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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373) 제야에 생각이 일다 己丑除夜有思 옛날 한 관상가가 내 수명은 오십칠 세에 그칠 거라 했는데 昔有觀相人謂余壽止五十七선군께서 이 말을 듣고 몹시 불쾌하게 여기셨네 先君聞之頗不悅또 한 담명가374)가 있어 又有談命人내가 사십칠 세에 죽을 거라고 하였는데 謂之四十七沒아우 억술375)이 돌아와 나에게 이 말을 고해주고 億弟歸告余그 종이를 가져다가 노여워하며 찢어버렸네 仍將其紙怒破裂또다시 한 어른이 있어 更有一長者집상할 때 나를 위해 명을 논하기를 爲我論命執喪日군의 수명은 오십사 세로 君壽五十四이 나이를 넘더라도 육십육 세에 그칠 것이니 過此止于六十六기한을 넘겨 누차 수명이 연장되더라도 過期延長亦累回육십육의 연수가 최대일 것이라 하였네 六六之數最其極올해가 바로 기한인 육십육 세가 되는데 今年正是六六期또 한 해의 제석인 오늘 저녁을 만났다오 又當今夕歲除夕병을 앓아 비록 거의 죽을 지경이지만 疾病雖濱死실낱같은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네 一縷尙不滅원래 천운은 본디 정해진 바가 있나니 元來天運自有定분분하게 떠드는 술사들을 끊어야 한다오 紛紛術士宜掃絶명의 길고 짧음은 연수에 있지 않음을 더욱 알겠으니 更識脩短不在年전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볼 뿐이로세 只觀有無可傳述있다면 단명하여도 진실로 슬퍼할 것도 없고 有則短固不足悲없다면 장수하여도 또한 말할 것도 없다오 無則脩亦不足說스스로 생각건대 이내 몸에 이미 없으니 自念此身旣無得육십 넘고 칠십 바라보아도 즐거울 게 없네 過六望七非所樂비록 그러하나 상제가 하사한 걸 감히 잊지 못하니 雖然帝賜未敢忘부지런히 힘써 미쳐 연수가 아니라 그 덕으로 장수할 수 있기를 어찌 생각하지 않으랴 盍思孜孜勉而及庶致不以年脩以其德 昔有觀相人謂余壽止五十七, 先君聞之頗不悅.又有談命人, 謂之四十七沒.億弟歸告余, 仍將其紙怒破裂.更有一長者, 爲我論命執喪日.君壽五十四, 過此止于六十六.過期延長亦累回, 六六之數最其極.今年正是六六期, 又當今夕歲除夕.疾病雖濱死, 一縷尙不滅.元來天運自有定, 紛紛術士宜掃絶.更識脩短不在年, 只觀有無可傳述.有則短固不足悲, 無則脩亦不足說.自念此身旣無得, 過六望七非所樂.雖然帝賜未敢忘, 盍思孜孜勉而及庶致不以年脩以其德? 기축년 1949년으로, 후창의 나이가 66세이다. 담명가(談命家)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다. 억술(億述) 후창의 셋째 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로, 자는 여안(汝安), 호는 연강(蓮岡) 또는 척재(拓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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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이기호가 적삼과 바지 한 벌을 주기에 시를 지어 주어 학업을 권면하다 李姪奇鎬進以衫袴一襲 贈詩勉其學業 면포는 어찌 그리 선명하며 吉貝一何鮮적삼과 바지는 어찌 그리 잘 맞는가 衫袴一何適알겠어라 너의 어머니께서 認是汝慈堂손수 베 짜고 옷 꿰맨 줄을 手自縫且織어찌 그리 애쓰기를 이처럼 하여 一何勤若是자식 스승의 옷을 지었단 말인가 爲其子師服옛사람은 자신의 옷을 두고 말하기를 古人謂其衣한 올 한 올이 어머니의 덕이라 하였네 絲絲母之德풀의 마음이 봄볕의 은혜를 갚기 어렵나니448) 草心難報春시를 지으면서 여러 차례 탄식하였다오 作詩三歎息더구나 이 옷은 스승에게 이바지한 것이니 矧此供師長자식 위한 정성이 더욱 지극하구나 爲子誠復極너는 장차 무엇으로 보답하려는가 汝將何以報마땅히 준칙이 있어야 할 것이로다 乃爲當凖則나는 남의 모범이 되지 못하니 我非人模範이 옷을 받고 몹시 부끄러웠다오 受之有愧色이문에선 회암이 나왔고 李門晦菴出호정에선 오봉을 얻었으니449) 胡庭五峰得네가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된다면 汝能靑勝藍나도 똑같이 아름다운 명예를 얻으리라 我同文繡餙어찌 이내 바람에만 부응할 뿐이리오 豈惟副吾望비로소 자식의 직분을 다하는 것일세 方是盡子職 吉貝一何鮮? 衫袴一何適?認是汝慈堂, 手自縫且織.一何勤若是, 爲其子師服?古人謂其衣.絲絲母之德.草心難報春, 作詩三歎息.矧此供師長, 爲子誠復極.汝將何以報? 乃爲當凖則.我非人模範, 受之有愧色.李門晦菴出, 胡庭五峰得.汝能靑勝藍, 我同文繡餙.豈惟副吾望? 方是盡子職. 풀의……어렵나니 당나라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에 "한 치 되는 풀의 마음을 가지고, 삼춘의 따뜻한 햇볕에 보답하기 어렵구나.[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풀의 마음은 자식이 어머니를 사모하는 마음을, 삼춘의 햇볕은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비유한다. 이문(李門)에선……얻었으니 회암(晦菴)은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호이고, 이문은 주희의 스승인 연평(延平) 선생 이동(李侗)을 가리킨다. 오봉(五峰)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호굉(胡宏)의 호이고, 호정(胡庭)은 그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호안국(胡安國)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제자는 스승을 능가하고, 자식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이른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사례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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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하다 痛恨 나의 아버지는 진실로 효자이고 我父固孝子나의 어머니도 현숙한 부인이니 我母亦賢媛살아서는 비록 보답을 받지 못했어도 生雖不食報죽어서는 하늘의 돌봄을 입어야 하는데 死當獲天眷어찌하여 기나긴 사십 년 세월 동안 胡然四十載길한 묏자리가 오래도록 안 나타나는가 吉阡久不現어찌 하늘이 돕지 않아서일 뿐이랴 豈直天不助불초한 이 몸이 정성이 없어서라오 不肖無誠力묘지가 귀하다고 말하지 말라 莫言佳城貴두 손까지도 모두 빈손이 되었네 幷與兩手赤옛날에 하자평447)이란 사람은 在昔何子平팔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는데 八年葬不得슬피 울부짖으며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아 悲號哭不已언제나 상차 곁에 있는 듯이 하였네 常如在喪側추울 때에도 솜옷을 입지 않았고 寒不衣絮袍굶주려도 소금과 채소도 먹지 않았네 飢不鹽菜食자식이 능히 이처럼 할 수 있다면 有子能如此사람들이 어찌 감복하지 않으리오 人豈不感服이러한 까닭으로 회계 태수가 所以會稽守그를 위해 무덤을 마련해주었네 爲之營塜域사람이 이미 그날처럼 했다면 人旣如此日하늘도 응당 불쌍히 여겼으리라 天應亦矜惻너는 어찌 진즉 이 일을 본받지 않았는가 爾盍早鑑此부질없이 장탄식만 늘어놓고 있구나 徒然長太息지금은 병세가 이미 극심하니 今也病已極후회한들 끝내 무슨 소용 있으랴 噬臍竟何益 我父固孝子, 我母亦賢媛.生雖不食報, 死當獲天眷.胡然四十載, 吉阡久不現?豈直天不助? 不肖無誠力.莫言佳城貴, 幷與兩手赤.在昔何子平, 八年葬不得.悲號哭不已, 常如在喪側.寒不衣絮袍, 飢不鹽菜食.有子能如此, 人豈不感服?所以會稽守, 爲之營塜域.人旣如此日, 天應亦矜惻.爾盍早鑑此? 徒然長太息.今也病已極, 噬臍竟何益? 하자평(何子平)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람으로 효성이 뛰어났다. 60세가 다 된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 기근과 전란으로 8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는데, 그 사이에 처음 초상 때처럼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더울 때는 시원한 곳을 피하고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았으며, 하루에 적은 쌀로 죽을 만들어 먹고 소금이나 채소도 밥상에 올리지 않았다. 당시 회계 태수 채흥종(蔡興宗)이 이 일을 듣고 불쌍히 여겨 하자평을 위해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小學 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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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 기환 을 애도하다 悼李愼軒【起煥】 부여 북쪽은 선비 많다고 이름났는데 扶北號多士차례로 모두 세상을 떠나고 있다오 次第皆凋零어찌하여 노나라의 영광전392)까지 云胡魯靈光지금 아울러 무너졌단 말인가 今焉幷頹傾절개를 지킴은 맑고도 신중하며 操執淸且愼타고난 자질은 소탈하고 정밀하였네 稟質簡而精서로 종유한 지 오십 년 되었으니 相從五十載참으로 예사로운 정분이 아니로세 不是尋常情중간에 스승을 보위했을 때 中間衛師日한마음으로 변론을 일삼았네 同心事辨明때때로 논의가 다르긴 했지만 有時論雖異혈기로 쟁론한 것은 아니었네 非出血氣爭요컨대 우리 사림들 가운데 要之吾林中우리 공과 같은 분을 어찌 찾기 쉬우리오 吾公豈易能집안에서의 행실은 진실로 독실하며 內行固淳篤효성스러운 마음은 선영에 있었다오 孝思在先塋한 석물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無一闕石儀노년에도 설경393)을 하였도다 衰齡爲舌耕아아 영영 떠나가신 날에도 嗟哉永逝日혹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네 或爲寒餓嬰부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니 遺言勿通訃눈물이 절로 흐르게 하는구나 令人淚自橫그런 뒤에 마침내 공을 보니 然後乃見公한평생 옥처럼 깨끗이 사셨도다 玉潔一平生 扶北號多士, 次第皆凋零.云胡魯靈光, 今焉幷頹傾?操執淸且愼, 稟質簡而精.相從五十載, 不是尋常情.中間衛師日, 同心事辨明.有時論雖異, 非出血氣爭.要之吾林中, 吾公豈易能?內行固淳篤, 孝思在先塋.無一闕石儀, 衰齡爲舌耕.嗟哉永逝日, 或爲寒餓嬰.遺言勿通訃, 令人淚自橫.然後乃見公, 玉潔一平生. 영광전(靈光殿)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노 공왕(魯恭王)이 세운 궁전으로, 산동(山東) 곡부현(曲阜縣) 동쪽에 있었는데, 한나라 중기에 도적 떼에 의하여 수도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과 건장궁(建章宮) 등은 다 불탔으나 영광전만은 그대로 보존되었으므로, 전하여 홀로 남은 원로(元老)나 석학(碩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이기환을 비유하였다. 《文選 卷11 魯靈光殿賦》 설경(舌耕) 혀로 농사를 짓는다는 것으로, 학문을 가르쳐 주고 생활을 영위함을 이른다. 후한(後漢) 가규(賈逵)의 집에는 문도들이 멀리서 배우러 찾아왔는데, 그들에게 경문(經文)을 가르쳐 주자 그들이 바친 곡식이 창고에 그득하였으므로, 세인들이 이를 두고 설경(舌耕)이라 하였다. 《拾遺記 後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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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남파 양호 의 〈초당〉 시에 차운하다 次林南坡【讓鎬】草堂韻 하늘이 이 초당에 명산을 주었으니 天以名山錫此堂그 뒤로 부소산383)을 마주한 봉산384)이 우뚝하구나 背惟蓬岳面蘇岡옛 유적이 아득하니 당나라 먼지385)가 깨끗해지고 蒼茫古蹟唐塵淨신선 인연에 가까우니 한나라 단약386)이 향기롭네 庶幾仙緣漢藥香근역387)이 새로워지니 마침 부락을 이루고 槿域維新適成落파옹이 비록 늙었으나 술 마시며 시 읊조리네 坡翁雖老亦吟觴인간 세상에 부절처럼 똑같은 곳388)을 진정 알겠으니 定知人境同符處서로 전해온 송설을 감히 잊지 못하노라 誦說相傳未敢忘 天以名山錫此堂, 背惟蓬岳面蘇岡.蒼茫古蹟唐塵淨, 庶幾仙緣漢藥香.槿域維新適成落, 坡翁雖老亦吟觴.定知人境同符處, 誦說相傳未敢忘. 부소산(扶蘇山) 백제의 도읍인 충남 부여의 진산이다. 봉산(蓬山)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당(唐)나라 먼지 먼지는 전장에서 일어나는 먼지로, 전란을 의미한다. 삼국 시대에 당나라가 신라(新羅)와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침략하여 멸망시킨 전란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단약(丹藥) 신선이 만든다고 하는 장생불사의 약을 이른다. 한나라 때 신선술(神仙術)이 유행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근역(槿域) 무궁화(無窮花)가 많은 땅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부절처럼 똑같은 곳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백록동부(白鹿洞賦)〉에 "산은 푸르게 집을 둘러싸고, 물은 콸콸 섬돌을 따라 흐르네. 옛사람 이를 즐겼음을 믿겠나니, 세대는 다르지만 즐거움은 부절처럼 똑같구나.[山蔥瓏而遶舍, 水汨㶁而循除. 諒昔人之樂此, 羌異世而同符.]"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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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에 도암450)의 일을 기억하고 스스로 탄식하다 病中記陶菴事自歎 내 듣건대 삼주451)는 세상에 드문 현자로 我聞三洲罕世賢문장과 도학이 모두 탁월하다고 하였네 文章道學幷卓然인물의 성이 같다 하자 낙론이 옳게 되고452) 人物性同洛語是《편람》 453)책이 완성되자 사례가 온전해졌네 便覽書成四禮全질병이 오는 것은 성인도 면치 못하나니 疾病之來聖不免만년에 중풍에 걸려 말하기가 어려웠다오 晩歲嬰風語音艱다행히 문하에 이행상454)이란 자가 있어 幸有門下李行祥뭇사람들은 못 알아들었으나 홀로 잘 알아들었네 衆皆莫辨獨詳聞언론과 문자를 잘 전달할 수 있었으니 言論文字能譯傳크게 고생하지 않고 십년을 보내셨다오 不甚見苦經十年아 나는 비록 선생과 같은 덕은 없지만 嗟我縱無先生德선생과 같은 병은 외려 몸에 얽혀 있네 先生之病却纏身슬하에 이공 같은 사람이 없으니 膝下無如李公者병중의 복은 또한 서로 현격하다오 病中之福亦相懸비교하고 따지는 건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니 比幷較量皆閒想사생과 고락은 전부 천명을 기다려야 한다네 死生苦樂總俟天 我聞三洲罕世賢, 文章道學幷卓然.