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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이씨 묘표 孺人李氏墓表 유인(孺人)의 성은 이씨(李氏)로, 관향은 공주(公州)이다.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의 후손이다. 대부(大父)의 휘는 직무(直茂)이고, 부친의 휘는 병희(秉禧)이다. 모친은 곡부 공씨(曲阜孔氏)로, 계로(啓魯)의 따님인데, 철종(哲宗) 병진년(1856, 철종7)에 능주(綾州)의 예암리(禮巖里)에서 유인을 낳았다.자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드러웠으니,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18세에 사인(士人) 김권일(金權一)에게 시집왔다. 시부모님를 섬길 적에 공손하고 순종하는 예도를 다하였으며, 행동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오직 명하신 대로 하였다.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동온하청(冬溫夏凊)의 예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반드시 조심하여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평상시에 말수가 적고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떠들썩한 소리는 규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사치품은 문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미신을 믿지 않았으며, 성품이 길쌈하는 데 부지런하여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선대의 기일이 다가오면 미리 재계하고 정결하게 하였다. 내외 친족과 향리의 노소에 대해서까지 안부를 묻고 구휼하는 것을 때에 따라 행하고 폐하지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절약하여 조금의 은혜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두루 베풀었다.일찍이 밤에 소를 잃은 적이 있는데 집안사람들이 찾고자 하니, 유인(孺人)이 말하기를 "도적이 막다른 길에 있게 되면 어찌 헤아리지 못할 화가 없으리라고 장담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그만두게 하였다. 자식을 가르칠 적에는 늘 어진 벗과 교유하게 하였고, 무릇 불량한 사람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말게 하였다. 일찍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정도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멀리하는 것은 집안의 자제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더구나 온갖 사설(邪說)이 난무하는 말세에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 잘 지내며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게 하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이다. 어찌 사람의 도리를 버리고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어느 날 몸져눕게 되자 네 아들을 불러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의 형제는 우애롭게 지내며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실추시키지 말라."라고 하였다. 막내아들을 가리키며 세 아들에게 말하기를 "부모가 없다고 하여 막내를 너무 아껴 가르치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으니, 때는 정미년(1907, 순종1) 12월 11일이었다. 향년 52세이다. 장사 지낸 뒤에 어은동(漁隱洞) 진사공(進士公) 묘소 아래 간좌(艮坐)에 이장하였다. 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봉희(鳳熙), 학희(鶴熙), 용희(龍熙), 인희(麟熙)이고, 딸은 장흥(長興) 임태주(任泰柱)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용희는 나와 교유하였는데, 어느 날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평소 익숙하게 아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지금 어른께서 이웃에 산 지 오래되었으니, 저의 돌아가신 모친의 평소 행실에 대해서는 응당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돌아가선 모친을 위하여 훌륭한 글을 남길 붓을 잡을 이는 어른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나는 유인이 어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유장에 기록된 글에서 듣지 못했던 말을 더 알게 되었으니, 더욱 공경할 만하다. 다만 정신이 혼미하고 글이 거칠어, 글로는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이는 용희가 마땅히 윤색하는 데 달려 있다. 孺人姓李氏籍公州。恭肅公諱明德后。大父諱直茂。父諱秉禧。妣曲阜孔氏啓魯女。哲宗丙辰。生孺人于綾之禮。巖里資質溫仁柔嘉。有女士風。十八歸于士人金權一。事舅姑。盡恭順之禮。動作進退。惟命是聽。晨昏定省。冬夏溫淸。必誠必謹。未有闕儀。平居。穻言語寡喜怒。喧囂之聲。不出於閨房。奢麗之物。不入於門庭。不用巫覡之術。性勤紡績。未嘗暇逸。値先世忌諱之辰。宿齋戒致潔。至於族戚內外。鄰里老幼。問訊賙恤。隨時不替。遇饑歲。縮衣節食。而升斗之惠。遍於貧乏。嘗夜失牛。家人欲追之。孺人曰。賊當窮途。安知無不測之禍乎。令止之。敎諸子。常令從賢士友遊。凡浮浪之人。紛競之地。勿令近之。嘗戎之曰。守正遠邪。此是人家子弟最初路頭。況在末世百邪交作之日乎。切宜愼之也。又曰。孝於父母。和於兄弟。睦於族戚。信於朋友。勤於學問。篤於行治。此是人道之當然。安有去人道而可以爲人者乎。一日屬疾。招四子而戒之曰。汝兄弟極其友愛。無墜世業也。指季兒而語三子曰。勿以無父母而愛踰於敎也。言訖而終。時丁未十二月十一日也。享年五十二。葬而移窆于漁隱洞進士公墓下艮坐。生四男一女。鳳熙鶴熙龍熙麟熙。長興任泰柱。孫以下不錄。龍熙從余遊者。一日抱遺狀。示余曰。凡狀人之行。必平素相熟人乃可。令丈人與相接隣。不爲不久。則吾先妣平日之行。想應聞之。然則爲吾先妣。把立言之筆者。非丈人伊誰。嗚呼。余聞孺人之賢。盖巳久矣。而今於狀辭。益聞其所未聞。尤可敬也。但神昏筆澁。辭不能達其意。此則在龍熙之所宜修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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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암 안공 묘표 淑庵安公墓表 영평(永平) 욱곡면(郁谷面) 반암(盤巖)의 서쪽 기슭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이는 숙암(淑庵) 안공(安公)이 편히 잠든 곳이다. 공의 휘는 후걸(厚傑), 자는 후평(厚平)이다. 안씨(安氏)는 계보가 순흥(順興)에서 나왔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가 그 현조(顯祖)이다. 우뚝한 공훈과 높은 관작이 대대로 찬란하였다. 휘 원(瑗)에 이르러 조선이 개국할 때 여러 번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으며, 서원(瑞原)의 별장에 거처하다 생을 마쳤다. 휘 세침(世琛)에 이르러 남평현(南平縣)에 우거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는 휘 몽성(夢省)이고, 부친은 휘 경룡(競龍)이다. 모친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아무개의 따님인데, 효종(孝宗) 경인년(1650, 효종1)에 공을 낳았다.공은 천품이 영특하여 범상한 사람과 달랐다. 효성과 우애, 문학으로 젊어서 이름이 났다.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선생이 많은 기대를 하여 손수 "안자와 맹자는 봄처럼 온화하고 가을처럼 준엄하였다.[顔子孟子春生秋殺]"라는 여덟 자의 큰 글씨를 써 주었다. 또 문답을 주고받은 약간의 편지가 있다. 동문인 권 수암(權遂庵), 김 농암(金農巖), 이 한포재(李寒圃齊) 등 여러 명망가와 도의로 사귀어 교유하고 강론하여 노년에도 폐하지 않았다. 선생이 제주(濟州)로 귀양 갈 적에 박손재 광일(朴遜齋光一), 박안촌 광후(朴安村光後) 제공과 더불어 전별하였는데 강진(康津)의 만덕사(晩德寺)에 이르는 여러 날 동안 배종(陪從)하였고, 선생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본 뒤에 돌아왔다. 이로부터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교유를 끊고, 오직 시서(詩書)와 서책을 보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다.숙종(肅宗) 경자년(1720, 숙종46) 11월 24일에 별세하였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선무원종공신(宣務原從功臣) 정일생(鄭鎰生)의 따님이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장자는 사립(士立), 차자는 두칠(斗七), 두생(斗生)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먼 시골의 일개 포의(布衣)로 한적한 곳에서 은거하였는데 당시 석덕(碩德), 홍유(鴻儒), 명공(名公), 거경(鉅卿)이 서로 추중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수창한 것이 마치 훈지(壎箎)와 같았으니, 이 어찌 취할 것이 없는데 그러하였겠는가. 여기에서 공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시대와 어긋나 산림에 은거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평소 뜻과 사업을 당시에 시험해 보지 못했으니, 식자들의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 뒤에 후손들이 영락하여 유풍(遺風)과 남겨진 훌륭한 말씀이 막혀서 드러나지 못하고 전하는 실제의 자취도 육정(六丁)67)이 가져감을 면치 못하여 보존된 것이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니, 더욱 한스러워할 만하다. 8세손 상익(相翊)과 동식(東植)이 유적(遺蹟)을 가지고 와서 묘표의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옛 감회에 잠겨서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永平郁谷面盤巖之西麓。有崇四尺而坐酉向卯者。是淑庵安公妥藏之所也。公諱厚傑。字厚平。安氏系出順興。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顯祖也。嵬勳達爵。世代煒燁。至諱瑗。我朝革命之際。累徵不起。居瑞原別墅以卒。至諱世琛。寓居南平縣。子孫仍家焉。卽公之曾祖也。祖諱夢省。考諱競龍。妣星山李氏某女。以孝宗庚寅生。公天稟潁悟。異於凡常。孝友文學。早歲著稱。師事尤庵宋先生。先生期詡甚重。手書顔子孟子春生秋殺八大字以贈之。又有答問往復若干篇。與同門人權遂庵金農巖李寒圃齋諸名勝。爲道義交。遊從講磨。老而不替。及先生謫于濟州也。與朴遜齋光一朴安村光後諸公。餞至康津之晩德寺。累日陪從。見先生渡海而後歸。自是杜門斂迹。絶遊息交。惟以詩書文籍爲餘日計。肅宗庚子十一月二十四日考終。官同中樞。配河東鄭氏宣務原從功臣鎰生女。墓合祔。擧三男。長士立。次斗七斗生。孫以下不盡錄。鳴呼。公以遐鄕一布衣。隱於閒寂之濱。而當時之碩德鴻儒名公鉅卿。互相推重。往復酬唱。如壎如箎。此豈無所取而然哉。於此而公之爲公。可以槪矣。然事與時違。沈晦林樊。使平日志業。未見有所試於時。識者之恨爲何如耶。身後數百年。雲仍零替。使遺韻餘馥。鬱而不暢。而所傳實蹟。亦不免爲六丁收去。存者不過十之一。尢可恨也。八世孫相翊東植。奉遺蹟。請爲表墓之文。余以曠感攸激。不忍終辭云爾。 육정(六丁) 도교(道敎)의 이른바 정묘(丁卯)ㆍ정사(丁巳)ㆍ정미(丁未)ㆍ정유(丁酉)ㆍ정해(丁亥)ㆍ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다. 