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신행택일(新行擇日) 단자(單子)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辛丑 辛丑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납폐(納幣) 등을 행하기 위해 신랑집에서 길흉을 점쳐 택일한 신행택일(新行擇日) 단자(單子) 납폐(納幣) 등을 행하기 위해 신랑집에서 길흉을 점쳐 택일한 신행택일(新行擇日) 단자(單子)이다. 건(乾)과 곤(坤)은 신랑과 신부를 가리키며, 그 아래의 간지는 이들의 생년이다. 신행할 길일을 먼저 점치고 그 다음에 세부적으로 입문(入門)과 좌처(坐處), 치롱(置籠), 폐례(幣禮), 옥녀(玉女), 태백, 희신(戱神), 이호(二虎), 천구(天狗), 주당(周堂), 재소(宰所) 등의 길방과 기휘 등을 점쳤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4년 이상산(李尙産)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戌四月十日 李尙産 雲從 甲戌四月十日 李尙産 雲從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4년 4월 18일에 종형 이상산이 운종에게 양쪽 가족의 안부를 묻는 간찰 1934년 4월 18일에 종형 이상산(李尙産)이 사촌 운(雲)에게 양쪽 가족의 안부를 묻는 안부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조우(趙友) 편에 편지를 부쳤는데 잘 받았는지 물었다. 글공부하는 정황이 신의 도움으로 좋으며 귀아(龜兒)도 무탈하고 성(聲)이도 막연히 사립문에서 기다리는 정회가 간절할 뿐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상황은 예전과 그대로이고 손자는 고해(苦海)가 갈수록 심하니 어찌하겠느냐고 하고, 각 집안이 우선 무탈하기를 바랐다. 벗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기지 못하고 인편을 통해 보낸다고 하였다. 추기가 있는데 사향(麝香) 2푼(分)을 사서 보낸다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시를 논하여 죽남에게 주다 論詩 贈竹南 시 삼백 편360)은 인정에 근본한 것이니 詩三百是本人情청탁361)이 수시로 사물에 느껴서 생기네 淸濁隨時感物生주소는 바르고 아름다우나362) 이제 볼 수 없고 周召正葩今不見제량363)은 스쳐가는 새라 누가 이름을 알랴 齊梁過鳥孰知名탁마를 하면서 공연히 꾸미는 데로 돌아가고 琢磨徒爾歸雕飾답습하였으나 도리어 평담을 숭상하지 않네 蹈襲還非尙淡平천연을 가장 중시하여 참으로 흥취 얻으면 最貴天然眞得趣구구하게 어찌 새로운 곡조를 배우겠는가 區區何用學新聲 詩三百是本人情, 淸濁隨時感物生.周召正葩今不見, 齊梁過鳥孰知名.琢磨徒爾歸雕飾, 蹈襲還非尙淡平.最貴天然眞得趣, 區區何用學新聲. 시 삼백 편 《시경(詩經)》의 별칭이다. 3000여 편의 시를 공자(孔子)가 311편으로 정리했는데, 그중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6편을 제외하면 실제로 305편이므로, 이를 줄여서 삼백편이라고 한 것이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청탁 맑았다가 탁해졌다가 하는 사람의 정서를 가리킨다. 주소는 바르고 아름다우나 원문의 '주소(周召)'는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을 말한 것이다.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바로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과 같다.[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라고 하였다. '정파(正葩)'는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시경의 시는 바르면서도 아름답다.[詩正而葩.]"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시경(詩經)》의 시를 가리킨다. 제량(齊梁) 남북조 시대의 제(齊)와 양(梁) 두 나라에서 유행했던 시체(詩體)인 제량체(齊梁體)를 말한다. 이 시기의 시풍은 성정(性情)의 표현보다는 성조(聲調)와 수사학(修辭學)적인 기교를 더욱 강조하여 알맹이 없이 화려하게 꾸민 문체를 말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벗 변죽남 규원 이 방문했기에 함께 짓다 4수 竹南邊友【圭源】見訪共賦 【四首】 백리 멀리서 그리워했던 적이 몇 번이었나 百里相思問幾回창가의 매화는 작년보다 배는 더 피었구나 牕梅添發去年培이곳에서 마음 통하는343) 눈을 반갑게 들고 靑擡此地通犀眼당년에 의마의 재주344)로 문예를 겨뤘지345) 白戰當年倚馬才풍진세상 바둑처럼 뒤집힌다346) 다투어 말하나 爭道風塵飜似奕뜻과 기개를 재처럼 식게 하기는 어렵다네347) 難敎志氣死如灰마음을 다 말을 못해 도리어 이별도 잊으니 話心未了還忘別강가 정자에서 늙은 버들 꺾어주지 못하네348) 不向江亭老柳摧오객349)의 시통은 갑절이나 늘어났으니 鰲客詩筒一倍增부끄럽게도 대적하기 어려운 게 남증350) 같네 愧難爲敵似南曾뱁새의 거처 우스워라 작은 가지 빌렸는데351) 鷦居堪笑微柯借붕새의 뜻은 만리를 오르고도 남으리352) 鵬志應餘萬里騰밝은 달은 어느 밤이나 강물을 비출까 明月何宵江上照한가한 구름은 종일 산마루에 엉겨있네 閒雲盡日嶺頭凝우리 돌아가 머물 곳353) 어디인지 알지만 吾人歸宿知攸在쉽게 할 수 있는 때가 정작 하기 어렵네 可易能時正未能세상 길에 쓸쓸히 갈 길 몰라 헤매다 塵途落落困迷津훌쩍 세월 흘러 홀연 오십이 되었구나 輥到光陰忽五旬거나한 술자리에서 만난 영해의 객은 酒半相逢瀛海客눈 속에 함께 섰던 계화도 문인이네354) 雪中俱立華門人비둔은 원래 비쩍 야윌 일이 없는데355) 肥遯元非生太瘦가짜 굴원이 진짜 난초 차는 걸 누가 허락하랴 僞原孰許佩蘭眞애써 남은 생애에 함께 손을 잡고 勉將餘日同携手오대356)의 만고의 봄을 한 번 보세나 請看鰲台萬古春돌아가는 죽남의 두 발걸음 가벼우니 竹南歸屐一雙輕삼일이나 무슨 일로 부성에 머물렀나 三日緣何滯阜城예로부터 구름산에서 이별 읊기 어려운데 從古雲山難賦別지금 양춘백설가357)를 누가 높이 읊는가 至今春雪孰高聲하늘이 머물려 두려는 듯 종일 비가 내리고 雨連盡日天留意범이 횡행하듯 거친 길에 먼지가 자욱하네 塵黑荒程虎恣行다시 석초358)가 와서 셋이 앉았는데 更有石蕉來鼎坐농사철 뻐꾸기가 울어댈까 걱정이네359) 却恐農節穀鳩鳴 百里相思問幾回, 牕梅添發去年培.靑擡此地通犀眼, 白戰當年倚馬才.爭道風塵飜似奕, 難敎志氣死如灰.話心未了還忘別, 不向江亭老柳摧.鰲客詩筒一倍增, 愧難爲敵似南曾.鷦居堪笑微柯借, 鵬志應餘萬里騰.明月何宵江上照, 閒雲盡日嶺頭凝.吾人歸宿知攸在, 可易能時正未能.塵途落落困迷津, 輥到光陰忽五旬.酒半相逢瀛海客, 雪中俱立華門人.肥遯元非生太瘦, 僞原孰許佩蘭眞.勉將餘日同携手, 請看鰲台萬古春.竹南歸屐一雙輕, 三日緣何滯阜城.從古雲山難賦別, 至今春雪孰高聲.雨連盡日天留意, 塵黑荒程虎恣行.更有石蕉來鼎坐, 却恐農節穀鳩鳴. 마음 통하는 원문의 '통서(通犀)'는 영험이 있는 무소의 뿔을 말하는데, 백색의 무늬가 양쪽 끝으로 통해 있는 것은 그 감응이 아주 빠르다고 한다. 이상은(李商隱)의 〈무제(無題)〉 시에, "몸에는 쌍으로 나는 채봉의 두 날개가 없으나, 마음에는 서로 통하는 한 가닥 영서가 있네.[身無彩鳳雙飛翼, 心有靈犀一點通.]" 하였다. 의마의 재주[倚馬才] 말에 기대어 글을 짓는 재주로, 민천합 문재(文才)를 말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에 "환 선무(桓宣武)가 북벌할 때 원호(袁虎)가 종군하다 문책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마침 포고문이 필요하여 원호를 불러 말 앞에 기대어 글을 짓게 하니, 원호는 손에 든 붓을 쉬지 않고 놀려 잠깐 사이에 7장을 썼는데, 매우 볼 만하였다.[桓宣武北征, 袁虎時從, 被責免官. 會須露布文, 喚袁倚馬前令作, 手不輟筆, 俄得七紙, 殊可觀.]"라고 하였다. 문예를 겨뤘지 원문의 '백전(白戰)'는 본래 특정한 어휘를 쓰지 않고 시를 지어 솜씨를 겨루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취성당(聚星堂)에서 빈객들과 눈[雪]에 대한 시를 지으면서, 눈과 관련된 글자들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그 뒤 소식이 빈객들과 함께 시를 지을 때에 구양수가 정했던 규칙을 지키며 〈취성당설(聚星堂雪)〉이라는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끝 구절에 "당시의 규칙을 그대들은 따를지니, 맨손으로 싸워야지 무기를 잡으면 아니되네.[當時號令君聽取, 白戰不許持寸鐵.]"라고 하였다. 바둑처럼 뒤집힌다 변화무쌍한 것을 말한다. 뜻과 …… 어렵다네 죽남의 뜻과 기개는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늙은 …… 못하네 원문의 '유최(柳摧)'는 '절류(折柳)'의 고사를 말한다. 버들은 꺾어주는 것은 이별을 뜻하는 말이다.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 사람들이 나그네를 송별할 때 장안 동쪽에 있던 파교(灞橋)까지 가서 다리 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준[折柳] 고사가 있다. 《三輔黃圖 橋》 오객(鰲客) 장성의 옛이름이 '오산(鰲山)'으로 장성에서 온 죽남을 가리킨다. 남증(南曾)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호가 남풍(南豐)인 송나라 정치가이자 학자 증공(曾鞏)을 가리킨다. 죽남을 비유한 것이다. 뱁새의 …… 빌렸는데 '뱁새'는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소요유(消遙遊)〉에 "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 때 나뭇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고, 두더지는 황하의 물을 마셔도 제 배를 채우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 偃鼠飮河, 不過滿腹.]"라고 하였다. 붕새의 …… 남으리 '붕새'는 죽남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물결을 3천 리나 박차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날아올라가 6달을 가서야 쉰다.[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라고 하였다. 돌아가 머물 곳 성현(聖賢)의 도를 말한다. 눈 …… 문인이네 눈 속에 함께 섰다는 것은 '정문입설(程門立雪)'에서 유래하여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이다. 《宋史 道學列傳 楊時》. '계화도(繼華島)'는 본래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이곳에 정착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비둔은 …… 없는데 편안히 은둔함으로 야위지 않는 것이다. 원문의 '비둔(肥遯)'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돈괘(遯卦) 상구(上九)〉에 "상구는 여유 있는 은둔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上九肥遯, 無不利.]"라고 하였다. 오대(鼇台) 오대(鰲臺)를 말하는데 전설상의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발해의 동쪽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골짜기가 있는데 가운데에 다섯 개의 산이 있다. 언제나 조류에 따라 위아래로 표류하므로 천제(天帝)가 다섯 개의 산이 서쪽으로 흘러가 신선이 사는 곳을 잃을까 걱정하여 15마리의 자라[鰲]를 시켜 번갈아 가며 머리로 떠받치고 있도록 하여 마침내 다섯 개의 산이 안정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 매우 뛰어난 시를 뜻한다.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나오는 고사이다.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으며, 〈양춘백설가(陽春百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이렇듯 곡조가 더욱 높을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고 한다. 《文選 권45》 석초(石蕉) 호인 듯하나 미상이다. 농사철 …… 걱정이네 농사철이 바빠져서 변규원이 떠나 돌아갈까 걱정이라는 뜻이다. 포곡(布穀)은 뻐꾸기인데, 그 울음소리가 '곡식을 뿌리라[布穀]'는 말과 비슷하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경무 족숙 낙기에게 드리다 贈敬武族叔【洛基】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공 이루고283) 寧靜致遠功총명은 공경으로 말미암아 나온다네284) 聰明由敬出제갈량과 정자 두 현인의 말씀은 葛程二賢語천년토록 배움의 비결이라네 千秋爲學訣더구나 또 자질이 부족하니 矧復不逮資가슴에 새김을 어찌 감히 소홀히 하랴 服膺豈敢忽백리길을 양식을 싸들고 가니 百里爲裹糧부형들은 정성과 최선을 다했네 父兄誠且竭바라는 바는 귀허와 같으니285) 所望如歸虛직분에도 빠뜨림이 없어야 하네 分職能無闕성문286)에는 두 글자가 있으니 聖門有二字분과 비287)가 바로 핵심이라네 憤悱卽機栝남들은 모두 준마의 발로 달리는데 人皆驥足展나는 왜 둔마의 걸음마저 굽히는가 我胡駘步屈먹고 숨쉬는 순간도 이 마음 보존해 食息存此心정과 경을 생활로 삼아야한다네 靜敬作計活나는 수주288)를 받들듯이 하여 吾爲奉隋珠유일무이한 물건으로 여긴다네 視爲無雙物일찍이 들으니 안면이 없었더라도 曾聞無面目인정은 오래되면 친밀해진다네 人情久親密큰 공업이 이뤄진289) 뒤에도 九仞功成後응당 오늘을 잊지 않으리라 應不忘此日 寧靜致遠功, 聰明由敬出.葛程二賢語, 千秋爲學訣.矧復不逮資, 服膺豈敢忽.百里爲裹糧, 父兄誠且竭.所望如歸虛, 分職能無闕.聖門有二字, 憤悱卽機栝.人皆驥足展, 我胡駘步屈.食息存此心, 靜敬作計活.吾爲奉隋珠, 視爲無雙物.曾聞無面目, 人情久親密.九仞功成後, 應不忘此日. 편안하고 …… 이루고 제갈량(諸葛亮)이 아들 제갈첨(諸葛瞻)을 경계한 글에 "군자의 행실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르나니,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편안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원대함을 이룰 수 없다.[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非澹泊, 無以明志; 非寧靜, 無以致遠.]"라는 말이 나온다. 《小學 嘉言》 총명은 …… 나온다네 정이(程頤)가 "총명예지가 모두 이 공경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로써 하늘을 섬기고 상제에 제향하는 것이다.[聰明睿知皆由是出, 以此事天饗帝.]"라고 한 말이 있다. 《近思錄 卷4 存養》 귀허와 같으니 끝없이 노력하라는 뜻이다. 원문의 '귀허(歸虛)'는 '귀허(歸墟)'와 같은 것으로, 전설상 바다 속에 있는 밑 없는 골짜기로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라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발해(渤海)의 동쪽 몇 억만 리가 되는지 모를 정도의 지점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실로 밑이 없는 골짜기이다. 그 아래에는 밑이 없으니 이름하여 '귀허(歸墟)'라 한다.[渤海之東, 知幾億萬里, 有大壑焉, 實惟無底之谷. 其下無底, 名曰歸墟.]" 하였다. 성문(聖門) 공자(孔子)의 문하로 유학을 말한다. 분과 비[憤悱] 학문을 갈구하여 분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분(憤)'은 깨닫지 못해서 분하게 여기는 것이고, '비(悱)'는 말로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더듬거리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마음속으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말로 나타내고자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하였다. 《論語 述而》 수주(隋珠) 수후(隋侯)가 얻은 구슬로, 매우 진귀한 보물이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비유하자면 수후의 구슬과 화씨(和氏)의 구슬을 얻는 자는 부유해지고 잃는 자는 가난해지는 것과 같다.[如隋侯之珠ㆍ和氏之璧, 得之者富, 失之者貧.]"라고 하였는데, 고유(高誘)의 주(注)에 "수후는 한(漢)나라 동쪽에 있는 나라의 희성(姬姓)을 가진 제후이다. 수후가 배가 갈라진 큰 뱀을 보고 약을 발라 치료해 주었는데, 후일에 그 뱀이 강 속에서 큰 구슬을 물고 나와 보답하였다. 