬於靜。又謂費隱不可分屬動靜。未知此說如何。向以此語及於景涵書中矣。愚意費隱之不分動靜。固然。而至於沖漠無眹之非靜。恐有可商量者。幸爲之示及。如何。 정운(停雲) 하늘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그리운 벗을 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정운(停雲)〉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한 벗을 생각해서 지은 시입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남당집(南塘集) 조선 영조(英祖) 때 문인 한원진(韓元震)의 시문집으로, 44권 22책으로 되어 있다. 잡저(雜著)에 심성론(心性論)에 관한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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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與梁處中 봄부터 멍하니 서서 하루도 빠짐없이 한 번 만나 뵐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서 한 해가 이미 저물어 갑니다. 그리워하는 마음 절절하여 그칠 줄을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경함(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과 함께 논설한 바가 있었는데, 그대가 경함에게 보내온 편지도 또한 얻어 볼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또한 경함의 편지에 답하였으니, 대략 말하자면, "주자(朱子)께서 말하길 '깨달음의 행위 주체는 마음【心】의 영묘함이요,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8)라고 하였는데, 만약 그대의 생각과 같다면, 마땅히 '일의 이치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요, '마음의 이치이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생생(生生)하기 때문에 영(靈)하고, 생생하기 때문에 각(覺)하는 것이니, 상채(上蔡)9)가 말하길 "마음에 지각(知覺)이 있는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智)는 마음의 정(貞)이요, 지(知)의 이치이며, 사덕(四德 : 仁義禮智)의 근본이고, 만 가지 이치의 창고이니, 이것이 '깨달음의 행위 주체는 마음【心】의 영묘함이요'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사(先師 : 奇正鎭)께서 이른바 '이치를 싣고 있는 것이 체(體)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靈)이 아니면 능히 깨닫지 못하며, 이(理)가 아니면 깨달을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깨달음의 주체【能覺】'라는 한 구절이 없이 다만 '깨달음의 대상【所覺】'만을 말한다면, 진실로 이치로써 이치를 깨닫게 되는 혐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의 주체【能覺】와 깨달음의 대상【所覺】을 상대적으로 들어서 말하였으니, 또한 어찌 이러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혹 어떤 사람이 선사(先師)께 단지 깨달음의 대상【所覺】만을 들어서 지각(知覺)하는 것을 이치라고 여기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선사께서 답하여 말하길 '어찌 이치로써 이치를 깨닫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깨닫는 행위 주체가 바로 영(靈)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면(下面)에서 '이치를 싣는 것이 체이다【載理爲體】'라는 한 단락의 말을 들어 채운 것입니다. 무릇 선현(先賢)의 말씀은 상대방이 묻는 것에 따라 답을 하는 것이니, 비록 그 답이 똑같이 않더라도 그 지향하는 바는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주재하는 바【所以主宰】'라는 말이 싫은 나머지 이를 두 주재함의 혐의가 있다고 여기고, 또 지각을 주재한다고 여기니, 이는 곧 소이연(所以然)입니다. 소이(所以)의 위에 다시 어떤 소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미 논변한 바가 있으나, 바빠서 미처 편지로 써서 보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부디 그대가 다시 한 마디 일깨움을 주는 말【一轉語】10)을 적어서 보여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스스로의 집착을 너무 고집하는 것은 진실로 이 사람의 병이니,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특이한 것을 만들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自春以來。無日不佇待一穩。而荏苒侵尋。歲已暮矣。憧憧懷思。曷有己已。近與景涵有所論說。而賢所抵景涵書。亦得以見之矣。日前又答景涵書。略曰。朱子曰。能覺者心之靈。所覺者。心之理。若賢意。則當曰事之理。不當曰心之理。生生故靈。生生故覺。上蔡云。心有知覺之謂仁。卽此意也。此非所覺者心之理乎。智者心之貞。知之理。四德之本。萬理之藏。此非所覺者心之理乎。先師所謂載理爲體。卽此也。非靈不能覺。非理無所覺。若無能覺一句。而只說所覺。則固有以理覺理之嫌。今以能覺所覺對擧言之。又安有此嫌耶。或人之問於先師。只擧所覺。而認知覺爲理。故先師答云。安有以理覺理之理乎。此言能覺者。是靈故也。是以其下面。擧載理爲體一段語以足之。夫先賢之言。隨問隨答。雖若不同。而其致則一也。云云。且駁所以主宰之語。以爲有兩主宰之嫌。又以爲主宰知覺。卽所以然。而所以之上。復有何所以云云。未知此說何如耶。愚已有所論辨。而忙未書呈耳。願賢更下一轉語以示之。如何。自執太固。固此人之病。而不知其喜新立異至於此也。 《주자어류》 권5에 "지각하는 것은 마음의 이(理)이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질의 영(靈)입니다.【所覺者心之理, 能覺者氣之靈.】"라고 한 말이 있다. 상채(上蔡) 중국 북송 때 성리학자 사량좌(射良佐, 1050〜1130)의 호입니다. 정호(程顥)의 주요한 제자로, 여대림(呂大臨)․양시(陽時) 등과 함께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리며, 뒷날 육구연(陸九淵)의 상산학(象山學)에 영향을 주었다. 일전어(一轉語)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한 마디의 번뜩이는 선어(禪語)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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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동지【南至】11)가 장차 가까워져서 양덕(陽德)이 상승하려고 하는 시기에,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부모의 병환은 시절과 더불어 모두 회복되었는지요. 매번 치달리듯 그리워하는 마음 지극하고 절절합니다. 보내 준 편지에 구구절절한 말들은 경계시키고 계발시켜 주심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생각에 혹 의심이 없을 수 없으니, 대략 그 내용을 진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주재(主宰)를 말하고 나서, 다시 주재(主宰)하는 바를 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는 천명(天命)의 본연(本然)과 태극(太極)의 주재(主宰)의 묘(妙)로서 말한 것이니, 진실로 당연하고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그대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도 또한 알고 있는 것이고, 나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위(無爲)이고, 사람은 유위(有爲)이니, 무위이기 때문에 이(理)가 주가 되고, 유위이기 때문에 심(心)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심(心)은 오로지 이(理)라고 부를 수도 없고, 기(氣)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이(理)와 기(氣)가 묘하게 합하여서 있는 것입니다. 묘하게 합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영묘함【靈】'인 것입니다.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지각할 수 있고,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人能弘道】'고 한 것과 장자(張子)가 이른바 '마음은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心能檢性】'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능히 넓힐 수 있는 능력과 능히 검속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재(主宰)를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 능력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용하는 바가 있게 됩니다. 만약 능력을 가지고 주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미 옳지 않습니다. '능소(能所)' 두 글자는 하나만 유지하고 하나는 폐할 수 없는 것이니,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 부분은 도리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니, 이 부분에서 어긋나게 되면, 모든 부분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경함(景涵)이 이른바 '영묘함은 주재하는 것이 아니다【靈不主宰】'라고 한 것과 '넓게 보면 영묘함은 주재(主宰)가 되고, 상세히 보면 신묘함이 주재(主宰)가 된다'라고 한 말들이 모두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자네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기를 잘 다스려서 다시금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능히 이와 같은 경지에 합하게 되면, 이른바 여러 가지 설명들이 모두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는 조목마다 따라가면서 낱낱이 들어서 말하지 말 것이니, 말단에서 위를 범하는 내용을 읽고 나서 놀랐습니다. 마음이 이미 주가 되면, 능소(能所)의 분단이 없을 수 없으니, 만약 그 능(能)을 보존하고자 그 소(所)를 폐한다면, 위를 범하는 근심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한단 말입니까. 다만 보내온 편지에 내가 말한 '마음에는 지각이 있다【心有知覺】'와 '지혜는 지각하는 것의 이치이다【智是知之理】'라는 주장을 옳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만약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을 지각(知覺)하는 까닭의 이치라고 한다면, 지각하는 것은 심(心)의 영역이 아니라, 성(性)의 영역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되므로, 이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지각하는 까닭의 이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평소 지리멸렬한 학문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정신까지 흐리멍덩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은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학문을 갈고 닦는 의리에 있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부디 나의 말을 배척하지 마시고 끝내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南至將近。