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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기 【임오년(1942)】 粉齋記 【壬午】 부풍(扶風 부안)에서 남쪽으로 7리 되는 곳에 위치한 석동산(席洞山)은 우리 17대조 고려 봉정대부 지고부군수공(奉正大夫 知古阜郡事公)께서 망복(罔僕)41)으로 은둔하셨던 고을이다. 이것을 인하여 이곳에 장사지내고, 두 아들 대호군공(大護軍公)과 직장공(直長公)을 부장하였는데, 풍수가 아름답다고 남쪽 지역에서 일컬어졌다. 석동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5리를 달려 간 곳이 분동산(粉洞山)이다. 직장공의 아들 첨지공과 손자 현감공(縣監公)을 이곳에 장사지냈고, 그 아름다움도 또한 석동산에 버금갔으니, 이곳이 우리 분파조(分派祖)의 선영이다.두 산에 모두 병사(丙舍)가 있는데, 석동산의 취성재(聚星齋)는 본디 석천(石川) 임문원공(林文元公 임억령(林億齡))의 "김씨 집안의 덕성이 모였네.[金門聚德星]"라는 시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분동산의 재실은 단지 지명을 사용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준 것이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예전의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었다.삼가 일찍이 생각건대, 공자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이 있은 뒤에 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자하가 "예(禮)는 뒤의 일이군요."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이에 대해 주석하기를, "예는 반드시 충신(忠信)을 바탕으로 삼으니, 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반드시 흰 비단을 우선으로 삼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42) 대체로 충신은 예에서 흰 바탕을 마련하는 것에 해당하고, 절의(節義)는 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해당하니, 당시 재실을 명명한 뜻이 비록 처한 형편과 환경을 따랐고, 일삼음이 없는 바를 행했다 하더라도 또한 성현의 가르침처럼 실제로 바탕을 숭상하고 꾸밈을 뒤로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줄 어찌 알겠는가.무릇 '재(齋)'란 것은 '가지런함[齊]'이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몸과 마음의 가지런함을 다하는 것이다. 제례(祭禮)로 말하면 슬프고 두려하며 마치 눈앞에 조상이 보이는 듯하고 계시는 듯 여기는 것은 충신의 바탕이고, 준조(尊俎)ㆍ변두(籩豆)와 오르내리고 절하며 무릎을 꿇는 것 등은 의절의 꾸밈이니, 만약 조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고 계시는 듯 여기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비록 의절의 꾸밈이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 베풀겠는가. 때문에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43)라고 하였고, 또 "예는 헛되이 행해지지 않는다."44)라고 하였으니, 이는 힘써야 할 바이다.더욱 일삼을 것이 있다. 첨지공이 나라에 세운 공훈과 현감공이 백성들의 정사에 드러낸 치적부터 군사공이 붙잡아 세운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윤리는 모두 충신(忠信)을 주로 하여 이룩한 것이니, 이 재실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봉영을 바라보며 추모하는 우리 모든 종족은 마음을 쓰고 말을 하는 것에서부터 고을에서 처신하고 세상에 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행동을 제재하고 몸을 세우는 모든 것들이 선조께서 힘쓰신 것을 주로 하여 겉모습과 본바탕 사이에서 먼저하고 나중에 할 바를 알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선조에 대한 제향을 잘하는 것이고, 선조를 생각하여 덕을 닦는 일을 잘하는 것이니, 재실의 이름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더 좋을 것이 있겠는가.구구하고 변변찮은 내가 감히 이것을 문미 사이에 기록하여 삼가 스스로 예전에 드러내지 못한 뜻을 드러낸 데에 부치고, 여러 종족들과 함께 힘쓰기를 바란다.재실을 중수한 일이 기사년에 있었는데, 그것이 원릉(元陵 영조) 때인지 인릉(仁陵 정조) 때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당시 육위문(六偉文 상량문(上樑文))이 있지만 그 창작이 어느 때에 있었는지는 더욱 자세히 알 수 없다. 維扶風南七里席洞之山, 我十七世祖高麗 奉正大夫知古阜郡事公罔僕遯鄕, 因葬于此, 而二子大護軍公、直長公祔焉.風水之佳, 稱於南方, 席山一支東走五里爲粉洞之山, 則直長公之子僉知公、孫縣監公藏焉, 其佳亦亞於席山, 而是爲我分派祖塋.二山蓋皆有丙舍, 席之聚星, 固取石川 林文元公"金門聚德星"之詩義, 惟玆粉齋, 但用地名, 而無所嘉錫, 何也? 舊無記, 不可考焉.竊嘗惟孔子曰: "繪事後素." 子夏曰: "禮後乎." 朱子釋之曰: "禮必以忠信爲質, 猶繪事必以粉素爲先." 蓋忠信者, 禮之粉地; 儀節者, 禮之繪事.當日名齋之意, 雖則隨遇因境, 而行所無事, 亦安知不實出於尙質後文, 如先聖賢之敎乎? 夫齋者, 齊也, 行祭而致齊乎此也.今以祭禮言之, 悽愴怵惕, 如見如在, 忠信之質也; 尊俎籩豆, 升降拜跪, 儀節之文也.如不致如見如在之誠, 雖有儀文, 將安所施? 故曰: "不誠無物." 又曰: "禮不虛行." 是所當勉也.更有事在, 僉知公之樹勳國家、縣監公之治著民政, 以至郡事公之扶植綱常, 皆主忠信而成之.凡吾宗族之入是齋而致潔, 瞻封塋而追慕者, 自宅心出言, 至於處鄕酬世, 凡所以制行立身者, 罔不以先祖所務爲主, 知所先後於文質之間, 則是爲能享其祖也, 能念祖修德也.其爲齋名之嘉錫, 孰尙於此? 區區無狀敢以是記之楣間, 竊自附於發前未發之義, 願與僉宗共勖焉.齋之重修在己巳, 其爲元陵、仁陵, 不可詳, 而有當時六偉文, 其創則尤不可詳在何時云.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하는 것으로, 은(殷)나라가 망하려 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微子》 공자가 …… 하였다 《논어집주》 〈팔일(八佾)〉 제8장에 보인다. 성실하지 …… 된다 《중용장구》 제25장에 "성(誠)이라는 것은 물(物)의 처음이자 끝이니 성실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을 귀하게 여긴다.〔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라는 구절이 보인다. 예는 …… 않는다 《논어》 〈팔일(八佾)〉 8장의 주에 "양씨가 말하기를 '단맛은 조미를 받아들이고, 흰 것은 채색을 받아들이며, 충신한 사람이라야 예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 바탕이 없다면 예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한다는 말씀이다.' 하였다.〔楊氏曰:甘受和, 白受采, 忠信之人, 可以學禮. 苟無其質, 禮不虛行, 此繪事後素之說也.〕"라는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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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 【임신년(1932)】 以承齋記 【壬申】 부안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 김(金)은 모두 천성적으로 선조를 사모하여 재실과 묘갈을 크고 웅장하게 하며 향사(享祀)에 진실하고 부지런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고 하였으니, 여론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우리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이 처음으로 영주(瀛洲 정읍)의 창동(滄東)에 거주하면서 대를 이은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한 지 200년이 지났는데, 호수는 겨우 40호뿐이었고, 일찍이 조정에서 봉록을 받은 사람이 없었으며, 아울러 전답이 이어지고 곡식이 쌓여 있는 집이 별로 없었으니, 비록 문학과 덕행이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선조를 사모하고 받드는 것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창동을 빙 둘러 장사지낸 선조는 여러 대가 지나 친진(親盡)45)하였고, 묘사(墓祀)를 지낸 지도 또한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난 신축년(1901)에 선군께서 재계를 다할 곳이 없음을 근심하시고 가옥을 팔아 재실을 마련할 것을 논의하여 거의 성사되려다 바로 중지되었다. 그러나 의론이 일어난 뒤로 또한 진실로 여러 종족의 마음속에 맺혀 있다가 25년이 지난 병인년(1926) 가을에 의논이 비로소 모두 같아졌다. 여러 신위의 묘와 거리가 균등한 곳을 취하여 본 마을 충의공(忠義公)의 묘 아래에 체사(體舍) 오량(五樑) 4칸과 문랑(門廊 대문과 행랑) 삼량(三樑) 5칸을 건립하였는데, 종중의 돈 200원과 두 종파에 배당한 돈 500원, 각 이름으로 낸 의연금 500원, 총 1,200원을 사용하였으니, 아, 힘이 다하였고, 또한 그럭저럭 갖추게 되었다.대저 사람이 선조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제사를 지내는 데에 재계를 다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며, 재계할 곳이 없으면 재계할 수 없으니, 이것이 우리가 재실을 힘을 다하여 짓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내가 《중용》 귀신장(鬼神章) 제3절의 뜻을 취하여 '이승(以承)'이라 편액을 달았다. 이 재실에 들어와 진실하게 공경하여 마치 선조가 앞에 계시는 듯 진실하게 공경하는 도리에 소홀함이 있다면 이는 재실을 세운 본뜻이 아니니, 공경히 생각하기를 바란다.또 생각건대, 제사를 지내는 것은 참으로 사람의 큰일이거니와 반드시 몸을 세우고 덕을 이루어서 조상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참된 효이고, 그 덕을 이루고자 한다면 성현(聖賢)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서는 말미암을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집안의 자제들이 강학하는 일도 또한 이 재실에서 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배워서 전 성현을 이은 경지에 이른 뒤에야 그 선조를 크게 드러내니, '이승'이라 한 것은 《맹자》 호변장(好辯章) 제12절의 뜻을 겸하여 취한 것이다. 이 재실에서 강학하면서 옛사람이 학문을 하는 방도에 전심하지 않는다면 그 이름과 뜻을 저버리는 것이 또한 클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바란다.아, 띠 풀로 지붕을 이고 흙으로 벽을 쌓은 이 하나의 집은 재력이 있는 사람이 웅장함과 화려함을 다하여 보기 좋게 지은 것과 비교하면 누추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 재실에 거처하는 자가 만약 제사를 지낼 때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안으로 선조를 잇고, 학문이 덕을 이루는 경지에 이르러 멀리 성현을 이을 수 있다면 그 가문의 창대한 명성이 장차 한 시대의 으뜸이 될 것이니, 조그마한 부귀의 녹속(祿粟)이 있고 없음을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종족의 후진들에게 깊은 바람이 있다.재실이 낙성된 뒤 7년, 임신년 정월 상순(上旬)에 나 택술이 기록하였다. 謂吾貫扶之金, 皆性於慕先, 豐壯齋碣、誠勤享祀, 甲於東方, 輿論然也.然惟我八世祖通德郞公始居瀛之滄東, 而後承之居此者, 年歷二百, 戶僅四十, 曾無立朝俸祿之人, 幷乏連田積粟之家, 雖其文行之不墜家聲, 至於慕先豐盛, 則末由焉.環滄而葬者, 累世親盡, 而墓祀亦已久矣.往在辛丑, 先君憂致齋之無所, 議買屋爲齋, 垂成而旋罷.然其議旣發, 亦固結于諸族心中, 越二十五年丙寅秋, 謀始詢同, 取累位墓道里之均, 就本里忠義公墓下, 立體舍五樑四間、門廊三樑五間, 用宗金二百圓、兩派排金五百圓、各名出義金五百圓、總一千二百圓也.噫, 其力殫矣, 亦苟完矣.夫人不祭祖非人; 祭不致齋非祭; 齋無其所, 不能齋.此吾齋所以不得不殫力而作也.故余取《中庸》鬼神章第三節之義, 扁之以以承.入是齋而有忽於誠敬如在之道, 則非立齋之本意也.其尙有以欽念哉.且惟祭固人之大事, 必也立身成德, 以顯其祖, 乃爲眞孝.欲成其德, 非學聖賢, 無由.故門子弟講學, 亦於是齋焉.蓋學而至於繼前聖, 然後大顯其先.其云以承, 兼取《孟子》好辯章第十二節之義也.講是齋而不專心於古人爲學之方, 則其辜負名義亦大矣.其尙有以警惕哉.噫, 此茅覆土築一箇屋, 視諸有力人致壯麗爲觀美者, 可謂陋矣.然居是齋者, 如能祭盡誠敬而內承祖先, 學至成德而遠承聖賢, 其家聲之昌, 將甲於一世, 規規富貴之祿粟有無, 何足道哉?余以是深有望於宗族後進云爾.齋成後七年壬申元月上旬日, 澤述記. 친진(親盡) 사당(祠堂)에 모시고 제사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 백성은 4대(代), 왕가(王家)는 5대가 넘으면 친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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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토보송림기 【을유년(1945)】 粉齋土堡松林記 【乙酉】 맹자가 말하기를, "이른바 '오래된 나라[古國]'라 하는 것은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벼슬하는 신하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47)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비록 대를 이어 벼슬하는 신하를 주로 한 것이지만, 그 뜻을 궁구하면 오래된 나라에는 반드시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알 수 있다.나는 일찍이 이 구절을 읽고 "인가(人家)의 고족(故族)이 고족이 된 까닭은 서로 전해온 세덕(世德 대를 이어 쌓아온 덕)에 있고, 경관이 아름다운 조상의 선산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고족의 집과 무덤 옆에 또한 반드시 드높이 자란 나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맹자의 뜻과 같다.우리 선조 첨지공(僉知公)과 현감공(縣監公) 두 대를 안장한 곳이 부안의 분토동(粉土洞)에 있고, 그 아래에 재실이 있는데, 재실 뒤에 있는 흙 보루와 소나무 숲은 외손 쌍백당(雙柏堂) 이충숙공(李忠肅公)48)이 본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에 장정들을 징발하여 축조하고 심어서 방어의 허술함을 보완한 것으로, 300년에 걸쳐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길러서 울울창창하였다.아, 이공은 명릉(明陵 숙종) 때 삼간신(三諫臣)49) 중 한 사람으로, 충직한 목소리가 조정과 재야에 진동하였다. 대저 충과 효는 일치하니, 외선조(外先祖)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도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미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 김씨(金氏)는 진실로 서로 전해온 세덕이 있는데, 외손으로 어진 이공을 얻었으니, 어찌 빛남이 있지 않겠는가? 또 그 분이 심은 높은 나무를 얻어 고족의 일단을 증험했으니, 어찌 거듭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대저 어찌된 일인지 근년 이래로 늙은 측백나무를 아끼고 애석하게 여기는 정50)이 점점 쇠퇴하고, 팥배나무를 베어내는 것에 대한 경계51)를 삼가지 않아서 거의 후산(後山)의 〈사정기(思亭記)〉의 염려52)를 범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여러 종족과 더불어 당시 이충숙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더욱더 아끼고 보호하여 큰 나무들이 더욱 많게 함으로써 이것을 본 사람들이 "효성스럽구나! 김씨여. 분암(墳菴 묘를 보살피기 위해 세운 암자)의 소나무조차 오히려 아끼는데, 하물며 그 선조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일컫기를 바라니,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이것이 선조를 생각하고 덕을 닦는 어진 후손이 되는 것이다. 어진 덕을 지닌 후손이 배출된다면 어찌 대를 이어 덕을 쌓아온 오랜 종족이 될 뿐이겠는가. 또한 장차 나라의 큰 나무가 될 것이고 대를 이은 신하가 될 것이다. 이에 기문을 짓는다. 孟子曰: "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之謂也." 此言雖主於世臣, 然究其意也, 故國之必有喬木, 則可知也.余嘗讀此而有言曰: "人家故族之所以爲故族者, 在世德相傳, 不在於祖山觀美." 然故族之家、丘壟之傍, 亦可知其必有喬木, 則若孟子之意也.我先祖僉知公、縣監公兩世之藏, 在扶安粉土之洞, 而其下有齋.齋後土堡松林, 外裔雙柏堂李忠肅公觀察本道時, 爲發民丁, 築之植之, 以補防虛疏者, 而歷三百年, 護養是松, 鬱鬱乎蒼蒼焉.於虖, 李公以明陵三諫臣之一, 忠直之聲, 震於朝野.夫忠孝一致, 致誠外先, 亦其孝親之推也.吾金氏固有相傳之世德, 而得李公之賢爲宅相者, 豈不有光? 又得其所植喬木, 以證故族之一端, 豈不重有辭乎? 夫何邇來, 老柏愛惜之情漸衰, 甘棠剪伐之戒不謹, 幾幾乎后山亭記之慮是犯, 可不懼哉? 願與諸宗深思當日李忠肅之意, 愈加愛護, 使喬木愈多, 觀者稱之曰: "孝哉! 金氏.墳菴之松, 猶愛之, 況於其祖乎? 苟能爾也, 是爲念祖修德之賢.賢德輩出, 豈惟世德之故族, 亦將爲國家之喬木、世臣也.是爲記. 이른바 …… 것입니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보인다. 쌍백당(雙柏堂) 이충숙공(李忠肅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로, 쌍백당은 그의 호이고, 충숙은 그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평(富平)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다. 1657년(효종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황해도ㆍ전라도ㆍ경상도 관찰사와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고, 세자빈객에 올랐으며,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저서로 《쌍백당집(雙柏堂集)》이 있다. 삼간신(三諫臣) 이세화와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 양곡 오두인(陽谷 吳斗寅)을 말한다. 이들은 1689년(숙종15) 숙종(肅宗)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였을 때에 함께 강력히 반대하는 소장을 올렸다가 분노한 숙종의 친국을 받고 유배되었는데, 훗날에 이들을 충신으로 추앙하며 삼간신이라 일컬었다. 늙은 …… 정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은 백성이 가져야 할 우국충정을 뜻한다.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곁에 있는 오래된 측백나무를 보며 읊은 〈고백행(古柏行)〉에서 "제갈공명의 사당 앞 늙은 측백나무, 가지는 청동 같고 뿌리는 바위 같네.〔孔明廟前有老柏, 柯如靑銅根如石.〕"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팥배나무를 …… 경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선정(善政)을 베푸는 관리가 되도록 권면한 것으로, 주(周)나라 무왕(周武王) 때에 소공(召公)이 남국을 순행하며 정사를 다스리고 팥배나무 아래서 쉬어 갔었는데, 떠난 뒤에 백성이 그 덕화를 생각하고 그 나무를 사랑하여 지어 부른 "무성한 팥배나무를 베지 말고 꺾지 말라. 소백이 쉬시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敗, 召伯所憩.〕"에서 유래하였다. 《詩經 甘棠》 후산정기(后山亭記) 북송(北宋)의 문장가 후산(後山) 진사도(陳師道)의 〈사정기(思亭記)〉를 말하는 듯하다. 