그래서 '수후의 구슬[隋侯之珠]'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큰 공업이 이뤄진 '구인(九仞)'은 아홉 길 높이로 매우 높은 것을 말한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목표를 이룬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밤낮으로 부지런하지 못한 점이 혹시라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자그마한 행동이라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칠 것이니, 이는 마치 아홉 길의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여 그 공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夙夜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월 오일 초강에서 노닐며 五月五日 遊楚江 오월 오일 초강에는 五月五日楚江中나부끼는 네가래 푸르고 비젖은 여뀌 붉네 風蘋靑靑雨蓼紅내 두 줄기 눈물 떨궈 삼려230)를 조문하니 我淚雙墮吊三閭머나먼 옛날 지명과 우연히도 똑같구나231) 千古偶因地名同언영232) 때의 일은 어찌 그리 잘못되었나 鄢郢時事一何錯둔마를 상양으로 여겨233) 준마를 버렸네 上襄駑駘棄駿驄간서는 구름처럼 많았으나 하늘은 멀어 諫書如雲天邈邈의담과 충간들234) 피로 가슴을 채웠도다 義膽忠肝血塡胸깨끗한 몸으로 어찌 더러움을 받으리오 皜皜安能受汶汶물고기 뱃속에 잘 묻히면 만사가 끝인 것을235) 好藏魚腹萬事終가을 하늘의 밝은 해와 광결함을 다투었고236) 秋天皎日爭光潔곤룡포의 기림이 빛나니 회옹을 만났구나237) 袞褒燁燁遇晦翁아 오늘이 무슨 날이던고 吁嗟今日是何日맥수와 서리238)의 슬픈 곡조에 오열하네 麥秀黍離咽悲風먼 뒷날에 참된 의리를 더 심히 느끼니 曠感義諦殆有甚천 길 흰 물속이라도 따를 만하다네 千丈白水可相從뻔뻔하게 구차히 사는 건 남자가 아니니 靦然苟活非男子아득히 백세토록 부끄러움 끝이 없으리 悠悠百世愧無窮한 잔 술을 붓고 나니 긴 강은 저물고 一樽酹罷長江暮백구는 푸른 산 하늘로 다 날아가구나 白鷗飛盡碧山空 五月五日楚江中, 風蘋靑靑雨蓼紅.我淚雙墮吊三閭, 千古偶因地名同.鄢郢時事一何錯, 上襄駑駘棄駿驄.諫書如雲天邈邈, 義膽忠肝血塡胸.皜皜安能受汶汶, 好藏魚腹萬事終.秋天皎日爭光潔, 袞褒燁燁遇晦翁.吁嗟今日是何日, 麥秀黍離咽悲風.曠感義諦殆有甚, 千丈白水可相從.靦然苟活非男子, 悠悠百世愧無窮.一樽酹罷長江暮, 白鷗飛盡碧山空. 삼려(三閭)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으로, 조정에서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모함을 받고 쫓겨난 뒤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은 굴원(屈原)을 말한다. 머나먼 …… 똑같구나 굴원(屈原)이 쫓겨나서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기 직전까지 배회하던 소상강(瀟湘江) 일대를 '초택(楚澤)'이라 하니, 지금 초강(楚江)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뜻이다. 언영(鄢郢) 춘추 시대 초나라의 도읍지들인데 여기서는 초나라를 가리킨다. 초나라 문왕(文王)이 처음 영(郢) 땅에 도읍했다가 혜왕(惠王) 때 언(鄢) 땅으로 도읍을 옮겨서도 그대로 영이라 불렀다. 둔마를 상양으로 여겨 둔마를 좋은 말로 여겼다는 뜻이다. '노태(駑駘)'는 둔한 말이다. '상양(上襄)'은 가장 좋은 말이다. 《시경(詩經)》 〈대숙우전(大叔于田)〉에 "두 마리 복마는 가장 좋은 말이요 두 마리 참마는 기러기처럼 뒤따라 가도다.[兩服上襄, 兩驂鴈行.]"라고 하였는데 주희 집전에 "양(襄)은 멍에이니, 말의 상품(上品)을 상가(上駕)라 하니, 상사(上駟)라는 말과 같다.[襄, 駕也, 馬之上者爲上駕, 猶言上駟也.]"라고 하였다. 의담과 충간들 의롭고 충성스런 마음을 가진 신하들을 말한 것이다. 깨끗한 …… 것을 《초사(楚辭)》 〈어부(漁父)〉의 "차라리 소상강 강물에 뛰어들어 강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될지언정, 어찌 희디흰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쓰겠는가.[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䝉世俗之塵埃乎.]"라고 하였다. 가을 …… 다투었고 《사기(史記)》 〈굴원열전(屈原列傳)〉에 굴원(屈原)의 결백한 절조를 말하여 "그의 뜻을 미루어보면 그는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推此志也, 雖與日月爭光可也.]"라고 하였다. 곤룡포의 …… 만났구나 굴원(屈原)이 주희(朱熹)의 평가를 통해 영광스러운 칭찬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곤룡포의 기림'은 지극히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범녕(范甯)의 〈춘추곡량전 서(春秋穀梁傳序)〉에 "《춘추》의 한 글자의 칭찬이 화곤을 받는 것보다도 영광스럽고, 한마디의 비판이 시장에서 맞는 회초리보다도 욕되다.[一字之褒, 寵逾華袞之贈, 一言之貶, 辱過市朝之撻.]"라는 말이 나온다. '회옹(晦翁)'은 남송(南宋)의 학자 주희(朱熹)의 호이다. 맥수(麥秀)와 서리(黍離)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한 노래들이다. 〈맥수(麥秀)〉는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터를 지나가다가 궁실이 다 허물어진 모습을 보고 지었다. 《史記 宋微子世家》. 〈서리(黍離)〉는 《시경》의 편명으로, 동주(東周)의 대부가 멸망한 서주(西周)의 옛 도읍을 지나가다가 옛 궁실과 종묘가 폐허로 변한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이희석(李喜錫) 수신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至月十四日 李喜錫 至月十四日 李喜錫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 11월 14일에 가천에 사는 아무개가 이희석에게 보기를 청하였지만 못 만났기에 장성을 출발하니 만나서 이야기 나누자는 간찰 모년 11월 14일에 가천(可川)에 사는 아무개가 이희석(李喜錫)에게 보기를 원하였지만 못 만났기에 장성을 출발하니 만나서 이야기 나누자는 편지이다. 국한문을 혼용하여 쓴 쪽지이다. 누차 보기를 청하였지만 왜 못 들은 척 하는지 모르겠다며, 급한 일이 있어 장성(長城)을 출발하여 떠났으니 만나는 것을 약속하여 얼굴 보며 세세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6년 이송렬(李松烈)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子五月十四日 李松烈 李敎成 丙子五月十四日 李松烈 李敎成 전라북도 고창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36년 5월 14일에 이송렬이 사돈어른 이교성께 안부를 여쭙고, 질부의 건강과 아이들의 일과, 농장에 이식하는 일, 남초에 대한 일을 써서 보낸 간찰 1936년 5월 14일에 고창군(高敞郡) 성내면(星內面)에 사는 이송렬(李松烈)이 보성군 문덕면(文德面)에 사는 사돈어른 이교성(李敎成)께 안부를 여쭙고 질부(姪婦)의 건강과 아이들의 일과, 농장에 이식(移植)하는 일, 남초(南草, 담배)에 대한 일을 쓴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질부의 건강은 조금 나아졌고, 공부하는 아이들도 일과를 잘 배워서 다행이다. 드릴 말씀은 근래 귀 족씨인 석씨(錫氏) 노인의 편지에 이식이 물론 완료 되었다고 하지만 상답(上畓)은 겨우 완료되었다고 한다. 말씀하신 담배는 농사에 힘쓰느라 바빠서 겨를이 없었으니 더디더라도 기다려 주시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06년 정재각(鄭在珏) 혼서지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丙午五月十四日 鄭在珏 潭陽李參奉 丙午五月十四日 鄭在珏 潭陽李參奉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6년 5월 14일에 정재각(鄭在珏)이 담양 이참봉에게 보낸 혼서지 1906년 5월 14일에 정재각(鄭在珏)이 담양 이참봉에게 보낸 혼서지이다. 신랑의 조부 정재각이 신부의 부친 이참봉에게 보낸 혼서지이다. 이참봉의 본관은 담양이다. 혼서지의 내용은 따님을 우리 종손 순혁(淳赫)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허락하셔서 이에 선인(先人)의 예(禮)에 따라 공경히 사자를 보내 납폐례(納幣禮)를 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랑은 정순혁이며, 정재각과는 조손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 혼서지는 납폐 때 보낸 것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자정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趙子貞 戊寅 부모가 외지로 나가셔서 그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경우, 자식이 상복을 입고 제사를 행하는 기일에 대하여 선배들이 논한 것이 똑같지 않습니다. 혹은 나이 100세로, 혹은 나이 80세로, 혹은 10년을 찾았는데도 찾지를 못하는 경우로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저의 견해로는 마땅히 해당인의 건강했는지 병들었는지, 도로가 험한지 평탄한지, 인심의 후한지 박한지, 탐색의 엉성했는지 정밀했는지를 가지고 서로 참고하여 결정을 해야지,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상황이 궁하고 희망이 끊어져서 더는 목숨을 구할 수 없게 되어야만 상복을 입고 제사를 행할 수 있습니다.그대의 중부(仲父) 어른은 집에 있었을 때 병으로 혼미함이 이미 심했고, 나이도 84세가 되었고, 집을 나간 지 6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난세로 인심도 박하고 나쁘니, 사세로 헤아려볼 때 생존해 있을 이치는 전혀 없습니다. 또 큰 아들이 61세이고, 둘째 아들도 60세에 가까워서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니, 그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는다면 다시 누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상황이 궁하고 희망이 끊어진 경우입니다. 영백(令伯)이 이런 상황을 좇아서 발상(發喪)하여 상복을 입고자 하니,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기제(忌祭)의 날짜는 세속에서는 모두 집을 나간 날짜를 씁니다. 그러나 이 어른은 집을 나간 뒤에도 사람들이 만나 본 명확한 근거가 있어서 그 예를 따르기 어렵습니다. 영백의 회갑일은 바로 부모가 길러주신 은혜에 대해 자식으로서 의당 갑절 비통할 때이니, 이날로 정한다면 아마도 옳을 듯합니다. 이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초종(初終)의 의식처럼 일찍이 입으셨던 상의를 가지고 초혼(招魂)을 하고, 주인(主人) 이하는 머리를 늘어뜨리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음식은 먹지 않으며, 의식대로 영좌(靈座)를 설치합니다. 이튿날엔 머리를 묶고 백건(白巾)을 씁니다. 4일째에 조전(朝奠)을 올리고 성복(成服)를 합니다. 성복을 하기 전에는 매일 한 차례 전(奠)을 올리며 곡소리를 그치지 않으며, 성복을 할 때에 사유를 갖추어 고합니다. 한 달이 지난 뒤에 날을 택하여 신주(神主)를 세우고, 졸곡(卒哭)을 한 다음에 부제(祔祭)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父母出外,不知所終者,其子爲之服喪行祭之期,前輩所論不一.或以年壽百年、或以八十年、或以求之十年不得爲斷.然淺見當以當人之病健、道路之夷險、人心之厚薄、探索之疎密,參互而決之,不可以歲年之久近爲斷也.要之情窮望絕,更無求性, 然後乃可服喪行祭矣.如尊仲父丈,在家病昏已甚,且壽爲八十有四,出爲六年之久,加以亂世人心薄惡,度以事勢,萬無生存之理.且長子六十一歲,其次亦近六旬,皆朝暮之人,一朝溘然,更誰求之? 此正所謂情窮望絕者.令伯從之欲發喪受服,不其然乎?其忌祭之日,則世俗皆用出去日.然此丈則出去後,亦有有人相見之的據,難從其例.令伯氏周甲日,是父母劬勞人子當倍悲痛之時,用是日爲定恐宜.是日早起,以曾經上衣招魂,如初終儀,主人以下,披髪易服不食,如儀設靈座.明日,括髪著白巾.第四日朝奠成服,成服前,每日一奠,哭不絕聲.成服時,具由告辭.間一月,擇日立主,行卒哭祔祭.如何?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자정에게 답함 정축년(1937) 與趙子貞 丁丑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훗날을 부탁한 제자가 악에 빠진 유현(儒賢)은 없다. 이로써 본다면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고 원고를 고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자취로 나아가서 그 유죄 무죄를 논하지 않고, 다만 예부터 없었던 것으로 판단한다면, 천하에는 원래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변고가 없을 것입니다. 천하에 원래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변고가 없다면, 이것은 일원(一元)54) 12만 9600년을 통틀어서 줄곧 변고가 없다는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천하에 처음 보는 변고가 옛날에 없었으나 오늘 비로소 있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그것을 변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참으로 처음 보는 변고가 있었지만 현자가 사람을 알아보고 맡겼기 때문에 이러한 변고가 없다고 한다면 곤(鯀)에게 치수(治水)를 맡긴 것55)과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은(殷)나라의 감독을 맡긴 것56)은, 요(堯) 임금과 주공(周公)이 현명하지 않아서입니까? 만약 이는 국가의 일이지 유문(儒門)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정인홍(鄭仁弘)57)은 남명(南冥)이 훗날을 맡긴 제자가 아닙니까? 남명은 유현이 되기에 부족한 것입니까? 여기서 그 설은 일찌감치 타파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禹)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지혜가 밝음이라, 요 임금도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58)고 하였고, 공자가 말하기를 "주공의 과실은 또한 마땅하지 아니한가."59)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일이 일이나기 전에 사람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성현이 되는데 해가 되지 않은 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선사가 실로 오진영에게 훗날을 부탁했고 오진영이 악에 빠졌더라도 애당초 선사의 허물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선사가 오진영에게 애당초 의발과 서책을 전하기를 근세의 여러 현인들처럼 한 것이 없고, 또 문장으로 근거가 되는 것이 원고 중에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처럼 일컬은 것도 없으며, 아울러 여러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명한 것이 없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그대는 황소심(黃小心)을 '노성장덕(老成長德)'과 '공언정의(公言正義)'로 논정하였는데, 모인(某人)이 음성 오진영이 칭한 "황은 무식해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들어서 답장을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진실로 무식한 견해입니다. 무릇 식견에는 문식(文識)과 견식(見識)의 차이가 있으니, 문식은 글자를 아는 것이고 견식은 의리를 아는 것입니다. 글자는 알지 못하지만 의리를 알면 유식하게 되는데 해가 되지 않고, 문자는 알지만 의리를 알지 못하면 무식하게 됨을 면하지 못합니다. 옛날에 정무공(貞武公) 오정방(吳定邦)60)은 광해군이 폐모(廢母)를 논의하는 자리에 나아가 말하기를, "신은 무부(武夫)로 다만 《사략(史略)》 1권만 읽고 단지 '점점 다스려 간악함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는 것만 알 따름입니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명언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오정방은 음성 오진영의 헌조(顯祖)입니다. 황장(黃丈)이 참으로 문식이 없다고 해도 다만 그 설이 의리에 합하는지 여부만을 논해야 할 뿐이고 결단코 무식으로 단정해서 안 됩니다. 만약 정무공이 당시에 이이첨(李爾瞻) 무리가 "오는 무식해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면 어찌 이치에 어긋난 말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물며 황장의 문장은 전중(典重)하고 평순(平順)하며 명백(明白)하고 절실(切實)하야 음성 오진영의 기이함을 숭상하는 문장이 능히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동문의 능숙한 자도 그보다 훨씬 뛰어난 자는 없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오진영이 한 것처럼 하지 않았던 까닭에 혁혁한 명성이 없었을 뿐입니다. 