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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숙 함재 공께 올리는 제문 【을유년(1945)】 祭族叔涵齋公文【乙酉】 옛사람 용감히 옛 관습을 벗어나서 勇脫舊習,단번에 지극한 학문에 이르렀고 一變至學,〈치의(緇衣)〉81)는 현인 좋아하고 緇衣好賢,〈항백(巷伯)〉82)는 악인 미워했는데 巷伯惡惡,지금의 시대에 이르러는 于今之世,공에게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惟於公覿.교활한 저 섬 오랑캐들 猾彼島夷,우리 팔도강산 뒤엎고 覆我八域,세상 사람들 거기 빌붙어서 世方親附,온 나라가 희희낙락 하는데 熙熙樂國,공께서는 홀로 말하셨네 公獨有言,며칠 뒤 저들 망할 거라고. 彼亡不日.그 음성과 안색 준엄하시니 聲色俱厲,곁에서 보는 이 혀 빼 물었네. 傍觀吐舌.다만 영남에 음기가 일어 惟嶺有陰,교활한 섬 오랑캐와 같이 同島夷猾,우리 사문(師門)을 해코지하며 賊我師門,울타리를 부수고 집까지 허물었고83) 撤藩毁室.사람들 마냥 넋을 잃은 듯 衆方褫魄,거꾸로 그것을 잘한다 했는데84) 反謂之得,공은 홀로 의리에 근거하여 버티며 公獨據義,동지를 연합하여 따지며 꾸짖으셨네. 聯衆討斥.오직 이 두 가지 일을 惟此二事,평생의 뜻과 업으로 삼았으니 生平志業,자나깨나 못 잊는 한은 寤寐之恨,그 뿌리를 다 뽑아내지 못함이었지요. 未拔根窟.아, 공께서 떠나가신지 嗟公觀化,오백일이 안 되었는데 日未五百,하늘이 우리 동국 도우시어 天佑大東,지뢰의 복괘85)가 돌아왔습니다. 地雷來復.그늘을 비춰주던 해와 달이 照陰日月,홀연히 그 빛을 잃었고 忽然失色,나라의 천명 새로이 시작되고 邦命維新,스승에 대한 무함도 절로 씻겼으니 師誣自雪,먼저 멀리 떠난다 하지 마시고 莫云先逝,공의 생전 자리 물리지 않았으니 象生不撤,부디 이곳에 내리고 오르며 載陟載降,혼령이여 저희를 기쁘게 해주소서. 靈其慰悅.저 춘추의 의리는 夫春秋義,하늘과 땅의 길이고 법이니 天地經法,선비가 이를 잃으면 士而失此,나머지는 말하기에 부족한데 餘不足說,공께서는 이를 얻으시어 公旣得之,큰 뜻을 바로 세우셨으니 大者斯立,그 모든 미담과 선행이 凡厥美善,다 여기에서 비롯했습니다. 皆從此出.여든살 느른히 쇠약하신 몸 大耋癃衰,어쩌다 몸조섭하는 방도를 놓치니 攝儀或失,어지러이 뒤섞인 집안 일들 家政紛錯,어떻게 능히 두루 살피겠습니까 何能周察,공은 이 때문에 병 앓으시는데 以是病公,저는 하나도 보살펴드리지 못했습니다. 太沒諒悉.아, 이 못난 후생은 嗟余無狀,공의 애틋한 사랑을 입어 荷公愛惜,우러러 숭앙하는 의리가 景仰義氣,생과 사에 다름이 없는데 于存于沒,상제(祥祭) 한 달 전에야 前祥一朔,비로소 술잔 올리오니 始致誄酌,정의에 맞추지 못함 부끄럽고 愧不稱情,제문의 모양 너무 소략합니다. 辭儀太略.밝으신 영령 계시거든 不昧者存,부디 오시어 살펴 주소서. 庶垂鑑格. 勇脫舊習, 一變至學, 緇衣好賢, 巷伯惡惡, 于今之世, 惟於公覿。 猾彼島夷, 覆我八域, 世方親附, 熙熙樂國, 公獨有言, 彼亡不日, 聲色俱厲, 傍觀吐舌, 惟嶺有陰, 同島夷猾, 賊我師門, 撤藩毁室, 衆方褫魄, 反謂之得, 公獨據義, 聯衆討斥, 惟此二事, 生平志業, 寤寐之恨, 未拔根窟, 嗟公觀化, 日未五百, 天佑大東, 地雷來復, 照陰日月, 忽然失色, 邦命維新, 師誣自雪, 莫云先逝, 象生不撤, 載陟載降, 靈其慰悅, 夫春秋義, 天地經法, 士而失此, 餘不足說, 公旣得之, 大者斯立, 凡厥美善, 皆從此出, 大耋癃衰, 攝儀或失, 家政紛錯, 何能周察, 以是病公, 太沒諒悉, 嗟余無狀, 荷公愛惜, 景仰義氣, 于存于沒, 前祥一朔, 始致誄酌, 愧不稱情, 辭儀太略, 不昧者存, 庶垂鑑格。 치의(緇衣) 《시경》의 편명인데, 정(鄭) 나라 무공(武公)의 현인에 대한 애호를 찬미한 시이다. 《예기(禮記)》에는 "현인을 좋아하기를 치의편처럼 하고, 악인을 미워하기를 항백편처럼 하면, 벼슬을 주어 유인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성실해질 것이며, 형벌을 시험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모두 복종할 것이다.[好賢如緇衣, 惡惡如巷伯, 則爵不瀆而民作愿, 刑不試而民咸服。]"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항백(巷伯) 《시경》의 편명인데, 환관이 주(周) 나라 조정의 참소하는 간신들을 미워하며 고발한 시이다. 울타리……허물었고 간재선생의 맡손자인 전일효(田鎰孝 자 田士)을 고소하여 끌고 가 구금한 일을 가리킨다. 거꾸로……했는데 간재선생의 문인 김용승(金容承) 등은 처음에는 후창과 함께 오진영을 성토하였으나 나중에는 돌아서기도 하였다. 지뢰의 복괘[地雷復卦] 《주역》 육십사괘 중 5개의 음표 밑에 하나의 양효가 있는 것으로, 땅 밑에서 우레가 움직이듯이 가득 쌓인 음기 속에서 양기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서는 일제가 항복하고 광복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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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74) 소공께 올리는 제문 【기축년(1949)】 祭悅齋蘇公文【己丑】 아, 소공의 집안은 嗚呼惟公,대대로 문장이 뛰어났는데 家世文章,400년에 걸쳐서 閱四百年,곤암과 양곡75) 양곡(陽谷)은 소세양(蘇世讓 1486~1562)으로 자는 언겸(彦謙)이며, 중종 때 문과급제 하고 홍문관직제학ㆍ이조판서ㆍ좌찬성 등을 하였다.의 가업을 이어오고 繼述困陽,공의 부자에 이르러 至公父子,옛 가업이 다시 창성하여 舊業再昌,아버지는 갑과에 공은 을과에 올라76) 父甲子乙,전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後先上庠,명성과 인망이 성대해져서 蔚然聲望,남쪽 지방의 대가(大家)가 되었습니다. 南服大方.문장을 통하여 도에 나아가며 因文入道,저문 빛의 노년에 이르렀는데 公年暮光,누구에게 나아가 질정을 받았는가 于何就正,공은 구산(臼山)의 당에 올라 升臼山堂,성(誠)과 경(敬)을 기틀로 삼고 樞紐誠敬,간략함과 자세함을 겸비하여 輪翼約詳.사림의 빼어난 인재가 되고 翹楚士林,사문의 높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高第門墻,그런데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夫何山頹,밝은 해가 구름에 가려질듯 하였는데 日爲雲障.공께서 한 번 붓을 들자 公擧一筆,사도(師道)가 다시 정상을 회복하였습니다. 師道復常,옛 사람이 순(舜)임금 공자(孔子)님 在昔舜孔이윤(伊尹)과 백리해(白里奚)를 비방하니 伊奚之謗,맹자가 변증하여 가리기를 孟聖有辨,마치 밭에 잡초 뽑듯이 하였습니다. 如苗去稂,하물며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矧父事地,어찌 감히 힘쓰지 않았겠습니까.77) 豈敢不蘉,의리를 이미 다하였고 義旣其盡,공훈 또한 세상에 드러났는데 功亦其彰,사람들은 과연 무슨 마음으로 人獨何心,지나쳤다고 한단 말입니까. 有謂過當?아, 저는 소공을 嗟余于公,높은 산처럼 우러러보았습니다. 高山其望,저의 아버지와 동갑이었고 先君同庚,친척의 정의도 오래되었습니다. 戚誼亦長.갑자 을미에 선생님을 지키다가 甲乙衛師,함께 음해(陰害)를 받았고78) 同受陰戕,생사와 영욕의 즈음에는 死生榮辱,낭패(狼狽)처럼79) 의지하기도 하였습니다. 狽之依狼.공께서 계실 때는 公之在世,동량처럼 믿었는데 恃若棟樑,공께서 떠나 가시고 나니 自公之逝,그 외롭고 쓸쓸함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柰如踽凉,넋은 녹아 부스러지고 魂爲之銷,눈물은 퍼붓는 비처럼 흐릅니다. 淚爲之滂.그러나 공은 어진 분이라 然公仁者,하늘이 장수와 건강을 주었고, 天錫壽康,순리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存順沒寧,서운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만 其誰憾傷,선비들은 사표(師表)를 잃었고 士失師表,나라에는 어진 인재가 없어졌으니 邦無賢良,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是爲幷世,공의 죽음을 한탄합니다. 同歎云亡.아아, 嗚呼!