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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벗들과 두승산423)에 오르다 同諸益上斗升山 산은 절로 푸른데 사람은 백발이 되어 山自蒼蒼人白頭납극424) 다섯 번 신으니 세월도 흘러갔네 五穿蠟屐歲華流중간에 오랜 세월 지나 뽕밭이 바다 되니 中經浩劫桑田海우선 맘껏 노닐고자 중들의 누각을 빌렸네 且借遨遊釋子樓옛날에 한 말 한 되의 술을 누가 마셨는가 昔日斗升誰酌酒삼신산이 지척이니 배를 번거롭게 찾지 않네 三神咫尺不煩舟하늘가에 저녁 구름이 다시 만나듯이 暮雲天際還相合만남과 이별 부질없이 근심할 것 없네 聚散無將作謾愁 山自蒼蒼人白頭, 五穿蠟屐歲華流.中經浩劫桑田海, 且借遨遊釋子樓.昔日斗升誰酌酒? 三神咫尺不煩舟.暮雲天際還相合, 聚散無將作謾愁. 두승산(斗升山) 전라도 고부군(古阜郡)에 있는 산이다. 납극(蠟屐) 밀랍을 발라서 반질반질하게 한 나막신을 이르는데, 남조 송(宋)나라 때 사령운(謝靈運)이 산에 오를 적에는 반드시 나막신을 신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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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에 가뭄을 걱정하며 暮春憫旱 농사를 점칠 땐 먼저 맥우425)를 보는데 歲事占看雨麥先어찌하여 봄철 내내 큰 가뭄이 드는가 如何亢旱一春全전답의 이앙 조금 늦어져 껍질 더디 터지고 田秧差晩遲開甲길가 풀도 자라기 어려워 절로 털방석 되네 路草難長自成氈구름 무지개 보며 비 내려주길 얼마나 생각했는데 幾望雲霓思惠霈또 들으니 책력에도 흉년에 속한다 하네 又聞星曆屬災年겸하여 약육강식이 만연한 이 시대에 兼玆弱肉强呑日백성들을 보니 또 동병상련의 마음이 드네 同病蒼生亦可憐 歲事占看雨麥先, 如何亢旱一春全?田秧差晩遲開甲, 路草難長自成氈.幾望雲霓思惠霈, 又聞星曆屬災年.兼玆弱肉强呑日, 同病蒼生亦可憐. 맥우(麥雨) 보리가 익을 때 내리는 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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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망실196)에 제하다. 마땅히 갑신년(1944) 조에 있어야 한다. 題不忘室【當在甲申年條中】 구렁에 버려짐과 머리 잃음을 잊지 않는다고197) 不忘在壑與喪元공자와 맹자198)께서 분명한 격언을 남기셨다오 鄒魯分明有法言천사라도 거들떠보지 않음은 의가 아니기 때문이요199) 千駟寧觀非義地만인이라도 내 가서 대적함은200) 지강의 경지201)에 들어서라네 萬人吾往至剛門서책은 고기처럼 좋아해야 하니202) 세 시렁에 가득 채우고 書宜嗜豢盈三架소나무는 양식으로 삼을 만하니203) 후원에 빼곡히 심는다오 松可爲粮滿後園불망 두 자로 편액한 걸 그대는 비웃지 마소 二字扁楣君莫笑옛사람을 상론할204) 후생이 절로 있을 터이니 尙論自有後生存 不忘在壑與喪元, 鄒魯分明有法言.千駟寧觀非義地, 萬人吾往至剛門書宜嗜豢盈三架, 松可爲粮滿後園.二字扁楣君莫笑, 尙論自有後生存. 불망실(不忘室) 후창 소유의 토실(土室) 이름이다. 후창은 갑신년인 1944년에 〈불망실기(不忘室記)〉를 지었는데, 그 기문에 당시 일본의 폭정과 수탈이 극에 달해 의리상 욕을 받을 수 없기에 토실에 몸을 숨겨 처음에는 솔잎과 마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마지막에는 구렁에 들어가 죽겠다고 하였다. 《後滄集 卷21 不忘室記》 구렁에……않는다고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맹자가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할 때 우인(虞人)을 정(旌)으로 불렀으나 우인이 오지 않자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孔子)께서는 '지사(志士)는 자신의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수도 있음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죽음을 당해 머리가 잘릴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칭찬하셨으니,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취하셨는가? 합당한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은 것을 취하신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원문의 추(鄒)와 노(魯)는 모두 춘추 시대의 국명(國名)으로,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맹자는 추나라에서 태어났으므로 공자와 맹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우인(虞人)을 칭찬하는 공자의 말을 맹자가 인용하였으므로 두 사람을 모두 언급한 것이다. 천사(千駟)라도……때문이요 천사는 4천 필의 말을 이른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맹자가 이윤(伊尹)의 마음가짐을 설명하면서 "의롭지 못하거나 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천하를 그에게 녹봉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4천 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不顧也, 繫馬千駟, 不視也.]"라고 하였는데, 이를 차용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인(萬人)이라도……대적함은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지 못하면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내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지강(至剛)의 경지 원문의 강문(剛門)은 지극히 굳센 경지를 비유한 말로,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 "그 기운 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함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이 기가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된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고기처럼 좋아해야 하니 원문의 환(豢)은 추환(芻豢)의 줄임말로, 초식(草食) 가축과 잡식(雜食) 가축을 뜻하는데, 맛있는 고기 음식을 비유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소나무는……만하니 후창의 〈불망실기(不忘室記)〉에 토실(土室)에 몸을 숨겨 처음에는 솔잎과 마를 채취하여 연명한다고 하였는데, 이 솔잎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後滄集 卷21》 상론(尙論)할 옛사람의 일을 평론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훌륭한 선비라야 천하의 훌륭한 선비를 벗할 수 있다. 천하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여 또다시 위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天下之善士, 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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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에 만당형장190)을 생각하며 3수 病中憶晩棠兄丈【三首】 이년이 지나도록 당형을 보지 못했는데 不見棠兄再過冬나의 상태로 당형을 미루어 알 수 있다네 以吾狀態可推公얼마나 머리가 센지는 다소 다를 터이고 淺深鶴髮差分異전후로 형제 잃은 슬픔191)은 일체 똑같으리라 先後鴒悲一體同용악에 힘써 달려갔으나 미치지 못하였고 龍岳專趨曾未及웅진에 들러 찾아뵀으나 또 허사가 되었다오 熊津歷拜又成空갑자기 몸져누워 장차 벙어리가 되려 하니 忽然臥病將成啞서로 만난들 어찌 속마음을 다 말할 수 있으랴 相對何能說盡衷사십 년 동안 기나긴 한겨울로 괴로웠는데 四十年間困大冬봄이 오자 비로소 조화옹을 보는구나 春來始見化翁公원수를 섬멸함은 예전 만남 뒤에 일찌감치 있었고 殲讐早在前逢後술을 따라 준 건 다 같이 축하한 일보다 오히려 늦었다오 酌酒猶遲一賀同서인에 대한 근심이 비록 눈에 가득하지만 憂在西人雖溢目태극기는 높이 걸려 이미 창공에 펄럭이누나 旗高太極已翻空세속에 매인 몸인지라 무궁한 설이 있으니 世途身分無窮說행여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소회를 토로하리라 倘有其時一吐衷추억하건대 유조192)의 해가 든 봄과 겨울에 憶曾柔兆歲春冬양부193)의 시론을 우리 당형에게 들었다오 兩部詩論受我公활수에 오르는 건194) 기약하지 못하거니와 活水登臨不期會천태에서 풍영하는 건195) 그 언제나 함께하랴 天台風詠幾時同궁한 길에 낙척하니 일평생의 한이요 窮途落拓平生恨늘그막에 처량하니 만사가 부질없어라 暮境凄涼萬事空당시에 기대한 뜻이 진중하였는데 珍重當年期待意지금 유복 차림이 진심 아닌 게 부끄럽구나 至今儒服愧非衷 不見棠兄再過冬, 以吾狀態可推公.淺深鶴髮差分異, 先後鴒悲一體同.龍岳專趨曾未及, 熊津歷拜又成空忽然臥病將成啞, 相對何能說盡衷?四十年間困大冬, 春來始見化翁公.殲讐早在前逢後, 酌酒猶遲一賀同.憂在西人雖溢目, 旗高太極已翻空.世途身分無窮說, 倘有其時一吐衷.憶曾柔兆歲春冬, 兩部詩論受我公.活水登臨不期會, 天台風詠幾時同?窮途落拓平生恨, 暮境凄涼萬事空.珍重當年期待意, 至今儒服愧非衷. 만당형장(晩棠兄丈) 김희현(金熺鉉, 1872~1951)으로, 만당은 그의 호이며,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정오(定五)이다. 후창의 외종형(外從兄)이다. 후창이 일찍이 그를 위해 〈만당시고서(晩棠詩稿序)〉를 썼다. 《後滄集 卷20 晩棠詩稿序》 형제 잃은 슬픔 원문의 영비(鴒悲)를 번역한 것이다. 영(鴒)은 척령(鶺鴒)의 준말로 할미새를 뜻하는데, 흔히 형제 또는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할미새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을 당하였도다. 매양 좋은 벗이 있으나, 길이 탄식할 뿐이니라.[脊令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조(柔兆) 고갑자(古甲子)로 천간(天干) 가운데 병(丙)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병술년(1946)을 가리키는 듯하다. 양부(兩部) 양부고취(兩部鼓吹)와 같은 말로, 앉아서 음악을 연주하는 부대(部隊)와 서서 음악을 연주하는 부대가 함께 연주하는 매우 기세가 성대한 음악을 뜻한다. 