대개 의리와의 합치 여부를 논하고자 한다면 오진영이 행한 것은 짝할 만한 의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줄곧 근거 없이 말만 놀려서 사람의 눈귀를 현혹하고, 이내 모는 가난함에 손상이 되었고, 모는 사적인 일을 도모하였고, 모는 유감을 가지고 있고, 모는 사기를 당하였다고 하였고, 심지어 황장은 무식하다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장이 만약 문장으로 이름이 났더라면, 그는 반드시 모는 시샘과 기교로 명성을 다퉜다라고 하였을 것이니, 그의 험악한 마음과 번지르르 입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묵묵히 우리의 의리를 지키면서 선사의 무함을 분명하게 변론할 따름입니다.모인은 어찌 한 번 생각지 않았단 말입니까? 오진영은 어렵지 않게 직접 선사의 원고를 고쳤고, 심지어 선사에게서 받은 조부의 묘지명(墓誌銘)도 고치고 첨가한 것이 많았으며, 또 그 당파 집안의 묘명(墓銘)도 고쳐서 묘갈명(墓碣銘)으로 만들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을 본 전표(傳表)에 대해서도 죽도록 놔주질 않고서 한바탕 얘기꺼리를 만들었으니, 오진영이 염치가 없음은 진실로 당연하였습니다. 모인은 어찌 한 번 생각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전에 쇠몽둥이로 머리를 때린 죄를 갚고자 하여 감히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고자 한 것이란 말입니까? 某人言: "自古無儒賢託重弟子之陷惡者,以此知震泳之不誣師亂稿." 蓋不就心跡上論其有罪無罪,只以自古所無斷之,則天下元無創有之變也.天下元無創有之變,則是通一元十二萬九千六百年一直無變矣,豈非好事? 終無柰天下創見之變,是古所無而今始有,故謂之變也.若曰變固有創見者,賢者知人而託之,故無此變,則託鯀以治水,託管、蔡以監殷者,堯、周爲不賢矣乎? 若曰此國家事,非關儒門,則仁弘非南冥託重之弟乎? 而南冥不足爲儒賢乎? 於是乎其說早破而不詞矣.禹謂: "知人則哲,惟帝其難." 孔子謂: "周公之過,不亦宜乎?" 以此觀之,不能先事知人,不害爲聖賢明甚.使先師實有託重於吳,而吳也陷惡,初不足爲累,而況先師之於吳,初無衣書之傳,如近世諸賢之爲,又無文字之據,如稱炳菴於稿中者,并無衆中公之命乎!賢弟以黃丈小心之以"老成長德"、"公言正義"爲論定,則某人舉陰吳所稱"黃是無識不足言"之說而答,此皆眞無識之見也.夫識有文識、見識之異,文識識字也,見識識義也.不識字而識義,不害爲有識; 識字而不識義,不免爲無識.昔吳貞武公定邦,當光海廢母議也,進言曰: "臣武夫,只讀《史略》一卷,但知'烝烝乂不格姦'而已." 至今稱爲名言.是爲陰震之顯祖也.使黃丈而眞無文識,只當論其說之合義與否,斷不可以無識而置之.如貞武當日,使爾瞻輩曰"吳是無識不足言",則豈非悖理之談? 而況黃丈之文,典重平順,明白切實,非惟陰震尚奇之文所不能及,同門能手無遠出其右者乎? 特以不衒其能如陰之爲,故無赫赫之名耳.蓋欲論合義與否,則渠之所爲,無義可對.故一直以無稽游辭,眩人視聽,乃曰某也以傷貧,某也以謀私,某也以挾憾,某也以見欺, 以至有黃丈無識之說也.黃丈而如有文章之名,則渠必曰某也以猜巧而爭名矣.其險心利口,何可當也? 只宜黙守吾義,明辨師誣而已.某人何不試一思之? 吳也無難直改師稿,至於所受渠祖墓誌銘,亦多改添,且改其黨家之墓銘作墓碣銘,而於其所惡者,則抵死不舍於已決傳表題目之間,作一副大話柄.吳之無恥固宜然矣.某人何不試一思之? 無乃欲贖前日金椎碎頭之罪而不敢一毫有異歟? 일원(一元)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주장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설에 나오는 용어로, 이 세계가 생성했다가 소멸하는 1주기(周期)를 말한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30년이 1세(世), 12세가 1운(運), 30운이 1회(會), 12회가 1원(元)이니, 일원은 모두 12만 9600년이 된다. 곤에게……것 요임금이 곤에게 치수를 맡겼는데, 온 천하가 물에 잠겼다. 여기서는 요임금같이 어진 임금 밑에서도 신하가 잘못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말하고 있다. 관숙(管叔)……것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들이다. 무왕은 죽고 성왕(成王)이 어려서 주공(周公)이 섭정을 할 때, 주공이 관숙에게 은나라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주공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가 뒤에 성왕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성왕이 주공에게 명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함으로써 난을 평정하였다. 《사기(史記)》 권35 〈관채세가(管蔡世家)〉여기에서는 무왕이 주공에게 나라를 맡겼음에도 무왕의 아우인 관숙 채숙이 난을 일으켰다는 점을 말한다. 정인홍(鄭仁弘) 15세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학문을 닦고 수제자로 학통을 이었다. 조식은 정인홍에게 아끼던 칼을 물려주며 전심(傳心)의 증거로 삼았다. 산림(山林) 출신으로 드물게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른 정치가였으나 끝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인물이다. 사람을……여겼다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에 "아, 모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요제(堯帝)도 어렵게 여긴 바이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바로 명철한 것이다.[吁, 惟帝其難之, 知人則哲]"라고 고요(皐陶)가 우(禹)에게 말한 내용이 나온다. 주공의……아니한가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공이 관숙에게 은나라를 감독하도록 했는데, 관숙이 난을 일으켰다. 이에 주공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관리로 썼다는 허물과, 아우로서 형인 관숙의 난리를 다스렸다는 허물이 있게 되었다. 오정방(吳定邦)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영언(英彦). 호는 퇴전당(退全堂).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내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자정에게 답함 병자년(1936) 與趙子貞 丙子 주자가 왕안석(王安石)의 죄를 논하여 말하기를49) "세상에는 자연히 바꾸지 못할 공론이 있지만, 말하는 사람이 간혹 치우친 데서 벗언나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공론을 잃게 됩니다. 또 '상이 알게 하지 말라[勿令上知]'50)라는 말은 세상이 다함께 전하는 것이지만 결국 수필(手筆)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육전(陸佃)51)으로 하여금 숨길 수 있게 했던 것이고, 비록 원우(元祐)의 여러 현자들이 힘들게 쟁변했지만 바로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그 무리들이 이 진적(眞蹟)을 내놓아서 천하에 그 악함을 폭로하였으니, 곧바로 멋대로 행동하며 이치에 어긋나는 실상을 주워 모아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오도한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히 바꾸지 못할 공론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혐의를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이유 때문에 도리어 완곡하고 에두르는 의론을 하여 이 글귀를 삭제함으로써 그 흔적을 없애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음성(陰城) 오진영(吳震泳)의 "사실은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따랐다."는 수필이 예전에 오진영을 높여서 우옹(尤翁 송시열)이라고 한 자의 집에서 나왔으니, 그것이 진적임이 이보다 확실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를 통해 그가 변명한 행설설(杏下說)52)을 깨뜨릴 수가 있습니다. "단지 지속을 논하였을 뿐이고 인가 여부를 미처 말하지 못하였다."라는 교묘한 말은 또한 오늘날의 '자연히 바꾸지 못할 공론'입니다. 저 김세기(金世基)53)가 크게 써서 두루 변론했던 것은 다만 오진영의 죄악을 더욱 천하후세에 폭로하였을 뿐입니다. 아무개가 "최병심(崔秉心)이 관계를 끊고 호남에서 음성에게 동화된 것에 대해 부끄럽고 분노한다."고 한 것 같은 것은, 그 운운한 것에 대해 어찌 깊이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朱子論王安之罪曰: "天下有自然不易之公論,而言之者不免於有所避就 故多失之.且如'勿令上知'之語,世所共傳,終以手筆不存,故使陸佃得爲隱諱,雖以元祐衆賢爭辨之苦,而不能有以正也.何幸其徒出此眞蹟,以暴其惡於天下,便當摭其肆情反理之實,正其迷國誤朝之罪,是乃所謂自然不易之公論. 柰何乃以畏避嫌疑之故,反爲迂曲回互之論,欲加刊削以滅其跡乎?" 今陰吳"其實原從先師不言之教"之手筆,出於前日尊吳爲尤翁者之家,其爲眞蹟其過於此! 足以破渠分疏杏下說."但論遲速,不及認否"之遁辭,是又今日自然不易之公論也.彼世基之所以大書廣辨者‚ 適足以益暴陰吳之惡於天下後世矣.如某人之"慙憤崔絕自湖化陰"者,其所云云,何足深論? 주자가……말하기를 아래 인용글은 주자가 1199년 8월 하순에 진사석(陳師錫)이 남긴 서첩과 진관(陳瓘)이 올린 표문을 소재로 삼아 왕안석의 학술 경향을 비판한 것인데, 《주자대전(朱子大全)》 권70 〈독양진변의유묵(讀兩陳諫議遺墨)〉에 보인다. 상이……말라 희령 9년(1076) 10월에 풍경(馮京)이 급사중(給事中) 지추밀원사(知樞宻院事)가 되었다. 이에 앞서 왕안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낸 사적인 서찰들의 수필을 모두 내어 놓고서 상주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에서 '제년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勿令齊年知]'는 말이 있었다. 제년(齊年)은 풍경을 말하는데, 왕안석과 함께 같은 해에 중서성에 있으면서 많은 이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또 그 가운데 하나에서는 '상[上: 신종]께서 알지 못하게 하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신종은 왕안석이 자기를 속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도(李燾),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권278. 육전(陸佃) 송나라 신종(神宗)~휘종(徽宗) 때의 문신ㆍ학자. 자가 농사(農師)이며, 호가 도산(陶山)이다. 산음(山陰)사람으로,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에게 사사(師事)하였으나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휘종(徽宗) 때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다. 저서로는 《비아(埤雅)》, 《악후전(樂後傳)》, 《춘추후전(春秋後傳)》, 《예상(禮象)》 등이 있다. 행하설(杏下說) 간재집의 간행과 관련하여, 간재가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있을 때에 오진영에게 "힘을 헤아려 하라."고 명하였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김세기(金世基) 자는 뇌만(賴萬), 본관은 경주로 설재 김려의 후손이며 수원에 거주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종중에 통고하는 글 【1937년】 通告宗中文 【丁丑】 삼가 생각건대 사람의 태어남은 반드시 조상에 근본하니, 근본이 있는 곳을 어찌 감히 오래되고 멀다고 하여 혹 이를 잊고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삼려(三閭)는 고양(高陽)의 후손임을 서술하였고313), 주(周)나라 사람들은 제곡(帝嚳)의 체(禘) 제사의 일을 거행하였으니314), 후대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서 어찌 본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옛날 신라 말에 경순왕(敬順王)315)이 나라를 고려에 넘기려 하자 태자(太子)316)가 간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충신, 의사와 함께 죽음으로써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두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천년의 종묘사직과 수천 리 강토를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통곡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베옷과 초식(草食)으로 여생을 마쳤다는 것이 신라 역사에 실려 있으니317), 개골산은 바로 지금의 금강산(金剛山)입니다.그의 빛나는 충정과 늠름한 기상은 일월과 빛을 다투고 천지에 걸쳐있어 천고가 지나도록 짝이 없고, 오직 후한(後漢)의 북지왕(北地王)318)과 나란히 견줄만합니다. 이 때문에 '동경의 의열[東京義烈]이요 북지의 영풍319)[北地英風]'이라는 말이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320)이 손으로 새긴 데서 나왔고, '늠름한 한 왕자여[凜凜一王子], 아름다운 이름이 천추에 홀로 남았네.[令名獨千春]'라는 말이 사가(四佳) 서공(徐公)321)의 시구(詩句)에서 나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모든 사람의 공론이 되었습니다.우리 부령(扶寧 부안) 김씨는 그의 후손으로, 가첩(家牒)에 실려 있는 것은 이미 세상에 전해졌고, 게다가 나라 안의 많은 문헌에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오래되고 멀어 자세히 알기 어렵다고 여겨서 이를 근본하지 않으면 안 됨이 분명합니다. 무릇 가르치고 기름에 전수 받을 바가 있기 때문에 맹자는 '사람들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322)'라고 하였으니, 의열이 매우 뛰어난 조상이 위에 있고 자손의 본보기가 유래한 바가 있다면 또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삼가 생각건대 우리 김씨의 정학(正學), 직도(直道), 순충(純忠), 탁절(卓節)에 훌륭한 사람이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은 것은 본래 이 조상에서부터 왔음을 또한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난으로 망한 때에 일이 대부분 겨를이 없고, 도망하여 피한 뒤에 사손(嗣孫)이 멀리 살게 되었는데, 개골산은 천하의 궁벽한 곳입니다. 비로봉(毘盧峯)의 북쪽323)과 관음봉(觀音峯)의 서쪽은 개골산의 궁벽한 곳으로 능묘가 있는 곳인데, 의물(儀物)이 갖춰지지 않고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지 못한 것이 거의 숙량흘(叔梁紇)의 장지(葬地)를 알기 어렵고324), 신릉군(信陵君)의 무덤이 사라지기 쉬운 것 같이325) 된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그러나 충의(忠義)를 사모하고 영이(靈異 혼령)에 감응하여 사찰의 승려와 산골의 백성이 앞다투어 풀을 베고 청소하여 공경하고 보호하기를 〈소남(召南)〉의 당(棠)326)과 현산(峴山)의 비(碑)327)처럼 할 뿐만 아닌 지가 천여 년이 되었습니다. 근래에 와서 금강산의 명승(名勝)이 더욱 만국(萬國)에 알려져 기차와 전차가 다니므로 즐기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폭주하자, 산수(山水)의 기이한 절경 이외에 옛 명인(名人)의 유적을 더욱 앞다퉈 보는 것을 유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산(名山)에 있어서는 금강산을 보고, 명인에 있어서는 태자의 유적을 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이에 한 언덕의 깊숙한 곳과 만년토록 숨겨져 온 무덤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람들의 이목에 가득 차 넘쳤으니, 공자의 집 벽에서 나온 서적328)과 주나라 임금이 동쪽으로 왔다는 것 같은 것은 모두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여 보고 싶게 만드는데, 하물며 후손인 우리 김씨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번갈아 달려가 앞다투어 성묘하니 무덤에 탈이 없고 정백(精魄 넋)이 영원히 편안하여, 마치 당일의 충간(忠諫)과 통곡하는 소리를 듣는 것 같고, 천 리나 떨어져 있는 계림(鷄林)의 월성(月城)이 이곳에 있는 듯합니다. 무릇 대량(大梁)을 지나는 자가 혹 이문(夷門)에 멈춰 서서 생각하고329), 구원(九原)에서 노는 자도 진회(隨會)와 배회합니다.330) 저 현자들은 아주 특별히 가깝지 않고 족류(族類)도 아닌데 오히려 그 지역을 인하여 느끼고 생각하거늘, 하물며 일기(一氣)가 서로 전해지고 고풍(高風)331)이 세상에 가득한 현조(顯祖)332)에 대해 그 산소를 찾아가 돌보는 우리들이 어찌 슬퍼하고 추모하면서 공경히 받들 것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이보다 십수 년 전에 근처에 사는 경주 후손 김영필(金永弼)과 김영일(金永日)이 각각 돈을 내어 간략히 제사 지내는 것을 해마다 상례로 삼고 말하기를 "이분은 조상이니, 차마 직계(直系)와 방계(傍系)로써 달리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였고, 또 고성 현감(高城縣監)이 도와준 것을 을 인하여 계를 만들고 이자를 받아 표석(表石)을 세웠으니, 그 마음이 매우 어짊니다. 