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자취에 대해 생각하고 물음 先蹟思問 고려의 제도에서 군사(郡事)270)는 군수(郡守)와 같은 것이 아니라 10여 개, 혹은 7, 8개의 군을 도맡아 다스린다. 군에는 본래 수령이 있으니, 호남의 경우 익산 군사(益山郡事), 영광 군사(靈光郡事 ), 고부 군사(古阜郡事) 등이 있고, 관직은 본조(本朝)의 관찰사(觀察使)와 같아 중임(重任)인데, 《명은집(明隱集)》271)에서 관직이 낮다고 한 것은 고증을 잘못한 것이다.임오년(1882) 족보272)에 "첨지공(僉知公)273)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난274) 때에 재능으로 선발되어 다시 무과에 합격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은 세조조(世祖朝)에 있었으니 임오년의 족보에서 세종이라 이른 것은 오류이고, 정미년(1907) 족보에서 이를 답습했으니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임오년 족보에 "매죽당공(梅竹堂公)275)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에 성종(成宗)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은 만일 그 고결함을 드러내주지 않으면 일세의 유풍(儒風)이 장차 사라질 것이다.'고 하고, 매(梅)와 죽(竹)을 그리고 옥배(玉杯)를 가져다가 그 모양을 새겨서 하사하며 '우리나라에 군자는 오직 김종뿐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계사년(1833) 족보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사년 족보가 나오기 130년 전에 공과의 시간적 거리가 매우 멀지 않은 쌍백당(雙柏堂) 이공(李公)276)이 지은 묘갈명에도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러한 내용이 만일 사실이라면 어찌 묘문(墓文)에 실리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정미년 족보를 편찬할 때에 문중의 장로들께 아뢰고 삭제하였다.매죽당공의 배위(配位)는 채씨(蔡氏)이고 외조부는 교리 남평인 조휘(曹彙)277)인데, 계사와 임오 두 족보에서 대제학 박중림(朴仲林)278)으로 기록하였고, 주부공(主簿公)은 배위가 조씨(趙氏)이고 외조부는 생원 남원인 양균(楊均)인데,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279)으로 기록하였다. 그래서 채씨와 조씨의 두 족보를 조사해보았는데, 박공 중림은 채씨의 부친인 채석경(蔡碩卿)280)의 외조부이고, 영응대군은 조씨의 부친인 조숙기(趙淑琦)의 외조부였으니, 이는 진실로 살피지 않고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위로 일세(一世)를 건너 취록(取錄)했는데 두 곳이 모두 똑같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묘한가. 이는 혹여 명위(名位)가 드러난 사람을 잠깐 보고 자기도 모르게 흠모하여 상하의 세계(世系)를 살피지 못한 것일 것이다. 박공은 정미년 족보에서 이미 개정(改正)했는데, 영응대군은 아직 미치지 못했다.참봉공(參奉公)281)의 배위는 청주 김씨이고, 부친은 진사 김경일(金敬一)282)이다. 일찍이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세계(世系)를 보니, 죽음 만영(竹陰萬榮)283)과 죽곡 장영(竹谷長榮)284)의 부친 이석(李碩)에게 사위 김경일이 있었는데 연대가 어느 정도 맞았다. 그래서 정미년의 족보를 편수하는 날에 김씨의 외조를 함평 이석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씨의 세계에서 김경일의 본관을 청주로 기록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그러한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래서 뒤에 다시 집에 보관하고 있는 족보에서 산정(刪正)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고창군 조산리(造山里)에 사는 김자순(金子順)이 청주 김씨라는 것을 듣고 오직 이 일만을 위하여 가서 그 족보를 보았는데, 이는 파보(派譜)이고 대동보(大同譜)가 아니었기에 고증할 수 없었으니 한탄할 만하다.