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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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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사 부군 가장 十七世祖高麗奉正大夫知古阜郡事府君家狀 옛날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일어날 때 성인 기자(箕子)가 말하기를 "나는 주나라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기자가 죽은 지 2천여 년 후에 고려가 망할 때를 당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두문동(杜門洞) 제현은 뜨거운 충심이 혁혁하여 전대 사람들보다 빛났다. 이 때 우리 17대조 봉정대부(奉正大夫) 고부군사(古阜郡事) 부군이 열한 고을 방백의 책임을 맡고 있었으니, 지위는 참으로 높고 봉록도 또한 많았다. 만일 세상의 변화를 따랐다면 지위는 보존하고 봉록을 지켜 대대로 영원히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임지에서 표연히 벼슬을 버리고서 처음 팔판동(八判洞)에 들어갔다가 끝내는 관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오백여 년이 지난 뒤에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이 처음 나와 행적이 이에드러나자 사림들이 경현사(景賢祠)에 제향을 지냈다. 오호라! 고아한 풍모와 엄준한 절개는 우주를 지탱하고 윤리를 붙들어 잡으니 기자, 포은, 두문동의 성현들과 맥락을 같이 하니 어찌 고금과 생사, 드러나고 숨겨진 것이 다르다고 하여 달리 보아 우열을 가리겠는가.부군의 휘는 광서(光敘)로 계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태자 일(鎰)의 후손에서 나왔다. 고려에 이르러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 휘 춘(春)이 10대조인데, 이로 인해 부령을 관향으로 삼았다. 6대조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는 문장과 도학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조부는 대제학(大提學) 휘 용수(龍壽)이다. 부친은 중랑장(中郞將) 휘 인정(仁鼎)이며, 부인은 숙인 개성부(開城府) 왕씨 종실 창녕군(昌寧君) 형(詗)의 따님이다. 장남 당(璫)은 대호군(大護軍)이며 차남 취(王就)는 직장(直長)이며 딸들은 생원 금산(錦山) 김생우(金生禹)와 녹사 여산(礪山) 송사명(宋師命)에게 시집갔다. 대호군의 아들로 회신(懷愼)은 문과에 합격하여 시직(侍直)을 지냈으며, 회윤(懷允)은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직장의 아들로 보적(甫赤)은 문과에 합격하여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보칠(甫漆)은 빈과(贇科)에 합격하여 16고을을 다스렸다. 사위 김생우의 아들은 내(鼐)이며, 사위 송사명의 아들 균(均)은 군수(郡守)를 지냈다. 회신의 아들 선(銑)은 직장을 지냈다. 회윤의 아들 직손(直孫)은 문과에 합격하여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으니,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그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차손(次孫)은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후손(後孫)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보적의 아들 봉손(奉孫)은 호군(護軍)을 지냈다. 보칠의 아들 숙손(淑孫)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윤손(胤孫)은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선의 아들 팽석(彭石)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팽령(彭齡)은 문과에 합격하여 박사(博士)를 지냈다. 직손의 아들 석홍(錫弘)은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는데, 문원공(文元公)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106)이 묘표를 지었다. 석옥(錫沃)은 생원으로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묘갈명을 지었다. 지평의 아들 석현(錫賢)은 습독(習讀)을 지냈으며, 석필(錫弼)은 문과에 합격하여 교리(校理)를 지냈으며, 석중(錫忠)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사직의 아들 석량(錫良)은 진사이다. 봉손의 아들로 완(完)은 진사이며 유(宥)가 있다. 숙손의 아들 종(宗)은 생원으로 호는 매죽당(梅竹堂)이며, 외손 충숙공(忠肅公) 쌍백당(雙栢堂) 이세화(李世華)107)가 묘갈명을 지었다. 우(于)는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윤손의 아들로 국주(國柱)는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방주(邦柱)와 한주(漢柱)가 있으며, 세주(世柱)는 감역(監役)을 지냈다.부군의 자손은 대단히 번성하여 대대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문과에 30여 사람, 생원진사에 백여 사람, 아경 두 명, 방백 한 명, 한림 두 명, 학행과 충절로 사원에 배향된 사람이 19명이니, 모두 부군의 덕의가 미친 바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으랴. 다만 역사에 빠진 글이 많고 집안의 전기(傳記)를 잃어버렸으니, 다만 조정에서의 사업과 평소 행의를 대략이나마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호와 생졸까지도 또한 전한 것이 없으니 공자가 탄식한 바 '기와 송을 증거할 수 없다.'108)는 말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신하되지 않는 뜻을 두고서 관향으로 완전히 돌아갔다.[志存罔僕大歸貫鄕]'는 여덟 글자는 예전 가첩(家牒)에 실려 있으니 참으로 대체(大體)로 표방하여 훌륭한 작가에 알리고 묘도(墓道)에 밝게 새길 수 있으니 후손들이 이런 것을 그만둘 수 없다. 아! 탄식이 인다. 운강공(雲江公)은 석담 선생109)과 도의로 서로 연마하는 벗이었는데, 도승지 공의 큰 빗돌을 세울 때 아울러 청할 겨를이 없었으며, 농암공(礱巖公)은 화양 대노(大老)110)와 학문을 함께 나누던 아우였는데 또한 《주서차의(朱書箚疑)》111)를 교정 부탁할 때 빗돌의 글을 받을 좋을 기회를 잃어 버렸으니, 이것이 천고의 한이다. 이밖에 앞뒤로 아득한 지난 일은 또 어찌 다 말하겠는가. 불초한 소자는 지금 병을 앓아 죽음을 드리운 가운데 간절한 마음으로 애통해하며 대략 가장(家狀)을 지으며 아울러 감회를 부친다.고려가 망한 뒤 561년이 지난 임진년 가을에 17대손 택술은 삼가 쓴다. 昔之殷亡周興也, 箕聖有言曰: "我罔爲臣僕." 後箕聖二千餘年, 而當高麗之亡, 則有若圃隱鄭先生曁杜門洞諸賢, 烈烈爀爀, 有光前人.于斯時也, 我十七世祖奉正大夫古阜郡事府君, 知十一州方伯之任, 位固高矣, 祿亦重矣, 如使與世推移, 則位可保祿可持, 而傳襲永世矣.乃卽自任所, 飄然棄官, 初入八判洞, 終大歸貫鄕.歷五百餘歲, 《麗朝忠烈錄》始行, 而蹟乃顯, 士林享景賢祠.嗚呼, 其高風峻節之撑拄宇宙, 扶持綱紀, 與箕圃杜門之聖賢, 同條共貫, 豈可以古今生死顯晦之殊, 差觀而軒輊哉.府君諱光敘, 系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之後.至高麗扶寧府院君諱春, 是其十世, 因以爲貫.六世祖文貞公諱坵, 文章道學大顯于世.祖大提學諱龍壽, 考中郞將諱仁鼎, 配淑人開城府王氏宗室昌寧君詗女.長男璫大護軍, 次男王就直長, 女金生禹錦山人生員, 宋師命礪山人錄事, 大護軍男, 懷愼文科侍直, 懷允直長贈左通禮.直長男甫赤文科縣令, 甫漆贇科歷典十六州.金壻男鼐, 宋壻男均郡守.懷愼男銑直長, 懷允男直孫文科僉正贈都承旨, 文成公栗谷李珥撰神道碑銘, 次孫持平, 後孫副司直. 甫赤男奉孫護軍.甫漆男淑孫縣監, 胤孫宣傳.銑男彭石文科判官, 彭齡文科博士.直孫男錫弘郡守贈吏議, 文元公老洲吳熙常撰墓表, 錫沃生員贈參判, 文憲公高峰奇大升撰墓碣銘.持平男錫賢習讀, 錫弼文科校理, 錫忠副護軍.司直男錫良進士.奉孫男完進士, 宥.淑孫男宗生員, 號梅竹堂, 外孫忠肅公雙栢堂李世華撰墓碣銘, 宇忠順.胤孫男國柱參奉, 邦柱, 漢柱, 世柱監役.府君之之5)子姓彌蕃, 世濟先美, 文科三十餘人, 生進百餘人, 亞卿二人, 方伯一人, 翰林二人, 以學行忠節享院祠十九人, 罔非府君德義之攸曁也.根深者枝茂, 豈不信哉.惟是史多闕文, 家失傳記, 非但朝著事業, 平日行治, 不少槩見, 字號生卒, 亦且無傳, 孔子所嘆'杞宋無徵', 從古而然矣.然至於志存罔僕大歸貫鄕八字, 固舊載家牒, 正可標榜大致, 闡于名家, 昭刻阡道, 後承之不容己也.吁嗟咄哉, 以雲江公, 爲石潭夫子道義相求之交, 未遑幷請於都承旨公大碑之日, 礱巖公, 爲華陽大老學問相長之弟, 亦失好梯於《朱書箚疑》託校之際, 是爲千古之恨.此外前後悠悠往事, 又何能盡言哉.小子不肖, 今於疾病垂死之中, 心切感痛, 略成家狀, 幷寓感意云爾.麗亡後五百六十一年, 壬辰菊秋日, 十七世孫澤述謹狀.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1763~183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주리(主理)·주기(主氣)의 양설에 대해서는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서수기(讀書隨記)》·《노주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쌍백당(雙栢堂) 이세화(李世華) 1630~1710.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栢堂)·칠정(七井)이다. 1689년(숙종 15)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 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설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소에 판서 오두인(吳斗寅)과 이세화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하였다.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쌍백당집(雙栢堂集)》이 있다. 공자가……없다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하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지만 하나라의 후예인 기나라가 내 말을 증거 댈 만하지 못하고, 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은나라의 후예인 송나라가 내 말을 증거 댈 만하지 못하다. 그것은 문헌이 부족한 때문이니, 문헌이 넉넉하다면 내가 내 말을 증거댈 수 있을 것이다.〔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라고 하였다. 석담 선생 율곡 이이를 가리킨다. 화양 대노 우암 송시열을 가리킨다. 주서차의 우암이 지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가리킨다. '之之'는 '之'의 연문(衍文)으로 한 글자를 지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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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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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종12대조 가선대부 행 이조 참판 운강 선생 가장 從十二世祖嘉善大夫行吏曹參判雲江先生家狀 선생의 휘는 계(啓), 자는 회숙(晦叔), 처음 자는 언(亨彦), 성은 김씨로 계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에서 나왔다. 고려조 휘 춘(春)이 부령군(扶寧君)에 봉해졌는데, 2대를 지나 휘 작신(作辛)이 부령군을 이어 받아 봉해졌다. 인하여 부령을 관향으로 삼았으니, 즉 지금의 부안군(扶安郡)이다. 또 2대를 지나 평장사(平章事) 휘 구(坵)는 문장과 덕업이 뛰어나 고려 역사에 보이며, 이 분이 휘 여우(汝盂)를 낳았다. 여우는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냈으며 큰 공훈을 세워 왕이 단서(丹書)를 하사하였다. 조정에서 두 분의 충성을 기려 도동사(道東祠)에 제향 하였다.4대를 지나 고부군사 휘 광서(光敘)에 이르러 고려의 운이 장차 다할 것을 보고서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니고 관향으로 완전히 돌아갔으니, 이 분이 5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회윤(懷允)으로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지냈으며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직손(直孫)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첨정(僉正)을 지냈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신도비를 지었다. 부친의 휘는 석옥(錫沃)으로 성균관 생원을 지냈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선생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3대의 추증은 선생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선비(先妣)는 정부인에 추증된 영월 신씨(寧越辛氏) 현감 중졸(仲椊)의 따님으로 성품이 엄격하여 법도를 지녔으며 부인과 어머니 역할에 모두 그 도를 얻었다. 네 아들을 두었으니, 희(喜)와 선(善)은 모두 장사랑(將仕郞)이 되었으며, 점(坫)은 참봉으로 학행이 뛰어나 매당 선생(梅堂先生)이라 불리었으니, 그의 막내이다.선생은 가정 무자년(1528년)에 부안 옹정리(甕井里)에서 태어났다. 얼굴이 빼어나고 환하였으며 자품이 온화하고 순수하여 사람들이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겨우 예닐곱 살에 참판공(參判公)의 상을 당하였는데, 신부인이 선생은 막내이므로 비록 매우 사랑하였지만 그러나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곧바로 매질하면서 가르치기를 "과부의 아들을 사랑만하고 노력하도록 만들지 않는다면112) 어찌 능히 스스로 설 수 있겠느냐."라 하였으니,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침이 이와 같았다.장성하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면앙(俛仰) 송순(宋純),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고봉 기대승(奇大升), 사암(思菴) 박순(朴淳),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과 우호를 나누었다. 임자년(1552년) 4월에 계공랑(啓功郞)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승정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문사가 넉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다급하게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고서 물러나 책을 읽었으니, 사서와 육경 및 여러 성리서들을 부지런히 읽어 정미하게 연구하였으며 병법과 한어(漢語)까지도 익혀서 통달하였다.임술(1562년), 계해(1563년) 연간에 내직으로 들어가 집의, 한림, 교리, 수찬, 헌납, 병조와 이조와 예조의 낭관을 지냈다가 경상도 어사(慶尙道御史)로 제수되었다. 이에 탐장(貪贓)을 저지른 수령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인끈을 풀고 떠나갔다. 갑자년(1564년) 정월에 지평(持平)에 제수되어 부르는 명이 있자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외직인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었다. 경성의 풍속은 본래 강하고 사납기에 부임한 초기부터 너그럽게 어진 정사에 힘쓰고 청백한 다스림을 숭상하니, 경성의 백성들이 모두 그 덕을 칭송하였다. 을축년(1565년)에 사간으로 있다가 평안도 안무사(平安道按撫使)에 제수되었는데, 주상께서 친히 교유를 내렸다. 대개 평안도는 서쪽 변방에 있어서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기에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명을 수행하고 돌아와 곧바로 순천 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에 제수되었는데, 학문을 흥성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전 부사 이정(李楨)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이곳으로 귀양 와서 타계하였기에 옥천정사(玉川精舍)를 세워 제향 하였는데, 이윽고 모친상을 당하여 떠나게 되었다. 선생이 정사의 제도를 두루 살펴보고는 신위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서 온당하지 않게 여겨 심부름꾼을 보내 이공에게 물어보고서 다시 당의 가운데로 신위를 안치하니 의식이 이윽고 완비되었으며 조리도 또한 갖추어졌다.병인년(1566년) 6월에 기고봉(奇高峰)을 방문하여 두 신주에 대한 의미에 대해 물어113) 서로 변론하고 질정하였다. 융경 정묘년(1567년)에 선조가 등극하자 장령에 제수되었다. 11월에 11일은 대전(大殿)의 탄신일이다. 전한(典翰) 기대승(奇大升), 수찬(修撰) 유희춘(柳希春), 정철(鄭澈) 등과 경연청(經筵廳)에 나아가 문안을 올렸는데, 주상이 퇴상(退床)을 하사주니 마침내 용배의 술을 마셔 대취하였다. 선생이 시를 지어 은혜에 사례하였다.천상의 백옥루는 참으로 허튼 말이며 天上玉樓眞謾說해중의 봉래도 또한 보기 어려워라 海中蓬島亦難看어찌 같으랴, 미천한 신하가 천재일우의 기회 만나 那似微臣千一遇차분하고 큰 덕을 지닌 용안을 가까이 하는 것과. 從容丕顯近龍顔이로부터 임금의 지우가 더욱 높아졌다. 이전에 안서순(安瑞順)이 정륜(鄭倫), 김응정(金應貞)과 소장을 올려 을사년 여러 간신들이 임금을 기망한 죄를 지적하여 모두 극형을 받았는데, 선생이 정언 최정(崔頲)과 소장을 올려 합계하여 극력 신원하였다.무진년(1568년) 봄에 동부승지(同副丞旨)에 제수되었다. 유희춘, 우부승지 김첨경(金添慶)114) 등과 함께 어록의 자의를 논하였는데, 유공은 선생의 말을 많이 취하고서 어탑 앞으로 나아가 그 까닭을 아뢰었다. 당시 선생은 여러 차례 경연관으로 임금을 모셨는데, 성덕을 보필함에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어 세상에서 유악(帷幄)에 쓸 만한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다. 또한 우찬성(右贊成) 이황(李滉), 대사헌(大司憲) 김귀영(金貴榮),115) 대사간(大司諫) 강사상(姜士尙),116) 대제학(大提學) 노수신(盧守愼), 좌상(左相) 권철(權轍),117) 우상(右相) 홍섬(洪暹)118) 등과 정암(靜菴) 등 제현이 화를 당한 이유와 남곤(南袞), 심정(沈貞)의 무리들이 올바른 사람을 해친 정상을 극력 아뢰었으니, 연달아 서로 의논을 수합하여 숨김없이 진달하였다.시월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569년) 6월에 주상께서 특별히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하였는데, 사헌부에서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논하자 주상께서 굳건히 거부하였다. 승지 기대승이 또다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김계는 사헌부에서 인물이 그 자리에 맞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급하게 승진한 것으로 논한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김계는 변장으로 명을 어길 수 없으니 형세상 마땅히 부임하여야 합니다. 김계는 선비입니다. 어찌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은 점이 없겠습니까. 지금 만약 억지로 부임하게 한다면 자못 인재를 배양하는 도에 어긋납니다."라 하자, 주상께서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김계를 불선(不善)으로 논하였는데 부임시킨다면 과연 이와 같거니와, 다만 급하게 승진한 것으로 논하여 부임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도리어 공론이 허락한 것이다.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대개 선생은 나이가 겨우 40살인데 갑자기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반열에 오르기 때문에 여론이 이를 꺼려하였으나 주상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는 바야흐로 변방에 대해 근심하였는데 북문(北門)을 잠기는 일은 선생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었다.7월에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천망(薦望) 에 들었다가 마침내는 첨지(僉知)에 제수되었다. 10월에 강원 감사(江原監司)의 천망에 들었다. 경오년(1570년) 외직인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나갔다. 부임할 때 감영 안의 기생들이 선생의 용모가 옥 같다는 소리를 듣고서 일제히 나아가 가마를 메려고 하니, 즉시 명하여 물리쳤다. 10월에 소장을 올려 을사년 신원과 삭직의 일에 대해 아뢰었는데, 말이 대단히 통절하여 당시 여론이 옳다고 하였다. 석담(石潭)으로 율곡(栗谷) 이 선생을 방문하여 조고(祖考) 승지공(承旨公)의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또한 율곡에게 인심과 도심설에 대해 묻고 질정하기를 "지각이 형기에서 발한 것이 인심이 된다. 그러나 정심에 어긋나지 않으면 처음에는 인심이지만 끝에는 도심이 된다. 지각이 성명에 발한 것이 도심이 된다. 그러나 형기를 따르면 처음에는 도심이었지만 마침내는 인심이 된다. 이것이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종이 된다는 것이다.……"라 하였다.신미년(1517년) 2월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천망에 들어갔다가 마침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임신년(1518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명나라 사신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謨)가 조서를 받들고 이르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빈상(儐相)이 되고 선생은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모화관(慕華舘)에 가서 영접과 전송의 예를 행하였다. 12월에 제문을 지어 기고봉의 영연에 찾아가 제사를 지냈는데, 선생과 고봉은 이미 막역하게 사귀었으며 겸하여 혼인의 정의가 있었다. 또한 고봉이 병들어 돌아갔다가 선생의 중형 매당공(梅堂公)의 집에서 타계하였으므로 그 애통한 정은 다른 사람과 남달랐다.만력 계유년(1519년) 정월에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다. 