도사(道士)의 경우 부록(符籙)을 사용하여 이들을 불러서 부릴 수가 있는데, 이 귀신을 잘 부리면 먼 데 있는 물건도 가져오게 할 수 있고 일의 길흉도 미리 알 수 있다고 한다. 《後漢書 卷50 梁節王暢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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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문씨 묘표 孺人文氏墓表 유인(孺人)의 성은 문씨(文氏),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중대에 휘 자수(自修), 호 면수재(勉修齋)란 분이 계셨다. 고조는 휘 복영(福榮)이고, 증조는 휘 종진(宗鎭)이며, 조부는 휘 영학(永學)이다. 부친은 휘 필휴(弼休)이다. 모친은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시오(金時五)의 따님인데,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8월 20일에 유인(孺人)을 능주(綾州)의 화곡리(花谷里) 사제에서 낳았다.유인(孺人)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단정하고 자상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니, 《소학(小學)》, 《열녀전(列女傳)》을 읽고 대략 대의를 깨달았다. 나이 18세에 사인(士人) 오장섭(吳長燮)에게 출가하였다. 시부모를 섬길 적에 매우 조심하였으니, 닭이 울 때 침소에서 문안하고 물 흐르듯 응대하였다. 시집올 때 치장(治裝)하여 보낸 옷과 기물이 매우 많았는데, 수시로 부족할 때마다 시어머니에게 바치고 자신이 입은 것이라곤 다만 시집올 때 입었고 이젠 다 해진 옷뿐이었다. 치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화려하게 꾸미는 습속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자며 길쌈하는 것을 오직 부지런히 하였다.시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여 집에서 술을 빚었는데, 유인은 반드시 별도로 간수 해 두었다가 적절한 때 올렸고 일찍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동서지간에 서로 아껴서 한솥밥을 먹은 지 10년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분가할 적에 재산이나 자질구레한 용품은 있든 없든 고루 나누었다. 종족과 이웃 사람을 대할 적에는 각각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친익척의 상사와 혼사에 부족하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반드시 시부모에게 여쭌 뒤에 적절하게 구휼해 주었다. 시부모가 병이 들자 남은 일을 제쳐두고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너무나 슬퍼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였고, 온갖 의절(儀節)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삼가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선조를 추모하는 예절은 매우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여 나물 등 온갖 음식을 미리 마련해 두어 부족한 것이 있지 않았다.신축년(1901, 고종38) 겨울에 병들어 낫지 않자, 하루는 "나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위로 연로하신 시어머님이 계시는데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였으니 사람을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며느리를 불러 연로하신 시어머님을 잘 봉양하라고 부탁하였다. 말을 마치고 별세하였으니, 때는 11월 24일이다. 단양면(丹陽面) 회활리(會活里) 안산(案山) 도리봉(道理峯) 정좌(丁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4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동(在東), 재남(在南)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용휴(李龍休), 조갑성(曺甲成), 정돈철(鄭燉哲)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딸은 어리다. 재동(在東)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용호(龍鎬), 봉호(鳳鎬), 인호(麟鎬)이다. 내가 가까운 고을에 살아 유인이 어질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 재동이 글을 지어 달라고 간청한 것에 대해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孺人姓文氏。本南平。中系有諱自修號勉修齋。高祖諱福榮。曾祖諱宗鎭。祖諱永學。考諱弼休。妣淸道金氏時五女。哲宗己未八月二十日。生孺人于綾之花谷里第。溫仁端詳。幼有至行。讀小學列女傳。略曉大義。年十八。歸于士人吳長燮。事舅姑甚謹。雞鳴問寢。應對如流。于歸時。裳送衣物甚多。而隨時隨乏。獻之於姑。自身所着。只是慶敞而巳。不屑膏沐之飾。不喜華靡之習。夙興夜寐紡績惟勤。其舅愛酒。家有釀。孺人必別蓄而藏之。待時以進。未嘗乏絶。焍姒相愛。共爨十年。庭無間言。及其析箸。財産什物。有無共之。待宗族鄰里。各得其心。有喪戚昏姻。貧乏災患。必稟於舅姑。隨時周恤。舅姑有疾。捨置餘事。專力調養。其遭故也。致哀過禮。凡百儀節。必誠必愼。俾無遺憾。至於奉先追遠之節。豊潔兩至。蔬菜几羞。宿戒預蓄。未有見乏。辛丑冬。屬疾彌留一日曰。我死必矣。上有老姑。未克終養。人理缺矣。因呼子婦。託以善養老姑。言訖而終。時十一月二十四日也。葬丹陽面會活里案山道理峯丁坐原。擧二男四女。男在東在南。女適光山李龍休曺甲成鄭燉哲次幼。在東生三男。曰龍鎬鳳鎬麟鎬。余在鄕隣之近。聞孺人之賢久矣。今於在東一言之懇。有不忍牢辭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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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둔재 안공 묘표 孝子遯齋安公墓表 공의 성은 안씨(安氏), 휘는 달득(達得), 자는 내성(乃成), 호는 둔재(遯齋)로, 순흥(順興) 사람이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가 그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휘 원(瑗)에 이르러 조선 초기에 형조 판서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서원(瑞原)의 별장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휘 세침(世琛)에 이르러 남평현(南平縣)으로 이사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증조는 휘 수린(壽麟), 조부는 휘 영(泳)이다. 부친은 휘가 종복(宗福), 호가 죽림재(竹林齋)이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김채경(金彩敬)의 따님인데, 정종(正宗) 정사년(1797, 정조21)에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효성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왕왕 지극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 일찍이 어버이가 병을 앓아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 기이한 꿈을 꾸고 이어서 집 정원에서 신약(神藥)을 얻어 이를 달여 올리니 과연 차도가 있었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 슬픔으로 몸을 상한 것이 매우 심하였기에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장사 지낸 다음 묘소의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배곡(拜哭)하되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나무를 베고 돌을 파내어 그가 왕래하는 길을 닦아 주었다.공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포부가 원대하고 문사는 성대한 명성이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았다.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 가운데 그와 교유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만년에 봉악산(鳳嶽山) 아래에 초당을 짓고 한가롭게 노닐며 노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기둥에 바람이 불고 창엔 달빛 비치며, 수죽(水竹)이 뜰에 가득하여 한가롭게 시를 읊조리며 유연(悠然)히 속진(俗塵)을 벗어난 의표가 있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갑술년(1874, 고종11) 1월 2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죽곡면(竹谷面) 팔룡동(八龍洞) 봉악산(鳳嶽山) 동쪽 산기슭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도경(朴道敬)의 따님이다. 2남을 낳았는데, 장자는 평일(平一), 차자는 평길(平吉)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효라는 것은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으뜸이니, 큰 근본이 확립되면 만인에게 미루어 확대할 수 있다. 공은 효순(孝順)한 덕에 보은을 받아 장수하는 복을 받았는데, 안으로는 자제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종친들이 그 은혜에 감동하였으며, 밖으로는 벗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고 향리 사람들이 그 기풍을 칭송하였으니, 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오늘 후손이 그 뜻을 계승하기를 생각하고 선조를 더럽히지 않는 터전으로 삼는 것 또한 어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원하건대 안씨(安氏)는 힘쓸지어다.증손 동식(東稙)이 나에게 묘도(墓道)에 기록할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삼가 전하는 유적(遺蹟)에 근거하여 글을 첨삭하여 다듬었을 따름이다. 公姓安氏。諱達得。字乃成。號遯齋。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中系顯祖也。至諱瑗。當我朝初。以刑曹判書累徵不起。居瑞原別墅以卒。至諱世琛。移寓于南平縣。子孫因居焉。曾祖諱壽麟。祖諱泳。考諱宗福號竹林齋。贈左承旨。妣光山金氏彩敬女。以正宗丁巳生公。公性孝根天。自幼往往以至行聞於人。嘗有親癠。久而彌留一夕感異夢因得神藥於家園供而進之果見差愈。執喪哀毁過甚。見者釀涕。及葬。廬于墓側。晨昏拜哭。三年如一日。里人感之。爲之伐木鑿石。以修其來往之路。公涉獵百家。抱負贍富。文詞聲華。擅望於時。一時知名之士。無不與之結交。晩營邁軸於鳳獄山下。爲養閒終老計。風楹月戶。水竹滿庭。婆娑嘯詠。悠然有出塵之標。壽陞同中樞。甲戌正月二日卒。葬竹谷面八龍洞鳳嶽山東麓庚坐原。配密陽朴氏道敬女。生二男。長平一。次平吉。孫以下不盡錄。嗚呼。孝者百行之本。萬善之長。大本旣立。萬目可推。公服孝順之德。膺難老之福。內而子弟遵其敎。宗族感其恩。外而朋友服其義。鄕里頌其風。此豈無所自而然哉。然則今日後嗣之所以思述其志而爲無忝之地者。亦豈有以外於此者乎。願安氏勉之哉。曾孫東稙。謁余文以表墓道。余謹据所傳遺蹟爲修潤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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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구공 묘표 學生具公墓表 공의 휘는 택현(宅鉉), 자는 규여(揆汝)이다. 