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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巳十一月 日 金載相 城主 乙巳十一月 日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署押] 1개 7.0*7.0(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5년(헌종 11) 11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재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45년(헌종 11) 11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재상(金載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신축년에 김재상의 친산(親山)에 누군가가 투장(偸葬)을 하여 그 뒤 5년 동안 김재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장자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관에 소지를 올려 "투장자를 잡아오면 대변(對卞)하겠다"라는 제음(題音)을 받고, 사방으로 투장자를 찾았지만, 그 종적이 묘연했다. 그리하여 김재상은 기왕에 관에 올렸던 소지를 함께 첩연(帖連)하여 다시 관에 소지를 올리면서, 부디 관에서 투총을 파내어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안현감은 만일 관에서 묘를 파내는 일은 법에 저촉된다는 제사를 내렸다. 이 문서는 그 전년, 즉 갑진년에 올린 소지와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다만 작성연대가 을사년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이 을사년은, 김재상이 여러 차례 시장(柴場)을 사면서 받은 명문(明文)들을 통해서 볼 때 1845년으로 추정된다. (1815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1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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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丁未正月 日 金載相 城主 丁未正月 日 1847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6.8*6.8(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7년(헌종 13) 정월에 부안현 일도면 당북하리에 사는 김재상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47년(헌종 13) 정월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하리(堂北下里)에 사는 김재상(金載相)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山訟所志)이다. 이에 따르면, 지난 갑오년, 즉 13년 전인 1834년(순조 34)에 일도면 중방리(中方里)에 사는 박계삼(朴啓三)이라는 자의 형 박기준(朴基俊)이 밀린 상채(喪債)에다 세미(稅米)까지 납부할 방법이 없자 자기 소유의 시장(柴場)을 팔려고 했다. 때마침 그곳에 친산(親山)이 있던 김재상은 그 시장을 매입하여 송추(松楸)를 심어놓았다. 그런데 그 시장의 송추에 욕심이 있었던 박계삼은 그 송추를 환퇴(還退)하겠다면서 관에 소지를 올렸다. 이에 김재상이 박계삼을 찾아가서 그 연유를 물어보니, 소지를 올려 관으로부터 받았던 제사(題辭)는 보여주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두고 후일을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말하면서 전혀 송사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믿을 수 없었던 김재상은 자신이 시장을 매입하면서 받았던 명문을 함께 첩련(帖連)하여 관에 소지를 올리면서, 위 박계삼을 잡아다가 조사하여 엄히 다스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관에서는 조사할 터이니 잡아오라는 제사를 내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정미년으로만 적혀 있으나, 다행히도 김재상이 위의 시장(柴場)을 사면서 받은 명문(明文)이 전하고 있어서 이를 토대로 위의 정미년을 1847년으로 추정하였다.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참조) 이 명문에는 박기준이 상채를 갚기 위하여 위의 시장을 7냥에 방매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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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 등장(等狀)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同治三年甲子八月 日 全羅道道內儒生 同治三年甲子八月 日 1864 全羅道道內儒生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4년(고종 1) 8월에 전라도의 유생들이 조정에 올리기 위하여 작성한 등장의 초안. 1864년(고종 1) 8월에 전라도의 유생들이 부안현(扶安縣)의 유생 김채상(金彩相)과 그의 동생 김우상(金祐相)의 처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효열(孝烈)을 기려 그들에게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조정에 올릴 예정으로 작성한 등장(等狀)의 초안이다. 문서의 첫 머리에 으레 나오기 마련인 소두(疏頭)의 이름도 비어 있으며, 끝에 나오는 연명인(聯名人)들도 적혀 있지 않다. 본문 또한 수정하고 첨삭한 부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소장을 작성하면서 상당한 고심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김채상은 부안김씨(扶安金氏)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22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례(古禮)를 철저하게 지키며 상장례를 치뤘다. 