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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및 김태형 성하 와 망제봉에 올라서 同松坡及金台亨【性夏】 上望帝峯 시든 꽃 지르밟으며 푸른 산에 오르니 踏破殘花上翠微봄 빛과 시력이 함께 아른아른 하구나 春光眼力共依依하늘에 맞닿은 대륙이 어찌 끝이 있으랴만 際天大陸何涯限티끌 한 점도 날아들지 않는 땅은 없구나315) 無地纖塵一點飛두 객과 시와 술 즐기니 지금의 적벽316)이요 二客詩樽今赤壁영걸들은 바람 쐬고 목욕하며 봄옷 입었네317) 羣英風浴又曾衣기적 소리 울리고 청산은 저무는데 一聲汽笛靑山暮강북과 강남엔 지친 새들 돌아가네 江北江南倦鳥歸 踏破殘花上翠微, 春光眼力共依依.際天大陵何涯限, 無地纖塵一點飛.二客詩樽今赤壁, 羣英風浴又曾衣.一聲汽笛靑山暮, 江北江南倦鳥歸. 티끌 …… 없구나 온 땅이 오랑캐들로 오염되었다는 뜻이다. 지금의 적벽 중국의 적벽(赤壁)에서 있었던 옛 풍류를 지금 망제봉에서 즐기고 있다는 말이다. 적벽은 양자강(楊子江) 가에 있는 지명이다. 북송(北宋)의 소식(蘇軾)이 두 차례에 걸쳐 적벽 아래 강에서 객(客)들과 함께 선유(船遊)하면서 풍류를 즐기고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다. 바람 …… 입었네 일행이 봄옷을 입고 산수를 즐기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원문의 '증의(曾衣)'는 증점(曾點)의 옷인데, 봄옷을 비유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저마다 자신의 뜻을 말해보라고 하자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 대여섯과 아이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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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에 서사의 생도와 함께 회포를 논하며 2수 初冬 同社生 論懷【二首】 바람 세고 낙엽 지는 초겨울에 風高木落早冬時노소가 회포 논하며 각기 시를 읊네 少長論懷各賦詩황권352)은 청년 때부터 읽어야 하니 黃卷須從靑年讀단전353)이 어찌 백발이 돼서 변하랴 丹田豈到白頭移한 유자도 예로부터 천지를 다퉜는데 一儒自古爭天地대운이 지금은 금수와 오랑캐 만났네 大運如今値獸夷오직 뜰 앞에 찬 국화가 있는데 惟有庭前寒菊在도옹354)과 천년토록 서로 잘 알아주네 陶翁千載好相知꼿꼿한 가을 국화는 비에 먼지 씻기고 晩菊亭亭雨洗塵초당에는 다시 홀로 깬 사람이 있구나 草堂更有獨醒人뛰어난 문장은 많은 것을 부자로 여기지 않고355) 工文曾未多爲富가르친 아들도 어질면서 가난하지 않기는 어렵네 敎子亦難賢不貧뜻이 씩씩한들 어느 해에 하늘 밖의 붕새 될까 壯志何年天外翼계모가 졸렬하니 근래엔 못 가운데 물고기네 拙謀近日沼中鱗숲 속의 옛 일들도 이처럼 맑았으리니 林間故事淸如許소춘356)에 서재의 촛불 아래 관동들과 모였네 書燭冠童會小春 風高木落早冬時, 少長論懷各賦詩.黃卷須從靑年讀, 丹田豈到白頭移.一儒自古爭天地, 大運如今値獸夷.惟有庭前寒菊在, 陶翁千載好相知.晩菊亭亭雨洗塵, 草堂更有獨醒人.工文曾未多爲富, 敎子亦難賢不貧.壯志何年天外翼, 拙謀近日沼中鱗.林間故事淸如許, 書燭冠童會小春. 황권(黃卷) 책을 가리킨다. 옛날에 좀이 슬지 않도록 황벽(黃蘗) 나무의 즙을 짜서 서책에 발랐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단전(丹田) 본래는 도가(道家)의 용어로 이마, 명치, 배꼽의 삼단전(三丹田)이 있는데, 여기서는 심성(心性)을 가리킨다. 도옹(陶翁) 국화를 좋아하여 〈음주(飮酒)〉 시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읊었던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뛰어난……않고 뛰어난 문장은 문장을 많이 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소춘(小春) 음력 10월을 말한다. 당(唐)나라 서견(徐堅)의 《초학기(初學記)》에 "10월은 날씨가 따뜻하여 봄날과 같기 때문에 소춘이라고 한다.[十月天時暖似春, 故曰小春.]"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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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대에게 주다 贈朴南大 사람됨의 본령은 학문을 함에 있으니 爲人本領在爲學배움의 공을 못 이루면 죽어도 그치지 말라 學不成功死不休자중하기를 마땅히 보배인 양옥처럼 하고 自重當如良玉寶부질없이 쏘다녀 근심스런 낡은 송곳344) 되지 말라 謾遊莫作古錐愁안연의 재주는 절벽 때문에 다하였으니345) 顔才竭處緣懸壁증자의 일이관지를 통하면 쾌주 띄운듯하리라346) 曾貫通時放快舟먼저 이 마음부터 세속에서 벗어나야 先要此心超俗外당우 삼대347)와 함께 짝할 수 있다네 唐虞三代可同儔 爲人本領在爲學, 學不成功死不休.自重當如良玉寶, 謾遊莫作古錐愁.顔才竭處緣懸壁, 曾貫通時放快舟.先要此心超俗外, 唐虞三代可同儔. 낡은 송곳 송곳이 오래되어 무디어져서 낭중지추(囊中之錐)가 되지 못함을 말한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이 문객(門客)인 모수(毛遂)에게 "현사의 처세를 비유하자면, 마치 송곳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어서 그 끝을 당장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데, 지금 당신이 나의 문하에 있었던 3년 동안 아무도 당신을 칭송한 것이 없으니, 이는 당신에게 특별한 것이 없는 것이다.[夫賢士之處世也, 譬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 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 左右未有所稱誦, 勝未有所聞, 是先生無所有也.]"라고 하자, 모수가 "내가 진작 주머니 속에 들어갈 수만 있었다면 송곳 자루까지 다 나왔을 것이다."라고 답변한 뒤에, 평원군과 함께 초(楚)나라에 가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크게 인정을 받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안연의……다하였으니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공자의 도(道)가 한없이 큼을 감탄하면서 "부자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해 주시므로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나의 재주를 다하니, 부자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한지라, 그를 따라가고자 하나 따를 길이 없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라고 하였다. 증자의……띄우듯하리라 공부가 처음엔 힘이 들지만 높은 단계에 이르면 힘써 노를 젓지 않아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배처럼 될 것이라는 뜻이다.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증삼(曾參)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였다. 당우 삼대(唐虞三代) 당요(唐堯)ㆍ우순(虞舜)ㆍ하우(夏禹)ㆍ은탕(殷湯)ㆍ주 무왕(周武王)이 다스리던 시대를 가리킨다. 모두 중국 상고의 잘 다스려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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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에게 수창하다 현호. 운계331) 뇌경의 8세손이다. ○2수 酬鄭流石【賢好, 雲溪雷卿八世孫.○二首】 운계의 곧은 절개 산천을 울리는데 雲溪貞節動山川처음 대한 현손은 백발의 나이라네 始對賢孫白首年장관 이룬 호서의 천리길로 왔으니 壯觀湖西千里躅영주 북쪽 초가집에 빛이 나는구나 生光瀛北一茅椽행로에 진속332)이 많음을 한탄하더니 堪歎行路多秦俗병진에 홀로 학문한다 잘못 말하네333) 錯道兵塵獨魯絃세 번 풍천시 읊으니 지금이 또 옛날이라334) 三疊風泉今又古굳이 남은 한을 말로 전할 것도 없구나 不須遺恨語相傳이별 아쉬워 또 장정335)을 나서지 못하는데 惜分且莫出長亭더구나 하늘 가엔 비 올 기색 어둡구나 又是天邊雨色冥망한 세상 함께 아파하며 마음이 붉게 썩더니 同病淪亡心腐赤반가운 눈길로336) 만날 걸 어찌 생각했으랴 豈圖邂逅眼生靑길이 험난하니 용문의 관광337)은 그만두고 路難休作龍門觀독이 비었으니 초택338)의 깬 곳에 돌아가 살리라 甕匱還居楚澤醒이제 그대를 보니 새 시가 무적이라 無敵新詩今見子맑은 위수에 부끄러운 경수로다339) 渭流淸處却慙涇 雲溪貞節動山川, 始對賢孫白首年.壯觀湖西千里躅, 生光瀛北一茅椽.堪歎行路多秦俗, 錯道兵塵獨魯絃.三疊風泉今又古, 不須遺恨語相傳.惜分且莫出長亭, 又是天邊雨色冥.同病淪亡心腐赤, 豈圖邂逅眼生靑.路難休作龍門觀, 甕匱還居楚澤醒.無敵新詩今見子, 渭流淸處却慙涇. 운계(雲溪) 정뇌경(鄭雷卿, 1608~1639)의 호이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가자 필선(弼善)으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매국노들인 정명수(鄭命壽) 등이 통역을 맡아 행패를 부렸는데 이들을 제거하려다 무고로 잡혀 청나라에 의해 32세의 나이로 처형당하였다. 진속(秦俗) 야만의 풍속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에 의하면 "진나라 풍속이 날로 무너졌다.……자식만 사랑하고 이익만 좋아하는 것이 금수와 다를 것이 거의 없다.[秦俗日敗.……其慈子耆利, 不同禽獸者亡幾耳.]"