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검색 필터

기관
유형
유형분류
세부분류

전체 로 검색된 결과 545746건입니다.

정렬갯수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기문(記文) 고문서-시문류-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에 형재공 사판을 이봉하는 일에 관한 기문 모년에 형재공(亨齋公) 사판(祀板)을 이봉(移奉)하는 일에 관한 기문(記文)이다. 형재공의 사판을 이봉하는 일은 정례(正禮)에 위배되고 정세(情勢)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고, 예의 바름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주부자(朱夫子주희(朱熹))의 정론(定論)을 토대로 중국으로 말하자면 범문정공(范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의 사당이 불천지위이기 때문에 묘소의 아래에 세웠고,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불천위는 별도로 묘소에 사당을 세운다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말했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은 형편상 미치지 못하면 별도로 사당의 곁에 묘(廟)를 세운다고 하였다. 이른바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근자에 종운(宗運)이 비색(否塞)하여 천백세 동안 내려온 제전(祭田)을 적손(嫡孫)이 삼켜버려서 향사(享祀) 존모(尊慕)의 도(道)에 왕래가 끊어졌다. 금일에 이르러 크게 힘을 쏟고자 하나 대종(大宗)이 없으니 지손(支孫)인 자가 예(例)대로 하되 별도로 사당을 비록 다른 곳에 있으나 묘소로 옮겨서 받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례와 정세에 매우 적합하다고 하고, 묘의 아래로 다른 곳에서 전이(轉移)하는 것이 천부당만부당하다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84년 이명우(李明雨)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申陰五月日 李明雨 甲申陰五月日 李明雨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84년 5월에 이명우(李明雨)가 집안의 근황과 농사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 1884년 5월에 이명우(李明雨)가 집안의 근황과 농사 등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간찰(簡札)이다. 지난달에 갑자기 집안의 조카아이의 참혹한 일을 만났다. 집아이가 가서 뵙지 못한 것은 게을러가 아니라, 스승을 따르고 있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이다. 여름휴가를 기다려 틈을 낼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외에 재종질 상기의 퇴원, 농사 등 근황을 전하고 있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갑인년(1914) 上艮齋先生 甲寅 한희녕(韓希甯 한유(韓愉))은 혼백(魂魄)과 정신(精神)은 기질(氣質)에 속한다고 했는데【《우산집(尤山集)》7권 13판〈조사흠(趙士欽)에게 답한 편지〉에 보임】, 이것은 정세(精細)함이 결여된 부분입니다. 삼가 저는 혼백과 정신은 사람의 혈기(血氣)가 응집된 것이고, 기질은 사람의 자성(資性)이 품부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혼백과 정신의 병은 약물(藥物)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고, 기질의 병은 의리가 아니면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이 둘을 섞어서 말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기질과 정신, 혼백에 관해서는 보내준 편지에서 논변한 것이 맞다. 다만 희녕은 이 편지에서 허령(虛靈)이 혼백, 정신, 기질과 한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것은 융통성 있게 봐야 한다. 만약 그대의 설을 들어 비판한다면 희녕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논어》에서 "대체로 임금의 물음[君問]에 모두 '공자대왈(孔子對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임금을 높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의 말입니다. 그런데 계강자(季康子)의 물음에도 '공자대왈(孔子對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쩌면 혹시 기록한 자가 우연히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니면 계강자의 권세와 지위 때문에 본래 어쩔 수 없어서입니까? 권세와 지위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공자 문인의 절조로는 반드시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록한 자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이러한 군신의 대절을 어찌 서로 살피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논어》에서 계강자가 묻고 '공자대왈'이라고 일컬은 것은 아마도 계씨의 가신이 기록한 것이고, '자왈(子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인 듯하다." 韓希甯謂魂魄精神, 屬乎氣質【見《尤山集》七卷十三板〈答趙士欽書〉】, 此欠却精細處也. 竊疑魂魄精神是人之血氣所凝也, 氣質是人之資性所禀也. 故魂魄精神之病, 非藥石不可醫, 氣質之病, 非義理不可治, 恐不可混說也.○ 先生答書曰: "氣質與精神魂魄, 來書所辨是矣. 但希甯此書, 是欲言虛靈與魂魄精神氣質之非一類故云爾. 此宜活看. 若擧盛說以詰之, 希甯又不待詞畢而點頭矣."《論語》'凡君問, 皆稱孔子對曰者, 尊君也', 此朱子《集註》也. 季康子問, 亦稱孔子對曰者, 何也? 豈或記者之偶爾? 抑以季氏之勢位, 而自不得已歟? 謂勢位而然, 則以孔門人之所操, 必不至如此, 謂記者之偶爾, 則似此君臣大節, 豈有不相照管之理乎?○ 先生答書曰: "《論語》康子問而稱孔子對曰, 疑是季氏家臣所記. 其稱子曰者, 它人所記也."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기유년(1909) 上艮齋先生 己酉 상(喪)을 당하여 선산(先山)에 합장한 경우, 매번 최질(衰絰)24)을 하고 새로 쓴 무덤을 살피는데, 선조(先祖)의 묘에 대해 절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고, 또 흉복(凶服)25)을 입고 선조에게 절할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분묘와 사당은 똑같지 않으니, 잠시 최질을 하고 선영(先塋)을 살피는 것도 일의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효대(絞帶)에 대하여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는 두 겹으로 꼬은 두 가닥으로 하는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례(家禮)》에는 이미 마승(麻繩) 한 가닥을 쓰고 중간을 굽혀서 합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례편람(家禮便覽)》에서 말한 네 가닥을 서로 겹치도록 하는 제도에 따라 행하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효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점에 관해서는) 이후에 자세히 강론하도록 한다."순목(順目)과 역목(逆目)을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제 생각으로는 순목은 네 가닥이 한곳으로 함께 모이는 것이고, 역목은 네 가닥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향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보아도 되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맞다."최복(衰服)이 해어져서 입을 수 없다면 비록 연제(練祭)26) 이전이라도 다시 만들어도 됩니까? 노나라 소공(昭公)은 한 해에 세 번 최복을 바꾸어 입었는데, 이를 두고 군자가 비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훼손되고 해어졌다 하더라도 단지 한 벌만 입고서 해를 마쳐야 합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것이 맞다." 遭喪祔葬先山者, 每以衰絰展省新墓, 而先墓則不拜未安, 又不可以凶服拜先祖, 如何則可乎?○ 先生答書曰: "墓與廟不同, 暫用衰絰, 展省先塋, 亦事勢之不得已也."絞帶, 鏡湖雖以二重兩股爲是, 然《家禮》旣有用麻繩一條, 中屈合之之文. 故依《便覧》四股相重之制行之, 未知如何?○ 先生答書曰: "絞帶, 未知當如何. 俟後熟講."順目逆目, 何以辨之? 竊意順目是四股同歸一處, 逆目是四股分歸各處, 如此看是否?○ 先生答書曰: "是."衰服弊, 不可服, 則雖練前, 亦可再製乎? 魯昭公一歲三易衰, 君子譏之. 然則雖毀弊, 只服一件以終歲可乎?○ 先生答書曰: "來示得之." 최질(衰絰) '최(衰)'는 상중에 입는 삼베옷으로 참최복(斬衰服)과 자최복(齊衰服)이 있다.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수질(首絰)과 허리에 두르는 요질(腰絰)이 있다. 흉복(凶服) 상장(喪葬)의 의례에서 입는 복장을 말한다. 일반적인 옷과는 그 모양이 조금 이상하고 괴상하다. 연제(練祭) 소상(小祥)을 뜻한다. 삼년상에서 1년째에 지내는 제사이다. 소상 때에는 연관(練冠)과 연의(練衣)를 착용하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연제'라고 부른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경율 노용에게 답함 을묘년(1915) 答宋景栗鲁容 ○乙卯 상중(喪中)에 경복(輕服)을 벗을 때 착용하는 복장은, 저의 생각에는 포건(布巾)과 직령(直領) 이외에는 아마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형도 이미 그렇게 여겼으면서 또한 어찌하여 상중에 선조를 제사지내는 복장으로만 국한하여 의심하는 것입니까? 선조를 제사 지낼 때에는 최질(衰絰)을 착용할 수 없기 때문에 포건과 직령을 착용하는 것이니, 경복을 벗을 때 잠시 최질을 벗을 수 있다면 포건과 직령 차림이 어찌 통용하는데 편치 않은 점이 있겠습니까? 확대하여 말하면, 출행(出行)을 할 때에 최질을 착용하면 속인을 놀라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포건과 직령을 착용하는데, 이것 또한 선조를 제사지내는 복장에 국한하고 또한 그 때가 아니라 하여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다만 선조를 제사지낼 때에는 포건 위에 평량자(平涼子)를 가하고, 출행할 때에는 포건 위에 방립(方笠)을 씁니다.】 길복(吉服)에는 옥색(玉色)을 쓴다는 등의 설은 비록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따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중용》 16장의 '성(誠)' 자는 '이(理)'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듯합니다.77) 그런데 선사가 《혹문(或問)》의 주자가 후씨(矦氏)의 설을 변론한 것78)을 인용하여 이(理)를 직접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의심하셨으니, 감히 질언(質言)하지 못하겠습니다. 喪中除輕服時所著服,弟意布巾直領外,恐無他道.兄旣然之,又何以喪中祭先之服局定而疑之耶? 祭先時,不可著衰絰, 故布巾直領; 除輕服時,可暫脫衰絰,則布巾直領, 有何不安於通用耶? 廣而言之,則出行時,衰絰駭俗, 故布巾直領,此亦可局定於祭先之服而亦非其時疑之耶?【但祭先,則布巾上加平涼子; 出行,則布巾上加方笠.】吉服玉色等說,雖云有據,恐難從也.《中庸》十六章"誠"字,似當以"理"看.而先師引《或問》辨矦氏說而疑非直指爲理, 未敢質言. 중용……듯합니다 《중용(中庸)》 16장의 "성은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음을 이른다. 음양의 합하고 흩어짐이 진실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그 발현되어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誠者, 眞實無妄之謂. 陰陽合散無非實者, 故其發見之不可揜如此]"라고 한 구절의 '성' 자를 가리킨다. 주자가……것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참조하면, 후씨는 "귀신은 형이하자이니 성이 아니다. 귀신의 덕은 성이다.[鬼神形以下者, 非誠也; 鬼神之德則誠也]"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이에 대해 "귀신의 덕이 성대한 까닭은 그 성 때문이고, 성이 스스로 하나의 물이 되고 별도로 귀신의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후씨는 귀신과 그 덕을 나누어 두 개의 물로 만들고 형이상과 형이하로 말하고 있다.[鬼神誌德所以盛者, 蓋以其誠耳, 非以誠自爲一物而別爲鬼神之德也. 今侯氏乃析鬼神與其其德爲二物, 而以形以上下言之]"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문성보 제중에게 보냄 정축년(1925) 與文聖甫濟衆 ○丁丑 좌하가 연전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가 '《오현수언(五賢粹言)》의 간행을 인가받는 것은 후일에 원고의 간행을 인가받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했으니, 이것은 선사에게 인의(認意)가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저와 사견(士狷)에게 말하기를 "'불언지교(不言之教)'는 석농(石農)이 쓰지 않아야 되었는데 썼다.'라고 하였는데, '본래 없었다.'라고 하지 않고 '쓰지 않아야 되었다.'고 했으니, 이는 선사가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전 편지 후면(後面)에 이를 변론했으나 들어주질 않은지라, 일찍이 좌하가 선사의 뜻을 모르고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민망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에 만났을 때 제가 좌하에게 "지금도 과연 선사가 인의와 인교가 있었다고 생각합니까?"라 물었더니, 좌하가 대뜸 대답하기를 "선사가 이미 '문고를 50년 뒤에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어찌 인의와 인교를 말씀을 이치가 있었는가?."라고 하였고, 제가 말하기를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서로 헤어지게 되어 친구 이경좌(李敬佐)와 함께 사천(沙川)에 이르러 이별할 때에 제가 다시 질문하여 말하기를 "아까 말씀하신 인의와 인교가 없었다는 것에 대해 이미 분명이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 뒤에 반드시 다시 변동함이 없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좌하는 기쁘게 듣고 다른 말씀은 없었고,. 저 또한 좌하가 끝내 선사의 마음에 어둡지 않고 선사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아, 이전의 걱정과 이후의 다행함이 어찌 나의 견해와 같거나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개 모두 좌하에게는 스승과 제자로서의 큰 관건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선사 휘일(諱日)이기에 이것이 생각나서 한 번 편지로 말씀드려 본 것입니다. 만일 편지가 사실과 어긋나면 일일이 분변하여 보여주셔도 무방합니다. 座下年前對人言: "先師言《五粹》認印開後日認稿之路." 是謂先師有認意矣.昨秋對僕與士狷言: "不言之教,石農不當書而書之." 不云本無而云不當書,則是謂先師有認教矣.僕前書後面以辨而不見聽,則未嘗不憫座下不知先師而見欺於人矣.今春之遇,僕問座下: "至今果認先師有認意、認教乎?" 則座下遽答曰: "先師旣有文稿五十年後爲之之命,則豈有認意、認教之理?" 僕曰: "分明如是." 旣而爲之相送,同李友敬佐至沙川而別,僕又質曰: "俄者所說無認意認教, 旣云分明如是,則後必不復變動矣." 座下喜聽而無他說,僕又以幸座下終不昧師心負師恩矣.噫! 前之憫後之幸,豈爲與我同不同而然哉? 蓋皆爲座下師生之大關也.適茲先師諱辰,念及於此,爲一告之,如書不以實,不妨一一辨示.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後滄先生文集 後滄集 後滄先生文集 고서-집부-별집류 문집 국역 後滄先生文集 乙未 金澤述 乙未 金澤述 석판본 15 반곽 유계 12행30자 註雙行 상하2엽화문어미 정읍 이평 부안김씨가 한국학호남진흥원 1955년 발행한 근대유학자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의 문집 1. 개요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은 일제강점기 항일(抗日) 운동가이자, 유학자, 문장가, 교육자로서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특히 당대 저명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고제자(高弟子)로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빼어났다는 칭송을 받았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하늘에서 준 재능이 높고 밝으며, 재주와 성실함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며, 문장은 일찍이 완성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묘를 3년 동안 하였다. 글을 짓고 후학을 길렀으니 한 시대 스승의 표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익현을 따라 목숨을 지켜 도를 잘 실천하는 의를 강설하였다. 공은 경술년 합방 이후 왜적이 공의 효행을 듣고 금잔을 하사하여 포상할 적에, 이를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이에 왜적으로부터 온갖 위협을 받았으나 현명하게 대처하고 행동했다. 왜적의 칙령에 죽음을 맹세하고 따르지 않음은 물론 배급한 식량마저도 물리쳐 먹지 않았다. 태산(정읍 이평면 산명) 위 황량한 산등성이 위에 흙집을 짓고 솔잎을 먹으면서 '금화곡수양아(金華哭首陽餓- 금화를 통곡하며 수양산에서 은거하던 백이처럼 굶어 죽겠다.)'라는 여섯 글자를 부절로 삼아 정절로써 삶을 마쳤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김택술은 누구보다도 문학적 재능이 남달랐고 학문적 깊이도 있었으며, 효심도 지극했고 의로움을 지녀 항일운동에도 동참했으며, 지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편고동문검공(徧告同門僉公)〉에서 "절의(節義)는 도학(道學)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과 방이다. 도학을 하지 않고 절의가 있는 사람은 있지만, 도학을 하면서 절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 바 있으니, 그의 가치관이 도학과 절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4년, 문인과 유림들은 김택술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향사(享祀)하였다. 이 서원은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2. 행력 김택술의 본관은 전라북도 부안(扶安)이다. 조고(祖考)는 김석규(金錫圭)이고, 선고(先考)는 벽봉(碧峰) 김낙진(金洛進)이며, 선비(先妣)는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1884년(고종 21년) 6월 6일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창동(滄東)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종현(鍾賢)이고, 호(號)는 후창(後滄)이다. '후창'이란, 간재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일을 계승한다는 의미로써 호를 '후율(後栗)'이라고 지었는데, 이를 모방하여 남송(南宋) 주자(朱子, 1130~1200)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로 후창이라 한 것이다. 곧 주자의 고향이 창주(滄洲)이므로 창주병수(滄洲病叟)의 호와, 창주정사(滄洲精舍)가 있었으니 주자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1988년(고종 34) 14세에는 감시(監試)에 응하고, 남은 노잣돈으로 『문선(文選)』, 『사문유취(事文類聚)』, 벼루 등을 구매하여 귀가하는 일도 있었다. 이로 보면, 그의 학문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듬해, 15세가 되던 해에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900년(고종 37) 17세, 천안(天安) 금곡(金谷)에 가서 간재 전우를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행하였다. 『후창선생속집(後滄先生續集)』의 〈선고벽봉군가장(先考碧峰君家狀)〉에 따르면, "경자년 가을, 전선생께서 변산에 있는 월명암에 머물러 계셨으니, 부친이 나에게 명하여 선생을 가서 알현하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나를 아껴 몸소 부친을 방문하였다. 사람들이 나에게 간재선생을 스승으로 모실 것을 청하라고 권하였는데, 부친께서는 집에서 스승을 청하는 것은 성의가 없고 또 예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날을 가려 폐백을 갖추고 사백여 리를 넘어 천안 산중에 있는 간재선생을 배알하고 연분을 청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실제 몇 달 후, 김택술은 천안에 찾아가 간재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1906년(고종 43) 23세, 정읍(井邑) 태인(泰仁)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의병진중(義兵陣中)을 방문하여 창의군(倡義軍)을 위로하고 간재선생의 서신(書信)을 전달하였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언행을 마음에 간직하여 본받기 위해 〈서신록(書紳錄)〉을 기록하였다. 1908년(순종 2) 25세, 일제의 지배 아래 있는 육지를 떠나 섬으로 들어가겠다는 신념으로 왕등도(王登島)에 들어가 거처할 섬을 찾다가 8, 9월 계화도(界火島) 장자동(壯子洞)에 머물렀다. 김택술 또한 계화도를 방문하여 간재선생의 문고(文藁) 편집과 교정에 참여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의 검열이 덜 미치는 북간도(北間島)를 두고'유학자들이 참으로 살만한 땅'이라고 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북간도로 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다. 1915년 32세, 일제가 은사금(恩賜金)을 보낸 것을 물리쳤다. 이듬해, 부친 벽봉선생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 1918년 35세에 『노화동이고(蘆華同異攷)』를 지었다. 