〈사정기〉는 진사도가 지은 글로 자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재실에서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10 思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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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효비 이건기 【본손을 대신해서 짓다. 기묘년(1939)】 純孝碑移建記 【代本孫作. 己卯】 우리 선조 만휴당 선생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친이 등에 종기를 앓았을 때에는 입으로 고름을 모두 빼내어 낫게 하였고, 또 혀가 굽어지는 증세를 앓았을 때에는 동짓달에 제비가 날아오는 이변을 불러왔으며, 부모님의 상을 다해서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마 치셨다. 선조가 이를 듣고 가상하게 여기시어 본 고을의 남쪽 문 밖에 순효비(純孝碑)를 세우도록 명하시고 장악원 주부를 제수하자, 상소로 당시의 폐단을 진달하여 두터운 비답을 받았다. 사직으로 옮겨가서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날에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 홀로 상소하여 불가함을 말하여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올린 상소로 구원을 받고 풀려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창도하여 전쟁에 공이 있었고, 의곡(義穀)을 거두어서 행재소(行在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로 실어 보냈다.광해군이 즉위하였을 때에는 선생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전에 올린 상소를 혐의하여 순효비를 훼손하여 넘어뜨리고, 삼강록(三綱錄)에서 삭출하였으며, 자손들을 금고(禁錮)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감사 김공 존경(金公存敬)의 상소로 인하여 신원되고 금고에서 풀렸다. 정조조(正祖朝)에 비를 회복하라는 은전이 있어 현의 남쪽 5리에 있는 도동사(道東祠) 가까운 곳에 옮겨 세웠으니, 판서 서공 준보(徐公俊輔)의 비명(碑銘)이 있다.고종 갑술년(1874)에 충성과 효성이 뛰어나고 남다르다하여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하였고, 59년이 지난 임신년(1932)에 또 비를 옮겨 석동산의 취성재(聚星齋) 앞에 세웠으니, 종10대손인 나 택술의 추기(追記)가 있다.아, 선생이 평생 동안 세운 큰 절개에 대해서는 본래 선왕조 때에 포정(褒旌)한 것과 병필가(秉筆家)들이 찬양한 것이 있으니, 진실로 불초한 내가 감히 군더더기를 덧붙여 진술할 것이 아니지만, 다만 마음에 느낀 점이 있다.혼조(昏朝) 때에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당한 화가 참혹했으니, 천지가 청명해진 때에 선생이 수립하신 것으로 절혜(節惠)53)를 내려주고 후손을 등용하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도리어 그렇지 않았으니, 얻은 것이라곤 겨우 신원되고 금고에서 풀린 데에 그쳤다. 비석을 복구하라는 명과 삼품(三品)에 추증한 것도 또한 여러 세대가 지난 뒤에야 있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삼가 생각건대, 화를 당한 끝에 두려움에 처하여 본가의 심정을 위로 진달할 길이 없었고, 새로운 교화를 펼치는 초기에 정사를 다스릴 조목이 많아서 이러한 일에 미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니, 이것이 매우 한스럽다.비를 세울 때에 전후로 장소를 달리 정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처음 현의 관할구역 내 사통팔달의 길 근처에 정한 것은 만백성이 함께 보기를 바란 것이었고, 중간에 사원(祀院)의 학사 근처에 정한 것은 많은 선비들이 흥기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세상이 달라지고 일이 변하게 되어서는 마지막으로 선대의 묘소 아래 종족이 모이는 곳에 자리 잡은 것은 바로 한 가문의 자손들이 대대로 보고 느끼게 하는 지극한 마음 때문이었다.《시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54)라고 하였으니, 무릇 선생의 자손들이 서로 더불어 이 비를 읽고 몸에 닦아 선생의 덕을 계승하고, 또 한 집안으로부터 고을로 미루어가고 세상으로 미루어간다면 만백성이 함께 보고 많은 선비들이 흥기하는 실상이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惟我先祖晩休堂先生, 天性至孝, 親患背疽, 口吮汁盡而瘳, 又患舌鉤, 致冬月鷰至之異, 內外之艱, 廬墓盡制.宣祖聞而嘉之, 命立純孝碑於本縣南門外, 除掌樂院主簿.上疏陳時獘, 蒙優批.移司直, 光海建儲日, 排門獨疏, 言其不可.竄濟州, 三司交章, 伸救得釋.壬辰之難, 倡義旅, 戰有功, 收義穀, 輸行在.及光海卽位, 先生已沒, 以前疏嫌, 毁踣純孝碑, 削出三綱錄, 禁錮子孫.仁祖改玉, 因監司金公 存敬疏, 伸冤解錮.正祖朝有復碑之典, 移竪於縣南五里道東祠傍近, 有判書徐公 俊輔碑銘.高宗甲戌, 以忠孝卓異, 贈通政大夫吏曹參議, 後五十九年壬申, 又移碑竪於席洞山 聚星齋前, 有從十世孫澤述追記.嗚呼, 先生生平大節, 自有先王朝所褒旌、秉筆家所揄揚, 固非不肖之所敢贅陳, 惟所感則有之.當昏朝之時, 先生身後之禍酷矣.及夫天地淸明之日, 以先生之樹立, 宜有節惠之賜、錄嗣之恩, 而顧乃不然, 所得者, 僅伸冤解錮而止, 復碑之命、三品之亦, 在於累世之後, 何也? 竊意其禍餘懾處, 本家之情, 無由上達, 更化之初, 政目多端, 而不暇及焉, 是可恨者深矣.乃若竪碑之前後異處則有以, 始之於縣治通衢之傍者, 欲萬姓之共覩, 中之於祀院學舍之近者, 欲多士之興起, 是固君師敎民作士之深意也.至於滄桑之餘, 時異事變, 則終而止於先世丘壟之下宗族聚斯之所者, 乃一門子孫世世觀感之至情也.詩不云乎? "無念爾祖? 聿修厥德." 凡爲先生之孫者, 相與讀斯碑而修諸身, 有以繩武乎先生之德, 旣又自一門而推及于鄕于世, 則萬姓共覩多士興起之實, 其亦在斯歟. 절혜(節惠) 시호(諡號)를 뜻하는 것으로, 《예기》 〈표기(表記)〉에 "선왕께서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되, 한 가지 선으로써 절취하니, 이름이 행실보다 지나친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 恥名之浮於行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너의 …… 닦을지어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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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임오년(1942) 答金聖九 壬午 저는 재주가 매우 졸렬하여 세상에서 화합하며 지내는 사람이 적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나와 사귀다가도 좀 지나서는 나에게 취할 만한 점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유독 그대만이 견문이 넓고 교유가 넓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될수록 더욱 더 친하게 대해주시니, 무엇 때문입니까. 감격하면서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의 유문(儒門) 대가(大家)의 자손들을 살펴보면 선조의 학문을 제대로 계승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대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급한 풍조가 뜨겁게 들끓는데도 오히려 주장을 고수하며 60년까지 끌고 온 사람도 드무니, 이 때문에 불쌍히 여기어 같은 심정을 느낀 것입니까. 비록 그렇더라도 저는 실로 늙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으니, 설사 그 나이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제 여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먹는 것이 줄고 살이 빠지며 정신이 나가고 생각이 막히는 것 등은 일일이 말할 겨를도 없습니다. 나이를 따져보고 힘을 헤아려보니 앞날에 가망이 없고, 허물을 반성하고 신세를 슬퍼하니 평소의 뜻은 허위가 되었습니다. 그대는 저보다 15세가 적고 겨우 40세를 넘겼으니 바로 발전하여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여 얼이 빠지고 의리를 구명하기 어려워서 부친과 선사를 저버릴까 두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에게 도움을 구하니 무엇 때문입니까? 궁핍한 길을 만난 것으로 말하자면 누가 심하고 누가 심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한쪽은 노인을 섬기고 아이를 기를 책임이 있고, 다른 한쪽은 부친이 죽고 자식이 장성했으니, 근심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쪽은 노인이 편안하며 아이가 즐겁고 다른 한쪽은 부인이 비난하고 자식이 어긋납니다. 이것은 또한 깊은 근심 속에 깊은 기쁨이 있는 것이고, 얕은 근심 속에 깊은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실로 동병상련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갓 근심하고 한탄하며 범범하게 서로를 구하기보다는 곧바로 눈앞에 행해야 할 일에 대해 진실한 마음으로 강구하고 익혀서 잘못을 빚어내지 않는 것이 더욱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는 이미 집안의 생계를 잊어버리고 푸른 산속에 살며 문을 닫아걸고 있으니 인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는 곳이 오히려 마을과 가까워서 차마 듣거나 보지 못할 일과 편치 않은 의리와 관련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간절하게 깊은 산이나 먼 바다로 높이 날아가고 멀리 떠나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다만 신세가 종손이라서 여러 대의 조상 신위에 제사를 받드는 때에 몸소 참가하지 않는 것은 윤리를 무너뜨릴까 두렵기 때문에 가벼이 감행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정밀한 의리로 알려주기 바랍니다. 僕於才最劣, 于世寡合, 故人雖始與之交, 既而以其無可取, 或異見而棄之, 獨以足下聞見博而交遊廣, 久而愈親者, 何也? 不能以感焉而不致疑也.竊觀今世儒門大家子孫, 繼述先學者, 惟足下在, 此固有辭今後, 而急潮熱沸, 猶能撕捱, 而輥到六十者亦鮮, 故爲之矜憐而同情也歟? 雖然, 僕誠老矣.人生七十古來稀, 縱使及之, 今餘幾何? 食減肉敓, 精遁思窒, 不暇枚言.計年量力, 前頭無望; 訟諐悼躳, 素志歸虛.乃以足下少僕十五歲, 僅過強年, 正可進成之日.有"鼎敗神喪, 義理難究, 懼負父師"之語, 而求助於僕, 何哉? 至於竆途之遭, 未知孰甚孰否.而一則有老幼事育之責, 一則既親沒而子壯, 宜其憂之有淺深.然一則老安而幼樂, 一則室讁而庭違.是又深憂中有深喜, 而淺憂中有深憂也.蓋吾人于斯世也, 實同病而相憐也.與其如此徒爾憂歎, 泛泛相求, 曷若直以目下當行, 實心講習, 不至鑄錯之爲愈乎? 今僕既忘家累, 棲碧閉戶, 宜其與人事無關.然所棲尚近家里, 不無聞見之不忍、處義之難安, 切欲高飛遠走於竆山絕海之中, 令人不知所終.但念身爲宗孫, 累世祀板奉祭之時, 身不與祭, 恐乖倫理, 故不敢率爾, 未知如何則可乎? 幸以精義指示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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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계일건익에게 답함 을유년(1945) 答黃啟一 鍵翼○乙酉 경술국치에 나라가 없어진 이후로부터 심장이 무너지고 창자가 뒤틀어져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는 없었으니, 다만 삼려대부 굴원처럼 오래 살아서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려는 소원79)을 지녔으니 상황이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천추의 밝은 하늘이 회복되어 한 조각 동토의 땅이 독립을 하니, 온 백성이 춤을 추고 사방에서 환호하였습니다. 진실로 함께 모두 축하할 일이지만, 고통을 참으며 구차하게 산 세월이 36년입니다. 늙어 머리가 세어졌을 때 다시 독립의 오늘을 보게 되니, 비로소 삼려대부의 소원을 이룬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깁니다. 매우 기쁘고 대단히 통쾌한 것이 홀로 만난 경사인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생각과 꿈이 서로 위로하고 몸뚱이와 그림자가 번갈아 축하하니,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때에 특별히 은혜로운 편지를 주셔서 국가와 집에서의 공적이고 사적인 기쁨과 다행함을 자세히 진술한 후, 마지막에 '공의 일생이 근심스럽고 울분에 차 있다가 늙어서 이런 경사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니 역시 저 혼자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알아주고 저를 사랑하는 것이 깊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저에 대해 도가 완성되고 식견이 풍부하여 장차 조정의 원로가 될 것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생각해볼 때, 산야에서 누추하게 살아서 늙을수록 더욱 황폐해져 처음부터 수기치인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매우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설사 한두 가지 취할만한 천박한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쇠하여 병이 더욱 심해지고 나이는 옛사람이 벼슬을 그만둘 때에 가까워졌으니, 어떻게 조정 일에 참여하여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당국의 여러 영특하고 용감한 사람들의 부흥에 대한 대책과 박학하고 명철한 사람들의 경제정책에 의지하여 앉아서 태평을 누리면서 일생을 마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명한 그대의 재주와 식견은 이미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서 확인되었으니, 이를 나라에 미룬다면 어디든지 도달하지 못하겠습니까. 나이도 중년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니 세상에 나가 벼슬하는 것은 바로 이때라 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스스로 작게 여기지 말고 더욱 떨쳐 힘을 쓰고, 더욱더 경사(經史)에 공을 들이고 널리 석학들과 교유하여 눈앞에서 실학을 이루고 미래에 위대한 공업을 세우십시오. 저는 큰 기대를 이길 길이 없습니다. 粵自庚戌無國以來, 崩心摧腸, 如不欲生.然亦無如之何, 只有屈三閭長年度世之願, 欲觀其出場.千秋之皓天來復, 一片之青邱獨立, 萬姓鼓舞, 八方歡呼.固所同慶, 而顧此忍痛茍活三十六年, 至老白首, 而復覩今日, 自幸始遂三閭之願, 而深喜大快, 有若獨當之慶, 思與夢相慰, 形與影迭賀, 不知所以爲懷.乃以此時, 特賜惠訊, 既以備陳在國在家公私之喜幸, 終以賤子生平憂憤, 老見此慶喩之, 亦有若一人獨當者.然非相知相愛之深, 烏能及此? 雖然, 謂賤子道成識富, 行將蓍龜乎朝著, 則誤矣.念山野陋生, 老益荒蕪, 初無得乎修己治人之術, 自知甚明.設有一二淺見之可取者, 衰病轉甚, 年近乎古人致事之時者, 何能與聞乎朝著事乎? 只得賴當局諸位英武興復之策․博哲經濟之政, 坐享太平而終身已矣.至於高明才識, 已驗於理家, 推之邦國, 何所不達? 年齡遠不及中身, 出世強仕, 此正其時.幸勿自小, 亟加奮勵, 益用功於經史, 廣從遊於鴻碩, 成實學於當下, 建偉業於前頭, 區區不勝祈望焉. 삼려대부……소원 48쪽 주)8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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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기 【계미년(1931)】 華山齋記 【癸未】 선조와 인조 시대에 우리 집안의 선조이신 퇴우당(退憂堂) 김공(金公 김해(金垓))과 그 아들 무송당(撫松堂 김이겸(金以謙))은 생존한 당시에 충절로 이름이 드러났고, 돌아가신 뒤에 부풍(扶風 부안)의 이산(梨山) 남쪽 기슭에 안장되었으니, 후대에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유풍(遺風)을 사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화전(華田) 마을이 있고, 화전 마을로부터 북쪽으로 1리가 채 안 되는 곳에 자리한 4척의 봉분은 무성공 셋째 아들의 부인 □씨의 무덤이고, 여러 신위의 무덤이 이곳에 이어져 있다.예전에 있던 재실은 겨우 재계하고 하룻밤 지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임오년 가을에 여러 종족이 함께 의논하여 이 산의 소나무를 벌목하여 재목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팔아 돈을 마련해서 옛 재실을 고쳐 새롭게 지었다. 참으로 걸출하게 크고,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우니, 그 마음과 노력이 또한 진실하고 부지런하였다. 지명을 따라 '화산(華山)'이라 편액하고 나에게 이를 기록하여 이름의 뜻을 돌이켜 생각할 방도를 드러내 주기를 청하기에 내가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화(華)'는 '화미(華美)'의 '화'와 '화하(華夏)'의 '화'가 있으니, 하나는 숭상하지 않는 바에 있고, 하나는 사모해야 할 바에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구분은 한갓 사물이나 사람으로써만이 아니다. 움직이고 멈추며 말하고 행하는 등 일상생활에 외면의 꾸밈과 관계되는 것들은 모두 '화미'의 '화'이고, 중도와 정도를 얻은 것들은 모두 '화하(華夏)'의 '화'이다.그러므로 이 재실에 거처하여 제사를 받들 때에는 형편에 걸맞지 않게 제기와 제물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 힘써 남의 구경을 위해 사치를 부렸는지, 정성과 공경을 기울임에 청결함과 엄숙함을 다하여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다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선대의 덕을 칭송할 때에는 또한 벼슬을 성대하게 진술하여 가문을 자랑하였는지, 덕의(德義)를 생각하고 닦음에 자신을 낳아 주신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따져 보아야 한다. 재실에서 물러나서도 이것을 구하여 집에 있을 때나 몸을 다스릴 때나 일 처리를 할 때에 이러한 도를 쓰지 않음이 없다면 그 두 가지를 버리고 취하는 것에 도를 얻었다고 하겠다.대저 퇴우당과 무송당 두 선조의 혁혁한 사업과 그 뒤로 대를 이은 행의(行誼)로부터 근대 성암공(成菴公)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니, 여러 어진 종족들이여, 서로 닦고 권면하여 큰 공적을 아뢸 수 있다면 돌이켜 생각함을 다했다고 하겠다. 그러면 욕되게 종족에 있는 나 같은 자도 또한 더불어 영광이 클 것이다. 粤在宣、仁之世, 我族先祖退憂堂 金公與其子撫松堂, 以忠節著於當時, 沒而藏於扶風 梨山之南麓, 後之人過其下者, 莫不慕遺風矣.自是而北可相望, 有華田之里, 自華而北未一里, 有四尺之封者, 撫松公第三子之配□氏之藏, 而累位繼兆在焉.舊有齋僅足以容齊宿, 歲在壬午秋, 諸族協謨, 伐是山松爲材, 斥其餘作錢, 易舊齋而新之, 信宏傑完美, 而其心力誠且勤矣.因地名而扁以華山, 請余記之, 以發其顧思名義者.余曰: "唯." 華有華美之華、華夏之華, 一在所不尙, 一在所當慕.然二者之分, 不徒以物以人而已.凡於動靜云爲之際, 涉於外邊之飾者, 皆華美之華也; 得於中正之道者, 皆華夏之華也.居是齋而奉祭祀, 則當自檢不稱有無而務豊籩豆粢牲, 以侈人觀乎? 用其誠敬而能致蠲潔僾肅, 自盡己心乎? 誦先德, 則亦自勘盛陳簪纓, 誇耀門戶乎? 念修德義, 無忝所生乎? 退而求之, 居家、治身、處事, 莫不用是道焉, 則其於二者之去取得矣.夫以憂ㆍ松二祖之赫赫事業、曁厥後連世行誼, 以及近時成菴公之學問, 亦皆由此而成.僉賢乎, 能交修胥勖, 用奏膚功, 則其爲顧思也盡矣.