陽德方升。未審生處愼候。與時俱復。每切馳慕之至。示喩縷縷。警發多矣。但於鄙意或不能無疑請略陳之旣言主宰。不當復言所主宰。此以天命本然太極主宰之妙言之。固當固當。非但賢知之。愚亦知之。非但愚知之。人皆知之。但天無爲。人有爲。無爲故理爲之主。有爲故心爲之主。此心不可專喚做理。不可專喚做氣。必是理與氣妙合而有者也。妙合是何物。曰靈而已矣。靈故能知覺。靈故能主宰。孔子所謂人能弘道張子所謂心能檢性是也能弘之能。能檢之能。其非主宰之謂耶。旣有其能則必有其所。若以能謂非主宰則已。不然。能所二字。不可存一而廢一。不其明矣乎。此是道理大頭臚於此錯。則無不錯矣。景涵所謂靈不主宰。及泛看靈爲主宰。細看神爲主宰之說。皆不以此耶。願高明平心易氣。更加三思也。苟能有合於此。則所謂諸般說話。皆有下落處矣。玆不復逐條枚擧也。末段犯上之云。讀之瞿然。然心旣爲主。則能所之分。斷不可無。若欲存其能而廢其所。則犯上之患。正在於此。如何如何。但來喩以愚所云心有知覺。及智是知之理之說。謂不然。而曰若以仁義禮智之性。爲所以知覺之理。則知覺非心也乃性也云云一條。最不可曉。仁義禮智之性。非所以知覺之理而何。可試思之也。素以滅裂之學。加以昏忘。何足以上下於此等議論乎。但講磨之義。不容無言。幸勿揮斥。終以見喩也。 남지(南至) 24절기의 하나인 동지(冬至)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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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유고》 서문 竹林遺稿序 글이 세상에 전해진 경우 중, 한 가지는 의리를 밝혀 사문(斯文)을 도울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한 가지는 경륜(經綸)을 펼쳐서 이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고, 달빛이나 이슬 등 아름답게 꾸며대는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비록 많다 한들 또한 무엇 하겠는가. 이 때문에 최고의 글은 천하에서 시행되어 만고에 바꿀 수 없는 경전이고, 그 다음의 글은 한 나라에서 시행되는 것이고, 또 그다음의 글은 한 집안에서 시행되는 것이다. 한 집안에서 시행될 만한 글을 한 나라에서 시행하고, 한 나라에서 시행될 만한 글을 천하에서 시행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협소하다고 여겨 시행하기에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오직 시행한 곳이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무릇 자식은 어버이에 대해 어버이의 손때가 책에 남아 있으면 차마 손상시키지 못하고, 침이 땅에 떨어져 있더라도 오히려 반드시 거두는 법인데, 하물며 유언(遺言)과 유고(遺稿)는 정신과 마음이 담겨있고 평생토록 행한 일이 실려 있는 것이니, 조심스럽게 지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이 혹 천하나 한 나라에서 시행될 수 없는 글이라면 한 집안에 보관하여 자손에게 전함으로써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당시에 가지셨던 뜻과 행하셨던 일을 알게 해야 한다. 또 이것이 일찍이 조상을 추모하고 사모하는 데에 한 가지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죽림(竹林) 황공(黃公)은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공무로 분주하였다. 이 때문에 전해진 저술이 많지 않았는데, 맏아들 작(稓)이 상자에 남아 있는 글을 찾아 살펴보고 약간 편의 글을 모을 수 있게 되자 이를 간행하여 집안에서 시행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겸손한 마음에 두려워하고 꺼려하여 감히 사람들에게 널리 배포하지 못해서였다.삼가 살펴보건대 편질(編秩)이 협소한데다 언사가 간결하고 질박하여 구구하게 꾸며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혹 세속의 안목에 맞지 않은 점이 없지 않겠지만, 그 속에 담긴 뜻만은 요컨대 의리의 문장과 경륜의 방책이 되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다. 내가 생각건대 단지 한 집안의 글이 될 뿐만이 아닌 듯하니, 지금 비록 세상에서 시행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뜻이 있는 자가 취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文之傳於世也。一則發明義理。可以羽翼乎斯文。一則敷陳經綸。可以裨補乎斯世。非是二者。而出於月露組繪之口。則雖多亦奚爲也。是以上焉者。行於天下。而爲萬古不刊之典。次焉者。行於一邦。又次焉者。行於一家。以一家之文而行於一邦。以一邦之文而行於天下。則人必少之以爲不足行。此非文之過也。惟行之非其所也。夫子之於親。手澤在書。不忍傷焉。口液落地。猶必收之。況其遺言遺稿。爲精神心術之所寓。平生行事之所載者。可不思所以謹守哉。其言或不得爲天下及一邦之文。則當藏之一家。傳之子孫。使知乃祖乃父當日之志行。又未嘗不是追遠思成之一助也。竹林黃公早年釋褐。奔走靡監。是以所傳著述爲不多也。胤子稓搜閱巾衍。裒稡得若干篇。付剞劂氏。將欲行之於家。蓋其謙謙畏忌。有不敢廣布於人也。竊覸其編秩狹少。言辭簡訥。不見有區區組繪之態。此所以或不無寡諧於時眼。而其旨意去處。要不失爲義理之文經綸之策也。吾恐不止爲一家之文而已。今雖不欲行之於世。而安知有志於斯世者。不之取焉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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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경계하다 自警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은 모두 구구하니 世間可欲總區區한평생 하찮게 여겨질까 스스로 경계하네 自警平生視若無여색 연모해 호전의 절개 바뀐 것 부끄럽고66) 戀色堪羞胡節改금을 본들 어찌 관녕의 마음을 변하게 하랴67) 見金怎使管心渝벌거벗은 너 또한 어찌 나를 더럽히겠는가68) 裸裎爾亦焉能浼함정 속 사람은 다 스스로 몰아넣은 것이네 罟穽人皆竟自驅이러한 관문을 뚫고 지나간 훗날에야 透得此關然後日천 사람을 뛰어넘는 호걸이라 일컬으리 方稱豪傑出千夫 世間可欲總區區, 自警平生視若無.戀色堪羞胡節改, 見金怎使管心渝?裸裎1)爾亦焉能浼? 罟穽人皆竟自驅.透得此關然後日, 方稱豪傑出千夫. 여색……부끄럽고 여색에 빠져 절조를 바꾸는 일이 없도록 경계한다는 말이다. 송나라 호전(胡銓, 1102~1180)이 해외에 귀양 갔다가 돌아와 상담 호씨원(湘潭胡氏園)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를 모시고 있던 기생 여천(黎蒨)을 위해 시를 지었는데, 주자(朱子)가 시를 지어 호전이 나라를 위해 죽을 만한 절개를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색의 욕심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조롱하였다. 금을……하랴 황금 보기를 하찮은 돌멩이 보듯이 하겠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말기에 관녕(管寧)이 친구 화흠(華歆)과 함께 채전(菜田)을 일구던 중 한 조각의 황금이 나왔다. 그러자 관녕은 기와 조각이나 다름없이 여겨 호미질을 계속했고, 화흠은 일어나서 황금을 집어 멀리 던졌다고 한다. 《世說新語 德行》 유하혜(柳下惠)의 풍모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너는 너고 나는 난데, 비록 어깨를 드러내고 옷 벗은 채 내 옆에 누워있다 한들, 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尔爲尔 我爲我 虽袒裼裸裎于我側 尔焉能浼我哉〕"라고 했다. 裎 底本에는 "程". 《孟子》 〈公孫丑上〉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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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날에 정토사에서 놀다 2수 末庚日, 遊淨土寺【二首】 절에서 청아하게 놀며 말복 달임을 하니 淸遊蕭寺煮終庚백발노인은 옛날의 정회를 잊기 어렵네 白首難忘舊日情우사가 한발31)을 몰아낸 것이 기쁘니 堪喜雨師驅旱魃주국에서 수성을 깨뜨리는 걸 보겠네 卽看酒國破愁城천년토록 황하가 흐려 몹시 괴로우니 千年正苦黃河濁긴 밤에 누가 붉은 촛불 가지고 밝히랴 長夜誰持炳燭紅날이 저물어갈 때 시 읊으며 돌아오니 風詠歸來天欲暮옆 사람은 불평하는 소리를 내지 마소 傍人莫道不平聲가뭄 끝에 가랑비가 삼복더위 씻어내니 旱餘小雨洗炎庚풍경 대하여 옷깃 젖힘에 시원함 느끼네 對景披衿覺爽淸어진 주인 오늘의 북해32)를 반갑게 만났으나 賢主喜逢今北海졸렬한 시를 옛 장성에서 짓기가 어렵네 拙詩難作古長城온 산의 푸른 나무는 가을철에 시들지만 千山碧樹當秋病별원의 그윽한 꽃은 여름을 지나 피었네 別院幽葩過夏明세상 밖의 한 구역이 깨끗한 땅이라 物外一區乾淨土풍진에도 여기에 오면 아무 소리가 없네 風塵到此寂無聲 淸遊蕭寺煮終庚, 白首難忘舊日情.堪喜雨師驅旱魃, 卽看酒國破愁城.千年正苦黃河濁, 長夜誰持炳燭紅?風詠歸來天欲暮, 傍人莫道不平聲.旱餘小雨洗炎庚, 對景披衿覺爽淸.賢主喜逢今北海, 拙詩難作古長城.千山碧樹當秋病, 別院幽葩過夏明.物外一區乾淨土, 風塵到此寂無聲. 한발(旱魃) 가뭄을 일으키는 전설상의 괴물이다. 《시경》 〈운한(雲漢)〉에 "한발이 사나워 속이 타는 듯하며 불을 놓은 듯하도다.〔旱魃爲虐, 如惔如焚.〕" 하였다. 북해(北海) 후한(後漢) 때 북해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 153~208)을 말한다. 그는 선비를 좋아하고 후진들을 교도(敎導)하기 좋아해서 빈객이 항상 그의 집에 가득했다. 그래서 "자리에는 빈객이 항상 가득하고, 동이에는 술이 항상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는 근심이 없겠다.〔坐上客恒滿, 樽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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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제삿날에 자정이 시를 짓기에 차운하여 절구 7수를 짓다 先師諱辰, 子貞有詩, 次韻因成七絶 산이 무너진 지 어느덧 몇 년이 지났나 山頹忽忽幾經春나이 젊은 사람이 지금은 노인이 되었네 年少今爲老大人이날에 해마다 동으로 바라보고 곡하니 此日年年東望哭사문의 일마다 통탄스러움이 새롭네 師門事事痛堪新선생의 바른 학문은 천 년 가도 드무니 先生正學罕千春세상에 식자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될까 識者世間凡幾人비방하는 말이 분분하여 거듭 한스러우니 謗說紛紛重可恨임금 잊고 절의 배격함이 어찌 그리 새로울까 忘君排節一何新변괴를 봄바람 속에 기거할 때35) 알았으나 變怪雖知起坐春무함을 날조한 증거는 비방하던 사람이었네 造誣證佐謗讒人선생이 만일 유고 인가받을 마음 가졌다면 先生如有認稿意주나라 높인 게 아니고 신을 찬미했으리라36) 不是尊周却美新여강의 죄는 천추에 드러날 것이니 驪江之罪著千春《중용》의 주석을 바꾼 사람이기 때문이네37) 爲是中庸易註人지금 보건대 스승의 본래 글을 바꾸었으니 今見改師本文變그 옛것을 가지고 새것을 비교해 보리라 將來厥舊較看新스승의 도와 글이 만 년에 어두워졌으니 師道師文晦萬春성벽에서 전투 관망하는 이가 천 명이네38) 戰觀壁上一千人인심과 세태가 지금 이와 같으니 人心世態今如許유문 또한 이미 변해버렸네 儒門亦復已變新태어난 지 오십오 년이 되었는데 生來五十五年春오직 스승 보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네 惟有閑師不愧人무함은 씻지 못하고 원고도 정리하지 못해 誣未洗淸稿未整가을바람에 백발이 또 새로 늘어났네 秋風白髮又添新그늘진 벼랑에서도 봄볕을 보는데 陰崖猶見有陽春하늘이 어찌 우연히 남자를 냈겠는가 天豈偶生男子人다만 소원은 존령께서 묵묵히 도와서 但願尊靈垂黙佑만년의 학업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네 晩年學業日新新 山頹忽忽幾經春? 年少今爲老大人.此日年年東望哭, 師門事事痛堪新.先生正學罕千春, 識者世間凡幾人?謗說紛紛重可恨, 忘君排節一何新?變怪雖知起坐春, 造誣證佐謗讒人.先生如有認稿意, 不是尊周却美新.驪江之罪著千春, 爲是中庸易註人.今見改師本文變, 將來厥舊較看新.師道師文晦萬春, 戰觀壁上一千人.人心世態今如許? 儒門亦復已變新.生來五十五年春, 惟有閑師不愧人.誣未洗淸稿未整, 秋風白髮又添新.陰崖猶見有陽春, 天豈偶生男子人?