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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유학 이기두(李箕斗) 준호구(準戶口)(50세) 고문서-증빙류-호적 丁卯 行郡守 李箕斗 丁卯 郡守 李箕斗 전라남도 보성군 行郡守[押] 周挾改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04_001 1867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67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내용은 호주와 그의 처의 가족구성 그리고 천구질(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와 그의 처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한 것이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리명과 통호수의 기재는 생략하였다. 호주는 이기두인데, 직역이 유학(幼學)이며, 나이가 50세(무인생)이고 본관이 성주이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유원, 조가 국진, 증조가 규명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나상좌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호주의 처는 이씨인데, 나이가 55세(갑술생)이며 본관이 전의이다. 그의 사조는 부가 광식, 조가 의현, 증조가 지찬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윤범은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함안이다. 호주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진용이다. 직역이 유학이고 나이가 19세(기유생)이다. 아들이 장가들어 맞이한 며느리는 조씨이며, 나이가 24세(갑진생)이다. 천구질에는 비 1명만이 기재되어 있는데, 곧 둑덕(20세)이다. 왼쪽 끝에는 행군수의 서압(署押)이 있으며, 중앙 하단에는 비껴서 장방형의 '주협개인(周挾改印)'의 묵인(墨印)을 찍었다. 주협개인은 주협과 개인 사이에 '자(字)' 혹은 무(無)'자를 써넣어 호주가 제출한 단자에 수정이 가해졌는지의 여부를 증명해주어야 하나 이를 생략했다. 우측 하단에는 큰 글씨로 붉은색의 '준(準)'자를 쓰고 그 위에 관인을 찍었다. 끝의 정묘식(丁卯式)은 정묘식년의 호적대장을 가리키며, 이를 근거로 호구단자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였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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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유학 이기두(李箕斗) 준호구(準戶口)(47세) 고문서-증빙류-호적 甲子 李箕斗 甲子 李箕斗 전라남도 보성군 周挾改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04_001 1864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64년 문전면 가천촌에 사는 유학 이기두에게 보성군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내용은 호주와 그의 처의 가족구성 그리고 천구질(노비 명단)로 구성되어 있다. 호주와 그의 처의 사조(四祖)는 동거 가족이 아니라, 당시의 호적제도에 따라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문전면은 보성군에 속한 면이다. 리명과 통호수의 기재는 생략하였다. 호주는 이기두인데, 직역이 유학(幼學)이며, 나이가 47세(무인생)이고 본관이 성주이다. 그의 사조는 부(父)가 유원, 조가 국진, 증조가 규명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나상좌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금성이다. 호주의 처는 이씨인데, 나이가 52세(갑술생)이며 본관이 전의이다. 그의 사조는 부가 광식, 조가 의현, 증조가 지찬이며, 직역이 모두 학생이다. 외조는 윤범은인데, 직역이 학생이며 본관이 함안이다. 호주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진용이다. 직역이 동몽이고 나이가 15세(기유생)이다. 천구질에는 비 2명과 노 1명이 기재되어 있다. 비는 순래(42세)와 둑덕(17세), 노는 수천(49세)이다. 왼쪽 끝에는 보성군수의 서압(署押)이 있으며, 천구질 위에는 비껴서 장방형의 '주협개인(周挾改印)'의 묵인(墨印)을 찍었다. 주협개인은 주협과 개인 사이에 '자(字)' 혹은 무(無)'자를 써넣어 호주가 제출한 단자에 수정이 가해졌는지의 여부를 증명해주어야 하나 이를 생략했다. 우측 하단에는 큰 글씨로 붉은색의 '준(準)'자를 쓰고 그 오른쪽에 관인을 찍었다. 끝의 갑자식(甲子式)은 갑자식년의 호적대장을 가리키며, 이를 근거로 호구단자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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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田面 第一里 可川村 第統第戶幼學 李有源 年六十癸未 本星山 父 學生 國鎭 祖 學生 奎明 曾祖 學生 仁輔 外祖 老職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 鄭弼東 本河東 妻 李氏 籍五十六丁亥 本全義 父 學生 옥 祖 學生 徵贇 曾祖 學生 兼三 外祖 學生 梁弼漢 本濟州 妻父 學生 宋昌呂 本礪山 子 幼學 箕翰 年三十一壬子 婦 任氏 籍三十四己酉 本長興賤口秩 甫今 年四十七丙申逃奴婢秩 班婢 雪德 年三十一壬子 婢 雪每 年四十六丁酉 一所奴 守千 年七丙子 婢 月每 年二十一壬戌 奴 千得 年三十五戊申 奴 龍伯 年二十三庚申 甫今一所奴 金哲 年二十三庚申 二所生奴 玉哲 年二十一壬戌 三所奴 三哲 年十五戊辰 四所生婢 吳深 年九癸酉 婢 德葉 年十九甲子壬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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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을해년(1935) 答吳士益 乙亥 제가 천하가 중화세계인데 유자가 능히 중화인이 될 수 없다면 천하가 즉시 오랑캐가 된다는 말로 세도(世道)에 해가 된다고 여긴 것은 감히 가혹하다 할 수 없으니 그 말의 실수를 취한 것에 불과하여 마치 죄를 판단하는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그 죄를 살피는 것과 같습니다. 형은 말의 병통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식견의 병통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형은 시험 삼아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말이라는 것은 마음의 소리이니, 말이 이미 병통이 있다면 심술(心術)의 병통이라 말한다 해도 또한 불가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식견의 병통이라고 말할 수 없겠습니까. 형은 이른바 유자는 중화되지 않은 이전에 얻은 호칭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중화되지 않은 이후에 이 칭호를 얻어야 할 자를 아울러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 그렇지 않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중화되지 않았을 뿐 유자는 아니니 가볍고 천하게 될 여지가 너무 심합니다. 얼마나 소중하기에 위 문장에서 오랑캐가 될 수 없는 유자와 똑같이 천하에 중요한 관건이 되게 하여 천하의 중화인을 다 모아서 모두 오랑캐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랑캐가 될 수 없는 자를 중화인이 될 수 없는 자와 똑같이 유자라고 이를 수 있다면, 이것은 또한 중화인도 될 수 있고 오랑캐도 될 수 있어서 유자의 본 모습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화인이 곧 오랑캐인이라는 것이 위 문장의 '천하가 오히려 중화이다'라는 것에 해가 될 뿐만이 아니니, 또한 어찌 병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송나라 말기에 허형(許衡)이라는 유자의 명성이 얼마나 성대했습니까. 만약에 허형으로 하여금 빠르게는 북송의 전성시기에 태어나게 하고 늦게는 명나라 황제가 나라를 건국한 때 태어나게 하여 홀로 오랑캐 제도를 행하게 했다면, 그가 평일에 유자의 이름이 있었던 까닭으로 송나라와 명나라 천하를 즉시 오랑캐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중화와 오랑캐를 섞어서 유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형이 대신하여 해명한 음성 오진영의 설을 가지고 말을 해보면, 중화인도 되고 오랑캐도 된다는 것은 단지 유자에게 달려있고 천하에 달려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자가 유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중화인이기 때문이니 다만 중화인이 되는 것은 유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다시 오랑캐가 되는 것이 유자의 손에 달려있고, 어찌 반드시 다시 천하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합니까.【천하에는 중화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유자가 중망(重望)을 받는 것은 다만 중화인이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오랑캐 사람이 되는 것에도 있으니, 오랑캐가 되었는데도 귀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 이것은 중화인도 되고 오랑캐도 되고 유자도 될 수 있다는 설이 아닙니까. 어찌 다만 제가 중화도 될 수 있고 오랑캐도 될 수 있고 유자도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사람들을 몸을 두지 못할 곳으로 내몰아낸다고 합니까. 끝내 음성 오진영의 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본래 이와 같기 때문에 형도 또한 스스로 어쩔 수 없이 이와 같이 하였고 이를 통하여 스스로 반성한다면 저의 의론이 가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형은 세도에 해롭다는 네 글자를 듣고서 매우 놀랐으나 어찌 생각이 이런 점에는 미치지 않았습니까. 양묵(楊墨)의 폐해가 부모도 없고 군주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주자는 "그 본심을 베푸는게 어찌 사악함이 있겠는가. 다만 약간의 실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중화와 오랑캐를 뒤섞어서 유자의 설을 하는 것이 어찌 다만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는 것과 비교할 따름 있겠습니까. 이것이 만약에 평상시의 편지와 글자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오히려 일시의 말의 병통으로 돌려서 반드시 깊이 논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문장은 입언하여 전해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 일은 절개를 우뚝 세웠고 그 작업은 심력을 다하여 한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추존하여 식견이 선사보다 뛰어나다고 하니 그 말의 실수가 이와 같으니 그 해로움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 점이 어쩔 수 없이 깊이 논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다만 형 또한 이미 자세히 보고 의심스럽게 여기고 말의 병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끝내는 훤하게 깨달을 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弟之以"天下華而儒不能華,則天下即夷"之語,爲世道之害者,非敢爲苛刻,不過就言論失,如斷獄者之聽其辭,而勘其罪也.兄乃以爲可謂語病,而不可謂識見之病,兄試思之.言者心聲也,言既有病,則謂之心術之病,亦無不可.而況不可謂識見之病乎? 兄謂其所謂儒指不華前,所得稱號而言,非謂并指不華後,當得是稱也者,非曰不然.然則不華已矣,非儒已矣,其可輕賊甚矣.有何所重,而與上文能不夷之儒,同一關重於天下,而蓋盡天下之華而并夷之乎? 能不夷者,旣可與不能華者,同謂之儒,則是亦可華可夷者,而非復儒者本面矣.然則,非但此華即夷之爲有害,上文天下猶華,亦安得而無病乎? 夫許衡儒名,何等盛也? 如使衡早生北宋全盛之世,晚生明帝建國之際,而獨行胡制,則以其平日儒名之故,謂宋明天下即夷可乎? 是非混華夷爲儒而何? 且以兄所代解陰吳說者言之,有曰 '爲華爲夷,只在乎儒,不在乎天下',夫儒之所以爲儒者,以其爲華也,但曰'爲華在乎儒',足矣.何必復曰'爲夷在乎儒',何必復曰'不在乎天下也' 【天下之中有華在】 然則,儒之負有重望,不只在於爲華,而亦在乎爲夷,爲夷而可且重之,則是非可華可夷可儒者之說乎? 何獨以弟之斥以可華可夷可儒者,謂歸人於不容身之地也? 蓋以終無柰陰說本自如此,故兄亦自不得不如此,因此而自反,則可以知弟論之非苛刻也.且兄以'世道之害'四字,聞甚瞿然,何不思之至此? 夫楊墨之害,至於無父無君,然朱子謂: '設其本心,豈有邪哉? 特微有差失.' 今此混華夷爲儒之說,豈但微有差失之比而已? 此若出於尋常書詞之間,則猶可歸之一時語病,而不必深論也.今也則不然.其文則立言之傳久也.其事則立節之卓爾也,其作則專致之心力也.其從之推尊,則見識優於先師者也,而其言之差失乃如此,其害庸有極乎? 