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9132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홍윤심에게 답함 答洪允深 세모(歲暮)에 그리움은 다른 날보다 배나 더한데, 은혜로운 편지를 받으니 감사하고 위로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당시에 매우 바빠서 사의(謝儀)를 쓰지 못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걱정하며 여러 날을 보냈습니다. 모시고 살피는【侍省】 체절(體節)69)이 한결같이 높고 넉넉한지 거듭 여쭙니다.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피인(被因)'이라 하신 것은 듣건대 매우 염려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잘되어가는 것은 늘 적고 늘 역경(逆境)이 많습니다. 옛날의 성현(聖賢)도 혹 면하지 못한 바인데 하물며 이처럼 기나긴 밤과 같은 말세【衰叔】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오직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서 하늘의 처분을 들어야 할 뿐이니, 어찌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망령되이 스스로를 굽히겠습니까.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70)에 "사생(死生)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결한다면, 그 밖의 영욕(榮辱)은 알 수 있다네.【以至死生皆處了 自餘榮辱可知之】"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부분이니 어떠합니까? 존선장(尊先丈)의 문자(文字)는 저처럼 천열(淺劣)한 사람이 진실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나 다만 맺은 정의(情誼)의 소중함을 생각하면 감히 굳이 사양할 수는 없을 따름입니다.'일변(一變)'이라고 하신 것은 오직 쇠퇴한 풍속에 대해 탄식을 하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정사를 하는 절도에 있어서 부자(夫子)를 담당하게 하였다면 또한 어찌 한 번 변화하여 점차 나아지는 것이 없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부자(夫子)께서 검소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지 않는 일로 답한 것은, 곧 왕도(王道)와 패도(覇道)가 나누어지는 지점입니다.'편안한 곳을 편안히 여겨서 옮길 줄 안다.【安安而能遷】'71)라고 말한 조목 하나는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현(聖賢)의 말씀에서 어느 것이 인의(仁義)를 겸하지 않은 것이겠습니까?'정(政)'은 대강을 말한 것이고 '사(事)'는 조리입니다. 무릇 조금씩 언급해 가는 것은 진실로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을 하거나, 또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歲暮懷想。有倍他日。際承惠函。感慰曷量。但時適悤劇。未修謝儀。一念耿耿。信餘有日。更詢侍省體節。一直崇裕。馳溯不任。示中被因云云。間甚代慮。世間萬事順境常少。逆境常多。古之聖賢。或有所不免。況此衰叔長夜之時乎。惟當盡其在我之道。而聽天處分而已。豈可恐懼憂惱。妄自隕穫也。康節詩曰。以至死生皆處了。自餘榮辱可知之。此是吾儕所當勉力處。如何如何。尊先文字。以若淺劣。固不當犯手。而但以契誼之重。有不敢牢讓故耳。一變云云。非惟發歎衰俗之意。而亦言其爲政節度處。則使夫子當之。亦豈無一變之漸耶。夫子答以不儉不禮者。卽王覇之所以分也。安安而能遷云云一條。固然。然聖賢之言。其孰非兼仁義者哉。政是大綱說。事是條理。凡因及之漸。固有自大而小者。亦有自小而大者。 체절(體節) 남의 안부를 물을 때에 그 사람의 기거(起居)나 건강 상태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강절(康節)의 시 인용한 시는 〈수미음(首尾吟)〉 135수 중, 제22수의 함련(頷聯)이다. 편안한 곳을 편안히 여겨서 옮길 줄 안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재물을 모으면서 흩어 베풀 줄 알며, 편안한 것을 편안하게 여겨 옮길 줄 안다.【積而能散, 安安而能遷.】"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백후【유묵】에게 답함 答梁伯厚【維黙】 길이 멀고 인편이 드문데 이번 편지는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깊이 돌보아주심을 삼가 알았으니 감사하기 한량이 없습니다. 오랜 객지 생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또 이번 봄을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고향 동산과 친구들을 저버리는 뜻이 많습니다. 대저 이 몸이 이사【搬移】를 한 것은 비록 사계(私計)의 부득이함에서 나왔을 뿐이지만, 그대의 고을이 멀지 않으니 아침저녁으로 함께 종유하여 만년(晩年)에 의지할 곳으로 삼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풍랑이 그치지 않아 한 조각 부평초와 같은 배가 아직도 이처럼 흔들리고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그대의 형제가 몸을 닦고 힘써 공부하면서 이미 자숙(自淑)한 다음에 또 가끔씩 편지를 보내주시어 객지에서 쓸쓸하게 지내는 나의 회포를 위로해주시니, 참으로 민망합니다. 구구한 이 몸의 일은 비록 마침내 어떤 상황이 될는지 알 수가 없으나, 만약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찾을 날이 있다면 마땅히 그대와 함께 오봉(五峯)의 물과 바위 사이를 소요하면서 서로 마주하고 글을 읽으면서 여생을 보낼 것입니다. 오직 백후(伯厚) 그대는 더욱 스스로를 경계하고 검칙(檢飭)하여 우리 두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사롭게 사귈 뿐은 아니도록 하기를 바랍니다.도리(道理)는 천연적으로 본디 존재하는 것64)인데, 어찌 새로운 해석을 한다거나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의 생각으로 특별한 입장에서 새로운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문(傳文)은 증자(曾子)의 뜻을 그의 문인(門人)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자의 말씀에 특별히 '증자왈(曾子曰)'이라고 쓴 것일 뿐입니다. 路迃便稀。此書何從而至。仰認傾眷。感佩沒量。久客不歸。又此送春。其所以負我鄕園知舊之意。多矣。大抵此身搬移。雖出於私計之不得而已。惟是仁里不遠。謂可以朝夕相從。爲晩暮毗倚之地。誰知風浪未定。而一片萍帆。尙此搖搖哉。但念我友昆季躬修力學。旣以自淑又能種種寄聲。慰此羈泊寂寥之懷。可憒可憒。區區身事。雖不知竟作何狀。而若有還山尋巢之日。則當與我友逍遙相對於五峯水石之間。尋行數墨。以遺餘日也。惟伯厚益目警勅。無使吾兩人爲終始閒追逐也。道理是天然自有底。何嘗有解新不解新之可言。但人之意思特地解新。傳文是曾子之意。而門人記之。故於曾子之言。則特以曾子曰識之耳。 천연적으로 본디 존재하는 것 정자(程子; 정이(程頤))의 말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7에, "모든 사물에는 다 천연적으로 중(中)이 있어서 사람이 안배할 필요가 없다.【事事物物上皆天然有個中在那上, 不待人安排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대서일에 大暑日 납량대 짓지 않은 걸 걱정하지 않으니 不愁未築納凉臺흉금이 절로 활짝 열리게 할 계책 있네 計在胸衿自暢開푸른 숲의 새 매미소리는 맑다가 거칠고 碧樹新蟬淸乍澀저문 산의 지친 새는 갔다가 다시 오네 暮山倦鳥去還來원생은 오래 고달팠으나 애초에 병들지 않았고480) 原生久憊初非病가부는 길이 탄식했는데481) 누가 인재라 했던가 賈傅長歎孰謂才아직도 생일에 거른 술을 남겨둔 게 있으니 尙有弧辰餘瀝酒그저 벽통배482) 대신으로 삼은 것을 과시하네 聊誇替作碧筒杯 不愁未築納凉臺, 計在胸衿自暢開.碧樹新蟬淸乍澀, 暮山倦鳥去還來.原生久憊初非病, 賈傅長歎孰謂才?尙有弧辰餘瀝酒, 聊誇替作碧筒杯. 원생(原生)은……않았고 원생은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 원헌(原憲)으로 자는 자사(子思)이다. 그는 공자가 죽은 후 궁벽한 시골로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위(衛)나라 재상 자공(子貢)이 찾아왔을 때 남루한 차림으로 나갔다. 이에 자공이 "혹시 병이 들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하니, 그가 "나는 들으니, 재물이 없는 자를 가난하다 말하고 도를 배우고서도 능히 행하지 못하는 자를 병들었다고 말한다 하였습니다.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자, 자공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실언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가부(賈傅)는 길이 탄식했는데 가부는 한 문제(漢文帝) 때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를 지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시국광구책(時局匡救策)인 치안책(治安策)을 문제에게 올렸는데, 그 첫머리에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지금의 사세가 통곡할 만한 일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두 가지요, 길이 한숨을 쉴 만한 일이 여섯 가지입니다.〔臣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하였다. 벽통배(碧筒杯) 연잎으로 만든 술잔을 가리킨다.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정각(鄭慤)이 삼복(三伏) 때마다 사군림(使君林)에 가서 피서를 했는데, 항상 큰 연잎에 술 서 되를 담고 연의 잎과 줄기 사이를 비녀로 뚫어서 술이 줄기를 타고 내려오게 하고는 마치 코끼리 코처럼 구부린 줄기 끝에 입을 대고 술을 빨아 마셨던 데서 온 말인데, 이것을 벽통주(碧筒酒) 또는 벽통배라고도 한다. 《酉陽雜俎 酒食》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삼가 선사의 〈오서오경음〉에 차운하다 謹次先師《五書五經吟》 옛날에 사람 가르친 책이 진나라 재앙에 걸려 昔敎人書秦禍嬰세상에서 《소학》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네 世將小學視之輕어버이 사랑하고 어른 공경함이 근본이 되니 愛親敬長爲其本나라 다스리고 백성 편안케 함이 이로부터 이루어지네 治國安民自此成천년토록 회옹442)의 아름다운 은혜가 크니 千載晦翁嘉惠大여섯 편443)의 전집으로 법규가 밝아졌네 六篇全集法規明받아 읽고 옛 현인을 생각해야 하니 端宜受讀思前哲만년에 동자라고 칭한 사람도 있네444) 亦有稱童在晩齡이는 《소학》에 대해 읊은 것이다.《예기》 사십구 편에 섞여 묵혀졌으나 戴篇四九混歸陳이를 드러내 밝힌 건 낙민으로부터였네445) 表以明之自洛閩삼강령446)에는 종시의 도를 걸어 놓았고 三領揭來終始道팔조목447)은 성인과 현인의 극진한 곳이네 八條盡處聖賢人공부는 사물을 궁구하여 모든 이치에 통하길 구하고 功求格物通千理징험은 마음을 성실히 해 일신을 윤택하게 함에 있네 驗在誠心潤一身공자와 증자가 전수한 뜻 알고 싶다면 欲識孔曾傳受意후학을 인도하여 정신을 환기해야 하네 爲提後學喚精神이는 《대학》에 대해 읊은 것이다.춘추 시대 운수가 순곤448)에 들었으나 春秋世運入純坤홀로 햇빛과 같은 이십 편을 보았네 獨見陽光二十篇환퇴와 무숙의 침모는449) 안목이 없고 桓武侵侮無眼目안연과 증자의 덕행은 연원이 있네 顔曾德行有淵源허다하게 정사 논했으나 모두 처지 따랐고 幾多論政皆隨地각기 다르게 인을 말했으나 모두 한 하늘이었네 各異言仁總一天당시에 자상하게 가르친 예의 법도를 當日諄諄文禮敎청컨대 그대는 친히 들은 것으로 간주하게 請君看作耳聞親이는 《논어》에 대해 읊은 것이다.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길 항상 잊지 않았고 遏欲存天恒不忘오동 가꾸고 가시나무 없애길 채마밭 다스리듯 했네450) 培梧除棘若治場마음에 의리 기뻐하길 맛있는 추환처럼 하였고451) 悅心理義如芻美몸에 명예 베풀기를 휘황한 슬갑452)보다 낫게 여겼네 施體名譽勝芾煌왕도로 임금 권하니 괴이하게 여긴 사람 없었고 王道勸君人莫怪호연지기를 기른 큰 공을 누가 감당할 수 있으랴 大功養氣孰能當백리해가 진나라에 자신을 팔았다는 일453)도 밝게 분변했는데 秦奚自鬻猶明辨어찌하여 지금 선비들은 〈만장〉 편을 읽지 않는가 胡不今儒讀萬章이는 《맹자》에 대해 읊은 것이다.《중용》 책은 가장 읽기 어렵다고 하니 中庸書號最難讀완미한들 누가 즐기는 데 이를 수 있겠나 玩味誰能到悅娛육합454)과 한 마음은 이치의 창고가 되고 六合一心爲理府구경과 삼덕455)은 성실함의 요체에 있네 九經三德在誠樞장작 짊어진 당시에 중니 조부 계승하니456) 荷薪當日承尼祖순임금으로부터 천 년에 도통을 전했네 傳統千年自舜虞하학하여 끝내 현묘한 곳을 보게 되니457) 下學終看玄妙處하늘과 사람이 멀지만 서로 부합하리라 天人雖遠便相符이는 《중용》에 대해 읊은 것이다.삼백 편이 모두 어떻게 지어졌나 三百篇皆何以作성정에 근본하여 탄식을 발했네 本之情性發咨嗟말 밖에서 깊은 뜻 알아야 하니 要將言表知深意마음에서 망녕됨과 사특함을 끊었네 却向心中斷妄邪정치 성대할 적에는 존귀하게 썼으나 治盛曾爲尊貴用음악 없어진 지금은 등한한 노래로 보네 樂亡今做等閒歌그래도 근체시를 보면 유풍이 남았는데 猶看近體餘遺韻고루한 선비들 모두 겉치레만 하는구나 陋士幷歸外飾華이는 《시경》에 대해 읊은 것이다.당우삼대458) 시절에는 흉금이 컸으니 唐虞三代大胸衿후학은 지식이 넓고 깊기를 구해야 하네 後學當求識廣深전고와 훈모459)는 모두가 이 일이고 典誥訓謨皆厥事덕 어짊 성실 공경은 모두 이 마음이네 德仁誠敬總斯心글은 이제와 옛날의 때에 따라 지었으나460) 文雖今古因時作의리는 선위 정벌한 곳이 다름에서 찾을 수 있네461) 義可禪征異處尋이 책을 읽고도 정치할 줄을 모른다면 讀此不知爲政治책상에 놓고 조석으로 읊은들 무슨 소용이랴 尊丌何益暮朝吟이는 《서경》에 대해 읊은 것이다.삼백 삼천462)은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니 三百三千毋不敬하늘 이치를 사람 몸에 부쳐 드러냈네 將天理寓人身彰이미 경전 속에 공정한 마음 나타냈으나 旣經傳裏公心見간혹 주소 가운데 사사로운 뜻 담겼네 或註疏中私意藏나라와 향리에도 모두 절도가 있는데 邦國家鄕皆有節군신과 부자에 어찌 기강이 몰락하겠나 君臣父子豈淪綱한탄스럽게도 예의를 크게 잃은 지금은 堪歎大失如今日점차 짐승처럼 되는데도 상관하지 않네 轉入翔蹄認不妨이는 《예경(禮經)》에 대해 읊은 것이다.《주역》은 사람이 지었으나 오묘함은 하늘이 냈으니 作易由人妙自天제가의 주석과 설명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일까 諸家註說孰爲眞어찌 암말을 말하고 날아가는 새463)를 말했을까 胡言牝馬胡飛鳥혹 군대 동원이 이롭고 혹 큰물 건넘이 이롭네464) 或利行師或涉川부로465)는 말로 인해서 항상 이치에 부합하였고 涪老因辭常附理요부466)는 수를 미루어 신명에 통한 듯하였네 堯夫推數若通神회옹이 터득한 것을 모두 본의467)에 쏟았으니 總輸本義晦翁得읽는 자들은 여기에 나아가 연구해야 하네 讀者須宜就此硏이는 《역경(易經)》에 대해 읊은 것이다.부월의 주벌과 화곤의 포상468)을 만년토록 전하니 銊誅袞褒萬年垂난신적자가 몰래 엿보길 단념한 일이 많았으리라 亂賊應多斷竊窺대법469)은 밝게 빛나서 쉽게 볼 수 있지만 大法炳朗雖易見은미한 말은 심오하여 더욱 알기 어렵네 微言深奧更難知천착하여 사사로운 뜻을 쓸 필요가 없고 不須穿鑿用私意평순하게 본문의 내용에 의거하면 되네 且可順平依本辭무엇보다 지금 공자를 높이는 자들이 最是而今尊孔者이러한 뜻 경시하고 무얼 하려 하는가 弁髦此義欲何爲이는 《춘추》에 대해 읊은 것이다. 昔敎人書秦禍嬰, 世將《小學》視之輕.愛親敬長爲其本, 治國安民自此成.千載晦翁嘉惠大, 六篇全集法規明.端宜受讀思前哲, 亦有稱童在晩齡.【《小學》】戴篇四九混歸陳, 表以明之自洛閩.三領揭來終始道, 八條盡處聖賢人.功求格物通千理, 驗在誠心潤一身.欲識孔曾傳受意, 爲提後學喚精神.【《大學》】春秋世運入純坤, 獨見陽光二十篇.桓武侵侮無眼目, 顔曾德行有淵源.幾多論政皆隨地? 各異言仁總一天.當日諄諄文禮敎, 請君看作耳聞親.【《論語》】遏欲存天恒不忘, 培梧除棘若治場.悅心理義如芻美, 施體名譽勝芾煌.王道勸君人莫怪, 大功養氣孰能當?秦奚自鬻猶明辨, 胡不今儒讀《萬章》?【《孟子》】《中庸》書號最難讀, 玩味誰能到悅娛4)?六合一心爲理府, 九經三德在誠樞.荷薪當日承尼祖, 傳統千年自舜虞.下學終看玄妙處, 天人雖遠便相符.【《中庸》】三百篇皆何以作? 本之情性發咨嗟.要將言表知深意, 却向心中斷妄邪.治盛曾爲尊貴用, 樂亡今做等閒歌.猶看近體餘遺韻, 陋士幷歸外飾華.【《詩經》】唐虞三代大胸衿, 後學當求識廣深.