但願尊靈垂黙佑, 晩年學業日新新. 봄바람……때 스승의 훈도와 덕화(德化)를 받던 때를 말한다. 송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여남(汝南) 땅에서 뵙고 돌아와 "광정이 춘풍 속에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光庭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하였다. 《宋元學案 卷14 明道學案》 선생이……찬미했으리라 저자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일제의 인가를 받아 자신의 문집이 간행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는 말이다. 원문의 '미신(美新)'은 양웅(揚雄)의 〈극진미신(劇秦美新)〉으로 진(秦)을 비판하고 왕망(王莽)이 서한(西漢)을 찬탈하여 세운 신(新)을 찬미한 글인데, 여기서는 일제에 협조하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여강(驪江)의……때문이네 윤휴(尹鑴)가 학문에 있어서 당시에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신봉된 주자(朱子)의 해석 방법을 배격하고 《중용장구(中庸章句)》ㆍ《대학장구(大學章句)》ㆍ《효경(孝經)》 등 경전(經典)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한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라고 비판하였다. '여강'은 윤휴를 가리키는데, 그가 젊은 시절 여강에 산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별칭하였다. 성벽에서……천 명이네 간재 전우의 무함을 해결하는 데에 많은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무심하였다는 말로, 항우(項羽)의 초(楚)나라 군대가 거록(鉅鹿)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무찌를 때 그 기세에 눌린 다른 제후의 장수들은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고만 있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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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광산 이씨 행장 孺人光山李氏行狀 우헌(愚軒) 윤공(尹公) 자욱(滋郁)의 배(配)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고(故) 학생 덕홍(德弘)의 딸로 청심당(淸心堂) 조원(調元)의 후손이며 비(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중황(重黃)의 딸이다. 순조 신묘년(1831, 순조31) 8월 10일에 광주(光州)의 마산리(馬山里)에서 태어났다. 20세에 남편의 집으로 시집왔지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대그릇과 표주박에 담긴 끼니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유인은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집안을 이끌어 나가는 모든 규범이 하나도 잘못되는 경우가 없었다. 존장(尊章 시아버지)인 묵양공(黙養公)은 성품이 엄격하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유인은 공의 뜻을 잘 받들어 한 번도 어기는 경우가 없었다. 고(姑 시어머니) 문씨(文氏)가 나이도 많고 눈도 멀어 20여 년에 걸쳐 일상에 남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여 눈이 먼 고통을 알지 못하였다. 적장자(嫡長子)의 아내로서 누대(累代)의 기일(忌日)을 받들면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기(祭器)를 매우 정갈하게 준비하고 차리는 제물도 극히 향기로웠다.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고 출입이 간결하며 사치와 화려함을 금하고 무당이나 축사(祝史)를 멀리하였다. 온화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엄격함으로 자식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일에는 검박하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두텁게 베풀어 안팎의 친족이나 같은 마을의 남녀노소에게 은혜를 베푸는 마음이 곡진하였다. 신미년(1871, 고종8) 2월 28일 향년 41세에 세상을 떠나 석채동(石菜洞) 선영의 모향(某向)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4남 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상룡(相龍), 상봉(相鳳), 상귀(相龜), 상린(相麟)이고 딸은 정기현(鄭琪鉉)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손자는 모두 적지 않는다. 나는 윤씨(尹氏) 집과 한 마을에 수십 년을 같이 살면서 출입하면서 지켜보고 일상적인 안부부터 길사와 흉사, 기쁜 일이나 슬픈 일에 대해서 한 집안인 듯 서로 친숙하였다. 우헌공(愚軒公)이 효자임을 알았고 또 공이 효자라는 명성이 반드시 내조의 힘이 아닐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상린(相麟)이 나에게 말하기를, "제 선비(先妣)의 훌륭한 계책과 덕성은 실로 옛날의 숙원(淑媛)에 부끄러움이 없지만, 규문(閨門) 안의 드러나지 않은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장인(丈人)께서 오래도록 이웃해서 살고 계셨으니 당연히 자세히 아실 것입니다. 선비를 위해 행장을 지어 인(仁)하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아,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말이 오랠수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후손이 번성하여 훗날의 복록이 다하지 않았고 상린(相麟)이 현명한 사우(士友)들과 종유하고 있으니 장차 입신(立身)하여 부모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날이 올 것이다. 결코 고루하고 보잘것없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상린의 부탁이 더욱 간절하여 무심하게 넘기기 어려웠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위와 같이 적는다. 愚軒尹公滋郁齊光山李氏。故學生德弘女。淸心堂調元后。妣水原白氏重黃女。以純祖辛卯八月十日。生于光州馬山里。二十歸于夫家。家貧甚。簞瓢枵如。孺人夙興夜處。左右靡解。凡百家政。無一闕儀。尊章黙養公。性嚴少諧。孺人克意承順一無違忤姑文氏老而盲廢起居須人爲二十餘年。而安心便體。克享其樂。不知盲廢之爲苦也。以長旁冡婦所奉累世諱辰。致誠致齊。盥濯器皿。極其精潔。饋奠籩豆。極其芳馨。平居。寡言笑簡出入。禁奢華絶巫祝。和以御家。嚴以敎子。儉於持己。厚於施人。內外族親。隣里老幼。曲有恩意。以辛未二月二十六日終。得年四十一。葬于石菜洞先隴某原。擧四男一女。相龍相鳳相龜相麟。鄭琪鉉。內外諸孫不盡述。余與尹氏家。同住一巷爲數十年。出入守望。起居寒暄。以至吉凶歡戚。若一家之相熟。而知愚軒公之爲孝子人。又知公之得此聲。又未必非其內助之力也。相麟向余言。我先妣嘉謨懿範。實無愧於古之淑媛。而閨門事隱。誰其知之。惟丈人接隣之久。計應詳悉。願爲之狀。使得免於不仁不明之罪也。嗚乎宗族之稱。鄕黨之誦。一辭嘖嘖。久愈不泯。況螽斯蕃衍。後祿未艾。而相麟從遊賢士友。立揚顯親。將有其日乎。決非固陋無狀所可承當也。但相麟之託愈懇。而有難恝然。謹据其家狀。爲之說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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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 조공 행장 竹溪曺公行狀 공의 휘는 덕기(德琪), 자는 기지(器之), 호는 죽계(竹溪)이다. 조씨(曺氏)의 선계는 창녕(昌寧)에서 나왔으니, 신라 태사(太師)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휘 계룡(繼龍)이 그의 시조이다. 증조는 효제(孝悌)가 있어 효행으로 재랑(齋郞)43)에 제수되었고, 조부 억원(億元)은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아버지 여홍(汝弘)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평택 임씨(澤林氏) 억문(億文)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明宗) 정미년(1547) 7월 13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스승에게 나아가44) 배우기 시작하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13세에 《논어》를 읽다가 자하(子夏)가 질문한 '교소천혜(巧笑倩兮)'에 이르러45)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 또한 근본에 힘쓴다는 뜻이니, 배워서 본말과 선후를 알지 못한다면 마치 기름덩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힘만 허비하고 공효는 없을 것이다."46) 라고 하고는, 마침내 마음을 잡아 함양(涵養)하고 근본을 바로잡아 근원을 맑게 하는 경지에 더욱 힘을 다하였다. 약관에 시서(詩書)와 육예(六藝)에 통달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미암(眉庵) 유선생(柳先生)47) 문하에 들어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절차탁마하여 날로 더욱 발전하니 선생이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줌이 매우 컸다. 부모를 섬길 적에는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모습으로 조촐한 음식이나마 한껏 기쁘게 해 드렸고, 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아우 덕련(德璉)과 함께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형제가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어48) 낮과 밤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종족과 붕우에게는 각각 그에 맞는 방도를 다하여 대하였다. 부춘산(富春山) 속에다 오두막집을 지어 세 오솔길49)에 꽃과 대나무를 심어놓고 사방 벽에 도서를 두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휘장을 드리우고서 경서를 궁리하고 이치를 연구하니 이웃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매번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할 때에는 복건(幅巾)과 망혜(芒鞋) 차림으로 수림(水林)과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하면서 화려한 영화(榮華)를 부러워하거나 외롭고 쓸쓸함을 서글퍼할 줄 몰랐다. 유선생이 일찍이 절구(시) 한 수를 붙여 말하기를,은둔해서는 도연명과 사영운50)의 정취처럼 하고 (隱同陶謝趣)마음으로는 정자와 주자의 글을 배운다 (心學程朱書)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51)이 본도(本道)의 절도사로 있으면서 순시하다가 본읍(本邑)에 왔을 적에,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 만나보고 탄복하기를, "직접 보니 들은 것보다 훨씬 뛰어나도다."라고 하고서 예물을 보내왔다. 