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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池坊居罪人朴沙郞右謹陳所無據段草郞坊居立馬有司金道仁立馬錢分給於渠矣村各人等處而年年收納矣中間收錢有司傳授於矣身外四寸金光德數年收納是如可金光德身死後用錢諸民昭然生存於渠矣村是去乙稱以光德之族越坊分錄於矣身不當之民則豈不寃哉緣由仰訴爲白去乎參商敎是後 嚴題前有司金道仁處立馬錢各人等處收納之地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使道處分丙子八月後用錢各人等鄭大江 鄭山德 鄭兩州 林石必 金興喆 金興連 金喆重 金光德又名達年 金道仁子致玉 金西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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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 遠自昌山華閥來江湖勝地別庄開蕙蘭古宅芬千載 松栢佳城土一盃滿世苦辛渾若夢根天仁善擧難收 誄詞未了重重緖殘雪斜陽不耐哀 侍生安東權五利 謹再拜 哭輓 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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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昌山華閥大瀛東詩禮䋲䋲述世風勤儉規模承泩 古桂蓮猷徽出衆中天心難測舟移壑人事靡常夢 若空執彿春山鵑泣血緬懷前躅淚盈瞳 侍下生 完山后人 李經魯 謹再拜 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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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 天命誰知只自然一生一死不何人蘭庭諸子難 忘際瑤月孤魂入夢頻殘菊丹旌當日淚白雲 古嶂四吋隣親朋多有先代小上帝招公望八年 全州后人 誼從弟 李明主 謹再拜 哭輓 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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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孝悌元來是性眞享年八十二今辰夜從譖闥六珈樂 春向芳蘭三朶新學生無愧閻羅府令德應聞上帝隣 東風殘雪靑山路薤露歌中哭萬人 花山后人權炳國 再拜 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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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楚漢英雄何處去八年風塵虛用軍當時若破閻羅國豈使人間有此行盆城后人金尙洙謹再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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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국(金正國)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정국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정국(金正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정국(金正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정국은 계림(鷄林), 곧 경주김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었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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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東日收光西日天黃山晦魄下玄玄五年以上肩隨誼七從之中最後縁桑海三田成 草夢{艹+韱}朝數曲挩花箋而今歸去歸來否更向春風向杜鵑二絶我昔貴門爲客時 與兄諸從好相隨今來只餘二三在以慰前人惹此悲 溟州后人金晉卿謹拜哭挽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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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 一壽人間八二年飄然去化白雲仙宗高姿勢甑山立暗淡精神鏡水 涓宿草然風嘶鬣馬碧蘿殊雨泣花鵑儀容彷彿歸何處曉色丹旌葉 魄月懸 溟州后人金鳳卿謹拜哭挽 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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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家詩禮槿瀛州成憶樂生洵美休蘭芽準擬三珠檮竹韻聯 成五鳳樓海上神仙應自許淤西風月共將悠病勢恨之無臨壙訣精 靈鑑此勿次尤 少弟 臨瀛 崔燉泰 謹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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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 夢耶不忍送君情念舊長嘆處淚生細說同時期更 着胡爲今日永離成故園四首浮在歸路關心積雪晴 流水凄凉山寂寞千年幽宅厥居平 延安后人 車仁宲 謹拜 哭輓 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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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진(金麟振)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麟振 李殷弼 金麟振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인진(金麟振)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인진(金麟振)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인진은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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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文爲回諭事三里居幼學朴仁弼以十七歲兒稟性眞孝之誠也其父以無何之疾數年呻吟長委枕席百藥無效漸至危劇矣去辛巳年十二月病勢蒼黃水不能下咽氣不能通脉至於死境豈不惘慘乎如此之時仁弼呼父惶級級是如可於斯之間欺其渾家割其右股稱其黃雀炙云而食其父矣自是以後有勿藥之慶而快蘇如初豈不歎賞哉如此孝行無愧於古人之孝豈可泯滅乎擧善懲惡晟世之美制也旌忠褒孝 國家之盛也玆以惟我坊員有溱論等訴故今月二十五日以入忕之意敬通于坊內各里一員式起選之地幸甚壬午四月二十三日 掌議金壽甲[着名] 色掌 韓敬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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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공부인(恭夫人) 조씨(趙氏)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豊五年十二月二十六日 哲宗 恭夫人 趙氏 咸豊五年十二月二十六日 哲宗 전북 남원시 [御寶] 1개 9.8*9.8(정방형) 적색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5년(철종 6) 12월 26일에 왕이 공부인(恭夫人) 조씨(趙氏)에게 내린 추증교지(追贈敎旨). 