典誥訓謨皆厥事, 德仁誠敬總斯心.文雖今古因時作, 義可禪征異處尋.讀此不知爲政治, 尊丌何益暮朝吟?【《書經》】三百三千毋不敬, 將天理寓人身彰.旣經傳裏公心見, 或註疏中私意藏.邦國家鄕皆有節, 君臣父子豈淪綱?堪歎大失如今日, 轉入翔蹄認不妨.【《禮經》】作《易》由人妙自天, 諸家註說孰爲眞?胡言牝馬胡飛鳥? 或利行師或涉川.涪老因辭常附理, 堯夫推數若通神.總輸本義晦翁得, 讀者須宜就此硏.【《易經》】銊誅袞褒萬年垂, 亂賊應多斷竊窺.大法炳朗雖易見, 微言深奧更難知.不須穿鑿用私意, 且可順平依本辭.最是而今尊孔者, 弁髦此義欲何爲?【《春秋》】 회옹(晦翁) 송나라 주희(朱熹)의 호인데, 흔히 다른 호인 회암(晦菴)을 존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섯 편 《소학》 내편(內篇)의 〈입교(立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ㆍ〈계고(稽古)〉과 외편(外篇)의 〈가언(嘉言)〉ㆍ〈선행(善行)〉을 말한다. 만년에……있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말한다. 그는 스승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으로부터 《소학》에서 학문을 시작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평생 《소학》을 읽으며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였다. 예기……낙민(洛閩)으로부터였네 《예기》 49편 중 42번째에 들어있던 《대학》을 정자(程子)가 표장(表章)하고 주자(朱子)가 제가(諸家)의 설을 종합 절충하여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지음으로써 유가 정통의 경전으로 위치를 굳힌 것을 말한다. '낙민'은 정주(程朱)와 같은 말이다. 낙(洛)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키고, 민(閩)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삼강령(三綱領)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 지선에 머무는 것[止於至善] 세 가지를 말한다. 팔조목(八條目) 삼강령(三綱領)에 따른 구체적 덕목인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格物],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致知],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루는 것[正心], 몸을 닦는 것[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平天下] 여덟 가지를 말한다. 순곤(純坤) 상하괘가 모두 곤(坤)으로 이루어진 괘로, 여섯 개의 효가 모두 음효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환퇴(桓魋)와 무숙(武叔)의 침모(侵侮)는 춘추 시대 송(宋)나라의 사마환퇴(司馬桓魋)가 나무를 베어 공자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일과 노(魯)나라의 대부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헐뜯은 일을 말한다. 오동……했네 맹자가 중대한 자기의 심지(心志)를 잘 길렀다는 말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지금 원예사가 오동나무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기른다면 값어치 없는 원예사가 되는 것이다.〔今有場師, 舍其梧檟, 養其樲棘, 則爲賤場師焉.〕"라고 하였다. 마음에……하였고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리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추환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心之所同然者, 何也? 謂理也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한 것을 말한다. 추환(芻豢)은 초식동물인 소ㆍ양 따위와 곡식을 먹는 짐승인 개ㆍ돼지 따위로서, 사람의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을 뜻한다. 휘황한 슬갑 《시경》 〈사간(斯干)〉에 "붉은 슬갑이 휘황찬란하니 실가를 두고 군왕이 되리로다.〔朱芾斯皇, 室家君王.〕"라고 하였는데, '주불(朱芾)'은 천자(天子) 또는 제후(諸侯)의 복색을 말한다. 백리해(百里奚)가……일 《맹자》 〈만장 상(萬章上)〉의 제9장에 보인다. 육합(六合) 천지와 사방을 가리키는 말로, 거대한 우주를 의미한다. 구경(九經)과 삼덕(三德) 삼덕은 삼달덕(三達德)을 줄여서 쓴 것으로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세 가지 덕을 가리키는바, 곧 지(智)ㆍ인(仁)ㆍ용(勇)을 이른다. 구경은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법칙으로, 몸을 닦는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뭇 신하들을 내 몸처럼 여기는 것[體群臣],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것[子庶民], 백공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곳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柔遠人], 제후들을 복종시키는 것[懷諸侯]이다. 《中庸章句 第20章》 장작……계승하니 자사자(子思子)가 할아버지인 공자의 가업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하신(荷薪)'은 장작을 등에 진다는 말로, 선업(先業)을 계승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에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아들이 등에 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 하였는데, 이를 변개하여 사용한 것이다. 하학(下學)하여……되니 인간이 행해야 할 도리를 배우면서 오묘한 천리(天理)를 통달한다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을 표현한 것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를 통달한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라고 하였다. 당우삼대(唐虞三代)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 시대와 하(夏)나라ㆍ은(殷)나라ㆍ주(周)나라 시대의 태평성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전고(典誥)와 훈모(訓謨) 《서경》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의 전(典)과 〈탕고(湯誥)〉ㆍ〈강고(康誥)〉 등의 고(誥)와 〈이훈(伊訓)〉의 훈(訓)과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의 모(謨)를 합칭한 말로 옛날 성현의 말씀, 즉 경전의 글을 뜻한다. 글은……지었으나 《서경》에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음을 말한다. 《금문상서》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 진(秦)나라의 박사였던 복생(伏生)의 구술을 받아 당시의 문자인 예서(隷書)로 기록한 것이며, 《고문상서》는 과두문자(蝌蚪文字)로 기록된 원래의 《상서》로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을 헐다가 벽 속에서 이를 찾아내었다. 의리는……있네 요(堯)가 순(舜)에게, 순이 우(禹)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한 일과 탕(湯)임금이 걸왕(桀王)을,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죽인 일 등을 말한다. 삼백 삼천(三百三千) 예(禮)의 조목이 많음을 형용하는 말로, 《예기》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가 삼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고 하였다. 예에 있어서 대강(大綱)이 되는 것을 경례(經禮)라 하고, 그 대강을 실천하기 위하여 필요한 절차에 관한 것을 곡례(曲禮)라 한다. 암말을…새 원문의 '빈마(牝馬)'는 암말로 음(陰)을 뜻하는데, 암말이 유순하고 굳건히 걸어가는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주역》 〈곤괘(坤卦)〉에 "곤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암말의 정(貞)함이다.〔坤, 元, 亨, 利, 牝馬之貞.〕"라고 하였다.소과(小過)의 초육(初六) 《주역》 〈소과괘(小過卦)〉에, "초육은 나는 새처럼 빠르니 흉하다.〔初六, 飛鳥以凶.〕"라고 하였는데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비조이흉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飛鳥以凶, 不可如何也.〕"라고 하였다. 군대……이롭네 《주역》 〈예괘(豫卦)〉에 "예는 후를 세우고 군대를 출동함이 이롭다.〔豫, 利建侯行師.〕"라고 하였으며, '큰물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利涉大川〕'라는 말은 《주역》의 괘사(卦辭)에 자주 나온다. 부로(涪老) 부주(涪州)라는 곳으로 유배를 갔던 송나라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그는 유배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서도 돌아올 때는 수염과 모발이 그전과 같았으므로 모두 그 학문의 힘에 탄복했다고 한다. 《心經附註 卷2 正心章》 요부(堯夫) 북송(北宋)의 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자이다. 일생을 낙양(洛陽)에 숨어 살면서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와 교유하였다. 《주역》에 정통하였으며, 역전(易傳)에 근거하여 팔괘(八卦)를 해석하였고, 도가 사상을 참고하여 '상수학(象數學)'을 개창하였다. 저서로 《격양집(擊壤集)》과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이 있다. 본의(本義) 남송 때 주자(朱子)가 《주역》을 풀이한 《주역본의(周易本義)》를 가리킨다. 부월(斧鉞)의……포상(褒賞) 중벌과 포상을 의미한다. 부월(斧鉞)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주로 출정하는 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장수에게 정벌과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었다. 화곤(華衮)은 고대 왕공(王公)과 귀족의 복장으로 지극한 영예를 뜻하는 말인데, 진(晉)나라 범녕(范寧)의 〈춘추곡량전 서(春秋穀梁傳序)〉에 "《춘추》의 한 글자의 칭찬이 화곤을 받는 것보다도 영광스럽고, 한 마디의 비판이 시장에서 맞는 회초리보다도 욕스럽다.〔一字之褒, 寵逾華袞之贈; 一言之貶, 辱過市朝之撻.〕"라는 말이 나온다. 대법(大法) 국가의 근본적인 법을 말한다. 娛 底本에는 "悞".《艮齋集》 卷6 〈五書五經吟〉에 근거하여 수정.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백졸402)의 〈어떤 사람에게 주다〉 시에 화운403)하다 和百拙《贈人》韻 평탄한 길을 가는 건 사람이 그윽해서니404) 履行坦道是人幽구함이 없음도 구하는 것임을 누가 알랴 誰識無求也有求정세함은 세 가닥 줄을 나누는 것 같고 精細若分三合繩고명함은 백 층 누대에 오르는 것 같네 高明如上百層樓구학을 잊지 않아야405) 참된 선비 되는데 不忘溝壑爲眞士부끄럽게 향원406)이 되어 속류들과 섞였네 羞作鄕愿混俗流끊임없이 방문하겠다는 약속 진중하니 訪問源源珍重約다만 이 일을 가지고 아득한 데 이르네 直將此事到悠悠 履行坦道是人幽, 誰識無求也有求?精細若分三合繩, 高明如上百層樓.不忘溝壑爲眞士, 羞作鄕愿混俗流.訪問源源珍重約, 直將此事到悠悠. 백졸(百拙) 최태일(崔泰鎰, 1899~?)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중(汝重)이다. 전라북도 고부(高阜) 출생으로, 전우(田愚)와 김택술(金澤述)을 사사하여 학행으로 알려졌다. 저서에 《백졸사고(百拙私稿)》 5권 3책이 있다. 화운(和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써서 답시(答詩)를 짓는 것으로, 운부(韻部)는 같으나 글자가 다르다. 원시(原詩)와 운은 같으나 앞뒤의 순서를 달리하는 것을 용운(用韻), 운과 전후의 순서가 모두 같은 것을 보운(步韻)이라 한다. 탄탄한……그윽해서니 《주역》 〈이괘(履卦) 구이(九二)〉의 "바른 길을 밟으니 탄탄하다. 마음이 조용하고 안정된 사람이라야 바르고 곧으며 길하리라.〔履道坦坦, 幽人貞吉.〕"라는 말을 변용한 표현이다. 구학(溝壑)을 잊지 않아야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가 죽더라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지사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아니하고, 용사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였다. 향원(鄕愿) 시골에서 후(厚)하고 틀림없는 듯이 행동하여, 남에게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실상을 알아보면 위선자에 불과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향원은 덕의 적이다.[鄕愿德之賊]"라는 말이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신도407)를 보고 정축년(1937) 視新都【丁丑】 하늘이 만든 계룡산은 웅장하고도 기이해 天作鷄龍雄且奇사람들은 이곳이 제왕의 터전이라 말하네 人言此是帝王基예전에 태조가 도읍지를 살펴보던408) 날에 在昔太祖胥宇日먼저 이 산에 나아가서 시귀409)에게 물었네 先就玆山問蓍龜신도라는 명칭이 지금까지 전해오는데 新都之稱傳至今주춧돌은 완연하여 어제와 같네 石礎宛然如昨時오래잖아 지운이 돌아온다고 다투어 말하니 爭道非久地運回사방에서 모여 들어서 뒤쳐질까 걱정하네 四方輻湊恐後遲양지쪽은 봄이 쉽게 이른다는 옛말 있기에 向陽易春古有語장수 재상으로 부귀 누리길 바라는 것이네 將相富貴是所希금전은 이미 얼마나 허비하였을까 金錢旣曾費多少전답 또한 척박함과 비옥함을 따지지 않네 田疇更不計瘠肥여러 종교가 분분하여 셀 수도 없고 衆敎紛紛不可數교당은 곳곳마다 있어 꿩이 나는410) 듯하네 敎室處處如彙飛묻노니 너희들 하나하나 마음 속의 일은 問爾箇箇心中事정녕 훗날에 제왕의 사부가 되는 것이리 定是他日王者師내 듣건대 풍운이 용호를 따른다411) 하니 我聞風雲從龍虎어찌 그루터기 지켜 토끼와 삵을 기다리랴412) 豈有守株待兔貍원래 하늘의 운수는 예측하기 어려운데 元來天數難預測누가 참위413)가 환히 알 수 있다고 하는가 誰云讖緯可明知지령에 대한 믿음과 운수의 빠름과 늦음은 地靈信否運早晩그 이치가 아득하여 모두 기약할 수 없네 厥理茫茫總未期슬프구나 무식하여 보잘것없는 부류여 哀哉無識庸庸流세상을 미혹하고 사기 치는 게 가증스럽네 又憎惑世挾詐欺영화 구해도 얻지 못하고 해가 이미 따르는데 求榮未得害已隨집안 망하고 가르침 흩어져도 굶주림 감수하네 家破敎散甘受飢다만 성현의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只緣未讀聖賢書분수 아닌 욕망을 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非分慾望一何痴 天作鷄龍雄且奇, 人言此是帝王基.在昔太祖胥宇日, 先就玆山問蓍龜.新都之稱傳至今, 石礎宛然如昨時.爭道非久地運回, 四方輻湊恐後遲.向陽易春古有語, 將相富貴是所希.金錢旣曾費多少? 田疇更不計瘠肥.衆敎紛紛不可數, 敎室處處如彙飛.問爾箇箇心中事, 定是他日王者師.我聞風雲從龍虎, 豈有守株待兔貍?元來天數難預測, 誰云讖緯可明知?地靈信否運早晩? 厥理茫茫總未期.哀哉無識庸庸流, 又憎惑世挾詐欺.求榮未得害已隨, 家破敎散甘受飢.只緣未讀聖賢書, 非分慾望一何痴? 신도(新都)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지역으로, 주초(柱礎)와 제방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계룡산(鷄龍山) 아래에 있다. 