직절공(直節公)285)의 부친 휘 장(鏘)은, 임오년 족보에서 '남대(南臺)에 선발되었다.'고 하였는데 정미년 족보에서 이를 답습하였으니, 이 4글자[被選南臺]는 무엇을 이른 것인가. '대(臺)'라는 것은 사헌부(司憲府)이니, 남대는 문과로 출신(出身)하지 않고 은일(隱逸)과 남행(南行 음직(蔭職))으로 사헌부의 관직을 삼는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남대를 매우 중시하였으니, 인가(人家)에 드물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대관(臺官)이라면 장령(掌令), 지평(持平), 집의(執義), 감찰(監察) 같은 것에 대해 어째서 명칭을 근거하여 바로 쓰지 않고, 다만 '선발되었다.[被選]'고만하여 사람들이 속으로 깊이 생각하게 하는가. 어쩌면 단지 선망(選望)에만 들고 실직(實職)을 얻지 못한 것인가.직절공의 아들 휘 찬(瓚)의 '영백(嶺伯 경상도 관찰사)'과 '호참(戶參)'이 또한 임오년 족보에 처음 나오는데, 정미년 족보에서 이를 답습했다. 이전 족보에 있는 벼슬을 나중의 족보에 기록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이 근거한 문자를 분명히 쓰고 난 뒤에야 후대 사람들의 의심이 없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서계공(西溪公)286)의 손자 좌망공(坐忘公)287) 휘 현(灦)은 자가 호호(浩浩)인데, 임오년 족보에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반드시 《우암집(尤菴集)》에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대신하여 김현(金灦)이 사계(沙溪) 선생의 제문을 지었다는 제목이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는 족보의 기록에 '선생의 장례에 글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 역시 젊었을 때 《우암집》을 보고 임오년 족보의 기록을 믿어 죽계(竹溪)288) 선조의 묘갈(墓碣)을 참판 김학수(金鶴洙)289) 공에게 부탁하던 날, 좌망공이 사계를 사사한 일을 글에 실기에 이르렀고, 죽계공의 여운(餘韻)이 미친 바와 두 집안의 세의(世誼)를 두루 말하였다. 그 뒤에 다시 널리 조사해보았는데, 우암이 대신해서 제문을 지었다는 김공은 바로 관향이 광산(光山)이고, 자는 지언(止彦)으로 우암과 친척 형제가 되는 자이니, 만일 《우암집》에 근거하여 좌망공을 사계의 문인으로 안다면 잘못이다. 게다가 사계는 명종 무신년(1548)에 태어났고 좌망공은 선조 계사년(1593)에 태어났으니, 좌망공이 사계보다 45세가 적은데 스승과 제자의 나이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또 (좌망공이) 문장에 능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경사(京師)에서 벼슬살이할 때 혹여 사계의 문하에 출입했는지도 알 수 없으니, 세상에는 진실로 성과 이름이 같으면서 동문(同門)이 된 자가 있다.매당공(梅堂公)290) 가장(家狀)에 이르기를 "모재 김공(慕齋金公)291)이 준 시에 '매당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니[不見梅堂久], 마음속에 비린한 생각이 생기네.[胸中鄙吝生]292) 척심정(滌心亭) 아래의 물은[滌心亭下水] 고금에 한결같이 맑네.[一樣古今淸]'."라고 하였는데, 《모재집》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모재의 후손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293) 어른을 찾아뵙고 이를 외우자, 병암이 《모재속집(慕齋續集)》 초건(草件)294)에 수록하였다.그 뒤에 매번 '모재는 선배이고 매당은 후배이니, 고금에 한결같이 맑다는 시는 매당이 죽은 뒤에 지어진 것 같다.'라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러한 질문은 인하여 살펴보고 생각해보았는데, 매당의 생년은 알 수 없으나 그는 4형제 중 셋째이니295), 막내 동생 운강공(雲江公)296)보다 많아봐야 5, 6세 연장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운강공은 가정(嘉靖)297) 무자년(1528)에 태어났고, 모재는 성화(成化)298) 무술년(1478)에 태어났으니, 운강공이 모재보다 50세가 적고 매당은 44, 45세쯤 적을 것이다.