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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前奴回下覆尙此伏慰便過有日寒㬉不適伏悶靜中體事連衛萬安閤節亦安護病婦諸証其間或有動靜鄙藥試無減亦已久矣今何望掩地夬蘇空費藥料徒勞心神只望志少有起動而生還媤家不可謂大幸而已矣亦將何爲査下生親候近以感患歷日欠損情私急迫如何形達今逢權友益山果旣勘還衙云聞甚喜幸積月曠務之餘似可促裝而來際此往見固所然矣而適有少碍不得如意姑竢數日登途計耳餘姑留拜候不備上候禮丁未至月十日査下生趙膺鎬배면上候書奴回後更阻安候下懷悵慕伏不審至沍靜養體度萬安伏慕不任下誠室人日間更如何忽念令胤內合如漫擧云伏想悲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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向者上書伏想 下鑑矣伊來阻候踰月伏悵何常少弛伏未審間者氣體候萬旺閤內均安竝伏泰區區不任下誠再從孫省側粗安伏幸何達回便陳玄一丁得送矣領納將上京以後所用錢夥然而所出處少無忙何以爲之耶 貴邊或有錢兩一貫下借則不年間當報勿慮若何方今所促錢八九兩或可 下諒僕下壅塞之艱難之情否勿投此書而下送伏望耳餘不備上候書丁未四月二十日再從孫翼鉉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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阻仰有時勞摯便中伏拜惠狀謹審冬暄靜中動定連護萬重欣豁慰賀允叶勞祝第孫婦間以項病屢日委苦雖是輪行之證有妨於食欲亦至元氣之陷敗者豈勝慮矣聞廊珍更肆云尤用悶慮比近則姑無是患而未知其終竟如何也弟衰軀遇寒蟄伏頓沒陽意自憐奈何孫兒之病知是長遠離涉之証安可望願地譴却而脆弱之質逐直重經徒存形骸所見不勝愁憐孫婦新禮差退數朔豈難而但見渠之心一時爲愈無?之時屈指待日矣聞此尤覺悵然應?兒益故不□▢陳耳餘適撓姑▢不備伏惟▢▢▢謹謝狀上壬寅陽月卄四日 弟在儀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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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九年庚午三月十二日幼學 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伏在西道秩再字畓五斗落所耕九卜三束庫果同字一斗落所耕一負五束庫乙幷以相換次加錢參兩備給而以新旧文二丈右人前永永相換爲去乎日後若有異言則以此憑考爲乎事畓主幼學金炳憲喪不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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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四年甲午四月十四日金順弼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年年耕食是如可妻喪債急急故勢不得已西十作悚字畓五斗落只所耕七[負]五[束]㐣折價文貳拾伍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三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言之獘則以次文記告 官卞呈事畓主 朴春實[着名]訂筆 尹龍奎[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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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九年庚午三月十二日幼學 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䖏伏在西道秩悚字畓五斗落只所耕十負五束㐣以再字畓五斗落相換次加錢十三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二丈右人前永永許給是矣日後若有爻象則以此憑考事畓主自筆朴永秀[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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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肆拾玖年甲辰十月十四日金俊起前明文右明文事段貧寒所致以祖上傳來陳荒䖏西十作簡字所耕西过南北長三十尺東西光三十五尺應用山次右人前捧価錢陸兩爲遣永永放賣爲去乎日後良中若有子孫族屬中雜談之獘是去㝳持此文記告官卞正事旧陳田主金斗應骨里[着名]證 洪夏讃[着名]茟執 朴仁鳳[喪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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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二十四年甲辰六月初一日幼學金載相前明文右明文事段以貧窮所致妻家山下墓田扶北中方里西十作惶字丁太三斗五升落只所耕六負五束庫果所付柴塲卄五同落只並以折価錢文五兩依數捧上是遣本文一丈並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誰談是去䓁以此文告官卞正事田柴塲 主同知高春成[着名]訂筆 幼學 宋亨柱[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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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김응상(金膺相) 고신(告身)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憲宗 金膺相 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憲宗 金膺相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45년(헌종 11)에 왕이 김응상을 절충장군 행용호위부호군으로 임명하며 내려 준 교지 1845년(헌종 11) 1월에 왕이 김응상(金膺相)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호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이다. 