라고 하였다. 병진에……말하네 전란 속에서도 학문을 한다고 상대가 자신을 칭찬한다는 뜻이다. 원문의 '노현(魯絃)'은 학문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노(魯) 나라는 공자가 탄생한 곳으로서 문교(文敎)가 흥성했던 지역이고, '현(絃)'은 '현송(絃誦)'을 줄여서 말한 것으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조린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풍천시……옛날이라 나라가 망한 슬픔이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뜻이다. 원문의 '풍천(風泉)'은 《시경》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합한 말이다. 〈비풍〉의 주제는 주(周)나라 왕실이 쇠미한 것에 대하여 현인이 이를 근심하고 탄식하는 내용이고, 〈하천〉의 주제는 왕실이 무너지자 소국이 곤폐(困弊)하여 주나라 서울을 생각하는 것이다. 장정(長亭) 옛날 큰 길에 노정(路程)을 표시하는 정(亭)을 두었는데, 10리마다 있는 것을 장정(長亭), 5리마다 있는 것을 단정(短亭)이라 한다. 대개 사람을 전별할 때 이 정에서 하였다. 반가운 눈길로 원문의 '안생청(眼生靑)'은 '청안(靑眼)'의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매우 반가워하는 눈길을 뜻한다. 진(晉)나라 때의 명사(名士)인 완적(阮籍)은 세속의 법도에 구애받지 않고 지내면서 속사(俗士)를 만나면 흰자위[白眼]를 드러내어 경멸하는 뜻을 보여 주고, 의기투합하는 사람을 만나면 푸른 눈[靑眼]으로 대하여 반가운 뜻을 드러냈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용문의 관광 천하를 주유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원문의 '용문(龍門)'은 사마천(司馬遷)의 고향으로 사마천을 가리킨다. 사마천은 20세부터 중국 천하를 주유하여 호연지기의 기상을 얻었고, 이로 인하여 천하의 명문장으로 칭송받는 《사기(史記)》를 저작하였다. 초택(楚澤)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충신(忠臣)으로 일찍이 참소를 입고 쫓겨난 굴원(屈原)이 방황했던 늪가이다. 그의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다 흐리거늘 나 혼자 맑고, 뭇사람이 다 취했거늘 나 홀로 깨었는지라, 이 때문에 내가 추방되었노라.[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라고 하였다. 맑은……경수로다 정유석을 위수에, 김택술 자신을 경수에 비유하여 자신이 못하다는 뜻이다. 위수(渭水)와 경수(涇水)는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두 강물 이름인데, 경수는 물이 탁하고 위수는 맑기 때문에 《시경》 〈곡풍(谷風)〉에서 "경수 물 때문에 위수가 흐려지네.[涇以渭濁]"라고 한 대목에서 유래하여 인물의 우열이나 청탁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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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제원에게 답함 무신년(1908) 答趙子貞濟元 ○戊申 옛날에 주나라 왕실이 쇠락하자 현인군자가 당시의 혼란을 슬퍼하고 풍속의 쇠퇴함을 가슴 아파하여 탄식을 하며 읊조리고 노래하였는데, 공자가 그것을 채집하여 변아(變雅)44)에 기재하니, 그 말이 강개하고 깊고 절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백세 이후에도 감탄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변(變)이라고 한 것은 그 시가 슬픔에 지나치게 상심하여 성정의 바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자가 세상을 근심한 것은 이것과는 달랐으니, 그 마음이 깊고 절실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은 일찍이 지나치게 상심한 뜻은 없었고 다만 "도가 행해지고 폐해지는 것은 명(命)이다"45), "봉황이 이르지 않고 황하에서 하도(河圖) 나오지 않으니, 나는 그만인가보다."46), "옛날에 백성에게 삼질(三疾)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것마저 없구나."47)라고 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성정의 바름을 얻고 근심한 것이 깊고 절실한 것이니, 또한 강개한 사람이 능히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의 어투를 가만히 살펴보면 주의(周意)의 뜻에는 거의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공자의 말씀하는 법도에는 진실로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이 뜻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체로 세상이 완전한 음(陰)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면, 비록 성인이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도를 지켜서 양(陽)이 회복되는 날을 기다릴 뿐이지, 반드시 발을 동동거리며 무익한 염려를 하고 떠들썩하게 쓸모없는 분노를 발하여 도리어 서로 얽매이는 병폐를 만들어 내면을 수양하는 공부를 손상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昔周室之衰,賢人君子憫時世之亂亡,病風俗之頹敗,發於咨嗟,登之咏歌,而夫子采之,載於變雅,其言慷慨深切,使人感歎於百世之下.然猶謂之變者,以其過傷於哀而不得性情之正也.若夫子之憂世,則異於是,其心非不深切也,其言未嘗有過傷之意,只曰"道之行廢,命也","鳳鳥不至,河不出圖,吾已矣夫","古者民有三疾,今也或是之亡也".此其得性情之正,而憂慮之深切,又有非慷慨之人所能及者也.竊觀來書詞氣,其於周意之意,則可謂庶幾焉,而於夫子詞氣之法,則誠有未易言者,此意不可不知也.蓋世入窮陰之時,雖聖人亦無如之何矣.只得守吾之道,以俟陽復之日,不必憧憧然致無益之慮,呶呶然發無用之憤,反成係累之病,而損了向裡之工也. 변아(變雅) 〈시경집전서(詩經集傳序)〉를 참조하면, 변아는 《시경》 의 소아(小雅), 대아(大雅)를 일컫는 정아(正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대개 주나라가 쇠퇴하여 정치가 문란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소아는 〈녹명(鹿鳴)〉부터 〈청청자아(菁菁者莪)〉까지를 정소아(正小雅), 〈유월(六月)〉부터 〈하초불황(何草不黃)〉까지를 변소아(變小雅)라고 하고, 대아는 〈문왕(文王)〉부터 〈권아(卷阿)〉까지를 정대아(正大雅), 〈민로(民勞)〉부터 〈소민(召旻)〉까지를 변대아(變大雅)라고 한다. 도가……명이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도(道)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명(命)이며 도(道)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명(命)이니, 공백료(公伯寮)가 그 명(命)에 어떻게 하겠는가.[道之將行也與도 命也며 道之將廢也與도 命也니 公伯寮其如命何]."라고 말하였다. 봉황이……그만인가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보인다. 옛날에……없구나 삼질 즉 세 가지 병통은 광(狂)ㆍ긍(矜)ㆍ우(愚)를 말하는데,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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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승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金允升 甲子 오늘날의 일은 다만 음성(陰城)의 무함 여부와 문죄(問罪)자의 강제 여부를 철저히 따져야 할 뿐입니다. "청원하여 발간하고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32)라는 가르침은 이 어떠한 의리입니까?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과 "반드시 깊게 구애될 필요는 없다."는 설은 이 어떠한 뜻입니까? 음성을 성토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욕보이는 거시니 따르지 말라.'는 것은 '힘을 헤아려서 하라', '구애될 필요는 없다.'는 것과는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반면, 음성을 편드는 자들은 "저것도 한 때이고 이것도 한 때이니 병행하더라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또한 누가 옳고 누가 잘못입니까? 공평하게 듣고 아울러 살펴서 그 시비를 판단한 연후에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형은 선사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음성의 주장을 감죄하면서 조금도 자세히 따지 않고 현고한 자에 대해 뒤늦게 문제를 삼았습니다. 당초에 피차가 동의하여 변명하였는데, 영남 사람들이 출판사에 투고하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가리고 막았습니다. 이것이 말이 더욱 많아질수록 끝내는 합치할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큰 윤리이고 의리의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여 완전히 밝혀지지 않으면 그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그 설을 끝까지 다하고자 합니다.