또 근래에 양호(兩湖)의 인사(人士)가 장차 큰 비석을 세우려는 것을 의논하고 말하기를 "이 산에 들어와서 이러한 일을 기념하지 않으면 이는 공연히 온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또한 높습니다. 무릇 덕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들이 똑같아 친소(親疏)에 차이가 없으니, 저 어질고 의로운 자들의 이러한 거동은 본래 아름다운 일입니다.그러나 본손(本孫)의 경우 조상을 받들고 효를 생각하는 도리에 있어 똑같이 덕을 좋아할 뿐만이 아닌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의물(儀物)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아 방손(傍孫)과 타성(他姓)보다 못하면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되는 일로서 또한 장차 부끄러워하면서 스스로 죽고 싶어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회암(晦菴) 주 선생(朱先生 주자)은 제치 부군(制置府君)의 무덤을 잘 지키지 못한 것을 괴로워했는데, 이를 관리에게 하소연하여 흙을 쌓아 봉분을 높였고333),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은 진사(進士)의 무덤이 실전(失傳)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으니334), 옛 철인들이 조상의 일에 대해서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음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지금 우리의 경우에는 원래 묘가 있고 또 송사할만한 것이 없으니 주자와 우재의 때와 비교하면 일의 완급과 형세의 난이에 있어 일은 적게 해도 공은 배가 될 것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에 저희들이 사정을 살피고 예를 헤아리며 널리 묻고 충분히 의견을 나누어, 전답을 두고 비석 세우는 것을 세사(歲事)의 원계(遠計)로 삼을 뜻을 종친들에게 공경히 고합니다. 오직 바란건대 여러분들께서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하는[追遠報本] 도를 중시하고, 충열을 사모하고 덕을 생각하는 의를 떨쳐, 기꺼이 성금을 내어 큰일을 잘 마칠 수 있게 해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竊以夫人之生, 必本於祖, 本之所在, 豈敢以久遠而或忘之而不報之也? 是故三閭敍高陽之苗裔, 周人擧帝嚳之禘事, 後人於此, 寧不思所以法之乎? 昔夫新羅之末, 敬順王以國讓麗, 太子諫曰: "當與忠臣義士, 以死自守, 力盡而後已. 柰何以一千年宗祊, 數千里疆土, 一朝與人乎?". 及其不聽也, 則痛哭入皆骨山, 麻衣草食, 以終餘年者, 載在羅史, 皆骨卽今之金剛山也. 其炳然之忠, 凜然之氣, 光日月, 亘天地, 曠千古而無儔, 惟後漢之北地王, 可比幷焉. 所以東京義烈, 北地英風, 出於梅月堂金公之手刻, 凜凜一王子, 令名獨千春, 出於四佳徐公之詩句, 而爲百世之不刊, 萬口之公論也. 我扶寧之金, 爲其裔孫, 家牒所載, 旣是世傳, 加以國中文獻之多有明徵, 其不可以爲久遠難詳而不本之也審矣. 夫以敎養之有所受, 孟子謂人樂有賢父兄, 則義烈特絶之祖在上, 而子孫儀刑之有所自, 則又當如何? 竊意吾金正學直道純忠卓節之賢, 連世不絶者, 本自是祖而來, 亦不可誣矣. 惟是亂亡之際, 事多未遑, 逃竄之餘, 嗣承遠居, 而皆骨之山, 天下之僻處, 毗盧之北, 觀音之西, 皆骨之僻處, 陵墓所在, 儀物不備, 苾芬久闕, 幾乎叔梁之葬難知, 信陵之墟易泯, 無足怪者. 然忠義所慕, 靈異所感, 寺僧峽氓爭先芟掃, 以敬以護, 不啻若〈召南〉之棠, 峴山之碑者, 爲千餘年矣. 至于近日, 金剛名勝益聞萬國, 汽電通車, 探賞輻湊, 流峙奇絶之外, 古名人遺跡, 尤競先覩之爲快, 則莫不曰於名山見金剛, 於名人見太子遺跡. 於是一邱之閟, 萬年之藏, 聲聞于世, 盈人之耳目, 若孔書之出壁, 周袞之來東, 皆驚聽而願見, 矧在吾金之爲裔孫者乎? 迭相駿奔, 後先展省, 則斧堂無恙, 精魄永安, 當日之忠諫痛哭, 如聞其聲, 千里之鷄林月城, 若在此地. 夫過大梁者或佇想於夷門, 遊九原者亦徊徨於隨會, 彼賢非絶特親, 非族類, 尙因其地而起感想, 矧在吾一氣相傳, 高風滿世之顯祖, 而省其墓者, 豈不惻怛追慕, 謀所以虔奉哉? 前此十數年, 近居慶州後人金永弼金永日, 醵金略祀, 歲以爲常曰: "是祖也, 不忍以直傍而異視.", 又因高城倅寄助, 而立契取息以立表石, 其心孔仁矣. 近又有兩湖人士, 將議豊碑之樹曰: "入此山而不記念此事, 是不免虛到.", 其義亦高矣. 夫好德之心, 人之同然, 而無間於親疏, 彼仁義者之爲此擧, 自是美事. 然在本孫奉先思孝之道, 非但有好德之同然而已者如何? 不盡誠於儀物苾芬之方, 而讓於傍孫與他姓, 則是不可使聞於人, 亦將羞愧而自死也. 昔者晦菴朱先生痛制置塋之失守, 訟之於官而崇土, 尤齋宋先生恨進士墳之無傳, 築之以壇而行祀, 曩哲之於先事, 靡不用極蓋如是. 今此元自有墓, 而又無可訟者, 視朱宋之日, 事之緩急, 勢之難易, 有相倍半而不待言矣. 迺者鄙等諒情度禮, 博詢爛議, 以置田立碣爲歲事遠計之意, 敬告于僉宗. 惟願諸位, 重追遠報本之道, 奮慕烈念德之義, 樂出誠金, 克竣大事之地, 千萬幸甚. 삼려(三閭)는 …… 서술하였고 삼려는 초(楚)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낸 굴원(屈原)을, 고양은 전욱(顓頊)을 일컫는 말이다. 굴원은 《이소경(離騷經)》에서 "(굴원은) 고양제의 후예이며, 내 아버지는 백용이라 한다."라고 하여 고양의 후예임을 서술하고 있다. 주(周)나라 …… 거행하였으니 《예기》 〈제법(祭法)〉에 "주(周)나라 사람은 제곡에게 체제사를 지내고 후직에게 교제사를 지내며, 문왕을 조로 삼고 무왕을 종으로 삼았다."라고 하였고, 《예기》 〈대전(大傳)〉에 "왕이 아니면 체제사를 지내지 못하니, 왕자는 그 시조를 출생시킨 제왕에게 체제사를 지내고 그 시조로서 배향한다."라고 하였다. 경순왕(敬順王) ?~979 :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태자(太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 ?~?)이다. 옛날 …… 있으니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 제이(紀異第二) 김부대왕(金傅大王)〉에 나온다. 후한(後漢)의 북지왕(北地王) 후한은 촉한(蜀漢)이고 북지왕은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 유심(劉諶)이다. 촉이 위(魏)나라의 침공을 받고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유선은 항복할 것을 결심했으나 유심은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유심은 자신의 말이 수용되지 않자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고 먼저 처자를 죽인 다음 스스로 자살했다. 《삼국지(三國志)》 권33 〈촉서 삼(蜀書三) 후주전(後主傳)〉 동경의 …… 영풍 동경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뜻하고, 북지의 영풍은 마의태자의 꿋꿋하고 의연한 태도를 칭송한 표현이다.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사가(四佳) 서공(徐公)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다. 사람들은 …… 즐거워한다 《맹자》 〈이루 하〉에서 맹자가 "도에 맞게 행하는 자가 도에 맞게 행하지 못하는 자를 길러 주고,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中也養不中, 才也養不才. 故人樂有賢父兄也.]"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비로봉(毘盧峯)의 북쪽 비로봉에서 북쪽 능선을 따라 1.4km 정도 내려가면 길 서남쪽 비탈진 언덕에 마의태자릉(麻衣太子陵)이 있다. 숙량흘(叔梁紇)의 …… 어렵고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아버지의 묘를 알지 못했다.[孔子少孤, 不知其墓.]"라고 하였다. 신릉군(信陵君)의 …… 같이 이백(李白)의 〈양원음(梁園吟)〉이란 시에 "옛날 신릉군은 호걸이요 귀인이었지만 지금 신릉군의 무덤엔 사람들이 농사짓고 있네.[昔人豪貴信陵君, 今人耕種信陵墳.]"라고 하였다. 〈소남(召南)〉의 당(棠) 《시경집전(詩經集傳)》 〈소남 감당(甘棠)〉에 "소백(召伯)이 문왕의 정사를 펼 때 혹 감당나무 아래서 머물렀는데, 뒤에 백성들이 그의 덕을 그리워하였다. 그래서 그 나무를 아껴 차마 손상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현산(峴山)의 비(碑) 진(晉)나라의 양호(羊祜)가 양양(襄陽) 태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떠난 뒤에 그 지방 백성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현산에 양호가 평소 노닐며 쉬었던 곳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세워 세시마다 제를 올렸다. 그 비석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기에 두예(杜預)가 이를 타루비(墮淚碑)라 이름하였다. 《진서(晉書)》 권34 〈양호전(羊祜傳)〉 공자의 …… 서적 한(漢)나라 무제(武帝) 말에 노 공왕(魯恭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을 헐어서 궁(宮)을 넓히려고 하다가 그 벽(壁) 속에서 얻은 《고문상서(古文尙書)》, 《예기》, 《논어》, 《효경(孝經)》 등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권30 〈예문지 권십(藝文志第十)〉 대량(大梁)을 …… 생각하고 《육신주문선(六臣註文選)》 권36에 "《사기(史記)》에 위(魏)나라에 후영(侯嬴)이라는 은사(隱士)가 있는데, 나이 70세에 집이 가난하여 대량의 이문 문지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지나다가 대량의 옛터를 보고 이른바 이문이란 것을 찾아 물어보니, 이문은 성의 동쪽 문이었다"라고 하였다. 후영은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의 빈객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사기(史記)》 권7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에 보인다. 구원(九原)에서 …… 배회합니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조문자(趙文子)가 숙예(叔譽)와 함께 구원의 무덤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나는 누구를 따를까? 나는 수무자를 따를 것이다. 그는 임금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기 몸을 잊지 않고, 자기 몸을 생각하면서도 그 벗을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말이 나온다. 수회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로 이름은 사회(士會)이며, 수무자(隨武子), 범무자(范武子)라고도 부른다. 고풍(高風) 고상한 풍채(風采)나 품격(品格)을 말한다. 현조(顯祖) 이름이 세상에 높이 드러난 조상을 말한다. 회암(晦菴) …… 높였고 주자가 원조(逺祖) 21공(公) 및 제치 부군과 조비(祖妣) 두씨 부인(杜氏夫人)의 묘에 고하는 글에 '선조 무덤을 공경히 잘 지키지 못해 일찍이 타인의 소유가 되어 떨리고 두려웠는데, 유사에게 하소연하여 옛 모습을 회복하여 흙을 쌓아 봉분을 높이고 석물을 세웠다.'라고 한 말이 《회암집(晦庵集)》 권86 〈축문(祝文) 제고원조묘문(祭告逺祖墓文)〉에 나온다. 우재(尤齋) …… 지냈으니 진사는 우암의 9대조 송극기(宋克己)인데, 우암이 묘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신단을 설치해서 나란히 제향하는 장소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45 〈구대조진사부군신단비기(九代祖進士府君神壇碑記)〉에 나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나라 안의 여러 김씨에게 두루 고하는 글 【1931년】 徧告國中諸金氏文 【辛未】 삼가 생각건대 사람이 태어날 때 남녀의 구분이 있고, 남녀가 있기에 부부가 있으며, 부부가 있고 난 뒤에 부자(父子), 군신(君臣), 장유(長幼), 붕우(朋友)가 있으니,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를 중시하여 혼인의 예를 제정할 때 반드시 다른 성[異姓]에서 찾게 한 것은305) 음탕을 방비하여 금수(禽獸)와 같이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책(史策)을 조사해보니 비록 치란(治亂)이 한결같지 않고 오륭(汚隆 쇠퇴와 융성)이 무상하지만, 위로 제왕으로부터 아래로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예법을 넘고 범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오직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동성(同姓)인 오씨(吳氏)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예에 맞지 않는 부끄러움을 알고 이를 숨겨 오맹자(吳孟子)306)라고 하였습니다. 왕망(王莽)307)이 왕씨(王氏)를 아내로 맞이하고 찬적(簒賊)한 소행에 이르러서는 애초에 굳이 말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왕망이 이미 한(漢)나라를 찬탈한 뒤에 유씨(劉氏)를 모두 왕씨로 고쳤는데 그의 며느리 유씨는 고치지 않았으니, 이는 왕망도 오히려 동성이 혐의가 됨을 안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성(先聖)의 엄한 예법은 어떠합니까.우리나라는 평소 예의(禮義)의 나라로 일컫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이르러서는 매우 엄정하지 않아서 동성혼(同姓婚)이 대부분 본관이 다름을 핑계하여 행해졌습니다. 이는 신라와 고려의 나쁜 풍습으로 인하여 여속(餘俗)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니, 중화인에게 오랑캐의 풍습을 취했다고 기롱(譏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국조대전(國朝大典)》에 이미 '본관이 다르지만 성이 같으면[貫異姓同] 혼인하지 말라.'는 글이 있으니, 마땅히 모두 구관(舊貫)308)을 바꿔 다 함께 새로워질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위에서 실제로 시행하지 않고 아래에서 실제로 행하지 않아, 다만 이름만 있고 일이 없어 그대로 인습하고 구차히 하여 어둡고 어지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명가(名家)와 덕이 높은 자로 불리더라도 귀결점이 같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루다 탄식할 수 있겠습니까.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본관이 다르고 성이 같은 경우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통혼(通婚)을 혐의하지 않으니, 예법에 죄를 지음이 깊다. 조정에서 금지 조항을 행하여 예법으로써 백성을 인도하는데도 백성이 이에 따르지 않음이 옳은가.309)"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엄격하고 발라 본받을 만합니다.우리 김씨는 비록 본관이 많지만 모두 똑같이 경순왕(敬順王)310)에게 나왔으니, 상하 장계(長季)의 구분과 소목(昭穆)의 차례가 분명히 사첩(史牒)에 있습니다. 이에 가장 서로 먼 자도 40세(世) 이내의 동조(同祖)에 지나지 않으니, 본관을 얻기 전의 상고할 수 없는 집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결국 모두 대보공(大輔公)311)을 근본으로 하여 근원이 같음[同源]이 매우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다른 성[他姓] 가운데 성이 같지만 혹 근원이 다른[異源] 자와는 다른 것이 있으니, 더욱 본관이 다름[異貫]을 핑계하여 통혼해서는 안 됨이 분명합니다.비록 근원이 다르지만 수로왕(首露王)312)의 후손일 경우에는 혐의스러운 일을 멀리하는 도리에 있어 또한 일체 논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대개 이러한 것을 예로 금지한 것이 이미 성인에게서 정해졌고 또한 나라의 법전에 드러나 있으니, 결코 '선대에서 이미 행해졌고 명가와 덕이 높은 자들의 통례(通例)이니 이에 따라 개정(改正)할 겨를이 없다.'라고 말해서는 안 됨이 또한 분명합니다. 제가 몽매하고 비루하지만 젊었을 때부터 항상 이러한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왔습니다. 그러다가 직접 자녀와 제질(弟姪)의 혼례를 여러 차례 주관할 때 이르러서는 모두 반드시 이성(異姓)을 찾아 영원히 가법(家法)으로 삼았는데, 매우 마음에 온당함을 느꼈습니다.