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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 둔와 박공 묘갈명 通德郞遯窩朴公墓碣銘 숨은 덕행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 가운데 그 공업이 그다지 기이하지 않고 그 명예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선조가 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은 보답이 이따금 후세 자손 사이에 드러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자손을 보고서 그 선조의 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둔와(遯窩) 박공(朴公)은 태어나 많은 일을 당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 마침내 천관산(天冠山)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독서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소요하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하였다. 세상에는 실로 명성(名聲)을 얻지 못했는데도 알려지는 경우가 있으니, 더구나 여기에 나아가 그에 대한 사실이 존재함을 아는 경우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심지어 죽은 뒤에 자손이 더욱더 번성하여 문학과 관직으로 성대함이 뒤따라 우뚝이 남쪽 고을의 명가가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공이 쌓은 공덕의 실상에 탄복하였으니, 단연코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공의 휘는 만윤(萬潤), 자는 중실(仲實)이니, 세계는 밀성(密城)에서 나왔다. 고려(高麗) 때 밀성군(密城君) 휘 언부(彦孚), 은산군(銀山君) 휘 영균(永均), 밀성군(密城君) 휘 천경(天卿),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 문정공(文貞公) 휘 부(敷)는 모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문정공 아우의 셋째 아들은 윤리(允利)인데, 좌찬성(左贊成)으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의 뛰어난 제자이다. 찬성공의 5세손은 계문(啓文)인데,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처음 호남의 장흥(長興)에 거주하였는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경립(景立)은 공조 참의이고, 조부 인적(仁績)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며, 부친 세장(世章)은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행주 기씨(幸州奇氏)로, 기수흥(奇壽興)의 따님이다. 영묘(英廟) 경술년(1730, 영조6)에 부(府)의 종정리(鍾亭里) 사제에서 공을 낳았고, 정묘(正廟) 신축년(1781, 정조5) 1월 20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남하면(南下面) 동촌(洞村) 뒤 술좌(戌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분성 김씨(盆城金氏) 김덕해(金德海)의 따님이다. 모두 아들 셋을 두었으니, 이형(履亨), 이중(履重), 이덕(履德)이다. 손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현손(玄孫) 희원(凞元)이 내가 교유한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그 종제 희준(凞俊)을 보내 묘갈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아름다운 나무는 뿌리 감추고210) 嘉木晦根좋은 옥은 광채 품고 있네. 良玉蘊光음덕에 대한 보답으로 不食之報후손이 번창하리라. 後錄彌昌 人有隱德而不需於世者。其功業不甚奇也。其聲稱不甚異也。而積累不食之報。往往發見於後嗣子孫之間。是以。觀乎子孫而其先德可知也。遯窩朴公。生丁多故。備經百艱。遂入天冠山中。杜門讀書。敎授生徒。婆娑徜徉。聊以卒世。世固有不得其名而知之。況進於此而識其實之所存哉。至於身後而螽斯椒聊。愈益蕃衍。文學科宦。從以蔚興。偉然爲南州之名家。於是而人服公積累之實。斷斷有不可誣者矣。公諱萬潤。字仲實。系出密城。麗朝密城君諱彦孚。銀山君諱永均。密城君諱天卿。入我朝。文貞公諱敷。皆其顯祖也。文貞弟三子曰允利。左贊成。佔畢齋金先生高弟。贊成五世孫曰啓文。軍資監正。始居湖之長興。卽公之高祖也。曾祖景立。工曹參議。祖仁績。漢城左尹。考世章。同中樞。妣貞夫人幸州奇氏壽興女。英廟庚戊。公生于府之鍾亭里第。正廟辛丑正月二十日考終。葬南下面洞村後戌坐原。配盆城金氏德海女。擧三男曰履亨履重履德。孫以下不能盡錄。玄孫凞元。以余有游從之舊。伻其從弟凞俊。謁碣銘之文。不敢辭。銘曰。嘉木晦根。良玉蘊光。不食之報。後錄彌昌。 아름다운……감추고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가 주희의 자(字)를 원회(元晦)라 지어 주며 남긴 축사에 "나무는 뿌리를 감추어야 봄의 자태가 찬란히 펴지고, 사람은 몸을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찐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고 하였다. 《屛山集 卷6 字朱熹祝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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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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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행 전라도좌우후 조공 묘갈명 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墓碣銘 아, 이곳은 고(故) 가선대부 행 전라도 좌우후 조공 휘 종성(鍾成), 자 문익(文益), 호 해은(海隱)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다. 공은 태어나서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양친을 효성으로 섬겨 구체(口體)의 봉양과 심지(心志)의 봉양을 위해서는 힘을 다해 주선해서 다 갖추어 드렸다. 병을 간호할 적에는 지극히 근심하여 팔을 휘저으며 걷지 않고, 웃을 때 잇몸을 드러내지 않았으며,211)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병세에 대한 차도를 알아보았다. 이에 효성이 하늘에 감응하여 산 꿩이 뜰에 떨어지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거의 목숨을 해칠 정도였고, 부친과 모친상에 모두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향리에서 안타까워하여 지속적으로 천거하였다.집안이 본래 너무나 가난하였는데, 공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재물을 모아 집안 살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친족과 이웃의 가난하고 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끼는 바가 없어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얻었다.순묘(純廟) 경인년(1830, 순조30) 11월 8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이다. 정해년(1887, 고종24)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고, 경인년(1890)에 6품으로 올랐으며, 계사년(1893)에 전라도 좌우후(全羅道左虞侯)에 제수되고, 이해 가을에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임인년(1902)에 가선대부에 올랐다. 관직에 있을 적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며, 힘써 폐단을 제거하였으니, 집집마다 칭송하여 갈수록 더욱 자자해졌다. 병오년(1906) 12월 28일에 집에서 별세하였으며, 현(縣)의 입암리(笠巖里)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조씨(趙氏)의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고려(高麗)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휘 지수(之壽)가 시조이다.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휘 온(溫)이 중대의 현조(顯祖)이다. 증조는 참봉에 추증된 휘 사보(士普)이고, 조부는 휘 참봉에 추증된 휘 제채(濟采)이며, 부친은 공조 참판에 추증된 휘 인경(仁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선산(善山) 임씨(林氏)로, 임상원(林相原)의 따님이다. 계비(系妣)는 정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이원도(李源道)의 따님이다. 공은 연안 차씨(延安車氏) 윤백(允伯)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모두 2남 3녀를 두었으니, 기원(基元)은 전서(典書), 용원(龍元)은 주사(主事)이다. 사과(司果)인 경주(慶州) 김원영(金元永), 사과인 경주 김기활(金琪活), 임천(利川) 서선재(徐善才)가 사위이다. 장자의 아들은 병연(炳燕), 차자의 아들은 병선(炳善)이다.기원이 족인(族人) 병두(炳斗)를 보내 묘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였지만 되지 않아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술하여 명을 짓는다.