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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扶安郡) 좌산내면(左山內面) 연동리(蓮洞里) 각인산지도본(各人山地圖本)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사회-지리-지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군 좌산내면 연동리에 소재한 여러 산들의 지도본 부안군(扶安郡) 좌산내면(左山內面) 연동리(蓮洞里)에 소재한 여러 사람들의 선산(先山)을 표시한 지도(地圖)이다. 모두 전주최씨 부안문중과 관련한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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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심원록(道洞尋院錄) 고문서-치부기록류-시도기 교육/문화-서원/향교-시도기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도동서원을 찾은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있던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찾았던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이다. 도동서원애서는 김구(金坵), 성중엄(成重淹), 김석홍(金錫弘) 등을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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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德齋記扶治南數弓許有曰內基三圍壠一面野蓬岳西立瀛洲東出前與席洞瓮菴公先塋瓮井固窮堂祖墟地脉相連勢起伏而氣明麗居者稱道行人指點此維我十世祖諱善立奉事府君以下繼葬之域窃惟府君古家英才好學察埋處世由道當時到今人猶慕善况在後孫乎奉德爲齋貌然簡素非徒止於齊宿等例而已要必使其來裔奉承先業不累祖德之謂時必省歲一祀之典遠近宗支世世肅行中年天變墓齋人▣事僅形欠實一般悵歉雖然顧吾祖靈想山與川淑氣依舊自著矣何幸風浪之餘思潮復常將此而去可期昇平及時振起擴立大本忘私相勵同根互愛則報先昌後幷可得也僉族盍夫共勉乎此丁酉冬 不肖后孫朱洪謹撰注意之餘下入思潮復常四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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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 김제(金濟) 용강기(龍崗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己巳小春之下浣 金濟 己巳小春之下浣 金濟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기사년 10월 하순에 김제가 용강이라는 자호를 지은 최공을 위해 지은 기문. 기사년 10월 하순에 김제(金濟)가 용강(龍崗)이라는 자호(自號)를 지은 최공(崔公)을 위해 지은 기문이다. 최용강은 고창군 부안면에 있는 수강산(水崗山) 기슭에 살고 있었다. 산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땅이 기름지고 풍속이 순박하고 효자 효녀들도 많이 나오는 곳이어서 군자가 은거하며 현자가 노닐기에 좋은 선경(仙境)이었다. 바로 이곳이 최공이 사는 마을이며 그 마을의 이름이 바로 용강이었다. 최공은 그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였던 그는 나이 90에 홍안(紅顔) 백발(白髮)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산수의 사이에서 사는 자신을 용강이라고 부른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김제는 찬탄하고 있다. 김제는 당시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춘추관사(春秋館事) 성균관사(成均館事)의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 적혀 있는 최용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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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樹興學稧序夫稧也者稧其可稧之稧而稧之稧者也未嘗不有古今修稧之多而自有異焉香山靑衿九老之一盛會也繁臺白石三豪之一奇事也至若此稧惟我氏族繼出完山自麗以後散居八域其數不爲不多至于扶安派計其代數則十三代計其年記則四百年冠員不過數百當此搶攘之世屢經大荒之年事力不贍文憲零滯余其不已者慨歎故辛丑十一月初十日門會之餘䦨商此意選其可與者二十七員也始刱此設盖欲興其學而名其稧也每年講信則春以麥秋秋以小春以作花樹之會欲成杏樹之風豈不美哉豈不休哉大抵學也者繼往聖開來學之學字也廢有其時興有其時興之則其廢也易廢之則其興也難以若子思之聖去聖遠而異端起也懼夫愈久而愈失其眞也推本堯舜質以父師以詔後學之生如此孤陋之所見雖是蔑學豈無開學之道乎每年春秋講會時講則以自願一經詩則以四律一章一以叙百代至親之誼一以勸不倦不厭之道百世春風渾成杏樹杏樹之下作花樹之會花樹之下作杏樹之風嗟我東邦更作鄒魯之世日月回明山川有彩三百六十州二千萬生靈盡在春風和氣中矣魯誦之猶聞不獨稱矣漢橋之圜聽罔專美矣今以香社之樂繁臺之美言之哉勉之焉勉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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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계서(興學稧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들이 