경전을 연구하고 학문에 힘쓰며,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조심하여 성대하게 우리 고장 선진(先進)의 반열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은거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를 동소남(董召南)68)과 같이 하고, 규문을 정돈하기를 목예공(繆豫公)69)과 같이 하니, 향리에서 믿고 복종하기를 왕언방(王彦方)70)처럼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그 위의와 동작은 모두 하늘에서 본받은 것이다. 하나라도 지극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곧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부귀와 빈천에 구애되어 그 지조를 바꾸지 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대장부(大丈夫)가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많으면 뜻을 손상하고 허물을 보태지 않는 경우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경륜(經綸)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풍족함을 구하지 않아서 남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이를 가져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아, 한마디 말과 하나의 행동이 모두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수 있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구씨(具氏)의 관향은 능성(綾城)인데, 평장사 민첨(民瞻)이 중시조이다. 대대로 훌륭한 덕이 있었다. 조부는 삼락(三樂)이고, 부친은 훈(壎)이다. 모친은 아무 관향의 아무 성씨인데, 생몰 연대는 알지 못한다. 공은 능주(綾州)의 교촌(校村)에서 태어났고, 모년 모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옥치(加玉峙) 안산(案山)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흥덕 장씨(興德張氏)로, 장만주(張萬柱)의 따님이고, 계배(系配)는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김창석(金昌錫)의 따님인데, 모두 부덕(婦德)이 있었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윤원(潤源), 익원(翼源), 인원(仁源), 복원(福源)이고, 딸은 최봉문(崔鳳文)에게 출가하였다.묘소에 오랫동안 묘표가 없었기에 현손 혁모(赫謨)가 지사(志士)라서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힘썼지만 성취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에 가문에서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혁모의 형 익모(翼謨)가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公諱宅鉉。字揆汝。窮經力學。飭躬謹行。蔚有聲稱于吾鄕先進之列。隱居養親似菫召南。閏閫齊整似繆豫公。鄕閭信服似王彦方。嘗曰。人爲萬物之靈。而其威儀動作。莫非天則也。一有不至。便不成人。又曰。人不以富貴貧賤而易其操。然後方可爲大丈夫。又曰。財者人之所須。而多則未有不損志而盆過。是以經紀調度。不求贏餘。有餘輒推以周諸貧乏。嗚呼。一言一行。皆可以爲法。曷不偉歟。具氏貫綾城。平章事民瞻。其中祖也。世有令德。祖三樂。考壎。妣某貫某氏。年號干支公生于綾之校村。某年月日終。葬于加玉峙案山亥坐原。配興德張氏萬柱女。系配靈光金氏昌錫女。皆有婦德。四男一女。男潤源翼源仁源福源。女崔鳳文。墓久無表。玄孫赫謨志士也。血力拮据。未就而歿。後二年。一門踵而成之。赫謨兄翼謨。以其家狀。俾余爲文云。 동소남(董召南) 당나라 때 안풍(安豐) 사람으로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이라는 노래를 지어 동소남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는 내용을 읊었다.《小學 善行》 목예공(繆豫公) 예공은 한(漢)나라 목융(繆肜)의 자(字)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 네 명이 재산과 가업을 함께하였는데, 각각 아내를 맞이한 뒤로 아내들이 마침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목융이 깊이 분노하여 문을 닫고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목융아, 네가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서 성인(聖人)의 법을 배움은 장차 풍속을 정돈하려 함인데, 어찌하여 그 집안도 바로잡지 못하느냐."라고 하자, 여러 아우와 그 아내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마침내 고마음을 바꾸어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냈다. 《後漢書 獨行列傳》 왕언방(王彦方) 언방은 후한(後漢) 때 학자인 왕렬(王烈)의 자(字)이다. 의로운 처신으로 부근에 이름이 나서 고을에서 송사(訟事)가 벌어지면 왕열에게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王烈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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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8 卷之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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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七月。金士亮【瀏】訪余下沙參奉家。病席因贈五言近體。 丙丁那可說。此地更逢君。床對鰲山飯。窓看鱣席文。吳洲弦素月。楚塞帚頑雲。含蓼辛勤誼。臨行莫惜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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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岐山李友益瑞韻 久客人情熟。屛山落盡梅。不勞顔氏帖。頻借士行盃。歲去忘恩怨。壽來任闔開。淸詩歸袖重。欲別更低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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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沙座上贈朝天館安行五 瀛洲鰲之柱。支撑銀潢津。盤根大洋中。五岳少比倫。瑰奇淸淑氣。往往鍾於人。忽逢安秀才。如得滄海珍。詩書藏其腹。禮義治其身。累及下沙門。心醉覿德辰。從古豪傑士。負笈尋師眞。言遊東吳客。澡浴沂泗濱。陳良南楚産。振刷喬木春。吾道無南北。勖哉前修遵。我竊仁者號。贈言愧傾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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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여【규홍】에게 답함 答金允汝【奎洪】 친구의 소식이 새로운 봄과 함께 이르니 감사함과 위로됨을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체도(體度)의 절선(節宣)75)이 더욱 태평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저의 기대하는 마음에 더욱 흡족합니다. 저는 흰 머리에다 정신도 몽롱한데 또 나이를 한 살 먹게 되었으니 그저 간절히 옛 사람처럼 빈궁한 초려에서 탄식76)할 뿐입니다. 영랑(令郞)77)의 지난 겨울 공부는 기대와 바람을 만에 하나라도 만족시키는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으신지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이처럼 쓸쓸하게 되었으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다만 그 박실(朴實)하고 영오(穎悟)한 자질은 앞으로 크게 발전할 가망이 일찍이 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빨리 변화하기를 바라지 말고 조금씩 부지런히 이끌어준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에서 시상(時象)78)에 대한 탄식은 같은 배를 탔는데 바람은 만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서 하늘의 명을 들을 뿐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편안히 지내면서 천명을 기다린다.【居易俟命】'는 말은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바라보면서 그리운 마음을 보내니 그저 간절히 슬퍼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故人音信。與新春俱至。感豁慰沃。曷以勝喩。矧審體度節宣。復泰增重。尤叶企仰。義林白首懵懵。又添一齒。只切古人窮廬之歎而已。令郞前冬功夫。可以稱塞其期望萬一之意否。切愧無以資助。而遽且落落也。但其朴實之質。穎悟之姿。未嘗無前頭長進之望。勿求速化。勤勤提勑如何。示中時象之歎。可謂同舟遇風。奈何奈何。惟盡其在我者。而聽天所命而已。古人所謂居易俟命。非此之謂耶。相望送情。只切悲悒。 절선(節宣) 계절에 따라 몸을 잘 조섭하는 것을 말한다. 빈궁한 초려에서 탄식 원문은 '포류궁려지탄(蒲柳窮廬之歎)'으로, 유약한 자질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학업에 힘을 쏟지 못하고 또 세상에 포부도 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지레 늙어 버렸다는 의미이다. 영랑(令郞)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시상(時象) 시대 또는 시국의 상황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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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은필【상량】에게 답함 答魏殷弼【祥良】 작별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 맑은 목소리와 우아한 모습은 일찍이 단 하루도 마음과 눈앞에서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 남애(南厓)와 북각(北角)이 같은 자리에서 함께 앉지 않는다고 했겠습니까. 하물며 어버이를 모시고 살피는【侍省】 상황이 순조롭고 일상생활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실로 듣고 싶던 소식과 부합하였습니다. 이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괴로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고궁(固窮)72)으로도 면하지 못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나 힘과 여유가 허락하는 대로 예전의 학업을 익히고 정리한다면 오히려 나무를 지고 물을 긷는 것보다 편함이 백 배 이상일 것입니다. 하물며 네 가지 이익【四益】에 대한 설73)은 장횡거(張橫渠)74) 선생이 말한 것이 아닙니까? 힘쓰고 힘쓰십시오. 저는 쇠한 몰골과 병의 상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이는 학문을 닦지 않은 소치입니다. 뒤따라 보충할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세상 길의 위험함을 어찌 이야기하겠습니까. 오직 독서(讀書)하고 궁리(窮理)하여 더욱 굳은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할 뿐입니다. 주자(朱子)의 시에, '삼군(三軍)도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고, 아홉 번 죽어도 장사(壯士)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네.【三軍莫奪匹夫志, 九殞難嶊壯士腸.】'