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재74) 소공께 올리는 제문 【기축년(1949)】 祭悅齋蘇公文【己丑】 아, 소공의 집안은 嗚呼惟公,대대로 문장이 뛰어났는데 家世文章,400년에 걸쳐서 閱四百年,곤암과 양곡75) 양곡(陽谷)은 소세양(蘇世讓 1486~1562)으로 자는 언겸(彦謙)이며, 중종 때 문과급제 하고 홍문관직제학ㆍ이조판서ㆍ좌찬성 등을 하였다.의 가업을 이어오고 繼述困陽,공의 부자에 이르러 至公父子,옛 가업이 다시 창성하여 舊業再昌,아버지는 갑과에 공은 을과에 올라76) 父甲子乙,전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後先上庠,명성과 인망이 성대해져서 蔚然聲望,남쪽 지방의 대가(大家)가 되었습니다. 南服大方.문장을 통하여 도에 나아가며 因文入道,저문 빛의 노년에 이르렀는데 公年暮光,누구에게 나아가 질정을 받았는가 于何就正,공은 구산(臼山)의 당에 올라 升臼山堂,성(誠)과 경(敬)을 기틀로 삼고 樞紐誠敬,간략함과 자세함을 겸비하여 輪翼約詳.사림의 빼어난 인재가 되고 翹楚士林,사문의 높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高第門墻,그런데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夫何山頹,밝은 해가 구름에 가려질듯 하였는데 日爲雲障.공께서 한 번 붓을 들자 公擧一筆,사도(師道)가 다시 정상을 회복하였습니다. 師道復常,옛 사람이 순(舜)임금 공자(孔子)님 在昔舜孔이윤(伊尹)과 백리해(白里奚)를 비방하니 伊奚之謗,맹자가 변증하여 가리기를 孟聖有辨,마치 밭에 잡초 뽑듯이 하였습니다. 如苗去稂,하물며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矧父事地,어찌 감히 힘쓰지 않았겠습니까.77) 豈敢不蘉,의리를 이미 다하였고 義旣其盡,공훈 또한 세상에 드러났는데 功亦其彰,사람들은 과연 무슨 마음으로 人獨何心,지나쳤다고 한단 말입니까. 有謂過當?아, 저는 소공을 嗟余于公,높은 산처럼 우러러보았습니다. 高山其望,저의 아버지와 동갑이었고 先君同庚,친척의 정의도 오래되었습니다. 戚誼亦長.갑자 을미에 선생님을 지키다가 甲乙衛師,함께 음해(陰害)를 받았고78) 同受陰戕,생사와 영욕의 즈음에는 死生榮辱,낭패(狼狽)처럼79) 의지하기도 하였습니다. 狽之依狼.공께서 계실 때는 公之在世,동량처럼 믿었는데 恃若棟樑,공께서 떠나 가시고 나니 自公之逝,그 외롭고 쓸쓸함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柰如踽凉,넋은 녹아 부스러지고 魂爲之銷,눈물은 퍼붓는 비처럼 흐릅니다. 淚爲之滂.그러나 공은 어진 분이라 然公仁者,하늘이 장수와 건강을 주었고, 天錫壽康,순리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存順沒寧,서운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만 其誰憾傷,선비들은 사표(師表)를 잃었고 士失師表,나라에는 어진 인재가 없어졌으니 邦無賢良,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是爲幷世,공의 죽음을 한탄합니다. 同歎云亡.아아, 嗚呼!공께서는 일찍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公曾謂余,"훗날 내가 죽거든 他日我喪,와서 신주를 써야 할 것이니 而來題主,먼 고을에 산다고 꺼리지 마시고 勿憚遠鄕,묘지의 명문도 함께 銘墓之文,지어 띄워 주시게." 而亦揄揚.제가 비록 적임자는 아닙니다만 顧雖匪人,어찌 감히 그 말씀을 잊었겠습니까. 亦何敢忘?그런데 뜻밖에 그 때 孰謂當日,부고를 제 때에 못 받았고 訃車未遑,몸마저 오랫동안 아파서 身亦久病,이제야 술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今始奠觴,사람의 일이 잘 맞기 어려운 것이 人事難協,멀리서 못 만나는 삼성과 상성80) 같으니, 有若參商,저승과 이승 간에 약속 져버린 부끄러움에 愧負幽明,이리저리 머뭇거리며 서성일 뿐입니다. 