그 뒤 혼자된 어머니가 위독하였을 때 오도조(五桃鳥)가 아니면 병이 낫기 어렵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백방으로 이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때마침 꿈에서 한 늙은이가 나타나 변산 입암 아래를 찾아가면 새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털이 얼룩달룩한 새 한 마리가 바위 아래 떨어져 있었다. 이를 구하여 약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었다. 나이 51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몸을 해칠 정도로 호곡하였으며, 매 삭망마다 눈비를 무릅쓰고 성묘를 했으며, 80세가 다되도록 성묘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의 묘에 성묘하기 위하여 다녔던 길은 효자성묘로(孝子省墓路)로 불리웠다. 김채상의 동생 김우상의 처 밀양박씨 또한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았다. 28세 때 남편이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이 마시게 하여 3일이나 목숨을 연장하였다. 남편이 죽자 곧바로 따라서 죽으려고 했으나 아무 곳도 의지할 데 없는 시어머니가 만류하자 마음을 바꿔 시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다. 시어머니가 죽자 3년을 하루같이 여묘살이를 하였다. 때마침 가뭄이 들었으나 박씨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듯 여묘 아래 한 자도 못되는 곳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사람들은 이 샘을 효열천(孝烈泉)이라고 불렀다. 박씨는 시어머니의 3년상을 치른 뒤 남편의 기일에 이르러 어린 조카를 선대의 제사를 받드는 후사(後嗣)로 정한 뒤에 마침내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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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西面多會里居化民崔載信右謹言淨塘里崔俊甫田一斗五升落定賭稅太二斗五升麥二斗五升耕食是乎所其子載龍處曾有債本錢五兩于今八年而這間利錢中流伊所捧菫爲二兩錢故昨秋賭稅太二斗五升相計次不爲酬給矣上項俊甫率其子同田刈麥一百四十四束盡數奪去者是可忍乎緣由仰訴參商敎是後同錢五兩計年并利推給敎是去乃麥一百四十四束推給敎是去乃兩端間 處分事行下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己酉閏四月 日官 [着押](題辭)二斗太何當於百束麥乎以麥計太零數即給以救濱死人向事卄九日告郭民{糸+奐}[印][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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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道面堂北下里化民金載相右謹言情由段世或有無據之人日▣▣爲豈有如本面中方里居朴啓三爲名者乎去甲午年▣中同啓三之兄基俊喪債備報與稅米辦納無路是如渠之柴場處欲爲放賣而民則親山同麓故以爲買得植其松楸是白加尼昨年十一月日風聞側同啓三貪其柴場處松楸還退樣呈訴云故往問其故於啓三則不示 題音而啓三言內日後如何是加隱喩姑爲置之云云而終無相訟之意是乎矣人謀難測故買得文券帖連仰訴爲去乎自 官同啓三捉來査問 敎是後嚴明 處分俾無殘民橫侵之弊千萬望良只爲行下向 敎是事城主 處分丁未正月 日官(署押)(題辭)査處得捉來事狀 卄六日[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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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 최재신(崔載信)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庚戌十月 崔載信 城主 庚戌十月 崔載信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경술년 10월에 최재신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최석준의 아들이 늑탈해 간 가산과 산업을 돌려받기를 탄원하고, 또한 자신을 구타한 일을 고발한 내용이다. 경술년 10월에 효정리(孝井里)에 사는 최재신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최재신(崔載信)은 지난 무진년에 최석준(崔碩俊)과 이웃에 살면서 말업(末業, 상업)에 종사하는 가운데 서로 종종 돈을 빌리고 또 빌려주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신년 가을, 최석준이 매월 4변의 이자로 돈을 빌려가서 아직까지 갚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돈을 받아야 한다며 그의 아들을 시켜 가대(家垈)와 산업(産業)을 늑탈해 갔다고 한다. 더욱이 한번은 최석준 아들 소손형제(素孫兄弟)가 이 일을 빌미로 시장에서 자신의 마구잡이로 구타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매우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석준에게 받아야 할 6냥과 그의 아들 소손형제가 늑탈해 간 가대 값 25냥을 모두 추급해 줄 것을 청한 것이다. 