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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寧金雅。訪余下沙。因請別韻。卽許之。 昔上蓬莱頂。滿山摠白雲。誰知眞面目。今日始逢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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惜別 石屛尋舊約。搴菊復看梅。雲襲三更枕。泉分一注盃。金篦從此別。碨磊向誰開。仙客吾何擬。淸塵夢百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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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견【규원】에게 답함 答金文見【奎源】 이보다 앞서 인편이 출발하였는데 모두 화급(火急)하여 단지 한 폭의 편지만 써서 여러 형이 돌아가면서 보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소략하기는 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뜻밖에 여러 형의 편지를 받았는데 각각 수백언(數百言)이나 되었습니다. 펼쳐 본 뒤 부지런함과 태만함이 서로 현격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저에 대한 칭찬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어찌 아우에게 그런 면이 있겠습니까. 한마디 말로 백대(百代)를 넘어 서로 감동하는 자가 있건만 하물며 한 시대를 함께 하면서 두 차례나 편지를 주고받은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아우가 어찌 다시 훈계를 할 만한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자연히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춘 대가가 있을 것입니다. 등잔을 밝히고 새벽을 잇는다는 것은 전한 사람의 망녕된 말입니다. 예전에 익힌 학업은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지식은 이어지지 않고 그저 오래도록 세월만 허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함양(涵養) 운운하신 것은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대체로 공부(功夫)는 동(動)과 정(靜)을 통합하여 말하는 것이지 적연부동(寂然不動) 한쪽만 가리켜서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부에는 본래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때, 궁리 격물(窮理格物)의 때, 성찰(省察)의 때가 있어 적연부동만으로 이 마음의 이치를 밝힐 수 없습니다. 또 적연부동에만 의지하면서 응접(應接)이 저절로 적절해지기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아마도 이보새(伊蒲塞)의 기미와 서로 멀지 않을 것16)16) 이보새(伊蒲塞)의……것:불교의 학설에 가깝게 된다는 말이다. 이보새는 범어 upāsaka의 음역으로, 오계(五戒)를 받은 재가 남자 불교 신도를 말한다. 우바새(優婆塞)라고도 하며 근사남(近事男), 근선남(近善男), 청신남(淸信男), 청신사(淸信士) 등으로 의역된다.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함양은 본래 학문의 본령입니다. 그러나 또한 눈꼬리를 치켜세우고 분을 부라려서 분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책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고 실심(實心)으로 실천하여 날이 쌓이고 달이 거듭된 다음에야 공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前此便發。擧皆火急。只擧一幅書。爲僉兄輪照計。雖涉草草。而其於力不及何哉。料外得僉兄書。各具數百言。披玩以還。甚愧勤慢之相懸也。吹噓過實。弟豈有是耶。以片言單辭。而有曠百世相感者。況竝一世而有再度往復耶。更加藥石。弟豈其人乎。天下自有一副大方可以當之者。焚油繼晷。傳之者妄也。舊業不記。新知無繼。只是悠悠玩愒而已。涵養云云。恐未穩。大抵功夫。是統動靜說。非但指寂然不動一邊說。且功夫固有存養時。有窮格時。有省察時。不可專以寂然不動。而明此心之理也。又不可專靠寂然不動。而欲應接之自得其宜也。若如此說。則與伊蒲塞氣味。恐不相遠。豈不可懼。涵養固爲學問之本領。然亦非撑眉努眼所可辦。必讀書窮理。實心踐履。日積月累而後。可以見功。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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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574)에 차운하다 次歸去來辭 무릇 간 곳이 있은 뒤에야 돌아갈 곳이 있는 법이니, 바로 도공(陶公)575)과 같은 경우이다. 나의 경우에는 애당초 간 곳이 없으니 어찌 돌아갈 곳이 있겠는가. 다만 귀숙(歸宿), 귀취(歸趣), 귀결(歸潔)의 취지로 이 글을 지었으니, 보는 사람들은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경진년(1940) 6월 모일.돌아가자 歸去來兮인세에 살기 어려우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人間難居胡不歸이미 하늘의 운수가 이와 같으니 旣天運之如此어찌 상심하여 홀로 슬퍼하기만 하겠는가 奚怊悵而獨悲이 몸이 말세 세상에 태어나니 身叔季之末먼 옛날의 일을 따르리라 마음먹는다오 生心古昔之遠追드넓은 천지에도 용납되지 않으니 廣天地之不容어찌 우리 도가 끝내 잘못된 것이겠는가 豈吾道之終非원자의 거친 밥을 달게 여기고576) 甘原子之糠食중씨의 해진 옷을 알맞게 여기며577) 適仲氏之弊衣구복의 하찮음을 믿고 諒口腹之賤小도의의 정미함을 본다오 見道義之精微마침내 영대를 바라보니 乃瞻靈臺천군이 밖으로 내달리지 않는구나578) 天君不奔형체는 그림자를 벗하고 形自友影발은 문밖을 나가지 않도다 足不出門잃은들 어찌 잃은 적이 있으랴 亡何嘗亡보존하면 참으로 보존된다네579) 存乃眞存배부름은 고기 밥상을 기다리지 않고 飽不待梁肉취함은 술동이로써 하지 않는다오 醉不以酒樽혹 날이 저물도록 말을 잊고 或竟晷而忘言느닷없이 얼굴 펴고 웃기도 하도다 忽有時而解顔담박한 맛을 진미로 여기고 味至淡而爲珍만나는 상황마다 늘 편안하다오 隨所遇而常安깊은 산에 문을 닫아걸으니 閉我門兮深山온갖 세상일과 상관없게 되도다 總萬事而無關천리의 운행은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理運渺其難測때때로 천문을 관찰하고 지리를 살핀다네 時俯察而仰觀옛날 장저와 걸닉580) 같은 은자들은 昔沮溺之隱者고원한 곳으로 초월해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超高遠而不還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는 矧今日之末梢어찌 그 기풍을 따라 배회하지 않으리오 盍趨風而盤桓돌아가자 歸去來兮조그만 방은 노닐기 좋은 곳이로다 斗室足以邀遊책속의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卷中人以爲師가르침을 구하는 동몽에 자신을 부친다오 竊自附於蒙求안자의 즐거움을 사모하고581) 慕顔聖之其樂맹자의 근심한 것을 생각하네 懷孟氏之所憂서자의 높은 풍도를 우러르니 仰徐子之高風밭에서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았고582) 食其力於田疇수부의 탁월한 식견에 감복하니 服秀夫之卓識애주에서 《대학》을 강학했다오583) 講大學於崖舟진실로 이로써 일생을 마치고 固以此而終身죽어도 고향을 잊지 않으리라 死猶不忘首丘세상이 끝없이 변화함을 보건대 相世變之罔極어찌 그리 도도하게 흘러가는가 何滔滔之一流만약 입에 올린다면 말이 추잡해지니584) 所可道也甚醜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치고 말도다 不忍言兮且休그만두어라 己矣乎만년의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되리오 桑楡晩景能幾時하고자 해도 일삼을 게 없고 欲爲兮無所事가고자 해도 어디로 간단 말인가 欲往兮何所之어버이의 남긴 몸을 받들어 스스로 깨끗이 하니 奉親遺而自潔타고난 것 온전히 지킴을 기약할 수 있도다 全天賦之可期세상길의 험난함을 보지 않고 不見世路荊棘오직 밭을 김매는 데 마음을 다하리라 惟勤心田耘耔남들이 비웃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니 任他人口笑罵뱃속에 들어 있는 시서에 부끄럽지 않아라 無愧腹中詩書이것이 진제585)로 돌아가는 것이니 是爲歸來眞諦당장 행해야 할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目下當行復奚疑○후창(後滄) 김공(金公)이 돌아가신 이듬해에 그 문인(門人)이 세상에 공의 유집(遺集)을 간행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공의 마음속으로 기약한 바에 대해 짧은 말이나마 해 달라고 말하였다. 내가 공에게 높은 산처럼 우러르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 높은 경지를 엿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제대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삼가 생각건대, 공의 고명한 자질과 탁월한 뜻은 진실로 이미 절륜한데, 마침내 구산(臼山 전우(田愚)) 선생에게 질정하러 나아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뜻을 들어 체득하고 온축하며 각고로 노력하고 오랫동안 쌓아 나감으로써 식견과 마음에 보존한 것이 또다시 공정(公正)하고 정밀해졌다. 그러므로 발휘되어 문장을 이룬 것이 간결하고 명쾌하며 곡절 있고 통창하였다.그 성리설(性理說)의 미묘함을 분석하고 학문의 핵심을 밝힌 것은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것을 형용해서 모두 극치에 이르렀고, 의리와 이욕의 분계를 논한 것은 추상처럼 엄격하여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과 왕복하여 논변할 때에는 묻기를 좋아하는 도량과 아집을 버리는 용맹함이 말뜻에 넘쳐났다. 그러한데도 이치와 일이 혹 어긋날까 염려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도를 강구하여 대심중생(大心衆生)586)의 바람이 한가로이 거처할 때에도 간절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공의 체용(體用)이 이에 갖추어졌다.아아, 공은 시운이 험난한 때에 태어나 궁벽한 산과 끊어진 언덕 사이에 몸을 숨겨 의리를 지키며 자정(自靖)하는 것을 궁극의 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차 뜻과 사업은 펴지 못하겠지만 세교(世敎)의 책임은 사양할 수 없었으니, 입언(立言)하고 책을 저술하여 선(善)을 돕고 악(惡)을 억누르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을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현의 도(道)와 생민의 강상(綱常)이 모두 다 실추되지 않게 하는 것도 공이 고심했던 바이다.