此所以不得不深論也.但兄亦既謂細看可疑,又謂之語病,則終有了悟之日矣.惟是之俟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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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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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려 박창현의 편지를 논함 을묘년(1915) 上艮齊先生論朴昌鉉書 乙卯 박창현의 편지에 성현(聖賢)이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발명했다고 운운한 것에 대하여-1기질지성이라는 명칭은 장자(張子 장재(張載))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는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天地之性)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53) 이미 잘 돌이키라고 말했다면 이미 기(氣)와 섞인 좋지 않은 사물인 것인데, 지금 애당초 이른바 잘 돌이키는 공부 없이 곧바로 그 섞이지 않은 체(體)를 보라고 하니, 그 섞이지 않은 체가 바로 천지지성입니다. 잘 돌이키는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천지지성이 저절로 있게 된다면 역시 순선(純善)한 성이니 어찌 굳이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박창현의 편지에 총명예지(聰明睿知)를 운운한 것에 대하여-2기질은 비록 청명(淸明)하고 순수(純粹)하더라도 도리어 지각(知覺)과 정의(情意)가 없는 것입니다. 무릇 지각과 정의가 있는 것은 바로 심(心)의 능력입니다. 대개 총명예지는 지각, 정의가 있는 것과 관계되니 심이라고 할 수 있지 기질이라고 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다만 성인(聖人)의 기질은 청명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그 심이 이로 인해 총명예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대학》의 서문에서 기품(氣稟)이 같지 않음에 대하여 말하고,《중용장구》에서는 나면서부터 아는[生知] 자질로 말하였던 것입니다.박창현의 편지에 품부받은 곳에 통함과 가려짐, 열림과 막힘[通蔽開塞]이 있다고 운운한 것에 대하여-3통함과 가려짐, 열림과 막힘은 바로 발용(發用)한 뒤의 일인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품부받은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품부받은 곳에서 이 성(性)이 이미 기(氣)를 따라서 통함과 가려짐, 열림과 막힘이 있다면 이른바 모든 선의 근본이 되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어느 곳에다 안배한단 말입니까? 만약 '단독으로 가리키면 본연지성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저는 이미 가리고 막힌 성이 어떻게 갑자기 형체를 바꾸어 순선(純善)하게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인용한 농암(農巖)의 설 운운한 것은 '생지위성(生之謂性)'장에서, 성을 말하는 순간 바로 이미 성이 아니라고 한 말을 풀이한 듯합니다. 그리고 '리(理)는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다[理固無不善]'는 한 구절로 맨앞에 문장을 만든 것은 아마도 기질지성으로 간주한 듯합니다. 그리고 기질에 부여되는 순간 바로 형기(形氣)를 겸한다고 한 것은 문제가 있는 설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저의 얕은 견해로는 기질을 품부받고 형기를 겸했다는 것을 가지고 대번에 문제가 있는 설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박창현의 편지에 정자(程子)가 '성(性)은 서로 비슷하다[性相近]'는 말을 논한 데 대해 운운한 것에 대하여-4정자가 '성은 서로 비슷하다'는 말을 논할 때 개와 소 그리고 사람의 성이 어찌 각각 서로 다른 성을 품수(稟受)하였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대개 상지(上知)와 하우(下愚), 개와 소 그리고 사람은 서로 다른 기질(氣質)을 품수하였기 때문에 그 성이 운용(運用)하는 데에 드러나는 모습이 그 기질에 따라 각각 다르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는 것입니다.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을 통괄하여 말한 것인 천명(天命)의 성과 성선(性善)의 성의 경우에는 또 기질에 있는 이 리(理)로 말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이 편지의 뜻처럼 기품(氣稟)에 따라 리가 다르게 나타나는 측면에 입각하여 본연지성 하나만 가리킨 것이겠습니까?박창현의 편지에 '오행이 각각 하나의 성을 갖는다[五行各一其性]'라고 운운한 것에 대하여-5오행(五行)이 각각 하나의 성을 갖는다는 말은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기 이전 천지의 조화(造化)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도구로써 말한 것입니다. 그 기질에 따라 품수받았다고 말한 것은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 본연(本然)의 기질에 따라 각각 하나의 성을 갖춘 것을 말한 것으로, 이것이 이른바 리(理)의 분수(分殊)라는 것이니 선악(善惡)과 편전(偏全)이 있는 사람과 사물의 기질지성을 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를 인용하여 기품에 따라 리가 같지 않다는 설을 증명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박창현의 편지에 단지 기질지성만 논했다고 운운한 것에 대하여-6기질지성을 품수한 곳으로부터 말하자면, 저 또한 어찌 그렇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품수한 자가 기질이 같지 않으므로 성이 발현하는 것이 또한 기질에 따라 같지 않게 됩니다. 다만 이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최초에 서로 같지 않은 리를 품수하였다고 곧바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쟁론(爭論)하는 부분은 품수와 발용의 측면이 같지 않다는 데 있지 않고, 바로 서로 다른 리를 품수하고 서로 다른 기를 품수하는 차이에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리가 기질 속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이유로 기질지성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대개 하늘에 있는 리가 사람의 기질 속에 있으면서 애초에 말할 만한 편전(偏全)과 선악(善惡)이 있은 적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본연지성이고, 그 기질에 따라 자체로 편전과 선악이 있는 하나의 성이 되는 데 이르른 뒤에야 기질지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기질에 막 떨어진 것을 가지고 곧바로 기질지성이라고 한다면 이른바 본연지성이라는 것은 그저 하늘에 있는 리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사람의 측면에서는 영원히 말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朴書聖賢發明氣質之性云云氣質性之名, 肇自張子而其言曰: "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 旣曰善反之, 則已是雜氣不好底物事, 而今初無所謂善反之功, 而直曰見其不雜之體, 不雜之體, 卽天地之性也. 不加善反之功, 而天地之性自存, 則亦是純善之性, 何必曰'氣質之性, 君子有不性者'乎?朴書聰明睿知云云氣質雖淸粹, 却無知覺情意者也. 凡有知覺情意者, 乃心之能也. 蓋聰明睿知, 係是有知覺情意者, 則可謂之心, 而不可謂之氣質也明矣. 特以聖人之氣質, 淸明純粹, 而其心因此而能聰明睿知. 故《大學》序對氣稟不齊而言,《中庸章句》以生知之質言歟!朴書稟受處, 有通蔽開塞云云通蔽開塞, 正是發用以後事, 而今以之言於稟受處. 若於稟受處, 此性已隨氣而有通蔽開塞, 則所謂萬善一源之本然性, 何所安頓乎? 若曰單指則本然性云, 則吾未知旣蔽旣塞之性, 安能驀地幻形純善乎?【所引農巌說云云, 似是解'生之謂性'章'纔說性時便已不是性'之語. 而其以理固無不善一句, 劈頭立文者, 似以氣質性看做. 而其曰'纔賦於氣質, 便兼形氣'之云, 是病痛說. 然淺見恐未可以賦氣質兼形氣, 遽做病痛說也. 未知如何?】朴書程子論性相近云云程子論性相近, 犬牛人性, 何嘗言禀受各異之性耶? 蓋曰上知下愚犬牛人之氣質禀受各異, 故其性之發於運用者, 隨其氣質而各異, 此所謂氣質性云爾. 至於天命性性善, 通聖凡而言者, 則又以此理之在氣質者言, 而此所謂本然性云爾. 何嘗就隨氣禀異理之中, 單指本然性, 如此書之意乎?朴書五行各一其性云云'五行各一其性', 此以人物未生前, 造化發育之具言. 其曰'隨其氣質所禀'云者, 謂隨其金木水火土本然之氣質, 而各具一性, 此卽所謂理之分殊也, 非所以論有善惡偏全底人物氣質性也. 今引此以證隨氣稟理不同之說, 不亦異乎?朴書但論氣質性云云氣質性之從稟受處說, 吾亦何嘗謂之不然? 然其所禀受者, 氣質之不同也. 故性之發見者, 亦隨氣質而不同. 但不直謂原初禀得不同之理, 如此書之說也. 然則今此所爭, 不在於從禀受從發用之不同, 正在於禀異理禀異氣之不同也. 且詳其意, 以此理墮在氣質中者, 認做氣質之性. 蓋在天之理, 在人氣質之中, 初未嘗有偏全善惡之可言, 則此卽所謂本然性也. 至於隨其氣質, 而自爲偏全善惡之一性, 然後乃可謂氣質性也. 若不待自爲一性, 而直以才墮氣質者, 做氣質性, 則所謂本然性者, 只可言於在天之理, 而永無就人上說時矣. 기질지성이라는……하였습니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체가 있게 된 뒤에 기질지성이 있으니, 이를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形而後, 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2 〈위학(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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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을묘년(1915) 上艮齋先生 乙卯 어떤 사람의 장자(長子)가 벙어리 병을 앓고 상처(喪妻)하고 자식도 없는데, 형편상 아내를 다시 얻을 수 없어 그 부친이 차자(次子)의 자식으로 장자의 후사(後嗣)를 세우고자 하여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례증해(家禮增解)》 〈종법(宗法)〉조에 기재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가 말한 '장자가 폐질(廢疾)을 앓고 있더라도 차자에게 전중(傳重)해서는 안 된다'는 설【권1 22판에 보임】에 근거하여 후사를 세우라는 뜻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부친이 지자(支子)52)여서 전중할 것이 없다면 장자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그 부친이 비록 지자라 하더라도 그의 장자된 자가 다른 죄악이 없고 질병으로 인해 부친의 뒤를 이어 부친의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편안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집안의 대사와 관계된 것이니 자세히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장자가 폐질(廢疾)에 걸려 전중할 수 없을 때는 본래 가씨(賈氏 가공언(賈公彦))의 학설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장자는 비록 벙어리이지만 이미 인도(人道)가 있어 아내를 맞아 아들을 낳을 수 있는데 아들이 없는 것은 운명이니 어찌 후사를 세울 수 없는 경우이겠는가? 매옹(梅翁 성직(成稷))은 장자가 폐질(廢疾)에 걸려 아내를 맞았는데도 아들 없이 죽는다면 마땅히 그를 위해 후사를 이어주어야 한다고 논하였고, 또 신독재의 설을 인용하여 이는 바꿀 수 없는 의론이라고 하였다. 그대가 의심한 바 그 부친이 지자라서 장자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의론의 경우, 이는 고례(古禮)로 살펴보면, 대종(大宗)의 후사는 되어도 소종(小宗)의 후사는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예(禮)의 큰 강령이다. 후세에는 비록 방계(傍系)나 서계(庶系)이더라도 모두 그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데 진실로 바른 예(禮)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폐질에 걸린 자는 장차 부친을 잇는 종자(宗子)가 될 것이니 그 끊기는 대를 잇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 듯하다." 有人長子有瘖瘂之疾, 而喪妻無子, 勢不能再娶, 其父欲以次子之子立後而來問. 故小子據《家禮增》解宗法條所載, 愼獨齋長子病廢, 不可傳重於次子之說【見卷一卄二板】, 以立後之意答之. 而更思其父支子, 無重可傳, 不當爲之立後歟? 又思其父雖支子, 爲其長子者, 無他罪惡, 而以有疾不得繼後, 以奉其父之祀, 是豈天理人情之所安乎? 此係人家大事, 伏乞詳示.○ 先生答書曰: "長子廢疾不傳重, 固有賈氏說. 然今此子雖瘖瘂, 而旣有人道娶妻, 可以生子而無子, 命也, 惡可不立後者? 梅翁論長子廢疾, 娶婦無子死, 當爲之繼後, 又引愼齋說, 以爲不易之論矣. 所疑其父是支子, 不當爲長子立後之論, 此以古禮則有後大宗而不爲小宗後, 是爲禮之大經也. 