입암의 기슭에 笠巖之麓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네. 有崇四尺효자가 묻혔으니 孝子之藏현인의 유택일세. 賢人攸宅지나는 사람 가리키고 行路指點초동이 공경할 줄 아네. 樵牧知敬봄가을로 제수 올리니 春秋苾芬자손들이 한없이 번성하네. 子孫繩繩 嗚呼。此故嘉善大夫行全羅道左虞侯趙公諱鍾成。字文益。號海隱衣履攸藏也。公生有至性。孝事兩親。凡口體之奉。心志之養。周旋竭蹶。無不畢給。侍疾致憂。不翔不矧。嘗糞甛苦。以試差劇。孝感攸至。至有山雉下庭。執喪過毁。幾於傷生。居盧墓側。前後六年。鄕里感傷。剡薦相續。家素貧甚。公勤儉積累。以起産業。然於族戚隣里周窮恤匱之節。無所係吝。各得其心。純廟庚寅十一月初八日。卽其寅降也。丁亥除禁府都事。庚寅陞六品。癸已拜全羅道左虞侯。秋陞通政。壬寅陞嘉善。其在官。愛民施惠。務祛敝瘼。家稱戶頌。久愈藉藉。丙午十二月二十八日考終于居第。葬縣之笠巖里亥坐原。趙氏本漢陽人。麗朝僉議中書事諱之壽爲始祖。漢川府院君良節公諱溫。其中系顯祖也。曾祖贈參奉諱士普。祖贈參奉諱濟采。考贈工曹參判諱仁敬。妣貞夫人善山林氏相原女。系妣貞夫人全州李氏源道女。公娶延安車氏允伯女。擧二男三女。曰基元典書。曰龍元主事。曰慶州金元永司果。曰慶州金琪浩司果。曰利川徐善才。長房男炳燕。次房男炳善也。基元伻其族人炳斗。來謁隧道之文。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狀而纂次之如右云爾。銘曰。笠巖之麓。有崇四尺。孝子之藏。賢人攸宅。行路指點。樵牧知敬。春秋芯芬。子孫繩繩。 팔을……않았으며 《소학》 〈명륜(明倫)〉에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장성한 아들은 머리를 빗지 않으며, 다닐 때 팔을 벌리고 흔들어 대면서 활기차게 걷지 않으며,……웃되 잇몸이 보이도록 크게 웃지 않는다.[父母有疾, 冠者不櫛, 行不翔,……笑不至矧.]"라는 내용이 보인다. 본래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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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 손공 묘갈명 石南孫公墓碣銘 공의 휘는 처상(處祥), 자는 사은(士隱), 호는 석남(石南)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는데, 다. 신라(新羅)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어졌다. 조선에 들어와 휘 책(策)이 있었으니,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현손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제학을 지냈다.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은거하였는데, 공에게는 10대조가 된다. 고조는 휘 시웅(始雄)으로, 동지중추부사이고, 증조는 휘 흥신(興新)으로, 부호군(副護軍)이다. 조부는 휘 덕효(德孝)로, 진사이고, 부친은 휘 몽두(夢斗)이다.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시규(文始奎)의 따님인데,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공은 을축년(1805, 순조5) 3월 1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기개가 빼어나고 도량이 넓었다. 서당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번거롭게 훈장(訓長)이 감독하지 않아도 대여섯 번 이상을 송독(誦讀)하였다.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글과 글씨는 보는 자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길 정도의 수준이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고 힘써 농사지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나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일하고 남은 힘이 있거나 고 한가한 날이면 두 아우와 함께 방을 쓸고 책상을 맞대어 토론하고 송독하였는데 공부하는 데 확실하게 과정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 대인(大人)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대부분 부모를 영화롭게 하려는 계책이다. '나는 네가 나를 잘 봉양하는 것만 말할 뿐이지, 네가 나를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옛사람이 자식에게 경계한 말이 아니더냐.205)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 또한 그러하니, 너희도 더 이상 서로 경쟁하는 곳에 마음을 허비하지 말라."라고 하니, 공이 마침내 문을 닫고 장막을 드리운 채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수신(修身)을 위한 학문을 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하며 연구하여 체득하고 실천함에 서로 그 힘을 쏟아 날로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배위(配位)는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유광인(柳光仁)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느 날 공이 병환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유씨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노친을 잘 봉양하며 어린아이들을 잘 키우고, 내가 죽는 것을 한스러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기절하였다. 유씨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공의 입에 흘려 넣어 소생하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졸하였다. 유씨는 뒤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전혀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극구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노친(老親)이 살아 계시고 아이들이 품 안에 있는데 다만 부군(父君)께서 임종 때 한 말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유씨가 멍하니 한숨을 쉬고 말하기를 "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부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 마침내 일어났다. 장례를 치른 뒤에 부지런히 집안 살림을 꾸리며 정성을 다해 시어른을 봉양하니, 향리에서 칭찬하여 효열부(孝烈婦)라고 일컬었다. 향리에서 추천하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공의 묘소는 호암면(虎巖面) 우비등(牛鼻嶝) 계좌(癸坐) 언덕에 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부군을 따라 죽으려 한 뜻에 따라 합장하였다. 인용(麟鏞)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는데 군수를 지냈다. 손자는 참의관(參議官) 영렬(永烈), 진사인 영하(永夏), 그리고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영렬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천하고 용렬한 데다 병으로 문장 짓는 것을 폐하여 감히 청에 응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지만 예전부터 서로 두터운 우의가 있었기에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 쌓고 의로움 행하였지만 積善行義오히려 덕을 감추었네. 尙絅晦根그 보답 누리지 않고 不食厥報후손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효자의 덕행 잘 전해주니 錫類式穀후손의 복 창성하리라 後祿以昌문암에 있는 무덤에 門巖斧堂해마다 늘 제향 올리네 歲事有常 公諱處祥。字士隱。號石南。孫氏系出密陽。自羅至麗。奕葉相承。入我朝。有諱策。文科。官牧使。至玄孫諱比長。文科官弘文提學。燕山朝。退休于扶安葛村。於公爲十世祖也。高祖諱始雄。同中樞。曾祖諱興新。副護軍。祖諱德孝。進士。考諱夢斗。妣南平文氏始奎女。壺儀備至。公以乙丑三月一日生。天稟醇厚。氣宇秀爽。就塾上學。不煩提督。而誦數甚勤。綴文揮毫。文與筆。見者驚異之。家貧甚。躬耕力穡以供菽水。以餘力暇日。與其二弟。掃室連榻。講討誦習。的有程曆。累中鄕解。輒屈禮部。其大人戒之曰。人之赴擧。多爲榮親計也。吾謂汝以善養。不謂汝以祿養。此非古人戒子語耶。吾之所望於汝者亦然。汝亦勿復費心於紛竸之間也。公遂杜門下帷。專心爲己。存養硏究。體認踐履。交致其力。日就邃密。配高興柳氏光仁女。閫範無闕。一日公屬疾幾危。顧柳氏曰。善養老親。善育稚孩。我死無恨。言訖而絶。柳氏血指注口。得甦數頃而卒。柳氏誓以下從。絶不飮食。家衆防之甚力。且曰。老親在堂。稚孩在懷。獨不念夫君臨沒之言乎。柳氏曠然太息曰。與其遂吾之志。不若遂夫之志也。遂起焉。視奠之餘。勤理家務。備盡忠養之節。隣里歎賞。稱以孝烈婦。鄕道剡報。續續不絶。公墓在虎巖面牛鼻嶝癸坐原。夫人之沒。從下從之意。爲之合封焉。有一男曰麟鏞。官郡守。孫男曰永烈。議官。曰永夏。進士。曰永吉。曰永鎭。曰永實。曾孫以下不盡錄。永烈抱家狀。請爲碣銘之文。余以淺劣。病廢鉛槧。其不敢承膺久矣。而在平昔相厚之義。有不忍終辭。銘曰。積善行義。尙絅晦根。不食厥報。垂裕後昆。錫類式穀。後祿以昌。門巖斧堂。歲事有常。 나는……아니더냐 정이(程頤)가 문인인 윤돈(尹焞)에게 "그대는 노모가 계시니, 과거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윤돈이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그의 어머니는 "나는 네가 잘 봉양하는 것만 알지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吾知汝以善養, 不知汝以祿養.]" 