보내온 편지에 의전(義戰)이 없다는 것과 저쪽이 이쪽보다 낫다고 하는 것으로 편지의 첫머리를 삼고 호남과 영남의 단안(斷案)을 주장하였는데, 저는 완전히 타당하지 않은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합니다. 호남이 선사께서 인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영남이 원고를 발간하려는 것을 배척했으니, 그 다툰 것은 '의(義)' 한 글자일 뿐이고 애당초 의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구나 선사가 무함을 당한 것을 보고 분변하여 성토하는 것은 의리의 가장 큰 것이니, 의전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욱 타당하지 않았습니다. 호남이 주장한 전후의 의리가 이처럼 명쾌하고 정대하니, 호남이 영남보다 낫다고 해도 오히려 잘못이지만 영남이 호남보다 낫다고 한다면 더욱 큰 잘못이 됩니다.만약 아무개 일과 아무개 일을 대비하여 논하고, 개개인을 나란히 평가한다면 피차의 득실과 우열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말을 바르게 하여 이론을 세우지 못한 것은 또한 죄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남이 거리낌이 없는 것을 보면, 인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주장한 것은 호남입니다. 경신년(1920)의 유서(遺書)가 나온 이후에 더욱 조마조마하며 이전의 죄를 통렬하게 후회한 것은 호남 사람입니다. 애써 인가하지 않은 사실을 버리고 유서를 무시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누차 위반하여 투고를 약속하고 서울에 인가를 구걸한 것은 영남과 음성 사람이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문인들이 스스로 만든 죄이니, 다만 선사에게 누를 끼쳤을 뿐이라고 해도 되고 대죄가 아니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런데 심지어 "선사께서 인의(認意)와 인교(認教)가 있었다."고 말한 것은 도대체 어떤 곳에 선사를 놓아두고자 한 것입니까? 이는 선사를 무함한 대죄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처음 함재(涵齋 김낙두金洛斗)의 인가설을 성토하는 편지가 왔을 때에 만약 답하기를 "선사의 혼령이 반드시 불같이 나에게 화를 낼 것이지만 나는 다만 오래도록 전하고 싶어서 죄를 지으면서 이것을 했습니다."라고 했다면 일찌감치 아무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내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앉아 있다가 진영(震泳)에게 명하기를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문고(文稿)를 군이 모쪼록 잘 헤아려 하라.' 하였다."라고 하고, 또 스스로 《오현수언(五賢粹言)》의 간인을 인가한 설을 인용하였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자승(子乘)이 편지로써 인가한 뜻을 질문하였을 때, 만약 답하기를 "선사의 절의로써 어찌 이런 뜻이 있었겠습니까. 내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말을 전한 자가 망령된 것입니다. 절대로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면 전혀 아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선사께서 일찍이 소자에게 책을 쓴 사람은 무관하니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말로 가르치셨다."33)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오현수언》을 인가했다는 설은 일찍이 한 글자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니, 원고를 발간하는 날에 이 설로 증명한 것은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치지 말고 오이 밭에서 신발 끈을 매지 말라는 경계를 스스로 범한 것이니 감히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물며 다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선사가 《오현수언》을 인가한 설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표준을 세우는 마음이기 때문에 꺼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였다."고 했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이미 그 글을 완성하여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전파하여, 결국 온 땅에 넘치도록 의심과 비방을 일으키고 하늘 가득 기롱과 조소가 퍼지게 하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나같이 생각이 없음이 어찌 이리 심하단 말입니까?근래에 장성(長城) 송문인(松門人)34)으로부터 온 자가 말하기를 "선사가 만약 인가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고제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라고 하고, 또 흥덕(興德) 면문인(勉門人)으로부터 온 자가 말하기를 "이런 선사가 있음에 이런 제자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승욱(李承旭)이 〈전간재전(田艮齋傳)〉을 지어 각 신문에 게재하려고 하는데, 보고 들은 것이 이미 이와 같다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비웃으며 각각 차록(箚錄)을 만들어 배척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냉소하는 것이 장차 산과 바다처럼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선사가 평생토록 쌓은 고결하고도 빛나는 업적을 하루아침에 어둡고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형께서 공정하고 맑게 생각하시면 또한 저절로 정확히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청원하여 발간하여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의리가 확립되면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과 "반드시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라는 설은 무너질 것이고,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과 "반드시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라는 설이 행해지면 "청원하여 발간하여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의리가 무너질 것입니다. 자손과 문인에게 보여준 수필(手筆)이 믿을 수 있다면 홀로 앉아 있을 때 오진영에게 명했다고 한 것은 근거가 없게 되고, 홀로 앉아계실 때 오진영에게 명했다고 하는 것이 근거가 될 만하면 자손과 문인에게 보여준 수필은 쓸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 가지의 형세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마치 밤과 낮, 얼음과 숯의 관계처럼 매양 서로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신해년(1911)의 유서에 인가하지 말라는 것은 그때의 일이고, 임술년(1922)에 혼자 앉아계실 때 명하여 인가하도록 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라고 하였고, 또 "전에는 변통할 길이 없었지만 뒤에는 대인(代認)하는 사례도 있으니, 왕등(暀嶹)에서 '인가하지 말라.'고 쓴 수필(手筆)과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계실 때 '힘을 헤아려 하라.'고 했던 명은 병행될 수 있고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음성을 믿는 것이 선사를 믿는 것보다 돈독하고 선사를 의심하기를 음성을 의심하는 것보다 쉽게 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이 때문에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과 "구애받지 말라"는 등의 설이 깨지지 않으면 선사가 전후로 두 마음을 가졌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선사는 광명정대한 군자이니, 음성은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내려주길 바랍니다. 今日之事,只當深究陰城之誣與不誣、問罪者之勒與不勒."請願刊布,決是自辱"之訓,是何等義理? "料量爲之"、"不必深拘"等說,是何等意思? 討陰者,則曰"自辱勿從之,與料量、不拘,氷炭之不相容"; 袒陰者,則曰"彼一時此一時,并行而不相悖".此又孰得孰失,而公聽并觀,斷其是非,然後乃可以出場.今兄於據師訓勘陰說,略無致詳,而見告者追提.當初彼此同議分疏,嶺人投稿,張皇而遮欄之,此所以言愈多而終不合也.然此係師生大倫,義理重關,要當愼思明辨,不得不措者.請得以畢其說.來書以無義戰、彼善此,作一書劈頭,主湖嶺斷案,弟則謂大失著題也.