나이가 이미 한참 많고 지위도 크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친구 사이에 하는 것처럼 시를 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하물며 가장(家狀)에서 '만년에 척심정을 지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때 모재가 어찌 생존했겠는가. 또 나아가 '고금에 맑네.[古今淸]'라는 시는 죽은 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진실로 사람들의 질문과 같다면 어찌 더욱 부당하지 않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시는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인데, 모재의 시라고 잘못 안 것이다. 전에 동상(東湘)299) 허공(許公) 진동(震童)의 문집에 매당에게 준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련(上聯)은 이른바 모재의 시와 완전히 똑같으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하련(下聯)에서는 '오늘 밤 서로 대화하니[今宵相對話], 마음이 활연(豁然)300)히 맑네.[心肺豁然淸]'라고 하였다. 무릇 매당과 모재는 연대의 선후가 서로 이와 같은데, 세마(洗馬) 이공(李公) 도중(度中)301)이 살피지 않고 묘갈명과 행장에 시어(詩語)를 실었고, 병암은 모재의 본손으로서 또한 그렇게 하였다. 두 공은 모두 박식하고 단아한 선비로 일컬어지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처럼 소홀하고 거칠면서 또 젊은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농암공(礱巖公)302)이 병자호란 때에 부친 참봉공(參奉公 김곡(金穀))을 따라서 왕등도(旺登島)로 들어갔다고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본손(本孫)이 들은 것을 기록한 말 중에 이미 이러한 말을 실었고, 우리 선사 간옹(艮翁 간재)도 〈관농암김공유허기(觀礱巖金公遺墟記)〉303)를 짓게 되었다. 그러나 김공(金公) 성갑(聖甲)이 지은 행장(行狀)을 조사해보면, 공은 만력(萬曆)304) 기미년(1619)에 태어나 17세에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였으니, 17세면 바로 병자년(1636) 전년인 을해년(1635)이다. 그렇다면 병자년에 부친을 따라 섬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어찌 절로 근거 없는 말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대개 세상의 소문을 믿을 수 없는 것에 이와 같은 것이 있다. 麗制郡事, 非與郡守同, 乃統知十餘郡, 或七八郡. 郡則自有其守, 在湖南則有益山郡事, 靈光郡事, 古阜郡事等, 官如本朝觀察使, 乃重任也, 《明隱集》謂官微, 此失考也.壬午譜云: "僉知公世宗朝登文科, 李施愛亂, 以簡才更占武科.". 施愛之亂, 在世祖朝, 壬譜世宗之云誤矣. 丁譜仍之, 失於不察也.壬午譜云: "梅竹堂公隱德不仕. 成宗曰: '如是之人, 若不揚其高潔, 一世儒風將滅.', 畵其梅竹, 取其玉杯, 雕其象劍以賜之曰: '我國君子, 惟金宗而已.'.". 此非惟不見於癸巳譜, 在癸譜百三十年前, 去公時不甚遠之雙柏堂李公所撰墓碣, 亦無見焉. 此若實事, 豈有不載墓文之理? 故澤述於丁譜日, 稟門長老而刪之矣.梅竹堂公配蔡氏, 外祖校理南平曹彙也, 而癸壬兩譜, 書以大提學朴仲林, 主簿公配趙氏, 外祖生員南原楊均也, 而書以永膺大君琰. 考蔡趙兩譜, 則朴公仲林, 蔡氏父碩卿之外祖, 永膺大君, 趙氏父淑琦之外祖, 此固不察誤書之故, 而其必上越一世而取錄者, 兩處皆同, 何其妙也? 其或乍見名位著顯之人, 不覺欽慕, 而未及致察於上下世系歟. 朴公則丁譜已改正, 永膺則未及耳.參奉公配淸州金氏, 父進士敬一. 嘗見咸平李氏世系, 竹陰萬榮, 竹谷長榮之父碩, 有女壻金敬一, 而年代相當. 故丁譜日, 金氏外祖, 書以咸平李碩矣. 更思李系, 不書淸州之貫於金敬一, 則安知其必然耶? 故後復刪正於家藏譜耳. 聞高敞郡造山里金子順爲淸州之金, 專往而見其譜, 則是爲派譜而非大同者, 故無考焉, 可嘆.