공이 일찍이 그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네가 귀인(貴人)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말을 신중히 하는 것이 화를 멀리하는 도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보존하고 학문을 진보시키는 것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선조 때, 향도천(鄕道薦)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인조 갑자년(1624) 5월 8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금오산(金鰲山)52)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부장(部將) 탁(倬)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명서(命瑞)는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지냈고, 딸은 진사 박립(朴立)에게 출가하였으며, 증손 이하로 매우 번창하였다. 숙종 때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아, 재주는 세상에 쓰이기에 충분하였는데도,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문장에 힘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학문은 다른 사람정도를 따라가기에 충분하였는데도,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에 급급해하지 않았으니, 공의 숭상하는 뜻이 무엇이며,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위의 높고 낮음과 이름의 드러남과 가려짐으로 공을 논할 바가 아니다. 후손 석주(錫柱)가 그 집안에 전하는 문자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그의 행장을 청하니, 나는 행장을 지을만한 적임자가 아님으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전(家傳)을 바탕으로 대략 윤색을 가하였다. 公諱德琪。字器之。號竹溪。曺氏系出昌寧。新羅太師昌城府院君諱繼龍。其鼻祖。曾祖孝悌。以孝行除齋郞。祖億元直長。考汝弘軍資監正贈吏曹參判。妣平澤林氏億文女。公以明宗丁未七月十三日生。天稟挺邁。不類凡兒。就傅上學。文理日進。十三讀論語。至子夏問巧笑倩兮。沈思良久曰。此亦務本之意也。學而不知本末先後。則如畵脂鏤氷。勞而無功。遂於操存涵養端本淸源之地。尤致力焉。弱冠通詩書六藝。聲聞藹然。廢擧業。遊於眉庵柳先生之門。薰陶切磋。日益展拓。先生稱許甚重。事父母。怡色婉容。菽水盡歡。居喪廬墓。與弟德璉友愛甚篤。長枕大被。日夕不離。宗族朋友。待之各盡其方。結廬富春山中。三徑花竹。四壁圖書杜門下帷。窮經硏理。隣里罕見其面。每良辰和煦。幅巾芒鞋。逍遙於水林泉石之間。不知芬華之爲可艶。而踽凉之爲可傷也。柳先生嘗寄一絶詩有曰。隱同陶謝趣。心學程朱書。愚伏鄭先生按節本道。巡到本邑。舍車徒入見。歎曰。所見浮於所聞。因致幣物。公嘗戒其子曰。吾願汝爲好人。不願汝爲貴人也。又曰。愼言非惟爲遠禍之道。存心進學。實權輿於此。可不勉哉。宣廟朝。以鄕道薦。除寢郞。仁祖甲子五月八日圽。享年七十八。葬于金鰲山甲坐之原。配南平文氏部將倬女。婦德純備。墓合窆。一男一女。男命瑞漢城左尹。女進士朴立。孫曾以下甚蕃衍。肅廟朝贈工曹參議。嗚乎。才足以售世而不屑屑於沽衒之文。學足以及人。而不汲汲於干進之路。未知公之所尙者何志。所樂者何事。位之軒輊。名之顯晦。非所以論公也。後孫錫柱持其家傳文字。請余狀其行。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家傳而略加潤色云爾。 재랑(齋郞) 재랑은 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맡은 하급 관리로, 위(魏)나라 때 처음 설치하였는데 태상(太常)에 속하였고, 당나라와 송나라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묘(廟), 사(社), 전(殿), 궁(宮), 능(陵), 원(園) 따위의 참봉을 달리 이르기도 한다. 스승에게 나아가 원문의 '취부(就傅)'는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나이인 10세를 말한다. 《소학(小學)》 〈입교(立敎)〉에 "여덟 살이 되면 문호를 출입하고 자리에 나아가고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반드시 장자(長者)보다 뒤에 하여 비로소 겸양(謙讓)을 가르친다. 열 살이 되면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 바깥에서 거처하고 잠잔다." 하였다. 자하(子夏)가……이르러 자하(子夏)가 공자(孔子)에게 "옛 시에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예쁘며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가 선명함이여.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하는 것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이는 곧 진실한 자질이 있은 뒤에 예의와 문학을 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論語 八佾》 이……것이다 얼음을 조각한다는 것은 곧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덩이에다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다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공효는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미암(眉庵) 유선생(柳先生) 유희춘(柳希春, 1513~1577)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사돈간이며 선조(宣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긴……덮어 형제간에 우애가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서》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에, "현종이 태자로 있을 적에 큰 이불과 긴 베개를 만들어 여러 아우들과 함께 썼다[玄宗爲太子, 嘗製大衾長枕, 將與諸王共之.]."라는 고사가 있다. 세 오솔길 원문의 '삼경(三徑)'은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본디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고 친구인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서로 종유했던 데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가리키는데,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 또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도연명과 사영운 원문의 '도사(陶謝)'는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의 병칭이다. 두보(杜甫)가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 가에 초당을 짓고 살 때 강물이 크게 불어난 것을 보고 지은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어찌하면 시상(詩想)이 도연명, 사영운 같은 이를 얻어서 그로 하여금 시 짓게 하고 함께 노닐꼬.[焉得思如陶謝手, 令渠述作與同遊.]"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 정경세(鄭經世, 1563~1633)로 우복은 그의 호이고, 자는 경임(景任), 본관은 진주(晉州), 초시(初諡)는 문숙(文肅), 개시(改諡)는 문장(文莊)이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19)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검열 등을 거쳐 사가독서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尙州)의 인사들이 의병을 규합하고 정경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왜적과 맞닥뜨리게 되어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해 겨울에는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호서(湖西) 지역으로 가다가 천연두에 걸려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 임진왜란 후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복집》ㆍ《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 금오산(金鰲山)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는 용암산(聳岩山, 547m)의 옛 이름이다. 용암산이라는 이름은 솟을 용(聳)과 바위 암(岩)자인데, 원래는 산위의 샘에 금자라[金鰲]가 있다고 하여 금오산(金鰲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산 정상에 용암이 솟아 오르듯 솟은 바위가 있다'고 하여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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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 정공 행장 晩翠軒鄭公行狀 만취헌(晩翠軒) 처사 정공(鄭公)은 무신년(1908)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53) 한 달 뒤 거주지 가까운 땅 운주동(雲柱洞) 술좌(戌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순진(淳珍)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내가 사는 봉양(鳳陽)의 누추한 집으로 찾아와서 사적(事蹟)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아, 처사는 바로 나의 50년 지기 옛 친구이며, 양세(兩世)에 걸쳐 종유하고 일심으로 의기투합하였으니 어찌 차마 행장을 짓는 데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겠는가. 공은 체구가 장대(長大)하고 훌륭한 용모에 수염도 아름다워서 보기만 해도 준걸스럽고 박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성품과 기질은 온순하고 화락하였으며, 행동거지는 안정되고 자상하였다. 선행을 즐겨하고 의를 좋아하였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온화하고 자상하여 화한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드니 자상하고 화락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가 풍부하였지만 시류를 붙좇고 사정(私情)을 따라 요행으로 벼슬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만년(晩年)에 과업(科業)이 사람을 그르치는 것을 개탄하고는 마침내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밤낮으로 두루 열람하여 의취(義趣)를 힘써 궁구하였다. 그러므로 그 문장(文章)에 발현되고 행위에 드러난 것이 늙을수록 더욱 치밀하여 찬란하게 문채가 났으니, 학문을 함에 법도가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 어버이를 섬길 때에 살아계실 적에는 그 기쁨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슬픔을 다하였으며, 기일(忌日)54)에 이르러서는 어렴풋이 뵙는 듯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듯55) 마치 살아계신 듯이 모시는 정성56)을 다하였다. 그 아우와의 우애가 순수하고 독실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고 지냈는데,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고아가 된 조카들을 보살피고 기르면서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다. 아이였을 적에, 노상에서 한 노인이 땔나무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그 노인을 불쌍히 여겨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갈증을 풀도록 도와주었으며, 엄동설한에 한 일가 사람이 지나가자 그 입고 있는 것이 매우 얇은 것을 보고 한 벌의 옷을 내어 그에게 준 적이 있었다. 