여기서는 음악 용어를 시의 이론에 대입하여 말한 듯하다. 활수(活水)에 오르는 건 활수는 문맥으로 볼 때 높은 정자나 누대의 이름을 가리키는 듯한데, 자세하지 않다. 활수라는 말은 남송(南宋) 때 주희(朱熹)의 〈관서유감이수(觀書有感)〉 시에 "묻노니 너는 어찌 이렇게 맑을 수가 있느뇨, 근원에서 흐르는 물이 내려오기 때문이겠지.[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고 한 시구에서 유래하였다. 《晦庵集 卷2》 천태(天台)에서 풍영(風詠)하는 건 천태는 정읍 이평면 창동리에 있는 천태산(天台山)을 가리킨다. 풍영은 바람을 쐬며 시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즐기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기를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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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윤봉길222)행 尹義士奉吉行 윤봉길이여 진정한 의사로다 尹奉吉眞義士당시 빼어난 기운 타고난 건223) 우연이 아니로세 岳降當年匪偶爾한 때의 행적은 천년토록 길이 빛나고 一時之蹟光千祀칠 척의 장신은 온 천하224)를 구제하였네 七尺之身濟九有약관의 나이에 일찍부터 명성을 떨치려 했으니 弱齡早欲立大名충과 효가 지극하다고 사우들에게 알려졌다오 忠孝二字聞師友붓을 잡으면 스스로 면려하는 시를 막힘없이 썼으니 筆下滾滾自勖詩지금까지도 사람의 기운을 분발하게 한다오 至今令人氣蚴蟉보잘것없고 누추한225) 시목동에서 佌佌蓛蓛柹木洞산풍의 간고226)로써 부모를 봉양하였네 山風之幹養父母효를 옮겨 충을 하려 했지만227) 나라 없음을 어이하랴 移孝爲忠柰無國우리나라가 협소하여 대바구니 속에 있는 것 같았네 東土窄窄如在簍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려가 새 정부에 찾아가니228) 出門西走新政府백범 노인229)을 처음 만나면서 마치 구면처럼 여겼다네 初面如舊白凡叟한 조각 간담을 서로 활짝 터놓으면서 一片肝膽相照地영구의 쉽고 어려운 일을 각자 취하였네230) 嬰臼難易各自取중국과 우리나라의 형세는 순치보거231)와 같으니 唇齒輔車中東勢고금의 논의가 과연 다름이 없겠는가 古今之論無異否팔월 상해에서 일왕을 위한 잔치가 있었는데232) 八月上海島酋宴대륙을 삼킬 듯이 기세가 몹시 등등하였다네 垂呑大陸勢甚阜계엄 상태가 서릿발 같이 삼엄하여 戒嚴肅肅如霜雪나는 새도 감히 그 뒤를 지나가지 못했는데 飛鳥莫敢掠其後편한 걸음으로 무인지경을 가는 듯이 했으니 平步躡去如無人온갖 신령이 오르내리며 좌우를 호위하였다오 百靈閃閃擁左右품속에 숨긴 한 덩이의 물건은 무엇인가 懷中一塊是何物삽시간에 천둥 벼락 치는 굉음이 울렸네 頃刻雷霆生擊掊한 사람의 순국에 열 명 대장을 모두 죽게 하고 一斃斃盡十大將가련하게도 나머지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오 可憐餘物作炙灸스스로 성명을 외치고서 춤추고 환호하며 自唱姓名舞且呼대한독립만세를 오래도록 부르짖었도다 大韓獨立萬歲久어찌 자신이 쓸 총포가 하나도 없으랴마는 那無一礮自家用웅어에 대한 구분233)이 진작부터 명백하였다네 熊魚之分早判剖윤봉길이여 윤봉길이여 尹奉吉尹奉吉의사라는 칭호가 만인의 입에서 앞다퉈 나왔도다 義士爭稱萬人口진심으로 은혜를 베푸니 민국을 찬란히 빛내고 中心載恩華民國덕을 좋아하는 자들이 함께 도우니 유럽까지 아울렀네 好德同贊幷巴歐그 큰 공로가 귀결된 바를 살펴보건대 淸看大功歸宿處조국의 온 지역을 한 비로 깨끗이 청소함일세 祖國之周掃一帚조국을 다시 얻었으니 어찌 충이 아니겠는가 復得祖國豈非忠이름 날려 부모를 드러냈으니234) 효 역시 성대하도다 掦名顯親孝亦厚예산은 높고 덕산은 무거우니 禮山高兮德山重예산과 덕산은 충효의 고을이로세235) 禮德之山忠孝部윤봉길이여 진정한 의사로다 尹奉吉眞義士몸은 떠났어도 의는 남아 있어 길이 불후하리라 身去義存長不朽 尹奉吉眞義士! 岳降當年匪偶爾.一時之蹟光千祀, 七尺之身濟九有.弱齡早欲立大名, 忠孝二字聞師友.筆下滾滾自勖詩, 至今令人氣蚴蟉.佌佌蓛蓛柹木洞, 山風之幹養父母.移孝爲忠柰無國? 東土窄窄如在簍.出門西走新政府, 初面如舊白凡叟.一片肝膽相照地, 嬰臼難易各自取.唇齒輔車中東勢, 古今之論無異否?八月上海島酋宴, 垂呑大陸勢甚阜.戒嚴肅肅如霜雪, 飛鳥莫敢掠其後.平步躡去如無人, 百靈閃閃擁左右.懷中一塊是何物? 頃刻雷霆生擊掊.一斃斃盡十大將, 可憐餘物作炙灸.自唱姓名舞且呼, 大韓獨立萬歲久.那無一礮自家用? 熊魚之分早判剖.尹奉吉尹奉吉! 義士爭稱萬人口.中心載恩華民國, 好德同贊幷巴歐.淸看大功歸宿處, 祖國之周掃一帚.復得祖國豈非忠? 掦名顯親孝亦厚.禮山高兮德山重, 禮德之山忠孝部.尹奉吉眞義士! 身去義存長不朽.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이다.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신이다.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김원상(金元祥)이다. 1932년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왕(日王)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감행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으로 호송되어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12월 19일에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빼어난 기운 타고난 건 원문의 강악(降嶽)은 산악의 신령한 기운을 받아 훌륭한 인물이 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디높은 산악이, 우뚝 하늘에 닿았도다. 산악에서 신령한 기운을 내려, 보후(甫侯)와 신백(申伯)을 내셨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온 천하 원문의 구유(九有)는 구주(九州)와 같은 말로, 천하 또는 중국 전체를 뜻하는 말이다. 보잘것없고 누추한 원문의 차차(佌佌)는 작은 모양이고, 속속(蔌蔌)은 가난하고 누추한 모양을 형용한 말로, 《시경》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보잘것없는 소인들은 저 집을 소유하며, 누추한 자들은 곡식을 소유한다.[佌佌彼有屋, 蔌蔌方有穀.]"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산풍(山風)의 간고(幹蠱) 산풍은 산 아래에 바람이 있는 고괘(蠱卦)를 가리킨다. 간고는 《주역》 〈고괘(蠱卦)〉에 "초육(初六)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집안일을 주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효(孝)를……했지만 원문의 이효위충(移孝爲忠)은 《효경(孝經)》 〈광양명(廣揚名)〉에 "군자가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기 때문에 충성을 임금에게 미루어 옮길 수 있다.[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문을……찾아가니 새 정부는 당시 상해(上海)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가리킨다. 윤봉길은 23세가 되는 1930년 3월에 만주(滿洲)로 망명하였고, 1931년 8월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갔다가 그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백범(白凡) 노인 김구(金九, 1876~1949)로, 백범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호는 백범ㆍ연하(蓮下)이다. 삼일 운동 후 중국 상해(上海)의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고, 1928년에 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1932년 1월의 이봉창(李奉昌)의 의거와 4월의 윤봉길(尹奉吉)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영구(嬰臼)의……취하였네 영구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신 조삭(趙朔)의 친구 정영(程嬰)과 문객인 공손저구(公孫杵臼)를 가리킨다. 진나라 경공(景公) 3년에 대부(大夫) 도안가(屠岸賈)가 조삭의 일족(一族)을 멸족시키자, 공손저구가 정영과 함께 조삭이 남긴 고아(孤兒)를 세울 일을 논의한 끝에, 정영에게는 조삭의 진짜 고아를 보호하게 하고, 공손저구 자신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데리고 거짓 조삭의 아이라고 위장하여 산중에 숨어 있으면서 정영에게 자신을 도안가에게 밀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손저구 자신은 가짜 아이와 함께 도안가에게 잡혀 살해당하고, 조삭의 진짜 고아는 정영에 의해 무난히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경공 15년에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조삭의 고아인 조무(趙武)를 조씨(趙氏)의 후계자로 삼아 예전의 지위와 땅을 회복하게 하고 동시에 조삭의 원수를 갚게 하였다. 정영은 이후 조무(趙武)가 관례식을 올리던 날에 조삭과 공산저구에게 일을 성공함을 보고하기 위해 황천으로 가야 한다고 하며 조무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자살하였다. '쉽고 어려운 일'이란 공손저구가 정영과 처음 논의할 때 죽는 일은 쉽고 조삭의 고아를 세우는 일은 어렵다고 하면서, 정영에게는 고아를 세우는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하고 공손저구 자신은 죽는 쉬운 일을 하여 먼저 죽겠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윤봉길은 공손저구의 쉬운 일을, 김구는 정영의 어려운 일을 각자 취해 행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 순치보거(脣齒輔車) 순치는 입술과 이를 말하고, 보거는 광대뼈와 잇몸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피차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여 서로 의지하는 사물을 비유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5년 조에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輔車相依, 脣亡齒寒.]"라고 하였다. 팔월……있었는데 1932년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日王)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행사를 두고 말한 것이다. 