라고 하였습니다. 읽어보면 사람을 개연(慨然)하게 만듭니다. 奉別三載。淸韻雅儀。未嘗一日不往來於心目間。誰謂南厓北角。非同堂合席耶。矧審侍省怡愉。起居珍勝。實副願聞。承知有絆己之苦。此固固窮所不免。然隨力隨暇。溫理舊業。猶有便於負薪汲水。不啻百倍。況四益之說。其非張先生所云乎。勉之勉之。義林衰相病情。日甚一日。此是不學之致。追補無計。奈何奈何。世路之危險。夫何言哉。惟宜讀書窮理。益加堅心之功而已。朱子詩三軍莫奪匹夫志。九殞難嶊壯士腸。讀之令人慨然。 고궁(固窮) 도의(道義)를 고수하면서 빈궁한 처지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아무리 빈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도의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빈궁하면 제멋대로 굴게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네 가지 이익【四益】에 대한 설 《근사록(近思錄)》 권10 〈정사(政事)〉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린 후학을 가르치는 유익함을 말한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으니, 자신을 얽어매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남에게 자주 가르쳐 주다 보면 자신도 글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어린이를 대할 적에도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자세를 의젓하게 갖는 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항상 자기로 인해서 남의 재주를 잘못되게 하는 것을 걱정하면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니 네 번째의 유익함이다.【敎小童亦可取益, 絆己不出入, 一益也. 授人數數, 己亦了此文義, 二益也. 對之必正衣冠尊瞻視, 三益也. 常以因己而壞人之才爲憂則不敢惰, 四益也.】"라고 하였다.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 1020~1077)로,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이다. 정씨 형제의 삼촌뻘이며 그들과의 많은 대화와 논쟁을 통해 북송 도학의 탄생을 예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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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2수 蟬【二首】 본 모습 벗어버리고 두 날개가 자라니 脫去本形雙翅長속인이 신선 방술을 배우는 것과 같네 有如俗子學仙方잘 우는 게 천직이라 힘들일 일이 없고 善鳴天職無勞力멀리 나는 맑은 의표는 절로 서늘케 하네 遐擧淸標自致凉세상 얘기 대하기 싫어 입을 굳게 다물고 厭對世談深閉口더러운 물건 삼킬까봐 창자를 모두 비웠네 恐呑穢物盡空腸너는 눈을 번쩍 뜨고 지기를 만나리니 爾應醒目逢知己구양수의 부492)가 아직도 취향493)에 남아있네 歐賦猶然在醉鄕위는 맑게 우는 매미[淸蟬]를 읊은 것이다.무슨 한이 길어 먹지도 않고 슬피 우나 不食悲鳴底恨長오늘밤 머물며 자는 곳은 또 어디일까 今宵止宿又何方비 온 뒤의 정원에는 석양이 저물고 雨過園落斜陽晩가을이 온 누대에는 푸른 숲 서늘하네 秋入樓臺碧樹凉지사는 듣고 세상 상심한 눈물 더하고 志士聞添傷世淚길손은 듣고 집 생각하는 애가 끊어지네 旅人聽斷憶家腸평생에 본디 요란함 없던 사물이었으니494) 平生自是無啁物호향과 같은 사마귀495)가 가증스럽네 可惡螳螂卽互鄕위는 슬피 우는 매미[哀蟬]를 읊은 것이다. 脫去本形雙翅長, 有如俗子學仙方.善鳴天職無勞力, 遐擧淸標自致凉.厭對世談深閉口, 恐呑穢物盡空腸.爾應醒目逢知己, 歐賦猶然在醉鄕.【右淸蟬】不食悲鳴底恨長? 今宵止宿又何方?雨過園落斜陽晩, 秋入樓臺碧樹凉.志士聞添傷世淚, 旅人聽斷憶家腸.平生自是無啁物, 可惡螳螂卽互鄕.【右哀蟬】 구양수(歐陽脩)의 부 〈명선부(鳴蟬賦)〉를 말한다. 이 시는 구양수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1056년에 예천궁(醴泉宮)에서 날씨가 개기를 기원할 때 지은 것이다. 취향(醉鄕) 술에 취했을 때 온갖 걱정을 잊는 별천지의 경계를 말한다. 당(唐)나라 왕적(王績)의 〈취향기(醉鄕記)〉에 보인다. 평생에……사물이었으니 대체로 매미가 7년 동안 애벌레로 땅속에서 살다가 성충 매미가 되어서는 겨우 두 주일 가량 살고 죽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호향(互鄕)과 같은 사마귀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뒤에 올 재화(災禍)를 알지 못하는 대상을 비유한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느라 뒤에서 참새가 머리를 들고 자신을 쪼려는 줄을 모르고, 참새는 사마귀를 쪼아 먹을 욕심에 나무 아래서 꼬마 아이가 새총을 자신에게 겨누는 줄을 모른다." 하였다. '호향'은 풍속이 좋지 않아 함께 선(善)을 말하기 어려웠던 중국의 고을 이름이다. 《論語 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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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이씨 묘지명 孺人李氏墓誌銘 고(故) 귀암 처사(龜巖處士) 문군 송규(文君頌奎)는 나와 20년 동안 교유하였는데, 평소 매양 외삼촌인 양씨(梁氏) 어른 집안의 규문의 법도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10여 년 뒤에 양군 재해(梁君在海)가 그 선유인(先孺人) 이씨(李氏)의 행장을 가지고 내가 임시로 거처하는 천태산(天台山)으로 찾아와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양재해는 바로 양씨 어른의 맏아들이다. 유인(孺人)의 어짊은 내가 실로 잘 알고 있다. 다만 부탁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양재해의 간청에 대해서 어찌 차마 끝까지 거절하겠는가.삼가 살피건대, 유인의 성은 이씨(李氏)인데, 그 선조는 광산(光山) 사람으로,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이다. 조부는 이사철(李師哲), 부친은 이용하(李龍河)이다. 모친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그 아버지가 김계(金啓)이다. 순묘(純廟) 을유년(1825, 순조25) 8월 17일에 태어났다. 18세에 양씨(梁氏)에게 시집가서 2남을 낳았으니, 재성(在成), 재해(在海)이다. 병술년(1886, 고종23) 9월 25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62세이다. 남평(南平) 저포(猪浦)에 장사 지냈다가, 능주(綾州) 화학산(華鶴山) 아래 무학동(舞鶴洞) 포만등(匏蔓嶝) 건좌(乾坐)에 이장하여 부군과 합장하였다.유인은 생래적으로 남다른 지조가 있어 계례(笄禮)31)하기 전에 이미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부모가 항상 귀여워하며 말하기를 "네가 남자였다면 우리 가문은 일어날 가망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섬기고 지아비를 받듦에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유인이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수고스러운 일을 다 하였으나 스스로에 대한 보양은 매우 검소하였다. 이로부터 생계가 힘입는 바 가 있어 맛있는 음식을 끊이지 않고 부모님께 올렸으며, 이른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자면서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동온하정(冬溫夏凊)의 예절에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조심하였다.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롭고 너그러웠기에 규방에서는 원망하거나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바른길로 인도하여 도가 있는 이를 가까이하게 하였다. 여항(閭巷)의 비루한 곳이나 시정의 광대놀이 하는 곳에는 금하여 가지 못하게 하였다. 매양 음식을 장만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게 하였고, 번번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는 너의 외사촌 문송규(文頌奎)를 보지 못했느냐. 나는 너희들이 그를 본받았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아, 유인의 어짊은 옛날 열부(烈婦)나 숙원(淑媛)처럼 아름답고 훌륭하다 할 것이다.양재해는 지금 천 리 멀리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하는 데에 매우 힘을 기울이니, 참으로 선조가 후손에게 물려준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후일 입신양명하여 어버이를 드러내는 것이 어찌 미미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잘하고 잘못함도 없는 것은 無非無儀여자의 떳떳한 도리일세. 女道之常유인이 있으니 孺人有焉규문의 법도가 날로 드러났네. 閫範日章자식이 잘 본받아 有子式穀그 모훈을 계승하였네. 思述厥謨아, 저 새로운 언덕에 吁彼新阡길이 보존하는 것 근심이 없네. 永保無虞 故龜巖處士文君頌奎。余二十年從遊也。平日每稱其舅氏梁丈家閫範之美。後十數年。梁君在海。奉其先孺人李氏狀。訪余於天台寓舍。以請幽室之銘。在海卽梁丈胤子也。孺人之賢。余固稔念。但以托非其人。牢辭久之。而在海之請。豈忍終拒也。謹按孺人姓李氏。其先先山人。淸心堂調元後。祖師哲。考龍河。妃金海金氏。父啓以純廟乙酉八月十七日生。十八歸梁氏。生二男曰在成在海。丙戌九月二十五日終。享年六十二。葬南平猪浦。移葬于綾州華鶴山下舞鶴洞匏蔓嶝乾坐合兆。孺人生有異橾。未笄時。已有至行。父母嘗愛之曰。汝若爲男子。則吾門庶有望焉。及適人。事舅故奉君子。極有婦道。家世素貧。孺人備經艱楚。殫服勤勞。而凡百自奉。極其儉約。自是生理有賴。而甘旨之供不匱。夙興夜處。定省溫情之節。必誠必謹。天性溫仁慈恕。閨房之間。未聞有怨慰愁苦之聲。敎養子孫。必以義方。當使親近有道。凡閭巷俚戱市井聲伎之地禁不得往來。每具粮饌。使之從師就塾。輒戒之曰。爾不見爾外弟文頌奎耶。吾欲汝曹效之。嗚呼。孺人之賢。可以與古之烈婦淑媛。倂美而匹休矣。在海今且千里從師求道甚力。信不負當。日垂裕之志。而爲他日立揚顯親之地者。豈淺淺哉。銘曰。無非無儀。女道之常。孺人有焉。閫範日章。有子式穀。思述厥謨。吁彼新阡。永保無虞。 계례(笄禮) 옛날에 여성에게 행해지던 성인례이다. 여자의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아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자(字)를 지어 주었다. 여자가 혼인을 허락하면 혼인 전에 계례를 행한다. 하지만 15세가 되면 혼인의 약속이 없어도 계례를 하였다. 계례 당사자나 부모가 1년 이상의 복(服 상복을 입음)이 없어야 행할 수 있다. 절차는 관례의 절차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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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현감 박공 묘지명 海南縣監朴公墓誌銘 공의 휘는 세장(世章), 자는 성재(聖哉)이니, 신라(新羅) 왕자 밀성군(密城君)이 비조(鼻祖)가 된다. 후세에 휘 울(蔚)이 있으니, 관직은 찰방(察訪)이고, 공에게 7대조가 된다. 증조는 휘 억천(億天)이니 감찰이고, 조부는 휘 지춘(枝春)이니 장악원 판사(掌樂院判事)이다. 부친은 휘 사돈(士敦)이니, 주부(主簿)이다. 모친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니, 판관 김중수(金仲秀)의 따님이다. 인조(仁祖) 무인년(1638, 인조16)에 남평(南平) 박곡리(博谷里)에서 공을 낳았다.타고난 자품이 빼어났고, 뜻은 무리 짓지 않는 것을 숭상하였다. 글방에 나아가 수업을 받았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장성하여서 탄식하기를 "남아의 사업은 굳이 한 기예에 치우치고 한 기국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활을 잡고 말을 타며, 군진을 펼치고 행군하는 방법을 겸하여 익혔다. 