湖之主不認而斥嶺徇稿也,所爭者一義字,初不可謂非義戰,而況見師誣而辨討之,義之最大者,則謂非義戰,尤無當矣.湖之前後之義,旣明且大者如此,湖善於嶺,猶爲失也,嶺善於湖,則尤爲失也.若以某事某事,對待論之,箇人箇人比并評之,彼此得失優劣,安得以無也? 夫初不能正言立異者,亦不爲無罪,然見湖無礙,即以不認爲主者,湖也.庚申遺書出後,益加兢兢痛悔前罪者,湖人也.若乃苦舍不認,無視遺書,累違前進,約投稿乞京認者,嶺陰人也,亦獨何心? 然此門人之所自孽,只可曰累師,而謂非大罪可也.至於謂先師有認意、認教者,欲置先師於何地,不得不謂誣師之大罪也.始涵齋討認書至也,若答之曰"先師之靈,必赫然怒我,我但欲傳久,而負罪爲之",則早已無事矣.乃曰"先師獨坐命震泳曰'世不可知,文稿君須料量爲之",又自引《五粹》認說,何也? 子乘之以書質認意也,若答之曰: "以先師之節義,豈有是意? 吾雖無狀,亦豈有是言? 傳之者妄也.絕勿復道也." 則都無事矣.乃曰"先師嘗教小子,以著書者無關,不必深拘之說",何也? 且五粹認說,曾不見隻字者,則證此說於刊稿之日,自犯李下瓜田之戒,已所不敢.況復大言之曰"先師五粹認說,是天地生物聖人立極之心,故不諱而公言之",何也? 旣成其文,無難傳播,以致溢地疑謗,漲天譏嘲,而莫可收拾,一何不思之甚也?頃自長城松門人側來者言: "先師若不教認,高弟焉敢有此言?" 又自興德勉門人側來者言: "有是先師,有是弟子." 李承旭作《田艮齋傳》,欲揭各新聞,聞見所及者旣若此,則餘外諸家之驚怪嗤排,各自箚錄而斥之,往復而騰笑者,將山海之不可量也.蓋使先師生平之皜皜炳炳,一朝歸於昧昧窣窣者,是誰之故? 兄其公清思之,亦自有輕重心衡也."請願刊布,決是自辱"之義立,則"料量爲之"、"不必深拘"之說破矣; "料量爲之"、"不必深拘"之說行,則"請願刊布,決是自辱"之義壞矣.示子孫門人之手筆可信,則獨坐命震之云無據矣; 獨坐命震之云可據,則示子孫門人之手筆無所用矣.二者之勢不兩立,如畫夜氷炭之每每相反.或者謂辛亥遺書之勿認,彼一時也,壬戌獨命之教認,此一時也.又有謂前無變通之路,後有代認之例,暀嶹勿認之之手筆,杏下料量之獨命,可并行而不相悖也.此輩人信陰篤於信師,疑師易於疑陰者也.吾故曰"料量"、"不拘"等說不破,則先師受前後二心之疑.先師之爲光明正大君子也,陰城之不得不歸於誣師也.請下一轉語. 청원하여……것이다 전우는 자손 및 제군에 고하는 글에서 "다른 날 시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쪽에 청원하여 발간 배포할 계획을 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비록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는 아비와 할애비의 마지막 명을 맹세코 지켜서 조심하여 애써 따르지 말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諸人雖或強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編》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 선사께서……가르치셨다 오진영은 이병은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소자에게 말하기를 '인쇄업자가 스스로 총독부에게 출판 인가를 받으면 책을 쓴 사람은 그것과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 이와 같다면 반드시 책을 출판하는데 깊이 구애받을 것이 없겠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후창집속집(後滄集續集)》 4 〈연보(年譜)〉 송문인(松門人) 장성에 거주하였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을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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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승 종섬에게 답함 갑자년(1924) 答金允升鐘暹 ○甲子 가르쳐 주신 뜻을 대략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형이 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 또한 형의 주된 뜻을 분명히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른바 이쪽은 어느 쪽을 가리키며 저쪽은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요? 영남을 이쪽이라 말하고 호남을 저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감히 알 바가 아닌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호남을 이쪽이라 말하고 영남을 저쪽이라 말한 것이라면 형은 이 편지에 일삼을 필요가 없이 곧 전편을 반복하여 읽어보면 피차간의 여탈(與奪)이 극히 선명하니 의심난 것을 질문하여 채택하여 살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영남이 호남의 인가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버리고 경성 사람에게 인가를 구걸한 것에 대해 일찍이 분명한 말로 배척했었습니다. 음성(陰城)의 인교서(認教書)가 나오자 이것은 대의(大義)가 관련된 것이라 말하고 절절히 근심하고 힘들게 변론하여 한쪽의 지목을 후하게 받았지만 후회하지 않았고, 영백씨(令伯氏)가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옛사람이 부들부들한 가죽을 차고 다니거나 활시위를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를 경계한 고사31)를 끌어다가 직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대한 가르침을 받듦에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형의 몽매함이 진실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김용승(金容承)은 이미 사문(師門)에서 스스로 물러난 자인데 그의 무죄를 변명했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다만 스스로 변명할 것은 있습니다. 내가 김용승을 따른 것이 그 죄를 알지 못했던 날에 있다고 했는데, 지난날에 이미 편지로 절교를 고하였는데 무슨 간섭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음성은 그가 연전에 한농노(漢農老)라고 부른 죄를 알고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선사를 무시하는 죄를 알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를 여러 해 동안 존경하고 믿어서 선사의 원고를 교정토록 청하였으니, 이것은 김용승을 당인(黨人)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용성이 음성에게 사과하면서 "사우간(師友間)으로 선사(先師)를 대하였다,"고 했는데, 사우간이란 말은 끝내 스승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음성은 서로 절교했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대를 더는 성토하지 않을 것이다. 조용하게 잘못을 고치고 경향(京鄕)을 미치광이처럼 쏘다니지 말라."라고 했으니, 이것은 김용승을 당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일 풍파가 일어났을 때에 추후에 와서 보고 김용성에게 여관에 물러가서 기다리지 않고 곧장 들어왔다고 질책한 뒤에, 다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가 이미 상제(祥祭)에 천리 길을 달려 왔으니 반드시 사죄하러 온 것이다. 붙들어 내보낸 뒤에 그 고문(告文)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야지, 먼저 멋대로 영전(靈前)에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김용승을 위하여 변명했다고 성토를 한다면 다만 받아들일 뿐이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저와 김용승은 모두 중년입니다. 절교 여부와 변명 여부는 앞날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다시 무슨 변명을 많이 하겠습니까? 教意略綽一覽,非惟兄之不能洞悉我情,弟亦難以明見兄之主意.所謂此邊指何邊,彼邊指何邊? 謂嶺爲此,而謂湖爲彼乎? 則有非吾之所敢知者.謂湖爲此,而謂嶺爲彼,則兄必無事乎此書,乃將全篇反覆,則彼此之與奪,十分躍如,可得以質疑而冀採察焉.弟於嶺之舍湖不認而乞京認也,蓋嘗顯言斥之矣.逮夫陰城認教書之出也,謂是大義攸關,切切然憂之,苦苦然辨之,厚被一邊指目而不悔,至以令伯氏之不辨師誣,獻佩弦佩韋之讜言矣.今承盛教乃如此,兄之昧實至於此乎?金容承旣是自退師門者,則分疏其無罪,果成說乎? 但自爲分疏者,則有之.蓋曰我之從金,在不知其罪之日,向旣以書告絕,則有何相涉乎? 陰城則知其年前呼漢農老之罪,知其心中久無先師之罪,猶與之多年敬信,至於請校師稿,此非黨金乎? 金謝過陰城,而曰"師友間處先師"云,則師友間終是倍師也.陰城不曰相絕,而曰"吾不復討君,其安靜改過,勿狂走京鄉",此非黨金乎云爾.當日風波之起也,追後來見,旣責金以不退舘俟之而直入,復言於衆中曰: "彼旣千里赴祥,則必其謝罪來者也.扶而出之,見其告文而進退之可也,先肆拳踢於靈前,則不可也." 以此而爲爲金分疏聲討之,則只當受之而已,亦復何哉? 雖然弟與金俱是中年人,絕與不絕,分疏不分疏,觀前頭可知,又多何辨? 옛사람이……고사 강하고 사나운 자는 억제하여야 하고, 두려워서 위축된 자는 기운을 충분히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관행(觀行)〉에 "서문표(西門豹)가 성격이 급하여 무두질한 가죽[韋]을 차고 다녔고, 동안우(董安于)는 성격이 느슨하여 활줄[弦]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급하게 하였다.