공께서는 일찍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公曾謂余,"훗날 내가 죽거든 他日我喪,와서 신주를 써야 할 것이니 而來題主,먼 고을에 산다고 꺼리지 마시고 勿憚遠鄕,묘지의 명문도 함께 銘墓之文,지어 띄워 주시게." 而亦揄揚.제가 비록 적임자는 아닙니다만 顧雖匪人,어찌 감히 그 말씀을 잊었겠습니까. 亦何敢忘?그런데 뜻밖에 그 때 孰謂當日,부고를 제 때에 못 받았고 訃車未遑,몸마저 오랫동안 아파서 身亦久病,이제야 술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今始奠觴,사람의 일이 잘 맞기 어려운 것이 人事難協,멀리서 못 만나는 삼성과 상성80) 같으니, 有若參商,저승과 이승 간에 약속 져버린 부끄러움에 愧負幽明,이리저리 머뭇거리며 서성일 뿐입니다. 躑躅彷徨.아아, 嗚呼!글은 여기에서 마치지만 辭止於此,슬픈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無窮哀腸.높으신 밝은 혼령께서는 尊靈不昧,굽어 혜량하여 주십시오. 庶垂鑑量애통하고 슬픕니다. 痛哉哀哉흠향하소서! 尙饗! . 嗚呼惟公, 家世文章, 閱四百年, 繼述困陽, 至公父子, 舊業再昌, 父甲子乙, 後先上庠, 蔚然聲望, 南服大方。 因文入道, 公年暮光, 于何就正, 升臼山堂, 樞紐誠敬, 輪翼約詳。 翹楚士林, 高第門墻, 夫何山頹, 日爲雲障。 公擧一筆, 師道復常, 在昔舜孔, 伊奚之謗, 孟聖有辨, 如苗去稂, 矧父事地, 豈敢不蘉, 義旣其盡, 功亦其彰, 人獨何心有謂過當? 嗟余于公, 高山其望, 先君同庚, 戚誼亦長, 甲乙衛師, 同受陰戕, 死生榮辱, 狽之依狼。 公之在世, 恃若棟樑, 自公之逝, 柰如踽凉, 魂爲之銷, 淚爲之滂。 然公仁者, 天錫壽康, 存順沒寧, 其誰憾傷, 士失師表, 邦無賢良, 是爲幷世同歎云亡。 嗚呼! 公曾謂余, 他日我喪, 而來題主, 勿憚遠鄕, 銘墓之文, 而亦揄揚。 顧雖匪人, 亦何敢忘? 孰謂當日, 訃車未遑, 身亦久病, 今始奠觴, 人事難協, 有若參商, 愧負幽明, 躑躅彷徨。 嗚呼! 辭止於此, 無窮哀腸。 尊靈不昧, 庶垂鑑量。 痛哉哀哉! 尙饗! 열재 소학규(蘇學奎 1859~1948)의 호로서, 자는 화지(化知)이다. 만재 소휘식(晩齋蘇輝植 1837~1910)의 아들로서,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서 태어났다. 곤암과 양곡 곤암(困庵)은 소세량(蘇世良 1476~1528)으로 자는 원우(元佑)이며, 중종 때 문과급제 하고 홍문관직제학ㆍ동부승지ㆍ대사간 등을 하였다. 아버지……올라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부친 소휘식(蘇輝植)은 1879년 식년 진사 갑과에, 아들 소학규(蘇學奎)는 1891년 증광시 진사 병과에 합격하여, 김택술의 기록과 약간 다르다. 하물며……않았겠습니까 소학규의 《열재집(悅齋集)》행장을 보면, 공이 부친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이라면 별세 후 십여 년간 산소터를 얻고자 지관과 함께 각처를 탐색한 것 뿐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갑자……받았고 1924~5년간에 간재 문하에서 일어난 분쟁을 말한다. 간재선생이 1922년(임술) 7월에 별세한 후, 선생의 문집을 일제의 허가를 받아서라도 간행하자는 쪽과 반대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간행하지 말자는 쪽의 주장이 대립하였다, 전자의 오진영(吳震泳, 1868~1944) 등은 진주에서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자, 후자의 김택술ㆍ최병심(崔秉心, 1874~1957) 등은 유림에 통문을 돌려 간행의 부당성을 말하며 불매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오진영 등이 손해를 입었다며 전주 검사국에 고소를 하였다. 낭패(狼狽)처럼 서로 긴밀한 사이를 말한다. 낭과 패는 모두 이리의 일종인데 낭은 앞발이 길고 뒷발이 짧으며, 패는 앞발이 짧고 뒷발이 길다. 이로 인해 낭과 패는 서로 의지하여 함께 다니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이다.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 삼성(參星)은 동쪽 하늘에, 상성(商星)은 서쪽 하늘에 뜨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두 별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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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재 황공께 두 번째 올리는 제문 再祭小心齋黃公文 유세차 정축년(1937) 봄, 소심재 황공이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나 영연을 장차 치우려고 합니다. 공은 사문의 큰 시비(是非) 문제에 있어서 이치를 분명하게 보았고 이론을 바르게 세웠으며 의리를 엄격하게 지키셨으니 사실상 모든 문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동문인 저 김택술은 공의 이런 모습에 감복(感服)하는 심정이 다른 사람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뜻대로 할 수가 없고 길마저 막혔으니 직접 공의 영연에 나아가 곡하지 못하여 초심을 저버리게 될까 대단히 두려웠습니다. 이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길을 나서서 어렵사리 400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영전에 애통한 마음을 한 번 고하였습니다.돌아와서 공의 논저를 읽고 여론을 들은 뒤에는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더욱 알게 되었고,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볼만한 글이라고 생각하였으니, 앞서 지어 보낸 제문이 대단히 거칠어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대상(大祥)을 이틀 앞둔 2월 20일 무신날에 삼가 한 편의 글을 지어 다음과 같이 고합니다.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재지가 특출하시어 이른 나이에 대현(大賢)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셨습니다. 그때 선생께서는 '소심(小心)'이라는 이름을 집에 붙여주셔서 공의 뛰어난 기질을 절제하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문로(門路)의 바름과 조행(操行)의 성실함이 여기에서 순수해지게 되었습니다. 성(誠)과 진(眞)을 근본으로 하고 공허한 예와 가식적인 의식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을 학문의 기준으로 삼았고, 지식과 견문을 위주로 할 뿐 높은 문장 실력과 눈에 띄는 행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았습니다. 전제(田制)와 병술(兵術)에 대해서도 모두 자세히 강구하였으니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뜻이 간절하셨습니다. 이단의 말과 잘못된 학설을 모두 변별하여 물리쳤으니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의리가 우뚝하셨습니다.대개 공은 지행(志行)이 높고 조예가 깊어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는데, 거기다가 선생님께 배워 안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따라서 시비(是非)를 가리는 문제 앞에서 이치를 분명하게 알고 의론을 바르게 내세우고 의리가 엄정했던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런 것만을 가지고 공이 훌륭한 인물이라 평가하겠습니까.