그런데 사문(師門)의 무함하는 변고가 또 동문(同門) 안에서 일어나 인심을 헤아릴 수 없고 화기(禍機)가 번갈아 임박하였는데, 공은 만 길 절벽처럼 우뚝 서서 통렬하게 변론하고 준엄하게 논척함으로써 사도(師道)를 이로 말미암아 빛나게 하였다. 이를 좋아하지 않은 무리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공격하여 비록 공의 몸을 곤욕스럽게 하였지만, 끝내 가릴 수 없었던 것은 공이 주송(朱宋)587)의 대의를 본받은 점이다. 후세에 이 유집을 읽고 감회가 이는 자들은 그래도 공이 일세의 대유(大儒)가 되고 사문(師門)의 통서가 공을 의뢰하여 전해질 수 있었음을 알 것이다.을미년(1955) 동짓날에 안동(安東) 김노동(金魯東)이 쓰다. 有所往而後有所歸, 若陶公是也.余則初無所往, 安有所歸? 但以歸宿歸趣歸潔之意, 作此辭, 覽者諒之.庚辰六月日.歸去來兮, 人間難居胡不歸?旣天運之如此, 奚怊悵而獨悲?身叔季之末, 生心古昔之遠追.廣天地之不容, 豈吾道之終非?甘原子之糠食, 適仲氏之弊衣.諒口腹之賤小, 見道義之精微.乃瞻靈臺, 天君不奔.形自友影, 足不出門.亡何嘗亡? 存乃眞存.飽不待梁肉, 醉不以酒樽.或竟晷而忘言, 忽有時而解顔.味至淡而爲珍, 隨所遇而常安.閉我門兮深山, 總萬事而無關.理運渺其難測, 時俯察而仰觀.昔沮溺之隱者, 超高遠而不還.矧今日之末梢, 盍趨風而盤桓?歸去來兮, 斗室足以邀遊.卷中人以爲師, 竊自附於蒙求.慕顔聖之其樂, 懷孟氏之所憂.仰徐子之高風, 食其力於田疇.服秀夫之卓識, 講《大學》於崖舟.固以此而終身, 死猶不忘首丘.相世變之罔極, 何滔滔之一流?所可道也甚醜, 不忍言兮且休.己矣乎, 桑楡晩景能幾時?欲爲兮無所事, 欲往兮何所之?奉親遺而自潔, 全天賦之可期.不見世路荊棘, 惟勤心田耘耔.任他人口笑罵, 無愧腹中詩書.是爲歸來眞諦, 目下當行復奚疑?後滄金公旣沒之明年, 其門人刊行遺集于世, 謂余爲心期所在, 要有一言.余於公, 曾切高山之仰, 未窺其閫域, 則何能有所發揮之哉? 竊念公高明之姿、超卓之志, 固已絶倫, 迺就正臼山, 得聞天人性命之旨, 體認而蘊蓄, 刻苦而積累, 所見所存, 又復公正精密矣.故發而成文章者, 簡潔爽亮, 紆餘通暢.其剖析性理之微妙, 闡明學問之肯綮, 則毫分縷解, 形其難形, 皆極歸致至, 論義利界分, 則嚴如秋霜, 不可犯.然與人往復辨說, 好問之量、捨己之勇, 溢於意表, 猶恐理與事之或貳, 講究經濟, 大心衆生之願, 未嘗不切于燕居之中,則公之體用, 於斯備矣.嗚呼! 公生當陽九之運, 竄身於窮山斷壟之間, 以秉義自靖爲究竟.然其將志業之未伸, 而世敎之責, 有不得辭焉, 則立言著書, 扶抑尊攘, 靡極不至, 使聖賢之道、 生民之綱, 不盡墜地者, 亦公苦心之所在也.而師門之誣, 又起於同室之內, 人心叵測, 禍機交迫, 公則壁立萬仞, 痛辨嚴斥, 使師道由是而光焉.不說之徒, 譁而攻之, 雖折困公身, 而終不能掩者, 惟公師法朱宋之大義, 則後之讀斯集而興感者, 尙識其爲一世之大儒, 而師門之統緖賴而得傳也.乙未陽復節, 安東金魯東書. 귀거래사(歸去來辭) 남북조 시대 동진(東晉)의 은사이며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게 지내고자 한 삶을 노래한 작품이다. 도공(陶公) 도연명(陶淵明)으로, 이름은 잠(潛), 자는 연명,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원자(原子)의……여기고 원자는 공자의 제자인 원헌(原憲)이다. 그가 노(魯)나라에서 가난하게 살 때 거친 밥으로 이틀에 한 번 끼니를 때우면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자득(自得)한 뜻이 있었다고 한다.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 중씨(仲氏)의……여기며 중씨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이름이 중유(仲由)인 자로(子路)를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 其由也與.]"라고 자로를 칭찬한 말이 있다. 마침내……않는구나 영대(靈臺)와 천군(天君)은 모두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순자(荀子)》 〈천론(天論)〉에 "마음이 중앙의 텅 빈 곳에 있으면서 오관을 다스리니, 이를 일러 천군이라 한다.[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라고 하였다. 잃은들……보존된다네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해진 때가 없고,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한 말을 근거 삼아 말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유명한 은자(隱者)로, 세상일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고 숨어 살았는데, 《논어》 〈미자(微子)〉에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안연(顔淵)이 가난한 생활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를 추구했던 즐거움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雍也》 서자(徐子)의……살았고 서자는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를 가리킨다. 그는 진번(陳蕃)의 우대를 받아 천거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면서 공검의양(恭儉義讓)과 담박명지(淡泊明志)를 숭상하였다. 《後漢書 卷35 徐穉傳》 수부(秀夫)의……강학했다오 수부는 남송(南宋) 말엽의 충신 육수부(陸秀夫)를 가리킨다. 애주(崖舟)는 애산(崖山) 일대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라는 뜻이다. 남송 말엽에 송나라 조정은 원(元)나라 군대에 쫓겨 애산으로 도망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항거하였다. 당시 재상인 육수부는 배를 타고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임금인 위왕(衛王)에게 《대학장구》를 강론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론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론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만약……추잡해지니 《시경》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에 "만약 말할진댄 말이 추잡해지네.[所可道也. 言之醜也.]"라고 하였다. 진제(眞諦) 불교 용어로, 세속을 초월한 참된 진리를 의미한다. 대심중생(大心衆生) 불교 용어로, 보리살타(菩提薩陀) 또는 보살(菩薩)과 같은 말이다. 주송(朱宋)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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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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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권13 卷之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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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재 김공 묘지명 栗齋金公墓誌銘 공의 휘는 종국(鍾國), 자는 성일(聖一), 호는 율재(栗齋)이다. 김씨(金氏)는 계보가 경주(慶州)에서 나왔다. 휘 충한(沖漢)이란 분이 계시니, 호는 수은(樹隱)이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본조에 들어와 휘 영전(傳號)이란 분이 계시니, 호는 필암(蓽庵)이고, 참봉을 지냈다. 여러 대를 전해 내려와 휘 대기(大器)에 이르렀는데, 호는 경재(警齋)이고 진사를 지냈고,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에게 수학하였다. 이분이 휘 명철(命哲)을 낳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횡(鑅)을 낳았는데, 호가 태암(泰巖)이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운정(運鼎)인데, 감찰을 지냈고, 증조는 휘 희학(希學)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지형(之炯)인데, 장악원 정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 홍기(鴻基)인데, 호가 농와(聾窩)이다. 모친은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정영(鄭爃)의 따님이다. 공은 순묘(純廟) 정축년(1817, 순조17) 2월 28일에 신산리(薪山里)에서 태어났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였으니, 곡학(曲學)하는 선비의 기습(氣習)이나 구차한 유학자의 기습이 없었다. 처음에 시서(詩書)를 공부하다가 활쏘기와 말타기를 함께 익혔는데, 버들잎을 꿰뚫을 정도로 기예가 정밀하고 심오하였으며 용병술(用兵術)이나 기율(紀律)에도 모두 통달하였다. 술을 마신 뒤에는 《시경》〈진풍(秦風) 무의(無衣)〉 몇 곡조를 읊조렸으며, 《사기(史記)》를 읽다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 바다를 밟고, 장량(張良)이 진(秦)나라를 격파하였다는 등의 구절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무릎을 치며 북받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했다. 중년 이후로는 변고를 겪은 것이 점점 깊어지고 세상일을 겪은 것이 점점 많아져, 젊었을 때의 풍도는 규각(圭角)42)을 드러내지 않고 편안하게 수렴하여 날로 노성(老成)한 법도를 이루었다. 또 무사재(無邪齋) 박씨 어른과 만년에 이웃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교유하여 깨달은 것이 많았다. 병인년(1866, 고종3) 강도(江都)의 난43)에 그 족숙(族叔) 산남공(山南公)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는데, 약속이 이미 정해져 출발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문득 난이 평정되어 그만두었다.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에게는 우애 있으며,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었다. 규문을 잘 다스리고 정돈하여 조화로우면서도 예법이 있었고, 자손을 가르침에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으니, 아름다운 명성과 훌륭한 명예가 향리에 자자하였다.기유년(1909, 순종3) 4월 7일에 졸하였는데, 신산(薪山) 오른쪽 산기슭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상산 김씨(商山金氏)로, 김욱해(金郁海)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만원(萬源), 두원(斗源)이고, 딸은 흥덕(興德) 장대규(張大奎)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권주(權柱)이고, 손녀는 정재우(鄭在禹)에게 출가하였다. 