유희춘이 주상에게 아뢰기를 "문신 가운데 한어에 능통한 자로 어전에서 통역할 만한 이는 대단히 적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반드시 미리 육성하였으니, 세종 때는 중국의 명사가 요동에 귀양 오자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등을 보내어 한어를 배우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중종 때는 최세진(崔世珍)119)과 윤개(尹漑)120) 등이 한어를 잘하니 중종이 장려하며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처럼 중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다만 김계 한 사람뿐인데 동래 부사에 제수하시니 승문 제조(承文提調)가 많이 애석하게 여깁니다.……"라고 하였다.3월에 외직인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가 되었는데, 주상께서 《행군수지(行軍須知)》 한 권을 하사하였다. 대개 선생이 비록 문신이지만 주상께서 곤수(閫帥)의 재주가 있음을 알았기에 특별히 이 관직에 제수한 것이다. 6월에 사역원 제조에 제수되어 한학, 몽학, 여진학의 통역을 배운 자들의 시험을 담당하였다. 12월에 이조 참의 겸지홍문관춘추관사(吏曹參判兼知弘文舘春秋舘事)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벼슬에 나아간 10년 동안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해와 달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비록 모두 몇 차례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하게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일찍이 군기 첨정(軍器僉正)으로 있다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에 갔으며, 또한 성절사가 되어 정랑(正郞) 상진(尙震)121)과 함께 갔으며, 또한 동지사가 되어 두 번 갔으며, 또한 질정관으로 갔으며, 서장관으로 간 것이 또한 한두 번에 그치지 않는다. 또한 《율곡전서(栗谷全書)》에 고증해보면 가정 갑자년(1564년)에 선생은 모두 세 차례 연경에 다녀왔으며, 갑자 이후에 또한 몇 차례 다녀왔는지 알 수 없다.일찍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자 천자가 친히 동방의 일에 대해 묻고서 특별히 조정에서 알현하게 하였다. 이에 선생은 조심조심하며 걸음걸이가 법도가 있었고 눈은 밝은 별과 같았으며 목소리는 커다란 종과 같아 신비로운 정채가 멀리까지 어리고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니, 천자가 그 풍골의 뛰어난 것을 사랑하였으며 또한 그 사신으로 온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이에 화공에게 명하여 그 모습을 그리게 하고서 먼저 열국의 사신들에게 반포하여 보여주면서 동국에 이러한 인걸이 있음을 알게 하였으며, 다음으로 조선으로 돌아가 본국의 군민(君民)들에게 보여주어서 천자의 기림을 받은 것을 알게 하였다.만년에 명성과 지위가 지나치게 높아지자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면서 "나는 먼 지방 사람으로 나이가 약관을 지나자 고제(高弟)가 되었으니 너무 빠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겨우 벼슬에 나아가자 지위가 아경에 이르렀으니 현달하지 못하였다고 이를 수 없다. 옛 사람이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122)고 하였으니, 참으로 격언이다."라고 하고는 이에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다. 곡성(谷城)의 동쪽 10리 큰 강가에 자리를 정하여 정자를 짓고서 운강정(雲江亭)이라 명명하였다. 인하여 운강으로 자호하고서 날마다 사우, 문도와 함께 서적을 토론하고 의리를 강구하였다. 하루는 문인들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좁고 작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거든 반드시 질시하는 마음을 지니니, 하물며 지금은 당론이 매우 격렬하니 끝내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다. 반드시 시비가 서로 다르게 서서 비방과 기림이 당파의 논의를 따르게 될 것이니 옥석을 가릴 수 없게 되어 조정이 안정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만일 빗돌을 세우게 된다면 다만 본래 관직과 이름만 쓰고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라고 하였다.공은 갑술년(1574년) 정월 6일에 타계하시니 나이 47살이었다. 부안(扶安) 석동산(席洞山) 선영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정부인(貞夫人)은 해주 오씨(海州吳氏) 붕지(鵬之)의 따님으로 쌍분으로 합부하였다. 서자 아들 두 명이 있는데, 효평(孝平)은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효길(孝吉)은 직장(直長)이 되었다.선생은 어려서 남다른 자질을 지녀 일찍부터 원대한 뜻을 지녔다. 이윽고 장성하자 성취한 바가 매우 컸는데, 그 대개를 논하자면 즉 하서(河西)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일찍 학문의 요점을 들었으며 율곡(栗谷) 등 제현과 도의로 서로 사귀었으니, 이것은 연원의 올바름이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학문이 넉넉하지 못함을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 벼슬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고 더욱 연마하였으니, 이것은 조예가 깊은 것이다. 이윽고 부르는 명에 응하여 온 정성으로 공사(公事)를 받들어 들어와서는 임금의 계책을 돕고 나아가서는 간성(干城)이 되어123) 각각 그 직분을 다한 것은 임금을 섬긴 충성이다. 정암(靜菴) 등 제현들이 화를 당한 사연과 남곤(南袞), 심정(沈貞) 무리들이 올바른 사람을 해친 정상을 힘써 아뢰고 또한 을사년 억울함을 당한 이와 거짓으로 공훈을 받은 자들에 대해 신원하고 삭훈하라고 청한 것은 현인을 높이고 간신을 구변한 공변됨이다. 선생이 "인심과 도심은 서로 시종(始終)이 된다."고 한 것은 깊이 생각하고 밝게 분별한 공이다. 명나라 만 리 길을 능력이 있어 수고함124)을 꺼리지 않고 능히 사신의 임무를 맡아 천자의 포상을 받기까지 한 것은 성인이 말한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군명을 욕보이지 않는다.'125)는 경우에 해당한다. 벼슬에서 물러날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만족함을 알아 향촌으로 돌아갔으며 임종에 한 마디 말은 당론을 초월한 것은, 성인이 말한 '기미를 보고 일어나 하루가 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126)는 것에 해당한다.이런 까닭으로 하서(河西) 선생이 일찍이 시를 주기를 "그대의 원대한 포부를 보니 속류가 아니로다.[看君遠抱非流俗]"라고 하였으며, 사암(思庵) 박순(朴淳)이 〈조경(朝京)〉이란 시를 주면서 "조정은 응당 이미 홍유임을 알았어라.[朝廷應己識鴻儒]"라고 하였으며, 면앙은 〈잡록(雜錄)〉에서 "우리 벗 회숙은 직(稷)과 설(契) 같은 계책과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 같은 재기를 지녔다."라고 하였다. 미암(眉巖)이 선생의 부음을 듣고서 슬픔에 놀라며 애석하게 여기기를 "이 사람은 문무를 갖춘 뛰어난 인재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지녔으며 강개하여 신의를 지키는 행동을 하니, 조정에서 바야흐로 크게 쓸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고봉(高峰)은 "회숙은 문무의 재주를 지녔으며, 능히 자신을 곧게 한 뒤에 행하여 세상에 연연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옥계(玉溪) 노진(盧禛)127)은 제문에서 "덕이 부족한 것이 아니거늘 수가 50살도 채우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높은 식견은 탁월하여 넘겨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128)이 칭송하기를 "당대의 명경(名卿)이 되어 충직한 목소리가 조정에 진동하였다."라 하였다. 이제(頣齋) 황윤석(黃胤錫)129)은 "혁혁한 운강옹이여! 호남에 으뜸이로다. 하서를 스승 삼고 율곡을 벗 삼았으니 그 유택이 지금도 전하도다."라고 하였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130)는 "운강공의 맑은 명성과 올바른 도는 먼 세대까지 이어져서 후세에 덕행을 드리울 수 있다."라고 하였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31)는 벼슬의 급류에서 과감하게 물러난 것132)을 인정하며 '학문의 힘은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제현의 칭송과 기술을 보면 또한 선생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다. 후대의 선비들이 선생의 덕의를 존모하여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를 모신 도동 서원에 뒤미처 배향하였다.아! 선생의 후손이 영락하여 문헌이 전하지 않으니, 관직과 이력도 오히려 자세히 알 수 없거든 하물며 행하였던 사실이랴. 헌종(憲宗) 병오년(1846년)에 방손인 필흠(弼欽)이 비로소 가장(家狀)의 초고를 갖추어 수종재에게 묘갈명을 청하였는데, 본래 가장에서 수집한 내용이 넓지 못하고 고증한 것이 정밀하지 못하여 대부분 빠졌으며 서차가 뒤바뀌었다. 그러므로 지은 바 묘갈명이 선생이 마음에 깊이 간직한 것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 후에 방손 국환(國煥)이 다시 가장(家狀)을 지었는데, 자세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또한 선후의 차서가 어긋나며 서술 도중에 중복된 내용이 많았는데 도리어 핵심을 빠트렸다.이에 택술이 수종재가 지은 묘갈명과 국환씨가 찬한 가장 및 매당 후손가에 보관한 문첩 등을 취하고 또 선현의 유집을 고찰하여 서로 대조하여 증거를 대어 교정하여 그 소략함을 보충하고 그 번거로움을 삭제하여 어긋난 사실을 바로잡아 차례를 정하고서 다시 가장 한 통을 지었는데, 그 관직과 이력은 을축년 평안 안무사(平安按撫使) 이상은 달리 근거할 바가 없어 다만 옛날 가장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다만 집의(執義)는 옛날 가장에 없던 것인데, 《고봉집(高峰集)》에서 "회숙이 일찍이 집의에서 관찰사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집의는 분명 초년 관직일 것이다. 그러므로 임술, 계해 년간에 편차하였다.】 순천 부사(順天府使)부터 그 아래는 미암과 고봉 등 여러 문집의 분명한 증거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는데, 좌부승지(左副承旨)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된 것은 선현의 유집에 있지만 어느 해에 했는지 알 수 없기에 감히 특정한 해 아래에 억지로 기록하지 않았다.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된 것은 묘비와 각각의 기록에서 증거를 댈 수 있으나 또한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인지 알 수 없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옛날 가장에서 "신미, 임신 연간에 예조·이조·호조 참의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관직 등급의 차례로 따져보면 계유년에 참판이 된 것을 증거할 수 있으니, 이는 믿을 만 하지만 일단 다른 책에 보이지 않기에 기록하지 않고 제쳐 둔다.돌아보건대 선생이 돌아가신 지 지금 334년이 되니 시대가 벌써 아득히 멀게 되었다. 만일 국사와 야사 및 동시대의 제현 문집을 널리 고찰하지 않는다면 가장에 자세히 실을 수 없는데, 식견이 어둡고 좁은 내가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전날 고찰한 것과 지금 기록하지 않은 것은 또다시 망실할 우려가 있기에 그러므로 감히 여기에 기록하여 훗날 박식한 이를 기다리니, 지금의 가장이 전부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다시 증보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입언하는 군자가 혹여 취하여 채택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또한 거의 그에 가까울 것이다.숭정후 다섯 번째 정미년 맹춘 모일에 종12대손 택술은 삼가 짓는다. 先生諱啓, 字晦叔, 初字亨彦, 姓金氏, 系出新羅敬順王.高麗朝有諱春, 封扶寧君, 二傳而有諱作辛, 襲封扶寧君, 因貫以扶寧, 卽今扶安郡也.又二傳而有平章事諱坵, 文章德業, 著於麗史, 生諱汝盂, 官刑部尙書, 有大勳勞, 王賜丹書, 褒忠兩世, 享道東祠.歷四世, 至古阜郡事諱光敘, 見麗運將訖, 志存罔僕, 大歸貫鄕, 是爲五世祖也.曾祖諱懷允, 司醞署直長贈左通禮.祖諱直孫, 文科僉正贈都承旨, 栗谷李先生珥撰神道碑.考諱錫沃, 成均生員贈戶曹參判, 高峰奇先生大升撰墓碣銘.三世之贈, 以先生貴也.妣, 贈貞夫人寧越辛氏縣監仲椊女, 性嚴有法度, 爲婦爲母, 咸得其道.生四男, 喜善皆將仕郞, 坫參奉有學行, 號梅堂先生, 其季也.嘉靖戊子, 生于扶安甕井里, 眉宇秀朗, 姿稟溫粹, 人以大器期之.年甫齠齔, 丁參判公憂, 辛夫人以先生爲末子, 雖甚愛之, 然有小過, 則輒橽而誨之曰: "寡婦之子, 愛而勿勞, 則豈能自立." 義方之敎, 蓋如此.及長, 受業河西金先生之門, 與宋俛仰純·柳眉巖希春·奇高峰大升·朴思菴淳·鄭松江澈相好.壬子四月, 以啓功郞登文科, 拜承文院正字, 以學問未精, 文詞不贍, 不欲躁進, 乃退而讀書, 四字六經及性理諸書, 無不劇讀精究, 至於兵學漢語, 亦皆旁通.壬戌癸亥間, 入爲執義·翰林·校理·修撰·獻納·兵吏禮郞, 轉拜慶尙道御史, 守令贓汙者, 皆望風解印而去.甲子正月, 除持平, 有召命, 上疏辭不允, 己而出拜鏡城判官.鏡俗素强悍, 赴任之初, 務存寬仁, 治尙淸白, 鏡民咸頌其德.乙丑, 以司諫拜平安道按撫使, 上親降諭書, 蓋平安一路, 邊於西陲, 屢經兵火, 民不安集, 故有是命也.應命而歸, 旋拜順天都護府使, 以興學爲己任.前府使李楨, 以寒暄金先生謫是土而沒, 立玉川精舍而享之, 已而丁內艱而去, 先生周視規制, 以神位在邊爲未愜, 伻質李公, 更安神位于堂中, 儀式旣備, 條貫亦備.丙寅六月, 訪奇高峰, 問二主之義, 相與辨論質難.隆慶丁卯, 宣廟御極, 拜爲掌令.十一月十一日, 大殿誕日也, 與典翰奇大升·修撰柳希春·鄭澈, 至經筵廳問安, 自上賜退膳, 遂飮龍盃大醉.先生作詩以謝恩曰, 天上玉樓眞謾說, 海中蓬島亦難看.那似微臣千一遇, 從容丕顯近龍顔.自是恩遇益隆盛矣.先是安瑞順與鄭倫金應貞上疏, 直斥乙巳羣奸誣罔之罪, 俱受極刑, 先生乃與正言崔頲, 上疏合啓, 極力伸雪.戊辰春, 拜同副丞旨, 與柳希春·右副承旨金添慶, 共議語錄字義, 柳公多取先生之言.至於榻前, 奏達其由.時先生屢侍經筵, 贊襄聖德, 無不備盡, 世稱帷幄得人.又與右贊成李滉·大司憲金貴榮·大司諫姜士尙·大提學盧守愼·左相權轍·右相洪暹, 力陳靜菴諸賢被禍之由, 袞貞輩害正之狀, 連相收議, 備達無隱.十月拜尙衣院正.己巳六月, 上特除會寧府使, 憲府論以資格未準, 上牢拒之.承旨奇大升又箚奏曰: "金啓, 憲府不以人物爲非, 只以驟陞論之, 而竟不得請, 則啓以邊將不能違命, 勢當赴任, 啓, 士類也, 豈不慊於心乎.今若强使赴任, 殊乖培養之道." 上曰: "此則有不然者.金啓以不善論之而赴任, 則果如是, 只以驟陞論之而止之, 則是公論許之也, 有何慙愧." 終不允.蓋先生年纔四十, 忽陞嘉善, 故物情不愜, 而上終不允者.時朝廷, 方有邊憂, 以北門鎖鑰, 非先生不可也.七月入黃海監司望, 遂拜僉知, 十月入江原監司望.庚午春, 出爲黃海監司, 赴任時, 營中妓姬, 聞先生容姿如玉, 欲齊進荷轎, 卽命却之.十月上疏, 言乙巳伸削事, 語甚痛切, 時論韙之.訪栗谷李先生于石潭, 請祖考承旨公神道碑銘, 又問質人心道心之說于栗谷曰: "知覺發於形氣者爲人心, 然不咈乎正理, 則始焉人心, 終爲道心, 知覺發於性命者爲道心, 然循乎形氣, 則始焉道心, 終爲人心, 此人心道心相爲終始云云." 辛未二月, 入全羅監司望, 遂拜右副承旨.壬申, 拜刑曹參議, 十月, 天使韓世能·陳三謨奉詔而至, 盧蘇齋守愼爲儐相, 先生爲接伴使, 詣慕華舘, 行迎餞之禮.十二月, 爲文往祭于奇高峰之靈, 先生與高峰, 旣爲莫逆之交, 兼有姻親之誼.且高峰病歸, 卒于先生仲兄梅堂公家, 其慟傷之情, 有異於他人者矣.萬曆癸酉正月, 除東萊府使.柳希春言於上曰: "文臣能漢語, 堪爲御前通事者至少, 故國家必預爲之培養, 世宗朝中朝名士謫遼東, 至遣申叔舟·成三問等, 往學漢語, 中廟朝崔世珍·尹漑等, 以善漢語, 中廟勸獎而責任之, 其重之也如是, 今只有金啓一人, 而又差東萊府使, 承文提調率多嗟惜云云." 三月出爲忠淸兵馬節度使, 上以《行軍須知》一卷賜之, 蓋先生雖文臣, 上知其有閫帥才, 故特拜是職也.六月拜司譯院提調, 考試漢學蒙學女眞學通事講者.十二月, 拜吏曹參判兼知弘文舘春秋舘事.先生出仕十載之間, 屢有朝天之行, 而年月莫詳, 雖不知凡幾度, 然若其昭然可徵者, 則嘗以軍器僉正爲書狀官赴京, 又爲聖節使, 與尙正郞震同赴, 又爲冬至使再赴, 又爲質正官赴之, 以書狀官赴之者, 又不止一再.且考諸《栗谷全書》, 則嘉靖甲子, 先生凡三赴燕京矣, 甲子以後, 又不知有幾度也.嘗至天朝, 天子親問東事, 特賜庭對, 於是先生洞洞屬屬, 行步有矩, 眼若曙星, 聲如洪鍾, 神彩凝遠, 風儀肅整, 天子愛其風骨魁偉, 又嘉其專對, 命畫工圖繪其像, 先令頒示列國使臣, 使知東國有此人傑, 次令歸示本國君民, 俾知獲蒙天褒.晩年以名位過隆, 自解曰: "吾以遐土之蹤, 年過弱冠, 獲叅高弟, 不可謂不早也.纔踰始仕, 位至亞卿, 不可謂不達也.古人云, 知足不辱, 知止不殆, 眞至言也." 乃上疏辭職.占地于谷城東十里大江上, 構一亭, 名曰雲江亭, 因以雲江自號, 日與士友門徒, 討論書籍, 講究義理.一日召語門人曰: "我東褊小, 見人勝己, 必有嫉妒之心, 况今黨論大熾, 未知終至何境, 其必是非各立, 毁譽相隨, 玉石難辨, 朝著不靖, 我死之後, 如立墓石, 則只書本職姓名, 勿爲記蹟也." 甲戌正月六日卒, 壽四十七, 葬于扶安席洞山先兆艮坐原, 配貞夫人海州吳氏鵬之女, 祔以雙墳.有庶男二人, 孝平主簿, 孝吉直長.先生幼有異質, 夙抱遠志, 及乎旣長, 所就甚大, 論其大槩, 則師事河西先生, 早聞學問之要, 栗谷諸賢, 以道義相長, 此淵源之正也.妙年登第, 以學之不優, 自視欿然, 無意進取, 益加磨礱, 此造詣之深也.旣應召命, 一心奉公, 入贊訏謨, 出鎭屛翰, 各盡其職者, 事君之忠也.力陳靜菴諸賢被禍之由, 袞貞輩害正之狀, 又請伸削乙巳寃枉僞勳者, 尊賢辨奸之公也.其曰: "人心道心, 相爲終始"者, 審思明辨之功也.至於皇華萬里, 不憚賢勞, 能自專對, 至蒙天子之褒賞者, 聖人所謂'使於四方, 不辱君命'也.未及致事, 知足而歸, 臨終一言, 超脫黨論者, 聖人所謂'見幾而作, 不俟終日'也.是故河西先生嘗贈詩曰: "看君遠抱非流俗." 思菴贈〈朝京〉詩曰: "朝廷應己識鴻儒." 俛仰〈雜錄〉曰: "吾友晦叔, 稷契訏謨, 管葛才氣." 眉巖聞先生訃音, 驚怛悼惜曰: "斯人也, 有文武長材, 有好善惡惡之心, 有慷慨信義之行, 朝方望以大用, 遽至是乎." 高峰曰: "晦叔有文武材, 能直己以行, 不娖娖於世." 盧玉溪禛祭文曰: "德非不足也, 而壽未及於半期." 又曰: "高識卓難窺." 金鰲峰齊閔稱之曰: "爲時名卿, 忠直之聲, 震於朝著." 黃頣齋胤錫曰: "赫赫雲翁, 冠冕湖南.師河友栗, 遺澤猶覃." 宋性潭煥箕曰: "雲江公之淸名直道, 克纘遠世, 而垂裕後昆." 宋守宗達洙, 則以急流勇退許之, 而謂'學問之力不可誣也.' 觀於諸賢之稱述, 亦可以知先生之萬一矣.後之章甫慕先生德義, 追享道東文貞公祠.噫, 先生之後承零替, 文獻無傳, 官職履歷, 尙不可詳, 况其事實乎.憲廟丙午, 旁孫弼欽, 始具狀草, 請墓碣銘于守宗齋, 而本狀裒蒐未廣, 考據未精, 率多疎漏顚倒, 故所撰墓銘, 未能盡發其蘊.其後旁孫國煥, 更撰家狀, 可謂詳矣, 亦未免先後舛錯, 間多架疊, 而反遺肯綮.於是澤述取守宗齋所撰墓銘·國煥氏所撰家狀及梅堂後孫家所藏文牒, 又考先賢遺集, 參互證訂, 補其疎略, 刪其繁蔓, 正其差誤, 定其次第, 復撰家狀一通, 而其官職履歷, 自乙丑平安按撫使以上, 他無所據, 而只依舊家狀錄之.【但執義, 舊狀所無, 而《高峰集》云, "晦叔嘗以執義, 轉至觀察使", 則執義必是初職, 故係于壬戌癸亥之間.】 自順天府使以下, 據眉高諸集之明證而錄之, 其爲左副承旨·戶曹參判, 有先賢遺集, 而未詳在何年, 故不敢强錄于某年之下.爲工曹參判, 有墓碑及各錄之可徵, 而亦未詳在何年, 故不錄.舊狀云, 辛未壬申間, 爲禮吏戶曹參議, 揆以官階次第, 證以癸酉參判, 則此爲可信, 而姑未見據於他書故闕之.顧今先生之沒, 爲三百有三十有四年, 世旣遠矣, 如非廣考國乘野史及幷時諸賢文集, 難以詳悉于狀, 而昧識謏見, 豈足以與此.但前日之所考, 及今不記, 則又有亡失之慮, 故敢此敘錄, 益俟異日之博見, 非謂今日之狀, 詳悉已盡, 而不復增補也.然世之立言君子, 或取而爲裁擇之資, 則亦庶幾近之云爾.崇禎五丁未孟春日, 從十二世孫澤述謹狀. 사랑만하고……않는다면 《논어》 〈헌문(憲問)〉에서 "사랑한다면 그를 노력하도록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성한다면 그를 깨우쳐 주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라고 공자가 말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소식(蘇軾)이 "사랑하기만 하고 노력하도록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새나 짐승의 사랑이요, 충성하기만 하고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자나 내시의 충성이다.〔愛而勿勞 禽犢之愛也 忠而勿誨 婦寺之忠也〕"라고 해설하였다. 두 ……물어 《고봉집》 권2 〈이주설(二主說)〉에 그 내용이 보인다. 김첨경(金添慶) 1525~1538.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문길(文吉), 호는 동강(東岡) 또는 장주(漳洲)이다. 1572년(선조 5)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대사간, 형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역학에 자득(自得)의 묘를 얻었고, 경학에 전력하였다. 기품이 청아하고 효우(孝友)가 매우 뛰어났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김귀영(金貴榮) 1520~1593. 본관은 상주,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이다.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상락부원군에 봉해진 뒤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시비에 적극성이 없다는 조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때 중추부영사로서 임해군을 배종하여 함경도에 피란하였는데, 회령에 수개월 머무르는 동안 민폐가 많아 인심을 잃었다. 강사상(姜士尙) 1519~1581.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상지(尙之), 호는 월포(月浦),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1568년(선조 1) 사간 유희춘과 조광조의 신원과 추숭을 건의하였다. 1570년에는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뒤 병조 ·형조 ·이조 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권철(權轍) 1503~1578. 본관은 안동,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사관(史官)이 되어 사초(史草)를 쓸 때 직필(直筆)하여 영의정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한때 좌천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사관에 복직되었다. 1565년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이 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67년 선조 즉위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1571년 영의정에 올랐다. 홍섬(洪暹) 1504~158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의 무고로 유배,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풀려나왔다. 그 후 좌찬성 겸 이조판서, 대제학을 겸임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이 과중하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하였다. 최세진(崔世珍) 1468~1542. 본관은 괴산(槐山), 자는 공서(公瑞)이다. 중인(中人)으로서 특전을 받아 1503년(연산군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조선 전기의 어문학자. 당대 최고의 중국어·운서 연구의 대가였다. 