부안현감은 늑탈은 법을 어지럽히는 행위인 만큼 자세히 조사하고자 최효손(崔孝孫)을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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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西面多會里居化民崔拱辰右謹言咸孟達名下蠲倉本錢三兩果利条六戔稱以私錢與受民前日呈訴是乎則城主分付內咸孟達身死則汝之擔當云故民哀其身死具本利畢納是遣又民之名下蠲倉本錢八兩五戔果又四兩五戔果利条二兩六戔歲前納上是遣本錢則今又畢納是乎乃同孟達名下蠲錢許多則日後之弊未可前知玆敢仰訴爲去乎洞燭敎是後同孟達名下蠲錢本利三兩六戔果又民之名下蠲錢本利十五兩六戔民旣爲畢納之事立旨成給以防日後之弊爲其爲行下 向敎是事城主 處分丙申二月 日官[着押](題辭)果如所訴則依所願立旨成給事初二日 告洪在二[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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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西面多會里化民崔拱辰右謹言民之從弟乃集所負京債民艱辛徵報而來頭之患將不至何境此後則無論某該色上納錢與內集者其該色處徵出是遣京邸吏復與京債則更不橫徵於民而渠自失之之意敢玆仰訴伏乞參商敎是後立旨成給事行下爲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辛亥四月 日官[着押](題辭)官意亦如此立旨成給事初九日[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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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김재상(金載相)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卯閏七月日 金載相 城主 癸卯閏七月日 金載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署押] 1개 6.8*6.8(정방형) 적색 3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43년(헌종 9)에 김재상이 자신의 선산에 투장한 사람을 잡아달라며 부안현감에게 올린 소지. 1843년(헌종 9)에 김재상(金載相)이 자신의 선산(先山)에 투장(偸葬)한 사람을 잡아달라며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김재상은 2년 전인 신축년에 누군가가 선산에 투장을 하자 관에 소를 올려 투장한 사람을 잡아와서 대변하라는 제사(題辭)를 관으로부터 받았다. 그 뒤 밤낮으로 수색했으나 형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투장자가 제발로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무덤 주위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놓았다. 그 뒤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으나 바로 수일 전에 누군가가 울타리를 부수고 밤에 달아났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투장을 한 자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 분명하며, 송사에서 질 것이 분명하므로 자신을 보지 않고 달아났을 것이라는게 김재상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김재상은 투총 옆에 도랑을 판다면 투장자가 제발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고, 기왕에 관에 올렸던 소지를 함께 올리니 처분을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안현감은 기일을 정하여 투장자를 찾으라는 제사를 내렸다. 김재상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관에 산송(山訟) 관련 소지를 올렸으나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다. 이 문서 역시 작성연대가 계묘년으로만 되어 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가 도광(道光) 24년, 즉 1844년(헌종 10)에 시장(柴場)을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明文)이 전하고 있어서 계묘년을 1843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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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道面堂北下里化民金載相右謹言憫迫情由段民去辛丑年分奄遭山變累次呈訴則 題音內搜捉偸葬漢率來對卞事行下敎罔夜搜探永無形跡是如乎民不得已而爲其現發故圍荊棘潛俟自現是乎矣數年間一無動靜矣數日前毁撤圍棘暗夜逃走此漢段想必在於不遠之間而自知理屈故避不見民百爾思之無他計料不獲而已塚傍掘漑以俟葬者之自現是乎乙等以前呈所志帖連仰訴處分行下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癸卯閏七月日官[署押](題辭)刻期搜覓可十九日[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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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유학(幼學) 김낙진(金洛晉)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酉二月 日 金洛晉 兼城主 乙酉二月 日 金洛晉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署押] 1개 7.0*7.0(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85년(고종 22)에 부안현 일도면 당후리에 사는 김낙진이 자신의 선산에 투장한 사람을 잡기 위하여 무덤 옆에 도랑을 파게 해달라면서 부안현감에게 올린 소지. 1885년(고종 22)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후리(堂後里)에 사는 김낙진(金洛晉)이 자신의 선산에 투장(偸葬)한 사람을 잡기 위하여 무덤을 파게 해달라면서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김낙진은 이 소지에서 일도면 중방리(中方里) 서쪽 기슭에 있는 자신의 선산은 5대 선조 때부터 수백년 동안 계속 무덤을 쓴 곳이라고 말하고, 그동안 이곳에 아무도 함부로 무덤을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며칠 전날 밤에 누군가가 밤에 몰래 이곳 선산의 주맥(主脈)에 들어와 이미 한번 무덤을 파낸 곳에 투장(偸葬)을 하였다고 호소하고 있다. 