조직한 흥학계 취지서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들이 친목도모를 위하여 조직한 흥학계에 관한 글이다. 흥학계를 만들게 된 시기와 취지 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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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이우면(李愚冕) 춘곡서(春谷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己巳冬十一月旣望 李愚冕 己巳冬十一月旣望 1929 李愚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9년에 이우면이 최병우의 호 춘곡에 대하여 작성한 서. 1929년 11월에 이우면(李愚冕)이 최병우(崔秉禹)의 호(號) 춘곡(春谷)에 대하여 작성한 서(序)다. 자신이 비록 늙고 병들어 붓을 놓은 지 오래되어 다른 사람의 호(號)에 대하여 감히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친구 정인소(鄭寅韶)의 얘기를 들어보니 최병우야말로 참다운 군자(君子)이니 사양할 수 없다면서 춘곡(春谷)이라는 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봄(春)은 그 기운이 조화롭고 골(谷)은 그 땅이 깊고 깊어서, 골이 봄을 만나면 곧 만물이 발생하는 시작이 되니 그 나머지는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병우가 호남의 뛰어난 명사라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자신은 늙고 아첨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시를 지어 서를 쓴다고 하였다. 이우면은 이 시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가 이원(李愿)을 반곡(盤谷)에 보내면서 지어 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를 인용하면서 최병우가 은거지에서 군자의 생활을 보내면서 출유천교(出幽遷喬), 즉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날아가듯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우면은 1881년(고종 1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홍문관 부수찬, 교리,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1885년 공조참의, 대사간, 형조참의를 지냈고, 1886년 이조참의, 호조참의,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승정원 우승지 등을 거쳐 1890년 호조와 병조의 참판을 지냈고, 1891년 한성부 우윤, 예조참판, 1892년 한성부 좌윤,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비서원승(秘書院丞), 1898년 회계원경(會計院卿), 1902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5년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임시서리 궁내부대신사무, 비서감경(秘書監卿)이 되어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을사오적의 처형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906년 궁내부특진관, 비서감경, 홍문관학사, 장례원경 등을 지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기사년으로 밝히고 있어서 이를 1929년으로 추정했으나, 이미 조선이 망한 뒤에 장례원경 홍문관학사라는 관직명을 그대로 기재하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 간지를 잘못 쓴 것으로도 보이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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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進土) 최안손(崔顔孫) 행장(行狀) 고문서-증빙류-행장 정치/행정-조직/운영-행장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진사 최안손의 행장 초안 진사(進土) 최안손(崔顔孫) 행장(行狀)이다. 