젊어서 서울에서 유학하였는데 명성이 자자하였기에 당대 명사들이 모두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현종(顯宗) 경술년(1670, 현종11)에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충무위 사정(忠武衛司正), 호분위 부사과(虎賁衛副司果)를 지냈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가리포 진관(加里浦鎭管), 고금도 첨절제사(古今島僉節制使),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다.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위엄이 있어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기에 현(縣)의 백성들이 비석에 공적을 새겨 칭송하였다.상국(相國) 민노봉(閔老峯) 및 그 아우 여양군(驪陽君)이 매양 원대한 기량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에 대해서 논의하여 확정한 것이 많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이궁(離宮)으로 물러나자 공이 초하루마다 찬품(饌品)을 봉진(封進)하였다. 일찍이 상국의 사신을 모시고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 상이 인견하여 그곳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서 묻고는 매우 가상하게 여겨 노비 수십 명을 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살게 되자 노비를 풀어 준 다음 각자의 길로 가게 하였다. 평소 인륜에 돈독하고 후하게 베풀었으니, 친척과 이웃 사람들이 그를 앞길을 밝히는 횃불처럼 대우하였다. 만년에 자손을 위하여 재산을 나누었는데 형제와 질서(姪婿), 인척과 친구 가운데 가난한 자에게는 또한 모두 미루어 넉넉하게 주었다.신묘년(1711, 숙종37)에 집에서 졸하였다. 남평(南平) 덕곡(德谷) 장등(長嶝)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부사과(副司果) 복(輻)의 따님이다. 모두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수검(守儉), 치검(致儉), 자검(自儉)이고, 사위는 황태걸(黃泰傑), 양필장(梁必章)이다. 측실(側室)은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덕검(德儉), 신검(信儉), 중검(仲儉)이고, 사위는 나수경(羅守慶), 조시태(趙始泰)이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서울에서 먼 시골 구석의 쇠락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스스로 발탁되어 크게 수립하였기에 당대에 이름을 떨쳐 대궐에까지 알려졌다. 공경들은 자문을 구하였고 동류들은 믿고 중시하였다. 백성을 다스릴 적에는 자상하고 은혜로운 풍모가 있었고, 변방을 다스릴 적에는 제압하는 위엄이 있었으니, 내면에 보존한 것이 심후한 자가 아니면 시행하고 운용함에 어찌 이처럼 평탄하고 광대하겠는가. 후손이 한미하고 문헌이 부족하지만 의를 행한 풍모는 아마 가릴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다.공의 8세손 준삼(準三)이 그 족제(族弟) 준기(準基)가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준기가 선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 그 말이 근거가 없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향리의 원로들이 서로 자자하게 전하니, 그 가장이 없더라도 알 수 있는 분임을 말해서 무엇하랴. 감히 비루하고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덕곡의 언덕에 德谷之阿넉 자의 봉분이 우뚝하네. 四尺其崇이 누구의 무덤인가 伊誰云藏해남 박공이 묻혔네. 朴海南公조정을 빛낸 어진 보필이요 熙朝良輔세상을 맑게 한 훌륭한 사람일세. 淑世偉人선량한 이에게 복을 내려 후손이 번창하니 福善昌後천년토록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春 公諱世章。字聖哉。以新羅王子密城君爲鼻祖。後世有諱蔚。官察訪。於公爲七代。曾祖諱億天監察。祖諱枝春掌樂判事。考諱士敦主簿。妣慶州金氏判官仲秀女。以仁祖戊寅生公于南平博谷里。天姿秀爽。志尙不群。就塾受課。淹貫百家。及長慨然曰。男兒事業。不必偏於一藝局於一器。遂兼習操弓馳馬布陣行軍之法。少遊京師。聲聞藹蔚。一時名士。無不願交。顯宗庚戌登武科。歷龍驤衛副司果。訓鍊院主簿。忠武衛司正。虎賁衛副司果。出爲加里浦鎭管。古今島僉節制使。海南縣監。廉勤有威。所至有聲。縣民刻石頌之。閔相國老峯及其弟驪陽君。每以遠器稱之。軍國機務。多所論確。仁顯王后遜于離宮也。公每朔密封饌品以進。嘗陪上國使。入北京。及還。上引問經歷狀。甚嘉賞之。賜奴婢數十口。及退而鄕居。放其奴任其去住。平生篤於人倫。厚於施予。親戚隣里。待以擧火。晩年爲子孫析産。至於兄弟姪婿姻戚知舊之貧者。亦皆推以資給焉。辛卯卒于家。葬于南平德谷長嶝亥坐之原。配原州李氏副司果輻女。擧三男二女。守儉致儉自儉。黃泰傑梁必章。側室生三男二女。德儉信儉仲儉。羅守慶趙始泰。孫曾以下不能盡記。嗚呼。公生于鄕曲遐荒之地。家戶零替之餘。而早自援擢。能大樹立。蜚英一世。動光九陞。公卿待以咨訪。儕流視以倚重。牧民有慈惠之風。莅邊有折衝之威。非存乎內者深厚。其施用云爲。安能若是之坦易滂沛也。雲仍式微。文獻莫徵。而其行義風致。槪乎有不可掩者矣。公八世孫準三。以其族弟準基所撰家狀來。請隧道之銘。余知準基善人也信人也。其言不爲無稽。況鄕里故老相傳藉藉。有不待其家狀而知者耶。不敢以陋劣辭。銘曰。德谷之阿。四尺其崇。伊誰云藏。朴海南公。照朝良輔。淑世偉人。福善昌後。芬苾千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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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기공 묘지명 野隱奇公墓誌銘 선비로서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어진 벗을 만나 교유하며 훌륭한 산수를 차지하여 소요하는 것은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한 가운데 때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을 고(故) 처사 야은(野隱) 기공(奇公)이 또한 그러한 사람이다. 기씨(奇氏)는 사문(斯文)의 명가가 되었으니, 남쪽 고을에서 으뜸이다.공은 뛰어난 재능과 남다른 자질로 선대에서 남긴 공렬을 이어받았고, 명성과 훤한 풍모로 젊은 시절부터 소문이 자자하였다. 공령문(功令文)과 사장(詞章)은 부모님과 가문의 바람에서 나왔지만 청탁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끊고 산수간 천석 사이에 마음을 두어 당시의 명사와 더불어 강론하고 시를 수창함에 부지런하여 피곤한 줄 몰랐다. 그 참다운 생각과 고매한 흥취는 우뚝이 세정(世情)을 벗어난 것이었으니 비록 사람들이 말하는 때를 만난 것과는 다르지만 이것이 천지간에 세상에 없는 만남이 됨을 누가 알겠는가. 지금 공의 세대와는 100여 년 차이가 나지만 효도와 우애의 훈계는 자손을 실추시키지 않았고, 겸양하는 기풍은 여전히 향리에 전한다. 당시 수양한 바가 깊고 조우한 바가 두텁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어찌 탁월하지 않은가.공의 휘는 상호(商頀), 자는 성원(聖元),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정무공(貞武公) 휘 건(虔)이 중시조가 되니,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이름을 떨쳤다. 진필(震弼), 정상(挺祥), 재동(再動), 종태(宗泰)는 고조와 증조 이하 4대의 휘이다. 모친은 순창 임씨(淳昌林氏)로, 임중형(林重馨)의 따님이다. 배위(配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조한신(曺漢愼)의 따님인데, 온화하고 어질며 고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부인의 덕이 지극하였다. 모두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사봉(師鳳), 사범(師範), 사룡(師龍), 사혁(師赫), 사은(師殷)이다. 두 딸은 최창화(崔昌燁), 임우재(任禹才)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증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영종(英宗) 경신년(1740, 영조16)에 태어났으니, 향년 48세이다. 능주(綾州) 남쪽 상우봉(上牛峯) 가양평(加陽坪) 을좌(乙坐) 언덕에 쌍분으로 장사 지냈다.5대손 세진(世搢)이 나와 교유하였는데, 어느 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묘표(墓表)를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송사는 유림의 학식이 깊은 원로 선배이니 그 말이 결코 친족에게 사사로이 아부하지 않을 것이기에 백세의 공필(公筆)이 될 수 있다. 생각건대 형편없는 내가 어찌 모름지기 그 사이에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사양하였지만 세진이 계속 간청하기에 삼가 묘표에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록한다.금오산21) 기슭 金鰲之麓양자강22)의 물가. 楊子之濱운림에는 푸른빛 감돌고 雲林蒼翠바람 부는 때 깨끗하네. 風日鮮新넉 자의 봉분 있으니 有封四尺군자가 묻힌 곳일세. 君子之藏자손에게 복 남겼으니 貽厥式穀남은 경사 영원하리. 餘慶長長 士之不遇於世久矣。得朋友之賢以從逐焉。占山水之勝以逍遙焉。此可謂不遇而遇者矣。吾鄕故處士野隱奇公。亦其人也。奇氏爲斯文名家。冠冕於南州。公以儁才異質。承襲餘烈。聲望風華。早年藉藉。功令詞章。出於父母門戶之望。而關節捷徑。有所不屑也。及遭大故。絶意進取。寄傲於水林泉石之間。與一時名碩。講劘酬唱。亹亹而不知倦。其眞想逸趣。亭亭物表。雖異乎人之所謂遇者。而誰知此爲天瓖間不世之遇也耶。今距公之世爲一百有餘年。而孝弟之訓。不墜於子孫。廉讓之風。猶傳於鄕里。可見其當日所養者深而所遇者厚也。曷不偉然。公諱商頀。字聖元。貫幸州。貞武公諱虔爲中祖。文學仕宦。奕世磊落。震弼。挺祥。再動。宗泰。高曾以下四世諱也。妣淳昌林氏重馨女。配昌寧曺氏漢愼女。溫仁柔嘉。極有婦德。擧五男。曰師鳳師範師龍師赫師殷。二女適崔昌燁任禹才。孫曾不記。公以英宗庚申生。享年四十八。葬于綾州南上牛峯加陽坪乙坐原雙兆。五代孫世搢。從余遊。一日以松沙奇宇萬所撰墓表來謁誌銘之文。竊忘松沙是儒林老宿。其言必不阿私族親。而足爲百世之公筆。顧蔑蔑無狀。何須加床於其間耶。辭之而世瑨之請不已。謹据表爲之說如是云爾。銘曰。金鰲之麓。楊子之濱。雲林蒼翠。風日鮮新。有封四尺。君子之藏。貽厥式穀。餘慶長長。 금오산(金鰲山) 전라도 장성현(長城縣)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양자강(楊子江) 능주천이 화순군 이양면 강서리 예성산 아래 송석정에 이르면 양자강 또는 용강(龍江)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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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병조 참의 천은 조공 묘지명 贈兵曹參議泉隱趙公墓誌銘 공의 휘는 서규(瑞奎), 자는 경천(擎天), 호는 천은(泉隱)이다. 조씨(趙氏)는 본래 함안(咸安) 사람이다. 휘 정(鼎)은 고려에서 벼슬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을 지냈는데, 그 시조이다. 휘 승숙(承肅)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덕곡(德谷) 선생이라고 불렀다. 휘 종례(終禮)는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휘 임(琳)은 관직이 대사성이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휘 희광(希匡)에 이르러 참봉을 지냈는데, 동복(同福)에 우거(寓居)하였다. 고조는 휘 유보(惟寶)인데, 습독(習讀)을 지냈다. 증조는 휘 호(豪)인데,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조부는 휘가 기벽(奇璧)이다. 