조선 태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이 계룡산 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를 택하여 대략 그 기지를 정하고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결국 조운(漕運)의 길이 멀다 하여 그만두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8 忠淸道 連山縣》 도읍지를 살펴보던 원문의 '서우(胥宇)'는 집터를 살펴보아 잡는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도읍지를 살펴보아 정하는 뜻으로 쓰였다. 《시경》 〈면(綿)〉에 "고공단보가 아침에 말을 달려와서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에 이르니 이에 강녀와 함께 와서 집터를 보아 잡았도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귀(蓍龜) 시(蓍)는 점을 칠 때에 쓰는 시초(蓍草)이고 귀(龜) 역시 점칠 때 사용하는 거북 껍데기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중대한 일을 잘 결단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제구양문충공문(祭歐陽文忠公文)〉에 구양수(歐陽脩)를 평하여 "공이 세상에 산 것이 66년인데 백성들은 부모가 있고 국가에는 시귀가 있었네.〔公之生於世, 六十有六年, 民有父母, 國有蓍龜.〕"라고 하였다. 《東坡全集 卷91》 꿩이 나는 대본의 '彙飛'를 '翬飛'의 오기(誤記)로 보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휘비(翬飛)'는 꿩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추녀를 뜻하는데, 화려한 건축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사간(斯干)〉에 "꿩이 날아가는 것과 같다.〔如翬斯飛〕"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에 "처마가 화려하고 높으며 날아갈 듯함은 꿩이 날아 날개를 펴는 것과 같다.〔其簷阿華采而軒翔, 如翬之飛而矯其翼也.〕"라고 하였다. 풍운(風雲)이 용호(龍虎)를 따른다 용호가 풍운을 만나 득세(得勢)하듯이,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제회(際會)함을 이른 말이다. 그루터기……기다리랴 수주대토(守株待兔)의 고사를 변용한 표현으로, 한 군데만 집착하고 변통할 줄 모른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사람이 밭을 갈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은 것을 보자,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기 바랐으나, 결국 다시 얻지 못하고 마침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韓非子 五蠹》 참위(讖緯) 미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조짐이나 그에 대한 예언을 말한다. 참(讖)은 도참(圖讖)이라고도 하며, 황당무계한 문자나 도상(圖像)을 이용한 은밀한 은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거나 길흉화복(吉凶禍福) 및 치란흥망(治亂興亡)을 예견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위(緯)는 주술적 이론을 사용하여 경전, 즉 유교경전을 해석하는 방법을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덕장의 자에 대한 설 朴德璋字說 돌은 지극히 거칠고 옥은 지극히 아름답다. 이 둘을 비교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옥을 귀하게 여기고 돌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고, 집어 주면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돌을 버리고 옥을 품지 않는 아이가 없다. 아, 옥과 돌은 외물(外物)이지만 귀천(貴賤)과 취사(取舍)의 분별을 살펴보자면 이처럼 뚜렷하다. 몸에 지닌 아름다움과 거침이 어찌 옥과 돌에 견줄 뿐이겠는가.그러나 여전히 거취(去取)를 몰라 광명보장(光明寶藏)117)을 산기슭이나 물가에 빠트려 사라지게 하고 거두어 간직하는 것은 모두 기와장이나 조약돌 같은 쓸모없는 물건이다. 어찌하여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이 외물을 사랑하는 것만도 못한가. 어찌하여 저것에는 밝으면서 이것에는 어두운가.우리 벗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취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버리지 말기 바란다. 구하기를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고 지키기를 잃을 듯이 하며 숫돌로 갈고 돌가루로 광을 내어 둥글게 다듬어 규(圭)를 만들고 잘라서 장(璋)을 만들며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의 덕을 함양하고 예악(禮樂)과 문장(文章)의 능력을 갖춘다면, 쌓아놓고 드러내지 않으며 감춰두고 팔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보물, 석상(席上)의 진보(珍寶)118)가 되기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 어찌 좋은 옥을 파는 변화(卞和)119) 같은 훌륭한 장사꾼이 그대를 위해 종묘(宗廟)에서 회동(會同)할 때나 하늘에 제사하고 상제에게 흠양할 때 특달(特達 특별히 통지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石至鹿。玉至美。比而較之。雖愚人莫不貴玉而賤石。持而與之。雖孩兒莫不投石而懷玉。嗚呼。玉石外物也。而審其貴賤取舍之分。若是昭昭。至若美鹿之存乎身者。則奚但玉石之比而已。然而猶且不識去取。使光明寶藏。淪沒於山之崖水之濱。而所以收拾而弆藏者。擧皆瓦礫無用之物也。豈愛身不如外物乎。何其明於彼而暗於此耶。願我友勿以衆好而取之。勿以衆惡而棄之。求之如不及。守之如將失。治之以礛。洗之以磢。圓而爲圭。折而爲璋。涵仁義忠信之德。具禮樂文章之用。則雖蘊而不露。藏而不衒。不害爲天下之寶。席上之珍。又安知無良玉善賈如下和者。爲之特達於宗廟會同祀天饗帝之間耶。 광명보장(光明寶藏) 광명은 불지혜(佛智惠)를, 보장은 귀하게 간직한 보물을 뜻한다. 주자는 이를 차용하여 "학자는 공부할 때 반드시 분발하여 물건을 잃은 사람이 도로 찾기 전에는 안타까워하며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자신이 소유한 하나의 커다란 광명보장(光明寶藏)을 남에게 도둑맞았다면 마음에서 그냥 버려두고 말겠는가. 반드시 훔친 사람을 추적하여 찾아내고야 만다.[學道做工夫, 須是奮厲警發, 悵然如有所失, 不尋得則不休. 如自家有一大光明寳藏被人偷將去, 此心還肯放捨否? 定是去追捕尋捉得了方休.]"라고 하였다. 이후에 본성을 뜻하게 되었다. 《朱子語類 卷121 訓門人7》 석상(席上)의 진보(珍寶)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유자는 자리 위에 진귀한 보배를 놓고서 초빙되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변화(卞和)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산중에서 옥박(玉璞)을 얻어 왕에게 바쳤다가 좌우의 발목을 모두 잘리고 원통해서 울었다는 '변화읍벽(卞和泣璧)'의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和氏》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사헌부 감찰 강공 묘지명 司憲府監察姜公墓誌銘 공의 성은 강씨(姜氏), 휘는 필영(弼永), 자는 찬서(贊瑞)이다. 세계(世系)는 진주(晉州)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 국자 박사(國子博士) 계용(啓庸)의 후손이다.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을 전해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중엽에 이르러 봉람(鳳覽)이 있으니, 호는 석포(石浦)로, 도승지(都承旨)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고조 택보(澤輔)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증조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태형(泰衡)으로, 호는 도능암(道能庵)이다. 조부는 좌승지에 추증된 휘복(彙稪)이다. 부친은 호조 참판에 추증된 학조(鶴照)이다. 모친은 해남 윤씨(海南尹氏)로, 윤규하(尹奎夏)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3월 30일에 부(府)의 유치리(有治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유복자로, 차츰 자라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기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길러 주신 것을 생각하여 어렵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심력(心力)을 다 기울였다. 8세때 땔나무를 팔아 등에 쌀을 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만일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가 있으면 시냇가의 나물을 캐고 쌀뜨물을 구걸하여 국을 끓여 올렸다. 이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 슬프게 소리내어 우니 이웃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겨 매양 쌀독이 비면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가 명하면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순종하였고, 어머니에게 병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 지극히 성실하고 측달한 마음은 천성(天性)에 근본하여 행위에 드러났다. 남들보다 뛰어난 행실이 많았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혀를 차며 찬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훗날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밀양 박씨(密陽朴氏) 홍준(弘俊)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박씨는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년에 이르러 집안 살림이 조금 넉넉해졌다. 모친상을 당해 온갖 의례와 절차는 예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하나하나 의례와 절차에 따라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한번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통한으로 여겨 태복(稅服)11)을 입고자 하다가 선유(先儒)의 설을 보고 마침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래도 기일이 되면 지성으로 애통해하여 소복(素服)을 입고 소식(素食)을 함으로써 종신토록 상을 치른다는 뜻을 부쳤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 매우 독실하여 글방을 짓고 서책을 소장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휴식하는 곳으로 삼고, 스승을 엄선하고 벗을 가려 사귀게 하여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아주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무도한 무리 들이 난을 일으키자12) 자손을 경계하여 신신당부하고 엄히 신칙하여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소모사(召募使)가 듣고서 가상하게 여겨 정문(旌門)을 세워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서 문에 '의문(義門)'이라고 썼다.공은 기개가 높고 타고난 성품은 낙천적이었다. 내외 친족으로부터 원근의 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겁게 은덕을 베풀었으니, 차마 실정이 아닌 것으로 속이지 않았고 감히 의롭지 못한 짓을 하지 않았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고, 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아들은 인형(仁馨), 예형(禮馨), 의형(義馨), 지형(智馨)이고, 손자는 진섭(晉燮), 병섭(井燮), 봉섭(鳳燮)이다. 이외의 손자들은 어리다. 병신년(1896, 고종33) 2월 26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67세이다. 유치리(有治里) 예상등(禮尙嶝) 오좌(午坐)에 장사 지냈다.아, 진섭은 나와 교유한 지 몇 년 되었다. 그는 영특하며 삼가고 조심하여 공이 살아 계실 때 큰 사랑을 받았는데, 공이 별세하고 상례를 마치기 전에 또 이렇게 요절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의형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니,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기쁜 마음으로 공경하고 삼갔으니 怡愉洞屬효성스러운 사람이라네. 孝子之人질박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니 質實勤儉선배의 자격을 갖춘 부류일세. 先進之倫가르침에는 오로지 경전을 중시하였으니 敎重一經훌륭한 자제들 참신하도다. 蘭玉鮮新예상의 산기슭에 禮尙之麓천추에 향기로운 제물을 올리네. 芬苾千春 公姓姜。諱弼永。字贊瑞。系出晉州。高麗博士啓庸后。文學仕宦。世傳煒燁。爲東方巨族。至中葉。有鳳覽。號石浦。都承旨弘文提學。丙子亂。倡義旅。高祖澤輔。文章名世。曾祖贈司僕寺正。泰衡。號道能庵。祖贈左承旨彙稪。考贈戶曹參判鶴熙。妣海南尹氏奎夏女。以純廟庚寅三月三十日。生公于府之有治里。公以遺腹孤孩。稍長而痛嚴顔之未逮。念慈育之劬勞。艱難拮据。備極心力。八歲賣薪負米。以供親旨。如有未繼。則采溪澗之毛。乞浙米之汁。作羹以進。因不勝悲泣成聲。隣理憐之。每邁空匱。多有助之者。親有命。如恐不及。親有疾。涕泣不離。側其至誠惻怛。根於天性而著於施爲。多有出人之行。聞者無不嘖嘖歎賞曰。此兒其必有後。委禽密陽朴氏弘俊女。朴氏孝養厥姑。夙夜靡懈。至中身。家力稍饒。遭內艱。凡百儀節。問于識禮處。一一遵循。俾無遺憾。嘗以早違嚴庭爲至恨。欲稅其服。見先儒說。而遂不果行。遇忌辰。至誠哀痛。素服素食。以寓終身之喪。敎子孫甚篤。結塾儲書以資其修息。擇師取友以正其趨向。甲午匪類之亂。戒子孫。申申嚴勅。俾不染跡。召募使聞而嘉之。旌門稱賞。因書門扉曰義門。公氣宇軒昂。天性樂易。自內外族戚至遠近朋知。皆歡然有恩。不忍以非情欺之。不敢以非義加之。戊子除司憲府監察。又陞嘉善。男仁馨禮馨義馨智馨。孫晉燮井燮鳳燮。餘幼。丙申二月二十六日終。享年六十七。葬有治禮尙嶝午坐。嗚呼。晉燮從余遊有年矣。其穎悟謹勅甚爲公當日之鍾愛。誰知公歿未終喪。而又此夭逝耶。義馨持家狀。屬余以誌諸幽道者。嗚呼。豈忍辭。銘曰。怡愉洞屬。孝子之人。質寶勤儉。先進之倫。敎重一經。蘭玉鮮新。禮尙之麓。芬苾千春。 태복(稅服) 세월이 이미 지난 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추후에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대공(大功) 이상의 복은 태복을 하고 소공(小功)은 가벼운 복이라 하여 태복을 하지 않았다. 《禮記 檀弓上》 갑오년……일으키자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겸와 민공 묘지명 謙窩閔公墓誌銘 호남은 문헌(文獻)이 있는 곳으로 시례(詩禮)와 행의(行義)로 저명한 가문이 많은데 겸와(謙窩) 민공(閔公)의 가문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공의 휘는 삼현(三顯), 자는 중덕(仲德)이니, 의암(義庵) 휘 회삼(懷參)의 후손으로, 사월헌(沙月軒) 휘 상동(相東)의 손자이며, 교채와(咬菜窩) 선생 휘 백우(百)의 둘째 아들이다. 선생은 송 문간공(宋文簡公)을 스승으로 섬겼고, 문장과 경술(經術)이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받았으며, 저술로 《심경집해(心經集解)》, 《홍범수해(洪範數解)》, 《주서보주(朱書補註)》가 세상에 전한다. 모친은 나주 임씨(羅州林氏)로, 임세진(林世鎭)의 따님으로, 승지 임붕(林鵬)의 후손이다. 