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유석승(柳石承) 죽촌최공묘표(竹村崔公墓表)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歲丁酉仲秋日 柳石承 歲丁酉仲秋日 柳石承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에 유석승이 작성한 죽촌 최병기의 묘표. 1957년에 유석승(柳石承)이 작성한 죽촌(竹村) 최병기(崔秉璣, 1901-1949)의 묘표(墓表)이다. 죽촌은 월당(月塘) 최담(崔霮),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 처사(處士) 최필성(崔弼成) 등 도학과 문장, 그리고 충효와 절행 및 열행으로 이름난 인물들을 배출한 동방대성(東方大姓) 전주최씨(全州崔氏)의 후손이다. 고조는 만흥(萬興), 증조는 명익(命翼), 조부는 기채(其彩)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죽촌은 일찍부터 자질이 뛰어나 공부를 시작하면서는 누가 과제를 내어 독촉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독서의 방법을 터득하여 문구 하나 소홀하게 다루지 않고 정독하여 그 뜻을 끝내 알아내었다. 소년의 공부가 이처럼 진지하여 일취월장하자 그를 가르치는 선생도 그가 크게 되기를 기대하였으나 때는 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무너지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뒤섞여 있는 시기였다. 죽촌은 뜻하는 바가 있어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자 새로운 책(新書)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머지않아 모든 내용을 통달하자 마을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18세 때 박상기(朴象基), 김봉섭(金琫燮)과 함께 주산학교(舟山學校)를 설립하여 영재를 교육하는 것을 필생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배우는 학생들이 내는 월봉(月捧)으로 가까스로 생활을 유지하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배우는 생도의 수는 때로 수천을 헤아리기도 하였다. 죽촌은 가난하게 생활하였지만, 결코 이를 걱정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권을 가지고 그를 부추겼지만, 그는 결연히 말하기를,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도 자리에서 물러난 지금, 저들 원수와 하늘을 함께 지고 사는 것이야 부득이한 일이지만, 부귀(富貴)하게 사는 일을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국치(國恥)를 회복할 수 없다면 내가 어찌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국민을 가르쳐 후일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묘표를 지은 유석승은 1961년에 ?호남모의록(湖南募義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