하였다. 이후 윤돈은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宋史 道學列傳 尹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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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훈대부 군자감 정 청계 조공 묘갈명 贈通訓大夫軍資監正淸溪趙公墓碣銘 공의 휘는 옥생(玉生), 자는 국미(國美), 호는 청계(淸溪)이다. 조씨(趙氏)의 관향은 함안(咸安)으로,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 휘 정(鼎)이 그 시조이다. 세계(世系)의 중대(中代)에 이르러 휘 승숙(承肅)이란 분이 계셨으니, 세상에서는 덕곡(德谷) 선생이라고 하였다. 이분이 휘 종례(從禮)를 낳았는데, 종례의 호는 율정(栗亭)으로,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3대가 전해 내려와 휘 임(琳)에 이르렀는데, 그의 호는 진재(愼齋)로,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휘 희광(希匡)에 이르러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동복(同福)의 예곡(艾谷)에 우거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자손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 인(仁)이니, 문학과 행실이 있었다. 증조는 휘 유보(惟寶)이니, 습독관(習讀官)을 지냈고, 조부는 휘 호(豪)이니,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부친은 휘 기벽(奇壁)이고, 모친은 삭녕 최씨(朔寧崔氏)로, 참봉 최인수(崔仁壽)의 따님이다.선묘(宣廟) 무신년(1608, 선조41) 8월 16일에 공은 예곡(艾谷)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일찍 고아가 되어 가난하였지만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9세에 능성(綾城)의 산음리(山陰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박공 영춘(朴公永春)과 이웃에 살았는데, 박공은 그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기골이 준수한 것을 보고 권유하여 학교에 들어가게 하고, 이어서 딸을 시집보냈다.공은 고생을 무릅쓰고 힘써 노력하여 전심으로 학문에 매진였고, 문학으로 명망이 당대에 떨쳤지만 명리(名利)를 다투는 과거 시험장과 벼슬을 구하는 방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시속을 따라 사람들과 어울려 잇속에 머뭇거리면서 말을 더듬거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직 선을 쌓고 의를 행하며 후학들을 권장하여 정진(精進)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계책으로 삼았다. 거처하는 곳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운림(雲林)이 창연(蒼然)하니, 사람과 땅이 잘 어울리고 정경(情境)206)이 서로 부합하여 한가롭게 소요하며 그윽이 감상하는 흥취를 극진히 하였으니, 실로 고인이 이른바 "영원히 이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 맹세한다.[永矢不諼]"라는 뜻207)이 있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올랐다.기묘년(1699, 숙종25) 3월 13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92세이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영춘(朴永春)의 따님이자, 판서 박사룡(朴駟龍)의 손녀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초장동(草庄洞) 경좌(庚坐)에 쌍분으로 장사 지냈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원규(元奎), 서규(瑞奎), 창규(昌奎)이다.연대가 더욱 멀어지고 문헌이 흩어지고 없어져 당시의 숨은 덕과 행실이 이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찌 자손의 한이 되지 않겠는가. 후손 익제(翼濟)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석의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산음리는 山陰之里여생을 보낸 곳이요. 杖屨是經초장동은 草庄之洞선생의 의복이 묻힌 곳이네. 衣履是藏지역의 명성 사람에 달렸으니 地逐人好정채가 은은하게 드러나네. 精采闇章자손이 잘 계승하였으니 子孫善述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 餘祿正長 公諱玉生。字國美。號淸溪。趙氏貫咸安。高麗平章事諱鼎。其始祖也。至中系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生諱從禮。號栗亭。入我朝。寶文閣直提學。三傳至諱琳。號愼齋。大司成。至諱希匡。參奉。寓居同福之艾谷。子孫因居焉。高祖諱仁。有文行。曾祖諱惟寶。習讀。祖諱豪。內禁衛將。考諱奇壁。妣朔寧崔氏參奉仁壽女。宣廟戊申八月十六日。公生于艾谷第。早孤貧。事母至孝。九歲流寓綾城之山陰里。與朴公永春接隣。朴公知其爲名家遺裔。而且見其氣骨俊異。勸令就學。因以女妻之。公勤苦刻勵。一意征邁。文學聲望。擅於一時。而於聲利之場。干進之路。澹泊如也。未嘗隨俗混塵。有趑趄囁嚅之態。惟以積善行義。奬進後學。爲究竟計。所居山高谷邃。雲林蒼然。人地相得。境情交孚。婆娑徜徉。以盡其幽賞之趣者。實有古人所謂永矢不諼之意。以壽陞軍資監正。已卯三月十三日卒。得年九十二。配密陽朴氏永春女。判書駟龍孫。有婦德。葬草庄洞庚坐雙兆。生三男。元奎。瑞奎。昌奎。嗚呼。年代彌遠。文獻散逸。當日之隱德幽行。因以不暢。豈不爲子孫之恨。後孫翼濟以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山陰之里。杖屨是經。草庄之洞。衣履是藏。地逐人好。精采闇章。子孫善述。餘祿正長。 정경(情境) 정(情)은 사물을 대하여 인식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을 가리키고, 경(境)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객관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영원히……뜻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고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낙을 잊지 않으려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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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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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학생 김공 묘갈명 學生金公墓碣銘 금릉(金陵)의 연자천(燕子川) 가 아암동(兒巖洞)에 부자(負子 정남향) 향오(向午)에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바로 고(故) 학생(學生) 김공(金公)의 신과 옷이 묻힌 곳이다. 공의 휘는 필환(弼煥), 자는 공서(公瑞), 관향은 도강(道康)이다. 고(故)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門下評理) 휘 을경(乙卿)이 그 시조인데, 문학(文學)과 관직으로 대대로 가문을 빛냈다. 고조는 선의(善疑), 증조는 익형(益兄), 조부는 명의(明義)이다. 부친은 유문(有文)이고, 모친은 통천 최씨(通川崔氏)로, 최일채(崔日彩)의 따님이다.공은 순조(純祖) 경진년(1820, 순조20)에 태어났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성품이 자상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지어 양친을 효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고 지물(志物)의 봉양에 빠뜨림이 없었다. 상례를 거행할 적에는 너무나 슬퍼하면서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고, 삭망(朔望)에 묘소를 참배할 적에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에 규범이 있었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복과 진귀한 물건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집안 내에 효성스럽고 성실한 가풍이 저절로 흥성하여 친척과 이웃까지도 기뻐하며 서로 뜻이 맞아 어울렸다. 이해를 따지고 서로 헐뜯는 일에 대해서는 아득히 듣지 못하는 듯이 하였지만, 의리와 사정(邪正), 물건을 주고받는 일에는 일찍이 조금도 주저하거나 구차한 뜻이 있지 않았다.갑신년(1824, 순조24) 윤5월 15일 생을 마감하였다. 배위(配位)는 청주 김씨(淸州金氏)로, 김귀갑(金貴甲)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자애롭고 유순했으며 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 공보다 3년 먼저 생을 마쳤는데, 묘는 같은 언덕에 있다. 2남 3녀를 낳았으니, 장자는 규상(奎庠), 차자는 규홍(奎洪)이다. 딸은 허일조(許一祚), 김한준(金漢俊), 양태한(梁泰漢)에게 출가하였다. 장자의 아들은 성진(成鎭)이고, 차자의 아들은 창진(昌鎭)이다.