後世則雖支庶, 皆爲之立後, 誠非禮之正者. 然今此廢疾者, 將爲繼禰之宗, 恐難禁其繼絶也." 지자(支子) 적자(嫡子)를 제외한 자식들과 첩에서 난 자식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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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부 사익에게 보냄 을유년(1945) 與吳翼夫士益 乙酉 밝은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여 조국이 광복을 맞았으니, 만백성이 똑같이 경하하는 마음을 어찌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큰 경사를 함께 하는 것은 피차간에 현재 상황이니, 길함과 흉함, 고통과 즐거움은 물을 것도 못 됩니다. 국가의 정책은 본디 책임자가 있으니, 산림의 서생은 다만 좋게 시작하고 좋게 끝마쳐서 태평시대가 길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문(斯文)과 관련된 일로서 여러 가지 계책도 이때에 미쳐서 시원하게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문하에서는 선사의 문함을 완전히 변론하지 못하였으니, 수고(手稿)를 간행하는 일과 난본(亂本)을 거두어 없애는 일을 마땅히 차례로 해야 할 것인데, 뜻을 같이 할 사람이 몇 사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이 일을 우러러 물을 수 있는 자는 형배(兄輩) 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아, 저 음성(陰城 오진영)은 내리 비춰주던 일월(日月)이 깨져 떨어졌으니, 장차 어디에 의지하고 우러르겠습니까? 진실로 가련합니다. 그가 무함한 말 가운데 이른바 '세상이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으니 헤아려 하라.'는 것은 어찌 가장 핵심적인 대목으로서 통탄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원수 오랑캐가 탐하고 포학하여 약소국을 삼키고 교만하고 패려궂어 강대국을 침략하는 것을 보고서는 비록 아녀자와 어린애라도 모두 반드시 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선사의 명철함으로 일찍이 망할 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앞날을 알 수 없다."고 했겠습니까? 선사가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왜가 망한다면 내일 죽더라도 절대 유한이 없으리라.[倭亡明日死,萬萬無所恨]"라고 하였고, 또 육검남(陸劔南)113)의 "왕의 군대가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하는 날에, 가제(家祭)를 지낼 적에 아버지께 고할 것을 잊지 말아라.[王師北定中原日,家祭無忘告乃翁]"는 시를 외우며 말하기를 "이는 먼저 내 마음을 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아시고 기다린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대개 "오늘 이후에 세상이 어찌 될 수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더욱더 그가 무함한 것임을 드러내어 분별할 것도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다행입니까. 우리들은 이미 만백성과 함께 경축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경축할 것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선사의 무함이 절로 명쾌하게 설욕되지 않겠습니까? 두 형의 고명한 견해는 어떠합니까? 회신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皓天悔禍,祖國興復,萬姓普慶,何可形喻? 大慶所同,彼此現境,休咎苦樂,不足問也.國家政策,自有任者,林下書生,但願善始克終,永奏太平而已.惟是事關斯文種種猷爲, 及此可以霈然行去,而在吾門,則辨誣之未盡,手稿之刊行,亂本之收洗,當次第有事,而未知同志者幾人.今日可以仰問此事者,非兄輩而誰也?噫! 彼陰照臨之日月破落矣, 將於何而依仰? 誠可哀也.蓋彼誣中所謂"世不可知,料量爲之",豈非最爲眼目而可痛者乎? 觀夫讐夷之貪虐而吞弱小、 驕悖而侵強大,則雖婦孺皆知其必亡,以先師之明,曾不知其亡,而曰"世不可知"也乎? 先師嘗有詩曰: "倭亡明日死,萬萬無所恨." 又誦陸劔南"王師北定中原日,家祭無忘告乃翁"之詩曰: "此先獲我心." 其知倭之必亡而待之者,豈不較然乎?蓋"當今日而後,世不可知"之云,益見其爲誣而無待乎辨矣,何幸何幸! 吾輩旣與萬姓同慶之外,別有可慶者,豈非師誣之自底快雪乎? 未知二兄雅見以爲如何? 幸回教之也. 육검남(陸劔南) 검남은 육유(陸游)의 호이다. 검남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로 검각(劒閣)의 남쪽 지역인데, 육유는 이곳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후에 자신의 시집을《검남시고(劍南詩稿)》라고 이름하였다. 시는 육유가 임종 때 남긴 〈시아(示兒)〉로 《검남시고》권85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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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에게 답함 무신년(1908) 答崔性武 戊申 고명(高明)이 유학(儒學)에 뜻을 두었으나 질병에 얽매어 각고하게 실행해 나가지 못하니 애석할 뿐입니다. 그러나 병중에도 또한 공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나금계(羅錦溪)의 문인에 아픈 사람이 있었는데, 금계가 묻기를 "병중에 공부가 어떠하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하자, 말하기를 "다만 아프지 않을 때와 같이 하는 것이 바로 공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병으로 인하여 조급하고 우려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조급하고 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결단코 병이 나아질 가망이 없고 갈수록 더욱더 심해집니다. 소설(小說)의 각병법(却病法)93)에 "늘 나보다 못한 자를 생각하며 스스로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다."라고 했고, "조물주가 생활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는데, 병을 만나 조금 한가하게 되었으니 도리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방법은 매우 묘합니다. 만약 마음에 일단의 번뇌가 생겨나서 쫓아 보내지 못한다면 다만 바람 쐬고 시를 읊조리며 몸을 살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장자(張子)는 "빈궁과 걱정 속에 처하게 함은 너를 옥(玉)으로 이루어 주려 함이다."94)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병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를 살필 수 없었을 것이니, 병이 어찌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기르는 것에 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평소 병을 달고 살면서도 크게 성취하는데 해가 되지 않았던 고인(古人)이 있었으니, 명나라의 석계도(席啟圖)와 우리나라의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가 이들입니다.고명은 병 때문에 조금도 기운이 꺾이지 말고 점점 동심인성(動心忍性)95)하는데 힘을 기울여 분수에 따라 공부를 해서 순조롭게 배우길 좋아하여 병을 잊는다면 덕이 진보하여 얼굴이 맑아지고 몸이 윤택해지는 날에, 저 두 아이[二豎子]96)가 어찌 그 재주를 멋대로 부릴 수 있겠습니까? 편지에 타고난 명이 허약함을 탄식하는 말이 있었는데 우울한 뜻이 있는 것 같기에 대략 이리 언급한 것이니 또한 깊이 헤아려 주길 바랍니다. 高明有志此學,而爲疾病所嬰,不能刻意做去,爲之慨惜.然病中亦未嘗無工夫.昔羅錦溪門人有病者,錦溪問: "病中工夫何如?" 對曰: "甚難." 曰: "只如不病時,便是工夫." 此謂不可因病而有煩躁憂慮之心也.蓋有煩躁憂慮之心,則決無痊差之望,愈往而愈甚.小說却病法曰: "常將不如我者,巧自寬鮮." 又曰: "造物勞我以生,遇病稍間,反生慶幸." 此二法甚妙.如遇心下一段煩惱,排遣不去,儘好風咏軆察也.張子有曰: "貧賤憂戚,庸玉汝成." 茍不至於病,不能省事,此何足爲治心養性之害乎? 故昔人有平生善病而不害大就者,明之席啟圖、我國之成牛溪是也.高明勿因病而少挫其氣,漸加動忍之力,而隨分施功,馴致嗜學而忘病,則德進睟面潤身之日,彼二竪子者,安能恣其伎倆耶? 來書有咏嘆賦命脆薄之語,似不免有悶鬱之意, 故聊此奉及,應亦深諒也. 각병법(却病法) 《지봉유설(芝峯類說)》 〈질병조〉를 참조하면, 병을 물리치는 8가지 방법[却病八法]을 말하고 있는데, 위에서 제시한 방법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방법이다. 빈궁과……함이다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보인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의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그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가 행하는 일마다 어긋나서 이루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의 성질을 굳게 참고 버티도록 하여, 그가 잘하지 못했던 일을 더욱 잘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라고 하였다. 두 아이[二豎子] 두 아이는 곧 병마(病魔)의 뜻이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이 병들었을 때, 두 아이가 고황(膏肓 : 심장과 격막의 사이)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의원을 데려왔으나 의원은 병이 고황에 들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좌전(左傳)》 成公 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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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 장열에게 보냄 병오년(1906) 與崔性武長烈 ○丙午 경초(勁草)88)와 한송(寒松)89)은 예로부터 만나기 드뭅니다. 오늘날 글을 읽는 선비들은 모욕하고 공갈하는 풍조에 쓰러지고, 포승과 총칼에 넘어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간혹 이미 유문(儒門)에 종사하고서 숨기고 꺼리면서 다시 움직이지 않거나 떨고 두려워하면서 후회하는 자가 있으며, 유문에 종사하고 싶지만 주저하면서 감히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명(高明)은 이런 상황에서 비록 머리 위에 철륜(鐵輪)90)이 내리친다고 하더라도 장차 떨치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전진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까?이천 선생(伊川先生)이 조정에서 사학(邪學)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마신(馬伸)이 정문(程門)에 의탁하여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이천이 말하기를 "시론이 바야흐로 달려져 그대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다."라고 하니, 마신이 대답하기를 "제가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91) 그 뜻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돈독합니까.제가 고명(高明)이 마신의 뜻으로 뜻을 삼고 전적으로 간옹(艮翁)의 문하에 의탁하여 배우길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는 것일 뿐이다."92)라고 하였습니다. 윤리를 말미암고 공맹의 가르침을 따라는 것이 정직함이고,. 오륜을 폐하고 공맹을 배반하는 것이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비록 산다고 해도 오히려 죽은 것이며, 정직한 삶을 살다가 죽는 것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산 것입니다. 이것으로 나아갈 바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정직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이 아니며 정직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사는 것이 아니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ㄸ한 한 번 다스려지는 운수가 돌아와서 도가 밝혀지고 교화가 행해져서 한 세상의 태평이 유자(儒者)의 손에서 나와서 저 패도(悖道)와 이유(異教)가 모두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고명께서는 천만 속히 도모하기 바랍니다. 勁草寒松,邃古罕覯.今讀書之士類,未免侮嚇恐喝之風所偃,縲絏刀銃之威所推,或有已從儒門而隱諱不復動者,惴惧以爲悔者,欲從儒門而趑趄不敢進者.不識高明於此,雖轉鐡輪於頂上,將奮不顧慮,而直前做去也否? 伊川先生被朝廷之攻以邪學也,馬公伸欲依程門學,伊川曰: "時論方異,恐貽子累." 對曰: "使伸得聞道死無憾." 此其志何等誠篤!鄙欲令高明以馬公之志爲志,專依艮翁之門而學焉,夫何故? 