이는 구구한 제가 감히 보통 사람과 달라 스스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라 안의 여러 성 가운데 근원이 같음이 분명한데도 통혼이 많은 것은 우리 김씨 만한 경우가 없으니, 이는 예에 맞지 않는 부끄러움과 중화인의 기롱을 우리 김씨가 많이 살 것이므로 참람하고 경솔함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이미 먼저 시행한 것으로써 전국의 김씨 여러분께 두루 고하여 함께 예전(禮典)을 준수하는 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분들께서 깊이 궁구하고 정밀히 살펴 이구동성으로 말하여 서로 응하고, 마음을 같이 하고 힘써 행하여 일세(一世)의 미속(美俗)을 이루고 천고의 비루한 풍속을 씻어낸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竊惟人之生也, 有男女之分, 有男女, 故有夫婦, 有夫婦, 然後有父子君臣長幼朋友, 夫婦者人倫之始, 萬福之源. 故聖人重之, 制爲婚姻之禮, 必使求諸異姓者, 爲其防淫佚而恥與禽獸同也. 考諸史策, 雖治亂不一, 汚隆無常, 上自帝王下至士庶, 未聞有踰犯防閑者. 惟魯昭公娶於同姓之吳, 而知非禮之恥, 諱之爲吳孟子, 至於王莽妻王氏, 簒賊所爲, 初不足言也. 然莽旣簒漢之後, 凡劉氏皆改爲王氏, 其子婦劉氏則不改, 是莽猶知同姓爲嫌也. 然則先聖禮法之嚴, 爲何如哉? 我國素稱禮義之邦. 然至於此事, 不甚嚴正, 同姓之婚, 多諉異貫而行之, 蓋因羅麗陋習而餘俗尙存也, 取夷風之譏於華人宜矣. 《國朝大典》旣有貫異姓同, 毋得爲婚之文, 則宜若一切革舊貫, 咸與維新而不能者, 上不實施, 下不實行, 徒有名而無事, 因仍苟且, 泯泯棼棼, 雖號名家碩德, 亦不免同歸, 可勝歎哉? 尤菴宋先生有言曰: "貫異姓同, 東俗不嫌通婚, 得罪禮法深矣. 朝家行禁條, 以禮法導民, 而民乃不從可乎?", 此言峻正可法. 惟我金氏, 本貫雖多, 擧同出於敬順王, 上下長季之分, 昭穆之次, 明在史牒, 其最相遠者, 不過四十世以內同祖, 雖以得貫前無稽之家言之, 究皆本於大輔公, 而其爲同源則明甚, 與他姓之姓同, 而容有異源者有異, 尤不可諉以異貫而通婚也審矣. 雖異源, 如首露王之後, 在遠嫌之道, 亦一切勿論可也. 蓋此禮禁旣定於聖人, 亦著於國典, 決不可曰先世已行, 名碩通例, 而從其未遑改正者又審矣. 澤述蒙陋, 自少時常以是爲未安矣, 及至身主子女弟姪嫁娶者累次也, 皆必求異姓, 永爲家法, 頗覺心下穩貼. 區區非敢異衆自矜, 特以國中諸姓同源明而通婚多者, 未有如我金氏, 則非禮之恥, 華人之譏, 亦應我金氏多受. 故不揆僭率, 敢以已所先行者, 徧告全國金氏僉座, 欲同歸於遵禮守典之地. 伏願僉尊深究精察, 齊聲相應, 同心力行, 成一世之美俗, 洗千古之陋風, 千萬幸甚. 성인이 …… 것은 《예기》 〈방기(坊記)〉에서 공자가 "아내를 취하되 동성을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라고 한 말이 나온다. 노(魯)나라 …… 오맹자(吳孟子) 노나라와 오나라는 같은 희성(姬姓)이기 때문에 오맹희(吳孟姬)라고 해야 하는데, 노나라 소공이 그것을 꺼려 송(宋)나라에서 시집온 것처럼 오맹자라고 했다는 내용이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왕망(王莽) B.C.145~A.D.23. 전한의 정치가이다. 자는 거군(巨君)이다.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신(新)으로 명명하였다. 한(漢)나라 유수(劉秀)에게 피살되었다. 구관(舊貫) 예전부터 내려오던 관례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07 〈답김노원(答金魯源)〉에 나온다. 경순왕(敬順王) ?~979.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65~?)이다.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시조이다. 수로왕(首露王) ?~199.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이다.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제1대(재위 42∼199) 왕이다. 수릉(首陵)이라고도 한다. 탄생과 치적에 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에 실려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우산을 매입한 것243)에 대한 변론 【1940년】 買牛山論 【庚辰】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에 모두 "성인(聖人)은 반드시 미리 안다."라고 하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성인이 반드시 미리 안다면, 요임금이 사흉(四凶)244)을 등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공(周公)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245)이며, 공자는 진(陳)나라와 송(宋)나라에서 곤액(困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246)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성인이 미리 아는 것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중용》에서 '지성(至誠)의 도는 미리 알 수 있다.247)'라고 말하였는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여기서 말하는 '알다.'는 사람들이 '알다.'라고 하는 것과 다르다. 주자가 '미리 알다.[前知]'를 해석할 때 정상(禎祥), 요얼(妖孼), 시귀(蓍龜), 사체(四體)248)에 대해 이치가 먼저 나타나는 것이라 하고 '오직 지극히 성실한 자라야 살필 수 있다.249)'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이치가 먼저 나타난 것을 통하여 아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종의 신기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치가 나타나는 것이 없으면 비록 요임금과 주공, 공자일지라도 미리 아는 것에 능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이다.다만 세상 사람들은 학문하여 미리 아는 데 이른 뒤에 도통하여 성현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조상을 존경하고 현인을 숭상하는 자들이 전해가며 서로 사모하고 본받아 혹 사리를 궁구하지 않은데 이르고, 견강부회하고 유전(流傳)시켜 마침내 실적을 이루었다. 그래서 도리어 존경하는 분을 불성(不誠)과 부지(不知)로 귀결시켰으니,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나는 세상에서 만육(晩六) 최 선생(崔先生)250)이 우산을 매입하였다고 말하는 일에 대해 일찍이 의심하여, '태조(太祖 이성계)로 하여금 이 때에 딴마음을 품게 하였다.'라고 여겼다. 뛰어난 지략가인 태조는 기밀이 치밀하지 않으면 계략이 누설되어 일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인데, 도리어 대풍가(大風歌)251)를 부르면서 미리 속마음을 드러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설사 선생이 태조에게 딴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면, 선생은 충신이니 마땅히 근심을 제거하여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태조를 놓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였고, 또 국토를 매입할 것을 요청하며 먼저 스스로 절개를 굽혀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뒷날 은둔할 땅과 신하가 되지 않았다는 명성을 취하려고 했다는 것은 더욱 이치에 가깝지 않다. 게다가 선생은 유자(儒者)이고 유문(儒門)의 선행은 충(忠)이 대절(大節)이 되는데, 만일 선생에게 이러한 사실이 있다면 어찌 유문에서 선을 밝히고 선을 택하여 지성(至誠)과 전지(前知)의 도를 다하겠는가.게다가 만일 태조가 실제로 대풍가를 불러 딴마음을 품었다면, 소문이 나라 안에 드러났다고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이치가 먼저 나타난 것뿐만이 아니니, 어찌 선생만이 알아서 이를 족히 귀하게 여겼겠는가. 또한 그러한 설이 통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나는 분명하게 선생에 대해 결코 이러한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설을 믿고 말하는 자들은 아마도 세상의 풍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리어 선생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그 이유를 궁구해보면 성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미리 아는 도가 있을지라도 인사(人事)에 대해서 미리 알 지 못하는 것은 성현이 되는데 방해되지 않는다. 아! 이는 진리를 아는 자와 함께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자,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러한 말은 이지촌(李芝村)252)의 쇄어(瑣語 자질구레한 말)에서 나왔고 후대 사람들이 대부분 준용(遵用)하는데, 그대가 감히 어찌 이처럼 할 수 있는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지 않았던가. 사책에 근거하는 것이 경문(經文)에 근거하는 것만 못하고, 경문에 근거하는 것이 이치에 근거하는 것만 못하다.253) 이 때문에 매산(梅山)254)은 망복(罔僕)255)이라는 말에 근거하여 사마천의 《사기》에서 기자(箕子)를 봉했다는 것에 대해 논변하였고256), 맹자는 지극한 인(仁)의 이치에 근거하여 〈무성(武成)〉에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漂杵]는 것에 대해 의심하였거늘257), 하물며 한때 들은 대로 자유롭게 쓴 것으로 사책도 아니고 경문도 아닌 자질구레한 말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러한 뜻을 나도 전수 받은 바가 있다."라고 하였다.선생의 후손이 장차 《실기(實紀)》를 중간(重刊)하려 할 때 나에게 이 안(案)을 가지고 물었는데, 강의(講義)와 관계된 일이라 생각하여 침묵하지 않고 참람함과 경솔함을 잊어 삼가 논하여 위와 같이 답했다. 人有恒言皆曰: "聖人必前知.", 豈其然乎? 聖人必前知也, 堯不用四凶, 周公不任管蔡, 孔子不遭厄陳宋也. 難之者曰: "聖人無前知也, 《中庸》之書, 何以曰 : '至誠之道, 可以前知.'乎?". 曰: "是知也, 異乎人所謂知也. 朱子釋前知也, 以禎祥妖孼蓍龜四體爲理之先見而曰: '惟誠至者察焉.'. 然則此不過因理之先見而知之, 非有一種神異之術也. 故理無所見, 雖堯與周孔, 亦有所不能於前知也. 顧世之人, 乃謂學而至於前知然後, 道通而爲聖爲賢, 於是尊祖崇賢者, 轉相慕效, 至或不究事理, 傅會流傳, 遂成實蹟, 反歸所尊於不誠不知之科, 豈非惑乎? 余於世所稱晩六崔先生買牛山事, 竊嘗疑之, 以爲使太祖有異志於是時也. 太祖大略也, 宜恐樞機不密, 謀洩事敗矣, 乃反歌大風而預露眞情者, 語不成說, 使見其有異志也, 先生忠臣也, 宜思所以除患保國, 無所不至矣. 乃不惟縱之, 使任爲, 而又請買國土, 先自許心屈節, 而取他日隱遁之地, 不臣之名者, 尤不近理. 且先生儒者也, 儒門善行, 忠爲大節, 若先生而有是, 豈儒門明善擇善, 以致至誠前知之道乎? 且使太祖實歌大風, 其有異志, 可謂聲明國中, 不但理之先見, 何獨先生知之, 而以是爲足貴乎? 亦可見其說之不通也. 吾於是斷然以爲先生決無是事也. 信其說而稱述之者, 無乃不免世風而反累先生歟! 究其由, 蓋緣不知聖賢, 雖有前知之道, 而容有人事之不能前知者, 不害爲聖賢也. 嗚呼! 此可與知者道也.". 難之者曰: "是說也出於李芝村瑣語, 而後人多遵用, 子何敢乃爾?". 曰: "古人不云乎? 據史不如據經, 據經不如據理. 是故梅山據罔僕之語而辨馬史之封箕子, 孟子據至仁之理而疑武成之漂杵, 況於一時隨聞漫錄, 非史非經之瑣語乎? 此義也, 吾亦有所受焉.". 先生後裔將重刊實紀, 問余以是案, 念事係講義, 不容含默, 忘其僭率, 謹論而答之如右云爾. 우산(牛山)을 …… 것 《후창집(後滄集)》 권10 〈최여중에게 보낸 편지[與崔汝重]〉에 "그대의 선조 만육 선생이 우산을 매입했다는 설이 수백 년 동안 유전되면서 충절에 누가 됨이 많았지만, 오직 그대가 처음으로 변명한 의론을 발명하여 지금 이후에 의혹이 제거되고 사라졌다."라는 내용이 나오지만, 우산을 매입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사흉(四凶)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을 말한다. 요임금이 이들을 등용하였는데 9년이 되어도 공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내용이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나온다. 주공(周公)은 …… 것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한 후, 관숙과 채숙에게 은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그들이 은나라 무리들과 반란을 도모했다는 내용이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이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공이 처벌했다는 내용이 《서경》 〈주서(周書) 채중지명(蔡仲之命)〉에 나온다. 공자가 …… 것이다 공자가 진나라를 지나가다가 광(匡) 땅의 사람들이 양호(陽虎)라고 여겨 구류하였고, 송나라에 가서는 사마(司馬)인 환퇴(桓魋)가 죽이고자 했다는 내용이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온다. 지성(至誠)의 …… 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4장에 나온다. 정상(禎祥) …… 사체(四體) 《중용장구》 제24장에서 "국가가 장차 일어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요괴스러운 일이 있어, 시초점과 거북점에 나타나며, 사체에 동한다.[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蓍龜, 動乎四體.]"라고 한 말을 줄인 것이다. 이치가 …… 있다 《중용장구》 제24장의 집주(集註)에서 주자가 말하기를 "무릇 이러한 것은 모두 이치가 먼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오직 성실함이 지극하여 조금의 사사로움과 거짓이 심목(心目)의 사이에 남아 있지 않은 자라야 이에 그 기미를 살필 수 있다.[凡此皆理之先見者也. 然唯誠之至極而無一毫私僞留於心目之間者, 乃能有以察其幾焉.]"라고 한 말을 줄인 것이다. 만육(晩六) 최 선생(崔先生) 고려말 조선 초의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최양(崔瀁, 1351~1424)이다. 대풍가(大風歌) : 원래 한 고조(漢高祖)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고향인 패군(沛郡)에 돌아가 크게 잔치를 베풀면서 노래한 시인데, 여기서는 이성계가 고려를 차지하려고 한 야심을 품고 노래한 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서(漢書)》 권1 〈고제기(高帝紀)〉에 나온다. 이지촌(李芝村) 송시열의 문인 이희조(李喜朝)를 말한다. 사(史)에 …… 못하다 명(明)나라 말기 학자 여신오(呂新吾)의 말이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호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초명은 긍필(兢弼)이다. 자는 백응(伯應), 백림(伯臨)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망복(罔僕) 망국(亡國)의 신하로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 매산(梅山)은 …… 논변하였고 이에 관한 내용이 《매산집(梅山集)》 권28 〈숭인사기(崇仁祠記)〉에 나온다. 맹자는 …… 의심하였거늘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에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血流漂杵]"라는 글이 《서경》 〈주서(周書) 무성(武成)〉에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맹자가 "《서경》의 내용을 모두 믿는다면 《서경》이 없는 것만 못할 것이다. 나는 〈무성〉에서 두세 쪽만 취할 뿐이다. 인자한 사람은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는데, 지극히 인자한 사람이 지극히 불인한 사람을 정벌하였으니, 어떻게 그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할 수 있었겠는가.[盡信書, 則不如無書. 吾於武成, 取二三策而已矣. 仁人無敵於天下. 而至仁伐至不仁. 而何其血之流杵也?]"라고 말한 내용이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등유가 아들을 버린 것238)에 대한 변론 【1908년】 鄧攸棄子論 【戊申】 아버지와 아들은 하늘이 정한 인륜이기 때문에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 하니,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버린다면 모두 천리를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등유가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보존한 것을 천리를 어기고 불인(不仁)한 것으로 여기고, 또 상하 천여 년 동안 붓을 잡고 사람에 대해 논한 자들 가운데 한마디 말로 깎아내려 배척한 자가 없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혹자가 말하기를 "아들은 자기 한 사람이 사사로이 사랑하는 바이고, 형제는 부모의 아들이다. 