이문(吏文)에도 뛰어나, 사대문서 작성과 사신의 내방에 중요 역할을 했다. 《훈몽자회》를 편찬하고 언문자모를 표기하여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는《사성통해》,《이문집람, 《언해효경》등이 있다. 윤개(尹漑) 1494~156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로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중종 때 기묘사화에 관련되었으나 중국어를 잘해 외직에 좌천되는 것으로 그쳤다. 인종 때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제거에 가담하고 위사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선조 초에 을사 원흉으로 규탄받아 모든 훈작이 삭탈되었다. 상진(尙震) 1493~1564.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범허재(泛虛齋)·향일당(嚮日堂),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1526년 예조좌랑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4년 중종이 죽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등을 지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58년 영의정이 되었다. 15년 동안 재상으로 왕을 보좌, 명상으로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다. 족함을……않다 노자 《도덕경》 44장에 보인다. 간성이 되어 원문의 '병한(屛翰)'은 나라의 울타리와 기둥이란 뜻으로 《시경》 〈판(板)〉에서 "큰 제후국은 나라의 병풍이며 대종(大宗)은 나라의 정간(楨榦)이다.〔大邦維屛, 大宗維翰.〕"라고 하였다. 수고함 원문의 '현로(賢勞)'를 해석한 말이다. 맹자(孟子)가 《시경》 〈북산(北山)〉 시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왕의 일이 아님이 없건만, 나만 홀로 어질다 하여 수고롭구나.〔此莫非王事 我獨賢勞也〕"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 사방에……않는다 《논어》 〈자로(子路)〉에서 자공(子貢)이 어떠해야 선비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자, 공자가 "염치를 알고서 자기 몸가짐을 단속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선비라고 이를 수 있다.〔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라고 하였다. 기미를……않는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는 기미를 보고 떠나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돌처럼 견고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라고 하였다. 절개가 돌과 같으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이를 통해서 군자가 결단하는 것을 알 수 있다.〔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易曰 介于石 不終日 貞吉 介如石焉 寧用終日 斷可識矣〕"라고 하였다. 옥계(玉溪) 노진(盧) 1518~1578.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칙암(則庵),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54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박사 ·전적 ·예조의 낭관을 거쳐 지례현감이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명되었다. 1567년 이조참의에서 충청도관찰사,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는데 홀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모두 사퇴하고 곤양군수로 나갔다. 평소 기대승(奇大升) ·노수신(盧守愼) ·김인후(金麟厚)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도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오봉(鰲峰) 김제민(金齊閔) 1527~1599. 본관은 의성,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峰),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화순현감 ·순창군수, 1586년 전라도도사(都事)를 지낸 뒤, 병으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리(鄕里)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난이 끝나자 학문에 전심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정통하였고,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전란으로 거의 타 없어졌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고, 문집에 《오봉집》이 있다. 이재(頣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로,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인데, 처음에는 이학(理學)의 공부에 힘쓰고 『주역』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 ·성담(性潭), 시호 문경(文敬)이다. 1795년 이조참의에 이어 예조판서에 오르고 좨주(祭酒)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당시 성리학계(性理學界)에서 심성(心性)의 변(辨)으로 논쟁을 벌일 때 호론(湖論)인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했다.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문집 《성담집(性潭集)》이 있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 1808~1858.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호는 수종재(守宗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8대손이며, 송치규(宋穉圭)에게 학문을 배웠다. 예학과 성리학에 뛰어났으며, 낙론(洛論)을 지지하여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문집인 《수종재집》이 있다. 벼슬의……것 벼슬자리에서 과감하게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송나라 전약수(錢若水)에 대해서 어떤 도승(道僧)이 "급류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평하였는데, 과연 그가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도 안 된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송나라 소백온(邵伯溫)이 지은 《문견전록(聞見前錄)》 권7에 나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고 벽봉 부군 가장 先考碧峰府君家狀 부군의 휘는 낙진(洛進), 자는 치일(致一), 벽봉(碧峯)은 자호이다. 김씨는 신라의 국성(國姓)에서 나왔으니, 경순왕(敬順王) 태자 휘 일(鎰)은 부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기는 것을 간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삼옷과 풀뿌리를 캐먹다가 생을 마쳤다. 그 후 휘 경수(景修)는 고려 선종(宣宗) 때 이부 상서(部尙書)가 되었다. 이 분이 휘 춘(春)을 낳으시니, 춘은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졌다. 2대를 지나 휘 작신(作辛)이 부령군을 이어받아 봉해지니, 이로 인해 관향으로 삼았다. 또다시 2대를 지나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는 불교를 배척하고 정학을 세웠으며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화를 높였으니, 도덕과 문장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이 분이 지포(止浦) 선생으로 형부 상서(刑部尙書) 충선공(忠宣公) 휘 여우(汝盂)를 낳았다. 여우는 원나라에 들어가 공자 사당의 제도를 그려서 가지고 와 강릉(江陵)에 처음으로 세우니, 사림들이 두 부자가 사문(斯文)에 공이 있다고 하여 부안(扶安) 도동(道東)에 사원을 세웠다.5대를 지나 고부 군사 휘 광서(光敘)는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보고서 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니고 관향인 부안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이에 자손들이 대대로 거처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충의록(忠義錄)》에 보인다. 이 분이 휘 취(王就)를 낳으니, 취는 조선에서 직장(直長)을 지냈다. 이분 이 휘 보칠(甫漆)을 낳으니, 보칠은 빈과(贇科)에 합격하여 열여섯 고을을 다스렸으며, 역적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여 공을 세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이 분이 휘 숙손(淑孫)을 낳으시니, 숙손은 임실 현감(實縣縣監)이 되어 뛰어난 정사를 펼쳤다. 이 분이 진사 매죽당(梅竹堂) 휘 종(宗)을 낳으셨는데, 노천(老泉) 김식(金湜)133) 공이 조정에 천거하면서 "조행(操行)이 돈실하며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선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 은거하면서 학생을 가르치며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이 분이 휘 경정(景貞)을 낳았으니, 경정은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다. 이 분이 죽계 휘 굉(鋐)을 낳으니, 굉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생원시에 2등하였다. 모당(慕堂) 홍리상(洪履祥)134) 공,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공 등과 도의로 사귀었으며, 학행으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유천사(柳川祠)에 제향 되었다. 이 분이 정길(鼎吉)을 낳았으니, 정길 또한 학행으로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이 분이 휘 숙(潚)을 낳았는데, 숙은 경학에 통달하였으며 선대의 가업을 이었으니, 호는 지와(止窩)이다. 그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휘 세광(世光)으로 고부(古阜)에 옮겨와 거주하였으니, 이 분이 부군의 7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인성(麟成)으로,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 조부의 휘는 석규(錫圭)로,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다. 부친의 휘는 경순(景淳)으로 또한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 조부와 손자 두 대의 일은 《삼강록(三綱錄)》에 보이며,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이효정려기(二孝旌閭記)〉를 지어주었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 통정(通政) 택려(宅麗)의 따님이니 대호군(大護軍) 해(該)의 9대손으로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규문이 정숙하였다.철종 기미년(1859년) 2월 2일 술시에 창동리(滄東里) 집에서 부군을 낳았다. 부군은 자질이 뛰어나서 2살에 책을 읽었으며 9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슬퍼하고 통곡하였으며 스승이 상례를 가르치자 그것을 외웠다. 10살에 이웃 마을에서 학업을 익혔는데, 지나다니는 길이 깊은 숲이라 귀신이 우는 곳이 있었지만 반드시 밤에 가서 책을 읽고 집으로 돌아와 자다가 닭이 울면 곧바로 가서 스승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촛불을 밝혀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비바람이 치더라도 멈추지 않으니 문사가 날로 발전하였다. 12살에 과체시를 지었는데 간간이 노련한 사람이라도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말이 있었으니, '청전의 흰 학이 날아드네[白靑田鶴來]'라는 말에 대해 사람들이 "이 아이의 시재는 평범한 부류를 뛰어넘었으니, 반드시 크게 성취할 것이다."라고 하고서 인하여 훌륭한 구절이라며 세상에서 널리 외웠다. 14살에 과거시험장에 들어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써서 제출하였다. 16살에 서울에 과거 보러 가서 여러 선비들과 문예를 다투니, 당시 과체를 잘 짓는 자들이 대부분 앞자리를 양보하지 않음이 없었다.병자년(1876년)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조부모와 부모를 모심에 집안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자 마침내 집안일을 맡게 되니 학업이 중단될 때가 많게 되어 과거도 또한 그만두었다. 기묘년(1879년)에 조모 송씨의 상을 당하여 승중상(承重喪)135)을 거행할 때 예서에 정해진 대로 하였다. 경진년(1880년)에 모친이 병을 앓자 논 열 마지기를 팔아 약을 사고 손가락을 찢어 피를 내서 약에 타서 올리니 곧바로 약효가 났다. 모친은 성격이 엄하여 명을 내리기만 하면 정성을 다해 받들어 따랐다. 항상 새벽이면 문안을 드리고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살폈는데 의복을 단정히 하고 절을 올렸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재배를 올렸으며 생신과 설날에는 헌수(獻壽)를 올렸다. 집안이 가난하여도 맛있는 음식을 항상 이바지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몸소 잘 요리가 되었는지 살폈으며 밤이 깊으면 먹을 것을 올리게 하였으며 새벽에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겨울밤에는 혼정신성(昏定晨省) 이외에도 자주 나아가 안부를 물었으며, 때로 반찬이 없게 되면 몸소 앞 시내로 나가 통발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았다. 비록 풍설이 몰아쳐도 반드시 잡은 뒤에야 돌아왔으니,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새었어도 모친 봉양에 게으르지 않았다. 항상 좋은 삼을 사두었다가 기운이 허해짐을 대비하였으니, 이렇기에 모친은 90살이 되어도 오히려 병이 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천성이 그러한 것으로 억지로 힘써서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혼정신성할 때 절을 올린 것은 만년의 일이다.계미년(1883년) 겨울에 증조와 부친의 정려 일로 상경하여 격쟁(擊錚)136)하여 어가 앞에서 하소연하니 마침내 은전을 받게 되었다. 무자년(1888년) 큰 흉년이 들자 여러 조카들의 자식과 친족의 많은 노인, 어린이들이 찾아와 먹을 것을 구하자, 자신이 비록 넉넉하지 않지만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이 죽을 끓여 이바지하니 모든 이들이 이에 힘입어 살게 되었다. 갑오년(1894년)에 동학의 괴수 전봉준(全奉準)이란 자가 부친의 연제(練祭)137)를 지내게 되었는데, 방백과 읍재부터 여항의 촌부들까지도 앞 다퉈 부의를 보내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이웃 마을에 살며 오랫동안 교유했지만 홀로 조문하지 않았는데, 어떤 이가 그 일로 위태로운 일을 당할까 걱정하자 말하기를 "붕우가 큰 잘못을 저지르는데 교유를 끊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화복은 물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병신년(1896년) 마을 남쪽 시냇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학동들과 학문을 강론하니, 군수인 윤병(尹秉)이 듣고서 '활수(活水)'라는 편액을 주고 아울러 기문을 지으니 주자 시의 뜻을 취한 것이다.138) 후에 간재 전 선생이 다시 기문을 지어주었다. 무술년(1898년) 봄에 향교의 색장(色掌)이 되었으며, 가을에 장의(掌議)가 되어 오래 묵은 폐단을 개혁하여 향교의 재정을 정비하고 대성전(大聖殿)을 수리하여 오래 유지할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경자년(1900년) 가을에 전 선생이 변산(邊山)의 월명암(月明菴)에 머물며 나에게 명하여 찾아가 배알하라고 하니, 선생이 나를 사랑하여 친히 부군을 찾아 주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의 스승으로 정하라고 권하니, 부군은 집에서 스승을 정하면 정성이 아니며 또한 예도 아니라고 하고서 이에 날을 잡아 폐백을 갖춰 4백 리 길을 가서 천안의 산중에서 절을 올리게 하고 사제(師弟)를 정하였다. 신축년(1901년) 크게 흉년이 들자 토지를 팔아서 사문에 재물을 보냈으며, 매번 나를 보낼 때 반드시 예물을 딸려 보냈다. 간옹이 일찍이 편지를 써서 "성인이 '인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139)라고 하였는데,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거늘 하물며 아들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부군이 그 말에 감동하여 드디어 이 학문에 온전히 뜻을 두고서 간옹을 모범으로 여겨 반드시 선생이라 칭하고 아무개 어른이라 이르지 않았다.출입하거나 평소 거처에 항상 큰 삿갓과 넓은 소매의 두루마기를 착용하였는데, 좁은 소매의 두루마기 입고서 책을 읽는 선비를 보면 곧 "선비의 행색은 절로 법복이 있거늘 어찌 세속을 따르는가."라 하였으니, 이로 인해 향당에서 경외하였다. 비록 이웃의 농부라도 관을 쓰지 않으면 다가가서 만날 수가 없었다. 일찍이 두풍(頭風)140)을 앓아 백회의 머리칼을 잘라냈는데, 문득 스스로 깨우치고서 "머리칼과 피부를 훼손하지 말라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에 보이거늘, 차라리 병을 앓고 말지 어찌 불효를 범하리오."라고 하고는 마침내 다시는 자르지 않으니 두풍도 또한 앓지 않았다. 또한 일찍이 흡연을 즐겼는데, 전재 임 선생의 '흡연이 비록 작은 일이나 실로 큰 덕에 허물이 된다.'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흡연하는 도구를 내다버리고 다시 피지 않았다. 이에 찾아오는 빈객들은 대부분 밖에다가 흡연하는 도구를 놓고 들어갔다.아들의 관례에는 반드시 삼가례141)를 행하였고, 부모의 상에는 검은 베옷과 삿갓을 사용하였다. 초상에 남은 음식으로 손님을 대접하지 않았으며 타인을 조문할 때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니, 연상(練祥)에 술에 취하고 배부르게 먹는 풍습을 금지하는 윗사람이 없는 것을 탄식하였다. 기공(朞功)142)에 성복(成服) 전에 관을 벗지 않았는데, 세속을 놀라게 하는 것에 대해 괘념치 않았다. 국상을 당하면 평소 거처에 흰 관을 썼으며 시를 짓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았으니, 고을 사람들이 대부분 공을 따라 하였다. 책을 읽을 때는 깊은 풀이를 구하지 않고 주된 의미를 잃지 않으려 힘썼으며 매번 마음에 맞는 곳을 표출하여 문득 두어 차례 낭독하다가 이어서 크게 읊조렸으니, 예를 들면 《논어》의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143) '어질구나! 안회여'144)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다.'145)는 장과 《맹자》의 진대(陳代),146) 경춘(景春),147) 웅어(熊魚)148) 장 등이 이것이다. 또한 역사를 섭렵하기 좋아하였으니 옛사람의 충효와 큰 절개, 재물을 가볍게 여겨 기꺼이 베푸는 내용을 보면 문득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였고, 현인군자가 뭇 소인배들의 함정에 빠진 것을 보면 문득 눈물을 줄줄 흘려 간혹 노기를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범려가 오호에 배를 띄우고 떠난 것149)이나 방맹이 관을 걸어놓고 떠난 것150)처럼 기미를 보고 세상에서 숨는 것을 보게 되면 더욱 좋아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것처럼 여겼다.계묘년(1903년) 봄에 거처하는 동쪽에 서실을 지어놓고 만년에 은거하며 수양할 곳으로 삼았다. 이에 간옹이 '낙요당(樂要堂)' 세 글자를 써서 보내주면서 호로 삼게 하고 아울러 명도 주었으니, 옛사람의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한 것이 없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자식을 가르침만한 것이 없다.'151)는 말에서 취하였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152) 공이 그 실상을 기문(記文)으로 지었으며, 간옹이 또한 '벽봉거사(碧峰居士)'라는 네 글자를 써서 보내주어 서당 벽에 걸게 하였다. 무신년(1908년)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부군은 편지를 써서 간옹에게 고하기를 "당당한 소중화의 몸으로 만약 오랑캐에게 변화를 당한다면 살아도 어찌 영화이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대개 삶과 의리의 분별이 이미 정해졌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기유년(1909년) 정월 17일에 병이 깊어졌다. 당시 나는 부안 목리(木里)에서 소식을 받고 20일 이른 아침에 돌아와 인사를 올리니 정신은 평소와 같았는데, 나를 보고서 간옹의 안부를 자세히 물으셨다. 다음날 아침에 병이 위독해졌는데, 관이 혹시라도 비뚤어질까 걱정하면서 자주 머리를 매만졌다. 얼마 뒤에 임종하니, 바로 21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였다. 향년 51세로, 고부 달천(達川) 뒷산기슭 선영 아래 병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후에 ■■로 옮겼다. 부인은 전주(全州) 최씨 학생 석홍(錫洪)의 따님으로 덕촌(德村) 희정(希汀)153)의 후손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조심스러웠으니 엄한 시모인데도 오히려 효부로 칭송받았다. 예로써 몸가짐을 하고 공경으로 남편을 섬겼으며 의로써 자식을 가르쳤으니, 여사(女士)의 풍모를 지녀 향리에서 모두들 "마땅히 그 군자에 걸맞은 짝이다."라고 하였다. 부군보다 2년 먼저 태어나 7년 뒤에 타계하셨는데, 처음에는 달천의 부군 묘에 합부하였다가 후에 부안군 부안읍 모산 분재(粉齋) 앞 왼쪽 산기슭 ■좌로 옮겼다.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불초 택술이며 그 다음으로 봉술(鳳述), 만술(萬述), 억술(億述)이 있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봉(金在鳳), 고흥(高興) 유동기(柳東起)에게 시집갔다. 