[西門豹之性急 故佩韋以自緩已 董安于之心緩 故佩弦以自急]"라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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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오남두에게 답함 을축년(1925) 答白光五南斗 ○乙丑 형이 보낸 편지에서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변론이 없었다면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무함한 것1)은 무함 당한 채 끝났을 것이고, 여러 군자의 변론이 없었다면 오진영(吳震泳)이 선사를 무함한 것2)도 무함 당한 채 끝났을 것이다.' 라고 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명확한 의론입니다. 오호라! 사람들이 모두 나라가 무함을 당한 것은 통분할 줄 알면서 스승이 무함을 당한 것은 통분할 줄 모르니, 무엇 때문입니까? 어찌 스승을 부모나 임금과 다르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세 분의 은혜로 살기 때문에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의리3)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사람으로서 이러한 의리를 모르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정응태가 우리나라를 무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임금과 스승을 잊고서 난신적자를 허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兄喻: "無李月沙之辨,則丁應泰之誣國也,誣而已矣; 無數君子之辨,則吳震泳之誣師也,誣而已矣." 此眞確論也.鳴呼! 人皆知國誣之爲痛憤,而不知師誣之爲痛憤,何也? 豈以師與君父差殊觀故耶.此不知生三事一之義者,人而不知生三事一之義,則烏得謂人乎哉.若謂吳不誣師,則是謂丁爲不誣國者也,非忘君師與亂賊者乎? 정응태(丁應泰)가……것 선조(宣祖) 31년(1598) 명나라 병부주사(兵部主事)인 정응태가 조선에서 왜군(倭軍)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고 자기 나라에 무함한 사건이다. 이때 월사가 조선국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을 지은 뒤 진주 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무함 사실을 밝힌 결과 정응태가 파직되고 마침내는 옥에 갇혀 죽게 하였다. 오진영(吳震泳)……것 오진영이 일본 총독부에게 문집 출판 인가를 받아 일제치하에서 간재가 자신의 문집을 출판하라 명했다고 간재 문인들을 속인 것을 말한다. 세분의……의리 부모와 스승과 임금 세 분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1〉에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성인의 말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버이는 낳아 주신 분이고, 스승은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임금은 먹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民生于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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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7 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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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윤명에게 보냄 병자년(1936) 與鞠潤明 丙子 요즘 세상 풍조의 위급함이 날마다 더욱 긴박해지고 있어서 사방에서 들리는 소식에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놀라니, 요컨대 목숨과 머리카락을 보전할 날이 얼마 되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이 얼마 안 되는 날이 비록 지극히 짧고 촉박하더라도 일찍이 채허재(蔡虛齋 채청)의 말을 들으니, "철인은 하루로도 만세의 공업을 이룰 수 있다." 했는데, 하물며 지금 남은 날이 또한 하루보다는 거의 많을 뿐만이 아님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만약 그럭저럭 목숨이나 부지하며 지낸다고 한다면 비록 3만 6천 날이 있더라도 또한 거북이나 뱀처럼 수명을 연장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어찌 귀하겠습니까? 우리들은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다만 본사(本事)가 허술한데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며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아 이 생을 잘못 사는 것을 근심할 뿐입니다. 음성 오진영의 무리는 때를 타고서 나날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우리 당은 세를 잃고서 시시각각 더욱 쇠잔해지고 있으니, 전에 스스로 정정당당하다 했던 자들이 이제는 문득 모두 얼굴을 바꾸고 자취를 더럽히며 기꺼이 저들과 영합하고 있습니다. 이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선사의 도가 박멸되고 잠식되어 다 없어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일각이라도 허술하게 그럭저럭 세월을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을 끝내 처리하여 결론짓지 못한다면 비록 세상을 덮을만한 공업과 세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행적일지라도 다만 지류와 말단일 뿐입니다. 도리의 근원과 본령이 잘못되어 이미 멀리 와버려서 거리로 계산할 수도 없으니, 항상 벗을 잃고 홀로 고루하게 지내 아무런 계책을 세울 수 없음을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동지를 얻어 이 도를 강론하여 밝힐 것을 생각하지만 막막한 천지에 누가 그런 사람이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집사일 것입니다. 집사는 뜻이 깨끗하고 행실이 후덕하여 오래도록 다른 사람의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매번 부는 바람을 맞으며 집사를 그리워하였으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거니, 어느 날인들 잊으리오![何日忘之]"라는 시구65)가 바로 제 마음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금일 이후로 더욱 재주 없고 무능하고 졸렬하여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니, 왜이겠습니까? 평생 오랜 친지들로 은혜와 예로써 서로 교제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반기를 들고 원수가 되었으니, 만약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에 이를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본래가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히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일이 사문과 관련이 되어 처음부터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허물하여 물러나서는 안 되었을 뿐이니, 이는 스승에게 받은 은혜66)가 벗어날 수 없는 고충67)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그 고충이 이와 같은 줄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지금 이것을 스스로 말하자니 비록 집사의 넓은 아량이 수용해주고 높은 지혜가 살펴주어 드러내주실 것을 믿지만 스스로 용렬함을 돌아봄에 부끄러움을 느낄 따름입니다. 가만히 들으니 군자는 덕으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저는 비록 군자는 아니지만 집사는 진실로 아름다움을 증진시킬 수 있는 분이니, 제가 진실로 조금이나마 아는 것이 있어 집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또한 장차 남에게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루가 만 년 같다는 말로 받들어 올리니 이미 잘 알고 있는 일이라고 하지 마시고 다시 마음을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도리의 근원과 본령이 더욱 드러나 밝혀지고 일처리가 결론이 나는 효험도 장차 차례대로 드러난다면, 이것은 다만 집사에게만 다행이 아니라 참으로 사문의 다행일 것입니다. 見今世風之急, 日復日迫.四方所聞, 朝暮驚心.要知命與髪保知有幾日.此有幾日, 雖極短促, 而嘗聞蔡虛齋之言曰: "哲人能以一日, 作萬世之業." 況今有日, 又不止幾多一日者乎? 若曰"悠悠泛泛", 雖有日三萬六千, 亦不過龜蛇之引年耳, 曷足貴哉? 吾儕不患餘日無多, 只患本事之虛踈, 悠悠泛泛漫無主張, 以失此生耳.陰徒乘時, 日以益熾, 吾黨失勢, 時以愈殘.蓋向之自謂行行堂堂者, 而今輒皆換面汙跡, 樂與之合, 若此不已, 先師之道, 幾何不撲滅晦蝕而且盡乎? 此正吾輩片刻不可虛踈悠泛者也.若使此事而終無區處著落, 則雖蓋世功業絶代懿行, 只是支流餘裔耳.