부친은 휘 옥생(玉生)으로, 호가 청계(淸溪)이며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모친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영춘(朴永春)의 따님이다. 인묘(仁廟) 신사년(1641, 인조19) 3월 29일에 산음(山陰)의 우거하는 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니, 효도와 우애는 타고난 천성이었다. 나아감과 물러남, 묻고 대답하는 예절에 대해서 물 흐르는 듯이 받들고 순종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독서할 적에는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課程)을 따라 공부하여 문리(文理)가 날로 통창하였다. 일찍이 동학에게 말하기를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은 비록 두 가지 길이지만 출사(出仕)하여 군주를 섬기며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치는 것은 한가지이다. 수하(隨何)와 육가(陸賈)는 문학에 국한되고 강후(絳侯)와 관영(灌嬰)은 무략에 치우쳤으니,23) 그릇처럼 한 가지 쓰임새에 국한되지 않는 군자의 방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독서하는 여가에 《손오병법(孫吳兵法)》24) 같은 병서를 함께 익혀 대략 대의에 통달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여론은 모두 장차 당시에 쓰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우연히 고질병(痼疾病)에 걸려 마침내 천하사방을 평정하는 원대한 일은 접고 문을 닫은 채 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평소 마음가짐은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행실은 겸손하였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고 공경스러웠으며, 일을 처리함에 신중하고 꼼꼼하였다. 종족과 인척으로부터 교유하는 친구에 이르기까지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기를 끊임없이 계속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임신년(1692, 숙종18) 8월 13일에 졸하였다. 나중에 장수하고 귀하게 된 손자로 인하여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정득영(鄭得英)의 따님이다. 화순(和順) 천운산(天雲山) 을좌(乙坐) 위아래로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징태(徵泰), 징휘(徵徽), 상겸(尙謙)이고, 딸은 낭주(朗州) 최구익(崔久翼)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영민한 재주로 태평성대에 출사(出仕)하여 마땅히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듯하였지만, 병마가 농간을 부려 끝내 궁벽한 산속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식자의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후손 익제(翼濟)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였는데,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행실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孝悌之行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였네. 文武之才벼슬길에 나아갔다면 釋褐登籍훌륭한 일을 하였을 텐데. 庶乎有爲운명이 시대와 어긋나 命與時違산속에서 숨을 거두었네. 沈淹林樊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고 積累不食후손들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 公諱瑞奎。字擎天。號泉隱。趙氏本咸安人。諱鼎。仕麗朝官平章事。其始祖也。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諱從禮。入我朝。官寶文閣直提學。諱琳。官大司成。皆顯祖也。至諱希匡參奉。寓居同福。高祖諱惟寶。習讀。曾祖諱豪。內禁衛將。祖諱奇璧。考諱玉生。號淸溪。軍資監正。妣密陽朴氏永春女。仁廟辛巳三月二十九日。生公于山陰之寓舍。公幼有至行。孝友根天。進退唯喏。承順如流。就傳讀書。不待提督而遵循課程。文理日暢。嘗語同學曰。文武雖是兩途。而其爲出身事君。經世澤民。則一也。隨陸之局於文。絳灌之偏於武。非君子不器之道也。是以讀書之暇。兼習孫吳兵略。略通大儀。丙辰擢武科。物論無不擬之以將爲時用。旣而偶得貞疾。遂還四方之事。以杜門養病爲餘日計。平居持心謹慤。行已謙恭。接人和敬。處事愼密。自宗族姻戚至於知舊從遊。問訊周恤。源源不替。各得其心。壬申八月十三日卒。後以孫壽貴。贈兵曹參議。配河東鄭氏得英女。葬和順天雲山乙坐上下兆。生三男一女。男曰徵泰徵徽尙謙。女適朗州崔九翼。孫以下不錄。嗚呼。以若挺邁之才。出身照朝。宜若有所爲。而二竪作戲。竟不免沈淹於遐曲林樊之間。其爲謙者之恨。爲何如耶。後孫翼濟。以家狀請識玄石。辭不獲已。銘曰。孝悌之行。文武之才。釋褐登籍。庶乎有爲。命與時違。沈淹林樊。積累不食。垂裕後昆。 수하(隨何)와……치우쳤으니 《진서(晉書)》 〈유원해재기(劉元海載記)〉에 "한(漢)나라 수하(隨何)와 육가(陸賈)에게는 무략이 없고, 강후 주발(周勃)과 관영에게는 문식이 없다.[隨陸無武 絳灌無文]"라고 하였다. 《손오병법(孫吳兵法)》 중국 춘추 시대 병법의 대가인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과 오기(吳起)의 《오자병법(吳子兵法)》의 합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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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 이공 묘지명 藥圃李公墓誌銘 공의 휘는 영복(永複), 자는 계실(季實), 호는 약포(藥圃)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다.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가 된다. 휘 선제(先齊) 호 필문(篳門)에 이르러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조원(調元)을 낳았는데,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다. 은일(隱逸)로 여러 번 천거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종덕(種德)인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경(㯳)인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 조부는 휘 필광(必光)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언구(彦矩)이니,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전성중(全聖中)의 따님이다. 영종(英宗) 신미년(1751, 영조27) 5월 22일에 공을 화산리(華山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천품이 온후하고 굳세고 방정하였다. 집안에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와서는 어른을 섬겨 아우와 자식 된 직분에 매우 충실하였다. 여력이 있고 한가한 날이면 등불을 밝히고 상투를 천장에 매단 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하여 성동(成童)의 나이에 이르러 문사(文詞)가 넉넉하여 시원스레 통하였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끝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과거 공부는 접고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여 애오라지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렸으니,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 성실한 뜻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는 늙은이와 젊은이, 윗사람과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믿고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흉년을 당했을 적에 수확한 벼가 논에 남아 있었는데, 밤에 가서 보니 어떤 사람이 벼를 훔쳐서 가다가 공을 보고 이랑 사이에 숨겼다. 공이 그에게 의리에 대해 말하면서 정성스럽게 깨우쳐 주니 그 사람이 사죄하고 돌아가서는 결국 착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 양상 군자(梁上君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묘간 군자(畝間君子)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웃 마을에 살인자가 있어 장차 관아에 고하려고 하였는데, 마을 사람이 모두 달아나고자 하니, 공이 엄히 금하여 농사 짓는 사람은 농사짓게 하고 독서하는 자는 독서하게 한 다음 공은 뜰을 쓸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서 관원을 맞이하자, 관원이 마음대로 침탈하는 바가 없어 마을이 마침내 편해졌다.부모의 상을 당해서 슬퍼하기를 예법에 정한 것보다 더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니, 향리에서 감동하여 마침내 상위 관아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무자년(1768, 영조44) 1월 21일에 졸하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론(公論)이 위에서 행해지지 않아 인재가 아래에서 흩어져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이와 같이 의(義)를 행하고 이와 같이 원대한 뜻을 품고 외진 곳에 서 은거하여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공의 입장에서는 실로 보탬이 되거나 손해되거나 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으로 보아서는 어떻다고 하겠는가. 바다에 빠뜨린 진주25)는 비록 열 겹으로 감싸서 광채를 숨기더라도 백세의 뒤에까지 절로 가리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배위(配位)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박성곤(朴聖坤)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광국(光國), 광렬(光烈), 광인(光寅), 광진(光震)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사욱(文思郁), 흥덕(興德) 장계인(張啓仁)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한휘(漢徽), 덕휘(德徽)이고, 딸은 강욱(姜旭)에게 출가하였다. 차자의 아들은 만휘(萬徽), 주국(周國), 주장(周璋), 주진(周鎭)이고, 딸은 문영기(文永璣)에게 출가하였다. 셋째는 주국(周國)을 양자로 삼았다. 넷째의 아들은 숙휘(淑徽)이고, 장녀는 경주(慶州) 김일기(金馹基)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밀양(密陽) 박영호(朴英浩)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현손 태휴(泰休)가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시례의 가문에 詩禮門庭효도와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네. 孝友式穀광채를 감추었으니 潛光含章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사람 없었네. 世莫我識선조가 공덕을 쌓고 누리지 않아 積累不食후손들이 복 받았네. 