人物性同洛語是, 便覽書成四禮全.疾病之來聖不免, 晩歲嬰風語音艱.幸有門下李行祥, 衆皆莫辨獨詳聞.言論文字能譯傳, 不甚見苦經十年.嗟我縱無先生德, 先生之病却纏身.膝下無如李公者, 病中之福亦相懸.比幷較量皆閒想, 死生苦樂總俟天.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 또는 한천(寒泉),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삼주(三洲) 김창협(金昌協, 1651~1708)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여기서는 김창협이 이재의 스승이 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인물(人物)의……되고 이재(李縡)는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洛論)의 입장에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호론(湖論)의 영수인 한원진(韓元震)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함으로써 낙론을 이론을 뒷받침하였는데, 이를 근거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편람(便覽) 이재가 관혼상제(冠婚喪祭) 사례(四禮)에 관하여 편찬한 《사례편람(四禮便覽)》을 가리킨다. 이행상(李行祥) 1725~1800.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리(公履), 호는 왕림(旺林)이다. 이재(李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스승을 깊이 흠모하여 유문(遺文)을 정리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도암(陶菴)의 문하에 이처사(李處士)를 얻어 사문(師門)이 더욱 높아졌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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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십사일에 감회가 있어 九月十四日有感 구십오 년 전 이 날은 九十五年前此日바로 나의 선비께서 태어나신 때라네506) 是我先妣懸帨辰불초한 육남매를 기르셨는데 育養不肖六子女졸년이 꼭 육순을 채웠다오 卒年恰滿六旬春찬찬히 보건대 환갑이 일 년이 모자랐는데 周甲看看爭一歲지연된 계책이 외려 상생507)의 궤연에 미쳤네 延計猶逮象生筵수박을 심어 크기가 항아리만 했는데 種得西瓜大如甕입동 전에 겉은 푸르고 속은 붉었다오 外碧內丹立冬前쪼개어 올리자 탁자에 향이 가득했으니 剖破獻上香滿卓마치 제철 과일처럼 단맛이 온전하였네 宛若時物甘味全호사가들이 앞다퉈 말하기를 好事之人爭有言이런 때 이런 과일이 어찌 우연이랴 하였네 此時此菓豈偶然이를 듣고 슬프고 부끄러워 자책하였으니 聞之悲愧內自訟나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말한 것만 같았네 若道此漢孝感天생전에 천년도508)를 얻을 수 있다면 生前應得千年桃사후에 어찌 환생초가 없으리오 死後詎無還生草선비가 돌아가신 뒤로 삼십여 년이 지났으니 風樹以來經三紀소자도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오 小子皤皤亦已老새삼 절절한 감회가 발하여 시가 되었는데 追切感懷發爲詩병자의 말과 절반 섞여 속마음을 다 토로하였네 半雜病話寫傾倒 九十五年前此日, 是我先妣懸帨辰.育養不肖六子女, 卒年恰滿六旬春.周甲看看爭一歲, 延計猶逮象生筵.種得西瓜大如甕, 外碧內丹立冬前.剖破獻上香滿卓, 宛若時物甘味全.好事之人爭有言, 此時此菓豈偶然?聞之悲愧內自訟, 若道此漢孝感天.生前應得千年桃, 死後詎無還生草?風樹以來經三紀, 小子皤皤亦已老.追切感懷發爲詩, 半雜病話寫傾倒. 구십오……때라네 후창의 선비(先妣)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정사년(1857, 철종8) 9월 14일에 태어나 병진년(1916) 3월 16일에 별세하니, 향년 60세였다. 상생(象生) 죽은 사람을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여겨 궤연(几筵)을 설치하고 의복과 기물 및 의식 절차를 살아 있을 때에 준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천년도(千年桃) 반도(蟠桃)를 가리킨다. 서왕모(西王母)가 심은 복숭아로, 3000년에 한 번 꽃이 피고 3000년에 한 번 열매를 맺으며 이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太平廣記 卷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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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병 열 폭의 그림 뒤에 삼가 쓰다 병서 ○신묘년(1951) 敬題祭屛十幅圖畵後【幷序 ○辛卯】 제병 열 폭에 선조(先祖)의 덕행을 열거해 쓰고 아울러 그림을 그려서 추모의 뜻을 부쳤다. '금강산(金剛山)의 충의[金剛忠義]'란 것은 원조(遠祖) 마의태자(麻衣太子)402)의 일이며, '영은사(靈隱寺)에 제영하다[靈隱題詠]'란 것은 24대조 복야공(僕射公)403)의 일이며, '불교를 배척하고 불경을 조소하다[斥佛嘲經]'란 것은 23대조 문정공(文貞公)404)의 일이며, '역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다[討賊安邦]'란 것은 15대조 첨지공(僉知公)405)의 일이며, '매죽과 짝할 만한 고고한 풍치[梅竹高致]'란 것은 13대조 생원공(生員公)406)의 일이며, '모당(慕堂)과 월사(月沙)와 도의(道義)로 사귀다[慕月道交]'란 것은 11대조 죽계공(竹溪公)407)의 일이며, '용성에서 창의하다[龍城倡義]'란 것은 10대조 참봉공(參奉公)408)의 일이며, '낙요당(樂要堂)409)에서 강학하다[要堂講學]'란 것은 선고(先考) 벽봉공(碧峰公)410)의 일이다. 각각 오언절구(五言絶句)로 그 행실을 대략 기록하였다. 신묘년 맹춘(孟春)에 택술이 삼가 쓰다.금강산이 사해에 이름난 건 金剛名四海참으로 까닭이 있으니 良有厥由而마의태자의 사적이 아니라면 不是麻衣蹟한갓 기이한 수석일 뿐이라네 徒然水石奇-금강산의 충의[金剛忠義]-바위틈 샘물은 밤낮으로 내리는 비요 石泉日夜雨소나무에 걸린 달은 고금의 등불일세 松月古今燈복야공이 영은암에서 시 읊으니 僕射靈菴詠천추의 풍아411)에 등재되었도다 千秋風雅登-영은사(靈隱寺)에 제영하다[靈隱題詠]-《원각경》에서 주장하는 이단의 설을 啾啾圓覺經일필휘지로 남김없이 쓸어버렸다오412) 一筆掃淸之아득히 멀리 창려413)의 뒤를 이으니 邈爾昌黎後사문에 공이 참으로 작지 않도다 斯文功不微-불교를 배척하고 불경을 조소하다[斥佛嘲經]-맑고 깨끗한 연적암414) 아래에 淸絶硯巖下몇 칸의 공자 사당이 있다오 數間夫子祠해동의 아름다운 추로 풍속415)이 海東鄒魯俗이곳을 뿌리 삼아 가지를 뻗었네 根此達其枝-문묘(文廟)를 창건하여 초상을 봉안하다[創廟奉像]416)-신복이 되지 않음은 태사의 절의이니417) 罔僕太師節그 풍모를 들었고 또 공을 보았네 聞風又見公당시에 덕을 함께한 벗으로는 當時同德友정문충공418) 같은 분이 계셨다오 有若鄭文忠-신복(臣僕)이 되지 않고 귀향하다[罔僕歸鄕]419)-북쪽 변방에 전란이 일어나니420) 北塞風塵起조정의 근심이 참으로 깊었네 朝廷憂正深문무의 재주를 모두 완비했으니 全材文武備산해의 요기를 말끔히 제거했다오 山海淨氛祲-역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다[討賊安邦]-대나무는 깨끗하여 속되지 않고 竹兮淸不俗매화도 정결하여 티끌 한 점 없다오 梅亦潔無塵담박하기 그지없는 선생의 풍취여 淡泊先生趣진실로 매죽과 짝할 만하여라 固亦與作隣-매죽과 짝할 만한 고고한 풍치[梅竹高致]-유문에는 모당옹421)이 있고 儒門慕堂老문원에는 월사옹422)이 있는데 文苑月沙翁같은 소리와 기운은 서로 찾는 법이니423) 聲氣相求處정신으로 교유해 한 몸과 같았다오 神交一體同-모당과 월사와 도의(道義)로 사귀다[慕月道交]-적현424)의 운수가 다하려 할 때 赤縣運將訖청구425)가 먼저 해를 입었다오 靑邱先受傷호남에 뜻있는 선비 많으니 湖南多志士의로운 군대426)가 명성을 길이 떨쳤도다 師直義聲長-용성에서 창의하다[龍城倡義]-초당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草堂何所事교재427)에 글 읽는 소리 울리누나 橋梓有書聲간옹의 글이 진중하기 그지없으니 珍重艮翁筆낙요명을 대대로 전하리라428) 世傳樂要銘-낙요당(樂要堂)에서 강학하다[要堂講學]- 祭屛十幅, 列書先德, 幷作圖畵, 以寓追慕.其曰'金剛忠義'者, 遠祖麻衣太子事也; 其曰'靈隱題詠'者, 二十四世祖僕射公事也; 其曰'斥佛嘲經'者, 二十三世祖文貞公事也; 其曰'討賊安邦'者, 十五世祖僉知公事也; 其曰'梅竹高致'者, 十三世祖生員公事也; 其曰'慕月道交'者, 十一世祖竹溪公事也; 其曰'龍城倡義'者, 十世祖參奉公事也; 其曰'要堂講學'者, 先考碧峰公事也.各以五言小絶, 略記其實.辛卯孟春, 澤述謹識.金剛名四海, 良有厥由而.不是麻衣蹟, 徒然水石奇.【金剛忠義】石泉日夜雨, 松月古今燈.僕射靈菴詠, 千秋風雅登.【靈隱題詠】啾啾圓覺經, 一筆掃淸之.邈爾昌黎後, 斯文功不微.【斥佛嘲經】淸絶硯巖下, 數間夫子祠.海東鄒魯俗, 根此達其枝.【創廟奉像】罔僕太師節, 聞風又見公.當時同德友, 有若鄭文忠.【罔僕歸鄕】北塞風塵起, 朝廷憂正深.全材文武備, 山海淨氛祲.【討賊安邦】竹兮淸不俗, 梅亦潔無塵.淡泊先生趣, 固亦與作隣.【梅竹高致】儒門慕堂老, 文苑月沙翁.聲氣相求處, 神交一體同.【慕月道交】赤縣運將訖, 靑邱先受傷.湖南多志士, 師直義聲長.【龍城倡義】草堂何所事? 橋梓有書聲.珍重艮翁筆, 世傳樂要銘.【要堂講學】 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태자인 김일(金鎰)로, 마의(삼베옷)를 입고 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부안 김씨(扶安金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된다. 경순왕이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신흥 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어 항복하자, 태자가 이에 반대하여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복야공(僕射公) 고려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낸 김의(金宜)이다. 다른 이름으로 정립(挺立) 또는 정립(鼎立)이 있다. 말년에 변산(邊山)의 영은사(靈隱寺)에 있었는데, 〈영은사〉 시 한 수가 전한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로, 자는 차산(次山), 초명은 백일(百鎰),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이다. 고려의 명현으로, 문장과 도덕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첨지공(僉知公) 세조(世祖) 때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보칠(金甫漆)이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웠다. 지방관으로 16개 고을을 잘 다스렸다. 생원공(生員公) 김종(金宗, 1471~1538)으로, 자는 사앙(士仰), 호는 매죽당(梅竹堂)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과업(科業)을 폐하였다. 매죽(梅竹)을 심고 가꾸면서 청고(淸高)함으로 자신을 수양하였다. 죽계공(竹溪公) 김굉(金鋐)으로, 자는 여기(汝器), 호는 죽계이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학덕(學德)으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등에 제수되었다. 참봉공(參奉公)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을 지낸 김정길(金鼎吉, 1576~1645)로, 자는 응구(應九)이다.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하하여 의병을 거느리고 청주(淸州)까지 진격하였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군대를 해산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이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 등에 실려 있다. 낙요당(樂要堂)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金洛進, 1859~1909)이 강학(講學)했던 초당(草堂)이다. 벽봉공(碧峰公) 김낙진으로, 자는 치일(致一), 호는 벽봉이다. 약관에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겸와(謙窩) 홍주후(洪疇厚)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풍아(風雅) 국풍(國風) 및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뜻하는 것으로, 《시경》을 가리킨다. 원각경에서……쓸어버렸다오 고려 고종(高宗) 때 권신 최항(崔沆)이 김구(金坵)에게 《원각경(圓覺經)》의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청하자, 김구는 바른 도리를 지켜 굽히지 않고 시(詩)를 지어 최항을 꾸짖으니, 최항이 이에 앙심을 품고 김구를 제주 통판(濟州通判)에 좌천시킨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이 고사를 근거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正祖實錄 14年 2月 13日》 창려(昌黎) 당나라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의 호이다. 그는 〈원도(原道)〉, 〈논불골표(論佛骨表)〉 등을 지어서 유학을 옹호하고 불교를 배척하였다. 연적암(硯滴巖) 강릉 향교 옆에 있는 항아리 모양의 바위를 말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4》 추로(鄒魯) 풍속 추로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태어난 고향으로, 학문과 예악이 성대한 풍속을 이른다. 