법도 있는 가문의 후손으로 타고난 성품이 곧고 얌전하여 여자로서의 덕성을 매우 잘 갖추어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공은 어려서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따라 뜻을 세워 학문하여 백씨(伯氏) 학생공(學生公), 종형(從兄) 진사공(進士公)·참판공(參判公)과 함께 나란히 수업을 받아 명성이 자자하였으니, 사람들이 삼봉팔용(三鳳八龍)13)에 견주었다. 장성하여서는 홍매산(洪梅山 홍직필(洪直弼)), 기노사(奇蘆沙 기정진(奇正鎭)) 두 선생의 문하에서 노닐면서 강론하고 논변하여 더욱 스스로 확충하였다. 오서오경(五書五經)으로부터 염락(濂洛)14)의 여러 서적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두루 폭넓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의리의 귀착점을 넓혀 마음을 보존하고 자신을 단속하며 세상일에 응수하고 외물에 응함에 확고하게 이루어진 규범이 있어 평탄히 행하여 발과 눈이 모두 이르고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여 덕기(德器)가 이루어졌으니, 뭇사람들과 아주 달랐다.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는 군주를 섬기는 계제(階除)이니 선비 된 자는 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매양 한가한 날이면 공령(功令)과 근체(近體)의 문장에 힘을 기울이니, 문사가 뛰어나 당시에 칭송을 받았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였지만 예부시(禮部試 대과)에서 낙방하였는데 언제나 당락(當落)에 개의치 않았다. 어떤 사람이 뇌물을 주어서 유사(有司)에게 청탁하기를 권유하니, 공이 말하기를 "당락은 하늘에 달렸으니, 내가 어찌 위험한 짓을 하여 요행을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일찍이 춘첩시(春帖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운명에 달린 빈천은 버릴 수 없고, 분수가 아닌 부귀는 구할 수 없다.[有命貧賤不可去, 非分富貴不可求.]"라고 하였다. 매양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단정히 앉아 칠서(七書) 가운데 한 책 및 정자와 주자의 책, 〈이소경(離騷經)〉,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의 글을 돌아가며 암송하였다. 물러나서는 여러 종형제와 책상을 마주하여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종일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겸손으로 자기를 단속하였다. 친족에게는 은애로 대우하고 벗에게는 신의로 대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사람이 되는 도리가 어떠한지, 사람이 독서하는 의미가 어떠한지를 알려 주었는데 곡진하고 간절하여 듣는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이에 경전을 가지고 찾아오는 등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일찍이 말하기를 "근세 시속의 풍조가 크게 무너졌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주역》〈규괘(睽卦)〉 상(象)에 '군자가 보고서 같으면서 다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남이 야박하게 하면 나는 후하게 하고, 남이 탐욕을 부리면 나는 청렴하게 하고, 남이 속이면 나는 정도(正道)로 하고, 남이 사사롭게 하면 나는 공적으로 하고, 남이 사치하면 나는 검소함으로 하고, 남이 게으르면 나는 부지런함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를 일일이 자신에게 돌이켜 적용한다면 아마 이욕만 넘실대는 세태에서 저절로 벗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세의 주기설(主氣說)에는 조금의 의혹도 없다. 가령 중화(中和)에 대해 말해보자면 중(中)은 미발(未發)의 이(理)인데 이의 체(體)이고, 화(和)는 이발(已發)의 이(理)인데 이의 용(用)이다. 만일 화(和)를 기(氣)로 여기는 것이 근일의 의론과 같다면 이(理)와 사(事)가 각각 양절(兩截)이 되고 분수가 구분되어 기(氣)보다도 중하게 되어 버리니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였다.무자년(1888, 고종25) 10월 6일에 별세하였으니, 태어난 을해년(1815, 순조15)으로부터 74년이 된다. 현(縣)의 원동(院洞) 괘등등(掛燈嶝)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충주 박씨(忠州朴氏)로, 박효조(朴孝祖)의 따님인데, 눌재(訥齋) 선생 박상(朴祥)의 후손이다. 온순하고 자혜로워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학(), 전(塼)이고, 딸은 이기전(李基琠), 이용헌(李龍憲), 유영주(柳永主)에게 각기 출가하였다.아, 여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이 말하기를 "안으로 어진 어버이와 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과 벗이 없으면서 성공하는 자가 드물다."라고 하였다. 지금 교채와(咬菜窩) 선생 같은 어진 아버지가 있고, 임 부인(林夫人) 같은 어진 어머니가 있고, 진사공(進士公)과 같은 어진 형제가 있고, 매산(梅山)과 노사(蘆沙) 같은 어진 스승과 벗이 있으니 비록 성공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갈고닦고 침잠하여 당대에 훌륭한 유자가 된 이유이다. 그런데 도(道)가 시대와 어긋나 시험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한스러워하였다. 그러나 유풍과 여운은 집안에서 계승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져 먼 후대에서도 징험되고 법식이 될 것이니, 어찌 당대의 실의(失意)와 득의(得意)를 가지고 실망하거나 의기양양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평리(坪里)에서 참판공에게 인사드리고 나아가 사촌(沙村)에서 공에게 인사드렸는데, 그 기상이 단정하고 엄정하며 행동거지가 온화하고 점잖은 것을 보았고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 옛날 현인의 법언(法言)와 격론(格論)이어서 완전히 심취하였다. 물러난 뒤에 다시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통한은 비록 간절하지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공의 장자 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순서를 잡아서 기록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복천의 남쪽 福川之南산수가 훌륭하네. 山明水清덕 있는 가문에 인재 모이고 德門聚星온화한 기운 정기를 모으네. 和氣毓精교채와(咬菜窩)는 후손이 있고 菜窩有胤사애(沙厓)는 어진 형이었네. 沙厓難兄선대의 훌륭함에 영향을 받았고 擩染箕裘전범을 계승하였네. 似述典刑초야에서 한가롭게 지냈으나 婆娑邱園감추어진 문채 은연중에 드러났네. 絅錦闇章훌륭한 운치 빼어난 자취를 偉韻逸躅잊을 수 있겠는가. 俾也可忘괘등등(掛燈嶝) 기슭에 掛燈之麓의복을 갈무리하였네. 衣履是藏봄가을로 향기로운 제수 올리니 春秋芬苾자손들이 번성하네. 螽斯繩繩 湖南文獻之地。以詩禮行義。著爲名家者多矣。而謙窩閔公之家。其一也。公諱三顯。字仲德。義庵諱懷參后。沙月軒諱相東孫。咬菜窩先生諱百次子。先生師事宋文簡公。文章經術。望重一世。所著有心經集解。洪範數解。朱書補註。行于世。妣羅州林氏世鎭女。承旨鵬后。以法家遺裔。天資貞靜。壺儀閨範。有女士風。公自幼。遵循庭誨。立志爲學。與伯氏學生公。從兄進士公。參判公。共方連業。聲譽譪蔚。人以三鳳八龍擬之。及長。遊於洪梅山奇蘆沙兩先生之門。講討問辨。益自展拓。自五書五經至濂洛群書。無不淹貫該洽。以博其義理之歸。以之存心行已。以之酬世應物。的有成規。而坦然由之。足目俱到。心口相應。德器成就。大異衆人。嘗曰。料擧是事君階除。爲士者所不可廢。每以餘日。着力於功令近體之文。文詞斐然。見稱一時。屢魁鄕解。屈於禮部。未嘗以得失關心。或勸行關節以干有司。公曰。得失天也。吾豈行險而徼幸者耶。嘗題春帖詩曰。有命貧賤不可去。非分富貴不可求。每日夙興端坐。輪誦七書中一書及程朱書離騷經歸去來辭等書。退而與群從昆季。對床硏討。終日靡懈。以誠敬存心。以謙恭持已。遇族戚以恩愛。待朋友以信義。敎人必告所以爲人之道何如。人所以讀書之意何如。諄諄懇懇。聞者感服。執經踵門。信從日衆。嘗曰。近世俗尙大壞。誠可痛歎。易暌之象。君子以同而異。如人以薄我以厚。人以貧我以廉。人以譎我以正。人以私我以公。人以奢我以儉。人以惰我以勤。如此之類。一一反之。庶幾自援於滔滔矣。又曰。近世主氣之說。此非細誤。如言中和。則中是未發之理而理之體也。和是已發之理而理之用也。若以和爲氣。如近日之論。則理事各成兩截。而分數段落。歸重於氣。其可乎。戊子十月六日考終。距寅降乙亥爲七十四。葬縣之院洞掛燈嶝乾坐原。配忠州朴氏孝祖女。訥齋先生祥后。溫順慈惠。克有婦德。二男三女。嶨。塼。李基琠李龍憲柳永主。嗚呼。呂榮公曰。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而能有成者少矣。今有父之賢如咬菜窩先生。母之賢如林夫人。兄弟之賢如進士公。師友之賢如梅山蘆沙。則雖欲其無成得乎。此所以磨礱沈灌以成一世之偉儒也。道與時違。未有所試。識者茹恨。然遺風餘韻。述之在家。傳之在人。足可以徵式於百世。豈以一時之詘伸爲低仰耶。余嘗拜參判公於坪里。進而拜公於沙村。見其氣象端嚴。動止雍容。終日語皆。古賢哲法言格論。充然心醉。退未再造。而公已辭世矣。靡逮之恨。雖切何補。公長子嶨。奉家狀以請幽道之銘。謹据狀而爲之序次焉。銘曰。福川之南。山明水清。德門聚星。和氣毓精。菜窩有胤。沙厓難兄。擩染箕裘。似述典刑。婆娑邱園。絅錦闇章。偉韻逸躅。俾也可忘。掛燈之麓。衣履是藏。春秋芬苾。螽斯繩繩。 삼봉팔용(三鳳八龍) 당(唐)나라 설원경(薛元敬)이 젊어서 숙부 설수(薛收), 족형(族兄) 설덕음(薛德音)과 같이 문재(文才)로 이름이 났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하동(河東)의 삼봉(三鳳)이라고 하였다. 《舊唐書 薛收列傳》 동한(東漢) 때 순숙(荀淑)에게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왕(荀汪),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전(荀專) 등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나다고 이름이 나서 당시 사람들이 순씨팔룡(荀氏八龍)이라고 불렀다. 《後漢書 荀淑列傳》 염락(濂洛)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 등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을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농헌 권공 묘지명 聾軒權公墓誌銘 권씨(權氏)는 본래 김씨(金氏)이니 바로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이다. 휘 행(幸)이 있었으니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운 공으로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대대로 문벌 좋은 가문으로 이름나 우리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휘 단(漙)이 있으니, 호는 국헌(菊軒),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기를 건의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성리학은 그가 창도하여 밝힌 것에 힘입었다. 고조는 통덕랑(通德郞) 진성(震成)이고, 증조는 덕의(德義)이고, 조부 동의(東誼)는 호가 양졸당(養拙堂)인데, 한평생 남몰래 베푼 은덕(恩德)이 있었다. 부친은 종수(宗燧)이다. 처음에 청주 한씨(淸州韓氏) 한택기(韓宅基)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후취(後娶)는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유한정(柳漢鼎)의 따님이다.공은 순조(純祖) 갑자년(1804, 순조4) 12월 16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품이 빼어났고, 성격과 도량은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8세에 부친상을 당해 사모하는 마음이 망극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고기 잡고 땔나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어느 날 마을의 글방을 지나다가 아이들이 독서하는 것을 보고 모친에게 고하여 나아가 배우고자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네가 가서 배우면 집안일은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낮에 일하고 저녁에 독서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부인이 허락하였다. 이날 밤에 즉시 글방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니, 글방의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소학(小學)》을 주었다. 이로부터 엄격하게 학습 과정(課程)을 세워 밤마다 빠뜨림이 없었고, 해가 뜨면 일어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고 땔나무를 등에 진 채로 암송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그 학업에 진전이 있어 공부만 하는 동학보다 나았다. 《소학》을 다 읽었지만 오히려 반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혹 다른 책을 배우기를 권유하자, 공이 말하기를 "많은 책을 보아 정밀하게 익히지 못하느니 적은 책을 보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 낫다. 또 이는 사람 노릇을 하게 하는 책이니 평생 읽더라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할까 근심스러운데, 어찌 구두(句讀)를 대략 이해하고 갑자기 다 읽었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20세가 넘어도 혼인을 서두를 생각을 하지 않자, 혹자가 너무 늦은 것을 염려하니, 공이 말하기를 "고인(古人)이 30세에 가정을 이룬 것과 비교하면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24세에 비로소 하동 정씨(河東鄭氏) 집안과 혼인하였으니, 바로 정효렬(鄭孝烈)의 따님이다. 어느 날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옛날에 가난한 자 중에는 점을 쳐 주고 돈을 받거나 약을 팔아서 생계를 꾸린 자가 있었다.15) 이는 비록 선비의 평소 일이 아니지만 역시 가만히 앉아서 독서하는 것이니, 땔나무를 하고 품팔이를 하는 것보다 매우 편할 것이다."16)라고 하고, 마침내 간간이 의학(醫學)을 섭렵하였다. 한편으로는 자급하려는 계책이고 한편으로는 널리 구제하려는 계책이었으므로 다 죽어가는 목숨을 살리고 음덕을 쌓아 전후로 대비가 많았다. 일찍 부친을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어머니를 섬길 적에 정성과 힘을 다하였으니, 몸을 편안케 해 주는 물건을 두루 제공하지 않음이 없었다.모친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을 적에는 거의 노쇠한 나이였는데도 예법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훼손하는 데 이르렀다. 어느 날, 허약해져서 병들었는데, 아들들이 고기를 올려 먹기를 권유하니, 공이 말하기를 "목숨을 상하게 하는 것이 실로 불효이다. 그러나 나의 병은 목숨을 상하게 할 염려가 있지 않으니, 어찌하여 좋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어 예법을 무너뜨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곳은 관로(官路) 근처이고 점사(店肆)와 가까웠다. 마침내 천운산(天雲山)에다가 집을 지어 만년에 한가롭게 지낼 계획을 세웠다. 이윽고 조공 병만(曺公秉萬)도 와서 이웃이 되어 밤낮으로 교유하며 서로 매우 즐겁게 지냈다. 뜰에는 다른 물건이 없고 오직 떨기로 자라는 국화 몇 이랑만 있었다. 