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공론(公論)은 지극히 공정하게 결정되었습니다. 저들69)은 호남 사람들이 거짓 의리로 한풀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은 거처가 그들과 가까워서 친하게 지낸 것입니다. 호남 사람들과는 함께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고 일에 관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방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공은 40년의 오랜 세월 동안 선생님의 문하에서 배출된 문도들 가운데 나이와 덕(德)으로 볼 때 1,500명의 문도 중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공의 한 마디 말씀은 정려(鼎呂)70)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저들이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과 호남 사람들의 의리가 참인 줄을 압니다. 대개 이 의리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선사(先師, 돌아가신 스승)는 선사가 될 수 없고 《춘추》의 의리도 어두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공께서 저들의 무함을 확실히 물리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공께서 하신 일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 말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아, 저는 공과 살아서는 의리를 함께 하고 죽어서는 같은 전기에 오르자71)는 결의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현동(玄洞)72)에서 한 번 뵌 뒤로 10여 년이 지나도록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은 적이 전혀 없었는데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권면하고 독려해 주셨습니다. 마음속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이것이 어찌 인간의 도리를 다한 것이라 하겠습니까.지금 공의 고택에 와 보니 초목은 곱게 자라고 책에는 공의 손때가 남아있습니다. 맑은 운치와 뛰어난 아취(雅趣)가 공을 처음 뵙던 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슬픔에 젖은 상주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효성과 우애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세 아들의 전형(典型)이 공과 매우 닮았습니다. 그들의 뜻과 식견을 살펴보니 집안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합니다.73) 이것으로 지난날 공의 집에 한번도 가지 못했던 한이 충분히 위로가 되었습니다. 서로 바로잡아 주고 서로 보살피며 덕(德)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이들에게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영령께서는 가만히 도우셔서 저희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평생에 의로 바로잡으신 가르침과 인을 배양하신 덕을 저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아, 슬픕니다! 維歲丁丑之春, 小心齋黃公沒已三霜, 而靈將撤矣。 同門生金澤述以公於斯文大是非, 見理明、立論正、持義嚴, 實全門一人, 感服之心, 非餘人比也。 而貧病掣之, 道路梗焉, 大懼不克躬哭象生, 有負初心, 乃銳意登程, 間關行四百里, 一慟于靈前。 退而讀夫論著, 聆諸輿論, 益知所未知, 而宗廟百官俱可得見, 則深愧夫前寄緘辭之太涉草草。 復以大祥前二日, 二月二十日戊申, 謹掇一文而告之曰: 嗚呼! 以公魁偉之資質、過人之英邁, 早就正于大賢之門, 被扁齋以小心, 而裁其英偉之氣。 門路之正、操履之實, 於是乎純如矣。 誠眞爲本而虛禮飾儀之視以無物者, 爲學之準的識見爲主而高文卓行之亦不足貴者。 論人之繩尺田制兵謀無不備究, 眷眷乎經邦濟民之志, 異言莠說幷皆辨斥, 堂堂乎衛正闢邪之義。 蓋其志行高、造詣深, 抱負大禀之資, 而得之師者旣如是, 則當是非而理明論正義嚴, 乃固其所也。 豈可專以此大公也哉! 雖然, 今日之公論則至公而定矣。 彼方謂湖爲假義逞憾, 然若公則於彼居近而親也。 於湖則謀不同事不涉也, 而所誅褒者如此。 且於師門爲四十年舊徒, 而巋然齒德居千五百之首, 則一言之重有加於鼎呂者。 以是, 人皆知彼罪之莫逃, 湖義之是眞, 蓋此義不明則先師非先師而春秋晦矣。 而公辭闢彼誣之廓如也, 由此。 而謂公大事無有加焉者, 豈不可乎? 噫! 余於公猥託生同義死同傳之契, 而玄洞一拜歲, 經十餘未一造門, 而穩承提命俾卒累書勉責之惠。 反顧于中, 此何人斯! 今來故宅, 卉木有彩, 緗帙留澤, 淸韻逸趣有如當日。 僉哀欒欒, 孝友可敬, 而三哥之典型酷似乎公。 觀其志識, 箕裘有在, 旣足以慰昔未造門之恨。 互規胥觀, 用資進德之益者, 亦在乎是。 何幸何幸! 伏惟尊靈冥佑陰隲, 使之相長, 有以不負平日義方之敎, 仁輔之德也。 嗚呼哀哉! 저들 오진영(吳震泳)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유림을 가리킨다. 정려(鼎呂) 구정(九鼎: 왕국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솥)과 대려(大呂: 종묘의 큰 종)를 합쳐 말한 것으로, 국가의 큰 정치 및 이를 담당하는 공경을 말한다. 죽어서는 같은 전기에 오르자 사마광(司馬光)이 범진(范鎭)과 의기투합하여 "나와 너는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전기를 함께할 것이다.[吾與子生同志死當同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5》 현동(玄洞)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의 마을이다. 집안의……합니다 소심재의 아들들이 학문에 힘써서 가업을 계승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기구(箕裘)는 키와 가죽옷으로, 가업(家業)을 의미한다. 《예기》〈학기(學記)〉에 "좋은 대장장이 아들은 반드시 가죽옷 꿰매는 것을 익히고, 뛰어난 궁사의 아들은 키 만드는 일을 익힌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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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론 상 【1944년】 正統論上 【甲申】 정(正)은 천하를 정도로써 얻은 것이고, 통(統)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니, 비록 통일했지만 정도로써 얻지 않았다면 정통(正統)이 될 수 없고, 비록 정도로써 얻었지만 통일하지 못했다면 정통이 될 수 없다. 한번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아 이러한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삼대(三代 하은주(夏殷周)) 이외에 정통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漢)나라와 명(明)나라뿐이다. 예를 들면 당(唐)나라가 정치를 밝히고 송(宋)나라가 관인(寬仁)을 숭상하여 국운을 장구하게 누렸지만 그들이 정도로써 얻지 않은 것은 동일하니 또한 정통에 들어갈 수 없다.묻기를 "그렇다면 그대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범례(凡例)에 어긋나는 것이니190),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정한 것이기 때문에 의리를 잘 살펴보는 자는 오직 옳은 것만을 좇고, 그 말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는 묻지 않는다. 