택술은 아들로 형복(炯復) 형태(炯泰), 형관(炯觀), 형겸(炯謙)이 있고 딸들은 전주(全州) 최춘렬(崔春烈), 밀성(密城) 빅진호(朴珍浩)에게 시집갔다. 봉술은 아들로 형귀(炯龜)가 있고 딸들은 김해(金海) 김태현(金泰賢), 청주(淸州) 한행종(韓幸鍾), 전주 최규택(崔圭澤), 경주(慶州) 이상헌(李相憲)에게 시집갔다. 만술은 아들로 형수(炯洙), 형락(炯洛), 형방(炯坊)을 두었고 딸은 창녕(昌寧) 장해초(張海楚)에게 시집갔고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억술은 아들로 형식(炯湜), 형주(炯澍), 형호(炯濩), 형부(炯溥)를 두었고 딸은 김해 김인태(金仁泰)에게 시집갔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어리다. 사위 김재봉은 아들로 상현(庠鉉)을 두었고 딸은 탐진(耽津) 안영식(安永植)과 함평(咸平) 이근범(李根範)에게 시집갔다. 사위 유동기는 종태(鍾泰), 종천(鍾千), 종칠(鍾七)을 두었고 딸들은 울산(蔚山) 김택수(金宅洙), 김해 김종연(金鍾淵), 전주 이형구(李亨九)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오호라! 부군은 밝고 굳센 자질로 용맹하게 매진하는 힘을 써서 곧고 굳건한 덕을 이뤘다. 그 조목을 대략 말하자면, 정성과 진심을 다하여 부모의 뜻을 받들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을 다하였으며 손가락을 찢어 피를 내어 매우 위독한 병을 되돌렸다. 그러므로 부군이 타계하자 조모께서 애통해하며 "내가 효자를 잃었구나."라고 했으니, 이는 부모를 섬긴 효성이다.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닦으며 교유를 즐겨하지 않았는데, 평생 존모한 이는 다만 간옹 한 사람 뿐이었으며 마음을 허여하며 친하게 지낸 이로는 그 문하에 몇 사람뿐이었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이 세 차례 방문하면서 "옛 것을 좋아하고 독실하게 행하는 이를 내가 호남에서 공과 같은 자를 찾아보아도 다시 얻을 수 없으니, 더불어 사귈 만하다."라고 하였다. 겸와(謙窩) 홍주후(洪疇厚) 공이 일찍이 찾아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매우 기뻐하다가 마침내 서로를 알아주는 벗이 되었다. 이것은 스승과 벗을 신중하게 택한 것이다.친족 가운데 상을 치르는 중에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자가 있으면 힘써 만류하였는데, 듣지 않으면 집이 서로 이웃하여도 관례나 혼례 하는 날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이것은 예를 엄격하게 지킨 것이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보면 진심으로 좋아하여 찬양을 마지않았으며,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보거든 대단히 미워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흉악하여 인륜을 무너뜨리는 자가 같은 마을에 살게 되었는데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수재나 화재를 멀리하듯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세속의 악행을 하는 자는 내가 악을 미워하니 미워하는데, 오직 도를 배운다고 내세우고서 더러운 유속에 부합하려는 자를 대단히 미워하니, 이런 사람이 세상에 해를 끼침은 짐독보다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선비가 말세에 살게 되었으니 좋아하는 사람은 적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으면 분명 고상한 사람이요, 좋아하는 자가 많고 미워하는 자가 적으면 분명 유속에 부합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올바름이다.좋은 자질을 갖춘 사람을 보거든 반드시 속학은 마땅히 버려야 하고 실제 학문을 마땅히 힘써야 한다고 정성을 다해 말해주니, 듣는 이들이 감격하여 성취한 이들이 많았다. 이것이 사람을 가르치는 인(仁)이다. 성시와 관부 등 명성과 이익을 다투는 곳에는 한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약관일 때 고을 수령이 예방(禮房)을 보내 안부를 묻고서 뵙기를 청하였는데 가지 않았다. 과거 볼 때에도 또한 한번도 권문(權門)을 찾아가 뇌물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이 지조의 개결함이다. 타인과 이해를 따지지 않았으니, 항상 "내가 조금 손해 보면 타인은 즐거워하니 어찌 이해를 따지겠느냐."라고 하였으며, 또한 "만사를 여유롭게 처리하면 그 복이 오래간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덕을 지닌 도량의 넓음이다. 타인과 논변하다가 의리와 관계된 부분이 나오면 확실한 증거를 이끌어와 엄격하고 명쾌하게 변석하여 상대방이 깨닫고서 감복한 뒤에 그만두었다. 비록 변론을 잘한다고 일컬어지던 이들도 감히 그 재주를 펼칠 수 없었다. 이것이 논의할 때 이치가 지극한 것이다. 시를 지을 때는 조탁을 일삼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었으나 천부적인 재능을 받았기에 절로 체재(體裁)를 이뤘다. 만년에 이르러 당대와 나라를 걱정하였기에 강개하며 충심에 분격하는 말이 많았는데, 그렇지만 더욱 더 풍격이 청절(淸絶)하였다. 간옹이 원고를 보고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작품마다 모두 아름답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시율의 격조가 높은 것이다.총괄하건대 마음에 있어서는 자기(自欺)를 버리고 성을 보존하였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세속을 끊고 전아함을 숭상하였으며, 세상에 있어서는 오랑캐를 배척하고 중화를 높였다. 이런 것들이 매우 엄준(嚴峻)하였으니, 본원(本源)의 바탕이 되었다. 세상에 널리 알릴만한 언행으로 모범이 된 것이 많아서 이에 그치지 않은데, 다 말하려면 번거로울 뿐이다. 또한 향리의 사우(士友)들이 직접 보고 입으로 전한 것도 또한 구태여 다 기록하지 않는다. 삼가 살펴보니 세상의 성리를 논하고 예의를 말하며 선비로서 이름난 사람들은 간혹 자신이 한 말을 채우지 못하여 성법(成法)을 어긴 자가 있는데, 오직 부군은 그러하지 않았으니 한 가지 행실 한 가지 일이라도 유자의 법도를 따르지 않거나 당신이 말한 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간옹이 참판 퇴암(退菴) 이성렬(李聖烈)154)이 선비를 구하는 편지에 답하면서 부군에 대해 '만년에 학문을 좋아하여 능히 유문(儒門)의 법도를 지켰으며 일에 임하여 의지할 만하다.'는 말로 칭송하니, 이는 참으로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일 수를 누려 마음에 지닌 것을 펼쳤다면 마땅히 세도(世道)에 도움이 있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외진 향촌에서 지내 명성이 드러나지 못하고 타계하였으니, 이것이 자손들의 끝이 없는 아픔이다. 삼가 편찬하여 가장을 지어 입언 군자가 채택하는 자료가 될 것에 대비한다.기유년(1909년) 여름에 불초 고자 택술은 피눈물을 머금으며 삼가 짓는다. -35년 뒤 갑신년(1944년) 중하에 첨삭하여 수정하였다.- 府君諱洛進, 字致一, 碧峯自號也.金氏出新羅國姓, 敬順王大子諱鎰, 諫父王讓國, 入皆骨山, 麻衣草食而終.其後有諱景修, 高麗宣宗朝, 爲吏部尙書, 生諱春, 封扶寧府院君.二傳而諱作辛, 襲封扶寧君, 因爲貫.又二傳而平章事文貞公諱坵, 斥佛扶正, 攘胡尊華, 道德文章冠一世, 是爲止浦先生, 生刑部尙書忠宣公諱汝盂, 入元摹聖廟貌, 創設於江陵, 士林以兩世有功斯文, 立祠于扶安道東.歷五世, 古阜郡事諱光敘, 見麗運訖, 志存罔僕, 大歸貫鄕, 子孫世居, 事見《忠義錄》.生諱[王+就], 本朝直長.生諱甫漆, 贇科歷典十六州, 討賊樹勳, 陞僉知中樞府事.生諱淑孫, 任實縣監, 有異政.生梅竹堂諱宗, 進士, 老泉金公湜薦于朝曰: "操履敦實, 從善若流." 己卯士禍後, 隱居敎學, 徵辟不就.生諱景貞, 禮賓寺主簿, 生竹溪諱鋐, 進壯生二, 與慕堂洪公·月沙李公, 爲道義交, 以學行除宣陵參奉, 享柳川祠.生諱鼎吉, 亦以學行除軍資監參奉, 丙子亂倡義旅. 生諱潚, 通經術, 纘先業, 號止窩.子通德郞諱世光, 移居古阜, 是爲府君七世.曾祖諱麟成, 以孝旌閭, 祖諱錫圭, 有文行, 考諱景淳, 亦以孝旌, 祖孫兩世事, 見《三綱錄》, 艮齋田先生撰〈二孝旌閭記〉, 妣, 靈光金氏通政宅麗女, 大護軍該九世孫, 治家有法, 閨門肅整.以哲宗己未二月二日戌時, 擧府君于滄東里第, 天資穎異, 二歲能讀書, 九歲丁外艱, 哀號如成人, 塾師敎以喪禮成誦.十歲做業隣里, 所經有深林鬼號處, 必夜往而讀, 歸家而宿, 鷄嗚卽往, 待師起寢, 明燭受業, 雖風雨不廢, 文辭日進. 年十二作科體詩, 間有老手所未道語, '白靑田鶴來'語, 人曰: "此子詩才出凡輩, 必將大就." 因以警句誦傳.十四入場屋, 自作自書, 十六赴京試, 與諸士較藝, 當時能者, 皆莫不讓頭.丙子歲大無, 重侍下無人幹蠱, 遂當家事, 學業多間斷, 科行亦廢止.己卯丁王母宋氏憂, 執承重喪如禮.庚辰母夫人病, 欲斥水田十斗種落買藥, 裂指出血和藥而進, 卽奏効.母夫人性嚴, 凡有所命, 一意承順, 每晨昏定省, 冠帶行拜, 朔望則再拜, 晬辰元朝上壽.家貧而甘旨常繼, 得美饌則親檢烹調, 夜久令進食物, 曉亦如之.冬夜則定省外累進問侯, 有時絶饌, 親往前川, 持笱獵魚, 雖値風雪, 必得之而後歸, 老白首不懈.常買置良蔘以備氣虛, 由是母夫人年九十, 尙無恙, 此皆天性然爾, 非出勉强, 而晨昏之拜, 晩年事也.癸未冬, 以兩世旌褒事上京, 擊錚原情于駕前, 竟得蒙典.戊子, 大饑, 諸甥兄妹, 本族老幼, 多來就食, 己雖不給, 少無難色, 饘粥共之, 幷賴以活.甲午, 東魁全奉準者, 行其父練祭, 自方伯邑宰至巷叟村嫗, 爭致賻慰, 府君以隣曲舊交, 獨不問, 人危之則曰: "朋友有大故, 不絶而何, 禍福不須問." 丙申, 構小亭于里南源泉上, 與冠童講修, 知郡尹侯秉聞之, 扁以'活水'幷有記, 取晦翁詩意也.後艮齋田先生復記之.戊戌春, 爲鄕校色掌, 秋爲掌議, 矯救舊弊, 整校財修聖殿, 爲久遠計.庚子秋, 田先生留邊山月明菴, 命不肖往謁, 先生愛不肖親訪府君.人有勸以使子定師, 府君以爲在家定師, 不誠且非禮, 乃擇日具贄, 越四百里, 令拜于天安山中而定分. 辛丑, 大歉, 賣土而資送師門, 每送必隨以禮物, 艮翁嘗有書曰: "聖人云'當仁不讓於師', 師且不讓, 况於子乎." 府君感其言, 遂專意此學, 視艮翁爲模範, 必稱先生, 不云某丈.出入燕居, 恒着大笠濶袖, 見讀書士著狹袖, 則輒曰: "士子行色, 自有法服, 何用隨俗." 由是鄕黨敬畏, 雖隣比農夫, 不冠不敢來見.嘗患頭風, 剪去百會之髮, 忽自解曰: "不毁髮膚, 著於聖訓, 寧可疾苦, 豈犯不孝." 遂不復剪, 而風亦無患.又嘗嗜吸烟, 見全齋任先生'吸烟雖小事, 實累大德'之語, 卽棄烟具不復吸.於是賓客來者, 多戢烟具於外.冠子, 必行三加, 親忌, 用黲布笠, 不以喪餘之薦待客, 吊於人不酒肉, 而嘆練祥醉飽之俗, 在上之人無禁之者.朞功成服前, 不去冠, 不以駭俗爲嫌, 國恤燕居, 著白冠, 不作詩, 不聽樂, 鄕人多慕效之.讀書不求深解, 務要不失主意, 每表出會心處, 輒朗讀數過, 繼以諷咏, 如《論語》飯疏飮水·賢哉回也·浴沂風雩等章, 《孟子》陳代·景春·態魚等章, 是也.又好涉獵往史, 見古人忠孝大節, 輕財喜施, 輒擊節嘆賞, 見賢人君子爲羣小所陷, 輒潛然淚下, 或赫然怒色, 至見見幾高蹈, 如范蠡浮湖, 逄萌掛冠等處, 尤欣然若出諸己.癸卯春, 構書室于所居之東, 爲晩年藏修所, 艮翁書送樂要堂三字, 以錫號, 幷有銘, 取古人'至樂莫如讀書, 至要莫如敎子'語也.炳菴金公駿榮記其實, 艮翁又書碧峰居士四字送之, 令揭諸堂壁.戊申, 剃變, 府君書告艮翁曰: "堂堂華夏之身, 若見化於夷, 則生亦何榮", 蓋態魚之判已定, 而志可見矣.以己酉正月十七日寖疾, 時不肖自扶安木里承報, 二十日早朝歸侍, 精神如常, 見不肖問艮翁安候甚詳, 翼朝疾革, 恐冠或不正, 時常撫頭, 少頃而終, 乃二十一日巳時也.享年五十一, 葬于古阜達川後麓先兆下丙坐原, 後移■■.配, 全州崔氏學生錫洪女, 德村希汀后, 性仁而謹, 姑嚴猶以孝婦稱, 以禮持身, 以敬事夫, 以義敎子, 有女士風, 鄕里咸曰: "宜其爲君子配", 生先府君二年, 卒後七年, 初祔達川府君墓, 後移扶安郡扶安邑芧山粉齋前左麓■坐.四男, 長不肖澤述, 次鳳述·萬述·億述, 女適光山金在鳳·高興柳東起.澤述男, 炯復·炯泰·炯觀·炯謙, 女適全州崔春烈·密城朴珍浩.鳳述男, 炯龜, 女適金海金泰賢·淸州韓幸鍾·全州崔圭澤·慶州李相憲.萬述男, 炯洙·炯洛·炯坊, 女適昌寧張海楚, 一未適人.億述男, 炯湜·炯澍·炯濩·炯溥, 女適金海金仁泰, 一幼.金壻男, 庠鉉, 女適耽津安永植·咸平李根範.柳婿男, 鍾泰·鍾千·鍾七, 女適蔚山金宅洙·金海金鍾淵·全州李亨九, 曾孫以下, 不錄. 嗚呼, 府君以明毅之資, 用勇邁之力, 成貞固之德, 略言其目, 則殫誠竭忠, 盡志物之養, 斮指往血, 回己革之疾, 故府君之沒, 母夫人慟曰: "吾失孝子", 此事親之孝也.闇然自修, 不屑遊從, 終身尊慕者, 惟艮翁一人, 許心相親者, 其門下幾人, 炳菴三度見訪曰: "好古篤行, 吾於湖南, 求如君者而不復得, 可與定交." 謙窩洪公疇厚, 亦嘗來訪, 與語大悅, 遂爲知己友, 此擇師友之謹也. 族人有乘喪取婦者, 力止而不聽, 則屋宇相接, 而冠昏之日, 一不往見, 此守禮之嚴也.見人有善, 實心好之, 贊揚不已, 見人有惡, 痛疾不貸, 凶悖犯常者, 同里而不相見, 絶水火, 常曰: "世俗之惡者, 吾惡則惡矣, 惟名爲學道, 而同流合汙者, 最可惡, 斯人之害世, 甚於鴆毒." 又曰: "士處末世, 好者少惡者多, 必是高尙之人, 好者多惡者少, 必是流汙之人", 此好惡之正也.見人質美, 必諄諄告以俗學當捨, 實學當務, 聞者感激, 多有成就, 此敎人之仁也.城市官府, 凡聲利之場, 一不近跡, 弱冠時, 本倅遣禮吏, 問候請見而不往.擧子日, 亦不一求權門關節, 此志操之潔也.與人不較利害, 常曰: "我少害則得人歡, 何較爲也." 又曰: "萬事從寬, 其福長遠", 此德量之弘也.與人論辨, 有關義理者, 則援引確據, 峻截明快, 得彼悟服而後己, 雖所稱善辯者, 莫敢售, 此言論之理到也.爲詩不事雕琢, 直寫己志, 然得之天分, 故自成體裁.及乎晩節, 志在憫時憂國, 故多慷慨忠憤之辭, 而益復淸絶, 艮翁見稿語人曰: "篇篇佳作", 此詩律之格高也.總之在心而去欺存誠, 在學而絶俗尙雅, 在世而斥夷尊華者, 最嚴且切, 而爲本源田地矣.言行之可表章爲柯則者, 多不止此, 而欲盡之, 則近煩.且在鄕邦士友之目覩口傳, 亦不必盡書也.竊觀世之談性理說禮義, 以儒名家, 或不能充其言而違成法者, 有之矣, 惟府君, 則不然, 求其一行一事, 不循儒規, 不副所言者, 而不可得矣.是故艮翁答退菴李參判聖烈求士之書, 稱府君以'晩而好學, 能守儒門規模, 臨事可仗', 眞實際語也.如得壽祿而展布所蘊, 宜有以裨益世程, 顧乃不然, 僻鄕中身, 聲聞不彰而沒世, 是爲子孫罔極之痛也.謹纂次成狀, 以備立言君子採擇之資焉.歲己酉仲夏日, 不肖孤子澤述泣血謹狀.【後三十五年甲申仲夏, 添刪修潤.】 노천(老泉) 김식(金湜) 1482~1520. 본관은 청풍,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시호는 문의(文毅)이다. 모당(慕堂) 홍리상(洪履祥) 1549~1615.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이다. 임진왜란 때 왕을 서경까지 호종하여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에 이르렀다. 성혼을 변호하다가 파천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초에 대사간에 소명(召命)되고, 부제학을 거쳐 개성유수에 올랐다. 승중상 장자(長子)가 부모보다 먼저 죽고 그 부모가 나중에 죽으면 장손(長孫)이 죽은 장자를 대신하여 맏상주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한다. 격쟁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해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의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연제 상례(喪禮)의 일종으로, 소상(小祥)을 앞당겨 치루는 것을 말함.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데 어머니가 먼저 죽었을 경우, 1년 만에 지내는 소상을 11개월 만에 지낸다. 활수……것이다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반 묘의 방당이 거울처럼 트였는데, 하늘 빛 구름 그림자 그 안에서 배회하네. 묻거니 어이하여 그처럼 해맑을까, 근원에서 생수가 솟아나기 때문일레.[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共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고 한 시에 그 의미를 취하였다. 인에……않는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두풍 머리 아픈 것이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고 수시로 발작하는 증상을 가리킨다. 삼가례 관례를 행할 때 세 번 관을 바꾸어 쓰고 의식을 가리킨다. 삼가례는 초가(初加)ㆍ재가(再加)ㆍ삼가(三加)로 나뉘는데 초가에는 단령(團領)ㆍ도아(絛兒) 차림에 갓을 쓰고, 재가에는 단령 각대(角帶) 차림에 사모(紗帽)를 쓰고, 삼가에는 공복(公服) 차림에 복두(幞頭)를 쓴다. 기공 기(朞)는 1년 복, 공(功)에는 대소(大小)가 있는데, 대공(大功)은 9월 복, 소공(小功)은 3월 복이다. 거친……마시며 《논어》 〈술이(述而)〉에 "나물밥에 물을 마시고 팔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속에 있나니, 떳떳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고 하였다. 어질구나 안회여 《논어》 〈옹야(雍也)〉에서 "어질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물을 마시며 누항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며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낙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하였다. 기수에서……쐬다 하루는 자로(子路)ㆍ증점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 네 사람이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가 "저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 뜻을 말해 보라."고 하였다. 이에 자로와 염유는 나라를 잘 다스려 보고 싶다는 뜻을 말하고, 공서화는 종묘(宗廟)의 제례나 제후의 회동에 집례(執禮)를 맡고 싶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증점의 차례가 되자 그는 슬(瑟)을 타고 있다가 간헐적으로 서서히 연주를 멈추고 쟁그렁 소리를 내며 슬을 놓고는 일어나서 "세 사람이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하고 대답하기를,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진대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진대(陳代)가 "제후를 만나 보지 않는 것은 작은 일인 것 같습니다. 이제 한 번 만나 보시면 크게는 왕자(王者)를 이루고, 작게는 패자(覇者)를 이룰 것입니다. 또 옛 기록에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편다.'라고 하였으니, 할 만한 일일 듯합니다."라고 말하자, 맹자가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할 적에 우인(虞人)을 깃발로 부르자, 오지 않으니, 장차 그를 죽이려 했었다. 공자께서 그를 칭찬하시기를 '지사(志士)는 시신(屍身)이 도랑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셨으니, 공자는 무엇을 취하셨는가? 올바른 방법으로 부르지 않으면 가지 않은 것을 취하신 것이다. 만일 부르지도 않았는데 간다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경춘 경춘(景春)이 공손연과 장의가 참으로 대장부라고 하자, 맹자가 이 두 사람은 순종을 정도(正道)로 삼았으므로 이는 첩부(妾婦)의 도(道)이기 때문에 대장부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웅어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서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라고 하였다. 범려가……것 월왕(越王)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회계(會稽)의 치욕을 당한 뒤로, 범려(范蠡)가 미인 서시(西施)를 오왕에게 바쳐 오왕의 마음을 현혹되게 하여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내 월왕을 하직하고, 다시 서시를 데리고 오호(五湖)에 배를 띄워 함께 떠나 버렸는데, 그 후 제(齊)나라에 들어가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성명을 바꾸고 도(陶) 땅에 살면서 주공(朱公)이라 칭하고 치산(治産)을 잘하여 거부를 이루었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 방맹이……것 후한 때 방맹(逄萌)이 왕망(王莽)이 충간(忠諫)하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지금은 삼강(三綱)이 끊어졌으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화환(禍患)이 닥칠 것이다."라 하고, 관을 벗어 동문에 걸어두고는 떠나 요동(遼東)에 가서 살았다 한다. 《後漢書 卷113 逄萌列傳》 지극한……없다 《명심보감》 〈훈자(訓子)〉에 보인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병암(炳菴)이다. 가세가 극도로 곤궁하여 주경야독을 하였으나 워낙 독실하게 공부하여 임헌회(任憲晦)·신응조(申應朝)·송병선(宋秉璿)·박운창(朴芸牕)·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허통(許通)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3번씩이나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 이기설(理氣說)과 예학(禮學)에 특히 주력하였으며 이항노(李恒老)를 중심한 벽문학자(檗門學者)들의 주리설(主理說)과 인물성이설(人物性異說)을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계의 학설을 비판, 논변하는 반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간재(艮齋)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는 학문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덕촌(德村) 최희정(崔希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정지(汀之), 호는 덕촌(德村)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여진족 속고내(速古乃)가 침입하자 조광조의 천거로 종성판관(鍾城判官)에 임명되어 종성의 토병(土兵)을 인솔하고 적을 대파(大破)하였다. 이어 갑산(甲山)·강계(江界)·위원(渭原)까지 추격하여 소탕한 공으로 품계가 올랐고, 민전(民田)이 하사되었으나 사양하였다가 그 뒤 고향 근처에 있는 동축산(東竺山)을 특사(特賜)받았다.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사(賜死)되자, 종일 통곡하고《용망호서(龍亡虎逝)》라는 시(詩)를 짓고 난 후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퇴암 이성렬 1865~?. 본관은 예안(禮安), 호는 퇴암(退庵)이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은거하여 민종식(閔宗植)·이시영(李始榮)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규합하는 한편 군자금(軍資金)을 전담했다. 그 후 의병명부가 압수되어 많은 동지가 체포되자 이를 비통히 여기고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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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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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선비 유인 최씨 가장 先妣孺人崔氏家狀 선비 유인 최씨는 계통이 호남(湖南) 전주부(全州府)에서 나왔으니, 고려 시중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가 시조이다. 