매양 날씨가 추워지는 늦가을에 꽃이 만발하면 문득 배회하며 시를 읊조리며 그지없이 사랑스러워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도정절(陶靖節 도잠(陶潛))이 국화를 몹시 사랑한 뜻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곳 가까이에는 운림(雲林)과 천석(泉石)의 승경지가 많아서 매양 나막신 신고 지팡이 짚고서 종일 오르내리며 아득히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몸가짐이 매우 엄격하여 거만한 적이 없었고, 사람을 대할 적에는 매우 공경하여 농담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는 아무리 한량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도 공을 보면 반드시 자신을 단속하였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우선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사기(史記)》를 우선하여 문장을 짓는 계책을 본받지 않았다. 이어서 경계하여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며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고 실제 일이니,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문장을 짓고 부귀해지기를 구하는 것은 그다지 돌아볼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음식은 배고픔을 면할 만큼만 먹고, 의복은 추위를 가릴 만큼만 입으면 된다. 화려하고 진귀한 물건은 다만 덕을 잃고 화를 초래할 뿐이다. 더구나 입는 것은 법복(法服)이 아니고 사용하는 것은 토산품이 아닌 경우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성격은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혹 저술한 것이 있으면 번번이 자질구레한 시문은 던져 버리고 이르기를 "고인의 저술에 갖추어져 있다. 많으면 남고 되풀이하면 어지럽다. 몸소 실행하여 실제에 힘쓰라."라고 하였다. 겉을 보기 좋게 꾸미거나 화려한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갑술년(1874, 고종11)에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을해년(1875) 9월 24일에 별세하였다. 현(縣)의 남쪽 호동(壺洞) 앞 산기슭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6인이니 종익(鍾翼), 종우(鍾禹), 종모(鍾謨), 종길(鍾吉), 종열(鍾悅), 종규(鍾規)이고, 손자는 7인이니 홍수(弘洙), 인수(寅洙), 학수(學洙), 갑수(甲洙), 용수(龍洙), 만수(萬洙), 익수(益洙)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춘식(春植)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아, 춘식은 나와 교유한 지 몇 해 되었는데, 빼어나고 삼가함을 보니 참으로 법도 있는 가문의 유풍이 있었다. 이는 그 신령한 지초(芝草)와 단맛의 샘물은 실로 응당 원인이 있고,17) 석과(碩果)의 종자(種子)18)가 되는 까닭이 또 처음부터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과 인을 쌓았지만 積善累仁보답을 받지 못했네. 不食其報후손에게 남겨주었으니 以遺後昆남은 경사 널리 미치리라. 餘慶斯普 權本金氏。卽新羅宗姓也。有諱幸。佐麗太祖有功。賜姓權。世著勳閥。爲東方巨族。有諱漙。號菊軒。諡文正。嘗以朱子四書集註。建白刊行。東方性理之學。其倡明之力也。高祖震成通德郞。曾祖德義。祖東誼號養拙堂。世有隱德。考宗燧。初娶淸州韓氏宅基女。系娶高興柳氏漢鼎女。公以純祖甲子十二月十六日生。天姿挺異。性度寬仁。八歲遭外艱。孺慕罔極。家貧漁樵供母。事無鉅細。必稟而行。一日過村塾。見群兒讀書。告於母夫人。欲孰學。夫人曰。汝若就學。家務委誰。對曰。晝而幹務。夜而讀書何如。夫人許之。是夜卽就塾請敎。塾師奇之。授以小學書。自是嚴立課程。逐夜無闕。日出而作。帶經而鋤。負薪而吟。未幾何。其業之進。勝於同學之專業者。讀小學訖。猶循環不已。或勸授他書。公曰。多之而粗。不若寡之而精。且此書是做人樣子。平生讀之。猶患不給。豈可粗解句讀而遽云了業耶。年踰二十。未嘗有汲汲營娶之意。或慮其太晩。公曰視古人三十而有室。不其太早乎。二十四始委禽於河東鄭氏之門。卽孝烈之女也。一日喟然歎曰。古之貧者。有賣卜賣藥以資其生者。此雖非士者雅業。其爲坐而讀書。則便於負薪行傭遠矣。遂間涉醫學。一以爲自給之計。一以爲廣濟之策。其保活殘命。積累陰德。前後備多。嘗恨早孤。未得逮養。事慈幃。罄竭誠力。便身之物。無不周給。及其遭故。年幾衰艾。而致毁踰禮。一日羸疾作。諸子進肉物。勸之食。公曰。傷生固爲不孝。然我疾非有傷生之慮。則何爲而恣食珍羞以壞禮防乎。所居傍官路。近店肆。遂卜築於天雲山中。爲晩年養閒之計。己而曺公秉萬。亦來結隣。日夕遊從。相得甚歡。庭除之間無他物。惟有嚴菊數畦。每當寒天晩節。開花燭漫。輒徘徊吟哦。愛之無己。因曰。吾今而後。知陶靖節偏愛之意也。近居多雲林泉石之勝。每一笻一屐。竟日遊陟。悠然忘歸。持身甚嚴。未嘗箕踞。接人甚敬。未嘗戱謔。是以鄕里間。雖號慢浪之人。見公必加斂飭。敎子孫。必以小學爲先。不效時人先史記作文詞計。因戒之曰。事親敬長。修身謹行。此是人生本分實事。吾之所望於汝等者也。若其作文章求富貴。甚非所願也。又曰。食取克腹。衣取蔽寒。若華嚴珍。怪之物。適以喪德而速禍。況所着非法服所用非土物乎。汝等戒之。性不好著述。或有所述。輒投之散墨曰。古人之述備矣。多之則剩反之則亂。其躬行務實。不求外華。類如此。甲戌以壽陞通政。乙亥九月二十四日考終。葬于縣南壺洞前麓酉坐原。男六人。鍾翼鍾禹鍾謨鍾吉鍾悅鍾規。孫男七人。弘洙寅洙學洙甲洙龍洙萬洙益洙。曾玄以下不盡錄。曾孫春植奉家狀。託以幽道之銘。嗚呼。春植從余游有年。見其秀爽謹飭。儘有法家餘風。此其靈芝醴泉。固應有自。而所以爲碩果種子者。又未始不在於此也。銘曰。積善累仁。不食其報。以遺後昆。餘慶斯普。 점을……받으며 군평(君平)이라는 자(字)로 더 잘 알려진 전한(前漢)의 술사(術士) 엄준(嚴遵)은 촉 땅 성도(成都) 시내에서 점복(占卜)으로 생활하면서 하루에 100전(錢)만 벌면 문을 닫고 방 안에 들어앉아 《노자(老子)》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고 한다.《漢書 王貢兩龔鮑傳》후한(後漢)의 한강(韓康)은 산에서 약초를 캐 장안(長安)에서 팔다가, 약을 사러 온 여인이 자기 이름을 거론하자, 숨어 살려는 본의가 어긋났다며 패릉산(霸陵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고 한다.《後漢書 逸民列傳 韓康》 이는……것이다 《擊蒙要訣》 〈處世章〉에 "과거 공부가 비록 이학(理學)과는 다르나 역시 앉아서 글 읽고 글 짓는 것이다. 농사짓고 품팔이하고 쌀을 등에 지는 것보다는 백 배 이상 편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신령한……있고 좋은 조상이 있어야 좋은 자손이 있다는 뜻이다. 옛말에 "신령한 지초(芝草)와 단맛의 샘물은 반드시 뿌리와 근원이 있다."라고 하였다. 석과(碩果)의 종자(種子) 평생에 자신의 복을 다 누리지 않아 자손이 그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주역》〈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음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허물리라.[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죽정 문공 묘지명 竹汀文公墓誌銘 관산부(冠山府) 유치방(有治坊) 작소동(雀巢洞)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간방(艮方 동북방)을 등지고 곤방(坤方 서남방)을 향한 것이 바로 고(故) 효자 죽정(竹汀) 문공(文公)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세월이 오래 되었지만 묘지명이 없었다. 어느 날 후손 진호(振浩)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가천(佳川)에 있는 나의 집으로 찾아와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대저 훌륭한 글이 널리 알려져 백세토록 잊히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도리어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러한 사람에게 부탁한단 말인가. 다만 쇳조각과 흩어진 구슬이 유실될까 염려하여 제때에 수습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갈고 다듬어 빛나게 하는 것은 조만간에 저절로 합당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삼가 살피건대, 공의 성은 문씨(文氏), 휘는 종현(宗鉉), 자는 국현(國賢)이니, 순묘(純廟) 정축년(1817, 순조17) 1월 29일에 대리(大里)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집안이 대대로 너무나 가난하여 재물이 될 만한 것이 없어 농사짓고 고기 잡고 나무하며 힘든 일도 부지런히 하여 부모님을 봉양하되 몸에 맞거나 입에 맞는 것이면 전부 바치지 않음이 없었다. 한가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방에 가서 먹을 갈고, 글을 읽고 외우며 연구하여 지식을 쌓아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다. 부모님을 간병할 적에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끊어지려는 목숨을 살렸으며, 거상(居喪)할 적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고, 벗들은 그 행실에 탄복하여 여러 번 추천하려는 의론이 있었다. 공이 듣고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설령 탁월한 행실이 있더라도 본래 자식의 본분이니, 실로 구구하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내가 한 바는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없는데 도리어 이렇게 추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하늘과 사람을 속이는 것이니 너무나 큰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힘껏 거절하였다.금상(今上) 을유년(1885, 고종22) 9월 27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였으니, 태어난 정축년으로부터 69년 후이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 행장을 지어서 관아에 보고하고, 이어서 암행 어사에게 보고하고 또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문씨(文氏)는 세계가 남평(南平)에서 나왔다. 신라(新羅) 무성공(武成公) 휘 다성(多省)이 시조가 된다. 고려 때 이르러 휘 익점(益漸)이 있으니,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다. 본조에 들어와 도승지를 지낸 휘 화(和)가 있고, 호가 풍암(楓庵)인 휘 위세(緯世)가 있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성광(聖光), 영복(永福), 사길(思吉), 기보(基普)는 고조와 증조 이하 4대의 휘이다. 배위는 장흥 위씨(長興魏氏)로, 위익조(魏益祚)의 따님이다. 묘소는 중군봉(中軍峯) 해좌(亥坐)의 언덕에 있다. 모두 5남 2녀이니, 아들은 진호(振浩), 욱호(郁浩), 면호(勉浩), 병호(丙浩), 관호(寬浩)이고, 딸은 김지현(金之鉉), 윤제신(尹濟臣)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조용히 수양하여 홀로 행하였으니 潛修獨行겸손함이 더욱 드러나네. 撝謙彌彰내 명문을 지어 我作銘詩무덤에 새기네. 用誌斧堂 冠山府有治坊雀巢洞。有崇四尺。背艮而向坤者。卽故孝子竹汀文公衣履之藏也。歲久無誌。一日遺胤振浩。持家狀。過佳川敝廬。屬余文之。夫立言揄揚。百世不朽。顧何等重事。而乃於淺淺膚末如此生者見託耶。但零金散璧。慮有遺落。其收拾之不可不以時。而若其琢磨淬礪。出治光彩。則早晩自有其人焉。謹按。公姓文。諱宗鉉。字國賢。以純廟丁丑正月二十九日。生於大里第。天姿淳實。幼有至行。家世貧甚。無以爲資。耕稼漁樵。服勤就養。便身適口。無不畢給。暇日餘力。入塾行墨。諷誦硏究。蘊蓄該洽。侍疾血指。以甦旣絶。居喪過毁。幾於傷生。隣里感其孝。朋友服其行。累有剡薦之議。公聞之歎曰。設有卓絶之行。自是人子常分。固不爲區區干聞。況我之所爲。無一毫近似。而乃有此擧耶。此欺天誣人。罪有甚焉。遂力拒之。今上乙酉九月二十七日。卒于正寢。距丁丑懸弧爲六十九歲矣。於是鄕人狀其行。聞於官。繼而聞於繡衣。又聞於道伯。文氏系出南平。新羅武成公諱多省爲始祖。至麗朝有諱益漸封江城君。入我朝。有諱和都承旨。有諱緯世號楓庵。皆其顯祖也。聖光。永福。思吉。基普。高曾以下四世諱也。配長興魏氏益祚女。墓在中軍峯亥坐原。擧五男二女。曰振浩郁浩勉浩丙浩寬浩。金之鉉尹濟臣。孫以下不盡錄。銘曰。潛修獨行。撝謙彌彰。我作銘詩。用誌斧堂。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암 김공 묘지명 松巖金公墓誌銘 공의 휘는 영록(榮祿), 자는 처국(處國), 호는 송암(松巖)이다. 김씨(金氏)는 계보가 진양(晉陽)에서 나왔으니,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무진(茂珍)의 후손이다. 고조는 응복(應福)이다. 증조는 재탁(再鐸)으로, 진사(進士)이고 호가 백파(白波)이다. 조부는 한익(漢益)이다. 부친은 호상(浩相)이고, 모친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유사봉(柳思鳳)의 따님이다. 헌종(憲宗) 기유년(1849, 헌종15) 9월 24일에 능주(綾州)의 도장리(道莊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체격이 크고, 자질과 성정이 영특하였다.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으며, 지극한 행실이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 하동 정씨(河東鄭氏) 정의열(鄭懿烈)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홍기(弘基), 원기(元基), 형기(炯基)이고, 딸은 양회익(梁會翼)에게 출가하였다. 을미년(1885, 고종32) 11월 23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 47세이다. 도장면(道莊面) 야산(夜山) 뒤 산기슭 유좌(酉坐)에 장사 지냈다.아, 홍기(弘基)는 나와 교유한 지 몇 해 되었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왕래하여 공을 잘 알고 있었다. 대개 공은 용모가 준수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자상하고 화락하였으며, 꾸밈이 없고 진실하며 말수가 적고 태도가 신중하여 기쁨과 노여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말은 어눌한 듯하였지만 몸가짐은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가정을 거느림에 검소하였다. 형제를 대할 적에는 화락하였고, 친족과는 화기애애하였다. 집안이 안팎으로 조용하며 정돈되고 여유가 있었으며 온화한 기운이 넘쳤다. 비속하고 괴이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고, 거만하고 음탕한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이롭고 은혜롭게 하는 것은 그의 심덕(心德)이고, 분수에 편안하고 낙천적인 것은 그의 신념이었다. 남의 성내는 말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게 하고 방자한 기색은 자신에게 미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이구동성으로 칭송하였고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거처하는 곳에는 샘과 바위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 초가집을 짓고 오솔길을 내었으며 샘물을 끌어들이고 꽃을 심어 은자의 자취를 다 누렸다. 스승을 맞이하고 서적을 소장하여 자손을 가르쳐 가업의 전통을 힘써 보존하였다. 평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아 문밖을 나가지 않아서 자신은 즐거움을 누리고 가정은 평안하였다. 매우 번성한 자손을 잘 가르쳐서 좋은 방향으로 닮도록 하여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라는 바람9)이 성대하게 있으니, 이른바 슬찬황류(瑟瓚黃流)10)라는 것은 그 이치가 참으로 그러하다.내가 만년에 이러한 벗을 사귀어 교유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다시 잃고 사석(沙石)만 남아 있으니, 벗들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사는 슬픔만 간절할 따름이다.