이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학문이 자연스럽게 부합한다는 주장을 전집(全集) 내용을 비교하고 서로 다른 점을 추출해서 비판하기도 했는데, 이에 간재 선생은 김택술의 이 저술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1922년, 39세에는 호남 유림으로 추대되어 대표로 충청북도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 현 충북 괴산)을 방문하여 〈화양동유록(華陽洞遊錄)〉을 지었다. 화양동에는 만동묘(萬東廟)뿐만 아니라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묘가 있어 기호(畿湖) 유림들의 성지였기에 유학자 김택술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유학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간재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1925년 정읍 만종재(萬宗齋)에서 강학을 시작하였다.〈강규(講規)〉, 〈교과규칙(敎課規則)〉, 〈시고규칙(試考規則)〉 등을 지어 교육과정과 운영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교과규칙〉을 살펴보면 반(班)을 학업의 정도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분반하였으며, 반마다 과목과 교재를 규정하였다. 1924년 41세, 동문수학하던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이 간재선생의 유훈(遺訓)을 어기고 총독부(總督府)의 승인 아래 문집 『간재사고(艮齋私稿)』을 추진한 일이 발생하자, 현동묘하(玄洞墓下)에서 동지 59명과 함께 그를 성토하였다. 일찍이 간재선생은 문집 간행에 대하여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문집을 내지 말라."고 하였기에 문집 간행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진영을 둘러싼 영남(嶺南)의 학자들은 왜인 관청의 출판 인가를 받아서라도 출간을 늦출 수 없으며 이 또한 선사 말년에 받은 유명(遺命)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김택술을 비롯한 호남(湖南)의 학자들은 왜적에게 출판 인가를 받아 출간을 하는 것은 스승의 높은 학덕과 의리를 욕보이는 일이며, 인가를 받아 출간해도 괜찮다는 유명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말로, 이는 선생을 속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김택술은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하였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는 간재선생의 유고를 편찬하고 교정하여, 스승이 직접 확인한 원본 『화도수정본(華島手定本)』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1926년 43세, 오진영을 주축으로 한 영남지방 문인들이 간재선생의 문집을 재편집하여 스승의 유지를 무시하고 경남 사천 용산정(龍山亭)에서 납활자(鈉活字)를 이용하여 간재선생 진주본(晉州本)을 발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김택술은 〈간재사고진주본고변록(艮齋私稿晉州本考辨錄)〉을 지어 수정본(手定本)과 진주본(晉州本)을 정밀하게 대조하여 진주본이 간재의 본뜻과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비판하였다. 1934년 51세 때, 아버지의 제삿날을 맞아 자신과 자손들을 향해"제사란 자손의 정성을 모아 조상의 신령을 모시는 것으로, 자손이 항상 조상에게서 명령을 듣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예법에 따라 항상 제사 때는 주부(主婦)가 남편 다음에 아헌례(亞獻禮)를 올려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혼인의 중요성, 사위나 며느리의 성품과 행실, 그 집안의 가법을 살펴야 하지 문벌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4년 71세 2월 18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완주군 소양면 명덕리(明德理) 산수동(山水洞)에 장사를 지냈다. 이에 동생인 척재(拓齋)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은 "아, 형님의 풍채는 난새가 우뚝 서 있는 듯, 학이 고고하게 서 있는 듯. 가슴속의 도량은 맑은 가을물인 듯, 개인 날의 달빛 같았습니다. (중략) 슬프고 외로운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쓸쓸하고 외로운 이 몸은 물가로 산속으로 헤매며 길이 끝나 돌아갈 곳 없는 듯하고 소경이 안내자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슬픔을 표출하였다. 3. 작품 김택술의 학문적 연원은 선고인 김낙진에 있다. 15세가 되기도 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 『예기(禮記)』, 『좌전(左傳)』, 『논어(論語)』, 『시경(詩經)』 등을 모두 외우게 했으니, 어릴 적 가학(家學)이 매우 깊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보다 깊은 학문 연원은 간재선생에게 있다. 17세에 친자(親炙)하기 시작하여 수년 동안 배울 수 있었기에, 그의 학문은 간재의 영향이 매우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문집의 1/3은 간재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삼가 제가 오늘날의 형세를 살펴보니, 서리를 밟아 이르는 얼음이 이미 단단해졌고, 새가 기미를 보고 날아오를 때는 이제 못 잡게 되어버렸습니다. 치발(薙髮)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치의(緇衣)는 이미 눈앞에 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일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 실로 경중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경』〈치의〉를 인용하여 의리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더러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옛사람의 일을 근거로 말을 한다면, 치의는 오래되었는지라 굳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머리를 자르는 일로 말하자면 성탕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 태백이 나라를 양보한 일 같은 경우는 역시 혹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치의를 입는 까닭은 우리가 옛사람을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조약을 따르도록 협박한 데서 나왔으니 어찌 이 고사들을 끌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마디 말로 이런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자께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일을 가지고 머리를 풀어헤치는 일과 함께 말씀하셨으니, 치의와 치발이 경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맹자가 오십 보를 도망간 자와 백 보를 도망간 자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으니, 비록 둥근 소매 옷에 큰 띠를 두르는 우리 복장에 검은 저고리 하나만 착용한다고 하더라도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치의를 입는 것과 치발을 하는 것이 오랑캐의 제도인 것은 똑같다. 어떤 이들이 이 둘을 놓고 경중과 시비를 나누지만,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견해가 맞다. 근래에 내가 지은 〈종중시중변(從衆時中辨)〉한 편이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을 비판하여 깨뜨린 것인데, 지금 겨를이 없어 적어 보내지 못한다."라고 했다. 을사년(1905) 10월, 간재선생에게 올린 편지이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우선 조선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서양의 양복-치의-을 입을 것을 권고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단발령-치발-의 시행이다. 물론 이 단발령은 1896년 2월 친일내각이 물러나자 고종이 "머리를 깎는 것은 각자 편한 대로 할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려 단발령을 강조하지는 않았고, 이후 1897년 단발령은 정식으로 폐지된다. 그러나 1905년 고종은 일본인의 위협에 각 군의 군수와 주사에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위에서 "치발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치의는 이미 눈앞에 와 있다."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러한 상황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경중과 시비를 논하고 있으나 모두 오랑캐의 법도라는 것이고, 스승과 제자 모두 이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김택술은 자신의 의견을 스승에게 전하는 글도 있고, 의혹이 생겨 질문하는 글도 있으며, 어려움, 슬픔, 기쁨 등 그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스승과 글을 통해 교감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잡저(雜著)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성리설이다. 이미 400년 전에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까지 치부되었던 성리론이 20세기에 들어 다시 고개를 들고 더욱 진중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무릇 정학(正學)은 주리(主理)이다. 이학(異學)은 주기(主氣)이지만 주리(主理)는 일찍이 기(氣)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자로부터 송나라 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심(心)으로써 기(氣)에 속한다고 했고, 또 마음이 주재한다는 의논이 있었다. 기(氣)를 주장하는 사람이 일찍이 이(理)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씨는 여래(如來)가 바로 성(性)이라고 하였고, 고자(告子)는 생(生)을 성(性)이라고 말했고, 식색(食色)이 성이라고 하였고, 육상산(陸象山)은 이(理)가 이미 드러났다는 설을 두었고, 왕양명(王陽明)은 심(心)의 본체가 곧 천리(天理)라는 설을 두었다. 그들이 한 말을 가지고 살펴보면, 주리자는 반대로 주기를 주장한 것 같고, 주기자는 반대로 주리를 주장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실상을 궁구해보면, 공명(空明) 영각(靈覺)은 불씨의 이른바 성(性)이고, 지각(知覺) 운동(運動)은 고자의 이른바 성이고, 육상산의 이른바 차리(此理)는 마음의 맑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왕양명의 이른바 천리(天理)는 마음의 양지(良知)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사가(四家)가 인식한 이(理)와 성(性)은 우리 유가의 이른바 기(氣)이고 심(心)이다. 그러므로 우리 유가가 그들을 주기(主氣)라고 여기는 것이다. 1903년, 김택술의 나이 40에 지은 것으로 그의 성리설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주리주기대(主理主氣對)〉이다. 요컨대, 성리설에 있어서 김택술은 정학이 바로 주리(主理)임을 밝히고, 불교, 고자, 육상산, 왕양명에서의 성(性)이나 이(理)가 주기론(主氣論)임을 밝히고 있다. 위의 작품 외에도 〈기질성문답(氣質性問答)〉에서는 본연성을 밝고 뜨거운 태양에 비유하고, 기질성을 구름이나 기류에 따라 어둡거나 추운 것에 비유하여, 기상이 태양의 본체를 손상시킬 수 없듯이 본연성이 기질성에 불변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두 작품은 모두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지니고 있는 핵심 사상이며, 이를 훗날에 더욱 일목요연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잡저 가운데 〈관조선사(觀朝鮮史)〉는 주목할 만하다. 1936년 편찬된 김경중(金暻中, 1863~1945)이 저술한 『조선사(朝鮮史)』를 김택술이 읽고 자신의 견해를 225조항으로 역사를 비평하였다. 그는 『조선사』의 명칭에 관한 문제를 시작으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들과 절의에 대해 논평하고, 명(明)나라 조정의 조선에 대한 정책, 조선 군주의 처신, 위정자의 실정 및 불교, 사치풍조 등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산문 외에, 김택술의 작품 가운데 한시 또한 주목된다. 그 방대한 양은 물론이고, 작품성 역시 뛰어난 시가 많기 때문이다. 본서에 1.336수, 속집에 169수 도합 1,505수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천여 수가 넘는 문인들이 많지 않으니, 시인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해 대나무 하나 구하여 나무를 작은 밭 주변에 심었지 식구들은 밭을 잘 가꾸려다 실수로 쳐서 온전한 나무 없구나 올해 죽순이 다시 나와 커다랗게 의연히 서 있다네 아 대나무의 사물됨을 초췌하여 때를 만나지 못함을 뜻 있는 선비의 가련함으로 김택술의 감정의 결이 잘 드러나 있는 〈죽(竹)〉이라는 제목의 한시이다. 대나무를 매개로 하여 현인(賢人)과 지사(志士)의 불우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 주제이다. 그가 주로 창작한 영물시가 죽(竹), 송(松), 매(梅) 등이 많은데, 이는 그의 절의를 투사함에 다름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시라는 장르로서 리듬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산문의 이야기하듯 심회를 말하고 있고, 또한 송풍(宋風)의 화려한 전거(典據)라든지, 험벽(險僻)한 글자 등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바로 시언지(詩言志)의 품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산문 중에 〈겨울 국화를 보고 느낀 바 있어 기록하다 [見冬菊識感]〉라는 작품에서는, '겨울'을 일제강점기를 빗대었고, '국화'를 선비의 절개를 비유하였다. 곧'가을'은 숙살(肅殺)을 의미하는데, 오히려 시들지 않는 서리를 맞은 국화의 고귀함을 말하고 또 서리를 넘은 눈 속의 국화를 말하고 있으니, 곧 오상고절(傲霜孤節)을 넘어선 비장함이 엿보이며 선비의 지절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작품과도 잘 조응한다. 속집에서는 『사백록(俟百錄)』과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中東國統正變有無年表)』이 주목된다. 서명의'사백(俟百)'은 『중용』제29장의 "백세 이후의 성인을 기다려서 물어봐도 의혹이 없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는 의미이다. 내용은 동문 오진영이 문중 사림에게 끼친 화(禍), 의발 전수에 대한 허위, 진주 간행본의 오류 등에 대한 논의이다. 또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는 정도(正道)로 입각한 국가를 '정통(正統)', 정도를 따르지 않은 국가는 '변통(變統)'이라 하여 정통성을 고찰한 책이다. 예컨대, 하(夏)나라는 정통 439년, 주(周)나라는 정통 867년, 명(明)나라 정통 278년 등이며, 진(秦)나라는 변통 15년, 진(晉)나라는 변통 37년 원(元)나라는 변통 88년 등 국가의 정통 여부를 통해 그 정체성을 고찰한 것이다. 4. 문집 『후창집(後滄集)』은 본집 31권 15책, 속집 11권 5책, 합 42권 20책의 석판본이다. 1955년 아들 김형관(金炯觀)과 문인들이 간행하였다. 연구자 박술철은 『후창집』의 판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으니 소중한 자료가 된다. ① 『후창집(後滄集)』 총15책, 김택술, 창동서원발행추정(전주대학교 고서실 소장), 간사자미상(刊寫者未詳), 목판본(木版本) 31권(卷)15책(冊). ② 『후창집』 총14권, 김택술, 심천서실장본(心泉書室藏本-전북대학교 고서실 소장), 간사자미상, 석판본 29권 14책, 총 15책 중 제 10권 1책 유실. ③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총4권, 김택술, 목판본, 본집 31권 15책. ④ 『후창집』 총1권, 김택술,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영인본(影印本), 1988. ⑤ 『후창선생속집(後滄先生續集)』총 4권, 김택술, 1997, 순창인쇄소(전주소재) ⑥ 기타 저서로는 『중동국통정변유무연표(中東國統正變有無年表)』1권과 『사백록(俟百錄)』1권이 있다. 본집(本集)은 권두(卷頭)에 총목(總目)이 있고, 권별마다 목록이 따로 있다. 크게는 편지, 잡저, 운문과 묘도문자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권1부터 권12까지는 서(書) 536편이 있다. 권1과 권2는 네 편을 제외하면, 모두 간재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주로 경학, 성리학, 예학 등에 관한 학문적 논설이다. 이 외의 편지는 석농 오진영과 간재 선생의 문집에 관련하여 논쟁한 부분이 많다. 권13부터 권19에 이르기까지 잡저(雜著) 101편이 있다. 김택술의 사상, 학문, 학규(學規) 등이 수록되어 있다. 〈남산재유제군(南山齋喩諸君)〉, 〈덕천서사규약(德川書社規約)〉 등은 근대 서사(書舍)의 학제(學制)와 수학 과정 및 운영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하고 있다. 〈오진영의여서병갑서변(吳震泳擬與徐柄甲書辨)〉은 오진영의 서신을 조목조목 논변한 것이다. 〈간재선생사고습유편집범례(艮齋先生私稿拾遺編輯凡例)〉와〈간재선생년보편집범례(艮齋先生年譜編輯凡例)〉 등은 오진영이 진주에서 간행한 문집과 별도로 편집한 간재선생문집의 편집 범례이다. 권20에는 서(序) 42편이 있다. 권21에는 기(記) 32편, 제발(題跋) 20편, 명(銘) 15편, 잠(箴) 8편, 찬(贊) 4편, 혼서(昏書) 5편, 자사(字辭) 24편, 애사(哀辭) 1편이 있다. 권22에는 제문(祭文) 37편, 고축(告祝) 16편, 상량문(上梁文) 8편, 비문(碑文) 5편이 있다. 권23과 권24는 묘갈명(墓碣銘) 30편, 묘지명(墓誌銘) 3편, 묘표(墓表) 28편이 있다. 권25는 행장(行狀) 19편, 가장(家狀) 4편, 전(傳) 11편이 있다. 권26부터 권31에 이르기까지 시(詩)가 1,336수, 부(賦)가 2편, 사(辭)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운문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오언율시(五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장편고체(長篇古體) 등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시상(詩想)은 도학을 지향하는 유학자로서 사문(師門)의 옹호와 국난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진실과 양심을 묘사한 작품이 대다수이다. 속집(續集)의 권두에는 김준영(金駿榮)이 1903년 4월에 김택술에게 써 주었던 〈증김종현서(贈金鍾賢序)〉를 서문으로 대신하였고, 아들 김형관(金炯觀)이 발문을 붙였으며 별도로 『사백록』과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를 편집하였다. 속집 역시 크게 편지, 잡저 및 기타, 운문과 연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권1부터 권3까지 서(書) 98편이 있다. 권4는 잡저(雜著) 23편, 권5는 서(序) 6편, 기(記) 12편, 제발(題跋) 8편, 명(銘) 2편, 잠(箴) 1편, 찬(贊) 1편, 혼서(昏書) 1편, 고축문(告祝文) 3편, 제문(祭文) 3편, 상량문(上梁文) 2편, 묘갈명(墓碣銘) 4편, 묘지명(墓誌銘) 1편, 묘표(墓表) 7편, 유사(遺事) 1편, 전(傳) 2편 등이 있다. 권6은 시(詩) 169수, 권7과 권8은 연보(年譜)가 부록(附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5. 맺으며 본서는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던 시기를 살았던 근현대 유학자 김택술의 문집 『후창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낸 책이다. 어쩌면 현대의 우리들과 시대적 간극이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문학적 형상화라든지, 역사관이라든지, 자연관, 처세관 등은 그 간극이 더욱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의 멸망, 국권 수탈, 광복, 6.25동란 등 격변의 시간 속에서, 김택술은 수많은 글을 남겼다. 조선 중기에나 치열하게 논쟁이 거듭될 만한 성리설을 비롯하여, 국가의 정통이냐 변통이냐의 정통성에 대한 사관, 사회적 문화 현상에 대한 관점, 유가적 수양론과 절의, 근대의 서당교육사, 근대 유학자의 장례문화 등 적은 시간 속에 많은 문화를 담아내고 있는 책이 바로 『후창집』이다. 이러한 소중한 자료를 번역하고 주석을 내어 준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앞으로 본서가 근현대 문화사를 연구하고 밝히는 데 많은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자정에게 답함 경진년(1940) 與趙子貞 庚辰 일전에 보여준 선사 어록(語錄) 3책에서 현제(賢弟)가 당일에 선사를 믿고 학문에 힘쓴 뜻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잘 윤색하여 후세에 전한다면 또한 배우는 자들에게 공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선사의 말씀을 귀로 들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추후에 윤색을 하다보면 본래의 뜻을 잃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가 있겠습니까? 요컨대 담당하는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하고, 문자를 고칠 즈음에는 반드시 당일의 어순과 문맥을 신중히 생각하여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게 해야만 될 것입니다. 무릇 강학(講學)과 아언(雅言)에 관계된 것도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인사의 득실과 실제를 논한 것이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컨대 어록 중에 음성의 오진영이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염치없이 받든 일을 논한 것 같은 것은, 본문에는 "장서가 전달되지 않아서 다행히 큰 화가 없었다.