《자치통감강목》에서 이미 진(秦)나라, 진(晉)나라, 수(隋)나라가 정도로써 얻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들 나라가 능히 통일했기 때문에 정통으로 인정한 것은191) 이러한 예를 미룬 것이다. 만일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192)이 처형되지 않고 나라를 자손에게 전해주었다면193) 또한 장차 정통으로 인정하겠는가. 이 때문에 나는 《자치통감강목》을 미완성의 책이라고 본다. 주자도 진실로 수정(修正)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무릇 《시경》 중에서 정(正)이 될 수 없는 것은 변풍(變風)과 변아(變雅)194)가 되니, 진(秦)나라, 진(晉)나라, 수(隋)나라, 당(唐)나라, 송(宋)나라를 변통(變統)이라 이르면 진실로 옳을 것이다.사군자가 입론(立論)할 때에는 마땅히 충분히 지당(至當)한 것으로 귀결시켜 선에 권장하는 바를 두고 악에 징계하는 바를 두게 하면, 저 사지(私智)와 강한 힘으로 못하는 짓이 없이 천하를 취하는 자일지라도 오히려 후세의 사책(史策)에서 비난하고 주벌하는 것을 꺼릴 것이다. 예를 들면 조조(曹操)가 한나라 제위(帝位) 곁을 배회하면서도 감히 바로 취하지 못한 것과 같다.195) 그러니 선비 가운데 붓을 잡은 자가 다만 정(正)과 부정(不正)을 궁구하지 않고 그 이룬 것만 보고 정통으로 인정한다면 무엇을 권장하고 경계할 것인가. 만일 《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하는 날에 이러한 말로써 명백히 아뢰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면, 주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를 따르지 않았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묻기를 "그대의 말과 같다면 후세에 다시는 정통이 없이 몇천 년의 변통 가운데 지나가 버릴 것이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90일간의 봄에 맑은 날이 항상 적고 예로부터 어지러운 날이 항상 많으니, 세상에 변이 많고 정이 적은 것도 이러한 이치이다. 우선 변통이라고 말하지 말라. 비록 무통(無統)196)이라도 어찌하겠는가. 육조(六朝)197), 오계(五季)198)와 지금의 천하는 다만 무통일 뿐이다. 그러나 한나라가 망한 때부터 명나라가 일어날 때까지 천여 년에 비로소 정통이 있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후대에 결국 정통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만일 지금 세상에 정도로써 천하를 얻어 왕노릇 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정통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묻기를 "이러한 것은 옳다. 또 주자가 천하를 통일시키지 못하면 또한 정통이 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 촉한(蜀漢)의 정통에 대해서 다른 말이 없으니199)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비록 천하를 잃고 겨우 한쪽 모퉁이를 보존하였지만 그 선대의 전통이 그래도 남아 있어 진실로 없어지지 않았다면 이를 빼앗을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 비방하겠는가. 다만 《자치통감강목》에서 동주(東周)의 임금200)이 정통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라고 하였다.묻기를 "동진(東晉)과 남송(南宋)은 어떠한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이는 또한 마땅히 서진(西晉)과 북송(北宋)을 계승한 변통으로 인정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正者得天下以正也, 統者統一天下也, 雖統一, 而得不以正 則不得爲正統, 雖得之以正, 而不能統一則不得爲正統矣. 試質千人萬人, 此言不當乎理則已, 不然, 三代以外, 可得爲正統者, 惟漢明而已. 如唐之明政治, 宋之尙寬仁, 而享國長久, 其得不以正則均矣, 亦不可與於正統也. 曰: "然則子違乎《綱目》之例, 柰何?". 曰: "義理者天下之公, 故善觀理者惟是是從, 不問其言之出自何人. 《綱目》旣於秦晉隋之得不以正者, 以其能統一, 與以正統, 推是例也.". "若使新莽身不受誅, 而傳之子孫, 亦將與以正統耶?". 吾故曰: "《綱目》未成之書, 朱子固以未修正爲恨矣. 夫詩之不得爲正者, 爲變風變雅, 秦晉隋唐宋謂之變統則固可矣. 夫士君子立論, 當以十分至當者爲歸, 使善有所勸, 惡有所懲, 彼以私智强力, 無所不至而取天下者, 猶憚後世史策之譏誅, 如曹操者徘徊漢鼎之傍, 而不敢直取, 士之秉筆者, 顧不究正與不正, 但視其所成與以正統, 則何所勸戒乎? 如使編《綱目》之日, 有人以此說明白稟質, 則安知朱子不莞爾而從之也耶?". 曰: "如子之言, 後世更無正統, 而幾千年變統中過了矣, 豈有是理?". 余曰: "九十之春, 晴景常少, 從古以來, 亂日常多, 世之多變少正亦是理也. 且莫說變統. 雖無統, 柰何? 若六朝五季與今之天下直無統耳. 然自漢亡至明興, 千有餘年, 始有正統, 亦何憂後世之終無正統乎? 使今世有以正得天下而王者, 豈不爲正統乎?". 曰: "此則然矣. 朱子又以不能一天下, 亦不得爲正統, 而《綱目》蜀漢之正統, 無異辭, 何也?". 曰: "雖失區宇而僅保一隅, 其先世之正統猶在, 苟不至於亡, 則不可得而奪之也, 吾何間焉? 但於《綱目》, 東周君之不與正統, 深疑之也.". "東晉南宋, 如之何?". 曰: "此亦當與其繼西晉北宋之變統矣.".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 것이니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는 당나라를 정통으로 분류하였다. 《자치통감강목》에서 …… 것은 주자는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 "무릇 정통은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 진(晉)나라, 수(隋)나라, 당(唐)나라를 이른다.[凡正統, 謂周秦漢晉隋唐.]"라고 하였다. 왕망(王莽) B.C.145~A.D.23. 전한의 정치가이다. 자는 거군(巨君)이다.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신(新)으로 명명하였다. 한(漢)나라 유수(劉秀)에게 피살되었다. 재위 기간은 8~23년이다. 신(新)을 …… 전해주었다면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는 왕망을 '찬적(簒賊)'으로 분류했는데, 이는 "정통에게서 찬위(簒位)했지만 자손에게 전하지 못한 것을 이른다.[謂簒位于統, 而不及傳世者.]"라고 하였다. 변풍(變風)과 변아(變雅) 《모시(毛詩)》 〈대서(大序)〉에 "왕도가 쇠퇴하여 예의가 폐해지고 정교가 잘못되니 나라마다 정치가 다르고 집집마다 풍속이 달라져서 변풍과 변아가 지어졌다.[至于王道衰, 禮儀廢, 政敎失, 國異政, 家殊俗, 而變風變雅作矣.]"라고 하였다. 《시경》에서 변풍(變風)은 〈패풍(邶風)〉부터 〈빈풍(豳風)〉까지 13개국의 작품을 가리키며, 변아(變雅)는 〈소아(小雅) 유월(六月)〉 이후의 작품을 이르는 변소아(變小雅)와 〈대아(大雅) 민로(民勞)〉 이후의 작품을 이르는 변대아(變大雅)를 합하여 말한 것이다. 조조(曹操)가 …… 같다 조조는 중국(中國) 후한(後漢) 말기(末期)의 무장(武將)으로서 제위를 차지하고 싶어하면서도 명분과 의리를 두려워하여 찬탈하지는 않았는데, 뒤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찬탈하였다. 무통(無統)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 무통(無統)은 주(周)와 진(秦) 사이 24년, 진(秦)과 한(漢) 사이 4년, 한(漢)과 진(晉) 사이 16년, 진(晉)과 수(隋) 사이 170년, 수(唐)와 당(隋) 사이 5년, 오대(五代) 53년을 이른다. 