1855년(철종 6) 12월 26일에 왕이 공부인(恭夫人) 조씨(趙氏)에게 내린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공부인 조씨는 이번에 공부인에서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공부인은 공인(恭人)을 잘 못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공인은 정5품과 종5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는 품계이다. 정경부인은 정1품과 종1품 문무관의 처(妻)에 주던 작호이다. 조씨의 작호가 공부인에서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일은 그녀의 남편 또한 증직(贈職)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실직(實職)이 2품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의 경우 그의 부(父), 조(祖), 증조(曾祖) 등 3대(代)에 걸쳐 사후(死後) 관직을 주었고 이를 추증(追贈)이라 하였다. 부모(父母)는 실직에 있는 아들과 같은 품계를 내리며 조부모(祖父母), 증조부모(曾祖父母)에게는 그 품계에서 각각 1품씩 강등하여 추증하였다. 1855년(철종 6) 12월 26일에 내려진 추증교지는 모두 6장이었다. '1801년 박태호(朴泰浩) 준호구(準戶口)'와 '1855년 박기정(朴基正) 추증교지(追贈敎旨)'를 참고해 보면 박태호의 아버지가 박기정이며, 박기정의 아버지가 박경승(朴慶承)으로, 곧 밀양박씨 3대가 된다. 추증은 3대에 걸쳐 사후( 관직을 주는 제도이므로 이 시기에 박태호의 아들이 높은 관직에 올랐음을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증조부 박경승, 조부 박기정(朴基正), 부 박태호가 모두 같은 날 추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는 실직에 있는 아들과 같은 품계를 내린다는 조항을 본다면 '1855년 박태호(朴泰浩) 추증교지(追贈敎旨)'를 통해 박태호의 아들 품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박태호는 정2품의 자헌대부이조판서 겸 경연춘주관사홍문관대제학(資憲大夫吏曺判書兼 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로 증직되었기 때문에 박태호의 아들 또한 품계가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날 함께 추증된 6명은 증조부, 조부, 부를 비롯해 공부인 조씨, 정부인(貞夫人) 서씨(徐氏),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추증 사유가 기재돼있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남원부(南原府) 기지방(機池坊)에 살고 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가문의 소장 문서 가운데 양주목에 살았던 밀양박씨의 준호구(凖戶口)와 교지(敎旨)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양주목에 살았던 밀양박씨의 일부가 뒤에 남원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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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前行縣監朴泰浩贈資憲大夫吏曺判書兼 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者咸豐五年十二月二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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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 鄕之領袖士之綱謹餙平生勉自疆晩歲又兼苽葛好所居常有蕙芝香誨敎 後裔罔非道紹述先人亦有光使我難忘姻婭誼當年只祝壽而康二絶一朝蘭報使人 驚白首難禁此日情耆舊吾鄕今有幾大溢風浪不平嗚 江城后人 査下生 崔萬吉 謹再拜 哭輓 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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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仁賦乎天德以根太平國一蘭村身全袵髮耕於野世守家聲士也 門生來世無恙擬仙佛老去齊閑聽子孫每歲射亭盃酒席從今 契事與誰論 同契 少弟 江陵金龍起 再拜謹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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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花 哀哉惟公生於世八十有八而顔赧聞乎一域者果不仁能如是耶仁者壽之說亦不 證矣况家亦不貧而隣里敦睦孰能不稱擧哉然而春回爲吉一枝零 橋一花春暮貧餘寬綿綿如隴雲不絶可聲此生楓樹哀暮以 一章誄說遠慶幽谷公眞釋靈還鄕矣 慶州后人 金必熙 謹再拜輓哭 楓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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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令宝玄坊長本坊前主事李元暢以其旌閭后裔旣有前等減戶之令而今行不如前施行致此來行是喩事例所在不覺能難令到卽時依飭減結餘存勸獎之地宜當向事丙午正月十九日[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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