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이식(李植) 연촌선생가전시문록후서(烟村先生家傳詩文錄後叙)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崇禎丙子七月之望 李植 崇禎丙子七月之望 李植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636년(인조 14) 7월에 이식이 연촌 최덕지의 가전시문록에 쓴 후서. 1636년(인조 14) 7월에 이식(李植)이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에 쓴 후서(後叙)이다. 최덕지는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연촌이 귀향할 때 조정의 명사(名士)들이 시부(詩賦)를 지어주며 전별했으며, 존양루에도 제문을 지어주었다. 또 장수를 누리고 많은 후손을 두고 있는 연촌의 부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칭송하는 시문도 많이 지어 주었다. 전주최씨 문중에서는 이들 시문을 오래도록 소중하게 지켜왔지만 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존양루가 훼손되고 시문도 산일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제 향리의 사람들이 연촌을 위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드리고 있으며, 연촌의 7대손 전 참봉 최정(崔珽)은 남아 있는 시문 90여 수를 수습하여 시문집을 간행하면서 이식에게 발문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이식은 연촌이 순실하고 순덕한 학자로 백세(百世)의 사표가 되는 분이라고 하였다. 또한 당대에 고관에까지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결과적으로는 곧바로 불어닥칠 문종의 죽음과 노산군의 양위(讓位)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니, 얼핏 보기에는 기미를 알아채고 화를 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명석하다고 하여 어찌 그같은 천수(天數)를 미리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이식은 ?주역(周易)?의 겸괘(謙卦) 단사(彖辭)에서 "천도는 차서 넘치면 허물어뜨리고 겸허하면 더해 주며, 지도는 차서 넘치면 변화시키고 겸허하면 계속 흘러가게 하며, 귀신은 차고 넘치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주며, 인도는 차고 넘치면 싫어하고 겸허하면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라는 구절과,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서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 모든 일이 연촌의 순수한 덕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관계에서 갑자기 물러난 것은 연촌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형 최광지(崔匡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연촌을 비롯한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후서를 지은 이식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 등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설서(說書), 북평사(北評事), 선전관(宣傳官) 등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지평(砥平)으로 낙향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조좌랑에 기용되었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그 뒤 탈출하여 귀국했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문집으로는 『택당집(澤堂集)』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