등유가 자신의 아들을 버린 것은 죽은 아우의 아들을 온전히 하려고 한 것이니, 이는 자기의 사사로운 사랑 때문에 형제의 인륜을 해친 것이 아니라고 이를 수 있다. 정자(程子 정이천)가 이른바 '부모의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도리어 자신의 자식보다 가볍다.239)'라고 한 것으로 말하면 바로 천리를 어기고 불인(不仁)한 것인데 지금 도리어 등유에게 이러한 죄를 뒤집어씌우니,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한다.등유가 아들을 버린 것은 진실로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지만 그 사이에서 일을 처리할 때 이치에 어긋나 자신도 모르게 절로 대죄(大罪)에 빠졌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부모의 아들이 자기의 아들보다 소중할지라도 천지의 큰 법으로 말하면 아들과 조카는 절로 경중이 있는데, 하물며 생사와 존망의 상황에서 어찌 차마 반대로 자기의 아들을 가볍게 여겨 버리고 조카를 소중하게 여겨 보전한단 말인가. 군자는 일을 처리할 때에 미래의 성패를 묻지 않고, 오직 의리가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볼뿐이다. 그때를 당하여 등유를 위해 생각해 본다면, 아들과 조카를 모두 데리고 둘 다 온전히 하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아들과 조카가 모두 온전히 살 수 있었다면 진실로 좋았을 것이다.설령 아들이 살고 조카가 죽었더라도 이미 죽은 아우를 저버린 것이 아니고, 조카가 살고 아들이 죽었더라도 천륜에 유감이 없으며, 불행히 둘 다 온전하지 못했더라도 이는 바로 나의 도를 다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하지 않고 바로 한 몸의 소중한 것[아들]을 떼어놓아 도적들이 전쟁 중인 곳에 버렸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하였단 말인가. 이런 짓을 차마 하였단 말인가.만일 그 조카가 죽은 형의 아들로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라면, 의가 있는 곳에 정(情)은 때로 빼앗긴다240)는 것을 혹시 행할 수 있어 오히려 등유를 위한 변명의 여지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이미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천리를 어기고 불인하다는 이름을 덮어씌우고 싶지 않더라도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주자가 《소학》에 기록하려고 하지 않았는데241), 결국 유자징(劉子澄)242)이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父子天定之倫, 生則俱生死則俱死, 子而棄父, 父而棄子, 皆逆天者也. 故余嘗以鄧攸之棄子保姪爲逆天不仁者, 而又怪夫上下千餘載, 秉筆論人者, 無有一言貶斥也. 或曰: "子者一己之私恩也, 兄弟者父母之子也. 鄧攸之棄其子, 所以全亡弟之子, 是可謂不以己之私恩, 害兄弟之倫者也. 若程2)子所謂愛父母之子, 却輕於己子者, 正逆天而不仁也, 今反加攸以是罪, 不亦過乎!". 夫攸之棄子, 固出於愛弟之心, 但於其間處之失理, 不覺自陷於大罪, 豈不惜哉? 蓋父母之子, 雖重於己子, 若以天地之大經言之, 則子之與姪, 亦自煞有輕重, 況於死生存亡之地, 尤何忍反輕其子而舍之, 重其姪而保之也? 夫君子之處事, 不問未來之成敗, 惟觀義理之當否, 當其時也, 爲攸計之, 不如幷取子姪而兩全之, 子姪俱得全生則固好矣. 如使子生而姪死, 旣非負於亡弟, 姪生而子死, 亦無憾於天倫也, 雖不幸而兩不得全, 是乃所以盡吾之道而無愧也. 顧不出此, 乃割一體之愛, 棄之於盜賊兵戈之中, 是可忍哉! 是可忍哉! 如使其姪是亡兄之子, 而爲宗廟祭祀之主者, 則義之所在, 情有時而奪, 容或可爲, 而猶有爲攸分疏之地, 今旣不然, 則雖不欲加以逆天不仁之名, 豈可得乎? 此朱子所以不欲載於《小學》, 而劉子澄竟載之者也. 등유(鄧攸)가 …… 것 진(晉)나라 등유가 영가(永嘉) 말년에 석늑(石勒)의 병란 때에 아들과 아우의 아들 수(綏)를 업고 피난하다가 둘을 모두 보호할 수 없겠 되자, 자기 아들은 버려 죽게 하고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을 대신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는 내용이 《진서(晉書)》 권90 〈등유전(鄧攸傳)〉에 나오고, 《소학》 〈선행(善行)〉에도 실려 있다. 부모의 …… 가볍다 이천 선생이 이르기를 "유독 부모의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도리어 자신의 자식보다 가벼워, 심한 경우는 원수처럼 여기기도 한다. 온 세상이 다 이러하니, 몹시 미혹된 일이다.[獨愛父母之子, 却輕於己之子, 甚者至若仇敵. 擧世皆如此, 惑之甚矣.]"라고 하는 내용이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8과 《소학》 〈가언(嘉言)〉에 나온다. 의가 …… 빼앗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대인은 말은 믿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고, 행실은 과단성 있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으며, 오직 의가 있는 데로 한다.[大人者, 言不必信, 行不必果, 惟義所在.]"라고 하였고, 이에 대해 주자는 《맹자집주》에서 "대인은 언행이 먼저 믿게 하고 과단성 있게 하기를 기필하지 않으며, 다만 의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따른다.[大人, 言行, 不先期於信果, 但義之所在, 則必從之.]"라고 하였다. 주자가 …… 않았는데 주희는 이 일에 대해 유자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식을 나무에 매어놓고 간 일은 너무 심한 일인 듯하니, 이런 일은 마땅히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그 일을 다 제거할 생각이 없다면, 자식을 버린 앞의 이야기만 제거해도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5 〈여유자징서(與劉子澄書)〉 유자징(劉子澄) 유청지(劉淸之, 1134~1190)이다. 남송 임강군(臨江軍) 사람으로 자징은 그의 자이고, 호는 정춘선생(靜春先生)이다. 주희의 문인으로 《소학》을 편찬할 때 주희의 감수 아래 유자징이 편집에 참여하였다. 程 대본에는 '張'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의 내용으로 보아 오기로 판단되어 수정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직불의가 금을 사서 보상해준235) 것에 대한 변론 【1926년】 直不疑償金論 丙寅 군자가 만사에 응하는 것은 정직[直]일 뿐이니,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라고 하는 것을 정직이라 한다. 직불의가 금을 사서 같은 방을 쓰던 낭관(郎官)에게 보상해 준 일에 대해 고금의 사람들이 '장자(長者)236)'라고 칭송하지만, 나는 정직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미생고(微生高)가 식초를 빌려 어떤 사람에게 준 것 때문에 정직하지 않다고 여겼고237), 직불의가 금을 사서 낭관에게 보상해 준 것은, 그 마음이 뜻을 굽혀 남의 비위를 맞추고 아름다움을 빼앗아 생색을 낸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을 있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알리지 않은 것은 동일하다.금을 잃어버린 낭관은 시정(市井)의 무뢰한 사람이 아니고, 직불의는 평소 더러운 행실로 일컬어짐이 없었지만, 관사(館舍)는 출입이 빈번한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금을 잃어버린 낭관이 직불의를 의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직불의가 화내지 않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니, 만일 사실대로 '내가 애초에 가져간 일이 없다.'라고 고했더라면, 그가 응당 억지로 사람을 다그치지 않았을 것도 짐작하여 헤아릴 수 있다. 얼마 있다가 단서가 드러나고 바로 의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사과하고 그에게 금을 보상해주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천성이 다투지 않는 것에는 뛰어나지만 정직하게 해야 하는 일에는 소홀해서일 것이다.비록 그렇지만 눈을 부릅뜨고 상대방과 다투면서 사이가 틀어지고, 사소한 이익 때문에 옥송(獄訟)을 일으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남이 이제 막 나에게 악명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데 금과 재물로 보상하여, 당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여 심복(心服)하게 하고 후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 그 아량과 높은 풍도는 탁월하여 따르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장자'라고 기리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관유(寬柔)하고 인후(仁厚)한 사람을 '장자'라고 이르고, 이치에 합당하고 도를 다하는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이르니, '군자'라고 하지 않고 '장자'라고 한 것은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君子之應萬事, 直而已, 是曰是, 非曰非, 有謂有, 亡謂亡曰直. 直不疑買金償同舍郞, 古今稱長者, 然余則以爲非直道也. 孔子以微生高乞醯借人爲不直, 不疑之買金償郞, 其心雖非曲意徇物, 掠美市德者, 以無謂有, 不告人以直則同也. 蓋亡金郞非市井無賴之人, 不疑非素有汙行之稱, 館舍是出入頻煩之所, 當亡金郞之疑不疑也. 不怒不恥, 告之以實曰我初無是也, 則彼應不强迫人亦斟量. 少間端緖乃見, 乃纔見致疑, 卽謝有之而償之, 何也? 無乃其質之優於不校, 而忽於應直之功歟? 雖然, 睢盱以爭仇隙成, 錙銖是利, 獄訟興常情也. 人方加我以惡名, 而報之以金財, 使慚服於當時, 歆動乎後世, 其雅量高風, 卓乎難哉! 長者之贊, 不亦宜乎! 然寬柔仁厚之謂長者, 當理盡道之謂君子, 不曰君子, 而曰長者者, 可以知其意矣. 직불의(直不疑) …… 주었다 한 문제 때 직불의가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같은 방에 기숙하는 동료 낭관(郎官)이 자기의 금인 줄 착각하고 타인의 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금을 잃어버린 낭관이 직불의를 의심하자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금을 사서 보상해 주었는데, 나중에 고향에서 돌아온 낭관이 금을 돌려주자 의심한 낭관이 크게 부끄러워했다는 내용이 《사기》 권103 〈직불의열전(直不疑列傳)〉에 나온다. 장자(長者) 덕망 있고 노성(老成)한 사람을 말한다. 미생고(微生高)가 …… 여겼고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말하기를 "누가 미생고를 정직하다 하는가? 어떤 사람이 초를 빌리려 하였는데, 그가 이웃집에서 빌려다가 주는구나.[孰謂微生高直? 或乞醯焉, 乞諸其隣而與之!]"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한 문제가 옥배를 얻고 개원한 것에 대한 변론 【1926년】 漢文帝得玉杯改元論 【丙寅】 원(元)을 바꿀 수 있는가.226) 원을 바꿀 수 있다면 명(名)과 실(實)이 문란해진다. 옥을 보배로 여길만한가. 옥을 보배로 여길만하면 보배로 여기는 것은 현인이 아니다.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요절과 장수를 의심하는 것이니, 도를 해치고 폐를 끼침이 크다. 당시 세상의 군주는 진실로 꾸짖을 것이 없지만, 한 문제(漢文帝)는 고금에 현군(賢君)이라고 일컫는 자인데도 '연수(延壽)'라는 글자가 새겨진 하나의 옥배(玉杯)를 얻고 갑자기 원년(元年)을 바꿔 버렸으니227), 내가 일찍이 그가 실리(實理)에 우매하여 신기한 기물에 미혹된 것에 대해서 애석하게 여겼다.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어진 이를 장수하게 하는 것이 비록 이치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만 하늘이 정성스럽게 명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요임금, 순임금, 삼왕(三王)228)의 덕이 저처럼 성대하지만 어찌 일찍이 하늘이 이와 같은 신기한 기물을 내리고 목숨을 늘려주며 복을 내려주었다고 경전에 드러난 것을 보았는가. 가령 문제가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은 신물(神物)을 직접 보았을지라도 이를 아득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부쳐야 할 뿐이다.만일 혹시 이를 하늘이 준 것으로 믿는다면 더욱 겸손하고 공손하며 힘써 노력할 것을 생각하여 결국 신의 은혜에 부응(副應)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갑자기 이 물건을 보고 문득 '상제가 나의 덕을 보고 이러한 큰 상서로움을 내려주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신원평(新垣平)229)의 거짓을 살필 겨를도 없이 만족스럽게 자만하여 옛날의 법을 파괴하고, 오히려 원년(元年)을 바꿔버리는230)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쩌면 그리도 미혹하고 교만한가.이때부터 이후로 원정(元鼎)231)과 신작(神爵)232)의 등속이 어지럽게 일어나, 무제(武帝)의 말기에 선장(仙掌)이 백량대(柏梁臺)에 우뚝 서 있고233) 임금이 바닷가를 두루 돌아다녀 재물과 화폐를 낭비하여 천하의 재화가 모두 고갈되어 거의 멸망하게 되었으니, 애초에 문제가 이러한 것을 열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그런데도 사람들은 문제가 몸소 현묵(玄默)234)을 닦고 절검(節儉)하며 백성을 사랑하여 한나라에서 제일 정치를 잘한 군주인 것만 알고, 그가 신이한 보물에 미혹되어 복을 빌고 법을 파괴하여 후세에 무궁한 폐단을 열어준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논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어찌 악한 마음이 있었겠는가. 그가 학문의 기회를 놓쳐서 도를 몰랐기 때문이다. 아! 왕자(王者)는 다른 사람보다 배우지 않으면 매우 안 되는 것이 이러하다. 元可改乎? 元而可改, 名實紊. 玉可寶乎? 玉而可寶, 所寶非賢. 壽可延乎? 壽而可延, 殀壽亦貳, 其害道貽弊大矣. 時君世主固不足責, 漢文帝古今所稱賢君也, 乃得一玉杯, 刻延壽字者, 輒改元年, 余嘗惜其昧於實理而惑於神異也. 夫祥善壽仁, 雖理當如此, 非天諄命付與也, 堯舜三王之德, 如彼其盛, 何曾見一般神異延壽錫福, 著於經傳者乎? 假使文帝親見神物之天墜而地湧, 可付諸冥漠不可知已矣. 如或信之爲天賜, 益思謙恭勉勵, 卒副神惠可也, 乃驀見此物, 輒謂帝鑑我德, 降玆大瑞, 不暇察新垣平之詐而充然自滿, 至於壞破舊典, 倒改元祀, 何其迷且泰哉? 自是以後, 元鼎神爵之屬, 紛然而起, 武帝之末, 仙掌屹於柏梁, 玉趾遍於海上, 糜費財幣, 天下虛耗, 幾致喪亡, 未始非文帝啓之也. 人徒知文帝躬修玄默, 節儉愛民, 爲漢家第一善治主, 不知其惑神寶異, 祈福破典, 啓後世無窮之弊也, 故著論如此. 然此豈有心之惡哉? 以其失問學而不知道也. 噫! 王者之不可不學, 有甚於他人也, 有如此夫. 원(元)을 …… 있는가 기년(紀年)을 고쳐 쓰는 것으로, 왕조가 바뀌어 연호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연수(延壽)'라는 …… 버렸으니 《사기》 권10 〈효문본기(孝文本紀)〉에 "(문제) 17년(B.C.163년)에 옥으로 된 잔을 얻었는데 '임금이 장수하리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천자는 이 해를 원년(元年)으로 바꾸고 전국에 연회를 여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그 해에 신원평(新垣平) 사건이 발각되어 삼족을 멸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삼왕(三王) 하(夏)나라의 우(禹)임금, 은(殷)나라의 탕(湯)임금, 주(周)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가리킨다 신원평(新垣平) 한 문제(漢文帝) 때 망기술(望氣術)을 가지고 문제에게 등용되어 벼슬이 상대부(上大夫)에 이르렀다. 나중에 그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나서 멸족되었다. 원년(元年)을 …… 바꿔버리는 한 문제 17년(B.C.163년)에 후원(後元) 원년으로 정하였다. 이를 후원년(後元年)이라고 하였고 그 전에는 숫자 앞에 '전(前)'자를 붙였다. 따라서 문제 때에 전과 후, 두 개의 연호가 있게 된 것이다. 