[書之未傳,幸無大禍]"로 되어 있는데, 지금 모인(某人)은 '미전(未傳)'을 '미발(未發)'로 고쳤으니, 이것은 글자 한 자의 차이로 천 리나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미전'이란 글이 비록 발송됐다 하더라도 아직 전달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미발'이란 글이 비록 완성되었지만 미처 발송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곳은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으니, 더욱 다른 사람이 그 사이에 손을 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본문에 의거하여 '미전'으로 해야만 지극히 옳고 지극히 옳습니다.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최상의 큰 죄악입니다. 곽광(霍光)의 처가 허후(許后)를 독살하였는데,70) 곽광이 그 죄를 숨기고 발설하지 않았으니, 곽광의 죄도 또한 컸습니다. 그러나 《한서(漢書)》를 지은 자는 이것 때문에 곽광의 전(傳)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사람들은 그가 국가에 크게 공이 있다고 일컫게 되어서는 또한 이윤(伊尹)과 병칭71)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떤 사람이 일컬을만한 일이 있음에도 처의 죄에 연좌되어 전을 세우지 않는 것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부인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본디 애매하여 외부 사람들이 자세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편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의당 처로 인하여 그 사람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처의 죄와 아울러서 풍문으로 전하는 말을 깊이 믿어서는 안 됩니다.김성구(金聖九)가 평상시 선사를 지극히 존경하고 사모하였는데, 둥글게 상투를 틀고 치포관을 쓰며 항상 넓은 소매의 옷을 입어 한결같이 선사의 법도를 따랐습니다. 또한 성리(性理)의 근원에 대해서 가정(家庭)의 호론(湖論)을 지키지 않고 선사의 낙론(洛論)을 따랐으니, 비록 친문인(親門人)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미 가마(加麻)72)의 복(服)을 행하고 하관(下棺)하는 자리에도 참여했으니 문인과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근래에 문인의 예로써 유림동(流林洞)에 있는 간옹의 사당을 배알하였는데, 특별히 음성 사람이 간옹을 무함한 것을 배척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미움을 받아서 내침을 당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비록 현제가 친하게 지내는 아무개 같은 자도 한쪽의 말을 익숙히 듣고서 의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동(玄洞)의 선사 묘소에 전배(展拜)할 때에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할 정도로 곡을 하였으니, 참으로 이와 같은 경우처럼 사람이 따르는 바를 신중히 하고 그 보는 것을 공평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또 말하기를 "친문인 가운데 3년 후에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을 하는 자가 또한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김성구는 인의의 성품을 발휘하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되므로 비록 친문인은 아니더라도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 선사의 고도대절(高道大節)로도 천고에 없던 무함을 받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김성구가 현인을 사랑하는 어짊과 무함을 통분한 의리에서 발로되어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을 한 까닭입니다. 그대가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日前所示先師語錄三冊,可見賢弟當日信師勉學之意,若善加修潤而傳後,亦可有功於學者.但聽言日遠,追後潤色,恐失本旨,況可借他人乎? 要之當人自爲,而改竄之際,須愼思當日語脈,不爽毫髪, 然後乃可耳.凡係講學雅言猶然,況其論人事得失實際者乎? 如錄中所論陰震巴里冒銜之事,本文以"書之未傳,幸無大禍", 今某人改"未傳"爲"未發",則是一字之異,千里之繆."未傳"者, 書雖發而未及傳逹也; "未發"者, 書雖成而未及發送也.如此等處,所係不輕,尤不容他人之容手於其間也.自當依本文爲"未傳",至可至可.弒君, 無上大惡也.霍光之妻,毒弒許后, 光匿其罪而不發, 光罪亦大矣.然而作《漢書》者,不以此不立霍光傳,而人稱大有功於國家,則又不與伊尹并稱乎? 然則今有人有可稱之事,而連坐妻罪,不爲之立傳,可乎? 況婦人之有罪無罪,自屬曖昧,而非惟外人之所不可詳,亦有其夫之所不可知者乎? 然則非惟不當因妻而斥其人,并與其妻罪,而不當深信於風說也.金聖九平日於先師極其尊慕,而其圓髻緇撮,常著廣袖,旣一遵先師規模, 又於性理源頭,不守家庭之湖論,而從先師之洛論,雖親門人,何以加此? 旣行加麻之服而參會下,同於門人矣.後又抵余書云: "近日一門人禮,往謁艮翁祠廟於流林洞,而特以排斥陰人誣之, 故爲其所惡而外之." 是故雖以賢弟所親如某也,亦不免習聞一邊說而至疑.其展拜玄阡日, 淚湧如泉, 哭之失聲.信矣哉! 人之不可不愼其所從而公其所見,有如是也.賢弟且道: "親門人之淚泉失聲於三年後者,還有幾人?" 惟聖九發得仁義之性,有加於人, 故雖非親門人,能如是矣.鳴呼! 以先師高道大節,蒙誣千古,豈不悲哉? 此聖九之哭之淚泉失聲,所以出於愛賢之仁、痛誣之義者也.賢弟思之,不其然否? 곽광(霍光)의……독살하였는데 곽광(霍光)은 한(漢)나라 무제(武帝)·소제(昭帝)·선제(宣帝) 때 사람으로 자는 자맹(子孟), 시호는 선성(宣成)이다.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아 소제(昭帝)를 보필하였고, 또 소제가 죽은 뒤에 창읍왕(昌邑王)을 영립(迎立)하였다가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영립하여 국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아내는 곽현(霍顯)이다. 그녀는 자기 딸을 귀인(貴人)으로 만들기 위하여 허후(許后)가 출산할 때, 유의(乳醫)를 시켜 독살하였다. 《한서(漢書)》 권68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 이윤(伊尹)과 병칭 '이곽(伊霍)'으로 일컬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윤(伊尹)은 은(殷)나라의 재상으로서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쳐 악행을 바로잡은 일화가 있고, 곽광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웠는데, 이 둘은 무도한 임금을 내친 대표적인 인물로 칭송되었다. 이미 가마(加麻)의 복(服)을 행하고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국역 농암집》 제36권 〈부록(附錄) 연보 하(年譜下)〉에 "〈김창협의〉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초야에서 모두들 서로 조상(弔喪)하였고, 원근의 선비들이 달려와 슬픔을 다해 곡하였으며, 문인들 중에 가마(加麻)하는 이가 6, 7십 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자정에게 답함 기묘년(1939) 與趙子貞 己卯 지금 보내준 《우암연보(尤菴年譜)》 한 편을 보니, 당시에 한쪽의 각립(角立)한 자를 제외하고 의론하는 사이와 향배를 정하는 즈음에 제대로 수립할 수 없었던 자들도 의당 모두 문행(文行)과 아망(雅望)이 있는 일세의 명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어떠합니까? 대체로 이와 같이 된 까닭은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여 화복(禍福)에 흔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초려(草廬)65)와 현석(玄石)66)과 같은 명현(明賢)도 오히려 얼마간 면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오늘날 호남과 음성 사이에서 이랬다저랬다 반복하는 모모(某某) 같은 자들이야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아, 우옹(尤翁)은 오직 의리만 알았지 화복은 알지 못하고 시종 하나의 절개를 유지하여 죽은 이후에야 그쳤으니, 참으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어찌 감히 감회를 일으켜 우러르며 배우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현제(賢弟)와 함께 힘쓰고자 합니다.사람들이 매번 고인(古人)의 잘잘못을 논할 때에는 분명하지 않음이 없지만 금인(今人)의 잘잘못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어두운데. 이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고인에 대해서는 애증(愛憎)의 관계가 없지만 금인에 대해서는 사적인 친소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현제는 특히 회니시비(懷尼是非)67)의 논변에 있어서 현석이 이랬다저랬다 한 것68)에 대해 매우 그릇되었다고 하였는데,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유독 호남과 음성 간에 대해서는 모인(某人)69)이 이전의 의론을 변경한 것을 그릇되었다고 하지 않으니, 어찌 그리도 어두운 것입니까? 만약 눈앞의 '사(私)' 한 글자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호남과 음성 사이의 쟁론을 옛날 책이나 고문으로 간주하여 살펴본다면, 또한 모인을 논하기를 반드시 회니시비에 있어 현석을 논한 것처럼 할 것입니다. 今觀所惠《尤菴年譜》一遍,在當時除一邊角立者外,其不能樹立於議論之間、向背之際者,宜亦皆文行雅望,一世之名士.然以今觀之,何如也? 蓋其所以如此者,不明於是非而有動乎禍福故也.至以草廬、玄石之名賢,猶些不免,而況今日某某之依違反覆於湖陰之間者,何足怪哉? 嗟呼! 尤翁惟知義理,不知禍福,終始一節, 死而後已,眞吾師也.安敢不興感仰止而願學也? 欲與賢弟共勉焉.人每於論古人之得失非不明也, 至於論今人之得失則暗焉.此曷故焉? 於古則無愛憎之關,而於今則有親疎之私也.賢尤於懷尼之論,深以玄石之依違爲非, 可謂明矣.獨於湖陰之間,不以某人之變改前論爲非,何其暗也? 若能一切掃去目下私之一字,以湖陰之爭,作陳編古文看,則亦當論某人,如懷尼時之論玄石也必矣. 초려(草廬) 초려는 이유태(李惟泰)의 호이다. 자는 태지(泰之),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예학(禮學)에 뛰어났으며, 호서(湖西)의 산림 오현(山林五賢)으로 꼽혔다. 저서로는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현석(玄石) 현석은 박세채(朴世采)의 호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이다.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의 문인이며, 송시열과도 교유하였다. 소론의 영수로서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문집인《남계집(南溪集)》을 비롯하여 《범학전편(範學全編)》, 《시경요의(詩經要義)》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회니시비(懷尼是非) 서인(西人)이 송시열을 두둔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두둔하는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어 싸우게 된 일을 가리킨다. '회(懷)'와 '니(尼)'는 각각 송시열의 거주지인 회덕군(懷德郡)과 윤증의 거주지인 이성군(尼城郡)을 가리키며, 노소(老少) 분당에 관련된 두 사람의 글을 모아 엮은 책으로 《회니본말(懷尼本末)》 등이 있다. 현석이……것 1684년(숙종10)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하여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한 것을 가리키는데,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고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모인(某人) 김평묵(金平黙)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자정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趙子貞 戊寅 어떤 사람이 시(詩)는 반드시 괴롭게 생각한 연후에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다고 하고, 황모(黃某)의 옷을 깨물며 스스로 뼈를 녹이는 일을 인용하여 말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우스운 일입니다. 무릇 시란 뜻을 말하는 것으로 밖에서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뜻이 바르면 시 또한 바르고, 뜻이 사특하면 시 또한 사특합니다. 옛날의 삼백편(三百篇) 《시경》은 훌륭합니다. 후세에는 비록 시법(詩法)을 진술하였지만 사특함과 바름을 폐하고 논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미 드러난 볼 만한 것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두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충의를 숭상하는 뜻이 있어야만 가을빛과 높음을 다투는 시가 있을 수 있으며, 이청련(李靑蓮 이백(李白))의 활달한 뜻이 있어야만 문을 열면 산을 보게 되는 시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뜻이 없는데 시가 있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억지로 힘써 찾으며 괴롭게 옷을 깨물고 뼈를 녹임에 이르러야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가? 또 시는 음악과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칙(內則)》에는 음악을 배우고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한 때의 일로 삼았고,62) 공자는 시에서 흥기하고 음악에서 완성하는 것으로 시작과 끝을 삼았습니다.63) 음악은 화락을 위주로 합니다. 그렇다면 시 또한 그 심기가 평화로워 곧바로 자기의 뜻을 표현한 뒤에야 혼연히 저절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무개의 말처럼 반드시 괴롭게 생각하여 옷이 물어뜯기고 뼈가 녹듯이 해야만 한다면 이는 성인이 시교(詩教)를 베푼 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생명을 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말은 이치가 없는 것으로 우스울 뿐만 아니라 이치를 해치는 것으로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某人之謂詩必苦思然後乃得佳句,而引黃某齧衣自家銷骨事以爲說者,甚可笑也.夫詩言志,而非外求而得者也, 故志正則詩亦正,志邪則詩亦邪.古之三百篇尚矣,後世雖陳詩法, 廢邪正不論.然但以已著之可見者言之,有杜工部忠義之志然後有秋色爭高之詩,有李青蓮豁達之志然後有開門見山之句,無其志而有其詩者,吾未之見也.豈強探力索之苦至於齧衣銷骨而可得佳句乎哉? 且詩近於樂者, 故《內則》以學樂誦詩爲一時事, 孔子以興詩成樂爲始終事.樂是以和爲主者,則詩亦可知其心平氣和,直寫已志而後, 可以得渾然天成之佳句也審矣.如必苦思衣齧骨銷而得之,若某人之言,則是聖人之設詩教也,乃所以使人勞心而戕生也,豈有是理哉? 其言也,非直無理之可笑,亦爲害理之可斥者也. 내칙(內則)에는……삼았고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13세가 되면 음악을 배우고 시가를 읊으며 작무를 배운다.[十有三年, 學樂誦詩舞勺]"라고 하였다. 공자는……삼았습니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시에서 흥기하고, 예에서 세우고, 음악에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소심재 황공께 올리는 제문 祭小心齋黃公文 유세차 병자년(1936) 윤3월 10일 임오날에 동문 김택술은 멀리서 과일과 포 등 제수를 보내 소심재 황공의 영령에게 곡하며 고합니다.아, 공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질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신 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인한 마음과 불인(不仁)한 마음을 함께 가질 수 없는 것은 한 번에 몸을 두 가지 용도로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걸핏하면 "인을 좋아하면 충분하지 어찌 반드시 불인(不仁)을 미워해야 하는가?"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만일 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매우 미워하는데 그 미워하는 정도가 불인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도 심합니다. 그러니 저는 그들이 과연 인을 좋아하는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조가 지금 세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대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두세 명의 흉도들이 후환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못된 짓을 끊임없이 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 스스로 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인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말에 반대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 도와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공께서는 그러한 까닭을 잘 알았기 때문에 힘껏 변별하여 그런 사람들을 통렬하게 논척하였으니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분이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옛날에 살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숭상하였을 것인데, 하물며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고, 게다가 동문의 사이이며, 더군다나 환난의 시기를 함께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매번 목을 길게 빼고 북쪽을 바라보며 노성(老成)한 공께서 건강하기만을 바랐건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부음을 듣게 될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생각건대 공은 덕성(德性)이 훌륭하고 정밀한 학술까지 갖추셨습니다. 비록 하루에 천 리를 내달리는 기개는 없었지만 1촌이나 1자씩 점점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지니셨습니다. 그리하여 만년에 성취한 것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이런 분이 운명하셨으니 흉악한 짓을 하는 무리와 조장하는 사람들은 더욱 설쳐대며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저는 못난 사람인데 외람되게 공이 알아주셨으니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은 정성으로 공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정하고 옳지 못한 학설을 막는 데 목숨을 바쳐 '부처님 은혜에 보답'67)하고자 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지금 더욱 외로운 신세가 되었으니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입니까.비록 그렇지만 공은 이미 한 일이 있기 때문에 돌아가 하늘에 계신 선생님의 영령을 뵙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저를 살피셔서 때때로 오르내리신다면 제가 감격하여 도와주는 것이 있음을 알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하거나 중단하여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모두 아는 이치를 저버리겠습니까.또 공의 자손과 문생들 가운데 도를 함께하여 서로 도움을 주는 이가 있으니 이것은 제 평생의 다행한 일입니다. 대개 이 일은 본래 만세까지 기약해야 할 일이지 하루아침에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양주와 묵적은 맹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맹자는 그런 이유 때문에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맹자를 본받지 않는다면 누구를 본받겠습니까. 다만 사문의 변고가 갈수록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다시 공의 거친 주먹과 힘찬 발길질68)을 볼 수 없어 서글프니 이것이 어찌 사사로운 감정이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부디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維歲次丙子閏三月初十日壬午, 同門生金澤述遠寄果脯之奠, 哭告于小心齋黃公之靈曰: 嗚呼! 公可謂好仁者也。 於何而見得好仁? 由其有惡不仁也。 心之不可兩存, 如身之不可二用。 今之人輒曰好仁, 足矣。 何必惡不仁? 如有拂此言者, 便致深惡。 惡之甚於不仁, 吾未知其果有好仁之實與否。 而此風於今爲烈, 蓋自山頹, 二三凶徒之敢行不顧餘患, 末有涯泝者, 實由自謂好仁之徒, 不惡不仁, 而反惡拂言者而助成之也。 公能深達其故, 力辨而痛斥之。 蓋千百人中一人而已。 如此人者, 雖使在古猶當尙之。 况在幷世, 况在同門, 况在同患之日乎! 每引領而北望, 庶老成之無恙, 孰謂一朝遽承訃音? 念公德性之厚, 輔以學術之精, 雖無一日千里之槩, 而自有寸得尺進之像。 其晩暮所成有難以盡形者。 斯文不幸, 斯人云亡, 凶行之徒、助成之類益以鴟張而無忌。 顧余孱劣, 猥蒙相知, 誠不後人, 願從下風, 距詖邪遁死生, 以之共報佛恩。 嗚呼! 今焉益孤, 吾將疇依? 雖然, 公旣有藉手歸見先師在天之靈, 而無所愧矣。 又有俯息相吹, 時降陰騭, 則使余知所歆動而庇蔭者猶自在也。 豈敢怠忽間斷, 有負幽明相知之理也乎? 且公之子孫門生亦有可與同道而相益, 此爲平生之幸也。 蓋此事, 本以萬世而爲期, 非以一朝而急功者。 故楊墨亦未怕孟子, 然孟子未嘗以此自沮。 吾輩不法孟子, 其將誰法矣乎? 但以師門事變去益叵測, 而不復見公麤拳大踢, 而爲之傷悲, 豈爲私耶哉! 嗚呼哀哉! 尙饗! 부처님 은혜에 보답[報佛恩] '몸과 마음을 다하여 끝없는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다. 주희가 진량(陳亮)에게 보낸 편지의 말 "불자들은 '이 몸과 마음을 온 우주의 진진찰찰에 바치오리니, 이를 일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함이라 하네.' 라고 한다.[佛者之言曰: 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為報佛恩。]"에 보인다. 거친 주먹과 힘찬 발길질 사문에 해를 끼치는 사람을 물리칠 힘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준 편지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정성스럽지 않았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하지 않았겠는가.