원문의 팔월(八月)은 사월(四月)이 되어야 하는데, 후창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웅어(熊魚)에 대한 구분 곰 발바닥 음식과 물고기 음식 가운데 택일하라면 물고기보다는 곰발바닥을 택한다는 말로, 생사(生死)의 선택에 있어 구차히 살기보다 떳떳하게 의리(義理)를 따라 죽는 것을 택하는 비유로 쓰인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어물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름……드러냈으니 《효경》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몸과 사체와 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침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예산……고을이로세 윤봉길이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시량리((柿梁里)에서 태어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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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2) 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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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 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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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헌에게 보냄 寄憲孫 네가 특별히 방종하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습관이 없고 집안을 잘 이끌고 애비의 뜻을 잇는 일194)에 마음을 두는 것을 항상 보게 되니, 이 때문에 내가 만년에 신세가 조금 안정되고 집안은 조금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내가 너에게 위안을 받으니, 그 마음이 어떻겠느냐. 사방의 친구들도 또한 이따금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다. 다만 너는 평소 용모와 안색의 사이에 온화한 기운이 적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고 일에 대응할 때 온당하지 못한 단서가 없지 않으니, 이것이 너의 단점이다. 이미 그 단점을 알았으니, 어찌 온 힘을 다해 맹렬하게 살피지 않으랴. 《시경》에서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이여, 오직 덕의 기반이네."195)라 하였으니, 대저 온화함이란 천지가 사물을 많은 마음이요, 우리 사람이 마음에 지녀야할 기초이다. 천하의 물건은 양을 향하고 음을 등지며 온화함을 좋아하고 썰렁함을 싫어하지 않음이 없는데, 더구나 사람 마음의 향배는 어찌 이에서 벗어남이 있겠느냐. 지금부터 마음과 뼈에 새겨서 냉정하고 차가운 낯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말고 절박한 말은 입에서 내지 말며, 틈틈이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학문을 배양하며 또한 나의 허물을 말해 주고 나의 부족한 점을 충고해 주는 많은 도움을 줄 정직한 벗과 교유한다면, 이것이 네 한 몸의 복이며 한 집안의 경사가 될 것이니,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라. 옛날 여동래는 젊어서 많이 격노하였다. 하루는 《논어》의 "자신에게 책망을 두터이 하고 남에게 책망을 가볍게 한다."는 구절을 읽고 나서는 죽을 때까지 격노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기질을 변화하는 방법이다.196) 너 또한 동래 선생처럼 기질을 변화해야 한다. 每見汝別無放逸浮浪之習。而留心於克家幹蠱之業。此我於晩年。身勢稍爲安帖。家容稍爲安集也。吾之所以慰望於汝者。其心爲何如。而四方知舊亦不無種種稱道者矣。但汝平日容色之間。少溫和之氣。是以接人應物。或不無未穩之端。此汝之所短也。旣知所短。豈不十分猛省乎。詩曰。溫溫恭人。惟德之基。夫溫溫者。天地生物之心。而吾人存心之基也。天下之物。莫不向陽而背陰。好溫而惡寒。況人情向背。豈有外於此乎。自今以往。銘心刻骨。冷涼之色。勿形於顔。迫切之言。勿出於口。間間讀書玩理以培養之。又從直友强輔。能言吾過。能攻吾闕者。與之遊逐。此汝一身之福。一家之慶也。千萬勉勉。昔呂東萊。少多暴怒。一日讀論語躬自厚而薄責於人之語。終身不暴怒。此是變化氣質法。汝亦變化質氣。如東萊先生也。 애비의 뜻을 잇는 일 원문의 '간고(幹蠱)'는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되리라.〔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온화하고……기반이네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동래는……방법이다 여조겸이 젊었을 때에 기질이 거칠고 포악하여 밥상이 맘에 들지 않으면 기물을 부수곤 하였다. 뒷날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한가할 때에 《논어》를 읽었는데, 〈위령공(衛靈公)〉의 "자신의 잘못은 혹독하게 꾸짖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이해해 주도록 노력하면 다른 사람의 원망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크게 깨달아 그 뒤로는 갑자기 성내는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 《心經 卷1 損大象懲忿窒慾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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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중81)에 대한 제문 祭朴學中文 하늘이 현철한 분 낸 것은 장차 큰일을 함이 있게 하기 위한 까닭인데 이에 그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그 행하는 것을 막히게 하여 혹 그 장수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데 이르니, 조물주는 여기에 그 어떤 마음을 쓰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어리고 장성할 때 효도하고 공손하며 늙어서 예를 좋아하였으니, 행실은 옥루(屋漏)82)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고 학문은 고금을 종합할 수 있으며, 인(仁)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만물에 은택을 끼칠 수 있고, 지(智)는 일을 도모하고 계책을 헤아릴 수 있으며, 곧으면서도 남과 절교하지 않고 화합하면서도 남과 얽매지 않는 것은 형이 거의 가까웠다고 하겠습니다. 오직 이 마경(馬卿)의 병83)과 현안(玄晏)의 질84)이 계속 이어져 남아 있어 일어날 수 있는 날이 없어, 신음 속에 세월을 보낸 것은 겨우 요절을 면하는데 이르렀고 그 건강했던 날을 찾아보면 또 삼분의 일이 되지 못하니, 어찌 덕은 넉넉하고 명에는 곤액을 당함이 이와 같습니까.오호라! 한 방에서 문을 닫은 채 고요히 지내며 병을 요양하여 사려는 점점 끊어지고 기욕은 점점 담박해져 본원의 자리에 조용하고 연구 탐색하는 즈음에 침잠하여 천하의 의리를 열람하고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을 알았던 것은 애초에 병을 요양하는 가운데로부터 터득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혹 하늘의 뜻은 이런 질병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무너진 풍속의 도도한 가운데 섞이지 않고 사도(斯道)에 힘을 다할 수 있게 한 것이라면, 어찌 학문이 진보함에 병 또한 심해져 이런 지경에 이를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오호라! 선왕의 전례(典禮)가 하루아침에 쓸어버린 듯 없어져 시상(時象)과 풍색(風色)은 극히 헤아리기 어려운데, 이에 능히 초연(超然)히 먼저 가서 숭정(崇禎)의 유민85)과 우리나라[小華]의 완인(完人)이 되는 것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또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효성으로 편모를 모시면서 봉양을 마치지 못하였고 여러 아들에게 공부를 권면하여 학업을 마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노형의 눈은 생각건대 응당 지하에서 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완인이 되었는데 또 완전한 복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여러 아들이 어질고 효도하니 그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소원을 족히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형께서는 마음 놓고 어두운 지하에서 걱정하지 마소서.아우는 부로를 잃은 외로운 처지에 쓸쓸히 지내고 있어 여생이 근심스러웠는데 중년 이후로는 오직 형에게 의지하였습니다. 경인년(1890, 고종27)에 식구들을 데리고 가까이 가서 살게 되었는데 형은 마침 병들었고, 지금 같은 마을에 와서 머물고 있는데 형은 또 돌아가셨습니다. 애달픈 나의 박한 운명은 단지 붕우와 지내는 한 즐거움이 있었는데 또한 능히 그 끝을 보장하지 못하단 말입니까. 형과 작별한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사이 세월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험한 길이 앞에 있는데 맹인은 지팡이를 잃고 풍파가 끝이 없는데 외로운 배는 키를 잃었으니, 무엇으로 기대하고 면려하여 훗날 지하에서 보고할 것으로 삼겠습니까. 天生賢哲。將以有爲也。而乃拂欝其心。室塞其行。以至或不得其壽焉。造物於此。未知其何所用心耶。幼壯孝弟。老而好禮。行可以不愧屋漏。學可以經緯古今。仁可以利人澤物。智可以圖事揆策。貞而不絶於人。和而不泥於物者。兄其庶幾焉。惟是馬卿之病。玄晏之疾。沈綿彌留。無日可起。其所以捱過得呻吟中光陰者。僅至免夭。而求其康適之日。則又不得爲三之一矣。何其優於德而厄於命若是耶。嗚呼。杜門一室。靜居養病。思慮漸熄。嗜欲漸淡。從容於本源之地。沈潛於硏索之際。閱天下之義理。會天下之至樂者。未始不自養病中得來。或者天意降此疚疾。使之不雜於頹俗滔滔之中。而得以盡力乎斯道也。豈知學進而病亦進以至於此耶。嗚乎。