忝在宗族如余者, 亦與有榮焉大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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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덕재기 【갑신년(1944)】 鳳德齋記 【甲申】 본조(本朝)가 여씨(麗氏 고려)의 숭불(崇佛)을 이어받은 나머지 선릉(宣陵 성종)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폐단이 여전히 혁파되지 않아 온 나라가 문란하였고, 조정에서 심지어 불도(佛道)는 지극히 높아 상대가 없다고 방자하게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러한 때에 우부승지 영귀당(咏歸堂) 손공(孫公)과 같은 분이 경연에 입시하여 부처는 영험함이 없고 화복이 사람을 속인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여 임금이 감동하고 깨달아서 많은 것을 혁파하고 수백 년 유학의 성세를 열게 하였으니, 당시에는 그 분의 말을 마치 봉황이 동쪽 언덕에서 우는 것처럼 들었고, 후대에는 그 분을 마치 상서로운 봉황이 세상에 나온 것처럼 우러러 보았다. 대체로 돌아가신 뒤에 부풍(扶風 부안) 소재지 남쪽 봉덕(鳳德) 마을에 안장되었으니, 지명을 인하여 덕을 상상하면 또한 칭송할 말이 있기에 충분하였다.묘의 동쪽에 옛적부터 4칸짜리 병사(丙舍)가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남에 따라 후손의 수가 더욱 번성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낼 때에 재계하고 하룻밤 지내는 인원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에 계미년 겨울에 여러 후손이 함께 의논하여 옛 병사를 고치고 묘 남쪽에 새로운 재실을 도모하여 다음해 봄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니, 으리으리하게 크고 넓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대문과 글방으로 호위하고 담장으로 둘러싸자 참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웠다.내가 공의 14대손 성호(聖晧)와 성교(聖敎) 두 군의 요청으로 인하여 바로 '봉덕'이라 명명하고 다시 말하였다."들으니, 옛말에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한다.'라고 하였고, 또 '조상을 생각하여 덕을 닦는다.'라고 하였다. 대저 승지공은 생전에 성대한 시대를 만나 빛나는 덕을 보고 내려온 봉황으로, 훌륭한 말과 아름다운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어 후손을 윤택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 분을 이어 도봉(道峯)과 한계(寒溪), 초은(楚隱) 등의 어질고 충성스러운 증손과 현손이 있게 되었으니, 이른바 단산(丹山)55)에 평범한 새가 없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지금 손씨의 여러 현자들이 이 재실에 거처하면서 조상의 자취를 계승할 것을 기약하여 옛 허물을 작은 것까지 다 떨어 없애고 더욱 새로운 덕에 나아가 성대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용감함과 진실함이 또한 재실의 공사를 마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렇다면 '봉덕'이라는 두 글자가 어찌 재실에만 있겠는가. 간직한 곧음을 직접 내 몸에 드러내고, 길이 손씨의 세전(世傳)이 될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일컬어 '조상을 생각하여 덕을 닦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 현자들이여, 힘쓸지어다." 本朝承麗氏崇佛之餘, 至于宣陵之世, 獘猶未革, 擧國泯泯, 朝廷之上, 至有恣言佛道之極尊無對者 時則有若右副承旨咏歸堂 孫公, 累侍經筵, 反覆言佛無靈驗, 禍福誑人, 以致君上感悟, 多所革罷, 啓數百年儒學之休運.當時聽其言, 若鳳鳴朝陽; 後世仰其人, 若瑞鳳出世.蓋沒而藏於扶風治南鳳德之里.因地而想德, 亦足以有辭矣.墓之東舊有丙舍四間, 歷世久而麗彌蕃, 則無以容歲祀之齊宿.乃於癸未冬, 諸孫協謀, 易其舊而新是圖于墓南, 至翌年春而功告訖, 輪奐曼碩, 聳人觀瞻.門塾以衛之, 垣墻以周之, 信完且美焉.余因公十四世孫聖晧、聖敎二君之請, 卽以鳳德名之, 復爲之言曰 : "聞之古語有云 : '顧名思義.' 又云: '念祖修德.' 夫惟承旨公, 生當晟際, 而爲覽輝之鳳, 昌言懿行, 範世而裕後.故繼是而有道峯、寒溪、楚隱賢若忠之曾玄, 所謂丹山無凡羽者是已.今孫氏僉賢, 居是齋而期繩祖武, 能盡祛舊瑕之微, 加進新德之盛.其勇且誠, 亦如齋功之訖.是則鳳德二字, 豈惟於齋乎? 存直親見於吾身, 而永爲孫氏之世傳矣.是謂顧思, 是謂念修.僉賢乎, 勉之哉. 단산(丹山) 봉황이 산다는 전설적인 산 이름으로, 단혈(丹穴)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단혈의 산에……새가 사는데, 그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 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丹穴之山……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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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망실기 【갑신년(1944)】 不忘室記 【甲申】 옛적에 맹자는 공자가 우인(虞人)을 칭찬하며 지사(志士)는 자신의 시신이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자신의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여 제후를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한 진대(陳代)의 기롱을 배척하였으니, 대체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출처와 거취를 절도에 맞게 하고자 하는 것은 의리를 죽음으로 지키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이것이 공자와 맹자가 특별히 두 가지의 '잊지 않는다[不忘]'는 가르침을 들어서 사람에게 보인 이유이다. 대저 출처와 거취가 어찌 벼슬살이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될 뿐이겠는가. 초야의 곤궁한 서민이 한번 거동하고 한번 음식을 먹는 것도 이것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아, 내가 세상이 변한 뒤로 어찌 일찍이 하루라도 살고 싶은 적인 있었겠는가. 그러나 내심 스스로 생각하기에 새로운 나라의 신하와 종이 되지 않고 내 땅에서 난 음식을 먹는 것으로 충분히 자정(自靖)의 도56)를 행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어찌하여 변고가 더욱 심해지고, 일이 더욱 어긋나서 곡식을 강제로 공출하고 양식을 배급받게 된 것인가?57) 먹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의리상 욕을 받을 수 없어 바로 쟁기를 버리고 토실(土室)에 몸을 숨겨 처음에는 솔잎과 마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마지막에는 도랑을 가리켜 돌아갈 곳으로 삼았다. 이에 '불망' 두 글자로 토실을 이름하고 기어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책려하였으니, 훗날의 군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이어서 생각건대, 맹자가 또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은 의(義)를 모으는 데에 달려 있음을 논하여 "마음에 잊지 말라."라고 말하였으니58), 나는 이에 감히 "의를 모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도랑에 자신의 시신이 있을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아, 이 몸을 깨끗이 하여 목숨을 다하고 돌아가는 날에 거의 한 줄기 무형의 강대한 기운이 이 사방 1장이 되는 토실을 가득 채우고 천지 사이와 통하여 가지 못할 곳이 없는 혼기(魂氣)와 함께 노닐지 않을까? 갑신년 양의 기운이 회복하는 동지에 나 김택술(金澤述)이 기록하였다. 昔孟子引孔子所贊虞人,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者, 以斥陳代不見諸侯之譏.蓋當亂世, 欲出處去就之中節, 非死守義理不能.此孔孟所以特揭二不忘之訓, 以示人也.夫出處去就, 豈惟仕者? 草茅韋布之窮, 一起居、一飮食, 無非是已, 豈可忽乎? 嗚呼, 余自世變, 何嘗一日欲生? 然竊自謂罔臣僕食吾土, 足以爲自靖之道.夫何變益甚而事益謬, 穀焉而勒供, 粮焉而配給? 食不能自由, 義不可受辱.於是舍棄耒耜, 竄身土室, 始焉採松薯而延命, 終焉指溝壑而爲歸.乃以不忘二字名室, 而自勵期不負孔、孟之訓, 未知後之君子, 以爲如何? 仍念孟子又曰: "浩然之氣, 塞于天地之間." 其論養氣在乎集義而曰: "心勿忘." 余乃敢曰: "集義之勿忘, 卽在壑之不忘也." 噫, 此身潔淨, 歸盡之日, 庶有一道無形剛大之氣, 充此方丈之室, 而透塞乎兩間, 與無所不之之魂氣俱遊也否? 甲申陽復日, 主人金澤述記. 자정(自靖)의 도 나라가 망했을 때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편안하게 해서 지조를 지키는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킨다는 뜻으로, 《서경(書經)》 〈미자(微子)〉 편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지조를 선왕에게 바친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곡식을 …… 것인가 일제는 중일전쟁(1937) 전후로 조선을 대륙침략의 인적·물적 보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병참 기지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1938년에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39년에 미곡 공출제와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여 경제를 수탈하였다. 맹자가 …… 말하였으니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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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재기 【경신년(1940)】 慕陽齋記 【庚辰】 살펴보건대, 저 천지의 조화란 오직 음(陰)과 양(陽)일 뿐이니,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빠뜨리면 조화를 부릴 수 없다. 그런데 성인이 《주역》을 만들 때에 항상 음을 억제하고 양을 부양하였으며, 심지어 그것으로 군자와 소인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음양이 비록 함께 한 해를 이루지만, 양은 생육을 주장하고 음은 살육을 주장하며, 양은 항상 만물을 펴게 하고 음은 항상 만물을 움츠리게 만들며, 양은 낮이 되고 음은 밤이 되니, 각기 군자와 소인의 형상과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를 취하여 비유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성인의 지극한 뜻이니, 성인을 배우는 자가 여기에 나아가 궁구하여 종사할 바를 안다면 거의 성인과 같게 될 것이다.무령(武靈 영광(靈光))의 동쪽 화산(華山) 아래에 '모양(慕陽)'의 편액을 게시한 서재가 있는데, 이는 경재(敬齋) 김공(金公)이 학문을 하며 수양하는 곳이다. 공이 말하기를,"지금 천하가 기나긴 밤처럼 어두침침하여 동서 열강부터 시골 마을의 영세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재화와 이익을 서로 다투고 살육하여 생기가 완전히 끊어지고 기상이 비참하니, 《주역》의 순음(純陰)인 〈곤괘〉가 바로 이러한 때이다. 그 시초를 궁구하면 대체로 재물에 힘쓰고 소인을 등용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하면 공자의 추양(秋陽)59)이나 주자의 자양(紫陽)60), 송자(宋子)의 화양(華陽)61)과 같은 양덕(陽德) 군자를 지하에서 일으켜서 세상의 도를 밝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또 가까이로는 도학(道學)을 이은 우리 스승 육양공(六陽公 전우(田愚))와 친척으로는 어진 덕을 지닌 우리 조부 양산공(陽山公)이 모두 내가 마음으로 사모한 바로, 서재의 편액에 나타냈습니다."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서 매우 옳게 여기고, 다시 한 마디 말로 공에게 공경히 답하여 말하였다."경전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천하를 다스려 평정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과 뜻을 진실하고 바르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공이 비록 학문에 늙어 가고 도에 깊지만, 억시(抑詩)를 오히려 90세의 무공(武公)에게 진술하고62), 오만함과 포악함을 또한 성인 순(舜) 임금에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63)청컨대 공께서는 이 서재에 거처하면서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즈음에 먼저 내 마음상의 생육과 살육, 폄과 움츠림, 낮과 밤의 기미에서 매양 저 음을 억제하고 이 양을 부양하여 순전히 숙련된 경지에 이른다면 사모한 바의 양덕 군자는 바로 내 자신이 이런 군자일 것이니,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며 천지를 돕는 도구가 바로 내 자신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설사 시세가 이미 심하여 오늘날에 무언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세상에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두고 훗날 칠일(七日)만에 돌아올 터전64)을 만들어 반드시 되돌아오는 하늘의 양을 기다리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이 서재에 찾아와 공에게서 법을 취할 것이니, 우선 이것을 문미 사이에 기록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觀夫天地之化, 惟陰與陽, 闕一不得, 而聖人之作易也, 常抑陰而扶陽, 至以比於君子與小人, 此曷故焉? 陰陽雖同成歲功, 然陽主生而陰主殺; 陽常舒而陰常慘; 陽爲晝而陰爲夜, 各有其象之所似者.故取譬焉.此聖人之至意也.學聖人者, 卽此究之, 而知所從事, 則其庶幾乎. 武靈東華山之下有齋焉, 而揭以慕陽之扁者, 敬齋 金公藏修之所也.公之言曰: "今天下長夜昏昏, 自東西列强, 以至閭巷細民, 以貨利相爭殺, 生意頓絶, 氣像愁慘, 易之純坤, 此其時也.究其始, 蓋由於務財用之小人矣.安得起陽德君子如孔子之秋陽、朱子之紫陽、宋子之華陽者於九原, 而治明世道? 又近則吾師六陽翁之道學, 親則吾祖陽山公之賢良, 皆吾所心慕而至形於齋扁者也." 余聞其言, 而深然之, 復以一言敬復于公曰 : "經不云乎? '欲治平天下, 先誠正心意.' 公雖老於學而深於道, 然〈抑〉詩猶陳於耄武, 傲虐亦戒於聖舜.請公居是齋而存省言動之際, 先從吾心上生殺舒慘晝夜之機, 每抑彼扶此, 而至於純熟焉, 則所慕之陽德君子, 卽吾身是已.致澤君民、輔相天地之具, 卽在於吾身.縱使時勢已甚, 不得有爲於今日, 世有有志學聖而作異時七日之基, 以俟必返之天者, 必來是齋, 而取法於公矣.姑記此于楣間而待之." 공자의 추양(秋陽) 추양은 증자가 공자의 덕을 칭송하여 "공자께서는 강한(江漢)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시다.〔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 말로, 이로 인해 후대에 공자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주자의 자양(紫陽) 자양은 주희(朱熹)가 1184년 복건(福建) 숭안(崇安)의 무이산(武夷山)에 자양서원을 짓고 한가로이 지낸 일로 인해 주희의 별호로 사용되었다. 송자(宋子)의 화양(華陽) 화양은 화양서원이 있는 충북 괴산의 마을 이름으로, 송시열(宋時烈)이 60세 때에 이곳에서 은둔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일로 인해 송시열을 지칭하는 별호로 사용되었다. 억시(抑詩)를 …… 진술하고 억시는 《시경》 〈억(抑)〉을 가리킨다. 90살의 위 무공(衛武公)이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경계하기 위해 이 시를 지어 날마다 사람을 시켜 자신의 곁에서 외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였다고 한다. 나이에 관계없이 더욱 학문에 정진할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오만함과 …… 것입니다 《서경》 〈익직(益稷)〉에 우(禹)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경계하기를, "단주처럼 오만하지 마소서. 그는 오로지 태만하게 놀이하는 것만 좋아하였으며, 오만하고 포악한 짓을 저지르기만 하였습니다.〔無若丹朱傲. 惟慢遊是好, 傲虐是作.〕"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우 임금이 이미 성인의 경지에 이른 순 임금을 경계한 것처럼 현재의 경지에 자만하지 말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도록 스스로 노력할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훗날 …… 터전 7일(日)의 일(日)은 월(月)의 뜻으로, 즉 7개월 만에 양효(陽爻)가 아래에서 하나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주역》 〈복괘(復卦)〉의 괘사(卦辭)에 "칠 일 만에 되돌아오니, 가는 것이 이롭다.〔七日來復, 利有攸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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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하당기 【신사년(1941)】 納遐堂記 【辛巳】 내가 일찍이 읽은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감춘부(感春賦)〉에 "머나먼 옛 사람의 정을 마음에 받아들였네."라는 구절이 있고, 또 "천년의 아득한 세월, 유독 내 마음에 와 닿네."라고 하여 그에 대해 거듭 표명하였다. 대저 지나간 옛날의 먼 정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유독 마음에 와 닿아 받아들인 것인가? 여기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대체로 '아득하게 멀다[遐遠]'라는 것과 대조되는 것은 '매우 가깝다[邇近]'라는 것이 이것이니, 사람의 정이란 매우 가까운 것에 가리게 되는 법이다. 처음에는 귀와 눈, 코와 입 등 내면의 욕구에 의해 이끌리게 되고, 마지막에는 부귀와 권세, 이익과 영달 등 외부에 대한 염원에 의해 내달리게 되니, 이리하여 마음이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대저 몸이 영욕의 길에서 초월하고 사물의 밖에서 서서 마음을 허명(虛明)하게 하는 것은 아득히 먼 영역을 밝게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와 같이 할 수 없으니, '아득하게 멀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경전에서 "먼 곳에 오르다."65)와 "먼 길을 가다."66)라고 서술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고, 아득하게 먼 도를 다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또 옛 성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이 주자가 천년의 정이 마음에 와 닿았다 말하고, 지금 학강(學岡) 정공(鄭公)이 '납하(納遐)'라는 편액을 새로 지은 문산재(文山齋)의 중앙 당(堂)67)에 내건 이유이다.신사년(1941) 여름에 내가 이 당을 방문하니, 공이 나에게 기문을 짓게 하였다. 내가 보건대, 이 당은 아득히 먼 경계에 의거하고, 시원스럽게 탁 트인 풍취를 점유하여 아래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막연히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또 방장산(方丈山 지리산)과 백운산(白雲山)68) 등 여러 명산들은 은둔하는 사람들이 깃들어 쉬는 곳이고, 신선들이 굴을 파서 거주하는 곳인데, 하늘 사이에서 흐릿하게 가물거리던 이 산들이 처마 밖으로 흔연히 와서 공수하니, 마치 상쾌한 기운끼리 서로 만나는 듯하고, 신령끼리 서로 감응하는 듯하였다. 