[孔子豈不是至公至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晦庵集 卷28 答陳同夫書》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족숙 노가암 공께 올리는 제문 祭族叔老可菴公文 유세차 경신년(1920) 4월 병자삭(丙子朔) 20일 을미날은 노가암(老可菴)61) 거사 김공의 소상입니다. 그 하루 전 갑오날에 족질 김택술은 삼가 향촉과 굴비ㆍ대추를 갖추어 궤연에 제물 올리고 곡하며 아룁니다.오호! 올곧은 도리로 맑은 지조를 지키며 악을 미워하여 가차함이 없는 것이 마치 매가 참새를 모는 듯 하는 이가 공이 아니었습니까? 성대한 풍도와 위의가 여유롭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난새와 학이 우뚝히 서있는 듯 하는 이가 공이 아니었습니까? 다채로운 문심과 훌륭한 문장은 눈부신 빛을 발하지만 은은한 채 뽐내지 않는 이가 공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말로는 공의 실체를 다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백발의 노년에도 스승을 모시면서62)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하는 학구(學究)의 의지가 확고하였고, 잘못된 구습을 일시에 바꿔 어제의 잘못과 오늘의 바름을 결연히 가르는 용단이 있으셨습니다. 이것들은 대체로 옛날의 위무공(衛武公)63)과 거백옥(蘧伯玉)64) 등의 일인데 공께서는 이를 능히 하셨습니다. 참으로 백 사람 중에서 하나도 찾기 어려운, 뒷 사람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장수를 누리며 지닌 뜻을 다 채웠더라면 도학을 제창하여 세상을 도왔을 터인데 어찌하여 갑자기 구천으로 떠나 사우(士友)와 종친들을 슬프게 하셨습니까?오호! 봉산(蓬山)65)의 구름과 영주(瀛洲)66)의 바람을 쫓아 동쪽으로 서쪽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앓으실 때 약 들고 문병하지도 못했고, 장례 때 상여줄도 잡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여름 창졸간에 한번 곡하고 진즉에 지어둔 애도의 글을 묘소에 풀 우거진 이제야 뒤늦게 고하여 유명(幽明)을 넘은 정을 전하오니 얼굴이 후끈거려 부끄럽습니다. 자리 펼친 산 위에 달 오래 비추고, 분단장 한 뜰에 꽃 만발하였는데, 밝은 혼령 이곳에 내리고 오르시며 천년토록 가시지 말기를 바라오니. 부디 환히 오시어 저의 맑은 술잔을 흠향하소서. 維歲次庚申四月丙子朔二十日乙未, 老可菴居士金公之常事也。 前一日甲午, 族姪澤述謹具香燭鯗棗, 哭奠于象生之設, 而告之曰: 嗚呼! 直道淸操, 疾惡不貸, 若鷹鸇之逐鳥雀者, 非公邪? 棣棣風儀, 閑習可則, 若鸞停而鶴立者, 非公耶? 藻思翰力, 炳乎其耀, 人而闇然不伐者, 非公耶? 然此何足以槩公之實也? 皓首從師, 確乎其朝聞夕可之志; 一變舊染, 截乎其昨非今是之勇。 是蓋古衛武伯玉之流, 而公則能之。 洵不亦百中難一, 而足爲後人之敬重乎? 如享遐齡而充厥志, 有以倡道而裨世, 胡爲乎一疾九原, 齎士友宗黨之悲耶? 嗚呼! 蓬雲瀛風, 西漂東泊, 病不問藥, 葬未執紼。 去夏一哭, 亦云倉猝, 哀文已構, 晩此草宿, 情徹幽明, 厚顔是恧。 席山月長在, 粉圃花重發, 惟赫靈之陟降, 歷千年而不滅。 庶幾昭格, 歆我泂酌。 노가암(老可菴) 김낙필(金洛弼 1850.10.9.~1919.4.20.)의 호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여량(汝良)이며, 부안 명당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 백홍진(白弘鎭)에게 배우고, 만년에 간재 전우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백발……모시면서 간재 전우(艮齋田愚)가 부안의 계화도에 은둔하여 강학할 때, 칠순의 나이인 김낙필은 아홉 살 연하인 간재에게 제자의 예를 갖춰 모셨다. 위무공(衛武公) 춘추 시대 위나라 무공(武公)으로, 95세의 나이에도 신하들에게 자신을 일깨워 달라 당부하며 반성에 노력하였다는 칭송이 전한다.《詩經ㆍ抑》 거백옥(蘧伯玉) 춘추 시대 위(衛) 나라의 현대부(賢大夫)로서,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그의 집에 머물렀다. 나이 오십에 지난 사십구 년의 잘못을 반성하고, 나이 육십까지 육십 번을 고쳤다는 칭송이 전한다. 《淮南子ㆍ原道訓》《莊子ㆍ則陽》 봉산(蓬山)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김택술은 봉산에서 처음 간재선생께 집지(執贄)하였다. 《후창집》〈告先考先妣墓文〉 영주(瀛州)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의 옛 이름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종숙부 태암 공께 올리는 제문 祭從叔台庵公文 유세차 신유년(1921) 7월 기해삭(己亥朔) 22일 경신일은 나의 종숙부 태암(台庵)59) 공의 소상입니다. 종질 김택술(金澤述)은 하루 전날에 비로소 부족한 제물을 갖춰 영전에 밝게 아룁니다.오호! 저는 아버지의 형제가 적어서 공을 백부나 숙부처럼 모셨습니다. 공께서도 저를 친 조카처럼 대해주셨습니다. 이는 남들의 종숙질 사이에 견줄 바가 아니었습니다. 전에 제 아버지께서는 일찍 친상을 당하여 할아버지께서 어렵게 이루신 가업이 손상될 우려가 있었지만 애써 노력하여 유업을 잇고 옛 자산을 온전히 보존하셨는데, 이것은 실은 공의 공로였습니다. 이런 일은 공께는 일상의 보통 일이셨겠지만 그 후인으로서는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제가 처음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기 시작하였을 때에 공께서는 진심으로 그것을 좋아하며 안으로는 두터이 격려하고 밖으로는 칭찬하고 자랑하며, 제가 학문을 이루고 가문의 명예를 빛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맨 나중에는 공께서도 흔연히 공부에 뜻을 두어 높은 관과 넓은 소매의 옛 복장을 엄연히 갖추고 《석담요결(石潭要訣)》60) 전부를 마치 당신의 말씀처럼 외우셨습니다. 때로는 의심되는 문제를 저에게 하문하며 허심탄회하고 거리낌 없으심이 마치 친구 사이 같았습니다. 아! 이것은 참으로 남의 선을 취하여 나를 깊이 사랑함입니다. 오늘날 어디서 이런 분을 다시 보겠습니까?오호! 저는 기유년(1909, 융희3, 26세) 이후로는 예전의 가업이 나날이 위축되어 더 견뎌 나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공께서는 이를 깊이 걱정하며 마치 당신의 일인 것처럼 하셨습니다. 이것은 비록 형기(形氣 유형의 물자)에 관한 근심이었지만 그 역시 저를 깊이 걱정하시는 마음의 발현이었습니다. 몇년 전 내가 월호(月湖)에 살게 되었을 때 공께서는 눈물로 작별하며 말씀하시기를, "바닷가의 바람과 장기(瘴氣)를 어찌 견디며 살겠느냐?"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우거(寓居)에 찾아와 위로하시며, "사정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옛 집을 마음에 두지 말거라."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저는 마음이 슬프고 한스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가 우거에서 벗어나 옛 마을로 되돌아 왔사오니, 공께서 아시면 기뻐하기 마지 않으실 터인데 어이하여 기다리지 않고 가셨단 말입니까? 계시던 옛 집에는 처량한 바람 불고 쓰시던 서안에는 먼지만 쌓여있습니다.오호! 해가 두 번 바뀌어 이제 살아계신 듯 모시던 궤연을 물리게 되었습니다. 공의 얼굴과 목소리는 날마다 멀어져 가고, 가문의 형편은 점점 쇠락해 가는 것이 슬프기만 합니다. 옛날을 우러러보고 지금을 굽어보며 감개와 서글픔에 점점 더 아립니다. 오호 슬프도다! 부디 흠향하소서! 維歲次辛酉七月己亥朔二十二日庚申, 我從叔台庵公之祥事也。 前一日, 從姪澤述始具薄奠, 昭告于靈前, 曰: 嗚呼! 姪以先君終鮮之故, 視公猶伯叔父。 公之於我, 亦親姪之視焉, 是豈他人從叔姪之比哉! 昔先君之夙遘憫凶也, 我王考艱致之業, 豈無耗損之虞, 而幹蠱惟勤, 俾完舊物, 公實有功。 此在於公, 雖曰常事, 其在後人, 安敢忘也? 又念姪初從事于學, 公實心好之, 旣敦勉于內, 或稱揚於外, 冀其有成而昌家聲也。 最晩, 公亦欣然而有意, 峨冠濶袖, 古貌儼然, 一部潭訣, 若誦己言。 時將疑難, 下問于姪, 虛懷亹亹, 有若朋儕。 噫! 此眞取人之善, 而愛我之深也。 今日何處復得見此? 嗚呼! 姪自己酉之後, 舊業日蹙, 殆不可爲, 公深以爲憂, 若己遭也。 此雖涉形氣之憂, 憂我之深亦惟見。 公曩年月湖之寓也, 公釀淚而別, 曰: 海曲風瘴何以奠居? 復枉寓所而慰之, 曰: 事已到此, 勿念舊居。 此言悲悵, 心肝欲碎。 旣而余不安寓, 復返故里, 公宜歡喜之不暇, 胡爲乎不待而逝? 但見空堂風凄, 舊案塵堆。 嗚呼! 星霜再易, 象生將撤, 痛音容之日遠, 慨門戶之零替, 俛仰今昔, 感愴冞切。 嗚呼哀哉! 尙饗! 태암(台庵) 김낙준(金洛俊)을 말한다. 1849(헌종15, 기유)~1921(신유), 자는 덕화(德和), 호는 태암이다. 부안김씨 직장공파 28세손이며, 아버지는 김의순(金義淳, 1830~1896), 어머니는 여산송씨(1828~1887)이고, 부인은 남양홍씨(1847~1920)이다. 석담요결(石潭要訣)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저자인 율곡 이이(栗谷李珥, 1536~1584)의 별호가 석담(石潭)인 것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간재 전우가 《석담요결》을 중히 여겨 가르친 것은 신철균(申鐵均)ㆍ유일준(俞日濬) 등의 문하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다. 《간재집》(권3,4)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창암 박공께 올리는 제문 祭蒼巖朴公文 유세차 정묘년(1927) 4월 을미삭(乙未朔) 17일 신해날은 창암 박만환(蒼巖朴晩煥)46) 공의 소상(小祥) 날입니다. 하루 전인 경술날에 부안 사람 김택술은 삼가 소박한 제수를 준비하여 궤연(几筵)에 곡하며 아룁니다.소나무와 잣나무처럼 굳세고 松柏之勁,쇠와 바위처럼 단단한 것은 鐵石之堅.공의 의지와 자질이었고, 公之志質,바다처럼 깊고 넓은 식견과 淵海之識,맹분(孟賁) 하육(夏育)47)처럼 용맹함은 賁育之勇,공의 재주와 힘이었습니다. 公之才力,어려서 글을 익혀 少日詞翰,과거시험장에서 재능을 떨쳤지만 蜚英場屋,운수가 나빠 좋은 승승장구 못 하고 數奇不捷,하찮은 남반(南班)48) 자리에 앉았으니 薄試南班,능력에 걸맞지 않는 낮은 직위였습니다. 位屈其才,세상이 점차 흉흉해지자 世且窣窣,영동(瀛東)49)으로 돌아왔으니 歸來瀛東,그곳에 선대의 초가집 있어 先人有廬,영원히 은거하기로50) 마음먹고 永矢邁軸,창주(滄洲)의 정사(精舍)와 滄洲之舍,백석(白石)의 장서(藏書)로 白石之藏,학생들을 가르치시니51) 惠嘉來學,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高山之仰,치의(緇衣)를 읊조림에52) 緇衣之咏,우뚝이 높은 덕이 널리 전하였습니다. 卓乎知德.산하의 색깔이 바뀌고 나니 山河改色,돌아가 기댈 땅도 없어졌는데 適歸無地,다시 또 무슨 더러운 물건53)인가? 又何穢物,일찌기 대한제국의 은혜 받았는데 旣受韓恩,다른 나라의 은혜를 다시 받지 않을 줄은 不受他恩,저 푸른 하늘도 알았을 것입니다. 彼蒼可質.눈 내리는 북쪽과 장기(瘴氣)의 남쪽으로 朔雪南瘴,고생스런 천 리 머나먼 길을 間關千里,아득히 기러기처럼 오가셨는데 鴻擧漠漠,평생에 마음을 알아준 이는 平生知心,저 우뚝한 구산(臼山 田愚)이었으니 有屹臼山,공의 덕을 서리 속 국화에 견주었습니다. 比德霜菊.공과 같은 현인이 若公之賢,선류(善類)의 주인으로 善類之主,우뚝이 만년의 절기 지키셨는데 晩節之特,마침내 외로운 꽃 시들고 孤芳竟萎,새벽 별처럼 떨어졌으니 晨星亦墜,너무나 아깝고 아쉽습니다. 云誰之貴.아, 재주 부족한 저는 嗟余不敏,공의 넘치는 지우와 칭찬을 猥蒙知獎,30년 가까이 받았는데 垂三十曆.저를 가상히 여기시어 公曰嘉乃,사도(斯道)가 이처럼 쇠퇴하는데 道喪如許,자네는 사업을 힘써 마치라 하셨습니다. 勉卒爾業.저는 그럴 능력 없는 사람이었지만54) 余雖蚊山,공께서 실로 이렇게 저를 아껴주시어 公實愛我,그 두터운 정의에 감복하였습니다. 厚意則服,그런데 오늘 이제부터는 今焉以後,누가 있어 저를 사랑해 주실지 疇能愛我,제 마음은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我懷忉怛.아, 박공께서는 嗚呼惟公,선악(善惡)을 매우 엄격하게 구분하고 最嚴淑慝,음험한 무함을 가려내어 물리치고 辨斥陰誣,시비(是非)를 분명히 밝히셨는데 是非昭晳,저는 공의 뒤를 따르며 余趨下風,화복(禍福)을 함께 하였습니다. 同厥禍福.완주(完州)에 어떤 일 있어 가면서는55) 完行何事,백 리 먼 길에 무더위를 무릅썼는데 百里冒熱,돌아오는 길에는 강물 다리 밑에서 歸路江橋,물고기를 잡아 술자리를 펼쳤습니다. 穿魚呼酌,즐거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怡然談笑,외물이 어떻게 이를 욕되게 할까보냐 外至何辱.이에 저는 공의 흉금을 보았으니 我視公衿,여덟 창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56) 八窓通豁.그러고는 몇 달도 채 되지 않아서 曾未幾月,공은 갑자기 앓아누우셨습니다. 公淹床簀,"돌은 거칠고 옥은 온윤(溫潤)하여 石粗玉溫,하나는 아름답고 하나는 거칠지만 雖別美惡,옥으로 좋은 그릇 만들기 위해서는 玉之成器,도리어 돌에 갈아야만 한다네. 反磨乎石.그러니 저 음(陰)의 재앙이 彼陰之禍,이로움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安知非益,더욱 조심하고 강인해져서57) 益加動忍,훌륭한 인재가 되도록 하게" 汝庸成玉.제가 문병할 때 이와 같이 逮余問疾,남겨주신 간절한 부촉 丁寧遺囑,그 말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니 言猶在耳,어찌 감히 잊고 소홀히 하겠습니까. 豈敢忘忽?아하, 오호! 嗚呼!눈물이 강물처럼 이어 흐릅니다. 傾長河之淚,백번이라도 제 몸을 대신 바치려 한다58) 願百身之贖,일찍이 옛사람 이런 말 하였는데 曾聞諸古人,제 마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我心其先獲.공의 밝으신 영령이여 公惟不昧,강림하여 살피소서! 庶幾鑑格. 維歲次丁卯四月乙未朔十七日辛亥, 蒼巖朴公常事之期也。 前一日庚戌, 扶寧金澤述謹具薄奠, 哭告于象生之筵, 曰: 松柏之勁, 鐵石之堅。 公之志質, 淵海之識, 賁育之勇, 公之才力, 少日詞翰, 蜚英場屋, 數奇不捷, 薄試南班, 位屈其才, 世且窣窣, 歸來瀛東, 先人有廬, 永矢邁4)軸, 滄洲之舍, 白石之藏, 惠嘉來學, 高山之仰, 緇衣之咏, 卓乎知德。 山河改色, 適歸無地, 又何穢物, 旣受韓恩, 不受他恩, 彼蒼可質, 朔雪南瘴, 間關千里, 鴻擧漠漠, 平生知心, 有屹臼山, 比德霜菊。 若公之賢, 善類之主, 晩節之特, 孤芳竟萎, 晨星亦墜, 云誰之貴。 嗟余不敏, 猥蒙知獎, 垂三十曆。 公曰嘉乃, 道喪如許, 勉卒爾業。 余雖蚊山, 公實愛我, 厚意則服, 今焉以後, 疇能愛我, 我懷忉怛。 嗚呼惟公, 最嚴淑慝, 辨斥陰誣, 是非昭晳, 余趨下風, 同厥禍福, 完行何事, 百里冒熱, 歸路江橋, 穿魚呼酌, 怡然談笑, 外至何辱。 我視公衿, 八窓通豁, 曾未幾月, 公淹床簀, 石粗玉溫, 雖別美惡, 玉之成器, 反磨乎石。 彼陰之禍, 安知非益, 益加動忍, 汝庸成玉。 逮余問疾, 丁寧遺囑, 言猶在耳, 豈敢忘忽? 嗚呼! 傾長河之淚, 願百身之贖。 曾聞諸古人, 我心其先獲。 公惟不昧, 庶幾鑑格。 박만환(朴晩煥) 1849~1926, 자는 경서(景瑞), 호는 창암(蒼巖)이며, 정읍 출신이다. 임헌회(任憲晦)의 제자로, 금부도사와 삼례찰방을 하였고, 동학농민군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정읍에 영주정사(瀛州精舍)를 지어 후생을 교육하였다. 맹분(孟賁) 하육(夏育)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의 유명한 역사(力士)들로서, 맹분은 맨손으로 쇠뿔을 뽑았고, 하육은 천균(千鈞 : 삼천 근)의 무게를 들어 올렸다고 한다. 남반(南班) 여기서는 별로 높고 무겁지 않은 미관말직을 말하는데, 박만환은 종육품직인 금부도사와 삼례찰방 등을 하였다. 남반은 원래 고려 때의 제도로, 동반(東班: 문신)과 서반(西班: 무신) 아래의 반열인데, 주로 왕명을 출납하는 내료직(內僚職)이나 음사(蔭仕)의 벼슬을 가리킨다. 영동(瀛東) 전라북도 고부(古阜) 영주산(瀛州山)의 동쪽, 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흑암리를 말한다. 영주(瀛州)는 고부의 옛 이름이다. 은거하기로 저본의 원문은 '邁軸'인데, 이는 '薖軸'의 오기이다.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숨어 살 집이 언덕에 있으니, 큰 선비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阿, 碩人之薖。]"라는 말과 "숨어 살 집이 고원에 있으니, 큰 선비가 소요하는 곳이로다.[考槃在陸, 碩人之軸。]"라는 말을 합한 것으로, 선비가 산림에 은거함을 말한다. 창주(滄洲)……가르치시니 창암(蒼巖 박만환)이 1903년에 고부면 흑암리에 영주정사(瀛州精舍)를 세우고 많은 서적을 수장하여 후학을 양성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나라의 주희(朱熹)는 무이산(武夷山)에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세워 강학하였고, 이상(李常)은 여산(廬山)의 백석승사(白石僧舍)에 일만 권의 책을 수장하였다. 높은 산을……읊조리며 사람들이 창암의 고상한 덕행을 우러러보며 찬탄하였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경》〈거할(車舝)〉편에서는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길을 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하며 높은 산을 고상한 덕행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치의(緇衣)〉편에서는 "검은 옷 참 잘 어울리네요, 해지면 내가 다시 지어드릴게요.[緇衣之宜兮, 敝予又改爲兮。]" 등으로 노래하였는데, 공자는 "현인 좋아하기를 치의편처럼 하라.[好賢如緇衣。《禮記》]"라고 하며 현인에 대한 흠모로 해석하였다. 더러운 물건 일제가 각 지역의 명사들에게 !준 은사금을 가리킨다. 저는……사람이었지만 원문의 '문산(蚊山)'은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한다는 뜻이다. 《장자(莊子)》〈응제왕(應帝王)〉에 "그렇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바다를 건너뛰고 강을 뚫고 모기를 시켜 산을 짊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其於治天下也, 猶涉海鑿河, 而使蚊負山也。]"고 한 데서 온 말로, 곧 힘이 아주 약해서 중임(重任)을 감당하기 어려움을 비유한다. 완주(完州)……가면서는 오진영(吳震泳)의 사건으로 김택술과 박사의(朴士毅, 창암의 족제)가 검찰국에 체도되어 조사받을 때(1925년 6월 2일) 창암이 그들을 위해 찾아갔던 일을 말하는 듯하다. 여덟 창이……있었습니다 사리에 통달하여 식견이 명철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0에 "허정해도 이 물건을 알아야 하고, 안 허정해도 이 물건을 알아야 한다. 이 물건을 알아 얻지 못하였다면, 이른바 허정하다는 것도 어두운 허정이지 밝은 허정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저 어두운 허정을 깨뜨리고 밝은 허정으로 바꿔야만 한다. 그러면 여덟 창의 영롱한 빛이 모두 어울려 통해 비출 것이며, 그러지 않으면 저 검은 허정을 굳게 지키며 종신토록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통해 알지 못할 것이다.[虛靜也要識得這物事, 不虛靜也要識得這物事。 如未識得這物事時, 則所謂虛靜亦是箇黑底虛靜, 不是白底虛靜。 而今須是要打破那黑底虛靜, 換做箇白底虛靜, 則八窓玲瓏, 無不融通。 不然則守定那裏底虛靜, 終身黑淬淬地莫之通曉也。]"라고 하였다. 조심하고 강인해져서 동인(動忍)은 동심인성(動心忍性)의 준말로, 항상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져 조심하고 성품을 강인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백 번……바치려 한다 《시경》〈황조(黃鳥)〉에 "저 푸른 하늘이. 우리 좋은 사람을 죽이는구나. 대신 갚을 수 있다면 사람들 제 몸을 백번이라도 바치리라.[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라고 하였다. 邁 원문은 '邁'(갈 매)인데 '薖'(풀이름 과)의 오기이다. 과축(薖軸)은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지산 김공께 올리는 제문 祭志山金公文 유세차 을축년(1925) 8월 을사삭(乙巳朔) 29일 계유날에 시생 부안 사람 김택술은 삼가 소박한 제수를 준비하여 돌아가신 국자선생(國子先生) 지산 김복한(志山金福漢)33) 공의 영령께 곡하며 아룁니다.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침은 尊華攘夷,천지간의 변치 않는 법도이고, 天經地緯,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은 竭忠報國,신하된 자의 큰 의리입니다. 人臣大義,살펴보건대 지난날의 위대한 인물들은 相古偉人,모두 이 두 가지를 지켰습니다. 疇不由玆?장릉(長陵)34)의 인조 임금 때 粤在長陵병자년과 정축년의 변란35)에서 丙丁之時,선원 김상용36)과 청음 김상헌37) 공의 惟仙淸翁,극진한 도의와 빛나는 충절은 盡道華忠,오늘까지 모범으로 남아 전하여 式至于今,백성들이 의지하는 큰 공훈입니다. 民賴鉅功.아아, 김공께서는 嗚呼惟公,조상들의 자취를 따르시어 繩祖之迹,왜놈들이 침입해 능욕하고 夷虜侵陵,복식 두발의 문화 전통을 허물자 毁我衣髮,정의의 기치로 군사를 일으키니 仗義起旅,공렬이 혁혁하게 빛나셨습니다. 有赫其烈.조선 조정이 이미 기울었지만 漢鼎旣顚,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으켜 회복하고자 一心興復,멀리 파리에 긴 서신을 보내고 遠書巴里,옥에 갇혀서도 후회하지 않으셨습니다.38) 靡悔燕獄,나라에 충성이 지극한 위에다 忠旣至矣,존화양이의 정신 또한 그러하여 尊攘亦然.산하가 비록 다 불탔지만 山河雖燼,신령한 광휘는 여전히 높았는데39) 靈光猶尊,어찌 알았겠습니까 하루아침에 孰謂一曙,하늘이 공을 앗아갈 줄을40) 天不憖賢,혈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다 凡有血氣,어버이를 여읜 것처럼 애통해합니다. 痛若懿親.아, 우리 사림들은 嗟我士林,사도(斯道)를 위해 슬퍼하니 重爲道悲,공맹(孔孟)의 유풍(儒風)을 부지하고 扶鄒魯風,호원(胡瑗)의 규모(規模)를 엄격히 지켜41) 嚴蘇湖規,한 가닥 남은 양기(陽氣)를 면면히 잇고 綿延線陽,붉은 등불이 어두운 거리를 비추었는데 昏衢燭紅,지금 이후로는 今焉以後,누구를 따라야 한단 말입니까? 于誰之從?아하 오호! 嗚呼!보잘것없는 저를 以我無狀,공께서는 버리지 않으셨으니 荷公不捨,명(銘)을 새긴 비석에서 빛이 나고42) 光生銘螭,말을 돌아보시자 값이 올랐습니다.43) 價增顧馬,먼저 바탕을 마련한 뒤에 채색하고44) 先素後繪,뿌리를 북돋운 뒤에 열매를 먹는다며 培根食實,덕(德)을 권면해 주시었고 勉之以德,저는 가르침에 감복하여 따랐습니다. 余所服述.늠름하게 척사(斥邪)를 주장하고 凜凜斥邪,겸손하게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시어 謙謙下士,그 풍모와 의론이 사람들을 움직였고 風議動人,저는 그 모습에 감격하고 기뻤습니다. 余所感喜.이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環求此世,다시 볼 수 없는 분이니 無處更覿,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지고 淚之傾河,애통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慟之彌臆.사문(斯文)이 장차 망해가는데 文之將喪,덕 크신 공이 함께 운명하시고 長德幷亡,세상의 변란이 극심한 지경에 世變之極,유가 선비들 또한 미쳐가니 儒流亦狂,깜깜한 밤에 비바람 몰아치듯 風晦雨冥,온 우주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宇內茫茫.현철한 만큼 준수하고 호매하였지만 賢似俊邁,실은 오직 학문을 좋아하셨을 뿐이라 實惟好學,간재 선생님께 존경과 신앙으로 尊信艮翁,마음의 삼년 상복 입은 후에는 心喪三朔[期]학우들 함께 모여 강습하며 誓將麗澤,서로 나눠 보태주기를 서약하셨지요.45) 交收其益.