문묘(文廟)를……봉안하다 후창의 22대조 김여우(金汝盂)의 일을 읊은 것이다. 김여우의 다른 이름은 종우(宗盂),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원(元)나라로부터 문묘 제도를 도입하여 강릉(江陵)에 문묘를 처음 세웠다. 이 유문(儒門)의 공로로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되었다. 신복(臣僕)이……절의이니 원문의 망복(罔僕)은 망국(亡國)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의를 이른다. 태사(太師)는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숙부로 태사 벼슬을 지낸 기자(箕子)를 이른다. 은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주(周)나라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하였다. 《書經 微子》 정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 1337~1392)로,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이다. 고려조의 충신으로서 훗날 조선의 태조가 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강해지자 이를 숙청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신복(臣僕)이……귀향하다 후창의 17대조 김광서(金光敍)의 일을 읊은 것이다. 김광서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세 형제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를 지키며 부안읍(扶安邑) 옹정(瓮井)에 살았다. 북쪽……일어나니 1467년(세조13) 함경도의 호족(豪族) 이시애(李施愛)가 북방 지역 사람의 차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이른바 '이시애의 난'을 두고 말한 것이다. 모당옹(慕堂翁) 홍이상(洪履祥, 1549~1615)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인상(麟祥), 자는 군서(君瑞), 호는 모당,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행촌(杏村) 민순(悶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양의 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월사옹(月沙翁) 이정귀(李廷龜, 1564~1635)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장에 뛰어나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같은……법이니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同聲相應, 同氣相求.]"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의기투합하는 것을 뜻한다. 적현(赤縣) 중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국 시대 제(齊)나라 추연(鄒衍)이 중원(中原) 지방을 '신주적현(神州赤縣)'이라고 일컬은 데에서 유래하였다.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우리나라가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의로운 군대 원문의 사직(師直)은 군사의 명분이 바르다는 말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에 "군사의 명분이 바르면 사기가 왕성하고, 명분이 없으면 사기가 쇠한다.[師直爲壯, 曲爲老.]"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교재(橋梓) 교목(橋木)과 재목(梓木)으로, 아버지와 아들, 부도(父道)와 자도(子道)를 의미한다. 주(周)나라 백금(伯禽)이 아버지인 주공(周公)을 찾아갈 때마다 회초리를 맞고 돌아왔으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현인(賢人)인 상자(商子)의 가르침을 듣고서, 남산의 양지에 의젓하게 있는 교목을 보고서 부도를 깨닫고, 음지에서 겸손하게 고개 숙인 재목을 보고서 자도를 깨달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說苑 建本》 간옹(艮翁)의……법이니 간옹은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가리킨다. 낙요명(樂要銘)은 간재가 김낙진을 위해 지어준 〈낙요재명(樂要齋銘)〉을 이른다. 《艮齋集 前編續 卷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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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군 원경 갑열 이 방문해주어 시를 주기에 차운하여 보여주다 4수 崔君元敬【甲烈】見訪有贈, 次韻示之【四首】 군과 처음 안 뒤로 이십 년이 흘렀는데 與君始識廿年多지금 새 시를 지어준 마음은 어떠한가 今贈新詩意如何감응하여 서로 통함이 신묘한 이치인데 感應相通神妙理한 마음만 온갖 화기를 헛되이 보내누나 一心虛送萬般和천추 뒤에 동생433) 무리를 다시 보게 되니 千秋復見董生儔주경야독하는 참된 사업을 남기누나 暮讀朝耕實業留바라건대 시종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惟願加功終始一우리 무리에게 수치를 끼치지 않을 수 있기를 免敎吾黨或貽羞현인 되기 바라는 일은 쉽지도 어렵지도 않으니 希賢不易亦無難어렵건 쉽건 간에 어찌 감히 안일하게 지내랴 難易之間豈敢安단지 시비를 헤아리고 취사를 분간하고서 但問是非分取舍모두 바쁜지 한가한지 따지지 말고 즉시 행하라 卽行幷勿較忙閒군의 집안에 본디 의방434)의 규범 있으니 德門自有義方規나 같이 견문 없는 자를 어찌 의뢰하랴 如我無聞何所資학문이 끊어진 지금 거의 황년곡435)과 같으니 絶學殆同荒年穀좋은 종자 이루어 훌륭한 말을 길이 전할지어다 須成嘉種永傳辭 與君始識廿年多, 今贈新詩意如何?感應相通神妙理, 一心虛送萬般和.千秋復見董生儔, 暮讀朝耕實業留.惟願加功終始一, 免敎吾黨或貽羞.希賢不易亦無難.難易之間豈敢安?但問是非分取舍, 卽行幷勿較忙閒.德門自有義方規, 如我無聞何所資?絶學殆同荒年穀, 須成嘉種永傳辭. 동생(董生)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의 은사(隱士)인 동소남(董召南)을 가리킨다. 동소남은 동백산(桐柏山)에 은거하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의(義)를 행하고 부모는 효로 잘 봉양하고 처자식은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당대 대문호인 한유(韓愈)가 이렇게 훌륭한 동소남을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동생행(董生行)〉을 지어 그를 칭송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동소남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小學 善行》 의방(義方) 의로운 방도라는 뜻으로, 자식을 가르칠 때 쓰는 방법이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방자하게 굴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자식을 사랑하되 그를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사악한 길로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황년곡(荒年穀) 흉년에 얻기 어려운 곡식이라는 뜻으로,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능을 가진 드문 인재를 비유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예(賞譽)〉에 "세상에서 유문강을 풍년옥이라고 하고, 치공을 황년곡이라고 한다.[世稱庾文康爲豐年玉, 稚恭爲荒年穀.]"라고 하였다. 문강은 유량(庾亮)의 시호이고, 치공은 유익(庾翼)의 자로, 유량은 재상이 될 큰 기국을 지녔고, 유익은 세상을 구제할 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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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재의 〈인일〉 시에 차운하다 次止齋人日韻 오늘은 인일519)이라 일컬을 만하니 今日可稱人日也내 옛말을 가지고 반복하여 본다오 我將古語反之看수만 군중이 전란을 만난 걸 어찌하리오 柰如萬衆遭兵火수천 가호가 기한에 시달림을 거듭 탄식하네 重歎千家迫飢寒웅략 있는 주운의 검을 의지한다는 말을 못 들었고520) 雄略未聞朱劍仗빼어난 인재인 공우의 관을 털어낼 희망이 끊어졌다오521) 秀才絶望禹冠彈천시가 예전과 같아 세상이 소란스러우니 天時如舊世擾攘이 좋은 날을 저버리는 게 어렵기만 하구나 負此良辰亦堪難 今日可稱人日也, 我將古語反之看.柰如萬衆遭兵火? 重歎千家迫飢寒.雄略未聞朱劍仗, 秀才絶望禹冠彈.天時如舊世擾攘, 負此良辰亦堪難. 인일(人日) 음력 1월 7일을 말한다. 1일은 닭, 2일은 개, 3일은 양, 4일은 돼지, 5일은 소, 6일은 말, 7일은 사람의 날이라 한다. 점치는 날 기후가 청명하고 온화하면 평안하고 풍년이 들며, 기후가 흐리거나 추우면 질병이 있고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荊楚歲時記》 웅략(雄略)……들었고 주운(朱雲)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직신(直臣)이다. 주운이 성제를 만난 자리에서 상방(尙方)의 참마검(斬馬劍)을 빌려주면 성제가 총애하는 간신(奸臣) 장우(張禹)를 베겠다고 간언하였고, 성제가 노하여 끌어내라고 명하였는데도 끝까지 굽히지 않고 간쟁하였다는 고사가 있는데, 이를 원용한 것이다. 《漢書 卷67 朱雲傳》 빼어난……끊어졌다오 한(漢)나라 때 공우(貢禹)와 왕길(王吉)은 서로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던 때문에 왕길이 출사하면 공우 또한 자기도 응당 등용될 것을 믿고 관(冠)의 먼지를 미리 털어내어 출사를 준비했다는 고사가 있는데, 이를 원용한 것이다. 《漢書 卷72 王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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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홍 규상 을 애도하다 哀崔載洪【圭相】 아아 군의 효성은 하늘에 근본하니 嗟君之孝根於天비록 배우지 못했다 해도 나는 배웠다고 하겠네515) 雖曰未學吾謂學십 년 동안 병든 부친의 뜻과 몸을 잘 받들었고 病父十年適志體초상과 제사를 경건히 하여 다시 덕이 후하게 되었네516) 愼終追遠復厚德품삯을 먼저 지급하여 제실을 지었으니 傭金先下作祭室헌청의 창과 벽은 어찌 그리 밝고 깨끗한가 軒廳牕壁何明潔당상의 편모께서 근심이 없으셨으니 堂上偏慈無戚戚털끝만큼도 어기는 경우가 없었다오 一毫無或有違越근본이 서고 나면 도가 절로 생겨나니 本之旣立道自生언행이 대부분 은연중에 시의적절하였네 言動于時多暗合오늘날 세상에는 패악한 자식이 넘쳐나니 滔滔悖子今世界미친 듯이 날뛰어 방자하기 그지없다오 陸梁挑達恣活躍아아 군은 한창 때인데 하늘이 빼앗아 가니 嗟君盛年天奪去어찌 저 무리를 위해 원수를 갚듯이 했는가 胡爲此曹仇報復의심되고 한탄스러워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니 且疑且歎意莫定하늘에 묻고 크게 혼을 부르는 걸 내 하고자 하네 天問大招我欲作군의 가정에 준수한 두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聞君庭下秀二蘭어질고 효성스러워 훗날 부친의 자취를 이으리라 賢孝他日繼父迹최씨 집안이 대대로 창대할 것을 기약할 수 있으니 崔門世世期昌大이로써 황천에 있는 군의 넋을 위로하노라 以是慰君泉下魄 嗟君之孝根於天, 雖曰未學吾謂學.病父十年適志體, 愼終追遠復厚德.傭金先下作祭室, 軒廳牕壁何明潔?堂上偏慈無戚戚, 一毫無或有違越.本之旣立道自生, 言動于時多暗合.滔滔悖子今世界, 陸梁挑達恣活躍.嗟君盛年天奪去, 胡爲此曹仇報復?且疑且歎意莫定, 天問大招我欲作.聞君庭下秀二蘭, 賢孝他日繼父迹.崔門世世期昌大, 以是慰君泉下魄. 비록……하겠네 《논어》 〈학이(學而)〉에 "어진 이를 존경하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서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군주를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하겠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초상(初喪)과……되었네 《논어》 〈학이(學而)〉에 "어버이의 초상을 신중하게 치르고 먼 선조의 제사를 정성껏 지내면 백성의 덕이 후함에 돌아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한 것을 원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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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김주백 종락 에 대한 만사 挽金友周伯【宗洛】 어려서부터 사귀어 늙을수록 친해졌는데 小少爲交老益親열흘 동안 달려도 천리마를 따라잡기 어려웠네528) 難將十駕躡行塵두 대양의 격류 속에 우뚝한 지주와 같았고 二洋頹浪亭亭柱스승을 가까이 모시며529) 강직한 인품을 지녔다오 三席春風侃侃人백옥루에 틀림없이 기문이 지어졌겠거니와530) 白玉樓應文有記선비들은 학문하는 이웃이 없음을 어이하리오 靑衿士柰學無隣아아 내 오래 앓고 있지만 저승사자가 더디 오는데 嗟吾積病遲符到그 누가 다시 때때로 이내 몸을 돌아볼까 誰復時時顧此身 小少爲交老益親, 難將十駕躡行塵.二洋頹浪亭亭柱, 三席春風侃侃人.白玉樓應文有記, 靑衿士柰學無隣?嗟吾積病遲符到, 誰復時時顧此身? 열흘……어려웠네 《순자(荀子)》 〈수신(修身)〉에 "무릇 준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데, 노둔한 말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따라잡을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則亦及之矣.]"