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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甲寅十月二十三日 各處契員與用錢之人 甲寅十月二十三日 發文有司 各處契員與用錢之人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갑인년 10월 23일에 부안의 전주최씨 처암공파계에서 각처의 계원들과 계의 자금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계일을 통보하면서 보낸 회문. 갑인년(甲寅年) 10월 23일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全州崔氏)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에서 각처의 계원들과 계의 자금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계일(契日)이 다음 달 10일로 확정되었다고 통보하면서 보낸 회문(回文)이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석동재각(席洞齋閣)에 참석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회문의 끝 부분에는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성명과 금액(본전)과 아직 갚지 못한 잔금 등이 차례로 적혀 있다. 예컨대 행산(杏山)의 송양호(宋良皓)는 계에서 조(租) 1석 1두 1승 5홉을 빌렸는데, 현재 10두 6승을 갚지 못한 상태이다. 빌린 계의 자금은 전(錢)과 조(租) 또는 도조(賭租)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계원의 거주지는 행산 외에 행하리, 봉두산, 마곡, 구야리, 원재중, 우서리, 모가산, 봉두산, 상리 등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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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 손호풍(孫浩豊)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庚申十月 日 孫浩豊 등 20명 全州崔氏門中 庚申十月 日 孫浩豊 扶安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경신년 10월에 손호풍 등 20명이 옹정사 유지의 소유권 변경과 관련하여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 보낸 통문. 경신년(庚申年) 10월에 손호풍(孫浩豊) 등 20명이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 보낸 통문(通文)으로,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 있었던 옹정사(甕井祠) 유지(遺址)를 최씨문중에서 그들 문중의 단독 소유로 바꾼데 대하여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옹정사는 1694년(숙종 20)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옹암(甕菴) 최생명(崔生命)의 위패만을 봉안하였다. 옹암은 대호군(大護軍) 김당(金璫)의 사위로 처가(妻家)가 있는 부안현에 옮겨와 살면서 전주최씨로서는 부안과 처음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부안 전주최씨의 역사는 옹암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옹정사는 그 뒤 1714년(숙종 40)에 옹암의 손자 최계성(崔繼成)의 위패를 청계사에서 이전 봉안하였다. 도중에 옹정사의 건물이 여러 차례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1778년(정조 2) 옹정사를 중창(重創)하면서 손홍적(孫弘績), 김석량(金錫良), 최명룡(崔命龍) 등을 추배(追配)하였다. 그 뒤 1835년(헌종 원년)에 이르러 최활(崔活), 김단(金湍), 채달주(蔡達周)를 또 추배하였다. 따라서 모두 8명이 이곳 옹정사에 배향되게 되었다. 그러나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옹성사는 훼철되었다. 이 때 8현의 위패를 이곳 유지에 매장하고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매년 3월 14일에 8현의 후손들과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치제(致祭)를 해왔다. 8현 가운데 4명이 전주최씨이며, 이곳 역시 부안 전주최씨의 텃밭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배향된 4성(姓)의 후손들이 골고루 답토(畓土)를 나누고, 단직가(壇直家)를 세우고, 여러 가지 손실 비용을 각자 부담해 왔는데, 이를 무시하고 최씨문중의 단독 소유로 바꾸었으니 이것은 매우 부당하다는게 손호풍 등의 주장이다. 이 통문에 연명한 사람들은 최씨가 아닌 손씨(孫氏), 김씨(金氏), 채씨(蔡氏) 등 3성 출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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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재(石洞齋)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丙戌正月 席洞齋 丙戌正月 席洞齋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46년 부안 전주최씨 석동재 통문 1946년 1월에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석동재(席洞齋) 도유사(都有司) 최주홍(崔周洪)이 보낸 통문(通文)이다. 