육조(六朝) 양자강 남쪽의 건강(建康)에 도읍을 정한 오(吳)와 동진(東晉), 그리고 남조(南朝)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을 가리킨다. 오계(五季) 오대(五代)이다. 당말(唐末)의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를 가리킨다. 촉한(蜀漢)의 …… 없으니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한 헌제(漢獻帝)가 폐위된 건안(建安) 25년부터 위(魏)를 정통으로 삼았는데, 주자는 《자치통감강목》에서 위의 기년(紀年)을 버리고 유비(劉備)가 세운 촉한을 정통으로 삼았다. 동주(東周)의 임금 평왕(平王)이 견융(犬戎)을 피해 동쪽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후를 '동주(東周)' 혹은 '성주(成周)'라고 한다. 이때부터 주 왕실의 힘은 약해졌고 정권은 제후에 의해 유지되어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춘추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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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질 극범의 자에 대한 설 【1922년】 龜姪克範字說 【壬戌】 거북아! 너는 사령(四靈)184)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 낙서(洛書)185)는 큰 이치인데 하늘이 반드시 너에게 이를 드러내고, 우(禹)임금과 기자(箕子) 같은 성인이 이를 취하여 〈홍범(洪範)〉186)을 부연(敷衍)하였으니, 기이하도다.형귀(炯龜)야! 너는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스러운 자가 아니냐. 인도(人道)가 〈홍범〉에 크게 갖춰져 있는 만큼 반드시 이를 능히 다한 뒤에 가장 신령스러운 자가 되는 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니, 쉽겠는가. 그러므로 형귀의 이름에 '극범(克範)'으로 자(字)를 지었으니, 이 〈홍범〉을 능히 잘하여 많은 사람들보다 걸출하기를 영귀(靈龜)가 (모든) 곤충 중에 빼어난 것과 같게 하라. 〈홍범〉의 도가 광대하여 요령으로는 어렵다. 절실하고 가까운 일에 착수하되 마땅히 이오사(二五事)187)로부터 시작해야 하니, 이는 또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아! 거북이는 장수하는 동물이고, 수(壽)는 〈홍범〉의 오복(五福)188) 가운데 으뜸이니, 거북이처럼 (장수하고) 〈홍범〉에 능하면 이른바 '길이 천명에 합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다.189)'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이 설을 지어 이로써 장수와 복의 축원을 대신한다. 龜乎! 爾非四靈之一乎? 洛書理之大者也, 天必於爾焉著之, 禹箕之聖, 取以衍〈洪範〉, 異哉! 炯龜乎! 爾非萬物中最靈者乎! 人之道大備於〈洪範〉, 而必能盡乎此然後, 不愧爲最靈, 易乎哉? 故於炯龜之名, 字之以克範乎爾, 其克乎此範, 出拔於人衆, 如靈龜之於昆蟲也. 範之道廣大, 難以要領, 切近下手, 當自二五事始, 是又不可不知也. 噫! 龜者壽物也, 壽爲〈洪範〉五福之首, 龜而克範, 所謂永言配命, 自求多福, 其在斯歟. 於是乎作此說, 用替眉壽宜嘏之祝. 사령(四靈) 네 가지 신령한 동물로, 용(龍), 봉황(鳳凰), 기린(麒麟), 거북을 말한다. 낙서(洛書)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홍수(洪水)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글이다. 〈홍범(洪範)〉 낙서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서경》 〈주서(周書)〉의 편명이다. 이오사(二五事) 《서경》 〈홍범〉에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한 조목으로, 모(貌), 언(言), 시(視), 청(聽), 사(思)를 말한다. 오복(五福)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으로, 수가 첫 번째이다. 길이 …… 길이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합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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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진의 자에 대한 설 【1929년】 李士進字說 【己巳】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70세에 법도에 넘지 않았다.179)'는 것은 비록 성인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가르친 말이다. 그러나 주자는 이를 '반드시 홀로 그 나아감을 깨달았으나, 다른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180)'라고 판단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나이가 높을수록 덕도 더욱 높아진다.181)'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성인의 학문이 나이를 따라 진보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거늘, 하물며 보통사람에게 있어서이겠는가.옛날에 20세가 되면 관례(冠禮)를 행하고, 관례를 행한 뒤에 비로소 성인(成人)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한 것은 그의 학문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진보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이씨의 아들 강년(康年)이 나이 14세에 관례를 하고 그 스승 가석(可石) 박공이 사진(士進)으로 자(字)를 지어주었는데, 나에게 그 의미를 대신 기술하게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사진은 진실로 훤칠하게 빼어나면서 조숙한 자이다. 다만 널리 배우며 효제(孝悌)의 도리를 힘써 행하는 것이 옛사람의 약관(弱冠) 때와 같은지 모르겠다.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학문이 함께 진보하는 자는 천지가 부여한 이기(理氣)를 잃지 않고, 부모가 생성해준 은애(恩愛)를 저버리지 않아서 둥근 얼굴에 네모난 발로 우뚝 똑바로 서서, 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자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학문이 진보하지 않은 자는 좋은 옷과 맛난 음식을 많이 허비하여, 다함이 없는 양식을 먹으면서도 남을 이롭게 하는 품행과 재능이 없고, 오랫동안 해와 달의 광명을 보고 풍정(風霆)의 고동(鼓動)을 듣고도 사물의 이치에는 견문이 어두워 천지와 부모가 생성해주고 가르쳐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고, 신묘한 마음과 선한 본성으로서 온갖 이치를 갖춘 천품을 스스로 버린 채 다만 조교(曹交)처럼 장자를 대우하고182) 원양(原壤)처럼 늙음183)으로써 오만하게 스스로 높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다.사람이 스스로 처할 곳을 택하는 자는 장차 어디에 처해야 하겠는가. 지금 사진은 나이가 비록 적지만 오히려 성인이 학문에 뜻을 두었던 때에 이르렀고, 비록 기품(氣稟)이 가지런하지 않아서 차례를 따라 정진할 수 없지만, 한결같이 성인이 마음과 본성을 돌아본 것처럼 한다면 성인과 똑같이 될 것이다. 