인재를 육성하여 선으로 인도하는 것은 育材式穀,이승과 저승에 간격이 있지 않으니 無間幽明,바라건대 가만히 저희를 도우시어 庶垂冥佑,좋은 성취 있게 해주십시오. 俾克有成.아, 슬픕니다. 嗚呼哀哉.흠향하소서 尙饗! 維歲次乙丑八月乙巳朔二十九日癸酉, 侍生扶安金澤述謹具菲奠, 哭告于故國子先生志山金公之靈, 曰: 尊華攘夷, 天經地緯, 竭忠報國, 人臣大義, 相古偉人, 疇不由玆? 粤在○長陵丙丁之時, 惟仙淸翁盡道華忠, 式至于今, 民賴鉅功。 嗚呼惟公, 繩祖之迹, 夷虜侵陵, 毁我衣髮, 仗義起旅, 有赫其烈。 漢鼎旣顚, 一心興復, 遠書巴里, 靡悔燕獄, 忠旣至矣。 尊攘亦然, 山河雖燼, 靈光猶尊, 孰謂一曙, 天不憖賢, 凡有血氣, 痛若懿親。 嗟我士林, 重爲道悲, 扶鄒魯風, 嚴蘇湖規, 綿延線陽, 昏衢燭紅, 今焉以後, 于誰之從? 嗚呼! 以我無狀, 荷公不捨, 光生銘螭, 價增顧馬, 先素後繪, 培根食實, 勉之以德, 余所服述, 凜凜斥邪, 謙謙下士, 風議動人, 余所感喜, 環求此世, 無處更覿, 淚之傾河, 慟之彌臆。 文之將喪, 長德幷亡, 世變之極, 儒流亦狂, 風晦雨冥, 宇內茫茫, 賢似俊邁, 實惟好學, 尊信艮翁, 心喪三朔3), 誓將麗澤, 交收其益, 育材式穀, 無間幽明, 庶垂冥佑, 俾克有成。 嗚呼哀哉! 尙饗! 김복한(金福漢) 1860~1924, 본관은 안동,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을 하였으며, 충남 홍주에서 1895년과 1906년에 항일의병을 일으키고, 1905년에는 을사오적 참소의 상소를 올리고,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서 서명을 지휘하였다. 장릉(長陵) 인조(仁祖)와 비(妃) 한씨(韓氏)의 합장릉(合葬陵)으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다. 병자년……변란 1636년(인조14) 12월에서 1637년 1월 사이에 후금의 홍태극(洪太極)이 침략해와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였던 병자호란을 말한다. 선원 김상용(仙源金尙容) 1561〜163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ㆍ풍계(楓溪)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청음 김상헌(淸陰金尙憲) 1570〜1652)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이다. 김상용의 아우이다. 병자호란 당시 예조 판서로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파리에……않으셨습니다 김복한은 영남의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호서 유림을 대표해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이 심하여 석방되었다. 산하가……높았는데 나라는 망했지만 김복한의 충절은 빛난다는 말이다. 원문의 영광(靈光)은 영광전(靈光殿)을 가리키는데, 여러 차례나 전란을 겪었어도 이 궁전만은 완전하게 보존되었다는 내용이, 한나라 왕연수(王延壽)의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 서문에 나온다. 하늘이……줄을 김복한이 운명했다는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원로 한 분을 아껴 남겨 두어서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고 하였다. 호원(胡瑗)의 지켜 소호(蘇湖)는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의 교수를 지낸 송(宋)나라 호원(胡瑗)을 가리킨다. 호원이 교육을 관장하면서 경의(經義)와 사무(事務) 두 과(科)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그 제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당시에 호학(湖學)이라고 일컬었다. 송나라 장자(張鎡)가 지은 《사학규범(仕學規範)》의 〈호안정언행록(胡安定言行錄)〉에 "안정(安定) 선생이 경력(慶曆) 연간부터 소주와 호주에서 20여년 간 교육하였는데, 제자의 예를 갖춘 자가 전후로 수천 명이었다. 당시에 모두들 사부(辭賦)를 숭상했는데, 호학만은 경의와 사무를 우선으로 하였다. 학교 안에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治事齋)를 두었는데, 경의재에는 경학에 소통하고 기국(器局)이 있는 자가 기거하였고, 치사재에서는 사람마다 각각 한 가지 일을 전공하고 또 한 가지 일을 겸하였다.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에서 호학에 인재가 많다고 하였고, 실제로 과거에서 높은 점수를 많이 맞았으며 정치에 기용된 자가 많았다." 하였다. 명(銘)을……나고 김택술의 십대조 죽계 김횡(竹溪金鋐)을 위한 비문을 김복한이 지어준 덕분에 조상과 가문이 빛나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志山集 參奉竹溪公鈜遺墟碑》참조. 말을……올랐습니다 김복한이 인정해준 덕분에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말이다. 백락은 춘추 시대 진(秦)나라 사람으로 말을 잘 알아보았다.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에 "어떤 사람이 말을 팔려고 하였으나 3일을 저자에 갖다 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백락이 가서 한 번 쳐다보니, 그 말의 값이 10배로 뛰었다.[伯樂乃環而視之, 去而顧之, 一旦而馬價十倍。]"라고 하였다. 먼저……채색하고 공자(孔子)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 바탕보다 뒤에 하는 것이니라.[繪事後素]"라고 한 것을 원용한 표현이다. 마음의……서약하셨지요 스승 전우의 탈상 후 사우(士友)들과 다시 모여 강학하기로 다짐하였었다는 말로 해석된다. 원문의 이택(麗澤)은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 《주역(周易)》〈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간재선생을 위한 마음의 복상 기간은 3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원문 '三朔'을 '三期'로 고쳐 해석하였다. 전우는 1922년, 김복한은 1924년에 별세하였다. 朔 문자의 의미 관계상 '期'의 오자인가 의심됨.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춘우정22) 김공께 올리는 제문 【기미년(1919)】 祭春雨亭金公文【辛亥】 아아, 김공께서는 嗚呼惟公,인산(仁山)23) 문하의 고족 제자로서 仁門高足,호서의 으뜸가는 인재였으니 湖右巨擘,그 효성은 순수하였고 有純其孝,그 학문은 실다웠으니 有實其學,일에는 순(舜)과 도척(盜跖)을 구분하고24) 功分舜跖,마음은 헌원(軒轅)과 제곡(帝嚳)을 좇았습니다. 心追軒嚳.저기 바라뵈는 시산(詩山)의 남쪽25) 瞻彼詩南,그 집의 이름을 춘우(春雨)라 하였는데 春雨其室,벗들이 멀리서도 찾아오니 有朋自遠,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도 말하였네26) 宣聖攸樂,아름다운 갓과 옥패가 숲을 이루고 林林冠佩,선비들 도포 자락이 펄펄 날리며 濟濟縫掖,넉넉히 자신을 채운 후 남에게 끼쳐주니 裕己及人,그 베푼 혜택은 넓고 넓었습니다. 厥施斯博.그런데 어찌하여 나라의 운세가 夫何邦運,하늘의 복록을 받지 못하고 遭天不祿,섬나라 오랑캐가 크게 일어나 島奴孔熾,이리저리 멋대로 날뛰더니 肆其猖獗,우리의 영토를 빼앗고 旣奪我疆,장차 우리를 잡아먹으려 하면서 將食我肉.인의를 가장한 간사한 무리들 大奸若仁,덕 훌륭한 노인들을 도와준다며 恤我耆德,억지로 금전을 보내주었는데 勒餽以金,공 또한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公亦其一,모욕의 물건 거절한 不受嗟來,제나라 사람의 높은 절기27)와 齊人高節,도적의 음식을 토해낸 反哇盜食,원정목을 가상히 여기셨는데28) 亦嘉旌目,하물며 일제의 구제금(救濟金)을 矧玆周金,어찌 다시 여기에 견주겠습니까? 又何同日?대의(大義)를 지닌 공께서 以公大義,준엄한 말씀으로 물리치시니 嚴辭退斥,저들이 처음에는 회유하다가 彼初遜誘,마침내는 협박을 가했습니다. 竟加脅迫.의리도 지키고 목숨도 유지한 사람은 熊魚兼全,상고 이래로 드물었으니29) 邃古難得,취할 것과 버릴 것을 결단함에 取舍一決,하늘에도 땅에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俯仰無怍.초나라의 굴원은 維荊有屈,상수에 몸을 던졌고30) 身沈湘澤,명나라의 유종주는 維明有劉,20일 동안 단식하였습니다.31) 兩旬絶粒,온 나라의 사람들 凡在邦人,모두가 슬퍼하고 罔不悲怛,어리석은 저 오랑캐들도 蠢彼頑夷,그 의리에 감복하였습니다. 亦知感服.아, 보잘것없는 저는 嗟余無狀,외람되게도 공에게 인정받아 猥遂荊識,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니 久承謦欬,공은 저의 본보기셨습니다. 作我矜式,저는 게다가 공의 손자와 况與賢抱,간절한 벗의 정의가 있습니다.32) 情在偲切.거친 글과 소박한 제물로 蕪文菲奠,감히 한 차례 곡하오며 敢展一哭,지난날을 떠올리고 지금에 상심하여 念昔傷今,두 손 가득 눈물이 흐릅니다. 有淚盈掬.아, 공의 혼령께서는 嗚呼公靈,천제의 곁을 오르고 내리면서도 陟降帝側,세상사에 분노하는 한 마음은 憤世一念,생사가 갈렸다고 어찌 다르겠습니까 死生豈別,저들의 죄가 세상에 가득 찼으니 彼罪貫盈,하늘이 반드시 벌주어 죽일 것입니다 天必誅殛,눈물로 천궁에 하소연하고 泣訴閶闔,여러 번 반복하여 진달하면 反覆陳達,천제도 공의 정성에 감동하고 帝感公誠,번쩍 큰 노여움 발하여서 一怒斯赫,저들의 종자를 다 없애고 殲厥種類,저들의 소굴을 쓸어버리며 擣厥巢穴,우리 생민을 도우면서 佑我民生,우리 영토를 광복하리니 復我疆域,저승과 이승의 큰 기쁨이 幽明一快,끝이 없지 않겠습니까? 曷有其極?높으신 밝은 혼령께서는 尊靈不昧,저의 이 마음을 살펴주소서! 鑑玆衷赤. 嗚呼惟公, 仁門高足, 湖右巨擘, 有純其孝, 有實其學, 功分舜跖, 心追軒嚳。 瞻彼詩南, 春雨其室, 有朋2)自遠, 宣聖攸樂, 林林冠佩, 濟濟縫掖, 裕己及人, 厥施斯博。 夫何邦運, 遭天不祿, 島奴孔熾, 肆其猖獗, 旣奪我疆, 將食我肉。 大奸若仁, 恤我耆德, 勒餽以金, 公亦其一, 不受嗟來, 齊人高節, 反哇盜食, 亦嘉旌目, 矧玆周金, 又何同日? 以公大義, 嚴辭退斥, 彼初遜誘, 竟加脅迫, 熊魚兼全, 邃古難得, 取舍一決, 俯仰無怍。 維荊有屈, 身沈湘澤, 維明有劉, 兩旬絶粒, 凡在邦人, 罔不悲怛, 蠢彼頑夷, 亦知感服。 嗟余無狀, 猥遂荊識, 久承謦欬, 作我矜式, 况與賢抱, 情在偲切, 蕪文菲奠, 敢展一哭, 念昔傷今, 有淚盈掬。 嗚呼公靈, 陟降帝側, 憤世一念, 死生豈別, 彼罪貫盈, 天必誅殛, 泣訴閶闔, 反覆陳達, 帝感公誠, 一怒斯赫, 殲厥種類, 擣厥巢穴, 佑我民生, 復我疆域, 幽明一快, 曷有其極? 尊靈不昧, 鑑玆衷赤。 춘우정 김영상(金永相)을 말하며, 1836∼1911, 본관은 도강(道康), 자는 승여(昇如), 호는 춘우정(春雨亭)‧오계(鰲溪)이고, 초명은 김영조(金永朝)이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으로 인산 소휘면(仁山蘇輝冕)의 제자였고, 최익현(崔益鉉)의 항일의병에 참여하고,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였으며, 군산감옥(群山監獄)에서 단식하다 별세하였다.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을 말하며, 1814~1889,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여(純汝), 호는 인산(仁山)이다. 익산 출신으로, 조부 소수구(蘇洙榘)의 학업을 이었고, 홍직필(洪直弼)께 사사하였다. 일에는……구분하고 선(善)과 이(利)의 구분을 알았다는 말이다. 순척(舜跖)은 순 임금과 도척(盜跖)을 가리킨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순 임금과 도척의 구분을 알고 싶은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단지 이익을 탐하고 선행을 좋아하는 그 사이에 있을 뿐이다.[欲知舜與跖之分, 無他, 利與善之間也。]"라고 하였다. 시산(詩山)의 남쪽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를 말한다. 벗들이……말하였네 김영상의 학덕(學德)에 감복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이다. 공자가 "벗이 먼 데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라고 하였다. 《論語 學而》 제나라……절기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크게 기근이 들어 길 가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던 이가 한 굶주린 사람에게 "불쌍도 해라, 와서 먹어라.[嗟來食]"라고 하자, 그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면서 "나는 불쌍하다면서 무례하게 주는 음식을 받아먹지 않았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予唯不食嗟來之食, 以至於斯也。]" 하며 음식을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禮記 檀弓》 도적의……여기셨는데 무심코 일제가 제공한 것을 받았다가 사태를 깨달은 후에는 되돌려 보낸 것을 말한다. 옛날에 원정목(爰旌目)이 굶주려 길에 쓰러졌다가 먹여주는 음식을 먹고 정신을 차린 후 상대가 악독한 도적임을 알고는 먹은 음식을 게워냈다는 이야기가 있다.《列子 說符》 의리도……드물었으니 맹자가 "물고기도 먹고 싶고 곰 발바닥도 먹고 싶지만 모두 먹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며, 생명도 보전하고 싶고 의리도 취하고 싶지만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는데, 웅어(熊魚)는 이 말을 원용하였다. 여기서는 김영상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을 말한 것이다. 초나라……투신하였고 김영상이 만경강에 투신하였던 것을 비유하였다. 굴원(屈原)은 초나라의 정치가이다. 근상(靳尙)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뒤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다. 명나라……단식하였습니다 김영상이 군산 감옥에서 단식한 것을 비유하였다. 유종주(劉宗周, 1578〜1645)는 명나라 말기의 충신으로, 자는 기동(起東), 호는 염대(念臺)ㆍ극념자(克念子)이다. 남명(南明)의 도읍이 함락된 뒤 단식하다가 23일 만에 죽었다. 간절한……있습니다 김영상의 손자 김환각(金煥珏)와 사우의 관계임을 말한 듯하다. 김환각은 김복한(金福漢)에게도 조부의 비문을 청하기도 하였다.(《志山集 春雨亭金公永相墓碣銘》) 원문의 '시절(偲切)'은 '절절시시(切切偲偲): 간절하게 권면하다'의 줄임말인데, 공자가 "붕우 간에는 간절하게 책선하고 형제간에는 화기애애해야 한다.[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 한 것을 인용하였다. 《論語 子路》 朋 원문은 明인데 '朋'의 오자로 보아 고쳐씀.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덕천서사 규약 【1925년】 德川書社規約 【乙丑】 거처'거(居)'는 내 몸을 두는 것이고, '처(處)'는 내 몸을 처하는 것이다. 내 몸은 천지가 낳고 부모가 물려주신 것이니, 난잡하고 더러운 데 처하여 정숙(整肅)하고 정결(淨潔)한 도를 버린다면, 자신의 몸을 게으르게 하여 상제와 어버이의 명을 더럽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몸을 병들게 하여 상제와 어버이의 은혜를 끊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거처를 장엄하게 하지 않는 것을 불효427)라 하였고, 율옹(栗翁 이이(李珥))은 거처는 병들지 않을 정도면 된다428)는 것으로 문인(門人)을 가르쳤으니, 학문에 뜻을 두고 수신(修身)하는 자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매일 일찍 일어나 실당(室堂)을 쓸고 닦으며, 창과 벽의 먼지를 털고 뜰과 계단에 물을 뿌려 깨끗이 하되 모두 힘써 정결 하게 하라.사람마다 정해진 위치가 있으니, 업무에 종사할 때나 한가하게 지낼 때나 손님을 접대할 때, 항상 그곳에서 머물러 있던 자리를 떠나거나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궤안(几案), 서책(書冊), 지연(紙硯), 의건(衣巾)과 기타 집물(什物)은 가지런히 정돈해서 거두어 두되 각각 부류에 따라 각각 일정한 곳에 둔다.각각의 사람들이 신발을 벗을 때에는 반드시 정해진 곳에 두되 1렬로 가지런히 늘어놓고【동쪽을 위로 한다.】, 잘못하여 타인의 신발을 신지 말며, 신발 없이는 계단이나 섬돌을 다니지 말라.종이는 한 조각 남은 것과 문드러진 작은 것일지라도 삼가 땅에 버리지 말라.【글자가 적혀 있는 종이는 더욱 삼가라.】 떨어뜨린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수습하고, 사용할 수 없으면 이를 소각하라.붓과 먹으로 창과 벽을 더럽히거나 침과 콧물로 계단과 섬돌을 오염시키는 등속은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위의공경으로 몸을 간직하면 위엄이 있어 남들이 절로 두려워하고, 예의가 있어 남들이 절로 본받으니 이를 '위의(威儀)'라 이르고, 긍장(矝莊 조심스럽고 엄숙함)하고 수식(修飾 외면을 꾸밈)하여 반드시 남들이 두려워 본받게 하려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밖을 제재(制裁)하여 중심(中心)을 기르는 것이니, 용모와 말투는 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덕(實德)에 힘쓰는 자는 반드시 위의를 삼가야 하니, 볼만한 위의가 없으면 반드시 덕이 없는 자이다.이 때문에 공자는 후중(厚重)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는 것을 학문이 견고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으니429),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덕과 학문의 부험(符驗)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화(禍), 복(福), 수(壽), 요(夭)가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례(儀禮)》에 "너의 위의를 공경하면 영원히 큰 복을 받을 것이다.430)"라고 하는 것을 관례(冠禮)를 올리는 자에게 빌고, 북궁문자(北宮文子)는 영윤(令尹)이 위의가 없기에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았다고 했으니431),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매일 일찍 기상하여 세수하고 머리를 빗으며 의관을 갖추고, 응당 행해야 할 예를 행하며 각자 자리에 나아가 업무에 종사하라.제생(諸生 여러 유생)은 반드시 폭이 넓고 소매가 있는 상의(上衣)를 입되, 질병, 복역 및 취침할 때가 아니면 벗지 말라.앉을 때 무릎을 꿇고 앉거나 반좌(盤坐)【반좌는 바로 편히 앉는 것이니, 두 발을 무릎 아래로 거둬들여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외에 다른 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깨와 등을 세워 곧게 하고 기대거나 구부정한 자세를 없게 한다. 서 있을 때는 바르고 곧게 하며 두 손을 맞잡고 발을 나란히 하여 짝다리 짚는 습관을 없게 한다. 다닐 때는 가볍게 하지 말고 느릿느릿하지 말며, 아울러 팔을 흔들고 뒷짐을 지며 좌우를 돌아보지 말라.말을 할 때는 차분하고 세심하게 분명히 하고, 빠르거나 고음으로 하지 말며, 또한 저음이나 분명하지 않게 하지 말라. 동료들 사이에 섞여 장난치거나 웃지 말며, 속어[俚語]와 패담(悖談)432)을 하게 되면 결코 선비의 부류가 아니다.남초(南草 담배)의 폐해는 선배들이 자세히 논하였으니, 독서하는 자는 더욱 통렬하게 끊어야 한다. 거만한 습관으로 성현을 대하고, 악취를 사장(師長)에게 맡게 하며, 불사르는 것을 서책에 이르게 하는 것은 모두 잠시라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여기서는 우선 바로 지금 급한 것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그 자세한 것은 《예기》 〈곡례(曲禮)〉, 〈소의(少儀)〉, 〈옥조(玉藻)〉, 《관자(管子)》 〈제자직(弟子職)〉 등의 편을 스스로 일일이 준행(遵行)해야 한다.예수예(禮)라는 것은 하늘에서 나와 사람에게 확립된 것이니, 예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잠시도 몸에서 버릴 수 없으니, 조정에는 조정의 예가 있고 향당에는 향당의 예가 있으며, 가정에는 가정의 예가 있으니, 학사(學舍)에 어찌 학사의 예가 없겠는가. 사장(師長), 생도(生徒), 장유(長幼), 관동(冠童)433)이 서로 함께 하는 예가 있어야 한다.또 생각건대 "배우는 것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인데 오래도록 부모를 찾아뵙지 않았다.434)"라고 한 것은 양원종(陽元宗 양성(陽城))이 경계한 것이고, "수십 권의 책을 읽고 어른을 능멸하고 홀대한다.435)"라고 한 것은 안지추(顔之推)436)가 미워한 것이니, 이른바 예라는 것을 학사에서 부지런히 하고 가정과 향당에서 소홀히 한다면 옳겠는가. 경건한 마음으로 경계하고 힘써 노력하라!매일 일찍 일어나 제생(諸生)은 사장(社長)에게 읍례(揖禮)를 행하고, 또 반을 나누어 서로 마주하여 읍하되 저녁에도 이처럼 한다.【의식은 홀기에 보인다.】 하룻밤 이상 묵으면서 학사(學舍)에 이르지 않으면 진퇴할 때 모두 사장에 절을 하고 단일(單日)이면 읍을 한다. 사장이 일이 있어 출입할 때는 제생이 절을 하거나 읍을 하는데, 또한 하룻밤 이상 묵을 때와 단일을 기준으로 삼는다. 학업을 함께 하는 사람이 하룻밤 이상 묵어 서로 보지 못하면 모였을 때와 헤어질 때 모두 서로 읍을 한다.사장에게 절하거나 읍할 때 1렬로 질서 있게 동쪽 가에 서서【사람이 많으면 겹줄로 선다.】 일제히 공경을 다하여 혹시라도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존장(尊長) 앞에서도 그러하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 10년 이상 차이가 나면 특별히 공경의 예를 행하되 언어는 동등하게 한다. 동자(童子)는 관자(冠者)와 나이가 서로 비슷할지라도 감히 호명하여 벗으로 교제하지 못한다.학사에서 묵은 자는 다음 날 아침에 귀가하여 반드시 부모에게 절을 해야 하니, 혹여 전에 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미적거리면서 실제로 하지 않은 일이 없게 하라.존장(尊長)을 뵈면 학사와 다른 곳을 가리지 않고 공경과 겸손을 다하되 조금도 거만한 태도가 없게 하며, 평소에 절을 드리는 곳이 길 위일지라도 절을 한다. 【세속에서 간혹 도로 위라고 하여 예를 생략하는데 이는 매우 옳지 않다.】빈객이 오면 공손히 삼가 절하고 읍하며, 맞이하고 보내는 절차는 따뜻하고 관대하게 인사를 하며, 말을 주고받을 때 학문이 있어 예의바른 사람이면 강론하고 질문하여 유익함을 취하고, 심지어 평범하게 여관을 하는 사람과 상공(商工)인이 들러 주더라도 감히 조금도 오만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교도붕우(朋友)가 오륜(五倫)에 있는 것은 오행(五行)의 토(土)와 같아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의 인륜이 이를 기다려 펴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는 인도(人道)의 중요함이 되는 이유이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벗에 의지하지 않고 이룬 자가 없으니, 이러한 뜻을 안다면 지금 사람들이 너무 가볍게 벗을 취하여 이를 의지하여 자기를 이루지 못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공자가 말하기를 "유익한 벗이 셋이 있다.437)"고 하였고, 증자가 말하기를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438)"고 하였으며, 맹자가 말하기를 "책선은 붕우의 도이다.439)"고 하였으니, 이러한 뜻을 안다면 지금 사람들이 서로 사귀는 것이 바른 방도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대들이 뜻을 둔 바는 도(道)이고 구하는 바는 인(仁)이니, 성기(聲氣)가 감응하고 풍운(風雲)이 모여 따르듯이 서로 의지하는 것이 가볍다고 이를 수 없다. 