이곳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초연한 생각이 들어 내면의 욕망에 의한 이끌림과 외부에 대한 생각의 내달림이 발생하지 않으니, 이 당에서 아득히 먼 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천년의 옛날을 기다릴 것도 없이 눈앞 앉아 있는 사이에서 얻을 수 있다.대체로 옛날의 먼 정이 마음에 와 닿아 당의 이름에 부치고, 산의 먼 정을 당에서 얻어 마음에 와 닿으니, 이는 안팎이 서로 기르는 것이라 하겠다. 비록 그렇지만, 공은 고상한 선비인지라 무릇 기뻐하고 사모할 만한 세간의 번잡하고 화려한 것들이 모두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니, 어찌 당에 건 편액의 문장을 기다려 마음에 수양하는 바가 있겠는가. 또 마음의 사이에는 원래부터 멀고 먼 이치가 갖추어져 있으니, 또한 어찌 밖으로부터 오는 것을 빌려 도움을 받은 뒤에 얻겠는가.다만 성탕(成湯)과 같은 성인과 공가(孔嘉)와 같은 현인으로도 오히려 대야와 솥에 명(銘)을 새겨 날로 새로워지고 더욱 공경하는 뜻을 잊지 않았으니69), 지금 공이 어찌 감히 스스로 내가 이미 잘하는 것이고,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고 여겨서 경계에 의해 만나는 것과 마음에 와 닿는 것으로 당을 빌려 먼 정을 받아들여서 그 지극한 경지를 힘써 사모하지 않겠는가. 이미 본바탕의 원리(元理)가 있는 경우이니,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주자와 같아서 힘써 사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장차 《상서(尙書)》와 《중용(中庸)》에 있는 궁극의 도를 다하여 천 년 전 성현을 따라 미치는 자가 있다면 아마도 공이 그 사람일 것임을 알고 있으니, 당 위에서 조용히 따르며 배우기를 원하는 날이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써서 공경히 답하였다. 余嘗讀朱夫子感春之賦, 旣有曰: "納遐情於方寸." 又以千載遙遙獨有會心申言之.夫往古之遐遠, 何與於我, 而乃獨會心而納之也? 是必有其說矣.蓋遐遠之對, 邇近是也.人之情蔽於邇近, 則始焉, 耳目鼻口之欲, 牽於內; 終焉, 富勢利達之念, 馳於外.於是乎方寸亂矣.夫惟身超乎榮辱之途, 立乎事物之表, 以致方寸虛明者, 非有昭觀乎遐遠之域, 則不能爾也.遐遠者何? 經傳所述陟遐、行遠之類是已.能盡遐遠之道者, 又古昔聖賢是已.此朱子所以有千載會心之語, 而今學岡鄭公揭納遐之扁於新築文山齋中堂者也.辛巳夏余過是堂也.公俾余記之.余見是堂, 據逈絶之境, 占淸曠之趣, 下視人寰, 旣漠然而不相干.且方丈白雲諸名山, 隱淪之所棲息, 仙流之所窟宅, 而縹緲於天際者, 欣然來拱於軒簷之外, 爽氣之若相値焉, 靈神之若相感焉.居斯也, 自不覺超然之想, 而內牽之欲、外馳之念, 無自而生.然則是堂遐情之納, 又不待千載之古而得之於眼前座間矣.蓋古昔之遐情, 會於心而寓之堂名; 山之遐情, 得之堂而會於心, 是爲表裏交相養焉.雖然, 公高士也, 凡世間紛華可喜可慕者, 擧無足以動其中, 則豈待堂宇扁章之間而心有所養? 且夫方寸之間, 元自具遐遠之理, 亦豈待外來借助而後得? 但以成湯之聖焉、孔嘉之賢焉, 猶借銘盤鼎而不忘日新、益恭之意, 今公烏敢自謂吾所已能, 吾心所具, 而不以境之所値、心之所會者, 借堂以納遐情, 而勉慕其至乎哉? 旣有本地元理境遇矣, 會心之同朱子而能勉慕矣.吾以是知將盡《尙書》、《中庸》究極之道, 而追及千載之聖賢者, 殆公其人也, 尙當從容乎堂上, 而願學有日焉, 爲之書此而敬復之. 먼 …… 오르다 《서경》 〈태갑 하(太甲下)〉에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하고, 먼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다.〔若升高, 必自下; 若陟遐, 必自邇.〕"라고 한 구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먼 …… 가다 《중용장구》 제15장에 "군자의 도는 비유하면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하며, 높은 데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함과 같다.〔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학강(學岡) 정공(鄭公) …… 당(堂) 학강 정공은 경남 함양 출신의 근대 유학자 정재경((鄭在璟, 1881~1960)이다. 문산재는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가성부락 뒤 보문산 중간지점 산속에 위치한 3칸짜리 집으로, 정경재가 청년시절에 건립하여 죽을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백운산(白雲山)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반암면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279m이며, 북쪽의 덕유산(德裕山)ㆍ남쪽의 지리산 등과 함께 소백산맥의 일부가 된다. 성탕(成湯)과 …… 않았으니 성탕은 중국 고대에 하(夏)나라를 정벌한 무공(武功)으로 은(殷)나라를 창업한 탕왕으로, 그는 세숫대야에 "진실로 어느 하루에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는 명문(銘文)을 새겨 두고 자신의 과실을 살피고 덕을 새롭게 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大學章句 傳2章》공가는 공자의 7세조인 공보가(孔父嘉)로, 송(宋) 나라에 벼슬하여 상경(上卿)이 된 그는 사당(祠堂)의 솥에 더욱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정(鼎)을 만들어 경계하는 말을 새겼는데, "대부(大夫)가 되어서는 고개를 숙이고, 하경(下卿)이 되어서는 허리를 굽히고, 상경(上卿)이 되어서는 몸을 굽혀 길을 갈 때에 담 옆으로 빨리 달려가면 다른 사람이 나를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명문을 새겨두고 더욱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左傳 昭公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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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 오공 행장 계유년(1933) 壽山吳公行狀【癸酉】 하루는 벗인 사익(士益) 오해겸(吳海謙)이 자신 선친 수산 거사(壽山居士)의 가장(家狀)을 안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내 부친의 덕행은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은 그대도 아는 바이다. 그대는 부친과 같은 고을 사람이니 그대에게 그럴 만한 믿음을 주었으니 그대가 행장을 지어주시게."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보건대 그가 행장을 청한 것은 문장을 잘해서가 아니라 글이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니,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가장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공의 휘는 병호(炳鎬), 자는 경중(景仲), 수산은 호이다. 오씨는 계통이 해주(海州)에서 나왔으니, 해주군(海州君) 현보(賢輔)가 시조가 된다. 대대로 벼슬아치가 나왔으니, 성균관 진사 정열(廷悅)이 우리 조선에 들어와 처음으로 부윤(府尹)을 지냈다. 희철(希哲)은 절도사(節度使)를 지냈으며, 진선(進善)은 참봉(叅奉)을 지냈다. 예부사(禮府使) 승필(承弼), 절도사(節度使) 종우(從禹), 현감(縣監) 윤희(允熙)를 거쳐 학정(鶴亭) 응창(應昌)은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맡았다. 광해군 때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이분의 손자인 명한(嗚翰)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학행으로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희태(希泰) 또한 가학을 이었으니, 이 분들이 공의 7대 이상이다.조부 성환(聖煥)은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강직하였다. 선친은 재기(在基)요, 선비는 풍천 임씨(豊川任氏) 태호(泰灝)의 따님이며 대사성(大司成) 량(樑)의 후손으로, 일찍 과부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켰다. 본생조는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동환(東煥)이다. 생부는 재풍(在豊)이며 생모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병권(炳權)의 따님이며 충경공(忠景公) 정란(廷鸞)92)의 후손으로 부덕이 넉넉하였다.공은 고종 갑자년(1864년) 7월 14일에 고부군(古阜郡) 만수리(萬壽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종가 종숙(從叔)의 후사로 출계하여 양부모를 생부모처럼 섬겼다. 생모 또한 후사가 없자 종자(從子) 학호(學鎬)로 후사를 이었으니, 매번 기일을 만나면 처연하게 슬퍼하면서 "우리는 죄인과 같다."라 하였다. 매일 반드시 일찍 일어나 당실과 궤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하여 자리에 먼지 하나 없었다. 몸가짐을 태만히 하거나 저속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일찍이 다급하게 말하거나 황급한 기색을 지니지 않았으며 타인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집을 다스릴 때는 검약을 앞세우고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 항상 마음이 담담하였다. 여러 종제들과 우애가 돈독하여 일을 논할 때 속마음을 말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이 있거든 반드시 나눠 먹으며 늙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사람을 상대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화기(和氣)가 무르익었으며, 상대방이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반드시 온화한 말로 달래었다. 비록 혐의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마음에 계교하지 않았으며 또한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승복하고 감화를 받아 화를 낸 자들은 화가 풀리고 사나운 자들은 행동을 조심하였다. 그러나 잡스럽고 올바르지 않은 무리에 대해서는 장차 자신을 더럽힐 듯 여기며 이르기를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친인척이라도 멀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가난한 벗과 곤궁한 친족에게는 비록 구휼할 힘이 없더라도 마음으로 항상 돌아보았으니, 불쌍하게 여기는 말이 단지 입으로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았다. 타인의 혼사와 상사에 부의할 때는 가난한 자들에게 더욱 마음을 다하였으며, 빈객을 대할 때는 입에 있던 음식을 뱉으며 나아가 맞이하면서 진정을 피력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문을 가득 채웠는데, 대부분 당대의 중망을 받던 이들이다.항상 아들을 경계하기를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말라." "남을 높이면 바로 이것이 나를 높이는 것이다." "한 마디 말을 함에 화복의 기미가 갈린다." "한 일이라도 잘 처리하면 음덕이 자손에게 미친다." "한 사람이 부덕하면 작게는 집을 망치고 크게는 나라를 망하게 한다." "대개 스스로 크다고 하여서 남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자신을 이롭게 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차라리 속임을 당할지언정 자세히 살피려 하지 말고, 차라리 두텁게 처리하다 실수할지언정 박하게 처리하다 실수하지 말라."라 하였으니 그가 평소 하는 말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이교도와 신학에 온 세상이 휩쓸리어 가자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않고 자손들을 검속하였다. 궁달로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며 아래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고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다. 자손이 잘못을 저지르면 문득 엄하게 꾸짖어 용서하지 않았다. 만년에 집안 살림이 점차 기울어 사람들이 걱정해주자 곧 "차고 기우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다."라고 하고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요히 거처하며 일이 없을 때는 문득 책을 뽑아들어 낭랑하게 읽으며 즐거워하였는데, 늙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공은 기가 가득하고 마음이 평안하여 일생 동안 건강하였기에 장수를 누릴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문득 을축년(1925년) 7월에 병에 걸려 11월 12일 위독해졌다. 유언을 청하니 말이 없다가 이윽고 장손을 불러 앞에 앉히고서 "사람의 도리는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을 아들다워야 하니, 효도와 공손, 충성과 신의뿐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 이 말을 반복하고 또 잊지 말라고 세 번 거듭하였다. 이 날 타계하시니 나이 62살로, 난산(卵山)의 등침(嶝枕)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부인은 고령 신씨(高靈申氏) 평구(平求)의 따님으로 귀래정 말주(末舟)93)가 유명한 조상이다. 부인은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어질고 착하여 공의 덕에 짝이 되기 충분하였다. 세 아들을 낳았으니 해겸(海謙), 해승(海升), 해곤(海坤)이다. 정근(貞根), 명근(明根), 그리고 고흥(高興) 유광영(柳光永)의 아내는 장남의 아들과 딸이다. 배근(培根), 이근(頣根), 삼근(三根), 인근(仁根)은 차남의 아들들이다. 정근의 아들로 형탁(炯卓), 명근의 아들로 형철(炯哲)이 있다.예전 내가 공의 산재(山齋)에서 구산 선사(臼山先師)94)을 모셨을 때 처음으로 공에게 절을 올렸는데 공은 헌걸차 키가 컸으며 모습은 살이 찌고 청수하였으며 풍모가 우아하고 중후하니, 장자(長者)임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익과 함께 구산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어 공의 집에 즐겁게 오가면서 공의 마음 씀과 삶을 절제하는 훌륭함을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 그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덕의 징표임을 믿게 되었다. 총괄하여 논하자면 인후함을 바탕으로 삼아 청수(淸秀)함으로 성취하였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행동하고 남을 사랑하며 의리를 앞세우고 이익을 멀리하는 덕은 타인이 미칠 바가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말세에 처하여 사특함을 물리치고 올바름을 지켰다. 이 때문에 안으로는 친족들이 열복하고 밖으로는 고을 사람들이 추중하여, 공이 죽는 날에 모두들 탄식하면서 "군자가 떠났구나."라고 하였으니, 여론의 공변됨이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아! 공의 어짊으로 더욱 거경궁리의 공부에 힘을 쌓고 천인성명의 깊은 이치를 궁구하였다면 능히 도술을 밝혀서 세도(世道)에 도움을 주었을 것인데 그렇게 할 겨를이 없었다. 비록 그러나 공이 마음속에 간직했던 것은 참으로 이에 있었으니, 이미 구옹(臼翁)을 열복하여 그를 따라 배웠으며 이어서 자질을 보내 스승으로 섬기게 하고서 매번 '뜻이 있는 자는 하고자 하는 일이 마침내 이뤄진다.'는 말로 권면하였다. 사우 가운데 공부를 하는 자들은 진심으로 좋아하여 오래 지날수록 더욱 존경하니, 지금도 인가의 후진 가운데 옛 유학의 덕을 따르며 신학문을 좇지 않는 것은 오씨 가문만한 데가 없다. 이는 공의 유운(遺韻)이 아니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에 공이 간직했던 실제를 속일 수 없으니, 삼가 아울러 써서 행장을 짓는다. 日, 吳友海謙士益, 抱其先君壽山居士家狀, 示余曰: "吾父之德行, 有足以傳後者, 子所知也, 子爲同鄕人, 可以見信, 子其狀之." 余惟其求也, 不以文而以可信, 有不可辭者, 遂按而敘之曰: "公諱炳鎬, 字景仲, 壽山號也.吳氏系出海州, 海州君賢輔, 爲上祖, 世襲冠冕, 成均進士廷悅, 始入我朝歷府尹, 希哲, 節度使, 進善, 叅奉, 自禮府使承弼節度使從禹縣監允熙, 至鶴亭應昌武宣傳出知宜寧縣, 光海政亂, 棄官遯跡.有孫嗚翰, 師沙溪金先生, 學行範世子.希泰亦紹家學, 是爲公七世以上.祖聖煥, 孝友剛直.考在基, 妣豊川任氏泰灝女, 大司成樑后, 早寡全節.本生祖敦寧府都正東煥, 考在豊, 妣全義李氏炳權女, 忠景公廷鸞后, 甚有婦德.公以高宗甲子七月十四日, 生于古阜郡萬壽里第, 幼而出爲宗家從叔後, 事所後如所生, 生庭亦無嗣, 以從子學鎬繼後.每當諱辰, 悽然而悲曰: "吾如罪人." 日必早起, 堂室几案, 明潔齊整, 座無一塵.身不設怠慢之氣, 口不出鄙倍之辭, 未嘗疾言遽色, 談人過惡.治家主儉約而不營利, 常淡如也.與羣從弟友篤, 論事吐懷, 有異味必分, 至老無失.接人款曲, 和氣藹然, 彼雖有失, 不加辭氣, 必溫言喩之, 雖有嫌不與較, 亦不介意, 故人皆承服而感化, 忿怒者釋, 暴悍者斂.至於異雜不正之徒, 則若將浼焉, 曰: "此等人, 雖姻親, 不得不疎之." 貧交窮族, 力雖未恤, 心常眷眷, 憫惻之言, 不啻口出.問人婚喪, 尤致意於孱弱, 待賓客, 吐哺迎接, 披露眞意, 故衣冠盈門, 多一時雅望.每戒子曰: "寧人負我, 毋我負人." "尊人便是尊己." "一言之發, 禍福之機." "一事善處, 蔭及子孫." "一人不德, 小則敗家, 大則亡國." "蓋不自大而輕人, 利己而害人." "寧見欺而不至察, 寧失厚而不失薄," 故其雅言, 類如此.異敎新學, 擧世滔滔, 而守正不撓, 撿束子孫.不以窮通易操, 御下寬而不苛.子孫有失, 輒嚴責不饒.晩而家業漸縮, 人爲之憂, 則曰: "盈朒常也", 無戚戚容.靜居無事, 輒抽卷朗讀而樂之, 老而不倦.公氣充心平, 一生康健, 期以遐壽, 忽以乙丑七月嬰疾, 至十一月十二日而革, 請遺命則無有, 俄而召長孫而前曰: "人之道, 父父子子, 孝悌忠信而已." 三復此言, 又申以勿忘者三, 以是日考終, 壽六十二, 葬于卵山嶝枕艮原.配, 高靈申氏平求女, 歸來亭末舟, 其顯祖, 孝慈仁善, 克配公德.生三子海謙·海升·海坤.曰貞根·明根, 高興柳光永妻, 長房男女.曰培根·頣根·三根·仁根, 次房男.貞根男炯卓, 明根男炯哲.昔余陪臼山先師于公之山齋也, 始拜公, 公頎而長, 貌豊而淸, 儀度雅重, 知其爲長者. 旣而與士益同師, 甚歡往來公家, 得以詳公用心制生之懿, 信其著於外者, 乃德之符也.總而論之, 仁厚爲質, 淸以濟之, 故不惟謙己愛人, 先義後利之德, 人不可及, 亦能處汙世, 而斥邪守正焉.是以內而宗族悅服, 外而鄕黨推重, 公沒之日, 莫不咨嗟曰: "君子逝矣." 輿論之公, 豈無以也. 噫, 以公之賢, 更得積累乎居敬窮理之功, 究觀乎天人性命之蘊, 吾知其能明道術而裨世程, 而不暇及也.雖然若公所存, 亶在乎此, 旣心悅臼翁而從之遊, 繼遣子姪而師事之, 每勵以'有志者事竟成'.士友之有學者, 中心好之, 久而愈敬, 至今人家後進, 食舊德而不歸新風者, 無如吳氏之門, 非公遺韻, 何以及此.是爲公所存之實, 不可誣者, 謹幷書以爲狀." 이정란 1529~1600.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문보(文父)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배티고개[梨峙]를 넘어 전라도로 침입하자 스스로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부민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켰는데, 군율을 엄히 하고 매일 순시를 하며 방비를 튼튼히 하니 공격의 틈을 엿보고 있던 적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1597년 정유재란에 다시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하자, 수성의 계책을 제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주성을 지키던 명장(明將)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니, 성중에서는 크게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다시 조정에 읍소하여 전주부윤이 되어 성을 지켰으며 삼도소모사가 되었다. 