중년에 서울에 갈 때, 동행 중 한 사람이 병이 매우 심하였는데, 동반한 여러 사람은 모두 가버리고 공만이 홀로 밤낮으로 병간호를 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강도(江都)에 변란57)이 일어나 풍문이 매우 흉흉하자, 사람들이 일찍 돌아가라고 권유하여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말게 하니 대답하기를, "병이 났을 때 서로 구휼함은 평상시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천 리 밖에서 위급한 상황에 닥쳤다고 버려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차도가 있어 함께 돌아왔다. 하루는 한 여자가 이웃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양가의 딸로 흉년에 구걸하다가 남에게 팔려 종이 되었다는 것을 물어서 알고는 이에 산 사람에게 권유하여 마침내 속량(贖良)58)하여 돌려보냈다. 흉년을 만나면 의식(衣食)을 절약하고 그 남은 것을 친척과 오랜 친구 중 가난한 자들을 도왔으며, 시절마다 안부를 묻는 것과 길흉사나 경조사에도 은혜가 두루 미치고 일찍이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효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들으면 공은 그를 불러다가 타일렀는데, 말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간곡하니 그 사람이 감동하여 깨닫고는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변란59)에 비적의 무리가 크게 일어나자 의리(義理)와 화복(禍福)을 진달하여 한 사람 한 사람 타이르고 이해시키니 고을이 이에 힘입어 사교(邪敎)에 물들지 않은 자가 매우 많았다. 문규(門規)를 세워 집안의 화목을 도모하였고, 동약(洞約)60)을 만들어 예속의 사귐을 밝혔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시문(時文)61)을 지어 과거를 쫓지 못하게 하고 항상 최면암(崔勉庵)62)과 기송사(奇松沙),63) 정애산(鄭艾山)64)의 문하에서 종유하게 하였다. 불량한 사람과 접촉하지 않았고, 분잡하고 화려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빛나는 광채를 간직한 채 산수 좋은 고을에서 유유자적 지내니 그 세속을 벗어난 뛰어난 운취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할 만하게 하였다. 공은 하동(河東)사람으로 휘는 기현(奇鉉), 자는 치홍(致弘)이다. 고조 인철(仁哲)은 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조 수국(遂國)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조부 권열(權烈)은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효성으로 정려(旌閭)의 명을 받았다. 아버지는 재일(在馹)이며 어머니는 밀성 박씨(密城朴氏) 명원(命源)의 따님이다. 헌종(憲宗) 갑진년(1844, 헌종10) 2월 19일에 바로 공이 태어났다. 16세에 공주 이씨(公州李氏) 의무(宜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65), 아들 순진(淳珍)과 문일수(文日洙)에게 출가한 딸은 이씨의 소생(李氏)이며, 순학(淳學)、순룡(淳龍)、순경(淳璟)、순호(淳鎬)와 문병우(文秉禹)에게 출가한 딸은 진씨(陳氏)의 소생이다. 아 나와 공은 평생 교분을 맺어 늘그막에도 곁에서 서로 지켜보면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천고의 사람이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물을 닦고 붓을 적셔 삼가 그 행실을 기술하여 돌려보낸다. 晩翠軒處士鄭公。以戊申二月二十五日觀化。踰月而葬于所居近地雲柱洞戌坐之原。遺胤淳珍奉家狀。過余鳳陽敝廬。謁不朽之文。嗚乎。處士是余五十年舊要。兩世遊從。一心密勿。豈忍以非其人辭。公身長體碩。好容顔美鬚髥。見之可知其爲峻茂朴實人也。性氣溫良。擧止安詳。樂善嗜義。愛人喜施。溫溫諄諄。和氣薰人。可知其爲慈詳愷悌人也。少業功令。文詞贍富。而未嘗趨時徇私爲僥倖干進計。晩年慨歎科業之誤人。遂將心經近思錄等書。晝夜閱覽。務窮義趣。是以其發於文詞。著於施爲者。老益邃密。斐然有章。可知其爲學問規矩人也。其事親也。生而盡其歡。死而盡其哀。至於夫日之臨。僾然愾然以盡如在之誠。與其弟友愛純篤。長枕大被。老而不替。撫育孤姪。無間已出。兒時路上見一老人負薪而行。悶其老。出囊金以資其解渴。冬雪中。一族人過之。見其所着甚薄。出一襲衣與之。中年赴京。同行一人。得疾甚劇。諸伴皆去。公獨晝夜救護。居未幾日。江都變起。風聞甚駭。人勸之早歸。毋貽親憂。答曰。疾病相恤。平時猶然。況在千里之外而可以危急相棄乎。月餘見差同還。一日有一女子逃匿隣家。問知其以良家女。凶年行乞。因以見賣爲婢於人。乃諭所買者。遂得贖良而還之。遇飢歲。縮衣節食。推其所餘。以周親戚知舊之貧者。時節寒暄吉凶慶弔恩意周遍未嘗有闕有人以不孝聞公招諭之。言極懇惻。其人感悟。卒爲孝子。甲午之變。匪類大熾。爲陳義理禍福。面面諭解。鄕里賴不染邪者甚多。立門規。講敦睦之義。設洞約明禮俗之交。敎子不令作時文覓科第。常令遊從於崔勉庵奇松沙鄭艾山之門。身不接浮浪之人。足不到紛華之地。潛光蘊輝。婆娑邱林。其偉韻逸趣。令人可敬。公河東人。諱奇鉉。字致弘。高祖仁哲贈參判。曾祖遂國五衛將。祖權烈通政。以孝命旌。考在馹妣密城朴氏命源女。憲宗甲辰二月十九日。卽公之寅降也。十六委禽于公州李氏宜茂女。男淳珍。女文日洙李氏出。淳學淳龍淳璟淳鎬。女文秉禹。陳氏出也。嗚乎。余與公爲平生之契。而到老相守。益切煦濡之情。誰知今日而奄作千古人耶。抆淚泚筆。謹述其行以還之。 세상을 떠났다 원문의 '관화(觀化)'는 만물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 〈지락(至樂)〉에 "사람의 생명은 빌린 것이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다. 사생은 주야의 교대와 같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함께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마침 변화가 나에게 미쳤으니 내가 또 어찌 싫어할 것인가.[生者假借也. 假之而生, 生者塵垢也. 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而化及我, 我又何惡焉?]"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기일(忌日) 원문의 '부일(夫日)'은 그날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기일(忌日)을 이른다. 《예기》 〈제의(祭義)〉에 "군자에게는 종신(終身)의 상(喪)이 있으니, 기일을 이른다. 기일에는 일상적인 업무를 보지 않으니, 이것은 불길한 날이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날〔夫日〕에는 내 마음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만 쏠리기 때문에 다른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어서이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라고 보인다. 어렴풋……듯 《예기》〈제의(祭義)〉에, "제사하는 날에 묘실(廟室)에 들어가서 어렴풋하여 반드시 조상이 신위에 계심을 뵙는 듯하며, 제수를 올리면서 주선하여 방문을 나올 때에 숙연하여 반드시 조상이 거동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며, 제수를 올리고 방문을 나와 들을 때에 반드시 조상이 크게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祭之日, 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마치……정성 선조의 영혼이 와 계신 듯이 정성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논어》 〈팔일(八佾)〉에 "선조의 제사를 지내실 적에는 선조가 계신 듯이 하셨으며, 신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신이 계신 듯이 하셨다.[祭如在, 祭神如神在.]"라는 말이 있다. 강도(江都)에 변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많은 사람들이 순절한 것을 말한다. 강도는 강화(江華)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속량(贖良)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매매되고 사역(使役)되던 비복(婢僕)ㆍ백정(白丁)ㆍ무격(巫覡)ㆍ배우(俳優)ㆍ창녀(娼女) 따위의 종들이 대가(代價)를 바치고 노비(奴婢)의 신분을 면제받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갑오년의 변란 1894년(고종31) 6월 21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궁궐을 점령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를 통상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고 한다. 이후 민씨(閔氏) 정권은 붕괴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하여 제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게 된다. 이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유생(儒生)들은 갑오변란과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적 개화 정권의 개혁 정책을 민족 존망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까지 전개하였다.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3권,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편, 지식산업사, 1989》 동약(洞約) 조선 중기(16세기) 이후 지방의 양반들이 신분질서의 유지와 결속을 위하여 만든 동단위 자치조직으로 동계(洞契)·동의(洞議)·동안(洞案)이라고도 한다. 향약이 국가 차원에서 장려되었지만, 향촌 전체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데는 비효율적이었으므로 몇 개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진 동에 거주하는 양반들이 결속하여 스스로의 관심과 이해를 반영시킨 동약을 실시했다고 한다. 시문(時文) 고문(古文)에 상대되는 말로 당시에 유행하는 문장을 가리키며, 과거 시험을 보는 데 필요한 문체의 글을 뜻한다.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면암집》이 있다. 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으로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1819~1891)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당시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장가들었는데 원문의 '위금(委禽)'은 혼례(婚禮)에서 납채(納采)할 때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올리던 데에서 유래하여, 장가드는 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원년 기사에 "춘추 시대 정나라 서오범의 여동생이 아름다웠다. 공손초가 그녀에게 장가들려 했는데, 공손흑이 또 심부름꾼을 보내 억지로 기러기를 맡겼다.