吾夫子曰: "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 倫常之道,鄒魯之教,是直也; 倫常是斁,鄒魯是背,是不直也.不直而生,雖生猶死; 爲直而死,雖死猶生.此可以知所往矣, 況爲直而未必死,不直而未必生乎? 不惟是也, 又安知不一治運回,道明教行,一世昇平出於儒者之手,而彼悖道異教, 皆條爾消滅也耶? 惟高明千萬亟圖之. 경초(勁草)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권63〈소우열전(蕭瑀列傳)〉 한송(寒松) 사혼은 그의 조카 사영운(謝靈運)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사혼의 풍운은 하늘의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고, 엄숙함은 차가운 바람을 맞서는 소나무를 같다.[混風韻爲高日望葵, 蕭如寒風振松]"라고 하였다. 《예문유취(藝文類聚)》권88 철륜(鐵輪) 쇠로 만든 수레바퀴로, 불교에서 지옥의 악귀(惡鬼)를 제압하는 무서운 형구(形具)이다. 또는 철륜발(鐵輪拔)의 준말로 수미(首尾)에 칼날이 달린 병기로 말 위에서 적을 쳐 죽이는 데 쓰인다. 이천선생(伊川先生)이……하였습니다 정자(程子)의 학파가 위학당(僞學黨)으로 몰려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마신은 자신과 연루될까 염려한 정이천(程伊川)과 정명도(程明道)의 고사(固辭)에도 불구하고 십여 차례 반복하여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면서 "저가 도를 듣게 된다면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경우이겠습니까." 하였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9 사람이……뿐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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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한규에게 답함 정축년(1937) 答趙受卿瀚奎 ○丁丑 근래에 일이 있어서 형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세 차례입니다. 《예기(禮記)》에서는 "예(禮)는 왕래하는 것을 숭상하니, 오기만 하고 가지 않으면 비례이고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 또한 비례이다"79)고 했습니다. 선사가 만년에 사방에서 편지로 질문하니 걸핏하면 글상자가 넘쳐서 뚜껑을 덮기도 어려웠습니다. 답장편지를 보낼 때면 크게 한숨을 쉬었지만 오히려 힘써서 대략 빠르게 답장하니 젊은 사람들도 고마워했습니다. 제가 형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도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각건대 영남에서는 일반적인 학규(學規)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선성(先聖)이 '예는 왕래를 숭상하고' 선사도 질문을 하면 반드시 답장했었던 도를 다시 바라지는 못하겠네요.올여름 초에 어쩌다 온 답장은 때가 지난 이후에 희망이 끊어진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그 놀라고 감격스러움은 옴에 따라 답장하는 일반적인 예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80) 치변(薙變)81)으로 인하여 몸을 숨기고 교제를 멈추어서 답장이 지체됨을 알았으니, 지난번 줄곧 망령되게 잘못 헤아려서 불공하게 생각한 것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변란에 대처하는 것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멀리 옛사람을 예로 들 것도 없이 단지 요즘 세상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본디 수립한 것이 있어서 편안히 앉아서 초연히 면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문 같은 경우에 최경존(崔敬存)은 참으로 최상이었으니, 난리에 임하여 굽히지 않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했고,82) 담양의 이복일(李復一)【이름은 광우(廣雨)이다. 내가 이절사전(李節士傳)을 썼다】과 진천(鎭川)의 정덕여(鄭德汝)【이름은 승원(升源)이다. 음성의 오진영이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썼다. 내가 그 후론(後論) 중의 '말에 의를 해치는 것이 있다'고 논하여 음성 오진영에게 절의를 배척한 것이라 지목 당하였다】는 또한 씩씩했으니, 목을 찔러 거의 죽음으로서, 저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고향의 안윤성(安允成)【이름은 재욱(在旭)이다. 내가 안의사시(安義士詩)를 썼다】은 더욱 기특합니다. 그간 숨어서 피하는 한 가지 일은 다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염려하여 거의 여러 해 동안 편지도 끊고 왕래도 않고야 마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선사가 절애고도에 숨는 것보다 깊숙한 것은 없으나,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이설(異說)이 시끄럽게 날뛰는 것을 염려하고, 유학이 쇠락하는 것을 한탄함에 이르러 또한 홀로 선을 지키는 것83) 외에 세도를 근심한 것이 심원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인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제가 식견이 밝고 행실이 고망84)한 형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여 묘한 생각으로 구할 만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헤아림에 도리에 어긋나는 실수를 하지 말고, 또한 즐겁지 않을까 두려워 화를 내지 않으며, 잘 안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또 두세 번 한두 개 문구의 타당치 못한 점을 개정하라는 것에 대하여 말단의 일이라 여기는데 실망했다고 하시니 제가 들은 것과는 다릅니다. 치평(治平)의 근본은 성의(誠意)에 있고, 성의의 방법은 스스로 부족한 것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작은 한 생각과 작은 한 이치와 용렬한 한마디 말에 대해서도 오히려 스스로 부족한 점을 구하는데, 하물며 문장이란 마음을 드러내고 이치를 나타내며 말의 정밀한 것이어서 더욱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천하에 심리(心理), 언문(言文), 자수(自修)의 공에 대해 실수가 있으면서도 세도(世道)를 붙잡은 자는 없습니다. 형께서 깊이 헤아려 비록 그 사람이 아니라 하고, 타당하지 않은 문장을 바르게 고치는 것을 말단의 일이라 여기며 그것을 실망했다고 말한다면, 또한 어찌 이치에 맞는 말이 되겠습니까? 형은 이 점에 대하여 만약 타당함과 타당하지 못함의 시비, 고침과 고치지 않음의 맞음과 그릇됨을 논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강론의 한 실마리가 되리니, 저는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덮어놓고 따를지 어길지를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근본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또 이미 대략적으로 판단하여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어찌 한가롭게 평상의 문구를 논함에 그치리오?" 라고 하였습니다. 논문은 제가 지난번 보낸 편지이고 제 평생의 뜻은 아닙니다. 오호라! '심상(尋常)'이라는 두 글자를 추론하여 말한다면 그 폐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선비가 의리를 엄하게 밝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교훈을 긴요하게 여겨도, '심상'이란 문구로 간주하여 수용한 것이 없음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천지가 뒤집어지고, 부모와 스승을 적으로 여기는 문자에 이르러서도 또한 심상한 문구로 간주하여 변란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의 나쁜 습관으로 이른바 유술을 떨쳐 일으키고 동문을 보합85)하려 한다면 결단코 이루어질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종기를 치료함에 있어서 피고름과 썩은 살을 씻어버린 후에야 살이 생겨나서 피부가 온전히 붙을 수 있습니다. 만약 심상한 일로 보아서 다 제거하지 않고 간혹 나의 피와 살이라 여겨 감싸고 안타까워한다면, 살이 돋고 피부가 완전히 붙는 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도 거의 드물 것입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頃因有事,致書于兄者,凡三度矣.禮曰: "禮尚往來,來而不往,非禮,往而不來,亦非禮." 先師晚年,四方書問,動輒溢篋,以艱於覆 答有時發書太息,猶必力疾略 謝及於少輩,而弟於兄三施,而一不見報,則意嶠之南 自有一般學規,有異乎? 先聖禮尚往來,先師有問,必答之道者,不復有望矣.今夏之初,何來巍覆,出於過時之後,斷望之餘,則其爲驚感,已非隨往隨復恒例之可比.又以知間緣薙變,隱身息交,以致稽報,則深悚夫向來妄揣繆度之爲不恭也.然吾儕之處此變也,何至如是? 不待遠據古人,只以并世言之,素有樹立,安坐超免.若吾同門之崔敬存,則固太上也,臨難不屈舍生取義,若潭陽之李復一【廣雨 ○弟爲作李節士傳】,鎮川之鄭德汝【升源.○陰作鄭節士傳.弟論其後論中,語有害義者,被排節一之目於陰.】亦可壯也,刺頸幾殊,使彼畏服,若鄙鄉之安允成【在旭○弟爲作安義士詩】,更可奇也.其間隱避一事,又可爲也.然不宜惴惴過慮,幾多年斷書闕禮而後已也.夫隱莫深於先師之絕島,而何嘗如是乎? 至於慮異說之喧騰,歎儒學之衰獘,則又以見自守獨善之外,爲世道憂者深遠,此正仁者之心也.然而以弟爲識明行高望,其有深慮妙算之可救者,則非惟爲擬人不倫之失,亦恐有不恱者之移怒,而不得爲智者之言也.但又以再三改正於一二文句之未穩,爲末事,而謂之失望,則異乎吾所聞.夫治平之本,在於誠意,誠意之方,在求自慊,一念之微,一理之細,一言之庸,猶求自慊.而況文者心之著,理之顯,言之精,而尤不可茍焉者乎.天下未有失於心理言文自修之功,而能扶世道者,則高明深妙,雖非其人,其以改正未穩之文爲末事,而謂之失望者,亦豈爲理到之言? 兄於此,若論穩與未穩之是非,改與不改之當否,則是固爲講論之一端,弟當虛心愼思以覆從違今也.不然,旣以改本爲善,而又槪斷之曰: "當此之時,何暇論尋常文句而止哉?" 論文固弟向日之書,而非弟平生之志也.鳴呼! '尋常'二字若推而言之,其獘有不可勝言者.今之士子,於嚴明義理,喫緊愛人之訓,旣不免看做尋常文句,而無所受用.至於目下有翻天地,賊父師之文字,亦且看做尋常文句,而不以爲變,由今之弊習,以求所謂振起儒術保合同門,則決無有成之理.譬如治瘇然,膿血朽肉消洗棄之,然後肌可生起,皮可完合.若視爲尋常,而不盡去,或認爲吾血肉,而護惜之,則不惟生起完合之無日,其不傷人也者 幾希矣,兄以爲如何? 예(禮)……비례이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편의 기록이다. 간연(間緣) 불교철학에서 사람과 사물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연(緣)이라 하여,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분류하였다. 등무간연은 직전의 원인으로, 불교의 찰나생멸(刹那生滅) 법칙에 의하면, 앞선 순간의 심적 활동은 그 다음 순간의 심적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편지에 답장하기 이전의 상황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치변(薙變) 1895년 을미년에 시행된 단발령을 말한다. 난리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의를 취했고 1917년 왜정(倭政)이 전주에 잠업소(蠶業所)를 설치한다는 명목으로 대대로 전수해 온 대지를 매도하라고 요청했으나, 일제에 토지를 내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자, 일제는 토지 수용령을 발동시켜 가옥을 모두 소각하였다. 최병심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사적인 단식 투쟁으로 이겨냈다. 만동묘(萬東廟) 철폐로 인한 정향(丁享) 문제로 항거하다가 왜경들에 의해 괴산경찰서에 10여 일 간 구속되기도 하였다.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춘추대의적(春秋大義的)인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힌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독선(獨善)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하였다. 고망(高望) 위고망중(位高望重)의 줄임말, 지위가 높고 명망이 크다는 뜻이다. 보합(保合)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사(彖辭)의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는 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동문의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크게 화합하게 됨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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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신사년(1941) 答趙子貞 辛巳 《의례》에는 "처가 죽은 경우 3년이 지난 뒤에 장가를 드는 것은 자식의 정을 소통시키기 위해서이다."74)고 하였고, 국전(國典)에는 "나이가 40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는 자는 1년이 지난 이후에는 다시 장가드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습니다. 