道理源頭本領, 失之已遠, 不可以道里計也.常恨索處孤陋無以爲計, 思得同志講明是道, 茫茫天地, 誰歟其人? 如有其人, 則必執事也.執事志潔行厚, 久爲人欽, 每臨風想望, '中心藏之, 何日忘之'者, 是也.如澤述者, 今以後, 益以自知不才無能鄙劣不足以有爲也.何者? 平生久要恩禮相接者, 輒皆反旗, 便成仇讐, 若非無狀, 豈意致此? 本合甘受, 不敢爲尤, 但以事關師門, 初不當以無狀自引而已者.是庸葛虆甚於沐漆而求解也? 鳴呼! 孰知其苦衷有如此者乎? 今此自言, 雖恃執事之弘量有以容之高明有以察之而發, 自顧劣下, 旋覺慚愧耳.竊聞"君子愛人以德", 澤述雖非君子乎, 而執事則實有可增美者.澤述苟有一知半解之可以有助於執事者, 則愛德之心, 亦將不後於人.所以以一日萬世之說奉獻, 勿謂已見之昭陵, 而更加之意焉.源頭本領之道理, 益以著明, 而區處著落之效, 亦將次第而見矣.此非獨爲執事之幸, 實師門之幸也. 마음속에 … 시구 《시경(詩經)》 〈습상(隰桑)〉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구절로, 이 시는 군자를 만난 즐거움을 노래한 시이다. 스승에게 받은 은혜 원문의 '갈류(葛虆)'는 칡덩굴로, 은혜 받음을 의미한다.《시경(詩經)》 〈주남(周南) 규목(樛木)〉은 후비의 은덕에 감복한 후궁들이 지은 시로, "남산 아래로 굽어 늘어진 나뭇가지 있으니, 칡덩굴이 얽히었네. 즐거우신 군자는 복록에 편안하도다.[南有樛木 葛虆纍之 樂只君子 福履綏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벗어날 수 없는 고충 원문의 '목출이구해(沐漆而求解)'는 '옻으로 머리를 감으면서 펴려고 한다'는 뜻으로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 〈송진소장서(送秦少章序)〉에 나오는 말이다. 어딘가에 매어 있어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할 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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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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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경에게 답함 신사년(1941) 答林子敬 辛巳 《역설혹문(易說或問)》을 만약에 읽어서 완성을 한다면 어찌 세상에 보탬이 되는 문자가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눈앞에 오대양이 들끓고 수많은 나라가 호시탐탐 노려보는 것에 대해 도움 되는 것이 없는 것으로 겸연쩍 하게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니 어찌 공자가 계사(繫辭)를 저술할 때 노나라가 쇠약하고 제후들이 다투어 혼란한 것이 옛날처럼 여전했음을 보지 못하였겠습니까? 다만 내가 지은 책이 혹여 진선진미 하지 않은 점이 있음을 근심할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책에 대하여 젊었을 때 날마다 예에 따라 한두 번 읽은 이후엔 일찍이 하루도 힘을 쓰지 않았으니 진실로 《역》의 도리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자(정이)의 "수시로 변하고 바꾸어서 도를 따른다"는 뜻을 취한다면 오늘날 학자는 64괘에서 다만 마땅히 대과괘(大過卦)58)의 "홀로 우뚝 서 두려워하지 않고 곤란함을 당하면 목숨을 버리고 뜻을 이룬다."는 말로 당면한 간절한 일로 삼아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금화사현(金華四賢)59)이 똑같은 데로 돌아가서 천지의 잘못을 억눌렸다는 비유는 저처럼 못난 사람이 어찌 그런 지경을 꿈에서라도 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금화(金華)가 아닐 뿐만 아니라 땅이 또한 금화(金華)가 아니고 때 또한 금화(金華)가 아니니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머리를 쳐들어 지붕을 보며 깊이 탄식할 뿐입니다.편지에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책을 논하면서, "한결같이 소강절을 따르고 괘를 그린 순서와 시초를 끼는 방법이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음이 없어서 절대로 인위적인 안배가 없으니 비록 복희, 문왕, 주공,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또 〈괘사전(繋辭傳)〉에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는 사생(四象)을 낳고 사생은 팔괘(八卦)를 낳는다"는 문장에 근거하여, "소강절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자를 따르지 않을 것이고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면 공자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니 이 말은 대단히 옳습니다.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선사가 일찍이 황동발이 소강절의 가배법(加倍法)60)을 따르지 않으므로 편지를 보내어서 옛사람은 이와 같은 의론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함에 이르렀으니 일찍이 이것으로 믿을 만하다 여긴 것입니다.편지에서 영남사람 이규준이 경전에 주석을 고쳤다고 언급을 했는데 그 책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참으로 만약 주자를 공격하는데 여력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 설의 득실이 어떠한지 논하지는 않고 다만 한 가지 일어날 일은 사람마다 그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남보다 뛰어난 재주와 하늘에 통할 만큼 학문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그 의견을 서술하여 책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선현의 의론에 대해서 의심나는 것을 기록하더라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감히 조금이라도 잊지 않는다면 누가 그에게 죄를 주겠습니까? 이제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고 멋대로 공격하는 것으로 일삼는다면 마음이 바르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중국의 강희장은 공자, 기독교, 회교, 노자, 불가를 다섯 성인이라 여긴 자이고 똑같이 공자, 묵자, 석가모니, 예수를 존경한 사람은 양계초입니다. 우리들은 다만 마땅히 잘 분별하여 사양하고 물리치는 일을 하는 것 이외에 다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중동 학문의 폐단을 답습하여 멸망을 재촉한 자라고 한 것은 어른이 참으로 옳습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학술에 폐단이 있는 것은 형세 상 반드시 이르는 것이니 비록 천하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경관일지라도 말단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폐단이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다만 국권을 잡고 문맹을 주관하는 사람은 수시로 거문고 줄을 바꾸어 알맞게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중국은 주자 이후와 우리나라는 우암 이후에 일찍이 한 명의 군상과 종사가 출현하여 폐단을 구한 적이 없으니 그 점점 쌓여가는 형세가 어찌 지루하며 번잡하지 않겠습니까? 구속받아 박절한 것과 고루하여 천근한 것과 시비를 공격하는 것이 당신의 편지의 말과 같습니다. 사문의 흥망은 시운의 성쇠와 관련이 되어 있으니 인력으로 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은 스스로 학문의 폐단을 구할 뿐이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편지에서 이미 근세학자가 천하국가에 뜻을 두지 않고 쓸데없는 말거리로 경쟁거리를 삼고 붕당을 만들어 우리나라의 학문이 반드시 망할 것이라 한탄했고 또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표준을 세우지 않으면 백성 중에 음붕(淫朋)이 참특해지고 사람의 비덕(比德)61)이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이치상 괴상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탄한 것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괴상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진실로 그러하다고 여깁니다. 세상에 만약 표준을 세운 군주가 있다면 이른바 경쟁거리로 삼고 붕당을 세운 자는 모두 교화되어 천하국가의 진정한 학문을 위해 쓰여 질 수 있습니다. 이전에 조선에서 동인과 서인, 소론과 노론이 다툰 것이 어찌 모두 쓸데없는 말이겠습니까? 간혹 정사의 득실과 국례의 시비와 윤리의 정패 같은 큰 제목을 가지고 변설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표준을 세우지 못한 군주가 조기에 그 가부를 정했기 때문에 경쟁과 붕당의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아! 어찌 우리나라만 그렇겠습니까? 