절충장군은 당상관(堂上官)에 해당하는 무신 정3품 상계(上階)이다. 용호위부호군은 종4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자(行字)를 적었다. 행수법에 따르면, 품계가 높고 관직(官職)이 낮으면 관직명 앞에 행을 썼고 그 반대로 품계가 낮고 관직이 높으면 관직 앞에 수(守)를 썼다. 이를 각각 계고직비(階高職卑)와 계비직고(階卑職高)라고 하였다. 김응상의 부호군(副護軍) 임명 사실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45년(헌종 11) 1월 11일조에 "兵批 判書趙冀永病 參判李同淳病 參議金{金+弼}直進 參知李時愚病 同副承旨鄭基世進 護軍閔致成 副護軍金膺相 副司直鄭鎏朴文? 副司果沈熙淳尹行謨金羲裕鄭漢然 副司正尹喜臣 以上竝單付"라고 실려 있는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김응상은 위 부호군에 임명되고 같은 달, 즉 1845년 1월에 다시 고신을 받게 된다. 이때 그가 받은 관직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이었다.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 김양묵(金養黙)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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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김응상(金膺相) 고신(告身) 3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二月 日 哲宗 金膺相 咸豐五年二月 日 哲宗 金膺相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에 왕이 김응상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 1855년(철종 6) 2월에 왕이 김응상(金膺相)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동지중추부사는 중추부(中樞府)에 소속된 종2품의 관직(官職)이며, 오위장(五衛將)은 오위(五衛)의 군사를 거느리던 정3품의 무관직(武官職)이다. 김응상의 임명 사실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55년(철종 6) 2월 28일조의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한편, 김응상이 가선대부로 임명될 때, 그의 선대 어른들에게는 추증(追贈)교지가 주어졌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증조부(曾祖父) 김덕렴(金德濂)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사정(司僕寺正)으로 추증되었고, 조부(祖父) 김도명(金道明)은 통훈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으로, 아버지 김명하(金命河)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으로 추증되었다. 또한 김응상의 증조모(曾祖母) 유인(孺人) 정씨(鄭氏)는 숙인(淑人)으로, 조모(祖母) 유인 김씨(金氏)와 유인 이씨(李氏)는 숙부인(淑夫人)으로, 어머니 유인 박씨(朴氏)와 유인 유씨(柳氏)는 정부인(貞夫人)으로 각각 추증되었다. 그리고 김응상의 처(妻) 숙부인 양씨(梁氏)와 임씨(林氏)도 모두 정부인으로 봉작(封爵)되었다.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 김양묵(金養黙)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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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金膺相爲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者道光二十五年正月 日 [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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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金膺相爲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者咸豐五年二月 日 [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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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김응상(金膺相) 고신(告身) 4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二月 日 哲宗 金膺相 咸豐五年二月 日 哲宗 金膺相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 2월에 왕이 김응상을 가선대부 행용양위호군 겸 오위장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 1855년(철종 6) 2월에 왕이 김응상(金膺相)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호군 겸 오위장(行龍驤衛護軍兼五衛將)에 임명(任命)하며 내려 준 교지(敎旨)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용양위(龍驤衛)는 오위(五衛) 중 하나로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의 병력을 관할(管轄) 하던 중앙의 군사조직이다. 