근세에 예법이 해이해져서 3년이 지난 뒤에 다시 장가드는 자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예를 지킨다고 일컬어지는 선비의 경우도 겨우 1년이 지나면 다시 장가를 들고 있으며, 나이가 젊고 자식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와 국전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러나 상복의 기일이 다하기를 기다린 것이라면 맞는 것입니다만, 만약 이것까지 아울러 법도를 넘는다면 또한 이른바 "더불어 말하기 어렵다."75)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매산 선생(梅山先生 홍직필(洪直弼))은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어찌 상복을 벗지도 않았는데 재혼을 하여서 한 몸에 애락(哀樂)을 모으고 한 방안에 길흉(吉凶)을 뒤섞는단 말인가?"라 하였는데, 깊고 절실하여 경계할 만한 말씀입이다. 상복을 벗기 전에 첩을 얻는 것은 비록 재혼과는 예를 갖추는 여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애락을 모으고 길흉을 뒤섞는 점에서는 똑같으니, 선비로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스스로 돌아볼 때 천리와 인정에 편안치 못하고, 또한 요새 사람이 핑계거리를 삼고 선비는 더욱 기탄이 없게 되는 폐단을 열어주는 것이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禮》云: "妻亡者,三年而娶,所以達子之情." 國典: "年過四十而無子者,許期年後改娶." 近世禮法解弛,絕不見三年而改娶者.其稱士子之謹禮者,僅得朞年而娶,而年少有子者亦然.此已違於禮典.然其爲待服盡,則得矣.若并此而踰閑,則又所謂難與言者.梅山先生論此云: "曷可服未除而絃已續,萃哀樂於一身,混吉凶於一室乎?" 是爲深切可警.除服前卜姓,雖與續絃有備禮與否之異,其爲萃哀樂混吉凶則均矣,士子而可爲乎? 旣是自顧而未安於天理人情,又啟時人藉口士子益無忌憚之弊,絕不可爲也. 처가……위해서이다 《의례》 〈상복(喪服)〉에 "부친은 반드시 3년이 지난 뒤에야 아내를 들이니 자식의 뜻을 소통시키기 위해서이다.[父必三年然後娶, 達子之志也]"라고 하였다. 더불어……어렵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호향(互鄕) 사람은 더불어 말할 수가 없다.[互鄕難與言]"고 하였는데, 주자 집주(集註)에 "그 사람의 습성이 착하지 못하여 예를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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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신사년(1941) 答趙子貞 辛巳 그대가 어제 전하길, 어떤 사람이 내가 연전에 막내며느리의 질병을 위해서 멀리까지 의원과 약을 구한 것을 조롱하며 "어찌 자식으로 하여금 그 처의 병을 구하게 하지 않고, 60세가 다 된 나이에 유의(儒衣)와 유관(儒冠)을 하고서 풍설을 피하지 않고 도로를 분주히 뛰어다니는가?" 하였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일찍이 독서를 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논어》에도 "공자가 삼간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었다."73)고 하지 않았습니까. 질병은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이 삼갔던 것입니다. 이제 나이어린 며느리가 괴이한 여러 증세로 죽지 않으면 폐인이 되는 큰 병에 걸렸는데, 시아비가 된 자가 아무 일도 모르는 약관의 어린 자식에게 맡겨서 병을 구하게 하고, 늙었다는 핑계를 대고 스스로 편안하게 집에 있다고 한다면, 성인도 삼가셨다는 가르침을 어겨서 유자가 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어찌 일찍이 조금의 윤리가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의와 유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윤리를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윤리를 잊지 아니하고 며느리의 병을 구한 것에 대해 유의와 유관을 한 자의 허물을 삼고 있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습니까.옛날에 선사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자식인 된 자가 매번 부친이 병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마음에 두려워하면서 '내가 이번에 반드시 대고(大故)를 당할 것이다.'고 한다면, 의원과 약을 구함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절로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仁情)을 친절하고 정밀하게 말씀하신 것으로서 만세의 법이 될 만한 것입니다. 자식과 며느리의 아버지와 시아버지의 관계는 그 분수가 비록 낮고 가볍지만 그 윤리는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아! 하늘로부터 타고는 떳떳한 윤리는 천하가 똑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만약 나의 처지를 당하게 한다면 나도 그 역시 전날에 사람을 조소했던 것을 잊고서 내가 했던 것처럼 할 것이라는 것을 장담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윤리가 없는 것이니, 내 알 바가 아닙니다. 나는 조소를 해명하여 스스로 선한 자리에 처하고 싶은 것이 나이라 다만 저 사람의 말이 세상에 행해져서 모두가 윤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언급하는 것입니다. 賢弟昨傳: 有人嘲余年前爲末媳病遠求醫藥,而曰: "胡不使子救其妻病,而年將六旬儒衣儒冠,不避風雪,奔走道路爲?" 吾雖未知此人之曾讀書與否,然《論語》不云乎? "子之所愼, 齊、戰、疾." 疾者,人之死生係焉,故聖人愼之.今於妙齡婦女祟怪證惡非死即廢之大病, 爲其舅者任諸弱冠昧事之子,使救其病,引老自逸晏然在家,則非惟違悖聖人所愼之教而不得爲儒者,豈可謂曾有一分倫理者乎? 所貴乎儒衣冠者,以其明倫理也.彼乃以不忘倫理而救婦之病,爲儒衣冠之累,豈不異哉?昔承先師之教,有曰: "爲人子者,每當親癠,自悚于心,曰'我今番必遭大故矣',則其所以盡心於醫藥者,自無所不至." 此言說得天理人情親切精當,可以爲萬世法.子媳之於父舅,分雖卑輕,其倫理則豈有異乎? 噫! 倫理之秉彛,天下之所同.使彼若當我所遭,吾知其亦將忘前日嘲人,而行我所爲矣.如曰不然,則無倫理,非吾所知也.吾非欲鮮嘲而自處善地, 只恐彼說之行世,皆爲無倫之人, 故不得不言之. 공자가……질병이었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께서 삼간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었다.[子之所愼, 齊戰疾]"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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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109) 전공께 올리는 제문 祭靜齋田公文 정재 전공께서 돌아가신 지 3년이 되어 궤연은 거두려고 합니다. 시하생(侍下生) 김택술(金澤述)과 조제원(趙濟元)은 부음을 듣고 달려가 곡하기는 했지만 아직 한 편의 글도 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고하려던 글 가운데 상주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감히 의기(義起)의 예110)에 의지하여 대상(大祥)을 9일 앞둔 정축년(1937) 1월 30일 무술날에 대청마루 가운데 허위(虛位, 임시 영연)를 펼치고 술을 딸아 올리며 다음과 같이 고합니다.아, 공은 두텁고 선한 자질과 막힘없이 통하는 재능으로, 일찍부터 가정의 교육을 받아 그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될 만하였고 그 덕은 다른 사람을 감화시킬 만하였으니, 참으로 간재(艮齋) 선생님의 아들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평생의 가난이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는데,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옛사람의 의리를 독실히 실천하며 직접 농사를 짓느라 하루로 빈 날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은 선현들의 논저를 보고 밝혀낸 것은 없었고 오직 경험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것만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는 인정의 폐단111)을 말하면서, 세상의 학자들이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는 급선무는 놓아두고 문학을 통한 헛된 명성만 추구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근본을 우선시하고 문식(文飾)을 뒷일로 여겼던 성인의 뜻과 합치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공이 먹거리를 도모할 뿐 도(道)는 도모하지 않는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음흉한 변고가 발생하자 공은 눈을 밝게 뜨고 정신을 집중하여 선친에 대한 무함(誣陷)을 밝혀내고 잘못된 글을 바로잡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떠도는 말과 교묘한 언사로써 평소에 공을 의심해왔던 다른 사람을 속여 넘기기 위해 "아버지의 명성을 빌리고 의리에 기대어 문집발간을 다투며 사익을 도모한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사실을 날조하여 모함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심지어 "돈만 보고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흉측한 말이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비록 그렇지만 스스로 돌이켜 볼 때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공자에 대해 아첨한다고 하거나112) 맹자에 대해 잔인하다 하고, 정이(程頤)를 간사하다 하거나 주자의 학설을 위학(僞學)라고 하는 등의 말은 모두 근거가 없는 가운데 만들어낸 것인데, 이런 일은 예로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하는 말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그러나 제가 공을 위해 애석하게 여기는 점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백 번 단련한 쇠에 아직도 납 성분이 남아있고 반 이랑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연못에서 찌꺼기를 다 없애지 못하셨습니까. 음흉한 사람들을 성토하여 끊어낸 다음에도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만나 기미(羈縻 어루고 달램)하고,113) 선생의 유집을 발행ㆍ배포하고 다시 용동(龍洞)의 문집 간행114)에 발걸음을 하여 저들에게 핑계 거리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저희들은 아무 힘이 없이 무한한 모욕을 당하였고무한한 낭패를 겪었습니다. 옛날 곽공은 착한 사람을 좋아할 줄 알았지만 등용하지는 못했고 악한 사람을 미워할 줄을 알았지만 내쫓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말았는데,115) 공께서 하신 일이 불행하게도 곽공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리고는 임종 전해 3월에 지금까지 음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죄안(罪案)을 만들어서 서신으로 보내 영원히 관계를 끊으셨는데, 당시 말씀과 의리가 모두 엄중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자공(子貢)이 말한 "군자의 허물은 일식과 월식과 같아서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116)는 경우이며, 증자(曾子)가 말한 "바름을 얻은 뒤에 죽는다."117)라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공의 이 일은 공의 심사를 명백하게 드러낸 것이니 후세에 기리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궤연의 상생(象生)이 엄연히 계신 앞에서 이처럼 선사(先師)의 유명(遺命)을 어지럽히고 심지어 그 음해했던 사람들까지도 들어와 곡 하도록 허락해줄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저희들은 진실로 허락해준 사람이 무슨 의리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고, 뻔뻔하게 들어온 사람들은 진실로 천하에 수치(羞恥)라는 것이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아, 공께서 돌아가신 뒤로 사태가 더욱 변화되어 사당을 완공하던 날 진영(震泳)이 주헌(主獻)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소 엄격히 성토하던 이들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그와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대개 음풍(陰風)이 지나가면 모두 휩쓸려 따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만일 공께서 살아계셨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제가 외로운 신세임을 새삼 자각하게 되고 구원에서 공을 살려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옛날 어떤 사람이 노론의 무리는 날마다 많아지고 노론의 무리는 날마다 줄어드는 상황을 걱정하자, 우암(尤菴)이 말하기를 "옳고 그름을 따질 뿐 인원수가 많고 적고는 따지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오늘의 일에 대해서도 저는 그와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제가 뛰어난 인물이 되지 못하여 옛사람처럼 말을 하기도 전에 남들이 믿어서118) 공께서 평소 부탁하신 것에 부합하지 못하는 점이 한스럽기만 합니다. 