신말주 1439~?. 본관 고령(高靈). 자 자집(子楫). 호 귀래정(歸來亭). 단종을 축출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한때 순창(淳昌)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후에 대사간과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구산 선사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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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학생 최공 행장 병자년(1936) 學生崔公行狀【丙子】 오호라! 지금 세상은 상례(喪禮)가 다 무너져버렸으니 식자들이 낙담한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우리 고을에 최민렬(崔敏烈) 군은 부친의 상을 예로써 거행하였으며 또한 여묘 살이를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칭송하면서 이르기를 "이는 근래 형과 아우 두 효자가 거상을 잘한 것이 소련과 대련95)의 손자와 종손 같으니, 참으로 그 집안의 인물이로다."라고 하였다. 나는 '민렬은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다만 효 한 가지만으로 이름을 날린 것이 아닌데, 그러나 지금 세상이 이러하기에 여론은 효자로 귀결되었다.'라고 생각하였다.고 사인(士人) 휘 병권(秉權), 자 치형(致衡)은 효도로 이름난 형제 가운데 형인 덕계 거사(德溪居士) 찬수(燦秀)96)의 조카이며 아우 대수(大秀)97)의 아들로, 민렬이 예로써 상례를 치른 대상이다. 민렬이 울면서 나에게 이르기를 "제 부친의 행적은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집안에서의 행실〔內行〕을 기록으로 남길 만합니다. 아저씨는 우리 부친과 친형제와 다름없어서 가장 잘 알고 계시니, 원컨대 행장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가까운 친지(親知)인데 아름다운 말로 꾸미다가 친지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해 도리어 불경함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글이 조금 미진해도 무방하다고 여겨 이에 다음과 같이 짓는다.공의 어질고 착하며 온화하고 공손함은 어려서부터 그러하였다. 자라서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효로써 선조를 받들며 두터움으로 사람을 대한다.〔奉先以孝, 接人以厚〕'는 여덟 글자의 지결을 종신토록 가슴에 지녔다. 앞장서서 종친을 통솔하여 규정을 세우고 재물을 정돈하여 제사가 영원히 이에 힘입어 지내지게 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차라리 자신이 손해 볼지언정 남을 이롭게 하고, 남의 재물을 앗아 자신의 재물을 불리지 않았다. 겉치레를 하지 않아 말하기 전에 이미 믿음을 주었다. 향당에서 칭송하기를 "아무개는 효성스럽고 착하며 전아(典雅)하고 평실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오호라! 천지가 뒤집히고 강상이 무너져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훼손하고 학문은 가르침을 속여 변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공은 몸소 농사지으며 집안을 지키고 세 아들을 유학으로 가르쳐서 오랑캐로 변하거나 사교(邪敎)에 물들지 않게 하였으며, 세 아들 모두에게 출입을 가리게 하였으며 다만 옛날의 도로서 말해주었다. 유문의 장덕(長德)을 보거든 반가움이 얼굴에 드러났으며, 또한 산재에 서당을 열어 스승을 모셔오고 학도를 모아 사풍을 진작시켰다. 이윽고 또 스승이 집을 짓는 것을 도와 있는 힘껏 주선하였다. 이에서 공이 의를 행한 것을 볼 수 있으니, 위로는 효자인 부친을 계승하였고 아래로는 효자 자신의 아들들을 계도하였다.삼가 생각해보니, 내행은 근본이요 사업은 말단이다. 근본이 있으면 이에 말단도 있게 된다. 공이 평소 집안에서 행한 것은 바로 공자가 말한 '이 또한 정사가 된다.'98)는 것에 해당하니, 치국평천하의 본말이 애초에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입언하는 자가 그 근본의 관점에서 잘 살핀다면 공의 숨겨져 있는 것을 널리 드러낼 수 있으며 또한 그 나머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호라! 이에 공의 행장을 짓기 충분하니 군자들이 채택하여 글을 쓰는 소재가 될 것이다.공의 계통은 전주(全州)에서 나왔으니, 고려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아(阿)가 시조이다. 본조에 들어와 공신으로 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학행으로 서산사(書山祠)에 배향된 희정(希汀)99)이 공의 12대조이다. 전주 이씨(全州李氏) 참의(參議) 시발(始鏺)의 따님이 공의 모친이다. 학생 관수(灌秀)와 진사 정낙주(鄭洛周)의 따님이 생부모이며, 양부모와는 단문의 친척100)이다. 부인은 나주 나씨(羅州羅氏) 통정(通政) 수엽(守燁)의 따님이다. 아들은 민렬(敏烈), 종렬(宗烈), 일섭(一燮)이며, 사위는 성주(星州) 이광열(李光烈), 수원(水原) 백남익(白南益), 언양(彦陽) 김주환(金周煥), 전주(全州) 이희우(李喜雨)이다. 장남의 아들은 규홍(圭洪)이며 딸은 남양 홍환표(洪煥杓)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아들은 규진(圭珍), 규면(圭冕), 규준(圭準)이다. 삼남의 아들은 규순(圭栒), 규연(圭衍), 규훈(圭葷)이다. 첫째 사위의 아들은 희준(喜俊), 희일(喜一)이며, 둘째 사위의 아들은 정기(正基)이며, 셋째 사위의 아들은 강(壃)이며, 넷째 사위의 아들은 종훈(鍾勳)이다. 공은 신미년(1871년) 9월 2일에 태어나 을해년(1935년) 7월 21일에 타계하였으니, 순창군(淳昌郡) 복흥면(福興面) 조동(槽洞) 모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嗚呼, 今之世, 喪紀壞盡, 有識之寒心, 非一日矣.吾鄕有崔君敏烈者, 乃執父喪以禮, 而又累然廬墓下, 人咸稱以孝子曰: "是爲近世伯仲雙孝, 善居喪, 若小大連者之孫若從孫, 固其世類也." 余謂'敏烈志于學, 不獨以一孝成名者.然以今世也, 故輿論歸之.' 故士人諱秉權字致衡, 雙孝之伯, 德溪居士燦秀之從子, 其仲大秀之子, 而敏烈爲之執喪者也.敏烈泣謂余曰: "吾父事業, 雖不著, 內行有可書者, 叔於吾父, 如親昆弟, 知之最悉, 願有以狀之." 余思以親知之最, 與其有溢美之辭不成親知而反爲不敬, 寧可有未盡, 乃爲之敘曰: "公之仁善和順, 自幼而然, 及其長也, 受庭訓, 奉先以孝, 接人以厚, 八字訣佩服終身.倡率宗族, 立規整財, 俾祀事永賴.應接人事, 寧損此而益彼, 無瘠人而肥己, 不修邊幅, 信在言前.鄕黨稱曰: "某也孝善典實人." 嗚呼, 天地翻覆, 綱常頹敗, 人毁形學譸敎, 無變不有, 公躬耕保家, 敎三子以儒學, 勿變夷染邪, 幷令簡其出入, 惟告以往.見儒門長德, 則喜形于色, 又爲之開社山齋, 聘師聚徒, 俾振士風.旣又助師築室, 極其周章.此皆公行誼之可見, 而上以承孝子之父, 下以啓孝子之子者也.竊惟內行本也, 事業末也.有其本, 斯有末矣.且公生平行於家者, 乃夫子所謂'是亦爲政'者, 而治平之本未, 始不在此.立言者因其本而善觀之, 則庶可闡幽於公, 而推其餘也, 嗚呼, 是足以狀公, 爲君子採擇之資矣.公之系出全州, 高麗侍中文成公阿, 上祖也.本朝功臣贈參判, 學行享書山祠希汀, 十二世祖也.全州李氏參議始鏺女, 其妣也.學生灌秀進士鄭洛周女, 爲本生父母, 於所後, 爲袒免親也.其配, 羅州羅氏通政守燁女, 其男敏烈·宗烈·一燮, 其壻星州李光烈·水原白南益·彦陽金周煥·全州李喜雨.長房男圭洪, 女南陽洪煥杓, 次房男圭珍·圭冕·圭準, 三房男圭栒·圭衍·圭葷.長壻男喜俊·喜一, 次壻男正基, 三壻男壃, 四壻男鍾勳.生于辛未九月二日, 卒于乙亥七月二十一日, 葬于淳昌郡福興面槽洞某坐原." 소련과 대련 《예기》 〈잡기(雜記)〉에서 공자가 소련과 대련을 칭찬하면서 "소련과 대련은 거상을 잘했다. 3일 동안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3개월 동안을 해이하게 하지 않았으며, 1년 동안을 슬퍼하였고, 3년 동안을 초췌하게 지내었다.[孔子曰 小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憂]"라 하였다. 덕계 거사 찬수 〈덕계최공묘갈명(德溪崔公墓碣銘)〉 참조. 대수 〈효자최공묘갈명(孝子崔公墓碣銘)〉 참조. 이……된다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에게 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공자가 "《서경》에 효(孝)에 대해 말하면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그것을 정치하는 데에 미루어 행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꼭 벼슬을 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는가.〔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라고 하였다. 《論語 爲政》 덕촌 최희정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정지(汀之), 호는 덕촌(德村)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德川面)에서 태어났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여진족 속고내(速古乃)가 침입하자 조광조의 천거로 종성판관(鍾城判官)에 임명되어 종성의 토병(土兵)을 인솔하고 적을 대파(大破)하였다. 이어 갑산(甲山)·강계(江界)·위원(渭原)까지 추격하여 소탕한 공으로 품계가 올랐고, 민전(民田)이 하사되었으나 사양하였다가 그 뒤 고향 근처에 있는 동축산(東竺山)을 특사(特賜)받았다.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사(賜死)되자, 종일 통곡하고《용망호서(龍亡虎逝)》라는 시(詩)를 짓고 난 후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단문의 친척 자기를 중심으로 삼종형제 즉 동고조(同高祖) 8촌까지가 본종(本宗)으로서 시마(緦麻) 3개월 복을 입고, 증고조의 자식 즉 고조의 형제 이하가 5세로서 이들에 대해서는 정복(正服)인 시마를 입을 수 없고, 단지 왼쪽 소매를 벗어 팔뚝을 드러내고〔袒〕, 갓을 벗고 좁은 삼베로 머리를 묶어〔免〕 슬픔을 표시할 뿐이며, 6세가 되면 단문마저 하지 않는다. 《禮記 大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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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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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호에게 보냄 정축년(1937) 與金文鎬 ○丁丑 제가 그대의 조부 병암선생(김준영)에게 외람되게 깊은 사랑을 받았고 저 또한 기꺼이 성심으로 복종했으니, 선생이 주신 편지와 제가 쓴 뇌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문에 일이 많은 이래로 매번 스스로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어떻게 하면 황천에서 선생을 일으켜 세워 이 난리를 바르게 할 것인가?"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북으로 떨어져 쓸쓸이 지내어 한 번 선생의 자손과 문인을 만나 이러한 회포를 한바탕 토로할 길이 없는 것을 한스러워했습니다. 뜻밖에도 10여 년 전에 한번 만난 기억을 되살려서 생사를 묻고 다시 선생의 유집 간행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니, 그 감격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 오직 선생의 언행과 심술이 세상에 드러나서 시비를 정하고 사문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은 사적으로 감회를 토로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선사가 대고에서 노인오(노동원)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하기를, "병암이 병들지 않았을 때엔 그 깊은 학문과 바른 식견, 굳은 절조와 두터운 덕은 위로 전옹의 단서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가 불행히도 갑자기 죽었다. 나머지 여러 제자들은 의망할 자 없으니, 나는 선숙처럼 눈물을 이길 길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사가 당일에 적통을 전한 정확한 근거의 윤문이니, 이른바 간재선생(전우)의 적전자가 이런 교훈을 받아 공론으로 발표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주 인쇄본과는 다른 내용임을 보고 이 편지를 없애서 선사가 적통을 전한 근거를 대고에서 보이지 않게 했으니, 그 마음가짐은 정말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약 공자의 70제자가 《노론》을 간행할 때 안회가 학문을 좋아하고 노여움을 옮기지 않으며 과실을 두 번 하지 않았는데 불행히 목숨이 짧았다는 말을 없앤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대는 이 일에 대하여 이미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선집 간행을 보고 평일에 높이 존경했기 때문에 감히 침묵할 수가 없어서 이런 말들을 갖추어 아뢰니, 현명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하십니까. 僕於尊王考炳菴先生, 猥蒙深愛, 僕亦悅服之以誠, 觀於先生下書及鄙之誄文, 可知矣.自斯文多事以來, 每自心語曰: "安得起先生於九原, 而靖此亂也?" 然而南北落落, 更恨無由一見先生之子孫門人, 而一吐此懷矣.料外承賜記念於十數年前一面之餘, 既問之以死生, 又報之以先生遺集刊行有日, 其爲感戢, 已不暇言.惟是先生言行心術, 著顯於世, 而其能定是非, 安斯文者, 不待私相吐懷而人人可見, 何幸何幸.先師大稿答盧仁吾書有曰: "炳菴無恙日, 意其邃學正識堅操厚德, 可以上續全翁之緒, 此友不幸遽九原矣.自餘諸子, 未有可擬望者, 區區不勝禪宿之淚爾." 此正先師當日傳統之的據輪文, 所謂艮齋先生之嫡傳者, 受諸此訓, 而發於公論也.夫何人見獨異晉印之本, 削去此書, 使先師傳統之據, 無見於大稿, 其心所在, 誠不可測也.如使七十子之徒刊行《魯論》, 而刪去顏回好學不遷不貳, 不幸短命之語, 則天下寧有是事? 未知座下於此事, 已聞之乎? 尚未也乎? 今於先集刊行之示, 區區揆以平日尊慕, 有不敢含黙者, 具此以聞, 明見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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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암 최공 행장 갑신년(1944년) 斗菴崔公行狀【甲申】 공의 휘는 병현(秉鉉), 자는 처현(處玄), 두암(斗菴)은 호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고려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아(阿)가 시조가 된다. 3대를 지나 월당(月塘) 담(霮)은 본조에 들어와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 되었는데, 덕과 학문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분이 전농소윤(典農少尹) 득지(得之)를 낳았다. 득지는 현감(縣監) 자목(自睦)을 낳았으니, 자목이 처음으로 고부(古阜)에 거주하였다. 3대를 지나 덕촌(德村) 희정(希汀)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중종 병자년(1516년) 선생은 종성 판관(鍾城判官) 판관에 제수되어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12대조이다. 고조는 명후(命垕), 증조는 선성(善性), 조부는 영순(永淳), 부친은 유수(儒秀)로, 부친의 본생(本生) 3대이다. 선비(先妣)는 부안(扶安) 김씨 광진(光鎭)의 따님으로 딸 한 명을 낳았고, 계비는 동복(同福) 오씨 경열(敬悅)의 따님으로 우덕면(優德面) 오공리(五公里) 집에서 공을 낳았으니, 고종 임신년(1872년) 6월 2일이었다.공은 어려서 몸집이 좋고 크며 남들보다 총명하였다. 장성하여 어질고 자애로우며 공변되고 정직하였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겨 뜻을 잘 받들고 좋은 물건을 마련하여 드렸다. 갑오년(1894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 동안 매우 애통해 하였으며, 모친을 모심에 더욱 공경하고 여러 아우들을 깊이 사랑하여 교육을 시켜서 학문을 성취하였다. 부친의 묫자리가 좋지 않은 것을 항상 걱정하여 평소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길지를 얻어 다음날 아침에 가서 보니 전부 꿈에서 본 것과 같았다. 이에 가산을 털어 산을 사서 편안히 모셨다. 부친과 조부로부터 여러 선조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빗돌을 세우고 명(銘)을 기록하여 석물(石物)을 빠트리지 않았다. 선친의 생부모를 위하여 또한 지성으로 길지를 구해 마침내 이장(移葬)의 뜻을 이루었다.곤궁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니 향리에 횃불을 들고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다. 친족을 사랑하고 인척간에 돈독히 하였으며, 혼인과 초상의 부의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크고 작은 종친의 일에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니 온 가문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손님들이 집에 가득하여 공북해(孔北海)의 풍치101)가 있었다. 만년에 일을 아들에게 맡기고 고서에 뜻을 붙여 그 속에서 무젖어 스스로 즐겼다.을해년(1935년) 7월 8일 타계하니 향년 64세였다. 고을 사람들이 앞 다퉈 만사를 지으니 5백여 수나 되었다. 정읍군(井邑郡) 정주읍(井州邑) 삼산리(三山) 뒷산기슭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 통정(通政) 영휴(永休)의 따님으로 공보다 ■■년 먼저 타계하였으니, 묘는 정읍군 소성면(所聲面) 화룡(化龍)의 묘향에 있다. 계비는 창녕 장씨(昌寧張氏) ■■의 따님이다. 아들은 정렬(錠烈)은 박씨 소생이다. 장씨 소생으로 아들은 승렬(承烈)과 우섭(于燮)이 있고 딸들은 고부 이영균(李永均), 남양(南陽) 홍순무(洪淳武), 함열(咸悅) 남궁한(南宮熯), 고흥(高興) 류유근(柳有根)에게 시집갔다. 승렬은 공의 아우 병■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정렬의 아들로 기홍(基)과 기영(基永)이 있다. 우섭의 아들로 재천(載天), 재■, 재■가 있다.공은 키가 크고 체격이 크며 행동거지가 차분하고 무거워 바라보면 존경심이 인다. 말과 웃음이 구차하지 않으며 즐거움과 성냄을 바로 드러내지 않았으니 가까이 다가가면 친해질 수 있었다. 내가 일찍이 공의 여막을 지나다가 외모를 보고서 덕을 지닌 사람임을 알았다. 후에 여론을 들으니 과연 그 본 바와 같았으며, 지금 행록을 보니 또 들은 바와 같았기에 어긋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고을에 세 가지로 만 백성을 가르쳐서 빈례(賓禮)로 조정에 천거한다.'102)고 하였는데, 공은 말세에 태어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효도와 우애, 친인척간에 화목함과 벗과의 신의와 가난한 이를 구휼하는 여섯 가지 행실을 잘하였으니 즉 아름다운 자질이 대단히 뛰어나다. 만일 세 가지가 고대에 있었던 것과 완전히 같다면 빈례로 천거하는 것에 버금갔을 것이다. 사람을 살피는 자는 어찌 자질이 뛰어난데 학문이 적은 것을 병통으로 여기겠는가. 이에 행록에 의거하여 행장을 지어 정렬에게 주면서 숨은 행적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취사선택할 자료로 삼게 해 달라고 청한다. 公諱秉鉉, 字處玄, 斗菴號也.