直節公之父諱鏘, 壬譜云被選南臺, 丁譜仍之, 此四字何謂也? 臺者司憲府也, 南臺者不以文科出身, 以隱逸南行爲司憲府官職也. 我國甚重南臺, 人家所罕有也. 旣臺官則若掌令持平執義監察, 何不據名直書, 只云被選, 使人沈吟也? 抑以只入選望而未得實職歟?直節公子諱瓚之嶺伯戶參, 亦始出壬譜, 而丁譜仍之者. 舊譜之官, 錄於後譜, 必明書其所據文字, 然後乃可無後人之疑, 今不能者何也.西溪公之孫坐忘公諱灦, 字浩浩, 壬譜錄以沙溪金先生門人, 此必見《尤菴集》有代旌善郡守, 金灦祭沙溪先生文題目而然也. 觀於譜錄所云先生之葬, 爲文祭之者, 可知矣. 余亦少時見《尤集》, 而信壬譜之錄, 請竹溪先祖墓碣於參判金公鶴洙之日, 至載坐忘公師沙溪事於文中, 備說竹溪公餘韻所及及兩家世誼矣. 後復廣考, 則尤菴所代作文之金公, 乃貫光山, 字止彦, 而與尤菴爲戚兄弟者, 若據《尤集》, 而認坐忘公之爲沙溪門人則誤矣. 抑沙溪明宗戊申生, 坐忘宣祖癸巳生, 坐忘之於沙溪, 少四十五歲, 可當師生之年? 且能文章, 登巍科, 遊宦京師, 其或出入溪門, 亦未可知也, 世固有同姓名而爲同門者矣.梅堂公家狀中有云: "慕齋金公贈詩曰: '不見梅堂久, 胸中鄙吝生. 滌心亭下水, 一樣古今淸.'.", 而不見於《慕齋集》. 故余嘗見慕齋後孫炳菴丈駿榮而誦之, 則炳菴收錄於《慕齋續集》草件中矣. 後每遇人問慕齋先進, 梅堂後進, 一樣古今淸之詩, 似有梅堂身後作之意, 是何故耶? 余因此問而考思之, 則梅堂生年, 雖不可知, 然其於四兄弟序居三, 想於季弟雲江公, 多不過長五六歲, 而雲江嘉靖戊子生, 慕齋成化戊戌生, 雲江少慕齋五十歲, 而梅堂則少四十四五歲矣. 年旣踰等, 位亦懸殊, 何得贈詩, 若朋儕間之爲? 且況家狀云晩年築滌心亭, 則是時慕齋, 豈得生存乎? 且況古今淸之詩, 意可以身後看, 誠如人問, 豈不尤無當乎? 竊意是詩他人所作, 而誤認爲慕齋詩也. 嘗見東湘許公震童集有贈梅堂詩, 上聯與所謂慕齋詩者純同, 亦未知其何故也. 下聯則云今宵相對話, 心肺豁然淸矣. 夫梅堂之於慕齋, 年代相後先如是, 而洗馬李公度中不察, 而載詩語於銘狀, 炳菴以慕齋本孫而亦然, 二公皆以博雅稱猶如此, 況如余之鹵莽而又在少時乎?世傳礱巖公丙子亂, 隨父參奉公, 入旺登島. 故本孫記聞說中, 旣載此語, 又至有我先師艮翁〈觀礱巖金公遺墟記〉之作. 然以金公聖甲所撰行狀考之, 公萬曆己未生, 十七丁外艱, 十七卽丙子前年乙亥也, 丙子隨父入島之云, 豈不自歸浮說乎? 蓋世間傳聞之不足信, 有如此者矣. 군사(郡事) 고려와 조선 초기에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인 군(郡)의 장관(長官)이다. 판군사(判郡事), 지군사(知郡事)를 두루 이르는 말이다. 《명은집(明隱集)》 김수민(金壽民, 1734~1811)의 저서이다. 임오년(1882) 족보 《후창집(後滄集)》 권20 〈가승서(家乘序)〉에 "부령(부안) 김씨는 처음에 만력(萬曆) 갑신년(1584)년에 대보(大譜)가 있었고, 그 후 각파에서 여러 족보를 만들었다. 우리 직장공파는 인릉(仁陵 순조(純祖)) 계사년(1833), 홍릉(洪陵 고종(高宗))) 임오년(1882)과 정미년(1907)에 편찬한 세 개의 족보가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첨지공(僉知公) 김보칠(金甫漆, ?~?)이다. 직장공(直長公) 김취(金玉+就)의 차남이다. 이시애(李施愛)의 난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함길도의 특혜가 없어지자 불만과 위기감이 누적된 토호층이 난을 일으킨다. 세조 13년인 1467년 5월에 이시애의 선동으로 일어난 이 반란은 조선 초기 최대의 반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반란군 2만여 명은 정부의 토벌군 5만여 명을 상대로 저항하다가 그해 8월 진압되었다. 매죽당공(梅竹堂公) 김종(金宗, 1471~1538)이다. 매죽당은 그의 호이고, 자는 사앙(士仰)이다.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당대의 명사들이 대거 화를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인 부안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쌍백당(雙柏堂) 이공(李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이다. 쌍백당은 그의 호이다. 시호는 충숙(忠肅)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다.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후창집(後滄集)》 권12 〈분재 문중에 보냄[與粉齋門中]〉에서 후창은 "매죽당공의 묘갈은 외손인 명현 쌍백당의 손에서 나왔다.