先王典禮。一朝掃如。時象風色。極其叵測。乃能超然先逝。不失爲崇禎之遺民。小華之完人者。又安知非天意耶。孝奉偏闈。未得終養。勉課諸郞。未見卒業。老兄之目。想應不暝於地下矣。然旣爲完人。又求完福。其不難乎。況諸郞賢孝。足以了厥考未了之願。願兄釋然無虞於冥冥之中也。弟孤露離索。餘生惸惸。中年以來。所賴惟兄。庚寅之歲。絜家就近。而兄適病焉。今也來留同塾。而兄又逝焉。哀此薄命。只有朋友一樂。而亦不能保其終耶。別兄以後。屬纊以前。未知其間日月幾何。而將誰賴依。險路在前而盲人失相。風濤無涯而孤舟失柁。其何以期勉以爲他日下報之地耶。 박학중(朴學中) 박인진(朴麟鎭, 1846∼1895)을 말한다. 자는 학중, 호는 우인당(愚忍堂)·즉이재(則以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옥루(屋漏) 집에서 가장 어두운 서북쪽 방구석을 가리키는데, 아무도 모르는 자기의 마음속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네가 네 집에 있을 때에 보니 옥루에 있을 때에도 부끄러움이 없었네.[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라고 하였다. 마경(馬卿)의 병 마경은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그의 자가 장경(長卿)이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는 소갈병(消渴病)을 앓아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무릉(茂陵)에 살다가 죽었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현안(玄晏)의 질 현안은 진(晉)나라 황보밀(黃甫謐)의 호이다. 그는 일생 풍비(風痺)에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서음(書淫)이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은거하며 저술을 일삼았다. 《晉書 卷51 皇甫謐列傳》 숭정(崇禎)의 유민(遺民)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남긴 백성이라는 뜻으로, 명나라는 망하고 숭정제는 죽었지만 여전히 숭정제를 황제로 여기고 명나라를 정통으로 여겨 그 백성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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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선생집(南坡先生集) 8권 3책 南坡集 南坡先生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南坡先生集 [1898] 李僖錫 목활자본 『남파집(南坡集)』 3 有界 10行20字 註雙行 한자 上下內向2葉花紋魚 전남대학교도서관_불명처2 전남대학교도서관 1898년(광무 2)에 간행한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의 문집, 8권 3책(목활자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손자 이선원(李善遠)이 편찬하였다. 『남파선생집(南坡先生集)』 해제 1. 생애와 사상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의 자는 효일(孝一)이고, 호는 남파거사(南坡居士)이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시조인 휘(諱) 문화(文和)는 정희왕비(貞僖王妃)의 외조부로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을 지냈으며,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이문화는 집안이 벌열(閥閱)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 아들 6명을 모두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 이때부터 장흥(長興)에 인천이씨가 거주하게 되었다. 청강(淸江) 휘 승(昇, 1556~1628)은 문장과 행의(行義)가 있어 호남으로 내려온 인천이씨의 현조(顯祖)가 되었다. 문집으로 『청강유집(淸江遺集)』이 전한다. 청강 이승을 추모하기 위해 장흥의 인천이씨는 영석재(永錫齋, 전라남도 문화재 제69호)를 설립하였다. 고조부는 휘 윤덕(潤德), 증조부는 휘 복현(復顯), 조부는 휘 능계(能啓), 부친은 휘 중집(重楫)이다. 부친은 천성이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에 전력하지 못하였기에 자식 교육에 더욱 힘을 쏟았다. 모친은 평강채씨(平康蔡氏)로, 채석후(蔡錫垕)의 딸이다. 이희석은 1804년(순조 4) 5월 15일 전남 장흥군 용산면 접정리 청적(聽笛)마을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재주가 걸출하고 성격이 꼿꼿하고 호걸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 이름만 듣고 만난 적이 없던 사람도 우연히 만나면 단번에 남파를 알아볼 정도였다. 사람들과 교유할 적에 구차히 영합하지 않았고 평소 불의한 사람과는 애초에 스스로 교분을 맺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배나 어린 학생이 질의하면 온화한 기색으로 자상히 알려주었다. 10세를 전후로 문리가 통달하여 제자백가 등을 남김없이 두루 통했는데, 사서와 오경에 더욱 공력을 다해 주소(註疏)가 아무리 많은 글도 자기 말처럼 외웠다. 이희석은 노사 문하에 나아가 스승의 말을 듣고 스승의 덕을 보자 마치 시원스럽게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같아 의귀처(依歸處)로 삼아 자신의 학업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희석은 노사 기정진보다 여섯 살 적었는데, 기정진은 이희석을 벗으로 대우했고, 그는 스승으로 받들었다. 1851년(철종 2) 홍수로 전토를 잃고 장흥에서 나주 사호(沙湖,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호동)로 이거하였다. 기정진의 거주지 근처로 옮긴 것이다. 이때부터 기정진의 거처에서 매달 29일은 숙식을 하며 강학에 열중하였다. 1879년 기정진 사후에 다시 장흥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1880년(고종 17) 77세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령이라고 하여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하였다. 이에 대해 이희석은 임종 전에 하신 어버이 말씀이 귓가에 뚜렷이 남아 저버릴 수 없어 죽기 전에 과거에 응시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 묘소에 가서 고유(告由)만 했을 뿐 당상관(堂上官)의 비단 관복과 옥관자(玉貫子)를 몸에 걸치지 않았다. 1889년(고종 26) 7월 17일에 묵동(墨洞)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흥 천관산 수정암(水晶菴) 선영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광산김씨로 김상희(金相禧)의 딸이다. 슬하에 1남 2녀가 있는데 아들은 인호(麟浩)이고, 첫째 딸은 낭주최씨(朗州崔氏) 최면식(崔冕植), 둘째 딸은 철원주씨(鐵原周氏) 주방일(周邦一)에게 시집갔다. 큰딸과 아들 인호는 안타깝게도 이희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인호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선원(善遠)과 학근(學根)이다. 둘째 아들 학근은 인천이씨 족보에 학원(學遠)으로 실려 있다. 선원이 이희석의 유고를 수집, 문집 간행을 주도하였다. 이희석은 시(詩)에 뛰어났는데, 『남파집』에는 성리설이 거의 없는 점이 특징이다. 기우만의 행장에서 이희석이 직접 언급한 문장에 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새롭고 기이함을 좋아하고 화려한 문장을 숭상하는 것은 문장가의 큰 병통이다. 글을 지을 때는 우임금의 치수(治水)처럼 일삼은 바가 없이 자연스러운 형세를 따를 뿐이다. 만일 부화(浮華)한 표현에만 마음을 쓰고 남을 기쁘게 하는 데 힘쓴다면 부인이나 여자가 용모를 치장하는 정도의 기량에 불과하니 나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 산수 유람과 기행에 관한 시와 글이 많은 것은 노사학파의 문인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희석 역시 문집 안에 다양한 지역을 유람하며 남긴 시문이 있고, 특히 「원유록」은 여행하며 지은 시문을 종합한 것으로서 이희석의 산수에 관한 사상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2. 문집 구성과 내용 『남파집(南坡集)』은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의 문집으로 8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98년(광무 2) 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에 있는 인천이씨 재실인 영석재(永錫齋)에서 손자 이선원(李善遠)에 의해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책별로 권두에 차례가 있고, 시가 권1에 140제 247수, 권2에 129제 193수, 총 369제 440수가 있다. 권3에는 서 34편, 권4에 잡저 9편, 권5에 서(序) 9편, 기(記) 12편, 발(跋) 6편이 있다. 권6에는 행장 3편, 묘지명 1편, 제문 7편이 있으며, 권7에는 「원유속록후서(遠遊續錄後序)」와 「원유록(遠遊錄)」이 실려 있다. 권8은 부록으로 남파의 행장과 전, 묘지명, 발문, 후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과 권2에 수록된 한시 440수는 스승인 노사 기정진과 그 문인, 친족이나 친구, 그리고 동향의 장흥위씨(長興魏氏)들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 기정진(奇正鎭), 기우만(奇宇萬), 기양연(奇亮衍), 김평묵(金平黙), 조의곤(曺毅坤), 오상봉(吳相鳳), 김한섭(金漢燮), 김영택(金永澤), 안달삼(安達三), 소치(小癡) 허련(許鍊) 등 많은 인물에게 준 시들이 있어 그의 교유관계를 보여준다. 유람시가 많은 분량은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시에서 그가 추구하였던 인지지락(仁智之樂)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장흥 인근에 있는 천관산, 제암산, 월출산 등 산천을 두루 유람하였다. 천관산에 올라 쓴 시 「유관산(遊冠山)」과 청산도와 거금도, 진도 등지에서 바다를 보며 읊은 「고금도(古今島)」, 「등고금도가마치망한라산(登古今島駕馬峙望漢拏山)」이 있다. 