차방손(次房孫)은 권율(權律), 권하(權夏), 권권택(權澤), 권권후(權厚), 권권신(權信)이고, 손녀는 구교열(具敎烈)에게 출가하였다.아, 공의 평생을 살펴보건대, 풍진세상에서 불우하였지만 뇌락(磊落)하고 강개(慷慨)함은 먼 후대에도 오히려 족히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같은 세상 같은 고을에 살면서 직접 인사드리지 못했으니,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권하(權夏)가 그 대인의 명을 받들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옛날엔 광견44)이지만 古之狂狷오늘날은 강개한 기상일세. 今之慷慨이로 인해 분별하여 因是裁之성취할 수 있었네. 可以有造만년에 좋은 이웃을 만나 晩接芳隣순박함을 회복하였네. 于以回淳신산의 기슭에 薪山之麓넉 자의 봉분이 있네. 四尺其崇봄가을로 향기로운 제물 올리니 春秋芬苾자손이 번성하리라. 子孫繩繩 公諱鍾國。字聖一。號栗齋。金氏系出慶州。有諱沖漢號樹隱。仕麗。官禮儀判書。入我朝。有諱永傳號蓽庵。參奉。累傳至諱大器號警齋。進士。受學於重峯趙先生。生諱命哲。壬辰擧義。贈掌樂院正。生諱鑅號泰巖。同中樞。從牛山安先生擧義。皆其顯祖也。高祖諱運鼎監察。曾祖諱希學。贈戶曹參議。祖諱之炯。贈掌樂院正。考諱鴻基號聾窩妣晉州鄭氏爃女公以純廟丁丑二月二十八日生于薪山里。天稟豪爽。無曲士拘儒之氣。初業詩書。兼習弓馬。穿楊碎柳。技藝精深。用兵紀律。無不曉解。酒後歌無衣詩數闋。讀史至魯連蹈海張良椎秦等處。廢書擊節。不勝其慷慨。中身以後。閱世漸深。更事漸多。少年風韻。不露圭角。而帖然收斂。日就孚老成規矩。又與無邪齋朴丈。晩而接隣。日夕遊從。多所契悟焉。丙寅江都之亂。從其族叔山南公。倡起義旅。約束己定。啓行有日。旋以亂平而止。孝於父母。友於兄弟。信於朋友。修整閨門。和而有禮。敎訓子孫。嚴而有法。令聞令譽。藉藉鄕里。己酉四月七日卒。葬薪山右麓子坐原。齊商山金氏郁海女。二男一女。男萬源斗源。女適興德張大奎。長房孫權柱。女鄭在禹。次房孫權律權夏權澤權厚權信。女具敎烈。嗚呼。迹公平生。其落拓風塵而磊落慷慨。百世之下。猶足相感。況在倂世同鄕而未得拜床。其恨爲何如也。權夏以其大人命。奉家狀。謁誌銘。銘曰。古之狂狷。今之慷慨。因是裁之。可以有造。晩接芳隣。干以回淳。薪山之麓。四尺其崇。春秋芬苾。子孫繩繩。 규각(圭角) 위가 뾰족하고 밑이 네모난 벽옥(璧玉 둥근옥)이 규(圭)이고, 이 벽옥의 뾰족한 모서리가 규각이다. 언행이 모가 나서 남과 잘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규각나다'라고 한다. 병인년 강도(江都)의 난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이른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천주교도 탄압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이다. 광견(狂狷) 《논어》〈자로(子路)〉에 공자가 "중도(中道)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광견한 사람과 함께 하겠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뜻이 크고 지조가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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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정공 묘지명 莘齋鄭公墓誌銘 공의 휘는 의상(義相), 자는 사균(士均), 호는 신재(莘齋)이다. 정씨(鄭氏)는 본래 하동(河東) 사람이다. 고려 때 밀직 부사(密直副使) 국룡(國龍)이 그 비조이다. 본조에 들어와 휘 지영(之英)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여해(汝諧)를 낳았으니 지평으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에게서 수학하였고,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세상에서는 둔재(遯齋)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휘 기령(箕齡)은 호가 양심재(養心齋)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문원(文黿)인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인채(仁采)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조부는 휘 석(錫)인데, 호가 반산(盤山)이다. 부친은 휘 양무(陽武)인데, 니, 문장과 행의(行誼)로 세상에 이름났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고명복(高命復)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기유년(1789, 정조13) 7월 28일에 능주(綾州)의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평범한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나아가고 물러남과 응대하는 예절이 있었으며,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어른에게 공경하였으며 자상하고 민첩함이 어른과 같았다. 집안이 평소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을 올리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공은 집안일을 잘 주간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니, 몸에 맞거나 입에 맞게 하여 어버이가 충분히 기뻐하시도록 힘썼다.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은혜로웠다. 전처와 후처가 모두 자녀를 두었는데,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온 고을에 두루 거처하였으니 한 마을에 함께 거주하는 시공지친(緦功之親)45)하는 자가 수십 호였다. 사람이 태어나면 축하하고 죽으면 위문하였으며, 흉년에 구휼하여 상황에 따라 어긋남이 없었고 은의(恩意)가 두루 미쳤다.공은 몸가짐[容儀]이 매우 위엄이 있어, 보는 자가 자연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온화하고 정성스러워 마치 술을 마시고 스스로 취한 듯하였다. 세상일을 잘 알고 물정에 해박하였으며, 말을 하는 데 장점이 있었고 일을 처리하는 데 뛰어났다. 이 때문에 공이 말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일을 할 때면 모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향리에서 언쟁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는 것과 복잡하게 뒤얽혀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모두 공에게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니, 비록 완강하여 교화하기 어렵고 완악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자도 공의 말을 들으면 어느새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며 굴복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만들 적에는 정자(程子)가 친족을 화합하게 한 훈계46)를 모방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 적에는 여씨(呂氏)가 고을에서 거처하던 위의47)를 따랐다. 선조인 둔재(遯齋) 선생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편집한 다음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임종할 때 두 아들을 불러 효도하고 우애 있게 하라고 경계하고, 친족들을 불러 화목하게 지내라고 경계하였다. 또 가까이 사는 붕우를 맞이하여 사람마다 영결을 고하였다. 이윽고 자리에 나아가 별세하였으니, 바로 갑자년(1864, 고종1) 11월 24일이다. 이곡(耳谷)에 장사 지냈다가 나중에 풍류치(風流峙)에 있는 선영의 부건(負乾) 언덕으로 이장하였다.배위(配位)는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상준(金相俊)의 따님이다. 계배(繼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백환(百煥), 차자는 주환(周煥), 딸은 양달환(梁達煥)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재한(在翰), 차방(次房)은 후사가 없어 종형(從兄) 명환(明煥)의 아들 재수(在洙)를 양자로 삼았다.아, 공은 우리 고을 선진(先進)이며 숙유(宿儒)이다. 나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우레 같은 높은 풍의(風義)를 익숙히 들었으나 가난과 병마로 구차하게 사느라 한번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공은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었다. 뒤에 재한(在翰)과 교유하게 되고, 지금 또 유장(遺狀)을 얻어서 읽어 보니, 더욱 당시에 듣지 못한 일을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지금 아득히 세상이 바뀌어 옛 것은 다 사라졌지만 오직 이 어른의 발걸음이 닿았던 촌락의 풍속은 순후하고 예스러워 현송(絃誦)이 끊이지 않으니, 이는 당시에 그분이 창도(唱導)한 힘이 아니겠는가. 아, 공경할 만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둔재 선생의 고가요 遯齋古家능주의 명문가일세. 綾陽名門선조 뜻 계승해 헛되지 않으니 繼述不空전형이 보존되었네. 典刑斯存전야에서 광채를 숨겼고 潛光畎畝산속에서 한가로이 지냈네. 養閒林樊그 유풍과 여운 遺風餘韻사랑스러워 할 만하네. 俾也可愛 公諱義相。字士均。號莘齋。鄭氏本河東人。勝朝密直副使諱國龍。其鼻祖也。入我朝。有諱之英。官縣監。生諱汝諧持平。受學于佔畢齋金先生。與一蠹寒暄爲道義交。世稱遯齋先生。諱箕齡號養心齋。中進士。皆其顯祖也。高祖諱文黿。贈參議曾祖諱仁采。壽陞正憲。祖諱錫號盤山。考諱陽武。以文行著世。妣長澤高氏命復女。以正宗己酉七月二十八日。生公于綾之華山里。幼而岐嶷。不類凡常。進退唯諾。出入孝弟。委曲敏贍。一如成人。家素貧。菽水戛戛。公極幹家務以就其養。便身適口。務盡其歡。御家衆。嚴而有恩。前後室皆有子女。而內外斬斬。無有間言。宗族甚繁。遍於一鄕。而緦功之親。同住一巷者。數十戶。生死問唁。飢饉賙恤。隨時無闕。恩意浹洽。公容儀甚嚴。見之者自然畏憚然接人酬語。溫溫諄諄。如飮醇自醉。諳於世故。該於物情。長於言辭。優於幹理。是以語人無不服。作事無不集。鄕里間。有爭辨而未平者。有盤錯而未解者。無不待公咨決。雖强梗難化頑忍無恥者。聽公言。不覺赧然愧屈。立門規。做程子合族之訓。說洞約。遵呂氏居鄕之儀。先朝遯齋先生遺稿。蒐輯編摩。刊行於世。臨終招二子。戒以孝友。招諸族戒以敦睦。又邀居近朋友。面面告訣。已而就枕而逝。卽甲子十一月二十四日也。葬耳谷。後移于風流峙先壟負乾原。配淸道金氏相俊女。系配金海金氏某女。有二男一女。長百煥次周煥。女適梁達煥。長房孫在翰。次房無嗣。以從兄明煥子在洙爲後。嗚呼。公吾鄕先進宿儒也。余在弱冠。艶聞風義。如雷灌耳。但貧病苟活。未得一就拜床。而因循之頃。公已千古矣。後得與在翰遊從。今又得其遺狀而請之。