연보의 후반부를 부탁하신 일과 가장(家狀)을 이어 완성하여 옥류(玉流)119)와 합하는 일은 모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또한 끝까지 사양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일 공께서 이렇게 될 줄을 미리 알았다면 마땅히 연보 초고를 가지고 와서 마무리하여 책을 만들고 가장 초고를 작성하여 수정해 주시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뜻밖에 변고가 발생하여 일이 크게 잘못되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금 전반부의 연보는 아마도 못된 무리들120)에게 들어갔을 것이고 가장의 초고를 작성하는 일은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두 가지 일을 완성하기는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 지난겨울 공의 아들 사견(士狷)마저 갑자기 운명하였으니 아마도 영령께서 큰 통한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이제 제가 사문(師門)의 큰일을 함께 논의할 사람이 없으니,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만난 외로운 배가 갈 곳이 없는 것처럼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니 더욱 애통합니다.다만 제가 선생님을 섬길 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처럼 했습니다. 제갈량(諸葛亮)이 "마음과 몸을 다 바쳐 나라에 보답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성공과 실패, 이로움과 불리함은 제가 알 바 아닙니다."121)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저의 심사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은 영령이 계시다면 불쌍히 여기셔서 때때로 오르내리며 도와주십시오. 아, 슬픕니다. 흠향하시옵소서! 維靜齋田公, 旣沒之三年, 象生之設將撤矣。 侍生金澤述、趙濟元雖己聞訃趨哭, 尙未一文之告者, 以告文中有主喪者惡聞語也。 乃敢竊附義起之禮, 以大祥前九日, 歲次丁丑元月三十日戊戌, 設虛位于堂中, 遙斟而告之, 曰: 嗚呼! 惟公以厚善之質、疏通之才, 早承家庭之敎, 學足以師人, 德足以化人, 洵不愧爲艮翁先生肖子矣。 惟其平生貧窮, 遭人難堪, 而古人非力不食之義是敦, 身親稼穡, 日不暇給, 故無所見於論著而發明者, 惟其所經歷而自得者在此。 故每說人情無恒産無恒心之弊, 而譏世之學者不省事育之急務, 徒求文學之虛名, 此正聖人先本後文之意也。 而不知者或有以此而疑公爲謀食而不謀道矣。 及夫陰變之出, 明目張膽, 辨親誣而正稿亂也。 則彼以遊辭巧說欲欺平日之疑公者, 乃謂假父託義而修爭刊營私之嫌, 構捏傾陷, 無所不至, 至有見金不見父之凶說而極矣。 嗚呼! 尙忍言哉! 雖然, 苟自反而無愧焉, 則孔諂孟忍、程奸朱僞, 一切無中生有, 從古而然。 彼所云云, 亦何傷哉! 若乃余之爲公痛者則有之, 夫何百鍊之金尙帶鉛性, 半畝之塘未盡纖滓? 討絶陰人, 而尙羈縻以面書; 發布遺書, 而復涉跡於龍刋, 使彼邊藉口, 吾黨無力以致無限辱累, 無限狼狽也。 昔郭公以善善而不能擧, 惡惡而不能去, 亡其國。 嗟公之事, 不幸近之, 乃於臨終前三月數陰前後罪案, 投之書而永絶之, 辭義俱嚴, 破其奸膽。 此實子貢所謂日月之蝕, 而更也曾子所謂得正而斃焉者, 可以暴白其心事, 而有辭於後世也。 詎意象生儼臨之前, 視此爲亂命, 而至於許陰人之入哭, 固不知許之者是何義理, 而冒入者眞不知天下有羞恥事也。 嗚呼! 自公之歿, 事局益變, 華祠之日, 震爲主獻, 而平日所謂嚴討者, 莫敢誰何而與之同事。 蓋陰風所過, 莫不靡然從之, 使公而在者, 豈至於是? 益覺此身之孤, 而思切九原之作也。 雖然昔有人憂少黨日衆, 老黨日寡者。 尤翁曰: 但問是非, 勿問衆寡。 今日之事, 吾亦云然, 但恨吾之樹立不能卓然, 而使人信在言前如古之人, 而有以副公平日之託也。 至於年譜下半之囑, 以續成家狀之與玉流合撰, 俱是不敢當, 而亦難終辭者。 如知公之至此, 宜其奉來譜草, 卒役成編, 起草家狀, 幷俟裁鑑, 而變出不意, 事歸大謬, 尙何言哉! 今上半之譜, 想入陰乎, 狀草之起亦無頭緖, 二事之成, 戛戛乎其難。 且於客冬, 公之肖子士狷亦遽不淑, 竊想尊靈己所痛恨。 而凡此身所與共議師門大事者, 今焉無人, 前頭茫茫, 若大海之遇風孤棹, 靡所止屆, 重可痛也。 但竊以爲生之事師如臣之事君。 諸葛公之言曰: 鞠躬盡瘁, 死而後已, 成敗利鈍, 非所逆覩。 此, 吾今日心事也。 伏惟不昩者存, 庶加哀憐, 而時降陰騭焉。 嗚呼哀哉! 尙饗! 정재(靜齋) 전우의 세째 아들 전화구(田華九 1866~1935)의 호이다. 의기(義起)의 예 예문(禮文)에는 없지만 의리에 입각해서 행하는 예법을 말한다. 《예기》〈예운(禮運)〉의 "선왕의 예법에는 그러한 예가 없을지라도, 의리에 입각해서 적절하면 새로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禮雖先王未之有, 可以義起也。]"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항산(恒産)……폐단 《맹자》〈양혜왕(梁惠王)에 "저 하민들은 일정한 산업이 없으면 따라서 마음이 항상되지 못하고, 항상된 마음이 본심이 없어지면 방탕편벽과 간사일탈을 안 하는 것이 없게 된다.[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僻邪侈無不爲已。]"라고 하였다. 공자에……하거나 《논어》 〈팔일(八佾)〉에 "내가 예를 극진히 해서 임금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여긴다.[事君盡禮, 人以爲諂也。]"고 공자가 말한 대목이 나온다. 편지를……기미하고 정재 전화구(靜齋田華九)가 오진영(吳震泳)을 만나고 편지를 보내자, 오진영은 이것을 핑계로 전화구와 화해하였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다. 《후창집》권5 〈書與靜齋田文 甲戌〉 용동(龍洞)의 문집 간행 전우의 장손 전일효(田鎰孝)가 손녀사위 이인구(李仁榘)와 함께 논산 용동(龍洞)의 봉양정사(鳳陽精舍)에 《간재집》의 간행소를 1925년에 설치하여 1927년에 목판 간행을 완료하였다. 옛날……말았는데 제 환공(齊桓公)이 곽공의 나라에 가서 부로(父老)에게 곽공이 망한 이유를 묻자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환공이 그 말을 듣고 "그렇다면 현군(賢君)인데 어찌하여 망하는 데 이르렀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곽공은 착한 사람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를 등용하지는 못했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기는 했지만 그를 내쫓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했습니다."라고 하였다. 《春秋大全》 군자의……우러러본다 《논어》〈자장(子張)〉에 "군자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다. 허물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고,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人皆見之, 更也人皆仰之。]"라고 하였다. 바름을……죽는다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할 때에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증자의 아들 증원(曾元), 증신(曾申) 및 동자(童子)가 옆에서 모시고 있었다. 동자가 말하기를, "대자리가 너무 화려합니다. 대부의 대자리입니까?" 하니, 증자가 듣고서 말하기를, "그렇구나. 이것은 계손(季孫)이 하사한 대자리이다. 내가 미처 바꾸지 못했구나. 원아, 이 대자리를 바꾸어라." 하였다. 증원이 말하기를, "지금은 병이 너무 위독해서 자리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날이 밝으면 바꾸겠습니다." 하니, 증자가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저 동자만도 못하구나. 군자는 사람 사랑하기를 덕(德)으로써 하고, 소인[細人]은 사람 사랑하기를 고식(姑息)으로써 한다. 내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내가 바름을 얻고서 죽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이다.[吾得正而斃焉, 斯已矣。]"라고 하였다. 그 말에 따라 위독한 증자를 부축해 들고서 깔고 있던 대자리를 바꾸었는데, 바꾼 자리에 미처 바로 눕히기도 전에 증자가 세상을 떠났다. 《禮記 檀弓上》 옛사람처럼……믿어서 공자께서 "한 마디로 송사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유(由)일 것이다. 자로는 약속을 묵혀두는 일이 없었다.[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子路, 無宿諾。]"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윤씨(尹氏)가 말하기를 "한 마디 말로 옥사를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임이 말하기 이전에 있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그를 믿었기 때문이었다.[一言而折獄者, 信在言前, 人自信之故也。]"라고 하였다. 《論語 顔淵》 옥류(玉流)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글을 옥처럼 맑고 시원한 냇물에 비유하며 자신의 글 솜씨를 겸양한 것으로 보인다. 못된 무리들 오진영(吳震泳)과 류영선(柳永善)을 가리킨다. 《후창집》권14 〈간재선생년보편집 범례〉 마음과……아닙니다 제갈량(諸葛亮)의〈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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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숙 정재108) 공께 올리는 제문 祭族叔精齋公文 유세차 정묘년(1927, 대한민국9) 8월 계사삭(癸巳朔) 20일 임자날에, 족질 김택술은 정재(精齋) 김공의 영전에 삼가 곡하며 아룁니다.자애와 양찰(諒察)의 자질 타고나서 慈諒稟質,언행이 성실하고 신중했으며 謹愼云爲,효성과 우애로 정법을 삼고 孝友是政,근로와 검소를 기틀로 삼으셨네 勤儉作基.누대의 가업을 다시에 일으키어 中創世業,종친의 규범을 완비하여 세우고 完立宗規,의로운 길을 가르쳐 인도하며 義方有敎,높은 스승께 귀의하게 하셨네. 俾歸宗師.온 가문이 우러러 의지하고 門有依仰,향리 사람들 모범이라 칭송하는데 鄕誦模楷,아아 우리 족숙님 嗚呼吾公,어찌 이리 급하게 가십니까? 胡遽至此?저는 가문 안의 어린이로 余在門少,여러 해 사랑을 입었으니 見愛多年.공의 아들과 조카들이 公子若姪,정의가 마치 친 형제 같아 情同親昆,때때로 한 책상 아래 절하고 時一拜床,덕음에 취하고 의론에 배불렀습니다. 醉德飽論,백년토록 장수하심을 기대하고 期公百曆,꽃나무의 긴 봄을 바랬는데 花樹長春,어찌 이리고 급히 가십니까 胡遽止斯,이제 예순하고 셋이신데. 六旬有三.제가 공께 병 문안 드린 것은 余候公疾,석류 익는 지난 6월이었는데 曩在榴炎,돌아가려는 저를 붙잡고 謂余勿歸,다시 보기는 어렵겠다 하면서 後會難諶,복과 선에는 이치가 있으니 福善有理,제가 공의 마음에 위로가 된다 하셨는데, 我慰公心.이제 이 말씀을 끝으로 已矣此言,영원히 고금으로 갈리었습니다. 永隔古今.우뚝우뚝 솟은 봉래산 蓬山嵂嵂,그리는 마음 답답하고 有懷其鬱,봉래 곁의 양양한 바다 蓬海洋洋,바라며 눈물 그치지 못하며 有淚其汪,한 잔의 술 올리고 一酌之奠,열 줄의 슬픈 말들로 十行之辭,제 속의 정 풀어 놓사오니 洩我衷情,존엄하신 혼령 강림하여 살피소서. 尊靈鑑玆.흠향하소서! 尙饗! 維歲次丁卯八月癸巳朔二十日壬子, 族姪澤述謹哭告于精齋金公之靈, 曰: 慈諒稟質, 謹愼云爲, 孝友是政, 勤儉作基, 中創世業, 完立宗規, 義方有敎, 俾歸宗師, 門有依仰, 鄕誦模楷。 嗚呼吾公胡遽至此? 余在門少, 見愛多年。 公子若姪, 情同親昆, 時一拜床, 醉德飽論, 期公百曆, 花樹長春, 胡遽止斯? 六旬有三, 余候公疾, 曩在榴炎, 謂余勿歸, 後會難諶, 福善有理, 我慰公心, 已矣此言, 永隔古今。 蓬山嵂嵂, 有懷其鬱, 蓬海洋洋, 有淚其汪, 一酌之奠, 十行之辭, 洩我衷情。 尊靈鑑玆, 尙饗! 정재 김낙영(金洛榮 1865.3.27.~1926.6.26.)의 호이며, 자는 경우(敬禹)이며 김택술의 족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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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 조(趙)공께 올리는 제문 2 【간재 선생님을 대신하여 지음. 기미년(1919)】 又 【代艮齋先生作 己未】 아아, 우리 주백이여 嗚呼! 周伯,몸가짐이 단정하고 침착하였으며 持身端默,마음을 씀에는 간절하고 수수하였네. 