홍기(弘基)가 어느 날 책 하나를 소매에 넣고 와서 보여 주며 말하기를 "이는 선인의 유장(遺狀)입니다. 선인의 벗으로 선인의 행적을 서술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공이 있을 뿐입니다. 바라건대, 은혜롭게 한마디 말을 하여 묘도(墓道)에 기록할 글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천도는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니 天道福善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孰云不然더구나 후손들은 矧伊雲仍남은 복록 끊임없이 이어짐에랴. 餘祿綿綿흰 물결 일렁이는 물가 白波之濱돌 무지개 다리 드리운 길. 石虹之阡지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過者指點바라보는 사람은 오래 머무네. 瞻者留連 公諱榮祿。字處國。號松巖。金氏系出晉陽。晉陽府院君茂珍后。高祖應福。曾祖再鐸。進士號白波。祖漢益。考浩相。妣文化柳氏思鳳女。憲宗己酉九月二十四日。生公于綾之道莊里。體質峻茂。才性開爽。孝友根天。至行聞人。聘河東鄭氏懿烈女。育三男一女。曰弘基元基炯基。女梁會翼。以乙未十一月二十三日。終于正寢。得年四十七。葬于道莊面夜山後麓酉坐。鳴呼。弘基從余遊有年。是以往來綢繆。得與公熟。盖公好容顔美鬚鬢。慈祥樂易。質實簡默。喜怒不形。言若不足。持身謹勅。御家儉約。處兄弟恰怡如也。與族戚訢訢如也。門闌內外。從容整暇。和氣盎然。鄙俚詭譎。不出於口。戱慢淫媟。不接於身。利人惠物。其心德也。安分樂天。其志守也。忿言不反於身。橫色不及於已。知不知。無不一辭稱道而無間言焉。所居有泉石之勝。結茅開逕。引流栽花。備餉幽逸之趣。邀師儲書。課子訓孫。勉存箕裘之傳。平日不求聞達。不出戶庭。身享安樂。家用平康。螽斯兟兟。式穀似之。蔚然有碩果不食之望。所謂瑟瓚黃流。其理信然。余在晩暮。得此一友而遊從。未幾旋復失之。沙石在後。只切雖索之悲。弘基一日袖示一冊曰。此是先人遺狀也。以先人友而加以述先人行者。惟公在焉。乞惠一言以識幽道。嗚呼。豈忍辭哉。銘曰。天道福善。孰云不然。矧伊雲仍。餘祿綿綿。白波之濱。石虹之阡。過者指點。瞻者留連。 큰……바람 《주역(周易)》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다. 이는 다섯 개의 효(爻)가 모두 음(陰)인 상태에서 맨 위의 효 하나만 양(陽)인 것을 석과(碩果)에 비유한 것으로, 하나 남은 양의 기운이 외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복을 다 누리지 않으면 자손이 대신 누리게 되리라는 바람을 말한다. 슬찬황류(瑟瓚黃流)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의 "산뜻한 저 옥돌 잔에 술이 들어 있네.[瑟彼玉瓚, 黃流在中.]"에서 나온 말로, 귀중한 그릇에는 그에 맞는 음식이 담기고 황류(黃流) 즉 울창주는 질장군에 담지 않는다면 뜻이다. 즉 성덕(盛德)은 반드시 녹(祿)과 수(壽)를 누리게 된다는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금방 안공 묘지명 錦舫安公墓誌銘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선조의 업적을 지킴)의 어렵고 쉬움에 대해서는 고인의 설에 자세하다. 어떤 가문의 선조가 바야흐로 창업할 적에는 모두 노심초사하며 온갖 고초를 겪고, 가시덤불 헤치며 비바람을 무릅쓰고 거의 망하려는 지경에서 보존하고 거의 죽으려는 지경에서 살아나 겨우 가문을 세워 자손을 공고하게 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자손이 된 자는 일찍이 조금의 공로나 수고로움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평안과 부귀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먹는 것을 계산하고 일에 걸맞게 하는 것은 또한 하는 일 없이 얻어먹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편안하고 부유함에 익숙하면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고, 풀어지고 방탕함을 좋아하면 게으른 마음이 싹트기 마련이니, 게으르고 교만하고 사치하면 패가망신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즐거움을 누리겠는가.이로써 말한다면 어떤 가문의 자제로서 끝까지 수성하는 자는 겉으로는 마치 도모하는 것이 없는 듯하지만 필시 그 마음 씀이 조심성 있고 치밀하여 남들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위태로울 적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망할 적에 망함을 잊지 않는 것은 실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보존될 때 망함을 잊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는 기미를 봄이 심오한 자가 아니면 능하지 못하니,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말에 대해서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금방(錦舫) 안공(安公)의 어짊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 공의 대인(大人) 덕림공(德林公)이 창업하고 공이 이어서 수성하였으며, 또 자신이 수성한 것을 가지고 그 자식을 가르쳐 수성이 무궁함에 이르게 하였으니, 대대로 계승하는 가풍과 가법의 아름다움은 사림(士林) 집안의 모범이 되었다.공의 휘는 영(潁), 자는 도형(道亨), 금방(錦舫)은 그의 호이다. 안씨(安氏)는 계보가 순흥(順興)에서 나왔으니, 문성공(文成公)의 휘는 유후(裕后)이다. 3대를 내려와 휘 원형(元衡), 시호 문혜(文惠)에 이르렀으니, 공로로 죽성(竹城)에 봉해졌기에 자손이 이 때문에 관향으로 삼았다. 2대를 전해 내려와 직제학 휘 정생(挺生)에 이르러 조선에서 벼슬하였다. 그분의 아들 을겸(乙謙)이 영암 군수(靈巖郡守)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 고을에 거주하였다. 그분의 아들 여주(汝舟)는 직장(直長)을 지내고 장흥(長興)에 우거하였는데, 자손이 이 때문에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9대를 내려와 휘 한징(漢徵)에 이르렀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택인(宅仁), 호 해옹(海翁)인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조부는 휘 몽원(夢元)이고, 부친은 휘 수책(壽策), 호가 덕림(德林)이다. 모친은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진방(李震芳)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지녔다. 순묘(純廟) 신사년(1821, 순조21) 10월 1일에 강진(康津) 용정리(龍亭里)에서 공을 낳았다. 무신년(1848, 헌종14)에 능주(綾州)에 우거하다가 병인년(1866, 고종3) 7월 6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46세이다. 고을의 서쪽 작약산(芍藥山) 아래 창포등(菖蒲嶝)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최수완(崔粹玩)의 따님인데, 온순하고 행실이 얌전하였으며 예법을 어김이 없었다. 후사가 없어서 차자의 소생인 국정(國禎)을 양자로 들였다. 3녀가 있으니, 문방호(文邦浩), 민정호(閔禎鎬), 이교일(李敎馹)에게 출가하였다.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훌륭하였다. 어려서 숙사(塾師)에 나아갔는데, 걸음걸이가 이미 단정하였다. 날마다 학습의 과정(課程)을 세웠는데 한결같이 《소학(小學)》에 근거하여 진행하였다. 자라서는 근체시(近體詩)와 당시 유행하는 문체를 함께 익혀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니, 이는 부모의 기대와 가문을 위한 계책으로 어쩔 수 없이 과거 공부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청탁하거나 요행을 바라지 않았으니, 득실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해드리고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 사계절의 향사(享祀)에는 돌아가신 선조를 서글피 사모하는 마음을 지극히 하였으며, 원근에 있는 묘소에는 성묘하는 절차를 신중히 행하였다. 내외 친족에게는 은혜와 의리를 두루 베풀었으며, 향당의 붕우에게는 빠짐없이 안부를 물었다. 매양 명절이나 좋은 계절을 만나면 번번이 동지들과 술을 가지고 명산의 경치 좋은 곳에서 시를 읊조리다가 날이 저물면 돌아오곤 하였으니, 담박한 마음과 뛰어난 흥취는 세속의 번잡함을 시원스럽게 벗어난 의표가 있었다. 아, 이는 공이 자신을 수양하고 의리를 행하여 대대로 수성하는 효가 될 것이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나는 공에 대해서 집안 간의 교분이 있었지만 한스럽게도 한번 찾아뵙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었다. 백발 노년에 이르러 공의 아들 국정(國禎)과 더불어 막역한 교분을 맺어 뒤미처 공의 맑은 행실과 아름다운 법도를 더욱 자세하게 들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옛날을 회상하고 오늘날의 세태를 살펴보니 서글픈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이에 묘소의 지문(誌文)을 지을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버지가 시작하고 자식이 계승하는 것 父作子述천지간의 당연한 이치일세. 天經地義왕왕 실패하는 것 往往覆墜터럭을 태우는 것처럼 쉽네. 燎毛之易탁월한 금방 공은 有卓錦舫온후하고도 공손하였네. 溫溫其恭시례로 자신을 단속하였고 詩禮律已화락함으로 풍도를 이루었네. 愷弟成風위로는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았고 上無所忝아래로는 후손에게 전해 주었네. 下爲可繼남은 경사 이어져 餘慶綿綿천년만년 누리리라. 於千萬世 創業守成之難易。古人之說詳矣。夫人家祖先。方其創業也。莫不困心衡慮。勞筋苦骨。披荊棘櫛風雨。存於幾亡之中。生於幾死之餘。僅能樹立家戶。以爲輩固子孫之計。爲子孫者。曾無錙銖之功。涓滴之勞。而坐享平康富貴之樂。其計食稱事。亦可爲不素餐者歟。然人情狃安富則驕侈生。樂舒肆則怠惰萌。怠惰驕侈。敗於不暇何以享其樂乎。以此言之。人家子弟終始守成者。外若無所猷爲。而必其用心謹密。行人所不能行者多矣。危不忘危。亡不忘亡。固人之所可能。而至於安不忘危。存不忘亡。則非見幾之深不能也。守成之難於創業。孰云不可。吾於是乎知錦舫安公之賢。爲不偶爾也。公大人德林公。旣創業之。公繼而守成之。又以守成於已者。敎誨其子。使之守成於無窮。而世述之風。家法之美。爲士林家楷範。公諱潁。字道亨。錦舫其號也。安氏系出順興。文成公諱裕后也。三傳至諱元衡謚文惠。以功封竹城。子孫因貫焉。二傳至直提學諱挺生。仕本朝。子乙謙。宰靈巖。因居是郡。子汝舟直長。寓居長興。子孫因居焉。九傳至諱漢徵。卽公之高祖也。曾祖諱宅仁號海翁。文學名世。祖諱夢元。考諱壽策號德林。妣全州李氏震芳女。婦德甚備。以純廟辛巳十月一日生公于康津龍亭里。戊申寓綾州。丙寅七月六日卒。享年四十六。葬于州西芍藥山下菖蒲嶝酉坐原。配海州崔氏粹玩女。婉順貞靜。閫範無違。無嗣。國禎以次房出。入爲後。有三女。適文邦浩閔禎鎬李敎馹。公天稟甚美。幼就塾師。步趨已正。日用課程。一依小學書。及長。兼習近體時文。葩藻贍麗。盖以父母之望。門戶之計。而不得不屈首場屋。然亦不爲干託僥倖之計。於得失泊如也。事親盡歡。執喪盡哀。四時享祀。極其霜露之感。遠近墳墓。愼其省掃之節。內外族戚。恩義周洽。鄕黨朋友。存訊無闕。每値良辰嘉節。輒與同志携酒。暢詠於名山水石之間。竟日而還。其沖矜逸趣。灑然有出塵之標。嗚呼。此公所以修身行義而爲世世守成之孝者也。曷不偉哉。余於公。有通家之誼。恨未得一拜。而公已千古矣。豈知至於老白首。而得與公之子國禎爲莫逆之交。追聞其行範爲加詳哉。緬古觀今。不勝悲悵之感。玆於幽堂之誌。不敢以非其人辭。銘曰。父作子述。天經地義。往往覆墜。燎毛之易。有卓錦舫。溫溫其恭。詩禮律已。愷弟成風。上無所忝。下爲可繼。餘慶綿綿。於千萬世。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유헌 처사 김공 묘지명 榴軒處士金公墓誌銘 공의 성은 김씨(金氏), 휘는 세익(世翼), 자는 원보(元甫)이며, 유헌(榴軒)은 그의 호이다. 관향은 경주(慶州)이니, 신라(新羅) 때 예원(璿源)이 바로 그 선계(先系)이다.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고 이로부터 고려에 이르렀으니, 이름난 공경(公卿)과 훌륭한 훈신(勳臣),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줄지어 배출되었다. 휘 광우(光宇)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진사(進士)로서 참봉을 지냈으며, 남쪽 지방에 우거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그곳에 살게 되었다. 이분의 아들 세좌(世佐)는 호가 청강(淸江)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應敎)를 지냈다. 이분의 아들 진(璡)은 참봉이다. 이분의 아들 익환(益煥)은 직장(直長)이다. 이분의 아들 희련(希練)은 교리(校理)이니, 문예와 행실로 세상에 이름났다. 이분의 아들 응규(應虯)는 판관(判官)을 지냈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아우 응원(應遠)과 함께 도모하여 왜적을 토벌하였으니, 왜적을 물리친 비석이 있다. 이분의 아들 정길(貞吉)은 부장(部將)이다. 이분의 아들은 담(潭)이다. 이분의 아들 화윤(和允)에게는 남몰래 베푼 은덕(恩德)이 있었다. 이분의 아들 경후(慶厚)는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홍려(弘礪)이다. 조부는 택계(宅繼)로, 호는 수산(睡山)인데, 의(義)를 행한 것으로 칭찬 받았다. 부친은 연흠(廷欽)이다. 모친은 장흥 마씨(長興馬氏)로, 마인학(馬仁㶅)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규중의 법도를 넉넉히 갖추고 있었다. 순묘(純廟) 계유년(1813, 순조13) 3월 27일에 부(府)의 덕제리(德堤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기개가 우뚝하고 재능과 기량이 뛰어났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잠자리를 살피고 문안 인사를 드리며, 집안일을 하느라 분주히 왕래하였으니, 어머니의 뜻을 받들고 몸을 봉양하는 데 에 모든 것을 이바지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안에는 어진 부형이 없고 밖에는 엄한 사우(師友)가 없는 것은 고인이 탄식한 바이다.19) 더구나 못나고 보잘것없는 나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으니 누구를 우러러 의지하고 성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같은 고을의 이남파(李南坡), 위호산(魏壺山), 백물암(白勿庵) 같은 이름난 석학들과 교유하여 오고가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너무나도 한스러워하여 매양 아버지란 말이 나오면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하였다. 풍수지리상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이장함에 곡을 하고 발을 구르는 예절과 슬퍼하는 모습을 한결같이 초상을 치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졌지만 3년을 하루같이 질대(絰帶)를 풀지 않고 궤연을 떠나지 않았다. 기일이 되면 지극한 정성으로 치재(致齋)하여 직접 제수를 장만하여 아련하고 엄숙하게 마치 다시 뵙듯이 듯하였다.몸가짐은 삼갔고 말을 할 적에는 신중히 하였다. 남의 잘못을 들으면 자신의 잘못인 양 여겼고, 남의 선한 행실을 보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친척과 벗들에게는 안부를 묻고 두루 구휼하였다. 은의(恩誼)를 두루 넉넉하게 펼쳐 의탁할 곳이 없는 고아와 과부, 혹 혼기를 놓친 자가 있으면 더욱더 가련하게 여기고 구휼하였다.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고 은혜와 의리가 지극하였다. 친족을 회합하여 고 친목을 다져 계속 끊이지 않게 하였다. 집안에 빚은 술이 있으면 번번이 친구들을 불러 시문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하였다. 봄가을로 마을의 생도(生徒)들을 거느리고 예의를 익히고 경서의 뜻을 강론하여 정성스럽게 이끌어 주니 듣는 자들이 감복하고 기뻐하였다. 일찍이 〈계자부(戒子賦)〉를 짓고, 또 경계하여 말하기를 "척박한 땅뙈기와 초라한 집이라도 분수에 따라 경영하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다. 