족보 발행을 위해 2월 30일까지 명단을 보내 달라고 하였으며 임원과 규례를 적어 보냈는데 족보 1질은 100원, 수단금은 관자(冠者) 10원 아이 5원, 수단소는 석제(石堤)와 백석리(白石里) 2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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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通諭事夫有姓之修譜亶出於昭系收族之原義而惟我提學公派辛亥之家乘譜頗多漏落之人甲子之大同譜未得家家有冊是誠諸族之所同慨歎而且歲紀已週三十滄桑屢回百六死者墓木已拱生者童已抱子矣修譜亦云且晩咸願續修維新得以家家有冊其於昭先敦族之義庶有考據之無弊幸甚云故今於寅會僉議齊發玆定任員與規例略列如左輪仰惟願 僉族斯速收單今二月晦日內無漏納單于席洞齋爛議開板事丙戌正月 日 席洞齋 都有司崔周洪規例一譜冊一秩에百円으로磨練事一單金은冠에十円童에五円으로磨練事一收單時譜冊申込하되冊価半額과單金全部를交附事一納單期限은二月晦日內完定事一收單有司은譜廳任員과同一報酬事一收單所은石堤白石里兩處로定홈譜所任員編輯 崔光煥 崔秉澔校正 崔斗洪 崔基洪掌務 崔春洪 崔在洪監印 崔玉煥 崔墀洪正書 崔敏洪 崔秉甲 崔秉炫收單有司司成公派 處士公派 檢閱公派--崔秉淵處庵公派 崔東周 崔相烈參奉公派 崔秉浩 崔弘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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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흥학계(興學稧)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戊午十一月二日 全州崔氏興學稧 戊午十一月二日 1858 興學稧 全州崔氏一族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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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별청계(別廳稧)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庚子十月初二日 有司 崔 庚子十月初二日 1840 崔 別廳稧員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40년(헌종 6)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문중에서 종원들에게 보낸 회문 1840년(헌종 6) 11월 2일 부안(扶安)에 거주하는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중에서 종원들에게 보낸 회문이다. 문계강신(門稧講信) 일자(日字)를 통보하고, 전유사(錢有司)들의 회계(會計)를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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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파수계(參奉公派脩稧)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辰十月十八日 有司 崔 壬辰十月十八日 1832 崔 參奉公派脩稧員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문중에서 종원들에게 보낸 1832년(순조 32) 회문 1832년(순조 32) 10월 18일, 부안(扶安)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참봉공파(叅奉公派) 문중에서 종원(宗員)들에게 보낸 회문이다. 계회일자(稧會日字)를 통보하고, 전유사(錢有司)들의 회계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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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문계(門稧)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癸丑十月初二日 癸丑十月初二日 1853 全州崔氏門中 全州崔氏門稧員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문중에서 종원들에게 보낸 1853년(철종 4) 회문 1853년(철종 4) 10월 2일, 부안(扶安)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문중에서 종원(宗員)들에게 보낸 회문이다. 석동재(席洞齋)에서의 계회일자(稧會日字)를 통보하고, 전유사(錢有司)와의 회계(會計)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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邑先候三巖公余之從叔也來治玆土政通廢興建一小亭於堂之後一㢧之地扁其楣曰西林亭公退之暇與文人才士逍遙於斯亭山林泉石爲太守之樂而遂成稧帖焉余出宰湖西纔三載又移治扶風慕公之蹟溯公之世今去公之時已四十禩餘聞郡人所傳盖記得當時事遂陟西林園亭已頹久只見瓦礫滿址數尺荒碑凡然堅立乎其間撫往陳跡殊極愴感乃命工匠經始重建告功遲速姑難預期亭旣成則不可無稧旣稧則不可無財舊帖中題名君子未知幾存幾沒而其若子若孫有能繼述先志修單收入量宜出力合聚存殖每當仲春仲秋齊會登亭以備觴詠之資以舒幽鬱之懷則庶可續先輩盛擧豈不猗歟美哉玆將輪通幸望 亮悉 收單以今晦內收入次丙申八月日 本郡守趙[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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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중(崔宗中) 서간(書簡)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席洞 崔宗中 席洞 崔宗中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 석동 앞으로 보낸 간찰의 피봉. 부안 석동의 최종중(崔宗中) 앞으로 보낸 간찰(簡札) 피봉(皮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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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문중(崔氏門中) 서간(書簡)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席洞 崔氏門中 席洞 崔氏門中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 석동의 최씨문중 앞으로 보낸 간찰의 피봉. 