수정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안(草案)으로 보인다. 탈락 부분이 있어, 누가 지은 글인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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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죽당(翠竹堂) 최해(崔海) 행장(行狀) 고문서-증빙류-행장 정치/행정-조직/운영-행장 鄭誠一 鄭誠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취죽당 최해 등 전주최씨 인물들의 행장 모음집 취죽당(翠竹堂) 최해(崔海) 등, 전주최씨 유명 인물들의 행장(行狀)을 모은 것이다. 최언철(崔言哲), 최진석(崔震錫) 등 십 여 명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수정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초고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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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암(竹菴) 최규동(崔圭東)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安東金魯東 撰 金魯東 崔圭東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김노동이 작성한 죽암공 최규동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모년에 김노동(金魯東)이 죽암공 최규동(崔圭東)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규동(崔圭東)은 자는 재숙(在淑), 호는 죽암(竹菴)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최씨의 시조는 고려문하시중 아(阿)이며, 연촌선생(烟村先生)에 이르러 선덕이 드러나고 벼슬로는 최성원(崔成元), 학행으로 이름이 난 자는 최광립(崔光岦), 효로 이름이 난 자는 증조 최한풍(崔翰豊)이다. 조는 최이(崔禰), 부는 한팔(翰八), 모는 금성박씨(錦城朴氏)이다. 죽암은 태어나 자라면서 준수하고 점잖아 무게가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섬기고 상중(喪中)에는 예를 다하여 허물이 없게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고 사람들을 믿음과 어진 마음으로 대하여 모든 이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가난한 사람을 보면 형편에 따라서 두루 구휼하였다. 나라에 국난(國難)이 일어나자 의사 이석용(李錫庸)과 더불어 꾸민 일이 발각되어 추궁당하며 갖은 곤욕을 치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주암(舟巖)은 선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가 만년에 머물던 곳으로 오랫동안 대대로 내려온 세천지(世阡地)였는데 불행하게도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서 그동안 백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죽암이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최씨 문중의 소유로 회복되었다. 죽암은 무인년에 그가 태어난 곳에서 63세로 사망하였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용호(龍鎬)와 재호(在鎬), 사위는 소재륜(蘇在倫), 박찬기(朴燦琦), 박홍양(朴洪陽) 등이 있으며, 그리고 4명의 손자 낙현(洛賢), 양현(洋賢), 생현(泩賢), 정현(涏賢) 등이 있다. 