원정(元鼎) B.C.116년부터 B.C.111년까지 6년 동안 사용되었던 한 무제의 다섯 번째 연호이다. 《한서(漢書)》 권64 〈오구수왕전(吾丘壽王傳)〉 신작(神爵) B.C.61년부터 B.C.58년까지 한 나라 선제(宣帝)가 쓴 연호의 하나이다. 신작(神雀)이 나타남으로 인하여 연호를 개정했다. 《한서》 권89 〈순리전(循吏傳) 황패(黃霸)〉 선장(仙掌)이 …… 있고 한 무제(漢武帝)가 백양대(柏梁臺)를 쌓고 구리 기둥[銅柱]을 세워 이슬을 받는 선인장(仙人掌)을 그 위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사기》 권12 〈효무본기(孝武本紀)〉와 《후한서(後漢書)》 권40 〈반표열전(班彪列傳)〉에 보인다. 현묵(玄默) 사려가 깊고 과묵한 것을 뜻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조의 자취에 대해 생각하고 물음 先蹟思問 고려의 제도에서 군사(郡事)270)는 군수(郡守)와 같은 것이 아니라 10여 개, 혹은 7, 8개의 군을 도맡아 다스린다. 군에는 본래 수령이 있으니, 호남의 경우 익산 군사(益山郡事), 영광 군사(靈光郡事 ), 고부 군사(古阜郡事) 등이 있고, 관직은 본조(本朝)의 관찰사(觀察使)와 같아 중임(重任)인데, 《명은집(明隱集)》271)에서 관직이 낮다고 한 것은 고증을 잘못한 것이다.임오년(1882) 족보272)에 "첨지공(僉知公)273)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난274) 때에 재능으로 선발되어 다시 무과에 합격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은 세조조(世祖朝)에 있었으니 임오년의 족보에서 세종이라 이른 것은 오류이고, 정미년(1907) 족보에서 이를 답습했으니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임오년 족보에 "매죽당공(梅竹堂公)275)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에 성종(成宗)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은 만일 그 고결함을 드러내주지 않으면 일세의 유풍(儒風)이 장차 사라질 것이다.'고 하고, 매(梅)와 죽(竹)을 그리고 옥배(玉杯)를 가져다가 그 모양을 새겨서 하사하며 '우리나라에 군자는 오직 김종뿐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계사년(1833) 족보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사년 족보가 나오기 130년 전에 공과의 시간적 거리가 매우 멀지 않은 쌍백당(雙柏堂) 이공(李公)276)이 지은 묘갈명에도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러한 내용이 만일 사실이라면 어찌 묘문(墓文)에 실리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정미년 족보를 편찬할 때에 문중의 장로들께 아뢰고 삭제하였다.매죽당공의 배위(配位)는 채씨(蔡氏)이고 외조부는 교리 남평인 조휘(曹彙)277)인데, 계사와 임오 두 족보에서 대제학 박중림(朴仲林)278)으로 기록하였고, 주부공(主簿公)은 배위가 조씨(趙氏)이고 외조부는 생원 남원인 양균(楊均)인데,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279)으로 기록하였다. 그래서 채씨와 조씨의 두 족보를 조사해보았는데, 박공 중림은 채씨의 부친인 채석경(蔡碩卿)280)의 외조부이고, 영응대군은 조씨의 부친인 조숙기(趙淑琦)의 외조부였으니, 이는 진실로 살피지 않고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위로 일세(一世)를 건너 취록(取錄)했는데 두 곳이 모두 똑같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묘한가. 이는 혹여 명위(名位)가 드러난 사람을 잠깐 보고 자기도 모르게 흠모하여 상하의 세계(世系)를 살피지 못한 것일 것이다. 박공은 정미년 족보에서 이미 개정(改正)했는데, 영응대군은 아직 미치지 못했다.참봉공(參奉公)281)의 배위는 청주 김씨이고, 부친은 진사 김경일(金敬一)282)이다. 일찍이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세계(世系)를 보니, 죽음 만영(竹陰萬榮)283)과 죽곡 장영(竹谷長榮)284)의 부친 이석(李碩)에게 사위 김경일이 있었는데 연대가 어느 정도 맞았다. 그래서 정미년의 족보를 편수하는 날에 김씨의 외조를 함평 이석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씨의 세계에서 김경일의 본관을 청주로 기록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그러한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래서 뒤에 다시 집에 보관하고 있는 족보에서 산정(刪正)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고창군 조산리(造山里)에 사는 김자순(金子順)이 청주 김씨라는 것을 듣고 오직 이 일만을 위하여 가서 그 족보를 보았는데, 이는 파보(派譜)이고 대동보(大同譜)가 아니었기에 고증할 수 없었으니 한탄할 만하다.직절공(直節公)285)의 부친 휘 장(鏘)은, 임오년 족보에서 '남대(南臺)에 선발되었다.'고 하였는데 정미년 족보에서 이를 답습하였으니, 이 4글자[被選南臺]는 무엇을 이른 것인가. '대(臺)'라는 것은 사헌부(司憲府)이니, 남대는 문과로 출신(出身)하지 않고 은일(隱逸)과 남행(南行 음직(蔭職))으로 사헌부의 관직을 삼는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남대를 매우 중시하였으니, 인가(人家)에 드물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대관(臺官)이라면 장령(掌令), 지평(持平), 집의(執義), 감찰(監察) 같은 것에 대해 어째서 명칭을 근거하여 바로 쓰지 않고, 다만 '선발되었다.[被選]'고만하여 사람들이 속으로 깊이 생각하게 하는가. 어쩌면 단지 선망(選望)에만 들고 실직(實職)을 얻지 못한 것인가.직절공의 아들 휘 찬(瓚)의 '영백(嶺伯 경상도 관찰사)'과 '호참(戶參)'이 또한 임오년 족보에 처음 나오는데, 정미년 족보에서 이를 답습했다. 이전 족보에 있는 벼슬을 나중의 족보에 기록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이 근거한 문자를 분명히 쓰고 난 뒤에야 후대 사람들의 의심이 없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서계공(西溪公)286)의 손자 좌망공(坐忘公)287) 휘 현(灦)은 자가 호호(浩浩)인데, 임오년 족보에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반드시 《우암집(尤菴集)》에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대신하여 김현(金灦)이 사계(沙溪) 선생의 제문을 지었다는 제목이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는 족보의 기록에 '선생의 장례에 글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 역시 젊었을 때 《우암집》을 보고 임오년 족보의 기록을 믿어 죽계(竹溪)288) 선조의 묘갈(墓碣)을 참판 김학수(金鶴洙)289) 공에게 부탁하던 날, 좌망공이 사계를 사사한 일을 글에 실기에 이르렀고, 죽계공의 여운(餘韻)이 미친 바와 두 집안의 세의(世誼)를 두루 말하였다. 그 뒤에 다시 널리 조사해보았는데, 우암이 대신해서 제문을 지었다는 김공은 바로 관향이 광산(光山)이고, 자는 지언(止彦)으로 우암과 친척 형제가 되는 자이니, 만일 《우암집》에 근거하여 좌망공을 사계의 문인으로 안다면 잘못이다. 게다가 사계는 명종 무신년(1548)에 태어났고 좌망공은 선조 계사년(1593)에 태어났으니, 좌망공이 사계보다 45세가 적은데 스승과 제자의 나이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또 (좌망공이) 문장에 능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경사(京師)에서 벼슬살이할 때 혹여 사계의 문하에 출입했는지도 알 수 없으니, 세상에는 진실로 성과 이름이 같으면서 동문(同門)이 된 자가 있다.매당공(梅堂公)290) 가장(家狀)에 이르기를 "모재 김공(慕齋金公)291)이 준 시에 '매당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니[不見梅堂久], 마음속에 비린한 생각이 생기네.[胸中鄙吝生]292) 척심정(滌心亭) 아래의 물은[滌心亭下水] 고금에 한결같이 맑네.[一樣古今淸]'."라고 하였는데, 《모재집》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모재의 후손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293) 어른을 찾아뵙고 이를 외우자, 병암이 《모재속집(慕齋續集)》 초건(草件)294)에 수록하였다.그 뒤에 매번 '모재는 선배이고 매당은 후배이니, 고금에 한결같이 맑다는 시는 매당이 죽은 뒤에 지어진 것 같다.'라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러한 질문은 인하여 살펴보고 생각해보았는데, 매당의 생년은 알 수 없으나 그는 4형제 중 셋째이니295), 막내 동생 운강공(雲江公)296)보다 많아봐야 5, 6세 연장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운강공은 가정(嘉靖)297) 무자년(1528)에 태어났고, 모재는 성화(成化)298) 무술년(1478)에 태어났으니, 운강공이 모재보다 50세가 적고 매당은 44, 45세쯤 적을 것이다.나이가 이미 한참 많고 지위도 크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친구 사이에 하는 것처럼 시를 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하물며 가장(家狀)에서 '만년에 척심정을 지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때 모재가 어찌 생존했겠는가. 또 나아가 '고금에 맑네.[古今淸]'라는 시는 죽은 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진실로 사람들의 질문과 같다면 어찌 더욱 부당하지 않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시는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인데, 모재의 시라고 잘못 안 것이다. 전에 동상(東湘)299) 허공(許公) 진동(震童)의 문집에 매당에게 준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련(上聯)은 이른바 모재의 시와 완전히 똑같으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하련(下聯)에서는 '오늘 밤 서로 대화하니[今宵相對話], 마음이 활연(豁然)300)히 맑네.[心肺豁然淸]'라고 하였다. 무릇 매당과 모재는 연대의 선후가 서로 이와 같은데, 세마(洗馬) 이공(李公) 도중(度中)301)이 살피지 않고 묘갈명과 행장에 시어(詩語)를 실었고, 병암은 모재의 본손으로서 또한 그렇게 하였다. 두 공은 모두 박식하고 단아한 선비로 일컬어지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처럼 소홀하고 거칠면서 또 젊은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농암공(礱巖公)302)이 병자호란 때에 부친 참봉공(參奉公 김곡(金穀))을 따라서 왕등도(旺登島)로 들어갔다고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본손(本孫)이 들은 것을 기록한 말 중에 이미 이러한 말을 실었고, 우리 선사 간옹(艮翁 간재)도 〈관농암김공유허기(觀礱巖金公遺墟記)〉303)를 짓게 되었다. 그러나 김공(金公) 성갑(聖甲)이 지은 행장(行狀)을 조사해보면, 공은 만력(萬曆)304) 기미년(1619)에 태어나 17세에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였으니, 17세면 바로 병자년(1636) 전년인 을해년(1635)이다. 그렇다면 병자년에 부친을 따라 섬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어찌 절로 근거 없는 말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대개 세상의 소문을 믿을 수 없는 것에 이와 같은 것이 있다. 麗制郡事, 非與郡守同, 乃統知十餘郡, 或七八郡. 郡則自有其守, 在湖南則有益山郡事, 靈光郡事, 古阜郡事等, 官如本朝觀察使, 乃重任也, 《明隱集》謂官微, 此失考也.壬午譜云: "僉知公世宗朝登文科, 李施愛亂, 以簡才更占武科.". 施愛之亂, 在世祖朝, 壬譜世宗之云誤矣. 丁譜仍之, 失於不察也.壬午譜云: "梅竹堂公隱德不仕. 成宗曰: '如是之人, 若不揚其高潔, 一世儒風將滅.', 畵其梅竹, 取其玉杯, 雕其象劍以賜之曰: '我國君子, 惟金宗而已.'.". 此非惟不見於癸巳譜, 在癸譜百三十年前, 去公時不甚遠之雙柏堂李公所撰墓碣, 亦無見焉. 此若實事, 豈有不載墓文之理? 故澤述於丁譜日, 稟門長老而刪之矣.梅竹堂公配蔡氏, 外祖校理南平曹彙也, 而癸壬兩譜, 書以大提學朴仲林, 主簿公配趙氏, 外祖生員南原楊均也, 而書以永膺大君琰. 考蔡趙兩譜, 則朴公仲林, 蔡氏父碩卿之外祖, 永膺大君, 趙氏父淑琦之外祖, 此固不察誤書之故, 而其必上越一世而取錄者, 兩處皆同, 何其妙也? 其或乍見名位著顯之人, 不覺欽慕, 而未及致察於上下世系歟. 朴公則丁譜已改正, 永膺則未及耳.參奉公配淸州金氏, 父進士敬一. 嘗見咸平李氏世系, 竹陰萬榮, 竹谷長榮之父碩, 有女壻金敬一, 而年代相當. 故丁譜日, 金氏外祖, 書以咸平李碩矣. 更思李系, 不書淸州之貫於金敬一, 則安知其必然耶? 故後復刪正於家藏譜耳. 聞高敞郡造山里金子順爲淸州之金, 專往而見其譜, 則是爲派譜而非大同者, 故無考焉, 可嘆.直節公之父諱鏘, 壬譜云被選南臺, 丁譜仍之, 此四字何謂也? 臺者司憲府也, 南臺者不以文科出身, 以隱逸南行爲司憲府官職也. 我國甚重南臺, 人家所罕有也. 旣臺官則若掌令持平執義監察, 何不據名直書, 只云被選, 使人沈吟也? 抑以只入選望而未得實職歟?直節公子諱瓚之嶺伯戶參, 亦始出壬譜, 而丁譜仍之者. 舊譜之官, 錄於後譜, 必明書其所據文字, 然後乃可無後人之疑, 今不能者何也.西溪公之孫坐忘公諱灦, 字浩浩, 壬譜錄以沙溪金先生門人, 此必見《尤菴集》有代旌善郡守, 金灦祭沙溪先生文題目而然也. 觀於譜錄所云先生之葬, 爲文祭之者, 可知矣. 余亦少時見《尤集》, 而信壬譜之錄, 請竹溪先祖墓碣於參判金公鶴洙之日, 至載坐忘公師沙溪事於文中, 備說竹溪公餘韻所及及兩家世誼矣. 後復廣考, 則尤菴所代作文之金公, 乃貫光山, 字止彦, 而與尤菴爲戚兄弟者, 若據《尤集》, 而認坐忘公之爲沙溪門人則誤矣. 抑沙溪明宗戊申生, 坐忘宣祖癸巳生, 坐忘之於沙溪, 少四十五歲, 可當師生之年? 且能文章, 登巍科, 遊宦京師, 其或出入溪門, 亦未可知也, 世固有同姓名而爲同門者矣.梅堂公家狀中有云: "慕齋金公贈詩曰: '不見梅堂久, 胸中鄙吝生. 滌心亭下水, 一樣古今淸.'.", 而不見於《慕齋集》. 故余嘗見慕齋後孫炳菴丈駿榮而誦之, 則炳菴收錄於《慕齋續集》草件中矣. 後每遇人問慕齋先進, 梅堂後進, 一樣古今淸之詩, 似有梅堂身後作之意, 是何故耶? 余因此問而考思之, 則梅堂生年, 雖不可知, 然其於四兄弟序居三, 想於季弟雲江公, 多不過長五六歲, 而雲江嘉靖戊子生, 慕齋成化戊戌生, 雲江少慕齋五十歲, 而梅堂則少四十四五歲矣. 年旣踰等, 位亦懸殊, 何得贈詩, 若朋儕間之爲? 且況家狀云晩年築滌心亭, 則是時慕齋, 豈得生存乎? 且況古今淸之詩, 意可以身後看, 誠如人問, 豈不尤無當乎? 竊意是詩他人所作, 而誤認爲慕齋詩也. 嘗見東湘許公震童集有贈梅堂詩, 上聯與所謂慕齋詩者純同, 亦未知其何故也. 下聯則云今宵相對話, 心肺豁然淸矣. 夫梅堂之於慕齋, 年代相後先如是, 而洗馬李公度中不察, 而載詩語於銘狀, 炳菴以慕齋本孫而亦然, 二公皆以博雅稱猶如此, 況如余之鹵莽而又在少時乎?世傳礱巖公丙子亂, 隨父參奉公, 入旺登島. 故本孫記聞說中, 旣載此語, 又至有我先師艮翁〈觀礱巖金公遺墟記〉之作. 然以金公聖甲所撰行狀考之, 公萬曆己未生, 十七丁外艱, 十七卽丙子前年乙亥也, 丙子隨父入島之云, 豈不自歸浮說乎? 蓋世間傳聞之不足信, 有如此者矣. 군사(郡事) 고려와 조선 초기에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인 군(郡)의 장관(長官)이다. 판군사(判郡事), 지군사(知郡事)를 두루 이르는 말이다. 《명은집(明隱集)》 김수민(金壽民, 1734~1811)의 저서이다. 임오년(1882) 족보 《후창집(後滄集)》 권20 〈가승서(家乘序)〉에 "부령(부안) 김씨는 처음에 만력(萬曆) 갑신년(1584)년에 대보(大譜)가 있었고, 그 후 각파에서 여러 족보를 만들었다. 우리 직장공파는 인릉(仁陵 순조(純祖)) 계사년(1833), 홍릉(洪陵 고종(高宗))) 임오년(1882)과 정미년(1907)에 편찬한 세 개의 족보가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첨지공(僉知公) 김보칠(金甫漆, ?~?)이다. 직장공(直長公) 김취(金玉+就)의 차남이다. 이시애(李施愛)의 난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함길도의 특혜가 없어지자 불만과 위기감이 누적된 토호층이 난을 일으킨다. 세조 13년인 1467년 5월에 이시애의 선동으로 일어난 이 반란은 조선 초기 최대의 반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반란군 2만여 명은 정부의 토벌군 5만여 명을 상대로 저항하다가 그해 8월 진압되었다. 매죽당공(梅竹堂公) 김종(金宗, 1471~1538)이다. 매죽당은 그의 호이고, 자는 사앙(士仰)이다.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당대의 명사들이 대거 화를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인 부안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쌍백당(雙柏堂) 이공(李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이다. 쌍백당은 그의 호이다. 