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졸시에 차운한 열재 어른26)의 시에 삼가 화운하다 –3수- 奉和悅齋丈所次拙詩韻【三首】 훌륭한 시편27)이 먼 곳에서 전해오니 瓊章來自遠문득 같은 당에 모여 있는 듯하네 還似會同堂같은 문하에서 도를 배운 지 오래되었고 學道同門久백세의 선생28)에게 강학한 세월이 길었다오 講先百世長사문은 끝끝내 귀착할 곳이요 斯文歸宿地세상은 희극이 벌어지는 무대로세 世事劇戱場평소에 다른 뜻이 없었으니 平素無他志더 이상 속세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네 不容更入商무고를 변론하고 가르침을 지킴은 辨誣與守訓대의가 진실로 당당한데 大義固堂堂나의 졸필은 괴롭게 쥐어짜낸 것이지만 拙筆雖云苦어른의 논설은 가장 큰 장기에서 나온 것이라네 盛論最所長후산은 경건하게 한 줄기 판향을 살랐고29) 後山一瓣敬단목은 묘 마당에서 삼년을 더 거처했다오30) 端木三年場죽어서는 열전에 함께 오를 것이니31) 堪可死同傳어찌 그저 음률 맞춰 수창할 뿐이랴32) 豈徒宮協商나라 없는 지 사십 년 세월 동안 無邦四十載지조를 지키는 것도 당당하였네 所守亦堂堂성난 두 눈은 눈초리가 찢어지고 怒目眥曾裂썩은 속마음은 원한이 깊기도 하여라 腐心恨太長희소식을 전해 오는 걸 얼핏 들었으니 似聞傳信好끝내 좋은 결말을 얻을 수 있으리라 庶得終出場황급하게 서둘러 죽지 마소 且勿須臾死밝은 시대에 나라의 걱정해줌을 받을 테니33) 明時見憂商 瓊章來自遠, 還似會同堂.學道同門久, 講先百世長.斯文歸宿地, 世事劇戱場.平素無他志, 不容更入商.辨誣與守訓, 大義固堂堂.拙筆雖云苦, 盛論最所長.後山一瓣敬, 端木三年場.堪可死同傳, 豈徒宮協商?無邦四十載, 所守亦堂堂.怒目眥曾裂, 腐心恨太長.似聞傳信好, 庶得終出場.且勿須臾死, 明時見憂商. 열재(悅齋) 어른 소학규(蘇學奎 1859~1948)로, 열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 자는 화지(化知)로,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서 태어났다. 진사 소휘식(蘇輝植)의 아들이다. 189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900년에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 들어가서 위기지학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열재집(說齋集)》이 있다. 훌륭한 시편(詩篇) 원문의 경장(瓊章)은 남의 훌륭한 시문(詩文)을 비유한 말로, 아름다운 패옥이란 뜻의 경거(瓊琚)에서 온 말이다. 《시경》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과를 던져주기에, 경거로써 보답하였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백세(百世)의 선생 열재 어른과 후창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가리킨다. 후산(後山)은……살랐고 후산은 북송(北宋)의 시인 진사도(陳師道, 1053~1101)의 호로, 그의 자는 무기(無己) 또는 이상(履常)이다. 증공(曾鞏)과 소식(蘇軾)에게 배웠다. 판향(瓣香)은 오이씨 비슷하게 생긴 향으로, 원래 선승(禪僧)이 남을 축복할 때 피우는데, 전하여 존경하는 사람을 앙모하는 것을 비유한다. 진사도의 시에 "지난날 한 줄기 판향을, 경건히도 증남풍을 위해 살랐다오.[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고 하였다. 남풍(南豐)은 증공의 호이다. 《後山集 卷1 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 단목(端木)은……거처했다오 단목은 단목사(端木賜)로, 공자(孔子)의 제자 자공(子貢)을 가리킨다. 그의 성은 단목, 이름은 사, 자는 자공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옛적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지만……자공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더 거처한 뒤에 돌아갔다.[昔者孔子沒, 三年之外, 門人治任將歸,……子貢反, 築室於場, 獨居三年然後歸.]"라고 한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죽어서는……것이니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과 범진(范鎭)은 평생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였는데, 사마광이 일찍이 범진에게 말하기를 "나와 그대는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열전에 함께 오를 것이다.〔吾與子生同志, 死當同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5》 어찌……뿐이랴 궁(宮)과 상(商)은 모두 오음(五音)의 하나인 궁음(宮音)과 상음(商音)으로, 여기서는 악곡이나 시가의 음률 또는 음조를 말한다. 밝은……테니 원문의 견우상(見憂商)은 백성이 나라 또는 임금의 걱정해줌과 헤아려줌을 받는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의 모서(毛序)에 "선왕이 여왕의 포학한 정사의 뒤를 이어 안으로 난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으며,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여 잠시도 몸을 편안히 하지 않고 행실을 닦아 재앙을 사라지게 하려고 하자, 천하 사람들은 왕의 교화가 다시 행해지고 백성들이 임금의 걱정해줌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를 지은 것이다.[宣王承厲王之烈, 內有撥亂之志, 遇而懼, 側身修行, 欲銷去之, 天下嘉於王化復行、百姓見憂, 故作是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