또 합천 삼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강학처인 뇌룡정(雷龍亭)을 방문하여 조식의 시에 차운하였다. 주변의 풍광에 자신의 감정을 담은 「사인정풍영계회(舍人亭風詠契會)」, 「장천재수창(長川齋酬唱)」 등은 대표적인 장편시이다. 「자민(自憫)」, 「초도음(初度吟)」 등은 자신을 돌아보며 불우한 인생에 대한 회한과 학문 성취의 한계를 표현한 시이다. 「학문(學問)」, 「감회(感懷)」, 「도통탄(道統歎)」 등 설리적(說理的) 시도 있다. 「독좌(獨坐)」와 「유회(幽懷)」는 은일 생활의 고독을 읊은 것이며, 「애국음(愛菊吟)」과 「조일대국(朝日對菊)」은 도연명의 전원 취미를 본받아 국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읊은 시이다. 이밖에 「석별(惜別)과 「억추려(憶秋旅)」 등은 친구와의 우정을 생각하며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 중 「하사좌상증조천관안행오(下沙座上贈朝天館安行五)」는 제주도에서 노사에게 공부하러 온 안달삼(安達三)에게 준 오언고시로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 유배 중에 이 시를 처음 보았다고 『남파집』 발문에서 그 인연을 소개하였다. 병인양요 때인 1866년(고종 3) 10월, 이희석이 장성에 있을 때 출전(出戰)하려고 가는 고제홍(高濟洪)에게 감격하며 써준 시 「고중범부의지행(高仲範赴義之行)」과 서양의 이양선 소식을 듣고 탄식을 하는 시 「문양선소식발탄(聞洋船消息發嘆)」 등은 그의 현실 인식을 잘 보여준 시이다. 권3에는 서(書) 34편이 실려 있다. 스승인 기정진에게 올린 편지와 자식과 친족 동생에게 보낸 편지, 고향의 벗 김대원(金大源), 사돈 최득수(崔得洙), 영남의 동문 조성가(趙性家), 이항로의 문인 김평묵 외 장흥부사로 부임했던 한치조(韓致肇), 이학래(李鶴來), 송기로(宋綺老) 등과 주고받은 편지로 안부를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김대원에게 보낸 편지는 김대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위로를 보냈고, 최득수의 경우 최득수의 며느리이자 이희석의 딸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소회를 적었다. 권4는 잡저(雜著)이다. 「거려설(蘧廬說)」은 이희석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작품이다. 거려(蘧廬)는 누추한 여관이란 뜻이다. 이희석은 30세 이전에는 어버이가 살던 집에서 살다가 30세 이후에는 어산(語山) 묵촌(墨村)에 살았고, 그 후에는 장성, 나주에서 살다가 10여 년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회갑설(回甲說)」은 회갑을 사치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노고를 생각하고 효도의 의미를 돌이켜보는 날이어야 한다는 취지로 쓴 글이다. 「거긍설(去矜說)」은 자랑과 과시를 의미하는 '긍(矜)'자로 재능과 과시의 상관 관계를 언급하면서 자랑하는 마음을 없애고 좋은 독서를 해야 한다고 논설하고 있다. 「거긍설」에서 양웅(揚雄)의 "책을 좋아해도 중니(仲尼; 공자)에게 구하지 않으면 책 가게일 뿐이고, 말을 좋아하여도 중니에게 보이지 않으면 자질구레한 말일 뿐이다."라는 구절과 사상채(謝上蔡)가 이천(伊川) 선생과 작별한 지 1년 만에 찾아가 뵈었는데 이천 선생이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하고 묻자, 사씨가 "다만 '긍(矜; 자랑하고 과시하는 마음)' 자(字)를 없애려 하였습니다."라는 일화를 인용하였다. 「정설증영석재제생(貞說贈永錫齋諸生)」은 이희석이 『주역』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중 정(貞)을 가지고 영석재(永錫齋) 여러 학생에게 당부한 글이다. 『주역』 곤괘(坤卦)에서 '정(貞)'의 의미와 영석재가 위치한 풍수지리적 환경을 연관하여 논하면서 '정(貞)'의 자세로 노력해 공부하라는 취지가 담겨있다. 「김민수기실(金敏受記實)」은 흉년에 마을과 친척들을 구제한 김영택(金永澤)의 공로가 알려져 수령 윤용(尹墉)과 관찰사 이돈상(李敦相)이 조정에 알린 사실 등을 기록한 글이다. 「설계(舌誡)」는 온몸에 병이 들었는데 그중 혀를 잘못 놀려 말을 함부로 하는 병이 가장 큰 병이라는 논의를 편 글이다. 주자의 '이렇게 하는 것이 병통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다.[若知如此是病 則不如此是藥]'라는 말을 인용하여 끝맺었다. 「의석서(擬惜誓)」는 『초사(楚辭)』 중 하나인 「석서(惜誓)」를 본떠 자신을 경계한 의고문(擬古文)이다. 「의주군신하궁인작관저시(擬周群臣賀宮人作關雎詩)」는 주나라 신하들이 관저시(關雎詩)를 쓴 궁인에게 경하하는 모습을 전문(箋文) 형식으로 쓴 글이다. 「선왕고부군신천록(先王考府君新阡錄)」은 부친의 묘소를 이장한 경위를 소상히 밝히며 후손을 경책한 글이다. 권5에는 서(序) 9편, 기(記) 12편, 발(跋) 6편이 실려 있다. 「사호이택서(沙湖移宅序)」는 이희석이 1851년 여름 대홍수를 만나 전토(田土)를 잃고 금성(錦城; 나주) 사호(沙湖)로 이사하게 된 경위를 『주역』의 논리를 발려와 기록한 글이다. 「애국서(愛菊序)」는 국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도연명 못지않다며 도연명을 경앙(景仰)하는 마음을 드러낸 글이다. 「지운서(止雲序)」는 이희석의 벗 김경현(金擎鉉)의 호인 '지운(止雲)'에 대해 써준 글이다. 김경현의 자는 국민(國敏), 호는 지운(止雲),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이리저리 떠도는 구름의 속성을 언급하며 정자(程子)의 「정성서(定性書)」와 『주역』 「간괘(艮卦)」 단사(彖辭)의 말을 인용하여, 공자가 말한 출처(出處)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피력하였다. 「가암서(可菴序)」는 김영하(金永夏)의 호인 '가암(可菴)'의 '가(可)'자에 관해 썼고, 「묵헌서(黙軒序)」는 박인환(朴寅煥)의 자호(自號)인 '묵헌(黙軒)'의 '묵(黙)'자에 대해 썼으며, 「죽사서(竹史序)」는 둘째 사위 주운지(周雲之)의 자호인 죽사(竹史)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당부한 글이다. 그 밖에 「묵헌김공유집서(默軒金公遺集序)」는 해남 출신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낸 묵헌 김재일(金載一, 1749~1817)의 시문집의 서문이고, 「묵와위공유고서(默窩魏公遺稿序)」는 장흥 위수택(魏守澤)의 유고집 서문이다. 「영보동계서(永保洞契序)」는 이규호(李圭浩)를 대신해서 지은 글이다. 영보동계는 영암 덕진면 영보동에서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내외 후손을 중심으로 결성된 계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명무실해졌다가 당시 수령의 도움으로 다시 동약(洞約)이 정해져 이를 기념한 글이다. 기(記)는 12편인데 「율정공비음기(栗亭公碑陰記)」는 선조 율정공 이두(李斗)의 비문 뒷면에 쓴 글이다. 율정공 이두의 자는 천추(天樞), 호는 율정, 또는 장춘오(藏春塢)이다. 율정공은 장흥에 내려와서 자제와 문하생과 강학만 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병란으로 인해 없어져 1573년(선조 6)에 쓴 족보의 서문 1편만 남아있다. 「연원중수기(淵院重修記)」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과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의 위패를 모신 연곡서원(淵谷書院, 현 전남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이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뒤에 다시 중수한 사실을 쓴 글이다. 「덕암재기(德巖齋記)」와 「낙영재기(樂英齋記)」는 모두 장흥에 있는 강학처에 관한 글이다. 장흥 묵촌의 덕암재는 이희석의 장흥 묵촌 친족들이 자제들의 공부를 위해 설립한 글방이고, 낙영재는 장흥 용산면에 있는 용강사(龍岡祠)의 강당으로 월산재(月山齋)와 더불어 우수(愚叟) 김상범(金尙範)의 5, 6대손이 세운 것이다. 그밖에 「송석당기(松石堂記)」, 「도곡서실기(道谷書室記)」, 「최씨용호정기(崔氏龍湖亭記)」, 「금구열녀정씨정려기(金溝烈女鄭氏旌閭記)」, 「노원기(鹵園記)」, 「화봉기(華峯記)」, 「유관산기(遊冠山記)」, 「유사산기(遊獅山記)」가 있다. 「노원기(鹵園記)」는 바닷가에 살던 김경여(金景汝)라는 사람에게 '노원(鹵園)'이라는 호를 지어주면서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한 글이다. 특히 「유관산기」과 「유사산기」는 유람을 좋아했던 이희석이 천관산과 사자산을 유람하고 쓴 글로 문학적 필치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발문은 6편이 실려 있는데, 족조 이적(李績)에 관한 「족조퇴옹공비문발(族祖退翁公碑文跋)」이 있고, 「영모재유집서발(永慕齋遺集序跋)」, 「서양성재선효자언행록후(書養性齋宣孝子言行錄後)」, 「서고씨삼효문기후(書高氏三孝門記後)」, 「서경주최씨효열록후(書慶州崔氏孝烈錄後)」, 「서영천굴결사기후(書靈泉窟結社記後)」가 있다. 그중 「영모재유집서발」은 1875년(고종 12) 1월 18일 삼가(三嘉)에 사는 친족 이양년(李亮年)과 이붕석(李鵬錫)이 영모재 문집 관련 일로 방문하자 써준 글이다. 「서경주최씨효열록후」는 판서 오준영(吳俊泳)을, 「서영천굴결사기후」는 무산도호부사(茂山都護府使) 고제환(高濟煥)을 대신해서 지어준 글이다. 권6에는 행장 3편, 묘지명 1편, 제문 7편이 실려 있다. 「삼종대부초당처사공행장(三從大父草堂處士公行狀)」은 이희석이 8세 때 『사략(史略)』을 배웠던 이상계(李商啓)의 행장이다. 이희석이 노사 기정진에게 부탁하였으나 근거할 만한 글이 없어 감히 행장을 쓰지 못하고 사양하면서 집안사람들이 사실을 모아 기록하라고 권유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소암처사위공행장(素菴處士魏公行狀)」은 위영우(魏榮禹)의 생애를, 「반천거사염공행장(磻泉居士廉公行狀)」은 염한기(廉翰琪)의 생애를 기록한 글이다. 행장 3편 모두 장흥에 거처했던 인물들이다. 묘지명은 부친 이중집(李重楫)에 대한 묘지명이 있으며 스승 기정진의 제문 2편과 기장일(奇章一), 도곡처사(道谷處士) 송종운(宋鍾雲) 제문이 있다. 그리고 「용산기우문(蓉山祈雨文)」은 기우제에 관한 글이고, 「제당산문(祭堂山文)」은 가뭄에 병충해 제거를 기원하는 글이고, 「축호문(逐虎文)」은 산신령에게 호랑이를 물리치게 해달라는 기원문이다. 「축호문」은 장흥부사 신석유(申錫裕)를 대신하여 쓴 글이다. 권7에 실린 『원유록(遠遊錄)』은 이희석이 1866년(고종 3) 3월 2일부터 6월 15일까지 약 4개월간의 여행기록이다. 