[鄭徐吾犯之妹美, 公孫楚聘之矣, 公孫黑又使强委禽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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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은 정공 행장 箕隱鄭公行狀 유생 정유흠(鄭瑜欽)은 나에게 배운 지 여러 해인데, 그 사이에 선대인(先大人,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고, 상기를 마친 뒤에 가장을 받들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가장의 기록에 의하면, 공의 휘는 덕주(德周), 자는 화앙(華仰), 호는 기은(箕隱)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숙하여 온화하고 화락한 풍모가 있고 출중(出衆)하고 탁월한 기개가 있었으니, 그 기국과 인물을 품평하는 것이, 대개 지금처럼 쇠퇴한 세상의 인물이 아니었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아가 형과 함께 공부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 된 자가 부모를 충심으로 봉양66)하지 못하고 도리어 부모에게 양육을 받으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마음이 편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잠시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이때부터 살림살이가 힘입은 바가 있어서 몸을 편안하게 하는 물건들을 모두 넉넉히 갖추어 드렸다. 5명의 형제 중에 공은 둘째였는데, 장가들고 나자 어버이의 명에 따라 분가하였으나, 조석으로 맛있고 연한 음식을 장만하는 일과 나고 들며 부지런히 집안일을 맡아 다스리는 일을 분가하였다는 이유로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다.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해서는 반드시 성심을 다하고 반드시 미덥게 하였으며, 절기에 따른 예제(禮制)는 마음에 유감이 없도록 하였는데,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는67) 예절은 예보다 지나치게 하였다. 백씨(伯氏)를 부친과 같이 섬겼으며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오직 명(命)대로 하였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형의 아들 및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려서 공이 곁에서 도와주었으니, 지극한 정이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한결같이 공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려 차례로 장가보내고 시집보내 그 집안 생계를 꾸리게 했는데,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였고남아있는 자제들을 어루만져 보살피기를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제기(祭器)와 제전(祭田)을 갖추고 노비를 사서 종가(宗家)에 바치고, 조상의 산소에 아직 표지(表誌)가 없는 경우에는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으며, 아직 제사를 지내지 못한 경우는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글방을 건립하여 마을 자제들이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흉년이 든 해에는 한 되 한 말의 혜택도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고, 절신(節辰, 명절날)을 맞아서는 고기반찬을 보낼 때에 연로한 이들을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을 차리는 초기에는 거친 옷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빈틈없이 준비하여68) 부지런히 일하였다.69) 중년에 이르러서는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조금 평안해지자 그 학문을 일찍 포기했던 것을 한스럽게 여겨 자식 가르치기를 매우 독실하게 하였다. 글방을 열어 책을 마련하고 어진 스승을 택하여 두어 그 과정과 절도를 엄격하게 조리를 두었다. 소년 중에 문행(文行)이 있는 자를 보면 더욱더 사랑하고 중히 여겨 반드시 불러서 자제들과 함께 종유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사람 중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폐백을 드리고 가서 수학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가장(家狀)에 기록된 내용의 대략이다.내가 사우(士友)를 따라 공의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의 가장과 당일(當日)에 들은 말이 다른 말이 없으니, 그 어버이를 속이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내가 일찍이 공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병세가 이미 극심한 상태에서 병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켜 간절하게 죽은 뒤를 부탁하였으니, 오직 그 자제를 잘 인도하여 불의(不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충신(忠信)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효제(孝弟)로 입신(立身)하며 근검(勤儉)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선(善)을 좋아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궁핍한 자를 구휼하였지만, 평생 쌓아온 덕행에 대한 보답은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공(公)의 후록(後祿)은 이로부터 장차 크게 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정씨(鄭氏)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충장공(忠莊公) 휘 분(苯)은 그의 중계(中系) 현조(顯祖)이시다. 증조는 택의(宅宜), 조부는 인모(仁謨), 아버지는 재충(載忠)으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어머니는 진원 박씨(珍原朴氏) 정채(挺采)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憲宗) 정미(1847, 헌종13)에 태어나 금상(今上, 고종) 갑진년(1904) 4월 22일에 졸하였다. 부인은 수원 백씨(水原白氏) 낙홍(樂弘)의 따님으로 1남 4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글을 요청한 것이다. 딸은 광산(光山) 김세현(金世鉉), 광산 김영대(金永台), 남평(南平) 문수엽(文洙燁)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어리다. 손자는 해성(海成), 해봉(海琫), 해현(海顯)이다. 공의 무덤은 본방(本坊) 서당동(書堂洞) 선조의 묘 오른쪽 산등성이 모좌(某坐)의 언덕에 있다. 鄭生瑜欽。從余遊有年。間遭其先大人喪。服闋而奉家狀來。謁不朽之文。按狀。公諱德周。字華仰。號箕隱。體相碩大容止端嚴。溫溫有愷悌之風。軒軒有倜儻之氣。其器局品第。蓋非衰世人也。幼而就塾。與兄連業。稍長。見家甚艱。甘旨不充。慨然曰。爲人子者。不能忠養父母。而反被養於父母。何忍一日安心。遂竭力服勞。暫不暇逸。自是生理有賴。而便身畢給。兄弟五人。公居第二。及其有室。以親命分炊。而朝夕甘腝之洪。出入幹理之勤。不以分炊而有少異。遭內外艱。必誠必信。時月之制。無憾於心。而擗踊之節。有過於禮。事伯氏如嚴父。進退惟命。兄歿。兄子及諸弟皆幼。公左右扶持。至情懇惻。一如所生。待其長。次第昏娶。俾立家計。次第歿。哀痛殊甚。撫恤遺孤亦如之。具祭器備祭田買奴婢。納于宗家。先世墳塋。有未表誌者。伐石以竪之。有未設享者。置田以祭之。營構齋塾。爲村子弟肄業之所。當飢歲。升斗之惠。遍及於貧乏。遇節辰。饌肉之饋。不遺於高年。設産之初。菲食惡衣。綢繆拮据。至於中身。事力稍䌥。嘗恨早失其學。敎子甚篤。開塾儲書。擇置賢師。課程節度。嚴有條緖。見少年有文行者。甚加愛重。必招延之。使與子弟遊。有老成可師者。爲贄幣。使之往從焉。此皆狀辭大略也。余從士友。聞公之名久矣。而今日之狀與當日之聞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余嘗一過於公。見病已劇矣。力疾而作。眷眷身後之託。惟是善道其子弟。使不入於不義。以忠信存心。以孝弟立身。以勤儉成家。樂善嗜義。賙窮恤匱。平生積累。不食其報。余謂公之後祿。從此而將有大來之日。鄭氏貫晉陽。忠莊公諱苯。其中系顯祖也。曾祖宅宜。祖仁謨。考載忠。世有隱德。妣珍原朴氏挺采女。公以憲宗丁未生。今上甲辰四月二十二日卒。配水原白氏樂弘女。生一男四女。男謁文者。女光山金世鉉光山金永台南平文洙燁。次幼。孫海成海琫海顯。公墓在本坊書堂洞先隴右岡某坐原。 충심으로 봉양 원문의 '충양(忠養)'은 충심으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효자가 노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그 뜻을 어기지 않으며,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해 드리고 그 잠자리를 편안하게 해 드리며, 그 음식을 가지고 충심으로 봉양해야 한다.[孝子之養老也, 樂其心, 不違其志, 樂其耳目, 安其寢處, 以其飮食忠養之.]"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가슴을……구르는 원문의 '벽용(擗踊)'은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극도로 슬픈 나머지, 가슴을 치며 발을 굴러 뛰는 것을 말한다. 《효경(孝經)》 〈상친(喪親)〉에 "벽용하며 곡읍을 하고, 슬퍼하며 보내 드린다.[擗踊哭泣, 哀而送之.]"라는 말이 나온다. 빈틈없이 준비하여 원문의 '주무(綢繆)'는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는 뜻으로, 빈틈없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미리 준비해서 환란을 예방한다는 말이다. 《시경》 〈빈풍(豳風) 치효(鴟鴞)〉의 "하늘에서 아직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너희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혹시라도 감히 우리 새들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였다 원문의 '길거(拮据)'는 《모전(毛傳)》에서 "길거는 극국(撠挶)이다." 하였는데, 공씨(孔氏)의 소(疏)에 "극(撠)은 가진다[持]는 것이다." 하였다. 극국은 '손톱으로 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길거는 둥지를 만들 때 손과 입을 함께 움직이며 바삐 일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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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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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70) 함양 박씨 행장 孺人咸陽朴氏行狀 조익제(趙翼濟) 군은 착한 선비이다. 나와 만년에 이웃 마을에 살면서 날마다 따르고 쫒은 지 10여년이 되었다. 하루는 선유인(先孺人)의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집안이 대대로 아름다운 덕을 지녔던 것은 진실로 이미 익히 들었으나, 다만 사람이 미천하고 학문이 얕아 받들어 감당하기에 부족한 점이 있네. 그렇지만 두터운 인연을 헤아려 볼 때 또 완강히 사양할 수 없겠네."라고 하였다. 유인(孺人)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상서공(尙書公) 휘 선(善)이 시조(始祖)이며, 영암군(靈巖君) 휘 통(通)이 그 중조(中祖)이다. 증조는 휘 종윤(宗允), 조부는 휘 경은(景殷), 아버지는 휘 원(源)이며,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참봉 기대(箕大)의 따님이다. 순조 경진년(1820, 순조20) 11월 3일에 유인은 영암(靈巖) 송정리(松亭里)에서 태어났다. 