益聞當日之所未聞。方今桑海茫茫。舊物掃地。而惟是杖屨所經。村俗淳古。絃誦不絶。此非當日倡遵之力耶。吁可敬也。銘曰。遯齋古家。綾陽名門。繼述不空。典刑斯存。潛光畝畝。養閒林樊。遺風餘韻。俾也可諼。 시공지친(緦功之親) 시마친(緦麻親)과 대공친(大功親), 소공친(小功親)을 이른다. 정자(程子)가……훈계 정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한다.[管攝天下人心, 收宗族, 厚風俗, 使人不忘本.]" 하였다. 《近思錄》 여씨(呂氏)가……위의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을 만들었는데 이를 여씨향약(呂氏鄕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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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경에게 써서 주다 書贈曺泰卿 학문은 뜻을 세우는 것[立志]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도 뜻이 세워지지 않으면 성취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커다란 공부와 커다란 사업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천지를 위해서 마음을 세우고[立心] 생민(生民)을 위해서 도를 세우고[立道] 옛 성현을 위해서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萬世)를 위해서 태평 성세를 여는 것159), 이것이 사군자(士君子)가 세우는 뜻이다.그러나 일시적인 입지(立志)는 누구인들 없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뜻을 지키고 잃지 않아야만 큰일을 할 수 있다.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삼가고 두려워함160),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의 두려움과 공경스러움161), 공자(孔子)가 말한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엄숙히 하는 것162), 자사(子思)가 이른 경계하고 근신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163)이 그것이다. 이것이 성인과 성인이 주고받은 첫 번째 요결(要訣)이며 치지(致知)와 독행(篤行) 등의 각종 공부가 모두 여기로부터 나왔다. 천하에 어찌 근원 없는 물줄기, 기초 없는 건물이 있겠는가. 이에 뜻을 세우고 뜻을 지키는 데 관한 말로 태경(泰卿)을 면려한다. 學莫先於立志。夫日用小事。未有志不立而能有所就。況大工夫大事業乎。爲天地立心。爲生民立道。爲往聖繼絶學。爲萬世開太平。此士君子所立之志也。然一時立志。誰曰無之。必須持其志而不失。可以有爲。持之如何。堯舜之兢兢業業。湯文之栗栗肅肅。孔子所謂正衣冠尊瞻視。子思所謂戒愼恐懼是也。此是聖聖授受第一要訣。而致知篤行種種工夫。皆從此出。天下安有無源之流。無基之築哉。玆以立志持志之說。爲泰卿勉焉。 천지를……여는 것 《근사록》 〈위학(爲學)〉에 장재(張載)가 이르기를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정립하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정립하며,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 시대를 열어야 한다.[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絕學, 爲萬世開太平.]"라고 하였다. 요(堯)임금과……두려워함 《서경》 〈우서(虞書) 고요모(皐陶謨)〉에 보이는 말이다. 탕왕(湯王)과……공경스러움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덕을 찬양하면서 "궁중(宮中)에 계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종묘(宗廟)에 계실 때에는 공경스러웠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항상 임재(臨在)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여기셨고, 싫증내어 나태하지 않은 때에도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보전하셨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공자(孔子)가……하는 것 《논어》 〈요왈(堯曰)〉에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다섯 가지 미덕을 가르쳐 주면서 "군자는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엄숙히 한다."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자사(子思)가……두려워하는 것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때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는 때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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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오의 자에 대한 설 文敬五字說 사문(斯文) 문재희(文載熙)가 처음에는 경오(敬於)를 자(字)로 삼았는데, 대체로 "오집희경지(於緝熙敬止)"169)에서 취하였는데, 어느날 내가 '오(於)'를 '오(五)'로 고치기를 권하여 곧 경오(敬五)가 되었다. 경오(敬五)가 말하기를, "자(字)에 설(說)이 있는 것은 옛 법도입니다. 저를 위해 설명을 덧붙여 그 뜻을 자세히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경오는 내 고향의 선사(善士)170)이다. 평소에 아끼고 우러렀기에 굳이 사양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망녕되이 고친 것이 있건만 감히 고치게 된 뜻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겠는가. 무릇 학문의 도는 단지 지선(至善)의 소재를 밝히고 지선(至善)의 경지에 머물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선의 소재를 밝히는 방도는 하루아침에 깨닫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반드시 거듭 쌓이고 계속된 다음에야 그 공을 알 수 있으며, 지선의 경지에 머무는 방도는 막혀 있는 채로 돌아보지 않는 것을 이르지 않고 반드시 장엄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기른 다음에야 힘을 쏟을 수 있다. 이것은 집희경지(緝熙敬止) 이 네 자에 이미 남김없이 전부 담겨있다.그러나 선후 완급(先後緩急)의 순서에 적합하지 못하면 이른바 '밝힌다[明]'라는 것은 바람을 움켜잡고 물에서 달을 건지려고 생각하게 되고 이른바 '머문다[止]'라는 것은 싹을 뽑아 자라는 것을 돕는171) 우환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집희경지(緝熙敬止)의 아래 문구에 '임금이 되어서는[爲人君]' 이하 다섯 가지의 세목172)이 있게 된 까닭이다. 이 다섯 가지는 바로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절실한 부분으로 손을 대고 첫걸음을 내딛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약여(躍如)173)하지 않겠는가.'희(熙)' 자로 이름을 짓고 '경오(敬五)'를 자로 정하였으니 그 뜻이 서로 의지하고 그 공부가 번갈아 갖추어져 체(體)가 있으면 용(用)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수 있다. 경오는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쉬지 않고 정진하기 바란다. 이른바 "시선이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지 않지만 도가 거기에 있다."174)라는 말도 또한 처음부터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文斯文載熙。表德初以敬於。蓋取於緝熙敬止之語也。一日余勸其改於以五。卽敬五也。敬五曰。字之有說古也。願爲之敷衍其義也。夫敬五吾鄕善士也。尋常愛仰。有難牢讓。況妄有所改。而敢不輸道其改之之意耶。夫學問之道。只是明夫至善之所在。而求止乎至善之地。明之之道。非一日頓悟之謂。必積累繼續而後。可見其功止之之方。非膠滯不顧之謂。必莊敬持養而後。可以爲力。此緝熙敬止四字。已說盡無餘蘊矣。然非有以適於先後緩急之序。則所謂明者。有捕風撈月之想。所謂止者。有揠苗助長之患。此緝熙敬止下文。所以有爲人君以下五者之目也。五者是人生日用平常切近之地。而所以示人下手發足之方。其不躍如乎。名之以熙。字之以敬五。其義相須。其功交備。可以有體而有用有始而有卒矣。願敬五顧名思義勉勉循循。則所謂不下帶而道存。亦未始非此耳。 오집희경지(於緝熙敬止) 《시경》 〈문왕(文王)〉에 "심원하도다, 우리 문왕이시여. 아, 실로 계속해서 공경하는 덕을 밝히셨도다.[穆穆文王, 於緝煕敬止.]"라고 하여 문왕의 덕을 칭송한 말이다. 선사(善士)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善士), 즉 훌륭한 선비일 경우에는 한 고을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한 나라의 선사일 경우에는 한 나라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선사일 경우에는 천하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또 옛사람을 숭상하여 논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싹을……돕는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말이다. 임금이……세목 《대학》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목목한 문왕이여, 아! 계속하여 밝혀 공경하여 머무르셨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무르시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머무르시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머무르시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로움에 머무르시고, 나라 사람과 사귈 때는 믿음에 머무르셨다."라고 하였다. 약여(躍如)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군자는 활을 당기고 쏘지 않으나, 약여하여 중도에 서 있거든 능한 자가 따르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표현이다. 