라고 하였는데, 자신은 노둔한 말에 상대는 천리마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스승을 가까이 모시며 원문의 삼석(三席)은 임금이나 신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매우 가까운 거리를 말한다. 《禮記 文王世子》 춘풍(春風)은 좌상춘풍(座上春風)의 줄임말로, 봄바람처럼 온화한 스승을 의미한다. 《近思錄 卷14》 백옥루(白玉樓)에……지어졌겠거니와 백옥루는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의 누각을 말한다. 당(唐)나라 이상은(李商殷)이 지은 이하(李賀)의 전기(傳記)에, 하루는 이하의 꿈속에 붉은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옥황상제가 백옥루를 완성하고 당장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 하려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꿈을 꾸고 나서 그가 곧 죽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원용한 것이다. 《李賀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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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꿈에서 조비 및 선고와 선비를 뵙지 못하다 不復夢見祖妣先考先妣 나는 기유년부터 余自屠維歲늘 꿈에서 벽봉옹을 뵈었고531) 每夢碧峰翁거듭 화를 당한 뒤의 꿈에서는 荐禍以後夢조비와 선비까지 함께 뵈었다오532) 祖妣先妣同평소의 그리움이 꿈이 되어 平生思爲夢밤마다 헛된 적이 없었는데 夜夜殆無空중풍의 병에 걸린 뒤로는 自嬰中風疾마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니 心官職失供그리움이 지극하지 못한지라 惟其思不至이 때문에 꿈에서 만나지 못한다오 所以夢不逢마치 옛날 공중니께서 有若孔仲尼다시는 꿈에서 주공을 못 보셨던 것과 같다오533) 不復夢周公아아 너 소자는 嗟嗟汝小子나의 말을 귀담아들을지어다 我言留汝聰도를 행하려는 뜻은 늙으면 진실로 쇠하거니와 行道老固衰네가 어버이를 잊는 건 어찌 용납될 수 있으랴 汝親忘豈容너의 불효를 말하지 않고 不言汝不孝옛일을 끌어와 교묘히 둘러대는구나 引古巧彌縫이 말씀을 듣고 아무 대답도 못 드린 채 聞言無以答눈물만 줄줄 흘리며 실의에 빠졌다오 有淚徒龍鍾 余自屠維歲, 每夢碧峰翁.荐禍以後夢, 祖妣先妣同.平生思爲夢, 夜夜殆無空.自嬰中風疾, 心官職失供.惟其思不至, 所以夢不逢.有若孔仲尼, 不復夢周公.嗟嗟汝小子, 我言留汝聰.行道老固衰, 汝親忘豈容?不言汝不孝, 引古巧彌縫.聞言無以答, 有淚徒龍鍾. 나는……뵈었고 기유년(1909)년 1월 21일에 후창의 부친인 벽봉공(碧峰公) 김낙진(金洛進)이 별세하였다. 거듭……뵈었다오 병진년(1916)년 3월 13일에 후창의 조모인 영광 김씨(靈光金氏)가 별세하고, 3일 후인 16일에 모친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별세하였다. 마치……같다오 중니(仲尼)는 공자(孔子)의 자이다. 공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도다. 내 다시는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였다.[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라고 하였다. 《論語 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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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홍【기현】에게 보냄 與鄭致弘【琦鉉】 영랑(令郞)이 복을 마치고 저를 찾아오니 슬프고 위로하는 마음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상례를 마칠 때 나아가 위로하려던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앉아서 방문을 받았으니 또한 마음이 부끄럽고도 부끄럽습니다. 삼가 묻건대 형께서는 체후가 안정되고 쾌적하며 중씨(仲氏) 또한 평안하신지요, 신이 화평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일찍이 재덕(才德)이 뛰어난 형제는 보았지만, 70의 노년을 맞아 긴 베개와 큰 이불로 저녁마다 평화롭고 화락하게 지내는 것은 옛날에 그런 말을 들었고 지금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물며 아래로 현명한 자제가 가르침을 받들고 잠자리 시중을 들며 시(詩)와 예(禮)를 물으니 만년의 넉넉한 복이 사람을 탄복하고 부러워하게 합니다. 아우는 형제도 없이 혼자라서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지내는 처지입니다. 게다가 처지가 기구하여 여러 해에 걸쳐 객지를 떠도느라 가인(家人)들과 조금이라도 단란하게 지냈던 날이 없었습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다면 역시 제게는 간절한 한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의 세상 소식은 갈수록 더욱 좋지 못하니 끝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고인(古人)의 만산통곡(萬山痛哭)89)도 오히려 헐후어(歇後語)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관산(冠山)의 사우(士友)가 달 전에 정산(定山)으로 갔습니다. 노정(路程)을 계산해보면 며칠 사이에 이곳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요사이 일어난 소식을 이 사람에게 듣게 될 듯하니 열흘 사이에 한 번 왕림하실 수 있으신지요. 몹시 기원(祈願)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令郞闋服過我。悲慰之情。有難勝堪。向於終制時。未遂晉慰之計。而今乃坐得其顧。亦不無愧愧之私也。謹問兄體安重。仲氏亦平適。神相愷悌。固應如此。竊嘗見金昆玉季。七耋衰年。長枕大被。日夕湛樂。此是古聞其語。而今見其人矣。好事好事。況下有賢子弟。趍庭侍枕。問詩問禮。晩年餘祿。令人歎羨。弟終鮮窮獨。踽踽無賴。加以身事奇險。多年羈泊。未得與家人輩有多少團聚之日。若一朝溘然亦未爲非區區之恨也。時耗去益不佳。未知終作何狀。古人之萬山痛哭。猶是歇后語。柰何奈何。冠山士友月。前往定山計。其程道則數日間。當過此矣。時耗似於此便聞之。旬間或可一枉否。雖所深願。而安敢望也。 고인(古人)의 만산통곡(萬山痛哭) 김인후(金麟厚)의 ≪하서선생전집부록≫ 권2에 정철(鄭澈)이 하서를 그리며 지은 시에서 인용하였다. "동방에는 출처에 바른 인물 없건만 오직 담재옹이 있다네. 해마다 7월이 되면 일만 산중에서 통곡을 하네.【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年年七月日, 痛哭萬山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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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은【택환】에게 답함 答安汝恩【澤煥】 지난달 그믐날에 보내신 편지를 이번 달 20일 저녁에 받았으니 벗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먼 곳에 있는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펼쳐 읽어 본 이래 정감(情感)이 배로 더하였습니다. 아우는 사는 곳이 외지고 누추하여 이전에 종유(從遊)하던 이들과 까마득히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여 외롭고 쓸쓸한 회포가 매번 마음에 절실합니다. 오직 노형(老兄)만이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매번 간절한 정의(情意)를 담아 권면과 일깨움을 아끼지 않으시니 제게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달 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충고와 책임에 관한 말이 이전과 달랐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읽어보니 곧 감히 억지로 책문하지는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노형이 저를 사랑하는 것은 이처럼 지극하건만 말씀은 이처럼 지나치신지요. 우리 두 사람이 적막한 물가77)에서 상종(相從)하면서도 정을 다하지 못한다면 또 어떤 사람이 나의 실수를 책망하고 나의 잘못을 보완하여 새롭게 떨쳐 일어나는 단계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까. 대체로 교제는 얕으면서 말만 심오한 것은 군자에게 부끄러움입니다. 하물며 교제가 깊건만 말이 얄팍한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노형께서 더욱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음양(陰陽)의 이치는 또한 사례를 가지고 본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음양의 동정(動靜)이 비록 체단(體段)과 유행(流行)은 다르더라도 그 이치가 어찌 일찍이 달랐겠습니까. '사(死)' 자를 '독(篤)' 자로 바꾸는 것이 참으로 당연합니다. '독(篤)' 자는 '사(死)' 자에 비해 진심 진력(盡心盡力)하여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부족합니다. 또 주자(朱子)께서도 일찍이 '사공부(死功夫)' 3자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한 착정(着靜)과 주정(主靜)에 관한 주장은 자연히 아주 상세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정(主靜)은 체용(體用)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착정(着靜)은 학자가 존심(存心)하는 방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알지 못하는 초학자(初學者)가 성급하게 착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장하고 공허한 것을 붙잡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정(靜)' 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보다는 '경(敬)' 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여 치우침이 없습니다. 주정(主靜)에 관한 주장은 초학자에게는 주경(主敬)만 못합니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는 "주선생(周先生 주돈이(周敦頤))의 말씀은 물길이 사나워 배를 대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초학자에게는 주경(主敬)을 말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주자(周子 주돈이)는 주정(主靜)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정(靜)' 자는 동정(動靜)을 다 포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천지의 조화는 지정(至靜)하지 않으면 한곳으로 모일 수 없어 발생(發生)할 수 없고, 인심은 지정(至靜)하지 않으면 부착하는 곳이 없어 응용(應用 반응하여 작용)할 수 없습니다. 무릇 천하의 사물 가운데 어찌 체(體)가 없는 용(用)이 있으며 뿌리가 없는 가지가 있겠습니까. 체(體)가 수립된 다음에야 용(用)이 작용할 수 있으며 뿌리가 단단한 다음에야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이 때문에 명도(明道 정호(程顥)), 연평(延平 이동(李侗)) 등 여러 선생께서 사람을 가르칠 때 정좌(靜坐)를 우선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자도 역시 "모름지기 정좌를 해야 비로소 수렴(收斂)할 수 있다. 또 정(靜)이 주(主)이고 동(動)은 객(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염옹(濂翁 주돈이)이 말하는 주정(主靜)도 이런 뜻이건만, 도리어 동(動)과 대비시키셨습니다. '정(靜)'은 동정(動靜)을 포괄하는 정(靜)이 아닙니다. 만약 동정(動靜)을 포괄하는 정(靜)을 말한다면 정이후능정(定而後能靜)78)의 정(靜)과 무욕고정(無欲故靜)79)의 정(靜)이 그것입니다.끝에 덧붙인 종덕(種德)80)에 관한 견해는 매우 훌륭합니다. 농인(農人)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다음에야 비로소 밭을 갈고 수확하는 공을 이루게 되고 학자는 심지(心地)가 안정된 다음에야 무한한 도리(道理)를 궁구하고 무한한 사업(事業)을 할 수 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씀하신 주정(主靜)과 주경(主敬)의 학설은 사인(斯人)이 먼저 심지를 안정시키는 요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보내신 편지에서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은 지나친 듯합니다. 실심(實心)으로 실천할 수 있다면 하루가 지나면 저절로 하루의 효과를 볼 수 있고 한 달이 지나면 저절로 한 달의 효과를 볼 수 있으며, 한 해가 지나면 저절로 한 해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꼭 멀리 백세 이후를 기약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쉬운 것을 하고 어려운 것을 하지 않는 이유가 또한 어찌하여 단지 이 때문이겠습니까. 무릇 사도(斯道)는 평담 순실(平淡純實)하여 사람의 이목을 잘못되게 만드는 성색 취미(聲色臭味)가 없으며 사람의 심술(心術)을 움직이는 성리 위세(聲利勢威)가 없으며 사람의 의지를 미혹시키는 신기 괴려(新奇怪麗)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일깨우고 형이 면려하여 입과 귀에 익숙한 것은 단지 문사(文辭)와 공리(功利)에 관한 방도일 뿐입니다. 