그리고 호군(護軍)은 정4품직이고 오위장(五衛將)은 오위(五衛)의 군사를 통솔하던 정3품의 무관직(武官職)이다. 한편 호군에는 여러 등급이 있었다. 상호군(上護軍)은 정3품, 대호군(大護軍)은 종3품, 호군은 정4품, 부호군(副護軍)은 종4품이다. 따라서 김응상은 종2품의 품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정4품의 관직을 받은 셈이다. 이처럼 자신이 지닌 품계보다 낮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를 계고직비(階高職卑)라고 하였으며, 관직 앞에는 반드시 '행(行)'이라고 쓰도록 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인 경우, 즉 자신이 지닌 품계보다 높을 관직에 임명되는 계비직고(階卑職高)의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수(守)라고 썼다. 이를 행수법(行守法)이라고 하였다. 한편 김응상의 오위장 임명 사실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55년(철종 6) 2월 19일조에 "兵批 判書洪鍾應進 以洪在喆南獻敎爲知事 吳取善爲同知 趙然興·兪章煥爲副摠管 尹致膺爲僉知 尹義儉爲兼訓鍊都正 尹致勛·朴長晉·金膺相·安壽祿·王道林爲五衛將 趙秉協 李承游爲文兼, 李興洙爲部將 方禹龍爲守門將 柳光魯爲慶尙右兵使 金鎭浩爲高嶺僉使 黃基崙爲蝟島僉使 金玹基爲德津萬戶"라고 실려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응상은 그해, 즉 1855년에 세 번의 고신을 추가로 받게 되는데, 이때 받은 관직을 차례로 살펴보면,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호군(行龍驤衛護軍),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 등이다. 현재 부안(扶安)에 있는 김응상의 후손가에는 김응상의 고신 8점을 포함하여 그의 처와 부, 조, 증조가 받았던 고신 또는 추증교지 12점, 김응상의 호구단자 7점, 그리고 김응상의 아들 김양묵(金養黙)의 고신 16점과 차첩(差帖) 2점, 문과 홍패(紅牌)와 시권(試券)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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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유인이씨(孺人李氏)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李氏 咸豐五年三月 日 哲宗 孺人李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55년(철종 6) 왕이 김응상의 할머니 유인 이씨에게 내린 추증교지 1855년(철종 6) 3월, 왕이 김응상(金膺相)의 할머니 유인(孺人) 이씨(李氏)에게 내린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김응상이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호군 겸 오위장(行龍驤衛護軍兼五衛將)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할머니 유인 이씨는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즉, 이 문서의 맨끝에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膺相祖妣 依法典追贈"라고 적혀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사실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실직(實職)이 2품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의 경우 그의 부(父), 조(祖), 증조(曾祖) 등 3대(代)에게 사후(死後) 관직을 주었고 이를 추증(追贈)이라 하였다. 또한 부모(父母)는 실직에 있는 아들과 같은 품계를 내리며 조부모(祖父母), 증조부모(曾祖父母)에게는 그의 품계에서 각각 1품씩 강등하여 추증하였다. 김응상에게 내려진 가선대부는 종2품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이다. 김응상의 할아버지 김도명(金道明)은 한 단계 낮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으로 증직(贈職)되었다. 통정대부는 정3품 문산계로 그의 할머니 유인 이씨도 그의 품계에 걸맞은 숙부인으로 봉작(封爵)되었다. 김응상에게는 할머니가 두 분 계셨는데 또 다른 할머니인 유인 김씨(金氏)도 이때 숙부인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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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최이앙 제태 에게 증정하다 奉贈崔而仰【濟泰】 경인년(1890, 고종27) 1월 8일에 내가 영남에 갔다. 상원일(上元日)에 산음(山陰)에 도착하고 다음 날 강성(江城)에 당도하여 신안강(新安江) 기슭으로 계남옹(溪南翁)73)을 찾아뵈었다. 안부 인사가 끝나자 옹의 조카인 이앙(而仰)이 말하기를, "지난밤에 계방(季方 정의림(鄭義林)의 자(字))과 노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깬 뒤 혼자 말하기를, '나는 계방과 평소에 일면식도 없건만 갑자기 꿈에 나타났으니 무엇 때문일까? 