한나라 때 응방과 절보, 당나라 때 덕유(이덕유)와 승유(우승유), 송나라 때 낙촉천삭(洛蜀川朔)62)이 모두 이런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후대 선비들이 자리나 권력을 위하지 않고 다툰 것이 또한 어찌 모두 쓸데없는 말이겠습니까? 처음에는 성설(性說), 경의(經義), 예론(禮論), 천과 인의 원두(源頭)63), 성현의 종지(宗旨), 인간과 금수의 관계를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 시작을 했지만 끝내는 서로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쓸데없는 말을 마구하는데 귀착이 되었으니 이 또한 표준을 세운 군주가 도의와 예의를 나라 가운데에 밝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을 논한다면 마땅히 그 가운데 나아가서 공격으로 마음을 삼지 않는 것을 간별해서 오직 큰 의리를 분별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함께 해야 하니, 택당(이식)이 논한 '사계(김장생)는 진정한 학문을 했으나 그 나머지는 당여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하는 것이 옳습니다. 마음의 공사(公私)와 일의 당부(當否)를 묻지 않고 일체 지금과 옛적의 선비를 쓸데없는 것을 쟁론하여 반드시 학문을 망하게 한다는 구덩이로 몰아넣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일찍이 우리나라 당쟁이 끝난 이후에 태어나서 초연하게 한 터럭만큼의 당심(黨心)도 없고 또한 출중하게 천하국가에 유용한 진짜 학문을 한 사람은 오직 편지에서 거론하고 있는 유반계(유형원) 선생이 유일무이한 대군자라 생각했습니다. 《반계수록》 한권은 즉 왕을 돕는 도구이니 어찌 다만 경제 범위만 대략 통달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집안이 대대로 남인이었는데 율곡(이이)과 중봉(조헌)을 존경하여 믿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꺼이 복종토록 하는 곳입니다. 《대동경제》를 편집한 뜻은 세도를 보충할 덕으로 존경할만합니다. 그러나 《반계수록》을 정말로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근세의 이른바 공화라는 이름은 비록 중국과 우리나라에 사용하기는 좋아도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취할 수 없습니다. 헌법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삼대 전례 중에 이미 이런 뜻이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어찌 반드시 저들의 이름을 취하겠습니까? 《대전통편》64)은 다만 명목(名目)과 도수(度數), 응행(應行)의 절목(節目)만 들고 본말을 두루 논하지는 않았으니 아마도 대문자를 편집하는 예로 삼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람되게 논함이 이에 미쳤는데 당신께서 너그러이 생각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易說或問》, 若能見成, 豈不是補世文字? 如以目前無補於五洋鼎沸萬邦虎食爲歉, 則有不然者, 豈不見夫子著繋辭之日, 魯國之削弱, 諸侯之爭亂, 依舊自若乎? 只恐吾所著之書, 或有未盡善者耳.未知如何.澤述於此書, 幼少日, 循例一二讀後來, 未嘗一日致力, 固不足與語《易》道者.然竊取程子隨時變易以從道之意, 則今日學者, 於六十四卦象中, 只當以大過之"獨立不懼, 困之致命遂志", 爲時下切務, 又以爲如何?金華四賢, 同歸拗過天地之喩, 若此無似, 何能夢見此境? 且非惟人非金華, 地亦非金華, 時尤非金華, 如之何哉? 只有仰屋, 長吁而已.尊喩論《啓蒙》之書而曰: "一從康節, 而畫卦之序, 揲蓍之法, 無一非自然, 絶無人爲之安排, 雖使羲文周孔復起, 不易其言." 又據「繋辭傳」"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之文而曰: "不從康節, 卽不從朱子, 不從朱子, 卽不從夫子." 此言極是.誰敢異辭? 先師之曾以黃東發不從康節加倍法, 至有下書, 蓋言古人有如此之論云爾, 豈以是爲可信也.喩及嶺人李圭晙改註經傳之云, 未見其書.誠若攻斥朱子不遺餘力, 則未論其說之得失何如, 只此一事, 可人人得而攻之者.渠雖有絶人之才通天之學, 只可述其意見爲成書而已.先賢之論, 雖不免記疑, 尊畏之心, 不敢少忘, 則夫誰有罪之? 今不出此, 以肆然攻斥爲事, 則其心不之正可知.至於中國江希張之以孔基回老佛爲五聖人者, 卽又一并尊孔墨佛穌之梁啟超也.爲吾輩者, 只當辨明, 辭闢之外, 更無他道耳.夫此二人者, 襲中東學術之獘, 而促其亡者, 尊喩是矣.雖然, 學術之有獘, 亦勢之所必至, 雖天下之良法美規, 及其末也, 末嘗無獘.只在秉國成主文盟者, 隨時改絃而救之耳.要之, 中國之朱子後, 我東之尤菴後, 未曾有一君相宗師出而救獘者, 其積漸之勢, 安得不支離煩鎖? 拘刻迫切, 固陋淺近, 是非攻撃, 如尊喩乎.大抵斯文之與喪, 關時運之盛衰, 又非人力之所能及.但在吾輩自救吾學之獘而已, 未知如何.尊喩旣以近世學者, 不用志於天下國家, 以無用說話資爭競樹朋黨, 爲東國學問之必亡而歡之.又謂居君位而無建極者, 則民之滛朋僭忒, 人之比德頗僻, 理無足怪.澤述竊以爲所歎者, 非曰不然, 而所不怪者, 乃誠然矣.世苟有建極之君, 則所謂資競樹黨者, 皆化而爲可用於天下國家之眞學問也.向也我國東西老少之爭也, 豈皆無用說話? 或因政事之得失, 邦禮之是非, 倫理之正悖, 大題目不容不辨者, 而以無建極之君, 爲之早定其可否, 故馴致乎爭競朋黨矣.噫! 豈獨東國然也? 如漢之膺滂節甫, 唐之德裕僧孺, 宋之洛蜀川朔, 皆坐此也.其後士子無位權而爭者, 亦豈皆無用說話? 始因性說經義禮論天人源頭聖賢宗旨人獸關係之不可不辨者, 而終而至於互相攻撃, 則歸於無用之說話, 亦以無建極之君明道學禮義於國中故也.此則旣然矣.若論人, 則當就其中而揀別得不以攻撃爲心, 惟大義理是辨爲事而與之, 如澤堂所論沙溪學也.其餘黨也之云可也.恐不可以不問心之公私事之當否而一切將今昔之士歸之爭說無用必亡學問之科, 未知如何.蓋鄙則嘗以爲生於我東黨爭之後, 超然無一毫黨心, 而又卓然爲有用於天下國家之眞學問者, 惟來喩所擧柳磻溪先生, 爲獨一無二之大君子也.其《隨錄》一書, 卽王佐之具, 豈但謂之略通經濟範圍? 家世南人, 而尊信栗谷重峰者, 令人悅服處也.《大東經濟》編輯之意, 可仰爲補世道之德.然未敢知果能過於《隨錄》之書也.且近世所謂共和者名, 則雖好用於中東, 則獘不勝言, 不可取也.憲法則可矣.然三代典禮中, 不已具此意乎? 何必取於彼名也? 至於《大典通編》, 只擧名目度數應行節目, 而不備論本末, 恐不足爲大文字編輯之例.僭易及此, 未知尊意更加善恕否. 대과괘(大過卦) 육십사괘 중 28번째 괘로서 태(兌)가 상(上)에 있고 손(巽)이 하(下)에 있는 괘로서 택풍대과(澤風大過)라고도 한다. 금화사현(金華四賢) 왕백(王伯), 하기(何基), 허겸(許謙), 김이상(金履祥)를 가리킨다. 금화주학(金華朱學)의 중요한 전인(傳人)으로, 금화산(金華山) 북쪽에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며 주자학을 널리 전파하였기에 금화사선생(金華四先生)이라고 불렸다. 가배법(加倍法) 1인 태극(太極)에서 음(陰)과 양(陽)인 양의(兩儀)가 생기고 양의에서 사상이 생기고 사상에서 팔괘가 생겨 각기 2배씩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음붕(淫朋)이……행해지는 《서경(書經)》〈홍범(洪範)〉에 "무릇 서민들이 사악한 당을 만들지 않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짓는 일이 없는 것은 임금이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凡厥庶民, 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낙촉천삭(洛蜀川朔) 송나라 철종(宋哲宗) 시기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는 수구파(守舊派) 조신(朝臣) 가운데에, 정이(程頤)를 우두머리로 하는 낙당(洛黨)과 소식(蘇軾)을 영수로 하는 촉당(蜀黨)과 유안세(劉安世)의 삭당(朔黨)을 가리킨다. 천당(川黨)은 사천(四川) 출신인 소식의 촉당을 말한다. 따라서 천당과 촉당은 같은 당이다. 원두(源頭) 핵심, 근원이라는 의미로 조선시대 학자들은 무엇을 특히 강조할 때 원두(源頭)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김장생이 쓴 〈행장(行狀)〉에 "선생은 심(心)ㆍ성(性)ㆍ이(理)ㆍ기(氣)의 근원에 대해 끝까지 연구하여 투철하고 시원스러웠다.[先生於心性情理氣源頭.極深研幾.通透灑落]"라는 말이 있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35 〈행장(行狀)〉 대전통편(大典通編) 1785년에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속대전(續大典)》 및 그 후에 간행된 법령집을 통합하여 편찬한 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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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경 장우에게 답함 을해년(1935) 答林子敬章佑 ○乙亥 존자의 편지가 깊이 선사의 원고 수정본이 음성 오진영에 의해 파괴된 것을 가슴 아파하시고 이를 유훈에 근거하여 그 죄를 처단해서 말하기를, "이 유훈이 얼마나 정중한 것인가? 그런데 그가 감히 멋대로 스스로 고치고 삭제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선사의 영령이 마땅히 어떻게 여기시겠는가? 이는 유문의 큰 변란으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은 물을 것도 없다. 이것을 방치한다면 어찌 선생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공정하고 의리가 바르고 의론이 적확하면 저 사람의 사나운 간담을 파괴시킬 수 있고 중간에 선 자들의 나약함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하는 말은 자연 말로 한 것의 가벼운 과실로 귀결되었으니, 그대로 놔두고 따져 묻지 않아도 괜찮다." 