비록 징험할 수 있는 성현(聖賢)의 말이 있더라도 저들이 평소에 존숭(尊崇)하고 향모(向慕)하던 것을 갑작스럽게 버리고 마음을 고쳐먹어 머리를 숙여 적막하고 먼지 가득한 서책에 마음과 힘을 다하려고 하겠습니까. 재질(才質)이 아름다운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평생토록 그럭저럭 한결같이 똑같은 길로 돌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통한스럽습니다.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신 "정(靜) 안에도 동(動)의 뜻이 있다."라는 말은 참으로 합당합니다.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음양(陰陽)은 자리가 같지 않고 동정(動靜)은 시기가 같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것으로 말하자면 동정과 음양의 이치가 이미 그 안에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미발(未發)했을 때 환하고 어둡지 않아 지각이 모두 갖추어진 것은 음중(陰中)의 양(陽)이고 정중(靜中)의 동(動)이며, 이발(已發)했을 때 등급이 나뉘어 어긋나지 않고 각각 머무는 곳이 있는 것81)은 양중(陽中)의 음(陰)이고 동중(動中)의 정(靜)입니다. 今二十日夕。獲拜前月晦日書。可知朋友往復。亦非容易事。近者如是。況遠者乎。披閱以還。情感倍增。弟所居僻陋。前日從遊之人。寥然不相問聞。孤索之懷。每切于中。惟老兄不以爲鄙。每致慇懃於書墨往復之間。勸勉引讓。無所不至。爲幸顧何如哉。然月前往復。規責之語。異於前日。及讀來示。乃有不敢强責之敎。豈老兄愛我如是其至。而其言如是其過乎。吾兩人相從於寂寞之濱。而猶不盡其情。則更有何人。責吾失補吾過。使之納之於作新之地哉。夫交淺言深。君子恥之。況交深而言淺乎。願老兄加察焉。來喩以爲陰陽之理。亦以例看。此無可言。陰陽動靜。雖有體段流行之殊。其理則何嘗有異。死字改以篤字。固當然。篤字比死字。少盡心盡力抵死不已之意。且朱子嘗以此死功夫三字爲言矣。但前書着靜主靜之說。自有所未能消詳者。主靜以體用自然之理言。着靜以學者存心之方言。然若使初學不知者。遽欲着靜。則必有助長捉空之獘。故說靜字。不如說敬字之爲正當而無偏也。主靜之說。在初學。不如主敬。是以朱子曰。周先生語。急難湊泊。初學不如說主敬。未知如何周子曰主靜。此靜字非兼包動靜而言歟。天地之化。非至靜。則不能翕聚。而發生不得。人之心非至靜。則無所湊泊。而應用不得。凡天下之物。豈有無體之用。無根之枝哉。體立而後。用有以行。根固而後。枝有以達。此自然之理也。是故明道延平諸先生敎人。未嘗不以靜坐爲先。而朱子亦曰。須是靜坐。方能收斂又靜爲主。動爲客。然則濂翁所謂主靜。亦是此意。而乃與動對之。靜非包動靜之靜。若言包動靜之靜。則定而後能靜之靜。及無欲故靜之靜。是也尾附種德之說。甚佳。農人得田地然後。方有耕耘收獲之功。學者定心地然後。窮得無限道理。做得無限事業。先儒所謂主靜主敬之說。莫非爲斯人先定心地之要也。但來喩所謂。百世之下。必期其效。此語似涉過當。若能實心行之。則一日自可見一日之效。一月自可見一月之效。一歲自可見一歲之效。何必遠期百歲之下哉。人之爲其易而不爲其難者。亦豈但此故也。夫斯道也。平淡純實。無聲色臭味之可以誤人耳目。無聲利勢威之可以動人心術。無新奇怪麗之可以惑人志意。則父詔兄勉。熟口慣耳者。只是文辭功利之術也。雖有聖賢言語可以證嚮者。彼肯遽然捨其平生之所尊尙向慕者。而革心屈首。以從事於寥寥塵編之間哉。才良質美非不多矣。而悠悠百年。同歸一轍誠可痛恨。來喩靜中亦有動之意者。固當。自其著者而言。則陰陽不同位。動靜不同時自其微者而言。則動靜陰陽之理。已悉具於其中。方其未發。而瑩然不昧知覺都具者。陰中之陽靜中之動也。方其已發。而品節不差各有攸止者。陽中之陰動中之靜也。 적막한 물가 은자의 거처를 말한다. 한유(韓愈)의 〈답최입지서(答崔立之書)〉에 "만약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넓고 한적한 들판에서 밭을 갈고, 적막한 물가에서 낚시질하면 된다.【若都不可得, 猶將耕於寬閒之野, 釣於寂寞之濱.】"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정이후능정(定而後能靜) 《대학장구(大學章句)》 경 1장에 "머물 곳을 안 뒤에야 안정을 취하게 되고, 안정을 취한 뒤에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진 뒤에야 외물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라는 말이 보인다. 무욕고정(無欲故靜) 주렴계(周濂溪)는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성인은 중정인의(中正仁義)로써 표준을 정(定)하고 정을 주로 하여 인극을 세운다.【主靜立人極.】"라고 하고, 정(靜) 자 밑에 "욕심이 없으니 정하다.【無欲故靜.】"라고 자주(自註)하였다. 종덕(種德) 사람들에게 널리 은덕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왕위를 선위하려고 하자, 우가 말하기를 "저의 덕은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귀의하지 않거니와, 고요는 힘써 행하여 덕을 펴서 덕이 마침내 아래로 백성들에게 내려져 백성들이 그리워하니, 황제께서는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미발(未發)했을 …… 것 《대학장구》 제1장의 소주에 있는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은 것은 '명'이고, 뭇 이치를 갖추고 있고 만사에 응하는 것은 '덕'이다. 뭇 이치를 갖추고 있음은 덕의 전체로 발하지 않은 상태이고, 만사에 응함은 덕의 대용으로 이미 발한 상태이니, 만사에 응함은 바로 뭇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의 작용 행위이다. 발하지 않으면 밝아서 어둡지 않고, 이미 발하였으면 품절하여 어긋나지 않는 것이 이른바 '명덕'이다.【虛靈不昧, 明也; 具衆理應萬事, 德也. 具衆理者, 德之全體未發者也; 應萬事者, 德之大用已發者也. 所以應萬事者, 卽其具衆理者之所爲也. 未發則炯然不昧, 已發則品節不差, 所謂明德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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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일【재철】에게 보냄 與文善一【載轍】 형과 아우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고요한 곳에서 고삐를 나란히 하고 수레를 가까이 대고 얘기를 나누니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나에게 백붕(百朋)83)을 주니 마음으로 좋아하도다.'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인편을 통해 또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았으며 서폭(書幅)에 가득한 내용은 모두가 사람을 경계하고 성찰하게 하였습니다. 하신 말씀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아, 서로 알게 된 것이 조금 늦어서 젊은 날에 서로를 바로잡아 주어 공효를 거두는 바가 있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끊임없이 이어 나간다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거나, 때를 놓치고 경계를 지나친 뒤라도 완전히 쇠하고 무너지기까지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또 어찌 알겠습니까? 형의 체후와 근래의 안부가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제가 듣고 싶었던 말에 더욱 부합합니다. 아우는 심란하기가 예전과 같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거사(蕖史)84)가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의 동당(同黨)이 더욱 외롭습니다. 일전에 영남의 벗 3인이 저를 찾아와 며칠 동안 정겨운 담화를 나누었는데 우리 형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삼파기(三坡記)」는 문사(文詞)가 매우 뛰어나 참으로 한마디 말도 거들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형(老兄)께서 명을 하셨으니 어찌 감히 줄곧 휘겸(撝謙)85)만 하겠습니까. 이에 약간 점화(點化)86)를 하였으니 서자(西子 서시(西施))에게 환술(幻術)을 부려 모모(嫫母)87)가 되게 하지나 않았는지요? 애초에는 가까운 시일에 한 번 찾아뵙고 사례를 표하는 의례를 갖추려고 했으나 손님과 벗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 마을 이웃을 조문하는 일이 간간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우선 미루어두었습니다. 크게 꾸짖지 말기 바랍니다. 쌓인 회포가 많을 뿐만이 아니라서 얼굴을 뵙지 못하면 다하기가 어렵겠습니다. 伯兮叔兮。倂轡傾蓋於萍水涔寂之中。詩所謂錫我百朋。中心好之者。此也。便來又承心貺。滿幅張皇。無非警省人處。受言在心。誓不遺忘。嗚乎相知差晩。未得相規於少壯之日。而俾有所收也。然從此源源。又安知不有小小回光。不至全然頹却於失時過境之餘哉。仍審兄體近節安適。尤協願聞。弟憒憒如昨。無可奉道。蕖史云亡。吾黨益孤。日前嶺友三人來過。作數日之款。恨未與吾兄共之也。三坡記文詞甚偉。固不可贊一語。然老兄有命。豈敢一於撝謙而已哉。玆以略加點化。不其歸於幻西子爲嫫母耶。初欲從近一造。以修回謝之儀。賓朋送迎。鄕隣吊唁。間間沓至。故姑爲停之。幸勿厚嗔如何。積懷不啻多矣。而非面難究。 백붕(百朋) 고대(古代)에 패각(貝殼)을 화폐로 사용할 때 오패(五貝)를 일관(一串), 양관(兩串)을 일붕(一朋)이라고 했던 데서, 전하여 극히 많은 보화에 비유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쑥이, 저 구릉 가운데 있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고 보니, 나에게 백붕을 준 것 같도다."라고 하였다. 거사(蕖史) 정석(鄭{氵+奭}, 1821~?)의 호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주백(周伯)이며 기정진의 문인으로 창평(昌平)에서 거주하였다. 휘겸(撝謙) 《주역》 〈겸괘(謙卦) 육사(六四)〉에 "겸손을 베풂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無不利, 撝謙.】"라고 하였는데, 그 전(傳)에 "휘(撝)는 펴는 상(象)이니, 사람이 손으로 펴는 것과 같다. 동식(動息)하고 진퇴(進退)함에 반드시 겸손(謙巽)함을 펴야 한다.【撝, 施布之象, 如人手之撝也. 動息進退, 必施其謙.】"라고 하였다. 점화(點化) 종래의 것을 새롭게 고친다는 뜻으로, 전인(前人)의 시문(詩文)의 격식을 본떠 더 참신하게 변용하여 시문을 짓는 것을 말한다. 모모(嫫母) 황제(黃帝)의 넷째 비(妃)로서 매우 못생겼으나 어진 덕(德)으로 알려졌다 하며, 추녀(醜女)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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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신묘년(1951) 선사455) 기일에 감회가 있어 일을 기록하다 7월 4일 辛卯先師諱辰感懷記事【七月四日】 광무 연간 경자년456) 光武歲庚子내 나이 열일곱 살이라 余年方十七학문하는 요령에 어두웠으니 所學昧蹊逕한갓 읽기만 할 뿐이라고 하겠네457) 可謂徒能讀듣건대 봉산 산중에서 聞說蓬山中선생이 남으로 와 강학한다 하니458) 臯比南來設유문이 바람에 쏠린 듯하였고 儒門風斯動사림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네 士林雲似集월명사가 집에서 꽤 멀었는데 迢絶月明寺찾아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절했다오 往拜其間厠선비들은 앞다퉈 요의를 강하니 士爭講要義경전과 성례의 심오한 이치였네 經傳性禮賾나는 《춘추좌씨전》을 가지고 余將左氏傳한 장을 소리 내어 외우니 郞誦一章訖사람들은 보기 드물다고 하였고 人謂是罕見선생은 옥처럼 아껴주셨네 先生愛如玉마침내 말씀하시길 곽임종은 乃云郭林宗모용을 방문해 권면하여 덕을 이루게 했는데459) 訪茅勸成德천고에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千古傳美談내 어찌 훌륭한 자취를 따르지 않으랴 하셨네 我盍追芳躅하룻길 노정을 우회해 가서 迂回一日程우리 집에 왕림해 주셨는데 枉駕臨弊宅가친께 글을 써서 주기를 書贈家大人어진 아들은 집을 윤택하게 한다고 하셨네460) 賢子乃潤屋사람들이 사제의 분의를 정하라고 권하니 有人勸定師선생의 뜻도 그렇게 하고자 하셨지만 先生意亦欲막중한 사제의 분의를 莫重師生義너무 쉽게 정하는 건 성의가 부족하다 하셨네 坐定誠意薄이것은 가친의 말씀이었으니 是爲大人言의리가 더욱 참되고 절실하였네 義諦更眞切영산461)은 집에서 사백 리나 떨어졌는데 寧山四百里폐백을 갖추어 배알하라고 명하셨다오 具贄命之謁팔풍 –땅 이름이다.- 에는 사나운 바람이 울부짖었고 八風【地名】獰風吼쌍용 –고개 이름이다.