시선이……있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말은 평이하면서도 뜻은 심원한 것이 좋은 말이고, 지키기는 간단해도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 좋은 도이니, 군자의 말은 눈앞의 일상을 얘기하지만 거기에 도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희의 주에 "옛사람들은 시선이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허리띠 위는 바로 눈앞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지극히 가까운 곳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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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여에게 답함 答李寬汝 10월이 다하려 하고 추위의 위세가 맹렬한데 가르치고 배우면서 지내는 안부가 계절에 맞추어 편안하신지 그리운 마음 늘 지극합니다. 계원(啓元)은 결국 저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총명함과 깨달음이 실로 비통하기만 합니다. 지난날 병환이 위독할 때 편지를 보내 작별 인사를 청하기에 마침내 경립(景立) 등 여러 벗과 찾아갔습니다. 손을 잡고 말하기를, "부귀공명은 정해진 명이 있으니 추구하지 못하였고 평생에 걸친 포부와 소망이 궁리(窮理)와 수신(修身)이었습니다. 천지 사이에 헛되이 왔다 가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제 병세가 이와 같으니 분명히 이 세상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장(吾丈)께서는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자기 선인(先人)의 행장(行狀)을 부탁하였는데, 저는 병세가 매우 위급한 것을 보고 물러나 즉시 행장을 지어 이달 14일에 비로소 부쳐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생사가 위급하고 정신과 기력이 다한 시각에도 오직 학문에 관한 일만은 간절히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품었던 마음을 살펴보자니 매우 비통합니다. 바라건대 오당(吾黨)의 익우(益友)들은 이렇게 한가하고 탈이 없는 때를 맞아 더욱 힘을 쏟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 벗이 죽음을 맞으면서까지 간절하게 잊지 못했던 정의(情意)를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익중(翊中)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벗께서 먼저 논의를 꺼내어 병 중에 있을 때는 먹을 것을 도와주고 죽은 뒤에는 모여서 조문하는 의절을 마련하셨다니, 가까이 교제했던 사이에 서로를 돌보는 후의(厚意)에 감복(感服)하였습니다. 일전에 보낸 익중의 편지는 혹시 보셨습니까? 기근이 비록 심하더라도 제힘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하필 이렇게까지 근심을 끼치겠습니까. 다시 여러 형과 의논하여 거둔 물품을 다시 나누어 돌려주십시오. 간절히 바랍니다. 陽月垂盡。寒威漸緊。卽惟斅學節宣。以時勝適。溯仰每至。啓元竟作泉臺人。其聰明開悟。實可痛傷。何日病劇時。走書請訣。遂與景立諸友往之。握手語曰。富貴功名。有命不可求。平生志願。是窮理修身。庶不爲天地間虛來底人。今病勢如此。其不得爲陽界人決矣。惟吾丈益加勉勵也。且以其先人行狀托之。余見病勢甚危。退卽構之。今十四日始付去。而此人乘化。在十五日。其入覽與否。未可知也。嗚乎。雖在死生危急神氣耗奪之時。而惓惓不忘。惟在於學問一事。究其情曲。極可悲也。願吾黨諸益。迨此閒暇無故之時。益可勉焉。又以慰此友臨歿惓惓不忘之意也。昨得翊中書。自吾友發論。病時有饌物之助。歿後有會哭之節。無非親契間相厚之義。感服感服。日前所與翊中書。或見之耶。飢饉雖甚。而私力可支。何必貽慮至此也。更與僉兄議之。所收之物。更爲散還也。企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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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에게 보냄 與李德哉 서한에서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근래 형세가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무릇 일본(一本)과 대본(大本)은 본래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분하자면 일본은 이(理)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대본은 심(心)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만수(萬殊 만물의 다양함)와 대가 되고35) 대본은 달도(達道)와 대가 됩니다.36) 또 일본과 만수는 본래 나뉘는 경계가 없습니다. 일본을 말하면 만수가 이미 갖추어지고 만수를 말하면 일본은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나누어 말하자면 나뉘는 경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으니 현자(賢者 상대방)가 말씀하신 "물은 샘에 근본하고 나무는 뿌리에 근본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理)와 기(氣)는 본래 선후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근원으로 말하면 이 이(理)가 있은 다음에 이 기(氣)가 있으니 이가 먼저이고 기가 나중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운행으로 말하면 이 기가 있은 다음에 이 이가 갖추어지니 기가 먼저이고 이가 나중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성(性)은 본래 오성(五性)의 총체적 명칭이지만 혼연(渾然)하게 뒤섞여 있는 것 가운데 또 찬연(粲然)하게 구분하여 말할 것이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 형상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리를 나란히 하고 함께 서 있는 것은 마치 화살의 활촉과 같고 각기 껍질이 있는 것은 석류의 씨와 같다."라고 한다면 잘못입니다. 합하여 말한다면 하나의 성(性)이라고 이를 수 있지만 나누어 말하자면 오성(五性)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자(朱子)가 "하나의 성이 혼연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오리(五理), 오태극(五太極)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조리(條理)나 문리(文理)를 이른다면 천하에 어찌 일찍이 오리만 있겠습니까. 태극이 이(理)의 총체적 명칭이라면 세상에서 또 어찌 일찍이 오태극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성(性)이 이(理)를 감싸 안고 있는 것이라면 일성(一性), 오성(五性)이라고 이르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좁은 견문으로 어찌 조그마한 의미라도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강습(講習)의 도리로 볼 때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보잘것없는 생각을 말씀드리니 거듭 신중하게 생각하여 회답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示喩縷縷。足見近日喫緊。甚不草草。夫一本大本。固無二致。然細分之。則一本是理上說。大本是心上說。是故一本與萬殊爲對。大本與達道爲對。且一本萬殊。固無界位。言一本而萬殊已具焉。言萬殊而一本不外焉。然若以分言之。則不可謂全無界位。如賢所謂水本於源。木本於根是也。理氣本無先後。然若以源頭言。則有是理。而後有是氣。謂之理先氣後可也。若以流行言。則有是氣而後是理具焉。謂之氣先理後可也。性固五性之總名。而渾然之中。又不無粲然之可言。以此意會。其象可見。若曰齊頭倂立。如箭之有簇。各有甲殼。如榴之有核則誤矣。合而言之。則謂之一性可也。分而言之。則謂之五性可也。是以朱子不曰一性渾然云云乎。但五理五太極。不成說理是條理文理之謂。則天下何嘗有五理而已乎。太極是理之總名。則天下又何嘗有五太極之可言乎。若夫性是理之結窠處。則謂之一性五性豈有不可乎。謏聞寡見。安足以發明萬一之意。但於講習之道。不容無答。玆以仰布鄙意。幸加三思而爲之回敎之。如何。 일본은……되고 《주자어류》에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근본이 되는 것과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은,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나가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와 수많은 가지와 잎이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子語類 卷27 論語9 里仁篇下 子曰參乎章》 대본은……됩니다 《중용장구》 제1장에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이른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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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견에게 답함 答李光見 한결같은 마음을 독실히 지켜 세속의 어지러운 일에 이끌리지 않으시니 좋은 일입니다. 우러러 기상(氣象)을 생각하자니 저도 모르게 청상(淸爽)함이 부럽습니다. 지금부터 지속해 나가서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용납하지 않게 된다면 공자(孔子)ㆍ안자(顔子)의 즐거움,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ㆍ정자(程子 정호(程顥))의 화창한 바람이나 밝은 달과 같은 인품37)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집안을 꾸리는 여가에 펼쳐 놓고 감상하는 것이 근래에 「홍범(洪範)」에 있으니 우리 벗께서 심력을 다하는 근실함은 일반 사람이 미칠 수 없습니다. 어찌 옛날의 위 무공(衛武公)38)과 거원(蘧瑗)39)만이 미덕(美德)을 독차지하겠습니까. 의림(義林)은 타고난 기질이 매우 박약하고 또 평소에 배양한 힘도 없습니다.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쇠퇴한 정도가 더욱 심해서 비록 애써 일으켜 세우고자 하더라도 곧 다시 옛날대로 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우리 벗께서 저를 위해 채찍질하여 때를 놓치고 상황이 지나버린 뒤 끝에 터럭만큼의 수확이라도 거두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기를 처음부터 바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謹守一心。不爲俗撓所牽引。好事好事。想仰氣象。不覺淸爽可艶。從此接續。至於些子不容。則孔顔之樂。孟子之浩然。周程之光風霽月。可以見之矣。幹務餘力。所以被玩。近在洪範。吾友心力之勤實。非常調人可及。衛武蘧瑗。豈惟專美於古也。義林稟氣甚薄。又無素養之力。至於老而頹靡益甚。雖欲作力扶竪。而旋復如故。奈何奈何。願吾友爲之鞭策之。俾有絲毫之收於失時過境之餘者。未始非區區之望也。 화창한……인품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에 대해 일컫기를, "인품이 매우 높아서 가슴속의 시원함이 마치 광풍제월과 같다.