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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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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85년 한량(閑良) 강준석(姜俊石) 수기(手記) 고문서-증빙류-수기 경제-회계/금융-수기 光緖十一年乙酉四月六日 姜俊石 光緖十一年乙酉四月六日 姜俊石 전북 남원시 [左章] 1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885년(고종 22) 4월 6일에 한량(閑良) 강준석(姜俊石)이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기(手記) 1885년(고종 22) 4월 6일에 한량(閑良) 강준석(姜俊石)이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기(手記)이다. 강준석의 형은 흉년이 들어서 생활이 몹시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조카가 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었으나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형의 딸이 우댁(右宅)에 자매(自賣)를 하겠다고 나서서 문서를 작성하려고 하였다. 우댁에서는 이를 애처롭게 여기면서 압량위천(壓良爲賤)은 애초부터 생각했던 바가 아니라면서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40냥을 빌려주면서 나중에 본전과 이자를 갚으라고 하였다. 조카딸은 빚을 갚기 전에 우선 병을 치료하는데 전념하겠다고 하였으며, 형제는 우댁의 호의에 감사하였다. 그리고 만일 빚을 갚지 못하고 미루게 된다면 조카딸을 자매(自賣)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수기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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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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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土地賣渡証書一 不動産表示南原郡宝節面道龍里四四八番地田四百七拾七坪又伏在南原郡宝節面道龍里石砧㱏座此合價格金㱏百拾伍円七拾貳錢也右土地與石砧爲前記金額額爲貴殿賣渡代金全部受領候事確實也今番貴殿 御勝手次第御處置相成度爲後日土地賣渡証書如件大正八年陰十一月十八日南原郡宝節面道龍里六六一番地賣渡人 丁昌斗代表人 父 丁元白[印]保證人 李秉錫[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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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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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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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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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相思別曲人間離別 萬事中에 獨守空方이 더욱 섧다. 相思不見이 眞情을 게누라셔 알회. 미친셔홈 이렁저령이라 흐트어진 근심다 후리쳐 더져두고 자냐깨나 임을 못보니 가삼이 답답어린 檏姿 고는 소리 눈에 黯黯하고 귀에 鈴鈴 보고지고 任의 얼골, 듯고지고, 任의 소리, 비나이다. 하늘任께 任頌기라허고 비나이다. 前生無生이라, 무삼 罪로, 우리들이 섬겨나셔, 잇지마자허고, 처음 盟誓, 죽지 마지허고, 百年期約, 萬疊春山을, 들어간들, 어느 우리 郎君이, 豈찾으라, 산은 疊疊허서, 고지되고, 물은 冲冲홀래, 沉로다. 梧相秋夜, 발은달에, 任生覺어, 서로워라. 한 番鍾前허고들 라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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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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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24년 이금강산(李金剛山)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 통신부(通信簿) 고문서-증빙류-증서 교육/문화-근대교육-성적표 大正十三年度 寶節公立普通學校 李金剛山 大正十三年度 寶節公立普通學校 李金剛山 전북 남원시 1.2*0.8 4개(적색, 타원형), 0.8*0.5 4개(적색, 타원형), 1.1*0.8 2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4년에 작성된 이금강산(李金剛山)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 통신부(通信簿).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 2학년 학생 이금강산(李金剛山)의 1924년도 통신부(通信簿)이다. 학교에서 학생의 성적, 출결 상황 등 학교에서의 생활을 기록하여 학생의 가정으로 보내는 학생의 성적통지표이다. 1학기, 2학기, 3학기 등 세 학기로 나누어, 학업, 품행, 근태(勤怠) 등을 기록하였다. 학업은 수신(修身), 국어(國語), 선어(鮮語), 산술, 이과, 창가(唱歌), 체조, 도화(圖畵), 평균 등으로 나누었다. 이 중 국어는 일본어를 가리키는데, 다시 독해, 회화, 철방(綴方), 서방(書方) 등으로 구분되었다. 근태는 출석일수, 결석일수, 지참조퇴수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어서 담임교원인(擔任敎員印), 교장인(校長印), 생도부형인(生徒父兄印) 등으로 나누어 도장을 찍어 확인하도록 하였다. 마지막 면에는 통신난(通信欄)을 두어 학교와 가정에서 필요한 사안을 기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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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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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大正貳年三月八日 前明文右明文事買得畓屢年耕食是多可以要用所致伏在長水郡上番岩面上北里峙舊坪宙三八番畓三夜味一斗落結一負㐣價折錢文拾円依數交易捧上是遣右前以新文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憑考事大正貳年七月卄六日長水郡上番岩面上北里二統二戶賣主 李己五[印]長水郡上番岩面上北里一統七戶買主 金南石[印]長水郡上番岩面下北里三統四戶保證人 趙伯奎[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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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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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契約書右契約事一金肆拾圓은去陰七月卄九日得去이고一金貳拾圓은陰八月二十三日得去인바傳來三斗落伏在寶節面中峴村後深谷坪地字員卜數十二落只㐣典當이고合陸[印]拾圓을以月四利로限陰十二月二十日報還이되如過限이면右畓次知許給之意玆契約홈大正五年丙辰陰八月二十三日契約主 