안물(顔勿)440), 증성(曾省)441), 녹법(鹿法)442), 남약(藍約)443)을 아침에 본받아 따르고 저녁에 익혀 성대하게 외우면 그 도가 없다고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어려운 것은 서로 겸손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오랫동안 공경하는 것인데, 요점은 '성실[誠]' 한 글자에 달려 있기에 조금이라도 성실하지 못함이 있으면 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나이가 많으면서 학문이 높은 자와 나이가 적으면서 학문이 낮은 자 및 나이가 서로 비슷하면서 학문에 고하(高下)가 있는 자는 서로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아야 하니, 그러면 서로 발전하여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여 나이는 많으나 학문이 낮은 자와 나이는 적으나 학문이 높은 자가 서로 함께하면 매번 어긋나서 서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근심하니, 반드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배운 것을 믿고 스스로 높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벗하는 것은 그 덕을 벗하는 것이고 알아주는 것은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니, 반드시 마음속에 쌓은 담을 툭 터놓고 가식(假飾)하지 않아야 한다. 남에게 선행이 있으면 내면으로 진실로 사모하고 기뻐하여 다만 면전에서 지나치게 칭찬하지 말고, 잘못이 있으면 성심(誠心)으로 면전에서 깨우쳐주고 물러나서 남에게 말하지 말라. 자기에게 선행이 있어 남들이 칭찬해주면 지나치게 겸손하여 남의 호의를 저지하지 말고, 잘못이 있어 남이 이를 바로잡아주면 겉으로 따르면서 속으로 싫어하여 남의 덕의(德意)를 저버리지 말라.모이면 이미 무리를 지어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의 성품이 어떻게 다 똑같겠는가. 항상 자신의 일에 때때로 불만이 있다면, 남의 일에 어찌 마음을 다 할 수 있겠는가. 협심(協心)해야 하니, 이른바 "아름다워 포용하는 것이 있다.444)"라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과정445)여사인(呂舍人)446)이 말하기를 "학업은 반드시 엄격히 과정을 세워야 한다.447)"고 하였고, 한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이 말하기를 "학업은 근면함에서 정진(精進)되고 노는 데서 황폐해진다.448)"고 하였으며, 공자가 말하기를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을 대업(大業)이라고 이른다.449)"고 했으니, 오직 엄격하고 근면해야 풍부하게 소유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다.천지는 쉼 없이 지극히 성실하기에 조화(造化)가 운행되고, 성인은 쉼 없이 부지런히 힘써 노력하기에 대덕(大德)이 확립되거늘, 하물며 우리들에 있어서이겠는가. 아, 《주역》에 "힘쓰고 힘쓴다.450)"고 하였고, 《중용》에 "독실하다.451)"고 하였으며, 《서경》에 "부지런히 한다.452)"고 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은 본받을 만하다. 강송(講誦)과 기사(記寫 기록하여 씀)의 종류는 수업에 없어서는 안 되기에 아래와 같이 방식을 정했다.매일 인정(寅正 오전 4시)에 기상하여 의관을 갖추고 묘시에 글을 배우며, 진초(辰初 오전 7시)에 아침 식사를 한다. 진정(辰正 오전 8시)에 글자를 쓰고 사시에 독서하며, 오초(午初 오전 11시)에 휴식하면서 토론하고 오정(午正 낮 12시)에 독서하며, 미초(未初 오후 1시)에 점심을 먹는다. 미정(未正 오후 2시)에 글자를 쓰고 신시에 독서하며, 유초(酉初 오후 5시)에 휴식하면서 토론하고 유정(酉正 오후 6시)에 독서하며, 술초(戌初 오후 7시)에 저녁 식사를 한다. 술정(戌正 오후 8시)과 해초(亥初 오후 9시)에 혹은 글을 논하고 혹은 예를 익히며, 혹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혹은 시문을 짓되 각자 편의대로 하며, 해정(亥正 오후 10시)에 독서하고 취침한다.【가을과 겨울에는 신시에 저녁 식사를 하고, 유시에 글을 논하고 예를 익히며,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문을 지으며, 술시에 독서하고 해시에 취침한다.】매일 각자 독서하는 곳으로 나아가 과정 세우는 것을 빠뜨리지 말고, 적어도 여러 번 읽어서【적어도는 백번 이하가 아니다.】 반드시 외워야 한다.매달 보름과 그믐에 강을 행하는 사장(社長)은 보름 동안의 과정 가운데서 각각 1장(章)을 뽑아 통(通), 약(略), 조(粗), 불(不)453)을 정하여, 음(音)과 의(義)를 모두 통한 자는 상(上)으로, 의를 통한 자를 그다음, 음을 통한 자를 그다음으로 한다.【강규에 별도로 보인다.】 매달 7일에 6일 치의 과정을 연속해서 읽고 14일, 22일, 29일에도 모두 이처럼 하고, 작은달에는 28일에 5일 치의 과정을 연속해서 읽는다.한 책을 모두 읽을 때마다 며칠 동안 복습하여 읽고 사장 앞에서 외운다.관자(冠者)는 7일 안에 장문(長文) 1편을 짓고, 매달 4차례 숙과(宿課)를 연속해서 읽으며, 날마다 사장 앞에서 근정(斤正)454)한다. 동자(童子)는 매일 몇 줄의 일기를 쓰되 하지 뒤 처서 앞에까지 이른다. 한창 더위가 심할 때 관자는 송독(誦讀)을 줄이고 저술을 더하며 3일 안에 장문 1편을 짓고, 동자는 이전대로 한다.독서할 때는 반드시 바르게 앉아 몸을 흔들지 말고 천천히 뜻을 생각하면서 읽으며, 높지도 낮지도 않게 명백하게 소리를 내어 읽되 반드시 본음대로 해야 한다. 글자를 쓸 때는 반드시 해서체로 바르고 전중(典重 전아하고 장중함)하게 하며, 가볍고 뾰족하거나 거칠고 조잡하게 하지 말며, 반드시 육서의 본형(本形)을 준수해야 한다. 작문할 때는 반드시 의리가 통창(通暢)하고 의취(意趣)가 심장해야 하며, 기발한 것을 숭상하거나 화려하게 하지 말라.휴양《중용》에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455)"고 하였고, 《논어》에 "시(詩)에서 흥기시키고 악(樂)에서 완성한다.456)"고 하였으니, 담일(湛一)457)하여 밝게 깨어있어 고요한 것은 본체의 중이 고요할 때 확립된 것이고, 감발(感發)하여 화순(和順)한 것은 시와 악의 효과가 덕성(德性)에 드러난 것이다.그러나 후대에 시와 악을 폐지한 때로부터 속사(俗士)가 정(靜) 공부에 어두워 힘은 분변하고 질의하며 차자(箚子)를 베끼는 데 지치고, 마음은 혼매하고 어지러운 데로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밤이 새도록 끊임없이 애쓰지만 전혀 본원(本原)을 맑게 하고 온갖 변화에 수응하며 우유함영(優遊涵泳)458)하여 그 지극한 공효에 나아감을 보지 못하니, 너무나 한탄스럽다.이제 원하건대 제군이 부지런히 학문을 닦다가 힘들고 불안한 여가와 오랫동안 틀어박혀 답답하고 괴로운 뒤에, 간혹 고요한 곳에서 눈을 감고 마음을 편안하고 깨끗이 하여 허명(虛明)하고 순일(純一)한 본체를 세우며, 혹은 높은 곳에 올라가 바람을 쐬고 시가를 창화(唱和)하여 시원하게 씻어 없애는 공효를 찾아보아라.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독서 후에 각자 정좌(靜坐)와 징심(澄心) 공부를 익혀야 하니, 그 방법은 가볍게 비춰보고 돌아보며459) 마음을 화평하게 하는460) 것이 바로 이것이다.【정자는 "한나절은 정좌하고, 한나절은 독서 하라.461)"고 가르쳤으니, 정 공부에 뜻을 둔 자가 어찌 다만 두 차례 뿐이겠는가.】매달 보름과 그믐에 강(講)에 응한 뒤나, 7일, 14일, 22일, 29일에 연속해서 숙과(宿課)를 읽은 뒤나, 매일 저녁 식사를 한 뒤에 간혹 산에 올라 바람을 쐬기도 하고, 뜰앞에서 달을 보며 걷기도 하면서 아울러 〈관저(關雎)〉와 〈녹명(鹿鳴)〉462), 주자의 〈초은조(招隱操)〉463), 퇴계의 〈도산육곡(陶山六曲)〉464), 율곡의 〈석담구곡(石潭九曲)〉465) 등을 읊으며, 또 각자 시를 짓고 그중에서 매우 맑은 것을 읊는 것도 좋다.강규강생(講生)은 일제히 모여 도포나 넓은 소매가 있는 두루마기를 입는다. 당(堂)의 북쪽 벽 아래에 남향으로 강장(講長)의 자리를 설치하고, 동쪽 벽 아래와 서쪽 벽 아래에 북쪽을 윗자리로 하여 강생의 자리를 설치한다. 강생은 뜰 안에서 서로 읍례를 행하고 예를 마치면 강장은 자리에 올라서 앉고, 강생도 당에 올라 차례대로 나누어 동쪽과 서쪽으로 나아가 자리에 올라앉는다. 숙직하는 날에는 강장의 오른쪽 구석에 앉아서 강록(講錄)을 쓰고 책상과 책자를 강장 앞에 둔다.강생은 차례대로 강장 앞으로 나아가 읍을 하고, 옷매무새 가다듬으며 바르게 앉는다. 강장은 보름의 과정(課程) 가운데서 1장(章)을 뽑고 배강(背講)466)을 명한다. 강생은 얼굴에 부끄러움, 마음에 두려움, 목소리에 떠듬거림, 몸에 흔들림이 없이 편안히 낭랑하게 외우되, 반드시 명백하고 맑게 해야 한다. 강장이 듣는 것을 마치고 문의(文義)를 물으면 강생은 아는 대로 대답한다. 또 의심스럽거나 모르는 곳에 대해 질문하면【곁에 있는 자도 참여하여 함께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이 허용된다.】, 강장은 자세히 깨우쳐주고 바로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을 정한다.음(音)과 의(義)에 모두 통한 자는 통으로 하고, 의에만 통한 자는 그다음으로, 음에만 통한 자는 그다음으로 하되, 모두 략으로 하며, 어렵게 외워 많이 틀린 자는 조로 하고, 외우지 못한 자는 불로 한다. 강생이 또 읍하고 물러난다. 숙직하는 날에은 각각의 사람들이 외웠던 장을 강록에 기록하되 통, 약, 조, 불을 함께 기록하고, 매번의 강록을 수렴하여 훗날의 평가를 대비하며, 각각의 사람들의 참여와 불참, 통, 약, 조, 불의 많고 적음으로 학업의 근만(勤慢)과 진퇴(進退)를 징험한다. 居處居者居吾身也, 處者處吾身也. 吾身乃天地之所生, 父母之所遺, 若處乎難亂塵穢之中, 而棄其整肅潔淨之道, 非惟慢其身而褻帝親之命, 亦病其身而絶帝親之恩也. 故孔子以居處不莊爲不孝, 栗翁以居處不病訓門人, 凡志學修身者, 可不戒哉?每日早起, 掃拭室堂, 揮拂牕壁, 灑除庭階, 皆務令淨潔.每人各有定位, 凡於執業, 燕居, 對賓, 恒於其處, 不得離次易位.几案, 書冊, 紙硯, 衣巾, 其他什物, 整齊收置, 各從部類, 各有常處.各人脫履, 必有定處, 一列齊排【東上.】, 毋得誤穿他人屨, 毋得無屨行階砌.紙物雖零片爛寸, 愼勿棄地.【字紙尤愼.】 如有遺落, 隨輒收拾, 不可用則焚之.墨筆点牕壁唾洟汚階砌之類, 切宜戒之.威儀敬以持身, 則有威而人自畏, 有儀而人自象, 是之謂威儀, 非謂莊矝, 修飾, 必欲人之畏象也. 蓋制乎外, 養其中也, 容貌辭氣, 德之符也. 故務實德者必愼威儀, 威儀無觀, 必其無德者也. 是以孔子以不重不威爲學不堅固, 可不謹乎? 不惟爲德學之符驗, 亦禍福壽夭之所以分也. 故《儀禮》以"敬爾威儀, 永受胡福"祝冠者, 北宮文子以令尹之無儀, 知其不返, 可不尤謹乎?每日早起, 盥櫛衣冠, 行應行禮數, 各就座執業.諸生必著廣袖上衣, 非有疾病, 服役及就寢時, 勿脫.坐則跪坐盤坐【盤坐卽便坐, 兩足斂入膝下, 使不見.】外, 不許他法. 肩背竦直, 去倚俯之態. 立則平正端直, 拱手比足, 絶倚跛之習. 行則勿輕遽勿緩慢, 幷勿掉臂負手, 左右顧瞻.言語要安詳分明, 勿疾高, 亦勿低迷. 儕輩間, 勿雜以戱笑, 至於俚語悖談, 決非士類.南草之害, 前輩論之詳矣, 至於讀書者, 尤當痛絶. 慢習之對聖賢, 惡臭之觸師長, 焚爇之及書冊, 皆不可頃刻之近者.凡此姑以目下所急者言, 其詳則〈曲禮〉, 〈少儀〉, 〈玉藻〉, 〈弟子職〉等篇, 自當一一遵行.禮數禮者, 出乎天而立乎人者也, 無禮則非人. 故不可須臾去身, 在朝廷 有朝廷之禮, 在鄕黨有鄕黨之禮, 在家庭有家庭之禮, 在學舍, 豈無學舍之禮乎? 宜其有師長, 生徒, 長幼, 冠童, 相與之禮矣. 且念"學爲忠孝, 久不省親", 陽元宗所戒, "讀數5)十卷書, 凌忽長者.", 顔之推所惡, 所謂禮者, 若謹於學舍而忽於家庭鄕黨, 其可乎哉? 宜虔心戒勉.每日早起, 諸生行揖禮于社長, 又分班對揖, 夕亦如之.【儀見笏記.】 經宿以上未至學舍, 則進退時, 皆拜于社長, 單日則揖之. 社長有事出入, 或拜, 或揖, 亦以經宿, 單日爲準. 同業人經宿以上不相見, 會別時, 皆相揖.凡拜揖于社長, 一列序立東上,【人多則重行.】 一齊致敬, 無或錯亂後先.【尊長前亦然.】 同業人十年以上, 特加敬禮, 言語有等. 童之於冠, 雖齒相敵, 不敢呼名通朋.宿于學舍者, 翌朝歸家, 必拜其父母, 無以前或不行, 因循不果.凡見尊長, 不分學舍與他所, 極其敬遜, 毫無慢態, 平日納拜處, 雖路上亦拜之.【俗或以道路上除禮, 甚不可也.】賓客之來, 恭勤6)乎拜揖, 迎送之節, 溫款乎寒暄, 酬酌之際, 若是學問文雅人, 則又講論問質以取其益, 至於尋常逆旅工商之見過者, 亦不敢少存慢想.交道朋友之在五倫, 如五行之土, 父子, 君臣, 夫婦, 長幼之倫, 無不待是而敍, 此所以爲人道之重, 而自天子至於庶人, 未有不須友而成者也, 知此義, 則知今人取友之太輕, 而不以資之而成己也. 孔子曰: "益者三友.", 曾子曰: "以友輔仁.", 孟子曰: "責善, 明友之道.", 知此義, 則知今人相交之非其道矣. 諸君所志者道, 所求者仁, 聲氣感應, 風雲聚從, 相取者不可謂不重也. 顔勿, 曾省, 鹿法, 藍約, 朝規夕講, 諷誦洋洋, 不可謂無其道矣. 但所難者, 相下不倦久而敬之, 而要在乎誠之一字, 一有不誠, 所爲如無, 可不戒哉?年長而學高者, 年少而學下者及年相敵而學有高下者, 宜其相視無間, 相長有得也. 其或年長而學下, 年少而學高者之相與, 每患牴牾不相入, 要當以不恥下問爲心, 恃學自高爲戒.友者友其德也, 知者知其心也, 要當洞通城府, 不飾邊幅. 人有善, 內實慕悅而勿徒當面溢贊, 其有過, 誠心面喩, 勿退而語人. 己有善而人奬之, 勿過爲謙退以沮人好意, 有過而人規之, 勿外從而厭以負人德意.會旣衆矣, 性何盡齊? 常以吾事有時不滿, 人事豈能盡? 協爲心可也, 所謂休休有容者如此.課程呂舍人7)曰: "學業須是嚴立課程.", 韓文公曰: "業精于勤, 荒于嬉.", 孔子曰: "富有之謂大業.", 惟其惟嚴, 惟勤, 所以致富有之大業也. 天地之至誠不已而造化以行, 聖人之勤勵無息而大德以立, 況在於吾人乎? 嗚呼! 《易》曰"乾乾", 《庸》曰"慥慥", 《書》8)曰"孜孜", 斯可以爲法矣. 講誦記寫之類, 修業之不可闕者, 故定式如左.每日寅正, 起寢衣冠, 卯時受課, 辰初朝飯. 辰正寫字, 巳時讀書, 午初休息討論, 午正讀書, 未初點心. 未正寫字, 申時讀書, 酉初休息討論, 酉正讀書, 戌初夕飯. 戌正亥初, 或論文, 或講禮, 或談史, 或賦詩文, 各隨宜, 亥正讀書就寢.【秋冬, 申時夕飯, 酉時論文, 講禮, 談史, 賦詩文, 戌時讀書, 亥時就寢.】每日各就所讀書, 立課毋闕, 少行多讀,【少不下百遍.】 須要成誦.每月望晦, 設講社長, 各抽一章於一望課中, 定通略粗不, 音義俱通者爲上, 義通者次之, 音通者又次之.【講規別見.】 每月初七日, 連讀六日課, 十四, 二十二, 二十九日, 皆如之, 小月則二十八日, 連讀五日課.每一冊讀畢, 數日溫讀, 誦于社長前.冠者限七日內, 作長文一篇, 每月四次, 連讀宿課, 日斤正社長前. 童子每日作日記數行, 至於夏至後處暑前. 盛暑時, 冠者減誦讀, 加著述, 限三日內, 作長文一篇, 童子則依前.讀書要正坐勿搖身, 徐讀思義, 勿高, 勿低, 明白音讀, 必從本音. 寫字要楷正典重, 勿輕尖潦草, 必遵六書本形. 作文要義理通暢, 意趣深長, 勿尙奇, 勿麗華.休養《中庸》曰: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論語》曰: "興於詩, 成於樂.", 湛一惺寂, 本體之中, 立於靜時也, 感發和順, 詩樂之效, 著於德性也. 自後世之廢詩樂, 俗士之昧靜功, 力疲於辨質鈔箚, 心汨於昏昧紛擾, 矻矻滾滾, 終晷通夕, 絶不見澄淸本原, 酬酌萬變, 優遊涵泳以造其極之功, 可勝歎哉! 今欲諸君勤攻困搖之暇, 久蟄鬱惱之餘, 或閉目靜處, 安淨方寸以立虛明純一之體, 或登高迎風, 唱和詩歌以求蕩滌消融之效.每日午前午後兩次讀書後, 各習靜坐, 澄心之功, 其方則輕輕照顧, 平平存在者是也.【程子有半日靜坐, 半日讀書之訓, 有意靜功者, 豈但兩次而已?】.每月望晦應講後, 初七, 十四, 卄二, 卄九, 連讀宿課後, 每日夕飯後, 或上山灑風, 或庭前步月, 幷唱〈關雎〉, 〈鹿鳴〉, 朱子〈招隱操〉, 退溪〈陶山六曲〉, 栗谷〈石潭九曲〉等歌, 又各賦詩, 擇其淸絶者, 唱之亦好.講規講生齋會, 着道袍, 或廣袖周衣. 設講長席于堂北壁下南向, 講生席于東西壁下北上. 講生行相揖禮于庭中, 禮畢, 講長升席坐, 講生亦上堂以次分詣東西, 升席坐. 直日, 於講長之右隅, 坐書講錄, 置案冊子于講長前. 講生以次就講長前, 作揖斂袵端坐. 講長抽一章於一望課中, 命背講. 講生容無怍, 心無恐, 聲無澁, 身無搖, 舒心朗誦, 須要明白淸徹. 講長聽畢, 問文義, 講生隨所知奉對. 又問質疑晦處, 講長詳喩之,【在傍者, 亦許參同問討.】乃定通略粗不. 音義俱通者通, 義通者次之, 音通者又次之, 而俱爲略, 艱誦多錯粗, 不成誦者不. 講生又揖而退. 直日, 錄各人所誦章於講錄, 幷錄通略粗不, 收斂每次講錄, 用備後考, 以各人參與不參, 通略粗不之多寡, 驗學業之勤慢進退. 공자는 …… 불효 이는 공자의 말이 아니고 증자(曾子)가 말한 것으로, 《예기》 〈제의(祭義)〉에 "이 몸은 부모의 유체(遺體)이니, 부모가 남겨주신 몸으로 행하되 감히 공경하지 않겠는가. 거처를 장엄하게 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身也者, 父母之遺體也. 行父母之遺體, 敢不敬乎? 居處不莊, 非孝也.]라고 하였다. 거처는 …… 된다 이이가 《격몽요결(擊蒙要訣)》 권3 〈지신장(持身章)〉에서 "거처는 편안함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병들지 않을 정도면 그만이다.[居處不可安泰, 不病而已.]"라고 하였다. 공자가 …… 여겼으니 《논어》 〈학이〉에서 공자가 "군자가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다.[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라고 하였다. 너의 …… 것이다 《의례》 〈사관례(士冠禮)〉에 "좋은 달 좋은 날에 너의 옷을 거듭 입히니, 너의 위의를 공경하고 너의 덕을 맑게 하고 삼가면 만년토록 장수하고 영원히 큰복을 받을 것이다.[吉月令辰, 乃申爾服, 敬爾威儀, 淑愼爾德, 眉壽萬年, 永受胡福.]"라고 하였다. 북궁문자(北宮文子)는 …… 했으니 북궁문자는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타(佗)이다. 그가 초나라에 있을 때 위나라 군주인 양공(襄公)에게 "초나라 영윤위(令尹圍)가 위의(威儀)가 없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31년 조에 보인다. 패담(悖談) 사리에 그릇되게 말하는 것, 또는 그런 말이다. 관동(冠童) 관례를 한 사람과 관례를 하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남자 어른과 남자아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학문하는 …… 않았다 당나라의 양성(陽城)이 국자사업이 되어 학생들을 불러서 "모든 학문하는 자들이 배우는 까닭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다. 제군 중에 오랫동안 부모를 찾아뵙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라고 한 말이 《소학》 〈선행(善行)〉에 나온다. 수십 권 …… 홀대한다 《안씨가훈(顔氏家訓)》 〈면학(勉學)〉에서 안지추(顔之推)가 "어떤 사람이 수십 권의 책을 읽고는 곧 스스로 높고 큰 체하여 어른을 능멸하고 홀대하며 동료들을 경시하고 오만하니,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기를 원수나 적과 같이 대하고, 그를 싫어하기를 부엉이나 올빼미처럼 여기는 것을 본 적이 있다."라고 하였다. 안지추(顔之推) 531~602. 북제(北齊) 사람으로 자는 개(介)이다. 그가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지었다. 유익한 …… 있다 《논어》 〈계씨(季氏)〉에 보인다. 벗으로써 …… 돕는다 《논어》 〈안연(顏淵)〉에 보인다. 책선은 …… 도리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안물(顔勿) 《논어》 〈안연〉에서 공자가 안연에게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마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한 것을 말한다. 증성(曾省) 《논어》 〈학이〉에서 증자가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핀다.[吾日三省吾身.]"라고 한 것을 말한다. 녹법(鹿法) 백록동서원 학규(白鹿洞書院學規)의 준말로, 당(唐) 나라 초기에 이발(李潑)에 의해서 세워진 백록동서원이 송(宋) 나라 때에 이르러 이미 황폐해졌는데, 주희가 백록동서원을 복구하고 학생을 가르치면서 만든 규약을 말한다. 남약(藍約) 남전(藍田)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줄인 말로, 남전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고을 이름이고, 여씨향약은 송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이다. 《소학》 〈선행(善行)〉 아름다워 …… 있다 《서경》 〈진서(秦誓)〉에 "그 마음씨가 아름다워 남을 포용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다.[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라는 말이 나온다. 과정(課程) 일정 기간 중에 교육하거나 학습해야 할 과목의 내용과 분량을 말한다. 여사인(呂舍人) 여본중(呂本中, 1084~1145)이다. 남송 수주(壽州) 사람이다. 학업은 …… 한다 《소학집주(小學集註)》 〈가언(嘉言)〉에 나오는 말이다. 학업은 …… 황폐해진다 《창려문집(昌黎文集)》 권12 〈진학해(進學解)〉에 나온다. 풍부하게 …… 이른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 말이다. 힘쓰고 힘쓴다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쓴다.[君子終日乾乾.]"라고 하였다. 독실하다 《중용장구》 제13장에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않겠는가.[君子胡不慥慥爾!]"라고 하였다. 부지런히 한다 《서경》 〈익직(益稷)〉에서 우(禹)가 "나는 날마다 부지런히 할 것을 생각한다.[予日思孜孜.]"라고 하였다. 통(通) …… 불(不) 강생(講生)의 성적을 평가하는 4가지 등급이다. 근정(斤正) 시문(詩文)을 다듬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중용》에……근본이다:《중용장구》 제1장에 나오는 말이다. 《논어》에……완성한다:《논어》 〈태백(泰伯)〉에 나오는 말이다. 담일(湛一) 장재(張載)가 "담일은 기(氣)의 근본이고, 공취(攻取)는 기의 욕구이다.[湛一氣之本, 攻取氣之欲.]"라고 하였고, 주희가 해석하여 "담일이란 외물에 감촉하지 않았을 때의 담연(湛然)하고 순일(純一)한 상태이니, 이것이 기의 근본이다.[湛一是未感物之時, 湛然純一, 此是氣之本.]"라고 하였다. 《정몽(正蒙)》 〈성명(誠明)〉 우유함영(優遊涵泳)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한가로이 오래도록 탐구하여 깊이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가볍게 …… 돌아보고 율곡은 정 공부를 할 때 미발(未發) 시의 기상을 경경조고(輕輕照顧)하면 진학(進學)과 양심(養心)에 반드시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21 〈성학집요(聖學輯要) 3〉 마음을 …… 하는 《퇴계문집(退溪文集)》 권24 〈답정자중(答鄭子中)〉 에 이러한 말이 보인다. 정자는 …… 하라 이는 정자가 한 말이 아니라 주자가 제자인 곽득원에게 한 말로,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16 〈주자 십삼(朱子十三) 훈문인 사(訓門人四)〉에 이러한 말이 나온다. 〈관저(關雎)〉와 〈녹명(鹿鳴)〉 모두 《시경》의 편명이다. 초은조(招隱操)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에서 온 말이다. 원래 초은(招隱)의 곡조는 회남(淮南)의 소산(小山)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 뒤에 주자도 초은의 곡조로 지었다고 한다. 〈초은사〉의 본래 의미는 은자를 세상으로 부르는 노래였는데, 후대에는 은거를 지향하는 의미로 쓰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1 〈초은조〉 도산육곡(陶山六曲) 퇴계 이황이 지은 12수의 연시조(聯詩調)를 〈도산십이곡〉이라고 하는데, 이별(李鼈)의 육가(六歌)를 모방하여, 〈육곡〉 한 편에서는 '지(志)'를, 다른 한 편에서는 '학(學)'을 노래하였다. 석담구곡(石潭九曲歌) 《율곡전서》 권2에 실려 있는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이른다. 