만약 다시 더 불리고 늘린다면 부지런하고 검소한 마음이 점점 사라져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점점 자라게 되니, 어찌 굳이 지엽적인 의식(衣食)에 구차하게 얽매이겠는가. 고인이 이른바 '뜻을 둔 곳이 있어서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할 겨를이 없다.'20)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계미년(1883, 고종20) 11월 14일에 졸하였다. 부(府)의 서쪽 무수봉(舞袖峰) 부병(負丙)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조남수(曺南壽)의 따님이다. 묘소는 합장하였다. 아들은 재호(在浩)이고, 사위는 영광(靈光) 김사현(金泗鉉)이다. 손자는 영국(榮國), 영선(榮善), 영철(榮哲)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젊은 시절에는 효도하고 우애가 있었으며, 늙어서는 예를 좋아하였으니, 내 그 말을 전해 들었고, 내 그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동시대에 이웃 고을에 살면서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하였는데, 도리어 그 유장(遺狀)을 돌아가신 지 20년 뒤에 읽으니, 뒤늦게 추모하는 감회에 예를 다 펴지 못한 마음만 간절하였다. 영국(榮國)이 그 대인의 편지를 전해주고 가장(家狀)을 보여주며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용렬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받들어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정중하게 부탁하니 어찌 차마 끝까지 사양하겠는가. 삼가 가장의 글을 살펴서 차례대로 대략 서술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천도는 겸허하면 더해 주고 天道益謙인정은 덕을 좋아하네. 人情好德진실로 군자다웠으니 允矣君子겸손하고 공경하며 덕이 있네. 謙謙有德번성한 자손들은 螽斯椒聊대대로 그 덕을 이루었네. 世濟其德 公姓金。諱世翼。字元甫。榴軒其號也。以慶州爲貫。新羅璿源。卽其先系也。至敬順王而國絶。自是而至麗朝。名卿嵬勳。鴻儒碩德。磊落相望。至諱光宇。入我朝。進士官參奉。僑寓南土。子孫仍居焉。子世佐號淸江。文科應敎。子璡參奉。子益煥直長。子希練校理。文行著世。子應虯判官。丁酉亂。與弟應遠協謀討倭。有却倭碑。子貞吉部將。子潭子和。允有隱德。子慶垕。於公爲高祖也。曾祖弘礪。祖宅繼號睡山。行義見稱。考廷欽。妣長興馬氏仁㶅女。貞靜柔嘉。閫儀贍備。純廟癸酉三月二十七日。生公于府之德堤里。氣宇軒昂。才器穎悟。三歲失怙。奉慈幃。極其孝順。晨昏定省。出入服勞。養志養體。無不畢給。嘗曰。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此是古人所歎。況不肖無狀。早違庭訓者。何所依仰而能有成乎。遂從同郡名碩如李南坡魏壺山白勿庵諸公。往復講磨。未及省顔爲至恨。每語及。泫然流涕。以風水不利。改葬他所。哀戚哭踊。一如祖括。遭內艱。毁瘠過禮。不脫絰帶。不離几筵。三年如一日。遐忌諱之辰。致誠致齊。躬執濯漑。僾然肅然。如復見焉。持身謹勅。出語愼重。聞人之過。若己病焉。見人之善。若己喜焉。族戚知舊。問訊周恤。恩誼遍洽。有孤寡無託。或婚嫁過時者。尤加矜恤。內外斬斬。恩義兩至。會族親修惇睦。源源不替。家有釀。輒邀朋舊。酬唱歡洽。春秋率坊裏生徒。習禮數講經旨。諄諄誘引。聽者感悅。嘗著戒子賦。且戒之曰。薄田敝廬。隨分料理。足以自遺。若復增益之。是勤儉之意浸銷。驕逸之心漸滋。何必營營於衣食之末乎。古人所謂志有在而不暇及者。此也。癸未十一月十四日卒。葬于府西舞袖峰負丙之原。配昌寧曺氏南壽女。墓合祔。男在浩。女靈光金泗鉉。孫榮國榮善榮哲。曾孫以下不錄。嗚呼。幼壯孝弟。老而好禮。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然倂世隣壤。未及拜床。而乃讀其遺狀於觀化二十年之後。追想曠感。徒切靡逮之懷。榮國奉其大人書。以家狀謁文於余。顧陋劣無狀。有難承當。而見屬鄭重。豈忍牢讓。謹按狀辭。序次梗槪。銘曰。天道益謙。人情好德。允矣君子。謙謙有德。螽斯椒聊。世濟其德。 안에는……바이다 송나라 학자 여희철(呂希哲)이 "안으로 어진 부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사우가 없으면서 성공하는 자는 드물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小學 善行》 뜻을……없다 《논어》 〈학이(學而)〉편의 주석(註釋)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는 먹을 때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할 때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을 민첩히 하고 말을 삼가며, 도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질정(質正)한다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서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 것은 뜻을 둔 곳이 있어서 여기에 마음이 미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不求安飽者, 志有在而不暇及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순집에게 답함 答梁順集 한 통의 서한은 확실히 얼굴을 마주하는 것에 버금갑니다. 보내신 서한을 통해 조용히 지내면서 정양(靜養)을 하고 체후가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욱이 제가 기원하던 바에 부응합니다. 정자를 짓는 비용을 수습하지 못한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하는 일이라고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선성(先聖)의 책을 읽고 선성의 도를 지켜서 사방(四方)에 있는 벗들과 함께하고 또 뒤를 잇는 자손들에게 전하여 사문(斯文)의 맥을 무궁토록 보존하니, 그 의리가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을 제이의(第二義)로 간주하여 되는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아, 지금 상황에서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우리 벗께서는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간(比干)은 귀척(貴戚 군주의 친척)의 경(卿)이어서 나라와 화복을 함께하는 의리가 있었으니43) 참으로 다른 사람이 출처를 정하는 일상적인 격식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천작(天爵)을 닦아 인작(人爵)이 이르는 것44)은 이치의 떳떳함이고, 천작을 닦았으나 인작이 이르지 않는 것은 이치의 변고(變故)입니다. 성인(聖人)은 상도(常道)를 말하였지 변고(變故)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勢)는 일시(一時)에 행해지지만 도(道)는 백세(百世)에 행해지니 또 이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억견(臆見)이니 온당하지 않으면 다시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一書亦對面之亞也。因審齋居靜養。體候珍勝。尤副企祝。亭費未了。此非小事。吾輩旣不得有爲於世。而所爲者。只此一事耳。讀先聖之書。守先聖之道。以與四方朋舊共之。又以傳之於後嗣子孫。以存斯文一脈於無窮。其義顧何如耶。此不可看作第二義。而伈伈然。聽其自爾也。嗚呼。在今日而所恃者誰也。恐吾友不可辭其責。如何如何。比干是貴戚之卿。而有與國休戚之義。固不可以他人之出處常格論之也。修天職而人爵至。理之常也。修天爵而人爵不至。理之變也。聖人語常而不語變。然勢行一時。道行百世。則又不可謂無其理也。此是臆見。如有未穩。幸更示及也。 비간(比干)은……있으니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와 숙부인 기자(箕子) 및 비간(比干)에 대해 공자는 세 사람의 어진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미자는 주가 무도한 것을 보고 종사(宗祀)를 보존하기 위해 떠나갔고, 기자는 간언하다가 옥에 갇힌 뒤 이내 종이 되었으며, 비간은 끝까지 간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공자(孔子)는 "은나라에 세 사람의 어진 이가 있었다.【殷有三仁焉.】"라고 하였다. 《論語 微子》 천작(天爵)을……것 천작은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자연스러운 존귀함을 말하고, 인작(人爵)은 사람이 만든 작위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천작이요, 공경대부는 인작이다. 옛날 사람은 천작을 닦아서 인작이 뒤따랐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 古之人, 修其天爵, 而人爵從之.】"라고 하였다. 덕을 닦으면 벼슬이 절로 이른다는 말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박대규에게 답함 答朴大圭 지난번에 돌보아 주신 일은 매우 고마웠습니다. 삼가 요즈음 부모를 모시면서 지내는 안부가 더욱 편안하신지 여쭙습니다. 지난번 서한에서 말씀하신 "강학(講學)의 공효는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지 않고 다만 뒤로 물러나는 것에 달려있다."50)라는 말은 강학의 첫 번째 의의입니다. 우리 벗께서 이미 이것을 아셨으니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방도가 더욱 심오해졌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의림(義林)은 날이 갈수록 머뭇거리고 골몰하는 정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한 몸의 낭패는 참으로 돌아볼 것도 없고 함께 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도 터럭만큼도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일이 없으니 이 때문에 부끄럽고도 송구스럽습니다. 정자(程子)가 "합장(合葬)은 원비(元妃)만 한다……"51)라고 한 것에 관해서 물으셨습니다. 합장은 원비를 하고 합독(合櫝 신주를 같은 궤에 함께 모심)은 종자(宗子)를 낳은 분을 한다는 것은 정자와 장자(張子 장재(張載)) 등 여러 선생의 의론입니다. 그러나 주자(朱子)는 "네 번 장가를 들고 다섯 번 장가를 들더라도 모두 합독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절충한 의론입니다. 다만 4~5위(位)를 합장하는 것은 예(禮)에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없는 형세이기 때문에 원비만 할 뿐입니다. 頃者寵顧。何等感戢。恭問比來侍旁。節宣增裕。向書所謂講學之工。不在向前。只在退後之語。此是講學第一義。吾友旣有見於此。則其所以溫故知新者。想益情邃矣。爲賀爲賀。義林因循深汨。與日益深。一身狼狽。固不足恤。而於多少相聚之人。無絲毫相長處。用是愧悚。程子曰合葬用元妃云云。合葬用元妃。合積用宗子所出。此固程張諸先生之論。然朱子曰。雖四娶五娶。皆可合櫝。此是折中之論也。但合葬四五位。非是禮不可。只是勢不得。故只用元妃耳。 강학의……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49 〈왕자합에게 답함〔答王子合〕〉에 "근래에 강학의 공효가 앞으로 향함에 달려 있지 않고 다만 뒤로 물러남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으니, 만약 옛것을 익히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을 알지 못한다. 대개 새로운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옛것까지도 기억하지 못하여 일상생활에서 바로 잊어버린다. 비록 그 양심을 놓아 버리지 않으려고 하여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近覺講學之功不在向前, 只在退後, 若非溫故, 不能知新. 蓋非惟不能知新, 且幷故者亦不記得, 日用之間, 便成相忘. 雖欲不放其良心, 不可得矣.】"라고 하였다. 합장(合葬)은 원비(元妃)만 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22 〈이천어록(伊川語錄)〉에 보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 가선대부 호조 참판 박공 묘표 贈嘉善大夫戶曹參判朴公墓表 면주(綿州) 서망산(西望山) 남쪽 산기슭 부갑(負甲)의 언덕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공(朴公)의 의발이 묻힌 곳이다. 공의 이름은 경란(慶欄), 자는 자선(子善)인데, 선묘(宣廟) 신축년(1601, 선조34)에 면주(綿州)의 고절리(高節里)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다. 대답하고 응대하며 주선하고 수고로움을 다하여 뜻을 받드는 봉양과 물질적인 봉양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여섯 형제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함께 공부하고 함께 잠자며 화목하게 지내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화기애애함을 친족과 향당에까지 확대시켜 두루 화합하고 공경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포부가 컸으니, 당시 저명한 구화(九華) 나공 무춘(羅公茂春)64)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와 교유하였다.광해군(光海君)이 정사를 어지럽히자 향리에서 문을 닫고 지내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는데, 정권을 장악한 간사한 무리들이 국모를 폐하기를 도모하려 하자, 이에 이익을 탐하고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곳곳에서 선동하였다. 공이 듣고 크게 놀라서 "자식이 만약 부모를 무시하고 신하가 군주를 업신여긴다면, 이는 천하 만고의 막대한 변고이니, 어찌 둥근 머리와 네모진 발을 가지고 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가 마음에 싹틔워 발설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백씨(伯氏) 직장공(直長公) 경록(慶祿), 종형(從兄) 참판공(參判公) 정(侹), 지봉공(芝峯公) 임(任), 승지 임동(林埬), 진사 신유길(辛惟吉), 사인 이시정(李時挺)과 더불어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대의(大義)로 호소하였다. 또 경내 인사 가운데 적신(賊臣)을 추종한 자를 찾아내어 경외(境外)로 쫓아내었다. 이보다 앞서 함평(咸平) 고을원 박정원(朴鼎元)이 흉도(凶徒)를 쫓아내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기까지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혹 이러한 예를 들어 경계하니, 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의리상 해야할 바이니 비록 죽더라도 어찌 회피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당시 의론이 옳다고 여겼다.현종 갑인년(1674, 현종15)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숙종 갑자년(1684, 숙종10) 10월 28일에 별세하였다.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아, 공은 멀고 외진 지방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가난하게 살았고, 훌륭한 자질이 있었는데, 덕을 숨긴 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삼강오륜, 존망과 굴신(屈伸)에 관계된 분수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만한 위엄이나 윽박지르는 위세를 개의치 않고 앞장섰으니, 의연히 수많은 사람을 대적할 만할 기세가 있었다. 만일 평소 깊이 함양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대의(大義)를 만목(萬目) 가운데에서 드러내고 대방(大防)을 당대에 보존하였으니, 그 공이 어찌 얕겠는가. 당시 조직(趙稷), 정유(鄭維) 같은 제공들이 모두 포의(布衣)로 절개를 드날렸다. 