창진이 그 대인(大人)의 명으로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아, 나는 공이 살아 계실 때 직접 뵙지 못하였지만 후손을 통해 그 의로운 행실에 대해서 들은 지 오래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고 감회에 잠기매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효도와 우애로 입신하고 孝悌立身근검으로 가정 이루었네. 勤儉成家자손이 번성하니 子孫繩繩남은 음덕 매우 훌륭하네. 餘蔭孔嘉 金陵之燕子川上兒巖洞。有崇四尺負子向午者。卽故學生金公衣履之藏也。公諱弼煥。字公瑞。貫道康。故匡靖大夫門下評理諱乙卿。其始祖也。文學仕䆠。世代煒燁。高祖善疑。曾祖益兄。祖明義。考有文。妣通川崔氏曰彩女。公以純祖庚辰生。姿相奇偉。性氣慈詳。家貧躬耕。孝養二親。愛敬倶至。志物無闕。執喪過哀。一從禮制。朔望展墳。風雨不廢。平居。持身有則。御家有法。華美之服。珍怪之物。不入於家。一家之內。孝順勤慤之風。油然興行。以至族戚隣里。無不歡欣相得。有利害毁譽。漠然無聞焉。而於義利邪正。辭受取予。未嘗有一毫依違苟且之意。甲申閏五月十五日考終。配淸州金氏貴甲女。貞淑慈柔。婦德備至。先公三年而終。墓同原。生二男三女。長奎庠。次奎洪。女適許一祚金漢俊梁泰漢。長房男曰成鎭。次房男曰昌鎭。昌鎭以其大人命。奉遺狀。宋謁碣銘之文。嗚呼。余於公之在世。未得拜床。而因緣後承。得聞其行義久矣。緬古感今。豈忍辭諸。銘曰孝悌立身。勤儉成家。子孫繩繩。餘蔭孔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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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7 卷之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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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연 정석에게 지어 주다 贈崔秉硏正錫 벽절산 속에 한 초당이 있으니 碧節山中一草堂등불 켜고 날 밝도록 학업에 힘쓰누나 焚膏勤業繼朝陽앵무새 같음을 경계한 상채의 말을 일찍이 들었고347) 戒存鸚鵡曾聞蔡사람과 소의 도리를 뒤섞은 자상을 다시 안타까워하네348) 道混人牛更病桑만약 전심하여 육예를 통달할 수 있다면 如使專心六藝透한 손으로 온갖 냇물 막는 게 어찌 어려우랴 何難隻手百川防나 같은 늙은이는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如余老矣亡無日훗날 그대 덕분으로 빛날 수 있기를 바라노라 願得他年賴以光 碧節山中一草堂, 焚膏勤業繼朝陽.戒存鸚鵡曾聞蔡, 道混人牛更病桑.如使專心六藝透, 何難隻手百川防?如余老矣亡無日, 願得他年賴以光. 앵무새……들었고 상채(上蔡)는 송(宋)나라 학자인 사양좌(謝良佐)의 호로, 정이(程頤)의 제자이다. 사양좌가 일찍이 당시 사대부들을 평하여 "명리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조금 쉴 수 있는 곳이니, 지금의 사대부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말만 잘하는 것이 참으로 앵무새와 같다.[透得名利關, 方是小歇處, 今之士大夫, 何足道? 能言, 眞如鸚鵡也.]"라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과……자상(子桑)을 자상은 도가(道家)의 무리인 자상백자(子桑伯子)를 가리킨다. 《논어집주(論語集註)》 〈옹야(雍也)〉에 중궁(仲弓)이 자상백자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그의 간략함도 괜찮다.[可也簡]"라고 대답하자, 중궁이 자상백자는 너무 간략한 것[太簡]이 아니겠냐고 말하였는데, 이 대목에 대한 주희(朱熹)의 집주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자상백자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거처하자, 공자가 그는 사람의 도리를 소와 말과 같게 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자상백자는 아마도 너무 간략한 자일 것이다.[家語記伯子不衣冠而處, 夫子譏其欲同人道於牛馬. 然則伯子蓋太簡者, 而仲弓疑夫子之過許與!]"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를 차용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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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달밤 雪月夜 눈 내린 빈산의 달밤은 참으로 더디 가는데 雪月空山夜正遲시혼은 흥을 타고 그 어디로 향해 가는고 詩魂乘興向何之가을 지난 동산의 국화는 예전 역사340)와 같고 經秋園菊同前史섣달 기다리는 다리 가 매화341)는 후일을 기약한다오 待臘橋梅結後期대숲 집 주인의 노래가 청절한 곳이요 竹館人歌淸絶處솔에 깃든 학의 꿈342)이 편히 이루어지는 때일세 松棲鶴夢穩成時남쪽 지방에 한 해가 저무는 걸 깜짝 놀라니 飜驚南國年光暮기러기의 울음소리에 일삼는 바가 있구나 鴻鴈聲中有所事 雪月空山夜正遲, 詩魂乘興向何之?經秋園菊同前史, 待臘橋梅結後期.竹館人歌淸絶處, 松棲鶴夢穩成時.飜驚南國年光暮, 鴻鴈聲中有所事. 예전 역사 국화를 유독 좋아했던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고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연명이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서문 말미에 "중추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지가 80여 일이었다. 일을 따라 마음을 순히 하였으므로 명명하기를 '귀거래혜'라 하니, 을사년(405) 11월이었다.[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라고 하고, 그 본문에는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리 가 매화 당(唐)나라 맹호연(孟浩然)의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다리는 장안(長安) 동쪽에 흐르는 파수(灞水) 위에 놓인 파교(灞橋)를 가리킨다. 맹호연이 일찍이 눈이 내리는 속에 나귀를 타고 파교에 가서 매화를 구경한 고사가 있었는데,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 이를 읊기를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으매 어깨가 산처럼 솟음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라고 하였다. 학의 꿈 세속을 초탈하고자 하는 뜻을 비유한다. 당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여이생론시서(與李生論詩書)〉에 "땅이 청량하니 학의 꿈은 맑고, 숲이 고요하니 중의 모습 엄숙하여라.[地涼淸鶴夢, 林靜肅僧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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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지 상덕재 선생 최공 묘지명 左承旨尙德齋先生崔公墓誌銘 선생의 성은 최씨(崔氏), 휘는 치호(致湖), 자는 평원(平遠)이다. 초휘(初諱)는 업(嶪)이었으며, 호는 상덕재(尙德齋), 관향은 낭주(朗州)이다. 고려 때 동래후(東萊侯) 휘 지몽(知夢)이 그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에 이르러 조선에 입조(入朝)하였으니 관직은 군기시 소감(軍器寺小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운(雲)을 낳았는데, 호는 덕암(德庵)이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휘 득초(得超)에 이르러 장악원 정랑(掌樂院正郞)을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자혁(自赫)으로,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을 지냈다. 조부는 휘 추(湫)로, 호가 난계(蘭溪)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선고의 휘는 근지(近池)로, 호는 월계(月溪)이며, 사성(司成)을 지냈다. 모친은 여흥(驪興) 민씨(閔氏)로, 참의 민식(閔湜)의 따님이다. 명종(明宗) 갑자년(1564, 명종19) 10월 16일에 서울 남부(南部)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겨우 말을 할 만한 나이에 문득 시구를 지을 수 있었는데, 〈영오시(詠烏詩)〉에 "새 가운데 너는 효도할 수 있으니, 고인이 현자에 견주었네.[鳥中爾能孝, 古人比於賢.]"라고 하였다. 7세에 모친상을 당해 유인(孺人)에 대한 애도가 망극하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상복을 벗자 글방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었다. 스승이 그가 자주 내정(內庭)으로 들어가 혹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자가 평소 애태우며 그리워하는 마음은 반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반은 스승에게 향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스승이 기특하게 여겼다.독서할 적에는 손을 단정히 모으고 꼿꼿하게 않아 전심치지(專心致志)하되 송독하는 횟수는 한도가 있었으나 연구에는 일정한 한계를 두지 않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에서부터 제자백가 자(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충분히 반복 학습하여서 깊게 통달하고 두루 폭넓게 이해하였다. 