- 에는 모진 눈이 쌓여 있었는데 雙龍【峙名】虐雪積어린 나이에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 弱齡不勝寒언 손을 호호 불며 구슬피 울었다오 呵手因作泣갖은 고생 끝에 금곡에 도착하니 十顚到金谷선생께서 깜짝 놀라며 기뻐하셨네 先生驚且悅이튿날 아침 집지의 예를 행하니 翌朝行贄禮주렴 앞에 상서로운 햇빛이 비추었네 簾前照瑞旭가르치는 말씀이 어찌 그리 온화한가 誨辭一何溫질박할 수 있도록 정성껏 면려하셨네 諄諄勉樸實《소학》 책을 가르쳐 주셨는데 授以小學書겨우 한 달을 보낼 수 있었다오 纔得經一朔내가 남으로 돌아감에 미쳐서는 及見我南歸무엇을 잃은 듯이 서운해 하시고 悵然如有失전옹이 남긴 예설 부류를462) 全翁禮說類교정 편집하기를 간곡하게 부탁하셨네 叮嚀託校輯만년에 준수한 선비를 얻었으니 晩得俊髦士박복한 신세는 아님을 자축한다고 하셨으니 自賀不淺福이는 가친에게 답하신 편지 내용으로 是回大人書그 말씀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오 其言肺肝出신축년(1901) 늦봄에 重光暮春者다시 지팡이 짚고 천리 길을 갔는데 復杖千里策선생께서 군이 와서 몹시 기쁘니 君來我甚喜예설 편집을 어찌 그리 빨리 했는가 禮輯何敏速금강 물결이 쪽빛처럼 푸른데 錦江碧如藍그 위에 정자가 우뚝 서 있다네 其上亭子屹선비들이 풍영하는 모임을 가지니 多士風詠會군도 나와 함께 가보세 하셨네 君可同我適예를 행하는 자리에 일이 있는 날에는 禮席有事日가장 연소한 반열에서 나를 뽑으셨으니 選我最少列나의 솟아 흐르는 기를 돕고 流峙助我氣나의 좁은 견문을 넓혀주셨다오 聞見闊我狹눈 내린 달밤 봉서사463)에서 雪月鳳棲寺큰 강회가 다시 열렸는데 復開大講席사람은 늘 육칠 십 명이 모이고 人常六七十기간은 구십 일 정도가 되었네 日惟九旬浹문난함이 번다하고 소란스러웠지만 問難煩且擾나만은 직접 가르침 받음이 많았다오 余獨最親炙문리가 나날이 빠르게 발전하여 文理日驟進동배들이 미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셨으니 流輩所罕及이는 선생의 붓에서 나온 말씀으로 出自先生筆나의 가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라네 向我大人說인하여 권면하기를 몸소 인을 당해서는 因勸躬當仁자식에게도 사양하지 말라고 하셨네464) 讓子亦且勿한적한 전주의 여관에서 寂寂完南館세 사람이 제석을 보냈는데 三席經除夕자식에게 함께 수세하도록 하셨으니 令子同守歲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오 佳況此無若새해 정월 귀근하는 날에 開正歸覲日손수 쓰신 선생의 편지가 은근하였네 殷勤師手畢임인년(1902) 가을에 신전465)에 이르러 壬秋到薪田한 달 동안 다시 선생을 모셨다오466) 浹月復立雪유문에 바야흐로 일이 많아 儒門方多事기와 권이 서로 방휼처럼 다투었는데467) 奇權互蚌鷸선생께서 두 사람의 설을 절충하니 先生折其衷외람된 변론이 모두 환히 밝혀졌다오468) 猥辨儘昭晳중간에 심오한 이기설을 가지고 間將理氣奥나의 몽매함을 하나하나 일깨워주셨네 一一開我窒사방에 편지를 주고받으실 때 四方往復書때때로 대신 붓을 잡았다오 時亦代執筆계묘년(1903)에 가서 문안드릴 때 癸卯往候時연기에 마침 가시려고 하였는데 燕岐駕適發나는 번지469)처럼 수레를 몰아 余爲樊遲御이백 리 넘는 먼 길을 왕래하였네 往返七舍邈중도에 두 여관 안에서 中路兩館裡나에게 후창이란 편액을 써 주셨네470) 贈我後滄額이보다 앞서 편지 봉투에 前此書封皮창동(倉洞)을 창동(滄東)으로 바꿔 쓰셨네 倉洞滄東易창주471)의 도가 동쪽으로 온 지가 滄洲道東來지금에 이르러 팔백 년이 되었는데 至今年八百계승함은 후학에게 달려 있으니 繼之在後學중대한 임무이자 또 막중한 책임일세 大任又重責나의 형편없는 재주를 돌아보건대 顧以鹵劣材절하고 받았지만 감히 응낙하지 못하였네 拜受未敢諾남쪽으로 완산 길을 가리키시니 南指完山路다시 지난번처럼 수레를 몰았다오 御駕復如昨당시 난파의 상이 있었는데 時有蘭坡喪선생은 대공복을 입을 친척이니 師則大功慽상례와 장례로 수개월을 보내다가 喪葬經數月서늘한 기운 일자 마침내 북으로 돌아오셨네 凉生遂還北갑진년(1904)에 마침 원고를 필사하여 甲辰會寫稿초여름에 필사 일을 마쳤는데 首夏役旣卒선생께서 다시 남으로 내려가시니 先生復南下난파의 연제가 가까운 시일에 있었네 蘭練在近隔방백이 강회를 설행하였는데 方伯設講會선생을 맞이하여 윗자리에 오르게 했네 邀之升上榻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人衆如山海나는 이날 일직을 맡았다오 我爲當日直연제를 지낸 다음 담양에 가서 旣練往潭陽삼은각을 구경하였네 爲觀三隱閣그 길이 우리 창동리를 경유하는데 路經我滄里가친께서 서재를 새로 지으시니 大人齋新築낙요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고 錫號以樂要명시까지 아울러 벽에 걸게 하셨네472) 銘詩幷揭壁객지에서 마침 더위에 지쳐 旅候適病暑영산(瀛山 고부)에 머물러 조섭하시니 瀛山留調攝천암은 구름과 숲이 좋고 天巖好雲林예천은 천석이 아름다웠네 禮川佳泉石많은 선비들이 달려와 모여드니 濟濟縫掖趨글 읽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오 洋洋絃誦徹남고엔 일재의 유적이 남아 있고 南臯一齋墟옥천엔 하서의 자취가 전해지네473) 玉川河西蹟쌍계루는 어찌 그리 깨끗한가 溪樓何瀟灑필암은 또 엄숙하기도 하여라474) 筆巖又嚴肅경치 좋은 곳은 진실로 명성이 있고 勝地固有名장대한 광경은 또한 즐길 만하여라 壯觀亦可樂비로소 추성(秋城 담양)에 이르렀으니 始得達秋城선생의 이번 행차 목적지라네 師行是目的돌아오는 길에 풍패475)에 이르러 歸路到豐沛선생께 하직하니 뜰에 국화가 피어 있었네 拜退庭有菊대개 반년 동안에 蓋於半載間잠시도 슬하를 떠난 적이 없었네 未嘗暫離膝선생을 따르는 건 바로 나의 바람이니 從師顧我願우리 선생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오 舍我師不得노닐고 즐긴 게 일이 아님이 없었고 遊豫無非事보고 느낀 것도 모두 배움이라 하겠네 觀感亦云學을사년(1905)에 이르러 至于靑蛇年봄부터 가을까지 自春及秋日나는 예재의 객이 되었고 我爲禮齋旅선생은 목리의 서숙에 계셨네 師在木里塾찾아뵙고 문안드림이 어찌 쉽지 않으랴 面候豈不易편지로 문후한 것도 자주 하였다오 書問亦頻數선생께서 북으로 돌아가는 날에 函駕北歸日낙요재를 지나다 들르셨네 要齋爲經入그해 겨울에 섬오랑캐와 늑약이 이루어져 是冬虜約成종묘사직이 장차 무너지게 되니 杜稷將傾覆선생께서 충의가 끓어올라 先生奮忠義상소 올려 오적을 성토하셨네 呈疏討五賊병오년(1906) 정월에 丙午歲之正고산의 여막에서 문안드렸는데 高山候旅幕고산에서 부풍(扶風 부안)에 이르는 사이에 自高至扶風셋째 아들476)을 만나보도록 하셨네 是要三子覿간행은 비록 할 수 없다 해도 剞劂縱未可필사는 해 놓지 않을 수 없으니 鈔寫不得不백천재에서 가르침을 받들어 銜訓百千間지필묵을 마련하여 놓았네 備置紙筆墨불민한 내가 이 일을 주간하니 不敏爲幹務도합 서른여섯 책을 완성하였네477) 總成卅六冊선생을 모시고 초여름을 보내니 操几經初夏내장산에 있는 벽련암478)이었네 內藏菴蓮碧다시 영산에 도착하니 還到瀛山裏윤월 가운데 절반이 지나갔네 閏月中半迄이때에 면암옹이 是時勉菴老남쪽 지방에서 창의하였네 倡義于南服선생이 경하의 글을 지으시어 先生作賀狀소자가 그 편지를 받들고 小子奉書角진중에 가서 전하려 하였지만 往致于陣中군대가 이미 떠나 못 전달했다오479) 師發未得達이 뒤로 일 년이 지나도록 自後經一朞선생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받들지 못하였네 謦欬久未接정미년(1907) 장마와 무더위 날씨에 丁未潦炎天예산 골짝에서 찾아뵙고 따랐는데 跟拜禮山谷서쪽으로 백화산에 이르러 西至白華山석전에서 늦더위를 피하였네 石田避老熱이때 하늘이 감동한 바가 있어 于時天有感신령한 거북이 바닷가로 나왔네 靈龜出海曲선생의 불우함을 한탄하노라니 歎師不遇時눈물이 줄줄 흘러 가슴을 적셨다오 汪然涕沾臆바다에 들어가 세속의 더러움을 끊으려는 건 入海絶世汚오랫동안 간직한 선생의 뜻이었는데 師志久所蓄이번에 이 지역으로 가신 것은 今番此地行멀리 떠나 은거함을 도모하려 해서였네 經營遐擧跡무신년(1908)에 목리에 이르니 戊申到木里또한 바다가 지척에 있었네 亦爲海咫尺왕등도(暀登島)로 떠날 날이 다가와 暀島行有日날씨를 점쳐 바다를 건너려고 했다오 占天候利涉봉산과 영산 사이를 왕래할 때 往來蓬瀛間또한 우리 집에 오랫동안 머무셨는데 亦久留杖屐가친께서 이별 길에 임하여 大人臨別路시 읊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오 賦詩淚如酌선생과 가친의 사이는 先生於大人진심으로 서로 좋아하셨네 相好以心膈경자 신축 갑진 을사 무신에 庚辛甲乙戊해마다 찾아와 이틀을 묵으셨는데 每歲來信宿그 누가 알았으랴 이날 만남이 誰知此日見길이 천고의 이별이 될 줄을 永作千古別늦가을에 왕등도로 배 타고 갔는데 晩秋暀棹發기유년(1909) 정월에 가친께서 돌아가셨네 己正我親沒선생을 생각하면 정신은 따라가고 싶었지만 念師神欲往부친을 생각하면 마음을 칼로 에는 듯했다오 思親心如割섬에서 나의 만장에 화운하신 글이 島中和我章뒤늦게 빈소에 도착하였는데 追到苫塊室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읽으니 有淚無聲讀이내 심정을 어찌 차마 형용하랴 此情那忍曰위문하시는 글이 바닷가에서 오니 唁書自海出직접 와서 곡하는 것처럼 간절하였네 懇切同親哭초겨울에 안양서실480)에서 배알하고는 初冬拜安陽마침내 묘지명을 부탁드렸는데 乃以墓銘託연말에 비로소 답신이 오니 歲窮始有報명이 아니라 전으로 대신하겠다고 하셨네481) 匪銘替傳述슬프게도 나는 집안을 맡은 고자인지라 哀此當室孤크고 작은 일을 모두 담당하였다오 大小俱擔著임자년(1912) 겨울에 계화도로 들어가시니482) 壬冬入繼華어느새 삼 년의 세월이 흘렀네 於焉歲三閱편지로 문안드림은 비록 끊어지지 않았지만 書候縱不絶감히 제자의 직분이라 할 수 있겠는가 敢云弟子職계축년(1913)과 갑인년에도 또 이와 같았으니 癸甲亦復爾글 읽는 일483)을 하다 말다 했다오 尋數作還輟을묘년(1915) 겨울에 비로소 오래 모셨는데 乙冬始久侍전수받아 정밀한 곳까지 들어갔네 傳受入精密병진년(1916)에 거듭 상을 당하니484) 丙辰荐遭艱묘소 곁을 외로이 지켰다오 煢然守墓側당시 예서를 읽는 여가에 時於讀禮暇선친의 유고를 두루 살펴보고는 大稿遍搜覓별도로 예설편을 완성하니 別成禮說編바로 선친과 문답한 것이라오 卽同親問答나의 선비는 어질고 효성스러워 賢孝我先妣뭇사람의 칭송이 고을에 자자했는데 輿誦播鄕邑선생의 마음에 감회가 있어 先生心有感스스로 행록 발문을 지어주셨네485) 自述行錄跋무오년(1918) 가을에는 막내아우486)를 데리고 가 戊秋携季也집지의 예를 행하게 하였는데 使之行脩束선생께서 선군을 칭송하면서 先生稱先君좋은 가법을 전하였다고 하셨네 能傳好家法기미년(1919)에 월포로 거처를 옮기니 己未徙月浦화산이 눈앞에 우뚝 솟아 있었네 華山當眉睫저분이 완연히 저곳에 계시니 伊人宛在彼한 번 뛰면 건너갈 것만 같은데 一超若可涉중간에 깊고 험한 물이 있는지라 中有深險水바라보고 마음만 그지없이 슬펐다오487) 瞻望心忉怛이 때문에 봄바람 속에 앉아 있음이488) 所以坐春風도리어 많지 않음을 면치 못했네 不免反稀闊경신년(1920)에 창동리로 돌아왔는데 庚申返滄里이 년 동안 집안일에 얽매이지 않았다오 二載不家縶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의리는 性師心弟義심은 기질이 아니라 성에서 생기기 때문이네 生性非氣質명덕은 기의 분수에 속하고 明德屬氣分신명은 곧 태극이 아니라오489) 神明非卽極노사와 화서의 동이를 고찰하고490) 蘆華同異考매산 제문을 쓴 김씨의 폐습을 논척했는데491) 祭梅金悖習선생께 자주 나아가 질정하여 頻頻就而正의심나는 조목이 늘 많았다오 疑目每盈掬다행히 대부분 인가를 해주시고 幸多蒙印可게다가 정확한 설명까지 더해주셨네 加賜以精確홀로 나아가 후고492)를 편집했으니 專詣編後稿임술년(1922) 오월이었네 榴夏歲壬戌뜻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意外居無何계화도에서 급한 전보가 왔네 自華來電特캄캄한 밤에 허겁지겁 달려가니 顚倒抵夜黑선생께서 이미 병세가 위독하셨다오 先生已寢疾연빙의 가르침493)을 물을 길이 없었으니 淵氷問無路동자만 구석에서 촛불을 잡고 있었네 童子隅執燭이튿날 저녁에 후학들을 버리고 가시니 翌晡棄後學바로 칠월 사일이었네 七月四日曆사문의 일을 생각하면 言念斯文事큰 집에 대들보가 부러진 것과 같고 巨厦折樑木사적인 일로 말하더라도 言及私分事등불을 잃고 어두운 길 헤매는 신세가 되었네 失燭冥擿埴통곡한다는 건 오히려 예사말이니 痛哭猶例語상심한 나머지 미친 사람 같았다오 喪心狂可作평소에 문도와 함께 平日及門徒마땅히 마음과 힘을 합쳐서 端宜同心力선생의 유지를 잘 알게 하여 俾無昧遺旨한 줄기 학맥을 영원히 보존해야 하는데 永永保一脈어찌하여 하늘은 돌보지 않아 云胡天不眷큰 변고가 내부에서 생기게 하는가 大變生肘腋처음에는 공리심으로 말미암아 始因功利心스승을 무함하는 악을 앞다퉈 이루었네494) 競成誣師惡선생은 일찍이 유훈을 남기셨으니 師曾有遺訓인고는 단연코 욕되게 하는 것인데495) 認稿決是辱어찌하여 인의와 인교라는 말을 如何認意敎방자하게 터무니없이 날조했는가496) 肆然白地揑만약 참으로 이런 말이 있었다면 如云眞箇有전후의 유훈은 두 갈림길이 된다네 前後爲二轍만일 인가 받음이 지당하다고 한다면 如云認至當앞의 유훈을 어찌 취소하지 않으셨겠는가 前訓盍收滅저들의 말이 믿을 만하다면 彼言如可信선생은 절의가 없게 된다오 先生無義節소자는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小子用是懼논척하기를 급급하게 했다오 辨討是汲汲저들이 만약 복죄한다면 彼如服其罪어찌 선한 사람이 되지 않으랴마는 豈不爲善物이처럼 하지 않고 왜정에 고소하니 不此訴倭庭사람을 음해하여 불측한 화에 빠뜨렸네 構人陷不測나를 단독 피고로 보고 視我爲獨隻나를 검찰국으로 압송하려 하였네497) 押我致檢局선인의 묘에 곡하고 하직하니 哭辭先人墓눈 덮인 달천의 산기슭일세 雪中達川麓왜에게 치욕을 받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誓不受倭辱품속에 독약을 준비해 두었는데 懷中備毒藥다행히 성명을 보전할 수 있었으니 幸得保性命신령이 보우하신 덕택임을 알겠어라 認是冥祐澤저들이 끝내 인가 받아 출간하여 彼竟成認刊전국 팔도에 유고를 배포했는데 布之于八域개찬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으니 改竄無難爲마음대로 첨삭할 뿐만이 아니었다오 非徒任添削만약 명백히 변론하지 않는다면 如不辨之明그 누가 다시 흑백을 가리리오 誰復知黑白소자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小子爲是懼〈고변록〉498)을 찬술하였다오 編成考辨錄저들이 또 선생의 연보를 간행했는데 彼又刊年譜진실로 오류와 착오가 많았으니 固多誤與錯마땅히 써야 하는 건 쓰지 않고 當書而不書써서는 안 되는 건 도리어 썼네 不當書反筆만약 바르게 고치지 않는다면 如不改之正선생께서 오명을 덮어쓸 것이네 先生蒙累黷옛날에 정재공499)은 在昔靜齋公나에게 이 일을 끝내주기를 부탁했는데 屬我卒是役오늘날 연보 한 본을 완성하니 今日成一本마침내 저들의 병폐를 볼 수 있다오 乃見彼病關이 두세 가지 사안은 惟此數三款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것이니 俟聖可無惑선생의 사후의 일도 先生身後事거의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네 庶幾無愧怍태산이 무너진 지 삼십년이 지났는데 山頹三十年이날 밤이면 늘 애통하기 그지없다오 此夜每痛衋지금 비록 병든 몸이 장차 다할 테지만 今雖病將盡근심스런 마음에 눈을 감지 못하리라 耿耿未接目이렇게 혼란이 지극한 날을 만나 値此亂極日후진들이 모두 면모를 바꾸니 後進皆渝色당일에 훌륭한 그 연원을 當日好淵源그 누가 계승할 수 있을까 有誰能接續쌓인 한이 발하여 시가 되니 積恨發爲詩글자마다 눈물 자국 맺히누나 字字淚痕結일백 칠십사 운으로 지은 이 시를 百七十四韻외설에 가깝다고 말하지 마소 莫曰近猥瀆 光武歲庚子, 余年方十七.所學昧蹊逕, 可謂徒能讀.聞說蓬山中, 臯比南來設.儒門風斯動, 士林雲似集.迢絶月明寺, 往拜其間厠.士爭講要義, 經傳性禮賾.余將左氏傳, 郞誦一章訖.人謂是罕見, 先生愛如玉.乃云郭林宗, 訪茅勸成德.千古傳美談, 我盍追芳躅?迂回一日程, 枉駕臨弊宅.書贈家大人, 賢子乃潤屋.有人勸定師, 先生意亦欲.莫重師生義, 坐定誠意薄.是爲大人言, 義諦更眞切.寧山四百里, 具贄命之謁.八風【地名】獰風吼, 雙龍【峙名】虐雪積.弱齡不勝寒, 呵手因作泣.十顚到金谷, 先生驚且悅.翌朝行贄禮, 簾前照瑞旭.誨辭一何溫? 諄諄勉樸實.授以小學書, 纔得經一朔.及見我南歸, 悵然如有失.全翁禮說類, 叮嚀託校輯.晩得俊髦士, 自賀不淺福.是回大人書, 其言肺肝出.重光暮春者, 復杖千里策.君來我甚喜, 禮輯何敏速?錦江碧如藍, 其上亭子屹.多士風詠會, 君可同我適.禮席有事日, 選我最少列.流峙助我氣, 聞見闊我狹.雪月鳳棲寺, 復開大講席.人常六七十, 日惟九旬浹.問難煩且擾, 余獨最親炙.文理日驟進, 流輩所罕及.出自先生筆, 向我大人說.因勸躬當仁, 讓子亦且勿.寂寂完南館, 三席經除夕.令子同守歲, 佳況此無若.開正歸覲日, 殷勤師手畢.