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이우면(李愚冕) 춘곡서(春谷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己巳冬十一月旣望 李愚冕 己巳冬十一月旣望 1929 李愚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9년에 이우면이 최병우의 호 춘곡에 대하여 작성한 서. 1929년 11월에 이우면(李愚冕)이 최병우(崔秉禹)의 호(號) 춘곡(春谷)에 대하여 작성한 서(序)다. 자신이 비록 늙고 병들어 붓을 놓은 지 오래되어 다른 사람의 호(號)에 대하여 감히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친구 정인소(鄭寅韶)의 얘기를 들어보니 최병우야말로 참다운 군자(君子)이니 사양할 수 없다면서 춘곡(春谷)이라는 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봄(春)은 그 기운이 조화롭고 골(谷)은 그 땅이 깊고 깊어서, 골이 봄을 만나면 곧 만물이 발생하는 시작이 되니 그 나머지는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병우가 호남의 뛰어난 명사라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자신은 늙고 아첨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시를 지어 서를 쓴다고 하였다. 이우면은 이 시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가 이원(李愿)을 반곡(盤谷)에 보내면서 지어 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를 인용하면서 최병우가 은거지에서 군자의 생활을 보내면서 출유천교(出幽遷喬), 즉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날아가듯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우면은 1881년(고종 1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홍문관 부수찬, 교리,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1885년 공조참의, 대사간, 형조참의를 지냈고, 1886년 이조참의, 호조참의,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승정원 우승지 등을 거쳐 1890년 호조와 병조의 참판을 지냈고, 1891년 한성부 우윤, 예조참판, 1892년 한성부 좌윤,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비서원승(秘書院丞), 1898년 회계원경(會計院卿), 1902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5년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임시서리 궁내부대신사무, 비서감경(秘書監卿)이 되어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을사오적의 처형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906년 궁내부특진관, 비서감경, 홍문관학사, 장례원경 등을 지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기사년으로 밝히고 있어서 이를 1929년으로 추정했으나, 이미 조선이 망한 뒤에 장례원경 홍문관학사라는 관직명을 그대로 기재하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 간지를 잘못 쓴 것으로도 보이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