全州之崔, 以高麗侍中文成公阿, 爲上祖.三傳至月塘霮, 入本朝, 集賢殿提學, 德學著世, 是生得之典農少尹, 生自睦縣監, 始居古阜, 歷三世至德村希汀, 學于靜菴趙先生門.中廟丙子, 先生薦除鍾城判官, 討女眞有功, 贈兵曹參判, 是爲十二世祖.高祖命垕, 曾祖善性, 祖永淳, 考儒秀, 考之本生三世也.妣, 扶安金氏光鎭女, 生一女, 同福吳氏敬悅女, 擧公于優德面五公里第, 洪陵壬申六月二日也. 幼而形貌豊碩, 聰明過人, 及長仁慈公直, 孝事父母, 志物俱盡.甲午遭外艱, 三年致哀, 奉母益敬, 深愛諸弟, 以敎以成.恒慮考墓靡寧, 寢食不安, 一夜夢得吉地, 詰朝往見, 一如所夢, 乃傾家買山而安厝.自父祖以及諸先墓, 皆樹石記銘, 儀物無闕, 爲先考本生父母, 亦誠求吉地, 竟得遂意緬奉.周窮恤貧, 鄕里有待以擧火者.愛族敦姻, 婚助喪賻, 特致其厚.大小宗事, 公平處置, 一門欣然.賓客滿堂, 有孔北海風致.晩年事聽於子, 寓意古書, 優遊自適.以乙亥七月八日卒, 享年六十四, 鄕人士爭致挽誄, 多至半千, 葬於井邑郡井州邑三山里後麓卯向原, 配密陽朴氏通政永休女, 先公■■年而卒, 墓在井邑郡所聲面化龍卯向, 繼配昌寧張氏■■女.男錠烈, 朴氏出, 承烈·于燮, 女適古阜李永均·南陽洪淳武·咸悅南宮熯·高興柳有根, 張氏出.承烈出爲公弟秉■後.錠烈男, 基洪基永.于燮男, 載天·載■·載■.公幹修體大, 動止凝重, 望之可敬, 言笑不苟, 喜怒不遽, 卽之可親.余嘗過公廬, 見其外, 知爲有德人, 後聞輿論, 如其所見, 今見行錄, 又如所聞, 竊自幸不謬也.古者以鄕三物, 敎萬民而賓興之, 公生乎叔季, 不待敎而能孝友睦婣任恤之六行, 則其天稟之美, 有大異者, 而旣有三物之一如在古代, 庶可列乎賓興流亞矣.觀人者, 豈可以多質少文病之哉.玆庸依錄成狀, 副錠烈, 請俾作闡幽家材擇之資焉. 공북해의 풍치 북해는 한(漢) 나라 때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북해 태수(北海太守)를 지낸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공융은 성품이 너그럽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선비들을 좋아하고 후생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동이에는 술이 빌 때가 없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孔融列傳》 고을에……천거한다 《주례》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하는데,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라 하였다. 《소학》 〈입교(立敎)〉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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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최공 행장 기사년(1929) 學生崔公行狀【己巳】 하루는 최태일(崔泰鎰) 군이 선친의 가장(家狀)을 지니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친께서 부모를 섬긴 효행은 타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며, 집안에 거처한 내행(內行)은 순수하고 독실하며 처세에 의리를 중시하고 올바름을 지켰습니다. 다만 가난하게 살다가 돌아가시니 그러한 사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원컨대 글을 지어 널리 선양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에 최군이 단정한 선비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말도 믿을 수 있으며, 또한 예전에 공에게 인사를 드릴 때 순수하고 질실(質實)한 사람임을 알았다. 이에 가장(家狀)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공의 휘는 상현(上鉉), 자는 군칠(君七)이다. 최씨는 계통이 전주(全州)에서 나왔다. 고려 집현전 대제학인 문충공 휘 군옥(羣玉)이 시조가 된다. 시대를 내려가 만육(晩六) 선생 휘 양(瀁)80)에 이르러, 도덕과 절의가 한 시대에 으뜸이었으니 이 분이 공의 16대조이다. 직제학(直提學)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된 휘 진명(進明), 군수(郡守)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된 휘 여관(汝寬), 춘추관 한림(春秋舘翰林)인 휘 팔준(八俊)은 만육의 아들과 손자와 증손이다. 공의 증조의 휘는 명경(命憬)이고, 조부의 휘는 수일(守一)이며, 부친의 휘는 재수(在洙), 모친은 경주(慶州) 정씨(鄭氏) 기순(奇淳)의 따님이다. 휘 재우(在佑)와 고흥(高興) 유씨(柳氏) 제두(濟斗)의 따님은 낳아주신 부모이다.공은 철종 정사년(1857년) 4월 8일에 태어났는데, 17살에 막내 아버지의 후사로 나갔다. 자못 성품이 괴팍한 여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모친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날마다 공을 비방하는 것을 일삼아 모친이 나타나지 말라고 물리쳤는데, 은밀히 극심하게 못살게 굴어 외부인은 알지 못하였다. 공은 성질을 참으며 몸을 부지런히 놀려 더욱 자식의 직분을 부지런히 하면서 힘써 오직 부모의 뜻을 받들었다. 서모의 아우와 재산을 나눌 때, 부모의 뜻은 현격하게 차별하였는데도 또한 온전히 뜻을 받들었으며 죽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상을 당하여 부장(副葬)하는 물건을 정성을 다해 마련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서모의 아우는 성격이 완악하고 오만하여 집안의 애물단지였는데, 한결같이 참고 용서하며 성심으로 깨우쳐 뉘우치고 고치기를 바랐다. 그가 함부로 사치하여 가산을 탕진하자 땅과 곡식을 나눠주어 삶을 꾸려나가게 하였다.무자년(1888년)에 큰 흉년이 들어 음식이 다 떨어져 3개월을 풀뿌리를 캐 먹었는데도 절대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다. 갑오년(1894년) 동학이 일어나자 여러 고을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리듯 쓸려 들어갔다. 같은 마을에 이 아무개는 그 괴수로 위세를 떨쳐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는데, 즉 그는 공의 자형(姊兄)으로 공에게 그를 따르라고 매우 달래고 위협하였으나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정사년(1897년)에 약간의 토지를 사고서 개인 계약서를 받고 관가의 증명서를 받지 못하였다. 후에 옛날 주인이 다시 그 땅을 사니, 어떤 사람이 "법사(法司)에 고발하면 내가 마땅히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무연(憮然)히 탄식하기를 "그의 나쁜 습속을 혼내려고 살던 곳에 몸을 굽히는 것을 나는 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다시 백 원의 돈을 주니, 그가 마침내 감동하고 부끄러워하여 땅을 돌려주었다.을축년(1925년) 4월 17일 돌아가셨으니, 임시로 정토산(淨土山) 아래 산북리(山北里) 앞 산기슭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曹氏) 병민(秉玟)의 따님이니 공희공(恭僖公) 흡(恰)의 후손으로 부덕을 두루 갖추었다. 장남은 태일(泰鎰)이고 차남은 순종(淳宗)이며, 두 딸은 예천(醴泉) 임옥기(林玉基)와 완산(完山) 이창의(李昌儀)에게 시집갔다. 태일은 남양(南陽) 홍재범(洪在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창식(昌植), 현식(賢植), 강식(康植)을 두었다. 순종은 언양(彦陽) 김병순(金炳淳)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외손은 임일석(林逸錫)과 임이석(林理錫)이 있다.공은 천성이 근검하여 가난한 살림에 힘써 농사지어 살림을 꾸렸다. 구차하게 남과 일치하려 하지 않았으며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만족할 줄을 알았다. 자신에 쓰는 것은 매우 박하였지만 곤궁한 사람을 구휼하였으며, 흉년에는 힘을 다하여 넉넉하게 베푸니 온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항상 친척 가운데 가난하여 살기 힘들 자가 있으면 자신이 병이 난 것처럼 아파하였다. 임종에 미쳐서도 누차 말하기를 '사람에게 재물을 빌려주었더라도 차마 독촉하지 말라.'고 하니, 갚지 않은 자가 반 정도 되었다. 일찍이 이해의 다툼 때문에 입으로 업신여기거나 욕설을 내지 않았으며 발은 송사의 뜰에 이르지 않았다. 평생 몸가짐을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듯하였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실수가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친하거나 멀거나 따지지 않고 진정을 다하고 피차의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약속할 때는 반드시 먼저 행하고서 후에 허락하였다. 이 모든 것은 공의 자질이 도에 암합한 것인데, 오히려 소소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만약 공의 평생의 큰일과 어려움을 당한 것으로 말하자면, 후사로 들어간 집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처함에 부모와 형제 사이에서 도를 잃지 않았으며, 동비(東匪)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달래고 협박하며 뜻을 꺾으려 하였지만 올바름을 지켜 기세등등한 인척에게도 뜻을 꺾이지 않았으며, 사는 마을에서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온 세상이 바람에 휩쓸려가는 상황에서 춘추의 의리를 세웠으니, 이는 실로 경전을 궁구하여 도를 아는 사람도 하기 어려운 바이거늘 공은 능히 이것을 하였다. 대개 사람은 본래 밝은 마음을 지니고 사물은 지극히 마땅한 이치를 지녔으니, 공을 비록 "학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이런 이치를 구하였으니 열심히 공부하여 식견을 갖추었다. 자하가 이른바 '내 반드시 학문하였다고 이르리라.'81)라고 한 것은 이를 이름인가.대개 공은 평소 말하기를 "사람이 되어 예의와 염치가 없으면 이는 금수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하늘 아래 백성들의 선악은 하늘이 환하게 보고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라고 하였으며, 또한 "사람이 복을 받고 받지 못하는 것은 모습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선을 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악을 하면 반드시 재앙을 받는다는 말을 나는 익숙히 듣고서 마음에 새겨두었다."라고 하였으니, 이에서 더욱 공이 마음에 지닌 바를 알 수 있다. 一日崔君泰鎰, 袖其先公家狀, 示余而泣曰: "吾父事親孝行, 人難能, 居家內行, 淳篤, 處世重義守正.惟是窮約而沒, 人無知者, 願有以闡之." 余素知崔君莊士, 其言可信, 且昔拜公顔, 識其爲淳實人, 乃按狀而敘之曰: "公諱上鉉字君七.崔氏, 系出全州.以高麗集賢殿大提學, 文忠公諱羣玉, 爲鼻祖.傳至晩六先生諱瀁, 道德節義, 卓冠一世, 是爲公十六世.直提學贈都承旨諱進明, 郡守錄原從勳諱汝寬, 春秋舘翰林諱八俊, 晩六子孫曾也.曾祖諱命憬, 祖諱壽一, 考諱在洙, 妣慶州鄭氏奇淳女, 諱在佑及高興柳氏濟斗女, 其所生考妣也.公以哲廟丁巳四月八日生, 年十七, 出爲季父后.有一妹, 性頗乖恃, 慈闈鍾愛, 日以毁公爲事, 使擯不見容, 加以隱禍孔慘, 外人莫知.公忍性勞體, 益勤子職, 惟以順親志爲務.與庶弟析箸, 親意懸有厚薄, 亦一切承順, 沒齒無言.及丁憂, 附身之物, 誠信無憾.庶弟性頑傲, 幾爲家禍, 一幷忍恕, 誠心曉喩, 望其悔悛.及荒侈破産, 割田捐粟, 以資其生.歲戊子, 大歉乏食, 咬菜者三月, 絶不稱貸於人.甲午東亂, 列邑風靡, 有同里人李某, 其魁也, 而威熖懾人, 卽公姊夫, 極其慫慂誘怵, 而終不撓.丁巳, 買土若干, 受私契而無官證, 後舊主再買, 有人曰: "可告法司, 吾當證之." 公憮然歎曰: "爲懲彼習而屈身所閭, 吾不爲也." 復與百圓金, 彼卒感愧歸土.以乙丑四月十七日卒, 權葬于淨土山下山北里前麓子坐原, 配昌寧曹氏秉玟女, 恭僖公恰后, 婦德備至.長男卽泰鎰次淳宗, 二女醴泉林玉基·完山李昌儀.泰鎰娶南陽洪在範女, 有男昌植·賢植·康植.淳宗娶彦陽金炳淳女.外孫林逸錫·理錫也.公天性勤儉, 居貧食力, 不苟合人, 安分知足, 自奉甚薄, 而能賙窮匱, 儉歲尤極力優施, 擧里咸頌.常念宗族貧無資生者, 若疾在己.逮屬纊, 猶累言之, '有貸給於人, 不忍督取.' 不見報者居半.未嘗以利害之爭, 口出慢詈, 足至訟庭.平生謹身, 如臨深履薄, 臨事如恐有失.接人, 無親疎, 用情實, 去畛域, 與人約信, 必先踐後諾.凡此皆公資質之暗合於道者, 猶可謂之疏節, 至若公生平大致遭難言之, 變於所後之家而處之不失其道於父母兄弟之間, 遇誘怵之撓於邪亂之世, 而守正不奪於姻親威熖之際, 恥屈身於所閭, 而立春秋之義於擧世風靡之中, 此實窮經識道者之所難, 而公則能之.蓋人有本明之心, 物有至當之理, 公雖曰未學, 以此心究此理, 煞用工夫, 越有見識也.子夏所謂'吾必謂學'者, 此之謂歟.蓋公雅言曰: "人而無禮義廉恥, 是禽獸也." 曰: "下民善惡, 天鑑孔昭, 可不畏乎." 曰: "人之福不福, 不在貌在於心, 作善必福, 作惡必殃, 吾之熟耳銘心者也." 此尤可知公所存也." 만육 최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함(伯函), 호는 만육(晩六)·장륙당(藏六堂)이다. 외삼촌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한 이후 이부 상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포은 정몽주가 순절하게 되자 벼슬을 내어 놓고 진안군 백운면 중대산(中臺山)으로 낙향한 이후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내……이르리라 이 말은 《논어》 〈학이(學而)〉에 보이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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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와 김공 행장 신사년(1941) 明窩金公行狀【辛巳】 공의 휘는 영철(永喆) 자는 봉경(鳳卿)으로, 명와(明窩)는 호이다. 김씨는 계통이 부령(扶寧)에서 나와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세상에 이름을 날린 분들을 들어보면, 고려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구(坵)는 최항(崔沆)이 불서를 간행한 것을 배척하여 정도(正道)를 붙들어 세웠다. 문한 학사 충선공(忠宣公) 여우(汝盂)는 아우 안무사 승인(承印)에게 강릉(江陵)에 성묘(聖廟)를 처음으로 세우게 하였다. 이 두 분은 모두 사문(斯文)에 공이 있기에 사림에서 도동(道東) 사원을 세워 제향을 지냈다. 고부(古阜) 군사 광서(光叙)는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두고서 두문동(杜門洞) 72현과 그 절개를 함께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사마 매죽당(梅竹堂) 종(宗)이 학문에 매진하고 뜻을 숭상하여 기묘(己卯) 제현들과 진퇴를 함께 하였다. 선릉 참봉 죽계(竹溪) 횡(鋐)은 도학으로 사림들의 추앙을 받아 사원이 세워졌다. 이것이 유천공(柳川公)의 9대 이상이다.조부는 서각(瑞珏)으로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바르고 곧았으니, 그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수를 누려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기에 위로 삼대의 조상들이 추증의 영광을 받았다. 부친 홍석(泓錫)은 호가 송암(松)으로, 수를 누려 통정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부인은 시산(詩山) 허씨 균(均)의 따님이며, 계비(繼妃)는 전주(全州) 최씨 수(洙)의 따님이다. 공은 철종 기미년(1859년) 4월 15일에 태어나셨고 무인년(1938년) 5월 20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80이다. 명당리(明堂里) 뒤쪽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전주(全州) 최씨 흠상(欽祥)의 따님으로, 만육(晩六) 양(瀁)82)의 후손이다. 둘째 부인은 나주(羅州) 나씨 성창(性暢)의 따님으로 교리 안세(安世)의 후손이다. 두 부인 모두 공의 묘에 합부하였는데 봉문은 따로 썼다.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으니, 낙서(洛瑞)는 첫 부인 소생이고 낙성(洛成), 낙호(洛鎬), 낙준(洛俊), 낙진(洛辰), 김제(金堤) 조인식(趙仁植), 경주(慶州) 이상기(李相基)의 처는 계비의 소생이다. 손자는 열세 명으로, 경술(慶述)은 친척의 집안으로 출계하였다. 문술(文述)은 큰아들 소생이며, 관술(寬述)과 동주(東柱)는 둘째 아들 소생이며, 덕술(德述), 용술(鏞述), 찬주(燦柱), 인주(仁柱)는 셋째 아들 소생이며, 재술(在述), 두술(斗述), 의술(義述)은 넷째 아들 소생이며, 한주(漢柱)와 택주(澤柱)는 다섯째 아들 소생이다. 외손은 여섯 명으로, 찬락(燦珞), 찬귀(燦貴), 찬용(·燦鏞), 찬춘(燦春)은 조인식의 소생이며, 달형(達炯)과 은형(殷炯)은 이상기의 소생이다.공은 기운과 용모가 청아하고 말투와 행동이 차분하고 엄숙하여 덕과 온화함이 절로 드러났으니, 그 밖을 보면 그 안을 알 수 있다. 향촌에 거처할 때는 겸손함으로 몸가짐을 가졌고 공손함으로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신의(信義)가 말을 내기 전에 있었다.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친족을 대할 때는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를 돈독하게 함을 위주로 하였으며 여러 사촌 형제와 대단히 우애하며 공손하였다. 이처럼 공의 모든 행동은 충분히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그러한 바탕을 따져보면 원래 행실의 근원이 있었으니,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종기를 앓을 때 그 독을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평상시에는 부모의 뜻을 받들어 음식과 의복 등으로 봉양하였고 장사지낼 때의 모든 것에 마음을 다하였으며, 삼년상에 아침저녁 상식(上食)을 올리며 인사드리는 것을 눈과 비가 내려도 멈추지 않았다. 매번 기일을 만나면 석 달 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늙을 때까지 이를 바꾸지 않았다. 집안이 원래 가난하여 간혹 짚신을 짜서 제수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니, 그 효성은 타인이 하기 어려운 바가 이처럼 많았다. 선대의 묘사(墓祀)와 석물, 재실 등을 갖출 때 여러 친족을 규합하여 한 가지 법도를 두었으니, 조상을 추모하는 공의 무궁한 생각을 알 수 있다.자손을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치고 화려한 문장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더욱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두었다. 손자 재술(在述)에게 명하여 유문에서 노닐게 하면서 경전의 공부에 힘을 쏟으라고 하니, 약관 전에 이미 크게 성공하리라 기약하였는데 갑자기 단명하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공의 평소 뜻이 이와 같았기에 비록 잘 아는 어진 선비에게 직접 학문에 대해 묻지는 않았지만 마음 깊이 좋아함을 마지않았으니, 열재(悅齋) 소학규(蘇學奎) 공은 그 가운데 더욱 친한 벗이다.오호라! 공은 나에게 족대부(族大父)83)가 되며 또한 나의 선친과 동갑이다. 그러므로 평소 존경하였는데, 공 또한 내가 학문에 뜻을 둔 것을 보고서 대단히 사랑해 주었다. 때때로 나를 자신의 앞으로 나오게 하면서 피곤할 줄 모르시고 자상하게 이야기하시니 그 깊은 참마음을 어찌 감히 잊으랴. 대개 공의 평소 모습은 자애롭고 자상하며 조심하고 온화한 사람인데, 그러나 매번 대종회에서 뵐 때면 공은 어른들의 줄 앞자리에 앉아서 시비를 분별하고 가부를 결정함에 칼로 물건 자르듯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으니, 굳세고 엄격하며 곧은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돌이켜보건대 지난 무인년(1938년) 봄에 내가 공에게 고하기를 "우리 김씨의 족보 간행하는 일이 이미 진행되었는데, 그러나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 옛날 같지 않아 법이 이미 행하기 어려우며, 또한 현재의 법에 저촉되니 다만 문안(門案)을 정비하여 그 사이에 보법(譜法)을 부친다면 이는 명목은 없지만 실상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이는 나의 생각인데, 네가 마침 나와 같으니 다행하도다. 