일찍이 계방이 영남에 오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까운 시일 안에 만나려는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두커니 기다리면서 한참을 있었더니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적어 놓은 꿈 내용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바로 7일이었다.아, 나와 이앙은 과연 일면식도 없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자못 오래되었다. 동서로 500리를 벗어난 아득히 먼 곳에서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게 서로 감응하는 것이 북채와 북,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을 줄 누가 알았는가. 천지 간에 의기가 서로 감응하여 걷지 않아도 이르게 되고 빨리하지 않아도 빠른 것74)이 진실로 이와 같았다. 예전에 호상(湖上)에서 선사(先師)를 모실 때 나와 애산(艾山)75)이 두 차례나 기약도 없이 서로 만나자 선사(先師)께서 이르기를, "기이한 일이다. 어찌 기록으로 남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만약 선사께서 살아 계신다면 또한 어찌 기이한 일이라고 하지 않으시겠는가.이에 대략 전말(顚末)을 적어 이앙에게 준다. 이앙은 언제나 나를 일깨우고 분발시켜 지극히 어리석고 근기(根氣)가 낮은 이 사람이 동성상응(同聲相應)76)하고 함께 돌아가는 결과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歲庚寅元月八日。余作嶺行。上元日到山陰翌日到江城。訪溪南翁於新安江上。寒暄畢翁從子而仰言曰。疇昔之夜。夢與季方遊。旣覺自語吾與季方。未有一面之雅。而遽爾入夢何也。聞季方嘗有意嶺行。其將從近見遇耶。佇俟久之。果爾果爾。因出所記夢蹟示之。乃七日也。嗚呼。吾與而仰。果無一面。而其有書路往復。則頗久矣。誰知東西遙遙半千里之外。不先不後。相應相感。如桴鼓影響哉。天地間氣類之感。有不行而至。不疾而速者固如此。昔年侍先師於湖上也。吾與艾山。有再次不期之遇。先師曰奇事也。盍記諸。若使先師而在焉。則亦豈不曰奇事也。玆以略述顚末。以呈而仰。願而仰爲之終始警策。使此至愚下根。無愧爲同聲同歸之歸也。 계남옹(溪南翁) 남옹은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걷지……빠른 것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신묘하기 때문에 빨리 하지 않아도 신속하고, 행하지 않아도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동성상응(同聲相應) 동류(同類)끼리 서로 기맥이 통하여 자연히 의기투합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자기와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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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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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가석이 연강 아우와 많은 수창시를 남겼다는 얘기를 듣고 뒤늦게 차운하여 만나는 날을 기다려 보여주다 4수 聞可石與蓮岡舍弟多有唱酬 追步其韻 待相見日示之【四首】 가석과 연강의 교분은 금을 끊을 만하니120) 石蓮交契斷堅金평소에 일편단심을 서로 비추는 듯하네 照得平生一片心근래에 연달아 시문을 주고받았던 때에 邇來唱和連篇日다 기울인 속마음이 몇 굽이나 깊어졌나 傾盡眞情幾曲深가석의 시 짓는 솜씨는 단련한 쇠보다 낫고 可石詩工勝鍊金소릉의 시 짓는 습성은 검남의 마음이로세121) 少陵性癖劒南心시속과 시국에 상심한 말을 시험 삼아 보니 試看病俗傷時語다시 〈풍천〉의 시122)로 얕고 깊음을 따졌다네 更把風泉較淺深침상 곁에 돈 다 없어졌다 한탄하지 말게 莫恨床頭見盡金장부의 생색은 마음 변치 않는 데 있다네 丈夫生色不渝心원컨대 연강 아래에서 호연지기를 길러서 願成浩氣蓮岡下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깊이 가득 차기를 亘塞天高與地深세상에 변치 않는 삶이 일금의 가치인데 世不滄生直一金홀로 세한의 마음을 보존한 줄 누가 알까 誰知獨保歲寒心자운123)을 천 년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子雲未必俟千載난실124)과 체원125)에서 정다운 이야기 깊어지네 蘭室棣園情話深 石、蓮交契斷堅金, 照得平生一片心.邇來唱和連篇日, 傾盡眞情幾曲深?可石詩工勝鍊金, 少陵性癖劒南心.試看病俗傷時語, 更把《風泉》較淺深.莫恨床頭見盡金, 丈夫生色不渝心.願成浩氣蓮岡下, 亘塞天高與地深.世不滄生直一金, 誰知獨保歲寒心?子雲未必俟千載, 蘭室、棣園情話深. 금(金)을 끊을 만하니 돈후한 우정을 나누어 왔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면 그 날카로움이 금을 끊는다.〔二人同心, 其利斷金.〕"라고 하였다. 소릉(少陵)의……마음이로세 가석(可石)과 연강(蓮岡) 두 사람이 시 짓기를 좋아하여 서로 주고받은 시(詩)가 매우 많음을 말한 것이다. 소릉은 두보(杜甫)의 호이고, 검남은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별칭이다. 두보(杜甫)의 시 〈강상치수여해세요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나의 성벽이 좋은 시구를 매우 좋아하여,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오.