하신 말씀에 이르러서는 삼가 더욱 의혹스럽습니다. 붓으로 쓰지 않은 것을 말로 한 것이라고 하고 큰 죄가 아닌 것을 가벼운 과실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구하여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 행하여 큰 해로움이 없다면 이와 같은 것은 그대로 놔두어 따져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오진영의 무함은 그렇지 않아 입으로 한 말 뿐만이 아니라 손으로 쓴 글도 분명하니, "선사께서 헤아려서 하라고 지시하셨다."는 말은 사실 선사의 '말로 하지 않은 지시[不言之敎]'를 말하며, 유서가 출현함에 미쳐서는 또 그 유서를 두고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땅에서 솟았는가? 크게 의심스러워할 만하니, 어찌 계집종이 전하는 석서(石書)53)와 같은 짓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으니, 정재의 유서를 가리켜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함한 사람은 존엄한 부사(父師)이고 무함한 일은 평생의 대절이니, 실정을 말하면 고의로 범한 것이고 범한 것을 말하면 큰 죄가 됩니다. 이 무함을 변론하지 않는다면 선사는 선사가 되지 못할 것이니, 어찌 그대로 놔두고 따져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선사에게 도의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비록 선사를 모를지라도 오히려 시비를 아는 자가 되는 것엔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부류의 사람들이 "만약 인가를 청하는 작은 일로 구속을 받는다면 군자의 대도가 아니다."라고 하는 말을 본다면, 그대의 글이 참으로 무함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또한 공자와 주자 이래로 《춘추》와 《자치통감강목》의 의리까지 아울러 모조리 뒤집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음성의 오진영이 무함을 행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것이 세교에 해로움이 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집사의 마음이 오싹하니 서늘해지지 않겠습니까? 인가를 지시했다는 무함과 원고를 고친 것은 죄가 모두 용서할 수 없는데 마침내 인가를 지시했다는 무함이 무거운 것은 어째서입니까? 원고는 본래 화도수정본이 있어서 고친 흔적을 가릴 수 없으나 무함은 심사(心事)를 밝히기 어려워 유서를 가리켜 위조하고 말하니, 가릴 수 없는 것은 종내 바름으로 귀결될 날이 있을 것이나 밝히기 어려운 심사는 더럽혀지는 누를 초래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렇고, 또 원고를 고친 것은 문자의 의론과 관련이 있으니 의론이 잘못되는 것은 혹 군자가 되는 데에 해롭지 않지만 인가를 지시했다는 무함은 평생의 도의와 관련이 있으니, 도의가 없다면 장차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두 가지를 서로 비교한다면 그 죄의 경중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尊喩深以師稿手本之被陰之所壞爲痛, 據之遺訓, 而勘斷厥罪曰: "此其爲訓, 何等鄭重, 而彼乃敢任自改削, 無少忌憚.先師之靈, 當以爲如何? 此爲儒門大變, 不可置之勿問, 此而置之, 豈可曰先生弟子乎? 凡此心公義正論確, 足以破彼悍膽, 而起間立者之懦矣." 至於所謂"認誣之說, 自是歸之語言薄過, 雖置之不問, 可也"之喩, 竊滋惑焉.夫非筆書之謂語言, 非大罪之謂薄過, 求之於心而非故犯, 行之於世而無大害, 則如此者, 斯可以置之不問也.今震也之誣, 則不然, 口言不啻, 手筆的確, 謂"先師敎以料量爲之", 謂其實先師不言之敎.及其遺書出也, 則又謂之"從天降耶? 從地出耶? 可疑之大者, 何憚爲女奴石書習," 靜齋遺書不可指以爲有, 所誣之人, 則父師之尊嚴也, 所誣之事, 平生之大節也.語其情, 則故犯, 語其犯, 則爲大罪, 此誣不辨, 則先師不足爲先師, 豈可以置之不問者乎? 不寧惟是.其謂先師無道義者, 雖不識先師, 而猶不害爲知是非者.有一種人見謂"如以請認之小節爲拘, 則非君子之大道也", 高足之筆, 信不誣矣, 此又并與孔朱以降《春秋》《網目》之義, 而盡行翻案者, 皆由陰誣之行也.其爲世敎之禍害, 果何如也? 執事有不凛然心寒者乎? 大抵認誣改稿, 罪俱不容, 而畢竟認誣重, 何也? 稿自有華本, 掩不得改迹, 誣, 難明心事, 指遺書謂僞, 不掩者, 終有歸正之日, 難明者, 易致點汙之累, 此旣然矣.且改稿, 關文字之議論, 議論之失, 或不害爲君子, 認誣, 係平生之道義, 道義之無, 其將謂何? 二者相準, 其罪之輕重, 果何如也? 계집종이 전하는 석서(石書) 이 글은 오진영의 선사 무함을 변척하는 재통문에 나오는 글로, 의미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석서는 석개(石介)의 편지로, 간신 하송(夏竦)이 석개를 모함하기 위해 위조한 편지를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는 유서를 위조된 것으로 보아 비유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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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九年甲子十月十五日辛命直前明文右明文事段所負債錢許多不得已自己買得是在扶北一作之飛里前坪梁傍伏在溫字畓四斗落只所耕十七卜四束庫乙価折錢文伍拾伍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一丈及牌子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屬人中如有雜談是去等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李仁芳[着名]證保 同姓四寸玉南[左寸]筆 金致鎰[着名]定只堤下梁俠三巨里下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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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張生仁伯【永立】 吾於人也見張君 蓬嶽元巖耕白雲 氣局平居無狹隘 心交逢處表懇懃 同歡僧舍多聯榻 豈料仙鄕遽作羣 肖子令孫能繼述 只歎荊室暮年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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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靜虛窩上舍族弟【源坤】 靜虛坐了七旬春 宗族咸稱君子人 蓮榜香名終繼孝 箕疇遐壽盖由人 如兄如弟情猶舊 同契同庚誼益新 誰識遺賢斯世老 也應陞召玉京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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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金希舜【基濬】 自古甕泉君子墟 世皆知在上仁居 靑年志業嗟無跡 白首經綸尙有餘 敦睦家規長守舊 款欣賓禮壹如初 公歸地下有何憾 孫善幹家兒守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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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春賦 卷之一1)賦感春賦曰吾生之蕭瑟兮 與庾信而同歸惟暮年之詩賦兮 盍美古而覬希吁不凋之松柏兮 尙不變於歲寒聲可聽於風晩兮 色猶看於雪殘潛林廬而靜處兮 不相關於時俗衣我衣冠我冠兮 殆爲人之指目開竹牖而步庭兮 物各得其自好農人告以回春兮 欽斯誠者天道群生有以自樂兮 天地心其可見鳥嚶嚶而悅豫兮 木欣欣而蔥蒨屐雨露而怵愓兮 唯君子之孝思不肖亦其感時兮 如將見而莫追仰帝位之出震兮 思聖人之立極聖人治而敎之兮 不亦感其盛德 目錄이 끝나고 卷之一이 시작하기 前에 通文이 하나 들어 있다. 하지만 목록에는 이 통문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원래는 포함시킬 계획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통문의 내용은 瀛州李氏의 始祖인 文憲公의 墓所에 壇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 통문은 精毅齋遺稿에 들어갈 내용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잘못 넣은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원문에 실려 있는 이상, 별도로 처리해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책의 맨 마지막에 부록으로 넣어주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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傷秋賦 傷世途之幽險兮 如將失其所怙人皆陷於滔滔兮 我涼涼而踽踽靜言思而感泣兮 竟與誰而同歸仰堯舜之天大兮 哀此生之塵微幸同得其性善兮 無閒然於彼此無以强而有順兮 厥初心斯赤子由仁義而孝弟兮 是乃道之規矩循斯理而安行兮 樂裕如而蹈舞聖無蔽於物誘兮 能擴充其德性要存養而學求兮 一是主於誠敬始力行而整肅兮 終乃遂其湛一熟於仁而義精兮 就事上而明决彼木偶與泥佛兮 乃赴火而入水不終朝而銷泐兮 何毫末之敢恃覺今是而昨非兮 守吾道而終年潛林廬而靜處兮 方夜讀夫陳篇耳聽明而有聞兮 入庭樹者何聲敎童子而出視兮 風刁刁而亂鳴日惟寒於雨後兮 月无光於雲閒推星曆而覺秋兮 㗳掩卷而開顔望美人而不見兮 歲將暮而徘徊撫素琴而歌商兮 世莫和而堪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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