만일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장성해서부터 늙을 때까지 차근차근 부지런히 자신의 재능을 다하여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비록 중도에 맞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에서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스승 가석이 자를 지은 뜻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사진은 힘써 노력하라! 十五而志學, 七十而不踰矩, 雖爲聖人, 謙己誨人之言. 然朱子斷之以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 此蓋云年彌高則德彌邵也. 然則雖謂聖人之學, 亦隨年而進, 不爲過矣, 而況平常人乎? 古者二十而冠, 冠而後始責成人者, 待其學隨年而稍進也. 李氏子康年, 年十四而冠, 其師可石朴公字之以士進, 俾余替述其意. 余惟士進固頎然秀而夙成者, 但未知博學惇孝悌, 亦如古人弱冠時乎? 夫年進而學與進者, 不失天地賊與之理氣, 不負父母生成之恩愛, 圓顱方趾, 挺然直立, 俯仰無愧者也. 年進而學不進者, 積費麻絲, 梁肉, 喫著無盡之養, 而無行能之益人, 久視日月之光明, 聽風霆之鼓動, 而昧見聞乎物理, 靠負天地父母生成敎養之恩, 自棄靈心善性萬理皆備之稟, 徒以曹交之長, 原壤之老, 偃然自尊而不知恥者也. 人之擇所以自處者, 將奚居焉? 今士進年雖少, 尙及聖人志學之時, 雖氣稟之不齊, 未能循次精進, 一如聖人之爲顧心與性, 則與聖人一也. 苟能自少而壯, 自壯而老, 循循孜孜, 竭吾才而變吾質焉, 則雖不中, 不遠矣. 石師所以命字之意, 豈不在斯歟? 士進勖哉! 15세에 …… 않았다 《논어》 〈위정〉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 70세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하였다. 반드시 …… 것이다 《논어집주》 〈위정〉에서 주자가 말하기를 "이는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반드시 홀로 그 나아감을 깨달았으나, 다른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是其日用之間, 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라고 하였다. 나이가 …… 높아진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효지(孝至)〉에 "나는 그것을 전에서 들었으니, 늙으면 경계함이 얻음에 있고, 나이가 높을수록 덕도 더욱 높아져야 공자의 무리일 것이다.[吾聞諸傳, 老則戒之在得, 年彌高而德彌卲者, 是孔子之徒與.]"라는 말이 나온다. 조교(曹交)처럼 …… 대우하고 《맹자집주》 〈고자 하(告子下)〉에서 주자가 말하기를 "조교는 어른을 섬기는 예가 이미 지극하지 못했고, 도를 구하는 마음이 또 독실하지 못했다.[曹交事長之禮旣不至, 求道之心又不篤.]"라고 하였다. 원양(原壤)처럼 늙음 《논어》 〈헌문〉에 "어려서는 공손하지 못하고, 장성해서는 칭찬할 만한 일이 없고,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은 바로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라고 하면서 친구 원양을 꾸짖은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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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회재 근호의 자사 【정묘년(1927)】 朴晦哉【根浩】字辭 【丁卯】 나무는 뿌리에 감추고 木晦於根,사람은 제 몸에 감춘다. 人晦於身.유병산(劉屛山)284)이 주자에게 준 有劉祝朱,천년에 향기뿜는 자사(字辭)이네 永辭千春.박근호(朴根浩) 군은 朴君根浩,반짝이는 문채 몸에 지녀 有文有斕,이제 회재(晦哉)라 자를 붙여주니 爰字晦哉,내가 전수받은 깊은 뜻 있네. 我有受焉.그 뜻 푼 자사(字辭) 지어서 演之作辭,첫 번째 축사(祝辭)를 때우려 하네. 庶補前言.해는 밤에 빛을 감추었다가 日晦于夜,아침 되면 밝고 곱게 솟아오르고 朝旭方鮮.달은 검은 백(魄)285) 뒤에 숨었다가 月晦于魄,마침내는 둥그런 바퀴를 그리네 終見圖輪,불은 꺼져 재 속에 숨어 있다가 火晦于灰,타오르면 빛과 불꽃이 하늘을 나네. 光熖騰天.이것은 사람도 똑 같으니 其在乎人,누가 유독 그렇지 않으랴. 奚獨不然,어두운 데서 조용히 숨쉬며 嚮晦宴息,그침 없이 애써 스스로 강해지고 自强乾乾,보이지 않는 속에 스스로 닦아 闇然自修,자신의 문채 날로 아름답게 가꿀지라. 日章其文.어둠 속에 잠겨 우환을 면함 沈晦免患,그 지혜 속류를 초월하니 智乃出倫,힘쓸지어다 회재여 懋哉晦也,그 어둠의 덕 돈후하네. 厥德斯敦.이름을 돌아보며 그 뜻을 생각하라 顧名思義,옛 현인이 일찌기 하신 말씀이니, 曾聞古賢,이름이 실제에 부합하지 못하면 名不副實,부끄러움에 얼굴 붉어지리. 是爲騂顔.회재(晦哉)여 노력하소 晦哉勖哉,이를 기억하여 허물에 빠지지 말소. 念玆罔諐.순(舜)은 누구고 나는 누구인가 舜何予何,옛 사람 이런 말 한 적 있으니286) 古亦有云,전날의 회재와 오늘의 회재 昔晦今晦,이 두 사람 또한 어찌 다르랴! 豈其別人.회재여 힘써 감출지니 勖哉晦哉,한결 같으면 어려움 없으리라. 毋貳毋難. 木晦於根, 人晦於身, 有劉祝朱, 永辭千春。 朴君根浩, 有文有斕, 爰字晦哉, 我有受焉。 演之作辭, 庶補前言, 日晦于夜, 朝旭方鮮。 月晦于魄, 終見圖輪, 火晦于灰, 光熖騰天。 其在乎人, 奚獨不然, 嚮晦宴息, 自强乾乾, 闇然自修, 日章其文。 沈晦免患, 智乃出倫, 懋哉晦也, 厥德斯敦。 顧名思義, 曾聞古賢, 名不副實, 是爲騂顔。 晦哉勖哉, 念玆罔諐。 舜何予何, 古亦有云, 昔晦今晦, 豈其別人。 勖哉晦哉, 毋貳毋難。 유병산(劉屛山) 남송의 학자 유자휘(劉子翬, 1101~1147)를 말한다. 자는 언충(彦沖)이고, 호는 병옹(病翁)이다.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한 주자의 스승이자, 아버지인 주송(朱松)의 친구이다. 《주역(周易)》에 대해 밝았고, 복괘(復卦)를 특히 중시하였다.《宋史.劉子翬列傳》 백(魄) 밤하늘의 달이 지구에 가려 어두운 부분을 가리킨다. 보름달이 지나면 생겨나기 시작하여 그믐에는 달을 온전히 가린다. 순(舜)은……있으니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슨 일을 하려면 역시 이래야 할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孟子.滕文公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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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년(1915) 재야에 간재 선생을 모시고 계초재에서 수세하는데, 그해 학문이 황폐해져 옛날을 애도하고 지금을 슬퍼해서 시를 지어 뜻을 말함 乙卯除夜 陪艮齋先生 守歲于繼草齋 年邁學荒 悼舊悵今 因拈韻言志 지난 신해년135)엔 粤在歲重光봉산 글방에서 열심히 공부했지 攻苦鳳山房추운 날 전주136)로 돌아가니 天寒歸豊沛나그네 마음 어찌 끝이 없나 客子感何長멀리 대인의 명을 받들고 遠承大人命가까운 자리137)에서 수세하였는데 守歲三席傍잠깐 사이에 지난 자취가 되어 俛仰成陳跡어느덧 십오 년이나 되었네 忽忽十五霜도중에 부모님 돌아가신 후 中間風樹後배움이 황량하기도 했었지 所學就荒凉반백 머리로 해가 또 다해 二毛歲且盡조용히 화산당에 앉았네 黙坐華山堂문득 신구의 한을 느끼니 飜覺新舊恨온갖 내 애간장 태우는 것이 모였네 叢集煎我腸이때 이르러 전철을 돌아보고 及此回前轍계속 전진하여 큰길로 나아가리 進進趨康莊우뚝하다 저 수수와 사수여138) 屹彼洙泗上공자의 담장은 몇 길인가139) 數仞夫子墻아 게으름 피우지 마라140) 嗟爾母泄沓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구나 惜此流年光부모님 스승님 바람을 벗어나게 한다면 免敎父師望끝내 실패를 맛보리라141) 究竟歸亡羊 粤在歲重光,攻苦鳳山房.天寒歸豊沛,客子感何長?遠承大人命,守歲三席傍.俛仰成陳跡,忽忽十五霜.中間風樹後,所學就荒凉.二毛歲且盡,黙坐華山堂.飜覺新舊恨,叢集煎我腸.及此回前轍,進進趨康莊.屹彼洙泗上,數仞夫子墻.嗟爾母泄沓,惜此流年光.免敎父師望,究竟歸亡羊. 신해년 원문 '중광(重光)'은 고갑자(古甲子)로 신(辛)에 해당된다. 