躑躅彷徨.아아, 嗚呼!글은 여기에서 마치지만 辭止於此,슬픈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無窮哀腸.높으신 밝은 혼령께서는 尊靈不昧,굽어 혜량하여 주십시오. 庶垂鑑量애통하고 슬픕니다. 痛哉哀哉흠향하소서! 尙饗! . 嗚呼惟公, 家世文章, 閱四百年, 繼述困陽, 至公父子, 舊業再昌, 父甲子乙, 後先上庠, 蔚然聲望, 南服大方。 因文入道, 公年暮光, 于何就正, 升臼山堂, 樞紐誠敬, 輪翼約詳。 翹楚士林, 高第門墻, 夫何山頹, 日爲雲障。 公擧一筆, 師道復常, 在昔舜孔, 伊奚之謗, 孟聖有辨, 如苗去稂, 矧父事地, 豈敢不蘉, 義旣其盡, 功亦其彰, 人獨何心有謂過當? 嗟余于公, 高山其望, 先君同庚, 戚誼亦長, 甲乙衛師, 同受陰戕, 死生榮辱, 狽之依狼。 公之在世, 恃若棟樑, 自公之逝, 柰如踽凉, 魂爲之銷, 淚爲之滂。 然公仁者, 天錫壽康, 存順沒寧, 其誰憾傷, 士失師表, 邦無賢良, 是爲幷世同歎云亡。 嗚呼! 公曾謂余, 他日我喪, 而來題主, 勿憚遠鄕, 銘墓之文, 而亦揄揚。 顧雖匪人, 亦何敢忘? 孰謂當日, 訃車未遑, 身亦久病, 今始奠觴, 人事難協, 有若參商, 愧負幽明, 躑躅彷徨。 嗚呼! 辭止於此, 無窮哀腸。 尊靈不昧, 庶垂鑑量。 痛哉哀哉! 尙饗! 열재 소학규(蘇學奎 1859~1948)의 호로서, 자는 화지(化知)이다. 만재 소휘식(晩齋蘇輝植 1837~1910)의 아들로서,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서 태어났다. 곤암과 양곡 곤암(困庵)은 소세량(蘇世良 1476~1528)으로 자는 원우(元佑)이며, 중종 때 문과급제 하고 홍문관직제학ㆍ동부승지ㆍ대사간 등을 하였다. 아버지……올라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부친 소휘식(蘇輝植)은 1879년 식년 진사 갑과에, 아들 소학규(蘇學奎)는 1891년 증광시 진사 병과에 합격하여, 김택술의 기록과 약간 다르다. 하물며……않았겠습니까 소학규의 《열재집(悅齋集)》행장을 보면, 공이 부친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이라면 별세 후 십여 년간 산소터를 얻고자 지관과 함께 각처를 탐색한 것 뿐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갑자……받았고 1924~5년간에 간재 문하에서 일어난 분쟁을 말한다. 간재선생이 1922년(임술) 7월에 별세한 후, 선생의 문집을 일제의 허가를 받아서라도 간행하자는 쪽과 반대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간행하지 말자는 쪽의 주장이 대립하였다, 전자의 오진영(吳震泳, 1868~1944) 등은 진주에서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자, 후자의 김택술ㆍ최병심(崔秉心, 1874~1957) 등은 유림에 통문을 돌려 간행의 부당성을 말하며 불매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오진영 등이 손해를 입었다며 전주 검사국에 고소를 하였다. 낭패(狼狽)처럼 서로 긴밀한 사이를 말한다. 낭과 패는 모두 이리의 일종인데 낭은 앞발이 길고 뒷발이 짧으며, 패는 앞발이 짧고 뒷발이 길다. 이로 인해 낭과 패는 서로 의지하여 함께 다니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이다.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 삼성(參星)은 동쪽 하늘에, 상성(商星)은 서쪽 하늘에 뜨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두 별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