雲仍蒙福지동의 무덤에 池洞斧堂억만년 향기로운 제물 올리네. 芬苾千億 公諱永複。字季實。號藥圃。李氏系出光山。勝朝左僕射諱珣白爲鼻祖。至諱先齊。號篳門。官大提學。封慶昌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薦至吏曹參議。皆其顯祖也。高祖諱種德。丙亂擧義。贈吏曹參議。曾祖諱㯳。贈僉中樞。祖諱必光。贈掌樂院正。考諱彦矩。同中樞。妣天安全氏聖中女。以英宗辛未五月二十二日生。公于華山里。公天稟溫厚剛方。八事父兄。出事長上。甚得弟子之職。餘力暇日。焚膏懸䯻。刻苦下功。年至成童。文詞贍暢。累捷鄕解。竟屈禮部。於是謝絶擧業。隱居求志。聊以自娛。平心率物。推己恕人。惻怛之情。孚實之意。交濟竝行。是以鄕里之間。老少上下。無不信服。嘗遇飢歲。稷禾棲畝。乘夜行視。有人竊禾以去。見公。匿於畝間。公爲陳義理。曉喩諄諄。其人服罪而去。卒爲善人。人曰。古有梁上君子。今爲畝間君子。村隣有殺人者。將告官。村人皆欲逃避。公嚴禁之。使耕者耕。讀者讀。公掃庭除。具衣冠。出迎官。官人無所肆其侵掠。村中遂晏如也。遭艱。哀毁踰節。廬墓三年。鄕里感賞。遂剡薦于上司。除童蒙敎官。戊子正月二十一日卒。葬池洞前麓午坐原。嗚呼。公論不行於上。而人才散逸於下久矣。以若行義。以若抱負。隱淪遐荒。世無知者。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謂何如耶。滄海遺珠。雖十襲鞱輝。而百世之下。自有不可得而掩者矣。配順天朴氏聖坤女。有四男二女。光國光烈光寅光震。女適南平文思郁。興德張啓仁。長房男漢徽德徽。女適姜旭。二房男萬徽周國周璋周鎭。女適文永璣。三房周國爲後。四房男淑徽。女長適慶州金馹基。次適密陽朴英浩。會孫以下不盡錄。玄孫泰休徵玄石之銘。不敢辭。銘曰。詩禮門庭。孝友式穀。潛光含章。世莫我識。積累不食。雲仍蒙福。池洞斧。堂芬苾千。億 바다에 빠뜨린 진주 보배를 모으는 사람이 바닷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여 빠뜨렸다는 말로,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여 등용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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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교수 이당 박공 묘지명 東學敎授梨堂朴公墓誌銘 공의 휘는 승수(承洙), 자는 석여(錫汝), 호는 이당(梨堂)이다. 박씨(朴氏)는 세계가 신라(新羅)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에게서 나왔다. 후세에 여덟 명의 대군(大君)이 분봉(分封)하게 되었으니, 그 장자가 밀성군(密城君)으로, 바로 밀성 박씨로 계보가 나누어지게 된 선조이다. 후손 가운데 휘 현(鉉)이 있으니, 고려 때 사헌부 규정(司憲府紏正)을 지냈다. 이분이 휘 문유(文有)를 낳았는데,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이분이 휘 사경(思敬)을 낳았는데,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심(忱)을 낳았는데, 본조에 들어와 개국원종훈(開國原從勳)으로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강생(剛生)을 낳았는데,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이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다. 이분이 휘 절문(切問)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중손(仲孫)을 낳았는데, 호는 묵재(默齋)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다. 이분이 휘 미(楣)를 낳았는데, 호는 존성재(號存誠齋)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냈다. 이분이 휘 광영(光榮)을 낳았는데,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 모두 합격하고 형조 참판을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난(蘭)을 낳았는데, 호가 오정(梧亭)이고,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북평사(北評事)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평군(密平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인원(仁元)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전한(典翰)을 지냈다. 이분이 휘 준현(俊賢)을 낳았는데,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호종훈(扈從勳)에 책록(策錄)되었다. 이분이 안정(安檉)을 낳았는데, 참봉(參奉)을 지냈고, 바로 공의 선고(先考)이다. 모친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김유현(金有鉉)의 따님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파주(坡州)의 덕현(德峴)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재성(才性)이 영특하여 문학을 일찍 성취하였다. 일찍 성균관에 들어가 동학 교수(東學敎授)에 제수되었다. 사우(師友)들과 교유하고 출중한 사람들과 사귀어 끊임없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더욱더 확충하여 훌륭한 명성이 당대에 자자하였다. 공은 퇴우당(退憂堂) 휘 승종(承宗)과 더불어 종고조(從高祖) 형제가 된다. 퇴우당이 화를 당한 뒤에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다.얼마 되지 않아 또 병자호란이 일어나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공은 마침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전주(全州)의 봉서산(鳳棲山) 선영 아래에 이르러 거처하였다. 3년을 거처하였는데 도회지와 가까워 출세를 위해 인연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한강(韓康)26)의 이름을 아는 자가 다만 한 여자에 그칠 뿐만이 아닌 것을 보고, 이에 남쪽 변방 산골 가장 깊은 곳을 찾다가 능주(綾州) 이목동(梨木洞)에 이르러 멈추었다. 숲속에 집을 짓고 고용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이름이 문밖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발은 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림자를 숨기고 자취를 없애며 교유를 끊어 세상을 버린 백성으로 자처하여 스스로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공이 어느 곳에서 떠돌아다니는지 몰랐고,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공이 귀족의 자제인 줄 몰랐다. 여유롭게 노닐면서 배운 것을 익히고 노닐면서 익히듯이 학문에 전념하여 뽕을 따는 자처럼 한가롭고,27) 대식(代食)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좋아하여28) 인간 세상에서 더이상 종경(鍾磬)과 옥백(玉帛)이 어떤 물건인지 몰랐다.정사년(1677, 숙종3) 10월 15일에 별세하였다. 거처하던 곳 뒤쪽 산기슭 자좌(子坐)에 장사 지내고 부인과 합장하였다. 배위(配位)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참판 이무(李武)의 따님이다. 아들 한 명을 낳았으니, 자희(自禧)이다. 손자는 일징(逸徵), 초징(楚徵)이다. 초징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이름이 성원(晟源)으로 장자의 후사가 되었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대대로 훌륭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태평성대의 명사(名士)로, 그 포부와 조예는 장차 이 세상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가문의 운수가 떨치지 못하고 시사(時事)에 어려움이 많았다. 마침내 천애(天涯)의 머나먼 변방에 초연히 은둔하여 폐인으로 자처하여 생을 마감하였으니, 탁월한 풍격은 먼 후대에 서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 할 것이다. 다만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후손들이 영락하여 유풍과 남은 향기가 파묻힌 채로 알려지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자손의 무궁한 한스러움이 아니겠는가. 9세손 학(鶴)이 와서 깊이 개탄하며 전해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를 수습하여 장차 묘도(墓道)에 새기려고 하면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 차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번다함 사절하고 고요한 곳 찾아 謝繁就靜외진 물가에 이르렀네. 止于遐濱은거할 곳 마련하였는데 菟裘是卜이곳에 새로 무덤을 만들었네. 斧堂仍新두텁게 쌓으면 반드시 발현하고 厚積必發오래도록 막히면 반드시 펴지게 마련이네. 久屈必伸후손이 번창하리니 螽斯椒聊남은 경사 시냇물처럼 이르리라. 餘慶川臻 公諱承洙。字錫汝。號梨堂。朴氏系出新羅始祖王赫居世。後世至八大君。分封其長曰密城君。卽密城繼別之祖也。後孫有諱鉉。䴡朝官司憲紏正。是生諱文有。慶州判官。是生諱思敬。典法判書。是生諱忱。入我朝。以開國原從勳。贈戶曹典書。是生諱剛生。號蘿山耕叟。集賢殿副提學。是生諱切問。文科正字。贈左贊成封密山君。是生諱仲孫。號默齋。文科都承旨。是生諱楣。號存誠齋。文科官承旨。是生諱光榮。中司馬文科官刑曹參判。封密城君。是生諱蘭。號梧亭。中司馬兩試。北評事。贈領議政封密平君。是生諱仁元。文科典翰。是生諱俊賢。中司馬。壬辰著扈從勳。是生諱安檉。參奉。卽公之考也。妣安東金氏有鉉女。歲丙辰生公于坡州之德峴。公才性穎異。文學夙就。早上庠。除東學敎授。遊從師友。交結英雋。琢磨淬礪。愈益展拓。蜚英馳譽。藉藉一時。公與退憂堂諱承宗。爲從高祖兄弟。退憂堂遘禍後。公退歸鄕第。杜門謝客。未幾又經丙子之亂。時事大變。公遂無意於世。挈家南下。至全州之鳳棲山先壟下居焉。居三年。見地近通都。夤緣漸繁。而知韓康之名者。不止爲一女子而已。於是行尋南荒山谷最深處。至綾州之梨木洞止焉。因樹爲屋。與同傭人。名不出門。足不出山。匿影滅跡。絶遊息交。自處以遺世之民。自謂以無名之人。洛中故舊。不知公之爲流落何處。洞裏居人。不知公之爲貴遊子弟也。優哉游哉。脩焉息焉。同桑者之閑閑。樂代食之維好。不知人間世復有鍾磬玉帛之爲何物也。丁巳十月十五日考終。葬所居後麓子坐合窆。配全義李氏參判武之女。擧一男曰自禍。孫男曰逸徵楚徵。楚徵有一男曰晟源。出後長房。玄孫以下不盡錄。嗚呼。公以世家華胃。照朝名士。其抱負造詣。將以有爲於斯世。而家運不競時事多難。乃超然遐擧於天涯地角之遠。自分貞廢以終其世。其風韻之偉然。百世之下。令人斂袵。但年代浸遠。雲仍零替。使其遺風餘芬。鬱而不暢。豈不爲子孫無窮之恨耶。九世孫鶴來。深懷慨歎。收拾遺間。將以揭諸墓道。因請誌銘之文。余不忍以非其人辭。銘曰。謝繁就靜。止于遐濱。菟裘是卜。斧堂仍新。厚積必發。久屈必伸。螽斯椒聊。餘慶川臻。 한강(韓康)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자가 백휴(伯休)이다. 그는 30여 년 동안 명산의 약초를 캐다가 장안(長安) 시장에서 늘 똑같은 값으로 팔아 왔는데, 어느 날 어떤 여자가 그와 흥정을 하다가 "당신이 한백휴라서 값을 깎아 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진 것을 탄식하며 패릉산(霸陵山) 속으로 들어가 숨었지냈다 한다. 《後漢書 逸民列傳 韓康》 뽕을……한가롭고 《시경》〈위풍(魏風) 십묘지간(十畝之間)〉에 "십 묘의 사이에 뽕을 따는 자가 한가롭고 한가로우니, 장차 그대와 더불어 돌아가리라.[十畝之間兮, 桑者閑閑兮, 行與子還兮.]"라고 하였다. 대식(代食)하는……좋아하여 대식은 농사짓는 소득으로 녹식(祿食)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대아(大雅) 상유(桑柔)〉에 "가색을 좋아하여, 농민과 함께 일하면서 대식하노니, 이는 가색을 보배로 여기고, 대식하는 것을 좋아함이로다.[好是稼穡, 力民代食. 稼穡維寶, 代食維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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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암 처사 고공 묘지명 遯庵處士高公墓誌銘 우리 고을에 옛날에 은사(隱士)가 있었으니, 둔암(遯庵) 고공(高公)인 휘 경리(景离), 자 광우(光宇)가 그 사람이다. 