梁七謨[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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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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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16년 양칠모(梁七謨) 전당문기(典當文記)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五年丙辰陰八月二十三日 梁七謨 大正五年丙辰陰八月二十三日 梁七謨 전북 남원시 [印] 1개 1.0*1.0 3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6년 음력 8월 23일에 양칠모(梁七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있는 논을 전당(典當) 잡히고 60냥을 빌리면서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1916년 음력 8월 23일에 양칠모(梁七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있는 논을 전당(典當) 잡히고 작성한 계약서(契約書)이다. 계약한 내용은 양칠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중현촌(中峴村)에 있는 논 3마지기를 담보로 음력 7월에 40원과 8월에 20원을 빌린 돈을 합한 금액 총 60원을 월 이자 4리(利)로 저당하면서 작성한 계약서이다. 기한은 음력 12월 20일까지로 만약 기한을 넘기면 위 논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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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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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大正二年癸丑三月二十日 李元輰前明文右明文事段本人傳來田五升落只伏在寶玄面內黃村下坪是加尼田則去庚子例還前已爲放賣是遣只此田畔堤隴幷貴木一株價折柒兩依數交易捧上是遣右前永永放賣以此新文記㱏張成文記爲去乎日後以此文記憑考事堤隴貴木主 康云燮[印]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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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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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정원백(丁元百) 영증(領証)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전북 남원시 1.0*1.0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4년 1월 22일 정원백(丁元百)이 작성해 준 영수증 1914년 1월 22일 정원백(丁元百)이 작성해 준 영수증이다. 정원백은 20원을 받고 영수증을 작성해 주었다. 정원백은 본인이 돈을 수령했다는 의미로 지장(指章)을 찍었다. 하지만 어떤 사유로 누구에게 써 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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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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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主事叔主前 上書昨日伏告事傳人三十升半此人便勿疑出給千萬伏望耳壬子五月初九日卽朝族姪 再拜上米三十升価二十四兩則九兩九戔壬子五月八日上一戔九日上在十四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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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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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임자년(壬子年) 족질(族姪)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子 卽●族姪 再拜上 壬子 전북 남원시 1.0*1.0 2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임자년(壬子年) 5월 초 9일 족질(族姪)이 보낸 서간(書簡) 임자년(壬子年) 5월 초 9일 족질(族姪)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수신인은 발신인의 숙주(叔主)였다. 발신인의 이름은 따로 적혀 있지 않으나, 이교태이교태(李敎台)라는 이름이 발신인의 것으로 생각된다. 편지의 내용은, 이 편지를 전달해 주는 사람 편으로 30승(升)의 쌀을 내어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교태가 숙주로부터 쌀을 빌린 것으로 판단되는데, 빌린 쌀은 돈으로 갚았던 듯하다. 편지 말미에 보이는 부분이 그와 관련한 내용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를 보면 30승을 돈으로 환산하면 24량인데, 9량 9전은 임자년 5월 8일에 상환하였고, 1전은 같은 달 9일에 상환하였으니, 나머지는 14량이 된다는 것이었다. 임자년은 1912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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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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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領證一金參拾円也但以吳券畓文記条로 又此領証홈大正五年丙辰陰十一月晦日領証主 金顯[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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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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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6년 김현(金顯) 영증(領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五年 領証主 金顯 大正五年 金顯 전북 남원시 [印] 1.0*1.0 3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6년 음력 11월 30일 김현(金顯)이 작성한 영수증(領收證) 1916년 음력 11월 30일 김현(金顯)이 작성한 영수증(領收證)이다. 30원을 답가(畓價)로 수령하였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김현이 팔기로 한 논의 크기나 이 논이 어느 곳에 있는지 등에 관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은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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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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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契約書右契約書은 債卽並利하야二十三兩을 未得報還하야釜一座典券이고 今月二十五日에 報納次로 玆以契約홈大正十一年壬戌十一月初三日契約主 姜汝洪李元暢圖章現在他處故指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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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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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41년 이용기(李容器) 특수우편물수령증(特殊郵便物受領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16.2. 