구곡담(九曲潭)은 황해도 해주에 있는 아홉 개의 승경(勝景)이다. 이이가 일찍이 이곳에서 강학하면서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모방하여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배강(背講) 책을 보지 않고 뒤돌아 앉아서 외우는 것을 말한다. 數 대본에는 없는데 《안씨가훈》의 원문에 근거하여 보충했다. 謹 대본에는 '勤'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으로 살펴 수정하였다. 呂舍人 대본에는 '張橫渠'로 되어 있는데 원문을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書 대본에는 '孟'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을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남산재에서 제군을 깨우쳐줌 【1924년】 南山齋喩諸君 【甲子】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받은 것 가운데에 순수한 성(性), 신령스럽고 밝은 마음, 바르고 준수한 몸이 있고, 자기에게 속한 윤리 가운데에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가 있다. 성은 마땅히 길러야 하고 마음은 마땅히 보존해야 하며, 몸은 닦아야 하고 아버지는 자애롭고 아들은 효도하며, 임금은 인자하고 신하는 공경하며, 부부는 분별이 있고 장유는 차례가 있으며, 붕우는 신의가 있어야 하니, 이는 모두 우리 몸에 절실한 직무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본래 태나면서부터 아는 뛰어난 성인의 자질이 아니면 반드시 선각자에게 배워야 하고 사우(師友)에게 물은 뒤에야 본분을 다하는 방법을 알 수 있으니, 이는 학문의 이름이 세워진 이유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학문의 본의(本意)를 모르고, 이는 문달(聞達)407)을 구하는 것이고 이록(利祿)을 구하는 것이며, 현묘(玄妙)함을 바라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에 겨우 몇 부의 경전을 읽고 조금의 수고로움을 하고는 이름과 봉록이 창성하지 않고 기이한 효과가 이르지 않으면 갑자기 학문을 포기하고 권모술수와 공명의 길로 좇아가니, 천년의 실학(實學)의 폐해짐이 모두 이 때문인데, 하물며 지금의 세상에 있어서이겠는가.큰 성인[大聖]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덮어씌우고, 윤리와 강상은 사람을 죽이는 짐독(鴆毒)408)으로 돌리는데, 넓고 넓은 천지에서 한 자 되는 주름진 소매가 달린 도포를 입은 그대들이 이러한 때에 적막한 물가에 모여 부지런히 글을 읽으니, 직분을 다하면서도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을 깊이 아는 자가 아니면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서로 장점을 관찰하여 본받는 선(善)409)이 없고, 쓸쓸한 처지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기뻐하기만 하니, 어찌 거들어줄 한마디 말이 없겠는가.내가 듣건대 군자의 학문은 처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잘 마치는 것이 어렵고, 예기(銳氣)를 떨쳐 일으키는 것이 다만 귀한 것이 아니고 지성(至誠)으로 투철하게 하는 것이 참으로 두려울 만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성(性)과 심(心)과 신(身)이 없으면 바야흐로 이를 기르고 보존하며 닦는 공이 없고,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가 없으면 바야흐로 자애[慈], 효(孝), 인자[仁], 공경[敬], 분별[別], 차례[序], 신의[信]의 도가 없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천하에 신심(身心)과 윤속(倫屬)410) 없는 사람이 없으니, 도와 공을 마땅히 배우고 물어서 잠시도 버릴 수 없음이 분명하다.주자가 이르지 않았던가. "한 숨이 남아있는 순간까지 이 뜻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짐을 용납하지 않는다.411)"라고 하였다. 이는 그대들과 생사를 함께 하는 영부(靈符)와 진결(眞訣)412)이니, 보배롭게 간직하고 또 유념하라. 이를 비유하면 오곡이 풍년일 때에 많은 곡식을 갈무리하는 일은 오히려 쉽게 할 수 있지만, 흉년이 들어 굶주린 해에 많은 곡식의 종자를 저장하여 다가오는 해의 파종에 대비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것과 같다.앞으로 그대들의 성취가 어떨지는 오직 재능의 고하(高下)와 노력의 심천(淺深)에 달려 있으니, 내가 감히 예언하지 않겠다. 가령 크게 성취하지 못하여 공자가 말한 삼사중품(三士中品)413)과 맹자가 말한 이중사하(二中四下)414)에 그치더라도, 그 세도(世道)에 도움 되는 공이 어찌 갑자기 다스림과 교화가 아름답고 밝은 때의 한 대군자(大君子)보다 못하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오늘 그대들 몇 사람이 뒷날 온 백성의 생활종자(生活種子)이다."라고 말하겠다. 이러한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으니, 어찌 매우 중요하지 않겠으며, 어찌 감히 잠시라도 머뭇거리겠는가.오직 학문의 실제는 신심(身心)과 윤리에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415)"라고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416)"라고 하였으니, 이는 성현(聖賢)이 세운 만대의 표준이다. 그런데 근래 이후로 밖을 중시하고 안을 경시하여 실제적인 것을 버리고 공허한 것을 숭상하며, 몇 조항의 명리(名理)417)로 화로의양(畵蘆依樣)418)하고, 몇 편의 사장(辭章)으로 작은 기교를 부린다. 그리고 곧바로 우뚝 선각(先覺)으로 자처하고 사람들도 우뚝한 선각으로 대우하여 더이상 그의 심술과 덕행이 어떠한가를 묻지 않으니, 아! 이는 학문의 적(賊)이다.원컨대 그대들은 학문의 적을 몹시 미워하고, 성인의 표준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효제충신(孝弟忠信)에 종사하라. 그리고 성찰하여 극기복례를 하는 데 실제로 체행하라.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하여 참되게 쌓고 오랫동안 노력한다면 하학(下學)이 이름에 어찌 상달(上達)할 날이 없겠는가. 하물며 여사(餘事)419)인 이른바 문사(文辭)에 있어서이겠는가.붕우(朋友)는 덕업(德業)에 있어 필요로 하여 이루는 자이기 때문에 오륜(五倫)의 한 조목에 해당되는데, 후대에 우도(友道)가 모두 없어져 서로 필요로 하여 이루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간혹 배척하여 실패하니, 너무나 통탄스럽다. 지금 그대들은 동당(同堂)에서 도와 뜻과 업을 함께 하니, 그 정의가 두텁지 않겠는가. 오직 원하건대 서로 권면하고 각자 채찍질하여 성찰하며, 학문을 믿고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지 말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며, 과실을 보고도 바로잡아주지 않지 말며 선을 보고도 싫어하거나 꺼리지 말라. 연이은 산봉우리는 양쪽으로 솟아나 더욱 높고, 두 개의 못이 붙어 있는 것은 서로 도움을 주어 더욱 깊어지니, 말세의 나쁜 풍습을 한번 깨끗하게 씻고 각자 그대들의 아름다운 덕을 공경하라.법복(法服)을 언행보다 우선시 한 자는 공자(孔子)이고420), 의관(衣冠)을 첨시(瞻視)보다 우선시 한 자는 주자(朱子)이니421), 이는 진실로 학문의 수제(首題 표제(標題))이다. 이는 태평한 세상에서도 오히려 삼가는데 이 오랑캐를 만난 날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한가하게 지낼 때에도 내팽개치지 않는데 경전을 대독(對讀)할 때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청컨대 그대들은 항상 폭이 넓은 소매의 상의(上衣)를 입고, 한편으로는 옛것을 본받고 지금의 것을 끊는 뜻을 확고히 하며, 한편으로는 밖을 제어하여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으로 삼되, 표방한다고 하여 이를 꺼리거나 외면을 꾸민다고 하여 이를 경시하지 말라. 내가 장차 의복을 삼가는지 않는지를 가지고 그대들의 진수(進修)422)를 시험할 것이다.한 번 예를 잃으면 이적(夷狄)에 들어가고, 두 번 잃으면 금수(禽獸)에 들어가니, 이것은 금일 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원하건대 그대들은 몸단속 할 때 시동처럼 앉고 재계하는 것처럼 서며, 발은 무겁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하는 곡례(曲禮)423)를 삼가며, 집에서 지낼 때 관례(冠禮), 영상(迎相)424), 초상(初喪)을 삼가고 멀리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는 네 가지 예를 다하라. 그래서 점점 훗날에 행동거지와 주선(周旋)이 예에 맞게 되면 나라의 예법을 주창해 밝히고, 더러운 이 세상을 깨끗이 씻어서 태평성대에 올려놓는 것이 그대들에게서 나오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힘써 노력하라!학문하는 방도는 진실로 생각을 성실히 하여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또 조용히 심신을 수양하는 공부가 본원(本源)이 된 뒤에야 행동할 때 품절(品節 절도(節度))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 지극한 것을 논하면 진실로 갑자기 말할 수 없지만, 분수에 따라 공을 베풀어 점차 효험을 보는 것에 이르러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사색하고 번뇌하며 강송(講誦)하고 근로(勤勞)한 뒤에, 눈을 감고 바르게 앉아 이 마음을 맑게 보존하고, 긴장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으며,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야 하니, 이것이 그 공부이다. 이렇게 해나가서 익숙해지면 마치 달이 하늘에 떠 있어 사방이 모두 환하게 밝고, 물결 없는 연못에 한 웅덩이가 자재(自在)한 것 같은 기상(氣象)을 거의 볼 것이니, 어찌 쾌활하지 않겠는가.글자의 모양은 천지의 이상(理象)에 근본하고, 글자의 소리는 음양의 성률(聲律)에 맞는다. 따라서 만일 하나의 점획(點畫)과 발음의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바로 다른 글자와 소리가 되니, 문의(文義)의 횡결(橫決 단절)과 인사(人事)의 오패(誤敗 오판하여 그르침)는 오히려 작은 일이다. 심한 경우 혹 천지가 뒤집히고 윤리가 뒤바뀌어 거꾸로 되는 지경에 이른다. 예를 들면 동쪽과 서쪽, 통함과 막힘이 바뀌면 해와 달의 출입하는 길이 바뀌고, 부(夫)와 부(婦), 평성과 거성이 섞이면 남녀의 명칭이 자리가 다르게 되니, 어찌 크게 걱정하고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천지가 만물을 내는 것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모두 정성[誠]이니, 천지와 성인도 그러한데 배우는 자가 정성스럽지 않고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정성은 사물의 시작이며 끝이니, 정성스럽지 못하면 사물이 없게 된다.425)"라고 하였다. 이상 고한 내용이 비록 잡다하지만 과연 그대들이 정성으로 행한다면 또한 족히 수신하고 법을 행하여426) 학문하는 실제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말한 것은 무의미하게 되고 들은 것은 잊어버린 것 같아, 피차에 도움 될 것이 없고 도리어 남의 조롱만 사게 될 것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夫人之生稟乎天者, 有純粹之性, 靈昭之心, 正秀之身焉, 倫屬乎己者, 有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焉. 性之當養, 心之當存, 身之當修, 父子君臣之慈孝仁敬, 夫婦長幼朋友之別序信, 皆吾切身之職務, 而不容不盡者也. 然自非生知上聖之資, 必學之於先覺, 問之於師友, 然後 乃能知盡分之方, 此學問之名, 所以立也. 世之人不知學問之本意, 以爲是求聞達也, 干利祿也, 希覬玄妙也. 纔讀得幾部經傳, 喫得些少勤苦, 而名祿不昌, 奇效不至, 輒抛棄之, 趨而之權術功名之途, 千載實學之廢, 皆坐乎此, 而況乎今之世乎? 大聖之加罔赦罪科, 倫綱之歸殺人鴆毒, 廣天地之恢恢, 一尺袖之蹙蹙諸君, 乃以此時, 聚首劇讀於寂寞之濱, 非深知職分之當盡而無所希求者, 能若是乎? 顧未有相觀之善, 喜在空谷之跫, 豈闕一辭之贊? 吾聞君子之學, 有其始之非難, 克其終之爲難, 奮發銳氣之非徒貴, 至誠透徹之眞可畏, 須知無此性無此心無此身, 方可無養之存之修之之功, 無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方可無慈孝仁敬別序信之道, 天下無無身心無倫屬之人, 則道與功之當學當問, 而不得暫捨也決矣. 朱子不云乎? "一息尙存, 此志不容少懈.". 此爲諸君與生俱死之靈符眞訣, 其寶藏之, 抑又念之. 譬之五穀樂歲之多藏厚蓄, 尙可易力也, 至於凶年饑歲, 能儲得多少穀種, 以待來歲布播, 其功爲尤難. 諸君前頭成就之多少, 惟在材之高下, 功之淺深, 吾不敢預言. 雖使未能大就, 止於孔子所稱三士中品, 孟子所稱二中四下, 其裨益世道之功, 豈遽下於治敎休明之時一大君子哉? 余故曰: "今日諸君幾箇人, 異時萬姓生活種子.". 念到于此, 豈不十分關重? 豈敢一晷虛徐?惟其學問之實之在身心倫理也. 故孔子曰: "行有餘力, 則以學文.", 孟子曰: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 此聖賢之萬世準的也. 挽近以來, 重外而輕內, 棄實而尙虛, 幾款名理之畵蘆依樣, 幾篇辭章之雕蟲施巧, 便巍然自處以先覺, 人亦以巍然先覺待之, 更不問其心術德行之如何, 嗚呼! 此學問之賊也. 願諸君痛心疾首於學賊, 竭誠盡力於聖的, 從事乎孝弟忠信之上, 實體乎省察克復之際, 孜孜無怠, 眞積力久, 則下學之至, 豈無上達之日? 而況所謂文辭, 又其餘事哉!朋友德業之所須而成者, 故居五倫之一, 後世友道喪盡, 不惟不相須而成, 反或相擠而敗, 可勝痛哉? 今諸君以同道同志同業于同堂之中, 其誼顧不重歟? 惟願互相勸勉, 各自策省, 勿恃學而矜人, 勿愧恥於下問, 勿見過而不規, 勿見善而厭忌. 連峯對起而增高, 麗澤互資而益深, 一洗末俗之惡習, 各敬爾身之美德也.法服之先於言行, 孔子也, 衣冠之先於瞻視, 朱子也, 此固學問之首題也. 平世之猶謹, 値此卉氊之日乎! 燕處之不放, 對讀經傳之時乎! 請諸君恒著廣袖上衣, 一以確師古絶今之志, 一以爲制外養中之方, 勿以標榜而忌之, 外飭而輕之. 吾將以衣服之謹不謹, 驗諸君之進修也.禮一失則入於夷狄, 再失則入於禽獸, 今日之謂也. 吾願諸君撿身而謹坐尸立齊足重手恭之曲禮, 居家而盡冠首迎相愼終追遠之四禮, 馴致異日動容周旋之中禮, 倡明邦國之經禮, 洗斯世之汚而升之隆, 安知不出諸君乎? 勉之哉!爲學之道, 固在乎誠思實踐. 然前此又有靜養工夫爲之本源, 然後動而得以品節不差. 若論其極, 固不可驟語, 至於隨分施功, 漸次見效, 則不可已者. 思索煩惱之餘, 講誦勤勞之後, 閉目端坐, 澄存此心, 不緊不歇, 勿忘勿助, 是其功也. 此而到熟, 庶見如月當空, 四面皆徹, 如淵無波, 一泓自在底氣象, 好不快活?字形本諸天地之理象, 字音協諸陰陽之聲律, 若其小差一點畫一脣舌之間, 便成別字異音, 文義之橫決, 人事之誤敗, 猶是小事. 甚或至於天地之翻覆, 倫理之倒錯, 如卯酉通塞之換, 日月之出入易路, 夫與婦平去之混, 男女之名稱異位, 豈非大可憂懼者乎?天地之所以生萬物, 聖人之所以應萬事, 皆誠也, 天地聖人亦然, 而學者可不誠而成哉? 故曰: "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以上所告, 雖甚粗淺, 果諸君之以誠行之, 亦足以修身行法, 無愧學問之實. 如其未也, 言者歸虛, 聽者如遺, 彼此無補, 反貽人譏, 可不念哉! 문달(聞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을 말한다. 짐독(鴆毒) 짐새의 깃에 있다는 맹독(猛毒)이다. 서로 …… 선(善) 대본의 '相觀之善'은 《예기》 〈학기(學記)〉에 "서로 장점을 보고 배워 착한 길로 이끌어가는 것을 마라고 한다.[相觀而善之謂摩.]"라고 한 데서 나왔다. 윤속(倫屬) 천륜(天倫)의 친속(親屬)을 말한다. 한 …… 않는다 《논어집주》 〈태백(泰伯)〉에서 주자가 "인이란 인심의 온전한 덕이니, 반드시 몸으로써 체행하여 힘써 행하려고 한다면 책임이 중하다고 이를 만하고, 한 숨이 남아있는 순간까지 이 뜻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짐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멀다고 이를 만하다.[仁者人心之全德, 而必欲以身體而力行之, 可謂重矣, 一息尙存, 此志不容少懈, 可謂遠矣.]"라고 하였다. 진결(眞訣) 진법(眞法) 또는 비결(秘訣)이란 뜻으로, 도를 전하는 정수(精粹)를 말한다. 삼사중품(三士中品) 《논어》 〈옹야(雍也)〉에 "중등 인물[中人] 이상의 사람에게는 높은 것을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으나, 그 이하의 사람에게는 이를 말해 줄 수 없다.[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라고 공자가 말한 내용이 나온다. 이중사하(二中四下)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서 맹자가 자신의 제자 악정자(樂正子)를 평하여 "악정자는 두 가지의 중간이요, 네 가지의 아래이다.[樂正子, 二之中, 四之下也.]"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선인(善人)과 신인(信人)의 사이에 위치하고, 미인(美人), 대인(大人), 성인(聖人), 신인(神人)의 아래에 위치하는 것을 말한다. 행하고 …… 한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온다. 학문의 …… 뿐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온다. 명리(名理) 위진(魏晉) 시대의 청담가(淸談家)들이 사물의 명(名)과 이(理)를 분석하며 시비(是非)와 동이(同異)를 따지던 것을 가리킨다. 화로의양(畵蘆依樣) 호로(葫蘆 조롱박) 모양만을 본떠서 그려 낸다는 뜻으로, 참신함이 없이 단순히 남을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유설(類說)》 권17 〈동헌필록(東軒筆錄)〉에 나온다. 여사(餘事)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을 말한다. 법복(法服)을 …… 공자이고 《효경(孝經)》 〈경대부장(卿大夫章)〉에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으며, 선왕의 법도에 맞는 말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으며,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는다.[非先王之法服, 不敢服, 非先王之法言, 不敢道, 非先王之徳行, 不敢行.]"라는 말이 나온다. 의관(衣冠)을 …… 주자이니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에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잠심하여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듯이 하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고 하였다. 진수(進修)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줄임말로, 덕을 쌓고 학업을 닦는 것을 말한다. 곡례(曲禮) 구체적인 소절목(小節目)의 위의(威儀)로, 《예기》 〈예기(禮器)〉에 "곡례가 3천 가지이다.[曲禮三千]"라고 하였다. 영상(迎相) 도와줄 아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친영을 의미한다. 《의례(儀禮)》 〈사혼례(士婚禮)〉 성은 …… 끝이다 《중용장구》 〈제25장〉에 보인다. 법을 행하여 《맹자》 〈진심 하〉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법을 행하여 명을 기다길 뿐이다.[君子行法以俟命而已矣.]"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세속에서 문자의 호칭을 오용하는 것에 대한 변론 世俗文字稱號誤用辨 공자가 '인(仁)하지만 말재주가 없다.'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어찌 말재주를 쓰겠는가. 넉넉한 말재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다.382)"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말재주가 없는 것은 바로 미덕(美德)이다. 고금에 문인들이 대부분 말재주가 없다는 것으로 자칭(自稱)하는데 이는 미덕으로 자처하는 것이니, 어찌 겸사(謙辭)이겠는가. 문인뿐만 아니라 중세 이후 현유(賢儒)도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결코 그대로 따라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남의 조카를 일컬어 '함씨(咸氏)', '영함(令咸)', '종함(從咸)', '당함(堂咸)'이라 하니, 이는 무슨 의의(義意)가 되는가. 완함(阮咸)383)은 본래 완적(阮籍)384)의 조카이니, 다른 사람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게다가 완적과 완함은 숙질(叔姪)간으로, 예법의 밖에서 스스로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으니, 본래 사모할 만한 현자가 아닌데, 차용하여 체면을 세워주는 자가 어떻게 이로써 남을 일컬어 해를 끼치는가. 심지어 그 조카를 '함씨', 그 숙부를 '완장(阮丈)', '종완장(從阮丈)', '당완장(堂阮丈)'으로 일컫는데 이르러서는, 한번은 그 이름을 들고, 한번은 그 성을 들었으니 더욱 지극히 가소롭다.증자가 자리를 바꾼 것은385) 비록 바름을 얻었다고 하지만, 결국 그가 자리를 바꾸기 전에는 스스로 살피지 못한 일이니, 촛불을 잡고 있던 동자(童子)가 아니었다면 혹 거의 바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은 다만 마땅히 그가 바름을 얻은 것을 사모하여 배우고, 그 전에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논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결국 이는 증자가 홀로 행한 일일 뿐인데, 어찌하여 후대에 유현(儒賢)이 몰(沒)했을 때, 이러한 일이 있지 않은데도 관례로 역책을 일컫는가.상례의 형식[易]과 슬퍼하는 마음[戚]은386) 모두 중도(中道)를 잃은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거상(居喪)을 잘한 사람을 일컬어 바로 '이척(易戚)이 모두 지극하다.'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마땅히 '감정과 형식이 모두 지극하다.[情文備至]'라고 해야 한다.아들의 죽음에 곡하다가 실명(失明)한 것은387) 자하(子夏)의 지나친 부분인데, 요즘 사람들은 자식을 잃은 사람을 일컬어 바로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 하니, 이러한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아내를 잃고 동이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른 것은 장자(莊子)의 방탕함이니388), 또 아내를 잃은 사람을 일컬어 '고분지통(叩盆之痛)'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마씨(馬氏)의 5형제 가운데 마량(馬良)389)의 자는 계상(季常)인데, 자라면서 눈썹이 하얗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씨의 오상(五常) 가운데 흰 눈썹[白眉 마량]이 가장 뛰어나다.390)"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남의 백형(伯兄)을 '백미(白眉)'로 일컫고 '가장 뛰어나다.'는 뜻을 취했으니, 아름다운 호칭인 듯하다. 