[梅竹堂公墓碣, 出於外孫名賢有如雙柏堂之手者.]"라고 말하였다. 조휘(曹彙) ?~? 관직은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이고, 남평(南平)인 이다. 박중림(朴仲林) ?~1456.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호는 한석당(閑碩堂)이다. 이염(李琰) 1434~1467. 세종의 여덟째 아들이고, 이름은 이염(李琰)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41년(세종 23)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지고, 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채석경(蔡碩卿) 1438~1498.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성종(成宗) 1년(1470) 경인(庚寅) 별시(別試) 을과(乙科) 2위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부사(府使)이다. 외조부는 박중림이고 장인은 조휘이다. 참봉공(參奉公) 김영무(金英武, ?~1592)이다. 자는 문중(文仲)이다. 김경일(金敬一) 1556~? 자는 덕부(德孚)이고, 거주지는 고부(古阜)이다. 죽음 만영(竹陰萬榮) 이만영(李萬榮, 1510~1547)이고, 죽음은 그의 호이다. 죽곡 장영(竹谷長榮) 이장영(李長榮, 1521~1589)이고, 죽곡은 그의 호이다. 직절공(直節公) 김치원(金致遠, 1572∼?)이다. 매죽당공의 증손으로,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서계공(西溪公) 김협(金鋏, 1546~?)이고, 서계는 그의 호이다. 좌망공(坐忘公) 김현(金灦, 1593~1653)의 호이다. 죽계(竹溪) 김횡(金鋐, 1541~1590)의 호이다. 김학수(金鶴洙) 1849~?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매당공(梅堂公) 김점(金坫, ?~1560)이고, 매당은 그의 호이다. 모재 김공(慕齋金公)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고, 모재는 그의 호이다. 마음속에 …… 생기네 후한(後漢) 때에 황헌(黃憲)의 인품이 매우 훌륭하여 그와 동군(同郡) 사람인 진번(陳蕃)과 주거(周擧)가 항상 서로 말하기를 "잠시라도 황생을 보지 못하면 마음속에 비린한 생각이 싹튼다.[時月之間, 不見黃生, 則鄙吝之萌復存乎心. ]"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어진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후한서(後漢書)》 권83 〈황헌전(黃憲傳)〉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덕경(德卿)이며, 호는 병암(炳菴)이다. 초건(草件) 시문 등의 초벌로 쓴 원고이다. 그는 …… 셋째이니 매당공의 부친 김석옥(金錫沃)의 묘갈명에 "자녀는 아들이 4명이니, 김희(金喜), 김선(金善), 김점(金坫), 김계(金啓)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고봉집(高峯集)》 권3 〈증 호조참판 김공 묘갈명(贈戶曹參判金公墓碣銘)〉 운강공(雲江公) 김계(金啓, 1528~1574)이고, 운강은 그의 호이다. 가정(嘉靖)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이다. 성화(成化)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1465~1487)이다. 동상(東湘) 허진동(許震童, 1525~1610)의 호이다. 자는 백기(伯起)이다. 활연(豁然) 시원하게 터진 모양이다. 이공(李公) 도중(度中) 매당공(梅堂公)의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농암공(礱巖公) 김택삼(金宅三, 1619~1703)의 호이다. 자는 계용(季用)이다. 〈관농암김공유허기(觀礱巖金公遺墟記)〉 《간재집전편속(艮齋集前編續)》 권5에 실려 있다. 만력(萬曆)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 1573~162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