全州府出納史 李容器 16.2. 全州府出納史 李容器 전북 전주부 2.5*2.5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1년에 이용기(李容器)가 전주부출납사에 특수우편물을 보내고 받은 수령증. 1941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용기(李容器)가 전주부출납사(全州府出納史)에 특수우편물을 보내고 받은 수령증이다. 우체국 소인이 희미하여 어느 우체국에서 보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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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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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42년 이용기(李容器)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소득세(所得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 年 月 日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李容器 昭和 年 月 日 1942 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 李容器 전북 남원시 1.2*0.8 1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이용기(李容器)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소득세(所得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용기(李容器)가 보절면에 소득세(所得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그가 낸 세금은 제3종 소득세 1기분으로, 22원이었다. 당시 해당 사무를 담당한 직원은 남원군 보절면 회계원 이본광기(李本光器)로,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때문에 성씨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세무관련 업무는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의 근간을 이루었다. 소득세의 경우, 1934년 4월에 '조선소득세령'을 개정하여 개인소득세를 도입하였으며, 1936년에 이르러서는 19개의 세목을 갖추게 되었다. 즉 수득세 8개(지세·광세·거래소세·영업세·자본이자세·소득세·상속세·임시이득세), 유통세 6개(톤세·조선은행권발행세·등록세·인지세·거래세·출항세), 소비세 5개(관세·주세·사탕소비세·골패세·청량음료세) 등이었다. 1930년대에는 군국주의의 기운이 드세지고 군부 내각이 드러서는 등 전시 체제로 접어들면서 1937년에 세제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임시조세증징령」을 공포하여 소득세·자본이자세·임시이득세를 증징(增徵)의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총독부도 전시 재정을 꾸릴 필요성이 생기자 1937년 8월에는 「북지나사변특별세령」을 공포하여 1년 한정으로 소득특별세·임시이득특별세·이익배당특별세·공사채이자특별세·물품특별세를 신설했으며, 다음 해 3월에는 「지나사변특별세령」을 제정하여 소득세·법인자본세·사탕소비세·거래소세를 증징하고 이익배당세·공사채이자세·통행세·물품세·입장세·특별입장세를 신설하였다. 1939년 4월에는 「임시이득세령」과 「지나사변특별세령」을 개정하여 세율을 인상하고 건축세와 유흥음식세를 신설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세제 개편을 시사하고 나서자 총독부도 제3차 세제 개정에 착수하였다. 기본 목적은 전쟁에 대비해 세수를 늘리고 국세와 지방세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여 복잡해진 세제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에서 세제를 정리하고 개편한 것은 전비(戰費)를 조달하고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으로, 세제의 근대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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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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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第二四五號 昭和十六年度 新 里 閔丙淑 納一金 壹圓 四拾四錢也 地稅(國稅) 昭和十六年度 第二期分一金 壹圓 拾壹錢也 地稅附加稅(道稅) 仝一金 壹圓 參錢也 地稅附加稅(面稅) 仝計金 三圓 五八錢也右 領收候也昭和十七年 月 日領收ス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器[印]⊙稅金은必히期限內에納付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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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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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領收證第二一七號 昭和十六年度 新 里 李敎政 納一金 壹圓貳拾錢也 地稅(國稅) 昭和十六年度 第二期分一金 七拾八 錢也 地稅附加稅(道稅) 仝一金 七拾一 錢也 地稅附加稅(面稅) 仝計 金 二圓六拾九錢也右 領收候也昭和十七年 月 日領收ス南原郡寶節面會計員 李本光[印]⊙稅金은必히期限內에納付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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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선(姜在善)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강재선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강재선(姜在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강재선(姜在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강재선은 진주(晉州)강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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