석담(石潭)1) 이 선생(李先生)이 성리학에 심오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가서 배웠다. 또 임공 숙영(任公叔英), 고공 용후(高公用厚), 홍공 입(洪公雴), 김공 반(金公槃), 고공 전천(高公傳川), 민공 성징(閔公聖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는데, 서로 충고하고 절차탁마하며 더욱 스스로 확충하여 훌륭하다는 명성과 명망이 당대에 자자하였다.계미년(1583, 선조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다. 을유년(1585)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지만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86)에 낭천(狼川)에 임명되는 명이 있었지만 또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정해년(1587)에 과거에 급제하여 바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의 자질이 있고 요순의 지위가 있으며 요순의 백성이 있는데, 요순과 같은 은택이 나라에 두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宋)나라 신하 채침(蔡沈)이 말하기를 '후세의 군주가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제삼왕의 도에 뜻을 둔다면 그 마음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구한다.[求其心]'라는 석 자가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구하는 법은 선성(先聖)의 가르침이 서책에 매우 자세히 드러나 있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유현(儒賢)을 친히 가까이하여 아침저녁으로 강구(講究)하여 그 이치를 밝히고 그 실제를 행한다면 마음을 구하는 방법이 터득되고 다스리는 근본이 확립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무자년(1588)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訥)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어느 날 주상이 경연에 나아가 《서경》의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를 강론하다가 이어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라는 뜻을 물으니, 공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고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한마디가 또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는데 성상(聖上)의 물음이 여기에 미치니 감히 나라를 흥하게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경인년(1590)에 집의에 제수되었다. 과거 시험에서 사람을 선발할 적에 오로지 문예를 숭상하는 것을 보고 아뢰기를 "장구(章句)나 익히는 학문은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이 아니며, 문장을 짓는 기교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장구나 익히고 문장을 짓는 능력을 가지고 선비를 선발하면서 세상을 경영하고 잘 다스리는 효과를 바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임진왜란 때 상국(相國) 유성룡(柳成龍)이 공을 천거하여 서기(書記)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기무(機務)에 참여하여 계책을 내었기에 드러난 공적이 많았다. 병신년(1596)에 부친상을 당했고, 계묘년(1603)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제수되었으며, 을사년(1605)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 광해군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을 때 상소를 올려 직간하였는데, 그 상소 중에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한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에 광해군이 몹시 화를 내며 이르기를 "그대는 나를 진(秦)나라 이세(二世)에 견주는 것인가?"라고 하니, 천천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이세에 비견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신다면 이세의 행실을 따르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더욱 노여워하여 장(杖)을 치고 의금부에 3일 동안 가두었다가 사죄(死罪)에서 1등급을 줄여 진도(珍島)로 유배보냈다. 이에 연관된 시가 아래와 같다.의금부 서리 행차 재촉하여 남쪽으로 문 나서니 禁吏促行南出門이 몸은 살아서 향촌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此身生不返鄕村소슬하게 비바람 치는 지난밤 꿈에 蕭蕭風雨前宵夢상강으로 날아가 굴원을 보았네.2) 飛入湘江見屈原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즉시 유배에서 풀려나는 은혜를 입었고, 부제학으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장흥(長興)의 와리(瓦里)에 거처하며 산수를 즐기고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다가 정묘년(1627, 인조5) 10월 16일에 졸하였다. 와리 뒤쪽 산기슭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참의 민순(閔絢)의 따님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결(潔)은 참봉(參奉), 숙(淑)과 해(海)는 진사이다. 딸은 변극중(邊克中)과 김인복(金寅福)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12세손 창주(昌柱)와 남표(南杓), 14세손 동민(東珉)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하늘이 밝은 운을 열어주어 天啓照運명철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만났네. 明良際出금당과 옥서3)에서 玉署金堂군신 간에 정사를 논하고 문답하였네. 都兪密勿세상에 다 베풀지 못했는데 不竟厥施창오의 구름 아득하네.4) 梧雲茫茫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身不見容갑자기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네. 奄竄南荒우레치고 비 내리는 가운데 雷雨繼作동쪽 언덕에 누웠네. 因臥東岡먼 후대에 회상해 보면 追惟百世그 풍도와 운치 더욱 드러나리라. 風韻彌彰 先生姓崔。諱致湖。字平遠。初諱嶪。號尙德齋。貫朗州。麗朝東萊侯諱知夢。其鼻祖也。至諱安雨。入我朝。官軍器寺小監。是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至諱得超。掌樂院正郞。公之高祖也。曾祖諱自赫司醞寺直長。祖諱湫。號蘭溪。戶曹參判。考諱近池。號月溪。司成妣驪興閔氏參議湜女。明宗甲子十月十六日。生公于京之南部私第。幼有異質。穎悟過人。纔能言。便能綴句。詠烏詩曰。鳥中甭能孝。古人比於賢。七歲丁外艱。孺哀岡極。見者釀涕。服闋。就讀塾師。師見其頻入內庭。或久而不出。問其故。對曰。小子平日戀戀意。半是慈親半是師。師奇之。讀書端拱危坐。專心致志。誦數有程。硏究無方。自四書五經以至諸子百家。循環熟復。淹貫該洽。聞石潭李先生邃於理學。遂往學焉。又與任公叔英高公用厚洪公雴金公槃高公傳川閔公聖徵爲道義交。規警切磋。益自展拓。令聞令望。藉甚一時。癸未中司馬。除禮賓寺參奉。乙酉差江原道都事。以親老不就。旋除造紙署司紙。丙戌有狼川之命。又以親老不就。丁亥擢第。卽拜弘文館校理。上疏辭。略曰。殿下有堯舜之資。有堯舜之位。有堯舜之民。堯舜之澤。未洽於國家者何也。宋臣蔡沈之言曰。後世人主。有志於二帝三王之治。不可不求其道。有志於二帝三王之道。不可不求其心。然則求其心三字。豈非今日急先之務乎。求心之法。先聖謨訓。著於簡冊者。至爲詳悉。必須親近儒賢。夙夜講究。以明其理。以踐其實。則求心之法得。而爲治之本立矣。戊子除司諫院獻訥。尋遷司憲府掌令。一日上御經筵講夏五子之歌因問民惟邦本之義公對之甚悉。且曰。孔子云一言而興邦。一言而喪邦。今此一言。亦興喪之所由繫。而聖問及此。敢不爲興邦賀。庚寅拜執義。見科試取人。專尙文藝。啓曰。章句之習。非經綸之學。文詞之術。非治平之策。今取士於章句文詞之間。而望其有經綸治平之效。不其難矣乎。壬辰之亂。柳相國成龍。擧公爲掌書記。參謀機務。多有著績。丙申遭內艱。癸卯除世子侍講院輔德。乙巳移左副承旨。光海辛亥陞都承旨。抗疏直諫。疎中有嚴法刻刑等語。光海大怒曰汝比予於秦二世乎徐對曰殿下若愧比二世則勿行二世之行。光海愈怒。杖囚禁府三日。減死一等。流于珍島。因有詩曰。禁吏促行南出門。此身生不返鄕村。蕭蕭風雨前宵夢。飛入湘江見屈原。癸亥改玉。卽蒙解放。以副提學累徵。不赴。因居于長興之瓦里。以山水文酒自娛。丁卯十月十六日卒。葬瓦里後麓甲坐原。配驪興閔氏參議絢女。生三男二女。男潔參奉。淑。海進士。女適邊克中金寅福。孫以下不錄。十二世孫昌柱南杓十四世孫東珉。以家狀來謁誌銘。銘曰。天啓照運。明良際出。玉署金堂。都兪密勿。不竟厥施。梧雲茫茫。身不見容。庵竄南荒。雷雨繼作。因臥東岡。追惟百世。風韻彌彰。 석담(石潭)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별호이다. 상강으로……보았네 상강은 중국의 소상강(瀟湘江)으로, 초(楚)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이 유배되어 있다가 죽은 곳이다. 