【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 하였고, 주희는 정명도(程明道)의 군자다운 모습에 대해 "봄기운처럼 따뜻하고 산처럼 우뚝 섰으며, 옥빛처럼 아름답고 종소리처럼 웅장했다.【揚休山立, 玉色金聲.】"라고 칭송하였다. 《宋史 卷427 周敦頤列傳》 《朱子全書 卷66 六先生畫像贊 明道先生》 위 무공(衛武公) 9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깨울 만한 좋은 말을 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고 전한다. 《시경(詩經)》 〈위풍 기욱(淇奧)〉이 그의 덕을 칭송하는 시로 알려져 있다. 거원(蘧瑗)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로 자가 백옥(伯玉)이다. 《장자》 〈칙양(則陽)〉에 "거백옥은 나이 육십이 되는 동안 육십 번이나 잘못된 점을 고쳤다.【蘧伯玉, 行年六十而六十化.】"라고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나이 오십에 사십구 년 동안의 잘못을 깨달았다.【年五十, 而知四十九年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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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의 큰 잔칫날에 사의와 여안이 시에 개연히 차운하다 2수 彼人大宴日 士毅汝安有詩 慨然 次韻 【二首】 홀로 가을바람 맞으며 눈물 자욱 씻는데 獨倚秋風灑淚痕저 사람은 삼대가 이미 얽힌 뿌리라네 彼人三世已盤根어찌하여 팔도에 남아 하나 없는 것인가 胡無八域一男子제멋대로 붉은 깃발이 읍촌에 퍼져있네 任爾紅旗遍邑村이전에 병법을 배우지 못해 한스러워라 却恨從前未學兵금수401)가 밝은 하늘 더럽힘을 앉아서 보네 坐看蹄跡褻天明수명 늘릴 술법도 없어 거듭 탄식하는데 重歎難得長年術강가에는 우수수 낙엽 소리만 들리네 江上蕭蕭落木聲 獨倚秋風灑淚痕, 彼人三世己盤根.胡無八域一男子, 任爾紅旗遍邑村.却恨從前未學兵, 坐看蹄跡褻天明.重歎難得長年術, 江上蕭蕭落木聲. 금수 원문의 '제적(蹄跡)'은 금수(禽獸)의 발자국으로 악인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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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의 화를 입었을 때 감회를 적다 12월 1일 ○2수 被震禍時 識感 【十二月十日○二首】 스승은 간옹이요 부친은 벽봉269)인데 師曰艮翁父碧峯일찍이 도의로 몽매한 나를 가르치셨지 曾將道義敎昏蒙지금까지 조심조심 받들어 지녀왔으니 至今戰戰奉持去황천에서도 잘 모시고 따를 수 있으리 庶可泉臺好侍從사악을 내치고 정의를 지킴은 추성270)에서 본받고 斥邪衛正法鄒聖목숨 바쳐 스승을 높이는 건 예경에서 익혔다네 致死尊師講禮經부앙해도 이 마음 부끄러움은 없으나 俯仰此心無愧怍단지 학업을 정밀히 닦지 못해 탄식하네 只歎學業未硏精 師曰艮翁父碧峯, 曾將道義敎昏蒙.至今戰戰奉持去, 庶可泉臺好侍從.斥邪衛正法鄒聖, 致死尊師講禮經.俯仰此心無愧怍, 只歎學業未硏精. 벽봉(碧峯) 김택술의 부친 김락진(金洛進, 1859~1909)의 호이다. 추성(鄒聖) 맹자(孟子)를 가리키는데, 그의 고향이 추(鄒)이고 아성(亞聖)으로 칭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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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 허명갑을 면려하다 勉許秀才明甲 공부가 깊어지면 글맛이 항상 흘러 넘치고 功深書味常流露덕이 성대해지면 겸손의 빛290)이 더욱 길상하다네 德盛謙光更吉祥이 시를 긴요하게 여기고 반복해 읊조려서 喫緊此詩三諷咏평생 그대를 위해 보배로 삼아야 하리라 畢生爲汝作珍藏 功深書味常流露, 德盛謙光更吉祥.喫緊此詩三諷咏, 畢生爲汝作珍藏. 겸손의 빛 '겸광(謙光)'은 겸손한 덕이 밖으로 성대하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주역(周易)》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겸손하면 높은 이는 더욱 빛나고, 낮은 이도 사람들이 넘을 수 없으니, 군자의 끝마침이다.[謙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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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15)에서 현판 위의 시에 차운하다 實相寺次板上韻 불교는 예로부터 허와 공을 숭상했는데 佛尙虛空自古時어찌하여 절의 이름은 이와 반대인가 胡然寺號反於斯내악16)을 차지해 숨으니 마음속이 평온하고 占藏萊嶽中心穩삼한17)을 다 겪으니 지난 세월이 더디네 閱盡三韓往劫遲길손아 좋은 경치 없다고 말하지 말게나 行客休言無勝槪여러 암자들 다 이곳에서 갈라져 나왔지 諸菴皆得此分枝월사가 훌륭한 솜씨로 시 지어 남겼으니18) 月沙高手留詩跡우리 선조 계옹이 옛 친구를 만난 듯하네 吾祖溪翁見舊知-《월사집(月沙集)》에 이르기를 "변산(邊山)을 유람할 때 참봉(參奉) 김횡(金鋐)19)을 방문했다." 하였다.- 佛尙虛空自古時, 胡然寺號反於斯?占藏萊嶽中心穩, 閱盡三韓往劫遲.行客休言無勝槪, 諸菴皆得此分枝.月沙高手留詩跡, 吾祖溪翁見舊知.【《月沙集》云?遊邊山時, 訪金參奉鋐?.】 실상사(實相寺)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사찰이다. 내악(萊嶽)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변산(邊山)을 가리킨다. 삼한(三韓) 고대 우리나라 남부에 있던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말한다. 월사(月沙)가……남겼으니 《월사집(月沙集)》 제18권 〈부습유록(附拾遺錄)〉 에 〈변산을 유람할 때 참봉 김횡을 방문하여 술자리에서 시를 짓다〔遊邊山時歷訪金參奉鋐酒席口占〕〉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월사는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호이다.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ㆍ이식(李植)ㆍ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힌다. 김횡(金鋐) 본관은 부안, 호는 죽계(竹溪)이다. 생원시에 장원 입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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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서【병섭】에게 답함 答李鳳瑞【秉燮】 뜻하지 않게 안부 편지를 받아 펼쳐서 완미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벽산(碧山)에서 예를 익히고 송정(松亭)에서 시문(詩文)을 주고받고 침정(枕亭)에서 시가를 읊조리는 일이 덧없는 인생의 고상한 취미라는 것은 과연 형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충분한 도리를 추구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즐거움24)은 설령 성급하게 논의하지 못하더라도 흥국(興國)25)과 아호(鵝湖)26)의 유람은 기풍과 자취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를 읊으면서 한가로이 날을 보낼 뿐이라면 불행스럽게도 진(晉)나라 때의 청담(淸談)이 여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들의 행위가 후자에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전자에 전일(專一)한 것을 보지 못했다면 역시 당연히 반성하여 뒷날의 감계(鑑戒)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오늘부터 결단코 한 번 출입하고 한 번 안부를 묻더라도 실질에 충분히 힘을 쏟아 약간의 효과를 거두어 헛된 명성에 귀착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눈앞에 닥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다."27)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학자들이 마음을 세우는 근본적인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외물로 향하고 명예를 추구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거짓이 됩니다. 料外承訊。披玩感感。碧山禮遊。松亭唱酬。枕亭風詠。此是浮生勝致者。果如兄敎。然求其十分道理。則末矣。沂雩之樂。縱未遽議。而興國鵝湖之遊。風蹟可考。若以一觴一詠。優遊度日而已。則晉室淸曠.不幸近之矣。向日吾輩之爲。雖不可謂出於彼。而亦未見其專於此。則亦當反省。為。後日鑑戒處也。大抵吾輩斷自今日。雖一出入。一寒喧。十分務實。俾有多少效益。而不爲虛聲所歸。豈非目下計耶。傳曰衣錦尙褧。此是學者立心地本也。纔有向外近名底意。便是僞也。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의 즐거움 기우(沂雩)는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인다는 말로 산수간에 노는 즐거움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先進》 흥국(興國) 중국 호북성(湖北省) 한양현(漢陽縣) 북쪽에 있는 절의 이름으로 본래 이름은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이다. 정호(程顥)가 장재(張載)와 함께 흥국사에서 종일 강론하고서 "옛날에도 어떤 사람이 이 자리에서 이런 강론을 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4》 아호(鵝湖) 아호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신주(信州) 연산현(鉛山縣)에 있는 산으로,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주희와 육구령(陸九齡),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이 산의 아호사(鵝湖寺)에 모여 논쟁을 펼친 바 있다. 비단……덧입는다 《중용장구》 제 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겉에 홑옷을 걸친다.'고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해서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시경》은 위풍(衛風) 석인(碩人)과 정풍(鄭風) 봉(丰)을 말하며 모두 '의금경의(衣錦褧衣)'로 되어 있는데, 뜻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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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방 매곡 최공 묘지명 察訪梅谷崔公墓誌銘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광(銧), 자는 중백(重伯), 호는 매곡(梅谷),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신라(新羅) 원보상(元甫相) 흔(昕)이 그 시조이다. 