따라서 을묘년인 1915년보다 4년 전인 신해년(1911)을 가리킨다. 전주 원문 '풍패(豐沛)'는 중국 한나라 유방(劉邦)의 고향인 패현(沛縣) 풍읍(豐邑)을 가리키는 말로, 제향의 고향을 말하는데,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전주 이씨이므로 전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가까운 자리 원문 '삼석(三席)'은 임금이나 신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매우 가까운 자리를 말한다. 《禮記 文王世子》 수수와 사수여 두 강 사이에서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데리고 학문을 강론했기 때문에 후세에 수사(洙泗)를 유가(儒家)의 대칭으로 일컬었다. "내가 그대들과 수사의 사이에서 선생님을 섬겼다."라고 한 말도 있다. 《禮記 檀弓 上》 공자의……길인가 공자의 학문이 매우 심오함을 표현한 말이다. "궁장(宮墻)에 비유하자면, 사(賜)의 담장은 어깨 높이라 집 안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지만, 스승님의 담장은 몇 길 높이라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종묘와 수많은 백관을 볼 수 없다.〔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 《論語 子張》 게으름……마라 맹자는 임금을 섬김에 의가 없고 진퇴에 예가 없으며 말만 하면 선왕의 도를 비방하는 사람이 '예예답답(泄泄沓沓)'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 실패를 맛보리라 이 세상에서 잘 되든 못 되든 결과적으로는 모두 똑같이 실패하게 된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변무(騈拇)에 "장(臧)은 책을 읽다 양을 잃어버리고, 곡(穀)은 노름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렸으나, 양을 잃어버린 것은〔亡羊〕 모두 똑같다."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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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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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부록 선생 차운시 附 先生次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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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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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86년 이국진(李國鎭) 통정대부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國鎭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國鎭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학생 이국진을 통정대부이조참의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학생 이국진을 통정대부이조참의에 추증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국진은 이기두의 조부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이때 조부의 직역은 학생이었다가 통정대부이조참의로 증직되었다. 학생은 유학(幼學)이 죽어서 사용하는 호칭이다. 통정대부는 문신의 품계로서 정3품의 상계(上階)이며, 이조참의는 이조에 속한 정3품의 당상관 벼슬이다. 통정대부 앞의 증(贈) 자는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릴 때 붙이는 글자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날짜 왼쪽에는 증직의 근거를 기재하였는데, 손자인 이기두의 관품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며 그의 조고(祖考)는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다는 것이다. 법전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의 추증조에서 '종친 및 문무관으로 실직 2품 이상은 3대를 추증한다.'는 법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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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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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41년 문덕면 성주이씨 복정공파(僕正公派) 문회(門會)의 결의록(決議錄)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昭和十六年一月十八日 星州李氏 僕正公派 昭和十六年一月十八日 星州李氏 僕正公派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41년 문덕면 성주이씨 복정공파(僕正公派) 문회(門會)의 결의록(決議錄) 1941년 문덕면 성주이씨 복정공파(僕正公派) 문회(門會)의 결의록(決議錄)이다. 1941년 1월에 용암리 용순 댁에서 문회를 개최하고 출석한 인원이 차례로 의결했다고 하는 서문이 있고, 출석인원과 채결의안(採決議案)이 기재되었다. 출석인원은 의장 이교선(李敎先)을 비롯하여 모두 23명의 명단이 기재되었다. 채결의안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복정공 사판(祠板) 봉환의 건이며, 2부는 복정공 고비위(考妣位) 묘소 설향(設香)의 건이다. 설향건에는 제수(祭需) 및 주류(酒類) 분담기가 있어 제사음식과 주류의 각 담당자 이름을 적어놓았다. 또 현금 분담 및 모금 기한과 방법, 설향의 자원(資源)을 기록하고, 끝에는 이와 같이 결의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의장과 필기의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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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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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칠언율시(七言律詩) 2수(首) 시문(詩文)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시운초(侍雲初) 등 칠언율시 두 편의 시문 칠언율시 두 편인 듯하나 내용이 앞뒤로 잘려나갔다. 앞부분은 제목 부문이 잘렸으나 수연을 맞이하여 젊었을 때의 기상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비분강개한 육십 노인이 황조(黃鳥)와 청노새를 바라보며 노인의 쓸쓸함을 표현했고, '시운초(侍雲初)'라는 제목의 시는 구름이 왔다 갔다 하여도 오히려 지루하여 봄에 함께 술동이 안고 취했다가 명월을 맞이해 홀로 시를 읊는 공은 백발을 슬퍼한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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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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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6년 이당(李鐺)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丙寅秋夕日, □.