금당(金堂)과 옥서(玉署)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이곳에 학사들을 초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후대에는 한림원이나 한림학사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조선 시대에는 홍문관이나 규장각 등 문신들이 근무하는 곳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묘지명의 주인공인 최치호(崔致湖)가 홍문관 교리로 제수된 적이 있기 때문에 사용한 듯하다. 창오의 구름 아득하네 최치호를 인정해 주었던 선조(宣祖)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오운(梧雲)은 창오(蒼梧)의 구름이라는 말로, 창오는 순(舜) 임금이 묻힌 산 이름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머리 돌려 순 임금 향해 절규하노니, 창오의 구름이 정녕 시름겨워서.[廻首叫虞舜, 蒼梧雲正愁.]"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2 同諸公登慈恩寺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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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 형공 묘지명 茅汀邢公墓誌銘 옥새 찍힌 교서(敎書)를 내려 격려하고 금을 하사하거나 품계를 더하였으니, 한(漢)나라 때 양리(良吏)가 여기에서 성대해졌다.5) 이는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이고 태평의 상징이니, 삼대(三代) 이하의 시대에서는 견줄 만한 왕조가 드물었는데, 오직 우리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즈음이 또한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권유하고 포상하는 전지(傳旨)가 날로 주군(州郡)에 내려지고 직분을 나누어 맡은 지방 관원이 날로 선(善)을 장려하자 어진 관리가 성대히 출현하고 칭송하는 소리 또한 자자하여 무궁한 아름다움에 이르렀다.모정(茅汀) 형공(邢公)은 또한 당시의 어진 관리였다. 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호) 경인년(1530, 중종25)에 외직으로 나가 남평(南平)을 다스렸고, 계사년(1533, 중종28)에 하양(河陽)으로 옮겼는데, 치적이 으뜸이어서 특별히 은혜로운 유서(諭書)를 내렸다. 그 유서에 이르기를 "지금 관찰사 송흠(宋欽)6)이 아뢴 말에 따르면, 그대가 남평을 다스릴 때부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청렴하고 부지런함이 이미 드러나 그대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니,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유서를 받았는데, 하교하기를 "그대의 청렴하고 탁월한 재주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표리 1습을 하사하니, 그대는 받들라."라고 하였다. 위로는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충성을 바치는 신하가 있어 구름이 용을 좇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듯이 의기와 기질이 맞는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났으니,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선비가 삼대(三代) 때 태어나지 못해 이미 고요(皐陶)ㆍ기(夔)ㆍ후직(后稷)ㆍ설(契)이 태평성대에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우리 동방이 흥성한 시대에 태어나 위로 성스럽고 명철한 군주가 있고 아래로 온화하고 고상한 신하가 있었으니, 송흠(宋欽) 선생 같은 분이 추천하고 칭송하기를 이와 같이 정중하게 한 것은 옳다. 그 나머지 작위를 받지 못하고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 것이 어찌 공에서 보탬이 되거나 손해나는 일이겠는가.공의 휘는 자관(自寬), 자는 장백(長伯), 모정(茅汀)은 그의 호이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방(昉)이 그 중시조이다. 2대를 전해 내려와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정벌한 공로로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진양군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와 군철(君哲)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충청 병사(忠淸兵使)를 지냈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부 경승(慶承)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은 용인(用仁)은 진사(進士)이다. 모친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 11월 3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천성이 단정하고 고아한 지조가 있으며 청렴하였다.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대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정축년(1517, 중종1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기묘년(1519)에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다. 남평(南平)과 하양(河陽)의 고을 원을 역임하였는데, 남평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향사(享祀)를 지냈다. 병오년(1546, 명종1) 3월 19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남평 저포면(猪浦面) 하류촌(下流村) 안산(案山) 병좌(丙坐)에 장사 지냈다.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주부(主薄) 김숭령(金崇齡)의 따님이다. 신해년(1491, 성종22) 9월 2일에 태어났고, 무신년(1548, 명종3) 1월 18일에 졸하였다. 묘소는 부군과 합장하였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현(世賢)이고, 딸은 각각 양응기(梁應箕), 조국성(曺國聖)에게 각각 시집갔다. 세현은 자식이 없어 양씨(梁氏)가 외손으로서 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공의 문적(文蹟)은 병화에 유실되었는데, 만년의 것은 양씨의 집안에서 약간의 유고(遺稿)를 얻었다. 종(從) 9세손 도열(道烈)이 눈물을 닦으며 붓을 들어 그 일을 서술하고 이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호남의 군현을 다스렸고 分憂湖郡영남 고을을 맡아 다스렸네. 歷典嶺邑봄볕이 빛을 발하였으니 陽春動輝성상의 표창이 융성하였네. 天褒隆洽어진 관리 계속 전해짐에 良吏續傳누가 감히 공을 빠뜨리랴. 誰敢遺公훌륭한 풍도와 위대한 공적 英韻偉蹟무궁한 후대에 밝게 드리우리라 昭垂無窮 璽書勉勵。增秩賜金。而漢世良吏。於斯爲盛。此其明良之會。昇平之象。三代以下。鮮見其比。而惟我成宗中宗之際。亦庶幾焉。獎諭褒旨。日下州郡。而字牧分職。日勤於善。所以良吏蔚興。頌聲倂作。而用底于無疆之休也。茅汀邢公。亦當時之良吏也。靖陵庚寅。出莅南平。癸巳移河陽。以治平第一。特蒙恩諭。有曰。今仍觀察使宋欽所啓。知爾自爲南平時。薄賦愼刑。廉勤己著。民有去後之思。予甚嘉之。賜表裏一襲。以示褒獎之意。爾其體予至懷。終始不渝。明年春。又蒙諭。有曰。嘉爾淸白卓異。特賜表裏一襲。爾其頌受。嗚呼。上有願治之主。下有效忠之臣。雲龍風虎。何等盛儀也。士不生三代之上。旣不得與臯夔稷契都兪吁咈於太和照皞之中。則生於大東日中之世。上有聖明之君。下有儒雅之臣。如宋欽先生。而推引賞識。若是鄭重則可矣。其餘爵位之不揚。祚胤之不昌。曷足以加損於公也耶。公諱自寬。字長伯。茅汀其號也。麗朝平章事昉。其中祖也。再傳至公美。征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自晉陽君三傳至君哲。入我朝。官忠淸兵使。卽公之曾祖也。祖慶承。仕郞贈戶曹參判。考用仁進士。妣淸州韓氏。以弘治戊申十月三日生。公天資端詳。雅操廉潔。孝友文學。見重一時。丁丑中生員。己卯除中部參奉。歷宰南平河陽。南平民建祠。春秋享祀。丙午三月十九日卒。享年五十九。葬南平之猪浦面下流村案山丙坐。淑夫人光山金氏主薄崇齡女。辛亥九月二日生。戊申正月十八日卒。墓合祔。有一男二女。曰世賢。曰梁應箕。曺國聖。世賢無育。梁氏以外裔奉公祀。文蹟失於兵燹。晩於梁氏家得若干遺實。從九世孫道烈。抆淚沘筆以序其事。仍請余以誌墓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分憂湖郡。歷典嶺邑。陽春動輝。天寢隆洽。良吏續傳。誰敢遺公。英韻偉蹟。昭垂無窮。 조서를……성대해졌다 선제(宣帝)는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방관의 역할을 특별히 중시하여, 치적이 있는 지방관은 새서(璽書)로 권면하여 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은 품계를 높여 주고 관내후(關內侯)나 공경 대신(公卿大臣)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漢書 循吏傳》 송흠(宋欽) 1459~1547.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담양(潭陽)ㆍ장흥(長興)의 부사(府使),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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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당 처사 홍공 묘지명 晩喜堂處士洪公墓誌銘 아, 여기는 병좌병향(丙坐丙向)에 좌병향임(坐丙向壬)7)으로 혈(穴)과 봉분을 함께한 곳인데, 고(故) 만희당(晩喜堂) 홍공(洪公)과 그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의 무덤이다. 