조선에 들어와서 월당(月塘) 휘 담(霮)이 제학(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분이 네 아들을 낳았으니, 광지(匡之)와 직지(直之)는 제학(提學)이며 득지(得之)는 소윤(少尹)이며, 덕지(德之)의 호는 연촌(烟村)으로 또한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기에 세상에서 한 가문에 네 명의 제학이 나왔다고 칭하였다. 소윤 공의 아들 현감(縣監) 휘 자목(自睦)이 처음으로 고부(古阜)에 거주하였으니, 자손들이 고부의 명망가가 되었다. 중종(中宗) 때 판관(判官) 휘 희정(希汀)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워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현감공의 증손으로 선비(先妣)의 13대조이다. 휘 광흔(光昕), 재원(在瑗), 석홍(錫洪)은 부친 이상 삼대이며, 선비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성무(聖懋)의 따님이다.선비는 철종 정사년(1857년) 9월 14일에 장순면(長順面) 양지리(陽池里)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효성스럽고 공순하여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으며 여공(女工)을 일찍 배워 여스승이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18살에 우리 선군에게 시집왔으니, 선군의 휘는 낙진(洛進), 자는 치일(致一), 관향은 부령(扶寧)이다. 시집와서 보니 시조모인 송씨는 81살로 숨이 끊어질 듯하여 앉거나 누울 때 사람의 손이 필요하였다. 이전에 집안사람들은 그 마음을 잘 맞춘 사람이 드물었는데, 선비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성심으로 받들어 모셔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을 모두 이바지하여 6년을 한결같이 하였다. 송씨는 항상 "내가 죽어서 만약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네 후손을 창성하게 하리라."라고 하였다.선비는 부도(婦道)를 매우 정성스럽게 행하였으니, 오직 시모의 명은 어기지 않았으며 비록 지극히 하찮은 일이라도 감히 자신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시모는 성품이 엄격하여 때로 분수 넘치게 화를 내어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달게 받아들이고 변명하지 않았으며 더욱 공손하게 섬기니 보는 이들이 칭송하였다. 시모는 평소 병을 많이 앓아 약과 죽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을 다해 올렸으며, 따뜻함과 시원함을 알맞게 하고 굶주림과 배부름을 때로 살폈다. 선군은 본성이 효성스러워 정성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모셨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 문하에서 노닐게 되자 실제 학문에 종사하여 〈내칙(內則)〉, 〈곡례(曲禮)〉 등 작은 예절에 더욱 마음을 다하였으니, 겨울에는 혼정신성(昏定晨省) 이외에 반드시 한 밤중에 나아가 안부를 물었으며 드시고 싶은 것을 올렸다.선비는 품부 받은 기가 허약하였는데, 이 당시 50살이 넘어 이미 늙고 병들어 있었는데도 몸소 직접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한밤중이라도 자주 일어났지만 싫어하는 기색 없이 기쁜 마음으로 하였다. 선군이 돌아가신 뒤 7~8년 사이에 선비는 몸이 메마르고 기가 고갈되었다. 일어나기도 어려워 우두커니 앉아 있는 병든 노인이었는데도 오히려 같은 방에서 시모를 모셔 전부를 받들어 모셨다. 더구나 시모가 노망이 들어 자주 얼토당토 않는 말이나 그런 행동으로 선비를 힘들게 하여도 온화하게 받아주었으니, 다만 낯빛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과 여러 며느리들이 민망하게 여겨 다른 방에 거처하라고 청하고서 그 수고를 대신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시 돌아가 모시면서 "잠시 시모 곁을 떠나니 마음이 불안하구나."라고 하였다. 시모 또한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었지만 다만 며느리가 곁에 없으면 불러서 찾으니, 대개 평소 선비의 효를 편안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 말하기를 "모부인이 백세가 되도록 건강한 것은 효성으로 봉양한 며느리 덕분이다."라고 하였다.선군이 고조의 종통(宗統)을 이었는데 지친(至親)이 매우 드물었으며 또한 거처하는 곳이 매우 멀어 매번 제삿날이 오면 와서 도와주는 동서(同壻)들이 없었는데, 선비 홀로 그 일을 주관하여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여 청결한 제수를 마련하였다. 매번 겨울밤에 제수가 비록 이미 요리되었어도 일찍이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며 단정히 앉아 닭이 울 때까지 기다렸다. 여러 자부(子婦)들이 곁에 있게 되어 그 일을 맡길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오히려 반드시 몸소 점검하면서 "이는 주부의 책임이다. 감히 나의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항상 친정의 가난하여 선조를 받들 때 의례대로 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는데, 만년이 되자 부모의 기일을 만나면 나에게 명하여 제수를 갖춰 보내게 하였으니, 이를 한 해 해야 할 일로 삼았다. 선군이 젊었을 때 성품이 제법 사나웠는데, 함께 살림을 꾸려갈 때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온 마음으로 뜻을 받들어 따르고 그 가부를 따지지 않았는데, 마침내는 선군이 깨우치게 되었다. 자녀들이 허물이 있으면 온화한 말로 깨우치고 일찍이 화를 내며 매질하지 않았으니 "예에 존귀한 손님 앞에서는 개도 꾸짖지 않거늘155) 어찌 감히 자녀를 사사로이 때려서 시모와 남편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내가 스승을 좇아 멀리서 공부할 때 조모께서 노자가 넉넉하지 않음을 걱정하니 나아가 아뢰기를 "살림이 가난한 것은 지금의 해로움이지만 자손이 인하고 어진 것은 원대한 이로움입니다."라고 하였다.진심을 담았지만 말이 어눌하였으니 비록 정이 두터운 사람을 대하더라고 일찍이 웃으며 말하면서 정이 넘치지 않았다. 친정의 친한 형제라도 문안을 묻는 것 이외에는 달리 사사로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타인의 장단점이나 시비에 대해서는 그 허실을 논하지 않아 일체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항상 "입으로 욕을 부르는 것은 장부에 있어서도 오히려 덕에 허물이 되거든 더구나 아녀자가 이를 범하여 시비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다만 나쁜 행실일 뿐 아니라 대단히 가풍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친척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가려서 혼인이나 상례 등 큰 일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 한 마을에 사는 다른 성씨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 집이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세상의 아낙들이 딸을 시집보낸 뒤에 빈번하게 내왕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니, 시집간 두 딸의 집을 10년 가까이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장 대제(張待制) 부인이 딸을 보러간 일156)로 고하니 이에 한두 차례 가서 보았다.본성이 인후하고 정이 많아 집이 평소 가난하여 살림을 마음대로 하진 못하여 비록 사람들에게 두텁게 베풀지는 못하였지만 그 뜻은 알 수 있었으니, 굶주리는 사람을 보거든 자신은 비록 먹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릇을 비워 주었다. 병술년(1886년)과 무자년(1888년) 두 해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생질 남매들이 찾아와 죽을 먹었는데, 곯고 배부름을 자신의 소생과 똑같이 하였으니 지금도 여러 조카들이 울면서 그 은혜를 말한다. 주곡(晝哭)157) 이후로 죽을 때까지 슬픔을 머금고 일찍이 이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몸을 많이 상하여 거의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항상 나에게 이르기를 "너의 선군의 지극한 효성으로 불행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 부모 봉양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지금 내가 또한 이처럼 쇠약하니 만약 조모보다 먼저 하루아침에 떠난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병진년(1916년) 2월 29일 병이 나서 3월 16일 축시(丑時, 3~5시)에 세상을 버리셨으니, 실로 시모가 돌아가신 지 3일 뒤이다. 임종할 때 자손이나 후사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효도를 마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으니, 대개 시모보다 7일 먼저 병이 났으니, 그 사이에 병이 나았다가 다시 심해진 것이 모두 세 차례였다. 말하는 자들이 최 유인이 평소 그 효성으로 신명을 감동시켜서 먼저 발병하였지만 뒤에 타계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봉양을 마치려는 효성을 이루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처음에는 달천(達川)의 뒷산기슭 선군의 묘소 왼쪽에 합부하였는데, 후에 부안군(扶安郡) 부안읍(抉安邑) 모산(芧山) 분재(粉齋) 앞 왼쪽 산기슭 ■좌에 이장하였다. 네 아들을 두었으니, 택술, 봉술(鳳述), 만술(萬述), 억술(億述)이 있고 두 딸은 광산(光山) 김재봉(金在鳳), 고흥(高) 유동기(柳東起)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로 형복(炯復) 형태(炯泰), 형관(炯觀), 형겸(炯謙)이 있고 딸들은 전주(全州) 최춘렬(崔春烈), 밀성(密城) 박진호(朴珍浩)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아들로 형귀(炯龜)가 있고 딸들은 김해(金海) 김태현(金泰賢), 청주(淸州) 한행종(韓幸鍾), 전주(全州) 최규택(崔圭澤), 경주(慶州) 이상헌(李相憲)에게 시집갔다. 삼남은 아들로 형수(炯洙), 형락(炯洛), 형방(炯坊)을 두었고 딸은 창녕(昌寧) 장해초(張海楚)에게 시집갔고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사남은 아들로 형식(炯湜), 형주(炯澍), 형호(炯濩), 형부(炯溥)를 두었고 딸은 김해 김인태(金仁泰)에게 시집갔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사위 김재봉은 아들로 상현(庠鉉)을 두었고 딸은 탐진 안영식(安永植)과 함평 이근범(李根範)에게 시집갔다. 사위 유동기는 종태(鍾泰), 종천(鍾千), 종칠(鍾七)을 두었고 딸들은 울산(蔚山) 김택수(金宅洙), 김해 김종연(金鍾淵), 전주 이형구(李亨九)에게 시집갔다.오호라! 애통하도다. 선비의 효성과 어짊은 마땅히 장수와 편안함을 누려야 하는데 젊어서 늙을 때까지 늙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시모 봉양에 애를 쏟으며 일찍이 하루도 앉아서 자식의 봉양을 받지 못하다가 시모가 돌아가신 뒤에 갑자기 따라서 떠나시니, 이것이 불초의 끝이 없는 한이다. 효부의 칭호를 선비께서 향촌과 친척들에게 얻었는데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나의 말이 필요하리오. 다만 규문 안의 평소 말과 일상적인 행동이 발하여 이치에 부합하고 시행하여 옳은 것을 참으로 타인이 알 수가 없으니, 불초가 어찌 감히 숨겨두고 기록하지 않아 불인한 죄를 범하겠는가. 이에 감히 평소 혼정신성 사이에 보고 들은 것과 및 효성으로서 크게 거론될 일을 기록하고서 편차하여 가장을 지어서 문하의 불후의 붓을 빌리고 싶습니다.158) 만일 이 가장을 가지고 논한다면 효부라 칭하는 것에 혹 미진할 지는 모르지만 옛날 이른바 여사(女士)에 부류에 견준다면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문하는 남의 아들의 사사로운 말이라고 해서 내치지 마시고 취하여 채택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대단히 다행이겠습니다.병진년(1916년) 9월 14일 선비의 생신일에 불초 애자 택술을 피눈물을 머금으며 삼가 짓는다. -29년 뒤인 갑신년(1944년) 중하에 첨삭하고 수정하였다.- 先妣孺人崔氏, 系出湖南之全州府, 高麗侍中文成公諱阿, 爲鼻祖.入本朝, 月塘諱霮, 以提學致仕, 是生四子, 匡之直之皆提學, 得之少尹, 德之號烟村亦直提學, 世稱一門四提學.少尹公子縣監諱自睦, 始居古阜, 子姓爲阜之望.中廟時, 判官諱希汀, 討賊樹勳, 贈兵曹參判, 是爲縣監公曾孫, 而先妣十三世, 諱光昕在瑗錫洪其三世, 妣, 驪興閔氏聖懋女.以哲廟丁巳九月十四日, 生于長順面陽池里, 生而孝順, 安父母心, 女紅夙就, 不煩姆敎.年十八歸我先君, 先君諱洛進, 字致一, 姓金氏, 貫扶寧.歸則有祖姑宋氏年八十, 氣息奄奄, 坐臥須人, 前此家人鮮有適其意, 先妣纔入門, 誠心供奉, 便身之物畢給, 六年如一日.宋氏常曰: "我死, 若有知, 必昌汝後." 先妣執婦道甚謹, 惟姑命無違, 雖至細微事, 無敢自專.姑性嚴, 分外之怒時有, 人所不堪, 而甘受無辨, 服勤愈恭, 見者稱賞.姑素多疾病, 藥餌糜粥, 殆無虛日, 專心供進, 適溫冷時飢飽.先君性孝, 忠養備至.及遊艮齋田先生門, 從事實學, 尤謹於〈內則〉〈曲禮〉疏節, 冬節則定省外, 必夜中進候, 供所欲.先妣稟氣虛薄, 是時年五旬餘, 已老且病矣, 而躬親甘旨, 夜中頻起, 欣然無難色.先君沒後, 七八年間, 先妣肉敓氣竭, 艱於振作, 居然一癃老人, 猶侍姑一室, 一應供奉是給, 加以姑昏耄, 累以非理之言非常之擧加之, 怡然受之, 不惟不見於色, 亦不曾作於意. 不肖輩及諸婦憫之, 請處他室而代其勞, 居無何輒復歸侍曰: "暫離姑側, 心事不安." 姑亦渾不省事, 而惟婦不在側, 則呼而覓之, 蓋以平日安其孝也.是以鄕里語曰: "某夫人百歲康寧, 得其婦孝養之力也." 先君爲繼高祖之宗, 而旣是終鮮至親, 居又稍遠, 每當祭祀, 無諸婦女來助者, 先妣獨自管當, 殫誠極力, 務令腆潔.每於冬夜, 饌雖已具, 未嘗就睡, 端坐待鷄鳴.及其有諸子婦在, 則不患無任其勞者, 猶必親檢曰: "此主婦之責, 不敢不盡吾誠." 常恨親家衰貧, 奉先不得如儀, 逮晩年, 當父母忌辰, 命不肖備送祭需, 作歲課.先君少時, 性稍厲, 與之治家, 雖有不諒悉處, 一意承順, 不與辨理可否, 終得感悟.子女有過, 以溫言喩之, 未嘗忿摑曰: "禮, 尊客之前, 不叱狗, 安敢私打子女, 不安姑與夫之心乎." 不肖從師遠遊, 祖妣以盤纏難給爲慮, 則進言曰: "産業窮蹙, 目下之害, 子孫仁賢, 遠大之利." 悃愊訥言, 雖接情厚人, 未嘗笑語款洽, 私親兄弟, 來往寒暄外, 幷無一言私語, 至於人家長短得失, 不論虛實, 一切不掛口, 常曰: "以口取辱, 在丈夫猶爲累德, 况婦女而犯此, 入於是非援引中, 非惟汙行, 玷辱家風大矣." 簡出入族親家, 非婚喪大故不往, 異姓居一里, 至有不知其家者.疾世之婦女嫁女後, 頻頻來往, 兩女適人, 近十年不一往, 不肖嘗以張待制夫人視女事告之, 於是一二次往見.性仁厚惻怛, 家素貧, 且不得自專, 雖未嘗厚施於人, 其志則可見, 見人飢困, 己雖未食, 必傾器與之.丙戊兩歲, 大饑, 甥姪兄妹, 就食饘粥, 飢飽一視己出, 至今諸甥泣說其恩.自晝哭後, 終身銜哀, 未嘗啓齒, 因以致毁, 幾不能保.常謂不肖曰: "以汝先君之誠孝, 不幸遽世, 未終養親, 今吾衰又如此, 若一朝溘然, 先於皇姑, 吾死不瞑目." 以丙辰二月二十九日寖疾, 三月十六日丑時棄世, 實後姑沒三日.屬纊時無一言及子孫後事者, 但以未得終孝爲恨, 蓋病先於姑七日, 而其間己瘳旋欲者凡三次, 說者以爲崔孺人平日孝格神明, 其先病而後沒者, 殆天遂其終養之孝.初袝于達川後麓先君墓左, 後移扶安郡抉安邑芧山粉齋前左麓■坐.四男, 四男, 澤述·鳳述·萬述·億述, 二女光山金在鳳·高興柳東起.長房男, 炯復·炯泰·炯觀·炯謙, 女適全州崔春烈·密城朴珍浩.次房男, 炯龜, 女適金海金泰賢·淸州韓幸鍾·全州崔圭澤·慶州李相憲.三房男, 炯洙·炯洛·炯坊, 女適昌寧張海楚, 一未適人.四房男, 炯湜·炯澍·炯濩·炯溥, 女適金海金仁泰, 一未適人.金壻男, 庠鉉, 女適耽津安永植·咸平李根範.柳婿男, 鍾泰·鍾千·鍾七, 女適蔚山金宅洙·金海金鍾淵·全州李亨九.嗚呼痛矣, 以先妣之孝且賢, 宜享耄期安樂, 而少而老, 老而歿, 勞悴於養姑, 未嘗一日坐受子媳之奉, 姑沒之後, 遽從而歸, 是爲不肖罔極之恨也.孝婦之稱, 先妣之得於鄕黨族戚, 而無敢間然者, 何待乎不肖之言.惟是閨閤間庸言常行, 多有發之合理, 施之當可者, 固非他人之所皆知, 則不肖何敢蔽而不書, 用犯不仁之罪.乃敢摭錄平日定省間所見聞者, 幷與孝行大節, 而撰次成狀, 欲乞不朽之筆於門下.苟執此狀而論之, 竊恐孝婦之稱, 爲未盡, 而擬於古所謂女士之流, 不爲過矣.願門下勿以人子私言而棄之, 取而爲裁擇之資, 幸甚.歲在丙辰九月十四日, 先妣生辰, 不肖哀子澤述泣血謹狀.【後二十九年甲申仲夏添刪修潤】 존귀한……않거늘 《예기》 〈곡례상(曲禮上)〉에 "존귀한 손님 앞에서는 개도 꾸짖지 않는다.[尊客之前不叱狗]"라고 하였다. 장 대제……일 《소학》 〈선행(善行)〉에서 "하루는 딸을 보러 왔는데, 집 뒤에 냄비와 솥 등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크게 언짢아하며, 신국부인에게 일러 '어찌 어린 아이로 하여금 사사로이 음식을 만들게 하여 가법을 무너뜨리는가?'라 하였으니, 그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及夫人嫁呂氏 夫人之母 申國夫人姊也 一日 來視女 見舍後 有鍋釜之類 大不樂洛 謂中國夫人曰 豈可使小兒輩 私作飲食 壞家法耶 其嚴如此]"라 하였다. 여기서는 장 대제 부인이 딸을 보러 간 것만을 취하여 모친에게 딸을 보러 가라고 권하였다는 말이다. 주곡 남편의 죽음을 의미한다. 춘추 시대 때 노(魯)나라 재상 문백(文伯)의 어머니 경강(敬姜)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낮에만 곡을 하고, 나중에 아들 문백이 죽자 밤낮으로 곡을 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경강이 예(禮)를 안다고 논평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문하의……싶습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즉, 가장을 짓고 나서 묘갈명을 대가에게 받기 위함을 상정하여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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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에게 보냄 정축년(1937) 與金 丁丑 당신의 조부 병암선생(김준영)의 유집 인쇄는 이제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어느 날 쯤 일이 끝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볼 때, 선생의 도덕과 학문은 이미 간옹선사(전우)가 노인오(노동원)에게 답한 편지에 논정한 바가 있는데, '위로 전옹을 계승했다'는 말이 있으니, 진실로 여타의 사람들이 감히 군더더기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제가 기꺼이 복종한 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 그 정도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진주에서 인쇄한 스승의 원고에 노인오에게 답한 편지가 삭제되었으니, 마음속으로 간절히 그들의 마음씀씀이가 착하지 않음을 한탄하고 애석해하였습니다. 근래에 다시 선사의 〈눈 내리는 군산에서 김덕경을 추억하다[羣山雪中憶金德卿]〉80)라는 시를 읽어 보니, "장차 후사를 누구에게 의탁하여 맡길 것인가, 누가 귀신도 정말 알기 어렵다고 말하겠는가마는, 하루아침에 뜻을 품고 황천으로 들어갔구나. 옛날에 들으니 노숙한 선승(禪僧)이 자신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을까 한밤중에 울었다고 하니81), 늙은 나 홀로 서서 마음속으로 슬퍼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노인오에게 답한 편지에서 '크게 애통해하며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한 말과 같습니다. 말로 부족하여 편지에다 썼고 편지에 표현하는 것도 부족하여 시로 읊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선사의 애통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저는 더욱더 간절히 노인오에게 보낸 답장을 뺀 것에 대해 개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겨울에 문하생이 된 자와 외손 되는 사람이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거나 괴상하게 여기는 말도 없고 낯빛도 없었으니, 국량이 커서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이른바 '자손의 입장에서 어찌 애통해하고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라는 말이 성정의 바름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씀씀이는 이치와 사심의 구분이 있어서 동일하게 애통하고 한스러운 일이라도 단지 일신의 무함이나 비난에 관련된 일이면 굳이 애통해하거나 한스러워 할 필요가 없지만, 부사(父師)의 손상과 폄훼에 관련된 일이면 애통과 한스러움이 없을 수 없으니, 이런 뜻은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사가 군산에서 쓴 시는, 잘 모르겠으나 당신은 보았습니까? 이를 외워 고하고 아울러 소회를 언급했습니다. 先王考炳菴先生集印役, 今至何境? 當以何時了畢? 竊念先生之德學, 既有艮翁先師答廬仁吾書之所論定, 而有上續全翁之語, 則固非餘人之所敢贅陳.惟是澤述之悅服, 亦非餘人之可比倫.所以晉印師稿, 盧書之見刪也, 心切慨惋於其用心之不美矣.近又得先師《羣山雪中憶金德卿》詩, "擬將後事相託任, 孰謂鬼神實難知.一朝齎志入黃壞, 昔聞禪宿中夜泣, 老我獨立心恫僘"之句, 正與答盧書同一慟喪予之語.言之不足, 而發於書疏, 書疏不足, 而發於詠歎者有如是, 先師之慟如是也, 故吾所以益切慨惋於刪減盧書也.然而昨冬, 見爲門人與外孫者聞其語, 畧無驚怪之辭色, 是未知量弘而然歟.高明所謂在子孫, 豈無痛恨之心者, 爲得性情之正矣.夫人之用心, 有理私之分, 同一痛恨, 關一身之誣毀, 則不必有; 關父師之損貶, 則不可無, 此意不可不知也.先師羣山詩, 未知高明見否? 爲此誦告, 幷及所懷耳. 눈……추억하다 이 시는 현행 《간재집(艮齋集)》에는 없다. 옛날에……하니 "曾聞禪宿夜中泣, 忽見潭州城裏降. 性命綱常都錯亂, 何人大筆鼎能扛?" 《간재집(艮齋集)전편》 권17 〈우심(憂心)〉 '曾聞禪宿夜中泣'은 주희(朱熹)가 황직경(黃直卿)에게 답한 편지에 있는 '古之禪宿, 有慮其學之無傳, 而至於感泣流涕者, 不謂今日乃親見此境界也'를 원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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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택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李鐘澤 ○戊辰 우리 도의 바름은 하늘의 명으로부터 나와 성인의 가르침으로 세워졌고, 순선(純善)한 본성으로부터 도출되어 영명한 마음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면 몸이 편안해지고 그것을 세상에 사용하면 세상이 다스려지니,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단 학설의 바르지 못함은 하늘이 미워하고 성인이 배척한 것입니다. 타고난 본성에서 찾아보면 본디 없는 것이고 허령한 마음에서 체험해보면 불안한 것이니, 몸에는 죽음과 치욕의 재앙이 있게 하고 세상은 혼란과 멸망의 지경으로 들어가게 되니, 잠시라도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타고난 성품의 덕성을 실추시키고 본래부터 밝은 심지(心知)를 어둡게 하는 자가 아니라면 정정당당(亭亭當當)하고 직상직하(直上直下)86)하며 평탄정대하고 진선진미하고 온전한 우리 도를 버리고, 덜컹덜컹 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구불구불 뒤섞여 험악하고 위태로운 저들의 술책을 어찌 따르겠습니까? 