휘 지몽(知夢)에 이르러 고려 태조를 섬겨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는데,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추(湫)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난계(蘭溪)이고, 관직은 참판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휘 치호(致湖)에 이르렀는데, 이 분의 호는 상덕재(尙德齋)로, 교리를 지냈다.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결(潔)인데,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다. 조부는 휘 경남(慶男)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부친은 휘 정민(廷敏)인데,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이다. 모친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민경우(閔敬雨)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 1월 13일에 장흥(長興) 와리(瓦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기개가 빼어나고 성정과 도량이 온화하고 순량하였다. 집안에서는 부모를 섬기고 나가서는 어른을 섬겼다. 말은 마치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고 몸가짐은 옷을 가누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독서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봉양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여 마침내 명경(明經)으로 과거 공부하여 기쁘게 해 드리려는 계책으로 삼았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 낙방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시상(時象)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마침내 은거하여 응시하지 않았다. 이어서 연달아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으니 나이가 이미 너무 많아서 이 때문에 과거 공부를 접고자 하니, 친척이 권유하여 말하기를 "비록 기쁘게 해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다만 문호(門戶)를 일으킬 계책에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례에 따라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계사년(1653, 효종4)에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업무를 본 지 한 해 남짓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흥에서 능주(綾州)의 가옥치(佳玉峙)로 이사하였다. 이는 고요한 곳에서 한가롭게 지낼 계책이었으니, 옛 벗들과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서로 교유하였다.기유년(1669, 현종10) 6월 10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81세이다. 능주의 서쪽 오리동(五利洞) 앞 산기슭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김후장(金厚璋)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지순하였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동망(東望), 차자는 동로(東老), 삼남은 동효(東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문룡(鄭門龍)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은 온갖 고생을 하였지만 아름다운 광채를 간직하였고, 70세에 이르러 비로소 찰방 한 직임을 받고 그쳤으니,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은 것이 어찌 공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잘되는 보응(報應)은 마땅히 누리는 때가 있을 것이니, 최씨 후손은 힘쓸지어다.8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하늘에 달렸고 遇不遇天얻고 얻지 못함은 명에 달렸네. 得不得命이 때문에 군자는 是以君子천명을 즐거워하고 명을 편안하게 여기네. 樂天而安命 公姓崔。諱銧。字重伯。號梅谷。貫朗州。新羅元輔昕。其始祖也。至諱知夢。事麗太祖。封東萊侯。諡敏休。至諱安雨。入我朝。軍器寺小監。六傳而諱湫號蘭溪。官參判。再傳而諱致湖號尙德齋。校理。於公爲高祖。曾祖諱潔。典牲署參奉。祖諱慶男。禦侮將軍。考諱廷敏。訓鍊奉事。妣驪興閔氏敬雨女。以萬曆己丑正月十三日。生公于長興之瓦里。氣宇秀爽。性度溫良。入事父母。出事長上。言若不出口。身若不勝衣。性勤讀書。手不釋卷。嘗念家貧親老無以爲養。遂業明經爲供歡計。累擧鄕解。輒屈禮部。當光海時。見時象不佳。遂隱不赴試。繼而連遭內外艱。服闋。年己耆艾。因欲廢擧。親戚强之曰。雖無獻悅之地。獨不爲門戶計耶。己丑擢第。例授奉常寺直長。癸巳除栗峯道察訪。視職歲餘。以老謝歸。自長興移寓于綾州之住玉峙。盖爲就靜養閒計也。與知舊士友。文酒相從。己酉六月十日卒。得年八十一。葬于綾之西五利洞前麓酉坐原。配金海金氏厚璋女。婦德純至。擧三男一女。長東望次東老次東曉。女適河東鄭文龍。孫以下不錄。嗚呼。公積若累艱。蓄章儲輝。至於行年七十。而始得攻駒一職而止。位不稱德。豈有如公者乎。然不食之報。當有享受之日。崔氏其勉乎哉。八世孫昌柱南杓奉家狀。來謁誌銘之文。銘曰。遇不遇天。得不得命。是以君子。樂天而安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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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성재 고공 묘지명 通政大夫惺齋高公墓誌銘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진오(鎭俉), 자는 성순(聖巡), 호는 성재(惺齋)이니,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계보는 장흥(長興)에서 나왔는데, 신라와 고려 사이에 대대로 작위와 공훈으로 이름이 났다. 휘 신전(臣傳)에 이르러 호조 참의를 지냈다. 이분이 휘 열(悅)을 낳았는데,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이분이 휘 상덕(尙德)을 낳았는데,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휘 가한(可漢)에 이르렀는데, 호가 봉강(鳳岡)으로,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명림(命霖), 호는 경재(敬齋)인데, 문학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의 휘는 산택(山宅)이니,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은 휘 세은(世殷), 호가 담암(澹庵)인데, 효우로 칭송을 받았다. 모친은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이영(李榮)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무오년(1798, 정조22) 2월 5일에 공이 이지촌(鯉池村)에서 태어났다.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김에 부지런히 일하고 봉양하여 몸에 편안 것은 다 바쳤고, 평소 모친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숙사(塾舍)에 있을 때면 날마다 반드시 세 번 문안을 드렸다. 모친에게 병환이 있으면 몹시 근심하여 잠자리에 들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다른 일은 제쳐 두고 모친의 뜻에 맞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장례의 모든 절차를 갖추어 반드시 성실하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졌다. 중년에 개연히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논어》, 《맹자》,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의 책들을 가지고 주야(晝夜)로 연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보이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들리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48)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제일의 방법이니, 잠시라도 소홀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라고 하고 자리 곁에 써 붙여 놓고서 늘 보았다. 규문을 정돈하고 자손을 가르침에 화평하면서도 은혜로웠으며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친척과 친구의 자손 가운데 고아가 되어 혼인하지 못하고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주어 혼인할 시기를 놓치거나 배우는 때를 놓치는 탄식이 없게 하였다. 흉년에는 그의 도움으로 밥을 지어 먹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무진년(1868, 고종5) 1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지(鯉池) 왼쪽 산기슭 원봉(圓峯)의 아래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동일(李東一)의 따님이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제문(濟文), 제옥(濟玉), 제식(濟植)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남호(李南鎬), 광산(光山) 이치호(李致鎬), 이천(利川) 서학규(徐學奎), 남평(南平) 문영욱(文永郁)에게 출가하였다. 장방(長房)은 2남이니, 황(榥)과 모(模)이다. 이방(二房)은 3남이니, 용주(容柱), 헌주(憲柱), 만주(萬柱)이다. 삼방(三房)은 1남이니 기주(麒柱)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증손 광무(光茂)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늘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惺惺維何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한 것일세. 