壬秋到薪田, 浹月復立雪.儒門方多事, 奇權互蚌鷸.先生折其衷, 猥辨儘昭晳.間將理氣奥, 一一開我窒.四方往復書, 時亦代執筆.癸卯往候時, 燕岐駕適發.余爲樊遲御, 往返七舍邈.中路兩館裡, 贈我後滄額.前此書封皮, 倉洞滄東易.滄洲道東來, 至今年八百.繼之在後學, 大任又重責.顧以鹵劣材, 拜受未敢諾.南指完山路, 御駕復如昨.時有蘭坡喪, 師則大功慽.喪葬經數月, 凉生遂還北.甲辰會寫稿, 首夏役旣卒.先生復南下, 蘭練在近隔.方伯設講會, 邀之升上榻.人衆如山海, 我爲當日直.旣練往潭陽, 爲觀三隱閣.路經我滄里, 大人齋新築.錫號以樂要, 銘詩幷揭壁.旅候適病暑, 瀛山留調攝.天巖好雲林, 禮川佳泉石.濟濟縫掖趨, 洋洋絃誦徹.南臯一齋墟, 玉川河西蹟.溪樓何瀟灑? 筆巖又嚴肅.勝地固有名, 壯觀亦可樂.始得達秋城, 師行是目的.歸路到豐沛, 拜退庭有菊.蓋於半載間, 未嘗暫離膝.從師顧我願, 舍我師不得.遊豫無非事, 觀感亦云學.至于靑蛇年, 自春及秋日.我爲禮齋旅, 師在木里塾.面侯豈不易, 書問亦頻數.函駕北歸日, 要齋爲經入.是冬虜約成, 杜稷將傾覆.先生奮忠義, 呈疏討五賊.丙午歲之正, 高山侯旅幕.自高至扶風, 是要三子覿.剞劂縱未可, 鈔寫不得不.銜訓百千間, 備置紙筆墨.不敏爲幹務, 總成卅六冊.操几經初夏, 內藏菴蓮碧.還到瀛山裏, 閏月中半迄.是時勉菴老, 倡義于南服.先生作賀狀, 小子奉書角.往致于陣中, 師發未得達.自後經一朞, 謦欬久未接.丁未潦炎天, 跟拜禮山谷.西至白華山, 石田避老熱.于時天有感, 靈龜出海曲.歎師不遇時, 汪然涕沾臆.入海絶世汚, 師志久所蓄.今番此地行, 經營遐擧跡.戊申到木里, 亦爲海咫尺.暀島行有日, 占天候利涉.往來蓬瀛間, 亦久留杖屐.大人臨別路, 賦詩淚如酌.先生於大人, 相好以心膈.庚辛甲乙戊, 每歲來信宿.誰知此日見, 永作千古別?晩秋暀棹發, 己正我親沒.念師神欲往, 思親心如割.島中和我章, 追到苫塊室.有淚無聲讀, 此情那忍曰?唁書自海出, 懇切同親哭.初冬拜安陽, 乃以墓銘託.歲窮始有報, 匪銘替傳述.哀此當室孤, 大小俱擔著.壬冬入繼華, 於焉歲三閱.書候縱不絶, 敢云弟子職?癸甲亦復爾, 尋數作還輟.乙冬始久侍, 傳受入精密.丙辰荐遭艱, 煢然守墓側.時於讀禮暇, 大稿遍搜覓.別成禮說編, 卽同親問答.賢孝我先妣, 輿誦播鄕邑.先生心有感, 自述行錄跋.戊秋携季也, 使之行脩束.先生稱先君, 能傳好家法.己未徒月浦, 華山當眉睫.伊人宛在彼, 一超若可涉.中有深險水, 瞻望心忉怛.所以坐春風, 不免反稀闊.庚申返滄里, 二載不家縶.性師心弟義, 生性非氣質.明德屬氣分, 神明非卽極.蘆華同異考, 祭梅金悖習.頻頻就而正, 疑目每盈掬.幸多蒙印可, 加賜以精確.專詣編後稿, 榴夏歲壬戌.意外居無何, 自華來電特.顚倒抵夜黑, 先生已寢疾.淵氷問無路, 童子隅執燭.翌晡棄後學, 七月四日曆.言念斯文事, 巨厦折樑木.言及私分事, 失燭冥擿埴.痛哭猶例語, 喪心狂可作.平日及門徒, 端宜同心力.俾無昧遺旨, 永永保一脈.云胡天不眷, 大變生肘腋?始因功利心, 競成誣師惡.師曾有遺訓, 認稿決是辱.如何認意敎, 肆然白地揑?如云眞箇有, 前後爲二轍.如云認至當, 前訓盍收滅?彼言如可信, 先生無義節.小子用是懼, 辨討是汲汲.彼如服其罪, 豈不爲善物?不此訴倭庭, 構人陷不測.視我爲獨隻, 押我致檢局.哭辭先人墓, 雪中達川麓.誓不受倭辱, 懷中備毒藥.幸得保性命, 認是冥祐澤.彼竟成認刊, 布之于八域.改竄無難爲, 非徒任添削.如不辨之明, 誰復知黑白?小子爲是懼, 編成考辨錄.彼又刊年譜, 固多誤與錯.當書而不書, 不當書反筆.如不改之正, 先生蒙累黷.在昔靜齋公, 屬我卒是役.今日成一本, 乃見彼病關.惟此數三款, 俟聖可無惑.先生身後事, 庶幾無愧怍.山頹三十年, 此夜每痛衋.今雖病將盡, 耿耿未接目.値此亂極日, 後進皆渝色.當日好淵源, 有誰能接續?積恨發爲詩, 字字淚痕結.百七十四韻, 莫曰近猥瀆. 선사(先師) 선사는 돌아가신 스승을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지칭한다. 간재는 1922년 7월 4일에 졸하였다. 광무(光武) 연간 경자년 광무 4년 1900년이다. 한갓……하겠네 원문의 도능독(徒能讀)은 책을 읽으면서 글의 뜻은 모른 채 그저 읽기만 한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신 인상여(藺相如)가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에 대해 "조괄은 한갓 자기 아버지의 책만 읽었을 뿐, 임기응변할 줄을 모른다.〔藺相如曰 王以名使括 若膠柱而鼓瑟耳 括徒能讀其父書傳 不知合變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봉산(蓬山)……하니 봉산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당시 전우가 이 봉래산의 월명암(月明菴)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있었다. 《後滄集 卷17 金華執贄錄》 곽임종(郭林宗)은……했는데 곽임종은 후한의 명사(名士)인 곽태(郭泰)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모용(茅容)은 자가 계위(季偉)로, 40세가 될 때까지 농사만 지었으나 행실이 단정하고 절도가 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곽태가 일찍이 모용의 집에 방문하여 유숙하였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어진 사람이로다."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하기를 권면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가친(家親)께……하셨네 당시 전우(田愚)가 후창의 집을 방문했다가 다음 날 떠날 때 자식을 잘 가르쳐 덕을 이루도록 권장하는 뜻으로 '벽봉현자윤옥(碧峯賢子潤屋)',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 '지요막여교자(至要莫如敎子)' 등의 글을 써서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金洛進)에게 주었다. 《後滄集 卷17 金華執贄錄》 영산(寧山) 충청도 천안(天安)의 옛 이름으로, 영주(寧州)라고도 한다. 당시 전우가 천안의 금곡(金谷)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옹(全翁)이……부류를 전옹은 전우(田愚)의 스승인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전재·고산(鼓山)·희양재(希陽齋)이다. 송치규(宋穉圭)와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 전우에게 전수하였다. '예설(禮說) 부류'는 《전재선생예설(全齋先生禮說)》을 가리킨다. 봉서사(鳳棲寺)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간중리 종남산(終南山)과 서방산(西方山) 사이에 있는 절이다. 인하여……하셨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인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當仁不讓於師]"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한 것이다. 신전(薪田) 공주(公州)의 신전리(薪田里)로, 1902년 8월에 전우(田愚)가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선생을 모셨다오 원문의 '입설(立雪)'은 정문입설(程門立雪)의 고사를 이르는 것으로,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음을 뜻한다. 송(宋)나라 때 양시(楊時)가 일찍이 정이(程頤)를 방문하였는데, 정이가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이에 양시가 곁에 시립(侍立)한 채 떠나지 않았는데, 정이가 명상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문 밖에 눈이 한 자가 쌓였다고 한 고사가 있다. 《宋史 卷428 楊時列傳》 기(奇)와……있었는데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권우인(權宇仁)이 이기설(理氣說)에 관해 많은 토론을 벌였으나 끝내 서로 합일되지 못했던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방휼(蚌鷸)은 큰 조개와 황새로, 큰 조개가 딱지를 벌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황새가 쪼아 먹으려다 조개 딱지가 닫히는 바람에 도리어 부리를 물려 서로 버티다가 어부에게 모두 잡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서로 버티고 다투다가 제3자에게 이익을 빼앗김을 뜻한다. 선생께서……밝혀졌다오 기정진이 일찍이 이이(李珥)의 성리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외필(猥筆)〉이란 글을 저술하였는데, 이 임인년(1902)에 전우가 〈외필변(猥筆辨)〉을 저술하여 기정진의 이 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번지(樊遲) 공자(孔子)의 제자로, 늘 공자의 수레를 몰았다. 《論語 爲政》 나에게……주셨네 스승인 전우가 김택술에게 '후창(後滄)'이란 호를 지어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호가 창주(滄洲)인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를 계승하라는 의미로 '후창'이라고 한 것이다. 후창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1903년 20세에 전우가 '후창거사 창동처사(後滄居士滄東處士)' 8글자를 써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다. 창주(滄洲) 남송의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주희가 일찍이 무이산(武夷山)에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짓고 강학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창주'가 그의 별호가 되었다. 가친께서……하셨네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金洛進)이 강학하는 서재를 새로 지었는데, 이때 전우가 '낙요재(樂要齋)'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아울러 〈낙요재명(樂要齋銘)〉을 지어 주었다.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艮齋集 前編續 卷5 樂要齋銘》 남고(南皐)엔……전해지네 일재(一齋)는 이항(李恒, 1499~1576)의 호인데, 태인(泰仁)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서 이항을 제향하였다. 하서(河西)는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호인데, 순창(淳昌)에 김인후가 지은 강학당인 훈몽재(訓蒙齋)가 있다. 전우(田愚)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이 갑진년(1904)에 남고서원과 훈몽재에서 강회를 열었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쌍계루(雙溪樓)는……하여라 쌍계루(雙溪樓)는 전라남도 장성(長成)의 백양산(白羊山)에 있는 누대이다. 필암(筆巖)은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하서 김인후를 제향하기 위해 장성에 세워진 서원이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이 갑진년(1904)에 백양산에 있는 백양사(白羊寺)의 산내암자인 운문암(雲門菴)에서 강회를 열고, 필원서원을 찾아갔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풍패(豐沛) 중국 패현(沛縣)의 풍읍(豐邑)이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므로 제왕(帝王)의 고향을 일컬어 풍패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관향인 전주(全州)를 이른다. 셋째 아들 전우의 삼남인 전화구(田華九)를 가리킨다. 간행은……완성하였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병오년(1906) 3월에 고부(古阜) 백천재(百千齋)에서 전우의 문고(文稿) 36책을 산정(刪定)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벽련암(碧蓮菴)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內藏山)에 있는 내장사(內藏寺)의 부속 사찰이다. 내장산 서래봉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한동안 내장사라 불리기도 하다가 근세에 와서 영은암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다시 벽련암이라 칭하였다. 이때에……못 전달했다오 전우의 연보에 의하면, 병오년(1906) 윤4월에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문인 김택술과 손자 전일건(田鎰健)을 시켜 위로하고 면려하는 내용의 편지를 內藏寺로 보냈지만, 최익현이 이미 떠난 뒤에 도착하여 편지를 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안양서실(安陽書室) 전우가 기유년(1909)에 군산도(群山島) 신치동(臣癡洞)에 들어가 세운 서실이다. 명(銘)이……하셨네 전우가 후창의 부친인 김낙진을 위해 전(傳)을 써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 전(傳)은 《간재집(艮齋集)》 전편속(前篇續) 권6에 〈김벽봉전(金碧峯傳)〉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후창은 이 전을 부친의 문집인 《벽봉유고(碧峯遺稿)》의 서문으로 대용하였다. 임자년……들어가시니 전우가 이해 9월에 군산도(群山島)에서 계화도(繼華島) 장자동(壯子洞)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글 읽는 일 원문의 심수(尋數)는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글 읽는 일을 이른다. 병진년에……당하니 후창이 모친상을 당한 것으로, 이해 3월 16일에 모친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향년 60세로 별세하였다. 스스로……지어주셨네 전우의 이 글은 《간재집(艮齋集)》 후편속(後編續) 권6에 〈제최유인행록(題崔孺人行錄)〉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막내아우 후창의 셋째 아우이자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로, 자는 여안(汝安), 호는 연강(蓮岡) 또는 척재(拓齋)이다. 