유인 박씨는 정숙하고 유순하여 어려서부터 장난하는 모습이 없었고, 놀러 다니는 습관도 없었으며, 어버이를 곁에서 모실 때에는 순종하며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조금 자라서는 규방(閨旁)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밤에는 다닐 때 횃불을 사용하였다.71) 그 몸가짐이 엄격함과 어버이를 봉양하는 정성과 일을 다스리는 부지런함은 제칙(提勅)하지 않아도 한결같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16세에 고(故) 학생 조용희(趙鏞熙) 공에게 시집갔는데, 조공은 함안(咸安)의 저명한 종족이었다. 문에 들어가 시부모를 알현하자 친척 내외가 그 덕용(德容)과 예모(禮貌)를 보고는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달라서 현부(賢婦)를 얻었다고 하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잘 때까지 집안일을 살펴 일이 크든 작든 반드시 여쭈어 행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드리고 문안드리는 의식과 겨울과 여름에 온청(溫淸)하는 절차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삼가서 시종 변함이 없었다. 시부모가 병이 있으면 낮에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아 지극히 근심하다가 혹 음식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시어머니 조씨(曺氏)가 몹시 늙고 병들어 사지를 가누지 못한 지 6년이나 되었는데, 유인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눕고 일어나는 것을 손수 부축하였고, 먹고 마시는 것을 손수 떠 주었으며, 머리가 가려우면 손수 빗질해주었고, 대소변을 흘리면 손수 닦아주었다. 병상을 부지런히 비질하고 병석에 입었던 옷을 자주 빨아 병실을 항상 청결하게 하니 사람들이 악취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조씨가 매번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말하기를, "내가 근근이 목숨을 이어 죽지 않고 6년이나 된 것은 모두 새 며느리의 은덕입니다."라고 하였다. 남편을 섬김에 예의가 있어 사사로이 지낼 때의 안일한 뜻을 경계하고 함부로 친압하는 태도를 끊어 공경하기를 손님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허물이 있으면 번번이 너그러운 말로 규간(規諫)하였고, 성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차분하게 깨우쳐 주고 오해를 풀었으며, 독서하고 근칙하도록 권하여 유업(儒業)을 실추시키지 않게 하였다. 동서를 대함에 항상 굶주리고 추위에 떨까 염려하고 그 노고를 근심하여 음식과 의복은 반드시 균일하게 하였고, 재산과 기물은 반드시 빌려주었으며, 곡직(曲直)을 서로 따지지 않았고, 이해(利害)를 가지고 서로 겨루지 않았으므로 매우 화락하여 누구도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친족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때에 따라 안부를 묻고 일에 따라 돌보아 주며 은혜와 의리가 있어 각각 그 마음을 얻었다. 태만한 기운을 몸에 베풀지 않았고 이치에 어긋난 비루한 소리를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화려한 물건은 방에 들이지 않았고 무격(巫覡) 같은 무리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 항상 어진 사우(師友)를 따라 배우게 하였는데, 예가 아닌 곳과 의롭지 못한 사람은 금하여 가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며 항상 말하기를,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는 연연해 할 것이 없고, 높고 화려한 관직은 부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인가(人家)에 좋은 자손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큰 바람이다."라고 하였다. 자기를 꾸짖는 데에 두텁고 남을 꾸짖는 데에 박하며, 스스로를 받드는 것에 검소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에 넉넉하였다. 따라서 한 집안의 안에 은의(恩誼)가 넘쳐흐르고 윤리가 정연하여 가르침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일이 거행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식자(識者)들이 옛날의 정녀(貞女) 숙원(淑媛)에 견주었다. 임진년 6월 17일에 세상을 떠나 부춘면(富春面) 담덕동(澹德洞) 뒤 기슭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익제(翼濟), 차남은 순제(順濟)이며 딸은 능성(綾城, 능주) 구치복(具致福)과 광산(光山) 이승규(李承奎)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내룡(來龍)과 내구(來龜)이며, 둘째 집의 손자는 내주(來柱)이다. 증손은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아, 규방의 안에 숨겨진 덕과 그윽한 행실이 상세하지 않은 듯하여도 밖에 드러난 것은 마치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열 눈이 주시하는 것처럼 밝을 뿐만 아니다. 시부모님은 그 효성을 칭찬하고, 친척은 그 자애로움을 칭찬하며, 자손은 그 가르침을 준수하고, 이웃은 그 뜻에 감동받아 고을의 오랜 벗과 원근의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조씨(趙氏)를 덕문법가(德門法家)라고 일컫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너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라.72)"라고 하였으니, 나는 조씨가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을 것임을 알겠다. 趙君翼濟善士也。余晩接隣閈。日月從逐。爲十餘年。日以其先孺人遺狀。有立言不朽之託。余曰。君家世德之美。固已稔聞。但人微學淺。有不足以承堪。而揆以事契之重。又不可以牢讓。孺人姓朴氏。貫咸陽。尙書公諱善。始祖。靈巖君諱通。其中祖也。曾祖諱宗允。祖諱景殷。考諱源。妣光山金氏參奉箕大女。純廟庚辰十一月三日。孺人生于靈巖松亭里。貞靜柔嘉。自幼無戲嬉之容。無遊走之習。侍側聽順。未有違忤。稍長不出閨旁。夜行以火。其持身之嚴。養親之誠。執業之勤。不費提勅而一如成人。十六歸于故學生趙公諱鏞熙。趙卽咸安著族也。及入門拜舅姑。親戚內外。見其德容禮貌。異於凡常。莫不賀其得賢婦。夙興夜寐以視宮事。事無大小。必稟而行。朝夕滫瀡之供。晨昏定省之儀。冬夏溫淸之節。必誠必謹。終始無替。舅姑有疾。晝不就席。夜不就枕。極其致憂。或至廢食。姑曺氏極老極病。四體不收。至爲六年。孺人晝宵在側。臥起則手扶之。飮啖則手匙之。頭癢則手梳之。遺矢則手除之。勤掃病榻。頻濯病衣。使病室常常潔淨。人不見其有臭惡之氣。曺氏每對人言曰。吾延命不死而至於六年之久者。皆新婦之賜也。事君子有禮。戒燕私之意。絶褻狎之態。敬之如賓。有過則輒寬裕以規諫之。有怒則必從容以諭解之。勸令讀書飭身。不墜儒業。待娣姒。常念其飢寒。悶其勞苦。飮食衣服必均一。財産器用必假貸。不以曲直相稽。不以利害相較。怡怡湛樂。了無間言。至於族戚隣里。隨時問訊。隨事扶恤。有恩有義。各得其心。怠慢之氣。不設於身。鄙俚之聲。不出於口。華麗之物。不入於房。巫覡之類。不納於家。敎子孫必以義方。常令從賢師友遊。至於非禮之地。非義之人。禁不得使之相接焉。常曰。良田美土。不足爲戀。嵬官華職。不足爲羨。但見人家有好子孫。是吾大願也。厚於責已而薄於責人。儉於自奉而豐於施人。一門之內。恩誼融融。倫理井井。敎無不行。事無不擧。識者以古之貞女淑媛擬之。壬辰六月十七日卒。葬富春面澹德洞後麓乾坐原。生二男二女。男長翼濟。次順濟女。適綾城具致福光山李承奎。長房孫來龍來龜。次房孫來柱。曾孫幼不錄。嗚乎。閨房之內。潛德幽行。宜若不詳而其著於外者。不啻若十手十目之爲昭昭也。舅姑稱其孝。親戚稱其慈。子孫遵其敎。隣保感其義。以至鄕邦知舊。遠近人士。無不稱趙氏爲德門法家。詩曰釐以女士。從以孫子。余知趙氏之必有後也。 유인(孺人) 9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품계이다. 밤에 횃불을 사용하였다 《소학》 〈명륜〉에 "그러므로 여자는 규문 안에서 날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백 리 먼 길의 초상에 달려가지 않는다.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없고 행실을 독단적으로 이룸이 없어서, 참여하여 알게 한 뒤에 행동하고 증험이 있은 뒤에 말한다. 낮에는 뜰에 나다니지 않고 밤에는 다닐 때 횃불을 사용한다. 이는 부덕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是故女及日乎閨門之内, 不百里而犇喪, 事無擅爲, 行無獨成, 叅知而後動, 可驗而後言, 晝不遊庭, 夜行以火, 所以正婦徳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너에게……하리라 《시경》 〈기취(旣醉)〉에, "그 따름은 무엇인가.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줌이로다.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라.[其僕維何. 釐以女士. 釐以女士, 從以孫子.]"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여사는 여자 중에 선비의 행실이 있는 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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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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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문공 행장 學生文公行狀 우리 고을에 있는 선배 중에 박아하고 후덕하며 자상하고 온화한 덕이 있어 이구동성으로 고을에서 탄복하고 군자와 장자(長子)로 지목한 사람이 있으니 학생(學生) 문공(文公)이 그 사람이다. 공의 휘는 치욱(致郁)이며 자는 우서(禹瑞)로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의 후손이다. 증조는 휘 세동(世東), 조부는 휘 봉주(鳳周)이다. 아버지는 휘 환상(煥相)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 동우(東宇)의 따님으로, 순조 기묘년(1819, 순조19) 1월 1일에 능주의 입교리(笠橋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자태와 용모는 단아하고 품성은 화락하였으며, 마음을 보존함은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며, 몸가짐은 삼가고 신중하였다. 그 말은 어눌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듯하였고, 그 행동은 움츠러들어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73) 부모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였고, 형제를 대함에 우애로써 하였으며, 친척을 대함에 화목함으로 하였고, 붕우를 대함에 충성스럽게 하였으므로 가정에서부터 미루어 고을에까지 모두 기뻐하며 각각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남을 이기거나 해치는 잔인한 생각을 일찍이 마음에 품지 않았고,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을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시비(是非)와 훼예(毁譽)에 관한 소리를 한 번도 귀에 거치게 하지 않았다. 선을 좋아하고 의를 좋아하여 남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고 사물을 구제하기에 이르러서는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굶주리고 목이 마른 듯 급급하게 하였다. 초년에 과거공부를 하여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중년에는 향시에 합격하여 예부시(禮部試)74)에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권하기를 가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선발될 수 있다고 하니 공이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권세가에 빌붙기를 힘쓰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인하여 과거공부를 그만 두었다. 