시호는 충숙(忠肅)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다.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후창집(後滄集)》 권12 〈분재 문중에 보냄[與粉齋門中]〉에서 후창은 "매죽당공의 묘갈은 외손인 명현 쌍백당의 손에서 나왔다.[梅竹堂公墓碣, 出於外孫名賢有如雙柏堂之手者.]"라고 말하였다. 조휘(曹彙) ?~? 관직은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이고, 남평(南平)인 이다. 박중림(朴仲林) ?~1456.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호는 한석당(閑碩堂)이다. 이염(李琰) 1434~1467. 세종의 여덟째 아들이고, 이름은 이염(李琰)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41년(세종 23)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지고, 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채석경(蔡碩卿) 1438~1498.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성종(成宗) 1년(1470) 경인(庚寅) 별시(別試) 을과(乙科) 2위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부사(府使)이다. 외조부는 박중림이고 장인은 조휘이다. 참봉공(參奉公) 김영무(金英武, ?~1592)이다. 자는 문중(文仲)이다. 김경일(金敬一) 1556~? 자는 덕부(德孚)이고, 거주지는 고부(古阜)이다. 죽음 만영(竹陰萬榮) 이만영(李萬榮, 1510~1547)이고, 죽음은 그의 호이다. 죽곡 장영(竹谷長榮) 이장영(李長榮, 1521~1589)이고, 죽곡은 그의 호이다. 직절공(直節公) 김치원(金致遠, 1572∼?)이다. 매죽당공의 증손으로,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서계공(西溪公) 김협(金鋏, 1546~?)이고, 서계는 그의 호이다. 좌망공(坐忘公) 김현(金灦, 1593~1653)의 호이다. 죽계(竹溪) 김횡(金鋐, 1541~1590)의 호이다. 김학수(金鶴洙) 1849~?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매당공(梅堂公) 김점(金坫, ?~1560)이고, 매당은 그의 호이다. 모재 김공(慕齋金公)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고, 모재는 그의 호이다. 마음속에 …… 생기네 후한(後漢) 때에 황헌(黃憲)의 인품이 매우 훌륭하여 그와 동군(同郡) 사람인 진번(陳蕃)과 주거(周擧)가 항상 서로 말하기를 "잠시라도 황생을 보지 못하면 마음속에 비린한 생각이 싹튼다.[時月之間, 不見黃生, 則鄙吝之萌復存乎心. ]"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어진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후한서(後漢書)》 권83 〈황헌전(黃憲傳)〉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덕경(德卿)이며, 호는 병암(炳菴)이다. 초건(草件) 시문 등의 초벌로 쓴 원고이다. 그는 …… 셋째이니 매당공의 부친 김석옥(金錫沃)의 묘갈명에 "자녀는 아들이 4명이니, 김희(金喜), 김선(金善), 김점(金坫), 김계(金啓)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고봉집(高峯集)》 권3 〈증 호조참판 김공 묘갈명(贈戶曹參判金公墓碣銘)〉 운강공(雲江公) 김계(金啓, 1528~1574)이고, 운강은 그의 호이다. 가정(嘉靖)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이다. 성화(成化)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1465~1487)이다. 동상(東湘) 허진동(許震童, 1525~1610)의 호이다. 자는 백기(伯起)이다. 활연(豁然) 시원하게 터진 모양이다. 이공(李公) 도중(度中) 매당공(梅堂公)의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농암공(礱巖公) 김택삼(金宅三, 1619~1703)의 호이다. 자는 계용(季用)이다. 〈관농암김공유허기(觀礱巖金公遺墟記)〉 《간재집전편속(艮齋集前編續)》 권5에 실려 있다. 만력(萬曆)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 1573~1620)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가규 【1944년】 家規 【甲申】 제사(祭祀)는 자손의 정성을 모아 조상의 신령을 이르게 하는 것이니, 자손의 행위는 항상 조상에게 명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한다. 이는 바로 인륜의 궁극(窮極)이고 가정의 대관(大關 매우 중요함)이기 때문에 정성껏 제사 지내면 자손이 번창하고, 정성 없이 제사 지내면 자손이 쇠퇴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사당(祠堂)은 제사 지내는 장소이니, 정성껏 제사 지내지 않을 수 없다면 사당을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장차 궁실(宮室)을 지으려고 할 때 먼저 사당을 세우니, 매우 가난할지라도 기필코 힘을 다해 세워야 하고, 거실 한쪽 구석의 벽장에 사판(祀版 신주(神主))을 구차하게 안치해서는 안 된다.제사는 시제(時祭)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비록 가난할지라도 시제를 지내야 하지만, 전혀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봄과 가을에 두 번 행하는 것도 괜찮다. 사당의 삭망참(朔望參)260)은 만일 가난이 심하면 옛날에 '사는 월반전(月半奠)이 없다.261)'라고 하는 예에 따라 삭참만 행해도 괜찮다.사당의 신주를 받드는 사람은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배알(拜謁)하는 예를 행한 뒤에 집안사람들에게 각자 자기의 일을 행할 것을 명한다.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은 자손이 부조(父祖)를 섬기는 간소한 예절로 본래 큰일이 아니었는데, 근대 이후에 윤리가 땅에 떨어져 이를 행하는 자도 매우 적으니 매우 한심하다. 이러한 것도 행하지 않으면 어찌 자손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이를 행하되 새벽에 주인이 사당에 배알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한다.《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제사는 반드시 부부가 친히 지내야 한다.262)"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풍속은 상중에 제사 지낼 때 이외에는 주부(主婦)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는 본받아서는 안 되니 더욱 반드시 예에 따라 행해야 한다.상중에 예를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의 자식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반드시 '너무 가난하여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를 행할 수 없다.'라고 하는데,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사농공상(士農工商)에게는 각자 자신의 업(業)이 있으니, 선비 이외에 어떻게 최질(衰絰)263)을 하고 흙덩이처럼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마음으로 슬퍼하면서 스스로 예법을 범하지 않으면 이는 괜찮다. 음악을 듣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이르러서는 인류가 아니라고 이르더라도 괜찮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나라에서 바로잡는 법이 있다.264)"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다시 논하지 않겠다.관혼상제(冠婚喪祭)는 모두 대사(大事)인데 속어에서 다만 혼인만을 대사라고 일컫는 것은 진실로 이치가 있으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혼(求婚)의 방법은 온공(溫公)이 논한바 '사위나 며느리의 성품과 행실 및 가법(家法)이 어떠한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그 부귀만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265)'라는 것과 같은 등의 설은 더할 것이 없으니, 이는 마땅히 따라서 행해야 한다. 그리고 선대의 문벌과 덕행이 없고 한갓 부귀한 자에 이르러서는, 당장에 소소한 칭찬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함께 혼인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옳다.사람들은 반드시 혼인할 때 생기(生氣)를 보아야 하고 그 선대를 묻지 말아야 한다고 하니, 이른바 생기라는 것은 자손이 번성하고 식도(食道)가 넉넉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아! 일반적인 집안과 한미한 집안은 생기에만 전념하는데 사대부 집안은 사기(死氣)를 모으는구나.나는 부부란 두 성(姓)의 합이라고 들었고 같은 성의 합이라고는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신라와 고려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동성끼리 혼인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지 못한 것은 진실로 통한스러운 일이다. 나라에 이미 금한 것이 있는데 선배들은 또 무엇 때문에 함부로 행하였단 말인가. 내가 혼인을 주관한 이후 절대 행하지 않아 이미 가법이 되었으니, 만일 뒷날 자손들이 준수하지 않으면 이는 그 부조(父祖)의 죽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스스로 오랑캐로 돌아가는 것을 달게 여기는 것이다.장지(葬地)는 무덤을 파내어 팔아넘기는 산을 매입하지 말고【일찍이 이미 파간 것은 논할 것도 없다.】, 절대로 다른 사람의 선산이나 금한 땅에 투장(偸葬)하지 말며, 평장(平葬)하는 것은 시신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이를 '적자(賊子)'라고 한다.선대의 지장(誌狀)266)을 남에게 함부로 맡기지 말라는 것은 선사(先師 간재)의 가규(家規) 중의 말인데, 진실로 이치가 있는 말이기 때문에 이를 표출하였다.종손(宗孫)은 조상의 사당을 받드는 자이니, 종손을 공경하는 것은 조상을 존중하는 것이다. 무릇 생전의 봉양과 사후의 장례에 관계된 것은 모두 마땅히 종손을 먼저 하고 지자(支子)267)와 서자를 뒤에 해야 하며, 언어와 배읍(拜揖)하는 것도 한 층 더 공경해야 한다.서자와 서손도 똑같이 내 부조(父祖)의 혈기를 받았으니, 마땅히 천시하고 소원하게 해서는 안 된다. 명분(名分)은 하늘이 정한 것이고 사람의 사사로움을 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우하는 예절도 너무 헤아림이 없어서는 안 되니, 만일 그들에게 예법을 범하게 하면 결국 적자를 능멸하게 될 것이다.빈궁(貧窮)함을 핑계하여 자식에게 문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 자식을 해치고 스스로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끊는 것이니, 어찌 그 자식이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행하여 그 아버지를 해치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종족의 남녀가 내외를 통하는 한계는 삼종(三從 8촌) 숙질(叔姪)의 처에 이르고, 사종(四從 10촌) 수숙(嫂叔)268)에서부터는 서로 보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지금 세속에서 출가한 고모, 손위 누이, 손아래 누이, 딸이 죽은 뒤 그 남편이 재취(再娶)한 처에 대해 '아고(芽姑)', '아자(芽姊)', '아매(芽妹)', '아녀(芽女)'라 이르고 서로 보면서 왕래가 빈번하며, 그들이 또 그 남편의 전처(前妻)의 친척들을 부르는데도 부형(父兄)과 제질(弟姪)로써 하여 부끄러움이 없다. 심한 경우 친정으로 보면서 해마다 빠짐없이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하는 자도 있어서, 그 망령되고 도리에 어긋나며 추하고 무람없음이 더할 수 없이 심하니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붕우(朋友)는 10년 이상이 많으면 자(字)를 불러서는 안 되지만 나이가 뒤이면 한 번 절해도 괜찮다. 《예기(禮記)》에 "10년 이상이면 형처럼 섬겨라.269)"고 하지 않았는가.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남들이 보지 않은 곳에서 예를 삼가라. 이는 음덕과 지극히 착한 행실이 되어 하늘이 반드시 도와줄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祭祀者萃子孫之誠, 致祖考之神靈, 而子孫所爲, 常若聽命於祖考然. 乃人倫之究竟, 有家之大關, 故祭祀誠則子孫昌, 祭祀無誠則子孫衰替, 可不愼哉?祠堂者祭祀之所也, 祭祀不可不誠, 則祠堂不可不建. 故君子將營宮室, 先立祠堂, 雖甚貧, 期於極力營建, 不可苟安祀版於居室一隅之壁龕也.祭莫重於時祭, 雖貧, 當行時祭, 萬不得已, 而只行春秋二次爲可. 祠堂朔望參, 若貧甚則依古者士無月半奠之禮, 只行朔參亦可.奉祠堂之主人, 每晨早起, 行拜謁禮, 然後命家衆各執其業.昏定晨省, 子孫事父祖之疏節, 本不足爲大事, 而近世以來, 倫理墜地, 行此者亦絶少, 甚可寒心. 此猶不行, 安得爲子孫? 必須惕念行之, 而當先於主人晨謁之前.《禮》云: "祭也者必夫婦親之.", 今俗於喪中祭以外, 主婦行亞獻禮者甚鮮. 此不可效, 尤必須依禮行之.喪不執禮, 何可謂人子? 人必稱貧窮服役, 不能執禮, 此不成說. 士農工商, 各有其業, 士以外, 安得衰絰塊坐? 但心有哀戚, 而自不犯禮防則斯可矣. 至於聽樂嫁娶者, 雖謂之非人類可也, 司馬溫公固曰: "國有正法.", 此不復論.冠婚喪祭, 俱是大事, 而俗語獨稱婚姻爲大事者, 良亦有理, 其不可以盡心乎? 求婚之方, 如溫公所論察壻婦性行及家法何如, 勿苟慕其富貴等說, 蔑以加矣 此當遵行, 至於無先世閥德而徒然富溫者, 目下雖有小小稱譽, 切勿與婚, 至可.人必稱婚姻, 當觀生氣, 不問其先世, 所謂生氣者, 指子孫繁衍, 食道豊裕而言也. 噫! 常微之家, 獨專生氣, 而士夫之家, 獨萃死氣乎!吾聞夫婦二姓之合, 未聞同姓之合也. 東方之自羅麗以降至今, 猶有同姓之婚, 而未變夷狄之俗者, 實所痛恨. 國旣有禁, 先輩亦胡爲而冒行也? 吾自主婚以來, 截然不行, 已成家法, 後日子孫, 若不遵守, 是幸其父祖之死而自甘夷狄之歸也.葬地勿買掘塚賣渡之山【曾已掘去者勿論.】, 切勿偸葬於他人先山當禁之地, 至於平葬者, 與棄尸同, 名之曰賊子.先世誌狀, 毋得妄託於人, 此是先師家規中語, 而實爲理到者, 故表而出之.宗孫是奉祖廟者, 敬宗孫, 所以尊祖也. 凡干生養死送, 皆當先宗孫而後支庶, 至於言語拜揖, 亦當一層加敬.庶子庶孫亦同受吾父祖血氣, 不當賤而疎之, 乃其名分, 天之所定, 非人之容私也. 待遇之節亦不可太沒斟量, 使之越防犯閑, 竟至凌嫡也.托於貧窮而不敎子以文字者, 是賊其子, 而自絶於父道也, 安可望其子之行子道, 不賊其父乎?宗族男女通內外之限, 當至於三從叔姪之妻, 自四從嫂叔不許相見.今俗於出嫁姑姊妹女死後, 其夫再娶之妻謂之芽姑芽姊芽妹芽女, 相見而往來頻煩, 彼又呼其夫前室之黨, 而父兄弟姪而無愧, 甚則視爲親庭, 而課歲覲寧者有之, 其爲妄悖醜褻莫甚矣, 切宜戒之.朋友十年以上, 不可呼字, 而歲後一拜可也. 《禮》不云: "十年以上, 則兄事之."乎?施惠於人所不報之地, 謹禮於人所不見之處. 是爲陰德至行, 天必佑之, 可不勉哉? 삭망참(朔望參) 삭망참례(朔望參禮)로, 초하루와 보름에 올리는 간단한 제사이다. 사는 …… 없다 "사는 보름에 은전을 올리지 않는다.[士月半不殷奠]"라는 말이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나온다. 제사는 …… 한다 《예기》 〈제통(祭統)〉에 나온다 최질(衰絰) 상중에 입는 삼베옷을 말한다. 나라에서 …… 있다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상중에 있으면서 음악을 듣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자는 나라에서 바로잡는 법이 있다."라고 하였다. 《소학》 〈가언(嘉言)〉 사위나 …… 된다 사마온공이 《소학》 〈가언〉에서 "무릇 혼인을 논의할 때에는 마땅히 그 사위나 며느리의 성품과 행실 및 가법(家法)이 어떠한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그 부귀만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凡議婚姻, 當先察其婿與婦之性行及家法何如, 勿苟慕其富貴.]"라고 하였다. 지장(誌狀)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을 말한다. 지자(支子) 맏아들 이외의 아들이다. 수숙(嫂叔) 형제의 아내와 남편의 형제를 이른다. 예에 …… 섬기라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가 배가 더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10년이 더 많으면 형처럼 섬기며, 5년이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되 조금 뒤처져서 따라간다."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