문집으로 《척재집(拓齋集)》이 있다. 저분이……슬펐다오 전우 선생을 만나고 싶으나 만날 수 없어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시경》 〈진풍(秦風) 겸가(蒹葭)〉에 "이른바 저분이, 이 물가 한편에 있도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 따르려 해도, 길이 막히고 또 멀며, 물결을 따라 내려가 따르려 해도, 완연히 물의 중앙에 있도다.[所謂伊人, 在水一方. 溯洄從之, 道阻且長, 溯游從之, 宛在水中央.]"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하였다. 봄바람……있음이 봄바람처럼 온화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정호(程顥)를 찾아뵙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봄바람 속에서 한 달을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近思錄 卷14》 성(性)은……아니라오 전우는 심본성설(心本性說)을 바탕으로 삼아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주장하였는데, 후창이 스승의 설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노사(蘆沙)와……고찰하고 후창이 저술한 〈노화동이고(蘆華同異攷)〉를 두고 말한 것으로, 이 글은 노사 기정진(奇正鎭)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여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매산(梅山)……논척했는데 전우가 일찍이 〈논가김제매산선생문(論嘉金祭梅山先生文)〉을 지어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이 매산 홍직필(洪直弼)의 문인(門人)으로 자처하면서도 홍직필의 祭文에 기롱(譏弄)하는 뜻이 있음을 밝혔는데, 후창이 스승의 설을 바탕으로 하여 김평묵의 폐습을 논척한 것이다. 후고(後稿) 전우가 저술한 글 가운데 1913년 이후에 지은 글을 가리킨다. 연빙(淵氷)의 가르침 임종 때 남기는 경계나 훈계를 이른다. 연빙은 증자(曾子)가 임종 전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서 자신이 평생 동안 몸가짐을 "깊은 물가에 임한 듯이, 엷은 얼음을 밟은 듯이 조심했다.[如臨深淵 如履薄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泰伯》 처음에는……이루었네 후창은 동문(同門)인 오진영(吳震泳)과 권순명(權純命) 등이 스승의 유훈을 날조하여 총독부의 인가(認可)를 받아 스승의 문집을 간행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선생은……것인데 유훈(遺訓)은 전우가 말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총독부에 인가(認可)를 받아 자신의 문집(文集)을 간행하지 말라는 훈계를 남긴 것을 이른다. 인고(認稿)는 총독부에 인가를 받아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것을 뜻한다. 어찌하여……날조했는가 인의(認意)는 전우가 일찍이 총독부에 인가를 받으려는 뜻이 있었다는 말이고, 인교(認敎)는 또한 전우가 일찍이 인가를 받으라는 하교를 내렸다는 말이다. 후창은 이런 말들을 동문인 오진영과 권순명 등이 날조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하였네 1925년에 오진영과 권순명 등이 후창 등을 전우 유고의 출판을 방해한다는 죄목으로 일본의 검찰국에 고소하여 후창 등이 검찰국에 구인되어 곤욕을 치룬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고변록(考辨錄) 《후창집》 권15에 실려 있는 〈간재선생사고진주본고변록(艮齋先生私稿晉州本考辨錄)〉을 가리킨다. 정재공(靜齋公) 전우의 셋째 아들 전화구(田華九, 1866~1935)로, 정재는 그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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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강연은 채영 에 대한 만사 여섯 절구 挽姜蓮隱【采永】六絶 동갑이며 동지에 또 사돈을 맺으니501) 同庚同志又通家한 시대에 이보다 친한 사이 없었네 幷世相親無復加하늘이 이승의 지기인 벗을 데려갔으니 天奪此生知己友바람결에 눈물 뿌리며 비가를 부르노라 臨風灑淚發悲歌곧은 도로써 사악한 자들을 증오했으니 直道生憎詐僞家악을 미워하는 마음에 더할 것이 없었다오 心存惡惡外無加평소 말하기를 내가 만약 시문에 능했다면 雅言我若能文字구구절절 모두 〈항백〉의 노래일 것이라 하였네502) 句句皆爲巷伯歌사해를 모두 한 집안으로 보려 했으니 欲將四海視同家일신에 사욕을 조금도 가함이 없었다오 私利身無一點加만약 사람마다 모두 이와 같을 수 있다면 如使人人皆若此오현금의 남풍 노래503)에 함께 화답하리라 南風共和五絃歌그대가 지난해에 나의 집에 왕림했는데 高旆前年枉弊家박한 음식과 냉방으로 고초만 더했다오 薄餐冷突楚酸加서둘러 이별하느라 아무것도 못 주었으니 悤悤別路無攸贈문득 후회되어 휘파람 불며 노래 불렀다오 飜成後悔嘯而歌나는 지난겨울부터 병들어 집에 있었는데 我自前冬病在家그대 병세가 날로 심해진다는 말을 들었다오 已聞美愼日添加갑자기 하루아침에 그대가 먼저 별세하니 遽然一曙君先逝저 모양에서 해로가가 처량하게 들리누나 悽彼牟陽薤露歌청산의 참된 집으로 나도 곧 들어갈 테니 靑山我亦入眞家옛 정의가 응당 조금도 가감이 없으리라 舊誼應無有減加혼령이 옥국504)에 따라 돌아가기 좋으니 精爽好隨歸玉局양계의 영근 노래505)를 서로 이어 부르겠지 載賡陽界郢斤歌 同庚同志又通家, 幷世相親無復加.天奪此生知己友, 臨風灑淚發悲歌.直道生憎詐僞家, 心存惡惡外無加.雅言我若能文字, 句句皆爲巷伯歌.欲將四海視同家, 私利身無一點加.如使人人皆若此, 南風共和五絃歌.高旆前年枉弊家, 薄餐冷突楚酸加.悤悤別路無攸贈, 飜成後悔嘯而歌.我自前冬病在家, 已聞美愼日添加.遽然一曙君先逝, 悽彼牟陽薤露歌.靑山我亦入眞家, 舊誼應無有減加.精爽好隨歸玉局, 載賡陽界郢斤歌. 사돈을 맺으니 후창의 넷째 아들 김형겸(金炯謙)이 강채영의 딸인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혼인하였다. 구구절절……하였네 〈항백(巷伯)〉은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소인(小人) 또는 악인(惡人)이 온갖 말을 꾸며 참소하는 것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뜻을 담고 있다. 《예기》 〈치의(緇衣)〉에 "현인을 좋아하기를 〈치의〉편의 노래처럼 하고, 악인을 미워하기를 〈항백〉편의 노래처럼 해야 한다.[好賢如緇衣, 惡惡如巷伯.]"라고 하였다 오현금(五絃琴)의 남풍(南風) 노래 순(舜) 임금이 일찍이 오현금을 처음으로 만들어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부르면서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염을 풀어 줄 만하도다.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리로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孔子家語 卷8 辨樂解》 옥국(玉局) 본래 중국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있는 도관(道觀)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신선 세계를 가리키는 듯하다. 양계(陽界)의 영근(郢斤) 노래 후창이 일찍이 강채영과 수창(酬唱)하였던 시가(詩歌)를 가리키는 듯하다. 양계는 이승 세계를 뜻한다. 영근은 영(郢) 땅 사람의 자귀질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빼어난 시가를 의미한다. 옛날 춘추 시대 영(郢) 땅 사람이 백토(白土) 가루를 자기 코끝에 매미 날개처럼 엷게 바르고 장석(匠石)이라는 자귀질 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깎아 내게 하였다. 장석이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큰 도끼를 휘둘러 백토를 깎아 냈지만 코에는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고 한다. 《莊子 徐无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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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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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조카 형식537)에게 경계하여 주다 戒贈從子炯湜 네가 감옥에 있었던 날에 汝在福堂日내 마음은 칼로 베인 듯했는데 我心若刀割감히 남에게 말하지 못하고 不敢對人說홀로 앉아 눈물만 흘렸다 獨坐淚雙目죽고 사는 문제는 진실로 큰일이지만 死生固亦大선조의 덕을 욕되게 함을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 尤恐忝先德선조의 덕이 남은 은택을 베풀어 先德垂餘蔭네가 무사하게 나올 수 있었다 汝得無事出아침에 까치가 희소식을 전하니 朝來報喜鵲이내 마음이 비로소 쾌활해졌다 我心始快豁지난 일은 비록 이가 시린 듯이 괴롭지만 往事雖齒酸팔이 세 번 부러진 일538)로 삼을 수 있다 可作肱三折바라노니 이후로부터는 願言從玆後매사에 근졸함을 지킬지어다 每事守謹拙범의 꼬리를 밟은 듯이 두려워하고 愬愬虎尾蹈봄날 얼음 위를 걷는 듯이 조심하여라539) 兢兢春氷涉한갓 근졸함만 가지고는 되지 않나니 徒謹亦不濟또 의리와 이욕을 분별해야 한다 又須義利別분별하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別之問何以바로 경전을 읽는 데 달려 있다 乃在經傳讀의리를 취하고 이욕을 버리기를 取義舍去利단칼로 두 동강 내듯이 해야 한다 一刀兩段截너의 품성은 민첩하고 선하니 汝性敏且善가문을 일으켜 세울 만하다 門戶可樹立무엇보다도 밝음과 삼감을 더해야 하니 最要加明愼절대로 거칠고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 切勿作粗忽자기 몸을 이루는 때를 기다리면 待到成身時온 집안이 상서로움을 만나리라 一門逢祥吉내 병은 이미 고황에 들었으니 吾病入膏肓조만간에 눈을 감게 될 것이다 朝暮纊且屬백부가 장차 죽게 되어 남기는 말이니 世父將死言가슴에 새기고 또 뼈에 새길지어다 銘肝復刻骨 汝在福堂日, 我心若刀割.不敢對人說, 獨坐淚雙目.死生固亦大, 尤恐忝先德.先德垂餘蔭, 汝得無事出.朝來報喜鵲, 我心始快豁.往事雖齒酸, 可作肱三折.願言從玆後, 每事守謹拙.愬愬虎尾蹈, 兢兢春氷涉.徒謹亦不濟, 又須義利別.別之問何以? 乃在經傳讀.取義舍去利, 一刀兩段截.汝性敏且善, 門戶可樹立.最要加明愼, 切勿作粗忽.待到成身時, 一門逢祥吉.吾病入膏肓, 朝暮纊且屬.世父將死言, 銘肝復刻骨. 조카 형식(炯湜) 후창의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의 장남이다. 팔이……일 세상일에 경험이 많음을 비유한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13년 조에 "팔이 세 번 부러져 봐야만 훌륭한 의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三折肱, 知爲良醫.]"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여러 차례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보아야만 그 팔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범의……조심하여라 《서경》 〈군아(君牙)〉에 "내 마음의 근심되고 위태로운 것이 마치 범의 꼬리를 밟은 듯, 봄날의 얼음 위를 걷는 듯하다.[心之憂危, 若蹈虎尾, 涉于春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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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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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매강 이형 쾌열 에 대한 만사 4수 挽梅岡李兄【快烈○四首】 옛날 공의 집안에 장가들었을 때547) 尊門昔日委禽時금란지교를 좋이 맺고 조금도 어김이 없었네 好結金蘭不少違노년에 이르도록 마치 하루처럼 지냈는데 直到暮年如一日갑자기 길이 작별하니 이 무슨 일이런가 遽然永別是胡爲은암과 구암의 세 묘갈을 찬술했을 때548) 隱龜三碣撰成時문식으로 구하지 않음도 훌륭한 일이었네 不以文求亦一奇비록 재주 없어 일을 그르쳤던 게 부끄럽지만 縱愧不才曾誤事다시는 날 알아줄 이 없어 홀로 서글퍼한다오 更無知我獨悽其누추한 집에 왕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賁臨弊屋不多時오늘 흉한 소식이 이를 줄을 어찌 알았으랴 此日凶聞那得知인세에서 죽고 사는 게 마치 꿈만 같으니 人世存亡如夢裡청산에서 통곡하며 탄식만 할 뿐이라오 靑山慟哭一歔欷무릎을 에워싼 손자와 증손이 있는 칠십 대에 繞膝孫曾七耋時세상 싫어 호연히 돌아간 공이 몹시 부럽다오 羡公厭世浩然歸아아 나는 오래 병을 앓고 근심도 많으니 嗟吾久病兼多患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산 자를 슬퍼하리라 死者有知生者悲 尊門昔日委禽時, 好結金蘭不少違.直到暮年如一日, 遽然永別是胡爲?隱龜三碣撰成時, 不以文求亦一奇.縱愧不才曾誤事, 更無知我獨悽其.賁臨弊屋不多時, 此日凶聞那得知?人世存亡如夢裡, 靑山慟哭一歔欷.繞膝孫曾七耋時, 羡公厭世浩然歸.嗟吾久病兼多患, 死者有知生者悲. 옛날……때 후창은 1898년(고종35) 15세에 성주 이씨(星州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은암(隱菴)……때 은암과 구암(龜菴)은 이쾌열의 선조인 이수일(李守一)과 이성익(李星益)을 가리킨다. 후창이 일찍이 이들의 묘갈명인 〈증가선대부호조참판 행조산대부내자시직장 은암이공묘갈명(贈嘉善大夫戶曹參判行朝散大夫內資寺直長隱菴李公墓碣銘)〉과 〈성균진사 구암이공묘갈명(成均進士龜菴李公墓碣銘)〉을 찬술하였다. 《後滄集 卷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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