□.21 李鐺 李敎燮 丙寅秋夕日, □.□.21 李鐺 李敎燮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18_001 1926년 8월 15일에 이당이 여로로 피곤함과 혼처의 일로 광주에 갈 계획 등을 내용으로 이교섭에게 보낸 간찰 1926년 8월 15일에 담양군 창평면(昌平面) 장전리(長田里)에 머무르는 재종질 이당(李鐺)이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장동리(長洞里)에 사는 숙부 이교섭(李敎燮)에게 보낸 간찰이다. 재종조부의 기력이 만강하시며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상대방의 체후와 종형제들도 예전에 읽은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물었다. 재종질 자신은 어제 겨우 장전리에 도착하였는데 여로(旅路)에 몸이 피곤하여 우선 버려두고 또 설증(泄症)이 더하여 견디기 어렵고 두통이 심하다고 하여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혼처의 일로 광주(光州)에 들어갈 계획이며 '너부실' 광주(廣州)는 합당하다고 하지만 이곳은 일찍이 지체 높은 집안이니 장성(長城) 김씨 집안을 택하라고 하였다. 목물(木物)은 누이가 말한 것을 서로 믿고서 처리하고 옻칠을 가져올 때 광주 홍순(洪淳)에게 옮겨 두면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피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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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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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4년 성구용(成九鏞)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戌十月九日 成九鏞 李敎成 甲戌十月九日 成九鏞 李敎成 전라북도 정읍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796_001 1934년 10월 9일 밤에 성기운이 현암에 도착해 인역을 설행한 일과 인본의 회답, 교천씨와 박태선씨의 근황을 묻는 내용 등으로 이교성에게 보낸 간찰 1934년 10월 9일 밤에 정읍군(井邑郡) 소성면(所聲面) 흑암리(黑巖里) 객지에서 성기운(成璣運)이 피봉에 성구용(成九鏞)의 명의[出附]로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에게 보낸 간찰이다. 기적이 한 번 울리자 길이 멀고도 먼듯하여 슬픔을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삼가 이러한 때에 어머님을 모시고 뜻을 받들며 생활하시는 체후가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사향(祠享)에 참석하고 오랜 친구를 상대하며 세월을 공허하게 허비하고 현암(玄巖)에 도착하였으며, 형의 부탁을 감히 어길 수 없어 사람을 시켜 인역(印役)을 설행하게 하였다. 그 일이 매우 어려워 또 3, 4일이 지나 돌아갈 기일이 되었기 때문에 지레 오는 차를 타고 시름없이 보산(寶山) 골짜기를 바라보았으나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하고, 인본(印本)은 수령한 뒤에 연기군(燕岐郡) 금남면(錦南面) 달전리(達田里)에 사는 성운(成塤)에게 회답해 달라고 하였다. 첨부한 별지가 있는데, 화족(華族)인 교천(敎川)씨와 박태선(朴泰璿)씨의 근황을 들었는지 묻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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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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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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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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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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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22년 유학 이유원(李有源) 호구단자(戶口單子)(60세) 고문서-증빙류-호적 壬午 李有源 壬午 李有源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22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유원(李有源)이 보성군에 제출하고자 작성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22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유원(李有源)이 보성군에 제출하고자 작성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내용은 호주와 그의 처의 가족구성 그리고 천구질(노비 명단)과 도망노비질(도망한 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와 그의 처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제1리에 거주하나 통호수의 기재는 생략하였다. 호주는 이유원인데, 직역이 유학(幼學)이며, 나이가 60세(계미생)이고 본관이 성산이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국진, 조가 규명, 증조가 인보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정필동인데, 직역이 노직의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이며 본관이 하동이다. 호주의 처는 이씨인데, 나이가 56세(정해생)이며 본관이 전의이다. 그의 사조는 부가 옥, 조가 징빈, 증조가 겸삼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양필한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제주이다. 또 처부(妻父) 송창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여산이다. 호주의 아들은 기한인데,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31세(임자생)이다. 호주의 며느리는 임씨인데, 나이가 34세(기유생)이며 본관이 장흥이다. 천구질에는 보금 1명이 있는데, 나이가 47세(병신생)이다. 도망노비질에는 비 5명, 노 6명의 명단이 있다. 비는 설덕(반비, 31세 임자생)과 설매(나이 46세 임술생), 덕엽(19세 갑자생)이며, 설매 소생 월매(21세 임술생)와 보금 소생 오심(9세 계유생)이 있다. 노는 설매의 소생 수천(7세 병자생)이 있다. 또 천득(35세 무신생)과 용백이 있는데, 용백은 소생이 셋이다. 금철(나이 23세 경진생)과 옥철(21세 임술생), 삼철(15세 갑진생)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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