죽암공의 묘는 남원 몽촌(夢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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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행곡(杏谷) 최태환(崔泰煥)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丙寅蜡月吉日 嘉善大夫前香山守波澄尹寗求撰 丙寅蜡月吉日 尹寗求 崔泰煥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6년 음력 12월에 윤영구가 작성한 행곡공 최태환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내용 1926년 음력 12월에 윤영구(尹甯求)가 행곡공 최태환(崔泰煥)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병인년에 윤영구(尹甯求)가 행곡공 최태환(崔泰煥)의 묘비에 사적(事蹟)이나 덕행(德行)을 후세에 알릴 목적으로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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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谷公諱泰煥墓碣銘幷序崔叅奉在洪狀其先大人杏谷公行敻途跋涉請不侫銘隧道按公諱泰煥字泰甫其先全州人上祖高麗侍中文成公諱阿厥後世襲圭組爲東方大族入我 朝諱霮號月塘文科戶曺叅議集賢殿提學學行邃古世稱月塘先生生諱匡之克紹詩禮文科集賢殿提學是生諱生明生員殿直學趾先美享〔立祠〕甕井■(院)生諱秀孫號固窮堂生五男序居五諱竟成生員以遺逸薦授叅奉生諱濱叅奉生諱大立判官甲子靖社功臣於公九世祖■■(高祖)■■■■■■(通德郞)曾祖諱鎭億 贈通訓大夫祖諱翼信 贈秘書承生諱光重配淸州韓氏得采女卽公之妣〔考〕 ■■(高宗)丙申十一月十一日生生而性至孝家素貧菽水之供踰人甘毳日親有不安節忍思鳧肉時天寒非城市不可倉卒買得乃號泣于川野有雙鳧自來獻身供之卽瘳鄊里莫不稱至誠攸感士林齊籲至登道薦己亥四月二十四日歾壽六十四移葬于扶安郡保安〔舟山〕面■■■■■■■■■■〔士山前麓先考墓北未坐原〕配保安張在孝女東萊鄭榮弼女生一男卽在洪三女光山金叅奉先澤士人扶寜金炯介古阜李鍾乙秉哲秉南秉基三孫公以名賢之裔有卓異之行誼其登庸于 朝聞達于邦而命與時舛不得展布其百一惜哉然在洪在斤斤乎隧途之銘公之名足以不朽詩云君子有孝子吾云孝子有孝子銘曰崔於我韓大姓之一公於崔氏名又副實孝之卓異無愧古賢矧乎肖子賁厥隴阡松栝蒼蒼斧斤莫侵鬣封何藏孝子之心丙寅蜡月吉日嘉善大夫前香山守波澄尹寗求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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叅奉公諱竟成墓碣銘幷序崔之望完山者爲湖南名族盖其氏葉肇系於高麗侍中文成公諱阿屢傳至集賢殿提學諱霮號月塘家聲益著顯自後聞達名碩代不乏盡至若烟村先生伯氏提學公之子殿直公諱生明號甕菴正學高節致仕講道有子固窮堂諱秀孫嘗受學于寒暄金先生深被稱詡修善厚蔭殆同古之王晉公手植五槐於庭除曰吾子孫之顯達者必懸鼓於此後果有驗其子五人皆登大小科咸稱以難兄難弟其季曰竟成早中司馬以遺逸薦授禮賓寺叅奉不就兄弟五人同居一室共宿大被沉潛經傳講究性理無意於名利韜光鏟彩不以貧賤爲慽慽不以富貴爲汲汲以沒世墓在扶安席洞山先兆下癸坐原端人慶州金氏生二男二女男長曰濱叅奉次曰淇女適丁淵金彦璧濱男大立女適金起文大立有五男長震男次應男察訪次奇男升男益男次致道武司果淇男弘立弘立生二男長曰巘武主簿次曰峻奉事丁酉亂叅功臣錄券次屹武兵叅丁酉亂原從功臣察訪男處中早登武科至營將 萬曆戊午虜犯上國天朝請救公應募與遼東伯金應河同往劉都督綎敗績公爲賊所擒■〔脅〕使促降公罵而不屈賊曳於蘆田三十里公激憤益勵罵不絶口賊乃縛樹下椎背吐血而死 皇上特書萬古忠臣崔處中七字出送本國曰忠貫日月節抗霜雪卽今之文天祥云 朝家嘉之命旌錄勳 贈兵曺叅判招魂而葬有二男長良弼武通政節制使次曰仁弼餘不盡錄噫公之積善藝德亦可以驗信於雲仍之功烈顯爀嘉言善行宜有以垂範於來世者中経欝攸灰燼之慘家無遺傳只有邑覽所記者甚寂寥故公之生平履歷及生卒年月亦不詳載是可慨也十一代孫昌煥畧記先系與後承事行編成狀草來示不侫請以墓銘顧余匪其人無其文而難孤其勤意搦筆如此庶幾無劉乂諛墓之譏乎時重光大淵獻仲秋旬三德殷宋秉珣謹撰叅奉公諱竟成行蹟公諱竟成全州人固竆堂諱秀孫第五子也當 中明兩朝伯仲司成公檢閱公俱以生進登文科歷敭淸顯宦遊京師仲叔處士公處庵公又以生進隱德修行特蒙 旌褒配食賢祠公以父兄子弟序居第五亦以生員薦授叅奉則固竆公五鼓亭種德之符若是契合而繼以門蔭之趾美棣華連芳亦可謂難兄而難弟矣墓在席洞先塋下配慶州金氏生二男長濱叅奉次淇濱子大立生五男長震男次應男察訪次奇男次升男次益男次子致道武司果淇子弘立生二男長巘次峻次子屹皆武科有一等功臣錄券察訪一男處中早登武科至營將萬曆戊午虜犯上國 天朝請救公應募與遼東伯金應河同往劉都督綎敗績公爲賊所擒脅使促降公罵而不屈賊曳公於蘆田三十里公激憤益勵罵不絶口賊乃縛樹下椎背吐舌而死 皇上特書萬古忠臣崔處中七字出送本 國曰忠貫日月節抗霜雪卽今之文天祥云 朝家嘉之旌閭錄勳 贈兵曺叅判招魂而葬有二男長良弼武營將次仁弼營將四男長以濟次以珩次以瑜次以球武營將次子以璇察訪噫公之平生行治卽其薦剡而觀之可想當時公議之不泯而有足以垂範後世者然中経鬱攸之■■衍之舊沒入於灰燼之中無得以徵焉者則可勝慨恨哉玆敢略掇其子孫錄以識之從九世孫鼎錫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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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최병수(崔秉洙) 십이대조고조비축문(十二代祖考祖妣祝文) 고문서-시문류-축문 종교/풍속-관혼상제-축문 庚戌九月癸丑朔十五日丁卯 秉洙 庚戌九月癸丑朔十五日丁卯 崔秉洙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경술년에 최병수가 지은 십이대조고와 십이대조비의 제문 경술년(癸丑年)인 1970년에 최병수(崔秉洙)이 지은 본인의 십이대조고(十二代祖考)와 십이대조비(十二代祖妣)의 제문(祭文)이다. 제삿날인 9월 15일에 읽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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