「원유속록후서(遠遊續錄後序)」에 의하면, 원래 1858년(철종 9) 기문현(奇文鉉), 기봉진(奇鳳鎭)과 함께 수개월 동안 관서(關西) 유람을 하고 돌아오던 중 칠원(漆原)에서 쉬다가, 마침 그곳에서 만난 김녹휴(金錄休)가 관동(關東) 유람을 청하였다. 이희석은 즉시 승낙하였지만, 기봉진이 내년 봄에 가자고 하고서는 끝내 아무런 말이 없어 결국 무위에 그쳤다. 그러던 중 1866년(고종 3) 3월 고종의 가례(嘉禮)로 인한 증광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한양으로 왔다가 김회현(金會鉉)과 함께 강화도를 유람하고, 한양으로 다시 들어온 뒤 김우(金玗)와 함께 세 사람이 금강산을 다녀오고, 다시 한양으로 와서 김회현과 함께 영서(嶺西)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 조령을 넘어서 영남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권7 마지막 부분에는 이희석이 경유지와 거리를 기록해 두었다. 장흥 남면에서 출발, 한양, 강화(정족산성, 마니산), 한양 동대문, 금강산 장안사, 마하연, 유점사, 신계사, 총석정, 금성(金城), 창도(昌道), 원주, 조령, 대구, 합천 삼가, 진주 월횡(月橫), 하동, 구례 간전, 순천, 장흥 남면 묵촌까지 3,360리에 달하는 긴 거리이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 중 「성단음(星壇吟)」, 「정양사음(正陽寺吟)」, 「마하연음(摩訶衍吟)」 등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 실려 있다. 또한 「산림학자변(山林學者辨)」, 「조성하순소등비로변(趙成夏舜韶登毗盧辨)」, 「삼신산설(三神山說)」과 같은 논변문(論辨文)도 실려 있는데, 그 중 「산림학자변」은 산림(山林)이라는 용어와 의미 등을 사적(史的)으로 서술하였으며, 오늘날에 산림이 붕당의 희생양이 되어 위로는 공로를 펼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은택을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조성하순소등비로변」은 도동(桃洞)에서 이희석이 조성하(趙成夏, 1845~1881)의 『금강록(金剛錄)』을 보고, 동행했던 중들에게 지난해 조성하가 비로봉에 올라간 경위에 대해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글이다. 조성하의 본관은 풍양, 자는 순소(舜韶), 호는 소하(小荷)이다. 병조판서 조병준(趙秉駿)의 아들로 조병귀(趙秉龜)에게 입양되었으며,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친정 조카이다. 편서로 『금강산기(金剛山記)』가 전해오는데, 이것이 이희석이 언급한 『금강록』일 것이다. 영남 지역에서는 주로 자신의 친족들이 와서 안내하거나 도움을 주어서 영남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합천 삼가에서는 선조 이문화(李文和)를 모신 서계서원(西溪書院), 남명 조식의 강학처인 삼가 토동(兎洞)의 뇌룡정(雷龍亭)을 방문하였으며, 하동 월횡에서는 10여 일간 머무르면서 하달홍(河達弘, 1809~1877)과 동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 등과 함께 시문을 주고받았다. 이희석과 조성가가 서로 창화(唱和)하며 지은 28운의 연구(聯句) 「여월재연구(與月齋聯句)」가 있는데, 특히 하달홍은 이를 기념하며 「파월연구서(坡月聯句序)」를 써주었다. 하달홍은 금강산의 뛰어난 절경과 여행 중 들었던 이야기가 여기에 다 실려 있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라고 칭하였다. 「원유록」을 보면, 강화도 기록에는 '추보(追補)'라는 작은 글자가 종종 보인다. 아마 문집을 편집할 당시 『원유록』 원편이 있었는데, 편집하면서 관련된 내용을 추가하고 해당 내용 끝에 '추보'라고 써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인명이나 지명에 세주(細註)를 달아 내용의 이해를 돕고 있다. 권8은 이희석의 생애와 문집 출간에 관한 각종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행장을 비롯하여 기삼연(奇參衍)의 「남파이선생전(南坡李先生傳)」, 이승욱(李承旭)이 지은 묘지명, 그리고 김평묵(金平默), 최익현(崔益鉉), 송기로(宋綺老), 조성가(趙性家)로부터 받은 문집 발문 및 후서(後敍)가 실려 있다. 마지막 부분에 실린 삼종손(三從孫; 칠촌 조카의 아들) 이주원(李周遠)의 발문에 의하면, 이선원(李善遠) 등이 선조 이희석 문집을 출간하지 못해 한스럽게 여기다가 1898년(광무 2) 『인천이씨장흥파세보(仁川李氏長興派世譜)』를 출간하면서 집안 종형제인 이대원(李大遠)·이정원(李正遠) 등과 발간에 대해 논의하여 『남파집』을 함께 출간하였다. 『남파집』 맨 마지막 장에 '장흥부 어산(語山) 영석재에서 시간(始刊)'라는 기록이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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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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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南坡集目錄 序(寄宇萬)卷 1詩(五言絶句) : 家君生辰獻壽, 讀書永思齋(三首), 大明梅, 春夜與淡圃雅會(二首), 贈長興文雅, 老梅, 松下聽鸎, 過長興寶林寺, 南坡亭十詠, 贈長水秋童, 愛白髮, 次黃頤齋絶澗梅韻(二首), 老人會(三首), 種竹, 種松, 種梅, 種菊, 種瓜, 次柏下臨別韻, 贈別同福曺華瑞韻(三首), 敬次靜庵先生蘭竹屛韻(八首), 贈白雲洞主人, 奉和曾王考農圃公舟韻, 次南谷朴圭尙韻, 又次難昜韻, 綿鳥(二首), 門扉(二首), 歲寒, 淸夜, 無心筆, 安分, 謹次南湖公韻, 言志, 訪柳參奉漢五韻, 歲暮, 見兒子吟詠因以示意, 登三洲亭遺墟(二首), 贈光州朴友景瑞(삼수), 斥東學, 見人壁上有詩次其韻, 次三山齋(九曲十絶嘉卉十絶), 別密陽諸族叔, 白鷗(二首), 次黃德五蓮溪韻(二首), 呈知州閔永采生朝, 喜雨, 秧歌, 農家, 聽蟬, 淸溪(二首), 竹風, 松月, 扇, 寶劔, 白玉, 陌上花, 黃栗, 冬, 足蔡李通戒子詩, 又足謫道州詩, 庚戌八月哀吟(二首), 白龍山, 信傑山, 兄弟峯, 贈別魯城尹松雲(相卨三首), 附松雲韻(三首), 憶松雲, 憶黙忍齋吳正言, 見朱夫子無題四首韻效嚬(四押韻各五首), 立春, 夏夜遣懷, 贈從孫女壻吳郞(二首), 見治木自喻, 坐遊金剛錄(三十首), 無題(寓自警), 雨晴(三首), 素安齋韻, 贈別, 待人, 愧白髮, 綠陰, 喜晴, 問農, 答農, 郊行卽事詩(五言四律) : 老人會, 次不換亭韻, 望月, 村居, 春夜, 屈於會園還鄕偶吟, 守歲, 見明齋集八吟感作, 謹效放翁詠物(十首), 贈楓亭書齋諸生韻, 贈大谷書齋諸生韻, 次蓮溪族叔韻, 春興, 與張羅金黃四友吟(二首), 贈斗湖齋諸生韻, 贈東村諸生韻, 贈橫山諸生韻, 齒痛, 贈潘溪諸生韻, 追輓崔參奉丈(二首), 聾巖韻, 贈永村諸生韻, 贈玉洞尹哲成韻, 惜老(二首), 素安齋韻(二首), 與尹巖溪羅錦坡雅懷, 滯雨賡吟, 春祝(二首), 風雨夕思義征壯士, 幽居卽事(六首), 夜話, 雞雛, 東村書齋雅會, 橫山書齋雅會, 與羅錦坡張石聾雅會, 贈金參奉方孝, 偶吟, 大谷書齋雅會, 贈黑巖諸生韻, 憶李敬和, 藏春亭檻外風帆爲題, 贈諸生, 松村書齋雅會, 巨漲, 登大朴山, 臨別, 與會津林兄士善朴兄君日往于坪山夜話, 向玉洞, 相別用前韻, 庚戌秋夜吟, 黙忍齋韻, 次林兄炳彦春庵韻, 次錦坡令孫加冠宴韻, 偶題, 老柏, 穉桐, 題羅氏墓閣韻(二首), 挽客, 言志, 次咸平李箕隱奎還婚宴韻(二首), 贈尹松雲, 挽柳公榮沃氏, 追挽博山梁栢下(相衡)卷 2詩(七言絶句) : 生朝感吟(二首), 思故人, 偶題, 示竹池諸生, 與張石聾羅錦坡雅會, 次張石聾與諸生論懷, 用前韻贈張醫石聾, 兒子讀書, 雨雪中偶吟(三首), 幽居, 書懷(二首), 索綯, 臘梅(二首), 贈兒曺一絶, 詠懷(三首), 贈醫師(三首), 贈地師(二首)咏巫師, 咏卜師·咏樂師, 戱贈羅松皋(二首), 與張石聾雅會(二首), 秋雨, 瞽負躄, 感懷, 示諸生, 別張石聾, 消遣世慮, 餞歲, 迓歲 , 霖蛙, 梳, 雞, 詠黃橘, 次閔侯芝潭松菊韻, 見柳子厚哀溺文感作, 春寒, 秋蘭, 戱贈或人, 贈人, 次閔侯夢得八字韻(二首), 次崔友與諸生敘懷(二首), 冬至, 大雪, 雪月, 冬雨, 次道林春齋難窩韻, 讀濂洛詩謹倣程明道及諸賢詩(二十二首), 倣拙齋和不欺堂韻(二首), 倣朱子題胡氏客舘韻, 倣伊川謝王佺期贈丹, 倣橫渠芭蕉韻, 倣康節暮春吟, 倣龜山江上夜行, 倣橫渠我欲韻, 倣涑水崇德久待不至, 倣龜山閒居書事, 倣呂榮公大雪不罷講, 倣朱文公題眞, 倣呂成公晩春, 倣王文憲題張子房, 倣王立齋査林對月, 倣楊船山幽居, 倣胡五峯利欲, 倣李延平柘軒, 倣王文憲冬菊, 倣胡致堂和唐人未到五更猶是春, 倣陣了翁雜詩, 倣尹和靖過种明逸故居, 過興德李魯瞻家, 八吾詩, 謝竹池先生所惠海墨, 聞主倅丈(宋正希)重修望華樓有感, 次主倅登海月樓韻, 次成眞逸齋漁父韻, 秋入新修洞永思齋吟, 次李容齋聽子規韻, 哭兦弟聖直墓, 榮江船遊, 謝錦城李使君所惠(二首), 輓登臨岳丈, 燈花, 次樂軒韻, 寒風韻示諸生, 謝崔自重送河豚, 贈別龍仁吳一洙, 次柳參奉漢五正月韻, 三月晦登大朴山(二首), 次公州閔都事泳夏韻, 贈別閔都事(二首), 見龜峯集詠月韻謹題, 老人會韻(三首), 贈同庚柳致奎, 見退溪集野池韻感作, 附原韻, 又見咏懷韻感作, 附原韻, 次魯龍起觀瀾齋韻(二首), 敬次退溪先生韻(七首), 又效退溪吟, 次柳參奉漢五韻(三首), 贈光陽朴熙權, 贈朴述齋三從孫鍾賢, 贈別石城宗人健緖, 次楊柳詞, 次朴圭尙難易韻, 次蓮溪諸生韻(二首), 次溫陽金恒鎭韻, 草洞風景十詠, 見兒子蜂桶斥蟻有感, 贈洪州金承旨雲庵韻, 次黃德五韻, 寒食途中用淸明韻, 贈黃友, 夜與張羅金黃四友吟, 效姜秋琴落花詩(十首), 池塘, 靈臺, 次藏春亭韻(三首), 理氣, 夜雨, 齒痛(二首), 與尹巖溪諸公雅會, 登大朴山, 聞養老之說偶題(二首), 與張石聾羅錦坡雅會, 臨別, 大朴小朴山(二首), 靑林山, 兄弟峯, 錦城山, 聽啞聾歌感懷(二首), 謹次讓寧大君詠梅韻, 聾盲歎, 芭蕉, 挽玉洞尹泰獻(二首), 詠懷(二首), 宿不老峙敬睦齋, 素安齋韻, 次松隱(三首), 松篁幽居(四首), 八月三日夜, 有所思, 客至夕話(三首), 贈咸平甑山金雅(三首), 聽秧歌, 次尋香寺會韻(三首), 憶寶林寺松臺舊遊(二首), 聽乳犢哀鳴, 觀禾鳥, 開硯, 敦睦齋老人會韻, 次張石聾韻, 與羅錦坡金醉松雅會, 冬柏, 次靈光李進士韻(二首), 尹本倅小石來訪, 題長城蛾睂巖, 見明人蚌鷸詩次一絶 , 贈潘南羅德咸, 雪中梅花, 落照, 寒風, 種樹, 初月, 林間新花, 初雪, 積雪, 西樓感懷, 次柳參奉韻, 懷春, 雨夜與閔友雅懷, 除夜, 正月穀日大雨溪漲, 過長洞酒店, 松湖雨夜憶族從士平, 喜雨夜與諸益雅會, 靈光行過古幕浦, 村居, 雨夜呼酒, 丁丑元朝偶題, 十二日偶吟, 冬暖, 冬至, 雨晴, 叢竹, 霖雨, 百日紅, 老柳, 蓮花, 夢中作, 偶吟, 大雪風, 次楓亭書齋會遊韻, 勉諸生, 怪石, 南瓜, 一經齋七夕詩會, 次再從弟木浦韻, 憫老, 自警, 自笑, 初夏盛事, 燈火, 縱筆, 石磨, 端午, 斗湖齋會吟(二首), 有感, 放言, 次人韻, 過馬山崔國鳴家詠霜菊(二首), 與林友及張石聾敘懷(二首)卷 3詩(七言律詩) : 南坡亭韻(二首), 望慕庵韻, 學心堂韻, 倚斗齋韻, 與南平洪亨植偶吟, 謹次寶山精舍韻, 與譜所諸族相和(十首), 次錦樵天然亭韻(二首), 附原韻, 次南山韻, 附韋堂靑湖韻, 南山歸路, 次錦樵(二首), 題金溝西溪張氏家, 登泰仁披香亭, 呈譜所諸君子, 憶譜所諸族, 夙夜齋韻, 贈諸生, 敬次崔參奉晬辰韻, 次次李父回甲韻, 龍山暮雨贈諸生, 與金相夏雅會, 