用心謹拙,의를 중시하고 재물을 경시했으며 重義輕財,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여색을 멀리하였네. 親賢遠色,이처럼 어질고 선했으니 以若仁善,백세의 장수 누려야 하는데 百曆是獲,어찌하여 하루아침에 云胡一曙,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奄至此極?지난날 그대는 나를 좋아하였으니 昔君好我,그 세월이 얼마였던가. 幾何日月,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흠모하였으니 一意慕向,거짓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었지. 匪浮伊實,바다 가운데 섬으로 그대를 보내어 送子入海,나의 집을 짓고 나니 于我樹屋,그대는 장차 가족을 데리고 와 謂將撤家,조석을 함께 하리라 하였는데106) 同我朝夕,끝내 운명에 내몰려 大化之驅,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구나. 事歸冥漠.그대는 진정 한스러워 할 터인데 君固可恨,이는 실로 내가 인연이 박해서라네. 余實緣薄.옛일을 슬퍼하고 지금을 서운해하며 悼舊悵今,이 늙은이는 눈물만 주먹으로 훔치네. 老淚盈掬.하나 있는 그대 아들 학문을 익혀 一哥有學,그 독실하고 순박한 자질 가상하니, 嘉厥敦樸,그의 장래를 헤아려 보면 儀圖其來,시례(詩禮)의 학문을 부지런히 익혀서, 詩禮之勖.북풍은 매우 차고 北風其凉,눈은 펄펄 내리는데 雱雱雨雪,함께 힘써 격려하며 庶共勉勵,만절(晩節)을 지키게 할 것이네.107) 俾葆晩節,이것으로 보답하여 用此爲報,부탁한 일을 저버리지 않으려니 不負相託,그대 밝으신 영령은 靈其有赫,나의 이 마음을 살펴주오. 鑑此衷曲! 嗚呼周伯, 持身端默, 用心謹拙, 重義輕財, 親賢遠色, 以若仁善, 百曆是獲, 云胡一曙, 奄至此極? 昔君好我, 幾何日月, 一意慕向, 匪浮伊實, 送子入海, 于我樹屋, 謂將撤家, 同我朝夕, 大化之驅, 事歸冥漠, 君固可恨, 余實緣薄, 悼舊悵今, 老淚盈掬, 一哥有學, 嘉厥敦樸, 儀圖其來, 詩禮之勖, 北風其凉, 雱雱雨雪, 庶共勉勵, 俾葆晩節, 用此爲報, 不負相託, 靈其有赫, 鑑此衷曲! 바다 가운데……하였는데 전우가 섬으로 들어가 산 시기는 1908~1922년 사이로, 군산 신시도와 부안 상왕등도ㆍ계화도 등지에서 완고당(頑蠱堂)ㆍ양서실(陽書室)ㆍ계화재(繼華齋) 등을 세워 거주하며 강학하였다. 북풍은……할 것이네 나라가 망한 혼란 속에 격려하며 동행할 것임을 말한다. 《시경》〈북풍(北風)〉은 나라가 망하는 혼란 속의 정경을 읊은 시인데, "북풍은 매우 차고, 눈은 펄펄 내리는데, 내 아끼는 좋은 이와 손잡고 함께 가리라.[北風其涼, 雨雪其雱, 惠而好我, 攜手同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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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99) 조공께 올리는 제문 1 祭湖隱趙公文 유세차 신유년(1921) 5월 경자삭(庚子朔) 2일 신축날에 처조카 김택술(金澤述)은 삼가 소박한 제수를 갖추어 호은 조공의 영연에 곡하며 고합니다.아아, 우리 조공께서 嗚呼我公,어찌 이렇게 되셨단 말입니까. 胡至斯極.훤칠하고 단단했으며 碩健充完,의젓하고 말 수가 적었고, 端重淵默,관대하고 어진 자세로 세상일에 임하였고 及物寬仁,신실하고 정직하게 사람들을 대하였습니다. 與人信直,공의 덕(德)으로 볼 때나 관상으로 볼 때나 以德以相,마땅히 백세까지 장수하여야 하는데 宜享百曆,어찌 갑자기 이렇게 되어서 胡遽至斯,저를 이토록 통곡하게 하신단 말입니까. 俾我痛盡,예전에 저의 선친께서는 昔我先君,공과 매우 친밀하시어 曁公膠漆,의리로는 사돈관계이지만 誼雖姻親,마음은 형제와 같았습니다. 情均骨肉,두 분은 덕을 서로 믿어서 惟德相孚,평생을 하루처럼 변함없었습니다. 生平一日.지난 갑오년100)에는 維歲靑馬,동학의 무리가 창궐하여 東徒猖獗,삼호(三湖)로 집을 옮기며 胥宅三湖,떨어지지 말자고 약속하였는데, 誓不相失,집을 다 짓기 전에 屋完未就,동학란은 끝났지만 東亂告息,무신년(1908)에 소란이 일자101) 黃猿擾攘,공께서는 선친과 상의하여 公謀先君,잠시 호남의 집에 옮겨 지내다가 暫僑湖屋,바로 되돌아와 이웃에 살기로 하셨습니다. 遄歸接隣.그런데 제가 복이 없어서 小子福薄,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風樹遽至,공께서 달려와 통곡하였는데 公奔痛哭,마치 동기(同氣)를 잃으신 듯하셨습니다. 若喪同氣.제가 집안일 처리에 어두워 昧我理家,선대의 가업이 무너지고 靑氈荒墜,수레바퀴 자국 속의 다급한 물고기가 되었는데 轍魚之急,공께서 물을 부어주듯 때때로 도와주셨습니다. 或捐斗水,봉산(蓬山)의 북쪽 維蓬之北,월호(月湖)의 물가에 月湖之涘,제가 옮겨와 살게 된 것은 余來棲息,공께서 인도해 준 것으로 寔公攸指,당시 공께서 직접 와서 公親命駕,집과 논밭을 구하셨습니다. 謀厥田里.강상(綱常)이 무너지고 풍속이 고약하여 綱絶俗惡,대란(大亂)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大亂近止,공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너는 曰吾與爾,여기에서 살기로 길이 맹세하자 하더니 託玆永矢,어찌 차마 저를 버리고 떠나가며 胡忍棄余,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曾不少俟.아아, 嗚呼!세상의 모든 일은 世間萬事,하늘의 뜬 구름과 같다 太空浮雲,공께서 하신 임종의 이 말씀 臨終公言,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豈不信然.학궁(學宮) 남촌에서 은름(恩廩)을 받으며102) 南泮恩廩,얼마나 열심히 공부하셨습니까. 講誦何勤,급제하여 벼슬하기를 金紫銀靑,마치 티끌 줍는 것처럼 여기셨다니 擬拾芥塵,젊었을 때 이러했던 공의 일에 대해 少日公業,저는 충분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亦足聽聞.어머니 돌아가셔서 북당이 비게 되었으니 北堂旣虛,관직에 오른들 어찌 즐거울 수 있으셨겠습니까?103) 毛檄奚欣.고향으로 돌아오시니 歸來鄕里,집도 있고 전답도 있었고, 有廬有田,전답을 직접 가꾸시니 我田我服,수확한 곡식이 천 상자나 되었습니다.104) 我箱維千.재물이 있으면 기뻐할 수 있다고 有財爲悅,맹자께서 말씀하셨는데105) 鄒聖有言,선인의 일을 잘 마무리 못 했는데 先事未恔,세월이 기다려주지 않으니, 歲莫我延,가슴 아픈 인생사에 傷哉人事,눈물만 주룩주룩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有淚漣漣.아, 큰 현인을 닮으셨으니 於碩賢似,진실로 선인(善人)이십니다. 允矣善人,선대의 사업을 잘 계승하여 克繼克述,집안의 전통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舊家命新,제가 그 원인을 찾아보니 我溯其自,시례(詩禮)의 공부가 돈독한 데 있습니다. 詩禮之敦.저 어둡고 사나운 사람들은 彼昏且狂,부귀와 영화를 서로 전하려고 富榮相傳,떳떳한 윤리를 원수로 여기고 仇賊彛倫,집안에 피비린내를 내기도 하는데, 戈戟墻垣.반대로 공께서는 豈若吾公,바른길을 소중히 여기고 義方是珍,덕을 기르고 인을 쌓으며 種德累仁,집안을 번창시켜서 用昌厥門,공은 큰 성과를 이루셨으니 公得其大,영원히 기리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有辭永年.아, 제가 은혜를 갚을 곳은 嗟余酬恩,공의 후손들에게 있습니다. 在公後承,크게는 덕업에서 鉅而德業,작게는 생계 꾸리는 데까지 細逮營生,저의 지혜가 닿는 모두에 智慮攸及,감히 정성을 다하겠사오니 敢不責誠,저 밝은 해를 우러러보며 聸彼皦日,그 밝음에 맹세합니다. 有如其明.하늘에 계신 공의 혼령 公靈在天,저의 충정을 굽어 살피소서. 俯鑑衷情.아, 애통합니다. 嗚呼哀哉!흠향하소서! 尙饗! 維歲次辛酉五月庚子朔二日辛丑, 婦姪金澤述謹供菲需, 哭奠于湖隱趙公之靈筵, 曰: 嗚呼我公, 胡至斯極, 碩健充完, 端重淵默, 及物寬仁, 與人信直, 以德以相, 宜享百曆, 胡遽至斯, 俾我痛盡, 昔我先君, 曁公膠漆, 誼雖姻親, 情均骨肉, 惟德相孚, 生平一日, 維歲靑馬, 東徒猖獗, 胥宅三湖, 誓不相失, 屋完未就, 東亂告息, 黃猿擾攘, 公謀先君, 暫僑湖屋, 遄歸接隣, 小子福薄, 風樹遽至, 公奔痛哭, 若喪同氣, 昧我理家, 靑氈荒墜, 轍魚之急, 或捐斗水, 維蓬之北, 月湖之涘, 余來棲息, 寔公攸指, 公親命駕, 謀厥田里, 綱絶俗惡, 大亂近止, 曰吾與爾, 託玆永矢, 胡忍棄余, 曾不少俟, 嗚呼! 世間萬事, 太空浮雲, 臨終公言, 豈不信然, 南泮恩廩, 講誦何勤, 金紫銀靑, 擬拾芥塵, 少日公業, 亦足聽聞, 北堂旣虛, 毛檄奚欣, 歸來鄕里, 有廬有田, 我田我服, 我箱維千, 有財爲悅, 鄒聖有言, 先事未恔, 歲莫我延, 傷哉人事, 有淚漣漣, 於碩賢似, 允矣善人, 克繼克述, 舊家命新, 我溯其自, 詩禮之敦, 彼昏且狂, 富榮相傳, 仇賊彛倫, 戈戟墻垣, 豈若吾公, 義方是珍, 種德累仁, 用昌厥門, 公得其大, 有辭永年, 嗟余酬恩, 在公後承, 鉅而德業, 細逮營生, 智慮攸及, 敢不責誠, 聸彼皦日, 有如其明, 公靈在天, 俯鑑衷情。 嗚呼哀哉! 尙饗! 호은 조기용(趙琪鏞)의 호인데, 자는 주백(周伯)이다. 전우의 제자이며, 김낙진(金洛進, 김택술의 부친)의 인척이자 벗이었다. 갑오년 원문은 '청마(靑馬)'인데 갑오년(甲午年)을 뜻한다. 갑(甲)이 오행(五行)에서 목(木)에 해당하고 목은 청색을 상징하며, 오(午)는 말을 상징한다. 무신년……일자 정미년(1907) 일제에 의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무신년에 전국적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학궁(學宮)……받으며 원문 '남반은름(南泮恩廩)'에서 남반(南泮)은 성균관 남쪽의 반촌(泮村)을 말하며, 은름(恩廩)은 성균관의 재실이 부족하면 학사들이 반촌에 묵기도 하였고 그 비용을 양현고(養賢庫)에서 지급하였던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조기용(趙琪鏞)이 성균관에 입학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관직에……있으셨겠습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므로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할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모격(毛檄)'은 '모의(毛義)를 벼슬에 임명하는 격문'이라는 뜻이다. 모의는 후한(後漢)의 가난한 효자로 유명한데, 작은 현령 벼슬의 임명통지를 받고 매우 기뻐하더니 노친이 별세하자 곧 사직하였다 한다.《後漢書 卷39 劉平列傳》 수확한……되었습니다 소출이 많았다는 말이다. 《시경》〈보전(甫田)〉에 "천 개의 창고를 구하고 만 개의 상자를 구하노니, 기장과 피와 벼와 조가 농부의 복이라.[乃求千斯倉, 乃求萬斯箱, 黍稷稻粱, 農夫之慶。]"라고 하였다. 재물이……말씀하셨는데 《맹자》〈공손추(公孫丑)〉에 "법 제도상 할 수 없으면 마음이 기뻐할 수 없고, 재력이 없으면 마음이 기뻐할 수 없다. 할 수 있고 재력이 있으면 옛사람들이 모두 사용했으니, 내 어찌 홀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不得, 不可以爲悅, 無財, 不可以爲悅. 得之爲有財, 古之人皆用之, 吾何爲獨不然。]"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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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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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당90) 박공께 올리는 제문 【기미년(1919)】 祭中堂朴公文【己未】 아아, 우리 박공은 嗚呼惟公,유림들 가운데 빼어난 분이셨습니다. 吾林翹特,악은 병처럼 미워하고 疾惡如厲,선은 마치 자신이 한 듯 좋아했으며91) 善若己出,학문이 깊고 문사에도 통달하여 學邃辭達,사문(斯文)의 우익이 되셨고 斯文羽翼,일의 실정을 잘 파악하여 綜覈事情,정술(政術)에도 뛰어나셨습니다. 可達政術,공의 덕을 살펴보고 이치를 헤아려 보면 諒德揆理.진실로 그에 합당한 복을 받아야 하는데 允膺厥福,어찌하여 한평생 云胡生平,온갖 고난을 겪으셨단 말입니까. 備經艱厄,원안(袁安)처럼 눈 속의 추위를 맛보며92) 酷寒袁雪,범중엄(范仲淹)처럼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견디고93) 永日范粥,봉산(蓬山)의 바람과 영주(瀛州)의 물을 건너며 蓬風瀛水,구름과 부평초처럼 떠돌며 사셨습니다. 雲蹤萍跡.하늘의 복록이 이처럼 얇았으면 旣薄其祿,수명은 마땅히 두터웠어야 하건만 壽宜不嗇,이제 중년인 55세94)에 中身有五,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遽見折輻.푸르고 푸른 저 하늘이여 蒼蒼者天,누가 일을 주관하는 것입니까. 孰秉其軸,복록과 재앙을 잘못 내린 것이 祥殃錯降,어제 오늘이 아니었으니 匪今伊昔,원헌(原憲)은 굶주리고 양호(陽虎)는 배불렀으며, 餒憲飽虎,안연(顏淵)은 단명하고 도척(盜跖)은 장수하였습니다. 短淵修蹠.기나긴 천고의 세월 동안 悠悠千古,지사(志士)들이 눈물을 흘렸으니 志士涕落,어찌 유독 공에게만 胡獨於公,애석하다 탄식하겠습니까. 咄咄嗟惜.도리어 한 마디 말로 抑有一言,명부의 공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慰公冥漠,살진 고기 먹고 두꺼운 가죽옷 입으며, 肥豢厚貉,붉은 인끈 차고 흰머리로 장수 누린 사람은 紫綬黃髮,무성한 풀처럼 많고 많아서 職職芸芸,그 수를 셀 수도 없는데 厥麗不億,황천에 묻힌 뼈가 다 썩어 가도록 骨朽黃壤,이름도 없이 긴 밤처럼 적막합니다. 長夜寂寞.그런데 우리 박공께서는 豈若吾公,돌아가신 뒤에 명성이 혁혁하니 身後名赫,하늘이 정해준 뜻을 여기서 압니다 天定乃諶,누가 성공했고 누가 실패했는지. 孰得孰失,아, 못난 저를 嗚呼無狀,다행히 공께서는 알아봐 주시어 幸爲公識,대단히 많은 은덕을 내리셨고 蒙賜孔厚,분에 넘치게 인정해주셨습니다. 許己亦切,사람들은 공께서 거칠다 의심했지만 人疑公麤,저는 희고 곧은 분임을 믿었으며 我信白直,사람들은 공의 문식(文飾)을 좋아했지만 人悅公文,저는 공께서 꾸미지 않음을 좋아했습니다. 我喜不飾.