〔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226 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 풍천(風泉)의 시 《시경(詩經)》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시는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쇠망한 것을 현인(賢人)이 개탄하면서 옛날의 주나라 왕실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자운(子雲)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다. 보통 당대(當代)에는 알아줄 사람이 없어서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줄 만한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요부(堯夫), 즉 송나라 소옹(邵雍)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다. 난실(蘭室) 지란지실(芝蘭之室)의 준말로,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善)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지란의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 그 향기는 못 맡더라도 오래 지나면 동화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체원(棣園) 후창(後滄)과 연강(蓮岡) 형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혹독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절의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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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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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한숙【윤채】에게 보냄 與金漢淑【潤采】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멀리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와 새로운 거처와 새해를 맞는 상황을 물어주셨으니, 이것은 일상적인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동오경(董五經)처럼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능력이 없어 잠시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바람에58) 결국 서로 어긋났습니다. 곧장 차비를 갖추고 가서 사례를 표하는 의례를 행하고 싶었지만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를 물으셨습니다. 고인(古人)은 오히려 아버지가 생존한 상황으로 보아59) 기년복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아버지가 살아계신 상황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된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무릇 상복은 처음 제정한 것으로 결정을 하니60) 기년복을 하는 것에 무슨 의문이 있겠습니까. 신주를 적고 축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살아 계신 것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완전히 살아 계신 것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61) 혜량(惠諒)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不憚崎懾遠入天台山中。爲問新寓新年之狀。此意已非常調可辦。但無董五經前知薄言出外。竟致相違卽欲理屐。以修回謝之禮。而末由也已。問父喪中母死者。古人猶以父在服朞。況父在時母死已久乎。凡服以始制爲斷。服朞何疑也。至於題主及祝辭。則不可專以知生而玖生之也。諒之如何。 동오경(董五經)처럼……바람에 동오경과 정이(程頤)의 고사를 가리킨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숭산 앞에 동오경이란 사람이 있는데, 은자이다. 이천이 그의 명성을 듣고 경전을 궁구한 선비일 것이라 생각하여 특별히 찾아갔다. 동오경은 평소 암자를 나간 적이 없었는데, 이날은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차와 과일을 지고 돌아오는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그대는 정 선생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이천이 특이하게 여겼다. 그 사람이 '선생이 오시려고 한다는 소식이 매우 크기에 제가 특별히 성안으로 들어가 조금의 차와 과일을 마련하여 장차 선생을 대접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천은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 때문에 다시 함께 그 집에 이르러 매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또한 남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없었고, 다만 오래도록 사물과 접하지 않아 마음이 고요하고 밝았다.【又嵩山前有董五經, 隱者也. 伊川聞其名, 謂其爲窮經之士, 特往造焉. 董平日未嘗出庵, 是日不値, 還至中途, 遇一老人負茶果以歸, 且曰君非程先生乎? 伊川異之. 