불교의 게송에 "해가 싸늘해질 수도 있고 달이 뜨거워질 수도 있으나, 뭇 마귀가 감히 우리의 진결(眞訣)을 깨뜨릴 수 없다."87)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비록 이교도라 할지라도 오히려 진실로 지키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마귀한테 꺾여 빼앗기지 않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 성인의 정도(正道)를 가지고서도 도리어 부정한 학설에 의해 무너지고 혼란스럽게 된다면 어찌 도리어 불교도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힘쓰기 바랍니다.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이단과 사설 가운데 알기 쉬운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치에 가까워 진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우리 도의 담장 안에도 간혹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을 궁구하고 이치를 연구하는 공부가 아니면 결단코 살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대는 헤아리기 바랍니다. 吾道之正, 出自上天之命, 而立於聖人之敎, 循其純善之性, 而具於靈明之心, 行之於身而身安, 用之於世而世治, 不可須更而離者也.異說之邪, 上天之所惡, 而聖人之所斥也.求之於性分而本無, 驗之於心靈而不安, 身有戮辱之禍, 世入亂亡之境, 不可晷刻而近者也.茍非墜秉彝之德性, 而昧本明之心知者, 安肯舍吾亭亭當當直上直下坦平正大美善安全之道, 而徇彼轇轇轕轕之東之西崎嶇回互險惡危殆之術哉? 釋子之偈曰: "日可冷, 月可熱, 衆魔不敢壞眞訣." 彼雖異敎, 猶實有所守, 故不被魔障之撓奪如此.若以吾聖人之正道, 還被邪說之壞亂, 豈不反爲釋子所笑乎? 惟高明勉之.雖然, 此皆以異邪之易知者言, 若其近理而亂眞者, 則吾道門墻之內亦或有之.此非竆經研理之功, 定無以察之, 亦惟高明之諒之也. 직상직하(直上直下) 상하가 일관되었다는 뜻이다. 정호(程顥)가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니, 천지 사이에 정정당당하고 상하 좌우 어디든 막힘없이 통하는 바른 이치이다. 이를 벗어나면 옳지 못하니, 오직 공경하여 잃음이 없어야 가장 극진하다.〔中者, 天下之大本, 天地之間, 亭亭當當直上直下之正理. 出則不是, 唯敬而無失, 最盡〕"하였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1 〈사훈(師訓)〉,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 또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5에 주희(朱熹)가 정정당당의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것은 속어이니, 대개 불편불의 직상직하의 뜻이다.〔此俗語也 蓋不偏不倚直上直下之意也〕"라고 대답한 말이 나온다. 해가……없다 당나라 영가현각대사(永嘉玄覺大師)의 게송 가운데 있는 구절인데, 전우(田愚)도 이를 인용한 적이 있다. 《간재집(艮齋集)전편》 권1 〈여박녀길 세화 ○임인(與朴年吉 世和 ○壬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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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답함 答小心黃丈 丙寅九月 병인년(1926) 9월"스승을 지키는 도는, 무함한 사람을 성토하는 것이 정도이고 유훈을 지키는 것은 그 다음이다."라고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당연하신 말입니다. 다만 무함한 사람을 성토하는 일에 있어 우리들은 힘을 다하지 않았다 할 수 없으나 무함한 자들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세상에 이를 처벌할 국법이 없는 것 또한 어찌할 수가 없으니, 유훈을 지키는 일에 대해 우리가 할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용동의 간행이 유훈을 무시하고 마침내 인가를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스승을 욕보인 죄에 대해서는 작년 겨울에 진주의 간행을 성토한 글에서 이미 다하여 비록 다시 거론할 일이 없다 하더라도, 유훈을 지키는 사람이 평소에 받은 훈사와 편지 및 선대의 문자에 대해 침묵한 채 맡겨두어서 죄 짓는 데로 똑같이 돌아가서는 안 될 듯하였으므로 이미 동지들과 함께 연서(聯書)하여 인가를 받아 간행하는 속에서 빼주기를 청했으니, 이 일이 타당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전일효(田鎰孝)가 오진영과 합의했다는 말은 일찍이 듣지 못했으나 그가 갈라선 것이 의리 때문이 아니고 이익 때문이라면, 다시 이익 때문에 합의했어도 이상할 일이 없습니다. '송의 신학은 할 만하다는 논〔宋之新學可爲之論〕'에 이른바 "치우친 말에서 가린 바를 안다."27)는 것은 오늘날의 낭패이고, 또 이른바 "마음에서 발동하여 일을 해친다."28)는 것은 우리 어르신께서 지적하신 것이니, 어찌 말을 아는 도가 되지 못하겠습니까? 근래에 또 여름 즈음에 호남의 첨좌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읽어보니 올바른 의리와 확고한 의론이 조목조목 타당하고 글자마다 바꿀 수 없었는데, 중립에 선 자들을 배척하며 율곡을 인용하여 말한 것은 더욱 절실하고 들어맞았으니, 백번 엄숙히 받들어 읽음에 어찌 존경하여 감복하는 마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천의 일을 인용하여 숙질에 대해 논한 것은 아마도 인용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閑師之道, 討誣爲正, 守訓爲次, 下喩當矣.但討誣之擧, 吾輩不可謂不盡力, 而誣者不服, 則世無王章, 亦無如之何矣.其於守訓, 不可不盡在我之道也.今龍刊不有遺訓, 竟至出認.其辱師之罪, 昨冬討晉章已盡, 雖無事復擧, 然凡守訓人, 平日所受訓辭書牘, 及先世文字, 恐不可含嘿任他, 而同歸於罪.故已與同志聯書, 請拔於認刊中, 未知此事爲得當否.孝與震合, 未之曾聞.然其離也, 不以義而以利, 則更以利合, 亦無怪矣.宋之新學, 可爲之論, 所謂詖辭, 知其所蔽者, 今日之狠狽, 又所謂發於其心, 害於其事者, 吾丈之斥, 豈不得爲知言之道乎? 近又得夏間, 答湖南僉座書, 讀之, 正義確論, 條條得當, 字字不易, 其斥中立者之引栗翁爲說者, 尤爲切中, 百回莊讀, 曷勝敬服? 但其引伊川事, 以論叔姪者, 恐不如不引, 未知如何. 치우친 말에서 가린 바를 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제2장의 "무엇을 말을 안다고 합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치우친 발에서 가린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 궁함을 알 수 있다.〔何謂知言? 曰:詖辭, 知其所蔽;淫辭, 知其所陷;邪辭, 知其所離;遁辭, 知其所窮〕"라고 한 것에서 말의 네 가지 병통을 말한다. 마음이 발동하여 일을 해친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그릇된 학설은 "마음에 나타나 일을 해치고, 그 일에 나타나 정치를 해친다.〔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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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흥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李起興 ○丁卯 보내온 편지를 받들어 읽으니, 모두가 '경력체험(經歷體驗) 진실각고(眞實刻苦)'의 뜻에서 나왔으며, "가난을 이유로 학문을 폐하지 않고 시대가 변천을 이유로 지조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마쳤습니다. 두 가지 대절(大節)과 여덟 글자로 기초를 세운 제목은 흠송하고 탄복할 뿐만 아니라 해이해진 저를 경계한 것도 실로 많았습니다. 어찌 이미 고도(古道)로 자처하고 또 능히 고도로 남을 흥기하게 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로 인하여 우러러 한 마디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대저 가난함이 극치에 달하여 굶어 죽어 구렁텅이에 나뒹굴 일이 눈앞에 있고 시대의 변화가 험악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일이 뒤에 있어도, 지사(志士)가 죽음을 잊지 않는 것82)과 대장부가 위무(威武)에 지조를 꺾지 않는 것83)을 여기에서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정말로 학문을 폐하지 않고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 말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근래에 고도를 지키는 자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성대하게 볼만 한 것이 없지 않지만, 광란(狂瀾)으로 흔들고 겁화(劫火)84)로 태우게 되어서는 형벌이나 굶주림의 압박이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젊은 시절 예리하게 나아갔을 때 터득했던 것을 도리어 만년에 도를 깨우칠 나이에 잃어버립니다. 매번 이로 인해 답답하고 애석하며 또한 전전긍긍 저 또한 이러한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약관의 나이로 앞길이 만 리 멀리 펼쳐 있지만, 세상이 언제 맑아질지 모르고 시대의 변화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반성한 나머지 또한 그대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바랍니다. 삼군(三軍)도 빼앗을 수 없는 의지85)와 만 마리 소도 되돌리기 어려운 힘을 더욱 떨쳐서 훗날 더욱 굳건하고 씩씩한 효과를 거두고, 종국적으로 한 숨이라도 붙어 있다면 조금도 해이하지 말아서 근래에 고도를 지킨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워 죽게 하고 길이 후대에 할 말이 있게 하십시오. 아, 오늘날을 어떠한 때입니까? 우리의 선사이신 공자가 장차 제사를 받을 수 없게 되고 도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漢)나라가 망할 때에는 무향후(武鄉侯 제갈량(諸葛亮))가 있었고 송(宋)나라 망할 때에는 문문산(文文山 문천상(文天祥))이 있었는데, 도가 사라지려는 즈음에 유독 공자를 위해 죽을 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또한 그대가 우뚝하게 몸소 세도를 책임져서 공자를 받드는 우리 유가의 무후와 문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그런 사람이라면 제가 비록 노둔할지라도 채찍을 잡고 뒤를 따르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이것이 어찌 벌컥 화를 내어 용기를 팔아서 혈전을 벌이는 것과 같겠습니까. 단지 힘써 일맥을 부지하여 죽음에 이르더라도 변치 않는 것일 뿐이고, 또한 오직 학문을 폐하지 않고 지조를 바꾸지 않기를 보내온 편지에 말씀한 것처럼 할 따름입니다. 더불어 서로 연마하고 서로 면려하기를 바랍니다. 奉讀來書, 無非出於"經歷體驗眞實刻苦"之意, 而終以"不以貧窶廢學, 不以時變易操".二大節立八字著腳之題, 欽尚敬服之餘, 有所警發於頹散者實多.豈非既以古道自處, 而亦能以古道興人者耶? 僕請因此而仰贊一言.夫貧窶之極而溝壑在前, 時變之險而刀鋸在後, 志士之不忘, 丈夫之不屈, 於此乃見, 而始可謂眞不廢, 眞不易矣.竊觀近日之守古道者, 其初非不蔚然可觀, 及夫蕩之以狂潮, 焚之以刼火, 不待鋸壑之迫, 而已把所得於盛年銳進之日者, 反失於晚節聞道之時, 每爲之悶惜, 而亦兢兢然, 恐己之有是也.足下在弱冠之年, 前程之遠若萬里, 河清無期, 時變難測, 區區自省之餘, 亦願足下加奮三軍不奪之志、萬牛難回之力, 管取他日益堅益壯之效, 究竟以一息尚存, 不容少懈, 使近日守者愧死, 而有辭乎永世也.鳴呼, 今日何日? 我孔聖先師, 將不得血食, 而道其亡矣.漢亡有武鄉侯, 宋亡有文文山, 道亡獨可無爲孔聖死者乎? 僕又願足下卓然身任世道, 作孔聖家武侯文山, 誠然者, 僕雖駑, 請執鞭下風也.雖然, 此豈赫怒賈勇, 若血戰然哉? 不過曰力扶一脈, 至死不變, 亦唯曰不廢不易, 如來喩焉已矣.幸與交修而胥勖焉. 지사(志士)가……것 공자(孔子)가 "의지가 굳은 선비는 곤궁하여 자기 시체가 구학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맹한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대장부가……것 맹자(孟子)가 대장부에 대해 논하면서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으니, 이런 것을 대장부라고 이른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겁화(劫火) 불가(佛家)의 용어로, 재앙을 뜻한다.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가 일어나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검은 재가 나오자,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하였다. 《고승전(高僧傳)》 권1 〈한락양백마사축법란(漢洛陽白馬寺竺法蘭)〉 삼군도……의지 매우 굳센 의지를 이른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삼군을 거느리는 장수의 목숨은 빼앗을 수 있지만 비록 필부라 할지라도 그의 뜻은 꺾을 수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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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일에게 보냄 정축년(1937) 與吳允一 丁丑 거상(居喪)의 시기에는 다른 생각은 생기지 않고 다만 한 덩어리의 측은한 마음만 있으니, 충양(充養)89) 을 체험함으로써 인을 이루다 쓸 수 없다는 근본을 세우기가 딱 좋고, 인사를 드물게 접하여 마음이 고요하고 기가 깨끗해지니, 경서를 읽으면서 이치를 연구하고 시비를 정밀히 분별함으로써 의를 이루다 다 쓸 수 없다는 근본을 세우기에 딱 좋습니다. 제수를 올리고 곡배(哭拜)하는 것 외엔 다른 일은 없습니다. 그대 같은 경우는 병이 많으니 역시 마땅히 시의적절하게 호흡하고 몸을 문지름으로써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근본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에 "거상하는 지금은 예서(禮書)를 읽을 때이지, 존양성찰과 격물치지를 할 때가 아니다. 슬픔에 몸이 훼손되는 것이 마땅하니 수양을 어찌 감히 하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거상하는 것은 또한 부모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남겨준 몸뚱이를 사랑하는 것이니, 부모가 남겨준 몸뚱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을 보존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이룰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호흡하고 몸을 문질러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몸을 보호하는 것이고, 인을 함양하고 의를 연구하는 것은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몸을 보호하고 몸을 이루면, 그것은 예법에 크게 맞는 것입니다. 그대는 모름지기 이에 따라 공효를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부친의 상에는 '고자(孤子)'라 호칭하고 모친의 상에는 '애자(哀子)'라 호칭하며 모두 돌아가신 경우에는 '고애자(孤哀子)'라 호칭하니, 승중(承重)90)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이제 그대가 당한 상은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 경우가 아니니, 멀리 몇 년 전에 있었던 조부상을 끌어다가 지금 당한 조모상에 '고애손(孤哀孫)'이라 호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후에 축사(祝辭)와 소장(疏狀)에서도 다만 '애손(哀孫)'이라고만 호칭해야 합니다. 방립(方笠)91)의 끈은 참최의 경우 마(麻, 삼)를 쓰고 자최의 경우 포(布, 베)를 쓰니, 관(冠)과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의 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居憂之時, 他念不生, 只有一團惻隱之心, 正好體驗充養, 以立仁不可勝用之本; 罕接人事, 心靜氣清, 正好念經研理, 精別是非, 以立義不可勝用之本.饋奠哭拜之外, 無他事.如哀多病, 亦宜以時調息摩體, 以立健壽之本.如曰: "此是讀禮時, 非存省竆格時, 哀毀是其宜, 修養豈敢爲?" 則此殊不然.夫謹居喪, 所以愛親也.愛親, 斯愛親遺矣, 愛親遺, 思所以保之矣, 思所以成之矣.調摩延壽, 保身也; 養研仁義, 成身也.保身成身, 則其爲禮也大矣.哀須依此試功, 如何?父喪稱孤子, 母喪稱哀子, 俱亡稱孤家哀子, 承重亦然.今哀所遭非偕喪, 不宜遠引幾年前祖父喪, 而幷稱孤哀孫於今日祖母喪也.茲後祝辭與疏狀, 只稱哀孫也.方笠纓, 斬衰用麻, 齊衰用布, 觀於冠及首腰絰纓, 可知矣. 충앙(充養) 본성을 확충하여 양성하는 것을 말한다. 승중(承重) 상제(喪祭)나 종묘의 중요한 책임을 할아버지로부터 손자가 전수받았다는 뜻으로,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중(傳重)이라 하고, 손자의 입장에서는 승중이라고 한다. 방립(方笠) 원래 서울의 아전들이 쓰던 검은색 모자였는데, 조선 중엽 이후 흰색으로 바뀌면서 상을 당한 사람들이 착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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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 後滄先生文集卷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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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답함 答悅齋蘇丈 甲子九月 갑자년(1924) 9월이전에 논의하는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호남이 반드시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영남이 반드시 다 그른 것도 아니다." 하니, 이것은 대개 영남이 진짜로 서울의 묵인을 받음이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인데, 만약 서울의 묵인이 속인 것으로 귀결된다면 영남이 어찌 한결같이 옳을 수 있겠습니까? 송병휘(宋秉徽)가 홍희(洪憙)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묵인해준다는 허락을 얻으려고 왔으나 묵인해준다는 허락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으니, 이를 보면 오진영의 이른바 "분명히 묵인이다."라는 말은 깨졌고, 조충현(趙忠顯)이 최경존(崔敬存)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민씨【영휘(泳徽)】어른은 원고를 가지고 왔을 때도 한마디 말이 없었고 원고를 가지고 갈 때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하였으니, 이를 보면 성기운(成璣運)이 이른바 "묵인을 얻는 것은 결국 하공(荷公)【영휘의 호는 하정(荷汀)이다】이 전담할 것이다."라는 말도 깨졌으니, 가소롭고 가소로울 뿐입니다.권순명이 창암(김광언)과 함재 두 어른을 속여 청도에 보내는 답서에서 최 씨를 빼고 오진영으로 바꾸어 팔도에 편지를 보냈으니, 속이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일효가 최경존에게 보낸 편지에, "김모의 문서는 간악함을 부려 도둑질하는 행위이다." 했고, 박계동이 정재(靜齋 간재의 차자 전화구)에게 보낸 편지에, "모씨와 모씨는 안면을 바꾸고 곡절을 꾸며냈다.【여기까지이다】."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변괴가 있겠습니까? 대개 영남 무리가 하는 짓은 모두 이와 같으니, 하나를 미루어 그 나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 《주례(周禮)》에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것에 대한 형벌이 있고42), 국전(國典)에는 사람을 속인 것에 대한 율법이 있습니다. 오늘날 천하는 법의 기강이 땅에 떨어져 저들이 뻔뻔스레 선비들 사이에서 행세하면서 하늘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으니, 이들을 일러 뭐라 하겠습니까? 前此議者, 或謂"湖未必盡是, 嶺未必盡非", 此蓋認嶺有眞京默也, 苟京默之歸誑, 嶺安有一是乎? 宋秉徽與洪憙書曰: "欲得默許而來, 默許不得, 故不得不歸." 觀此則吳所謂分明是默之說, 破矣.趙忠顯與崔敬存書曰: "閔丈【泳徽】, 稿之來也, 無一言, 稿之去也, 無一言", 觀此則成所謂得默, 結局荷公【泳徽號荷汀】專擔之說, 破矣, 好笑好笑.權純命, 誣鬯涵二丈, 以割崔換吳於淸道答書, 飛書八省, 譸張靡極.故田鎰孝與崔敬存書曰: "金某文書, 作奸盜戝之行", 朴▼{王+啓}東與靜齋書, "某也某也, 改換頭目, 粧撰典折【此止】", 天下安有如此變恠乎? 蓋嶺派所爲, 擧皆如此, 推一而可知其餘.噫, 周禮有造言之刑, 國典有誣人之律.今天之下, 法綱墮地, 此輩靦然行章甫間, 視天矇矇, 謂之何哉. 주례에는……있고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육향에서 시행하는 여덟 가지 형벌을 사용하여 만민을 규찰한다. 이 여덟 가지 형벌은, 첫째는 어버이에게 불효한 것에 대한 형벌이며, 둘째는 구족(九族)과 화목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며, 셋째는 인척을 친애하지 않는 것에 대한 형벌이며, 넷째는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며, 다섯째는 벗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며, 여섯째는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며, 일곱째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것에 대한 형벌이며, 여덟째는 난을 일으킨 백성에 대한 형벌이다.〔以鄕八刑 糾萬民 一曰不孝之刑 二曰不睦之刑 三曰不婣之刑 四曰不弟之刑 五曰不任之刑 六曰不恤之刑 七曰造言之刑 八曰亂民之刑〕"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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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일에게 답함 신사년(1941) 答吳允一 辛巳 사람이 학문하지 않아서 흑백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근심을 삼고, 마땅히 학문에 힘써서 기질을 변화시키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표준으로 삼고, 자기 견해를 스스로 옳다 여겨서 좌정관천을 면하지 못한 것을 경계로 삼으며, 책을 읽어 분발하여 훌륭한 사람에게 올바름을 취하는 것으로 힘씀을 삼고, 몸이 시세에 얽매인 까닭으로 제 집에 놀러오지 못한 것을 근심으로 삼는다는 편지 내용을 받아보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학문은 기회를 놓칠 것처럼 생각하여 서둘러함으로써 날마다 정심함에 나아간다는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잘못입니다. 