조금 내려와 정좌(丁坐) 언덕에 있는 것이 둘째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무덤이다. 공은 숙종(肅宗) 임진년(1712, 숙종38)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60세 되던 해에 졸하였다. 졸한 지 125년 뒤에 현손(玄孫) 형주(馨周), 기주(基周), 경주(慶周)가 무덤 앞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또 실제의 일을 기록하기를 도모하여 장차 무덤에 묘지명을 새기려고 행장(行狀)과 묘갈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금석문은 만년의 계책8)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소홀해질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선조를 향한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훌륭한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공의 휘는 이발(履潑), 자는 자함(子涵)이니, 세계(世系)는 풍산(豊山)에서 나왔다. 직학사(直學士) 휘 지경(之慶)이 그 현조(玄祖 5대조)인데,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대대로 그 미덕을 더하였다. 고조는 휘 준(埈)인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는 휘 덕우(德遇)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경고(景古)인데,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천규(天奎)이고 호가 오은(鰲隱)으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이인량(李仁亮)의 따님이다.공의 성품은 효성스러웠으니, 집이 가난하여 직접 집안 살림을 꾸렸고,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를 거행함에 지나치게 애통해하였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일찍 부친의 훈육을 받고 경전을 읽고 학업에 매진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면서도 막힘없이 시원스러웠으며, 의리를 행하여 환하게 빛났다. 오서육경(五書六經)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여러 설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회통(會通)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 역학(易學)에 심오하였으니, 순환하면서 복습하고 반복해서 깊이 연구하여 노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수(山水) 사이의 경치 좋은 곳에 초가집을 짓고 형제간에 다정하게 마주 보며 강론하고 토론하니, 원근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학당동(學堂洞)이라고 불렀다.아들 영구(永九)는 나씨(羅氏)의 소생이다. 아들 영범(永範), 영조(永兆)와 김양려(金陽麗)에게 시집간 딸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홍씨(洪氏) 일문(一門)은 자손이 번성하고 훌륭한 가법(家法)이 향리에 소문이 나서 학문에 뜻을 둔 많은 선비가 바야흐로 성대하여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만희옹(晩喜翁)과 같은 여러 선배가 선도한 힘이 아니겠는가. 유풍과 여운이 더욱 백세토록 뻗어나가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지금 은택이 사라지지 않았고 친분이 다하지 않았으니 좋은 방향으로 계승한 민첩함이 마땅히 이러함에랴. 우러러보면서 감동하는데, 감히 그 부지런한 뜻에 일부나마 힘써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은둔하여 곤궁하면 형통하니 遯肥困亨대대로 옛 음덕을 누렸네. 世食舊德무덤에 글을 실으니 載辭幽堂억만년 수를 누리리라. 用壽斯億 嗚呼。此坐丙而向壬。竝穴而同墳者。故晩喜堂洪公及共夫人羅州羅氏之藏也。稍下而負丁者。系夫人河東鄭氏窆焉。公以肅宗壬辰生。生六十歲而卒。卒一百二十五年。而玄孫馨周。基周慶周竪墳前短碣。又謀記實。將以銘諸幽竁。持行狀及碣文來。命於義林。此是金石萬年計也。托非其人。恐涉疏歇。而其向先追遠之誠。誠可謂能子能孫矣。公諱履潑。字子涵。系出豊山。直學士諱之慶。其玄祖也。文學行誼。世濟其美。高祖諱埈。贈掌樂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議。祖諱景古。號枕漱亭。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有隱德。妣仁川李氏仁亮女。公性孝。家貧躬幹。忠養備至。執喪過毁。廬墓三年。早襲庭訓。劬經績學。文詞贍暢。行義煒燁。自五書六經至程朱諸說。無不淹貫會通。尤邃易學。循環紬繹。至老不倦。結茅山水間。兄弟對床講討。遠近士子。聞風空集。人號其地爲學堂洞。子永九羅氏出。永範永兆女金陽麗。鄭氏出也。洪氏一門。椒聊蕃衍。而家法之美。聞于鄕邦。濟濟志學之士。方蔚然而未艾。此非先輩諸公如晩喜翁垂創之力歟。流風餘韻。加以亘百世而不泯。況今澤未斬而親未竭。其式穀似述之敏。宜乎內爾也。瞻感攸至。敢不勉副勤意之一二也。銘曰。遯肥困亨。世食舊德。載辭幽堂。用壽斯億。 좌병향임(坐丙向壬) 묘소의 방향을 말한 것으로, 병(丙 방위로는 남녘에 해당)을 등지고 임(壬 방위로는 북녘에 해당)을 향함을 의미한다. 만년의 계책 〈능고대(凌敲臺)〉 시에 "백 년 인생에 지었을 만년의 계책이여, 바위 위 옛 비석엔 푸른 이끼만 남았네.[百年應作萬年計, 巖上古碑空綠苔.]"라는 시구가 있다. 《唐百家詩選 卷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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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하여 제군에게 보이다 自叙示諸君 중유의 헤진 솜옷에 굴원의 관 높이 쓰고224) 仲袍弊弊屈冠峨흰 머리에 야윈 얼굴로 반평생이 지났구나 霜鬂蒼顔半世過도를 구할 땐 돌을 뚫는 것 같아 탄식했어도 求道堪歎同透石사람을 건네줄 땐 세파를 따르지는 않았네 涉人不肯輒隨波비바람 하늘에 가득하여 심회가 사납지만 滿天風雨心懷惡안개 노을 낀 벽지에도 살 계책은 많다네 僻地烟霞計活多도리어 부끄럽네 제군이 멀리서 왔는데 還愧諸君來自遠옆사람이 무성가225)에 잘못 견주는 것이 傍人錯比武城歌 仲袍弊弊屈冠峨, 霜鬂蒼顔半世過.求道堪歎同透石, 涉人不肯輒隨波.滿天風雨心懷惡, 僻地烟霞計活多.還愧諸君來自遠, 傍人錯比武城歌. 중유의 …… 쓰고 중유(仲由)나 굴원(屈原)처럼 높은 뜻을 가지고 살았다는 뜻이다. '중유'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의 이름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해진 솜옷을 입고서[衣敝縕袍],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굴원'은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난 초(楚)나라 대부이다. 그가 지은 〈섭강(涉江)〉에 "내 어릴 적부터 이런 특이한 복장을 좋아했는데, 늙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네. 긴 칼 허리에 늘여 차고서, 우뚝 높은 갓 머리에 썼지.[余幼好此奇服兮, 年旣老而不衰. 帶長鋏之陸離兮, 冠切雲之崔嵬.]"라고 하였다. 무성가(武城歌)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악(禮樂)을 가르쳐 교화를 잘 시켰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현가(弦歌) 소리를 듣고는 칭찬한 일이 있다. 《論語 陽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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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 형공 묘지명 道谷邢公墓誌銘 공의 휘는 세영(世英), 자는 춘영(春榮), 호는 도곡(道谷)이다. 신라(新羅) 때 휘 옹(顒)이 있었는데, 당(唐)나라 학사로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왔으니, 이 분이 상조(上祖)이다. 중대 휘 공미(公美)에 이르러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로가 있어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으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이 분이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휘 문궤(文軌)를 낳았고, 문궤가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휘 찬(贊)을 낳았으며, 찬이 진사를 지낸 휘 군철(君哲)을 낳았는데, 군철이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경(慶)이니, 장사랑(將仕郎)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용인(用仁)인데, 진사이다. 선고(先考)는 휘 자홍(自弘)인데,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냈다. 모친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인데, 정덕(正德) 2년 우리 중종(中宗) 정묘년(1507, 중종2)에 공을 낳았다.