曰先生欲來, 信息甚大, 某特入城置少茶果, 將以奉待也. 伊川以其誠意, 復與之同至其舍, 語甚款, 亦無大過人者. 但久不與物接, 心靜而明也.】" 《二程外書 卷12》 아버지가……보아 아버지가 사망하여 상중이기는 하지만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는 여전히 살아계신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상복은……하니 상복은 처음 결정한 것을 도중에 상황이 변하더라도 바꾸지 않고 입는다는 뜻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생존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성복(成服)일에 '부재위모기(父在爲母期 아버지 생존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면 기년을 한다)'의 규정에 따라 자최장기복(齊衰杖期服)을 입는다. 성복을 하고 어머니 상을 치루는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부졸위모자최삼년(父卒爲母齊衰三年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어머니가 사망하면 자최삼년을 한다)'의 규정을 다시 적용하여 자최삼년복(齊衰三年服)으로 바꾸지 않는다. 신주를……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으로 간주하면 어머니상의 상주는 남편인 아버지가 되므로 신주나 축사에 '망실(亡室)'이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면 상주는 맏아들이 되어 '현비(顯妣)'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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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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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춘탄 처사 구공 묘지명 春灘處士具公墓誌銘 종족은 효성스럽다고 하고, 향당에서는 어른을 공경한다고 일컬어 한 고장의 선한 선비가 되는 데 어긋나지 않는 자가 가까이 우리 고을에 있으니, 춘탄(春灘) 구공(具公)과 같은 이가 그 사람이다.공의 휘는 철수(澈洙), 자는 성서(聖瑞)이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함에 부지런히 고기 잡고 나무하여 몸에 편안하고 입에 맞는 것은 모두 다 마련하여 올렸다. 평소에는 그 공경을 지극히 하고, 병환이 들었을 땐 근심을 지극히 하며, 상을 당했을 땐 슬픔을 지극히 하고, 제사에는 엄숙함을 지극히 하였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이 있지 않았다. 형제 두 사람은 화목하고 우애가 있어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곡식을 깁고 찧는 것도 모두 함께하였다. 친족과 붕우에게는 온화함으로 대하고 신의로 사귀었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늘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해마다 좋은 때에 초대하여 마음껏 즐기면서 수일 동안 흥겹게 지냈다. 평상시에 겸손하고 공손함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경전을 연구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는 모두 가장(家狀)에 실린 대략이다. 아, 부침(浮沈)하는 것은 명(命)이고, 가고 머무름에는 때가 있다.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였으니, 그 행실은 부침과 가고 머무르는 것을 벗어난 데 있었다. 여기에서 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구씨(具氏)의 관향은 능성(綾城)이니, 평장사 민첨(民瞻)이 그 상대(上代)의 선조이다. 고조 준익(俊翼)은 참봉을 지냈고, 증조 용주(龍珠)는 이조 참의를 지냈고, 호는 오헌(梧軒)이다. 조부 담(壜)은 가선대부이다. 부친 상년(相年)은 공조 참의를 지냈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통정대부 김상희(金尙喜)의 따님이다. 공참공(工參公)은 종조부 승지 상묵(相黙)의 아들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 분이 바로 춘탄(春灘)이다. 본생비(本生妣)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판관 이동좌(李東佐)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무진년(1808, 순조8)에 태어났고, 철종(哲宗) 정사년(1857, 철종8) 12월 13일에 졸하였다. 마을 동쪽 간좌(艮坐)에 장사 지냈다. 송사(松沙) 기공 우만(奇公宇萬)이 그 묘갈명을 지었다. 배위(配位)는 연일 정씨(延日鄭氏)로, 현감 정재린(鄭在麟)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희모(希謨)이고, 차자는 경모(慶謨)이다. 딸은 안명록(安命祿)에게 출가하였다. 차자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교륜(敎倫), 교신(敎信)이고, 딸은 이은환(李殷煥)에게 출가하였다. 교륜은 장방(長房)의 양자로 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을 쌓고 積累其善광채는 감추었네. 潛晦其光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남은 경사 영원하리라. 