빨리 도모하라. 또한 나의 서문을 교체하여 책머리에 그 뜻을 기술하라."라고 하였다. 내가 명을 받들어 여러 일을 하여 겨우 마치자마자 공이 돌아가셨다.오호라! 슬프도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끝내 시속을 따라 법이 없는 족보를 만들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법도가 엄격하고 의리가 정밀한 공의 뜻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니, 탄식이 인다. 그러나 이 때 정비한 문안(門案)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공의 뜻은 참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다만 오래토록 보물처럼 보관하여 후손들을 기다려 질정할 뿐이다. 공의 아들 낙성이 공의 행적을 대략 서술하여 나에게 행장을 짓게 하니 정의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윽고 삼가 받아 행장을 지으면서 평소 공을 보고 느꼈던 바를 덧보태어 이상과 같이 행장을 편차하여 완성한다. 公諱永喆字鳳卿, 明窩號也.金氏, 系出扶寧, 代有冠冕.以言其名世者, 則高麗平章事文貞公坵, 斥崔沆之雕佛書, 扶植正道.文翰學士忠宣公汝盂, 使弟按撫使承印, 創設聖廟於江陵, 兩世俱功在斯文, 士林立祠道東.古阜郡事光叙, 志存罔僕, 與杜門洞七十二賢同其節.本朝司馬梅竹堂宗, 敦學尙志, 與己卯諸賢同進退.宣陵參奉竹溪鋐, 以道學爲士林追慕立祠.柳川公之九世以上.祖瑞珏, 孝友正直, 事載《三綱錄》, 壽階至崇政, 追榮三世.考泓錫號松菴, 壽通政左承旨, 妣詩山許氏均女, 繼妣全州崔氏洙女.生以哲廟己未四月十五日, 卒以戊寅五月二十日, 享年八十, 葬于明堂里後卯坐原.配, 全州崔氏欽祥女, 晩六瀁後, 羅州羅氏性暢女, 校理安世后, 俱祔公墓而各封.有男五人女二人, 洛瑞初配出, 洛成·洛鎬·洛俊·洛辰·金堤趙仁植·慶州李相基妻, 繼配出.孫十三人, 慶述出系宗家, 文述長房出, 寬述·東柱次房出, 德述·鏞述·燦柱·仁柱三房出, 在述·斗述·義述四房出, 漢柱·澤柱五房出, 外孫六人, 燦珞·燦貴·燦鏞·燦春趙出, 達炯·殷炯李出.公氣容淸雅, 言動安莊, 德和自著, 見其外可知其內.居鄕黨, 謙謙自持, 恂恂與人, 應接事物, 信在言前.御家衆處族親, 以正倫理篤恩義爲主, 與羣從兄弟, 友恭備至.凡所行義, 足以爲人模範.推其所自, 元有行源, 天性誠孝, 父患疽, 吮其毒而瘳.平時志物, 送終凡百, 旣盡情, 三年朝夕展墓, 雨雪不廢, 每當諱辰, 三月不酒肉.至老不懈.家素貧乏, 至或織屨以供祭牲, 其孝之多人所難, 類如此.至於先代墓祀石儀齋舍之備, 糾合諸族, 自有一副規畫, 又見其追遠無窮之思矣.敎子孫以義方, 不以文華, 尤致意於聖賢之學, 命孫在述從學儒門, 使之專功經傳講硏, 弱冠前己期大就, 而遽見短造, 人咸惜之.公之素志如此, 故雖不能躬親問學於相識儒士之賢者, 心好之不已, 悅齋蘇公學奎, 尤其親交也.嗚呼, 公於余爲族大父, 而又先君同庚, 故敬慕有素, 公亦以余志學甚親愛之, 有時引坐於前, 娓娓語不倦, 眞意藹然, 此何敢忘也.蓋槩公生平, 慈諒儉約和祥人, 然每見於大宗之會, 公以尊行首席, 剖判是非, 裁決可否, 一刀兩段, 無顧瞻依違態, 其剛嚴直方, 又如是.憶在戊寅春, 余告公曰: "吾族之譜族己及, 然今人心不古, 法旣難行, 且時律爲拘, 若只修門案而寓譜法於其間, 則是無其名而有其實也." 公曰: "此吾意也, 而而適與同, 幸哉, 而亟圖之.且替吾序, 述其意於卷首." 余承命, 設役役, 甫畢而公下世.嗚呼悲夫, 孰料夫衆見無定, 不幾何而竟作無法循時之譜, 不少念公法嚴義精之意也, 可慨也己.雖然此案自在, 公之意, 固不泯, 只得永久寶藏, 俟質來許己矣.公之子洛成略述行治, 俾余狀之, 義不敢辭, 旣謹受而書之, 增以平日所自觀感者, 纂次成狀如右云爾. 만육 최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함(伯函), 호는 만육(晩六)·장륙당(藏六堂)이다. 외삼촌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한 이후 이부 상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포은 정몽주가 순절하게 되자 벼슬을 내어 놓고 진안군 백운면 중대산(中臺山)으로 낙향한 이후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족대부 할아버지뻘이 되는 같은 성의 먼 일가를 가리킨다.

상세정보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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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성암 양공의 행장 병술년(1946) 星巖楊公行狀【丙戌】 대대로 순창(淳昌)에서 살아온 양씨는 실로 남쪽 지방의 유서 깊은 가문인데, 그 집안의 선비 양병철(楊秉哲)은 부안(扶安) 가까운 곳에서 타관살이를 하고 있다. 나와 만년에 교유하여 친해졌는데, 하루는 선친 성암공(星巖公)의 행적 한 두루마리를 기록하고서 찾아와 행장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사람의 행실을 형상하는 것은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한 터럭이라도 같지 않으면 문득 다른 사람이 되니 이것이 두려워 감히 할 수 없는데, 또한 병든 몸을 부여잡고 눈 속에서 세 번이나 찾아와서 정성스런 말로 청하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에 그 기록을 보니 비록 매우 자세하지만 번잡하거나 어지럽지 않으니, 실상과 어긋나거나 지나치지 않음을 헤아릴 수 있기에 이를 살펴서 서술하면 잘못된 점이 적을 것이다. 이에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 문구를 줄이고 다듬어서 다음과 같이 행장을 짓는다.공의 휘는 원영(瑗永), 자는 치경(致瓊)인데 후에 원옥(爰玉)으로 고쳤다.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84) 선생의 문인으로 자를 고친 것은 선생의 명이다. 양씨는 계통이 남원(南原)에서 나왔으니, 고려 시대 군사 휘 경문(敬文)이 시조이다. 9대를 지나 휘 이시(以時)는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냈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85)의 추중을 받았다. 이 분이 직제학 휘 수생(首生)을 낳았으니, 수생이 송경(松京)에서 타계하실 때 부인 이씨(李氏)는 나이가 아직 젊었다. 부모가 그 뜻을 꺾으려고 하니 부인은 다른 곳에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한림(翰林) 김문(金問)의 부인 허씨(許氏), 진사 송극기(宋克己)의 부인 유씨(柳氏)와 함께 유아(遺兒)를 등에 업고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세상에서 칭하는 '여말 삼부인'이 바로 이 분들이다. 본조 세조 때 정려하고 무덤을 높이 쌓았다.4대가 지나 휘 배(培)는 은거하면서 의를 행하였는데, 연산군 때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지계사(芝溪祠)에 배향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낸 휘 공준(公俊)과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지낸 휘 홍(洪)을 지나 휘 사민(士敏)에 이르러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발라 특별히 천거되어 시강원 익위사(侍講院翊衛司)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지계사에 제향되었다. 또 2대를 지나 진사 휘 여백(汝柏)이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발라 천거되어 참봉, 익찬, 주부, 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분이 두 아들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휘 현거(顯擧)이며 차자는 휘 빈거(賓擧)로 중부 휘 여춘(汝春)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8대조이다.증조의 휘는 필환(弼煥), 조부의 휘는 재화(在華)이다. 선친의 휘는 석규(錫奎), 호는 조은(釣隱)으로 효행과 학문이 뛰어났으니, 심석재가 묘갈명을 지었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 경진(慶鎭)의 따님이니,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9대손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꿈에 신인이 은비녀 3개를 주었는데, 후에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기영(璣永)은 학행이 사림의 모범이 되었고, 차남 찬영(瓚永)은 과부(科賦)로 과장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막내가 바로 공이다.공은 철종 신유년(1861년) 11월 17일에 태어났다. 7살에 큰형 청파공(靑坡公)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번거롭게 가르치거나 감독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잘하였으니, 날마다 수백 마디의 말을 외웠다. 12~3살에 문리가 이미 성취되어 《춘추》, 《예기》 및 여러 성리서들의 대지를 대략 통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파공이 죽자 애통을 견디지 못하였지만 오히려 더욱 각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부친 조은공(釣隱公)의 성격이 엄격하여 공이 작은 허물을 보면 용서하지 않았으니, 그러면 즉 온화하고 공손하게 공수(拱手)하고 서서 화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또한 부친이 책 읽기를 좋아하여 공과 의문 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곳을 논할 때면 정성을 다해 모시고 강하였으며 중요한 핵심을 풀이하였다. 모친의 곁에 있을 때는 옛날 어진 여인과 국조의 충신, 효자, 열부 등을 들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여 환하게 웃음 짓게 하였다.신묘년(1891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대단히 슬퍼하면서도 예를 다하였다. 계사년(1893년)에 연달아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상처럼 상을 치렀다. 선조를 받듦에 정성을 다하여 종가의 제사에 참여하여 도왔으며, 조심스레 재계하여 제주(祭主)가 아니라고 해서 소홀하지 않았으며 또한 작은 병으로 제사를 폐하지 않았다. 중형 만포공(晩圃公)을 섬길 때 엄한 부친을 모시는 듯 공경하였으며, 만년에 2~3리 떨어진 곳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시운을 수창하였다. 맛난 음식이 있으면 비록 적더라도 반드시 나눠서 드렸다. 자질(子姪)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부드럽게 마주하고서 타이르며 말과 낯빛을 엄하게 하지 않되 사랑과 엄격함을 모두 갖추었다. 심하게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끼니를 물리치고 자책하다가 그가 뉘우치면서 행동을 고친 것을 본 뒤에야 그만두었다. 안방에 거처할 때는 온화하고 공경함으로 부인을 대하였다. 남들과 사귈 때는 오래되어도 상대방을 더욱 공경하였다.집 뒤에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면에 동굴이 뻥 뚫린 것이 마친 신성처럼 환하였다. 공이 그것을 좋아하여 아침저녁으로 찾아 올라가 멈추지 않았는데, 마침내 자호를 성암(星巖)이라 하고서 설(說)을 지어 말하기를 "나는 품부 받은 기(氣)가 혼탁하므로 빛나게 문체가 있는 것을 보면 밝게 될 것을 생각하며, 받은 질(質)이 경부하므로 중후하여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고요함을 함양할 것을 생각한다. 〈홍범(洪範)〉에 '뭇 백성은 별이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백성이다. 몸소 농사지어 참으로 온전하게 살면서 세속에 변화되지 않고 우두커니 홀로 거처하니 머리카락이 희게 새는 줄도 모른다."라고 하였다.무술년(1898년)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86) 선생을 고암(考巖)에서 찾아뵙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으며, 경자년(1900년)에 다시 원계(遠溪)로 찾아갔다. 이로부터 연재와 심석재 두 사문에 왕래하니 덕망이 날로 드러나 찾아와 배우는 자들이 많아졌다. 학생들의 재목에 맞게 학문을 성취해 주었는데, 싫증을 내지 않고 정성을 다해 가르쳤다. 그렇지만 일찍이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을사년(1905년)에 연옹이 도를 위해 순절한 것을 듣고서 신위를 만들어 곡하고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장사 지낼 때 다음과 같은 만시를 지었다.사기가 더욱 불어나니 왜적들 간담이 놀라고 士氣還增賊膽驚태산은 가벼운 홍모(鴻毛)보다 무겁지 않아라. 泰山不重一毛輕참 학문 이어 열은 것 장차 어디에서 보랴 繼開眞學將何見존화양이 남긴 가르침 힘입어 다시 밝으리. 尊攘遺謨賴復明선왕에게 정성을 바쳤는데 외려 자결하니 忱獻先王猶自靖공은 후대에 전해져 또한 형용하기 어려우리. 功存後世亦難名침문에 통곡하니 한은 끝이 없는데 寢門痛哭無窮恨살아 당시 아껴주신 애정을 저버렸구나. 靠負當年眷愛情이윽고 또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연옹이 타계한 이후로 학자들이 대부분 심석재에게 귀의하니, 공도 또한 마음을 다해 스승으로 섬겨 '충신독경(忠信篤敬)' · '시서예악(詩書禮樂)', '본심은 지키기 어렵고 사의는 제거하기 어렵다.[本心難保, 私意難除]'는 등의 가르치는 글을 받아 벽에 걸어 가슴에 새기고 다만 그렇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78세의 수를 누리고 무인년(1938년) 3월 5일에 타계하여 군의 동쪽 적성면(赤城面) 도왕(都王)의 뒤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장연(長淵) 변씨(邊氏) 한용(漢龍)의 따님으로 도탄(桃灘) 사정(士貞)의 후손인데,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계비는 청주(淸州) 한씨(韓氏) 동화(東燁)의 따님으로 청성군 종손(終孫)의 후손인데,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다. 장남이 바로 병철이며, 다음으로 병익(秉益)과 병직(秉直)이 있고 딸은 이찬수(李燦秀)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로 진섭(晉燮), 정섭(貞燮), 도섭(度燮)이 있으며, 차남의 아들은 건섭(健燮), 언섭(彦燮), 만정(萬鼎), 만성(萬成)이 있으며 딸은 최만기(崔萬基)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은 ■■를 두었다. 사위 이찬수의 아들은 병집(丙緝)과 병진(丙縉)이다.공은 풍도와 위의가 차분하고 장중하며 행동거지는 단정하고 엄숙하며 덕성은 따뜻하고 우아하였다.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절로 법도를 넘지 않았으니, 자질이 참으로 이미 도에 가까웠다. 어려서 가정의 가르침을 받았고 만년에 현인의 문하에 노닐면서 교화를 받은 것이 깊었으니, 즉 의리에 마음을 쏟아 화순한 덕성이 안에 쌓였으며87) 자신이 지닌 것은 정명(精明)하고 남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이에서 학문의 힘을 속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평소 학자들을 가르치기를 "뜻이 기운을 통솔하지 못하면 마음이 동서로 내달려서 말과 행동을 돌아보지 못하여 정신이 붕 떠서 돌아올 줄 모른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심목(心目)을 열어 밝혀서 행함에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맹자가 '돌아가서 구하면 남은 스승[餘師]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남은 스승이란 바로 내 본심이다."라고 하였으며, 도한 "책을 읽을 때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니,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만 마디 말을 외우더라도 상자는 사고 구슬은 돌려주는 격88)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말에서 공이 스스로 힘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평소 힘을 쏟은 것은 다만 심신과 인륜과 일상에 있었으니, 실질을 보고 두터움을 행하였으며 명성을 겁쟁이처럼 두려워하였다. 즉 옛날의 이른바 위기(爲己)의 학문을 하는 자가 바로 공이 아니겠는가.때로 세상 변화에 마음 아파하여 시로 읊조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눈물을 닦고서 울분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거처하는 곳에 산수가 아름다워 친한 벗이 찾아오면 시내와 산 사이에서 소요하고 담소하며 빼어난 시어와 우아한 운치로 마음을 달래고 몸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또한 슬픔과 즐거움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성정의 올바름을 얻은 것이다. 오호라! 후대에 공의 풍모를 듣는다면 반드시 거만하고 과장을 중시하는 자는 간략함으로 돌아올 것89)이며 허위를 일삼는 자는 진솔함으로 돌아갈 것이다. 楊氏之世居淳昌者, 實南服故家, 而士人秉哲, 近僑扶安.余交晩而契親, 日錄其先考星巖公事行一通, 來請狀文.余惟狀人行同寫人形, 一髮不似, 便是別人, 懼是而不敢爲, 則又扶病, 雪中三踵門, 而請益勤辭, 不獲已, 乃視其錄, 雖甚詳悉而不複不紊, 可揣其無差無溢, 按是而叙之, 庶幾寡過, 檃栝刪略而爲之狀曰: "公諱瑗永, 字致瓊, 後改爰玉, 宋心石先生門人, 而改字師命也.系出南原, 高麗郡事諱敬文, 其鼻祖, 九傳而諱以時, 集賢殿大提學, 爲李牧隱金惕若所推重, 生直提學諱首生, 捐舘松京, 夫人李氏, 年尙少, 父母欲奪志, 夫人矢靡他, 與金翰林問配許氏宋進士克己配柳氏, 負遺兒南下, 世所稱麗末三夫人, 是也.本朝世祖時, 旌閭封墓.四傳而諱培, 隱居行義, 燕山時累徵不起, 享芝溪祠, 歷文佐郞諱公俊文典翰諱洪, 至諱士敏, 經行特薦, 除侍講院翊衛不就, 亦享芝溪祠.又二傳而進士諱汝柏, 經行薦除叅奉翊贊主簿縣監幷不就, 生二子長諱顯擧, 次諱賓擧通德郞, 出系仲父諱汝春後, 公之八世祖.曾祖諱弼煥, 祖諱在華, 考諱錫奎號釣隱, 有孝學, 心石撰墓碣, 妣長澤高氏慶鎭女, 霽峰敬命九世孫, 有女士行.夢神人授銀釵三, 後有三子, 長璣永, 學行範士林, 次瓚永, 科學鳴場屋, 季卽公也. 生以哲宗辛酉十一月十七日, 七歲受學于伯兄靑坡公, 不煩敎督, 日誦數百言, 十二三文理己就, 《春秋》《禮記》及性理諸書, 略通大旨.未幾靑坡公沒, 痛不自勝, 猶益刻勵不輟.釣隱公性嚴, 見公小過而猶不貸, 則溫恭拱立, 以待怒解, 又好讀書, 待公而論疑晦, 則陪講亹亹, 解釋肯䋜.在母夫人側, 擧古昔賢媛, 國朝忠孝烈, 論說備盡, 以供歎笑.辛卯丁內艱, 哀過而禮盡, 癸巳連遭外憂, 一視前喪.誠於奉先, 助奠宗家, 致齊之謹, 不以非祭主而忽, 亦不以微恙而廢.事仲兄晩圃公, 敬如嚴父, 晩年各居數里, 日以詩韻相酬, 有異味, 雖少必分.子姪有過, 諄諄面戒, 不厲言色, 而愛嚴幷至.有甚焉者, 則却食自責, 見悔改而後已.居室之間, 和敬相對, 與人交, 久而尤敬.家後有巖, 面有一竅, 炯然如晨星, 公愛之朝往暮登而不捨, 自號星巖, 爲之說曰: "余稟氣混濁, 故見其煥乎有章, 而思有以光明, 受質輕浮, 故見其厚重不遷, 而思有以養靜, 〈洪範〉曰: '庶民惟星', 余民也, 躬耕苟全, 不與世移, 塊然獨處, 不知鬢髮之星星." 戊戌謁宋淵齋先生于考巖, 講《大學衍義》, 庚子再謁遠溪, 自是往來淵齋心石兩門, 德望日著, 來學者衆, 隨材成就, 用誠不倦, 然未嘗以師道自處.乙巳聞淵翁殉道, 位以哭之, 詩以悲之.及葬有輓曰, 士氣還增賊膽驚, 泰山不重一毛輕.繼開眞學將何見, 尊攘遺謨賴復明.忱獻先王猶自靖, 功存後世亦難名.寢門痛哭無窮恨, 靠負當年眷愛情.旣又操文而祭之.自淵翁沒, 學者多歸心石, 公亦專意師事, 受忠信篤敬, 詩書禮樂, 本心難保, 私意難除等訓辭, 揭壁服膺, 惟恐不及焉.壽七十八而卒于戊寅三月五日, 葬于郡東赤城面都王後麓壬坐原, 配長淵邊氏漢龍女, 桃灘士貞後, 早沒無育, 淸州韓氏東燁女, 淸城君終孫後, 婦德純備.男長卽秉哲, 次秉益秉直, 女適李燦秀.