공도 버금가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박씨(朴氏)는 계보가 무안(務安)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국학 전주(國學典酒)인 휘 진승(進昇)이 그 시조이다. 문학과 관직으로 대대로 명성이 있었다. 고조 휘 익경(益卿)은 호가 애한정(愛閒亭)인데, 효도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성공 삼문(成公三問), 박공 평년(朴公彭年)과 도의로 교제하였으며, 장릉(莊陵 단종)이 양위(讓位)하자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나중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성(城)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이고, 조부는 휘 언순(彦純)인데, 호조 참의이다. 부친은 휘가 념(恬)이고, 호가 죽헌(竹軒)인데,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에게서 수학하였는데 김하서(金河西), 송규암(宋圭庵), 유미암(柳眉巖) 제현과 동문으로 친하게 지냈다.을사사화가 발생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모친은 공인(恭人)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정양공(靖襄公) 심귀령(沈龜齡)의 따님이다. 아들 여섯을 낳았으니, 공은 그중 막내이다. 배위(配位)는 고성 김씨(固城金氏)로, 김시의(金始義)의 따님이다. 묘소는 합장하였다. 아들 여섯을 낳았다. 장자인 중길(重吉)은 호가 청검재(淸儉齋)로 가정의 훈계를 잘 계승하였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다음은 효길(孝吉), 숭길(崇吉), 성길(聖吉), 지길(之吉), 진길(眞吉)이니, 모두 유자의 행실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자손이 번성한 것은 어찌 선인이 공덕을 쌓은 보답이 아니겠는가.후손 기용(淇容)과 안상(顔相)이 한겨울에 발이 부르틀 정도로 고생하면서 멀리서 찾아와 묘표를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형편없는 내가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한 것은 백세토록 전해지는 성운(聲韻)에 감회가 절실하고, 양가 선대의 교분도 모른 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綿州西望山南麓負甲之原。有崇四尺。卽故贈嘉善大夫戶曹參判朴公衣履之藏也。公諱慶欄字子善。以宣廟辛丑。生于綿之高節里。幼而岐嶷。至孝根天。唯諾應對。周旋勤勞。凡百志物。無不克備。兄弟六人。友弟純篤。對床連被。怡怡無間。推以至於族戚鄕黨。和敬周至各得其心。勤身力學。抱負贍博。一時知名如九華羅公茂春諸人。皆其從遊也。光海政亂。閉門鄕閭。不赴公車。及群壬當路。謀廢國母。於是嗜利無恥之輩。在在煽動。公聞之大駭。以爲子而無父。臣而無君。此是天下萬古莫大之變。豈圓頭方足戴天履地者之所可萌諸心而出諸口者耶。與其伯氏直長公慶祿。從兄參判公侹。芝峯公任。承旨林埬。進士辛惟吉。士人李時挺。通諭列邑。聲告大義。又探境內人士趨赴賊臣者。逐出境外。先是咸平宰朴鼎元。以斥出凶徒。至被竄謫。人或擧此爲戒。公奮然曰。義所當爲。雖死何避。時論韙之。顯宗甲寅陞通政。肅宗甲子十月二十八日考終。嘉善其追贈也。嗚呼。公生長遐荒。窮約布素。懷瑾握瑜。闇然不露。而於綱常倫理存亡屈伸之分。不知威武之可畏。氣燄之可拍。而挺身出脚。毅然有千萬人可往之氣。如非素養之深。安能乃爾。聾大義於萬目。存大防於一世。其功豈淺淺哉。當時如趙稷鄭維諸公。皆以布衣著節。公亦其流亞一隊人也。曷不偉然。朴氏系出務安。麗朝國學典酒諱進昇。具始祖也。文學仕宦。世代煒燁。高祖諱益卿號愛閒亭。孝除寢郞。與成公三問朴公彭年爲道義交。莊陵遜位。掛冠歸鄕。後贈吏曹參判。曾祖諱城禦侮將軍。祖諱彦純戶曹參議。故諱恬號竹軒。軍資監判官。受學于慕齋金先生。與金河西宋圭庵柳眉巖諸賢。同門友善。乙巳禍作。棄官歸鄕。妣恭人靑松沈氏靖襄公龜齡女。擧六男。公其季也。配固城金氏始義女。墓合祔。育六男。長重吉。號淸儉齋。承襲庭訓。贈左承旨。次孝吉崇吉聖吉之吉眞吉。皆以儒行著聞。孫曾以下。不能殫記。螽斯椒聊。其非積累餘蔭耶。後孫淇容顔相。大冬遠趼。來請表墓之文。余以無狀。不忍牢讓者。以百世聲韻。有切曠感。而兩家先契。又不可以二視之也。 나공 무춘(羅公茂春) 1580~1619.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구봉(九峯)ㆍ구화(九華)ㆍ기지(耆之)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묘표 墓表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오공 묘표 贈童蒙敎官朝奉大夫吳公墓表 공의 휘는 응조(應祚), 자는 화여(和汝)이다. 오씨(吳氏)는 계보가 보성(寶城)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의 보성군(寶城君) 현필(賢弼)을 중시조이다. 가문의 명성과 세가(世家)의 덕으로 동방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고조는 태유(泰有)인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석규(錫圭)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만상(萬祥)인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수남(壽南)인데, 으로, 호가 용한(容閒)이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다. 모친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로, 양중현(梁中鉉)의 따님인데, 순묘(純廟) 계유년(1813, 순조13) 6월 4일에 부춘(富春)의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어머니가 품팔이로 절구질하고 바느질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늙은 부모님을 편안하게 봉양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처럼 수고로움을 끼치니 이것이 어찌 자식 된 도리이겠는가."라고 하고는 살림을 맡아 꾸렸다. 이를테면 땔나무하고 가축을 기르며 농사짓고 집을 짓거나 신을 삼고 베를 짜는 일을 모두 자신이 직접하였다. 그렇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림이 차츰 펴졌고, 맛있는 음식을 넉넉히 봉양하게 되었다. 새벽이나 저녁 사이 일을 하는 여가에 조용히 곁에서 모시면서 온화하게 응대하였으며, 잠시 외출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와서 뵈었다. 이어서 밖에서 들은 소식을 전해 주어 적적하지 않게 하였다. 부친 양씨(梁氏)가 노환으로 앉거나 누울 때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였는데 밤낮으로 간호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공은 귀밑털과 머리털이 하얘진 노년의 나이에도 색동 적삼을 소매에 두르고 뜰을 뛰어다니며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으니 공을 사람들이 노래자(老萊子)에 견주었다.병인년(1866, 고종3) 8월 21일에 졸하였다. 장사 지낸 다음에 세청면(世淸面) 한한동(閒閒洞) 안산(案山) 해좌(亥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27년 뒤 임진년(1892, 고종29)에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풍산 홍씨(豐山洪氏)로, 홍수증(洪壽增)의 따님이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양휘영(梁暉永)에게 출가하였다. 묘소는 품평촌(品坪村) 앞의 치촌(峙村) 부을(負乙) 언덕에 있다. 계배(系配)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홍경주(洪敬周)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홍(在鴻), 재봉(在鳳), 재순(在淳)이고 사위는 정재우(鄭在禹)이다. 묘소는 부군의 왼쪽에 쌍분으로 합장하였다.아, 나는 혼인하기 전에 외람되이 이웃에 살아 공의 댁에 출입하면서 공의 자취 뒤에서 배종(陪從)한 것이 어제처럼 또렷한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미 4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장자는 세상을 떠나고 어린 자는 늙었으니, 옛일을 떠올리고 지금을 생각해 보면 서글픈 마음 가누기 어렵다. 맏아들 재홍(在鴻)이 나에게 묘표를 부탁하였다. 명을 전한 자는 이방손(二房孫) 창호(昌鎬)이다. 公諱應祚。字和汝。吳氏系出寶城。以麗朝寶城君賢弼爲中祖。門望世德。爲東方鉅姓。高祖泰有。贈司僕寺正。曾祖錫圭。贈左承旨。祖萬祥。贈戶曹參判。考壽南號容閒。同中樞。妣濟州梁氏中鉉女。純廟癸酉六月四日。生公于富春之七松里。幼有至性。見慈夫人行傭眷織。以糊眷口。歎曰。不能安養老親。而反貽勞苦如此。此豈人子之道耶。幹理家務。如樵牧耕稼。板築捆織。無不身親爲之。行未幾何。生理梢紓。而甘旨克然。晨昏之間。事務之暇。從容侍側。溫溫唯諾。有小出入。必反面。因以外間所聞。誦以告之。使之忘寂焉。梁氏以老病。坐臥須人。晝宵扶持。造次不離。公年至耋艾。鬢髮皤如。而班衫彩袖。趨戱盡歡。人擬之於老萊。丙寅八月二十一日卒。葬而移厝於世淸面閒閒洞案山亥坐原。後二十七年壬辰。贈童蒙敎官朝奉大夫。配豐山洪氏壽增女。生一女。適梁暉永。墓品坪村前峙村負乙原。系配豐山洪氏敬周女。擧三男一女。曰在鴻在鳳在淳。鄭在禹。墓祔乾位左雙兆。嗚呼。余在丱弁。忝同隣閈。而出入陪從於杖屢之後者。歷歷如昨日。而荏苒歲月。已作四十年前事矣。長者沒幼者老。緬古想今。悲悵難任。胤子在鴻。屬余爲文以表墓道。將命者。二房孫昌鎬也。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계광 처사 진공 묘표 溪狂處士陳公墓表 공의 성은 진씨(陳氏), 휘는 석형(錫馨), 자는 윤영(允英), 호는 계광(溪狂)이다. 관향은 여양(驪陽)이다. 고려 때 휘 총후(寵厚)라는 분이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는데, 바로 그 비조(鼻祖)이다. 증조는 휘 성언(聖彦)이고, 조부는 휘 덕리(德履)이다. 부친은 휘 광표(光表)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하동 정씨(河東鄭氏) 정복형(鄭福亨)의 따님인데, 순묘(純廟) 무인년(1818, 순조18) 2월 8일에 능주의 정천리(淨泉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총명하고 영특하여 범상한 사람과는 매우 달랐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이끌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바깥일을 물리치고 문을 닫고 휘장을 내린 채 밤낮으로 공부에 전념하여 오서(五書), 오경(五經)으로부터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섭렵하여 깊게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윽고 같은 고을에 사는 만희재(晩羲齋) 양 상사(梁上舍)에게서 차츰 듣지 못하던 바를 듣고, 차츰 보지 못하던 바를 보고 더욱 학문을 갈고닦아서 채우고 확충하였다. 이에 문사가 찬란하여 거침없고 분방함이 물이 샘솟는 듯 산이 우뚝 솟은 듯하였으니, 비록 급작스럽게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하여 급히 지어주는 상황이라도 물 흐르는 것처럼 민첩하고 빨랐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시를 읊조렸고 붓으로는 멈추지 않고 써 내려갔으니, 옛날 조식(曺植)의 칠보시(七步詩)65)나 온정균(溫庭筠)의 팔차(八叉)66)도 이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사원(詞苑)의 거벽(巨擘)으로 당대에 재능을 떨치던 자들이 모두 옷깃을 여미고 공에게 선두(先頭)를 양보하며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명망과 명성이 원근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니, 서울의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주군(州郡)의 관찰사 가운데 혹은 편지를 보내 공경하는 뜻을 보이고, 혹은 집으로 찾아와 교유하기를 청하였다.과장(科場)에 들어갈 때마다 과장에 가득한 응시자들이 가리키면서 서로 말하기를 "아무개 선생이 왔다."라고 하였으며, 붓을 들어 글씨를 쓰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처럼 에워싸곤 하였다. 다만 시대와 어긋나고 운명이 기구하여 주옥같은 시문으로 명성을 떨친 자를 조정에 천거하여 문장의 성률(聲律)을 조화롭게 하여 나라에 영화(榮華)를 보태게 하지 못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의 실망이 어떠하였겠는가. 산재(山齋)와 촌숙(村塾)에서 생도를 가르칠 때 아침에는 부추를, 저녁에는 소금 반찬을 먹으며 궁핍함 속에서 고생을 두루 겪었는데, 오직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소요하고 수창하는 즐거움은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말은 반드시 삼갔으며, 젊은 후생(後生)을 대할 적에는 반드시 옛 선현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적을 인용하여 사람에 따라 일에 따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는 것이 마치 근원이 있는 샘물이 마르지 않는 것과 같았다.무인년(1878, 고종15) 2월 26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품평촌(品坪村) 뒷산 직동(直洞) 해좌(亥坐)에 있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만환(朴萬煥)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성수(性洙), 차자는 문수(玟洙)이며, 딸은 문영주(文永周)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동윤(東潤)이고, 차방(次房)은 중부(仲父)의 양자로 갔다.아, 내 어렸을 적에 한묵(翰墨) 사이에서 공을 배종(陪從)하였기에 받은 것이 적지 않았는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득히 옛일이 되었으니, 회상하매 슬픈 마음 매양 감당하지 못하겠다. 지금 동윤이 묘갈명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대해 어찌 차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사양하겠는가. 公姓陳氏諱錫馨。字允英。號溪狂。貫驪陽。高麗時。有諱寵厚。封驪陽君。卽其鼻祖也。曾祖諱聖彦。祖諱德履。考諱光表。世有隱德。妣河東鄭氏福亨女。純廟戊寅二月八日。公生于綾之淨泉里。聰明開悟。絶異凡常。就傳上學。不待提飭而孜孜不怠。稍長。益自奮勵。掃却外事。杜門下帷。焚膏繼晷。自五書五經至諸子百家。次第涉躐。無不淹貫。旣而從同鄕晩羲齋梁上舍。益聞所未聞。益見所未見。磨礱淬濯。克長展拓。於是文瀾詞華。淓沛奔放。如水湧而山出。雖在忽卒副急。而敏速如流。口不絶呼。筆不停草。古之曺七步溫八叉。無以過之。詞苑巨擘蜚英一時者。無不斂衽推先。自以爲不可及。聞望聲譽。膾炙遠邇。京洛縉紳。州郡侯伯。或抵書致款。或造門請交。每入試圍。滿場擧子。指而相語曰。某先生來矣。至揮毫行墨。觀者如堵墻焉。但畸於時危於命。使瓊据大聲。未得薦之郊廟協之聲律。以增國家之光。其爲一時之缺望何如耶。山齋村塾敎授生徒。朝薤暮塩。備經窮約。惟是風月文酒逍遙唱酬之樂。綽綽有餘地。平居夙興。衣帶必勅。言語必謹。對後生少年。必引古之嘉言善行。隨人隨事。懇懇誘解。如源泉之不渴也。戊寅二月二十六日卒。墓品坪村後山直洞亥坐。配密陽朴氏萬煥女。擧二男一女。長性洙。次玟洙。女適文永周。長房孫東潤。次房出爲仲父後。嗚呼。余在小少。陪從翰墨間。受賜爲不少矣。而荏苒日月。漠然若先天事。追惟悲慨。每不勝堪。今於東潤碣文之託。豈忍以非其人辭諸。 조식(曺植)의 칠보시(七步詩)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조식이 지은 칠보시를 말한다. 조식은 문재(文才)가 뛰어났는데, 이를 시기한 형인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짓게 하고, 만일 짓지 못하면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조식은 과연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연두시(燃豆詩)를 지었다. 《世說新語》 온정균(溫庭筠)의 팔차(八叉) 당(唐)나라 온정균은 재주가 민첩하여 부(賦)를 지을 때 팔짱을 끼고 구상하였는데, 여덟 번 팔짱을 끼면 팔운(八韻)을 다 완성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온팔차(溫八叉)로 일컬었다. 《北夢瑣言 卷4 溫李齊名》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