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년 손호풍(孫浩豊)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庚申十月 日 孫浩豊 등 20명 全州崔氏門中 庚申十月 日 孫浩豊 扶安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경신년 10월에 손호풍 등 20명이 옹정사 유지의 소유권 변경과 관련하여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 보낸 통문. 경신년(庚申年) 10월에 손호풍(孫浩豊) 등 20명이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 보낸 통문(通文)으로,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 있었던 옹정사(甕井祠) 유지(遺址)를 최씨문중에서 그들 문중의 단독 소유로 바꾼데 대하여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옹정사는 1694년(숙종 20)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옹암(甕菴) 최생명(崔生命)의 위패만을 봉안하였다. 옹암은 대호군(大護軍) 김당(金璫)의 사위로 처가(妻家)가 있는 부안현에 옮겨와 살면서 전주최씨로서는 부안과 처음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부안 전주최씨의 역사는 옹암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옹정사는 그 뒤 1714년(숙종 40)에 옹암의 손자 최계성(崔繼成)의 위패를 청계사에서 이전 봉안하였다. 도중에 옹정사의 건물이 여러 차례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1778년(정조 2) 옹정사를 중창(重創)하면서 손홍적(孫弘績), 김석량(金錫良), 최명룡(崔命龍) 등을 추배(追配)하였다. 그 뒤 1835년(헌종 원년)에 이르러 최활(崔活), 김단(金湍), 채달주(蔡達周)를 또 추배하였다. 따라서 모두 8명이 이곳 옹정사에 배향되게 되었다. 그러나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옹성사는 훼철되었다. 이 때 8현의 위패를 이곳 유지에 매장하고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매년 3월 14일에 8현의 후손들과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치제(致祭)를 해왔다. 8현 가운데 4명이 전주최씨이며, 이곳 역시 부안 전주최씨의 텃밭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배향된 4성(姓)의 후손들이 골고루 답토(畓土)를 나누고, 단직가(壇直家)를 세우고, 여러 가지 손실 비용을 각자 부담해 왔는데, 이를 무시하고 최씨문중의 단독 소유로 바꾸었으니 이것은 매우 부당하다는게 손호풍 등의 주장이다. 이 통문에 연명한 사람들은 최씨가 아닌 손씨(孫氏), 김씨(金氏), 채씨(蔡氏) 등 3성 출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