세간에 고명한 사람들은 적지 않으니 나에게 진실로 터득한 것 있다면 어찌 나아가 질정(質正)할 곳이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진실로 질정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천 리가 떨어져 있어도 종이 한 장의 편지로 지척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할 수 있으니, 또한 어찌 몸이 얽매임을 근심하겠습니까. 저는 비록 그런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만둘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당신의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윽이 당신의 자질을 살펴볼 때, 겉모습은 약하고 둔한 듯하나 내면은 실로 밝고 강하니, 어찌 감히 본 것이 없어서 구차스럽게 말을 많이 하겠습니까. 제가 더불어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공자가 학문하는 큰 방법인 다섯 가지 놓지 않는 법을 자세히 논하였는데, '명강(明剛)' 두 글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도학의 철두철미한 곳이니, 원컨대 격물·치지·성의·정심에 더욱 노력하여 만리를 모두 통달하고 백행을 다 선하게 하여 지대한 명강의 경지에 나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말씀하신 음성의 오진영이 스승의 의리를 속여 배반하고 사문의 큰 변란을 일으킨 죄는 사람들이 모두 비난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만약 용암선생(김시묵)이 살아계셨다면 반드시 의리를 들어 성토할 것이라는 말은 대단히 옳습니다. 이제 용암선생의 문집을 음성의 오진영에게 교정과 서문을 부탁했다하니, 어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다만 문장의 기교를 취하고 성세를 좇아가서 그리 한 것입니다. 이는 도도한 속된 작태로서 어찌 말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자의 도로는 한 번 바르게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편지로 주인에게 깨우쳐주었는데 듣지 않았다고 하여 그만둘 수 있겠습니다. 구해서 볼 수 있는 여부는 당신이 이미 마음에 편안치 않다 했으니 맹자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 뜻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으니, 어찌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묻겠습니까. 承以人不學問, 無別黑白爲懼, 當勉學問, 變氣反本爲準, 自是己見, 不免坐井爲戒, 讀書憤悱, 就正高明爲務, 終之以身縻勢故, 未遊弊廬爲憂.即此可見學如不及, 日造精深之意.然必以鄙人爲說, 則誤矣.世間高明自不乏人, 我茍有所得, 何患就正無所? 茍有可正, 千里一紙, 咫尺面談, 又何憂身縻哉? 鄙人雖非其人, 無已, 則自茲以往, 書尺往復, 如惠書所云, 亦吾之願.竊覵貴座資質, 外似柔鈍, 內實明剛, 豈敢無所見, 而茍然謾說乎? 吾之所以樂與之交者也.蓋孔子備論爲學大方, 五不措之法, 而終之以明剛二字.是爲道學築底處, 願益加努力於格致誠正之功, 使萬理皆通, 百行盡善, 以進於明剛之大且至焉者如何? 所喩陰吳誣背師義, 作師門大變之罪, 人皆可斥, 況使勇菴而在者, 必舉義聲討, 極是極是.今以勇集託陰校弁, 豈不知其不是哉? 特以取文技, 趨聲勢而然.此滔滔俗態, 何足道哉? 然在賢之道, 不可不一番正言, 書喩於主人, 不見聽, 則亦可已矣.購見與否, 賢既云於心不親帖, 則孟子所謂無欲其所不欲者.此可以斷之, 何復問於別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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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종복에게 답함.【○현동 첨좌를 대신하여 지음】 계해년(1923) 7월 答小心黃丈【鐘復 ○代 玄洞僉座作 ○】癸亥七月 현산(玄山)1)에 풀이 무성하고, 화도2)에도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선사(先師)의 연사(練事)3)가 지나가 버렸으니 스승님을 잃은 슬픔4)은 더욱 간절하고 한결같습니다. 이즈음에 어르신의 편지5)를 받아 보니, 당당하고도 지극히 바른 의리와 분명하고도 이치가 극진한 말씀에서 선사의 도덕과 의절이 이로써 밝게 드러나 마치 해와 별을 모두가 보는 것과 같았으며, 한쪽 사람6)의 잘못되고 낭패한 일이 실정이 밝혀지고 벌이 마땅하여 거울처럼 선명하고 서릿발처럼 엄격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아, 집사의 한마디 말이 아니었다면 간재 문하의 한 조각 의체(義諦)7)는 거의 사라졌을 것입니다.호남이 영남과 달리 하는 것은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않는다는 하나의 의리에 있으니 이것이 가장 큰 것이고, 이 외에도 또한 몇 가지 작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호남은 전편과 후편을 각각 편집하여 손수 편정(篇定)하신 고본(稿本)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영남은 합고(合稿)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한 가지이며, 호남은 감히 한 편도 첨가하지 않아 "썩은 시신을 지각이 없다며 속이는 것일 뿐이다." 하신 엄한 훈시8)를 따랐는데 영남은 사적인 것을 용납함을 면치 못한 것이 두 가지이며, 호남은 고인의 축장(築場)하는 뜻9)을 붙였는데 영남은 개의치 않은 것이 세 가지입니다.이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저들과 우리들 사이의 잘잘못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수레를 돌려 바른 데로 달려가는 것이 쉬울 것 같은데, 어찌하여 서로를 이기고자 하는 투쟁심으로 성을 마주 쌓고 깃발을 내걸어서 한결같이 버티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서울의 묵인이 났다고 속이고 원고를 판매하는 적도에게 넘겨서 선사께서 지킨 것을 깎아 없애고 온 나라의 욕을 실컷 얻어먹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잘못을 뉘우치고 훗날을 좋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강태걸(姜泰杰)의 일10)을 일으켜 어깃장을 놓았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전체 원고를 발간하지 않고 절요본을 먼저 찍는 것을 의(義)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체 원고를 사서 읽을 돈을 빼앗아 장사꾼의 전대를 채워주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호남에서 발간하는 것을 깨뜨리고 싶어서 한 무리의 적을 내세워 막는 것을 예(禮)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장사꾼이 이를 했다 하더라도 이것을 주관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인가를 받았다는 이름을 피할 수 없고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사체11)를 헤아리지 못하여 의리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더불어 보합12)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나의 부끄럽지 않은 의리를 지키고 나의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닦을 뿐입니다. 玄山草宿, 華嶹秋入.轉眄之頃, 奄經先師練事, 山樑之痛, 彌切惟均.乃於此際, 獲拜尊函, 堂堂至正之義, 鑿鑿理到之言, 先師之道德義節, 以之昭著, 如日星之共睹.一邊人之舛錯狼狽, 情得罰當, 不啻鑑明霜嚴.噫, 靡執事者一言, 艮翁門下一副義諦, 幾乎熄矣.蓋湖之貳嶺, 在不認一義, 此其最大者, 外此而亦有種種非細故者.湖主各稿, 用手定本, 而嶺主合稿者一也.湖不敢添入一篇, 遵欺其朽骨無知之嚴訓, 而嶺不免容私者二也.湖寓古人築場之意, 而嶺之不以為意者三也.於此數段, 平心究之, 彼我之是非不難知, 回車趍正, 似易易也, 柰之何爭心勝氣, 對壘揭幟, 一向抵賴? 至於誑出京, 默投稿販賊, 剝喪先師所守, 飽喫通國唾罵, 而猶不思悔過善後, 復惹出姜事, 以乖張之, 絶不可曉也.蓋全稿不刊, 而先印節要, 得爲義乎? 奪購讀全稿之金, 充賈人之槖, 可謂仁乎? 欲破湖刊, 出一對敵而抵之, 可謂禮乎? 雖曰賈人爲之, 其主之者誰也? 認名不得避, 累師不得免, 可謂智乎? 人而不揆事體義理, 乃至於此, 則何可與論保合哉? 只得守吾不愧之義, 修吾當爲之職已矣. 현산(玄山) 지명으로, 간재(艮齋)의 묘가 있는 익산 현동을 말한다. 화도(華島) 지명으로, 본래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전우가 이곳에 정착하여 강학을 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선사(先師)의 연사(練事) 선사는 돌아가신 스승을 일컫는 말로, 여기에서는 전우를 지칭한다. 연사는 연제(練祭)로, 본래 부모의 상을 치를 때 만 1주기에 지내는 제사를 뜻하며, 소상(小祥)이라고도 부른다. 간재는 1922년 7월 4일에 졸하였다. 스승님을 잃은 슬픔 원문의 '산량지통(山梁之痛)'은 스승이나 현인을 잃은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태산이 무너지려나, 들보가 꺾이려나, 철인이 시들려나?〔泰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과연 7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 어르신의 편지 원문의 '존함(尊函)'은 상대방의 편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한쪽 사람 원문의 '일변인(一邊人)'은,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꺼려해서 사용한 말이다. 의체(義諦) 사물의 바탕이 되는 뜻이나 이유를 말한다. 썩은……훈시 이 말은 《간재집(艮齋集)後編續)》 권5 〈시자손문인〔示子孫門人〕〉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고는 이미 정본을 대략 완성하였으니, 이 외에 한 편도 함부로 첨가하지 말라. 이러한 뜻을 자손과 문인은 삼가 어김없이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훗날 사사로운 안면에 구애되어 다시 변통할 방도를 행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자신의 아버지와 스승을 차마 죽은 사람 취급하여 썩은 시신을 지각이 없다며 속이는 것일 뿐이니, 제자들은 그리 알라.〔私稿旣已略成定本, 此外無得妄添一篇. 此意子孫門人, 不可不恪遵無違. 若異日有拘於顔私, 復行通變之道者, 是忍死其父師.而欺其朽骨無知爾, 諸子識之〕" 고인의 축장(築場)하는 뜻 축장은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다.……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昔者, 孔子沒, 三年之外, 門人治任將歸……子貢反, 築室於場, 獨居三年然後歸〕" 하였다. 강태걸(姜泰杰)의 일 강태걸은 오진영의 제자이다. 오진영의 지시를 받아 간재 사고(私稿)의 선집(選集)을 만들어 서울로 가서 인가를 받는 일을 도맡아 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김택술(金澤述)과 최병심(崔秉心) 등을 진천서(鎭川署)에 고소하여 배일당(排日黨)으로 몰아세우는 데에 앞장섰다. 《사백록(俟百錄)》 권1 〈진걸화사(震杰禍士)〉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보합(保合)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사(彖辭)의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는 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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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乙丑二月 을축년(1925) 2월매번 우리 어르신께서 정재(靜齋)에게 보낸 편지글을 읽어보면, 늠연하게 선사의 절의가 드러나고 환하게 음인(陰人)13)의 간담을 깨뜨려서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하게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니, 직접 존장의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아, 저들이 스승을 무함하는 일이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깊어지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명을 받은 것14)은 리(鯉)가 공자(孔子)를 독대하고15)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효종(孝宗)을 독대한 것이다." 하고【김세기】, "증자의 일관(一貫)이다."16) 하고【우형근】, "단전밀부(單傳密付)17)로, 간옹이 귓속말로 전한 것이다." 하며【조충현】, "경신년(1920)의 유서는 인가 받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별도로 가리키는 뜻이 있다." 하며【최원, 정운한, 김세기가 세 차례 어른에게 말한 것임】, "신해년(1911)의 유서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났다." 하고【정운한】, "크게 의심할 만하다." 하고【김세기】, "감히 가리켜 있다고 할 수 없다." 하니【조충현】, 사람들의 기탄없음이 어찌 이런 극심한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일이 이에 이르러 내버려두려고 하면 끝내 선사의 무함을 씻을 날이 없고,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하면 저쪽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 결말이 날 기약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호중(湖中)은 선사께서 도를 제창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동문과 노성(老成)한 분들이 많으니, 오늘날의 변란에 큰 발길질로 치우친 말을 막고 지극한 정성으로 은혜에 보답하는 것18)은 또한 마땅히 호중에서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적막하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저쪽을 편들어 비호하는 자가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음성의 오진영을 성토하는 것이 호남의 치우친 논의에서 나왔다고 의심하는 것에 혹 염려가 없지 않으니, 어찌 답답하고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에 홀로 우리 어르신께서 사문의 선배요 호중의 두터운 명망으로 우뚝이 의리를 잡아 지키고 의연히 정도를 부지하여 남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히신 스승의 의리를 천명하셨고 폐와 간을 보듯 훤한 저들의 실정을 알아내셔서 확실하게 각인시켜19)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이 모두 음성의 오진영이 저지른 죄는 마땅히 성토해야 하고 호남의 의론이 치우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의심하던 자들도 일제히 따라서 안정되었습니다. 어르신 같은 분은 참으로 노성하고 명망이 두터운 실상에 부합하여 사문의 순정한 신하가 되시니, 세도의 다행스러움이 어찌 이보다 더함이 있겠습니까? 저 무리들이 점점 더 무함하여 거리낌이 없으니, 오직 우리 어르신께서는 거울 같은 마음을 더욱 밝히고 부월 같은 필치를 더욱 엄격하게 하여 시종 그들을 물리쳐 멈춤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每得吾丈與靜齋書, 讀之, 凜凜然先師節義著, 灼灼然陰人奸膽破, 令人肅肅然起敬, 宛若親承尊誨也.噫, 彼邊之誣師, 日滋月深.謂杏下獨命, 爲鲤尤獨對【金世基】, 曾子一貫【禹烔根】, 單傳密付, 艮翁耳語【趙忠顯】.謂庚申遺書, 謂非指勿認, 而別有所指【崔愿·鄭雲翰·金世基, 三次惇丈】.謂辛亥遺書, 從天降從地出【鄭雲翰】, 可疑之大者【金世基】, 不敢指以爲有【趙忠顯】, 人之無忌憚, 胡至此極? 事到于此, 欲置之乎, 則終無洗誣之日, 不置之乎, 則彼強我弱, 出場無期, 未知如何則可乎? 竊念湖中, 先師倡道之地.故多同門老成, 今日之變, 大踢距詖, 血誠報佛, 亦宜多出湖中, 不惟寥寥爲未聞, 反不免有護袒者.故國人之疑討陰之出於湖南偏論者, 或不無慮, 寧不悶歎? 乃獨有吾丈, 以師門先進, 湖中重望, 卓然仗義, 毅然持正, 闡師義之發人未發, 得彼情之如見肺肝, 一棒一血, 不少假貸.然後人皆知陰罪之當討, 湖論之非偏, 疑之者, 翕然隨定.若丈者, 誠副老成重望之實, 而爲師門之純臣也, 世道之幸, 豈有加此哉? 彼輩之滋誣無憚, 惟願吾丈之心鏡愈明, 筆斧愈嚴, 始終闢之而無替也. 음인(陰人) 음성(陰城)에서 살고 있던 오진영을 가리킨다. 은행나무……것 원문의 '행하독명(杏下獨命)'은 오진영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간재에게 문집 발간의 명을 받았다는 말이다. 리(鯉)가 공자(孔子)를 독대하고 리는 공자의 아들로, 자는 백어(伯魚)이다. 공자가 뜰에 홀로 서 있을 적에, 백어가 종종걸음으로 그 옆을 지나가자, 공자가 시(詩)와 예(禮)를 배우라고 훈계한 고사를 말한다. 《논어(論語)》 〈계씨(季氏)〉 증자의 일관(一貫)이다 일관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준말이다. 공자(孔子)가 제자 증삼(曾參)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 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예, 그렇습니다.〔唯〕" 하여 곧바로 깨닫고는 잘 모르는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바로 충서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설명해 준 것을 말하는데, 오진영이 문집간행에 대한 간재의 뜻을 홀로 알았음을 비유한 것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단전밀부(單傳密付) 《주자대전(朱子大全)》 권59 〈답왕숙경서(答汪叔耕書)〉에서 "〈태극도(太極圖)〉를 단전밀부(單傳密付)의 삼매(三昧)로 여기는 것은 또한 근세 학자들이 형체를 등지고 그림자를 쫓으며 거짓을 가리켜 진짜라고 하는 폐단입니다."라고 하였다. 단전밀부는 한 사람에게만 은밀하게 전수한다는 의미이고, 삼매는 흐트러짐 없이 한곳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모두 불교의 용어이다. 여기서는 전우가 오진영에게 은밀히 남긴 유언이라는 의미이다. 큰 발길질로……보답하는 것 《주자대전(朱子大全)》 권28 〈답진동보서(答陳同夫書)〉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성실하지 않았겠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큰 발길질을 하지 않았겠는가.〔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오진영의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을 반박하여 물리치고 스승의 은혜를 지성으로 갚는 것을 말한다. 확실하게 각인시켜 원문의 '일봉일혈(一棒一血)'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34에 "대개 성인이 하시는 일은 예를 들면 방망이로 내려쳐서 한 가닥 혈흔(血痕)이 생기게 하고 손바닥으로 때려서 혈인(血印)이 생기게 하는 바로 그런 것과 같은 것이다.〔大概聖人做事 如所謂一棒一條痕 一摑一掌血 直是恁地〕"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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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丙寅七月 병인년(1926) 7월오진영의 일은 죄가 극치에 달하여 이미 할 말이 없고, 용동(龍洞)에서의 발간20)도 스승의 유훈을 저버림을 면치 못하였으니, 사도의 재앙이 한결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바야흐로 동지들과 맹세코 유훈을 지킬 것을 종신의 계책으로 세울 뿐이니, 더욱 우리 어르신의 이전 편지에서, "문집 발간을 차라리 아예 먼 후대로 늦추는 것이 낫다." 하신 논의가 질정하여 의심할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진주에서의 발간을 알린 첫 통문에 음성 오진영 무리의 핵심인물들은 쥐가 머리를 감추고 여우가 꼬리를 숨기듯이 자취를 감춰서 이편도 저편도 아닌 중립자들의 이름을 빌리거나 속여서 기록하여【죽은 지 3년 된 이석승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있다.】 마치 공론에서 나온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인구가 발간한다는 통문이 갑자기 나오자 그 일이 와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드러내고 꼬리를 흔들어대더니, 권순명, 유영선, 김종희, 최원, 김세기 등 12인의 두 번째 통문이 있어 말하기를, "이 일은 석농 오진영이 실제로 주선했다."라고 하고, 사람들에게 용맹한 장수와 사나운 병사들이 적을 만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뜻을 비치며, 그 맡은 일이 반드시 성공해서 호응함이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간사하며 가소로운 일인데, 스승의 손자를 고소하여 구속시킨 일21)에 있어서는 또한 다른 사람을 핑계대어 말하기를, "오진영이 한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오진영이 이미 인쇄할 곳을 주선하였으니, 스승의 손자를 고소하여 구속시킨 것은 인쇄하는 곳에서의 큰일인데, 어찌 주선한 자가 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도 속일 수 없는 만큼 그들의 간사한 속내가 함께 노출됨을 더욱 잘 볼 수 있습니다. 오진영이 일찍이 말하기를, "강태걸의 고소는 내가 시킨 것이 아니다." 하였으나 이렇게 된 후에도 오히려 감히 입을 열어 스스로 변론할 수 있겠습니까?옛날에 우암 선생이 광남(光南)22)을 구한 일 때문에 당시에 비난을 많이 받자 이내 말하기를, "설사 광남이 정말로 큰 죄가 있고 내가 앞장서 말하여 그를 구제했더라도 무슨 큰 죄가 되겠는가?"23) 하였으니, 우암이 스승의 손자를 중히 여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진영은 매번 우옹으로 자처하며 무함을 변론한 사람을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둘로 나누었다24)고 주장한 윤휴(尹鑴)로 취급하더니, 지금 전사인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잠시도 먼저 우옹을 어줍잖게라도 흉내 내지 않고, 마치 왕망(王莽)이 유자(孺子)를 끼고서 해치기에 급급했던 것25)처럼 하여 드러내놓고 고소하는 화란을 더하기를 이처럼 급히 한단 말입니까?전사인이 이미 오진영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미혹당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을 사묘(祠廟)26)에 고하고, 아울러 사우들에게 사과한 다음 유서를 받들고 근거하여 진주에서 간행하는 것을 곧바로 성토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치고 보충하여 뒷날을 좋게 하는 방도인데, 계책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고 급급하게 인가를 받아 간행하기를 힘써서 선사의 가르침을 버린 똑같은 자취로 함께 돌아가니,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혹자는 "인가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진주를 성토하고 용동을 성토하지 않는 것은 진주를 박대하고 용동을 후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심하지만, 이는 생각 없이 하는 말입니다. 