長房男晉燮·貞燮·度燮, 二房男健燮·彦燮·萬鼎·萬成, 女適崔萬基.三房男■■.李壻男丙緝·丙縉. 公風儀凝重, 動止端莊, 德性溫雅, 不拘拘於繩墨而自不失度, 天資固己近道.早襲庭訓, 晩遊賢門, 得之擩染者深, 則潛心義理, 積中和順, 在己者精明, 接人者謙恭, 學問之力, 不可誣也.雅訓學者曰: "志不帥氣, 東馳西鶩, 不顧言行, 游游泛泛而不知返." 又曰: "學問之道, 無他, 開心明目而利於行." 又曰: "孟子曰: '歸而求之有餘師', 餘師卽吾本心." 又曰: "讀書, 先正其心, 心不正, 雖日誦萬言, 買櫝而還珠." 其所以自勉者, 亦可知己.是以平生致力, 只在心身彛倫日用之常, 見實行敦而畏名若㥘, 古所謂爲己之學者, 非公耶.有時傷世, 發於吟咏, 扼腕抆淚, 憤惋不已.然所居有山水勝, 親朋至, 則逍遙談笑於泓崢之間, 逸韻雅致, 會於心適於體, 此又哀樂中節而性情得正者.於虖, 後世聞公之風, 其必有侈夸者反約, 虛僞者歸眞也夫." 심석 송병순 1839~1912,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종형인 송병선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으며, 송달수의 사후에는 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척약재 김구용 1338~1384. 본관은 안동,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이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과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로서 1375년(우왕 1) 삼사좌윤으로 있을 때, 이숭인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1384년에 행례사(行禮使)로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에서 붙잡혀 난징[南京]으로 압송, 영녕(永寧)현에서 병사하였다. 연재 송병선 1836~1905.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화순한……쌓였으며 《예기(禮記)》 〈악기(樂記)〉에서 "화순함이 안에 쌓여서 영화가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和順積中 而英華發外〕"라고 하였다. 상자는……격 《한비자》 〈외저설(外儲說)〉에서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 사람에게 그의 구슬을 팔게 되었다. 목란(木蘭)으로 상자를 만들고 계수나무와 산초나무의 향기를 더하였으며 주옥(珠玉)으로 상자를 엮고 옥돌로 장식하였다. 정나라 사람은 그 상자만 사고 그 구슬을 돌려주었다."라 하였다. 형식이 내용을 능가함을 이른다. 간략함으로 돌아올 것 《논어》 〈학이〉 4장 집주의 윤씨(尹氏) 설에서 "증자는 지킴이 요약하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자신에게서 구하신 것이다.[曾子守約, 故動必求諸身.]"라고 하였으니, 행동을 자신에게서 구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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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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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묵암 김공 행장 默菴金公行狀 내가 이미 족제 기술(箕述)을 위해 조부 화암공(華巖公)의 행장을 지었다. 기술이 다시 선고 묵암공(默菴公)의 행록을 보여주면서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내가 "이미 화암공의 행장에서 공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부친을 덕을 잇고 집안을 잘 다스렸다.〔承襲庭訓, 肖德克家〕'고 칭하였으니, 이 여덟 글자면 충분히 다 서술하였거늘 어찌하여 다시 지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기술이 "대개 문장을 지을 때 제목에 따라 서술 내용이 주인과 빈이 있어서 말이 자세하고 간략하다. 부친과 조부도 마찬가지여서 주인은 자세하고 빈은 간략함이 다르니 어찌 마음에 흡족하겠는가. 원컨대 끝까지 잘 지어주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내가 "이런 마음을 지녔구나, 그대의 효성이여. 내가 어찌 감히 효자의 지성을 이뤄주지 않으랴."라고 하였다.예전에 내가 자주 선공(先公)에게 절을 올렸는데, 행동이 장중하고 언사가 차분한 것을 보고서 덕을 지닌 어른임을 마음속으로 짐작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기록을 보고서 더욱 그 자세한 것을 알게 되니 또한 다행이다. 드디어 기록을 살피고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공의 휘는 낙항(洛恒), 자는 성천(聲天), 처음 이름은 재학(在鶴), 호는 묵암이다. 선조의 계통은 화암공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가첩의 〈세덕편(世德篇)〉과 및 〈찬장인집(撰狀人集)〉에 잇달아 편찬되어 있으니 이에서 볼 수 있다. 공은 철종 갑인년(1854년)에 태어나 갑자년(1924년)에 돌아가셨으니 71살의 수를 누렸다. 몸가짐이 청고하며 마음이 차분하여 말이 적었으며, 평생에 한결같이 정직함으로 일을 처리하였다. 마흔둘 아내를 잃었을 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을 장가들고 두 명을 아직 어렸다. 자부(子婦)가 겨우 18세이므로 어떤 사람이 '지금 나이면 다시 장가들거나 측실을 들여도 괜찮다. 자부가 집안 살림을 꾸려가지 못하며 어린 아들을 양육하는 것도 어려우니 어찌 도모하지 않으시는가.'라 하자 공이 말하기를 "알았다. 도모하겠는데, 만일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면 자부에 이간하는 말이 있어서 도리어 어린 아들을 양육하는데 해가 되니 그만 두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어린 아들 한 명이 죽자 드디어 다른 어린 아들을 이끌고 남의 집에서 6년 동안 훈장 노릇을 하며 간신히 그 아이를 가르치며 장가보냈다. 살림살이가 조금 펴지자 출계한 아우가 몹시 곤궁하였는데 온 힘을 다하여 도와주니 우애가 더욱 지극하였다. 쉰여섯 살에 장남을 잃게 되자 밖으로 살림을 주관하는 이가 없고 안으로 또 매우 군색하니, 어떤 사람이 "지금 측실을 두게 되면 어찌 편하지 않겠는가."라 하니, 공이 "며느리는 젊어서 과부로 지내는데 나 홀로 편하게 지낸다면 어찌 미안하지 않겠는가."라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이것이 공의 집안에서의 순독(純篤)한 행실이다. 나머지는 이를 미뤄 종합해보면 청고, 정직하다는 칭송을 상상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일찍이 종회의 시제에서 공을 뵈었는데, 하루는 어떤 어른의 말을 하는데 사리에 다 들어맞지는 않자 공이 사리를 들어 명백하게 분별하였으니, 이는 실로 《논어》 〈향당〉에 보이는 뜻에 해당한다.90) 공이 비록 자호를 '묵(黙)'으로 하였지만 그러나 말을 해야 할 때는 이처럼 말하였으니, 말하거나 침묵할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억하건대 예전 갑진년(1904년)에 선친 벽봉공(碧峰公)이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91) 공과 함께 효리(孝里)의 서재로 공을 방문하여 종일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는데, 벌써 47년이 흘렀지만 어제처럼 눈앞에 선하다. 사람의 일에 대한 감회가 이니 어찌 탄식하지 않으랴.묘는 탑촌(塔村) 남쪽 산기슭에 있는 선비(先妣)의 묘소 왼편의 을좌 언덕에 있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 병규(炳奎)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 왼편에 합부하였다. 장남은 경술(慶述)이고, 차남은 기술(箕述)【처음 이름은 판술(判述)】로 공의 종형 재덕(在德)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경술의 아들은 형재(炯才), 형렬(炯烈), 형규(炯奎)가 있고, 딸은 의령 남광희(南光熙)에게 시집갔다. 기술의 아들은 형표(炯杓), 형선(炯善), 형유(炯裕), 형균(炯均), 형숙(炯淑), 형종(炯鍾)이 있다. 余旣爲族弟箕述, 狀其王考華巖公行矣.箕述復示以先考默菴公行錄, 請狀之, 余曰: "旣於華巖公狀, 語及公, 稱以承襲庭訓, 肖德克家, 此八字足以盡之, 何庸復爲." 箕述曰: "凡述文字, 題有主賓, 語有詳略, 父祖一也, 而有主詳賓略之殊, 豈得恔心乎.願終有以成之也." 余曰: "有是哉, 子之孝也.吾豈敢不遂孝子之誠乎." 昔累拜先公, 見其動止莊重, 言辭安定, 心知其爲有德長者, 今獲是錄, 益聞其詳, 亦幸矣.遂按而叙之曰: "公諱洛恒字聲天, 初諱在鶴號默菴.先系詳在華巖公狀, 聯編於家牒〈世德篇〉及〈撰狀人集〉中, 可得以見也.公生以哲廟甲寅二月二十四日, 終以甲子三月十日, 壽七十一.持身淸高, 平心寡言, 平生處事, 一以正直.年四十二喪偶時, 有三男, 一娶二幼, 子婦甫十八歲, 人謂'年可再娶側室亦可, 子婦不能執産, 保養幼穉亦難, 盍圖之.' 公曰: "若.圖之而如非其人, 慮有間言於子婦, 且反害於保幼, 不如己之." 己而一幼化去, 遂率一幼, 舌耕人家六年間, 僅得敎之娶之, 調度亦稍舒, 有出系弟窮敗, 極力周護, 友愛愈至.五十六喪長子, 外無主産, 內亦多窘, 人曰: "今則置一側室, 豈非便乎." 公曰: "婦少寡居, 而吾獨取便, 豈不未安." 終不聽, 此公內行之純篤也.餘可推此綜合, 於淸高正直之稱而想見也.嘗見公於宗會歲祀, 日有長老言未盡善, 公據事理便便辨之, 此實《論語》〈鄕黨〉首章之意也.公雖自號以'默', 然當言而言如此, 其於語默, 亦可謂合節矣.記昔甲辰夏, 先君碧峰公, 與炳菴金公, 訪公於孝里書舘, 終日盡歡而歸, 至今爲四十七年, 歷歷如昨日, 人事之感, 寧不慨然.墓在塔村南麓, 先妣墓左邊乙坐原.齊, 全州李氏炳奎女, 墓祔左.長子慶述, 次子箕述【初名判述】, 出爲公從兄在德後.慶述男炯才·炯烈·炯奎, 女宜寧南光熙.箕述男炯杓·炯善·炯裕·炯均·炯淑·炯鍾也." 사리를……해당한다 《논어》 〈향당(鄕黨)〉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종묘와 조정에 있을 때에는 말을 잘하면서도 다만 삼갔다.[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라고 하였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병암(炳菴)이다. 가세가 극도로 곤궁하여 주경야독을 하였으나 워낙 독실하게 공부하여 임헌회(任憲晦)·신응조(申應朝)·송병선(宋秉璿)·박운창(朴芸牕)·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허통(許通)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3번씩이나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 이기설(理氣說)과 예학(禮學)에 특히 주력하였으며 이항노(李恒老)를 중심한 벽문학자(檗門學者)들의 주리설(主理說)과 인물성이설(人物性異說)을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계의 학설을 비판, 논변하는 반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간재(艮齋)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는 학문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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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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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공인 허씨 행장 신유년(1921) 恭人許氏行狀【辛酉】 순조 16년 병자년(1816년) 호남의 선비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완산(完山) 최공(崔公) 필성(必性)의 부인 공인 허씨(許氏)가 효열로 도신(道臣)에게 글이 올려 도신이 임금에게 계달하여 포상을 받도록 청하였는데, 도신이 비록 매우 가상하게 여겨 장려하였지만 그 일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73년이 지난 뒤에 도유(道儒)들이 다시 춘조(春曹)에 글을 올리니 춘조에서 계문하여 정려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그 때가 바로 고종(高宗) 무자년(1888년)이었다.이에 오두적각(烏頭赤脚)의 정려문이 높다랗게 솟아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어 허씨의 행실이 더욱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행실을 기록한 글은 돌아가신 뒤 백 년 동안이나 지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현손 장렬(長烈)이 대군자의 글로 묘지명을 받기 위해서는 행장이 없을 수 없기에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였다. 나는 참으로 중한 일이라 감당할 수 없지만 같은 고을 사람으로 부인의 지극한 행실에 익히 감복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삼가 허락하고서 기록을 살펴 다음처럼 서술한다.허씨는 계통이 하양(河陽)에서 나왔으니, 영의정 조(稠)103)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조상이다. 경(璟), 후(垕), 집(鏶)이 그 부친, 조부, 증조이며, 의성 김씨(義城金氏) 계상(啓相)의 따님이 모친이다. 영조 37년 경진년(1760년)에 공인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으로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길 때 그 마음에 맞게 하였으며, 시집가서 시부모를 봉양할 때 정성을 다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며 맛난 음식을 이바지함에 지성을 다 바쳤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때 훈초(葷草)를 먹지 말라는 경계를 지켰으며 허름한 채소도 올려104) 또한 정성으로 하고 허식으로 지내지 않았다. 남편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으나 허물을 보면 반드시 규간하여 그저 따르기만 하지 않았다. 친척 간에 화목한 정의가 넘쳐 한 가문 구족이 모두 화기애애하였다.시부모가 돌아가시자 반벽(攀擗)105)하며 통곡하고 울면서 그 슬픈 마음을 다하였으며, 염할 때의 수의와 관곽에 여한이 없게 하였다. 삼년을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이를 드러내 웃지 않았다. 기일을 만나면 월초부터 시부모가 평소 즐겼던 음식을 생각하여 온 힘을 다해 미리 장만하였으며, 제사를 지낼 때 슬픔을 다하여 초상 때와 다름이 없었다. 최공이 일찍이 학질을 앓아 여러 달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인육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서 이에 오른쪽 넓적다리를 잘라 육적을 만들어 올리고 피를 약에 타서 주니 곧바로 효과를 보았다. 이윽고 병이 재발하여 목숨에 위태롭게 되자 또다시 왼쪽 넓적다리를 베어 탕으로 적으로 만들어 올리니 소생하게 되어 마침내 함께 해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경탄하면서 "뛰어나구나! 허씨의 효열이여. 시집오기 전에 부모를 사랑함이 어찌 이렇게 지극한가.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으니 더욱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번 살을 베어 병이 나았으니 이미 그러한 일 하기도 어려운데, 다시 살을 베어 목숨을 연장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와 필적할 대상이 많겠는가."라 하였다.부인은 모년 8월 15일에 타계하여 고부(古阜) 우덕면(優德面) 동역동(東驛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로 시창(時昌), 시순(時淳)을 두었는데 시순은 출계하였으며, 딸은 도강(道康) 김규흠(金奎欽)에게 시집갔다. 시창의 아들은 문수(文秀)며 딸은 상산(商山) 김홍기(金弘基)에게 시집갔다. 아! 사람이 사물보다 귀한 것은 삼강(三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삼강의 도리를 능히 행한다면 이에 사람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대저 충과 효와 열은 참으로 사람이 모두 함께 받은 이치인데, 다만 태어나기 전에 기질에 구애받고 태어난 후에 형체에 가려져 그 이치를 따르는 자가 드물다. 그러나 공인은 자질이 이미 아름다운데 능히 이치로서 형체를 이겼으니, 그 효와 그 열이 우뚝하게 섰다. 만약 장부로 태어나서 임금을 섬겼더라면 당대는 다스려져 충신이 되었을 것이며 난리를 만났다면 반드시 목숨을 바쳤을 것을 나는 확신한다. 이른바 '그 도를 행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는 자는 바로 공인이 아닐까한다. 다만 세상에 하기 드문 일을 공인은 능히 하였으니 공의가 오래되어도 더욱 드러나며 성조에서 포상의 은전을 아끼지 않는 것은 마땅하다. 이에 행장을 지어서 빗돌을 세울 자가 채택할 것을 준비한다. 純廟十六年丙子, 湖南章甫擧通德郞完山崔公必性之妻, 恭人許氏, 孝烈呈道臣, 請啓達蒙褒, 道臣雖嘉獎之重, 其事不果, 後七十三年, 道儒復呈春曹, 春曹啓聞, 綽楔命下, 時則高宗戊子也.於是烏頭赤脚, 巋然聳瞻, 許氏之行, 益聞于邦國, 惟其狀行之文, 闕於身後者, 且百年, 玄孫長烈將求大君子筆, 銘其墓, 以不可無本狀, 屬于澤述.余固非能任重役者, 而忝在鄕人, 稔服至行,則久矣.敬諾而按敘曰: "許氏系出河陽, 以領議政稠, 爲顯祖.曰璟曰垕曰鏶, 其父若祖曾, 義城金氏啓相女, 其妣也.英廟之三十七年庚辰, 恭人生焉.幼而孝思根天, 事父母稱其意.及適人, 養舅姑盡誠恪, 溫凊之節, 甘旨之供, 俱極其至.其承先祀, 茹葷之戒, 蘋蘩之薦, 亦以誠不以文也.奉君子無違, 然見有過, 必規諫之, 不徒承順爲也.睦婣之誼, 洽於親戚, 一門九族, 咸雍雍如也.及舅姑沒, 攀擗哭泣, 盡其情, 斂禭棺槨, 無餘憾.三年不魚肉, 不啓齒.値忌日, 自月初思其平日所嗜, 極力預備, 行祀盡哀, 無異袒括.崔公嘗患瘧, 積月不愈, 聞人肉爲良, 乃割右股, 肉炙而進, 血和於藥, 輒奏效, 己而疾復作, 危欲就盡, 又割左股, 或湯或炙而用之, 因得回甦, 與之偕老.聞者驚歎曰: "卓哉, 許氏之孝烈.在家愛親, 一何至也, 篤孝舅姑, 更難得也.一割愈疾, 已難其事, 再割延壽, 世豈多儔." 卒于某年八月十五日, 葬于古阜優德面東驛洞子坐原.男時昌, 時淳出系, 女道康金奎欽.時昌男文秀, 女商山金弘基.嗚呼, 人所以貴於物者, 以其有三綱也.人而能行三綱之道, 則斯無愧乎爲人.夫忠孝烈, 固人所同得之理也, 但質拘於前, 形掩於後, 能循其理者鮮焉, 若恭人, 則質旣美矣, 故能以理勝形, 之孝之烈, 所立者卓, 如使身爲丈夫而事君, 則吾知其時平而作藎臣, 臨難而必授命也.所謂'行其道而無愧'者, 非其人耶.惟其世之所鮮, 而恭人能之, 宜乎公議之久而益彰, 聖朝之不靳褒典也.斯可以爲狀, 而備夫立銘者之採擇云爾." 허조 1369~1439.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이다. 조선 초기 태조·정종·태종·세종 연간 여러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특히 왕조의 예제(禮制)와 법전 정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과 더불어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꼽힌다. 여러 학문 중 예제에 특히 밝았다. 이에 조선 건국 후 석전의식을 비롯한 각종 예제 정비와 《속육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30년(세종 12)에는 세종의 명으로 《오례의(五禮儀)》를 편찬하였다. 허름한 채소 빈번은 마름과 쑥이라는 뜻으로, 귀하지는 않아도 정성껏 올리는 제물(祭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확실한 신의만 있다면……빈번과 온조 같은 변변치 못한 야채와 나물이라도……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반벽 원문 '攀擗'은 반호벽용(攀號擗踊)의 준말로,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너무 슬퍼 부여잡고 울부짖기도 하고, 가슴을 치며 뛰기도 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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