공은 생래적으로 기개가 높고 도량이 넓으며,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우뚝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경전을 읽으면서 힘써 배웠는데, 더욱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및 성리학에 관한 책을 깊이 연구하여 발휘하고 확충하여 사물의 본체와 작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은 구차하고 소홀한 뜻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한 일찍이 모질고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중년에 능주(綾州) 도동(道洞)으로 이사한 다음 산을 구입하여 정자를 짓고 시냇물을 끌어다 꽃을 심고 한가로이 노닐면서 그윽하고 빼어난 흥취를 두루 만끽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지만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향리에서 이름난 양학포(梁學圃) 제현과 서로 날마다 어울리면서 회포를 시로 읊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조정암(趙靜庵)이 본주(本州)에 귀양 오자 가서 위문하였다. 이를 인연으로 강론하고 질정하기를 끊이지 않고 하였다. 사약을 내리는 명이 이르자 슬퍼하고 상심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그 심정을 토로하였다.신사년(1581, 선조4) 10월 13일에 사제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75세이다. 죽동(竹洞)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니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공의 오른쪽에 있다. 계배(繼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묘소는 같은 언덕 갑좌(甲坐)에 있다. 모두 3남이니, 응지(應祉), 응식(應植), 응희(應禧)이다.12세손 도열(道烈)이 못난 나에게 편지를 보내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다만 고루(固陋)하고 용렬하여 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지만 유풍에 느끼는 바가 있어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도곡의 산은 道谷之山쉬고 노닐 수 있네. 可以棲遲도곡의 물은 道谷之水굶주림도 즐길 수 있네. 可以樂飢산은 높고 물은 유장하니 山高水長운치는 전과 다름이 없네. 風韻依然백세토록 생각나게 하니 百世興想지나는 사람 머무르네. 過者留連 公諱世英。字春榮。號道谷。新羅時有諱顒。以唐學士。浮海東來。是其上祖也。至中系諱公美。討倭有功。封晉陽君。子孫仍貫焉。是生諱文軌。禮部尙書。是生諱贊。版圖判事。是生諱君哲。進仕於公爲高祖。曾祖諱慶。將仕郎贈戶曹參判。祖諱用仁。進士。考諱自弘。碧潼郡守。妣延安李氏。以正德二年我中宗丁卯生。公生而氣宇峻茂。孝友根天。稍長屹若成人。劬經力學。尤蓫小學近思錄及性理之書。發揮展拓。體用無闕。平生行已。未見有苟且簡慢之意。亦未嘗有斬絶矯激之行。中年移寓綾州之道洞。買山結亭。引流裁花。逍遙徜徉。備盡幽逸之趣。以學行除齋郞。疏辭不就與鄕裏名勝梁學圃諸賢。日相追逐。唱酬遺懷。己卯趙靜庵謞本州。往省之。因以講討問辨。源源不絶。及後命至。不勝哀傷。爲賦一絶詩以寫其情。辛巳十月十三日卒于居第。享年七十五。葬于竹洞艮坐之原。配韓山李氏某女。墓附右。繼配水原白氏某女。墓同原甲坐。擧三男曰應祉應植應禧。十二世孫道烈。走書不侫。謁誌墓之文。顧固陋微劣。固知不敢承當。而曠感餘風。有不忍終辭者。銘曰。道谷之山。可以棲遲。道谷之水。可以樂飢山高水長。風韻依然。百世興想。過者留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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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水山金聖則【義鉉】 世味頭俱白。鄕情眼復靑。前期知有限。何必淚空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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允性【金大源】兄故爲留行。又以惜別號韻。因酬之。 雛合本無邊。送迎互有連。淸遊繩此日。佳約筮明年。雪淺任踰嶺。木輕易渡川。歸餘多小思。茅屋夢依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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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立春前一日二日。寄允性兄。 天日會成歲。雄雌各守家。靑春吾已過。華髮子兼斜。晩學難尋道。先知易泳涯。罄懷應不遠。聊寄一梅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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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日夜懷允性兄 惡離常好合。不見意茫然。梅蘂經春發。栢樽竟夕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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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를 읽다가 '거문고와 책을 스스로 즐기다'305)는 말에 감회가 있어 讀《歸去來辭》, 感琴書自娛之語 멀리 심양306)에 살던 처사의 마음을 생각해보니 緬想潯陽處士心거문고와 책만 안고 운림307)에서 즐거워했다오 琴書獨抱樂雲林책 속의 진미를 탐닉함만 추구할 뿐이었고 只求卷裡耽眞味인세의 묘음에 맞추는 걸 원치 않았다네 不願人間和妙音장단의 곡조는 물고기가 나와 들었을 터이고308) 長短曲應聽水族글 읽는 소리는 산새 울음과 뒤섞였을 것일세 咿唔聲或雜山禽스스로 즐긴 그 깊은 뜻을 그 누가 알리오 自娛深意誰能識부질없이 거문고와 책을 가지고 찾아보노라 謾向絃篇上面尋 緬想潯陽處士心, 琴書獨抱樂雲林.只求卷裡耽眞味, 不願人間和妙音.長短曲應聽水族, 咿唔聲或雜山禽.自娛深意誰能識? 謾向絃篇上面尋. 거문고와……즐기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친척들과의 정담을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달랜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한 데서 보인다. 《古文眞寶 後集 卷1》 심양(潯陽) 도연명의 고향으로, 그는 팽택 영(彭澤令)의 벼슬을 버리고 심양의 율리(栗里)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운림(雲林) 구름 낀 숲이라는 뜻으로, 은거하는 장소를 비유한다.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 〈도원행(桃源行)〉에 "당시에 산 속 깊이 들어간 것만 기억하노니, 맑은 시내 건너 몇 차례나 운림 속을 찾아갔나.[當時只記入山深, 靑溪幾度到雲林.]"라고 하였다. 장단(長短)의…… 터이고 도연명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물고기가 물속에서 나와 들었을 것이라는 뜻으로,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호파가 거문고를 연주하자 물속 물고기가 나와서 들었고, 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하자 여섯 마리 말이 고개를 치켜들고 들었다.[瓠巴鼓瑟而流魚出聽, 伯牙鼓琴而六馬仰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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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즉흥으로 읊다 卽事 병든 몸이 경물을 보자 감회가 앞서는데 病夫覽物感懷先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니298) 또 일년이 지났네 大火西流又一年늙은 나무엔 가을 매미 울어대니 어찌 그리 쓸쓸한가 老樹殘蟬何蕭索푸른 갈대엔 흰 이슬 맺혀 있으니 더욱 처량하여라 蒼葭白露轉凄然영허299)가 윤달을 만드니 명협300)은 푸른빛이 더해지고 盈虛作閏蓂添碧보름에 밤을 맞이하니 밝은 달은 참으로 둥글도다 三五當宵月正圓맑은 창가에 고요히 앉으매 속된 일이 없으니 靜坐淸窓無俗事문득 입으로 화식을 먹지 못함을 의심하노라301) 却疑口不食人煙 病夫覽物感懷先, 大火西流又一年.老樹殘蟬何蕭索? 蒼葭白露轉凄然.盈虛作閏蓂添碧, 三五當宵月正圓.靜坐淸窓無俗事, 却疑口不食人煙. 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니 음력 7월이 되었음을 말한다.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7월에 대화성이 서쪽으로 흐르거든, 9월에는 옷을 만들어 준다.[七月流火, 九月授衣.]"라고 하였다. 영허(盈虛) 기영(氣盈)과 삭허(朔虛)를 이르는 말로,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의 '기삼백(朞三百)'에 대한 주석에서 "해가 하늘과 만날 적에는 5일과 940분의 235일이 더 많은데 이것을 기영이라 하고, 달이 해와 만날 적에는 5일과 940분의 592일이 적은데 이것을 삭허라 한다. 기영과 삭허를 합쳐서 윤달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명협(蓂莢) 요(堯) 임금 때 섬돌 사이에 났던 상서로운 풀로, 매월 1일부터 15일까지 하루에 한 잎씩 나다가 16일부터는 하루에 한 잎씩 떨어져 그믐이 되면 다 졌으며, 작은달에는 마지막 한 잎이 시들기만 하고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인하여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득……의심하노라 자신이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 신선인가 의심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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