戒愼恐懼큰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大本旣立온갖 선이 갖추어지네. 萬善斯具멀고 외진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며 婆娑遐隅세상과 서로 잊었네. 與世相忘넉 자의 무덤이 있으니 圓峯四尺군자가 묻힌 곳일세. 君子維藏 公姓高。諱鎭俉。字聖巡。號惺齋。壽階通政。系出長興。羅麗間。世著爵勳。至諱臣傳。官戶曹參議。生諱悅。戶曹參判。生諱尙德。司憲府持平。至諱可漢號鳳岡。卽公之高祖也。曾祖諱命霖號敬齋。文行著世。祖諱山宅。有隱德。考諱世殷號澹庵。孝友見稱。妣光山李氏榮女。正宗戊午二月五日。公生于鯉池村。早失所怙。以未得逮養爲終身恨。事母夫人。服勤就養。便身畢給。平居未嘗離側。若在塾舍。則日必三省。有疾極其憂。不就寢席。不御酒肉。舍置餘事。惟以迎合爲急。遭故。哀毁罔極。絶而復蘇。送終凡具。必誠無憾。早業功令。文詞夙就。中年慨然有志乎爲已之學。將論孟心經近思錄及性理諸書。晝夜硏究。嘗曰。恐懼不睹。戒愼不聞。此是端本第一法。不可斯須而忽忘。書諸座側以常目焉。修整閨門。敎誨子孫。和而有恩。嚴而有法。親戚知舊。有孤而未婚貧而未學者。爲之助力。俾無失時失業之歎。遇饑歲。待以擧火者爲不少。戊辰正月十一日卒于正寢。葬鯉池左麓圓峯下子坐原。配全州李氏東一女。有三男四女。濟文濟玉濟植。女適光山李南鎬光山李致鎬利川徐學奎南平文永郁。長房二男榥模。二房三男容柱憲柱萬柱。三房一男麒柱。以下不錄。曾孫光茂以家狀。謁誌銘之文。銘曰。惺惺維何。戒愼恐懼。大本旣立。萬善斯具。婆娑遐隅。與世相忘。圓峯四尺。君子維藏。 보이지……것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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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참판 난계 최공 묘지명 戶曹參判蘭溪崔公墓誌銘 공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추(湫), 자는 양호(養浩), 호는 난계(蘭溪),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휘 지몽(知夢)이 있는데,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1천(千) 호의 식읍(食邑)을 받았다. 이분이 족보에 기록된 선조가 된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왔으니,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고,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으로,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는데, 두 이름난 선조이다. 고조는 휘 사경(思敬)인데, 지용주사(知龍州事)를 지냈다. 증조는 휘 홍의(弘毅)인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조부는 휘 득초(得超)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부친은 휘가 자혁(自赫)인데,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이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현감 김시(金時)의 따님이다.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18) 12월 3일에 공이 서울 남부(南部)에서 태어났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민하고 비범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적에 번거롭게 독려하지 않아도 학습 과정에 따랐으며, 별도로 풀이하지 않아도 글 뜻을 알았다. 장성하여서는 제자백가를 널리 섭렵하여 암송함에 빠뜨림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적에는 물이 솟아나는 듯이 산이 우뚝 솟은 듯이 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전의 성현이 저술하고 이론을 내세운 것은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후인이 독서하고 학문하는 것은 또한 그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과문(科文)이나 문장을 꾸미는 습속을 버리고 경서를 배우고 여러 책을 읽어 깊이 연구하고 몸으로 익혀 실천함과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음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격언(格言)과 중요한 가르침이 있으면 반드시 자리 곁에 기록해 두었다.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에는 명(銘)이나 잠(箴)을 새겨 놓고 늘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성종(成宗) 임진년(1472, 성종3)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신년(1476)에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부임하였다. 기해년(1479)에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 좌랑이 되었고, 경자년(1480)에 외직으로 나가 고창 군수(高敞郡守)가 되었다.다스릴 적에는 한결같이 윤리를 밝히고 풍교를 순후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규약을 엄히 하고 권선징악의 뜻을 보이며 상벌을 미덥게 하니, 시행한 지 몇 년 안 되어 간사하고 교활함이 자취를 감추고 폐단의 근원이 사라졌으며, 관리들은 그 위엄에 복종하고 백성들은 그 덕을 그리워하였다. 경내에 학문하고 효제(孝悌)에 힘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물어보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어느 날 백성 중에 자기 자식이 불효하다고 말하며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공이 마침내 불효하는 사람을 잡아다 효자의 집안에 잡아 보낸 뒤 한 달 남짓 만에 풀어주니,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한결같이 그 효자처럼 부모를 섬겼다. 갑진년(1484, 성종15)에 능성(綾城縣監)으로 관직을 옮겨 다스렸고, 무신년(1488)에 장성(長城)으로 관직을 옮겼으며, 기유년(1489)에 광양(光陽)에 부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으니, 공의 공적을 찬양해 기록한 풍비(豐碑)는 만인이 칭송하였다. 임자년(1492)에 군을 잘 다스린 치적을 높이 평가받아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3)에 효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기미년(1499)에 치사(致仕)하고 낙향하였다.정묘년(1507, 중종2) 7월 26일에 사제에서 졸하였다. 와리(瓦里) 뒤쪽 산기슭 부갑(負甲)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위(配位)는 기계 유씨(杞溪俞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근지(近池)는 사성(司成)이다. 딸은 황보손(皇甫孫), 김석중(金碩中), 조승안(曺承安), 설등산(薜登山), 고상겸(高尙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셋이니, 치함(致涵)은 참봉이고, 치담(致淡)은 부위(副尉)이고, 치호(致湖)는 승지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후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대구(對句) 맞추어서 문장 아름답게 꾸며 抽黃對白성취하는 바가 무슨 일이랴. 所就何事돌이켜 요약하고 근원을 궁구하며 反約窮源착실하고 자신에 절실하게 공부해야 하네. 近裏著己두텁게 쌓되 조금만 드러내니 厚積薄發하늘에서 떨어짐이 있네. 有隕自天출사하여 조정에 나아가 釋褐登廷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자임하였네. 致澤經綸무성에서 소 잡는 칼을 어디에 쓰리오 武城牛刀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 들리네.33) 絃誦有聲진원은 처벌하지 않았으니 陳元不罪난봉이 상서로움을 드러내네.34) 鸞鳳著祥고을을 두루 다스려 공적 드러났으니 歷典著績포상이 융숭하였네. 褒賞隆重나이 많아 치사하고 산중으로 돌아갔으니 引年歸山그 풍모와 운치 숭상할 만하네. 風韻可仰 公姓崔。諱湫。字養浩。號蘭溪。貫朗州。有諱知夢。仕麗朝。封東萊侯。食邑千戶。是爲登譜之祖。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諱雲號德庵。平安監司。皆其名祖也。高祖諱思敬。知龍州事。曾祖諱弘毅。司憲府監察。祖諱得超。掌樂院正。考諱自赫。司醞寺直長。妣靈光金氏縣監時女。正統丙辰十二月三日。公生于京之南部。幼有異質。英邁過人。就傳上學。不煩提督而遵循課程。不常訓釋而曉解文義。及長博涉諸家。成誦無遺。綴文點句。水湧山出。旣而自語曰。前聖所以著書立言者。其意欲何爲。後人所以讀書學問者。亦其意欲何爲。遂廢功令組繪之習。將經學念書。沈潛硏究。體察涵養。夜以繼日。造次不懈。有格言要誨。必書之座側。至於盤孟几杖。有銘有箴。常常寓目以自警焉。成宗壬辰擢文科。授奉常寺直長。尋遷司僕寺正。丙申赴江原都事。己亥入爲吏曹佐郎。庚子出宰高敞。爲政一以明倫理厚風敎爲主。嚴規約示勸懲信賞罰。行之有年。奸猾斂迹。弊瘼滌源。吏服其威。民懷其德。境內有學問孝悌者。必訪問之。厚加賞賜。一日民有來言其子不孝。請爲之懲治。公乃押送不孝之人於一孝子之家。月餘放之。其人歸家。事父母一如孝子人。甲辰移宰綾城。戊申遷長城。己酉赴光陽。所至皆有治績。豐碑萬口。壬子以治郡高第。入爲禮曹參議。丁巳陞戶曹參判。已未告老還鄕。丁卯七月二十六日卒于居第。葬瓦里後麓負甲原。贈戶曹判書。配杞溪俞氏贈貞敬夫人。生一男五女。男近池司成。女適皇甫孫金碩中曺承安薜登山高尙謙。孫三男致涵參奉。致淡副尉。致湖承旨。曾孫以下不錄。後孫昌柱南杓抱家狀。奉謁誌銘。銘曰。抽黃對白。所就何事。反約窮源。近裏著已。厚積薄發。有隕自天。釋褐登廷。致澤經綸。武城牛刀。絃誦有聲。陳元不罪。臠鳳著祥。歷典著積。褒賞隆中。引年歸山。風韻可仰。 무성(武城)에서……들리네 지방을 다스릴 때 예악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선정을 베푼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수령으로 있는 무성(武城) 고을에 갔는데,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 하였다. 《논어 양화(陽貨)》 진원(陳元)은……드러내네 후한(後漢)의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주부(主簿) 구람(仇覽)에게 "주부가 진원(陳元)의 과실을 듣고서도 처벌하는 대신에 교화하였는데, 새매의 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힐책하자, 구람이 "나는 새매가 난새나 봉황만은 못하다고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循吏列傳 仇覽》 여기서는 최추가 덕으로 교화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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