산에서 나물 캐고 강에서 낚시하여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올렸고, 밤에는 등불을 밝히고 경서를 읽었다. 함부로 교유하지 않고 반드시 합당한 사람을 택하였으며, 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고 반드시 합당한 곳을 택하였다. 예에 맞지 않는 책은 보지도 않고 법도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양하고 받으며 얻고 주는 일에 이르러서는 합당한 의리가 아니고 합당한 도리가 아니면 만종(萬鍾)이라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조금도 구차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주군(州郡)에서 추천하였지만 나아가지 않고 관찰사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국사봉(國師峰) 아래에 집을 짓고 세 갈래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사방 벽엔 책이 가득하였다. 소쇄하고 고즈넉하여 그 사이에서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생활하였다. 때때로 은봉(隱峰) 안 선생(安先生)을 따라 경서를 강론하고 산수 간에 노닐며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는 흥취를 다하였으니, 〈천태유산록(天台遊山錄)〉과 같은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고씨(高氏)는 관향이 장흥(長興)이다. 휘 신전(臣傳)은 호조 참의를 지내고, 휘 열(悅)은 호조 참판를 지냈으며, 휘 상덕(尙德)은 지평을 지냈는데, 모두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휘 익심(益深)으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을 지냈고, 조부는 휘 명진(明進)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부친은 휘 현(鉉)으로 진사를 지냈다. 모친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첨추(僉樞) 언상(彦祥)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참봉 조의수(曺義修)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을 낳았으니, 장자는 원건(元健)이고, 차자는 인건(仁健)이다. 손자는 태제(泰濟)이고, 증손은 가한(可漢)이며, 현손(玄孫)은 명림(命霖), 명주(命舟), 명좌(命佐)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묘소는 수동(壽洞) 선영(先塋) 좌측 자좌(子坐)에 있고 쌍분(雙墳)이다. 10세손 광무(光茂)가 대인(大人)의 명을 받들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옷 속에 옥을 품고 손에 옥 지니고 懷瑾据瑜산림에 은거하였네. 枕山樓谷한가롭게 소요하며 婆娑徜徉즐거움 알리지 않기로 길이 맹세하였네. 永矢不告커다란 운치, 은둔한 자취는 偉韻逸躅저 언덕에 있네. 在彼阿陸선조가 복을 다 누리지 않아 碩果不食후손이 대대로 복을 누리네. 世世式穀 吾鄕古有隱士曰遯庵高公。諱景离。字光宇。其人也。採山釣水以供親旨。焚膏繼晷以讀古經。不妄交遊而必擇其人。不妄出入而必擇其地。目不觀非禮之書。口不道非法之言。至於辭受取予。非其義也。非其道也。萬鍾有所不屑。一毫有所不苟。州郡擧之而不起。侯伯邀之而不赴。結廬於國師峰下。三逕花竹。四壁圖書。瀟灑幽。閴寄敖其間。時從隱峰安先生。講討墳籍。登臨水石。以償風詠之趣。如天台遊山錄諸篇可見。高氏貫長興。諱臣傳。戶曹參議。諱悅。戶曹參判。諱尙德。持平。皆其中系顯祖也。曾祖諱益深。昌陵參奉。祖諱明進。通德郞。考諱鉉。進士。妣東萊鄭氏僉樞彦祥女。公娶昌寧曺氏參奉義修女。擧二男。長元健。次仁健。孫泰濟。曾孫可漢。玄孫命霖命舟命佐。以下不錄。公墓在壽洞先兆左傍子坐雙墳。十世孫光茂。奉大人命。以其家狀。謁誌墓之文。銘曰。懷瑾据瑜。枕山樓谷。婆娑徜徉。永矢不告。偉韻逸躅。在彼阿陸。碩果不食。世世式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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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호은 황공 묘지명 湖隱黃公墓誌銘 무성한 꽃과 잎을 보고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고,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연원(淵源)이 깊다는 것을 안다. 사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이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선인의 벗 황 이랑공(黃吏郎公)은 먼 지방에서 떨쳐 일어나 젊은 나이에 명성을 떨쳤으니, 성대하게 밝은 시대의 어진 신하가 되고 태평성대의 명사(名士)가 되었다. 자손들이 모두 법도를 준수하여 찬란하게 시례(詩禮)의 기풍이 있었으니, 다가올 복록이 오히려 다하지 않았다. 평소 흠모하여, 선조가 쌓기만 해놓고 누리지 않은 공덕이 필시 선대에 있었는데 아직 후손이 끌어오지 못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 여름에 이랑공의 맏아들 작(稓)이 증왕고(曾王考) 호은공(湖隱公)의 행장을 가지고 내가 머무는 벽산(碧山)의 집으로 찾아와 묘도에 세울 비문(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양대에 걸쳐 50년 동안 집안끼리 서로 친하게 지낸 우의로 볼 때 어찌 차마 굳게 사양하겠는가.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상곤(象坤), 자는 후지(厚之), 호은(湖隱)은 그의 호이다. 국초의 명재상 익성공(翼成公) 휘 희(喜)의 후손이다. 부친은 휘 자중(字中)이다. 모친은 밀양 손씨(密陽孫氏)로, 손덕삼(孫德三)의 따님인데, 영종(英宗) 병자년(1756, 영조32)에 장흥(長興) 벽신동(闢新洞)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지극한 성품이 있어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났다. 과거 공부를 하여 문장이 넉넉하며 시원하였다. 이윽고 번연히 생각을 바꾸어 수신을 위한 학문에 종사하였으니, 대개 타고난 훌륭한 자질로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바른길로 돌이킨 것이다. 문을 닫고 휘장을 친 채 가부좌를 하고 앉아 독서하고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날마다 학습해야 할 과정을 두었다.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에 통달하여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고, 하늘이 부여한 명(命)과 사람이 부여받은 성(性)29)을 정밀하게 분석하였다. 예학(禮學)에 더욱 심오하였는데 《상변통고(常變通攷)》와 《의례문해(疑禮問解)》에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대학(大學)》, 〈홍범(洪範)〉 등의 말을 가지고 분류하고 강목과 조목을 만들어 자리 오른쪽에 붙여두고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다. 매일 일찍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참배하였다. 대답하고 응대함에 부모님의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고, 좌우에 있거나 출입할 적에는 매우 힘써 일하였다. 하늘에 빌어 역병을 물리쳐 아버지가 끝내 탈이 없었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입에 넣자 어머니도 살아났다.상례를 거행할 적에 3일 동안 미음을 먹지 않았고, 묘소에서 곡하는 것은 눈보라가 쳐도 3년 동안 폐하지 않았다. 동생과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즐거워하는 기색이 말과 낯빛에 넘쳤다. 남의 선행을 보면 자신이 선을 행한 듯이 하였고, 남의 근심을 보면 자신의 근심처럼 여겼으며, 남의 불선함을 보면 자신의 잘못인 양 여겼다. 정성스럽게 경계하고 신칙하여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교화된 사람이 많았다.인천 이씨(仁川李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이정기(李廷夔)의 따님인데, 부인의 덕을 지녀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갑인년(1794, 정조18) 5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9세이다. 어은동(魚隱洞) 연봉(鳶峯)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세 아들은 세진(世鎭), 유진(有鎭), 재진(再鎭)이다. 유진의 아들 기원(基源)이 바로 이조 정랑이다.세상에는 실로 조용히 수양하여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내면이 넉넉한 사람이 있는데, 호은공(湖隱公)과 같은 분이 어찌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장담하겠는가. 내 지금 이후에 황씨(黃氏) 복록의 원대함이 유래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선한 자는 하늘이 복을 내린다30)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운명이 어찌 어긋났으며 命何不揚수명을 어찌 누리지 못하였는가. 壽何不長그 보답을 받지 않고 不食其報자손에게 남겨 주었네. 貽于孫子자손들에게 좋은 일 내려주니 孫子錫類음덕이 그치지 않으리라. 餘蔭未已 見花葉之茂而知根荄之固。見派流之長而知淵源之深。物猶然矣。矧伊人乎。先友黃吏郎公。崛起遐遠。早年騰颺。蔚然爲昭代之良輔。照朝之名士。子孫皆遵守規矩。彬彬有詩禮之風。其福祿之來。尙未艾也。尋常欽艶。意其積累不食之德。必有在於其先而未之叩焉。歲乙未夏。吏郎公胤子稓。以其曾王考湖隱公狀。行訪余於碧山止舍。請墓道誌銘之役。嗚呼。兩世通家五十年久要之誼。豈忍牢辭哉。謹按公諱象坤。字厚之。湖隱其號也。國初名相翼成公諱喜後。考諱字中。妣密陽孫氏德三女。以英宗丙子生公于長興闢新洞。幼有至性。孝友著稱。治擧子業。詞藻贍暢。旣而幡然改圖。從事爲己之學。盖天資之美。不待提諭而自爾反正也。杜門下帷。斂膝加趺。讀書窮理。日有課程。經史子集。淹貫該洽。天人性命。剖析情密。尤深於禮學。常變疑禮。無不旁通。以九容九思及大學洪範等語。彙分綱條。粘付座右。常自鏡考焉。每日早起。省親謁廟。唯諾應對。極其承順。左右出入。極其服勞。祈天驅疫而父竟無恙。割指注血而母亦回甦。執喪而水漿不入口者三日。哭墓而風雪不廢者三年。與弟友愛甚篤。怡悅之氣。溢於色辭。見人之善如己之善。見人之憂如己之憂。見人之不善如己之病。諄諄警勅。不露聲氣。而人多化之。娶仁川李氏廷夔女。婦德甚備。閫範無闕。公以甲寅五月十六日卽世。得年三十九。葬于魚隱洞鳶峯子坐原。三子世鎭有鎭再鎭。有鎭之子基源卽吏郎也。世固有潛修獨善含章內腴之人。而如湖隱公者。安知非其流耶。吾今而後。知黃氏福祿之遠有自來矣。天道福善。豈不信哉。銘曰。命何不揚。壽何不長。不食其報。貽于孫子。孫子錫類。餘蔭未已。 하늘이……성(性) 원문은 '천인성명(天人性命)'이다. 《주역대전(周易大傳)》 〈건괘(乾卦) 단(彖)〉에 "하늘의 도가 변화하매 각각 성과 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和氣)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본의(本義)》에 "하늘이 부여한 것을 명(命)이라 하고, 물(物)이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선한……내린다 원문은 '天道福善'이다. 《서경(書經)》 탕고(湯誥)에 "선하면 복을 주고 악하면 화를 내리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天道福善禍淫]"라고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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