공의 맏아들75) 송규(頌奎)76)가 훌륭한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사람들이 권하여 시문(時文)을 지으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자식을 가르침에 귀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게다가 사람의 귀함은 명(命)에 달려 있어서 구한다 한들 보장할 수 없는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고는 마침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계(家計)77)를 세우게 하였다. 만년에 가족을 데리고 화학산(華鶴山)78) 안에 들어가 교유(交遊)하는 것을 사절하고 더욱 자신의 능력을 감추면서,79) 초의(草衣)를 입고 갈건(葛巾)을 쓴 채80) 밤낮으로 흰 구름과 붉은 등라의 사이에서 노닐며 시를 읊조렸다. 나와 송규(頌奎)는 학문의 교분을 정하고 종유(從遊)하며 왕복한 지 전후 몇 년 동안 거의 빠뜨린 달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찾아뵙고 문안하는 것이 빈번하였다. 경진년(1880, 고종17) 봄에는 공이 묵계리(墨溪里)로 선인(先人)을 찾아와 두 집안의 자식들이 종유하는 정의(情誼)를 말씀하셨는데, 종일토록 시립(侍立)하면서 감격하여 잊지 못할 말씀을 많이 하셨다. 4년 뒤에 선인이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 갑신년(1884, 고종21) 12월 10일에 공이 또 이어서 세상을 떠났다. 아, 바람에 나무는 고요할 수 없고81) 음성과 용모는 날이 갈수록 멀어지며, 추위와 더위가 바뀌고 서리와 이슬이 변한 지 이제 몇 년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옛 학업은 그대로 실추되어 당일 기대하였던 만에 하나의 뜻에 부응할 수 없지만 오직 송규만은 재주가 민첩하고 뜻이 확고하며 나아가기만 하고 멈추지 않아,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양가(兩家) 돌아가신 부모의 바람이 전혀 아무런 결과가 없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송규가 또 병을 앓고 있는데, 여러 해 조리하면서 아직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조옹(造翁)의 뜻이 장차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하루는 송규가 편지를 보내 나에게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불초가 무탈할 때에 일찍이 선인의 행장을 써두지 못하였는데, 지금 병이 이미 심해져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천고의 한이 될 듯합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불초를 위하여 한 때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마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아, 고로 여생(孤露餘生, 어려서 부모 잃은 것)이 예전에 교유하였으니 그 사모하는 마음과 측은한 마음이 진실로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며, 더구나 송규가 병에 걸려 간절히 부탁하니 더욱 차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감히 대강을 차례대로 적어 훗날에 입언(立言) 하는 자로 하여금 취할 바가 있게 하였다. 공은 제주 양씨(濟州梁氏) 상기(相基)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송규와 언규(彦奎)이며, 딸은 고홍진(高弘鎭), 이승옥(李承玉), 민모(閔某), 윤의호(尹懿浩)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공보다 7년 앞서 정축년(1877, 고종14)에 세상을 떠나 고을의 동산(東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무덤은 화학산(華鶴山) 동쪽 기슭 술좌(戌坐)의 언덕에 있다. 在吾鄕先輩。有博雅長厚慈詳愷悌之德。翕然爲鄕里所服。而無不以君子長者目之者。學生文公其人也。公諱致郁。字禹瑞。江城君諱益漸后。曾祖諱世東。祖諱鳳周。考諱煥相。妣達城徐氏東宇女以。純廟己卯正月一日。生公于綾之笠橋里。公姿相端雅。稟性樂易。存心質慤。持身謹勅。其言訥訥若不出口。其行縮縮若不勝衣。事父母以孝。處兄弟以愛。待族戚以和。接朋友以忠。自家庭推至鄕閭。無不驩然各得其心。忮克殘忍。未嘗一萌於心。俚俗鄙倍。未嘗一出於口。是非毁譽。未嘗一經於耳。至於樂善好義急人濟物。則不顧前後。汲汲若飢渴然。初業功令。爲親應擧。中年參鄕解。赴禮部。有人勸以往見要人。可得選。公正色曰。富貴在天。豈趨附可辦耶。終不應親歿之後。因廢擧業公主器頌奎有才性過人人勸以做時文公曰吾敎子不願爲貴人。只要作好人。況人貴有命。求未可必耶。遂令從學於蘆沙奇先生之門。專意學問以立家計。晩年挈家入華鶴山中。謝絶交遊。益自鞱晦。草衣葛巾。日夕嘯咏於白雲紅蘿之間。義林與頌奎。定爲學問之交。從遊往復。前後幾年。殆無闕月。是以拜床承候爲頻頻矣。歲庚辰春。公訪先人于墨溪里。爲道兩家子從遊之誼。侍立終日。多有感鏤不忘之語。後四年先人棄世翌年甲申十二月十日。公又繼逝。嗚乎。風樹莫靜。音容日遠。寒暑霜露之變。今幾年矣。宿心舊業。因仍失墜。無以副當日萬一之志。而惟頌奎材敏志確。進且不住。私竊以爲兩家先父母之望。不至專歸無有。頌奎且病矣。積年調理。尙不告效。未知造翁之意。且將何居耶。一日頌奎走書要余。且曰。不肖無恙時未曾爲先人下狀德之筆。今病已劇矣。若遂溘然。恐爲千古之恨。願吾子爲不肖。勿吝一時之勞。嗚乎。孤露餘生。於先行交遊。其所以思慕感惻。固非常人之比。而況頌奎之臨病懇託。尤有所不忍辭者。玆敢序次梗槪。使後日立言者。有所取焉。公娶濟州梁氏相基女。擧二男四女。男頌奎彦奎。女高弘鎭李承玉閔某尹懿浩。夫人先公七年丁丑卒。葬于州之東山丙坐原。公墓在華鶴山東麓戌坐原。 몸은……하였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문자는 그 몸이 겸퇴하여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였으며, 그 말이 어눌하여 마치 그 입에서 제대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文子其中退然如不勝衣, 其言吶吶然如不出諸其口.]"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공손하고 겸양하였다는 말이다. 예부시(禮部試) 과거의 본고시로 958년(광종9)부터 실시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대과(大科)와 연결된다. 예부가 주관하므로 예부시(禮部試)라고 하며, 예위(禮闈)·춘관시(春官試)·춘위(春闈)·동당시(東堂試)로도 불렸다. 합격자는 급제(及第)·등제(登第)·중제(中第)·중과(中科) 등으로 표현된다. 예부시 과목은 제술업(製述業)·명경업(明經業)이 양대업(兩大業)을 이루었는데, 제술업이 가장 중시되었다. 맏아들 원문의 '주기(主器)'는 종묘(宗廟)의 제기(祭器)를 주관할 적장자로 맏아들을 말한다. 송규(頌奎) 문송규(文頌奎, 1859~1888)이다. 개항기 화순 출신의 학자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계원(啓元), 호는 구암(龜巖)·면수재(勉修齋)이다.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으며, 하락이수(河洛理數, 개개인의 품성과 운명에 대한 연구)와 천문(天文)의 물상을 확연하게 융회하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의 요체를 깨닫고, 심성과 이기의 묘리를 세밀하게 분석하니, 선생이 매우 칭찬하였다. 가계(家計) 학문이나 공부를 말한다. 주희가 말하기를 "사서는 혼잡하고 경서는 냉담하니, 후생들은 마음과 뜻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외면으로 향하지 않는 이가 적다.[史書鬧熱, 經書冷淡, 後生心志未定, 少有不偏向外去者.]"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3 答呂伯恭》 이황(李滉)이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모름지기 심신을 수렴하여 냉담한 가계(家計)로써 고되고 힘든 공부를 해야 한다. 이에 연찬하고 되씹되 오래도록 그만두지 않아야 바야흐로 그 맛이 좋은 줄을 참으로 알아 힘을 얻게 될 것이다.[惟學者, 先須收斂身心, 以冷淡家計, 作辛苦工夫. 於此鑽硏咀嚼, 久久不輟, 方始眞知其味之可悅, 而得其力也.]"라고 하였다. 《退溪集 卷19 答黃仲擧 別紙》 화학산(華鶴山)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우치리와 청풍면 청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세가 학이 날개를 펼쳐놓은 듯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자신의 능력을 감추면서 원문의 '도회(韜晦)'는 재주나 지혜, 학문, 자취 등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을 말한다. 초의(草衣)를……채 초의는 은자가 입는 옷이고, 갈건(葛巾)은 처사나 은사(隱士)들이 쓰던 두건을 말한다. 바람에……없고 원문의 '풍수(風樹)'는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 구오자(丘吾子)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묻자,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한번 가면 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요, 다시 뵐 수 없는 것은 어버이이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 往而不來者年也, 不可再見者親也.]"라고 대답하고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致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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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魏士悅【啓學】 靜中思故舊。渴處憶珍奇。二者皆難得。入海求安期。蠹篇看故舊。虬卵當珍奇。吾道固如是。蓬萊不可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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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절 삼일 전에 만종서사를 속개하다 重陽前三日 續開萬宗書社 봄 지난 객의 책상에 또 가을은 깊어지니 經春客榻又秋深유생들296)에 부응하려 옛 규약 찾아보네 爲副靑襟舊約尋붉은 단풍과 기운 해는 백발을 재촉하고 紅葉斜陽催雪鬂노란 국화와 새 달은 속된 마음 씻어주네 黃花新月濯塵心천년의 전통을 사람들이 잇지 않으나 千年統緖人無續홀로 가는 남아를 누가 막을 수 있나 獨往男兒孰可禁중양절 가까워 현동 묘소에 술 따르고 一酹玄阡重陽近산북쪽에 새겨진 유풍 다시 찾아보네 遺風更覓勒山陰 經春客榻又秋深, 爲副靑襟舊約尋.紅葉斜陽催雪鬂, 黃花新月濯塵心.千年統緖人無續, 獨往男兒孰可禁.一酹玄阡重陽近, 遺風更覓勒山陰. 유생들 원문의 '청금(靑衿)'은 청색으로 깃을 두른 옷으로 유생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자금(子衿)〉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이여, 아득하고 아득한 나의 그리움이로다.[靑靑子衿, 悠悠我心.]"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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幽懷 鳳鸞懷不見。蘭蕙種無鄰。孤抱遺經籍。逍遙寂寞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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謾成 鼻藏三斗醋。齒和五音韲。識得此中意。施爲未必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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