그러나 '백미'는 결국 사람의 모습이 변이(變異)한 것이니, 이러한 호칭은 남의 형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다.상고시대에 푸른 매화[靑梅], 풀명자나무[査上] 위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자녀의 혼사를 정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어떤 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세속에서 신랑과 신부의 부모가 서로 '사돈(査頓)'으로 부른다고 하니, 이는 무의미한 말이다. 그렇다면 만일 풀명자나무 위가 아닌 꽃 아래[花下]에서 머리를 조아렸다면 마땅히 '화돈(花頓)'으로 일컬어야 하는가.'윤(胤)'은 《자서(字書)》에 '계통을 잇다[繼]', '잇다[嗣]'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윤'은 장자(長子)를 일컫는 것이니, 지금 세속의 서찰과 언어에서 남의 아들을 일컬을 때 장자와 차자(次子)를 묻지 않고 공통으로 '윤우(胤友)', '윤군(胤君)'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이다. 10년 전에 내가 사는 고을의 임 박사(林博士)가 박모(朴某)에게 편지를 보냈었는데, 그 차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윤군이 와서 배웠다. ……"라고 말하였다.이때 마침 박모의 장자가 죄를 범해 밖에 피해있었는데, 일본 사람이 집 안의 문서를 탐색하다가 임 박사의 편지를 찾고는 와서 따져 물었다. 이에 임 박사가 말하기를 "내가 그의 차자를 가리켰고, 그의 장자는 애초에 무관하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 사람이 말하기를 "《자서(字書)》에서 '윤'은 장자의 칭호이고 공은 박사인데, 어찌 글자의 뜻을 모를 리가 있는가. 이는 임시로 말을 바꾼 것이니,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박모의 장자를 잡고 난 뒤에야 임 박사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가 비록 오랑캐이지만 오히려 자학(字學)에 정밀함이 이와 같았다.내구(內舅)의 아들이 내종(內從)이고 고(姑)의 아들이 외종(外從)인데, 지금 통속적으로 대부분 바꾸어 부르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세속에서 내구를 외숙(外叔)으로 부르기에 그 아들을 외종으로 부른다. 이미 이를 외종으로 불렀으니, 절로 마땅히 고의 아들을 내종으로 불러야 한다. 비록 그렇지만 이는 크게 옳지 않다. 모(母)의 형제가 구(舅)가 되는 것은 예경(禮經)에 드러나 있고, 그 '내구'라고 이른 것은 외구(外舅)와 구별한 것이다. 이미 '내구'라고 하였으니, 그 아들 되는 자가 어찌 내종이 되지 않겠는가. 이 아들이 이미 내종이 되었다면, 출가외인인 고의 아들이 어찌 외종이 되지 않겠는가.부(父)의 처를 '모(母)'라 하고 부의 자매(姊妹)를 '고(姑)'라 한다. 따라서 고는 다만 마땅히 '고'로 일컬을 뿐이니, 만일 '고모(姑母)'라고 일컬으면 온당치 않다.세속에서는 처의 형제를 '처남(處娚)'으로 부르는데, 남(娚)이 《자서(字書)》에 보이지 않으니 마땅히 '처형(妻兄)', '처제(妻弟)'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처의 자매(姊妹)를 '처형', '처제'라고 일컫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것은 마땅히 '처자(妻姊)', '처매(妻妹)'라고 해야 한다.여자 가운데 나보다 먼저 태어난 자를 손윗누이[姊]라 하고, 나보다 뒤에 태어난 자를 누이[妹]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세속에서 그다지 분별하지 않고 손윗누이의 남편을 '매부(妹夫)', '매형(妹兄)'이라 하고, 손윗누이의 집을 '매가(妹家)'라 한다. 부녀자와 아이들뿐만 아니라 장부로서 장년에 이른 자도 그렇게 부르니 이는 큰 망발이고, 매형이라고 이른 것은 더욱 우습다. 이미 '매(妹)'라고 하였는데 또 어찌 '형(兄)'이라고 하는가. 마땅히 '자부(姊夫)'라고 해야 한다. 만일 '자형(姊兄)', '매제(妹弟)'라고 이른다면 겨우 말이 된다.'수(嫂)'는 형의 아내이니, 세속에서 '제수(弟嫂)'라고 일컫는 것은 터무니없다. 마땅히 '제부(弟婦)'라고 해야 한다.시문(詩文) 사이에 세속 사람들이 '경성(京城)'을 '장안(長安)', '낙양(洛陽)'으로 일컫는 것은 잘못이다. 장안과 낙양은 본래 그 지역이 있는데 어느 곳에 해당되는가. 사실을 기록하는 글 및 장문(狀文)이나 갈문(碣文)을 지을 때 더욱 사용해서는 안 된다.'하(芐)'는 지황(地黃)이니, 지황은 가라앉아 내려가는 성질이 있기에 풀 초(艸)를 좇고 아래 하(下)를 좇는다.391) 그런데 요즘에는 '변[苄]'이 되었으니392), 예를 들어 '생변[生苄 생지황]', '숙변[熟苄 숙지황]', '변개(卞介)'라고 하는 것은 약성(藥性)에 있어서 어느 것에 해당하는가.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합장(合葬)은 〈단궁(檀弓)〉에서 무덤 안의 관(棺 속 널)과 곽(槨 겉 널)의 이합(離合)으로써 말하였다.393)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분묘(墳墓)의 합봉(合封)과 각봉(各封)으로써 말하니, 인가(人家)의 묘도 문자(墓道文字)에 사용하는 것은 사실에 근본한 것이 아니다.옛사람들은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다만 그 자손만 보았을 경우, 그 아들을 평범한 사람이나 용렬한 사람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에 문 위에 '봉(鳳)'자를 써서 붙이고 돌아갔다.394) 그러나 글자가 비록 겉보기에 좋지만 실제로는 범조(凡鳥)395)이기에 당나라 시에 '문에 이르러 감히 범조(凡鳥)라고 쓰지 못한다.396)[到門不敢題凡鳥]'라고 이른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서찰에 '봉'자를 쓰고 돌아오는 것을 무난하게 사용하니, 이는 범조로 남의 자손을 대우하는 것이다.양자로 나아가 과방(過房)397)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경전에는 보이지 않고, 조조(曹操)398)가 하후승(夏侯嵩)399)의 후사가 된 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생각건대 그것(과방)은 이성(異姓)의 후사가 된 경우에만 사용하고, 동성(同姓)의 후사가 된 경우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진 강공(秦康公)이 그 외삼촌을 전송하여 위양(渭陽)에 이르렀기에400) 다른 사람의 외삼촌을 '위양장(渭陽丈)'이라고 일컫는다. 주자가 사자(獅子)를 그려 외손(外孫)에게 주었기에401) 외손을 '사손(獅孫)'으로 일컫는데, 모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외삼촌을 전송하여 낙양(洛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낙양장(洛陽丈)'이라고 해야 하고, 외손에게 호랑이를 그려주었다면 마땅히 '호손(虎孫)'이라고 해야 하는가.좌태충(左太冲)이 〈삼도부(三都賦)〉를 지었는데, 황보밀(皇甫謐)402)의 서문(序文)을 얻은 뒤에 문장의 명성이 더욱 성대해졌다.403) 세상에서는 황보밀을 '현안 선생(玄晏先生)'으로 일컫기 때문에 문집의 서문을 '현안지탁(玄晏之託)', '현안지역(玄晏之役)'이라고 하니, 요즘 사람들이 묘도 문자(墓道文字)에 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공자가 옛날에 머물렀던 관사(館舍) 주인의 상(喪)을 만나 참마(驂馬)404)를 벗겨 부의(賻儀)하게 하자, 문인이 너무 중하다고 의아해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한 번 (관사의 주인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으니, 나는 이유 없이 눈물 흘리는 자를 싫어한다. 소자들아, 부의를 행하라.405)"고 하였다.이것은 '내가 이미 곡을 하고 나와서 눈물을 흘렸는데, 만일 부의를 하지 않으면 이 눈물은 내력(來歷) 없이 다만 흘리는 것이니, 이 어찌 인정(人情)에 마땅한 것이겠는가.'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부의의 예를 행한 뒤에라야 바로 인정에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남의 만사(挽詞)406)에 바로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린다.[涕無從]'라는 말을 쓰고 말하기를 "눈물이 갑자기 나오기에 '무종(無從)'이라 한다."라고 하니, 그 잘못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이 근심스러워할 만하다. 무릇 이유 없이 눈물 흘리는 것은 공자가 미워한 것이니, 어찌 다른 사람을 애도하는 말에 사용할 수 있겠는가. 孔子答仁而不侫之問曰: "焉用侫?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則不侫乃美德也. 古今文人多以不侫自稱, 是以美德自居也, 烏在其爲謙辭也? 非惟文人, 中世以降, 賢儒亦多如此, 然後之人決不可襲用.稱人之姪曰咸氏令咸從咸堂咸, 是爲何等義意? 阮咸自是阮籍之姪, 他人何關? 且籍咸叔姪, 自放禮法之外, 則本非可慕之賢, 借用生光者, 何以是稱人而累之也? 至於稱其姪爲咸氏, 稱其叔爲阮丈從阮丈堂阮丈, 一擧其名, 一擧其姓, 尤極可笑.曾子易簀, 雖云得正, 而終其未易之前, 自是未察之事, 若非執燭童子, 或幾乎不得正矣. 後之人只當慕其得正而學之, 不必論其前之未察. 然終是曾子獨行之事而已, 胡爲乎後世儒賢之沒也, 非有此事而例稱易簀也?喪之易戚, 皆失中者也, 今人稱人之善居喪也, 乃曰易戚備至, 此何謂也? 當曰情文備至.哭子喪明, 子夏之過處, 今人稱人之喪子, 乃曰喪明之痛, 此不可用. 喪妻叩盆而歌, 莊子之放狂也, 亦不可稱人喪妻, 曰叩盆之痛.馬氏五兄弟, 良字季常3), 居長而眉白. 時人語曰: "馬氏五常, 白眉最良.". 以是今人稱人之伯兄曰白眉, 取其最良之義, 則似爲美稱. 然白眉終是人形之變異者, 則是稱非敬人兄之道也.上古之有頓首於靑梅査上, 而定子女婚者, 此未知出於何書, 而今俗壻婦之父母, 相稱曰査頓云, 此無意味之說. 若頓首不於査上而於花下, 則當稱花頓乎?胤《字書》繼也嗣也. 然則胤是長子之稱, 今俗書札言語間, 稱人之子, 不問長次, 通謂胤友胤君誤也. 十年前, 吾鄕林博士書于朴某, 語及其次子曰: "胤君來學云云.". 適朴之長子, 有犯避外, 日人探索家中文書, 得林札來詰, 林曰: "吾指其次子, 其長子初無關.". 日人曰: "《字書》胤長子之稱, 公爲博士, 豈有不知字義之理乎? 此是臨時易辭, 吾不信.". 其後得朴之長子, 然後林得無事, 彼雖夷虜, 猶精於字學如此.內舅之子爲內從, 姑之子爲外從, 今俗擧多換稱, 此何以故? 俗呼內舅爲外叔, 故呼其子爲外從. 旣呼此爲外從, 則自當呼姑之子爲內從矣. 雖然, 此大不然. 母之兄弟爲舅, 著於禮經, 而其云內舅者, 別於外舅也. 旣云內舅, 則爲其子者, 豈不爲內從乎? 此旣爲內從, 則嫁外之姑之子, 豈不爲外從乎?父之妻曰母, 父之姊妹曰姑, 姑只當稱姑, 若稱姑母, 未安.俗呼妻之兄弟曰處娚, 娚《字書》無見, 當曰妻兄妻弟, 而今乃稱妻之姊妹曰妻兄妻弟, 何也? 此則當曰妻姊妻妹.女子之先己而生者爲姊, 後己而生者爲妹, 今俗不甚分別, 稱姊之夫曰妹夫妹兄, 姊家曰妹家. 非惟婦孺, 丈夫而壯者亦然, 大是妄發, 妹兄之云, 尤可笑. 旣云妹, 又何兄? 當曰姊夫矣. 若姊兄妹弟之云, 僅成說.嫂兄妻也, 俗稱弟嫂者妄也. 當云弟婦.詩文間, 俗稱京城爲長安洛陽者非也. 長安洛陽自有其地, 何所當乎? 至於記實之文及狀碣之作, 則尤不可用.芐地黃也, 地黃性沈下, 故從艸從下. 今作苄, 例曰生苄, 熟苄, 卞介也, 於藥性, 何所當乎?魯祔衛祔, 〈檀弓〉以壙內棺槨離合而言, 今人以墳墓之合封各封而言, 用於人家墓道文字, 非本實也.古人有訪人不遇, 只見其子, 其子凡庸, 故題鳳字於門上而歸者. 字雖外好, 而其實凡鳥也. 故唐詩云到門不敢題凡鳥. 今人書札題鳳而歸, 無難用之, 是以凡鳥, 待人之子也.謂出後爲過房, 經傳無見, 而始見於曹操爲夏侯嵩之後, 意其但用於爲後異姓, 而不可用於爲後同姓也.秦康公送其舅, 至渭陽, 故稱人之舅曰渭陽丈. 朱子畵獅子, 贈外孫, 故稱外孫曰獅孫, 皆不可用也. 若使送舅至洛陽, 則當曰洛陽丈, 畵贈外孫以虎子, 則當曰虎孫乎?左太冲作〈三都賦〉, 得皇甫謐序文, 然後文章之名益盛. 皇甫謐世稱玄晏先生, 故稱文集序爲玄晏之託, 玄晏之役, 今人於墓道文字, 亦用之此誤也.孔子遇舊館人之喪, 脫驂而賻之, 門人疑其已重. 孔子曰: "吾遇於一哀而出涕4), 吾惡夫涕之無從者, 小子行之!" 此言吾旣哭之而出涕, 若不賻則此涕爲無來歷而徒出, 是豈人情之當然乎? 故必行賻禮, 然後乃當於人情也. 今人挽人之詞, 乃用涕無從之語而曰: "涕淚忽然而出, 故曰無從.", 其錯解誤用可㦖. 大抵涕之無從, 孔子之所惡者, 烏可用於悼人之詞乎? 인(仁)하지만 …… 뿐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온다. 완함(阮咸) ?~?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문인으로, 자는 중용(仲容)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이다. 죽림칠현의 다른 한 사람인 완적의 조카이다. 술을 잘 마셨으며 종종 완적과 함께 음주를 즐겼다. 이 때문에 당대의 선비들에게 질시를 받았다. 완적(阮籍) 210~263. 자는 사종(嗣宗)이다. 위나라 진류(陳留) 사람이다. 아버지는 후한(後漢) 말의 명사이자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완우(阮瑀)이다. 성격이 호방하고 예법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증자가 …… 것은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병으로 누워 위독했다. 그런데 구석에 앉아 촛불을 잡고 있던 동자가 '빛나고 화려하니 대부(大夫)가 사용하는 자리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증자가 듣고 두려운 기색을 띠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자가 반복하여 말하자, 증자가 '바른 것을 얻고서 죽으면 그뿐이다.'라고 붙들어 일으키고 자리를 바꾸었는데, 다시 자리에 누워 안정되기도 전에 몰(沒)했다."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상례의 …… 마음[戚]은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하고, 상은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야 한다.[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아들의 …… 것은 《예기》 〈단궁 상〉에 "자하가 아들을 잃고 실명하였다.[子夏喪其子, 而喪其明.]"라고 한 데서 나왔다. 아내를 …… 방탕함이니 《장자(莊子)》 〈외편(外篇) 지락(至樂)〉에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惠子)가 문상을 갔는데, 장자가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 鼓盆而歌.]"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마량(馬良) 187~222. 자는 계상(季常), 백미(白眉)이다.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이고, 마씨의 5형제 가운데 장남이다. 눈썹이 흰색이라 백미(白眉)라고도 불렸다. 당시 …… 뛰어나다 《삼국지(三國志)》 권39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에 "마량은 자가 계상으로 양양 의성 사람이다. 그의 집에 5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재주가 출중했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씨의 오상 가운데 흰 눈썹이 가장 뛰어나다.'라고 하였다. 마량이 눈썹에 흰 털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컬어졌다.[馬良字季常, 襄陽宜城人也. 兄弟五人, 並有才名, 鄉里爲之諺曰:'馬氏五常, 白眉最良.'. 良眉中有白毛, 故以稱之.]"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풀 …… 좇는다 '芐'자가 풀 초와 아래 하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변(卞)'이 되었으니 '芐'는 '지황 하'인데, '下'자가 '卞'자로 잘못 읽히면서 '변[苄]'이라는 한국식 한자가 생긴 듯하다. 따라서 '숙하(熟芐)'가 맞고 '숙변[熟苄]'은 잘못이지만, '숙변'을 '숙하'의 변한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때문에 우리 사전에서도 '숙변'과 '숙하'를 모두 인정하여 이 두 단어를 서로 유의어로 보았다. 노(魯)나라와 …… 말하였다 춘추 시대에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합장하였는데, 그 방식이 달랐다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 하〉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위나라 사람들의 합장은 분리하였고, 노나라 사람들의 합장은 합하였는데, 노나라 방식이 더 좋다."라고 하였고, 소(疏)에 "부는 합장이다. 분리한다는 것은 겉 널 속에 어떤 물건으로 두 속 널의 사이를 격리시키는 것이다. 노나라 사람들은 합하였으니, 이는 두 속 널을 함께 겉 널 속에 두고 다른 물건으로 격리시키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사람들은 …… 돌아갔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간오(簡傲)〉에 "(진(晉)나라) 여안(呂安)이 (절친) 혜강(嵇康)을 찾아갔는데, 마침 혜강은 없고 그의 형 희(喜)가 나와서 맞이하였다. 그러자 여안은 방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문 위에 '봉'자를 써서 붙이고 떠났다.[安後來, 值康不在, 喜出戶延之. 不入, 題門上作鳳字而去.]"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손이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는 뜻이다. 글자가 …… 범조(凡鳥) '봉'자를 파자(破字)하면 범조가 된다. 이는 시원찮은 새라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이나 용렬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을 말한다. 당나라 …… 못한다 왕유(王維)의 〈춘일여배적과신창리방여일인불우(春日與裴迪過新昌里訪呂逸人不遇)〉라는 시에 나온다. 과방(過房) 아들이 없을 경우 형제 또는 일가의 친척을 양자로 삼는 일, 또는 그 사람을 말한다. 조조(曹操) 155~220. 중국(中國) 후한(後漢) 말기(末期)의 무장(武將)이다. 본성은 하후(夏侯)이고 자는 맹덕(孟德)이다. 황건(黃巾)의 난(亂)을 다스려 군공(軍功)을 세웠다. 원소(袁紹)와 같이 도적과 흉노(匈奴)를 토벌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동탁(董卓)의 사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후승(夏侯嵩) 본래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 ?~194)이다. 자는 거고(巨高)다. 성은 본래 하후씨(夏侯氏)였는데, 환관 조등(曹騰)의 수양아들이 되었다. 진 강공(秦康公)이 …… 이르렀기에 춘추 시대 진 강공이 망명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외삼촌 중이(重耳), 즉 진 문공(晉文公)을 전송할 때에 "내 외삼촌을 전송하여 위양에 이르렀노라.[我送舅氏, 曰至渭陽.]"라고 노래한 내용이 《시경》 〈진풍(秦風) 위양(渭陽)〉에 나온다. 주자가 …… 주었기에 주희가 사위 황간(黃榦)에게 한 폭의 사자 그림을 보내면서, '외손 황로(黃輅)가 떨쳐 일어나 포효하는 사자를 닮기 바란다.'라고 하는 내용이 《주자대전 속집(朱子大全 續集)》 권1 〈답황직경(答黃直卿)〉에 보인다. 또 《서산문집(西山文集)》 권35 〈화사첩(畫師帖)〉에 "주 문공이 육탐미가 그린 사자상을 그 외손 황로에게 보내 주었다. 황로의 자는 자목이니, 면재의 장자이다.[朱文公以陸探微所畫師子像, 遺其外孫黄輅. 輅字子木, 勉齋長子也.]"라는 내용이 나온다. 육탐미는 육조(六朝) 시대 송(宋)나라의 유명한 화가이다. 황보밀(皇甫謐) 215~282. 위(魏)나라와 진(晋)나라 사이의 의사이자 문학가이다. 자는 사안(士安)이고 어릴 때 이름은 정(靜)이며, 현안 선생(玄晏先生)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좌태충(左太冲)이 …… 성대해졌다 태충은 좌사(左思, ?~?)의 자이다. 서진(西晉)의 시인이다. 좌사가 10년 동안 구상하여 〈삼도부(三都賦)〉, 즉 〈촉도부(蜀都賦)〉, 〈오도부(吳都賦)〉, 〈위도부(魏都賦)〉를 지었는데, 황보밀이 서문을 써주어 칭찬하자 부귀한 자들이 서로 다투어 베껴서 낙양의 종이값이 폭등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진서(晋書)》 권92 〈문원전(文苑傳) 좌사(左思)〉 참마(驂馬) 《예기》 〈단궁 상〉의 주에 "수레에 멍에를 멜 때, 가운데 두 마리는 복마(服馬), 양쪽 바깥의 각각 한 마리는 참마가 된다.[駕車者, 中兩馬爲服馬, 兩旁各一馬爲驂馬.]"라고 하였다. 공자가 …… 행하라 《예기》 〈단궁 상〉에 나온다. 만사(挽詞) 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이다. 良字季常 대본에는 '謖字幼常'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수정하였다. 遇於一哀而出涕 대본에는 '一於遇哀而哭之'로 되어 있는데, 《예기》 〈단궁 상〉의 원문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겨울 국화를 보고 감회을 기록함 見冬菊識感 내가 갑자년(1924) 겨울에 (고부(古阜)) 우일면(雨日面) 남산재(南山齋)에 머물고 있었다. 때가 10월 상순이라 산에 달이 휘영청 밝고 북풍의 찬바람이 사람에게 불었으므로 뜰 가를 배회하면서 세모(歲暮 연말)의 감회를 견디기 어려웠다. 이때 마침 김군 장환(長煥)이 나에게 한 떨기 노란 국화를 주었는데, 찬란한 황금빛 꽃이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의 자태에 손색이 없었다. 이에 내가 한숨 쉬며 탄식하고 말하기를 "가을바람이 한번 불어오면 향기로운 많은 꽃이 다 시들어 서리 맞은 국화가 너무 귀할 만한데, 하물며 눈 속의 국화에 있어서이겠는가. 오늘날의 선비는 눈 내리는 날의 국화이니, 누가 능히 거듭된 변란을 두루 다 겪으면서도 절조를 더욱 엄하게 하여 너와 함께 돌아가겠는가. 무릇 국화에 대한 사랑은 정절(靖節)380)의 뒤에 생겼으니, 우리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다만 오늘날 인류가 짐승처럼 되고 윤리가 식은 재처럼 사라져버렸으니, 어찌 다만 참절(僭竊)한 재앙 속에 얹혀사는 노비381)일 뿐이겠는가. 내가 원하건대 많은 국내 지사들은 향기를 품고 절개를 지켜서 아홉 번 죽어도 변치 않으며, 지금 세상의 겨울 국화가 되어 이에 정절의 가을 국화보다 빛남이 있기를 맹세하라."라고 하였다. 甲子冬, 余留雨日之南山齋. 時値十月上旬, 山月皎皎, 朔風射人, 彷徨庭際, 叵耐歲暮之感. 適金君長煥贈余以一朶黃菊, 金葩粲粲, 不減重陽色態. 余喟然而嘆曰: "秋風一起, 群芳摧盡, 霜菊已爲可貴, 況雪菊乎? 士之今日, 菊之雪天, 疇能歷盡層層變難, 而節操彌厲, 與爾同歸? 夫菊之愛, 靖節之後, 我何敢言? 顧今人類翔走, 倫理灰盡, 豈但寄奴僭竊之禍? 吾願海內志士, 抱香持節, 九死不變, 誓作今天下冬菊, 于以有光靖節之秋菊.". 국화에 …… 정절(靖節) 정절은 도잠(陶潛, 365~427)의 시호이다. 자는 연명(淵明) 또는 원량(元亮)이다. 도연명은 국화를 매우 좋아하였다. 국화는 그의 많은 작품에 보이는데, 《도연명집(陶淵明集)》 권2 〈화곽주부(和郭主簿)〉에서는 "우뚝 서리 아래 걸물이 되었다.[卓爲霜下傑]"라고 국화를 칭송하기도 하였다. 참절(僭竊)한 …… 노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처참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말한다. 후창이 이 글을 쓴 때가 갑자년(1924)인데, 이미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져 온 나라의 백성이 일제의 가혹한 통치 아래에 있었다.

상세정보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