인가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이나 용동은 스스로 그 죄를 담당하였고 또 선사께서 손수 편정한 각각의 원고를 썼으니, 스승을 무함하고 원고를 어지럽힌 오진영의 간행과는 같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震泳事, 罪至極頭, 已無可言.至於龍刊, 又不免棄訓, 師道之厄, 一何至此? 方與同志立誓, 抱遺訓, 終身計而已, 益覺吾丈前書, 刊事, 寧可遅緩百年之論, 爲建質無疑也.晉印之初通也, 陰黨骨子, 藏鼠頭, 隱狐尾, 或借或冒中立者名而錄之【沒已三年之李錫升入名其中】, 眩人以若出公議.然及李仁矩刊通忽出, 則恐其事瓦觧, 乃露頭搖尾.有權純命·柳永善·金鐘熙·崔愿·金世基輩十二人之再通, 而曰: "此事, 吳石農實周章之." 示人以猛將悍卒, 遇敵必勝之意, 冀其知事之必成而有應之者.此已極奸好笑, 而至於訴拘師孫之事, 則又諉之他人, 而曰: "非震所爲." 夫震旣周章印所矣.訴拘師孫, 乃印所中大事, 焉有周章者, 不爲之理乎? 尺童之瞞不得, 而益見奸膓之迸露矣.震嘗言: "杰訴, 非吾所使." 此後亦尙敢開口自辨耶.昔尤庵先生, 以救光南之故, 厚受時誚, 而乃曰: "設使光南, 眞有大罪, 而愚倡言救之, 亦何足爲大罪哉?" 蓋尤翁之重師孫也如此, 震每以尤翁自處, 處辨誣人於尹鑴卑主貳統之說, 而今於士仁也, 何不暫先效嚬於尤翁, 若王莽之攝孺子而急於戕害, 顯加訴禍之此急乎?士仁旣悟見欺於震也, 則當告其迷惑獲罪於祠廟, 并以謝之於士友, 奉據遺書, 正討晉印.是爲改補善後之道, 而計不出此, 乃汲汲然認刊之是務, 同歸於棄訓之一轍, 何其誤也? 或疑認則一也, 討晉而不討龍, 無乃薄晉而厚龍, 此不思之言也.認雖一也, 龍則自擔其罪, 而又用手定各稿, 非可與誣師亂稿之震印同科.未知如何. 용동(龍洞)에서의 발간 전우의 손서(孫壻)인 이인구(李仁矩)와 장손인 전일효(田鎰孝)가 1925년 겨울에 논산(論山) 용동(龍洞)의 봉양정사(鳳陽精舍)에 간소(刊所)를 설치하여 문집 간행을 착수한 것을 말한다. 1927년경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을 용동본(龍洞本)이라고 한다. 스승의……일 스승의 손자는 간재의 장손인 전일효를 말한다. 전일효의 자는 사인(士仁)으로, 오진영에게 문집 원고를 넘겨주었다가 돌려받는 문제로 서로 고소한 일이 있다. 광남(光南)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 김익훈(金益勳)의 호이다. 설사……되겠는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7 〈답류우구(答柳悠久)〉에 보인다. 《송자대전》에는 "설사 광남에게 참으로 큰 죄가 있는데 내가 감히 구출했다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는 데까지야 이르겠는가〔設使光南眞有大罪而愚敢救之, 亦何至難容於世哉〕"라고 되어있다. 군주를……나누었다 기해년(1659, 효종10년)에 예론(禮論)이 발생했을 때, 송시열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기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윤휴가 "임금을 비하(卑下)하고 종통(宗統)을 둘로 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한 말을 가리킨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3년. 왕망이……급급했던 것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顕)의 아들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세워서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ㆍ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을 한 것을 말한다. 사묘(祠廟)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影幀)을 모셔 두고 제사 지내는 건축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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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丁卯 정묘년(1927)삼가 생각해보니, 스승께서 돌아가신 후 동문 중에서 식견이 고명하고 의론이 정확한 분은 오직 우리 황소심 선생 한 분이 있을 뿐인데, 책 상자를 짊어지고 도를 묻는 것은 형세상 이미 행할 길이 없고 시절에 문안하는 편지는 번번이 해를 넘기니, 어찌 이리도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엷단 말입니까.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자책하다보니 싱숭생숭 즐겁지가 않습니다.삼가 생각건대, 겨울 추위에 도를 즐기며 지내시는 기거가 안회(顔回)처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29) 원안(袁安)처럼 눈 덮인 속에 고고히 누워서30) 다른 사람의 좋은 음식과 의복을 원하지 않으시리니, 비록 군자가 본성으로 여기는 것이 이에 있고 저 외물에 있지는 않으나 인자하고 현명한 사람의 곤액이 한결같이 이렇게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세상의 운수입니다. 시생 같은 자야 어찌 말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죽어 시신이 골짜기에 나뒹구는 것이 분수이니 지사(志士)인 냥 잊지 않을 필요도 없으나31) 구구한 저의 일념은 그래도 경서를 껴안고 끝까지 선사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이 음성의 해괴한 도적이 스승께서 떠나시자 더욱 거리낌 없이 '인가 받으라고 지시했다〔認敎〕'고 스승을 무함하여 스승의 백옥과도 같은 깨끗한 고결함을 더럽히고, 또 멋대로 원고를 고쳐서 금저울〔金秤〕과도 같은 정확한 의리를 어지럽는 것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늘까지 넘치는 사나운 물결은 결단코 거룻배 하나로 상대하여 건널 수 없으니, 온종일 근심하고 두려워하지만 계책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그들이 스승을 무함한 것은, 다만 그가 이른바 "은행나무 밑에서 독대했다." 운운한 말만 보더라도 원래 명백한데,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다."32)느니 "성토하는 글의 초안을 주관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써 백방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난겨울에 또한 그가 임술년(1922) 가을에 혼자 이름으로 서근소(徐近小)에게 답한 편지를 얻었는데, 곧장 "사실은 원래 선사의 '말씀하지 않은 지시〔不言之敎〕'를 따른 것이다." 하였으니, 말씀하지 않은 지시라는 것이 인가를 받을 뜻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사실은"이라고 하고 "원래 따른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다시금 무함하고 모독한 것이 매우 혹독함을 깨달았습니다. 竊念山頹後, 同門中識見高明, 議論精確, 惟吾黃小心先生一人在, 而負笈問道, 勢已末由, 時節侯書, 動輒經歲, 是何好賢之誠薄? 撫躳自訟, 忽忽靡樂.伏惟冬寒, 起居樂道, 飲顏氏水, 卧袁安雪, 而不願人梁繡也, 雖君子所性在此不在彼, 仁賢之厄, 一至於此寒心者, 世運也.如侍生者, 何足道哉? 溝壑是分, 不待不忘也.然區區一念, 猶欲抱經而終不負先師也.柰此陰怪之賊, 師去益無憚, 旣誣認敎, 汙了白璧之潔, 又擅改稿, 亂了金秤之義? 滔天虐浪, 決非一葦之抗, 夙夜憂惧, 計無所出.蓋其誣師, 但觀渠所謂杏下云云說, 原自明白, 而欲以語欠區別, 舍主討草等說, 百方圖脫, 而不得者也.昨冬又得渠壬戌秋, 單名答徐近小書, 直以為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 不言之敎, 非認意而何? 其曰其實, 曰原從者, 更覺誣衊之孔酷也. 안회(顔回)처럼……마시고 안회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지만, 안회만은 그 즐거움을 변치 않았다는 고사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원안(袁安)처럼……누워서 원안은 후한(後漢)의 현사(賢士)이다. 낙양(洛陽)에 폭설이 내려 다른 사람들은 눈을 치우고 밖으로 나와 먹을 것을 구하였으나 원안은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있는 판에,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大雪人皆餓 不宜干人〕" 하며 혼자 집에 누워 있었던 고사이다. 《후한서(後漢書)》 권45 〈원안열전(袁安列傳)〉 죽어……없으나 제 경공(齊景公)이 우인(虞人)을 우인에게 쓰는 피관(皮冠)으로 부르지 않고 대부에게 쓰는 정(旌)으로 부르자 우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공자가 "지사는 죽어서 시신이 도랑이나 골짜기에 있을 것을 잊지 않고, 용사는 싸우다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여 우인의 지조를 칭송한 데서 나온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다 이 말은 오진영이, 간재가 인가를 지시했다고 한 자신의 말이 공격을 받자 이를 해명하기 위해 한 말로, 〈답김용승서(答金容承書)〉에, "은행나무 아래에서 독대할 때에는 문집 간행의 지속만을 논했고 애초에 인가를 받을지 말지는 언급이 없었는데,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를 나중에 기억하다보니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으니, 이것은 말을 전달함에 소홀했던 나의 과실이다.〔杏下竹床時 單論刊稿遲速 初無認否之及 追記師生酬酌 而語欠區別 此吾命辭疎忽之過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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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학규에게 답함 答悅齋蘇丈學奎 ○甲子 갑자년(1924)지난 달 찾아뵌 것은 사실 몇 년간 벼르던 끝에 나온 것인데, 인연이 사람과 어긋나 공교롭게도 출타를 하시어 그리운 마음에 한없이 방황하였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운곡(雲谷)34)의 풍물이 옛날의 경관 그대로이고 명덕정(明德亭)35) 위의 상쾌한 기운이 사람 품을 파고드는 것을 보고 고인의 빼어난 운치를 손을 내밀면 바로 움켜쥘 수 있을 듯하였으니, 이것이 이미 사람의 뜻을 조금은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아드님 형제의 안내를 받아 서실로 들어갔는데, 첫째 아드님은 정성스러워 사람을 흡족하게 하고 둘째 아드님은 명민하여 기뻐할 만하였으니, 군자의 전형과 고가(故家)36)의 훌륭한 집안 교육이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흠모케 하여 마침 높으신 가르침을 입지 못한 것 때문에 크게 탄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편지와 아름다운 시37)를 당일로 오롯이 보내주셨으니, 정의가 중하고 의리가 바르며 풍격이 아름답고 뜻이 깊어서 깜짝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에 외람된 생각으로 지난번에 만약 하룻밤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귀중한38) 글을 얻어 영원히 산속의 보물로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이어 생각하니, 시생과 우리 어른은 선대에 가까운 친척이었고 선친과는 연세가 같았습니다. 부친을 여읜 뒤로는 친소와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선친과 연세가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을 들으면 번번이 서글퍼지며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슬픔39)이 흘러나왔습니다. 하물며 우리 어른과 같은 위치에 계신 분이겠습니까? 매번 우리 어른께서 술이 반쯤 취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리와 이익을 담론하고 고금을 논평하시는 것을 볼 적마다 풍치와 언론의 풍부함이 선친과 거의 엇비슷하다고 가만히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우리 부친이 살아계시면 아직도 이 어른처럼 건강하시고 아직도 이 어른과 함께 선비들 사이에서 주선할 수 있으셨을텐데." 하였으니, 저도 모르게 줄줄 눈물이 흐르려 했습니다. 말이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우리 두 집안의 친분과 정의는 평상시에 실제로 상상하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또 제가 다행히 우리 어른과 함께 구산옹40)의 문하에 출입했고, 또 다행히 시비가 뒤섞인 날을 당하여 잡아 지키는 것이 우리 어른과 같았으니, 마침내 선대의 친밀한 정의가 이에 더욱 친밀해짐을 알았고, 또한 본 바가 서로 부합하는 것이 선대의 우의로 맺어진 두 집안의 행복임을 이로써 알았습니다. 이런 점에 나아가 노소간에 간극이 없는 믿음과 피차 서로 격려하는 도를 구한다면 또한 그것이 실제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연히 《맹자》의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으니, 서이 사람이다.〔文王 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41)라고 한 부분을 읽었는데, 제가 여기에 보충하여 "간옹은 완산에서 태어나 부안에서 죽었으니, 호남사람이다."라고 하겠습니다. 호남은 진실로 간옹의 도학이 처음 시작하여 끝을 맺은 땅입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후에 이런 망극한 무함을 당하신 것에 대해 완주에는 우리 어른과 여러 분들이 계시고 부안에는 창암과 함재 및 여러 분들이 계시는 만큼 한 조각 마음을 단단히 먹어 일생토록 부처님 같은 은혜를 갚고 큰 붓으로 훤히 밝혀 백세토록 사설(邪說)을 막아서 간옹의 도로 하여금 언제라도 의지할 것이 있게 해야 하니, 하늘의 뜻이 어찌 우연히 그리되겠습니까. 삼가 강성한 힘을 더욱 떨쳐 백번 부러져도 회피하지 않고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아서, 맹세코 호남 한 지역이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못난 시생도 마땅히 하풍(下風)에 달려가 함께하여 영광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客月拜門, 實出於累年經擬之餘, 而緣與人違, 巧值駕外, 徊徨眷戀.猶見雲谷風物, 不改舊觀, 明德亭上, 爽氣襲人, 高人逸韻, 若可挹取, 此已稍強人意.旣而令似兄弟, 延入書室, 一哥誠欵洽人, 二哥明敏可喜, 君子典型, 故家詩禮, 又令人欽豔, 不須以適違尊誨, 大致於邑.矧茲赫蹏瓊什, 卽日耑賜, 情重而義正, 格佳而意深, 驚喜感幸.私竊以爲向使不失一宵之陪話, 安能獲此百朋之手筆, 永作山中之寶哉? 仍念侍生之於吾丈, 先世切戚也, 先人同庚也.一自失怙以來, 不分親踈貴踐, 聞有與先人同庚者, 輒惕惕動蓼莪悲, 况如吾丈地哉? 每見吾丈酒半酣揮白鬚, 談說義利, 揚扢古今, 暗想風致言論恰恰, 與先人或相上下, 自語於心曰: '吾親而在者, 尙能如此丈之康健, 尙能與此丈周旋於章掖間.' 不覺泫然乎欲淚興.言到此兩家契誼之, 非比平常, 實際可想.且澤述幸而與吾丈同出臼門, 又幸而當此是非混淆之日, 所執與吾丈同, 乃知先戚之誼, 於是乎益密.又以知所見之相符, 兩家先誼之幸福也.卽此而求之, 老少無間之孚, 彼此相勉之道, 又可知其實際也.偶誦孟子之言, 曰: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 澤述足之, 曰: "艮翁生於完山, 卒於扶風, 湖南之人也." 湖南, 固艮翁道學, 成始成終之地.故旣沒而遭此罔極之誣, 在完而有吾丈諸公, 在扶而有鬯涵諸公, 寸心斷斷, 報佛恩於一生, 大筆晳晳, 距邪說於百世, 俾艮翁之道, 始終之有賴, 天意豈偶然哉? 伏願益奮大壯之力, 百折不回, 九死靡悔, 誓使湖南一區, 永有辭於來許, 則侍生之無似, 亦當奔趍下風, 而與有榮矣. 운곡(雲谷) 열재 소학규가 거주했던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 운곡을 가리킨다. 명덕정(明德亭) 위치는 미상이다. '명덕(明德)'은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에서 그 의미를 취한 것이다. 고가(故家)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하며 살아온 집안을 말한다. 편지와 아름다운 시 원문의 '혁제(赫蹄)'는 옛날에 글씨를 쓰는 데 썼던 폭이 좁은 비단을 뜻하는 말인데 종이의 이칭으로 쓰이기도 하고 여기서는 상대방의 편지를 뜻하며, 경십(瓊什)은 상대방이 지은 시나 문장을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귀중한 원문의 '백붕(百朋)'은 많은 재물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소학규가 지어서 보낸 시를 칭송하여 말한 것이다. 붕(朋)은 화폐의 단위이다. 《시경(詩經)》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 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네.〔旣見君子 錫我百朋〕" 하였다. 부모를……슬픔 원문의 '육아(蓼莪)'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명인데,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살아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자식의 슬픈 심경을 읊은 시이다. 구산옹(臼山翁) 구산은 간재 전우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문왕은……사람이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는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 부하로 옮겼다가 명조에서 죽었으니, 동이의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서 필영에서 죽으니 서이의 사람이다.〔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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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올림 上悅齋蘇丈 乙丑十二月 을축년(1925) 12월지난번 보내주신 편지에서, 어른께서는 주된 논의를 담당하시고 시생은 통문 만드는 것을 담당하자고 하셨으니, 마치 '죽어서 함께 열전에 오르자'43)는 뜻을 보이신 듯하였고, 급기야 시생이 10일에 검사국(檢事局)에 답변한 말44)을 들으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마치 내 입에서 나온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이에 감히 인정해 주시는 끝자리에 외람되이 끼어 있지는 못하나 피차 간직하고 있는 마음은 차이가 없다고 믿었는데, 과연 19일에 어른께서 검사국에 써서 보인 한 편의 시는 어쩌면 그리도 시생이 마음속 깊이 지니고 있는 뜻과 하나하나 부합하는지요? 시에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일생의 일이고, 유훈을 지키는 것은 만 번 죽어도 하리라.〔辨誣一生事 守訓萬死爲〕"라는 구절을 바로 쓰셨으니, 단지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켜서 죽어 지하에 돌아가 선사를 배알한다는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시가 이 외에 다른 뜻은 없으니, 바로 쓰는 것은 달리 말할 만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께서 이른바 "마치 내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하신 것이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듣자하니 검사가 다른 사람에게 시생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도는 본래 광대한데, 김 아무개는 이와 같이 소견이 좁다." 하였다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어른은 노성한 분이신데 또한 시생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니, 한층 더 기롱 받음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저 한바탕 웃고 맙니다. 가는 해를 전송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가 바로 앞에 닥쳤으니, 새해에 복을 받기를 축복하는 것이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의 예인데, 우리들은 바야흐로 호랑이 꼬리를 밟은 듯 근심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에 있으니,45) 길상(吉祥)에 대해서는 말할 바가 아니고 오직 '의리를 지키고46) 몸을 깨끗이 한다47)〔守義潔身〕'는 네 글자로 서로 신년에 대한 축원을 다할 수 있을 뿐입니다. 頃承下狀, 以丈之自擔主論, 生之自擔製通, 有若示死同傳之意.及聞生初十日答檢辭, 則又謂不啻若自己口出.顧不敢僭厠於引與之末, 已信彼此所存之無間矣, 果爾十九日, 丈之示檢一詩, 何其與生之衣帶書, 一一相符也? 詩之"辨誣一生事, 守訓萬死爲", 卽書之, 只有辨誣守訓, 歸拜先師於地下也.詩之此外無他意, 卽書之, 他無可言者也.吾丈所謂若自口出者, 非此歟? 聞檢向人譏侍生曰: "道本廣大, 金某若此狹隘." 吾丈之老成, 而亦同於侍生, 則想不免加受一屑譏矣.旋堪一呵, 餞迓在卽, 頌新福, 往復間例也, 而吾儕則方蹈虎尾, 吉祥非所言, 惟可以守義潔身四字, 交致新年之祝. 죽어서 함께 열전에 오르자 송나라 때 명신인 범진(范鎭)은 사마광(司馬光)과 우의가 두터웠는데, 사마광에게 "그대와는 살아서 뜻을 함께하고 죽어서 전을 함께할 것이다.〔與子生同志死同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치의집전(緇衣集傳)》 권3 〈일류장(壹類章)〉 중국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에서는 성향이 같은 인물을 한 열전(列傳)에 모아 엮기 때문에 한 말로, 이 말은 뜻을 같이 하자는 의미이다. 시생이……말 오진영의 제자인 강태걸(姜泰杰)이 후창 김택술 및 최병심 측을 업무방해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하였는데, 이는 인가 받아 간행한 진주본을 구독하지 못하게 선동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검사국(檢事局)에서 후창을 불러 조사하였는데, 이 조사에 응하여 답한 말이다. 호랑이……있으니 《서경(書經)》 〈군아(君牙)〉에 "내 마음의 근심되고 위태로운 것이 마치 범의 꼬리를 밟은 듯, 봄날의 얼음 위를 걷는 듯하다.〔心之憂危 若蹈虎尾 涉于春氷〕"라는 말이 나온다. 의리를 지키고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을 주장하여 그 마음을 곧게 하고, 의를 지켜 그 밖을 방정하게 한다.〔君子主敬以直其內 守義以方其外〕"라고 하였다. 몸을 깨끗이 한다 자기 한 몸 깨끗하게 하고자 윤리를 어지럽히는 것을 말한다. 《논어》 〈미자(微子)〉에, "자로가 말하기를,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義)가 없으니, 장유(長幼)의 예절을 폐할 수가 없거늘 군신(君臣)의 의를 어떻게 폐할 수가 있겠는가. 이는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큰 윤리를 어지럽히는 것〔潔身亂倫〕이다.' 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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