투장을 한 자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파내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므로, 무덤 주위에 도랑을 판다면 스스로 나타날 것이 분명하니 관에서 이를 허락하여 자신들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이미 무덤을 파낸 곳에 다시 무덤을 몰래 쓰는 나쁜 관습을 없애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관에서는 투총을 한 자를 함께 잡아와서 대기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을유년으로만 적혀 있으나, 다행히도 김낙진이 광서(光緖) 11년, 즉 1885년(고종 22)에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가 전하고 있어서, 위의 을유년을 같은 해로 추정하였다.(1885년 유학(幼學) 김낙진(金洛晉) 수표(手標)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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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阻爲念移寒甚緊連爲無事供任否此中姑安耳此去扶安金書房主方以移擇事下往而有冊中所去書客地踪迹似難通路書到日須善爲周旋無使遲滯之地爲好耳不一乙丑九月卄一日寺洞(背面)此家有兒病本魚骨芒碍於咽喉再昨日以手指揮去之際未知出不出吐痰多後更爲飮食一宿蘇醒後有咽中痰聲昨日所發如鉅喘急滋甚至今未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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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未審漢回靜中起居候萬安仰溯區區無任下誠外甥無撓還返親候粗安伏幸何達餘不備伏惟下察謹拜上書癸未四月七日外甥金落坤拜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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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津后人崔鳴瑢拜時維季冬尊體百福僕之次子道澈年旣長成未有伉儷伏蒙尊慈許以令愛貺室玆有先人之禮謹行納幣之儀不備伏惟尊照 謹拜上狀庚午十二月初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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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陽后人禹漢鳳拜時維季春尊體百福僕之第次子八龍年旣長成未有伉儷伏蒙尊慈許以令愛貺室玆有先人之禮謹行納幣之儀不備伏惟尊照謹拜上狀癸丑三月二十六日(皮封)上狀金生員 下執事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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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問原癸亥十一月 日行縣監趙[官印](皮封)單子 一道堂北中里金 碩士炳觀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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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阻悵仰謹審此來冬令兄體萬旺閤度勻慶何等仰慰叶祝弟間以山訟事往在大田昨夜還捿幸免火刻耳第示意謹審而言念此事亦赬然無顔色吾輩之此世此等事每每如此憤歎奈何上告一節 兄須深諒爲之弟何有良策耶且不得同席以議亦不可以一筆斷言何以則好耶盧氏云云其侄尙無回答盧氏亦往釜山云出發已爲十餘日尙無消息甚爲訝鬱以似不可信用可歎世道之駭怪也餘在續后不備謹謝上十二月七日弟金永旭拜拜(皮封前面)全北益山郡朗山面石泉里宋淳轅 仁兄升啓(皮封後面)大邱府 明治町二丁目一五三 金永旭十二月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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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행부안현감(行扶安縣監) 조영하(趙榮夏) 존문단자(存問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亥十一月 日 行縣監趙 金炳觀 癸亥十一月 日 1863 行縣監 趙 金炳觀 전라북도 부안군 7.0*7.0(정방형) 적색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3년(철종 14) 11월에 행부안현감이 부안현 일도면 당북중리에 사는 김병관에게 발급한 존문단자. 1863년(철종 14) 11월에 행부안현감(行扶安縣監)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당북중리(堂北中里)에 사는 김병관(金炳觀)에게 발급한 존문단자(存問單子)이다. 존문이란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관할 지역의 백성을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자는 행부안현감이 김병관의 집을 방문할 때 발급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발급년대가 계해년으로만 되어 있는데, 김병관과 같은 부안에 살면서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었던 김병헌(金炳憲)이 주로 1800년대 중반에 활동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위의 계해년은 1863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단자를 보낸 부안현감 조 아무개가 바로 이 시기에 부안현감으로 봉직했던 조영하(趙榮夏)의 성씨와 일치된다는 점이다. 수령안(守令案)에 따르면, 조영하는 1863년 10월에 부안에 부임하여 이듬해 6월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조영하는 본관이 풍양(豐壤)으로 21세 때인 1850년(철종 1) 증광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861년(철종 12)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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