贈南原金澤烈韻, 次南原李上舍元泓燭詠, 又次紙繩韻, 次族叔回甲韻, 次宋山丈八音八卦韻, 十月太雪中聞雷聲, 次崔有聲敘懷韻, 西樓感懷, 次柳參奉書齋韻, 次道林吳二兄韻, 次新堂林元詩會韻, 見林老泉集效碁韻, 次登臨林(基洪)韻, 用前韻憶吳諸兄, 與諸老少登大小朴山, 輓蘭石朴先生, 贈梧隱梁相烈, 次東隱先生回甲韻, 往登臨遊魚登山, 田家, 生日契韻, 次務安雲庵書齋韻, 自寶山紋巖, 登錦城峙, 與海南尹鍾敏氏雅會, 庭試行曉過四街, 過詩山, 三月時祀後登周流峯, 老梧, 村居, 次(炳愚)最高亭韻(二首), 永思齋韻, 贈別綿城李使君雲夏, 宗人汝冠雨後適至, 輓登臨岳丈, 與綿城倅趙駿九遊東湖, 鄕校次主倅金炳愚韻, 崇禮門外與梁博山, 入登臨滯雨, 題務安朴氏遊山亭, 過寶林寺贈离峯上人, 次潘南羅友楠堂韻, 放言, 用前韻聽兒子夜課, 用前韻憶光汝去公州, 示兒子, 次七星洞崔西山韻, 次興德黃寒悶世韻, 怪石, 次淸一齋韻, 雨夜與黃德五敘話, 次白羊寺雙溪樓韻, 與黃德五敘話, 族兄璋憲氏回甲韻, 題柱聯詩, 見退溪集謹效問業韻, 安分, 憫老, 谷城李友三人來訪, 次蓮溪詩話, 輓南松崔監役, 次族叔晩軒韻, 敦睦齋韻, 逍遙亭韻, 次崔安中韻, 次楓亭書齋韻, 次永村書齋韻勉諸生, 次斗滿齋韻勉諸生, 觀書有感, 次錦莎亭重修韻, 次不老峙敬睦齋韻, 農隱齋韻, 贈漢樵鄭進士斗鎔, 次不換亭雅會, 贈曺漢明秉奎, 次李友洞晩悟亭, 回甲韻, 次再從弟入島韻, 登碧流, 次吳難窩回甲韻, 楓亭齋雅會, 隨占堂原韻, 次潭陽俛仰亭韻, 次赤碧望美亭韻, 次風詠亭韻, 次長城金同甫巖窩韻, 次長城德亭水聲韻, 自戒, 言志, 寄笑, 示同閈諸生 重陽對菊, 次蓮溪雅會韻, 次扶安鄭(碩好)韻, 次或人韻, 贈斗湖齋諸生韻, 示兒子, 贈楓亭齋諸生韻, 縱筆, 幽居, 贈大谷書齋諸生韻, 贈竹池書齋諸生韻, 贈南原諸友韻, 次鄭振聲幽居亭韻, 次(朴準承)養老堂韻, 復次萬人屛韻, 次朴氏永慕齋韻(作人代), 謹次石串亭韻, 輔義契韻, 詠竹坡, 和(朴準承)冬至與鄕士韻, 大谷書齋雅會(二首), 輓勉庵先生(二首), 人日, 上元, 逢黃德五說處世道(二首), 次張石聾感時, 黃德五同奇友來並和, 與金醉松夜話, 與黃石東吟, 觀雉雛, 盆梅, 歎世吟(二首), 贈別黃德五, 次芝岡, 次白雲汀送奇松沙韻, 次白雲汀韻偶吟, 古木, 贈門中諸少韻(二首), 與龍仁吳一泳雅會, 謹次申閤丈桂田韻, 次晩悟韻, 次藥隱韻, 次吳氏永慕齋韻, 與曲江金參奉雅會, 再從弟亨憲回甲韻, 藏春亭謹用高峯韻, 次崔氏永慕齋韻, 贈松臯羅正字韻, 挽錦陽居士林公(瀯相), 思美人, 觀高峯集四七論, 四端, 七情, 理氣, 送松臯羅兄赴慕聖契會, 挽南平戚弟李熙, 次歸樂齋韻, 次朴聖汝回甲韻, 贈玉洞靑龍齋尹哲成, 輓族弟樹憲, 追輓奇公三衍, 狂歌行卷 4書 : 上沈判書(相薰)二, 上朴承旨(昌壽)四, 與尹承旨(相翊), 上校理族叔(敏英), 答珍島倅族弟(命憲), 上密陽族兄(志憲), 與本倅閔(種烈 二), 答本州義所李(鶴相), 答義所柳紀淵, 與舍弟輔憲, 上朴司諫(淇鍾), 與寄傲亭朴(寅陽), 與雙汀金在淇, 與奇松沙(八), 與吳後石, 答吳難窩, 與梁草史(相衡), 贈族姪啓宖, 答密陽宗中, 與南松崔基相, 與本倅金(天洙), 答朴駿相, 與應敎李(炳鋈), 與主倅閔(泳采), 答主倅金(聖基), 與朴參奉(準一), 答冰月堂刊所(二), 與崔洛喜, 答咸恩君宗孫(啓元), 答族人(令憲)記 : 南坡亭記, 三山齋記, 夙夜齋小記, 遊登魚登山記, 望慕庵紀, 一經齋記, 隨占堂記, 石串亭記, 永慕齋記, 靑龍齋記, 倚斗齋記, 學心堂記, 祠山書院記卷 5序 : 錦沙公墓契案序, 沙隱公遺稿序, 海史公從遊簡編序, 海史公墓契案序, 麟谷白馬山兩村契案序, 世寶錄序, 草譜序, 花樹錄序, 洞約序, 老人會案序, 聞尹參判(相翊)分福下比志行上方語感而序, 修齊輯要序, 洞契別庫重刱序, 鄕約案序, 鶴洞門案序, 輔門案序, 學禊序, 興德張氏直長公派門案序, 聾巖小序, 黙忍齋序, 春齋序, 晩悟序, 藥隱序, 黙窩序, 蒙學句語序, 文月溪(錫容)孝行錄後序, 觀張餘力齋集感而爲序, 一心齋序, 訪李君京彦甫聽彈琴序, 贈柳參奉漢五序, 自警序,箴 : 南坡亭壁上箴, 戒子啓元箴, 贈諸生箴, 憑几箴, 食色箴, 晝寢箴銘 : 明鏡銘, 自警銘, 座右銘說 : 人心道心說, 心字說, 竹說贈魯竹坡仲敬, 張友志敎石聾說, 黃德五號石東說, 離孫高在天字說上樑文 : 南坡亭上樑文, 孝子崔公旌閭上樑文, 石串亭上樑文祭文 : 祭高氏妹文, 祭蘭石朴承旨(昌壽)文, 祭崔監役(鳳翰)文, 祭竹圃朴司諫(淇鍾)文狀 : 祖考莎隱公府君家狀, 先考海史公府君家狀, 學生崔公行狀, 義士贈敎官張公行狀, 上舍羅公行狀墓碣銘 : 先祖蒿巖公府君墓碣銘(幷序), 附先祖參議公世系事實錄墓表 : 先祖節度公府君墓表, 宣武原從 扈聖建功, 將軍節制使李公墓表附錄 : 輓詩(十四首), 祭文, 行狀, 墓表 跋(李孟範, 李啓善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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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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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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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謁邵城伯墓祗 昔聞文鶴山。今見看雉島。千里湖南孫。暮春始展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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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呈立齋奇丈 梅花未放柳梢遲。春日行人雪映眉。三到鰲山非學步。函筵薰炙已多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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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承旨崔益鉉以眞言恩譴濟州 通國齊心越視秦。脂帚軟熟保其身。何處得來崔益鉉。封章唐突感重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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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 김경범56)에 대한 제문 祭大谷金景範文 오호라!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께서 늦게 동방에 태어나 이미 끊어진 학문을 잇고 이미 어두워진 의리를 밝혀 사설을 물리쳐 선비들의 추향을 바르게 하고 이단의 무리를 물리쳐 세도를 밝히니, 사람들은 군신부자의 인륜이 있는 줄 알고 선비들은 격물치지 성의정심의 학문이 있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가까이로는 영남과 호남으로부터 멀리로는 관서와 해서에 이르기까지 문하에 찾아와 학업을 청한 사람이 무려 수천 명이었습니다.공은 묘년(妙年)의 나이에 뜻을 세워 가족을 데리고 선생을 따라 배웠는데, 독실하고 총명한 자질로 훈도하고 배양하는 가르침을 받은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30년이었습니다. 긍지(矜持)하던 것은 순수하고 견고해지고, 사색(思索)하던 것은 기쁘고 순해지고, 간단(間斷)하던 것은 접속되어 순수하게 사문의 성덕(成德)이 되고 성대하게 한 시대의 유종(宗儒)이 되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한 번의 병으로 마침내 천고의 사람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자연(子淵)57)이 죽고 백풍(伯豊)58)이 가버렸으니, 사문(師門)의 남은 실마리를 누가 수습할 것이며, 사문의 은미하고 깊은 뜻을 누가 발휘할 것입니까? 큰 의리가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은미한 말이 분석되다가 다시 혼잡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사문(斯文)의 불행입니다. 세도가 분열되고 이단의 무리가 점점 불어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이 이 때와 같은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사특함을 배척하고 정도를 호위하는 것은 세상에 그러한 사람 보기 어려우니, 이것은 이 세상의 불행입니다. 노사 선생께서 돌아가심으로부터 원근의 학자들이 의심스러운 것을 질정하고 덕을 고찰함에 오직 공에게 의지하여, 공경하여 감히 거만하지 못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끝나버려 형세가 장차 흐트러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사문(斯文)의 불행입니다. 궁벽한 시골의 한 선비에게 시운(時運)의 비태(否泰)가 매이고 풍화(風化)의 오륭(汚隆)이 관계됨이 이와 같음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의림(義林)은 몇 년 전부터 안으로는 부모님을 여의고 밖으로는 의귀할 분을 잃었고, 게다가 세상 변고는 점점 심해지고 학문은 날로 엉성해졌습니다. 오직 공이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에 있어 우러르기를 태산북두 같이 하고 공경하기를 시귀(蓍龜) 같이 하여 만년에 서로 의지할 계획으로 삼았는데, 어찌 나를 버림이 이같이 급작스럽게 하였습니까? 외롭고 쓸쓸하게 더듬거리며 길을 찾음에 내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소리 놓아 길게 불러봄에 눈물이 저승에 떨어집니다. 오호라! 말은 끝이 있지만 뜻은 무궁하니, 영령이여 지각이 있다면 이 제수 흠향하소서. 嗚呼。惟我蘆沙先生。晩出東方。繼已絕之學。明已晦之義。闢邪說而正士趍。攘異類而明世道。人知有君臣父子之倫。士加有格致誠正之學。近自嶺湖。遠至關海。及門請業。無慮數千人。公妙年立志。絜家從學。以篤實頴悟之資。受薰陶培養之教。首尾三十年。矜持者純固。思索者怡順。間斷者接續。粹然爲斯門之成德。蔚然爲一世之宗儒。誰知至於今日。而遽以一疾。竟作千古耶。子淵死矣。伯豊逝矣。師門緖餘。誰其收拾。師門微奧。誰其發揮。大義明而復晦。微言析而復混。此則斯文之不幸也。世道分裂。異類浸淫。生民塗炭。孰若此時。斥邪衛正。世難其人。此則斯世之不幸也。自先生沒後。遠近學者。質疑考德。惟公是倚。敬之而不敢慢。畏之而不敢肆。合焉已矣。勢將渙散。此則斯文之不幸也。誰知窮巷一布衣。繫時運之否泰。關風化之汚隆。有如是哉。義林年歲以來。內失怙恃。外失依歸。加以世故轉深。學問曰疎。惟公相望在邇。仰之如山斗。敬之如蓍龜。以爲晚暮相依之計。何其棄我。若是忽劇。踽踽擿埴。余將疇依。放聲長呼。淚落懸泉。嗚呼。言有盡而意無窮。靈其有知。歆此奠儀。 대곡(大谷) 김경범(金景範) 김석귀(金錫龜, 1835∼1885)를 말한다. 자는 경범, 호는 대곡,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과 함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노사학파의 3대 제자로 불렸다. 저서로는 《대곡집》이 있다. 자연(子淵) 공자의 수제자 안회(顔回)의 자이다.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백풍(伯豊) 주자의 고제(高弟) 오필대(吳必大)의 자이다. 