餘慶長長 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而不失爲一鄕之善士者。近在吾鄕。若春灘具公。其人也。公諱澈洙。字聖瑞。家貧養親。服勤漁樵。便身適口。無不畢給。以至居致其敬。病致其憂。喪致其哀。祭致其嚴。生死始終。無有憾焉。兄弟二人。雍容湛樂。尺斗縫眷。與之共焉。以至族戚朋友。接之以和。交之以信。賙窮恤匱。常若不及。每歲良辰。招邀酣歡。以爲數日之暢。平居以謙恭持身。以勤儉御家。硏覽境典。手不釋卷。此皆狀辭大略也。嗚呼。陞沈命也。流坎時也。素其位而行。其行在於陞沈流坎之外。此可見公之爲公矣。具氏貫綾城。平章事諱民瞻。其上祖也。高祖俊翼參奉。曾祖龍珠吏參。號梧軒。祖壜嘉善。考相年。工參夫人金海金氏通政尙喜女。工參公取同祖承旨相黙子爲後。卽春灘也。本生妣全州李氏判官東佐女。公以純祖戊辰生。哲宗丁巳十二月十三日卒。葬里東艮坐。松沙奇公宇萬撰其碣銘。配延日鄭氏縣監在麟女。有婦德。擧二男一女。長希謨次慶謨。女適安命祿。二房生二男一女。敎倫敎信。李殷煥。敎倫系長房。銘曰。積累其善。潛晦其光。螽斯椒聊。餘慶長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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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연심재 전씨 어른과 수창하다 2수 酬鍊心田丈【二首】 연심 어른은 걸출한 기상이 많아 鍊翁多傑氣작은 재목과 서까래가 아니라네 不是細材椽진실함을 믿어 겉치레55)가 없었으나 任悃無邊幅곤궁함56)을 지키느라 늘 위태로웠지 固窮一沛顚온화한 용모는 따스한 햇볕과 같고 和容如暖日웅장한 변론은 쏟아지는 폭포 같았네 雄辯若懸泉의리를 더욱 정밀히 할 뿐이지만 但得加精義단약이 완성되면 바로 신선이라네 丹成卽是仙한평생 처세에 부정함을 따르지 않았고 處世生平不詭隨연옹은 가슴속에 좋은 포부만 지녔지 鍊翁惟有好衿期그리우면 찾아가니 약속한 적이 없었고 相思卽訪曾無約잠시 헤어져도 회포는 다시 끝이 없었네 暫別餘懷更罔涯시편은 두보57)와 육유58)를 공부한 게 아니요 非是詩篇工杜陸첩부가 공손연59)과 장의60)를 배우는 걸 비웃었네 笑他妾婦學衍儀정토사의 맑은 모임 어겼다 탄식하지 마오 莫歎淨寺違淸會이 날이 더디 가서 노닐 수 있으니 正可逍遙此日遲 鍊翁多傑氣, 不是細村椽.任悃無邊幅, 固窮一沛顚.和容如暖日, 雄辯若懸泉.但得加精義, 丹成卽是仙.處世生平不詭隨, 鍊翁惟有好衿期.相思卽訪曾無約, 暫別餘懷更罔涯.非是詩篇工杜、陸, 笑他妾婦學衍、儀.莫歎淨寺違淸會, 正可逍遙此日遲. 겉치레 본문의 '변폭(邊幅)'은 겉으로 꾸미는 것을 말한다. 공손(公孫)이 쫓아가서 국사(國士)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변폭을 수식하여 우형(偶形)같이 앉았다 하였고, 그 주석에 포백(布帛)의 변폭을 다듬은 것과 같다 하였다. 《後漢書 馬援傳》 곤궁함 원문의 '곤궁(困窮)'은 곤궁한 처지에서도 분수를 지키며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아무리 빈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도의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빈궁하면 제멋대로 굴게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하였다. 두보(杜甫) 당(唐)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이백(李白)과 함께 시로 명성을 나란히 하여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두소릉집(杜少陵集)》이 있다. 육유(陸游) 1125~1210. 남송(南宋)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다. 강경한 북벌론자였으므로 조정의 기조가 화의와 북벌을 반복할 때마다 관직에서의 부침이 심했다. 지방관과 말직을 전전하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며, 일생 동안 1만 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특히 금(金)나라의 금(金)나라에 대한 항전(抗戰)을 통한 실지(失地)의 회복을 바라는 애국적인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처음에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영향으로 기교를 추구하였으나, 중년 이후 호방함으로 변했고, 만년에는 전원생활에 귀의해서 담담하고 고요한 시풍을 열었다. 양만리(楊萬里)ㆍ범성대(范成大)ㆍ우무(尤袤)와 더불어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로 불린다. 저서에 《검남시고(劒南詩稿)》 등이 있다. 공손연(公孫衍) 전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서수(犀首)의 벼슬을 지냈기에 서수로 불렸다. 진(秦)나라를 위하여 제(齊)나라와 위(魏)나라에 유세(遊說)하여 소진(蘇秦)의 종약(縱約)을 깨뜨렸다. 장의(張儀)와 잘 지내지 못하여 진나라를 떠났다가 장의가 죽자 돌아왔는데 진나라에서 이를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감무(甘茂)가 이간하여 다시 위나라로 갔다. 장의(張儀)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6국이 각각 강한 진(秦)나라를 섬기게 하는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6국이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하는 소진(蘇秦)의 합종책(合從策)과 반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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