부안 석동의 최씨문중(崔氏門中) 앞으로 보낸 간찰(簡札)의 피봉(皮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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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53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흥학계(興學稧)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癸丑九月初十日 癸丑九月初十日 1853 全州崔氏門中 興學稧員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문중에서 종원들에게 보낸 1853년(철종 4) 회문 1853년(철종 4) 9월 10일, 부안(扶安)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문중에서 종원(宗員)들에게 보낸 회문이다. 석동재(席洞齋)에서 있을 흥학계(興學稧) 계회일자(稧會日字)를 통보하고, 전유사(錢有司)와의 회계(會計)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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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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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철수(李喆壽)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지세(地稅)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十七年 二月 二十八日 南原郡巳梅面會計員 崔成海 李喆壽 昭和十七年 二月 二十八日 南原郡巳梅面會計員 崔成海 李喆壽 전북 남원시 1.2*1.2 1개(적색, 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2년에 이철수(李喆壽)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 1942년에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 신파리(新波里)에 사는 이철수(李喆壽)가 남원군(南原郡) 보절면(寶節面)에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領收證)이다. 이철수는 1941년도 2기분 지세(地稅)(국세(國稅))로 2원 40전, 지세 부가세(도세(道稅))로 1원 85전, 지세부가세(면세(面稅))로 1원 72전 등 모두 5원 97전을 납부하였다. 당시 보절면에서 해당 업무를 담당한 회계원은 이본광기(李本光器)로, 일제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때문에 성씨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지세는 조선왕조 때에도 국가 세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세 수입의 원천이었다. 일제는 지세의 원천인 토지제도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여, 1912년부터 토지소유권을 명확히 규정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며, 1914년 '지세령'을 공포해 세율을 인상했다.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종결됨에 따라 토지대장 및 지적도가 정비되자 지세령을 개정하여 과세표준과 세율을 개정하는 등 세 단계를 거쳐 조세제도를 구축해 나갔다. 제1단계는 과세대장에서 누락되어 있던 탈세자를 탖아내 과세대상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05년 등록된 토지면적이 약 96만결이던 것이 1910년말에는 약 102만결로 늘었다. 특히 오랫동안 지역토호들에 의해 자행되어온 은결(隱結) 등 지세 부과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토지들에 대한 과세를 정비하자 세수가 크게 늘었다. 그러 그 과정에서 농민들의 상당수는 가지고 있던 전답의 소유권을 박탈당하였다. 제2단계는 1914년 3월에 지세의 부과, 면세 및 징수에 관한 기본법인 지세령 및 시가지세령을 제정 공포한 것이었다. 지세령의 개정으로 세율이 크게 오르자 세수도 크게 늘었다. 예컨대 1913년도 지세수입이 647만원이던 것이 1914년에는 945만원으로 47.4%나 증가하였다. 제3단계는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고 1918년 세제 정리를 통해 지세에 대한 과세율을 개정한 것이었다. 종래의 과세면적 단위인 '결(結)'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 수익에 기초하여 토지대장에 등록된 '지가(地價)'를 과세표준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물납제에서 금납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모두 마무리되면서 1920년에는 지세 수입이 1910년에 비해 2배 가량 증가했다. 당시 총 조세 수입 가운데 지세가 25%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으며 일제의 조세수입은 연평균 15.9%라는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일제는 이렇게 확보된 지세 수입을 통해 총독부의 예산을 확충해 식민지 지배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많은 우리 농민들은 지주에게 유리한 기한부계약제 소작농 혹은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만주·연해주·일본 등지로 이주했다.(이재은, ?일제강점기 조선지방재정사 연구?, 한국지방세연구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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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函伏悉而宋子大全重刊之役窃爲僉位閤下獻賀萬萬師門大事之地豈敢辭免者乎予出紙三塊鄙門中協議後伏呈爲計耳癸丑八月四日 崔炳郁(印)崔光煥(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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