일찍 죽었으며 저서로 《사해집(師海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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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부사 박공59) 헌양 에 대한 제문 祭長興府使朴公【憲陽】文 오호라! 부사께서 우리 고을에 부임한 것이 옛날 어느 때였던가? 정직한 풍모와 자혜로운 덕과 엄격하고 밝은 다스림과 훈도한 가르침이 사람들의 이목에 익숙하고 사람들의 구설에 회자되었던 것이 전후로 20년이 하루 같았습니다. 심지어 아녀자들과 하인들도 추모하여 생각하며 노래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습니다. 두루 맡아서 공적을 쌓았고 늙어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심에 남북으로 길이 멀어 인사드릴 길이 없었더니, 어찌 요망한 기운과 무지개[螮蝀]60)가 남쪽 지방에 들끓음에 얽힌 뿌리에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것61)이 또 우리 부사에게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백수(白首)의 조개(皁蓋)62)를 남쪽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넉넉한 기량63)으로 복잡한 일 잘 처리하니 악한 무리들이 그칠 줄 알고 성을 지키는 조치는 오랠수록 더욱 견고하여 이웃 고을이 족히 힘입고 한 도가 매우 든든해졌습니다.오호라! 하늘의 마음은 알기 어렵고 시사(時事)는 평정하기 어려우니, 귀순한 도둑이 외부의 원조를 얻어 도리어 치성하고, 달아난 적이 내부의 호응을 믿어 난입[闖入]하였네. 괴뢰(傀儡)가 사방에서 모여들고 이무기[虺蝎]가 멋대로 독을 끼칩니다.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흩어짐에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였습니다.64) 관산(冠山)은 광채를 더하고 호수는 문득 맑아졌습니다. 상중의 사람이 망극하여 천 리에 달려가 곡하였습니다. 태양이 밝고 밝아 원수를 이에 잡았습니다. 능주[綾陽]로 돌아오는 길에 유민들 달려가 모였습니다. 감당(甘棠)65) 같은 쌍백(雙柏)66)은 슬픔에 쌓인 채 풍상을 지났습니다. 제문을 가지고 제사 드리니, 눈물이 샘처럼 쏟아집니다. 오호 통재라! 嗚呼。侯之來莅我鄕。在昔何時。正直之風慈惠之德。嚴明之治。董陶之教。慣人耳目。膾人口舌。前後二十年如一日。以至婦孺輿㒗。莫不追思歌詠。久而不忘。歷典積勞。退老養閒。南北脩夐。拜床無階。豈意妖氛螮蝀。南路鼎沸。而盤根利器之別。又在於我侯哉。白首皁蓋。南民相慶。恢刃剸劇。匪類知戢。城守調度。久而益固。隣壤足賴。一省差强。嗚呼。天心難知。時事難平。歸順之寇。得外援而反熾。敗遁之賊。恃內應而闖入。傀儡四集。虺蝎肆毒。城陷軍散。舍魚取熊。冠山增色湖水動淸。棘人罔極。千里奔哭。天日昭昭。仇讎斯得。綾陽歸路。遺民奔聚。甘棠雙柏。悲纒風霜。操文致侑。淚隕如泉。嗚呼痛哉。 장흥 부사(長興府使) 박공(朴公) 박헌양(朴憲陽, 1830∼1894)을 말한다. 자는 계정(繼正),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858년(철종9) 식년시에 진사로 합격하여 호조 정랑을 거쳐 1894년 7월에 장흥 부사로 부임하였다. 같은 해 9월 동학군이 2차 봉기하고, 10월에 공주 우금치에서 패전한 후 수만 명이 웅치에서 장흥으로 진격하여 12월에 장령성이 함락되어 전사하였다. 《梅泉野錄 卷2》 무지개[螮蝀] 무지개는 음양의 기운이 부당하게 어울려 생기는 것이므로 천지의 음기(淫氣)를 표상한다. 《시경》 〈용풍(鄘風) 체동(螮蝀)〉에 "무지개가 동쪽에 있으니, 감히 이를 가리킬 수가 없네.[蝃蝀在東, 莫之敢指.]"라고 하였다. 얽힌……것 박헌양이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였다는 말이다. '반근(盤根)'은 '반근착절(盤根錯節)'의 준말인데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비유한다. 주로 외직(外職)으로 나가 맡기 어려운 고을을 잘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조개(皁蓋) 검은 비단으로 만든 수레 위에 치는 일산(日傘)으로 지방 관원의 행차를 뜻한다. 넉넉한 기량 본문의 '회인(恢刃)'을 풀이한 말인데, 이 말은 《장자》에 나온다.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하여 소를 잡고는 문혜군에게 주면서 "저는 칼을 잡은 지 19년에 잡은 소가 수천 마리나 되지만 칼날은 금방 숫돌에 간 듯합니다. 저 관절에는 반드시 사이가 있고 칼날은 두껍지 않으니, 두껍지 않은 칼날로 그 사이에 휘두른다면 반드시 넉넉함이 있습니다.[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라고 하였다. 《莊子 養生主》 물고기를……취하였습니다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였다는 말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바라는 바요, 곰발바닥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으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감당(甘棠) 지방관이 선정(善政)을 펼친 곳을 말한다. 주(周) 문왕(文王) 때 선정을 펼친 소공(召公)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며 감당나무 아래 머문 일이 있는데, 그 뒤 백성들이 소공의 덕을 그리워하여 감당나무를 보호하며 〈감당〉 시를 지어 읊고 제사를 지냈다. 《詩經 召南 甘棠》 쌍백(雙栢) 북송(北宋) 때 구준(寇準)이 파동현(巴東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관청 뜰에 손수 한 쌍의 측백나무를 심었는데, 그가 심은 측백나무를 백성들이 감당(甘棠)나무에 비겼다는 '내공백(萊公柏)'의 고사가 있다. 《與猶堂全書 第五集 政法集 卷29 遺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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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남 홍공67)에 대한 제문 祭鳳南洪公文 공은 준수하고 시원한 자질로 가정에서 학문한 공을 익혀 위연(偉然)히 효우(孝友) 개제(愷弟)의 행실이 있었고, 의연(毅然)히 강방(剛方) 정직(正直)한 덕이 있었고, 충연(充然)히 경륜(經綸) 시위(施爲)의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가 때와 더불어 어긋나고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오솔길을 내어 꽃을 심고 산을 구입하여 정자를 지어 만년에 기오(寄敖)68)할 장소로 삼았는데, 조물주가 시기하고 좋은 일에 장난치는 일이 많아 오래도록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여 갑자기 이렇게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오호라! 궁통(窮通)은 운명이고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렸으니, 하늘과 운명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있고, 내가 한 덩이 혈기로 하여금 능히 그 명정(明淨)하고 순결(純潔)함을 보호하여 천지 부모에게 돌려놓는 것은, 공은 여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의림(義林)은 왕래하며 지낸 것이 가장 오래여서 지우를 받아 친밀하여, 꽃피는 아침이나 달뜨는 저녁, 바람 부는 대낮이나 눈 내리는 밤엔 생각하여 그리워하지 않은 때가 없었고, 글방이나 정자, 산과 들 시내와 다리에서 서로 연이어 함께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이나 기·차·운·율(記劄韻律)에 대해 경도되지 않은 말이 없었습니다. 서로 만나면 밤새도록 잠자는 것도 잊고 날이 다하도록 밥 먹는 것도 잊어 끊임없이 담론하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고, 만나지 못하면 날마다 인편을 보내고 달마다 우체 편을 통해 서간이 이어지고 서찰이 쌓여 장황해도 그칠 줄 몰랐는데, 지금은 끝나버리고 끝나버렸습니다.여생을 돌아보고 생각해 보건대, 지금부터 이후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 만나는 온갖 감회는 누구에게 토로할 것입니까? 혹시 쌓아두고 또 쌓아두어 훗날 서로 만난다면 장차 황천의 달 아래서 악수하고 실컷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변하여 사라진 것은 형체이고 그 정영(精英)과 기상(氣爽)은 항상 상상하고 꿈꾸는 사이에 흘러 통하니, 장차 꿈과 생시가 섞이고 사생이 하나여서 형체나 외물의 얽매이는 밖에서 끊임없이 왕래하며 서로 노닐 것입니까?그 마을에 들어가니 누대와 연못은 옛날 같이 있는 것을 보겠고, 그 문에 들어가니 소나무와 국화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겠고, 그 집에 들어가니 서책과 거문고가 어제같이 정연함을 보겠는데, 하나의 작은 방에는 유독 주인옹을 볼 수 없으니. 오호 통재라! 公以俊茂秀爽之姿。服詩禮學問之功。偉然有孝友愷弟之行。毅然有剛方正直之德。充然有經綸施爲之才。道與時違。世莫我知。開經栽花。買山結亭爲晩暮寄敖之所。誰知造物有猜。好事多戱。使未得久享其樂。而遽此謝世耶。嗚乎。窮通命也。死生天也。天與命有不在我。而我之所以使一團血氣。能保其明淨純潔。而交還於天地父母者。公其至此。庶乎無憾矣。義林過從最久。見知密勿。花朝月夕。風日雪夜。無時而不思想。庠塾亭樓。山野溪橋。無處而不牽連。經史子集。記劄韻律。無言而不傾倒。相見則竟夜忘寢。竟日忘食。娓娓而不知倦。不見則日便月禠。連簡累牘。張皇而不知止。今焉已矣。今焉已矣。顧念殘生。未知自此能保幾年。而其間所遇百感萬懷。向誰討破也。其或積之又積。使他日相逢。將握手劇談於泉臺夜月之下耶。抑所化者形也。而其精英氣爽。常常流通於想像夢寐之間。其將混夢眞一死生。而源源相遊於形骸物累之外也耶。入其洞。見䑓池如古。入其門。見松菊猶存。入其室。見書冊琴瑟。秩秩如昨。而一區方丈間。獨不見主人翁。嗚呼痛哉。 봉남(鳳南) 홍공(洪公) 홍채주(洪埰周, 1834∼1887)를 말한다. 자는 경좌(卿佐), 호는 봉남,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저서로는 《봉남집》이 있다. 기오(寄敖) 오만한 마음을 부친다는 뜻으로, 자기 뜻대로 자유로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동진(東晉)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남쪽 창가에 기대어 오만함을 부치니, 무릎을 용납할 만한 곳이 편안하기 쉬움을 알겠노라.[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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