제가 집안일에 얽매였을 때 我縶家務,공께서 자식의 직분이라 말씀해 주었고, 公曰子職,저의 주장을 사람들이 그르다고 할 때 我論人否,공께서는 때때로 수긍하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公或肯諾,공께서 낭주(浪州, 전북 부안)에 계실 때 公在浪州,제가 서쪽의 공을 뵙고자 갈망하는 참이면 我想西渴,공께서는 이미 동쪽으로 건너와서 公旣于東,저에게 귀한 백붕(百朋)을 주셨습니다.95) 百朋我錫.공께서 서쪽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見公還西,제 마음 아쉽고 서글펐는데, 我心戚戚,제가 이제 공의 마을에 찾아오니 我來公鄕,공께서는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公入眞宅,사람의 일은 이처럼 어긋나기 십상이니 人事參差,그것을 누가 헤아려 알겠습니까. 疇能測度.지난 해 제 아들 관례 날은 客歲兒冠,공께서 길일을 점찍어 주셨습니다. 筮公維吉,그 때 날씨가 차갑고 于時天沍,비와 눈이 오락가락하였는데, 載雨載雪,공께서는 당신 말을 믿으라며 公謂不信그냥 가자 하셨습니다.96) 若車無軏,진창길을 출발하여 泥濘戒行,칠흑 같은 밤에 고생하며 왔는데 顚倒夜黑,다음날은 날씨가 맑아지고 翌朝淸佳,술과 안주가 맛있고 깔끔하였습니다. 酒旨薦潔.관례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 禮成告歸,다시 만날 날을 손꼽았는데, 後會指日,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때의 작별이 孰謂此別,저승과 이승으로 영원히 갈라질 줄을. 幽明永隔.이산(梨山)97)의 가을 밤에 梨山秋夜,촛불 아래 정담 나누었고, 話心剪燭,두승산(斗升山)98)에 맑은 바람 불 때 斗嶽淸風,주고받은 시가 편지에 넘쳐났습니다. 唱和溢牘.이번 생에 이러한 즐거움 此生此樂,다시 이을 날 없으니 無日再續,예와 지금을 생각하면 俯仰今昔,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寧不忉怛.뛰어난 기상은 傑然之氣,세속을 훌쩍 뛰어넘었고 邁越流俗,대범하고 씩씩한 논변은 雄辯偉論,황하를 매달고 장강을 터놓은 듯하였고 河懸江決.문장은 북두성과 같이 星斗之文,그 빛이 찬란하였으니 爛然厥色,이 세상을 다 둘러보아도 環顧斯世,어디에서 다시 만나겠습니까. 於何復覿.저는 세도(世道)를 위해서 我爲世道,슬픔이 너무나도 간절한데, 尤切傷盡,글은 말을 다 못 담아내고 文不盡辭,말은 생각을 다 못 나타냅니다. 辭不盡臆.공의 밝은 혼령이시여 公靈於昭,저의 붉은 마음 살펴주소서! 鑑我衷赤. 嗚呼惟公, 吾林翹特, 疾惡如閭5), 善若己出, 學邃辭達, 斯文羽翼, 綜覈事情, 可達政術, 諒德揆理, 允膺厥福, 云胡生平, 備經艱厄, 酷寒袁雪, 永日范粥, 蓬風瀛水, 雲蹤萍跡, 旣薄其祿, 壽宜不嗇, 中身有五, 遽見折輻, 蒼蒼者天, 孰秉其軸, 祥殃錯降, 匪今伊昔, 餒憲飽虎, 短淵修蹠, 悠悠千古, 志士涕落, 胡獨於公, 咄咄嗟惜, 抑有一言, 慰公冥漠, 肥豢厚貉, 紫綬黃髮, 職職芸芸, 厥麗不億, 骨朽黃壤, 長夜寂寞, 豈若吾公, 身後名赫, 天定乃諶, 孰得孰失, 嗚呼無狀, 幸爲公識, 蒙賜孔厚, 許己亦切, 人疑公麤, 我信白直, 人悅公文, 我喜不飾, 我縶家務, 公曰子職, 我論人否, 公或肯諾, 公在浪州, 我想西渴, 公旣于東, 百朋我錫, 見公還西, 我心戚戚, 我來公鄕, 公入眞宅, 人事參差, 疇能測度, 客歲兒冠, 筮公維吉, 于時天沍, 載雨載雪, 公謂不信, 若車無軏, 泥濘戒行, 顚倒夜黑, 翌朝淸佳, 酒旨薦潔, 禮成告歸, 後會指日, 孰謂此別, 幽明永隔, 梨山秋夜, 話心剪燭, 斗嶽淸風, 唱和溢牘, 此生此樂,無日再續, 俯仰今昔, 寧不忉怛, 傑然之氣, 邁越流俗, 雄辯偉論, 河懸江決, 星斗之文, 爛然厥色, 環顧斯世, 於何復覿, 我爲世道, 尤切傷盡, 文不盡辭, 辭不盡臆, 公靈於昭, 鑑我衷赤。 중당 박수(朴銖 1864~1918)를 말하는데,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부(衡夫), 호는 중당(中堂)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문집 《중당유고(中堂遺稿)》가 있다. 악은……좋아했으며 《명심보감(明心寶鑑)》〈입교(立敎)〉에 "선을 보거든 내게서 나간 것같이 하며, 악을 보거든 내가 병든 것같이 하라.[見善如己出, 見惡如己病。]"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보면 '려(閭')는 '려(厲), 려(癘)'의 오사(誤寫) 가차자로 볼 수 있다. 원안(袁安)처럼……맛보며 원안은 후한(後漢)의 유명한 재상이다. 원안이 미천했을 때, 한번은 낙양(洛陽)에 큰 눈이 와서 낙양 영(洛陽令)이 민가를 순행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가서 눈을 치우고 걸식(乞食)하는데, 원안의 집만 유독 눈도 치우지 않은 채 방 안에 드러누워 있으므로, 사람을 시켜 왜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원안이 말하기를 "큰 눈이 와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때에 남에게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大雪人皆餓, 不宜干人。]"라고 하므로, 낙양 영이 그를 어질게 여겨 효렴(孝廉)으로 천거하였다. 《後漢書 卷45 袁安列傳》 범중엄(范仲淹)처럼……견디고 범중엄이 죽그릇을 만들어 가운데를 나눈 다음 죽 한 그릇을 가지고 반은 아침에 나머지 반은 저녁에 먹었다. 55세 《서경》〈무일(無逸)〉에 "문왕이 천명을 받은 것이 중년이었는데, 나라를 향유한 것이 50년이었다.[文王受命, 惟中身, 厥享國, 五十年。]" 하였다. 여기서 중신은 중년과 같은 말로 50세를 말한다. 원문에 '유오(有五)'를 55세로 풀이하였다. 백붕을……주셨습니다 《시경》〈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새발쑥이여, 저 언덕 가운데 있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 보니 나에게 백붕을 준 듯하여라.[菁菁者莪, 在彼中陵, 旣見君子, 錫我百朋。]"라고 하였다. 백붕(百朋)은 많은 재화를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좋은 시를 지어주었다는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공께서……하셔서 원문의 '不信若車無軏'는 '믿음이 없으면 수레에 멍에막이[軏]가 없는 것과 같다(아무 일도 할 수 없다)'로 즉, '내 말을 믿으라' 한 것으로 해석된다. 《논어ㆍ위정(爲政)》에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알 수 없다. 큰 수레에 수레채마구리가 없고 작은 수레에 멍에막이가 없으면,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는가.[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하였다. 이산(梨山)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산 이름이다. 두승산(斗升山) 전라북도 정주시 고부의 진산이다. 閭 불분명한 저본의 자형이 '려(閭)'와 유사한데, 의미관계상 질병을 뜻하는 '려(癘), 려(厲)'의 오사(誤寫) 가차자인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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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형 성암86) 공께 올리는 제문 祭族兄成菴公文 유세차 을사년(1905) 7월 26일 정유날은 성암(成菴) 처사 김공의 장례 날입니다. 그 하루 전에 족제 김택술은 삼가 부족한 제물을 영연에 올려 곡하며 아룁니다.사문(斯文)이 끊기지 않으려면 대덕이 나타나 그 계통을 있고, 조상이 더욱 빛나려면 뛰어난 자손이 나타나 그 명예를 드날립니다. 오호! 공께서 세상에 오신지 46년, 사문에 있어서는 대덕을 기대하고, 조상에게는 뛰어난 자손을 일컬을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풍부한 재질에 수명이 짧아 한 삼태기 흙이 부족하여 공적을 못 완성하고, 갑자기 이렇게 떠나실 줄을! 사람은 멀리 떠나고 가르침은 흐려지어 이단의 의론이 함부로 날뛰는데, 누가 있어 그것을 엄히 방지하며, 누대(累代)의 덕 있는 가법과 빛나는 고관의 이력들은 누가 나타나 아름답게 계승하겠습니까?아아! 공께서는 일찌기 도의를 당부하고 함께 닦기를 약속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한테 있어서 그대는, 조상이 같은 친족이고, 한 스승을 모신 동문이니, 그 정의가 매우 깊네. 선비가 세상을 살면서 가진 바 뜻이 없다면 그만이려니와, 만약 뜻을 품었다면 그것이 덕이면 반드시 높기를 바라고 사업이면 반드시 크기를 바라네. 우리 두 사람은 기왕에 이 학문에 종사하는 이상, 어찌 감히 종신토록 권면하며 높고 큰 데 목표를 두어, 가까이는 조상의 덕을 계승하고 멀리는 사문의 계통을 잇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힘껏 노력하지 않겠는가?" 저의 미천한 자질이 하류를 벗어나지 못 함을 생각하고 함께 상품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려 하신 그 마음은 바로 인(仁)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앞서는 인심(仁心)으로 저더러 나아가 크고 높은 뜻을 시작하게 하더니, 뒤에는 인심(忍心)으로 저를 차마 버리시어 도모한 뜻을 끝마치게 하지 않으십니까?오호! 지난 봄에 공의 병환 소식을 듣고 화전(花田)87)의 서실에 가 뵈었습니다. 공께서는 애써 일어나 제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병세가 조금 헐거워져서 위태로운 지경은 면할 것 같네." 그리고는 이어 의리(義理)를 담론하는데 저는 말씀을 듣고 놀라면서, 하늘은 선한 이에게 복을 주니 이제 곧 회복하시겠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하(西河)의 애통한 소식88)에다 공의 환후가 더 중하심을 들었고, 크게 놀라 서둘러 나아가 위문드리려 하였으나 공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불민한 저는 이처럼 정의와 예절 모두 못 갖추었으니 참으로 유명으로 갈린 마음에 한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생각건대, 제가 처음 간재 선생님을 금화(金華)89)에서 뵙고 돌아올 때 선생께서 남쪽의 교유할 만한 학자로 거명하신 이가 바로 공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께서 어떤 분인가는 알고 있었으나 형세가 여의치 못해 공의 문하에 나아가 한 달이나 한 해의 가르침을 받을 틈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제 마음에 맺힌 풀길 없는 한입니다.오호! 맑고 밝은 용모와 위엄있는 거동에다, 말씀은 조심스럽고 진실하였으며 의리를 지킴은 굳고 확실하셨습니다. 가정 다스림은 은애와 예절로 하여 안팎 모두가 화합하였고, 사람을 성신(誠信)으로 대하니 고집스럽고 험한 사람도 복종하였습니다.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공부는 천지와 인간 모두 남김없이 통달하기를 구하였고, 종합고찰하는 계산은 제반의 사업에 착오 없이 시행하셨습니다. 하늘이 만약 공께 장수를 허락하여 그 덕업을 크게 이루도록 하였더라면, 공은 우리 사림의 큰 장인이 되고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며 조상의 큰 덕 역시 뒷날에 더욱 빛을 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운수가 어긋난 것은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바라서, 마침내 이러한 공의 이러한 덕이 다시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깊이 아쉬워하고 길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높으신 혼령께서는 제 간절한 마음을 굽어 살펴주소서. 흠향하소서! 維歲次乙巳七月二十六日丁酉, 成菴處士金公襄奉之期也。 前一日, 族弟澤述謹具薄奠, 哭告于靈筵, 曰: 斯文不喪, 大德出而接夫統, 祖先益顯, 賢孫生而揚其名。 嗚呼! 公之生於世, 四十有六年。 於斯文而可期大德, 於祖先而可謂賢孫, 孰知材豊命嗇, 仞積簣虧, 而遽至於此。 人遠敎泯, 異議橫奔, 孰俟而嚴其防? 世德家法, 有斐顯秩, 孰作而趾其美? 噫! 公嘗責余以道義, 約余以共修, 其言若曰: 吾於君, 以親則同祖, 以誼則同師, 其情深矣。 士生于世, 無志則已, 如有志則德必欲其高, 業必欲其大。 吾二人旣從事此學, 曷敢不終身交勖準的乎高大, 其於近而繼祖先之德, 遠而承斯文之緖, 視以爲己任而勉力乎? 顧念卑瑣之質不離下流, 乃欲引而同歸於上品爲心, 其亦仁矣。 何前仁於我而進之, 使經其始, 後忍於我而棄之, 不使圖其終乎? 嗚呼! 公之病報始得於春間, 來謁于花田書室。 公强起握手而言曰: 今則勢稍輕歇, 庶免阽危。 因談義理, 令人竦聽, 意謂天道福善, 應臻遄復。 俄聞慟遭西河, 患添冉牖, 不勝驚愕, 亟圖進慰, 而公已不起矣。 嗟余不敏, 情禮幷虧, 誠不能無憾於幽明之間也。 仍念余初拜田先生于金華而歸, 先生擧南中可從問學之人而告之者, 乃公也。 則公之爲公可知, 而形勢爲障, 未暇穩就門屛, 以受歲月之敎, 是爲恨結於不可解者。 嗚呼! 有睟其容, 有儼其儀, 恂如其發言之謹, 確乎其守義之固。 御家以恩禮, 內外旣翕, 待人以誠信, 頑險亦服。 窮格之工, 求達乎天人而無遺, 綜覈之算, 要施諸事爲而不錯。 天若假之以永年, 俾得大就其德業, 則爲吾林之碩匠, 而世敎以之有補, 先德亦得以益顯於來許也。 無柰氣數之舛差, 非人力之致, 竟使此公此德不得復見於此世之上, 其何以不深嗟而永歎也? 伏惟尊靈, 鑑玆衷曲, 尙饗! 성암 김연술(金淵述, 1860~1905)의 호이다. 간재선생의 문인으로, 저서《성암유고(成菴遺稿)》가 있다. 화전(花田) 전북 전주시 조촌동 만경강변의 마을 이름이다. 서하(西河)……소식 자식을 잃은 비통함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살았는데, 아들을 잃게 되자 눈이 멀도록 울었다 한다. 《禮記 檀弓上》 금화(金華) 김택술은 1900년 여름에 천안의 금화산(金華山)에서 간재 전우(艮齋田愚)를 뵙고 집지(執贄)의 예를 올렸다. 〈금화집지록(金華執贄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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